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들어보니 인간세상이 모두 취했으니"
술로써 명성이 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우리와 같은 일반인이 제아무리 술을 많이 마시고 잘 마신들 명성이 날리는 만무하고, 단지 유명인사의 행동거지에 술이 가미되어 더욱 기이하고, 풍류있고, 운치있는 일화로 꾸며져서, 그를 더욱 부풀리게 하는 것은 아닐까? 술은 이상한 물건이어서 화기가 있기에 술만으로는 사람을 망치거나 대사를 그르치게 하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어설픈 술꾼은 이를 마음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술을 앞에 놓고, 평생 술과 얽혀 지낸 왕적의 일생을 찬찬히 보면서, 술을 어떻게 다뤄야 자신의 목표와 명성을 얻을 수 있을 지, 다신 한번 자신에게 되묻기를 바란다.
왕적(585년~644년)은 수말당초의 사람으로, 자가 무공(無功), 호가 동고자(東皐子), 산서성 강주(絳州) 용문(龍門: 지금의 산서성 河津縣) 사람이다. 그는 수대에서는 비서성정자(秘書省正字)를 지냈고, 초당(初唐)에서는 대조문하성(待詔門下省)을 지냈고, 뒤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 동고촌(東皐村)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그는 수말당초의 유명한 학자이자, 왕발(王勃)의 조부인 왕통(王通)의 동생이다.
차에 있어서 엄우(嚴羽)의 ≪다경(茶經)≫이 있다면 그는 술에 있어서 ≪주경(酒經)≫1권,≪주보(酒譜)≫1권을 지었지만 아쉽게도 지금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취향기(醉鄕記)>,<오두선생전(五斗先生傳)>,<주부(酒賦)>,<독작(獨酌)>,<취후(醉後)> 등의 시문이 남아있기에, 그의 일생은 또한 술과 아주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술과 관련된 그의 일생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박학다식하였으며 총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수 개황20년(600년)에 15살의 나이로 수도 장안으로 유력하여 조야의 대신인 양소(楊素)을 알현하니, 자리에 있던 공경대부들이 모두 그를 ‘신동선자(神童仙子)’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후 대업원년(605년)에 효렴에 응시하여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여 비서정자를 제수받았지만 조정에 들어가 근무하기를 원치 않아서 병을 핑계로 고사하고, 다시 양주육합현승(揚州六合縣丞)을 제수받았다. 그런데 그는 ‘술을 좋아하여 정무에 방해를 주었고(以嗜酒妨政)’, 당시는 또한 세상이 혼란하였기에 그는 마침내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以嗜酒妨政’하였다는 것은 당시에 술로 인해 탄핵을 받아서 관직을 그만 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 탄식하여 “온 세상을 법으로 옭아매니,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 안녕을 도모할 것이다(網羅在天, 吾且(혹은 將)安之!)”라고 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마을에 중자자광(仲長子光: 자광은 혹 子先이라고도 함)이란 은자가 있었는데, 이 은자는 처자식이 없었고, 오로지 이록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왕적은 그의 참됨을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항상 그와 가까이 지냈는데, 그는 벙어리였기에 말을 한마디로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 술을 나눌 때는 아주 기뻐하였다. 집안에 밭이 16이랑과 노비 몇 명이 있었고, 기장을 심어 봄과 가을에 술을 담고, 오리와 기러기를 기르고, 약초를 심어서 자급자족했다.
≪주역≫,≪노자≫,≪장자≫를 침상머리에 두고 다른 서적은 거의 보지 않았다. 소를 타고 술집을 지나게 되면 며칠을 머물렀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유령을 만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서로 문을 닫아걸고 실컷 마셔봤으면……”이라고 하였다.(≪신당서열전≫권196과 ≪주전(酒顚)≫30조 참조)
당 고조 무덕(武德)8년(625년)에 조정에서 이전 왕조에서 벼슬한 사람을 초빙하여 대조문하성을 제수받았다. 관에서 날마다 술 3승을 주었는데, 왕적의 동생 왕정(王靜)이 황궁의 금위관(禁衛官)이 되어, 왕적에게 “대조의 일이 즐겁습니까?”라고 물었다.
왕적이 대답하여 “대조의 봉록이 아주 낮다고 하더라도 좋은 술 3승인 것이 아쉬울 뿐이네.”라고 말했다. 시중 진숙달(陳叔達)이 이 말을 듣고 날마다 술 한말을 주었는데, 그리하여 당시에 그를 두주학사(斗酒學士)라고 하였다.
당 태종 정관(貞觀)초에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다시 관직을 구했다. 당시 그는 태락서사(太樂署史) 초혁(焦革)의 집안이 좋은 술을 잘 담근다는 말을 듣고, 어렵게 태락승(太樂丞)이 되었다. 초혁이 죽은 뒤에도 그의 처가 술을 계속 보내줬는데, 1년이 지나서 또 초혁의 처가 죽자, 왕적은 “하늘이 나에게 좋은 술을 맛보지 않게 하는구나!”라고 하고서, 관직을 그만두었다.
그는 초혁의 술주조법을 연구하여 ≪주경≫을 짓고, 또한 두강(杜康) 의적(儀狄)이래 좋은 술을 구하여 ≪주보≫를 지었다. 이순풍(李淳風)이 그를 보고 “자네는 술문화에 있어서 남사씨와 동호라네(君酒家南․董也)”고 하였다. 그의 집 동남쪽에 반석이 있는데 두강사를 세워서 그를 제사지내고, 스승으로 받들었으며, 초혁을 그의 짝으로 모셨다. 유령의 <주덕송>을 따라 <취향기>를 지었고, 그의 주량은 오두(五斗)를 마셔도 몸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술로써 초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천을 따지지 않고 갔다고 한다.
왕적의 일생을 보면, 그는 먼저 유가의 학설보다는 도가의 ≪주역≫,≪노자≫,≪장자≫ 등의 서적을 좋아했고, 술을 좋아했지만 60평생을 살았으며, 특이나 그가 관직을 서너 번 나갔다는 것은 그의 재능을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술에 관한 훌륭한 저작을 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결국 현세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직분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아가 그 결과물로써 판단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아래에는 참고로 그의 시와 <오두선생전>을 소개하고자 한다.
<취한 뒤(醉後)>
阮籍醒时少(완적성시소), 완적은 술이 깨어있을 때가 적고,
陶潜醉日多(도잠취일다). 도연명은 취해 있는 날이 많네.
百年何足度(백년하족도), 백년을 어찌 만족하며 보낼까?
乘兴且长歌(승흥차장가). 흥에 기탁하고 크게 노래부르면 될 뿐.
<혼자 술을 마심(独酌)>
浮生知幾日(부생지기일), 뜬구름같은 인생이 몇 날인지 알기에,
無状逐空名(무상축공명). 쓸데없는 명성을 쫓는 것을 형용할 수 없다오.
不如多酿酒(불여다양주), 술을 많이 빚어,
时向竹林倾(시향죽림경). 때때로 대나무숲에서 기울이는 것만 못하네.
<술집을 지나며(过酒家)>五首(또는 술집벽에 쓰다(题酒店壁)라 함
洛阳無大宅(낙양무대택), 낙양에는 큰 저택이 없고,
长安乏主人(장안핍주인). 장안에는 주인이 부족하다네.
黄金销未尽(황금소미진), 황금을 다 없애지 않으니,
只为酒家贫(지위주가빈). 술집은 가난할 뿐.
此日长昏饮(차일장혼음), 이날은 오랫동안 정신없이 마시니,
非关养性靈(비관양생령). 성령을 양성하는 것과 관련없네.
眼看人尽醉(안간인진휘), 눈을 들어보니 인간세상이 모두 취했으니,
何忍独为醒(하인독위성). 어찌 차마 홀로 깨어 있을 수가 있을까!
竹葉连糟翠(죽렵연조취), 죽엽청주는 술지게미가 푸르고,
蒲萄带麴红(보도대곡홍). 포도주는 누룩이 붉다.
相逢不令尽(상봉불령진), 서로 만나서 다 마시지 않는다면,
别後为谁空(별후위수공). 이별한 뒤에 누구와 다 마실까?
对酒但知饮(대주단지음), 술을 대하면 마실 줄만 아니,
逢人莫强牵(봉인막강견). 사람을 만나서는 억지로 이끌지 마소.
倚炉便得睡(의로편득수), 화로에 의지하면 곧 잠들고,
横瓮足堪眠(횡옹족감면). 어지러운 술동이로 족히 잘 수 있네.
有客须教饮(유객수교음), 손님이 있으면 모름지기 마시라고 가르치지만,
無钱可别沽(무전가별고). 돈이 없으면 술을 사려고 하지 마소.
来时长道贳(내시장수세), 올 때마다 술을 빚내야 하니,
惭愧酒家胡(참괴주가호). 오랑캐 술집인 것이 부끄럽네.
<五斗先生传>
오두선생이란 사람은 술의 덕으로써 인간세상에서 즐긴다네. 술로써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천을 따지지 않고 가고, 가서는 반드시 술에 취하고, 취한다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잔다네. 술에 깨면 다시 일어나 술을 마신다네. 항상 한번 마시면 다섯 말을 마시니 이러한 까닭에 오두선생이라 부른다네. 선생은 고민을 하지 않고, 말도 적고, 세상의 인의가 후덕하거나 얇은 것을 모른다네. 갑자기 가거나 갑자기 온다네.
그가 움직이면 하늘같고, 그가 조용히 있으면 땅 같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의 마음을 얽어맬 수 없다네. 항상 말하기를, "세상은 대체로 볼 수 있지만 인생은 어떻게 양성하나? 그런데 혜강은 자신의 이론을 저술했는데 그의 일생이 왜 곤궁하였나? 그런데 완적은 통곡하였다. 그러므로 어리석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성인이 보인 행동이다." 마침내 그의 뜻대로 행하지만 그는 갈 곳을 모른다네.
有五斗先生者, 以酒德游於人间. 有以酒请者, 無贵贱皆往, 往必醉, 醉则不择地斯寝矣. 醒则复起饮也. 常一饮五斗, 因以为號焉. 先生绝思虑, 寡言语, 不知天下之有仁义厚薄也. 忽焉而去, 倏然而来. 其动也天, 其静也地. 故萬物不能萦心焉. 尝言曰:「天下大抵可见矣. 生何足养? 而嵇康著论; 途何为穷? 而阮籍恸哭. 故昏昏默默, 圣人之所居也.」遂行其志, 不知所如.
우리와 같은 일반인이 제아무리 술을 많이 마시고 잘 마신들 명성이 날리는 만무하고, 단지 유명인사의 행동거지에 술이 가미되어 더욱 기이하고, 풍류있고, 운치있는 일화로 꾸며져서, 그를 더욱 부풀리게 하는 것은 아닐까? 술은 이상한 물건이어서 화기가 있기에 술만으로는 사람을 망치거나 대사를 그르치게 하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어설픈 술꾼은 이를 마음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술을 앞에 놓고, 평생 술과 얽혀 지낸 왕적의 일생을 찬찬히 보면서, 술을 어떻게 다뤄야 자신의 목표와 명성을 얻을 수 있을 지, 다신 한번 자신에게 되묻기를 바란다.
왕적(585년~644년)은 수말당초의 사람으로, 자가 무공(無功), 호가 동고자(東皐子), 산서성 강주(絳州) 용문(龍門: 지금의 산서성 河津縣) 사람이다. 그는 수대에서는 비서성정자(秘書省正字)를 지냈고, 초당(初唐)에서는 대조문하성(待詔門下省)을 지냈고, 뒤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 동고촌(東皐村)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그는 수말당초의 유명한 학자이자, 왕발(王勃)의 조부인 왕통(王通)의 동생이다.
◇ 술 담는 용기 |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박학다식하였으며 총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수 개황20년(600년)에 15살의 나이로 수도 장안으로 유력하여 조야의 대신인 양소(楊素)을 알현하니, 자리에 있던 공경대부들이 모두 그를 ‘신동선자(神童仙子)’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후 대업원년(605년)에 효렴에 응시하여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여 비서정자를 제수받았지만 조정에 들어가 근무하기를 원치 않아서 병을 핑계로 고사하고, 다시 양주육합현승(揚州六合縣丞)을 제수받았다. 그런데 그는 ‘술을 좋아하여 정무에 방해를 주었고(以嗜酒妨政)’, 당시는 또한 세상이 혼란하였기에 그는 마침내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以嗜酒妨政’하였다는 것은 당시에 술로 인해 탄핵을 받아서 관직을 그만 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 탄식하여 “온 세상을 법으로 옭아매니,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 안녕을 도모할 것이다(網羅在天, 吾且(혹은 將)安之!)”라고 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마을에 중자자광(仲長子光: 자광은 혹 子先이라고도 함)이란 은자가 있었는데, 이 은자는 처자식이 없었고, 오로지 이록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왕적은 그의 참됨을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항상 그와 가까이 지냈는데, 그는 벙어리였기에 말을 한마디로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 술을 나눌 때는 아주 기뻐하였다. 집안에 밭이 16이랑과 노비 몇 명이 있었고, 기장을 심어 봄과 가을에 술을 담고, 오리와 기러기를 기르고, 약초를 심어서 자급자족했다.
◇ 술 주병 |
당 고조 무덕(武德)8년(625년)에 조정에서 이전 왕조에서 벼슬한 사람을 초빙하여 대조문하성을 제수받았다. 관에서 날마다 술 3승을 주었는데, 왕적의 동생 왕정(王靜)이 황궁의 금위관(禁衛官)이 되어, 왕적에게 “대조의 일이 즐겁습니까?”라고 물었다.
왕적이 대답하여 “대조의 봉록이 아주 낮다고 하더라도 좋은 술 3승인 것이 아쉬울 뿐이네.”라고 말했다. 시중 진숙달(陳叔達)이 이 말을 듣고 날마다 술 한말을 주었는데, 그리하여 당시에 그를 두주학사(斗酒學士)라고 하였다.
당 태종 정관(貞觀)초에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다시 관직을 구했다. 당시 그는 태락서사(太樂署史) 초혁(焦革)의 집안이 좋은 술을 잘 담근다는 말을 듣고, 어렵게 태락승(太樂丞)이 되었다. 초혁이 죽은 뒤에도 그의 처가 술을 계속 보내줬는데, 1년이 지나서 또 초혁의 처가 죽자, 왕적은 “하늘이 나에게 좋은 술을 맛보지 않게 하는구나!”라고 하고서, 관직을 그만두었다.
그는 초혁의 술주조법을 연구하여 ≪주경≫을 짓고, 또한 두강(杜康) 의적(儀狄)이래 좋은 술을 구하여 ≪주보≫를 지었다. 이순풍(李淳風)이 그를 보고 “자네는 술문화에 있어서 남사씨와 동호라네(君酒家南․董也)”고 하였다. 그의 집 동남쪽에 반석이 있는데 두강사를 세워서 그를 제사지내고, 스승으로 받들었으며, 초혁을 그의 짝으로 모셨다. 유령의 <주덕송>을 따라 <취향기>를 지었고, 그의 주량은 오두(五斗)를 마셔도 몸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술로써 초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천을 따지지 않고 갔다고 한다.
왕적의 일생을 보면, 그는 먼저 유가의 학설보다는 도가의 ≪주역≫,≪노자≫,≪장자≫ 등의 서적을 좋아했고, 술을 좋아했지만 60평생을 살았으며, 특이나 그가 관직을 서너 번 나갔다는 것은 그의 재능을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술에 관한 훌륭한 저작을 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결국 현세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직분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아가 그 결과물로써 판단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아래에는 참고로 그의 시와 <오두선생전>을 소개하고자 한다.
<취한 뒤(醉後)>
阮籍醒时少(완적성시소), 완적은 술이 깨어있을 때가 적고,
陶潜醉日多(도잠취일다). 도연명은 취해 있는 날이 많네.
百年何足度(백년하족도), 백년을 어찌 만족하며 보낼까?
乘兴且长歌(승흥차장가). 흥에 기탁하고 크게 노래부르면 될 뿐.
<혼자 술을 마심(独酌)>
浮生知幾日(부생지기일), 뜬구름같은 인생이 몇 날인지 알기에,
無状逐空名(무상축공명). 쓸데없는 명성을 쫓는 것을 형용할 수 없다오.
不如多酿酒(불여다양주), 술을 많이 빚어,
时向竹林倾(시향죽림경). 때때로 대나무숲에서 기울이는 것만 못하네.
<술집을 지나며(过酒家)>五首(또는 술집벽에 쓰다(题酒店壁)라 함
洛阳無大宅(낙양무대택), 낙양에는 큰 저택이 없고,
长安乏主人(장안핍주인). 장안에는 주인이 부족하다네.
黄金销未尽(황금소미진), 황금을 다 없애지 않으니,
只为酒家贫(지위주가빈). 술집은 가난할 뿐.
此日长昏饮(차일장혼음), 이날은 오랫동안 정신없이 마시니,
非关养性靈(비관양생령). 성령을 양성하는 것과 관련없네.
眼看人尽醉(안간인진휘), 눈을 들어보니 인간세상이 모두 취했으니,
何忍独为醒(하인독위성). 어찌 차마 홀로 깨어 있을 수가 있을까!
竹葉连糟翠(죽렵연조취), 죽엽청주는 술지게미가 푸르고,
蒲萄带麴红(보도대곡홍). 포도주는 누룩이 붉다.
相逢不令尽(상봉불령진), 서로 만나서 다 마시지 않는다면,
别後为谁空(별후위수공). 이별한 뒤에 누구와 다 마실까?
对酒但知饮(대주단지음), 술을 대하면 마실 줄만 아니,
逢人莫强牵(봉인막강견). 사람을 만나서는 억지로 이끌지 마소.
倚炉便得睡(의로편득수), 화로에 의지하면 곧 잠들고,
横瓮足堪眠(횡옹족감면). 어지러운 술동이로 족히 잘 수 있네.
有客须教饮(유객수교음), 손님이 있으면 모름지기 마시라고 가르치지만,
無钱可别沽(무전가별고). 돈이 없으면 술을 사려고 하지 마소.
来时长道贳(내시장수세), 올 때마다 술을 빚내야 하니,
惭愧酒家胡(참괴주가호). 오랑캐 술집인 것이 부끄럽네.
◇ 술 주병 |
오두선생이란 사람은 술의 덕으로써 인간세상에서 즐긴다네. 술로써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천을 따지지 않고 가고, 가서는 반드시 술에 취하고, 취한다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잔다네. 술에 깨면 다시 일어나 술을 마신다네. 항상 한번 마시면 다섯 말을 마시니 이러한 까닭에 오두선생이라 부른다네. 선생은 고민을 하지 않고, 말도 적고, 세상의 인의가 후덕하거나 얇은 것을 모른다네. 갑자기 가거나 갑자기 온다네.
그가 움직이면 하늘같고, 그가 조용히 있으면 땅 같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의 마음을 얽어맬 수 없다네. 항상 말하기를, "세상은 대체로 볼 수 있지만 인생은 어떻게 양성하나? 그런데 혜강은 자신의 이론을 저술했는데 그의 일생이 왜 곤궁하였나? 그런데 완적은 통곡하였다. 그러므로 어리석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성인이 보인 행동이다." 마침내 그의 뜻대로 행하지만 그는 갈 곳을 모른다네.
有五斗先生者, 以酒德游於人间. 有以酒请者, 無贵贱皆往, 往必醉, 醉则不择地斯寝矣. 醒则复起饮也. 常一饮五斗, 因以为號焉. 先生绝思虑, 寡言语, 不知天下之有仁义厚薄也. 忽焉而去, 倏然而来. 其动也天, 其静也地. 故萬物不能萦心焉. 尝言曰:「天下大抵可见矣. 生何足养? 而嵇康著论; 途何为穷? 而阮籍恸哭. 故昏昏默默, 圣人之所居也.」遂行其志, 不知所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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