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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따라 읊었던 코미디의 유행어에 등장하는 동방삭은 장수한 인물로, 또는 골계에 뛰어난 인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그가 왜 삼천 번의 환갑이 되는 세월(1만8천년)을 살게 되었고, 골계로 뛰어난 인물이 되었는지, 이 음주고사를 통해 살펴보자.
진(晉)대 장화(張華)의 박물지(博物志)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군산(君山)에는 좋은 술 몇 말이 있었는데, 마시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았다. 무제(武帝)가 난파(欒巴)를 보내어서 결국 이 술을 얻었다. 동방삭이 ‘신이 이 술을 알아야겠으니 보여 주십시오’라고 하고서, 이 술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무제가 동방삭을 죽이려 하니, 동방삭이 ‘저를 죽여서 만약 죽는다면 이것은 효험이 없는 것이고, 이것이 효험이 있다면 저를 죽인다고해도 죽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무제가 그를 용서하였다.”
위의 고사는 골계가 넘치는 그의 기지가 잘 드러나지만 오만방자하게까지 보이는 그의 이러한 행동은 도대체 뭘 믿었기 때문일까? 물론 한무제가 만년에 신선술과 장생불사에 심취하였기에 고대의 경전과 신선술,기이한 고사 등에 해박한 자신을 쉽사리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무제의 총애를 받은 그가 왜 정사를 돌보는데 관심을 두지 않고, 낭관(郞官)․대조금마문(待詔金馬門)이라는 낮은 벼슬에 만족하며 궁전의 악사나 배우처럼 황제 곁에서 빌붙어 생활했던 것일까?

그는 황제에게 받은 하사품을 술과 여자를 사는데 모두 써버렸다. 그래서 동료 낭관이 그에게 모두들 미치광이로 여기고 있다고 하자, 동방삭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세상을 피하여 사는 사람인데, 옛 사람은 세상을 피해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세상을 피해 조정안에 있는 겁니다.”고 대답한다.
또한 그는 연회석에서 술이 거나해지면 그 자리에 널부러져서 이러한 노래를 불렀다. “속세에 은거하고, 세상을 피한 금마문(金馬門·내시들이 있는 관청의 문), 궁전 속에서는 세상을 피해 몸을 안전해 주는데, 구태여 깊은 산중 쑥으로 이은 움막에 은거할 필요가 있는가?”
나아가 필자가 의아해하는 것처럼 <사기>에서도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들은 것이 많고 변설과 지혜가 뛰어난 동방삭이 왜 이전의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같은 공을 세우지 않은 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옛말에 ‘천하에 재난이 없으면 성인이 있어도 그 재주를 베풀 곳이 없고, 상하가 화목하면 어진 사람이 있어도 공을 세울 수가 없다’고 했소. 그러므로 ‘시대가 다르면 상황도 달라진다’고 했던 것이오. 이렇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몸을 닦는 것에 힘쓰지 않을 수 있겠소?……몸을 닦게만 된다면 영달을 얻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오.……”
그런데 몸을 닦아 세상의 이치를 통달해야 한다고 한 그가 술과 여자를 사는데 재산을 탕진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혹시 동방삭이 자식을 권계하는 시(誡子詩: 여러 판본이 남아 있는데 싯구가 조금씩 다름)를 읽으면 이러한 그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될까 싶어서 소개한다.
현명한 사람이 일을 처리하는 것은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가장 숭상하여 마음대로 노닐어도 도(道)와 서로 부합한다. 수양산에 은거한 백이숙제는 처세가 졸렬한 것이고, 내침을 받아도 원망하지 않은 유하혜(柳下蕙)의 처세는 뛰어난 것이다. 밥을 배불리 먹고 편안하게 생활하는 것은 관직에 있는 것으로써 농사짓는 것을 대신한다.
조정에 은거하여 세상을 놀리게 되면 시류와 어그러져서도 화를 당하지 않게 된다. 이런 까닭으로 재주가 다한 자는 몸이 위태로워지고, 명성을 좋아한 자는 영화를 얻게 되고, 무리를 가진 자는 허물이 생겨나고, 고귀한 자는 조화를 잃게 되고, 남음이 있는 자는 다하지 않고, 저절로 다하는 자는 남음이 없게 된다. 성인의 도는 용처럼 나타나기도 하고 뱀처럼 숨기도 하여 모습을 드러내지만 정신을 숨겨서, 사물과 때에 따라 항상 적절하게 변화하니 정해된 틀이 없다.
(明者處事, 莫尚於中, 優哉游哉, 與道相從. 首陽爲拙; 柳惠爲工. 飽食安步, 在仕代農. 依隱玩世, 詭時不逢. 是故才盡者身危, 好名者得華; 有群者累生, 孤貴者失和; 遺餘者不匮, 自盡者無多. 聖人之道, 一龍一蛇, 形見神藏, 與物變化, 隨時之宜, 無有常家)

이를 통해 봐도 그가 왜 술과 여자를 위해 재물을 탕진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다만 “재주가 다한 자는 몸이 위태로워지고……”라고 인식한 점이 바로 그가 박학다식에 기초하여 한무제를 끊임없이 웃게 만들고 환심을 사게 된 원천인 듯 하다.
어쨌든 사람의 행동은 복잡다단한 사상의 결과로 빚어지기에 하나의 사상이나 원인에 한정하여 귀납시킨다면 이 또한 오류를 범할 여지가 크다고 본다. 여기서는 그가 다만 조정에 은거하여 화를 당하지 않으면서도 개인적인 기호를 즐긴 것이라 생각해볼 뿐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쇼를 하자’는 광고의 문구를 즐긴다. 이는 여러 방면에 다각도로 적용될 수 있는 멋진 처세방법일 수가 있는데, 가만히 따져보면 정치가,학자,은사,종교방면의 종사자,상인 등 적용되지 않은 분야가 있겠는가? 동방삭의 ‘조은(朝隱)’도 바로 일종의 쇼가 아니겠는가?
<사기>에 의하면, 그가 황제에게 자신을 추천할 때, 자신의 장점을 3천여개의 죽간에 적어서 상주했기에, 무제가 방점을 찍어가면서 두 달이 걸려서야 다 읽었다고 한다. 이는 그의 변설이 뛰어남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그는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도로 살려내어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으로 삼았음을 알 수가 있다. 각설하고 동방삭은 평소 배우처럼 황제를 모시고 신선술에 심취하도록 도우며 일신의 편안을 도모했지만 늙어죽을 때가 되어서는 황제에게 이렇게 간한다.
“<시경>에 「앵앵거리는 쇠파리 울타리에 모이면 어진 임금이라도 참언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참언하는 사람이 한없이 많으면 온 나라를 어지럽한다.(營營靑蠅止於樊, 豈弟君子, 無信讒言, 讒人罔極, 交亂四國.)」(<소아(小雅),청승(靑蠅)>)고 했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교활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을 멀리하시고 참소하는 말을 물리치십시오.”
이를 들은 황제가 “이상하게도 요즘 동방삭이 하는 말에 착한 데가 많도다”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이쯤되면 그의 삶은 조정에 은거하여 ‘때와 사물과 따라 항상 적절하게 변화하는’ 쇼를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동방삭의 고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수많은 고사를 양산하게 되었을 것이다. 동방삭은 골계와 변설에 뛰어나서 <사기·골계열전>에도 이름을 올렸는데, 그의 면모가 드러나는 고사들을 살펴보자.
[고사1]황제에게 3000개의 죽간에 글을 써서 자신을 추천한 동방삭은 겨우 낭중(郞中)을 얻었지만 황제를 알현할 기회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장안으로 나가 무제의 총애를 받는 한 난장이에게 “너의 죽음이 임박했다!”고 쇼를 한다.
그 난장이가 동방삭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동방삭이 말했다. “너처럼 왜소한 사람은 살아도 세상에 무익한데, 너의 힘으로는 밭을 갈 수도 없고, 관리가 되어 백성을 다스릴 수도 없고, 병기를 가지고 나가 전쟁을 치를 수도 없다. 너같은 사람은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고 다만 살아서 양식만 축내니 황제가 한꺼번에 너희들을 죽일 것이다.”
난장이가 이를 듣고 울음을 터뜨리자 동방삭이 말한다. “울지 마라, 황제가 곧 오실 터이니, 오시면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라.” 마침내 황제가 수레를 타고 지나가다가 난장이가 울고 있기에 그 까닭을 묻고서, 동방삭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동방삭은 이렇게 말했다.
“신은 살더라도 이렇게 말할 것이고, 죽더라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 난장이는 키가 겨우 3척정도 되는데 한포대의 쌀과 240냥의 돈을 봉록으로 받습니다. 저는 키가 9척이나 되지만 한 포대의 쌀과 240냥의 돈을 봉록으로 받습니다. 저 난장이는 배가 터져 죽을 것이고, 저는 굶어서 죽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인재를 널리 구한다고 하시는데, 저의 말이 옳고, 인재라고 여기신다면 저를 중용하시고, 인재가 아니라면 저를 내치시어 저가 이곳에서 양식을 축내도록 하지 마십시오.”
황제가 껄껄 크게 웃고서 그를 대조금마문(待詔金馬門)에 임명하였다.
[고사2]어느 여름철 복날 무제가 조정의 신하에게 육고기를 하사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고기를 나눠줄 관리가 올 생각도 하지 않아서 동방삭은 자신의 분량만큼 살코기를 떼어서 돌아갔다. 주방장은 이를 무제에게 알렸고, 다음날 무제가 그를 꾸짖었다. 동방삭은 즉시 모자를 벗고 땅에 엎드려 처벌만을 바랬다. 무제가 그를 놀려줄 심산으로, “네가 진심으로 후회한다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큰소리로 욕해봐라”고 하였다. 그래서 동방삭은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동방삭아, 너는 폐하의 분부도 기다리지 않고 마음대로 하사품을 가져갔으니 정말로 무례하구나! 차고 있던 칼을 뽑아서 큰 고깃덩이를 자르니 기상이 아주 굳세구나! 그렇게 많은 고기 중에서 적게 잘랐으니 욕심이 없는 표본이라고 할 수 있구나! 자신은 한입도 먹지 않고 모두 부인에게 가져다 주었으니 애정의 표본이구나!”
무제가 이말을 듣고 배를 잡고 웃고서 “원래는 자네에게 창피를 주려고 했지만, 자네는 한판의 희극을 연출하여 오히려 자신을 자랑했구나!”라고 하고, 술 한섬과 고기 백근을 하사하였다.
[고사3]무제의 누이동생인 융려(隆慮)공주의 아들 소평군(昭平君)은 교만사치하고 음란한 사람으로서 무제의 딸 이안(夷安)공주에게 장가들었다. 그가 어느날 술을 마신 뒤에 이안공주의 유모를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무제가 고민하여 슬퍼하였다.
이때 대초(待詔) 동방삭이 상주하여 말했다. “제가 듣기로 성왕은 정치를 위해 상을 줄 때는 원수집안을 가리지 않고, 죄를 벌할 때는 친척을 가리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서경>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무리짓지 않으면, 왕도가 평탄할 것이다'고 했으니, 이 두 가지는 오제(五帝)가 중하게 여긴 것이고 삼왕(三王)이 혼란하게 한 것인데, 폐하께서 이를 행하시면 천하에 복을 가져올 것입니다! 신 동방삭이 술을 바치는 것은 죽을 죄지만 다시 황제의 만수무강을 바랍니다.” 이에 무제가 “고서에 이르기를 ‘말해야 할 때 말해야 하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싫어할 수가 없다.’고 했는데, 지금의 상황이 자네가 장수를 비는 술을 바칠 때냐?”
동방삭이 말했다. “근심을 푸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이 술이니, 제가 장수를 비는 술을 바치는 것은 첫째 폐하의 공정무사한 것을 표명한 것이고, 둘째 황제의 슬픔을 없애려고 한 것입니다. 저가 꺼려야 하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 것은 정말로 죽어 마땅합니다!” 황제가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그가 훌륭하다고 여겨 중랑(中郞)으로 삼았다.
이날 동방삭은 이미 술에 만취하여 궁전에 오줌을 쌌고, 대신들이 그를 ‘불경죄’로 탄핵하여 파관되어 서인이 되었다. 뒤에 다시 대책(對策)에 뛰어나서 중랑(中郞)이 되었다.
[고사4]<방삭별전(方朔別傳)>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무제가 감천(甘泉)의 장평판(長平坂)을 순행할 때 도중에 곤충이 있었는데 소의 간처럼 붉었고, 머리에 붙은 눈과 입속의 이빨이 모두 있었다. 사람들이 이것을 몰랐다. 당시 동박삭은 뒤따르는 수레 안에 있었는데, 가서 보게 하였다.
동방삭이 ‘괴이합니다! 이곳은 반드시 진(秦)의 감옥이 있던 곳입니다.’고 하였다. 황제가 시켜서 지도를 가져오게 하게 살펴보니 과연 진의 감옥이 있던 곳이었다. 황제가 동방삭에게 어떻게 이러한 사실을 알았는지 묻자, 동방삭이 ‘이 곤충은 근심이 쌓여서 된 것입니다. 대저 근심이 쌓인 것은 술로써 풀어야 합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곤충을 술 속에 담그자 이내 사라졌다. 황제가 동방삭에게 비단 백 필을 하사하였다.”
[고사5]<사기·골계열전>에 이러한 고사가 있다. 건장궁(建章宮) 후문의 이중 장랑에 이상한 짐승이 나타났는데, 그 모습이 고라니와 비슷했다. 황제가 소문을 듣고 와서 보곤 좌우의 군신 중 경술에 정통한 사람에게 물어보았지만 이 짐승에 대해 아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동방삭을 불렀다.
동방삭이 “신은 이것을 아는데 좋은 술과 쌀밥을 실컷 먹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황제가 이를 승낙하자 동방삭이 또 말했다. “어느 곳에 공전(公田)이 있는데 고기가 사는 연못에 부들과 갈대가 자라는 것이 몇 이랑 됩니다. 폐하가 이를 저에게 주시면 제가 곧 말씀드리겠습니다.” 황제가 승낙하자 동방삭이 말했다. “이것은 이른바 추아(騶牙)라는 것입니다. 먼 곳의 나라가 귀순하려고 하면 이 추아가 먼저 나타납니다.
그의 앞니와 속니가 하나와 같이 가지런하여 어금니가 없는 듯 하기에 추아라고 부릅니다.” 이후 1년쯤 지나자 흉노의 혼야왕(渾邪王)이 과연 1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투항했다. 그리하여 황제는 동방삭에게 많은 돈과 재물을 다시 하사했다.
위에서 인용한 고사를 읽다보면 동방삭이 황제에게 총애를 받은 이유를 엿볼 수 있는데, 자칫 흥미거리에 빠져 그냥 지나칠 수가 있기에 여기에서 간략하게 다시 한번 고사를 정리해 보겠다.
고사1, 3은 동방삭이 관직의 종류를 불문하고 황제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관직을 얻으려 했다는 점에서는 이론이 없을 듯 하다.
나아가 고사1, 2, 3은 조금은 황당하고 지나친 언행을 보이는데, 이것은 자신의 가치를 최대한도로 끌어올리는데 있어서 커다란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러한 행위는 생명의 위험까지 감수하여야 하는데, 이는 아마도 무제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한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여겨지며, 나아가 [고사4,5]에서 보듯 고금에 널리 정통한 자신의 박학한 학식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황제가 알고 싶어하는 궁금증은 결국 동방삭을 통해 해결되기에 그의 존재가치가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특이한 점은 동방삭이 도가의 학설에 심취했다고 알려졌지만 기존의 도가와는 조금 변질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사2, 5가 동방삭이 또 쇼를 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글자 그대로만 두고 판단한다면, 동방삭은 관직의 높고 낮음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오직 생활에 필요한 재물과 의식주에 더 관심을 가진 듯 하다.
이는 자신의 포부를 가지고 ‘입신양명’하는 유가의 입장이라기보다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이 관심사를 마음대로 즐긴 변질된 도가의 입장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렇기에 물질적인 면을 무시한 기존의 도가와는 삶의 태도와 방법이 사뭇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동방삭은 역사서에 의하면 분명히 기원전154에서 기원전93년까지 대략 61년, 즉 1갑자를 산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장생한 인물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만년에 장생불사를 추구하던 한무제와 얽혀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역사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한무제는 한나라를 당시에 세계최대강국으로 만든 현명한 황제였지만 만년에는 신선술과 장생불사에 심취하였던 인물이다.
이 대목에서 한무제를 통해 인간본연의 나약함과 욕심을 동시에 보게 되는데, 이는 진시황이나 당(唐)현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한 나라의 황제로써 세계최고라 할 만한 세력을 구축하고 나면 왜 전성기와는 전혀 다른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이는 걸까?
목표를 달성하고 난 뒤 새로운 목표가 없어서일까?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정력이 쇠진했기 때문일까?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한 뒤 현실에 안주하고 편안히 살고 싶은 마음이 먼저 작용하기 때문일까? 그러다가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것인가?
어쨌거나 한무제는 만년에 신선술과 장생불사에 심취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부인(李夫人)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 때문이라 한다.
한무제의 신선술과 장생불사에 관한 고사는 이후 <한무제고사(漢武帝故事)>, <한무제내전(漢武帝內傳)>, <한무동명기(漢武洞冥記)> 등을 통해 더욱 신비한 색채를 더하게 되었다.
동방삭은 그의 일생이 한무제와 거의 겹쳐있고, 또한 한무제가 신선술과 장생불사에 심취하는데 상당부분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소가 서로 작용하여 이후의 책 속에서 그는 한무제와 더불어 불로장생한 인물로 그려진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신선술의 색채가 농후한 <한무동명기(漢武洞冥記)>, <독이기(獨異記)>, <한무제내전(漢武帝內傳)> 등에서 동방삭을 신선으로 취급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심지어 기이한 이야기를 모은 <신이경(神異經)>, <해내십주기(海內十洲記)>를 동방삭이 지은 것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이러한 책이 전해진 이후 민간에서는 점점 동방삭이 불로장생한 인물로 여겨졌을 것이다.
동방삭에 관한 기록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한무동명기> 권1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보겠다.
동방삭은 자가 만청(曼倩)이다. 부친 장이(張夷)는 자가 소평(少平), 장이의 처는 전(田)씨집의 딸이다. 장이는 나이가 200살이지만 얼굴이 아이같았다. 동방삭이 태어난지 3일만에 모친 전씨가 죽었는데, 그때가 한 경제(景帝)3년이다. 이웃집 부인이 그를 받아서 길렀다. 나이 3살 때 세상에서 아주 귀중한 참위서(讖緯書)를 한번 보면 입으로 암송하였고, 항상 하늘을 가리켜며 허공에다 대고 혼잣말을 하였다.
양모가 갑자기 동방삭을 잃었는데, 몇 달이 지난 뒤 돌아와서 양모가 그를 매로 때렸다. 뒤에 다시 나가서 1년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양모가 그를 보고 매우 놀라서 “네가 일 년만에 돌아왔는데 어째서 나를 위로하지 않지?”하고 물었다.
동방삭이 말했다. “저는 자니해(紫泥海)에 가서 자수(紫水)에 옷을 더럽혀서 우연(虞淵)에 가서 옷을 빨았는데, 아침에 갔다가 정오에 돌아왔는데, 어떻게 1년이 되었다고 하시오?” 양모가 “네가 어디로 갔는지 낱낱이 말해 보거라.”라고 하였다.
동방삭이 말했다. “제가 옷을 다 빨고 나서, 도숭당(都崇堂)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왕공(王公)이 단하(丹霞)로 만든 음료를 줘서 제가 이것을 먹고 너무 배가 불러 답답해 죽을 것 같았는데, 현천황로(玄天黃露) 반잔을 마시고 곧 깨어났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데, 길에서 우연히 털이 뿌연 호랑이 한 마리를 만나서 길옆에서 쉬었다가, 호랑이를 타고 돌아오다가 호랑이를 아프게 채찍질을 하니 호랑이가 저의 다리를 꽉 깨물었습니다.” 양모가 슬퍼하며 푸른 베옷을 찢어서 동방삭을 감쌌다.
동방삭이 또 집을 떠나 만리나 되는 곳에서 말라죽은 나무를 하나 보았는데, 그 나무에 베옷을 벗어서 걸었다. 베옷은 용으로 변했고 그리하여 그땅이 포룡택(布龍澤)이 되었다.
동방삭이 원봉(元封)연간에 몽홍(濛鴻)의 연못에 놀러가서, 서왕모가 백해(白海)의 물가에서 뽕나무를 캐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눈썹이 누런 늙은이가 서왕모를 가리키며 동박삭에게 말했다. “옛날 나의 부인인데, 모양을 빌려 태백의 정령(太白之精)이 되었는데, 지금 자네가 이 별의 정령이니라. 나는 곡기를 끊고 정기를 마시니, 이미 9천여세로, 눈동자는 색깔이 모두 파른 색을 띠어 그윽하게 감춰진 사물까지 볼 수 있다. 3천년에 한번 뼈를 바꾸고 골수를 씻고, 2천년에 한번 살을 깎고 털을 없앤다. 내가 태어난 이후로 이미 골수를 세 번이나 씻었고, 털을 다섯 번이나 깎았느니라.”
<한무동명기>는 한무제의 연호 등 역사적인 사실을 인용하면서 한무제를 중심으로 빚어지는 허황된 고사를 엮어서 서술하기 때문에 궁전 속의 일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고사가 사실인지 허구인지 의아해하면서도 흥미위주로 보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등장인물에 대해서도 점점 자신의 입장에서 취하고 싶은 부분을 취하면서 진위가 뒤섞이는 현상으로 나간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러한 현상은 <독이지(獨異志)> 권상(卷上)에서도 나타난다. “한대 동방삭은 목성(歲星)의 정령이다. 한무제 때 관직에 들어온 뒤로 하늘에는 목성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 목성이 다시 드러났다.” 심지어 <태평광기(太平廣記)> 권6에서조차 위 인용문의 밑줄 친 부분을 인용하고 있으니, 독자들로써는 점점 동방삭의 신격화를 믿게 되고, 그의 죽음조차 신선이 되어 간 것으로 믿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무제내전(漢武帝內傳)>에서 동방삭은 용을 타고 날아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하였고, ≪열선전전(列仙全傳)≫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동방삭은 한무제 때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다. 한무제는 만년에 신선술을 좋아하였는데, 동방삭이 박학다식하여 항상 신선과 신령스럽고 괴이하고 세상 밖 괴이한 일들을 한무제에게 말씀을 드렸다. 별을 잘 운용하고, 부도(佛道)를 잘 읊었는데, 문득 속세에 내려왔다가 마음대로 날아가 버렸다.
또한 <통선전(洞仙傳)>에서도 이렇게 기록되었다. 동방삭은 태상진궁(太上眞宮)의 곡희자(谷希子)를 스승으로 받들어 낭(閬),종산(鐘山)과 신주(神州)진형도(眞形圖)를 얻었고, 뒤에 서왕모를 모시는 시신(侍臣)이 되었다.
이외에 동방삭이 천도를 훔쳤다는 고사는 널리 알려졌는데, <통석편(通惜篇)>에 그 기록이 보인다. 서왕모가 칠월칠석에 구화전(九華殿)에 내려와서 한무제에게 복숭아 다섯 개를 하사하였는데, 동방삭이 궁전 동쪽 곁채의 붉은 창문으로 몰래 이것을 바라보았다. 서왕모가 “저 아이가 예전에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세 번이나 선도(仙桃)를 훔쳤다.”고 말했다.
동방삭은 이처럼 그의 골계와 도가적인 신화로 인하여 본래의 진면목을 잃은 부분이 많다. 사실 그에게는 <답객난(答客難)>, <칠난(七難)>, <비유선생론(非有先生論)> 등 논리정연한 변설이 뛰어난 작품들은 있지만 황당하고 신화적인 고사들에 의해 가려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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