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고흥의 소록도. 소록도에 가면 늘 부끄럽습니다. 한센병 환자를 격리했던 이 섬은 한때 최소한의 인권도 지켜지지 않았던 곳입니다. 소록도의 한센병 박물관 전시실 한쪽에 이런 문장이 쓰여 있더군요. “모두 다 모두가 다 이름 있는 모든 것들이다.” 그렇습니다. 이 섬에는 ‘모두 다 이름이 없었던’ 길고 긴 시간이 있었습니다. 소록도에 한센병 환자 격리가 시작된 지 101년. 섬에서는 그 시간의 기억이 빠르게 지워져 가고 있습니다.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이 노환으로 세상을 뜨면서 집이 비워지고 마을이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마을이 비워지자마자 나무뿌리는 집을 감아 지붕을 허물어버리고 벽체를 쓰러뜨렸으며, 금세 자란 풀들은 아예 길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렇게 폐허가 된 자리를 불량스럽게 기웃거리고 있는 건 개발에 대한 욕망입니다. 환자들이 떠나고 난 뒤에 기억을 싹 쓸어내 버리고, 근사한 리조트나 해양 케이블카 따위를 놓아서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겠다는 속셈이겠지요.
소록도의 기억을 지키고자 온몸으로 힘겹게 버티고 있는 노 건축가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단언했습니다. 공공건축의 대가로 꼽히는 건축가 조성룡. 재활용 생태공원 선유도 공원과 어린이 대공원 꿈 마루도, 광주의 의재미술관과 홍성의 이응노 기념관도 그의 건축입니다. 칠순을 넘긴 그는 필생의 마지막 작업을 ‘소록도의 마을과 집을 지켜내는 일’로 삼았습니다. 뜻밖에도 ‘짓는 일’이 아니라 ‘지키는’ 것으로 건축가의 마지막 소임을 다하겠다는 얘기입니다. 그는 지금 조급합니다. 빈 마을에서는 지금도 하루하루 거대한 나무뿌리가 집을 먹어치워 버리고 있고, 포클레인의 삽날에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다던 간장 공장이 허물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수시로 소록도를 오가며 사라진 마을의 무너져가는 담벼락이 더는 허물어지지 않도록 강관 비계를 대고, 건물 기둥을 감은 나무뿌리를 쳐냈으며 풀숲에 묻힌 길을 다듬었습니다. 무너지지 않게 지지대를 세운 채 ‘놓아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곳은 누구도 섣불리 손을 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금방 수긍이 됐던 건 폐허가 된 마을에 섰을 때 느껴졌던, 그곳을 지나간 삶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존재감 때문이었습니다. 소록도에는 육지와 격리된 마을이 있고, 집이 있고, 모질었던 세월을 살아낸 사람들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 시간을 지키자는 게 어찌 의미 있는 건축물 몇 개를 남기자는 것뿐이겠습니까. 소록도 안에 어떤 마을이 있었고, 어떤 집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남긴다는 것은 ‘모든 것’에 ‘이름’을 부여해서 모든 것들이 ‘이름 있는 모든 것’이라는 걸 증명하는 일과 다름없습니다. 밥도 떠먹기 힘들 정도로 오그라든 손으로 한 장 한 장 만든 벽돌로 지은 집들을 지킨다는 건 소록도의 역사를 지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소록도의 마을을 지킬 수만 있다면 소록도는 ‘야만의 시간’이 가져온 절망과 고통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되고, 공범이었던 우리들의 사죄를 담는 공간이 될 겁니다. 진정한 용서란 이렇게 구하는 것이지요. 공감하고, 또 감동하면서 말입니다.
# 사라지게 놔둬서는 안 되는 것들 우선 소록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부터.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소록도는 서울 여의도 크기의 1.3배 남짓한 작은 섬이다. 섬 한가운데 잘록한 목에 들어선 국립소록도병원을 중심으로 섬 왼쪽은 병사(病舍)구역, 그러니까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고, 오른쪽은 병원 직원들이 거주하는 관사구역이다. 소록도에 거주하는 한센병 환자는 500명 남짓. 병원 직원과 직원 가족 200여 명을 합하면 700명 정도가 소록도에 산다. 고흥 녹동에서 소록도까지 연륙교가 놓이고, 소록도가 관광객들에게 개방됐다지만, 사실 공개된 구간은 병원 인근에 있는 중앙공원과 주변의 건물 몇 동, 그리고 한센병 박물관까지가 고작이다. 섬의 다른 지역은 외부인들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된다. 우리가 소록도의 진짜 모습을 잘 모르는 것도, 섬 안에서 마을과 집들이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소록도에 격리된 한센병 환자들은 병원의 병실에 수용된 것이 아니라, 주로 공동 주택에서 살았다. 과거 한센병을 두고 ‘천형’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이 병은 피부병의 일종일 뿐, 병 자체가 생명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증세가 극히 심한 환자가 아니라면 대부분 공동 주택에 살면서 마을 단위로 생활했다. 환자들에게 섬은 ‘거대한 병실’이 아니라, 소외된 가장 낮은 이들이 모여서 살았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살고 있는 생활 공간이라는 얘기다. 소록도는 본래 섬에 살던 주민들을 다 몰아낸 뒤에 한센병 환자 격리시설로 조성한 섬이라서 그런지 마을 이름부터가 대충 대충이다. 동쪽에 있다고 동생리, 서쪽에 있으니 서생리, 남쪽은 남생리…. 뭐 이런 식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소록도에는 9개 마을이 있었다. 한때 섬에 사는 주민들만 6000명을 헤아리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환자가 크게 줄면서 마을 두 곳이 사라지고 7개 마을만 남았다. 남은 마을도 폐가와 공가가 늘고 있다. 이런 속도라면 다른 마을도 하나둘 사라지고 말게 되리라. 이렇게 집이 한 채 한 채 사라지면…, 기억도 곧 지워진다. # 시간의 버팀목을 든든하게 세우다
노 건축가인 조성룡 성균건축도시설계원 교수는 연구원과 함께 무너지려는 서생리의 집과 마을을 안간힘을 써서 붙들고 있다. 폐허처럼 남아 있는 독특한 건축양식의 건물 외벽에다 쇠파이프로 비계를 지어 받쳤으며 나무뿌리가 헤집어 넘어지기 직전이었던 축사의 블록 담벼락을 쇠파이프로 지탱했다. 우드칩을 깔아 동선을 만들고 안내판을 세운 것 말고 새로 짓거나 들여놓은 건 하나도 없었다. 더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건축가의 목표였다. 무너진 벽의 벽돌 한 장도 환자들이 오그라든 손으로 굽고, 쌓았을 것을 생각하면 버릴 수 없었다. 더 무너지지 않게 받쳐두기만 했으되 공간은 매력적이었다. 허물어진 건물의 사라진 벽을 시간과 역사가 충분히 대체했다. 형체를 잃어가는 것들이 오히려 보이는 것 너머를 보게 했다. 누가 이 벽돌을 찍어냈을까, 여기는 어떤 공간이었을까, 여기서는 누가 살았을까…. 마을 바로 앞 넘실거리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공간은 어떻게 지켜져야 할까. 소록도를 다녀온 뒤에 만난 조 교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건축으로 일가를 이룬 노 건축가는 연신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리고 그는 ‘의견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더 무너지고 사라져서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말이다. 하지만 무너지고 사라지는 걸 지켜내는 일에 세상은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으니 돈을 대는 이들도 없다. 그나마 국립소록도병원이 병원 유지관리비를 지원하며 애를 쓰고 있지만 그걸로는 역부족이다. 더 큰 문제는 지방자치단체가 문화재 보수랍시고 마구잡이로 공사를 벌이는 일이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자혜의원은 복원을 한다며 반들반들한 시골 역 대합실처럼 바꿔놓았고 소록도의 신사 건물도 국적불명의 건축물로 만들고 말았다. 기가 막히다 못해 분노까지 치밀 일이다. # 출입 통제지역 곳곳에서 만난 풍경
발을 들일 수 없는 통제구역임에도 소록도의 병사구역 얘기를 하는 건 섬 안에 무엇이 있는 줄 알아야 그걸 왜 지켜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소록도 병사구역에서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가 마을과 마을을 잇는 신작로에 세워진 ‘순바구길’ 비석이었다. 해방 후 소록도에는 주민들이 스스로 조직한 ‘건설대’라는 조직이 있었다. 비교적 건강한 환자들로 구성된 건설대는 섬 안에 길을 놓거나 공원을 만드는 등 거친 일을 했다. 비석은 50년 동안 건설대로 일했던 ‘박순암’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름의 바위 암(岩)자를 ‘바구(바위)’로 풀어 ‘순바구’란 아명으로 신작로의 길 이름을 삼고서 비석을 세웠다. 소록도 안에 환자들의 피와 땀, 살과 뼈를 깎아 만들지 않은 게 어디 있을까. 소록도에 살면서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했던 박순암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길 이름이 된 그의 이름과 마주치는 순간 ‘한센병 환자’라는 익명으로 뭉뚱그려진 섬 주민들이 모두 하나의 개인으로 호명되는 느낌이었다. 관사구역에는 한국으로 건너와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40년 넘게 생활하다가 지난 2005년 자신의 병이 깊어지자 편지 한 장 남기고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간 오스트리아 출신의 간호사 마리안느 스퇴거(83)와 마가렛 피사렉(82)의 사택도 있다. 두 간호사가 소록도에서 얼마나 소박한 생활을 했는지는 앉은뱅이 책상 하나 덜렁 놓여 있는 방을 보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따스한 가을 오후의 햇살이 드는 피사렉 수녀 방의 창호 문에는 뜻밖에도 붓글씨로 ‘하심(下心)’이란 글귀가 붙어 있었다. 하심이란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을 이르는 불가의 용어. 그 글귀에서 종교를 넘어선 숭고한 마음을 읽는다. 소록도에서는 남생리 뒤쪽의 언덕 위에 벽돌로 지어 올린 등대도, 영화세트장에서 가져다 놓은 것 같은 남생리 사무소도, 바다에 한쪽 다리를 담그고 있는 동생리의 이국적인 식량창고도, 구북리에서 마주친 쓰러진 팽나무 거목의 고래 뼈 같은 잔해도, 바다를 정원 삼은 순백의 성당도 모두 마음을 움직이는 풍경이다. 그리고 하나 더. 소록도에는 사슴이 많다. 작은 사슴을 뜻하는 ‘소록’이라는 섬 이름에 걸맞다며 경기 이천의 한 농장에서 병원에 사슴을 기증한 것이 시작이었다. 별 생각없이 섬에 방목한 사슴이 마구 불어나서 지금 200여 마리에 이른다. 사슴은 지금 소록도의 생태를 해치는 최고의 골칫거리가 돼버렸다. 소록도에 머무는 한나절 동안 섬의 은밀한 숲 속에서 수시로 사슴과 마주쳤다. 숨소리를 죽이며 숲길을 가다 펄펄 뛰는 야생의 사슴과 눈이 딱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떨렸다. 섬의 골칫거리라고는 했지만, 이렇게 된 게 어디 사슴 잘못일까. 섬 안의 깊은 숲에서 마주친 암사슴의 맑은 눈망울과 수사슴의 겨누는 당당한 뿔은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 소록도 지금 가도 볼 수 있는 것들
본래 소록도병원은 100주년 기념비를 세울 요량이었다. 그러나 제안을 받아든 조 교수는 ‘돌덩이 기념비 대신 폐허가 된 병사를 간수해 기념물로 삼자’고 제안해 만들어진 게 이 기념시설물이었다. 1970년대까지 병사로 사용하던 공간은 뼈대를 건드리지 않은 채 다듬어져 이렇게 기억과 감성의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주차장에서 병사구역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이 바다와 나란한 소나무길이다. 빼어난 경관에 어울리지 않게 이 곳은 수심과 탄식이 깃든 곳이라는 뜻의 ‘수탄장(愁嘆場)’이라 불린다. 소록도의 한센인들은 가족과 자식을 이곳에서 만났다. 감염의 우려 때문에 가족과 함께 살 수 없었던 이들은 한 달에 딱 한 번, 길 이쪽에 늘어서서 길 저쪽의 가족을 바라보았다. 자식의 손을 잡을 수도, 머리를 쓰다듬을 수도 없었다. 철조망이 있었다고 했지만, 그게 없어도 어떤 병든 부모가 자기 자식을 만질 수 있었을 것인가. 한센인 부모는 바람을 안고서야 아이들과 마주했다. 행여나 바람에 병균이 자식 쪽으로 날아갈까 싶어서였다. 한센병박물관 한쪽의 전시실에 소록도에 거주하고 있는 환자가 기증한 명주 저고리와 바지가 걸려 있다. 환자의 어머니가 아들 결혼을 위해 정성껏 누에를 치고 바느질해 지은 결혼예복이었다. 그러나 결혼 1년 만에 아들은 병에 걸렸다. 아내는 떠났고 아들은 가족을 위해 고향을 떠나 소록도로 혼자 들어왔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얼마나 아들이 그리웠을까. 어머니는 명주 누비 바지저고리를 가지고 소록도로 와서 아들에게 전해주었다. 그게 아들이 본 어머니의 마지막이었다. 섬을 나갈 수 없었던 아들은 어머니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박물관에 걸린 저고리와 바지는 그날 어머니가 전해준 것이었다. 소록도 안에 이런 이야기들이 어디 하나둘일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 섬에 있다. 소록도를 지금의 모습으로 지켜내야 하는 이유다. 다시 말하지만 ‘집이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진다’.그리고 진정한 화해란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 목재문화체험장 한옥 숙소 추천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고흥의 유일한 호텔이 발포의 빅토리아호텔(061-832-3711)이다. 마복산 아래 포두면 목재문화체험장(061-830-5123)의 전통한옥체험 숙소와 거금도의 거금도한옥민박(061-282-5327)도 추천할 만하다. 녹동항 근처 생선구이백반을 내는 정다운식당(061-843-0217)과 통장어탕으로 이름난 득량식당(061-840-2082)이 있다. 전복과 조개를 수북하게 넣어 끓여낸 짬뽕을 내놓는 일성식당(061-834-7061)도 가볼 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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