경남 진주의 도심 한복판을 흘러내리는 남강의 물길을 끼고 있는 진주성과 촉석루.
다른 곳으로 대체될 수 없는 진주의 대표적인 경관이다.
도시마다 그 도시를 대표하는 곳이 있다지만, 진주성이야말로 진주의 압도적인 상징이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대표인물 3人 발자취 따라… 다시 걷는 경남 진주
(1) 진주성 전투의 영웅 김시민 장군
3800명 병사로 2만 왜적 격퇴… 전사후 참혹한 대패
이름딴 유람선 띄우고 곳곳에 동상 세워 기려
(2) 우리나라 최초 인권운동가 강상호
3000석지기 지주가 ‘백정 차별 철폐운동’에 전재산 쏟아
초라한 묘 앞엔 “베푼 덕 잊지 않으리” 시민의 비석
(3) 진주의 독지가 김장하
한약사로 일하며 100억 조용한 자선사업 ‘감동’
장학금·학교 기부채납·서점 살리기 등 다양한 활동
진주=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비장미 넘치는 이름, 김시민
경남 진주를 대표하는 인물은 누굴까. 물으나 마나 ‘김시민’이다. 진주는 그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진주성에 김시민 동상이 있고, 김시민 장군 전공비가 있으며, 김시민 대교가 있다. 남강에 새로 띄운 유람선도 ‘김시민호’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 목을 다스렸던 목사(牧使) 김시민. 그는 3800명 병력으로 2만여 명의 왜적을 격퇴한 진주성 전투를 이끈 명장이었다. 그의 이름만 듣고 진주로 속속 합류한 전국 의병들이 왜병에 맞서 함께 싸웠다. 그러다 전승의 막바지에 그는 이마에 총을 맞고 전사했다.
진주에 그의 이름이 오래 기억되고 있는 건 진주성 전투의 승전보다는 이듬해 벌어진 2차 진주성 전투의 처절한 패전 때문이 아닐까. 진주성에서 있었던 스물다섯 번의 전투에서 스물네 번을 우리가 이겼지만, 김시민이 없었던 마지막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졌다. 참혹하고 비극적인 패배였다. 진주성을 지키던 장졸은 물론이고, 주민들까지도 왜병들에게 무차별 도륙됐다. 9만 명이 넘는 왜군과 벌인 7000명의 중과부적 싸움. 거기다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한 진주대첩 영웅들은 당파 싸움과 정치적 견제로 죄다 좌천된 상황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진주 사람들은 죽은 김시민을 떠올렸으리라. 김시민이 있었다면 그들을 구원해 줬을 거라 믿지 않았을까. 그의 이름에서 푸른 칼날 같은 서늘한 비장미가 느껴지는 건 그가 없어서 빚어진 그날의 비극 때문이다.
진주성은 단연 진주를 대표하는 공간이다. 진주를 여행한다면 진주성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진주성은 그곳 그대로가 진주니까. 설령 진주성에 들르지 않았다 해도 상관없다. 진주에서는 밥을 먹다가도, 산책하다가도 진주성 전투와 맞닥뜨리게 된다. 진주에 가서 먹게 되는 진주비빔밥에도, 왜장을 안고 강물로 뛰어든 논개 얘기 속에도, 가을 축제 때 남강에 띄우는 유등(流燈)에도 진주성에서 벌어진 두 번의 전투 얘기가 있다.
그렇다고 여행하는 마음이 줄곧 무거워야 하는 건 아니다. 수백 년 전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전투가 있었다 해도, 강바람 시원한 촉석루 대청마루에서 여름밤 풍류를 느끼는 게 죄가 되는 건 아니란 얘기다. 다만 과거의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진주가 여러 겹의 표정을 갖게 됐다는 것. 그래서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도시가 됐다는 것. 누구는 강변 누각의 정취를 읽고 가고, 누구는 승전에 뒤이은 죽음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그 성벽에 깃든 비극적인 날을 기억하고, 다른 이는 여름밤의 강변 풍경을 추억의 풍경으로 인화하고 지나간다. 여러 겹의 이야기가 있는, 진주는 그런 곳이다.
진주성 안에 세워진 김시민 장군 동상.
옛 진주좌 자리인 제이씨티 앞에 세워진 형평사 창립축하식 기념 조형물.
# 진주 서랍의 손잡이는 ‘사람’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진주에서 여러 겹의 이야기를 꺼내는 손잡이는 대개 ‘사람’이다. 근대에 들어와서 진주의 인물이라면 이 ‘두 사람’을 들 수 있겠다. 강상호와 김장하.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은 아니지만, 마음에 새기고 오래 기억해야 하는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의 이름 뒤에 진주가 있다. 그래서 얻은 깨달음. 아, 사람이 도시를 기억하게 할 수도 있구나.
진주시 가좌동 산93-1. 석류공원 근처에 강상호의 묘가 있다. 아내와 나란히 묻힌 초라한 그의 묘 옆에 낮은 묘비가 있다. ‘백촌(栢村) 강상호 지묘.’ 묘비의 뒷면에 적힌 글귀가 이렇다. “모진 풍진의 세월이 계속될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선생님이십니다.” 그 아래 작은 글씨가 희미하다. ‘작은 시민이’. 누굴까. 그의 묘지 앞에 ‘그립다’는 글귀를 써서 세운 작은 시민은.
강상호. 1887년생. 3000석지기 지주였던 그는 일찌감치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스물한 살 때인 1907년 국채보상운동 경남회를 결성해 모금운동을 벌였고, 1919년 진주 지역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구속돼 8개월을 복역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형평(衡平)운동에 뛰어들었다. ‘형평(衡平)’이란 곧 공평(公平)하다는 뜻. 형평운동은 백정 차별 타파를 주장하는 운동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운동이었다.
백정은 짐승을 도살하는 천민으로 조선 시대 내내 가장 천대받던 신분이었다. 한곳에 모여 살아야 했고, 호적에 백정임을 표시해야 했다. 기와집에 살 수도 없었고, 비단옷을 입지도, 갓을 쓰지도, 가죽신을 신지도 못했다. 집 밖에서는 봉두난발에다 천민만 쓰는 패랭이를 써야 했다. 양반은 물론이고 상민 앞에서도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실 수 없었다. 죽어서 상여도 못 썼고 결혼할 때도 가마나 말을 탈 수 없었다. 이름에 성을 붙일 수도 없었고, 이름 자에 인(仁)·의(義)·충(忠)·효(孝)를 넣어서도 안 됐다.
# 차별받는 자의 편에 서다… 강상호
백정이 아니었음에도 강상호는 형평운동의 맨 앞줄에 당당하게 섰다. 백정 출신인 이학찬이 자식을 학교에 보내려고 했다가 ‘백정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하는 걸 본 게 계기였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백정이 천민이란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났다지만, 말만 그랬을 뿐 실제로는 전과 다름없는 백정 차별이 계속되고 있었다. 백정의 자식은 학교에도 가지 못했고, 교회에서 예배를 보지도 못했다.
강상호는 분노했고, 분노는 곧 행동이 됐다. 교육운동을 하던 사회운동가 신현필과 백정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를 다닌 장지필 등과 힘을 합쳐 백정 차별 반대와 평등사회를 기치로 내걸고 형평사를 결성했다. 차별 철폐에 반대하는 반형평사 세력들로부터 갖은 욕설과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그는, 자신이 믿는 평등의 가치를 위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백정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야학을 개설했으며, 백정의 아이를 양자로 받아들여 학교에 보내기까지 했다.
사회운동을 하느라 가산을 탕진한 그는 말년이 곤궁했다. 나중에는 제 자식 공부시킬 형편마저 안 돼 주위의 도움을 받았다. 1957년 그는 일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의 장례는 ‘한국축산기업연합회장(葬)’으로 치러졌다. 전국에서 과거 형평사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신들과 함께했던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그리고 세상은 그를 잊었다. 따져보니 올해가 형평사 창립 101주년이다. 작년이 100주년이었는데도 이렇다 할 기념행사 하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묻힌 묘지는 여전히 너무 초라하다.
그의 묘지 옆에 퇴락한 비석 하나가 서 있다. 1917년에 지역 주민들이 강상호의 어머니인 전주 이씨를 기려서 세운 ‘시덕불망비(施德不忘碑)’다. 시덕불망비. 곧 ‘베푼 덕을 잊지 않으려 세운 비석’. 거기에 새겨 놓은 글이 이렇다. “… 천금을 바르게 쓰시어/ 많은 집이 돈을 얻으니/ 혜택이 산과 바다와 같으매…/ 돌에 새겨 잊지 않고/ 백 세에 전하리라.”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전주 이씨는 마을에 가뭄과 홍수가 나서 주민들이 먹고살기 어려워지자 곳간 문을 열고 쌀을 내주었으며 호세를 대납해 주기도 했단다. 굶는 이웃을 차마 볼 수 없어 곳간을 연 어머니와 천대받고 멸시당하던 백정의 아픔을 함께했던 아들. 무덤은 초라하고 비석은 퇴락했다. ‘잊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비석에 새겨 놓고서, 사람들은 진작 다 잊은 건 아닐까.
1928년에 열린 형평사 제6회 전국대회 포스터.
# 왜 하필 그곳이 진주였을까
왜 하필 진주였을까. 진주에 백정이 특별히 많았던 것도 아니었고, 진주 사람들이 백정에게 별다른 호의를 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40만 명에 달하는 백정 중 진주에 사는 이는 고작 200∼300명 수준에 불과했으며, 진주에서는 백정 차별에 얽힌 사건 사고도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도 진주가 형평운동의 중심지가 됐던 이유는 무엇일까.
진주는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도청소재지였다. 도청소재지는 행정과 문화의 중심지였으니 새로운 문물을 빨리 받아들일 수밖에. 쏟아져 들어온 새로운 문물은 곧 근대적 변혁으로 이어졌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신분 해방과 차별 철폐의 구호가 사회개혁운동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진주에는 평등한 세상을 꿈꾼 인권운동 조직이었던 형평사와 형평운동의 자취가 남아 있다. 먼저 진주교회를 가보자. 진주교회는 1905년 호주 출신 선교사가 세운 진주 최초의 교회다. 초창기 교회에서는 백정 신도와 일반 신도가 따로 예배를 봤다. 그러다 1909년 부임한 라일 목사가 ‘하느님 앞에서 차별 없이 예배를 보자’고 권했다. 15명의 남녀 백정들이 일반 예배에 참석하자 이에 반발한 신도들이 교회를 떠나버렸다.
일반 신도들이 교회로 돌아온 건 한 달 보름여 만의 일이었다. 궁금했던 건 외국인 선교사들이 일반 신도를 설득해 낸 비결이다.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을까.
어찌 됐든 진주에서 최초로 백정 신도와 일반 신도들의 동석 예배가 실현됐다. 형평운동이 시작되기 14년 전의 일이다. 이런 이야기가 교회 건물 옆 비전관 앞 팻말에 적혀 있고, 당시 사진 등이 교회 역사실에 전시돼 있다.
진주 용산리의 용호정원. 100년 전쯤 중국 쓰촨성의 무산 12봉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 기생이 노래를 거절하다
이어서 가볼 곳이 진주 동성동 중앙광장사거리 부근의 제이씨티다. 형평사가 창립 20여 일 만인 1923년 5월 13일 창립축하식을 개최했던 극장 ‘진주좌’ 자리다. 당시 창립축하식에는 전국에서 400여 명에 달하는 백정이 참석했다. 사상 최초로 백정들이 모여 자신들의 신분 해방을 알린 공식 행사였다. 이날 행사와 관련해 씁쓸한 뒷얘기가 있다. 창립축하연을 앞두고 형평사는 기생들을 불러다 축하 노래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는데, 기생들이 ‘백정 앞에서는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단칼에 거절했단다. 차별받았던 기생마저도 백정을 차별한 얘기다.
제이씨티 앞에 형평사 창립축하식 기념 조형물이 있다. 2004년에 세운 조형물은 스테인리스 금속제 구형 위에 손톱깎이 모양의 메뚜기가 올라앉은 디자인이다. 한참을 봐도 대체 뭘 형상화한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나이트클럽에 극장까지 들어서 있던 제이씨티는 경영난에 시달리다 경매에 넘어간 뒤로 수년째 비어 있단다. 텅 빈 쇼핑몰에 기이한 조형물이다.
남강 수변공원에는 형평운동 기념탑이 있다. 형평운동 기념사업회가 1996년에 세운 탑이다. 본래 성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백정을 생각해서 진주성 촉석문 앞에 세웠던 것인데, 진주성 지하 주차장 조성 공사를 이유로 2017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공사 도중 뜻밖에 유적이 발견되면서 주차장 공사가 ‘진주대첩 광장’ 조성 공사로 규모가 커져 기념탑이 제자리로 돌아가기란 사실상 불가능해진 상황이다.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촉석문 앞이 낫겠지만, 남강 너머 새벼리가 건너다보이는 지금의 자리도 찾아가기에는 그리 나쁘지 않다. 진주에 갔다면 꼭 가보시길. 다만 기념탑의 완성도는 아쉽다. 창립축하식 기념 조형물만큼 조악한 건 아니지만, 차별이 없는 세상을 향해 걸어가는 남녀를 형상화한 기념탑의 미감과 상징이 기념하는 정신의 크기와 무게에 못 미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진주남강유등전시관에 설치된 소망등 터널.
전시관에는 대한민국 등(燈)공모대전 역대 수상작 등 볼거리가 많다.
진주비빔밥을 내는 진주 중앙시장의 천황식당. 3대에 걸친 110년 내력의 노포 중의 노포다.
# ‘어른 김장하’를 찾아 진주로 가다
이제 또 한 명, 진주의 인물을 불러보자. ‘진주의 큰어른’ 김장하. 그는 한약업사로 일하면서 일평생 사회운동과 자선사업을 하며 나눔을 실천해 온 독지가다. MBC 경남의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로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교육, 언론, 역사, 환경운동 등 시민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걸친 그의 선행과 조건 없는 기부도 놀랍지만, 스스로에게는 늘 엄격했던 그의 절제의 삶이 옷깃을 절로 여미게 한다.
그의 선행은 이루 다 거론할 수 없을 정도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100억 원이 넘는 사재를 털어 세운 학교를 국가에 기부 채납했으며, 지역 서점을 살리고, 지역의 극단을 지원하며, 지역의 전통문화를 지키는 데도 손길을 보탰다. 알려진 것만 해도 한참 더 많은데, 그것 말고도 또 어떤 게 더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스스로의 선행에 입을 꾹 닫고 있어서다.
이런 기부와 선행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건 해외여행 한 번 안 가고, 찻잔이나 방석도 안 바꾸고, 차 한 대 없이 낡은 구두를 신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베푼 것이어서다.
그는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지냈고, 형평운동기념탑을 세우는 데도 팔을 걷어붙였다. 그의 모습 속에서 100여 년 전 형평운동에 앞장섰던 강상호의 삶이 언뜻 비쳐 보인다. 두 사람 사이에는 54년의 간격이 있지만 어쩐지 닮아 있다.
놀라운 건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보고 감동한 이들이 무작정 진주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은퇴와 함께 2022년 5월 문을 닫은 동성동의 남성당 한약방 앞에서 만난 여행자만 여럿이었다. “그저 먼 발치에서라도 ‘어른’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는 게 이들이 말한 여행의 이유였다.
남성당 한약방은 진주시가 매입해 교육관 조성 리모델링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남성당 한약방의 역사적 자료를 전시하고 교육 공간으로 활용하는 사업이다. 1층은 한약방 원형을 보존해 김장하 선생의 활동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으로, 2층은 진주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의 전시 공간으로, 3층은 진주의 정신문화 유산을 계승하는 교육 및 휴게 공간으로 구성해 공사를 마치고 내년에 개관할 계획이다.
# 진주에서 가장 출세한 인물, 하륜
이번에는 결이 좀 다른 진주 출신 인물, 하륜 얘기를 해 보자.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조선 태종의 오른팔이었던 하륜. 그는 정치권력의 급변 속에서도 끊임없이 여러 관직을 거치며 활약했던 인물이다. 두 왕조, 아홉 임금의 시대를 살았으며, 자그마치 일곱 임금을 섬기며 일흔까지 천수를 누렸다. 시대를 가리지 않고 진주에서 ‘가장 출세한 인물’을 따진다면 그의 이름을 맨 앞에 올려야 하지 않을까.
그의 묘가 미천면 오방리에 있다. 하륜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하륜의 제사를 위한 재실 오방재(梧坊齋)가 있고, 하륜 일가의 묘가 그 뒤에 있다. 오방재 정문을 마주 보고 왼쪽으로 담을 따라 돌아가면 산길이 나오는데, 이 길로 200m쯤 가면 하륜 일가의 묘가 있다. 그의 묫자리에 관심이 가는 건 현실 정치의 한가운데서 승승장구했던 그의 삶 때문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이어지는 양식의 하륜 일가의 묘는 검은 돌로 무덤 아래쪽을 담쌓듯 감싼 모습이 독특하다. 일가의 묘가 특히 흥미로운 건 하륜이 풍수에 조예가 깊었다는 기록 때문이다. 조선 초기 도읍을 계룡산 아래로 옮기려던 것을, 하륜이 풍수이론을 들어 막았다고 전한다. 하륜이 왕실이 추진하는 천도 사업을 가로막았을 정도의 풍수이론가였고, 일가의 묫자리는 그가 잡은 것이었다.
숲길을 걷다가 먼저 마주치는 건 나란한 4기의 묘다. 하륜의 조부모와 부모의 묘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한 줄로 조성돼 있다. 제일 아래쪽에는 어머니, 그 위에는 아버지, 또 그 위에는 할머니, 가장 위에는 할아버지 묘가 있다. 할아버지 묘 앞에서 내려다보면 저 아래로 시야가 탁 트인다. 명당의 기운이 느껴지는 자리다. 하륜의 묘는 이곳에서 50m쯤 더 들어가서 따로 조성돼 있다. 하륜의 묘 주위에는 돌판을 팔각으로 둘렀고, 무덤 앞에는 석등과 석상을 세웠다.
일곱 임금을 섬기며 천수를 누렸다는 권력가 집안의 묫자리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까. 각을 맞춰 차곡차곡 쌓은 돌담과 오래된 석등과 석상이 다른 무덤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느낌을 준다.
■ 진주비빔밥
진주비빔밥은 아는 이들이 적다. 귀화 한국인 이참 전 한국관광공사 사장은 상대방이 자신을 외국인 취급한다고 느껴지면 던지던 질문이 있었다. ‘전주비빔밥과 진주비빔밥의 차이를 아세요?’ 상대방이 고개를 저으면, 이 사장은 으쓱해서 진주비빔밥을 설명하곤 했다. 진주비빔밥은 2차 진주성 전투를 앞둔 병사와 백성들이 성안에 남은 소를 잡아 마지막 식사를 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진주비빔밥이 양지 국물로 밥을 하고, 육회와 선짓국을 곁들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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