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삼국유사의 현장기행

醉月 2013. 7. 28. 01:30

삼국유사의 현장기행

저자 : 이하석

 차례

 ▣ 책머리에


 ▣ 국위 인각사-민족사학 태동 성지
 ▣ 울산 처용바위-처용무는 토속 열병퇴치 춤
 ▣ 울산 영취사지-신라인의 익살과 기행
 ▣ 월성 여근곡-관능적인 명당 설화
 ▣ 고선사지-원효대사와 뱀복의 인연설화
 ▣ 부산성지-득오와 죽지랑의 우정
 ▣ 남산 삼화령-안민가의 유적지
 ▣ 선도산-신라 건국신화의 유적지
 ▣ 나정과 알영정-신라개국의 산실
 ▣ 두두리들과 신원사지-비형랑 설화
 ▣ 서출지-보름약밥의 유래 간직한 곳
 ▣ 감은사지와 대왕암-죽어서도 나라 지킨 문무왕
 ▣ 흥륜사지-이차돈이 순교한 절
 ▣ 구지봉-가락국 수로왕의 출생지
 ▣ 김해-국제결혼의 현장
 ▣ 모례 샘과 도리사-고구려접경 신라불교의 전래지
 ▣ 운제산 오어사-불교 대중화운동의 산실
 ▣ 아진포-석탈해 설화의 유적지
 ▣ 알천-박혁거세가 왕으로 추대된 곳
 ▣ 도림사-동화 같은 경문왕의 비밀
 ▣ 남천-신라인의 광명사상을 끌어안은 하천
 ▣ 가슬갑사지-화랑도 '세속오계'의 전수장
 ▣ 불국사와 그 주변 절터-신라인의  이상세계인 불국토 신라의 궁성들-흔적조차 없는 천년영화
 ▣ 치술령-애절한 그리움 깃든 산
 ▣ 사천왕사지-문무왕의 자주의지 깃든 호국가람
 ▣ 망덕사지와 비파암-지혜로 위난넘긴 신라인이  얼 담긴 곳 포석정-신라왕실의 영화와 패망의 상징
 ▣ 굴불사 사면석불-화엄세계의 염원
 ▣ 호원사지-호랑이와 인간의 슬픈 사랑 전설
 ▣ 설총 유허지-이두를 집대성한 석학의 성장지
 ▣ 진흥왕릉-신라 최대의 영주를 모신 곳
 ▣ 무열왕릉과 재매정-'화장 해프닝'의 장소
 ▣ 분황사-광덕과 엄장의 설화
 ▣ 황릉사지-신라 최대의 사찰
 ▣ 동화사-점을 쳐서 정해진 절의 위치
 ▣ 견훤의 출생지-지렁이의 건국설화
 ▣ 백률사-순교자 이차돈
 ▣ 밀교 유적지-금광사
 ▣ 홍효사지-효도의 열매인 돌종에 얽힌 설화
 ▣ 현풍 비슬산-관기와 도성의 만남


책머리에

신화와 설화, 역사적 사실들이 남아 있는 현장 찾기에 몰두...

  삼국유사의 현장기행은 애초 크게 기대를 하지 않고 시작했다. 삼국유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곧잘 대비된다. 그런 만큼 그것은 정사보다는 야사적인 성격을 가진, 그야말로  '유사'적인 기록이어서, 그 내용에 현실감이 없을 거라는 지레짐작이 그 첫 이유였다. 또한  그것이 기술된 것은 고려 중엽이지만, 그 내용은 대부분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적 것이어서 그  시차가 엄청났고,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오는 비현실감의 폭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나는 그것이 엄연히 현실을 토대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했고, 아직도 그 숨결이 미약하나마 남아있는 것을 느끼고, 만져 볼 수 있었다는 데서  흥분을 느끼고 취재 열기를 더해 갔다.

 

그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해보라,  아득한 천년 전에, 또는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있었던 신화와 설화, 그리고 역사적인 사실들이  지금 남아있는 현장을 토대로 이루어졌고, 그 현장감을 지금도 느낄 수 있다는 것! 이보다 더  놀랍고 감동적인 것이 무엇이겠는가.   삼국유사의 현장기행은 '삼국유사의 현장'이란 제목으로 82년 한 해 동안 당시 내가 몸 담고  있던 신문사(대구매일신문)의 지면에 연재됐던 기획물로 인해 이루어졌다. 그때 나는 매주 한  번씩은 경주와 그 일대를 중심으로 한 현장찾기에 몰두했다. 비록 시간이 모자라고, 또 나  자신이 천학비재하여 그 취재가 거칠기 짝이 없었지만, 나는 현장에 남아있는 이야기들이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는 데 위기감을 느끼면서, 현재 남아있는 것만이라도 수습해놓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것들을 더듬고 다녔다.

 

그 취재노트를 토대로 40여 회를 연재했는데, 그것은  방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삼국유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나마, 그리고 그  현장들의 한 모퉁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산업화의 물결이 밀려들기 전, 농경사회의 자취가 많이 남아있던 때까지만 해도, 그 유적들과  설화들은 시간에 의해 다소의 변질은 있었어도 그 자취만은 비교적 알아볼 수 있게 현장과 그  주민들의 기억속에 보전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농경문화가 무너지고 산업화 바람이  불어닥치면서 그것들은 급속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일연이 취재했던 고려 중엽 당시만 해도  전해오던 설화와 역사적 사실의 현장들의 변화가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기술됐지만, 60년대  이후의 변화는 너무나 극심해서, 그야말로 1천여 년간의 변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것들의 파괴와 사라짐의 정도가 심했다. 많은 유적들이 개발의 거친 손과 기계음 속에 묻혀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다.

 

구전되어오던 관련 설화와 전설들도 새것들을 좇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거의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 바뀌어진 현장을 돌아보고, 이제는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것을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내서 묻고, 확인하는 걸로 한 해를 보냈다.   그 후 나는 또 바쁜 일들에 묻혀 그 일에서 떠났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올해 초에  문학평론가 이경호형으로부터 그것의 출판제의를 받았다. 그래서 다시 그 현장들을 빠른 시간  동안에나마 확인할 기회가 주어졌다. 10여 년의 세월 동안 그 변화가 다시 심했음을 볼 수  있었다. 있었던 것이 사라져버리기도 했고, 문화재 보호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포장되어  생경하게 드러난 것들도 있었다. 그 변화들을 다시 취재해서 보충했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이  만들어졌다.   이 책은 요즘 부쩍 많아진 문화유적답사기와 비슷한 면도 있으나, 앞서 말했던 이유로 현장  답사가 이루어진 만큼 단순한 고적답사와는 다른 각도에서 취재가 이루어졌음을 느낄 수  있으리라.

 

무엇보다 그것은 생성하고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내어 확인하는  일이며, 그것을 통해 오늘의 우리 존재의 위치를 살피는 데 뜻이 있었다. 비록 나 자신이  역사전공자도 아니고, 그 분야에 밝지 못해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는 데 정밀하지 못한 점은  있지만, 현장의 상태를 가능하면 보이는 대로 담으려고 노력했다.    이 현장기행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경주의 윤경렬선생은 남산 일대의 답사에  큰 도움을 주셨다. 몇 군데는 함께 등산도 하면서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셨다. 각 지역  향토사학자들의 도움도 켰다. 사진은 더러 자료사진들을 입수하기도 했지만, 내가 최근 다시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찍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군위 인각사__민족사학 태동 성지

일연이 만년에 살다가 입적한 곳
  삼국유사는 한국민족의 원형적인 세계를 담은 책이다. 그 세계는 우리의 무의식의 심층에 짙게  깔려 끊임없이 솟구치는 샘과 같은 잠재의식의 세계이기도 하다. 삼국유사는 우리의 강토 곳곳에  널려있는 가장 한국적인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 삶 속에는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종교와  풍속과 정신은 물론 조상들의 숨결과 노래가 담겨 있다. 그 현장들을 찾아 보는 것은, 일연의  기록을 우리의 국토 속에서 음미하는 일이 되며, 나아가 천 년의 세월을 이어서, 아득한 신라적  현실과 오늘의 현실을 맞추어 보는 일이 될 것이다.   삼국유사의 저자가 일연스님임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그의 유적지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이는  드물다.

 

일연이 만년에 살았으며 지금도 그를 기리는 비와 부도(이름난 중의 유골을 보관한  탑)가 있는 곳이 대구의 지척에 있다는 것을 알면 놀랄 사람이 많을 것이다.   군위군 고로면 화전동에 위치한 인각사가 그곳이다. 대구에서 군위쪽으로 가다가 신령에서  의성 쪽으로 방향을 틀어, 화남을 지나 화수리에 오면 오른쪽으로 갑자기 협소한 도로가 강을  끼고 나타난다. 화산에서 고로면으로 가는 좁은 산길을 1km쯤 달리면 길가에 선 고색창연한 절이 보인다. 절의 앞뒤로 산수가 수려하고, 절 앞을 흐르는 중천과 중천을 끼고 솟은 절벽인  학소대의 풍광이 아름답다. 절은 10여 년 전만 해도 본당과 요사(절의 중들이 거처하는 집)뿐  황량하기 짝이 없었으나 80년대 중반에 들어 중창(낡은 건물을 고쳐짓는 것)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정비가 제법 되어 있는 셈이다. 본당인 극락전과 중창된 강설루가 탑과 석등이 있는  마당을 사이하여 서있다. 극락전 옆에는 명부전(절의 십왕을 모셔놓은 전각)이 있다. 명부전 옆  새로 단장된 비각 속에는 일연의 비가 안치되어 있다.

 

버려진 성지
  일연은 말년(1284년)에 인각사에 들어왔으며, 이곳에서 구산문도회를 성황리에 열기도 했다. 그가 이 절에서 죽은 것은 1289년으로 84세였다.   그는 고려 중기의 선승으로 지눌과 진각 두 국사의 뒤를 이어 발흥기에 들어선 선종을 크게  발전시킨 승려이다. 그의 고향은 장사군(현 경산시)이다. 1206년에 태어난 그는 9세에 출가하고,  22세에 승과에 급제한다. 44세에는 남해의 정림사에 주석(주지의 자리에 오름)하고 56세에 왕의  부름을 받아 서울로 올라간다. 그때부터 그의 선풍과 명성은 전국에 드날리기 시작했으며,  78세에는 국존의 책봉을 받는다.

 

그는 만년에 오랫동안 운문사에 주석하지만, 국존이 되어  서울에 잠시 있었으며, 곧 부모봉양을 내세워 인각사에서 은거했다.   그는 저술에서 특히 정력적인 업적을 남겼다. 비문에 의하면 "어록" 2권, "게송잡저" 3권,  "중편조동오립" 2권, "조국" 2권, "대장순지록" 3권, "제승법수" 7권, "조정사원" 30권, "선문염송" 30권 등 저작 또는 편찬한 저술이 1백 권이 넘는다.   그러나 정작 그의 본령인 불서는 거의 전하지 않고, 다만 비문에도 적혀있지 않은  삼국유사만이 전해온다. 비문을 서술한 민지가 삼국유사를 그의 저술 속에 넣지 않은 것은  삼국사기적인 정사의식 때문인 듯하다. 이 책에 수록된 설화들이 황당 무계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삼국유사가 없었다고 가정해볼 때 이러한 유교적이고 주체의식을 잃은  사대주의적 역사가 진실이 아님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돋보이는 주체성
  삼국유사는 일연이 70세 이후 6__7년 동안에 지어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책은 이보다 약  1백 40년 전에 간행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빠진 설화와 불교부문 설화를 보전하려는 의도로  집필된 것이나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눈으로 시작하겠다는 주체성이 한결 돋보인다. 이 책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의 초창기를 아무런 꾸밈없이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으며 무엇보다 삼국사기에  없는 단군의 전설을 실을 만큼 주체적이다. 이와 함께 우리 민족 고유의 신앙과 이에 얽힌  설화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특히 향가 14수의 수록은 이 책의 진가를 결정적으로 마련한다. 무엇보다 삼국유사가 주목받는 것은 풍부한 인용과 까다로운 고증에 의해 객관적으로  저술되었으며, 그만큼 당시 사료가 풍부하게 깃들어 있는 점이다.  

 

실로 이 책은 역사, 언어, 종교, 신화, 민속, 국문학 등의 보고이며 귀중한 연구서적인  것이다.   인각사에 있는 보각국존비는 그가 입적한 지 5년이 되는 1295년(충열왕 21년)에 세운 것이다. 민지가 글을 지었으며 왕희지의 글자를 모아서 비문을 새겼다. 당초 높이는 2m, 너비는 1m,  두께가 5Cm인 편마암 비석이었으나 지금은 인위적인 마멸로 그 원형을 알아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비석이 마멸된 것은 "옛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갈 때 이 비석에 새긴 글자  중 마음에 드는 글자를 떼내어 갈아마시면 급제한다는 미신 때문에 뜯겨나간 것"이라고 이 절의  한 스님은 설명한다. 이런 무지한 짓은 못난 후손들의 근본을 팔아먹는 몰주체적인 행동의  사례인 듯 여겨져 서글픔을 금할 수 없게 만든다. 그의 3층 8각 부도인 정조탑은 원래 절 동쪽  2km 떨어진 곳에 있던 것을 절 안에 옮겨다놓은 것이다.
 

즐겁던 한 시절 자취없이 가버리고,

시름에 묻힌 몸이 덧없이 늙었으라  

한 끼 밥 짓는 동안 더 기다려 무엇하리  

인간사 꿈결인 줄 내 인제 알았노라
 

일연의 사후 7백 년 되던 해(1985년)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가 인각사 입구에 세운  일연시비에 새겨진 시이다. 이 시는 삼국유사 권3의 '낙산의 두 성인인 관음, 정취 보살과  조신조'에 일연이 붙인 것으로, 시의 앞부분에 해당된다. 일연은 이 시를 짓게 된 이유로 "지금  모든 사람들이 속세의 즐거움만을 알고서 기뻐하며 애쓰고 있으나, 이것은 단지 깨닫지 못한  까닭"이라고 말했다. 꿈과 현실은 확연히 구분되어지지 않고 뒤섞여 있다. 조신은 승려였으나 한  여자를 사랑하여 파계하고 살림을 차리지만, 세파의 고통에 휩싸인다. 그러다가 깨어보니,  그것이 한순간의 꿈이었다. 삼국유사가 그리고 있는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일연은 꿈과 현실이  모두 물거품 같은 것으로, 그것을 아는 것은 깨달음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인각사는 그 깨달음의  중심이다. 이곳에서 그는 우리 삶의 꿈과 현실을 삼국유사라는 것으로 얽어 짰던 것이다. 이  시의 뒷부분은 다음과 같다.

 

착한 행실 위해서는 마음을 먼저 닦을지니
미인을 그리는 꿈 해로운 꿈일러라
가을 날 맑은 밤에 무슨 꿈을 꿀거나
때때로 눈 감아 청량에 이르리.

     

울산 처용바위__처용무는 토속 열병퇴치 춤

설화 속 신비함 간직한 성지
  봄빛 머금은 바닷물이 띄운 돌섬 하나가 천 년의 꿈을 아직도 혼곤한 봄기운 속에 수줍게  떠올린다. 옛 개운포, 경남 울산시 황성동 세죽마을 앞바다에 있는 처용바위,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이 작은 섬은 그 신성한 위력을 잃지 않고 바다 속의 명당으로 여전히 버티고 있다.  

 

10여 년 전, 정확하게는 1982년 삼월 중순에 찾아보았던 처용암 인근의 풍경이다. 당시  처용암이 있는 바닷가로 가는 길은, 울산시내에서 벗어나면 이내 비포장도로로 세죽마을까지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올봄에 그 생각을 하면서 다시 들렀으나, 너무나 달라진 풍경에 넋을  잃어버릴 지경이었다. 세죽마을로 가는 길은 말끔히 포장되었으나, 웬일인지 세죽마을 전체가  폭격을 맞은 것처럼 온통 부서져 있었다.

 

마을 복판, 처용암이 바로 지척인 바닷가에 있는  재실(무덤이나 사당의 옆에 제사의 용도로 지은 집) 황죽당도 보기에 안스러울 정도로 황폐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85년 12월 8일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와 울산문화원이 공동으로  세운 처용가비가 생경하게 서 있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투명해 밑바닥까지 환히  보이던 바닷물도 극심한 오염으로 부우여니 흐려 시궁창 같았다.    세죽마을은 울산 시가지의 남쪽 10여 리 바닷가에 위치한다. 울산정유공장을 지나  석유화학공단 못 미쳐 왼쪽으로 빠져 5분 정도 달리면 닿는다. 이곳은 신라 49대 헌강왕 때의  처용설화의 현장이다.

   

용신을 숭배하는 신라인의 미륵신앙
  헌강왕은 바다에서 놀다가 돌아오는 도중 이 근방에서 쉰다.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  길을 분간 못한다. 왕이 일관에게 물으니, "동해 용의 짓입니다. 무언가 베푸십시오"라고 아뢴다. 용을 위해 절을 짓겠다고 약속하자 구름은 걷히고 안개가 사라진다. 개운포라는 이름은 이에  연유한다. 그때 동해 용이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춘다. 왕은 그중 한  아들을 데리고 서울(경주)로 온다. 용과의 약속대로 영취산(현 문수산)동쪽 기슭에 망해사(또는  신방사)를 짓는다. 데리고 온 용의 아들 이름은 처용이라 짓고,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아주며 급간의 벼슬을 준다.   처용 아내의 미모는 뛰어났다. 역신(천연두 전염병을 다스리는 귀신)이 그녀에게 반해  사람으로 변하여 동침한다. 처용이 돌아와 잠자리에 누운 두 사람을 본다. 그는 곧 노래하고  춤추며 나간다.

 

서라벌 밝은 달에/밤 이슥히 노니다가/들어와 자리를 보니/가랭이가
넷이네/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것인가/본디 내것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하리
 

이에 역신이 그 앞에 꿇어앉아 빈다. "나는 부인에 혹해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도 노하지  않는군요. 훌륭합니다. 이제부터는 당신의 모습을 그린 화상만 봐도 결코 문 안에 들어가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그후 사람들은 처용의 형용을 대문에 붙여 삿된 귀신을 물리쳤다.   이상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설화이다. 처용설화는 그 극적인 구성 때문에 학계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에 있어서도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처용이 실제인물이냐 허구의  인물이냐에서부터, 처용은 신인가, 인간인가가 역사학자와 신화민속학자들 간에 분분한  얘깃거리가 되어 왔다. 또한 처용설화의 마지막 부분이 패배 또는 체념의 자세인가 달관의  자세인가도 흥밋거리가 되고 있다. 일부 사학자들은 처용을 외래인, 구체적으로는 아라비아인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남쪽 지역에는 일찍부터 남방제국과의 교역이 있었다. 김해 가락국 김수로왕의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과의 국제결혼은 그 한 사례이며, 신라 45대 신무왕 때에 남해해상을  주름잡았던 장보고의 해상무역 활동에도 아라비아 계통의 무역상들이 등장한다. 신화나 설화의  주인공들이 외래인이 많다는 점에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꽤 설득력을 갖는다. 한편 이 설화를  불교와 무교의 두 갈래 입장에서 해석하는 경우도 만만치 않다.

이 입장에서는 특히 용신을  숭배하는 신라인의 미륵 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불력 빌어 질병 퇴치
  처용설화는 삿된 귀신을 쫓고 역병신을 퇴치하는 신앙이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용이 왕  앞에서 춘 춤은 무당춤의 일종인 처용무로 발전했다. 그 춤은 반신반인의 모양을 한 처용의  얼굴을 문에 붙이는 습속과 더불어 고려와 조선을 거쳐 최근까지 지속되어 왔다.   이 설화의 중요한 동기가 되는 용은 신라인의 용숭배와 관련된다. 신라인의 용숭배는 초기  때부터 보이며, 문무왕 때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그 전에도 화랑도 조직의 이념 속에는 용  신앙이 깊었다.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다.   불교를 국교로 하던 신라로서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호국의 신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설화에  나오는 춤은 그러니까 마를 퇴치하는 용의 한 표현인 셈이다. 역신은 당시의 유행성 악질 열병의  의인화로 나타난 것이다.   당시 유행성 악질 열병을 치료하는 데는 유치한 단계에 있던 의약법보다 무속적인 요법을 더  믿었을 것이다. 역신이 처용의 아내를 능욕했다는 것은 역병에 걸린 현실적인 사실을 설화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성행함에 따라 불력에 의해 치료하려는 노력이 발전해낸 것이 '처용식  치유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른다면 왕이 개운포에서 맞았던 용과 그 아들은  실은 그 지역의 무당들인 셈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처용무는 개운포지방에 전승되어 오던  토속적인 열병퇴치춤이었던 것이 우연하게 헌강왕의 눈에 들어 이에 가호를 받아 전국적인  것으로 확산된 것'이라는 김사엽 씨(전 계명대 교수)의 의견에 수긍이 간다.

   

공해지대가 된 마을 수호지
  이러한 구구한 해석들에도 불구하고 처용설화는 그 신비성을 여전히 갖고 있다. 신라인들은  관념적(불교, 무교 등)인 것을 구체화시키는 탁월한 상상력을 가졌음을 이 설화는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인간적인 것을 인간화시켜 수용한다. 용신이라는 신적인 존재를  처용이라는 인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떨어진 처용은 아내의  부정이라는 인간적 한계상황에서 고민하다 끝내 용서하는 도덕적인 인간의 한 면모를 드러낸다.  

 

이처럼 "신의 인간화에서 다시 도덕적인 인간이란 새로운 자리의 획득(이것이야말로 역신을  감동시킨 또다른 인간의 신격화이다)이 이루어지는 원리야말로 신라 예술의 새로운 인간형에의  관심의 발로"라고 홍경표 교수(효성여대)는 말한다. 처용에 대한 이러한 면모는 현대문학에  그대로 수용되어 서정주, 신석초, 김춘수 등의 시인들의 시 속에도 그 불가해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처용바위는 지금도 이곳 세죽마을의 성지로 보호되고 있다. 10여 년 전에 필자가 이곳에  들렀을 때 이 마을에 살면서 처용바위 근처에서 미역을 따서 애들 학비를 마련하는  이근생할머니(당시 58세)는 "이 섬은 보통 섬이 아니니까 아예 섬에 올라설 생각을 말라"고  경고했다. 이 섬은 마을 주민들에 의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으며, 아무도 섬에 오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해마다 정월 보름에는 섬이 바로 보이는 마을 앞 도선장에 있는 사당에서 이 바위에  제사를 지낸다.   이 섬의 주민들은 처용바위 주변의 바다에서 미역을 따고 꼬막조개를 채취하며, 굴양식을 하는  어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이 바위가 용왕의 수호지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선창에서 만난 한 노인은 "처용바위에 정성을 안 들이면 마을이 망한다"고까지 말했다. 최근  들어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을은 망하고 말았다. 그 '무엇'은 기실 바로 공해이다.  

 

처용바위가 있는 이곳 바다 주위에는 70년대 이후 울산공단이 집결, 그 오염이 심했다. 서쪽의  석유화학공단과 남쪽 세죽마을 건너편의 온산공단의 폐수가 이 일대의 바다를 더럽혔다. 그래서  70년대 후반부터 이 마을 주민들은 폐수를 정화해 달라고 투쟁했다. 덕분에 80년대 중반 무렵에  잠깐 동안이나마 물은 다시 맑아졌지만 주변의 풍광은 공단이 뿜어내는 시커먼 연기 속에서 옛  자취를 잃어갔다. 그리하여 끝내 황성동 세죽마을을 비롯한 이 일대가 공해이주단지로 정해져  주민들은 보상금을 받고 뿔뿔이 흩어져 가고 있다. 천여 년을 처용암과 함께 생활했던 마을들이  사라져 버리고 있다. 썩은 물에 용이 살 리 만무하니, 처용암도 따라서 빛이 바래고 만 셈이다. 다만, 처용암을 살려야한다는 뜻있는 이들의 주장이 나오고 있고, 이에 따라 울산시가 처용암과  재실 등을 보전한다는 약속을 했지만, 아직도 그 예산조차 잡히지 않고 있다.

     

울주 영취사지__신라인의 익살과 기행

  신라 31대 신문왕 때 재상 충원이 장산국(동래로 추정)의 온천에서 목욕하고 돌아오다가  들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누가 매를 놓아 꿩을 쫓는 광경을 보았다. 꿩은 멀리 날아갔다.   찾아가보니 굴정현 관청 북쪽의 우물가 나무 위에 매가 앉아 있었다. 꿩은 우물 속에 있었다. 우물은 핏빛이었고, 꿩은 두 날개를 벌려 새끼를 안고 있었다. 매는 그 정경을 보고 불쌍히 여긴  듯 감히 꿩을 잡지 않았다. 충원은 측은한 느낌이 들어, 왕에게 아뢰어 현의 청사를 옮기고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 삼국유사 탑상편에 나오는 영취사의 내력이다.

   

영취사의 위치
  영취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 위치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굴정이라는 지명도  남아있지 않다. 이 이야기의 근거지는 울산 남쪽 8km 지점에 있는 문수산(옛 영취산)이다. 문수산 동쪽 기슭에는 영취마을(울산시 청양면 율리)이 있다.   울산에서 부산 가는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10km쯤 가면 처용설화와 관련이 있는 망해사 입구가 나온다. 이를 지나면 바로 오른편으로 문수산 입구가 있다. 입구의 마을이 율리 마을의  초입이다. 40여 호의 집들이 산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율리는 지금도 주민들에 의해  영취마을이라 불리는 데, 바깥 영취와 안 영취 마을이 문수산에서 뻗어 내린 낮은 뫼뿌리를  가로지른 낮은 고개를 사이하여 분리되어 있다. 안 영취 마을 앞의 논바닥에는 부서진 돌탑의  잔해가 흩어져 있다.   이곳이 영취사지가 아닌가 한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곳이 영취사지라는 근거는 있다. 이  마을에 사는 노인들은  "젊었을 때 마을 노인들로부터 이곳이 영취사의 절터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말한다. 마을 이름을 옛부터 '영취'라고 불러온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이 마을을  지나 문수산 중허리를 넘는 고개가 있다. 산 중턱의 문수암을 지나 고개를 넘으면 작동마을과  굴화(범서면 굴화리)로 연결된다. '굴화'라는 이름은 '굴정'이라는 이름과 첫자가 같다.

   

인간으로 화한 문수보살
  삼국유사 피은편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얘기가 이 고개 위에서 벌어진다. 신라 38대  원성왕 때 영취사에 연회라는 스님이 있었다. 그는 항상 법화경을 읽으며 정진했다. 그의 도는  높아 뜰의 연못에는 언제나 연꽃 두어 송이가 피어 사철 시들지 않았다. 왕이 그 상서로운  소문을 듣고 그를 국사로 삼으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연회는 암자를 버리고 피해 달아났다. 서쪽 고개의 바위를 넘어가노라니 한 노인이 밭을 갈고 있다가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나라에서 나를 벼슬로 얽매려들기에 피해가는 길이오"라고 연회가 대답했다.

 

그러자 노인은  "여기서(이름을) 팔지, 뭘 그리 멀리까지 가서 팔려고 하오. 법사는 이름 팔기가 싫지  않은가보군"하고 빈정댔다. 연회는 모욕감을 느끼며 그곳을 떠났다.   한참 가다가 시냇가에서 한 노파를 만났다. 노파도 역시 어디가느냐고 물었다. 아까처럼  대답하니 노파는 "좀 전에 누굴 만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연회가 노인 얘기를 하자 노파는  그가 바로 문수보살이라고 말했다.

 

이에 놀란 연회가 되돌아가 그 노인 앞에 꿇어앉았다. 그때  노인은 시냇가의 그 노파를 바로 변재천녀의 화신이라고 말해준다. 변재천녀는 영가와 음악을  맡은 여신으로 문수산의 산신으로 떠받들려 오는 신이다. 놀란 연회는 국사 자리에 앉는 것이  신의 배려임을 알고, 영취사로 되돌아가 임금의 부탁을 받아들인다.   이 재미있는 '해프닝'은 현실의식이 짙은 신라인들의 면모를 거리낌없이 보여준다. 주어진  현실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도피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는 반대로 생각하면 이 '해프닝'은  심한 야유와 '아이러니'가 깔려있음을 알게 된다. 연회가 번거로움을 싫어해서 달아난 것은  진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으로 숨기를 원한다면 애초부터 연꽃을 피워 천하게 향기를 뿌리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런 짓은 점잖은 척하면서 실은 이름을 파는 매명 행위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삼국유사는 이 두 가지 뜻을 한 짧은 얘기 속에 포함시킨다.

   

민중불교를 상징하는 남루함
  재미있는 것은 문수보살과 변재천녀의 변장술이다. 문수보살과 변재천녀와 같은 거룩한 성인을  꾀죄죄하고 별 볼일 없는 노인과 노파로 슬쩍 분장시키는 상상력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  상상력 속에는 흡사 민화를 보는 듯한 위트와  아이러니가 넘친다. 이 얘기에서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의 곳곳에는 우스꽝스러운 노인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예외없이 미륵보살이나  관음보살의 화신들이다. 때로는 고매한 도를 지닌 승려들이 남루한 행색과 기이한 장식을 하고  시중에 나타나기도 한다.  

 

경흥국사가 잘 꾸민 말을 타고 호화롭게 대궐로 들어가다가 길에서 한 중을 만나는  이야기(삼국유사 감통편)도 그런 식이다.   이 승려는 남루한 옷에 지팡이를 짚고 마른 물고기를 담은 광주리를 메고 나타난다. 그래서  국사를 시종하는 사람들이 중이 고기를 지고 다닌다고 꾸짖자 그 중은 태연하게 "산 고기를 두  다리 사이에 끼고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 이게 뭐 어때서"하고 대든다. 말을 타고 가는  경흥국사를 비꼬는 말이었다. 이 남루한 중은 실은 경주 남산에 있는 문수보살상의 화신이었다.   

 

신라인들은 이처럼 남루와 익살, 그리고 기행 속에다 성스러움을 감출 줄 알았다. 그것은  귀족불교에서 민중불교로 전환하는 원효 이래의 신라불교의 진면목이기도 했다. 이러한 익살과  기행은 엄숙함보다는 인간적이고 명랑함을 더 숭상했던 신라인들의 삶에 대한 의식이기도 했다.   영취사지로 추정되는 이곳은 현재 절터의 보호상태가 전혀 되어 있지 못하다. 탑은  처참하리만큼 파괴되어 그냥 논가에 방치되어 있다. 탑은 기단(건물의 터전이 되는 받침대)의  터가 넓고 탑 조각들이 거대해 큰 탑이었을 성싶다. 탑은 두 개로 동서에 배치되어 있다. 그  중간에 비가 서 있는 듯싶은 거북돌이 남아 있다. 탑은 조각들을 수습하면 어느 정도 복원이  가능할  듯하다. 그러나 아직 당국에서는 이 탑지의 자리 파악도 않고 있는 데다 남은  유물들마저 논가에 방치한 채 손쓸 엄두를 내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

     

월성 여근곡__관능적인 명당 설화

  대구에서 경주 가는 고속도로를 달려 건천 못 미쳐 아화터널을 빠져나오면 오른쪽의  부산 골짜기에 여자의 성기를 쑥 빼놓은 듯한 작은 산이 앉아 있는 게 보인다. 여근곡이다. 또는  속칭 '음문골', '보지골'로 불리기도 한다. 주소는 경주시 서면 신평2리. 경주 서쪽에 위치하며  건천읍에서 3km 떨어진 곳이다.

   

선덕여왕의 예언
  이 골짜기는 신라 27대 선덕여왕의 '세 가지 일을 미리 알다' 설화와 관계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삼국유사 기의편에 보이는 이 설화는 선덕여왕이 예언한 세 가지 특출한 지혜를 밝힌  것이다. 그중 이곳과 관련되는 얘기는 다음과 같다. 영묘사 옥문지에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개구리들이 모여 3__4일 동안 울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여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여왕은  급히 각간(신라 벼슬의 첫번째로 높은 직책) 알천, 필탄에게 명했다.   "훈련된 정병 2천 명을 데리고 속히 서쪽으로 나가서 여근곡이란 곳을 물어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다. 습격하여 잡아라." 각간들이 명령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 물으니 부산 아래 과연 여근곡이 있었다. 백제 군사 5백명이 거기에 숨어 있었다. 신라군은 곧 그들을 사살했다. 백제 장군 우소가 남산 고개에 숨었으므로 그도 에워싸 사살했다. 또한 백제의 후속부대 1천3백 명이 오는 것도 모두 죽였다. 신기하게 여긴 군신들이 여왕에게  어떻게 개구리를 통해 백제군이 숨어 있는 줄 알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여왕은 "개구리는  성내는 형상이니 군사의 상징이다. 옥문이란 여근이요, 여자는 음인데 그 색은 희고, 흰 것은  서쪽이다. 그러므로 서쪽에 군사가 있을 것을 알았다. 또한 남근은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으므로 쉽게 잡을 것을 알았다"라고 대답했다.  

 

이 에로틱한 풀이를 통해 신라의 전통적인 사상 속에 음양오행 사상이 합류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음양오행 사상은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이다. 이 설화를 통해 보면 이때 이미  우리나라에는 이 사상이 들어와 있었으며, 그것이 널리 쓰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음양오행 사상은 특히 점복과 관계를 깊이 맺으면서 발전되어 온다. 선덕여왕의 이 얘기도  앞날을 미리 점치는 음양오행의 응용이 두드러진다. 신라뿐만이 아니라 고대국가의 왕은  제정일치의 주제자였다. 제사와 무당을 겸한 것이다. 그것이 왕권이 강화되고 국가권력 구조가  확립됨에 따라 무의적인 요소는 떨어져 나가고 통치자로만 바뀐 것이다. 신라에 있어서 선덕여왕  시기는 중기에 해당된다. 이보다 오래 전에 신라의 왕권은 확고해졌다. 그러나 선덕여왕의 이  설화는 신라왕실에 여전히 초기 때의 무속 관습이 남아 있었음을 비쳐준다.

   

여성의 성기 모양을 한 지형
  여근곡은 부산의 계곡에 불쑥 솟아오른 작은 산이다. 정면에서 보면 여성 성기의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대음순 부분은 전체 모양을 둥글게 싼 부분이며 푸른 소나무숲으로  덮였다. 소음순부분은 잡목숲을 이루고 있다. 질구 부분은 빽빽한 잡목숲을 이룬 가운데 샘이  있다. 중위는 깊은 계곡으로 패여있다. 여근에 해당되는 산은 너무 커서 가까이에서는 그 모양을  잘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고속도로변이나 국도변으로 나와 멀리서 바라보면 그 모양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기이한 모양의 산은 산 아래 신평2리 마을 주민들에게는 신성하게 여겨져 왔다

 

이 작은 산 위에는 명당의 혈소가 있다. 그 혈소가 임진왜란 당시 왜군 또는 명군들에 의해  못질을 당했다는 전설이 아직 전해 내려온다. 또한 "이 산의 샘을 작대기로 쑤시고 휘저으면 이  동네 처녀들이 바람이 나기 때문에 샘물은 동네 어른들에 의해 철저하게 지켜져왔다"고 6대째 이  동네서 살아왔다는 김잠락 씨는 말한다. 조금만 감시를 소홀히 해도 이 동네 처녀들의 바람기를  부추기려고 타동네 총각들이 이 골짜기에 몰래 들어와 작대기로 휘젓기가 예사였다는 것이다. 현재 샘은 이 동네 상수도의 수원지가 되어 있다. 이 상수도 공사는 20여 년 전에 새마을  사업으로 완공됐다. 이 공사를 놓고 샘을 건드려선 안 된다는 동네 노인의 반대는 대단했다. 그러나 청년들은 그런 미신이 어디 있느냐고 대들면서 상수도 시설을 강행했다. 지금은 이 동네  60여 호의 주민들이 이 샘물을 먹고 있다.

 

동네전체가 여자의 음수를 먹고 있다는 묘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여성의 성기 모양을 닮은 지형이 꽤 있다. 그러한 곳은 예외없이 명당이 되거나,  흉한 자리가 되고 있다.   명당과 흉한 자리는 산의 형세에 따라 달라진다. 산세가 가랑이를 벌린 형세를 한 것은 흉한  곳이나, 정숙하게 오무린 형세를 한 것은 좋다는 식이다. 그래서 흉한 산세 아래는 여자들의  바람기가 거세어지고, 남자들의 양기가 위축된다고 믿기 일쑤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편법을  쓰게 된다. 여성 성기형의 산세 반대편에 남성을 상징하는 돌을 세우거나 하여 음기를 누르는  것이 그것이다.

   

마주보이는 남성산
  이곳 여근곡도 그 형상이 워낙 두르러지기 때문에 주민들이 그 기세를 누를 필요를 느낀  듯하다. 그래서 들 건너 마주보이는 산을 남성산으로 설정했다. 이 마을에 사는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한때 앞산은 남근을 세우고 여근곡으로 접근해 왔다고 한다.   앞산이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으로 들을 건너려고 할 때 때마침 이들을 지나가던 '행금장이'가  그 모습을 보고는 호통을 치며 막대기로 돌출한 '그 부분'을 내리쳤다. 그 힘이 너무나 세어  그만 그 부분이 잘린 채 앞산은 주저앉고 말았다. 현재 철도와 고속도로 중간의 들판에 길게  누운 낮은 언덕이 그때 잘린 산의 성기라고 한다. 여근곡도 앞산도 원한이 대단한 듯 이 일대는  역사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잦았다.

 

이 성이 축성되기 전 선덕여왕 때 이 성은 백제군에게  함락되어 신라 군사들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설을 간직한 채 여근곡은 여전히 수줍음도 없이 그 자리에 버티고 앉아 있다. 고속버스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 유명한 여근곡을 보며 키득거리기도 한다.   6  25사변 때 국도변을 따라 행군하던 미군들이 그 기묘한 산세에 탄성과 야유를 지르며  사진을 찍느라고 법석을 떨기도 했다고 마을 주민들은 말한다. 이 골짜기와 함께 부산산성은  절경의 경치를 가진 만큼 관광지로 개발이 가능할 듯하다. 그러나 샘을 상수도시설로 대치한 것과 여근곡에 들어선 암자 등은 명소로서의 품위를 잃게 할 우려를 자아낸다.

   

고선사지__원효대사와 뱀복의 인연설화

수몰된 유적지
  말 없는 물 잠자는 용이라 어찌 등한하랴/떠날 때 한 곡조에 여러가지 숨겼네/괴로운 생사는  본시 괴로운 것 아니니/연화장에 떠도는 그 세계가 너그럽네   삼국유사 의해편에 나오는 일연스님의 이 찬문(시문을 짓는 일)은 뱀복(또는 뱀부)이라는 사람을 위해 붙인 것이다. 뱀복과 고승 원효와의 유명한 인연설화는 고선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고선사는 알천의 상류에 있었다.   보문단지에서 동쪽으로 빠지는 길을 따라 산을 하나 넘어 약 2km쯤 가면 물에 잠긴 산골짜기가 나온다. 주소는 경주시 암곡동 1020번지. 이곳에는 75년 이전까지만 해도 고선사지가 남아 있었다. 거대한 3층 석탑과 거북돌 및 기단과 초석들이 있었다.

 

그러나 75년 덕동댐이 완공되자 고선사지는 수몰지구에 들어가 물 속에 잠겼다. 원효와 뱀복의 꿈 같은 얘기를 담은 현장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이 설화가 강조한 현상계의 덧없음을 실제로 보여주는 듯하여 감회를 자아낸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뱀복의 얘기는 다음과 같다.   경주 만선북리에 한 과부가 살았는데 남편도 없이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는 열두 살이 되도록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뱀복'이라 불렀다.   어느 날 그 어머니가 죽었다. 그때 원효는 고선사에 머물러 있었다. 뱀복은 원효를 찾아왔다. 원효가 뱀복을 맞아 배례하자 뱀복은 답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대와 내가 지난날에 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죽었다. 같이 장사 지내는 것이 어떤가" 원효는 그러자고 대답하고 같이 뱀복의  집에 와서 장례를 치렀다. 원효가 시신을 향해 말했다.   "나지 말지어다. 그 죽음 괴롭도다. 죽지 말지어다. 그 태어남 괴롭도다." 원효의 말을 듣고  뱀복은 "말이 번거롭다"라고 말하고는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괴롭도다"라고 했다. 두 사람은  시체를 메고 활리산 동쪽 기슭으로 갔다. 원효가 말했다. "지혜있는 호랑이를 지혜 숲속에  장사지냄이 그 아니 마땅한가." 이에 뱀복이 게송(부처의 공덕을 기린 노래)을 지었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사라수 사이에서 열반하셨네/지금도 그와 같은 이 있어/연화장계 넓은  데로 들려하네
  게송을 마친 뱀복은 띠풀을 뽑았다. 풀뿌리 아래에 한 세계가 열렸다. 그 세계는 명랑하고  맑으며 칠보 난간과 누각이 장엄했다. 뱀복은 시체를 메고 그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땅은 이내 아물었다. 원효는 혼자 돌아왔다.

   

윤회사상이 이룬 설화
  불교의 윤회사상이 두드러지는 얘기이다. 인과응보 사상을 담은 윤회설은 한국인의 의식심층을  흐르는 하나의 지배적인 경향이다. 그 심층의 의식이 뽑아낸 이야기가 바로 '뱀복 설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설화는 뱀복과 원효가 전생의 친구였으며, 뱀복의 어머니는 그때 그들의 경전을 싣고  다니던 암소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인연관계 때문에 현세의 인간관계 체계는  무너져버린다.

 

스님과 신자, 또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가 사라지고 '나고' '죽는' 현상계의  무상성만이 돋보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사실 앞에서도 애통과  번민 같은 인간적인 면이 나타나지 않으며, 천연스러운 장례 해프닝이 벌어질 뿐이다. 일연은  뱀복의 이 천연스러운 행위를 성자의 차원에서 조명하고 있다. 뱀복은 생사에 초탈한 대성인의  면모로 나타난다.

 

뱀복의 삶이 영원에 걸쳐 있는 만큼 원효와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벌이는 이  해프닝은 현세의 삶에 잠깐 모습을 보인 섬광과도 같은 반짝임일 뿐이다. 그러한 행위를 통해  현세의 한정된 삶과 영원한 시간의 흐름을 흥미있게 대비시킨다. 어떤 이는 뱀복이가 그  어머니를 경을 싣고 다닌 암소에 비교한 것에 대해 신라인의 철학적 유머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뱀복의 모습도 재미있다. 대개 성인이라면 고고하고, 의젓하게 묘사되기 쉽다. 그러나 이 설화에서는 열두 살까지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병신스러운 몰골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인물설정은 성속을 한 테두리에 넣어 사고하려는 신라인의 인생관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이 설화는 사원(절)에 대한 의식을 보여준다. 뱀복은 띠풀을 뽑는 행위를 통해 그 아래  신선한 세계(그 묘사가 사원의 모습을 띤다)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찮은 풀 한  포기일지라도 그 속에는 '연화장세계'를 품고 있다는 평등한 세계인식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불법은 만산에 두루 편재하는 만큼 굳이 절을 지어야 수도가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무사원사상'이 이 얘기 속에는 깃들어 있다.

   

박물관에 이전된 유물
  이러한 설화를 간직한 고선사지는 영원히 물 속에 잠겨버렸다. 절터에 남아있던 탑과 거북돌  및 발굴유물들은 75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탑(국보 38호)은 경주박물관 동남편에 우뚝  서 있다.   이 탑은 감포의 감은사지 탑과 함께 경주일대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것으로 높이가  10.3m이다. 탑의 상륜부는 날아가고 없다. 이 탑은 군데군데 금이 가고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나 그 단아하면서도 장중한 모습이 일품으로,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다. 고선사지에서 옮겨놓은 거북돌은 머리부분이 떨어져 나간 채 탑 앞에 놓여 있다.  

 

암곡동에 사는 남삼진노인은 "수몰되기 전의 절터 주위는 참으로 경치가 좋았다"고 말한다. 절  앞으로 알천의 지류가 흘렀으며, 계곡의 암석들이 개울과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덕동댐으로 계곡이 물에 잠기자 절 주변의 2백여 가구들은 고향을 돌아보며 이곳을  떠났다. 더러는 도시로 가서 터를 잡았고, 더러는 못내 고향을 못 잊어 이 주변의 논밭을 사들여  일구고 있다. 언덕에 남은 몇 집들을 돌며 '뱀복이 얘기'를 물어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원효가 간 후 1천 3백 년의 무자비한 세월 속에서 모든 것은 변하고 잊혀졌다. 다만 사람 사는  데는 여전히 '나고 죽는 것이 괴로움'이라는 사실만 남아있을 뿐이다.   4월의 덕동댐물은 맑다. 댐 주위의 산들에는 진달래가 피어 온통 붉다. 붉은 산 그림자가 물에  비쳐 또다른 연화장세계가 새로이 물밑에서 떠오르는 듯한 착각이 문득 솟는다.

     

부산성지__득오와 죽지랑의 우정

모죽지랑가
  부산성은 향가 '죽지랑 그리는 노래'의 현장이다. 이 노래는 신라 효소왕 때 득오가 화랑  죽지랑을 그리워하며 지은 것이다.
 

간봄 그리매 모든 것이 시름이로다/

아담하신 모습에 주름살 지시니/

눈 도리질 사이에 만나옵기  지오리/

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가을길/

다북쑥 우거진 곳에 잘 밤은 있으리  

 

득오는 죽지랑의 낭도로서 풍류황권(화랑도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풍류도를 닦았다. 죽지랑은 김유신과 더불어 3국을 통일하고 진덕여왕 때 중시(신라 집사부의 으뜸 벼슬)가 되어  왕정의 기밀을 관장하는 등 진덕, 무열, 문무, 신문왕의 4대에 걸쳐 대신이 되었던 인물이다. 득오가 이 노래를 불렀던 효소왕 때는 죽지랑의 만년으로 백발이 성성한 노장 화랑이었다.  

 

이 노래와 더불어 부산성에서 있었던 득오와 죽지랑의 교분은 화랑도들간의 우애와 신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얘기이다. 그 얘기는 다음과 같다.   득오가 한 열흘 보이지 않았다. 죽지랑은 득오의 어머니를 불러 아들의 행방을 물었다. 그의  어머니는 "당전(군대의 직책으로 부대장) 익선이 내 아들을 부산성의 창고지기로 임명했습니다. 급히 달려 가느라고 미처 알리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죽지랑은 "당신의 아들이 만일 사적인 일로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지만 공적인 일로 갔다니  응당 가서 대접해야겠군요"하고 술과 안주를 준비하고 부산성으로 향했다. 그때 그의 낭도  1백37명도 그를 따랐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의 행방을 물으니 익선의 밭에서  부역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죽지랑은 득오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 술과 떡을 대답했다. 그리고는 익선에게 득오의 휴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익선은 그 부탁을 거절했다. 이때 사리  간진이 추화군에서 조세 30석을 거두어서 성으로 싣고 가다가 부하를 중히 여기는 죽지랑의  마음을 아름답게 보고 익선의 행동을 비루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청했으나 그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진절사지가 타던 말안장을 주니 그때야  허락했다. 조정의 화주(화랑도를 관장하는 관직)가 이 소식을 듣고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럽고  추한 짓을 씻어주려고 했다.   그러자 익선은 도망쳐버렸다. 조정에서는 익선의 맏아들을 잡아가 한겨울 성 안의 못에 목욕을  시켜 얼려 죽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익선의 고향인 모량리 사람 중에 벼슬하는 사람을 모두  몰아냈다. 또한 그후로부터는 모량리 사람이 벼슬하거나 중이 되는 것을 금했다.

   

화랑 사이의 아름다운 우애
  이상이 삼국유사에 전하는 득오와 죽지랑 그리고 익선 사이에 부산성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이 얘기에는 자기의 젊은 낭도를 위해 성까지 술과 떡을 갖고 가는 늙은 죽지랑의 정과 죽지랑을  따르는 1백37명의 낭도들의 우애가 특히 돋보인다. 거기에는 '사랑'이라고 할만큼 깊은  인간관계가 바탕이 되어 있다. 이러한 우애와 의리야말로 사나이들의 심기를 결속시키고, 삼국을  통일시키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익선은 그러한 사나이들의 꽃다운 우애의 한 장애요소로  등장한다. 삼국유사에는 이때 득오가 화랑 죽지랑을 그리워하며 지어 불렀던 '죽지랑 그리는  노래'를 기록해 놓았다. 이 노래에는 흡사 애인에게 사랑을 하소연하는 듯한 애틋함이 배어  있다. 존경하는 늙은 화랑 죽지랑을 향한 청년 득오의 어리광과도 같은 정을 담은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래에 대해 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다. 혹자는 득오가  죽지랑의 아름다운 얼굴이 늙어감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읊은 것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죽지랑의 죽음을 슬퍼하는 노래라고도 해석한다. 전자의 해석은 '아담하신 모습에 주름살  지시니'라는 귀절을 중요시한다.   후자의 해석은 마지막 귀절인 '다북쑥 우거진 곳에 잘 밤은 있으리'를 이유로 든다. '다북쑥  우거진 곳'은 무덤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보다는 차라리 득오가 부산성에서  부역할 때, 지난 날 낭도들과 더불어 수련하던 때를 그리워하며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것이  더 설득력을 가질 듯하다.   이러한 얘기를 간직한 부산성은 경주 서쪽의 여근곡이 있는 바로 그 산에 위치한다.

 

부산,  또는 주사산으로도 불리는 산의 정상에 위치한 이 성은 현재 성을 쌓은 돌들의 흔적이 몇 군데  남아 있을 뿐이다. "동경잡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이 성은 신라 문무왕 3년(서기 663년)에 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완성했다. 이 성은 '둘레가 3천 6백 척, 높이가 7척이며 안에는 4개의 개울과 하나의 연못, 9개의 샘이 있었다'고 한다. 이 성에 오르려면 여근곡의 뒷골짜기를 따라 오르거나, 건천읍에서 '산내도로'를 따라 송선리 쪽으로 나 있는 좁은 도로로 가면 된다.

   

경주의 중요한 와성
  부산의 가파른 산길을 힘겹게 올라가면 산정에 광활한 평지가 펼쳐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이 부산성 안에는 시가가 조성되어 있었다.   즉 성내에 군창을 비롯하여 절과 민가에 이르기까지 그 자체로서 한 도읍을 형성했었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주암사가 있으며, 화전민들의 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그들의 자녀들을  위한 분교(국민학교)가 있다. 성의 넓은 목초지는 목장으로 개간되어 있다.  

 

부산성은 경주의 서쪽 외곽을 지키는 외성으로 중요시 됐던 듯하다. 이 성을 짓기 전인  선덕여왕 때 백제군이 산 아래 여근곡까지 침입했다가 토벌됐으며, 무열왕 때에는 백제군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성이 함락되기도 했다. 이로 미루어보면 이 성의 축성목적은 경주의  서쪽으로 침입해오는 백제군의 방어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동시에 난리 때 주민들의  피난처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듯하다. 성터의 여기저기에는 숱한 기와조각이 뒹굴고 있어서,  더욱 그러한 생각을 짙게 한다. 이 일대의 경치는 절경이다. 특히 부산의 정상에 위치한  주암사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은 넓어 멀리 경주가 한눈에 들어온다. 절 뒤로는 김유신이 군사들을  모아 술을 빚었다는 지맥석의 넓은 반석이다.

     

남산 삼화령__안민가의 유적지

부처에게 차공양 하던 곳
  신라 경덕왕이 3월에 반월성 서편에 있는 귀정문의 누각에서 지나가던 스님을 불러들였다. 그는 남루한 장삼에 앵통(또는 삼태기)를 걸머지고 있었다. 그 통 속에는 다구가 담겨 있었다. 이름을 물으니 충담이라고 했다. 충담은 "저는 늘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다려서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올립니다. 오늘도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라고 말했다. 임금은 차를 청해  마셨다. 충담은 당시 향가를 잘 부르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왕은 대뜸 그가  '찬기파랑가'의 작자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에게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할 노래를  지어주기를 청했다.   충담은 노래했다.

 

임금은 아비요/신하는 자애로운 어미며/백성은 어린애라 할지./백성은
사랑하는 이  아네/윤회의 차축을 괴고 있는 갓난이/이들을 먹여서 편안히
하라/이 땅 버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나라 보존할 길 아노라/아으,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나라가 태평하리라
 

이 노래가 바로 유명한 '안민가'이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라는 평범한 말 속에 깊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왕은 감동하여 그를 왕사로 봉했으나  충담은 끝내 사양했다.   삼국유사의 이 얘기 속에 나오는 삼화령은 어디일까? 이 문제는 아직 학계에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일제침략시대(1925년)에 발견된 3개의 미륵불이 바로 삼화령에 있었던  불상이라고 학계에서는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이 미륵삼존은 현재 경주박물관 8실에 진열되어 있다. 그 명칭도 '삼화령 미륵삼존'으로 되어  있다.

 

이 불상이 발견된 곳은 남산의 북편에 있는 남산성터 바로 밑 고개 위이다. 이 고개의  동편은 부처골이며 서편은 남간사지 등 숱한 절터가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서 이 불상이  발견되었을 때는 본존상만 있었으며 두 보살 입상은 민가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불상이 나온  자리에는 높이 1m 가량 되는 네 개의 석주가 있었으며 이 네 개의 돌기둥 안에 불상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황수영 교수는 이 불상을 신라초기의 것으로 추정, 이 지점 가까이에서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세 개의 무덤을 찾아내고 그것을 화랑의 무덤으로 간주하여 이곳이  삼화령이며 불상이 들어 있었던 네 개의 돌기둥은 바로 신라초기의 석굴형태였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 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다소 억지스러움이 있는 듯하다. 삼국유사 탑상편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선덕왕 때 생의라는 스님이 항상 도중사에 살았다. 하루는 꿈에 어떤  중이 그를 남산으로 끌고가면서 풀을 꺾어서 길을 표해 두라고 하며 산의 남쪽 골짜기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묻혔으니 청컨대 스님이 파내어 이 고개 위에 앉혀달라"고 했다. 꿈을  깨어 친구들과 표한 곳을 찾아가 골짜기에 이르러 땅을 파니 돌미륵이 있었다. 그것을 삼화령  위에 두었다가 선덕왕 13년에 절을 세우고 생의사라 했다.

   

현 삼화령터의 의문점
  이 설화에 의하면 삼화령은 산의 남쪽에 있는 것을 되어 있다. 현재 삼화령으로 인정되어 있는  곳은 남산 정상의 북편이므로 우선 방위가 틀린다.   또한  네 개의 돌기둥은 높이가 1m 정도밖에 안 돼 세 개의 불상을 안치하기에는 비좁다. 불상조각 솜씨가 뛰어난 점으로 봐서, 그런 불상을 그렇듯 비좁고 거친 석실에 두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주위에 화랑의 무덤이라고 추정되는 세 개의 무덤이 있다고 했으나, 자세히 살피면 세  개뿐만 아니라 많은 무덤들이 주위에 흩어져 있어, 꼭 세 개만을 집어내기가 힘들다.

 

그러하면  이 미륵불을 삼화령의 미륵불이라고 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경주에 사는 윤경렬 씨는 "이  주변에 기와조각이 다량 출토되는 점으로 봐서 이곳이 절터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절이  없어진 후 그곳에 버려진 불상을 수습하여 풍우를 피하기 위해 임시 거처를 만든 흔적이 바로 네  개의 돌기둥이 아닌가 한다"고 추정한다. 이렇게 되면 이곳은 삼화령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삼화령은 어디일까.

 

남산순환도로를 따라 정상을 넘어 약 5백m쯤 가면 용장골과  대지계곡을 양 옆에 거느린 뫼뿌리가 나타난다. 동쪽으로는 남산리를 지나 조양들이 펼쳐지며,  서쪽으로는 용장계곡이, 남쪽으로는 고위산이 바라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이곳 능선 위에 큰  바위가 바위를 얹고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위에 얹힌 높이 약 2m의 바위를 오르면 바위  윗부분에 연꽃을 엎어놓은 모양으로 좌대가 조각되어 있는 게 보인다. 불상을 안치한 흔적이다. 연좌대는 지름이 2백18cm이며 16개의 연잎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남쪽을 보면 경주시내에서  조양들을 지나 바로 앞 뫼뿌리를 넘어 용장골로 해서 고위산 동편 중허리를 넘어 언양으로 가는  고갯길이 바라보인다.   이 고개는 경주에서 언양을 거쳐 부산으로 빠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이 산밑에 사는  노인들의 얘기를 들으면 이 연좌바위가 있는 산의 뿌리가 한 꽃잎을 이루고, 정상 쪽으로 치닫는  한 뿌리가 또 한 잎을 이루며, 용장사가 있는 쪽으로 뻗친 뫼뿌리가 또 한 잎을 이루어 세 개의  꽃잎으로 벌어진 한 송이 꽃과 같은 지형을 갖추었다고 한다.

   

언양가는 고갯길
  연좌바위의 서편 아래 50m지점의 계곡에는 절터가 있다. 절터는 상하의 축대가 있어 곧바로  연좌바위 쪽으로 올라가는 계단 형태를 보여준다. 추측이지만 연좌 바위가 있는 이곳이야말로  삼화령이 아닌가 한다. 산세의 모양이 세 잎의 꽃잎형이라는 데서 '삼화'라는 명칭이 붙을 수  있으며 바로 앞을 지나는 고갯길로 해서 '삼화령'이라 이름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위 밑 절터는 바로 생의사가 된다. 고갯길은 후미진 곳인데다 높아서 오가는  옛사람들이 불안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불안을 덜기 위해 고갯마루에 불상을 안치하여  위안을 삼으려 했을까? 고개 주위에는 지금도 많은 절터가 산재하고 있으며, 고개가 시작되는  오산골의 어귀에도 불상이 서 있다. 그 절들은 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의 숙박시설로도 중요하게  이용됐으리라. 불상은 고갯길의 무사를 비는 마음을 담았을지도 모른다. 더욱 이곳은 남산  정상의 남쪽 편에 해당되는 만큼 삼국유사의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생의스님이  파내어 이곳에 모셨던 불상은 어디로 갔을까.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윤경렬 씨는 "30년 전  남산을 올랐을 때 이 바위에 부서진 불상이 서 있는 걸 보았다"고 말했다.   바위 주위엔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는 걸로 봐서 생의스님이 파낸 불상이 없어진 후 절 밑에  있는 불상을 대신 모신 다음 그 위를 지붕으로 덮은 것인지도 모른다.   바위 아래 절터에서 올려다보면 아득히 진달래꽃 사이로 하늘 속에 솟아오른 연좌대가 보인다. 흡사 도솔천을 올려다보는 느낌마저 든다. 미륵보살은 도솔천에 있는 부처이다. 그렇다면  연좌바위 위 불상자리를 도솔천으로 설정하고, 이 절에서 그 청정한 하늘을 바라보며 충담스님이  차를 올렸다고 할 수 있다. 불상을 찾을 길 없고 절도 없어졌지만 청정한 하늘은 그대로 남아  연좌바위가 그 푸르른 세계를 받치고 있다는 감동적인 느낌마저 든다.

     

선도산__신라 건국신화의 유적지

선도신모가 깃든 산
  선도산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산이 경주 서북쪽에 있다. 무열왕릉의 뒷산으로 높이는  3백80m. 나지막하지만 옛부터 '신성한 산'으로 경주일대에서 떠받들려져 온 산이다. 이 산은  경주의 진산(성이나 도읍을 수호하는 산)일 뿐만 아니라, 신라의 건국설화와 관련있는  선도신모가 거처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선도산의 신모는 신라 건국 초기부터 이 산에 머물면서  경주를 지켜 왔다고 한다. 삼국유사 감통편에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부인을 낳은 신이  바로 선도신모라고 되어 있다.  

 

선도산 신모의 설화는 고대인의 산악숭배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얘기이다. 선도산의 신이  여신으로 설정된 것은 모계사회의 영향을 보여주며, 출산 도는 풍요와 연관을 갖는 고대의  여성숭배사상에도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삼국유사에 실린 선도산 신모의 얘기는 다음과 같다.   신모는 원래 중국 황실의 딸이었으며 이름은 사소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신라에  와서 머물면서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인 황제는 솔개 발에 서신을 매어  부쳤다. '솔개가 머무는 곳을 따라 집을 삼아라'라고 서신에 쓰여 있었다. 사소는 솔개를 놓아  보냈더니 이 산으로 날아와 멈추었다.   사소는 마침내 이곳에 와서 지선이 되었다. 그래서 산이름을 서연산이라 했다. 신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 웅거하여 나라를 지켜주었는데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 그러므로   나라가 건립된 이래로 늘 삼사(3가지 주요한 제사)의 하나로 했고, 그 차례도 망제(1. 가뭄이  심할 때 비를 기원하며 올린 제사. 2. 매달 보름에 조정에서 종묘에 지내던 제사)의 위에 있었다. 

   

신라시조왕의 어머니인 사소
  이 얘기 속에는 선도산 신모의 이름이 사소이며, 그녀가 중국황제의 딸이라는 사실 등  흥미있는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솔개와 연관된 서연산이란 명칭도 그냥 보아넘길 수  없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이 설화 속의 여신의 이름 중 '소'는 고어로서 '산'또는 '악' '봉' '영'등을 의미하는 '소리'  '수리' '술' ' 솟'의 머리글자를 뜻한다. 서연산은 서악을 말하는 것으로 일명 서술산,  서형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서술의 '술' '수리'는 옛말로 산, 고상, 신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볼 때 사소라는 이름은 산악신앙의 일면을 보여주는 신성한 인물(또는 지역)이란 뜻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연신이 중국황제의 딸로 설정된 것은 그 신성한 지위를 높여주기 위한  것이며, 하늘의 사자로 설정된 소리개를 통해 신성한 장소를 점지함으로써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선도산 신모의 설화는 민간층에서 부락의 풍요와 수호를 위해  동신(마을을 지켜주는 신)을 모신 동신당인 국사당(또는 국수당)의 원형이라 할 수도 있을  듯하다. 국사당은 대개 부락의 뒷편 높은 산꼭대기에 위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점은  국사당의 제신이 천신일 가능성이 높다는 면을 보여준다.

 

국사당이 있는 산은 우주적 중심의  성역으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우주적 통로로 상징된다.   단군신화의 태백산정이나 가락국의 구지봉 등은 선도산 신모의 설화와 같은 사고형태가 끌어낸  것으로 하늘신앙의 한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선도산의 신모는 도교적인 신선의 이미지와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라는  건국신화적인 연관성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사소가 처음에 진한에  오자 성자를 낳아 동국의 첫임금이 되었는데 아마 혁거세와 알영의 출생이 그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혁거세의 출생신화는 흰말의 '말 토템'을 보여주며, 알영은 계룡의 왼편 갈비뼈에서 나와 '닭  토템'을 보여준다. 이대 흰빛과 '계룡, 계림'등의 닭은 모두 서쪽을 의미하고 있어  서악(선도산)과 쉽게 연결되고 있다. 이러한 연관은 시조왕을 더욱 신성화시키는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 때문에 이 선도산의 성모는 유명해졌다고, 지금도 이 산은  무속적인 산앙의 장소로 떠받들려지고 있다.

   

성모사와 마애삼존불
  선도산의 정상 바로 밑 경주시가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지금도 선도신모의 유허지가 있으며 그  위패를 모신 사당 성모사가 있다. 현재의 사당은 1975년 11월에 새로 옮겨 지은 것이다.   이 성모사는 박혁거세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성모사부인봉참회가 신축했다. 원래의 사당은  지금의 사당 북쪽 1백50m 거리에 있는 묏부리에 있었다. 원래의 사당이 있던 터에는  성모사유허비(1977년 8월 건립)가 서 있다. 이 유허비는 원래 있던 비를 없애고 새로 깎은  비인데 바닥과 돌담 위를 시멘트로 발라 옛맛을 잃어버리고 있다.

 

성모사에서는 지금도 매년 3월  10일(음력)에 박혁거세 후손들에 의해 제사가 지내진다.   사당 왼편에는 거대한 마애삼존불(보물62호)이 서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마애삼존불은 거대한  바위면에 남향하여 높이 7m의 주존 아미타조상을 새기고 그 좌우에 화강암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조성했다. 마애본존불은 그 손상이 심해 얼굴 윗부분이 부서졌다. 남아 있는 뺨,  턱, 눈, 코 등의 표현은 그나마 부처의 자비와 의지를 강하게 떠올리고 있다.   이 불상은 조선후기에 크게 파손을 입었다고 한다.

 

1970년 12월 이 불상이 경주박물관에 의해  복원되기 전만 해도 두 협시보살은 형체가 두절된 채 주존 아래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이  삼존상은 통일신라 즉 7세기 후반의 작품이다.    이 마애석불과 선도산 신모와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그 관계는 알 수 없지만 선도신모의  도교적인 면과 마애불의 불교적인 면이 처음부터 이 산에서 공존해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이 불상은 극락정토의 교주인 아미타불이며, 이 세계의 위치가 서쪽에 있는 만큼, 서악이란  명칭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이 마애불과 성모사가 있는 곳에서 내려다보면   경주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산밑에 숱한 고분들이 눈에 띈다. 이 산밑에는 무열왕릉을  비롯하여 헌안왕, 진지왕, 무성왕 등으로 추측되는 왕릉과 숱한 크고 작은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다. 마애삼존불은 똑바로 묘소들을 향해 서 있다. 추측이지만 이 마애삼존불과 산밑의  고분군과는 깊은 관계가 있는 듯하다.   성모사의 오른편에는 '도덕회수성원'이라는 간판을 붙인 건물이 있다. 수성원의 한 방에는  황원단이 있고 조물주의 위패와 단군 및 관세음보살의 화상이 걸려 있다.   이곳에는 '도사'가 거주한다는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마애삼존불과 성모사와  유사종교의 제단이 지금도 여전히 한 자리에 공존하는 것이 이 산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듯하다.

     

나정과 알영정__신라개국의 산실

나정과 알영정의 위치
  신라 개국의 현장인 나정은 경주 시가지의 남쪽 남산 아래에 있다. 오릉에서 불국사 쪽과 언양  쪽으로 가는 길이 겹치는 네거리에서 포석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2백m떨어진 곳에 나지막한  언덕이 솔숲에 싸여 있는 게 보인다. 이 숲속에 나정이 있다. 나정의 동쪽 30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6촌장 재실이 있고, 그 동편에는 나지막한 언덕이 역시 숲에 싸여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언덕에는 양산재라는 재실이 있다. 오릉을 포함한 이 일대가 바로 신라의 첫 임금 혁거세와 왕비  알영이 태어난 지역이다.  

 

아득한 옛날(기원전 60년) 혁거세는 하늘의 아들로 이 땅에 강림한다. 삼국유사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삼월 초하루에 6부의 조상들이 각기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 냇가에 모여 의논했다. "우리들의  위에 다스릴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방자해졌소. 덕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을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해야지요." 이에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보니 양산(지금의 남산) 밑 나정 곁에  이상한 기운이 전광처럼 땅에 비치는데 흰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말은 하늘로 올라가버리고 보랏빛 알(푸른 알이었다고도 한다) 하나가 있었다. 그 알을 깨니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 아이를 동쪽 샘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춤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밝아졌다. 그래서 그를 혁거세(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뜻)라 했다.  

 

사람들은 서로 치하하여 이제 천자가 강림했으니, 마땅히 덕있는 여왕을 정해 배필로 하자고  했다. 이날 사량리 알영정(현재의 오릉 안에 있다)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겨드랑이 밑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 얼굴이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 같았다. 월성 북쪽 내로 데려다 목욕을  시키니 그 부리가 빠져 떨어졌다.   두 성인을 남산 서쪽(지금의 창림사지)에 궁실을 짓고 기르다가 나이가 13세가 되었을 때 왕과  왕비로 삼았다.

   

부족간의 연맹을 상징하는 설화
  이 설화는 국조탄생 설화의 한 중요한 패턴인 난생 설화형의 전형이다. 더불어 전광과 같은  서기가 하늘에서 땅으로 드리워진다든가, 흰 말이 길게 울고 하늘로 올가간다는 등의 상징을  통해 천상에서 땅에 내려오는 천자의 모습을 결정적으로 떠올린다. 또한 이 설화에는 말, 용  등의 동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곰, 거북, 악어, 사슴, 말, 용 등은 신화상 수신으로 중요한  동물들이다.

 

곰, 사슴, 말은 서북방계 신화에서, 용, 악어, 거북 등은 남방계 신화에서 자주  나타난다.   이를 통해 추측해보면 혁거세집단은 북방계이며 알영집단은 남방계 신화의 패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철순 씨는 혁거세집단은 '말 토템'을 가졌던 천신족으로 북방계에서  경주로 이주해온 유이민집단이며, 알영집단은 '닭 토템'을 가진 지신족인 토착족 또는 앞서  이주해온 집단이라고 추정한다.

 

이 신화는 그러므로 경주 지역에 먼저 뿌리내린 알영집단과  북방으로부터 이주해온 혁거세집단이 연맹체제를 이루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이 내려진다.   고대에 부족국가가 생길 때는 대개 선진 철기문화를 가지고 북방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과  토착족들이 연맹을 맺어 그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했으며, 스스로는 천신족이라 했다.   이종욱 교수(영남대)는 설화에 나오는 나정과 알영정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만큼 서로   이웃한 마을의 우물들로 파악한다. 이 두 개의 우물 주변에는 각각 마을이 있었으며, 혁거세와  알영의 결혼은 곧 이 두 집단 간에 연맹이 맺어져 한 부족국가가 된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혁거세가 13세 때 왕이 된 것은 혁거세집단이 경주 평야에 이주해 온 후 정착하는데 13년이  걸렸으며, 그 후 이 지역을 장악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이 교수는 설명한다.

 

당시 6촌장은  현 경주시와 월성군일대 지역인 사도국을 지배한 장로급 촌장들이었다. 이 지역은 이들 6촌장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체제의 면모를 지녔던 듯하다.   혁거세집단과 알영집단의 연맹집단은 결국 사로국의 최고실력 집단으로 대두되어 6부장의  추대를 받았던 것이다. 그 결과 이런 신화적인 모습으로 그 추대과정이 상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우물터와 비석
  나정에는 조선 순조 3년(1803년)에 세운 비석을 안치한 비각이 있다. 비각 뒤에는 우물터가  있다. 나정은 사적 2백45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정 옆에는 6촌장 재실이 있어 아득한 옛날 이  일대에서 혁거세를 맞이했던 정경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재실은 1970년 정부가 세웠다. 이곳에서는 매년 8월 17일에 6촌장 재실 동편에는 둥글게 솟은 원형의 나지막한 언덕이 있다.

 

그  위는 평평하고 넓다. 이 언덕의 남편에 양산재가 퇴락한 채 방치되어 있다. 이 언덕  남쪽마을(탑정동 835번지)에 사는 한 노인은 "옛날 나라에 일이 있으면 이 재실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들었다"고 말한다. 언덕의 모양과 전해오는 얘기로 봐서 이 언덕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도당산일 가능성이 짙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가까운 곳에 나정이 있어서, 이 언덕  위에서 당시 6촌장들이 모여 회의를 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경우  문제는 알천이 된다.

 

신화에는 6촌장들이 알천 냇가에 모인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언덕  아래 가까운 내는 남천으로 남산 동편을 흘러 반월성 남쪽을 돌아 오릉 북쪽으로 해서 흘러간다. 알천은 보문지를 지나 포항 쪽으로 빠져 나가기 때문에 이곳에서 거리가 멀다. 이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알천이 황룡사 부근으로 해서 반월성과 현 박물관 옆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고 추측이 되고 있다.  

 

태풍 사라호가 불 때 알천물이 경주들을 지나 이쪽으로 쏠리려고 한 것도 그 한 증거가  아니겠냐고 주민들은 말한다. 알천 물길은 역사적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물길이 분황사  쪽으로 흐르면 분황사 부처가 땀을 흘리고, 물길이 헌덕왕릉 쪽으로 흐르면, 헌덕왕이 땀을  흘렸다는 설화도 알천물길이 변동이 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에는 알천물은 반월성 부근에서 현재의 남천에 합류되어 흘렀다고도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이곳에서 가까운 남천을 알천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지역민들의 추측일 뿐이다.   오릉의 고분 동편 숭덕전 뒤쪽에는 혁거세의 왕비 알영부인이 태어났을 때 그 몸을 씻었다는  알영정터가 있다. 이 우물은 돌로 덮어두었다. 그 곁에는 '신라시조왕비탄강유기'라 새긴 비를  안치한 비각이 수줍은 색시처럼 서 있다.

     

두두리들과 신원사지__비형랑 설화

귀신의 아들 비형
  임금님 혼이 와서 낳으신 아들/비형랑이 이 집에 머물고 있다/저 모든 귀신들 쫓아버리니/아예  이곳에는 있지 말아라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 때 사람들의 귀신 쫓는 노래이다. 신라인들은 이 가사를 문에 붙여  귀신을 쫓았다고 한다. 이 노래에 나오는 비형랑은 반인반귀의 존재이다. 신라 26대  진평대왕 때에 집사 벼슬을 한 비형랑은 귀신인 왕(25대 사륜왕)과 인간의 아녀자가 사통하여  낳은 희대의 사생아이다. 비형랑의 출생에 대한 설화를 삼국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사륜왕(시호 진혜대왕)은 정사가 어지럽고 음란하여 재위한 지 4년 만에 나라 사람들이 폐위시킨  임금이다. 폐위되기 전 사륜왕은 사량부 서인의 딸이 얼굴이 예뻐 도화랑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사랑하려 했다. 그러자 여자는 "여자는 두 남자를 섬기지  못합니다. 남편이 있고서 다른 데로 가게 한다면 이는 비록 천자의 위엄으로도 뺏을 수  없습니다"하고 거절했다. 그러자 왕은 "너를 죽인다면 어쩔 테냐"하고 말하자 "차라리 거리에서  죽음을 당할지언정 소원을 달리할 수 없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왕은 그녀를 풀어주었다.

 

그해 왕은 폐위되어 죽었다. 그 후 3년 만에 도화랑의 남편도  죽었다. 남편이 죽은 10여 일 후 밤중에 홀연히 왕이 옛모습으로 그녀의 방에 나타났다. "네가  옛날에 허락했다. 이제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라고 왕은 말했다. 도화랑은 부모의 허락을  받아 왕을 맞아들였다. 왕은 7일을 그 방에서 머물다가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그녀는 곧  태기가 있었으며, 이윽고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비형랑이다.  

 

진평대왕은 이 이상한 얘기를 듣고 비형랑을 궁중에서 거두어 길렀다. 15세에 집사 벼슬을  시켰더니 밤만 되면 멀리 달아나 놀았다. 그래서 왕이 용사 50명을 시켜 지켜보게 했다. 그랬더니 그는 항상 월성(반월성)을 날아 넘어 황천 언덕에 가서 귀신들을 이끌고 놀았다. 이  사실을 안 왕은 비형에게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 북쪽 개천에 다리를 놓아라"고 하니 비형이  귀신을 이끌고 하룻밤 새 다리를 놓았다. 그 다리 이름은 귀교라 했다. 왕은 또 귀신 중  인간세상에 와서 정사를 도울 만한 자를 추천하라 했다.  

 

비형은 길달이란 자를 소개했으며 그에게도 집사 벼슬을 주었다. 길달은 나중에 각간 임종의  아들이 되었다. 임종은 길달에게 흥륜사의 문루(궁이나 성, 절의 문위에 있는 다락집)를 짓게  했다. 길달은 문루를 지은 후 밤마다 그 문 위에서 잤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쳤다. 이에 비형이 귀신들을 시켜 길달을 잡아죽었다. 그래서 귀신들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달아났다.   이 재미있는 설화는 인간세상과 귀신세상을 자유로 넘나드는 신라인의 사유가 잘 드러나 있다. 귀신과 사통하여 아이를 낳기도 하며, 귀신을 데려다가 정사를 맡길 뿐만 아니라 아들로 삼기도  하는 등 인간계와 영계는 자유자재로 통해 있다. 도화랑을 통해 드러나는 정조에 대한 관념도  조선시대와 판이하다. 남편이 없으면(죽으면) 얼마든지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조는 고수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편과의 관계가 확고할 때를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다.

   

귀신과 놀던 들
  이 설화가 깃든 현장은 어디일까. 설화에 의하면 비형은 밤마다 황천 언덕에서 놀았으며,  신원사 북쪽에 다리를 놓았다고 되어있다. 그 지역은 오릉 서편, 고속도로 진입로 남편의 서천을  낀 탑정동 일대의 들이다. "이 들을 두두리들이라고 부른다"고 이 들에서 농사를 짓는 한 노인은  말한다. 또한 '귀더리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귀더리'란 '귀다리' 즉 귀교를 말하는 듯하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 지역에 귀교가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두두리'는 귀신을 뜻한다. 동국여지승람의 경주의 왕가수조에 보면 '나무사내'의 설명이 나온다. '나무사내'란 귀신을  위패를 말하는 것으로 곧 귀신을 뜻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목랑은 속칭 두두리라고 한다.

 

비형  이후로 세상에서는 두두리를 섬기기를 매우 성대하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왕가수는 오릉에서 포석정 사이의 지역으로, 이곳에는 많은 '두두리'들이 있었던 듯싶다. 더불어 오릉 서편의 '두두리들' 지역은 귀신들이 밤마다 들끓은 곳이었다. 비형은 반월성을 날아  넘어 오릉을 지나 이 들에서 그들 귀신들과 어울려 놀았다는 얘기가 된다.   '두두리'들은 비록 귀신들이었지만 나라가 위급하거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는 돕기도 해  신라의 호국이념에 닿아 있는 특이한 존재들이다. 귀신이라고는 하지만 유령과는 다르다. 흡사  서구의 '님프'나 목신과 같은 감수성을 가진 존재들이기도 하다. 우리 민속에 잘 나오는  도깨비의 전형 같기도 한 이들은 익살스럽고 장난기가 넘치고 있다. 오릉 뒤편에 있던 영묘사는  바로 이들 '두두리'의 명복을 빌고 제사를 지냈던 절이다. 선덕여왕 때의 유명한 지귀설화에  나오는 지귀도 이 '두두리'의 일종이었던 듯하다.

   

남아 있는 절터와 다리터
  황천은 남천의 하류이다. 곧 모량 쪽에서 내려오는 모량천과 남쪽의 기린내 그리고 남천(사천  또는 문천이라고도 한다)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오늘날 남천은 오릉 북쪽을 돌아 들판 북쪽으로  빠지지만, 옛날에는 탑정동 지역에서 합류됐다고 한다. 그래서 세 줄기 냇물이 합류됨으로써  홍수가 나면 이 일대는 황폐하게 변해버려 황천이란 이름이 붙은 듯하다. 경주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지나 경주 쪽으로 들어오다가 다리를 넘으면 왼쪽에 이 내를 끼고 펼쳐진 들이  '두두리들'이다. 들의 남쪽 고속도로 진입로 옆에는 탑동수원지(탑정동 340의 1)가 있다.

 

이곳에  근무하는 한 청원경찰은 "처음 수원지를 닦을 때 이곳이 절터였다는 얘기가 많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터가 세고 때때로 사택의 청마루 밑에서 여자의 허연 손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나돌아  10여 년 전에 크게 지신을 밟았다고 한다. 수원지의 서편에는 거대한 옥개석이 흩어져 있어  이곳이 탑자리임을 드러내고 있다. 남아 있는 옥개석의 하나는 길이가 2m나 돼 탑의 측면 길이가  4m가 넘는 큰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탑재들은 수습이 안 되어 풀덤불 속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이곳이 신원사지라는 안내 팻말만 덩그러니 서 있어 이 일대는 거의  잊혀진 장소로 바뀌었다.  

 

귀교는 신원사의 북쪽 개울에 있다고 삼국유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 일대 주민들은  탑동수원지의 서북쪽 약 30미터 지점 서천에 옛날 귀교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 자리에는  80년대까지만 해도 '뚝다리'의 흔적인 듯 싶은 돌무더기들이 내를 가로질러 쌓인 채 흩어져  있었다.   뚝다리의 흔적으로 봐서 옛날 강물의 물길은 지금과 달리 김유신 장군묘가 있는 산밑을 흘렀던  듯하다.   이곳에 있었던 다리는 그 지은 솜씨가 특이하여 당시에는 귀신의 솜씨로 빚었다는 소문이 나  있기도 했다.

     

서출지__보름약밥의 유래 간직한 곳

  서출지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보름찰밥의 유래를 밝힌 '거문고의 갑을 쏘다(사금갑'의 전설을  간직한 못이다. 유사에는 이 못이 '남산동쪽 기슭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월성에서 남천을  따라 남산동편을 거슬러 오르면 오른쪽으로 부처골, 탑골, 미륵골 등의 계곡이 나타난다.

 

임업시험장을 지나면 화랑의 집이 나오고 조금더 오르면 통일전이 나타난다. 통일전의 동남편에  연못과 고옥이 눈에 뛴다. 이 못이 서출지라 알려져 있는 못이다. 이 못에 임해서 세운 정자는  1664년 임칙이 세운 이요당으로 그 마당에는 석조와 석등, 그리고 연화대석 등이 보인다.   이 못은 사적 138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서출지는 원래 이 못이 아니라, 이곳에서 남쪽으로 2백m 떨어진 못(양기못이라  불리운다)이라는 설이 이 일대 주민들에게 구전이 되고 있어 혼란을 느낀다.  

 

현지 주민들에 의하면 이 일대 남산리는 옛부터 풍천 임씨의 취락지였다. 현재의 서출지가  있는 마을은 큰집이고 양기못이 있는 마을은 작은집이 자손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제 당시 문화재를 등록할 때 원래의 서출지인 양기못이 너무 초라하여 현 이요당이 있는 못을  서출지로 잘못 등록해버렸다는 것이다.   '경주시지'(71년 발간)에도 그에 대한 언급이 있다. 즉 '이 서출지는 지금 남산록 이요당전의  연못에 의정되고 있으나 구비에 의하면 거기서 남쪽 1백m 되는 곳에 있는 양기못(통사에는  양벽제)이 그것이라 한다. 양기는 양피의 음전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거기가 바로  피촌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에 근거해서, 그리고 현지주민들의 주장에 따라 현 서출지는 잘못  지정되어 있다는 주장이 향토사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현 서출지는 통일전 옆에  있어서 학생들과 관광객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사소한 일 같지만 서출지의 원래 위치가 이곳이  아니라면 자칫 후손들에게 거짓을 가르치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다.

   

까마귀가 일러준 비밀
  정확한 서출지를 찾기 위해서는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신라 21대 비처왕 10년(488년)에 왕이 천천정에 행차했다. 이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다. 쥐가 사람처럼 말했다.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잘 살피시오" 왕이 곧 기사에게 뒤쫓게 했다. 기사가 가는 남쪽 피촌(지금의 양피사촌이니 남산 기슭에 있다)에 이르러 두 돼지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다가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길에서 헤매고 있으니 한 노인이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렸다.   그 겉봉에는 '이것을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가 급히 돌아와 왕에게 드리니 왕은 '두 사람이 죽느니 한 사람이 죽는게 낫다'고  떼어보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일관(좋고 나쁜 징조를 미리 예측하는 직책)이 "두 사람은 백성을  가리키나 한 사람은 임금을 가리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떼어보니 '거문고의 갑을 쏘라'고  쓰여 있었다. 왕이 궁에 들어가 거문고의 갑을 활로 쏘니 그곳에는 내전에서 분향하던 수도승이  궁녀와 몰래 간통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 사형을 당했다. 이때부터 해마다 음력 정월  15일을 오기일이라 하여 찰밥으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노인이 나왔던 그 못은 서출지라  불렸다.   이 얘기에 의하면 서출지는 피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피은편을 보면 염불사의  얘기가 나오는데, 이 얘기도 이 지역과 관계가 있다. 이 얘기에 의하면 남산 동쪽 기슭에  피리촌이 있고 그 마을에 피리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 절에 중이 있었는데 항상 아미타불을  염송하여 그 소리가 성 안까지 들렸다. 그래서 그를 염불사로 불렀다. 그가 죽은 후 그가 있던  피리사는 염불사로 이름을 고치고 그 절 옆에 있는 절 이름을 양피사라 했다.  

 

이런 설화를 종합해보면 서출지는 피촌(양피사촌)에 있었으며 양피서출지보다는 양기못이  원래의 서출지라는 설이 더 타당성을 갖는 것 같다. 양기못은 '양피제(양피못)'로 쓰는데 이는  양피사의 관련되어서 후대에 붙은 이름인 듯하다. 양기못의 바로 서쪽에는 거대한 3층 석탑  2기가 서 있다. 이 탑은 양피사지를 나타낸다. 이 탑은 경주 남산리 삼층 석탑(보물  제124호)이라 불리는데, 형식을 달리하는 쌍탑이 동서로 대립한 특이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동탑은 모전석탑의 일종으로서 큰 지대석 위에 8개의 석괴로써 입방체의 단층기단을 형성했고,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돌이며, 표면에는 장식이 없다.

 

서탑은 일반형 석탑으로  2중 기단 위에 3층석탑이다. 면석의 각면에 팔부신중상을 한 구씩 양각한 것이 특색이다. 이  절터에서 3백m 가량 떨어진 남쪽에는 역시 부서진 탑 2기가 있다. 이곳은 염불사지로 추정된다. 한국불교 연구원에서 간행한 '신라의 폐사 II'(1977년 간)에 보면 앞의 절터를 남산사지, 뒤의  절터를 개선사지로 추정하고 있으나 근거없는 추정인 듯하다.

   

서출지로 추정되는 양기못
  10여 년 전 필자가 이곳에 들렀을 때 이 마을에 사는 임복식 씨(당시 64세)는 "양기못은  양피못으로 불려왔다는 얘기를 어른들에게 자주 들었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이 못이 신라 때  못이라는 얘기도 전해 왔다고 말했다. 이 못은 원래 자그마한 연못이었으나 일제침략기에 2배  정도 확장하여 증축된 것이다. 양피사지 옆 문수암 선원에 있는 스님들도 "이 못이 원래  서출지였다는 말을 평소 주민들에게 자주 들었다"고 말했다. 한 주민은 "양기못은 원래 나무도  없고 정자도 없어 초라했고, 이요당이 있는 못은 주위에 나무도 있고 정자도 있어서 그럴듯하게  생겼기 때문에 그곳으로 잘못 정해져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요당이 있는 못이든 양피못이든 모두 같은 문중의 소유이기 때문에 주민들은  드러내놓고 양기못이 진짜 서출지라는 말을 하기를 꺼리는 듯 보였다. 자칫하다가는 문중간  갈등을 초래할까 겁내는 눈치가 역력했다.   양기못가에는 현재 산수재라는 암자가 있다. 이 암자는 마을에 있다던 것을 해방 후 이곳에  옮겨 지었다고 한다. 현 서출지로 정해진 이요당 마당의 석조와 석등 등은 모두 양피사지에서  옮겨온 것인 듯하다.   서출지를 중심으로 펼쳐진 '사금갑'의 전설은 민속학뿐만 아니라 불교학적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 설화이다.

 

이 설화에 의하면 소지왕 때 이미 신라에는 불교가 유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가 신라에서 공인된 것은 23대 법흥왕 때였다. 소지왕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다.  소지왕의 앞 임금이 자비왕이였는데 '자비'라는 말은 불교용어이다. 이 설화에 나오는 궁은  내궁으로 내제석궁을 일컫는다. 이 궁은 궁중의 별전으로, 불교 공인 전에 벌써 불교가 궁중에  침투되어 거기서 분수행사를 비공식적으로 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궁은 안압지와 반월성 사이에 있는 인왕파출소 바로 뒤쪽에 있었다고 한다.

     

감은사지와 대왕암__죽어서도 나라 지킨 문무왕
호국의 성지
  감은사지와 대왕암, 그리고 이견대가 있는 월성군 양북면의 동해안 지역은 옛부터 동해구로  불리웠으며, 신라 호국이념이 깃들인 성지일 뿐만 아니라 만파식적의 현장이다. 감은사지의 동쪽  대본해수욕장 앞 동해바다에 떠있는 대왕암은 신라 30대 문무왕의 해중릉 또는 산골처(유골을  뿌려놓은 곳)로 알려져 있다. 감은사는 그의 아들 신문왕이 부왕의 위업을 있기 위해 지은  절이다. 이 일대가 호국의 성지로 일반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67년 신라  오악조사단(한국일보사주관)이 동악인 토함산과 동해구 유적조사를 하던 도중 바닷속에서  능침(능의 자리)을 발견했다고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 능침의 발견으로 지금까지 건설로만  문무왕의 능으로 전해오던 것이 사실임이 드러난 것이라고 이 조사단은 흥분된 어조로 강조했다.   문무왕은 재위 21년(681년)에 죽었다. 그는 생전에 자주 지의법사에게 "나는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다. 죽은 후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동해구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 절의 완공을  못 보고 죽었으므로 그의 아들 신문왕이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체를 화장하여 동해에 안장  또는 산골하고, 감은사를 완공했다.  

 

삼국유사에는 이 절의 금당(절에서 불상, 혹은 고승의 영정을 두는 불당. 금으로 장식하여  지은 집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부른다.)밑에 동쪽을 향한 구멍을 뚫어 동해의 용이 이 절에 와서  돌아다니게 해놓았다고 기록해 놓았다. 현재 감은사지(양북면 용당리)는 쌍탑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감은사지는 1959년에 국립박물관이 주관하여 1차 발굴조사를 했으며, 80년대 초에  문화재연구소가 주관하여 사지전역을 발굴하여 옛 가람 배치의 전모가 드러났다. 이 절은  조사결과 정연한 쌍탑식 가람배치였으며, 남쪽으로부터 중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동탑과 서탑이  서 있었고, 그 정면에 금당이 서고 금당 뒤에 강당이 있었으며, 중문과 강당을 연결한 회랑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중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금당 밑의 구조였다. 삼국유사에 적힌  대로 금당 밑에 구멍을 파서 문무왕의 화신인 동해 용이 드나들었다는 얘기의 근거가 과연  있는지의 여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발굴 결과 금당의 중앙에는 공간이 있었으며, 물이 드나들  수 있는 수조장치가 드러나 세인을 놀라게 했다.

   

수중에 잠긴 능
  감은사지에 서면 동쪽에 바로 대왕암이 보인다. 대본해수욕장 왼편으로는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감은사지 앞을 지나 바다로 흘러드는 대종천이 있다. 추측컨대, 대종천의 물길이 옛날에는  감은사 바로 밑을 흘렀으며, 동해 용은 대종천을 거슬러 올라와 감은사 금당 밑의 구멍을 통해  오갔음직하다. 절 남쪽에는 용담이라 불리는 못이 아직 남아 있다. 이 못과 절이 연결되어 용이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됐다고 본다면, 대종천과 이 못이 연결됐으리라는 추측을 쉽게 해볼 수  있다.  

 

설사 이러한 얘기가 허황된 거짓이라 할지라도, 왕의 능침이 있는 바다와 절터를 이런 식으로  연결하고, 그 연결의 의미를 호국의 의미로 끌어올리려는 신라인의 배려가 놀랍다. 이러한  연관성 때문에 이 일대의 지명도 여기에서 연유된 게 많다. 절 뒷산을 용당산이라 하며,  감은사지가 있는 마을을 용당리라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감은사를 떠나 동해로 나와 대본국민학교가 있는 언덕에 오르면 이견대가 있다. 이견대는 용의  출현을 바라보던 누각이었다고 한다. 이견대는 역시 신라오악조사단에 의해 그 터가 발견되어, 

 

80년대 초에 새로 누각을 세웠다. 이견대에서 바라보면 바로 눈앞에 망망대해가 펼쳐지고,  오른편 대종천을 건너 대본해수욕장이 한눈에 들어오며 해수욕장 앞바다에 대왕암의 돌섬이 솟은  것이 보인다. 저 돌섬이 삼국을 통일한 불세출의 영주 문무왕의 무덤이거나 산골처라 생각하니  감개가 새롭다. 대왕암은 겉으로 보기에는 돌섬으로 보이나 섬에 오르면 그 교묘한 구조에  놀란다. 돌섬의 중앙을 깊숙이 파내어 동서남북 사방에 수로를 뚫었으며, 바닷물은 동쪽 수로로  들어와 서쪽 수로로 빠져나가도록 높낮이를 잡고 있어 그 안에 가득 찬 바닷물은 파도도 없이  그지없이 맑다. 문무왕의 뼈는 사리함(석관)에 넣어져 그 청정한 물 밑에 안치했다고 발견당시의  조사단은 주장했다.  

 

석관으로 추정되는 돌(길이 3.7m, 폭 2.06m, 높이 4.45m)의 밑은 역시 교묘하게 배수로 같은  게 만들어져 있다. 이것이 정말 문무왕의 무덤이라면 이러한 수중릉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무덤을 수중에 잠기도록 한 것은 용으로 변해서 나라를 돕겠다는 문무왕의 유지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만파식적의 현장
  대왕암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호국 이념을 간직한 설화들이 꽤 전해온다. 특히 감은사지가  낙성된 후 신문왕은 이곳에서 '만파식적'이라는 신비한 피리를 얻는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피리는 동해 용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마음을 같이하여 내린 보물이며,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올 때는 비가 개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졌다고 한다.

 

이 피리를 얻는 데는 이적이 따랐다. 감은사를 세운  이듬해에 동해안에 작은 섬이 떠서 감은사로 오는데, 섬에는 대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섬은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로 되었다. 두 섬이 하나로 합칠 때 섬의 대나무도  하나로 합쳤으며, 그때 그 대나무를 베어 피리를 만든 것이었다. 이 설화의 사실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이 설화를 낳게 한 현장이 이곳이라는 사실이 더 관심을 끈다.   

 

이 일대가 성역이라는 것은 여러 면에서 비쳐지고 있다. 당시 이 지역을 조사했던  신라오악조사단은 토함산 석굴암 대불의 시선이 이곳 대왕암이 있는 동해구 유적지대에 닿아  있음을 알아내고 크게 주목했다. 고대에 절을 창건할 때는 그 방위문제가 가장 중요한 만큼  석굴암과 동해구 유적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당시 조사단의 최대  관심사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석굴암을 조성한 김대성이 당시 국정을 잡았던 김씨 왕족임에  주의, 그가 선조들의 묘역을 위해 석굴암을 지었으며, 그래서 석굴암이 동해구에 모신 문무왕릉  등 김씨일족의 묘역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 이 조사단의 주장이다. 동해안 지역은 문무왕  이외에도 34대 효성왕이 동해에 산골 되었던 만큼 이들 역대 군주를 본받아 김씨 일족들이  동해를 장지로 택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문무왕이 죽은 후에  석굴암을 비롯한 많은 유적들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곳 동해구와 관련을 가질 만큼 이곳이  신성시됐다는 것이다.

     

흥륜사지__이차돈이 순교한 절

서라벌 최초의 절
  흥륜사는 서라벌 최초의 가람(절)이며 창건자는 아도이다. 삼국유사에는 아도는 신라시대  비처왕(서기 479__499년)때에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대인 일선군(현 선산국)에 포교를 위해  숨어들었으며, 차차 경주에 그 모습을 드러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왕실과의 관련을  맺으면서 비로소 천경림에 흥륜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특히 연대기록에  있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불교전파와 흥륜사 창건의 확실한 시기를 알 수는  없다.

 

아도 이전(19대 눌지왕 때)에 묵호자라는 중이 역시 신라에 들어왔다는 기록으로 봐서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눌지왕(서기 427__457년)때부터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아도에  의해 띠풀로 지붕을 한 흥륜사가 세워졌으나, 아도를 비호했던 왕이 죽자 불교배척의 바람이  불어닥쳐 흥륜사도 없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불교는 다시 지하로 잠입하며, 그후 법흥왕 14년  이차돈의 순교로 비로소 흥륜사가 다시 창건된다.

 

신라불교의 초전법륜의 터(최초의 절터라는  뜻)는 이렇듯 우여곡절을 거쳐서 이룩되었다. 이 절을 완공하고 신라에 불교를 공인한 진흥왕은  만년에 출가하여 이 절에 머문다.   아도가 머물렀던 초라한 초가집, 이차돈이 순교한 이 절은 그리하여 신라인의 가장 중요한  사찰로 자리잡으면서 왕실의 원찰로 신라에 '절들이 별처럼 벌여 있고, 탑들이 기러기 행렬처럼  연이어 있는'(삼국유사) 불교문화의 융성을 일으킨 첫 사찰로 떠오르게 된다.

   

의문점이 많은 절터 지정
  이처럼 중요한 사찰인 흥륜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흥륜사는 조선 때에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현재 학계와 문화재 당국에서는 흥륜사를 경주시 사정동 281번지에 있는 절터로 잡고 있다. 오릉의 북편 남천 건너편에 있는 절터이다. 이곳은 사적 15호 지역으로 보호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절터는 흥륜사지가 아니라는 주장이 현지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즉 이 절터는  영묘사터이며, 원래의 흥륜사지는 고속버스 터미널 남쪽의 경주공고 자리라는 것이다. 흥륜사와  영묘사는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천왕사, 담엄사와 더불어 삼국유사에 나오는 '7처가람'의  절이다. 삼국유사에는 흥륜사가 금교 동쪽 천경림에 있으며, 영묘사는 사천의 꼬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사천은 바로 남천을 가리킨다.(삼국유사 '원효불패조') 그렇다면 '현 흥륜사터의 위치가 바로 사천의 끝(고리)에 해당되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흥륜사지는 그 동안 두 차례 발굴했는데, 발굴 결과 절터가 모래밭으로 되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남천의 하류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더욱 그 자리에서는 그 동안 많은  와당조각들이 출토되었는데 그중 여러 개는 '대령묘사' '영묘지사'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들 명문이 새겨진 기와파편은 김태중 씨(경주문화고교), 최기주 씨(근화학교), 경주박물관 및  이름을 알 수 없는 동국대학생 등이 보관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봐서 이 절터는 영묘사지이지  흥륜사지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특히 명문와당의 출토는 이  사실을 거의 결정적으로 밑받침해주고 있다. 이 지역의 절터를 개인적으로 조사해 온 김원주  씨(불국사 신라여관 주인)에 의하면 "영묘사지가 흥륜사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일본인들에  의한 짓이었다"는 것이다. 즉 일제 침략 당시 사정동 일대를 조사하던 중 이 일대가 '흥륜들'로  불리고 있었는데, 절터라곤 이 곳밖에 보이지 않아 현 영묘사터를 흥륜사지로 단정해 버렸다는  것이다.
   

원래 터는 경주공고 자리  

원래의 흥류사지로 추정되는 경주공고 자리는 완전히 흙에 묻혀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30여 년 전 경주공고의 운동장을 닦던 도중 흙에 묻힌 절터가 비로소  발견되었다. 당시 그 절터의 굉장함에 놀랐으나 미처 발굴할 겨를이 없어 그 위에 흙을 덮고  그대로 운동장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곳이 흥륜사지였을 거라는 추측은 여러 문헌을 비교하여  확실시되고 있다. 삼국유사 '미추왕조'에 보면 '능(미추왕릉)은 흥륜사 동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경주공고는 미추왕릉의 서쪽에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 나오는 흥륜사의 위치를 보면, 이 절이  '금교동쪽'으로 되어 있는 만큼 '이 다리는 서천 위에 놓였으며, 그 위치가 경주공고 가까운  서편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는 것이다.  

 

흥륜사는 진흥왕이 만년에 귀의한 절이다. 또한 영흥사는 진흥왕의 왕비가 귀의한 절이다. 삼국유사에는 영흥사가 삼천지에 있다고 되어 있다. 삼천지란 바로 남천과 기린내 그리고  건천지역에서 흘러드는 물이 합쳐지는 지역이다  그곳은 경주공고 가까운 서편이었으며, 그  강바닥에서 거대한 절터가 발견되어 그곳이 영흥사였을거라는 추측이 나온 바 있다.   왕과 왕비가 귀의한 흥륜사와 영흥사는 지척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어 이 또한 흥륜사가  경주공고 자리였으리라는 사실을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 "영묘사는 남천 가에,  흥륜사는 서천 가에 있어야 논리적으로 맞는다"고 윤경렬 씨(민속공예가)는 주장하며, 그런  점에서 현재의 흥륜사지는 잘못 지정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확실한 자리고증의 필요성
  영묘사는 오릉에서 포석정 일대에 많았던 귀신(두두리)들을 위해 지은 절로 다른 절과는 달리  무속적인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절이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인면문 와당의 미소짓는 얼굴은  무속적인 면과 닿아 있는 특이한 유물이다. 15세기 말에 쓴 김시습의 시에 보면 흥륜사는  보리밭이 되었으며 석조만 외로이 남아 있다고 되어있다.

 

최근 흥륜사지(영묘사지) 발굴 결과  쌍탑의 탑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탑지는 바로 목조탑의 탑지임을 보여 주고 있다. 탑은 바로  부도를 뜻하는 만큼 이 곳이 영묘사지임을 뒷받침해준다는 것이 이 지역 향토사학자들의  주장이다.   조선 인조 때 경주 부윤이 옮겼다는 흥륜사지의 석조는 바로 경주공고 자리에서 가져간  김시습이 얘기했던 그 석조인 듯하다. 석조는 지금 경주박물관에 옮겨다 놓았다.  

 

흥륜사는 서라벌 최초의 가람이었던 만큼 그 확실한 자리 고증이 있어야겠다. 현재의  흥륜사지가 기실은 영묘사지이며 그것을 밑받침할 만한 자료가 출토된 이상 문화재당국은 그  점을 보다 면밀하게 조사하여 확실한 자리를 밝혀야 할 것이다. 더욱 그것이 일제침략 시대에  함부로 정해진 것인 만큼 민족사의 바른 이해와 주체성있는 사료제시를 위해서도 이의 시정이  시급하다고 현지의 뜻있는 사람들은 주장하고 있다.

     

구지봉__가락국 수로와의 출생지

가야국의 터전인 김해
  김해는 옛 가락국의 터이다. 부산에서 구포대교를 건너면 낙동강하구의 '델타'가 이룬  김해평야가 질펀하게 펼쳐진다. 김해는 이 비옥한 하구에 터를 잡은 유서 깊은 고장이다. 그러나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를 보면 2백 년 전만 해도 지금의 김해평야는 낙동강 하구의 강바닥에  불과했다. 오랜 세월 동안 강바닥이 퇴적되고 한편으로는 간척사업이 이루어져 평야를 이룬  것이다.  

 

김해는 수로가 왕업을 닦을 때만 해도 '여뀌잎처럼 협소하나 지세가 빼어나 16나한이 살 만한  곳'으로 일컬어졌던 곳으로, 아득한 옛날에는 강변의 작은 분지였다. 그러나 한반도 남부를  가로지르는 낙동강의 큰 강 하구라 이곳에는 옛날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기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의하면 이곳에는 원래 아홉 추장이 백성을  거느리고 살았으며 '산이나 들에 자리잡아 우물을 파서 물 마시고 밭을 일궈 먹었다'고 한다. 이들 아홉 추장인 9간은 신라의 6부장과 같은 부족장들이다. 그러다가 1세기 중엽(서기 42년)에  비로소 수로라는 인물이 출현하여 이들 부족들을 통합, 가야국으로 출범한다.

   

알에서 태어난 수로왕
  수로의 출현은 여느 개국설화와 마찬가지로 신화적이다. 그 출현지는 수로왕릉이 있는 김해시  서상동의 숭선전 서북쪽 8백m 지점에 있는 구지봉이다. 후한 광무제 18년(신라 유리왕 19년,  서기 42년) 3월 계욕일(3월의 첫 사일'육십갑자로 된 일진이 뱀의 형세를 갖는 날'에 목욕하고  물가에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는 풍습)에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주민 2백여 명이  모여 들었다.

 

소리는 사람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이곳이 어디인지 물었다.   9간들이 구지임을 밝히자 "황천께서 내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셨다. 그대들은 산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이렇게 노래하라 '거북아 거북아/머리를  내밀어라/내밀지 않으면/구워서 먹을래' 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어라. 이로써 대왕을 맞아  기뻐 춤추게 될 것이다." 9간들이 그 말대로 노래하고 춤추니 하늘에서 붉은 보에 싼 금합이  달린 보랏빛 줄이 내려왔다. 금합을 열어보니 여섯 개의 금빛 알이 들어 있었다. 알들을 아도간의  집에 두었는데, 이튿날 알들은 여섯 이이로 변해 있었다. 처음에 태어난 아이를 수로라 했다. 수로는 그 달 보름에 즉위했다.

 

나라를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 불렀으며,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돌아가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이상이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의 건국신화이다. 이 얘기대로 받아들인다면 가야국은 서기  42년 수로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기술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병도 박사는 이 설화를 가락국의 개국신화가 아닌 6가야 연맹설화로 파악한다.

 

즉 가야는 더  오랜 변한의 상고적에 이미 부족국가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서기 42년에 비로소 가락국의 왕  수로를 맹주로 하는 연맹체가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또는 이 설화는 북쪽에서 이주한  유이민집단인 수로족과 농경과 어로에 종사하던 토착씨족집단인 허왕후족들이 연맹을 결성하는  과정을 상징화한 신화로, 뒤에 보이는 수로와 허황옥과의 결혼 이야기와 결부시켜 파악하려는  견해도 있다.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는 대부분 난생 설화이다. 고구려의 동명왕, 신라의 혁거세왕  등의 탄생 설화가 그것인데, 이는 태양숭배와 통치자의 외국유입설 또는 추대즉위설을 포함하고  있다. 수로왕의 경우에도 새로운 통치자가 외부로부터 들어왔으며, 그 때문에 '카리스마'적인  신화설정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구지봉의 위치
  이 설화를 간직한 구지봉은 김해시의 뒷산인 분산(또는 분성산)이 뻗어내린 산봉우리이다. 해발 2백m 정도의 나지막한 이 봉우리 위에는 '대가락국태조왕탄강지지(대가야의 첫번째 왕이  하늘에서 내려와 태어난 곳)'라 새긴 비가 서 있으며, 80년대 이전 조성한 탄생지가 있다. 탄생지는 화강암으로 궤 위에 얹힌 여섯 개의 알을 용들이 얽힌 채 둘러싸고 있는 모양을  조각해서 조성했다.

 

구지봉은 동편으로 뻗친 능선을 따라 분산과 이어진다.   지금은 동편으로 창원과 마산으로 가는 도로가 뚫려 분산과 구지봉이 끊어져 있지만, 산세는  분산이 거북의 몸뚱이가 되고 구지봉이 거북의 머리가 되어 전체적으로 거북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분산과 구지봉의 사이도로는 나중에 터널식으로 조성되어, 터널 위로 하여 분산과  구지봉이 연결되도록 해놓았다.   분산 기슭, 구지봉에서 분산으로 가는 터널을 넘으면 바로 동편에 수로의 왕비인 허황옥의  능이 있다.

 

이 능 지역은 현재 조성이 잘 되어 김수로왕릉과 함께 김해지역의 주요 관광명소로  바뀌었다.   분산 위에는 산성이 남아 있으며, 산성의 남쪽 약 1백m 떨어진 곳에 해은사가 있다. 해은사는  옛 성조암의 터이다. 2백 년 전에 성조암이 불타 그 자리에 지은 절이 해은사이다. 이 절의  어귀에는 뿌리 둘레를 석축으로 싼 몇 아름드리 느티나무(당수목)가 서 있다. 절 안에는 해마다  월 단오일에 당산제를 모시는 사당이 있었으나 1979년 해은사를 개축하면서 사당이 너무 낡아  헐어버렸다고 한다.

 

이 사당에는 수로와 허왕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으며, 영정 앞에는  허왕후의 전설이 깃든 망산도에서 가져왔다는 '봉돌'이라 불리는 영험한 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정은 사당이 헐린 후 절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봉돌은 10년 전에 왕의 영정 앞에 이런  불경한 돌을 놓아선 안 된다고 반대가 일어 다른 데로 옮겼다가, 지금은 하황옥의 능 앞에  비각을 세워 안치해 놓았다.   김택규 씨(전 영남대 교수)는 분산에 있는 이 사당 자리는 성황신을 모신 자리이며, 해은사는  재래신앙의 제사를 지내던 장소(성황사)였던 곳에 후대에 이르러 세워놓은 절이라고 파악한다. 특히 분산의 성황당은 분산이 김해의 진산인 점으로 봐서 그 성격이 호국신을 모신 사당임이  분명하다. 분산 위에 있는 거대한 당수목은 보다 원초적인 신목의 잔영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가락의 9간들이 '즐거이 춤추고 노래하며' 수로를 맞이한 장소(구지봉)는 바로  이곳이라 볼 수 있다고 김택규 씨는 말한다. 그러면 현재 구지봉으로 되어 있는 성지(원래의  구지봉인 분산정)를 올려다보면서 제사를 지내던 '굿하는 장소'로 볼 수 있다고 풀이한다.      

   

굿형식과 많이 닮은 설화
  수로왕의 탄강설화는 그 내용이 굿의 형식과 흡사한 점이 많다. 한국의 굿은 비의와 음복의  이중 구조를 갖는다(김택규씨 견해)고 할 때 '가락국기'에 보이는 '소리'(풀이)와 '놀이'는 굿의  형식과 많이 닮았다. 이로 미루어보건데 분산 위 성황당에서 이루어지던 굿은 가야인들이 봄을  맞아 풍요를 비는 굿이었으며, 또는 조상신을 위한 조령제로 볼 수도 있다. 그것이 수로왕  탄생설화의 구조를 제공했을지도 모른다.   구지봉을 중심으로 김해에는 수로왕과 허왕후의 결혼과 관련되는 설화를 간직한 지역이 많다. 그러나 옛날 바다였던 곳이 평야로 바뀐 현재 그 지역들을 밝히기는 퍽 힘들다. 수로의 능은  숭선전 안에 있다. 옛부터 능에 딸린 전답이 많았다고 삼국유사에는 적혀 있지만, 지금도 1만  평의 능 전답을 갖고 있다. 능 전답의 터로 보이는 '진상답'(주촌) '진상 미나리 '(서상동일대)  등의 들 이름이 전해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김해__국제결혼의 현장

인도의 공주 허황옥
  김해는 김수로왕과 왕비 허황옥간의 국제결혼이 이루어진 낭만적인 고장이다. 삼국유사에는  허왕후가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임을 밝혀놓았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허왕후는 신랑인  수로를 만나기 위해 2만 리가 넘는 머나먼 바닷길을 항해해 왔다는 얘기가 된다. 삼국유사에는  아득한 1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로맨스가 그야말로 극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설화는 초기의  가야국이 벌인 남방제국과의 해상무역 활동이 빚어낸 로맨스일지도 모른다.   수로왕은 신하에게 왕후가 될 사람이 오는 길목을 지키라고 명령한다. 서기 48년 음력 7월  27일이었다. 그리하여 유천간은 빠른 매와 준마를 가지고 망산도에 대기하며 신귀간은 승점에서  기다린다. 이윽고 붉은 돛과 기를 단 배가 북쪽을 향해 오는 것이 보인다. 이에 유천간 등이  망산도에서 불을 들어주니 배에 탔던 사람들이 상륙한다. 신귀간 등이 왕에게 알리고 가락국의  중신들이 허황옥을 영접한다. 그러나 허왕옥은 "내가 한번도 그대들을 본 적이 없는데 어찌  경솔하게 따라가겠는가"하고 말한다. 이에 왕궁에 이 사실을 알리자, 수로는 곧 대궐 밖 60보쯤  되는 곳에 행재소를 꾸미라고 명한다.

 

황옥은 곧장 근처의 쭈삣한 산 위에 올라가 비단옷을 벗어  그것을 폐백으로 산신령에게  보낸다. 그런 다음 황옥은 수로왕이 있는 행재소로 다가간다. 그들은 곧 유궁에 든다. 그곳에서 '마침내 합환의 기쁨을 이루어 맑고도 아름다운 이틀 밤과  환한 낮을 보내고'(삼국유사) 2박3일 만인 8월 1일에 본궁으로 들어간다. 삼국유사에는 허왕후가  처음 배를 대었던 나루를 주포촌, 비단옷을 벗은 언덕을 능현, 붉은 깃발이 들어온 해변을  기출변이라 했음을 적고 있다.

   

평야 속에 묻힌 로맨스의 현장
  수로와 허왕후의 2박3일의 신혼꿈이 무르익은 이 얘기의 현장은 어디일까. 김해 주위에는  허왕후가 배를 대고 상륙하여 수로왕을 향해 다가간 옛자취를 현재 거의 남기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지형이 많이 변해 옛날에 바다이던 곳이 지금은 육지로 바뀌어 버렸다. 낙동강  하류라 오랜 세월 동안 물에 떠내려온 흙이 쌓여 퇴적된 데다가 간척사업으로 바다를 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수로와 허왕후의 로맨스의 현장은 태반이 김해평야 속에 묻혀  버렸다고 할 수 있다.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보면 조선 때만 해도 김해 앞까지  바다(강하구)였으며 김해 앞바다에는 네 개의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섬들이 대부분 평야에 묻혀 그 봉우리들만 뾰족하게 들 가운데 솟아 있을 뿐이다.  

 

우선 처음 배를 발견한 망산도는 어디일까. 현재 망산도는 김해에서 20km이상 남쪽인 창원군  응동면 용원리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으로 되어 있다. 속칭 '부인당'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마을에는 유주각이라는 사당이 있다. 사당 안에는 '대가락국태조왕비문태보허씨유주지지'라 새긴  비석이 있다.   허왕후가 배를 댄 곳을 기념하기 위한 표시인 셈이다. 용원리 뒷산은 거북산이며, 이 산에서  흘러 용원리 마을을 통과하여 바다로 흘러드는 용원강의 하구에 망산도가 위치한다. 망산도는  썰물 때는 물이 빠져 뭍과 연결되며 밀물 때는 바닷물에 둘러싸인다.

 

이 섬의 남쪽 1백m 바다  속에는 석주(쪽박)섬이 있어서 허왕후가 돌배를 타고 왔다가 파선한 형해라고 이 마을의  주민들은 믿고 있다.   이 마을의 사당에는 음력 3월 15일에 김해 김씨 종손들에 의해 제사가 올려진다. 이 사당은  기우제를 지내는 당집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을 삼국유사에 나오는 망산도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은 듯하다. 무엇보다도  김해에서 많이 떨어져 있으며, 근처에 높은 산이 있어 '궁성 남쪽 섬에서 배를 보았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모순된다.

 

그렇다면 망산도는 어디일까. 대동여지도를 보면 김해 앞바다  가운데 있는 45개의 섬 중에 '망산'이라 표시된 섬이 보인다. 현재 김해평야 가운데 솟은 송산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처음 배를 발견한 망산도는 현재 송산의 기슭이며, 유천간이 대기하다가  불을 들어 표시한 곳은 땅 속에 묻혀버렸음을 알 수 있다. 왕후가 처음 배를 댄 곳인 주포도 잘  알 수 없다. 일부 학자들은 주포가 낙동강 하구, 최후의 우회지역인 녹산면 생곡리 장낙나루로  보기도 한다.  

 

김해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고장이다. 80년대 초에 들렀을 때만 해도 과거의 지형이  너무나 변해버렸고, 또 변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웠다. 최근 다시 들렀을 때, 시가지의 변모가 너무  급격하게 이루어져 다시 한번 어지러움을 느껴야 했다. 특히 망산도가 있는 용원리 지역은  상전벽해의 대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만을 이루고 있는 신호리와 용원리지역 일대의 광활한  바다가 간척사업으로 묻혀버렸다. 삼성자동차 공장과 그 협력업체들이 그 곳에 들어설 예정이다.  

 

망산도는 간척사업이 이루어지는 속에서 겨우 바다에 접해 형체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바다는 극심하게 오염되어 버려 망산도는 시궁창 위에 떠 있었다. 망산도가 있는 인근의 용원리  지역은 유흥가가 조성되고 있고, 주변의 산들도 깎아 내리고 있어서 옛날의 풍경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부족연맹 설화의 가능성
  그 다음 배에서 내린 허왕후가 산신령에게 폐백을 드린 능현은 어디일까. 현재 그 위치도  미상이다. 그러나 옛 지도인 여지도서의 김해부지국에는 능현이 명월산 줄기에 표시되어 있다. 명월산은 지금의 김해 부근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대동여지도에는 낙동강 하구의  바다에 임한 산이 명월산으로 표시되었다. 오늘날 지도와 대조해본다면 옥녀봉이 있는 산에  해당될 듯하다. 이곳에는 명월사지가 있다.

 

능현은 이 산의 동쪽 높은 봉우리(해발 3백 20m)로  추정된다. 이 언덕에서 응달리 쪽으로 뻗친 '장유치'고갯길을 걸어 왕비는 수로왕의 행재소  쪽으로 갔다고 추측이 된다. 행재소의 위치도 미상이다. 삼국유사에는 궁궐에서 60보라 되어  있다. 1보를 1백 10cm로 잡을 때 궁궐 밖 70m 지점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수치는 믿기 어려워  60보는 6천 내지 6백 보의 오기라는 주장이 많이 나오고 있다.  

 

왕의 행재소에 이른 허왕후는 곧 인사를 한 후 왕과 함께 유궁에 든다. 유궁은 글자대로라면  휘장을 친 궁전이란 뜻이지만 신방에 휘장을 친 고사로 미루어 신혼을 위한 궁으로 보인다. 유궁의 자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옛 왕후사 자리이다. 왕후사는 바로 수로와 허왕후의  신혼자리에다 후대(가야의 김질왕대)에 세워진 절이라 되어있다. 수로왕릉을 모신 숭신전의  전지에는 '왕후사는 현 김해읍에서 남쪽 30리 지점인 김해군 장유면 응달리 태정마을 뒷산에  있다'라 기록되어 있다. 현재 장유암이 있는 자리이다.  

 

이상으로 미루어보면 왕후는 능현에서 '장유치'고개를 넘어 응달리에 이르며, 곧 왕의  행재소로 갔다가 그 근방에 임시로 세워진 신방으로 옮겼다는 얘기가 된다.   이처럼 수로와 허왕후와의 '로맨스'가 깃든 현장은 추측으로만 찾을 수밖에 없도록 모든  지형이 변했다. 그러나 이상의 지형고증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님을 현지에 가보면 느낄  것이다.   그 동안 이 일대를 답사하여 옛 자리를 고증하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들의 자료를  분석하여 더욱 확실한 자리고증이 세워졌으면 한다. 수로와 허왕후의 결혼을 삼국유사에서는  국제결혼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둘의 결혼은 북에서 내려온 선진  철기 문화를 가진 수로족과 이 일대에 터를 잡고 농경과 어로에 종사하던 허후족들이 연맹을  결성하는 과정이 미화된 설화롤 보는 견해도 있다.

     

모례샘과 도리사__고구려접경 신라불교의 전래지
불교포교의 방해세력인 지방호족

  구미시 해평면의 도리사는 삼국유사에 아도설화와 함께 신라의 첫 사찰로 소개되고 있다. 도리사는 냉산(또는 태조산)의 정상 가까운 곳에 선산의 넓은 들과 낙동강을 내려다보며 앉아  있다. 냉산은 왕건이 정상에 숭신산성을 쌓고 견훤과 싸운 곳이다. 지금도 정상에는 50m 정도의  석축이 남아 있다. 도리사에서 숭신산성과 아도가 열반했다는 금수굴, 낙산리 3층석탑을 잇는  4km의 등산로는 고사목군락과 기암절벽 등이 어우러진 솔바람소리 그윽한 산길이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9대 눌지왕(427__457년)때이며, 공인된 것은 23대 법흥왕  14년(527년)이다. 전래되고부터 공인되기까지 근 1백년이 걸린 셈이다. 신라의 불교는 대부분  고구려를 통해 들어왔다.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지역인 구미 해평지역(선산군)일대가 그  통로였다. 이 통로를 통해 묵호자 아도 등의 초기 포교승려들이 잠입해 들어와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받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계속했다.

 

고구려나 백제에 불교가 들어갈 때는 별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왕실에서 쌍수를 들어 환영할 정도로 순탄했다. 그런데 유독 신라에서만 불교가  공인되기까지 1백 년이 걸린 이유는 무엇일까. 더욱 그 기간 중에는 이차돈이 순교라는 피의  과정이 있어야만 했다. 이는 신라가 지리적으로 외진 동쪽에 위치하여, 고구려나 백제보다도  고유신앙을 더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초기의 6부장과 같은 강력한 지방호족 세력들이 잔존해 있어서 왕실의 힘을 견제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추측해볼 수도 있다.

 

다소 억지스런 추측이지만 신라의 왕실은 재래적인 신앙을  고수하려는 이들 지방호족들을 규합할 정신적인 지주로서 불교를 채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하여 불교를 공인하려는 왕실과 이를 배척하려는 지방호족과의 갈등이 불교포교를  방해했을 가능성이 짙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차돈의 순교'는 왕실이 불교를 공인할 명분을  마련하기 위해 벌인 '어마어마한 정치 드라마'일지도 모른다. 실제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신라에서 공인되며, 곧이어 즉위한 진흥왕에 의해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된다.

    

초기 불교 포교의 거점
  이처럼 중요한 정치적 사건을 불러일으킨 불교는 공인 전까지만 해도 구미시 도개면과 해평면  일대를 거점으로 하여 신라왕실을 오락가락했다. 이 일대는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지대였다. 또한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었던 만큼, 승려들이 포교를 목적으로 밀입국하기에  안성마춤이었다.   눌지왕 때 묵호자라는 승려가 고구려로부터 국경을 넘어 일선군(현 구미시 도개면 일대)으로  잠입해 들어왔다.

 

그는 곧 모례(모체 또는 모록)의 집 지하실에 숨어들었다. 묵호자는 마침  신라의 공주가 병이 났을 때 그 병을 치유한다는 구실로 서라벌 왕실에 잠시 모습을 나타내지만,  곧 행적을 감추어버린다. 그 후 21대 비처왕 때에 아도라는 승려가 시종자 3명과 함께 역시  모례의 집에 숨어든다. 아도는 그곳에서 수년 만에 죽고, 시종자 세 사람이 그곳에 남아 경률을  강독하며 포교활동을 벌인다.   이상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초기의 포교얘기이다. 삼국유사에는 이에 덧붙여 아도의 비문을  소개하고 있다. 비문에 의하면 아도는 고구려인으로 5세에 출가, 15세에 위나라로 가서  현창화상에게 배운다.   19세에 귀국하여 어머니의 명에 따라 불교포교의 임무를 띠고 신라로 들어온다. 그때가 미추왕  2년이었다.

 

그는 서라벌에 기거하면서 왕에게 불교승인을 요청했으나 강력한 불교반대 세력으로  인하여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곧 일선군 모례의 집으로 피신한다.   그 이듬해 공주의 병이 심하자 아도는 대궐로 들어가 병을 치유한다. 이로 말미암아 왕의  허가를 얻어내어 천경림에 띠풀로 지붕을 인 흥륜사를 세운다. 그러나 얼마 후 미추왕이 죽자 곧  불교배척의 바람이 불어닥쳐 아도는 다시 모례의 집에 피신하여 그곳에서 죽는다.  

 

이상의 비문에서 밝힌 아도의 얘기는 연대기술에 의문되는 점이 있다. 아도가 흥륜사를 지은  것이 미추왕 3년(264년)이라 하나, 이는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서기 372년보다 근 1백년이  앞선다. 그러므로 앞 (삼국유사)에서 본 것처럼 아도는 묵호자가 온 이후인 21대 비처왕 때  신라에 왔다고 봄이 타당할 듯하다. 어쨌든 묵호자나 아도는 신라 불교의 개척자들이며, 모례는  그 후견인이었던 듯하다. 이들의 얘기는 눌지왕 이후 법흥왕까지 1백 년 동안 숱하게 이루어졌던  승려들의 포교활동 중 대표적인 것으로 삼국유사에 수록된 것 같다.

   

풍부한 초기불교의 유적지들
  신라불교의 발상지인 구미의 도계 해평지역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초기 불교의 유적이 꽤  있다. 도개면 도개리에는 모례의 집터임을 알려주는 모례샘이 있으며, 샘 주위로 모례와 아도의  행적을 떠올려주는 설화들이 많이 깔려 있다. 해평면 냉산 정상부근에 있는 도리사 역시 아도의  자취를 간직한 절이다.  

 

모례샘은 신라초기에 만들어진 우물로 최근까지도 마을의 중심부에 자리하여 주민들의 중요한  급수원으로 쓰였다. 지금은 집집마다 상수도가 들어서서 식수로 쓰여지지는 않고, 샘 주위의 몇  집이 허드렛물로 쓰고 있을 뿐이다. 우물의 모양은 특이해 약 두 길의 깊이 위에 길이 1.2m,  높이 40cm의 화강암 판석을 우물 정자 형으로 서로 얽어맨 모양이다.   이 마을 입구와 앞들에는 계주석(배를 매어놓은 말뚝)이 두 개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모례의 집이 배가 떠내려가는 형상이라 해서 떠내려가지 못하게 매어두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이 마을의 한 노인은 설명한다. 이 마을에 전해오는 설화에 의하면 아도는 당시 모례의 집에  신분을 숨기고 머슴으로 일했다. 모례는 부호였다. 아도는 소 1천 마리와 양 1천 마리를 길렀다. 3년 후 모례로부터 품삯을 받아 냉산 기슭에 절을 세웠다. 그 절에는 겨울 눈 속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절 이름을 도리사라 한 것은 그 때문이다.

   

도리사의 위치
  이 마을의 동편 청화산 골짜기는 지금도 '우실' 또는 '소천골'로 불린다. 남쪽 냉산 기슭을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마을 동편의 다곡 마을은 옛날 모례집에서 먹이던 소의 외양간터라는  얘기도 전해온다. 마을 동편의 산기슭에는 아도가 혼자 독경하던 절터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흔적은 없다.   도리사는 해평면 소재지에서 북쪽 선상행 길을 따라 8km쯤 가다가 개울을 따라 오른쪽으로  4km쯤 걸으면 닿는 냉산 정상 가까운 곳에 있다. 지금은 입구에 '해동최초가람성지 태조산  도리사'라 쓰여진 일주문이 서 있다. 입구에서 절 아래까지 포장이 되어 있다.

 

도리사는  신라불교의 개산지이며 아도가 처음 불법을 설법한 '초전법륜의 터'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아도의 사적비(조선 인조 17년 건립)가 있으며, 고려 때의 화엄석탑(보물 4백 70호)과  세존사리탑이 있다.  1976년에 이 사리탑에서 사리가 나와 도리사는 한 때 크게 알려졌다. 그러나 원래의 도리사터는 냉산 아래 (현 주차장터)라고 한다. 지금도 절터가 남아 있다. 이곳의  절터가 어느 때 없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번성할 때는 승려가 1천 명이 넘었다고 하니, 그  컸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현 도리사터는 아도가 정진하던 금당암이며, 1986년에 발견된  '도리사중수기'에 의하면 정사년(1677년) 6월에 화재로 대웅전 등이 타버려 기유년(1729)봄에  대인선사가 중창하여 금당암을 도리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세존 진신사리는  금동육각사리함과 함께 세존사리탑의 복원 중 발견했다. 사리발견 당시 필자는 도리사에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새롭다. 사리를 구경하려는 신도와 승려들이 수개월 동안 연일 몰려들었다. 고요한 산중이 저자거리처럼 되었다. 사리 발견으로 도리사는 새롭게 부각됐다. 그 후 절  아래까지 도로가 포장되고, 적은 사리를 안치한 적멸보궁(불상을 모시지 않고 법당만 있는  사찰의 건물)이 조성돼, 불교인들의 중요한 순례지로 바뀌었다.

     

운제산 오어사__불교 대중화운동의 산실

오어산의 유래
  포항에서 남쪽으로 19km 떨어진 곳에 있는 운제산은 신라 2대 남해왕의 아내인 운제부인이  산신으로 머물러 있는 영산이다. 산의 골짜기가 깊고 수목이 울창해 이곳은 언제나 정적이  감돈다. 최근 이 산에서는 가뭄해소를 비는 기우제가 몇 차례 지내져 산의 정적을 깨뜨렸다. 94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가뭄은, 동해안 지역이 특히 심해, 이곳에서 지내는  기우제가 큰 관심을 끌기도 했다.  

 

기우제는 산의 정상부근에 있는 운제부인을 모셨던 성모당터에서 지내진다. 산밑의 주민들은  이 산의 성모가 비를 내리는 힘을 갖고 있다고 믿어왔다. 이러한 믿음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는 것이기도 하다.   오어사는 이 산의 동쪽 기슭에 있다. 이 절은 신라초기에 닦여졌으며 항사사라고도 불리웠다. 절의 주소는 포항시 오천면 리사동. 절 동쪽에는 오어지라는 큰 호수가 있다.  

 

이곳은 신라의 중 혜공이 만년을 보냈던 절이다. 혜공은 원효보다 앞선 시기의 사람으로  기행으로 유명했던 승려이다. 그가 만년에 이 절에 머물자 후학인 원효는 경과 소를 짓다가  의심이 나면 경주에서 이곳으로 달려와 묻고 할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다. 삼국유사에는 오어사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하루는 혜공과 원효가 만나 개천을 따라가며 고기를 잡아 먹었다. 그런 다음 둘이 똑같이 바위  위에 앉아 똥을 누었다. 혜공이 똥을 가리키며 원효에게 "네 똥은 내 고기구나"라고 놀렸다. 그래서 절 이름을 오어사로 했다는 것이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혜공은 그때 고기를 먹었지만,  대변 속의 고기들은 그대로 살아서 물로 들어 갔다고 한다.   불교의 살생금지의 가르침을 이런 식으로 빗대어 떠올리는 그들의 해학정신이 돋보인다. 혜공은 그 해학이 뛰어나고 기이한 행동을 많이 했다. 혜공은 대안, 혜숙 등과 더불어 당시  대중불교의 기치를 들었던 3대 고승의 한 사람이다.

   

 대중불교의 실천자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 등 어려운 과정을 거쳐 불교를 공인하지만, 초기에는 귀족불교에  머물렀다. 진흥왕에 의한 불교문화진흥과 그 후대 왕들의 보호 및 원광, 자장 등 고승들의  활동은 신라불교를 흥성시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왕실 귀족을 중심으로 한 국가적인  것이었다. 국가적인 것이었던 만큼 불교는 고답적이고 이념적이었다.   흔히 신라불교를 '호국불교'라고 특징짓는다.

 

그것은 왕실이 국민(또는 지방호족)들의 의식을  왕권에 지향시키고, 결속시키려는 정신적인 구심점으로 불교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혜공과 대안,  혜숙 등은 그러한 이념적이고 귀족적인 불교에 반발하고, 불교를 서민대중 속에 끌어내린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기행과 익살 및 남루한 행색은 하화중생(중생과 더불어 사는  삶의 자세)하는 불교 본래의 면모를 드러내기 위한 모습이었으며,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해체정신의 표출로도 볼 수 있다.  

 

초원에서 사냥하고 여자와 누웠다가/술집에서 노래하고 우물에서 잠잔다'라고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이들을 찬탄하고 있다.  

 

혜숙은 진평왕 때 사람이다. 일찍이 승려 화랑도로 있다가 물러나 안강의 적선촌이라는 마을에  살았다. 그는 당시 왕도인 경주를 중심한 귀족적인 불교의 범주를 벗어나 시골사람들을  교화했다. 혜공도 혜숙과 거의 동시대 사람이지만 주로 선덕왕 때 활동한 고승이다. 그는 귀족집  품팔이 노파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불가사의한 행동이 많아 성인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 승려들의 귀족적인 위치와 호화웅장한 절을 버리고 매일 술에 취하여 마을의  골목을 떠돌며 서민들을 교화했다. 허름한 옷에 삼태기를 지고 있는 그는 초부 목동이나  뒷골목의 건달, 술주정꾼과도 쉽게 친했다. 언제나 삼태기를 짊어지고 다녔으므로 부궤화상이라  불리웠으며, 그가 있던 절은 부개사라 불렸다고 한다.   때때로 그는 부개사의 우물 속에 들어가 몇 달씩 나오지 않기도 했다.  

 

영묘사에 선덕여왕이 들렀을 때 그를 사모한 지귀의 심화로 불이 났으나, 그 사실을 미리 알고  화재를 예방한 얘기는 유명하다. 그는 임종할 때도 예사롭지 않아 공중에 높이 떠서 사라졌다고  한다.   혜숙과 혜공뿐만 아니라 대안 역시 기이한 행동으로 일관한 승려였다. 그는 항상 남루한  차림으로 장터거리를 떠돌았다. 언제나 구리로 만든 그릇을 두드리면서 대안, 대안하고 외치며  돌아다녔기 때문에 이름마저 대안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들은 승속을 초월하여 당시 사회를 누볐다. 그래서 때로 미친 중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으며,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혜숙은 시골마을에서, 헤공은 왕성 안의 골목거리에서, 대안은  장터를 중심으로 각각 교화에 힘씀으로써 신라불교는 급격히 대중화의 물결을 타게 된다.   이들의 불교 대중화운동은 원효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원효는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거지나 더벅머리 아이들한테까지도 불교의 뜻을 알림으로써 비로소 불교 대중화의 완성을 보게  된다.   이들은 당시 불교가 '위로만'치닫는 데 대해 '아래로' 향한 몸짓을 과감히 보여준 인물들이다. 그들은 대승불교의 진면목을 몸소 보여주며, 참다운 자유를 실천해보인 위대한 행위자들이었다. 

   

옛자취 없는 명승지
  혜공과 헤숙은 물론 대안의 자취는 지금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헤숙이 있었던 절은  삼국유사에 안강현 북쪽 혜숙사라 하지만 그 절터는 확실치 않다. 현 안강읍 북쪽 9km지점인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에 있는 치동부락이 그 흔적이 아닌가 추측될 뿐이다. 치동부락은  '치실'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그것은 '적곡' 또는 '적선'의 어원을 떠올려 준다. 이곳에는  치동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바로 혜숙사가 아닐까 추측해 볼 뿐이다. 혜공이  있었다는 부개사터도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만년에 그가 있었던 오어사만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 절에도 혜공과 원효 등의 자취는 전무하다.

 

오어사는 20년 전만 해도 대웅전이  덩그러니 서 있었을 뿐, 퇴락하여 황량했다. 그래서 이 절의 주지를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3년 전 대웅전을 보수하고, 나한전 설선당 및 요사체 등이 지어져 비로소 절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원효와 혜공이 놀았던 모의천(현 항사천)냇물은 큰 호수로 변해 새로운  명승지의 면모로 바뀌었다.   이곳이 혜공과 원효의 설화가 깃든 곳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인근에는 별로 없다. 다만  혜공의 그 '걸림없는 자유행'처럼 바람만이 운제산 계곡을 불어댈 뿐이다.

     

아진포__석탈해 설화의 유적지

토함산의 산신이 된 석탈해왕
  석탈해가 처음 상륙했던 바닷가로 가려면, 경주에서 토함산을 넘어야 한다. 보문단지에 이어  보문호를 끼고 돌아, 황룡계곡을 지나면 추령재이다. 추령재를 넘으면 감포가는 길로 접어든다. 봄날 진달래가 흐드러진 추령 넘는 고갯길은 기막힌 드라이브코스이다. 추령재휴게소에서 차를  한잔 하면서 동해 쪽을 바라본다. 오른쪽으로 수많은 골짜기로 주름을 이루면서 잡목림의 수해를  이룬 산이 토함산이다. 석굴암은 추령재에서 멀지 않다. 석탈해를 찾기 위해 넘는 토함산길은  감회가 어리게 마련이다.   토함산신이 바로 석탈해이기 때문이다.

 

석탈해는 죽은 지 오랜 뒤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다음에  문무왕의 끔에 나타나, 자신이 묻힌 소천구에서 뼈를 수습하여 그 뼈로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해달라고 부탁한다. 문무왕은 꿈에서 깨어난 후, 곧 그 뼈를 수습하여 만든 소상(찰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을 토함산에 사당을 세워 안치한다. 석탈해는 해골 둘레가 3자 2치, 몸통뼈  길이가 9자 7치였으며, 이빨은 응고되어 하나 같고, 뼈마디가 모두 이어진 이른바 천하무적의  역사였다. 그리하여 그를 받들어 토함산신으로 삼았다.

 

이 석탈해 사당은 조선시대 초기까지  전해져, 제사가 이어졌다고 한다. 석탈해가 토함산의 산신이 된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석탈해는 동해안을 통해 신라에 잠입하며, 이 산을 넘어 서라벌에 진출했다. 그러니까 그는 그가  넘었던 산을 지키는 셈이다. 잘 알려지다시피 토함산은 신라 당시 신성시되던 5악 중 동악으로  꼽힌 산이다.

 

토함산이 특히 신성시된 것은 이 산이 동해와 바로 이어져 수도 서라벌의 국방상  요새였기 때문이다. 토함산에서 감포일대는 '동해구'라 해서 옛부터 성역시된 지역이다. 그것은  이곳으로 외적이 침입하면 곧바로 수도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문무왕이 사후에 뼈를 동해에  수장해 동해 용이 된 것과, 석탈해가 토함산신이 된 것은 신라인의 나라수호의 열망의 표시일  것이다. 문무왕은 석탈해를 토함산신으로 세운 다음 그것으로 불안을 잠재우지 못해 그 너머  동해구의 입구를 자신이 직접 지키려한 것일까.

 

토함산에서 동해 쪽을 향하는 눈길에는 그런  마음으로 서걱거린다.   신라 2대 남해왕 때의 어느 맑은 날, 동해 하지촌의 아진포 바닷가에서 문득 까치들이  요란하게 울어댔다. 그곳에 살던 노파는 이상히 여겨 배를 타고 까치 우는 곳으로 다가갔다. 배가 한 척 있었다. 까치들은 그 배 위에서 울고 있었다. 그 배에는 길이가 20자, 넓이가  13자나 되는 커다란 상자가 실려 있었다. 노파는 배를 끌어다가 바닷가에 대고는 길흉을 알  수 없어 망설이다 하늘에 맹세한 후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놀랍게도 그 속에는 이목이  수려한 남자가 온갖 보물과 노비들을 거느린 채 들어 있었다.  

 

아진의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노파는 그 남자를 데려다가 음식과 숙소를 제공했다. 7일 만에  그 남자는 비로소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원래 용성국 사람인데 우리나라에는 28용왕이 있다. 나의 아버지는 함달과로 적녀국의 왕비를 맞아 7년 만에 큰 알 하나를 낳았다. 이에 흉조라 하여  궤를 만들어 바다에 띄우면서 임의대로 인연있는 땅에 가서 나라를 세우라고 축원해서 여기까지  왔다."이 말을 마치자 그는 지팡이를 끌고 두 종을 거느린 채 토함산으로 올라갔다.   이 설화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석탈해의 이야기이다. 석탈해는 신라 제4대 임금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탈해는 그 출생부터가 특이하다.

 

그는 용성국(또는 다파나국이라고도  한다)의 왕과 적녀국(그냥 녀국이라고도 한다)의 여자 사이에서 출생했으며 알로 태어나 버림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처음 김해 금관가야에 들러 수로왕과 세력다툼을 했다. 그 다툼에서 패한 후 사로국의  동해안에 도착한 것이라는 기록도 나오고 있다. 그는 그후 토함산에서 은거하다 서라벌에 그  모습을 내보이며, 호공이 살던 반월성을 기지로 뺏고, 남해왕의 딸과 결혼하여 정치의 표면에  부상된다. 그리하여 3대 노례왕에 이어 4대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를 종합해보면 그는  대단한 풍운아였던 것 같다.

   

동해변에서 온 이주집단
  그에 대해서는 알에서 출생하며, 까치 '토템'을 가지는 등, 건국신화의 양상으로 그  출생과정이 묘사되어 초기 임금인 박혁거세와 같은 불가사의한 인물로 떠올려지고 있다. 설화로  봐서 석탈해는 이주민집단의 실력자로 추측된다. 그는 경주평야에 이주해 올 때 이미 상당한  정치적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어쩌면 동해변을 거점으로 해상활동을 하던 집단의 일원이었을까. 금관가야의 수로왕과  세력을 다투다가 배로 달아났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석씨족은 신라 개국초기에 경주  평야에 들어오며 석탈해가 가진 정치적 역량으로 곧 그의 세력을 경주에 뿌리내렸다. 그리하여  사로국의 중심지역인 반월성을 차지했으며, 다시 경주지역을 지배하던 박씨족과 결혼하여  연맹체제를 구축, 사로국의 실력자로 부상되었음직하다. 그는 마침내 남해왕이 죽을 때 노례와  탈해에게 서로 의논하여 왕위를 이으라는 당부를 받아낼 정도로 그 세력이 막강해진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사이좋게 연장자인 노례가 먼저 임금이 되고 그 다음 탈해가 보위에 오르는 것이다.  

 

또는 석탈해의 설화를 모계설화의 잔영으로 보려는 학자들도 있다. 설화에 나오는  아진의선 노파는 혁거세왕의 뱃꾼의 어미라 되어 있다. 이는 서술성모와 마찬가지로 그 지방  씨족사회의 여추장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으로 비중이 주어지기도 한다. 탈해의 부계가 불분명한  것은 이 때문일까. 그리하여 석탈해 이후 여계가 남계로 바뀌면서 동시에 씨족연합이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이러한 추측을 펴는 이들의 주장이다. 여추장의 아들인 탈해와 남해왕의  딸의 결혼은 씨족연합의 한 유리한 조건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신라는 지방의  호족들을 규합하지 못한 상황이었던 만큼 동해안의 큰 세력인 석씨족과의 동맹은 왕실로서는  바람직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석탈해는 4대 왕이 되지만 곧이어 5대부터는 다시 박씨계가  왕권을 잡는다.   그러나 석씨계의 세력은 더욱 커져 9대 벌휴왕 때 다시 왕권을 장악, 16대 걸해왕까지 8대에  걸친 석씨 왕조를 전개하게 된다.

   

외롭게 남은 상륙기념비
  탈해가 처음 배를 대었던 아진포는 옛 월성군 지역인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이다. 감포 남쪽에 있는 대본해수욕장에서 울산 가는 바닷길을 약 8km쯤 달리면 닿는  바다마을이다. 대동여지도에 보면 이곳은 하서지로 표시되어 있다. 이곳의 수남마을에는  석탈해가 이곳에서 상륙했음을 표시한 '신라석씨탈해왕탄강유허비'라 새긴 비를 안치한 비각이  솔숲 속에 서 있다.

 

이 비는 4백 년 전에 세워졌다고 한다. 비각 앞에는 하마비가 있다. 이  비각의 동쪽 2백m 지점에 옛날 석탈해의 배를 댔다는 홈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그 바위는 흙에 묻혀 상부만 약간 돌출해 있었는데, 태풍 사라호 때 흙과 자갈이 패여나가 큰  바위가 드러난 적이 있었다"라고 양남 면사무소에 근무하는 한 주민은 말했다. 이 바위는 지금은  완전히 매몰되었다.   이곳에 75년부터 원자력발전소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해 그 터를 닦으면서 묻혀버린 것이다. 더불어 이 일대의 마을들이 인근 야산으로 이주해 나가고 새로이 발전소 건물과 사원아파트들이  들어차버려 옛 아진포의 정취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탈해의 상륙지점을 표시한 비각 앞에서도, 바다는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이 비각은 10여 년 전까지 홍응생 씨가 관리를 해왔다고 한다. 홍씨는 81년에 82세로  작고했다.   이곳에는 석씨 문중 소유의 전답이 5마지기 가량 있어서 그걸로 생활을 하며 비각을 청소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이 동네도 흩어졌다.   이 일대의 마을들, 수남부락과 읍천리 등은 모두 석탈해가 개척한 마을로 이곳 주민들은 믿고  있다. 그러나 석탈해의 유적은 비각뿐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있었던 홈바위와 석탈해가  장성하도록 기른 곳이라는 장아라는 지역도 발전소로 철거되고 묻혀버렸다. 다만 비각을 둘러싼  소나무 위에는 여전히 까치가 울면서 맴돌아 그날의 설화를 무심히 떠올리고 있을 뿐이다.

     

알천__박혁거세가 왕으로 추대된 곳

신라인의 얼서린 냇물
  알천은 신라의 흥망에 큰 영향을 준 하천이다. 초기에 6부의 조상들이 회의를 하다가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곳이 알천냇가이며, 38대 원성왕 때에는 즉위를 둘러싼 왕위계승 문제가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일어나기도 했다.   이 왕위 계승 싸움은 37대 선덕왕이 죽자 일어났다. 선덕왕은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군신들은  왕의 친족인 주원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주원의 집은 알천 건너편에  있었다. 마침 큰비로 알천의 물이 불어 주원은 건너오지 못했다. 그 사이에 왕의 아우인 경신이  보좌에 올라버렸다. 이때 물론 누군가가 "왕위는 인간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큰비는 주원에게 보좌를 전해주지 않으려는 하늘의 뜻일 것이다"라는 제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원이 냇물을 건너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며, 경신은 중신들의 발의에 따라 '하늘의  명에 의해'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경신은 곧 원성왕이 된다.  

 

삼국유사에서는 원성왕의 등극에 알천 신의 가호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주원은 재상,  경신은 주재상이었다. 경신은 꿈을 꾸었다. 사모를 벗고 갓을 쓰고 12줄의 현금을 안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가는 꿈이었다. 꿈을 깬 뒤 점을 치니 '사모를 벗은 것은 실직할 징조이고, 현금을  안은 것은 형을 받을 징조이며, 우물에 든 것은 옥에 갇힐 징조'라는 해석이 나왔다. 이에  경신은 극히 조심하여 출입을 삼갔다. 그때 여삼이란 자가 그를 찾아와 새로운 꿈풀이를 했다. 즉 '사모를 벗은 것은 더 높은 사람이 없는 것이요.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고,  12현금을 안은 것은 12대손까지 대를 전할 징조이며,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대궐로 들어갈  징조'라는 것이었다.

 

곧 왕이 될 대길몽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경신은 "위에 주원이 있지  않느냐"라고 묻자 여삼은 "몰래 북천(알천)의 신에게 제사하라"고 비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리하여 선덕왕이 죽자 경신은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알천의 물 때문에 임금자리를 빼앗긴 주원은 원한을 품고 명주(지금의 강릉)로 퇴거했다. 원성왕은 그에게 명주군왕이라는 허울좋은 감투를 내렸다. 그러나 이때의 원한은 계속 이어져  뒷날 주원의 아들 헌창의 반란과 헌창의 아들 범문의 반란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이  때 이후 신라왕실에는 왕위쟁탈의 내분이 계속되어, 이 사건이 신라쇠망의 촉진제가 되기에  이른다.

   

알천의 위치
  알천은 신라인에게는 남쪽을 흐르는 남천과 더불어 중요한 물길이었다. 알천은 동천 또는  북천으로도 불리는 형산강의 지류이다. 알천은 경주에서 보문단지를 지나 감포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 황룡산에서 발원하여, 덕동호를 지나 보문호에 머물렀다가 경주시의 동편을 흘러  서천과 합류, 형산강으로 들어간다.   물길은 길이가 21km나 된다. 냇물의 양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상류의 여러 골짜기 물을  합해 갑자기 경주평야에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 물길이 곧잘 거센 급류를 이루어 옛날에는  다리를 놓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더욱이 홍수라도 지면 곧잘 범람하여 걷잡을 수 없이 시가지를  적셨다. 주원이 등극하지 못한 것도 이 냇물이 폭우로 홍수가 졌기 때문이었다. 주원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사에 '북천의 북쪽'에 있었다는 것으로 봐서 알천의 하류에  있었던 듯하다.   알천의 물길은 홍수에 따라 수시로 바뀌어 경주인들은 알천의 물길을 잡는데 애를 먹었던  듯하다.  

 

현재의 알천은 어느 정도의 변동이 있었으나 거의 원래의 물길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알천의 한 지류가 구황동의 분황사 옆으로 해서 안압지 북쪽을 흘러 계림의 미추왕릉  뒤로 빠져 경주공고 뒤편으로 흘렀음이 추측되고 있다. 이러한 추측을 근거로, 이 물길이 바로  6부장의 족장들이 냇가에 앉아 회의를 가졌던 그 알천일것이라는 주장을 펴는 향토사학자들도  있다. 현재의 알천과 혁거세의 탄생지인 나정까지는 거리가 퍽 멀다. 나정에서 가까운 하천은  남천이 있을 뿐이다.   6부장들이 지금의 알천 가에 모여 회의를 했다면 나정에 말이 끓어 앉아 있는 것이 보일 리가  없을 만큼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얘기의 앞뒤도 맞지 않는다.

 

그래서 6부장이 모인 곳은 바로  남천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한때 많이 나왔다. 그러나 알천의 지류에 대한 추측으로 이를  해석하려는 것이 더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알천의 물길이 신라 당시에는  분황사 동편으로 해서 안압지 동편을 흘러 남천에 합류됐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주원의 얘기와 모순된다.   알천의 물길이 경주시내를 동서로 관통했다는 흔적은 지금도 꽤 남아 있다. 일제 때 경주시  성동리에 있는 전랑지(사적 88호)의 발굴 당시, 이곳에 있었던 궁성의 일부가 범람하는 알천의  물길로 잘려나간 흔적이 발견되었다. 지금도 경주고등학교 뒤편으로는 당시 쌓았던 제방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알천은 이 지역에서 한 지류가 생겨 경주시가지 쪽으로 흘러갔음을 이 유적은  보여주고 있다. 혁거세의 배필인 알영부인이 태어났을 때 그 입술을 씻긴 곳이 월성(반월성)  북쪽 하천이라 했는데, 아마 안압지부근의 알천지류가 아니었는가 싶다.

   

알천의 범람
  알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경주인들은 많은 고심을 해왔다. 조선초기에는 이 범람하는 물이  봉덕사를 삼켜버렸을 정도로 해마다 피해가 컸다. 그래서 고려 때는 알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3도의 병사들을 동원하기도 했으며, 조선 때에는 연일 등 인근의 백성들을 매년 동원하여  제방쌓기에 힘썼다.   그러나 먼 곳의 백성들을 동원하기가 곤란하여 각 고을에서는 노임의 대가를 현금으로 경주에  납입하여, 경주부에서 일꾼을 사서 제방을 쌓기도 했다. 이 돈을 이 지방에서는 '물 아랫돈'이라  했다고 한다. 경주 아전들이 빚장이에게 졸리면 으레 '물 아랫돈이 올라오면 갚겠다'라고 했다는  데서 연유하여 지금도 이 말이 이 지방에서는 속담 비슷하게 전해온다.

 

이처럼 골치 아팠던  알천도 지금은 제방시설이 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제방 아래 고수부지가 조성되어 공원화  되었다. 또한 상류의 덕동댐과 그 밑의 보문호가 생겨 홍수의 걱정은 없어졌다. 봄이면  분황사에서 보문호로 이어지는 알천변에 흐드러지게 피어 오르는 벚꽃이 장관을 이룬다. 알천은  경주분지를 흐르는 하천 중 수량이 가장 많다. 그래서 상류에는 경주시민의 식수해결을 위한  덕동댐이 조성되었고, 그 아래 다시 보문호가 조성되어 거대한 위락단지를 이루었다.


     

도림사__동화 같은 경문왕의 비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도림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경주 들판을 불고 간 바람은 천년의 세월 동안 숱한 절들을 흙  속에 묻어 버렸다. 도림사라는 절로 바람 속에 사라져버린 절 중의 하나이다. 이 절은 바람과  대나무와 산수유나무의 관계 속에 펼쳐지는 동화 같은 얘기 하나를 간직했던 절이다.   신라 말기의 왕인 경문왕은 마누라를 잘 얻은 덕분에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갑자기 귀가 커지기 시작하여 꼭 당나귀 귀 같았다. 그래서 늘 귀를 감추어 왕후와  궁인은 물론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다만 복두(신라 진덕여왕 때부터 처음으로 머리에 쓰기  시작한 관리의 모자)를 만드는 장인 한 사람만이 그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 장인은 왕의 비밀을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다. 그는 그 비밀을 누구에게든 털어놓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마침내  죽을 때가 되어서 그는 홀로 도림사의 대숲 속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 대나무들을 보고  외쳤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 후 바람이 불면 도림사의  대숲에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이에  놀란 경문왕은 대나무들을 베어 버리고 대신 산수유를 심었다.

 

그 뒤로는 바람이 불면 그 숲에서  다만 이렇게 소리가 났다. "임금님 귀는 길기도 하다." 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나온다. 이야기와 흡사한 것에 희랍의 '마이다스  왕'이야기가 있다. 마이다스 왕의 얘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전세계 어린이들이 동화책을 통해  알고 있다. 마이다스 왕의 얘기는 경문왕의 얘기와 신기할 정도로 거의 똑같다. 마이다스도  경문왕과 같이 귀가 당나귀 귀 같았다.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오직 궁중에 전속된 이발사뿐이었다. 이발사는 왕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기로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혼자 갈대밭으로 나가 구덩이를 파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고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을 토설한 후 구덩이를 매워 버린다. 그러나 그후 그 구덩이에서  솟은 갈대가 바람이 불면 그 사실을 발설하게 된다.  

 

경문왕과 마이다스 왕의 얘기는 퍽 문학적이다. '하고 싶은 말'을 토해 놓는 것을 문학에서는  대단히 중요시한다. 그것은 '카타르시스'가 갖는 '정화'와 '배설'의 의미를 가지며,  '아리스토텔레스'이래로 문학의 한 요소로 대단히 중시되어왔다. 이 이야기는 또한 사실을  숨기거나 금기하더라도 언젠가는 밝혀진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도림사의 위치
  이 이야기의 현장인 도림사의 터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유사에는 '도림사는 도림입구에  있었다'라고만 밝히고 있을 뿐이다. 도림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기이편의 '태종 춘추공'조에도  보인다.   성부산 이야기에 보면 '이산(성부산)이 도림의 남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성부산은 경부  고속도로 경주 톨게이트의 남쪽에 있는 망산의 바로 곁에 위치한 산이다.

 

그런 만큼 도림을  천경림과 오릉이 있었던 남정숲을 지칭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한편  도림은 경주의 동쪽, 북천(알천)의 서편에 있었던 숲이었다는 주장을 펴는 이들도 있다.   '도경잡기'에 보면 동천(북천을 말한다)가에 '오리숲'이 있어 숲이 5리 뻗쳤다고 적혀 있다. 이  오리숲이 바로 도림일 것이라는 추측을 많이 하고 있다. 이 숲은 옛날 알천의 수해방지를 겸해  심어졌던 것이다. 지금 그 숲은 흔적도 없다. 논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오직 보문리의 경주  수조 저수지 밑에 '숲머리'라는 마을이 남아 있어 숲의 동쪽 끝이 이 마을부근이었음을 추측할  뿐이다.   이 숲은 이 마을에서 알천내를 따라 현재 분황사가 있는 곳까지 뻗쳐 있었던 듯하다.  

 

1930년경 일본인 '오사까 긴따로'씨는 분황사 동쪽 들판에서 '도림'이라 새겨진 기와조각  하나를 주웠다. 현재 분황사 동편 들에서 있는 제사공장 서편이다. 이 기와 파편이 단서가 되어  이 일대가 도림의 입구에 해당하는 만큼 현 제사공장이 있는 경주시 구황동 들판이 도림사의  절터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명문기와 파편은 그 후 정적이 묘연해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도림'이라는 명문 기와조각이 발견된 들은 분황사와 황룡사지의 동편 산업도로 건너편  들이다. 이곳에서는 많은 절터가 발견되었다. 제사공장 옆에는 모전 석탑 터가 있으며, 제사공장  남편에서 낭산에 이르는 들에는 여러 개의 절터들이 논 속에 묻혀 있다. 그래서 도림사터는 이들  절터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해볼 수 있을 뿐이다.

   

뱀과 함께 잠잔 임금
  도림사의 대나무를 베어버린 경문왕은 일상생활에 기이한 면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잠자리에는 날마다 저녁이면 무수한 뱀들이 모여 들었다. 궁인들이 놀라 뱀들을 몰아내려 하면  왕은 "나는 뱀들이 없으면 편히 잘 수가 없다. 그냥 두라"고 했다. 왕은 늘 뱀과 함께 잤으며  왕이 잘 때면 뱀들은 혀를 낼름거리며 왕의 가슴을 뒤덮곤 했다고 한다.   이러한 얘기들은 기이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섹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뱀과 논다'는 것은  어쩌면 궁중에서 벌인 '섹스 파티'를 상징한 것이 아니었을까. 뱀은 성을 상징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경문왕은 그 전 왕인 응렴왕의 맏공주에게 장가를 든 사람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둘째  공주에게 더 맘이 있었다. 맏공주는 못 생기고 둘째공주는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심이 있어 맏공주를 취해 그 때문에 보위에 오르게 되며, 보위에 오른 후 둘째 공주도 품안에  넣는다. 그런 만큼 그는 섹스에도 퍽 관심이 있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귀 이야기'나 '뱀 이야기'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이 임금은 탄로나면 곤란한  비밀들이 퍽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궁중 안의 일들이 궁중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퍽 겁냈던  듯하다.   경문왕은 신라 말기 때의 임금이다. 신라는 말기에 이르면서 이런 기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경문왕 다음 대의 왕인 헌강왕 때에만 해도 용의 아들인 처용이 궁중에 들어오며,  왕이 포석정에 거동했을 때는 남산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기도 했다. 또한 금강령에 거동했을  때는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기도 했다. 신라 말기의 이러한 기이한 조짐들은 바로 신라  쇠운의 조짐들이라고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타진하고 있다.

     

남천__신라인의 광명사상을 끌어안은 하천

여성적인 신성한 내
  남천은 경주정신의 한 흐름이다. 또한 옛 서라벌의 정취를 싸안고 흐르던 풍류의 내이기도  했다. 남천은 삼국유사를 보면 상류를 사등이천이라 부르며 중류로 내려오면서 모래내, 모기내,  해내 등으로 불리다가 하류로 오면 황천으로 불리는 등 다채로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하천의  길이는 21km. 이 하천은 하류에서 서천으로 합류되며, 알천을 더하여 영일만으로 들어가는  형산강의 지류이다.

 

그 근원지는 토함산 서북 계곡이다.   동산령 서남계곡의 신계와 마석산 동쪽을 흘러내리는 시리계 등 두 갈래 물이 합쳐서 상류를  이룬다.   남천은 알천과 더불어 경주인들에게는 퍽 유서 깊은 내이다. 남천의 이름이 사등이내, 해내  또는 사천 등으로 불리워진 것을 보면 사천의 '사'는 원래 '서'였을 가능성이 크다.   '서'는 동쪽을 의미한다. '동'은 곧 '빛'을 의미하며 '밝다'는 뜻을 갖는다.  

 

사등이내는 '동쪽 봉우리 내'라는 의미를 갖는다. 문천은 잘 쓰이지 않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사천을 글자 그대로의 의미대로 '몰개'('모래'의 방언)로 불러 그것이 '모갱이'('모기'의  방언)로 전이되면서 생긴 이름인 듯하여 원래의 이름(사내)에서 많이 벗어난 뜻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남천은 '밝은 내'라는 의미 그대로 신라인의 광명사상과 닿는 신성한 내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내는 알천과 퍽 대조적이다. 알천은 그 물길이 밋밋하고 물 흐름의 속도가 '빠른 남성적인  내인데 비해, 남천은 냇길이 구불구불하고, 물 흐름이 완만한 여성적인 내이다. 알천은 자갈이  많으나 남천은 모래가 많다  알천은 수시로 범람하여 경주인들에게 애를 먹였으나 남천은  그지없이 조용하다. 남천은 불국사를 감싸안고 흐르면서 내동평야를 지나, 배반, 인왕들을 거쳐  남산 아래로 흐른다. 그 다음 반월성을 지나 서쪽으로 몸을 틀며, 오릉을 빠져 서천으로  들어간다.

   

남천의 다리에 얽힌 일화
  남천은 그 주위에 숱한 절들을 갖고 있었다. 남천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설화도 꽤 많다. 인왕사, 임용사, 영묘사, 담엄사, 천관사 등의 지금은 사라진 절들이 모두 이 내를 끼고  세워졌다. 이 내에 놓인 다리도 꽤 많았던 듯, 지금도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특히 남천이  반월성을 끼고 있는 만큼 남산과 반월성을 잇는 다리가 많았다. 신라 당시 남산에 세워진  남산성은 경주의 군사요충지였으며, 궁성의 피난처였다. 또한 남산은 신라인이 불국토를  꾸미려고 숱하게 절을 세웠던 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경주시가지와 반월성은 남천을 건너  남산과 빈번하게 연결되었던 것이다. 현재 추측되는 다리터는 경주박물관 서편의 효불효교,  반월성 남편의 일정교와 월정교 등과 오릉 북쪽의 남정교 등이 있다.   이중 일정교는 남산과 반월성을 잇는 다리로, 반월성 남쪽 성벽이 움푹 팬 것으로 보아 그쪽에  놓였을 가능성이 크다. 일정교 자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월성 반대편 언덕에 교대(다리의  양쪽 끝을 받치는 기둥)로 보이는 석축이 조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일정교는 춘양교라고도  불렸다.   월정교는 일정교의 서편에 위치했다.

 

이 다리는 남산 쪽에서 계림 앞을 지나 경주시내로  통하는 다리였으며, 옛부터 유교 또는 문천교로 불리기도 했다.   월정교의 흔적은 비교적 뚜렷하여 다리가 있었던 양쪽 냇가에 석축이 남아 있다. 또한  기초되는 초석이 내를 가로지른 채 그대로 놓여 있다. 초석을 통해 추측해보면 이 다리는 넓이가  14m, 길이가 63m나 되는 큰 다리였다. 다리 사이에는 12.6m 간격으로 교각을 돌로 짜 올렸다.

 

그  위에 목재로 무지개 다리를 가설한 듯하다. 무지개 다리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고려 때의 시인  김극기의 시 중에 '반월성 남쪽 토끼재 가에 무지개 다리 그림자가 문천에 거꾸로 비쳐있네'라는  귀절로 봐서 틀림없는 듯하다. 월정교는 이 시로 봐서 고려 대까지 남아 있었던 듯하다. 월정교  다리 위에서 신라 태종무열왕 때 승려 하나가 뛰어내려 물에 빠졌다.  

 

그는 다름아닌 원효였다. 다리 건너편에는 요석궁이 있었으며 그 궁전 안에는 무열왕의 딸인  공주가 거처하고 있었다. 원효는 젖은 옷을 말린다는 구실로 요석궁에 들어가 요석공주와  동침한다.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 신라의 석학 설총이 태어난다. 이 유명한 이야기는 바로 남천이  맺어준 인연이기도 했다.   경덕왕이 충담사를 만난 것도 월정교 다리 부근이었다. 충담사는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에게  차를 공양하고 내려오던 길에 경덕왕을 만난다. 이 자리에서 충담사는 유명한 향가인 '안민가'를  부른다. 이 향가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가 절로  태평하리라'는 끝구절이 유명하다.   박물관 서편에 있었던 효불효교도 현재 흔적만 남아있다.  

 

이 다리는 속칭 '칠성다리'라 불린다. 이 다리에는 과부어미와 그 자식들간의 애틋한 이야기가  서려 있다. 신라 때 일곱자식을 둔 과부 어머니가 살았다. 그녀는 수남이라는 곳에 사는 남자를   사랑했다. 그래서 아들들이 깊이 잠든 밤에 남천물을 건너 그 남자와 어울렸다. 이 사실을  아들들이 알았다. 아들들은 의논했다. '어머니가 밤에 물을 건너시니 자식의 마음이  편하겠니"하고 자식들은 어머니를 위해 돌다리를 지어주었다.   이에 그 어머니가 부끄러워 행실을 고쳤다고 하여, 그 이름을 효불효교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  얘기는 후대에 꾸며진 얘기라는 느낌이 든다. 신라 당시의 정조 관념은 조선 때와 다르다.   그 당시만 해도 남편없는 여자는 자유로왔던 경우가 삼국유사 중에 많이 나온다. 이 얘기는  아마 삼국유사 속에 유교적인 교훈이 끼여 들어서 생긴 설화인 듯하다.

   

'문천도사'의 경치
  이처럼 남천은 숱한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김유신이 애인 천관의 집에 갈 때도 이 내를  건넜을 것이다. 임금이 즉위하여 신궁에 참배할 때와 포석정에 거동할 때도 이 내를 건너갔을  것이다. 특히 남산의 많은 절을 참배할 때는 경주인들이 떼를 지어 이 내를 건너가야 했을  것이다. 월정교의 다리 자리가 큰 것은 이처럼 사람의 왕래가 심했기 때문이며, 더불어  남산성으로 무기와 군량미를 수송하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남천은 활짝 핀 부용처럼 펼쳐진 남산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 고즈넉히 흘러내린 그림 같은  내였다.

 

반월성을 지나면, 지금은 사라졌지만, 유명했던 천경림과 남정숲 사이를 남천은  꿈결처럼 흘러내렸다. 더욱이 그 모래의 고움은 옛부터 유명했다. 그래서 옛부터 문천도사라  일컬어졌다. 이 말은 물의 흐름이 완만하여 고요히 흐르는 물에 금빛모래가 치오르는 듯하여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냇바닥이 높아지고 제방이 쌓여져 옛 정취는 많이 없어졌다. 더욱이 논으로부터 농약이 흘러들어 내 주변이 공해로 시들어가, 신라 후예들의 의식에서도 내의  신성한 의미가 사려져가고 있다. 
     

가슬갑사지__화랑도 '세속오계'의 전수장

'가슬갑사유적지'
  청도의 거찰 운문사 입구에서 동쪽으로 5km쯤 비포장도로를 따라 간다. 후미진 산골길을  거슬러 오르면 삼계리라는 산골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동쪽의 문복산에서 쏟아져내리는 계곡물이  요란하다. 이 마을에서 좁은 산길을 따라 문복산을 오른다. 4km쯤 가파른 산길을 걸어 폭포로  이어진 계곡을 따라 오르면 산의 중턱 가까운 바위 계곡 옆 잡초로 덮인 길가에 자그마한 비석  하나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가슬갑사유적지'라 새긴 글씨가 뚜렷하다. 70년대 중반에 청도 출신의 모 인사가 세웠다는 이  비석은 높이가 1m정도. 주위엔 절터 특유의 대나무들이 솟아 있다. 참나무 등 잡목들이 우거져  옛 절터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절터였던 곳으로 추정되는 이 일대 1천여 평의 넓이는  흙에 묻혀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옛날에 쌓은 듯한 축대의 흔적이 약간 남아 있을 뿐이다. 이들  흔적들은 잡목과 잡초, 낙엽들 속에 묻혀 조심해서 살피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들다.   절터 바로 옆에는 두 개의 폭포가 쏟아져내려 그 물소리가 이 일대를 덮고 있다. 이곳은 절이  사라진 이래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원시의 절경을 조금도 손상이 없이 가지고  있다.

   

세속오계의 현장
  가슬갑사는 7세기 초에 신라의 고승 원광스님이 머물렀던, 유명한 '세속5게'의 현장이다.   원광은 이곳에 머물면서 신라의 중견지도자(화랑도)들을 수련하게 했다. 그런 만큼 이 일대는  화랑들의 수도장이며 삼국통일의 웅지를 폈던 신라 젊은이들의 호국의 장소이다. 당시 청도군  운문면 일대에는 5갑사가 있었다고 한다.   중앙에 대작갑사(현 운문사), 동쪽에 가슬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서쪽에 소작갑사(일명  대비갑사), 북쪽에 소보갑사가 그것이다. 이들 5갑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운문사에 소장되어 있는 운문사 사적에 의하여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5갑사는 원광이 중국에서 본국(신라)에 돌아온 서기 600년(진평왕 22년)이전에  이미 창건된 듯하다. 운문사 사적에 따르면 5백 57년 (진흥왕 11년)에 신승이 금수동에 들어와  작은 암자를 짓고 3년을 수도하다 절을 짓기 시작, 7년 만에 5갑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오갑사가 창건된 해는 560년이 된다.

 

이때는 원광법사가 환국하기 40년 전이 된다.   운문사를 중심한 5갑사의 성격은 일반 사찰과는 달랐던 듯하다. 운문사 사적기에 이곳을  '복국우세지장'이라 부르고 있다. 나라를 복되게 하고 세상을 돕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들  사찰들은 신앙으로서의 사찰과는 다른 목적에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깊은 산 속에 절을  지은 데다 이들 5개의 절들이 신라통일 직후에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있다.   이러한 '미스터리'는 왜 생겼을까. 삼국유사에는 귀산과 추항이라는 젊은이가 가슬갑사에  찾아와 세속오계를 전해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속오계는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고,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고,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며, 싸움에 임해서 물러나지 않으며, 생물은  가려서 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5계의 설정은 비불교적이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원광이 '가슬갑사에 점찰보를  설치했다'고 적고 있다. 점찰보는 점찰경에 의한 법회를 말한다. 점찰경은 지장보살이 나무쪽을  던져 길흉과 선악을 점치는 법을 밝힌 것인 만큼 불교 본래의 신앙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이들을 통해볼 때 5갑사는 신앙보다는 교육을 위한 시설이며, 특히 군사교육을 위한  시설이었음이 확실시되고 있다.

   

위장된 화랑교육장
  이 절들이 세워질 무렵은 신라의 발흥기였다. 신라역사상 가장 현명한 왕으로 꼽히는 진흥왕은  즉위함과 동시에 삼국통일이라는 거창한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우선 각  지방별로 세력을 가지고 있던 6부장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그 힘을 왕실에 묶어두기 위해 불교를  공인하여 그것을 정신의 구심점으로 삼아 왕권부터 강화시켰다.  

 

그 다음 원화에 이은 화랑의 청소년집단을 구상하여 이들 집단을 통해 전체 국민의 충성심을  뽑아냈다. 이러한 작업들은 확실히 그 후의 문무왕에 의한 삼국통일에 기초를 마련한  위업들이었다. 5갑사의 창건은 실로 이러한 구상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5갑사가 청도군 운문면 일대에 세워진 까닭은 이곳이 깊은 산골이라 들킬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당시의 신라군사기지의 요충지였던 언양과 양산이 이곳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운문산은 경주에서도 가깝다. 가슬갑사에서 경주로 통하는 산길은 삼계리에서  월성군 산내면을 거쳐서 가는 길이 있다  또한 동쪽 문복산록을 넘으면 언양과 산내면을 거쳐  내남면을 지나 경주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이 역사적으로 오래된 길임은 그 연도에 지금도  단련장, 채공지, 숙영지, 소규모의 돌성 도요지 등이 흩어져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곳은 교육도장이자 수도권방위상의 요충으로 중요한 곳이었을 듯하다. 더욱이  이곳은 해발 1천2백m의 높은 운문산록인만큼 백제와 고구려에 들키지 않는 은밀한 지점이며,  왜구의 침공 위험도 없는 곳이라 군사교육장 같은 국가시설을 짓기엔 안성마춤이었을 것이다.  

   

통일후 5갑사가 폐쇄된 이유
  그렇다면 신라통일 후 5개의 갑사들이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들 절들은 왜  삼국통일과 더불어 똑같이 폐사가 됐을까.   이들 절들이 삼국통일과 더불어 동시에 폐사된 것은 전란이나 천재지변으로 돌릴 수 없는  '미스테리'이다. 추측해본다면 이들 절들은 삼국통일을 위한 인재교육 목적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던 만큼 삼국통일이 되어 그 임무를 다하자 자동적으로 철거된 것이 아니었을까.

 

애초에  이곳은 가슬갑사를 중심으로 절로 위장된 또는 후국불교적인 발상에서 세워진 거대한  교육도장이었으며 이 도장의 특수임무가 달성되자 자연히 폐쇄된 것이리라. 이 절들의 폐쇄와  함께 신라 젊은이들의 숨결도 이 골짜기에 묻히고 폭포물소리에 덮혀 잊혀져 버렸다.   현재 남아 있는 흔적들은 거의 추측에 의해 5갑사터임을 밝히고 있을 뿐 확실한 증거는 없다. 5갑사 중 현재 남아있는 절은 대작갑사와 소작갑사뿐이다. 이들 절은 후대에 폐사된 자리에  재건한 절들이라 옛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운문사 경내 중심부에 '작압전'이라는  자그마한 암자가 남아 있어 그나마 어렴풋이 옛 사실을 떠올려 줄 뿐이다.

     

불국사와 그 주변 절터__신라인의 이상세계인 불국토
  불국사는 석굴암과 더불어 신라의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전생과 현생의 양부모를 위해 건립한  절이다. 김대성과 관계있는 유적으로는 이밖에도 장수사와 웅수사, 몽성사 등이 있다. 이들  절들은 모두 토함산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불국사와 석굴암뿐이며, 장수사지에 3층석탑이 서 있을 뿐이다.

   

전생과 현세의 부모 위한 절
  김대성은 신라 신문왕 때 사람으로 원래 모량리에서 살았다. 그는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하며 머리모양이 성처럼 새겼기 때문에 대성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는 가난한 어머니와 함께  남의 밭을 부쳐 겨우 입에 풀칠을 했다. 마침 흥륜사에서 육륜회라는 법회를 열기 위해 시주를  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현세의 가난을 벗고 내세에는 복을 받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에서  고용살이해서 겨우 마련한 밭을 선뜻 보시했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대성은 죽었으나 바로 재상  김문량의 집에 점지가 되어 다시 그 집의 아들로 환생한다. 대성은 이 기이한 인연 때문에  모량리에 있던 전생의 어머니와 현생의 어머니를 함께 모시고 자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서 곰을 잡았다. 그날 밤 산밑에서 자니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그를 잡아먹으려고 했다.  

 

대성은 놀라서 곰을 위해 절을 세우겠다고 약속, 곰을 잡았던 자리에 장수사를 지었다. 그  일을 계기로 그의 신앙심은 깊어졌다. 그리하여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창건하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불사(석굴암)를 세웠다. 이상이 삼국유사에 실린 이야기이다. 일연은  "한 몸으로서 두 세상에 걸쳐 부모에게 효도한 것은 옛적에도 듣기 드문 일'이라고 '착한  보시'의 영험을 찬탄하고 있다.   김대성의 삶은 불교적인 인연관계가 두드러진 삶이다. 그가 보시한 한 뙈기의 밭은 큰 복전을  이루어 그를 다시 태어나게 하며, 동시에 두 부모를 모시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삶은  삼라만상의 정령들과도 통해 있는 기이한 삶이었다. 곰과의 관련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석굴암을 지을 때는 천신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그의 의식은 인간과 하늘 및 자연을 관통했다. 물론 그것은 그의 지극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세운 절이 불국토를 염원한 신라인의 꿈과 닿아 있는 것이라면 그의 삶은 그 자체가 바로  신라인의 꿈이며 자연관이라 할 수 있다. 신라인에 의해 '김대성 설화'가 구성된 것은 곧  신라인들이 이 허망한 삶의 한계를 벗어나 걸림없는 경계에 들고자 한 염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사상은 남산을 절과 불상으로 온통 덮어 청정한 극락세계로 꾸미려고 구상했던 그 의식과  통한다.   그 의식은 전생, 현생, 그리고 내생 등 3세의 세계는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안에  공존하며 같은 궤도 안에서 순환한다는 신라인의 현실사상 및 낙천성과도 이어진다.

   

신라인이 그린 불국토 재현
  이처럼 '김대성 설화'를 낳을 정도로 신라인의 꿈과 닿아 건립된 불국사는 언제 세워졌을까. 신문왕대(681__692년)의 김대성이 창건했다고 하나 기실 기록에 의하면 법흥왕 15년  (서기528년)에 창건됐다고 한다. 이 해는 이차돈이 순교한 이듬해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확실한  증거자료가 없어 신빙성이 없다. 김대성이 설화는 그렇다면 완전히 허구일까.

 

학계에서는  김대성의 설화는 창건설화 형식을 띠고 있으나 기실은 중창설화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김대성은 기왕의 불국사를 중창했으며, 이때 석가탑과 다보탑 등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이  설화의 중요성은 곧 불국사를 향한 신라인의 꿈과 염원이 그만큼 컸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화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큰 허물은 아니다.   불국사가 자리잡은 곳은 경주인들이 동악으로 떠받들던 영산인 토함산의 서쪽 기슭이다. 앞으로는 조양, 모화의 평야가 펼쳐지고, 그 너머 남산(금오산)이 활짝 핀 부용꽃처럼 벌어진  것이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불국사는 석굴암과 더불어 영산 토함산의 정기가 모인 곳에 위치하며, 그 장엄한 자리잡음이  인간이 자연과 맺을 수 있는 조화미의 한 극치를 이루고 있는 예로 평가되고 있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이상적인 세계 즉 불국의 상징이다.   이 절은 세 개의 공간으로 대별되어 이상 세계를 그리는 신라인의 세가지 의식모형을  드러낸다. 대웅전과 극락전 및 비로전의 구성이 그것이다. 대웅전은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  부처의 사바세계 불국토이다. 극락전은 무량수경 또는 아미타경에 근거한 아미타부처의 극락세계  불국토이다.

 

비로전은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부처의 연화장 세계 불국토이다. 이들 세계의  주불은 모든 사람의 마음의 본래 모습 또는 마음이 귀의하는 고향을 상징한다.   이들 세계와 현세는 석단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다. 석단의 위는 이들 세계가 있는 불국토이다. 아래는 보통 인간의 세계이다. 보통 인간의 세계와 불국토는 각각 33개의 계단을 가진 돌다리인  청운, 백운다리와 연화, 칠보다리를 통해 연결되고 있다.   청운, 백운다리는 석가여래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자하문과 연결되고, 연화, 칠보다리는  아미타여래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안양문에 연결된다.   세속의 보통인간은 수련을 거쳐 이 다리를 올라가야 부처의 나라에 이른다는 것을 이 계단과  무지개다리는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다리 위의 33계단은 33천을 상징한다. 이 다리는 부처의  경지인 성역에 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다리이다. 그러므로 이 다리는 바로 희망과  환희와 축복이 뒤범벅이 된 그런 다리라 할 수 있다. 청운, 백운다리를 지나 자하문의 관문을  통과하면 곧 찬란한 부처의 몸인 석가, 다보탑이 보이고 대웅전의 부처님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이 돌다리는 현재 철창으로 굳게 막혀 있어, 일반인들은 옆으로 돌아 동쪽회랑에 내놓은  문으로 출입해야 한다.

   

곰 위해 세운 절
  한편 불국사 이외에 김대성의 유적으로는 석굴암이 있으며, 장수사 등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그가 곰을 잡았던 곳에 장수사를 세웠다고 했으나, 불국사의 역사를 담은 '불국사고금창기'에는  그가 곰을 발견한 곳에 장수사를 세웠고, 곰을 잡은 곳에는 웅수사를, 꿈을 꾸었던 곳에는  몽성사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웅수사 자리는 토함산 정상인 석굴암 위쪽 편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절도 사라지고, 흔적도 희미하다.   그 자리에는 일제침략기 당시까지도 세 개의 불상이 있었다고 전해 왔으나 두 개는 사라지고  한 개는 현재 석굴암 경내에 보관하고 있다. 장수사지는 월성군 내동면 마동의 속칭 탑골,  탑마을 혹은 장수골로 불리는 마을 남쪽에 있으나 삼층석탑만이 남아 있다. 장수사의 석탑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거의 동일하나 신라초기의 탑은 아니다. 이 절은 1593년에 병화로 불탔으며,  그 후 중건됐으나 조선말기에 폐사됐다고 한다. 몽성사터는 현재 없으나, 석굴암을 오르는 차도  중간에 몽성골이라는 골짜기가 있어 이곳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의 궁성들__흔적조차 없는 천년영화

모두 사라져버린 신라 궁성들
  1천 년의 역사를 누린 신라임에도 불구하고, 경주에는 신라의 궁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궁성터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나마 확실한 궁터로 알려진 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궁궐터가 그 위치조차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로 있다.   헌재 남아 있는 궁궐터는 창림사터인 초기의 궁궐터와 반월성, 동궁이었던 안압지뿐이다. 이밖에 금성, 만월성 등과 요석공주의 거처지인 요석궁 등은 그 위치를 대강 추측하고 있을 뿐,  확실한 고증이 안 되고 있다.

 

그외 영창궁, 영명신궁, 예궁, 청연궁, 본피궁, 사량궁, 양궁,  선천궁, 회궁, 남하소궁, 북궁, 적반궁, 고찰궁, 남도원궁, 복원궁 등 많은 궁궐들의 이름이  전해오고 있으나 거의 그 위치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위치가 확실한 반월성과 안압지의  경우, 아직까지 궁궐의 규모조차 밝혀내지 못하고 있어, 경주 유적은 핵이 빠진 채 보존되어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신라의 첫 대궐은 지금의 창림사터이다. 오릉을 지나 남산 서쪽 계곡으로 접어들면 나정과  남간사지로 통하는 골짜기가 있고, 그 다음이 창림사지이다. 이곳에는 높이 7m의 거대한  3층석탑이 있고 산라명필 김생이 글씨를 썼다는 비의 받침인 돌거북 한 쌍이 엎드려 있다. 이곳에서는 창림사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조각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곳은 신라의 첫임금  박혁거세가 머물렀던 대궐로 원래 고허촌의 촌장 소벌도리공의 집이었다. 이 궁궐은 통일  신라시대에 와서 없어져버렸으며, 8세기 말에 창림사절이 세워졌다. 그런 만큼 궁궐의 흔적은  전혀 없다.   그 다음에 생긴 궁궐이 금성이었다. 금성은 박혁거세 즉위 21년 만인 BC 37년에 6촌의  중심인 양산촌(현 경주 시내) 중앙에 쌓은 궁성이었다. 이 성은 둘레가 729.4m(2천 4백 7자)가  되는 자그마한 성이었는데 동, 서, 남, 북으로 네 개의 문이 열린 토성이었다. 금성은 서기101년  파사왕이 궁성을 반월성으로 옮긴 후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금성의 위치는 현재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금성 서쪽 시림에서 한 닭이 울어 김알지가 탄생했다' 또는  '금성 동남쪽에 월성을 쌓았다'라고 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부(구 박물관)의 동쪽 4리에  금성터가 있다'라고 했다. 이상의 기록들의 종합하면 금성이 위치는 경주의 쪽샘과 첨성대  사이에 있은 듯하다. 현 미추왕릉 동편 도로를 건너면 민가들 사이에 토성터의 일부가 남아 있어  이를 밑받침하고 있다.

   

천혜의 요새 반월성
  그 다음 생긴 성이 월성(반월성)이다. 삼국유사에는 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석탈해가 어릴 때 토함산에 올라 바라보니 경주시내의 한 봉우리가 초승달 모양으로 생긴  게 눈에 들어왔다. 산을 내려와 찾으니 곧 호공의 집이었다. 탈해는 몰래 호공의 집 둘레에  대장간 숯을 묻어두고 호공에게 찾아가 이곳이 자기의 할아버지 집이었다고 주장, 관에 소송을  걸었다. 관에서 탈해에게 "네 집이라는 증거를 보이라"고 했다. 탈해는 "우리는 본시  대장장이였다. 당시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빼앗겼다. 땅을 파보라"고 했다. 땅을 파보니 과연  대장간 숯이 나왔으므로 그 집은 드디어 탈해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처럼 기지로 반월 언덕을 빼앗은 석탈해는 곧 2대 남해왕의 사위가 되고, 이어 4대 임금이  된다. 탈해가 죽은 후 그 뒤를 이은 5대 파사왕은 이곳에 궁성을 쌓고 성 이름을 월성이라 했다. 그리고 월성 안에 새 궁성을 짓고, 왕 22년에 이사했다. 이 성은 둘레가 1천7백m되는 언덕의 동,  북, 서의 3면을 성벽처럼 가파르게 깎고, 남는 흙을 다시 언덕 위로 치올려서 높이 약 10m  전후되는 넓은 토대를 만들고, 그 둘레에 돌을 쌓아 담을 짠 특이한 궁성이다.   남쪽으로는 남천을 끼고 있어 강을 방패로 삼았다. 또한 남산의 심장부인 남산성의 망대인  해목령을 마주보고 있어, 유사시에 대처하기 좋은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밖의, 성의  내부구조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최근 반월성을 발굴하자는 얘기들이 많이 나왔으나 여러 어려운 사정 때문에 보류되어,  후세인에게 발굴을 넘기기로 했다. 다만 동쪽 성문의 일부가 발굴되었을 뿐이다.   이 성은 여덟 곳의 성문이 있었던 듯 성문터가 남아있다. 경덕왕이 충담 스님을 만난 귀정문은  반월성 서쪽에 있었던 큰 문이었는 듯하다. 이 성의 동쪽 임해전(안압지)과 통하는 곳에는  임해문이 있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 성 안에는 많은 전각들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그  전각들의 이름들은 알 수 없다. 다만 월상루라는 누각이 성이 서쪽 끝 언덕에 서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을 뿐이다. 월상루가 성 동쪽에 있다고 추측되는 것은 '헌강왕 6년(서기 881년)에  왕이 신하들과 월상루에 올라 서울거리를 보니 17만8천9백36호나 되는 집들이 모두 기와집으로  처마가 잇닿아 있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유추한 것이다. 당시 도시는 배반리와 성건리  일대에 널려 있었던 만큼 이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월성 동쪽 언덕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만월성터 경주고 부근
  이밖에 서라벌 최대의 규모를 가졌던 성인 만월성이 있었으나 그 위치가 확실하지 않다. 이  성의 둘레는 2858.09m로 둥글게 쌓은 토성이었다고 한다. 만월성은 지금의 경주고등학교 서북쪽  편에 있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곳에는 곱게 다듬은 주춧돌이 줄지어 있어 규모가 큰  건축터임을 보여주고 있다. 만월성은 초기의 금성과 월성이 규모가 작아 후대에 그 규모를  늘려서 궁성을 만든 것이다. 이 성은 당나라의 서울을 본받아 쌓은 궁성으로, 여기서 반월성  쪽으로 주작문가도를 내고 그 좌우로 바둑판처럼 작은 길을 내어 완벽한 도시계획을 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근화여고 부근과 경주여중 부근의 길이 바둑판처럼 설계되어 있는 것은 옛  서울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동궁은 원 이름이 달못으로 알려진 안압지이다. 이 곳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인공정원이다. 이 궁은 문무왕 14년(647년)에 조성했다. 이 궁은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과  나라에서 잔치를 베풀던 임해전의 정원을 겸했다. 이 궁터는 1975년 3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발굴조사에 의해 일부 건축의 규모와 못의 본래 형태가 밝혀졌으며, 못은 거의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치술령__애절한 그리움 깃든 산

박제상 부인의 망부석
  치술령은 그리움의 산이다. 바다를 건너가서 죽은 지아비에 대한 아내의 애타는 마음이 깃든  산이기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 신라의 충신 박제상(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되어 있다)은  왜국에 볼모로 잡힌 신라의 왕자를 탈출시키고 그곳에서 잡혀 죽는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가눌 길 없어 동해가 바라보이는 이 산위에 올라 통곡하다가 죽어간다.

 

이런 슬픈  전설이 깃든 이 산은 경주시 외동면의 남서쪽에 있는 해발 7백65m의 험한 산이다. 산 위에는  박제상의 아내가 앉아서 바다 멀리 왜국을 바라보았다는 망부석이 있다. 이 산은 금오산맥이  이룬 묏부리 중에서 가장 높고 험한 산으로 경주시 외동면 녹동리에 위치한다. 불국사역에서  울산 쪽 국도를 따라가면 입실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거기서 계속 국도를 따라가다가 모화리에서  서쪽 도로로 꺾어든다. 석계리를 지나 한참 달리면 녹동이라는 마을에 닿는다. 치술령은 마을  서편에 서 있다.   이 마을에서 두 시간의 등산을 하면 정상에 닿는다. 산은 귤참나무와 물푸레나무 등 잡목으로  덮였다. 중턱부터는 으름과 다래덩굴이 온통 뒤덮인 가운데 가파른 산길이 이어진다.  

 

산 위에 오르면 서북쪽으로 태백, 소백의 연봉이 멀리 바라보이고, 동남쪽으로는 울산만을  지나 동해의 짙푸른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청명한 날은 대마도가 바라보인다고 한다.   이곳 정상에는 기우제를 지내기 위한 제단이 있다. 망부석은 산 정상의 바로 동편 아래쪽에  있는 거대한 화강암이다. 이 바위는 상부가 편편하여 사람이 앉기에 편하게 되어 있다. 그밖에  이곳에는 신모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박제상의 부인은 죽어서 새가 되었다고 한다. 산의 정상에서 서편기슭을 약 두 시간 정도  내려간 기슭에는 그 새가 날아 들어갔다는 은을바위가 있으며, 그곳을 기념하여 세운  은을암이라는 절이 있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죽어서 치술신모가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신모사는 그 때문에 세워졌던  것 같다. 치술신모에게 빌면 가뭄에 영험이 있다 하여 이 산 정상의 기우제는 예부터 이 일대  주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지난 여름의 가뭄 때에도 이 산 정상에서는 성대한 기우제가  벌어졌다. 그런 만큼 이 산은 이 일대의 영산으로서 오랜 옛날부터 숭앙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망부석에 앉아 동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름 모를 새들이 골짜기에서 울어대고, 산의 숨소리와도  같은 바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흡사 치술신모의 한서린 한숨을 듣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장렬한 충절의 죽음
  삼국유사에 실린 '내물왕과 김제상'의 얘기는 장렬한 충신전으로 유명하다. 그의 얘기는  삼국사기의 '열전'에도 나온다.   신라 17대 내물왕 36년(391년) 왜왕은 신라와의 화친을 위해 미해왕자를 사신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 나이 열 살인 미해왕자를 보냈으나, 왜국에서는 왕자를 볼모로 억류하여 30년이 지나도록  신라로 되돌려보내지 않았다.  

 

내물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눌지가 19대 임금으로 올랐다. 그가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419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다시 사신을 보내 내물왕의 왕자 보해를 화친의 뜻으로 고구려에  보낼 것을 간청, 보해왕자는 고구려로 갔다. 장수왕 역시 보해왕자를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즉위한 지 10년이 지난 후 눌지왕은 왜국과 고구려에 잡혀 있는 두 아우를 가슴 아프게  그리워했다. 그래서 신하들과 의논하니, 제상이 이에 자원했다. 제상은 당시 삽라군(지금의 경남  양산)의 태수였다. 제상은 변장하여 고구려로 가서 왕자 보해와 접선, 모의하여 왕자를  빼내어선, 신라로 돌아온다. 이어서 제상은 곧장 말을 달려 율포(밤개라고도 하며, 현재의  울주군 청간면 표리)바다를 통해 왜국으로 건너간다. 그리하여 미해왕자를 탈출시키고, 그는  탈출 시간을 지연시키다가 잡힌다. 왜왕은 제상의 변절을 요구했으나 제상은 끝까지 '나는  신라의 신하임'을 고수했다.  

 

그리하여 발바닥의 가죽을 벗긴 다음 갈대를 베어낸 위를 걷게 해도 의지를 굽히지 않았으며,  벌겋게 달군 철판 위에 세워도 그는 굴하지 않아, 마침내 불태워 죽임을 당한다. 제상의 장렬한  죽음과 굴하지 않는 충절에 크게 감화, 신라왕은 나라 안의 죄수를 크게 사면하는 한편 제상의  아내에게는 '국대부인'의 작위를 내린다. 그의 딸은 왜국에서 돌아온 미해의 부인이 된다.   이러한 장렬한 얘기는 바로 신라인들에게 충성의 본보기로 채택됐다. 당시 고구려와 왜국에  대하여 신라는 당당하지 못했음을 이 이야기는 드러내고 있다. 왕자 보해와 미해를 국가의  권위로서 떳떳하게 데려오지 못한 것은 당시의 신라 국세로 봐서 부득이했던 듯하다. 그런  가운데 제상의 슬기와 용기는 특히 돋보인다. 이러한 슬기와 용기 및 강인한 충성심은 바로  화랑도 단체를 통해 확대되고 높여졌다. 그리하여 곧이어 오는 신라의 융성과 삼국통일의 성취를  끌어내는 원동력으로 작용될 수 있는 것으로 국가에 의한 충성의 전형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장사'와 '벌지지'
  이와 더불어 삼국유사는 박제상과 그 아내와의 정이 돋보이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적고 있다. 당시 제상이 율포로 나갔을 때 그의 아내는 지아비를 보기 위해 뒤따랐으나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망덕사 절문 남쪽의 모랫벌에 나가누워 길게 울었다.   그래서 그 모랫벌을 '장사'라 했다. 친척 두 사람이 겨우 그를 부축하여 되돌아오는 길에  부인은 펄쩍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 일어나려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 자리를 다리를 뻗었다 하여  '벌지지'라 했다는 것이다.   망덕사는 경주 배반리의 낭산 남쪽에 있었던 절로 절터만 전하고 있다. 장사는 이 절터의 남쪽  남천가에 있었던 모래밭이었는 듯하다. 현재 남천은 제방이 쌓여져 모래밭이 옛 같지 못하다. '벌지지' 역시 남천과 망덕사지 사이에 있었던 듯하나, 그 흔적을 찾을 길 없다. 망덕사지 곁을  흐르는 남천변의 제방 위에는 이 지역이 장사와 벌지지의 현장임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옛날 경주와 울산 가의 왕래는 낭산 남쪽으로 해서 불국사역 쪽으로 빠져나갔음을 이 이야기를  통해 상상할 수 있다. 어쨌든 제상과 그 아내의 사랑은 죽음을 같이한 슬프고 아름다운  얘기이다. 제상의 아내는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치술령을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며 울다 죽었다. 그 한스러운 죽음 때문에 결국 그녀를 치술신모로 떠받들어 모시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사천왕사지__문무왕의 자주의지 깃든 호국가람

사천왕사의 위치
  낭산의 서남쪽 기슭에는 사천왕사가 있었다. 사천왕사에서 1백m 떨어진 서남쪽 남천가에는  망덕사가 있었다. 경주박물관에서 남편으로 1km쯤 떨어진 곳이다. 현재 남아 있는 사천왕사터  입구에서 통일전으로 가는 길과 불국사로 가는 길이 갈린다. 사천왕사터의 서쪽, 불국사로 가는  도로를 건너면 배반들이 남천을 따라 펼쳐진다. 들의 중간에 전신주가 남북으로 쭉 서 있는  곳으로 옛날 길이 있었다고 한다. 그 길은 경주시내에서 사천왕사 앞을 지나 망덕사 서쪽을 돌아  남천을 건너 불국사 앞들로 해서 울산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그 길은 논으로  변해버렸다. 지금의 새 도로가 굳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그 길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월명스님이 달을 멈추게 한 곳
  사천왕사 앞을 지났던 그 옛길에서 한때 달이 잠시 가던 길을 멈춘 적이 있었다. 이 꿈 같은  얘기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월명스님의 설화 속에 나온다. 월명스님은 화랑도요, 이름난  향가의 작가인데다 탁월한 음악가였다. 그는 특히 젓대(피리)를 잘 불었다. 하루는 달밤에  사천왕사 문 앞의 큰 길을 젓대를 불며 걸어갔다. 그 소리에 달은 가던 길을 멈추었다는 것. 그래서 그 길이 월명리라 불렸고, 그 때문에 그도 유명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이곳의 지형과 잘 맞아떨어지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신라 때만 해도 이 일대는  신유림의 숲이 덮이고, 그 속에 웅장한 사천왕사가 단청빛을 아롱이며 서 있었다. 그 서남쪽  가까이에는 망덕사의 큰 절이 서 있었다.   망덕사 아래로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남천이 고운 모래 위로 흘러내렸다. 내 건너편에는  부용꽃처럼 벌어진 남산이 펼쳐졌다. 길은 그 중간으로 나 있었으니 달밤의 경치가  어떠했겠는가. 월명의 이 설화는 바로 소리(젓대)와 산천과 풍류(화랑도인 월명의 풍류)가  혼연일체를 이룬 융화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월명의 향가는 두 편이 전해온다. 도솔가와 제망매가가 그것이다.

  생사길이란/여기 있으려 하나 있을 수 없어/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가버리는가/어느  가을날 이른 바람에/이리저리 떨어질 나뭇잎처럼/한 가지에서
떠나선/가는 곳 모르는구나/아아,  미타찰에서나 만나리니/내 도 닦아 기다리리라

 

 '제망매가'이다. 죽은 누이를 애통해하는 심정이 넘쳐흐른다. 그러면서도 구도자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 노래는 전래되어 오는 향가 중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그의 또다른 노래인 도솔가는  천재지변을 물리치기 위한 주술적인 것이다. 즉 경덕왕 19년 4월 초하루에 해가 둘이 떠서 10여  일간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산화공덕(부처 앞에 꽃을 뿌려서 부처를 공양하는 일)을 해서  재액을 풀고자 했다. 때마침 그 의식장 옆을 월명스님이 지나갔다.   그리하여 인연 닿는 중이라 하여 월명은 왕에게 불려가 도솔가를 지었다고 한다.

   

당군 물리치기 위해 건립된 사찰
  월명스님의 얘기를 간직한 현장인 사천왕사는 현재는 절터뿐 황량하다. 그러나 신라 때에는  대가람이었음을 현재 남아 있는 초석들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사천왕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당의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일년으로 지은 호국의 가람이다. 이 절이 세워진  낭산은 신라인들과 각별한 관련을 맺었던 해발 1백4m에 불과한 나지막한 산이다. 흡사 언덕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낭산은 낮지만 신령스러운 산으로 신라인의 숭앙을 받았다. 낭산은 경주시  보문동과 배반동 일대에 걸쳐 있으며, 사적 제1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일대에는 사천왕사를  비롯하여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효공왕릉 등이 있으며, 문무왕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유적들이  있다. 이곳은 경주의 7처 가람터의 하나인 신유림터로 선덕여왕 때에 도리천이라고 하여  신성시되었다.  

 

선덕여왕은 죽으면서 "도리천에 나를 묻어달라"고 유언했으며, 그곳이 바로 현 낭산의  기슭임을 지적했다. 여왕이 죽은 지 30여 년 만에 여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지자  비로소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사천왕이 주거하는 하늘(세계)은 바로 도리천의  아래에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도리천은 욕계 6천 중 두번째이며 삼십삼천이라고도 한다. 수미산  꼭대기에 있으며, 이곳을 지배하는 신이 바로 제석천이다.   삼국유사에는 사천왕사의 창건은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668년 삼국을 통일했다. 당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곳곳에  점령지구의 군정기관인 도호부와 도독부를 설치하여 신라의 자주권을 침해했다. 당은 신라마저  손에 넣으려는 계략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문무왕 14년, 당나라는 신라가 저들의  도독부군사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9만 대병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해왔다. 이에 당군을 불타의  힘으로 퇴치하기 위해 세운 절이 바로 사천왕사이다.   삼국유사에는 당나라 군사들이 배를 타고 쳐들어온다는 보고에 급히 절을 짓고, 월명스님을  우두머리로 삼아 문두루 비법을 쓰니, 바람과 물결이 이러 당나라배가 모두 침몰했다고 적고  있다. 당은 곧이어 다시 5만 명의 군사를 보냈으나 역시 그들이 탄 배가 침몰했다.

   

철로에 잘린 성지
  사천왕사는 통일 후에 나타나는 가람배치인 쌍탑가람의 형식을 갖추었음을 절터의 주춧돌들은  보여준다. 초석을 보면 금당을 중심으로 목탑인 동탑과 서탑이 있고, 금당의 뒤로는 좌우에 각각  경루가 있었으며, 그 뒤로 강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절의 앞쪽은 중문이 있어서 이 문의  좌우로 화랑이 둘러져 강당과 이어졌음을 추측하게 한다. 금당을 중심으로 한 쌍탑배치는  통일이후에 보이는 양식인데, 목탑이면서 쌍탑양식은 사천왕사에 처음 보인다. 석탑으로 쌍탑을  배치한 것으로는 감은사가 유명하다.  

 

이밖에 이 절에 남아 있는 유물은 머리가 잘린 거북돌 2기와 당간지주 하나가 있다. 당간지주는 절의 입구에 있다. 거북들은 절의 동남쪽 보리밭 사이에 있다. 이 거북돌은 그  사실적인 조각 수법과 등에 새겨진 무늬의 음각이 탁월해 신라시대 거북돌 중에서도 손꼽히는  작품이다  그중 서쪽 거북돌은 '문무대왕릉비'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거북돌은  원래 머리를 북쪽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사천왕사터는 훼손이 많이 되었다. 일제 때 무책임한 행정당국에 의해 강당터의 일부가  잘리면서 동해남부선인 기차선로가 놓여졌다. 그래서 사천왕사는 지금도 철로에 의해 두동강으로  절단된 채 풀 속에 묻혀 있다.

     

망덕사지와 비파암__지혜로 위난넘긴 신라인의 얼 담긴 곳
망덕사의 건립 목적

  사천왕사지 앞의 망덕사지와 남산 비파골의 석가사지는 전신석가가 현신한 설화가 얽혀있는  전설의 현장이다. 망덕사를 창건하게 된 것은 사천왕사를 당나라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당나라 군사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사천왕사를 짓고 비법으로 그들을 물리치게 되자,  당나라에서는 그 사실을 알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다. 이때 신라조정에서는 급히 망덕사를 지어  이 절이 바로 사천왕사라고 속였다.

 

번번이 싸움에 패한 당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풀어주기 위해  "우리는 절을 지어 당나라 황실의 만수를 빌었다"라고 거짓 구실로 당의 사신을 속였던 것이다. 그런 만큼 망덕사는 거짓구실로 당의 사신을 속여 나라의 위난을 극복한 신라인의 지혜와 호국의  얼이 담긴 절이다.   망덕사는 문무왕 11년(671년)에 창건했으나 삼국유사에는 효소왕 즉위년(692년)에 망덕사를  낙성했다고 잘못 기록하고 있다. 아마 문무왕 11년에 당의 사신을 위해 절을 급조로 창건한 후  서서히 절을 중수하여 효소왕 때에 낙성재를 베푼 것일 듯하다.   망덕사터는 사천왕사터의 서남쪽 2백m 지점의 남천가에 있다. 절터에는 당탑, 보랑 및  목조탑이 세워졌던 흔적들이 풀숲에 묻혀 있다. 초석과 목조탑의 흔적 등으로 봐서 이 절은  상당히 큰 규모였던 듯하다. 이곳에는 높이 2.5m의 당간지주만이 외롭게 솟아 있다.

   

진신석가 현신 설화
  효소왕 8년, 망덕사의 낙성재가 베풀어지던 날, 왕은 친히 이 절에 가서 공양을 베풀었다. 그때 외양이 누추한 한 중이 허리를 구부리고 그 재에 참석하기를 청했다. 왕은 그에게 말석에  앉도록 했다. 재를 마칠 때쯤 왕은 그 중에게 농담삼아 물었다.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예,  저는 비파암에 살고 있습니다."   왕은 다시 그를 희롱하여 말했다. "지금 나가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노라는 말을 하지 말게나"   왕의 이 말에 그 중은 웃으면서 응대했다. "폐하께서도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진신석가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옵소서"   말을 마치자 그 중은 몸을 솟구쳐 남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왕은 놀랍고 부끄러웠다. 그래서  동쪽산에 달려올라가 중이 사라진 쪽으로 절하고, 신하들에게 그가 간 곳을 찾게 했다. 그 중은  남산 삼성곡(또는 대적천원)이라는 곳에 이르러 바위 위에 지팡이와 발우(스님들의 식기)를 놓고  숨어버렸다. 시자가 이 일을 고하자 왕은 석가사를 비파암 아래에 세우고 그의 자취가 없어진  곳에는 불무사를 세웠다.   이상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이다. 희롱삼아 던진 말 한마디로 임금이 창피를 당한 이  얘기는 드러난 바깥 모습만으로 그 삶을 평가하려는 속된 사람의 짧은 소견을 비웃는 내용이  들어 있다.   눈에 드러난 현상 속에 감추어진 가치의 세계를 드러냄으로써 진리를 나타낸다는 것은 불교의  세계인식의 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 설화는 허망한 현상계에 집착하는 중생들의 짧은 소견을  경계하고, 현상 속에 감추어진 진리의 진면목을 투시해야 한다는 교훈이 깃들어 있다.

   

진신석가 사라진 비파암
  이러한 설화의 현장인 비파암은 남산의 비파골에 있다. 비파골은 서쪽 남산의 약수계 다음  골짜기이다. 경주교도소가 있는 약수계 입구에서 1km쯤 비포장도로를 따라가면 비파마을이  나타난다. 이 마을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큰 골짜기가 비파골이다. 비파골을 타고 한 시간 정도  좁은 산길을 걸어 올라가면 비파암에 닿는다. 이 골짜기는 중간의 잠늠골과 상부의 사롱골 등의  작은 골짜기가 모여 이룬 골이다.  

 

일제침략기에 조선 총독부가 발간한 "남산의 불적"을 보면, 석가사는 잠늠골 입구에 서 있는  삼각형의 봉우리 밑에 있으며, 그 아래로 내려가 비파골의 입구 부근에 불무사가 있다고 되어  있다.   이 두 곳에는 지금도 절터로 보이는 석축이 남아있다. 그래서 지금도 석가사와 불무사의  절터는 이 두 곳으로 확정지어져 있다.  77년에 발간된 '신라의 폐사 II'(한국불교연구원)에도  그렇게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현지를 답사해보면 석가사와 불무사는 비파골의 상류에 있으며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것이 허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잠늠골을 지나 풀덤불을 헤치고 계속 골짜기로 들어가면  사롱골 입구에서 몇 개의 골짜기가 갈라지며 눈앞에 화강암의 기이한 바위들이 꽉 들어찬 광경을  보게 된다. 골짜기의 경사는 갑자기 급해진다. 바위들을 타면서 올라가면 흡사 비파의 모양을 한  큰 바위가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다.

 

이 바위는 높이가 5m정도 되며 윗부분이 뾰족하고,  아랫부분은 동그스름한 게 완연히 비파악기의 모양이다. 비파암은 바로 이 바위를 가리킨 것이  틀림없구나 하는 확신이 당장 들 정도이다.   비파암 1백m 아래 남쪽 계곡 옆의 풀덤불을 헤치고 조심스럽게 찾아보면, 절터가 틀림없는  석축이 발견된다. 이 절터가 바로 석가사지이다. 삼국유사에는 '비파암 아래에 석가사지를, 중이  지팡이와 발우를 놓고 사라진 곳에 불무사를 세웠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불무사는 비파암  부근이 틀림없다. 비파암의 위쪽 1백m쯤을 올라가면 큰 바위가 연이어 서 있다.

 

그중의 한  바위는 큰 바위 위에 몇 개의 바위들이 얹혀 있고, 그 위는 제법 너른 평지를 이루고 있다. 바위  아래와 위의 평지에는 신라시대의 기와조각들이 많이 흩어져 있어 이 지역에 절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산의 경사가 심해 절이 설 때라고는 바위 위의 평지뿐이다. 그러므로 불무사는  이 바위 위에 조그만 암자 형태로 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바위 위에 서보면 바로 아래  비파암이 있고, 그 아래 석가사지가 눈에 들어온다.   또한 왼쪽으로 비파골의 상류인 사롱골의 골짜기가 눈에 들어오며 그 위에는 남산의 정상  가까운 묏부리이다. 사롱골의 능선을 누비면 삼층탑으로 보이는 탑석들이 능선 위에 흩어져  있어, 이 골짜기에는 크고 작은 절들이 꽤 있었으리라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일제의 절터 고증은 허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석가사지와 불무사지가 잘못된 것이며 비파암을 중심한 이곳이 옳다고  보는 근거는 또 있다.
  삼국유사에는 중이 사라진 곳을 삼성곡이라 했으며, 일연은 '삼성을 혹은 대적천이 발원하는  곳'이라고 주석을 달고 있다. 비파암에서 올려다보면 능선위 산의 정상 가까운 묏부리에  '3형제바위'로 불리는 세 개의 바위가 앉아 있는 게 보인다. 이들 바위는 지금도 인근마을  사람들의 기도처로, 촛불을 밝힌 흔적들을 보여 주고 있다. '삼성'의 '성'은 경상도 방언으로  '형'일 가능성이 많아 '삼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골짜기는 '삼성골'로 불리기 이전에 '삼형제바위골'로 불리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대적천'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이곳의 골짜기가 급하기 때문에 비가 오면 갑자기 물이  불어 급히 골짜기로 쏟아져 내리며, 그때 이 산에 많은 화강암의 부스러기(모래)들이 골짜기에  쌓이게 되어서 생겼을 가능성이 크며, 이 대적천이 발원하는 곳이 곧 비파암 부근이 되는  것이다. 일제당시에 추정된 절터는 이 골의 중간지점에 해당하는 만큼 이러한 사실과 전혀  부합이 되지 않는다.

     

포석정__신라왕실의 영화와 패망의 상징

신라왕의 놀이터

  포석정 앞에 말을 세울 때/생각에 잠겨 옛일 돌이켜보네/유상곡수하던 터는 아직  남았건만/취한 춤 미친 노래 부르던 일은 옳지 못했네/황음한 일 있으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을까


  서거정이 읊은 '포석감회'의 앞부분이다. 포석정은 신라왕실의 영화와 패망의 상징이다. 이곳은 임금의 놀이터로 쓰이던 이궁이었다. 풍류 넘치는 거나한 술자리의 터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라 말기의 쇠운 속에서 술에 도취했던 왕실의 타락상이 드러난 곳이 바로 이곳이다. 해공왕 이후 기울기 시작한 신라의 국운은 말기에 이르러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사방에서 도적이 끓고, 민심은 흉흉해졌으며, 심상치 않은 조짐들이 나타났다. 더불어 왕권을  다투는 권력투쟁이 빈번해졌다.   그러나 왕실은 도탄에 바진 백성들을 잊고 술잔치로 흥청댔다.

 

결국 이러한 왕실의 타락이  신라 멸망을 재촉했다. 포석정에 얽힌 경애왕의 슬픈 얘기도 그러한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경애왕 4년(927년) 11월, 왕은 비빈과 종친 등과 함께 포석정에서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그 전에 후백제의 기린아 견훤이 신라를 침범, 고울부(지금의 영천군)에까지 쳐들어와  경애왕은 왕건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경애왕은 이곳에서 잔치를  벌인 것이다. 한참 취흥이 무르익어 갈 무렵 갑자기 견훤의 군사들이 포석정을 덮쳤다.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왕비와 함께 후궁으로 들어가 숨었다.

 

왕의 종친과 궁녀들은 붙들려 목숨을  애걸했으나 견훤의 군사들은 그들을 무참하게 살육했다.   견훤은 왕비를 겁탈했으며 군사들은 궁녀들을 능욕했다. 이어 견훤은 경애왕의 족제 김부(곧  경순왕)를 왕으로 세우고 왕의 동생 효렴과 재상인 영경을 볼모로 잡았으며, 나라의 보배와  병기를 빼앗고 신라의 공인 기술자 중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가 버렸다.   이러한 굴욕적인 사건이 있은 후 10년이 못 되어서 신라는 고려에 왕권을 넘겨주게 된다. 천년의 찬란했던 영화가 허망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서라벌의 근처에까지 닥쳐온 적의 침입에  바로 대처하지 못하고 안락에 탐닉했던 당시의 무모함과 국방의 무방비상태를 이 얘기는  단적으로 드러낸다.

   

신라의 이궁
  포석정은 서남산의 포석계곡 입구에 있다. 오릉에서 언양가는 길을 따라 나정을 지나면  창림사지 입구에 닿고 거기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포석정에 닿는다. 포석계곡은  윤을곡과 함께 남산성의 바로 아래 골짜기이다. 그 정상은 남산의 최고봉이다.  

 

포석이란 이름은 포석계곡의 바위모양이 마치 전복과 같이 울퉁불퉁하다고 해서 붙여졌다. 포석계곡은 신비스러운 느낌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경관이 좋다. 포석정은 포석계곡의 입구에  자리잡고 있으며 담장을 두르고 잘 단장이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포석정은 임금의  놀이터인 이궁이었던 것 같으나 궁궐은 없어지고, 전복모양의 석구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석구는 화강암을 다듬어 구불구불하게 만든 것으로 물길이 타원형을 이루면서 감돌아  빠져나가게 되어 있다. 이곳이 바로 경애왕이 술자리를 벌였던 현장이다. 이곳에서 임금은  유상곡수의 잔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유상곡수란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잔이 자기 손에 닿으면  시를 짓는 놀이를 말한다. 수구의 폭은 30cm, 높이도 30cm정도이다.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물을 붓는 자리에 거북모양의 큰 돌이 있었으며, 그 입에서 물이 나오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수구 옆에는 느티나무 고목이 서 있다. 수구의 물은 남산계곡(포석계)에서 흘러 내리는  물을 끌어당겼다. 그 물이 거북에게 연결되어 거북의 입으로 물이 흘러내려, 석구의 홈을 따라  감돌게 된다.  

 

석구는 물이 들어오는 부분과 빠져나가는 부분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되어 있다.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도도한 시의 흥취를 자아냈던 것이다. 수구의 거북돌은  19세기 말엽 안동으로 옮겼다고 하나 현재 그 있는 곳은 알 수 없다.   이 석구의 배치는 신라 궁원예술의 독특한 예술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주변의 풍치를  배경으로, 자연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인공적인 기술을 가미한 것이다. 이 포석정은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경애왕의 슬픈 얘기가 전해올 뿐이어서 위정자들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경각심을 일깨우는 장소로 곧잘 소개되어 왔다.

   

남산신의 춤
  삼국유사에는 포석정에 관한 얘기를 또 하나 전하고 있다. 신라 49대 헌강왕이 포석정에  거동했을 때였다. 남산의 신이 문득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다. 그러나 그 귀신의 춤이 좌우의  신하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왕의 눈에만 보였다. 왕은 남산신의 그 춤을 본따서 몸소 춤을  추었다. 어전에 나타난 춤을 춘 남산신의 이름은 '상심'이라 했다. 그래서 그후 사람들은 그  춤을 전하고 '어무상심' 또는 '어무산신'이라 했다는 것. 이밖에도 헌강왕 때에는 몇 차례  산신들이 왕 앞에 나타난 춤을 춘 일이 있었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은 이들 춤을 신라  말기에 보인 쇠운의 경고였다고 파악한다. 귀신들은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므로 이를 경고하기  위해 춤으로 왕 앞에 나타났으나 왕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상서로움으로 받아들여  환락이 갈수록 심해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패망이었다.  

 

옛날 진평왕은 스스로 궁중의 향연과 사냥을 금했다. 문무왕은 검소한 생활을 몸으로  실천했다. 또한 죽어서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고자 바닷물 속에 장사지내줄 것을 유언으로  남기기도 했다. 군주가 이처럼 솔선수범했을 때 나라는 번성했고, 국운은 천하에 떨쳐졌다. 그러나 말기에 오면 신라왕실은 윗대의 그러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환락에 빠진다. 그리하여  포석정에서처럼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의 원성 속에서 술잔과 궁녀의 춤으로 허송하다가 결국  무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굴불사 사면석불__화엄세계의 염원

땅 속에서 나온 돌부처
  신라 35대 경덕왕이 백률사에 행차하여 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였다. 문득 땅 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했다. 땅 속에는 커다란 돌이 하나 묻혀 있었다. 그 돌의  사면에는 부처들이 새겨져 있었다. 왕은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굴불사라 했다.  

 

삼국유사에 실린 굴불사 창건에 얽힌 얘기이다. 이 절은 한때 굴석사로도 불리었던 듯하다. 삼국유사에는 굴불사가 와전되어 굴석사로 잘못 불리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굴불사가 있는 곳은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의 기슭이다. 굴불사지에서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백률사가 있다. 그 위치는 황성공원의 동쪽 산업우회도로변이며, 굴불사지 바로 아래에는 근래에  지은 듯한 암자(굴불암)가 대숲 속에 서 있다. 굴불사의 절터는 현재 그 흔적조차 없다. 다만  사방불이 새겨진 사면석불(보물 1백21호)만이 참나무와 소나무 숲속, 계곡 곁에 서 있을 뿐이다.

 

이 사면석불은 경덕왕이 발견했던 바로 그 석불이다. 이 석불은 백률사 밑에 있는 자연석을 깎은  것으로 보인다.   그 바위가 바로 계곡에 있어 계곡의 흐르는 물을 막기 위해 석불 주위에 둥글게 축대를 쌓아  보호해 놓고 있다. 축대의 높이는 사람키의 반쯤 높이이며, 물이 흘러오는 동쪽과 남북편을  둘러싸고 아래쪽인 서편만이 입구가 터져 있다. 그래서 얼핏보면 석불이 땅 속에 반쯤 묻혀 있는  것을 파낸 듯한 느낌을 준다. 굴불사라는 이름은 이 때문에 생긴 듯하다. 또는 홍수라도 지면  계곡에서 흘러내는 물에 떠밀려 온 흙이 이 바위를 덮어버리기 쉬웠을 것이다. 그래서 홍수  후에는 번번이 땅을 파서 바위를 발굴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석불은  경덕왕 이전에 조각되어졌으며, 홍수로 흙에 덮였던 것을 다시 찾아내는 작업을 설화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바위의 사면에 새겨진 부처들
  굴불사는 경덕왕 때인 8세기 중엽에 지어진 것이다. 사면석불의 조성연대 역시 신라 삼국통일  초기의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이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1세기 가까이 지난 시기로 정치, 문화의 각 방면에 걸쳐  가장 흥성했던 시기이다. 즉 통일이후의 수습과정을 끝내고 내외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던  시기였다. 굴불사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서 창건된 것이다.  

 

사방불은 큰 바위의 사면에 불상을 조각한 것을 말한다. 신라의 유물과 유적 중에는 사방불이  꽤 남아 있다. 굴불사지 사면석불 외에도 경주 남산의 사면석불, 안강 금곡사지의 사방불,  호원사지의 사방불 등이 그것이다. 사방불의 4면에 어떤 부처님을 모시는가 하는 것은 이론이  많고, 일정하지 않다. 경전 등에 보면 동서남북의 사방을 주재하는 부처들이 나오지만, 실제로는  경전에 따라 조각되어져 있지는 않다. 시대와 사회적인 환경에 따라 그 사회가 지향하는 부처의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굴불사 사면석불의 경우 동쪽에는 약사여래가, 서쪽에는 미타삼존 즉 중앙이 미타, 좌우에  관음, 대세지 보살을 조성했으며, 북방에는 여래상이, 남방에는 2구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불상은 높이 4m의 바위 덩어리에 양각으로 새겼으며, 서방 미타여래를 보좌하는 관음과 대세지  보살은 따로 길쭉한 돌로 다듬어 큰 바위 옆에 세워 놓았다. 미타여래의 높이는 3.9m이며, 동방  약사여래는 좌상으로 높이가 1.4m 너비 1.1m이다. 동쪽과 서쪽의 경우는 약사여래와 미타여래가  확실하다. 그러나 남, 북방의 불상은 험하게 마멸되어 그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북방  여래상 오른 편에는 음각으로 보살상을 조각한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남방의 2개의 보살상  중 왼편 보살은 머리부분이 부서져 나갔다.   미타여래는 아미타불 또는 무량수불로 불리는 서방 극락세계의 교주이다. 약사여래는 동방  유리빛세계의 교주로 대의왕불로도 불린다.

 

이 부처는 중생의 질병을 치유하고 수명을 연장하며  재화를 소멸하고 의복과 음식을 만족하게 하는 부처이다.   그밖의 남, 북 불상들도 각각 그 방향의 세계의 교주들일 것이다. 이들 불상들은 그 조각에  있어서 입체, 양각, 음각, 입상, 좌상 등 변화있게 배치했다. 또한 불상의 모습이 풍만하고  부드러우면서 생기를 띠고 있어서 신라통일 초기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독특한 불상의 배치 방식
  사면불은 거친 바위를 다듬어 화엄세계를 나타내고자 한 신라인의 염원이 담긴 예술품이다. 신라인의 석가와 미타, 지장, 관음보살의 4불을 특히 좋아했다. 또한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  약사여래신앙이 크게 유행을 일으키기도 했다. 굴불사 사면석불 중 동쪽에 약사여래를 모시게 된  것도, 신라인 나름의 신앙심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존하는 신라의 사방불은 모두 동에  약사, 남에 미를, 서에 미타, 북에 석가로 되어 있다. 이러한 불상의 배치는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신라인의 독창적인 배치이다.  

 

일본의 경우 정면에는 석가, 뒷면엔 정광, 좌편에는 미륵, 우편에는 보현으로 되어 있어  사방불이라기보다는 석가 삼존 형식에 머물고 있다. 신라인의 사면불 구성은 경전에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경전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식으로 배치함으로써 독특한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   굴불사지가 있는 곳은 금강산의 서편 아래 기슭이다. 이 기슭에 굴러다니는 숱한 바위 중의 한  바위에 신라인은 정신을 불어넣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과 예술적 기교를  동원하여 한 이름모를 장인이 사면불을 새겼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면불의 조각이  완성됨과 동시에 거칠고 황량한 바위덩어리가 화장세계로 변모되고 생기 감도는 정신력을 획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면에서 이 사면석불은 신라인들의 돌 다루는 솜씨를 과시한 것이며,  동시에 거친 무정물에서 다정다감한 인간성을 추출하는 예술 정신을 잘 드러낸 것이라 할  만하다.

     

호원사지__호랑이와 인간의 슬픈 사랑 전설

처녀로 변한 호랑이
  삼국유사의 신주편에 나오는 '김현감호' 설화는 한국 호랑이 민담의 전형이다. 호랑이는  아름다운 여자로 변신하여 남자와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인간인 남자와 호랑이인 여자의 사랑은  서로를 알게 됨으로써 비극적인 종말을 갖는다. 이런 식의 도식으로 짜여진 호랑이 민담은  근래까지 갖가지 줄거리로 변용되어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왔다.   '김현감호' 설화는 신라 원성왕시대(785__798)에 서라벌의 서쪽 내를 배경으로 펼쳐진 슬픈  사랑의 얘기이다.

 

이 설화의 현장은 경주 동북편에 있는 황성공원 일대이다. 황성공원의  서편으로는 북천이 흘러 서천과 합류된다. 서천변 현 경주공고 자리에는 흥륜사가 있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김현이라는 청년은 흥륜사에서 호랑이로 변신한 처녀와 만난다.   신라의 풍속에 해마다 2월(음력)이 되면 초8일부터 보름까지 사람들이 흥륜사의 탑을 도는  풍습이 있었다.

 

원성왕 시대에 김현이라는 청년이 밥 깊도록 탑을 돌았다. 그때 아름다운 처녀가  그와 함께 염불하면서 탑을 돌고 있음을 그는 보았다. 김현은 가슴이 떨림을 느꼈다. 새벽까지  둘이서 탑을 도는 동안 그들 사이에는 사랑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이윽고 새벽에 처녀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김현은 처녀를 따라가려고 요청했으나 처녀는 사양했다.   그러나 김현의 끈질긴 요청에 처녀는 할 수 없이 그를 집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호랑이굴이었다. 처녀는 김현을 구석진 곳에 숨겼다. 조금 있자 호랑이 세 마리가 으르렁대며 집  안에 들어오더니 "집안에 비린내가 난다. 마침 요기 때가 되었으니 다행이군"하며 덤벼들려고  했다. 그들은 처녀의 오빠들이었다. 그때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났다. "너희들이 해치기를  즐기니 마땅히 너희 중 한 놈을 죽여 악을 징계하겠다."     죽음으로 보답한 호랑이   이에 처녀는 김현에게 말했다.   "숨김없이 말씀드리지요. 저는 호랑이입니다. 비록 저와 낭군(김현)은 같은 종류는 아니나  하루저녁의 즐거움을 나누고 부부의 의를 맺었습니다.

 

이제 세 오빠의 악은 하늘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 벌을 제가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긴 싫습니다. 당신의 칼에 죽겠습니다." 그러고는 내일 시내에 들어가 사람들을 해치면 나라사람들이 어찌할  수 없으므로 임금이 반드시 높은 벼슬로서 사람을 모집하여 호랑이를 죽이려 할 것이니,  김현더러 겁내지 말고 자기를 따라 성 북쪽 숲속에 오라고 했다.  

 

그러나 김현은 주저했다. 비록 짐승이긴 하지만, 서로는 부부의 의를 맺은 사이가 아닌가. 김현은 "내 어찌 배필의 죽음을 팔아서 한 세상의 입신출세를 바라겠느냐"고 거절했다.   그러나 처녀는 그것은 하늘의 뜻임을 알리고 죽고 나서 자신을 위해 절을 지어 사후의 좋은  과보를 얻도록 해달라고 간청했다. 김현과 처녀는 그날 밤이 새도록 된다, 안 된다 하며  옥신각신하다가 새벽이 되어 울며 헤어졌다.  

 

다음날 과연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와 마구 사람을 물었다. 누구도 호랑이를 막지 못하자  원성왕은 "누구든지 범을 잡는 사람은 2급의 벼슬을 주겠다"라고 공표했다. 김현은 그 일에  자원했다. 김현이 호랑이와 약속한 숲에 들어가자 범은 이내 여자로 변해 어젯밤의 언약을  확인하고 "오늘 제 발톱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모두 흥륜사의 솔잎을 상처에 바르면 곧  나으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현은 차마 죽이지 못했다. 그러자 처녀는 김현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처녀의 시체는 곧 범으로 변했다. 신라인들은 그의 용기를  치하했다.

 

김현은 벼슬을 하게 되자 서천가에 호랑이를 위해 절을 짓고 호원사라고 이름지었다.   이 설화와 함께 일연은 나쁜 호랑이의 설화를 덧붙여 대비해 놓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연은  짐승도 이처럼 사람의 은혜에 보답하는데, 인간으로서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 있는 세태를 꼬집고  있다. 더불어 김현이라는 평범한 사람이 지성으로 탑돌이를 함으로써 큰 보답을 받았음을  강조하여 탑돌이의 공덕과 인과응보의 불교사상을 부각시키고 있다.   어쨌든 짐승과 사람간에 사랑이라는 주제로 관계를 맺어놓은 이 설화는 그 비약적인  얘기구성과 비극적인 종말 때문에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호원사의 위치
  이 설화에 나오는 호원사는 어디였을까. "동경잡지"에는 그 절이 서천가에 있다고 기록했다. 그  이상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 절의 위치는 현재 확실하게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다만 현  황성공원 서편의 절터가 호원사지가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황성공원 부근에는 5층 석탑과  김후직의 묘 등 유적들이 많다. 일제침략 당시 학자들은 호원사지도 황성공원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황성공원에서 남쪽으로 2백m 지점(황성동 403의 1번지)에는 절터가 있다. 부서진 탑조각과  석재들이 많이 보이고 있어서 꽤 큰 절이 이 자리에 있었으리라 추측되고 있다. 탑은 두 개의  거대한 옥개석만이 나란히 엎어진 채로 남아 있다. 절터는 민가로 바뀌었다. 이 자리는 30년  전에 과수원을 일구면서 집이 들어섰다고 한다. 10여 년 전에 과수들을 베어내어 절터는  콩밭으로 바뀌었다.

 

이 자리는 뒤로 금강산이 펼쳐지고 북쪽에는 황성공원의 독립산이 서 있으며  앞으로는 북천이 서천에 합류되는 것이 보이는 곳이다. 내 건너편으로는 경주 시가지를 지나 옛  흥륜사지 쪽이 바라보인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보면 흥륜사의 전탑이 눈에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호랑이와 김현의 사랑은 금강산록에서 황성공원 기슭을 잇는 무성한 송림을 배경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북천 건너편에도 역시 송림이 우거졌다고 전해져 냇물과 잘 어울리는 이 일대의 절경은  짐승과 인간 사이의 기막힌 사랑의 배경으로 멋지게 떠오를 수 있었던 듯하다.

     

설총 유허지__이두를 집대성한 석학의 성장지

외래문화의 주체적 수용
  설총은 한자에서 우리말을 찾아낸 국학의 개조이다. 신라 10현의 한 인물로 추앙받아온 그는  소성거사를 자처한 원효의 아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불교일색이었던 당시 신라사회에서  유학을 고수, 구경을 처음으로 구결로 강론했다. 특히 그는 우리말로 경서를 읽는 새 방법을  발견, 외래문화의 주체적인 수용태세를 보였다. 그렇다고 설총이 이두를 창제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과대평가이다. 설총이 출생하기 이전인 진평왕과 선덕여왕대엔 이미 이두로 된  서동요, 혜성가, 풍요 등 향가가 있었다. 그 이전인 진흥왕대에 세워진 북한산 순순비에도  이두가 보인다. 이로 미루어볼 때 설총은 이두문의 창작자가 아니라 기왕의 것을 정리체계화한  집대성자였던 것 같다.  

 

설총은 경서와 역사에도 능통한 대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는 '방음(우리나라말, 곧  이두)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풍속과 물명에 통회하고 육경과 문학을 훈해하여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몽고, 여진의 언어도 연구했으며, 이들 언어로 된 물건이름도 모두  우리식 발음으로 적었다. 그는 불교의 거봉인 원효와 함께 이 땅에 유학을 열어, 2대에 걸쳐  유불의 위대한 봉우리를 형성한 특이한 가계를 보여준다. 더욱 이들 두 부자는 각기 '우리'라는  굳건한 주체성 위에다 불교와 유교를 수용, 전개함으로써 그 위대성이 더 한층 돋보인다.   설총의 출생을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어느날 원효는 춘의가 발동하여  "누가 자루없는 도끼를 주려나/하늘 받칠 기둥을 찍어내려네"라는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태종 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법사가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하는구나. 나라에 훌륭한 인물이 있으면 이익이 그보다 더 클 수가 없지" 그는  '자루없는 도끼'가 여자의 생식기를 뜻함을 간파한 것이다. 그때 요석궁에 홀로된 공주가  있었다. 무열왕은 관리를 시켜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해 들이게 했다.   그때 원효는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반월성 서편에 있었던 다리)를 지나다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이 함빡 젖게 했다. 왕명을 받은 관리는 그를 요석궁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옷을 말리도록  했다. 이리하여 원효는 요석궁에서 유숙, 공주와 동침했다. 그 일로 태어난 아들이 설총이다.   원효는 '하늘 받칠 기둥'으로 설총을 낳았지만, 설총은 불교보다는 유교를 택함으로써 원효의  기대를 어긋나게 했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출생이 아버지의 파계의 부산물이라는 것을 큰  오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출생 컴플렉스 때문에 그는 그의 뿌리인 불교에 반항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유교를 택했지만 그것으로 그는 이미 '하늘 받칠 기둥'이 되었다.

   

압량면 유곡
  그의 유허지는 현재 확실하지 않다. 그의 위패는 김유신 최치원과 더불어 경주의 서악서원에  모셔져 있다. 해방 직후 그의 묘소가 경주시 보문동에서 발견되었으나 아직 확실한 고증은 안  되고 있다. 서악서원에서는 음력 3월과 8월의 정일(두번째 정일)에 춘추향사가 후손들에 의해  치러지고 있다.   지난 76년초 경산시 압량면 유곡동의 설곡사 부근에서 설총의 신도비가 발견돼, 잠시 학계를  긴장시킨 적이 있었다.

 

이곳은 원효의 출생지라는 추측이 강하게 일고 있는 곳인 만큼 설총의  성장지일 가능성이 컸었기 ㄸ문이다.   그러나 조사 결과 그 신도비는 1913년에 세워진 것이며 그 비와 똑같은 비가 가까운 경산시  압량면 여천동에도 있음이 밝혀져 다소 김이 새고 말았다. 현재 경산시 남산면 하대 1리에 있는  도동재 뒤편에는 그의 묘소가 비와 함께 세워져 있는데 그 묘는 가묘로 된 설단이다.  

 

유곡동의 설곡사라는 이름은 바로 설총이 살았던 골짜기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절 뒤의  산봉우리는 경주봉이라 불린다. 설총이 어릴 때 이 봉우리 위에서 즐겨 글을 읽었는데, 글읽는  소리가 경주까지 들렸다는 설화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이 일대에는 설총의 어머니 되는 요석공주가 친정에 오는 길에 바로 이 유곡동에서  설총을 급하게 낳았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 설화는 전혀 근거가 없다. 아마도 이 설화는  원효대사의 출생이야기가 와전되어 이루어진 설화인 듯하다. 삼국유사에 보면 원효의 출생지는  압량군 남쪽 불지촌 북쪽인 율곡의 사라수 아래였다고 한다. 사라수라고 한 유래는 원효의 집이  원래 율곡의 서남쪽인데 그의 어머니가 임신한 채 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갑자기 아기를 낳게  되어 급한 김에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 휘장을 치고 그 안에서 분만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원효는 나중에 출가하자 그의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를 짓고 그가 출생한  사리수 나무 곁에도 절을 지어 사라사라 했다고 한다. 초개사와 사라사의 위치는 현재 확실하지  않으나 이곳 유곡동과 경산군 자인면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임금을 깨친 화왕계
  설총을 모신 도동제는 유곡동에서 20리 떨어진 곳이다. 이 재실에는 좌우로 명일헌과 해경당의  현판이 붙어있다. 사당 뒤쪽의 홍유후설선생신도비는 설곡사에 있는 비와 형태나 내용이 똑같다.   다만 이 비는 설곡사의 것보다 10년 뒤에 세워졌을 뿐 비문을 쓴 이나 글을 쓴 사람은  동일인물이다. 이 사당은 이 일대의 유림에서 설총을 추모하여 건립한 것이다.   설총에 관한 자세한 자료는 전해오는 것이 거의 없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신문왕에게 모란,  장미, 할미꽃을 비유로 들어 진언한 '화왕계' 설화를 그의 작품으로 소개하고 있다. '내  임금님이 총명하시고 사리를 잘 아시는 줄 알고 왔더니 뵈온 즉 틀렸습니다. 무릇 임금되시는 분  중에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하고 정직한 자를 멀리하지 않는 분이 적은 까닭에 맹자도  종신토록 불우했고 빙당랑도 숨어 센머리로 늙었는데 예로부터 이와 같으니 낸들  어찌하겠습니까'라는 대목은 이 화왕계의 압권이다.   설총은 이처럼 현실을 비판하며 참가하며 당대 지식인으로서 양심에 거리낌없는 참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그는 강수, 최치원과 더불어 신라의 3문장으로 꼽혔으며, 신라 10현으로 추앙된다. 그의 학문의 위대성은 고려에 가서 홍유추로 추봉되어 문묘의 윗자리에 배향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진흥왕릉__신라 최대의 영주를 모신 곳

초라한 왕릉
  신라 최대의 영주로 꼽히는 진흥왕,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 민족의 주체의식을 강조하고,  국토를 확장했으며,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진흥왕은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곧잘 대비되는  영웅이다. 그는 한강유역에까지 진출하여 영토를 서해안까지 이르도록 하고, 중국과의 교통로를  뚫었다. 또한 낙동강유역의 가야제국을 정복했다. 안으로는 국사를 편찬하고, 화랑제도를  창설했으며, 불교를 일으키고 음악을 장려하는 등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이처럼 걸출한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그에 대한 대접은 소홀한 듯하다.

 

그의  왕릉(사적177호)은 신라사 최대의 왕의 능으로서는 너무나 초라하다. 경주의 서쪽 진산인 선도산  기슭, 태종 무열왕릉에서 북쪽으로 5백m쯤 떨어진 호젓한 산 중턱에 그의 능이라 전하는 무덤이  있다. 이 일대는 신라시대의 장지였는 듯 많은 무덤들이 있으며, 진흥왕릉 바로 아래에도  헌안왕릉(사적179호)과 진지왕, 문성왕의 합장릉(사적 178호)등이 있다. 진흥왕릉은 이 일대의  무덤들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산 속에 있을 뿐 아니라, 그 크기도 왜소하고 초라하며 능비 조차  서 있지 않다. 인적이 많지 않는 곳이라서 그런지 다른 왕릉에 비해 능을 보전하는 손길도 닿지  않은 듯 바람 속에 버려진 느낌을 강하게 준다.   이 초라한 능이 정말 진흥왕릉인가. 그의 업적으로 봐서, 신라인들이 이렇듯 소홀한 대접을  했을 리가 없다. 그의 능은 신라 최대의 규모를 갖추는 것이 마땅했을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들이 떠오른다.

 

이곳 선도산 기슭의 이 그의 능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다만 그렇게  전해올 뿐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곳에 진흥왕릉이 세워진 사실을 의문시하기도 한다. 신라유물의  발굴과 연구에 평생을 바치다 최근 작고한 최남주 씨는 진흥왕릉이 경주시내 중심인  노동동고분군 중의 하나인 봉황대(사적38호)로 보기도 했다. 노동동고분군은 경주시청 바로  뒤편에 있는 금관총과 서봉총, 봉황대 등의 무덤군을 가리킨다.

 

이중 봉황대는 밑지름이 82m,  높이가 22m나 되는 신라의 능묘 중 최대의 크기를 자랑한다. 최남주 씨는 "조선조 후기  권이진(1608__1734)이 경주 부윤으로 재임하던 중 경주의 각 고분을 둘러본 뒤 당시까지  무명총이던 선도산 중턱의 고분을 아무런 사증도 없이 진흥왕릉이라 단정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경주시 노동동고분군의 서봉총을 22대 지증왕릉으로, 금관총을  23대 법흥왕릉으로 봉황대를 24대 진흥왕릉으로 추정했다.   그 이유를 최남주 씨는 "금관총 발굴 당시 연꽃무늬가 새겨진 찻잔이 발견됐는데, 이런 사실은  불교가 법흥왕 때 공인된 사실과 부합하며, 서봉총에선 그런 류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그  이전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특히 봉분의 크기로 봐서 진흥왕의 치적과 맞아떨어진다는  것. 이러한 사실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상당한 호소력을 갖기도 한다.

   

진흥왕릉의 위치
  고고학적으로 볼 때 고신라시대의 무덤은 경주 평지에 세워지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고신라의 편년은 7세기 반경까지이며 진흥왕(540__576)도 이 시기에 해당된다. 이은창 교수(전  효성대박물관장)는 경주시내 평지의 고분들(황남동고분군, 노동동고분군 등)은 대부분 7세기  이전 왕들의 무덤이며, 그 이후의 무덤은 경주 외곽지대의 구릉이나 산기슭으로 옮아간다고  말했다.

 

노동동고분군의 경우 이미 발굴된 금관총, 서봉총 등의 구조로 봐서 4__5세기의 왕릉으로  추측되고 있다.   선도산 남편에 즐비한 서악리고분군은 태종무열왕(654__661) 이후와 삼국통일 이후 골품제도가  바뀔 때(무열왕 때 성골이 진골로 바뀌었다)진골출신의 왕족들이 집중적으로 무덤을 쓴 곳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진골 이전이 성골출신 왕족들의 무덤은 경주의 중앙평지일 것이라는 추측이  자연스럽게 제기될 수 있다.   더욱 고신라기에 신라왕릉은 석실무덤이 아니 적석무덤이었다. 고신라의 편년도 무덤의 이러한  구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은창 교수는 "신라왕릉 중 본격적인 석실분은 통일 이후에  나타나는데, 그 무덤은 경주주변의 산과 구릉지대로 옮아가는 경향이 현저하다. 특히  서악리고분은 전형적인 석실분이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하면 진흥왕릉이 경주시내의  평지에 있었을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일부학자들은 삼국사기에는 진흥왕이 죽은 후 '애공사 북봉에 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며 앞의 주장을 반박한다. 애공사의 절터는 경주 효현리에 있다.   대구에서 경주로 오는 국도변의 무열왕릉 못 미쳐 왼쪽 동네가 효현리이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도 진흥왕릉이 '부(구박물관)의 서쪽 서악리에 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고려중기 이후 구전으로 전해오던 것을 수습한 것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의심되고 있다.  그보다는 고분의 구조와 시대적인 고증이 더욱 신빙성을 갖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어쨌든 이 문제는 확실한 고증이 없는 한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 진흥왕릉이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은 문화재당국이 귀를 기울여야 하며 확실한 위치를 바로잡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진흥왕의 업적
  진흥왕은 7세에 즉위했다. 그래서 한때 왕태후가 섭정을 했다. 그가 즉위한 시기는 신라가  미약했던 국세를 펴기 시작한 때였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국력신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재위 6년(545)에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케 하는 등 자주적 역사의식이 이전이 왕들에 비해  높았다.   또한 그는 551년에 개국, 568년에 대창, 572년에 홍제라는 연호를 사용, 자주적인 국가의식을  내외에 선양했다.  

 

그의 국가의식 및 통일의식은 투철했다. 삼국통일은 문무왕대에 완성되지만, 그 발상은  진흥왕대에 구상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 원대한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먼저 불교를 진흥하고,  화랑도를 창설했다. 불교진흥은 순수한 종교적인 수용이기보다는 정치적인 배려에서 나온  것이라는 감이 짙다. 즉 당시까지 짙게 남아 있던 6부장의 세력으로 권력이 각 지방 호족들에  분산되어 있어서 왕권이 미약했다.

 

그리하여 종래의 정신적 가치관을 버리고 불교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도입, 국민정신을 한 곳으로 모으는데 성공,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한다. 그런 다음  화랑도라는 청소년집단을 창설, '충성'이라는 구호 밑에 국민의식을 단합시킨다. 이러한 작업은  이후 국토확장과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밑받침이 되는 것이다.   그는 551년에 백제와 연합하여, 남하하는 고구려군을 공격하고 죽령이북의 넓은 지역을  확보한다. 그 여세를 몰아 백제가 점령했던 한강하류마저 점령, 중국과의 교류를 도모할 통로를  뚫는 데 성공한다.  

 

남쪽의 대가야까지 정복한 그는 1백 20년간 유지해온 나제동맹까지 와해시키면서 한강일대의  지리적 우위를 독점함으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의 의지를 뚜렷이 내보였던 것이다. 그가 세웠던  순수비는 그의 통일염원이 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며, 흥륜사를 중건하여 불교를 처음으로 공인했다. 만년에 정계에서  물러났을 때는 스스로 중이 되어 머리를 깎기도 했다. 그는 45세에 죽었다.

     

무열왕릉과 재매정__'화장 해프닝'의 장소

가장 확실한 신라의 왕릉
  신라 왕릉 중 그 소재가 가장 확실한 것이 무열왕릉이다. 대구에서 경주로 들어간 국도변 경주  서편을 흐르는 서천을 건너기 직전 왼쪽편에 있는 이 왕릉은 이 일대 서악리고분군 중의  하나이다. 왕릉 앞 도로 건너편에는 두 개의 무덤이 보인다. 김인문과 김양의 무덤이다. 무열왕릉 뒤편으로는 네 개의 거대한 무덤이 늘어서 있다.

 

이 들 무덤의 오른편인 선도산  기슭에는 진흥왕릉과 헌안왕릉, 진지, 문왕왕의 합장릉 등으로 추정되는 무덤들이 있다. 이들  외에도 이 일대에는 대소 고분들이 많아 신라시대의 중요한 장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열왕은  진골출신이다. 무열왕 때부터 신라의 왕릉은 성골에서 진골로 바뀐다. 서악리고분군은 경주의  진산인 선도산과 관련된 진골출신 왕족들의 무덤터였다.  

 

무열왕릉에는 유명한 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가 있다  이 비는 문무왕 원년(661년)에  세워졌다. 현재 이수(거북 모양의 조각 위에 세우는 비석)와 귀부(거북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만 남아 있는 이 비는 고개를 쳐든 거북이가 금방이라도 기어나올 것만 같은 생동감  넘치는 걸작품이다. 이수는 여섯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쥐고 있는 조각을 정교하게 했다. 이수의  앞면에는 '태종무열대왕지비'의 글자가 두 줄로 새겨졌다. 이 글씨는 그의 둘째 아들이자 당대의  명필이었던 김인문의 필적이라 전한다.

 

무열왕릉이 확실하다는 것은 이 비석에 쓰여진 글씨  때문이다.   귀부는 머리 부분과 발의 조각이 실물과 같고, 이마와 턱의 보상화를 아로새긴 무늬와 등의   귀갑문과 테둘레에 조각된 운비문의 아름다움이 뛰어났다. 비신은 없어졌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조선 때 경주 부윤으로 있던 이정의 한 관속이 무열왕의 비신을 깨뜨려 자기 선영에  쓰려하는 것을 당시 풍기 군수로 있던 퇴계가 엄히 금했다고 한다. 이런 기록을 미루어보면  비신은 퇴계가 죽은 다음 없어진 듯하다. 1935년 그 비신의 일부(파편)가 작고한 최남주 씨에  의해 발견되어 경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화장 해프닝의 장소인 재매정
  무열왕은 이목이 수려하고 외교 수완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그는 당나라와 고구려, 일본 등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국제외교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왕이 되어서는 김유신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전형적인 정치가였다. 그의 이름은 춘추였으며, 성은 김씨로  문흥대왕으로 추존된 용수(또는 용춘)각간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이었고, 그의  아내는 천명황후 문희이다. 문희는 곧 김유신의 누이동생이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교우는 각별했다.

 

명장 김유신은 일찍부터 김춘추의 사람됨을 간파하고,  그와의 관계를 결속하려 했다. 유명한 '화장 해프닝'은 이렇게 하여 연출된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그 사건을 이렇게 기록했다.   김유신의 집 앞에서 김춘추와 김유신이 공을 차고 놀았다. 김유신은 공을 차는 척하며  김춘추의 옷을 밟아 옷고름을 떼어버렸다. 그리곤 집 안에 들어가서 고름을 꿰매자고 하여  김춘추를 유인, 누이동생 문희로 하여금 옷고름을 달게 했다. 그 일이 인연이 되어 김춘추는 자주  김유신의 집에 들락날락했다. 결국 문희는 아이들 뱄다. 김유신은 짐짓 문희에게 '네가 부모에게  고하지도 않고 잉태한 것은 무슨 일이냐"고 꾸짖으며, 그녀가 잉태한 사실을 서라벌 일대에다  퍼뜨렸다.

 

그런 다음 선덕왕이 남산으로 행차하는 날을 택해 뜰 안에 나무단을 쌓고는 불을 절러  연기가 솟구치도록 했다  왕이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묻자 좌우의 신하들이 "아마 유신이 그  누이를 태워 죽이나 봅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묻자 신하들은 "남편없이 아이를 밴  까닭"이라고 대답했다.   왕이 그게 누구의 소행이냐고 묻자 옆에 있던 김춘추의 얼굴이 빨개졌다. 왕이 그걸 보고는  "네 소행이군. 빨리 가서 구해 주어라"라고 했다. 김춘추는 왕의 명을 받고 말을 달려 그 일을  중지시킨 후, 혼례를 올렸다.

 

이리하여 김춘추는 김유신의 매부가 되어 확실한 관계를 맺게 된다.   김춘추와 김유신과의 이러한 결속은 김유신으로 하여금 영웅으로서의 웅지의 날개를 펴게 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김유신은 진흥왕 때 폐망한 가야국 출신인만큼, 중앙정계에의 진출에 장애가  많았다. 김춘추와 김유신과의 관계는 그러므로 가야국과 신라가 확실한 결합을 이루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 결합은 곧이어 김춘추가 왕으로 등극하면서 백제를 멸망시키는 추진력이 된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공을 차고 놀았고, '화장 해프닝'이 벌어졌던 곳은 재매정 앞의 터였다. 재매정은 경주시 교동 91번지 반월성 서편 5백m 지점인 남천가에 있다. 반월성에서 남천을 따라 내려오다가 최근 생긴 교촌교 다리를 지나면 바로 닿는다. 이곳은 김유신의 집터로 지금은  재매정이라는 우물과 김유신의 유허비만 남아 있다. 우물은 비각 바로 옆에 있다. 화강암을  벽돌처럼 쌓아올리고, 그 위로 네 변에 장대석을 이중으로 쌓아올린 다음, 맨 위에 ㄱ자 모양의  장대석 두 개를 정사각형으로 짜맞추었다.  

 

재매는 김유신의 어머니의 택호였다. 재매정 바로 앞은 남천이 흘러내리고 내 건너편으로는  남산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보이는 남산 기슭에는 천관사지가 있었다. 김유신의 애인인 천관과의 슬픈 사연이 깃든  곳이다. 재매정은 김유신이 출정하는 길에 집 앞에서 차마 집으로는 못 들어가고 집 앞 우물의  물을 길어 물맛으로 집 안에 별일 없다고 생각, 전장으로 떠났던 유명한 일화가 깃든 바로 그  우물이다. 그 우물은 지금도 맑은 물맛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김춘추는 654년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으로 추대된다. 그때가 그의 나이 53세였다   왕위에 오른 김춘추는 왕권을 강화, 진흥왕이 닦았던 위대한 '삼국통일 프로그램'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먼저 중앙집권적 율령 국가를 세움과 동시에, 당나라와의 연합을 계획,  추진한다. 이러한 정책은 당의 구미를 당겼다. 당은 마침 동방정책을 구상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삼국을 통일하려는 신라의 야망과 당의 야심찬 동방정책이 동상이몽을 이룬 가운데  마침내 나당연합이 성립돼, 백제를 멸망시킨다. 그러나 김춘추는 백제를 멸한 이듬해 6월에  58세의 나이로 아깝게 병사한다. 그 후 그의 꿈은 그의 아들 문무왕에 의해 마침내 이루어진다. 

     

분황사__광덕과 엄장의 설화

원효가 머물렀던 절
  무릎을 곧추며
  두 손바닥 모아
  천수 관음 앞에
  비움을 두나이다.
  즈믄 손 즈믄 눈을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더옵기
  둘 없는 내라
  하나로 그윽히 고쳐질 것이라
  아아, 나에게 끼쳐주시면
  놓되 쓸 자비여 얼마나 큰고

 

분황사에 있었다는 천수관음 앞에서 희명과 그의 아이가 불렀다는 향가이다. 경덕왕 때  한기리에 사는 희명의 아이가 태어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그래서 이 천수관음 앞에  나가 앞의 노래를 불렀더니 눈이 뜨여졌다고 한다. 천수관음의 영험이 큼을 이 설화는  떠올려주고 있다. 이 설화는 신라인들이 분황사를 찾아 행복을 빌었음을 추측케 해주는 설화이다.  

 

분황사는 신라수도의 옛사찰로서 현재 남은 몇 개 안 되는 절 중의 하나이다. 이곳에는 화성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으며 절 경내의 돌우물 속에는 호국의 용이 살고 있었다고  전해져오는 호국사찰이었다. 또한 이 절에는 명장 강고내미의 걸작 약사상도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분황사는 원효와 깊은 인연이 있는 절이다. 문무왕 때에 이미 원효의 독창적인 불교는  해동종이라 불리우기도 하고 분황종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원효는 한반도의 명산을 두루  떠돌았지만, 이곳 분황사에 있었던 기간이 길었다.

 

이곳에서 그는 "화엄경소" 등 중요한 저술들을  집필했다. 원효는 "화엄경소"를 짓는 도중 제4권 10회향품에 이르러 입적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원효의 초상과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그믐에 제사를 드리고  있다  제사는 '이차돈, 원효양성사 봉찬회'가 주관한다  그밖에 원효와 관계되는 유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경내에 원효를 위한 비를 세웠던 것으로 추측되는 비석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비석대는 화강암으로 된 것인데, 20여 년 전에 이 절의 발굴단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대의 상부에는 '차화정국사지비'라 새긴 예서체 글씨가 보인다. 이 글씨 아래는  '김정희제'라는 사인이 보이다. 화정은 원효의 시호이다. 그러므로 이 비석대는 원효를 위한  비석을 세웠던 비임을 김정희가 밝힌 것이다. 발굴 당시 비석의 파편도 발견되었는데 현재   동국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원효가 죽자 그 아들 설총은 그의 유해를 부수어 원효의 모습을 소상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예배를 했다. 성종이 예배를 할 때마다 소상은 고개를 돌려 돌아다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소상은 '고상'이라 불리었다. 삼국유사를 보면, 그 소상은 일연이 살고 있었던 고려말까지도  이 절에 남아 있었다. 그 후 소상이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모른다.

   

광덕과 엄장의 설화
  분황사에 얽힌 얘기로는 유명한 광덕과 엄장에 대한 설화가 있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 마을에  숨어 신 삼는 것을 업으로 삼았으며, 엄장은 남악에 암자를 지어 나무를 베고, 밭 갈며 살았다. 어느날 광덕이 열반했다. 엄장은 광덕을 제사지낸 후 광덕의 아내에게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살자"고 청혼, 그 아내가 좋다고 말해 같이 살았다. 밤에 엄장이 아내에게 접근하자 아내는  '스님이 서방극락을 구함은 나무에 올라 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엄장이 그 까닭을  묻자 아내는 이전에 광덕과는 잠자를 함께 한 적이 없으며, 오로지 깨치기 위한 수행에만  몰두했다고 말했다. 엄정은 부끄러웠다. 그는 물러가 원효에게 법을 물었다. 원효는 쟁관법을  지어 가르쳤다.  

 

엄장은 한마음으로 관을 닦아 마침내 서방극락으로 갔다. 그 아내는 분황사의 노비였으나  기실은 관음의 화신이었다는 것.   이 얘기 중 원효의 쟁관법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징을 치면서 산란한 생각을 없애며  선정에 들도록 하는 특수한 관법이었던 듯싶다.   분황사는 또한 원효와 쌍벽인 자장이 머물렀던 절이기도 하다. 원효와 자장은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룬다. 서민들 속에서 대중불교를 편 사람이 원효였다. 이에 비해 자장은 그 당시  신라불교 교단의 질서를 확립한 탁월한 행정승이었다. 그는 분황사 주지로 있으면서 왕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현재 3층만 남아있는 분황사 모전탑은 자장이 당에서 보고 익힌 전탑을 모방하여 건립된 것인  듯하다. 그는 대승경전을 크게 펴, 때때로 왕궁에 가서 대승론을 강설했으며, 분황사 앞의  황룡사에서 보살계본을 강성하기도 했다.

   

신라에서 가장 오랜 탑
  현재 분황사는 많은 유물들이 산실되고 변형된 전탑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분황사탑은  신라에서 가장 오랜 탑이다. 안산암을 벽돌처럼 다듬어 만든 이 탑은 아래층의 4면에 감실을  만들었다. 감실 양쪽에는 인왕상을 조각했다. 이 인왕상은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자세가 잘  드러난 삼국시대 조각품 중 걸작에 속한다. 이 탑은 1915년 일본인들의 손으로 수리되었는데,  당시 사리와 유물들이 꽤 나왔다.  

 

탑의 북쪽 편에는 돌우물이 있다. 화강암을 8각으로 깎아 외부를 구성한 이 우물은 신라의  우물로서는 가장 우수하고 규모가 크다. 이 우물은 '삼룡변어정'이라 불리는데, 그 유래는  호국적인 데서 온 것이다.   신라 원성왕 때 중국사자가 이 우물 안에 나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용이 살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용을 잡아가면 신라가 망하리라고 생각하고, 이곳의 호국룡을 작은 고기로 변하게 하여  가지고 갔다. 이를 안 원성왕은 중국사신을 뒤쫓아가선 다시 빼앗아 이 우물에 넣었더니, 고기가  원래의 용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 설화는 멸망해가는 신라를 다시 소생시키려는 의욕이  깃들어 있는 상징적인 이야기이다.

     

황룡사지__신라 최대의 사찰

  서라벌의 겨울밤. 눈은 쌓이고 어두웠다. 황룡사에 사는 정수스님은 추위에 잔뜩 웅크린 채  삼랑사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오고 있었다. 천엄사 앞을 지날 때였다. 구걸하는 여인이 절 문  밖에서 아기를 낳고 얼어죽을 지경에 처해 있는 걸 보았다. 정수스님은 불쌍히 여겨 한동안 그  여인을 안아주었다. 그 여자의 몸에 비로소 생기가 돌았다. 이에 그는 자신의 옷을 홀랑벗어 그  여인을 덮어주었다  알몸이 된 그는 추위에 팔짝팔짝 뛰면서 절로 돌아와 거적을 덮고 오돌오돌  떨며 밤을 새웠다.   이 아름답고도 우스꽝스러운 얘기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이다.

 

정수라는 스님의 행적은 이  이상,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이러한 보시 덕분에 왕사로 봉해졌다고 한다. 혹독한 겨울밤의  추위 속에서 자신의 옷을 남에게 홀랑 벗어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버려진 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리고 지극한 극기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신라 최대의 사찰터
  이러한 설화를 간직한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절은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 있어서도 그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컸다. 경주 중심가에서 동쪽으로 1km쯤 떨어진 곳,  분황사 바로 앞에 있는 넓은 들이 바로 황룡사 터이다. 이 절은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고군의  침입으로 불타버린 후 지금까지 폐허로 버려져 왔다. 그래서 황룡사는 삼국유사 등 문헌을 통해  그 규모가 추측되어져 왔을 뿐이다.  

 

그러다가 76년 4월부터 7개년 계획으로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황룡사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이  절의 규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발굴 결과 옛 문헌들이 밝힌 규모가 거짓이 아님이 입증되어  학계를 흥분시켰다.   83년 2월에 이 사찰의 발굴은 끝났다. 현재까지 발굴된 것을 통해 황룡사의 규모는 주요  건물터만 해도 8천 8백 평에 이르는 거대한 사찰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불국사의 터가 1천 1백  평이니까, 황룡사는 그보다 8배나 더 큰 셈이다. 이 절은 신라 3보 중 장육존상과 9층탑 등 두  개의 보물이 있었으며, 유명한 화가 솔거의 금당 벽화가 있었던 국찰이었다. 발굴 결과 금당  건물터에서 장육존상을 안치했던 대좌석이 발견되었으며, 9층석탑의 심초석도 발견되어 그  규모의 장대함을 다시 한번 세상에 드러냈다.   더불어 이 절은 신라 최대 가람의 규모뿐만 아니라, 가람배치가 유례없이 특이함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 가람배치의 전형인 한 개의 탑을 금당 앞에 안치한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장육존상을 안치한 본금당의 좌우에 각각 금당을 세움으로써 세 개의 금당을 가진 특이한 양식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형식은 백제식과 고구려식의 가람배치가 혼합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의 배치는  남쪽으로부터 중문이 있고, 중문의 동서로 회랑이 둘러져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바로  목탑(9층탑)이 나타나고 그 뒤로 세 개의 금당이 세워져 있다.   목탑과 금당이 있는 곳이 절의 중심부이다. 이 중심부를 동서의 회랑이 둘러싸고 있다. 금당  뒤로는 강당이 있고, 강당의 좌우에는 부속건물들이 세워졌다.

   

신라 불교의 구심점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에 창건되었다. 이 절은 불교가 공인된 이후 흥륜사에 이어 세워진  가장 오래된 절 중의 하나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흥왕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지으려 할 때  황룡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서 대궐 대신 절을 짓고 절이름을 황룡사로 했다는 것이다. 이곳의  절터는 서라벌 내 7처가람지의 하나로 전해지는 '월성 동쪽 용궁의 남쪽'에 해당된다. 추측컨대  용의 출현 등의 설화로 보아 이곳에는 원래 못이 있지 않았나 싶다. 그 못을 메운 후 절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이 절은 무엇보다도 9층탑과 장육존상이 유명했다. 9층탑은 선덕여왕 2년(643)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장율사의 요청에 의해 이룩된 것이다. 자장은 중국에 있을 때 태화지라는  연못의 신인으로부터 9층탑 건립의 계시를 받은 것으로 삼국유사에는 기록하고 있다.   9층탑을 지으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9한(아홉 오랑캐)이 와서 조공할 것이라는 서원을 세우고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탑은 황룡사를 중심으로 한 신라 불교의 구심점이며 신라인의 정신적  지주로 상징되어 건립된 것으로 보아진다.

 

이 탑은 여러차례 중수되어 오다가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의 병화로 불타 없어졌다. 이번에 발굴된 이 탑의 초석은 직경이 약 1m정도 되며 사방  8개씩 놓여 도합 60여 개에 달한다. 그 중앙에는 심초석이 있다.   이 탑지는 1964년까지만 해도 민가가 들어서 있었다. 64년 12월에는 도굴꾼들에 의해 심초석  안의 사리함이 도난당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후 이 사리함을 다시 찾았다. 사리함 속에는 탑지가  들어 있어서 이 탑의 규모가 드러났다. 탑의 높이는 2백 25척(약 80m)이라 하여 삼국유사가 밝힌  '철반기상고사십이척, 기하일백팔십삼척'과 정확하게 일치되었다.

   

거대한 장육존상
  또하나의 보물인 장육존상은 금당 안에 있었음이 발굴 결과 드러났다. 금당은 초석으로 보아  전면 9칸, 측면 4칸의 법당임을 알 수 있다. 이 금당 안에는 장육(일장은 6자)의 석가 삼존상이  있었고 그 좌우에 10구의 제자상과 2구의 신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이 장육존상의 조성배경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남해에 큰 배가 닿았다. 검사해보니 "서축의 아육왕이 황철 5만7천 근과 황금 3만 분을 모아서  석가삼존상을 주조하려다 실패하고, 배에 실어 띄웠으며 그때 인연있는 국토에 가서 장육존상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금과 철을 옮겨 진흥왕 35년에 장육존상을 주조하니  무게는 3만 5천 7근으로 황금이 1만 1백 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은 철 1만 2천 근과 황금 1만  1백 16분이 들었다.   이로 미루어보면 금당내의 장육존상이 얼마나 거대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장육존상 역시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의 침입으로 9층탑과 함께 소실되었다. 현재는 금당터에 존상을 안치했던  자연석 대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대석은 3개의 둥근 좌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좌대마다 중앙에 조그마한 우물을 파놓은  것처럼 푹 패여져 있고, 반석의 지름은 각각 2__3m 가량 되어 불상의 크기를 짐작하게 한다.

     

동화사__점을 쳐서 정해진 절의 위치

창건한 스님은 심지
  동화사와 파계사를 창건하여 신라 5악의 하나인 중악을 불국토로 만들려고 했던 심지라는  승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지금도 팔공산 일대의 사찰에서는 '심지왕사'라 하여 그를 전설적인  인물로 떠받들어 오고 있다. 그러나 그에 관한 기록은 의외로 드물다. 삼국유사와 동화사,  파계사 사적지에 그의 행적이 얼핏 비치고 있을 뿐이다.   그이 족적은 동화사 일대, 파계사 및 은해사 지역 등 팔공산 남쪽 기슭에 꽤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장구한 세월 속에서 그의 면모는 비바람결에 씻겨버려, 그가 남긴 불사의 흔적들 몇 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심지는 신라 말기 때 승려이다. 그는 41대 헌덕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왕자로서의  호사를 버리고 '학문에 뜻을 둘 나이(15세)'에 출가, 산문에 든다. 그가 출가한 곳이 어딘지는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그는 한동안 팔공산에서 정진했다고 삼국유사는 밝히고 있다. 그는  신라말기의 고승 진표율사의 법제자인 영심으로부터 법을 이어받아 원광__신표__심지로 이어지는 독특한 신라 점찰 법맥을 이룬 사람이다. 점찰법은 '점찰선악업보경'에 근거한 것이다. 이 경전은  지장보살이 나무쪽을 던져 길흉선악을 점치는 법과 참회하는 법을 밝힌 것이다.

 

이 경에 의한  법회가 점찰법회이다. 신라에서는 원광법사가 점찰보를 만들고, 이 법회를 처음 열었다. 점찰법회는 유교의 주역괘풀이와 비슷한 것으로도 보여진다. 주역의 대나무간자(점치는 대쪽)는  64개이지만, 점찰경의 간자는 1백 89개로 되어 있다. 점찰법회의 상세한 기술이 없어 어떻게 이  법회가 열려 왔는지, 심지 이후의 법맥은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법회는 불교와  무속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과 더불어 동화사가 그 법맥을  간직하고 있었으리라고 여겨질 뿐이다.  

 

삼국유사에는 심지가 진표율사의 점찰간자를 전수하는 과정을 밝히고 있다. 그가 팔공산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마침 속리산의 영심이 진표율사의 불골간자를 전하여 과종법회(진리를 깨달아  도를 여는 법회)를 연다는 소문을 들었다. 심지는 급히 속리산으로 갔으나 도착이 늦어 참례에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는 할 수 없이 땅에 자리를 깔고 뜰에 엎드려 법회에 예를 올리고  참여했다. 7일이 지나 큰 눈이 내렸다. 그러나 그가 있는 땅의 10자쯤은 눈이 날리고 내리지  않았다.   승려들이 이 신기한 일을 보고 그를 당에 오르라고 했으나 그는 사양했다. 그가 당을 향해  예배할 때 팔굽과 이마에 피가 흘렀다.

   

점을 쳐서 정한 절터
  법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도중에 보니 그의 옷주름에 간자 두 개가 붙어 있었다. 그걸 가지고 되돌아가 영심에게 알리니, "간자는 함 속에 있다"고 하여 찾아보았다. 과연 두  개가 없었다. 심지가 간자를 돌려주고 돌아가다가 다시 보니 여전히 간자가 옷에 붙어 있었다.

 

이에 영심이 "부처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가 받들어 봉행하라"고 패쪽을 심지에게 주었다   심지는 그걸 받아 돌아오다가 산신을 만난다. 그는 산신과 함께 "땅을 가려 이 신성한 간자를  봉안하겠다'고 말하고,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간자를 던졌다. 그 간자는 숲속의 한 우물에  떨어졌다. 그 자리에 법당을 세웠다. 이곳이 바로 동화사 자리이다.   이 얘기로 미루어보면,

 

이 설화는 동화사 절터를 정할 때, 점을 쳐서 자리를 잡은 것을 상징한  것이라 추측된다. 또는 점찰법의 특징을 갖고 이 절이 세워졌으리라고 추측도 된다. 그러나  동화사 사적기에는 동화사 창건은 이보다 훨씬 앞서 신라 소지왕 15년(493년)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라 부르다가 흥덕왕 7년(832년)에 심지왕사가 중건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렇다면 심지는 창건자가 아니라 중건자가 된다.

 

당시 심지가 중건할 때 겨울철인데도 절  주위에 오동꽃이 피어 절 이름을 동화사로 고쳐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화사 사적기는  연대적으로 모순이 있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은 23대 법흥왕 이후이다. 소지왕(21대)은  그 이전인 만큼 사찰이 창건될 수가 없다. 동화사 경내에 남아 있는 옛 유물들은 모두 신라  후기의 것이다. 그런 만큼 흥덕왕 7년(832)에 절이 처음으로 조성됐으리라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사라진 우물의 원형
  10여 년 전에 필자가 동화사를 들렀을 때 동화사의 서북쪽편 대웅전 왼쪽 요사체 뒤에 오래  된 우물이 하나 있었다. 그 우물이 바로 심지가 간자를 던졌을 때 간자가 빠진 우물이라고 전해  내려온다. 삼국유사를 보면 일연이 살았던 고려 중기 때까지 그 우물 옆에는 첨당이라는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간자를 모신 사당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며, 간자도 없어졌다.

 

다시 우물은 시멘트로 조잡하게 조성하여 옛 우물의 표가  나지 않는다.   당시 절의 한 스님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옛우물은 원형대로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원래의  우물은 가로 2m, 세로3m 가량의 직사각형 화강암으로 다듬은 것으로, 지표에서 1m가량 된 대단히 견고한 우물이었다고 한다. 4__5년 전까지도 우물 주위에는 당시 우물의 유물인 화강암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 우물은 조선 말기까지만해도 신성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듯하다. 그러다가 절에 수도시설이 되고 난 뒤부터는 빨래터로 바뀌었으며, 결국 돌들은 축대 등으로 빠져나가고, 콘크리트 우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최근에 그 우물을 다시 찾았으나 우물은 사라지고 없고 우물이있던 자리에는 시멘트가 두텁게 발라져 있었다.

 

절에서 일을 보는 한 아주머니에게 우물을 언제 없애버렸느냐고 물으니 3__4년 전에 그랬다고 했다. 그 우물은 동화사 절터를 잡을 때 지표가 됐던 중요한 것이었으나 그 중요성이 후손들에 의해 망각되어 버린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화사에는 입구의 마애불좌상(보물 2백43호)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2백 48호) 등  심지가 조성했다는 통일신라 후기의 유물들이 꽤 남아 있다. 심지는 특히 불사를 좋아하고,  예술적이 자질이 있은 듯하다. 파계사뿐만 아니라, 은해사 뒤편의 중암암 3층석탑도 그가  조성했다는 얘기가 남아 있다.

     

견훤의 출생지__지렁이의 건국설화

  백제왕 견훤. 그는 신라 말기에 후백제를 건국하여, 옛 백제 유민들의 한을 풀기 위해  일어섰던 영웅이다. 자욱한 전장의 먼지 속을 30여 년 동안 헤매며 후삼국을 통일할 꿈을 다지던  그였지만 결국 자중지란으로 비참하게 죽었다. 그에게 있어서 왕이라는 칭호는 애처롭게  들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의 원대한 포부는 한때나마 옛백제 유민들의 열렬한 기대를 모았다.

   

서로 다른 출생설
  견훤의 출생에 얽힌 얘기는 신기한 설화로 곳곳에 남아 있다. 그의 출생지는 상주라는 설과  무진주(현 광주)라는 설이 있다. 삼국유사는 견훤이 상주 가은현(현 문경시 가은면) 사람이며,  서기 867년(신라 경문왕 7년)에 태어났다고 밝히고 있다. 본성은 이씨였으나 후에 견으로 성을  삼았다 한다.   그의 아버지는 아자개로 상주를 거점으로 활동한 장군이었다. 또한 삼국유사는 견훤의  출생지가 광주라는 설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견훤이 신라의 무인이 아니라 광주지방의  토호로서 세력을 얻어 후백제를 건국했다는 후세의 설도 있다.  

 

견훤의 출생담은 '야래자전설'이라고 해서 우리나라 전역에 널리 퍼져 있다. 그 줄거리는  약간씩 변형되지만, 대개 다음과 같다.   옛날 어느 곳의 양반집에 과년한 처녀가 살았다. 그런데 밤중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립동이가 처녀방에 들어와 잠을 자고 갔다. 처녀가 임신을 하자 처녀의 부모가 그 사실을 알고  추궁했다. 처녀는 "붉은 옷을 입은 남자가 밤이면 와서 자고 갔다"고 털어놓았다. 부모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두었다가 그 남자의 옷에 꽂아두라"고 일러 주었다. 그대로 했다. 처녀가  이튿날 아침에 실을 따라가보니 큰 지렁이의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처녀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견훤이라는 것이다.   이 얘기는 우리나라 곳곳에 퍼져 있다.

 

문경시 가온면 갈전2리에 있는 아차마을(또는  아개마을)의 금하굴에 얽힌 설화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곳은 삼국유사가 밝힌 바로 그  출생현장이다. 점촌에서 문경 쪽으로 가다가 마성에서 가은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가은면  소재지에서 이내 가은천을 건너, 강따라 1km쯤 올라가면 이 마을이 나온다. 마을 나이든 분들의  얘기에 의하면 아자개는 이 아개마을에서 큰 부자로 살았으며 그 지렁이가 살던 굴이  금하굴이었다는 것이다. 그 굴에서는 늘 풍악소리가 났다고 한다. 금하굴은 아개마을의 남쪽  속칭 남산 아래에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을 지나, 은행 나무 고목이 있는 외따로 떨어진  집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일제침략기에 세워진 금하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 옆에 있는  집에는 올해 88세인 이귀현 할머니가 막내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굴은 이씨 집의 바로 뒤편에  있다.   이곳은 남산의 묏부리가 뻗어내리다 멈춘 봉긋한 곳으로, 굴은 지표에서 80도의 각도로 3m쯤  지하로 뚫려 있다. 굴의 입구는 좁아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이다. 마을 사람들은  "옛부터 금하굴 속에서는 굉장한 소리가 났다고 하며 이 굴이 온전히 뚫리면 아개마을의 운수가  크게 열린다는 전설이 전해온다"고 말했다. 그래서 해방 후 이 마을 사람들이 막힌 굴을  뚫으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굴 속에 들어가면 물소리가 들린다. 굴 밖을 감돌아 아개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의 지하수가 이  굴 밑을 흐르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이귀현 할머니는 "전에 배추를 저장하기 위해 이 굴 속에  한 번 들어가 본 적이 있다"며, "깊이가 장정 두 명의 키 정도 되기 때문에 사다리 두개를 이어서  놓고 내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굴 입구는 좁지만, 안에 들어가면 몇 사람이 앉을 정도의 제법  넓은 공간이 있다. 이 할머니는 "특별히 쓰일 일도 없고, 또 후미진 곳이라 찾는 사람도 없어  버려진 것이나 다름 없다"고 말했다.

   

전국에 분포된 야래자 전설
  이밖에도 야래자 전설은 많다.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가 있는 지룡산 역시 견훤의 출생지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곳에서는 '지룡'이 '지렁이'와 같다는 점에 근거한 지명설화의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운문사 자리에 견훤의 모친이 살았으며 지룡산의  지렁이가 밤마다 잠자러 내려왔다고 한다.   한편 공주시내의 태봉산(현재 산은 깎여 없어졌다)이 견훤의 출생지라는 전설도 있다.

 

전북  전주시내에도 '야래자전설'이 전해온다. 전주고교와 옛 역전 사이에 있는 '물왕멀' 동네가  그곳인데, 지렁이의 화신인 견훤이 여기에 도읍하여 '물왕의 마을'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밖에 충북 영동군 영동읍, 충남 연기군 서면 쌍류리 등을 비롯하여 강원도 횡성, 전북  익산, 경남 동래, 함북 회령, 함북 성진 등에도 '야래자전설'이 전해온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곳에 '야래자전설'이 전해오며, 그것이 곧잘 견훤의 출생과 결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견훤이라는 인물을 영웅시하려는 백제 유민들의 열망의 한 표시일 수도 있으며, 견훤의 권위와  영향력을 높이려는 후백제인의 의도도 작용된 듯하다.   또는 백제의 건국신화를 흡수한 얘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렁이는 용의 축소 형태이다. 지렁이의 아들인 견훤은 결국 용의 아들로 자처, 왕으로서의 개국신화를 열어 보이려고 스스로  지렁이의 아들임을 강조했을지도 모른다.

   

백제 재건의 야망
  견훤은 백제 패망 후 3백 년 만에 백제 옛 땅에서 백제를 재건했다. 백제 옛 땅의 백성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으며 그 여세를 몰아 그는 급속도로 민심을 사로잡았다. 그는 백제를  패망시킨 신라에 대한 복수라는 명목으로 신라 궁중을 유린, 포석정에서 애장왕을 자결케하고 그  왕비를 겁탈했으며, 결국 신라인의 적개심에 불을 질렀다.  

 

그가 성장한 시기는 신라에서 지방의 호족이 크게 대두되어 장군이나 성주로 성장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심던 시기였다.   20여 세에 군인이 된 그는 서해안 방비에 용감했다는 이유로 비장이 되었다. 당시 신라 정부는  방향감감이 없고 중앙집권 체제도 흔들려 나약했다. 진성여왕 3년에 기선과 양길이 죽산과  원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원종과 애노 등은 상주에서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서 야심만만한 견훤은 892년 20대의 청년장군으로 군사 5천을 이끌고 광주를 공격,  점령하여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한다.

 

기반을 닦은 그는 양길을 회유하여 전주에 다다랐다. 그는 백제의 후계자임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면서 전주에 도읍을 정한다. 이 시기에 궁예도  후고구려를 세움으로써 바야흐로 40년간의 후삼국시대가 전개된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그의  세력은 경주를 침범한 3년 후(930) 안동전투에서 참패한 후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더욱 신흥 고려와의 싸움에서 참패를 거듭했으며 신하들이 고려로 투항하기 시작, 공주 이북의  30여 개 성이 고려로 넘어가는 불운이 겹쳤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70이 넘었다. 그러나 그의  몰락의 계기는 의외로 내부에서 나타났다. 그의 10여 명의 아들 중 왕위를 네째 아들 금강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장남 신검이 이에 불복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 고려의 왕건에게 신세를 지다가 등창이 터져 죽었다. 백제를 재건하려던 그의 원대한 꿈은  그의 죽음으로 허무한 끝을 맺었다.

     

백률사__순교자 이차돈

백률사와 자추사의 관계
  경주 북쪽 금강산 기슭에 백률사가 있다. 금강산은 신라시대에 5악의 하나인 북악으로  떠받들여진 산이다. 이 산은 법흥왕 14년(527년) 이차돈이 불법을 널리 펴기 위해 순교했을 때,  그의 목이 날아와 떨어진 산이기도 하다. 당시 신라인들은 이차돈의 죽음을 슬피 여겨 이 산의  좋은 터에 그를 위하여 자추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과 더불어 이 산에 대한 신라인의 산악신앙이 합쳐져, 금강산은 신라인의 큰  숭배를 받았다.   이차돈을 위한 절인 자추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금강산 기슭에는 백률사  외에는 뚜렷한 절터가 발견이 안 되고 있다. 그래서 백률사가 바로 옛 자추사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생긴다.   권오찬 씨에 의하면 '자추'는 '백률'과 뜻이 같다고 한다. 즉 '자'는 '잣'의 음을 한자로 적은  것이며 '추'는 '밤'의 일종이라는 것.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추사는 따로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이들도 있다.   이기영 씨(한국불교연구원) 등이 집필한 '신라의 폐사 I'에 보면 자추사지는 백률사가 있는  금강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30m쯤 내려간 곳에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곳에는  마애삼체석불이 있다.

 

이 석불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바람과 비에 깎여 나가 심하게  마멸되어 손모양과 얼굴모습이 식별이 안 될 만큼 이즈러졌다. 이곳밖에는 절터가 발견 안 되는  걸로 봐서 이곳이 자추사터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추측에도 불구하고 백률사가 이차돈을 기리기 위한 절이었음은 분명하다. 이곳에  이차돈공양석당(국보 16호)이 있는 걸로 봐서 그 점은 명백해진다. 이 석당은 1.06m의 높이에  6면으로 된 것으로 1면에는 이차돈 순교에 대한 글이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다. 이 석당은  현재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백률사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자추사가 백률사였다면 창건 연대가 법흥왕 때까지  올라간다. 한편으로는 삼국유사에 백률사 대비상 조성 얘기와 이 대비상에 얽힌 영험담이  효소왕 2년(693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는 걸로 봐서 이 절이 신라통일 전후에 세워진  것이라고 짐작되기도 한다.

   

관음상의 영험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절에는 관음상이 하나 있는데 참으로 영험하다고 밝히고 있다. 이  불상은 중국의 신장을 만들 때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이 관음상의 영험담을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서기 692년 효소왕은 부례랑을 구선(화랑의 우두머리)으로 삼았다. 그 문도는 1천 명이나  되었는데, 부례랑은 그중에서도 안상이라는 화랑과 친했다.  

 

693년 3월에 부례랑은 무리를 거느리고 금란(현 강원도 통천)에 눌러갔다가 말갈족에게  잡혀갔다. 무리들은 당황하여 되돌아왔는데 안상만이 홀로 그를 뒤쫓아갔다. 이 소식을 듣고  왕은 놀랐다. 더욱 그 직후에 천존고에 있던 보물인 현금과 신적(만파식적)이 감쪽같이  없어져버린 일이 일어났다. 왕은 "내가 복이 없어 국선을 잃고 두 보물까지 잃게 되었다"라고  탄식하고, 두 보물을 찾는 사람은 1년 조세로써 상금을 주겠다고 공포했다.   그해 5월에 부례랑의 부모가 백률사의 부처 앞에서 며칠 동안 기도를 했다.

 

그랬더니 향이  놓인 탁자 위에 난데없이 현금과 신적이 놓여지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이 불상 뒤에서  나타났다. 놀라는 부모에게 부례랑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부례랑이 잡혀가 그곳 대신의 집  말먹이가 되어 들에서 방목을 하고 있을 때 문득 스님 한 사람이 손에 현금과 신적을 들고 와  그를 위로했다. "고향에 가고 싶다"고 부례랑이 말하자, 스님은 그를 바닷가로 데려가 신적을  둘로 쪼개어 부례랑과 안상을 각각 타게 하고 스님은 현금을 타고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그  스님은 바로 관음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이 얘기에는 신라인의 믿음과 통한다. 이 대비상에서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는 다른  관음신앙의 설화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분황사의 천수대비관음에게 빌어 눈먼 아이가 눈을  떴다는 얘기, 아이를 얻었다는 얘기 등은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금동약사여래상
  이러한 얘기를 간직한 백률사 대비상은 임진왜란 때 없어진 듯하다. 이 절에는 이 대비상 외에  금동약사여래상이 전해왔다. 이 금동약사여래상(국보28호)은 불국사의 비로자나불. 아미타불과  함께 현존하는 신라 3대금동불상으로 꼽힌다.   높이는 1.79m인데 1930년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옮겼으며 현재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절에서는 그 동안 이 금동약사여래상을 돌려달라는 청원을 몇 차례나 관계기관에 했다. 그러나 한번 박물관에 들어간 불상은 영영 나올 줄 모르고 있다.  

 

백률사는 그 동안 몇 차례 중건을 해왔다. 현재의 법당은 임진왜란 직후에 경주 부윤 윤승순이  중수한 건물이다. 오래된 법당이라 이 건물은 현재 보수가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이 절에는 옛  건물에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주춧돌과 탑을 양각한 돌조각 등이 남아 있으며, 대웅전의 동편  암벽에는 신라시대에 조각된 3,5m 정도의 높이로 3층탑이 음각된 것이 남아 있다. 또한 이 바위  끝에는 삼국유사에도 소개된 관세음보살의 발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발자국을 만지면 큰  복을 받는다는 신앙이 이 절의 신도들에겐 여전히 통한다.

     

밀교 유적지__금광사

명랑법사가 세운 금광사
  남산의 북쪽 끝, 남산성터의 서쪽 아래 골짜기를 시켸골(식기곡 또는 식혜곡으로도 적는다)이라  한다. 이 골짜기에 옛날 금광사가 있었다고 한다. 오릉에서 남쪽으로 뻗은 국도를 따라가다가  왼쪽에 있는 나정으로 향하는 길을 들어서서 쭉 들어가면 6부장 재실이 나타난다. 재실의 동남쪽  남산 기슭에 배리마을이 있다. 배리마을 일대는 남간사지이다.

 

금광사는 이 마을의 남쪽  개울가에 있었다고 추측된다. 이 마을의 동쪽 남산 골짜기의 끝에는 일성왕릉이 있으며 왕릉  아래에는 일성왕을 모신 숭성재라는 재실이 있다. 재실의 앞은 저수지이다. 이 저수지가 바로  금광사의 강당터로 알려지고 있다. 저수지 아래는 들이 있다. 저수지와 들녘의 창림사지  사이에는 일제침략기 때 금광지라는 못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금광지는 69년초에 불도저에 의해  메워졌다. 이때 이 못에서 불상조각과 계단석 및 금강경을 새긴 경석이 발견되어 이 못 이  금강사지임을 추측케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금광사지는 남간사지와  인접해 있다. 남간사지 역시 추측에 불과하다. 배리마을 중간에 있는 채소밭에는 석탑의  심초석과 주춧돌들이 많은데, 이곳이 옛부터 남간사지 또는 금광사지 등으로 추측되어져 왔다.   10여 년 전 이곳에서 '사제사'라는 명문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학계를 어리둥절하게 하기도  했다. 아무튼 확실하지는 않으나 이 일대에 금광사지가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금광사는 신라 밀교의 비의를 간직한 절 중의 하나이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법흥왕  15년(528)이었다. 그후 1세기 사이에 단편적인 초기 밀교가 당나라를 통해 들어왔다. 그러나  본격적인 밀교의 도입은 유명한 명랑법사 때부터이다. 명랑은 신라선덕 여왕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가 밀교를 수학한 후 3년 만에 귀국했다. 귀국 도중 서해의 용궁에 들어가 신인의  비법을 전해 받고, 용왕으로부터 황금 1천 냥을 선사받았다.

 

그는 바다 위로 올라오지 않고  바다를 잠행하여, 땅 속의 수맥을 따라 자기집 우물 밑으로 솟아나왔다.   이에 집을 절로 바꾸어 금광사라 했으며 선사받은 황금을 불상을 조성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명랑은 신라 사간(신라관등 제8위=사창) 재량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남간부인이다. 그가 당나라에서 돌아온 지 30년 후(문무왕9년) 당나라 군사가 신라를 치기 위해  50만 대군을 끌고 바다로부터 공격해 왔다. 명랑은 문무왕의 청을 받아 낭산 남쪽 신유림에 단을  만들어 5불의 신상을 안치한 후 20명의 밀교승을 거느리고 문두루비법을 행했다.  

 

그때 바다에서는 홀연히 폭풍이 일면서 당나라 군사를 몰살시켰다. 이 단을 설치했던 곳에  세워졌던 절이 유명한 사천왕사이다.   이 얘기 중 그의 어머니가 남간부인이라 한 것은 그의 집이 바로 남간사가 있던 마을에  위치했음을 추측하게 해주는 것이다. 배리마을에는 신라 때부터 전해오는 우물이 두 개 있는데,  그중 한 우물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혹 이들 우물 중 하나가 바로 명랑의 집  우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주술과 샤먼의 비의
  신라 밀교의 시작은 이처럼 허황하고 신비스러운 신통력으로 떠오른다. 명랑의 이 허황한  신통력은 신라불교의 특징인 호국불교와 연결되면서 외적의 퇴치라는 신출귀몰(?)한 전과를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에 전래된 밀교가 초기 및 중기 밀교의 단계이며, 주로  주술과 샤먼에 의한 비의가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밀교승들이 이따금 나타나 황당무계한 신통력을 부리는 광경이 보인다.

 

명랑의 시대만 해도 밀본이 있었다. 밀본은 귀신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선덕여왕의 병을 신기한 비법으로 치료했다. 밀본이 왕의 침실 밖에서 '약사경'을 읽자 그가  가졌던 육환장이 침실 안으로 날아들어, 한 마리 늙은 여우와 법척을 찔러 뜰 아래로  내동댕이쳤다. 그러자 왕의 병이 거뜬하게 나았다. 밀본은 이밖에도 많은 이적을 보이고 있다.  

 

명랑은 신인종의 개조이다. 명랑보다 조금 늦게 혜통이 나왔다. 혜통은 당나라로 건너가  선무외삼장에게서 밀교를 수학하고 문무왕 5년(665년)에 귀국했다. 그는 신라에 돌아온 후  갖가지 이적을 보였다. 총지종과 명랑의 신인종은 신라밀교의 2대산맥을 이룬다. 이밖에  다라니비밀법에 정통했던 명효, 신라밀교의 황금기를 구가하게 한 혜일을 비롯 의림, 현초,  오진, 불가사의, 균량, 혜초 등이 모두 밀교승이었다.   신라의 밀교는 고려로 넘어오면서 흥성했다. 고려초기의 밀교는 국난퇴치를 위한 비법으로  각광을 받았다. 고려 건국초 왜구가 침범해 왔을 때 태조는 신인종계의 광학, 대연에게 비법을  어명하여 개성에 현성사를 건립, 밀교 근본 도량으로 삼게 했을 정도였다.

 

문종 28년(1074년)에  외적이 침입했을 때는 사천왕사에 문두루비밀도량을 설치했으며, 예종 3년(1108년)과 4년에는  연속적으로 문두루도량을 설치하기도 했다. 고려의 밀교는 묘청, 신돈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의 내용은 잘 알 수 없다.   밀교는 정통 대승불교의 입장에서는 분명 이단적인 것이다. 그것은 소승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밀교가 전파되고 꽤 성세를 보인 것은 그 비법이 호국불교와 연결되는  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의 밀교는 대부분 신기함과 허황함으로만 떠오르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신라의 밀교도량은 금광사를 비롯하여 사천왕사와 금곡사 등이 있다. 금곡사는 밀본이  머물렀던 절이다. 금곡사는 현재 월성군 안강읍 두류리의 비장산 동쪽 기슭에 절터만 남아 있다. 이곳에는 원광법사의 부도인 3층석탑이 폐탑으로 남아 있다. 이 탑은 파손되어 흩어진 것을 일부  수습하여 사면에 불상을 새긴 탑신과 그 위에 두 개의 육개석을 올려놓았다. 절터 주위에는  탑재가 꽤 흩어져 있어서 그 수습이 아쉽다.

     

홍효사지__효도의 열매인 돌종에 얽힌 설화

자식 묻으려다 얻은 석종
  경주시에서 서쪽으로 서천을 건너 동학의 성지인 용담정을 지나 한참 가면 경주시 현곡면  사동이란 마을이 나온다.   경주에서 7km 가량 떨어진 이 마을은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마을의 산골짜기를  북골이라 한다. 동네 중심을 흐르는 개울을 따라 산골 후미진 골짜기를 한참 들어가면 북골이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절터로 추정되는 곳이 물가에 있다.

 

이 동네에는 이밖에도 동남쪽  산골짜기(절골이라고도 한다)에 절터를 갖고  있다. 북골의 절터는 10여 년 전 이곳 주민들이  개간하여 초석들을 묻어버렸다고 한다. 절골에는 두 개의 절터가 발견되는데, 한 곳은 밭으로  개간되어 있고, 다른 한 곳은 대나무ㅅ으로 덮여 있다.   마을 사람들은 북골에서 옛날에 돌종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절터를 주민들은 종동사지라  부른다.   이 마을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유명한 '손순이 아이를 묻다' 설화의 현장이다. 이 설화는 한국  효자설화의 대표적인 형태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손순은 모량리 사람으로 학산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자 그는 아내와 함께 남의 집  품팔이로 쌀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다. 손순은 아내에게 말했다.   "자식은 또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지 못한다. 저 애가 어머님의 밥을 늘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가 오죽 시장하실까. 차라리 저 애를 묻어버리고 어머니를 배부르게 해드리자" 부부는 마침내 아이를 업고 취산 북쪽 들로 갔다. 아이를 묻기 위해 땅을 파는데 뜻하지 않은  돌종이 그 속에서 나왔다. 그들 부부가 놀랍고 이상스러워 종을 나무에 매달고 쳐다보았다. 웅숭깊은 소리가 더없이 좋았다.

 

이에 손순의 아내는 말했다.   "이렇게 신기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마 이 아이의 복인 듯하니 묻지 맙시다." 손순 역시 동감했다. 이들 부부는 아이와 종을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그 돌종을 집의  들보에 매달아두고 두드렸다. 그 돌종소리는 서라벌 대궐에까지 들렸다.   흥덕왕은 이 소리를 듣고 '이상한 종소리'의 출처를 알아보게 했다. 사자의 보고를 듣고 왕은  말했다.   "옛날 곽거가 자식을 묻으려 하자 하늘이 금솥을 내리더니, 오늘날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하매  땅이 돌종을 솟구쳐냈구나. 이는 하늘과 땅이 살피신 게다" 왕은 손순에게 집 한 채를 하사하고 해마다 벼 50석을 주어 그 지순한 효도를 가상히 여겼다.

 

손순은 그의 옛집을 희사하여 절을 삼아서 홍효사라 부르고, 그 돌종을 안치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이 돌종은 진성여왕 때 후백제군의 침입으로 없어졌고, 지금은 절만 남았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손순이 돌종을 얻은 곳의 이름은 완호평인데, 지금은 와전되어  지량평이라고들 부르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홍효사터의 위치
  이 얘기를 염두에 두고 남사동일대의 절들을 살펴보면 이곳 절터들 중의 하나가 홍효사지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장소는 알 수 없다. 억지로 추측해본다면 남사동의 동남쪽  절골에 있는 두 개의 절터 중 한 곳이 홍효사지이고, 북골의 종동사지는 돌종이 솟아나왔던 곳이  아니었을까.   이 마을의 남쪽 3km 거리에 있는 소견리에는 '갓들' 또는 '갓질'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이  '갓들' 또는 '갓질'은 지량평이 음전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거리상으로 이곳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이 마을 부근에는 '순의정'  또는 '순정'이라 부르는 곳도 있는데, 이 일대에서는 이곳이 손순이 살던 곳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이 부근에는 근세의 학자인 성제 허전이 서술한 손효자유허비가 있었다고 하나,  누군가가 엎어버린 후 그 자취가 없어졌다고도 한다. 아무튼 이 일대에는 지금도 여전히 손순의  얘기가 '손수자설화'로 남아 전하고 있다. 이 일대를 집중적으로 조사하면, 뜻밖의 구체적인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돌종의 불교적 영향
  손순의 설화는 삼국유사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간보의 수신기'에 나오는 곽거의 얘기와  흡사하다. 곽거는 진나라 사람으로 형제가 3명이었는데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2천만금의  아버지 유산을 그의 두 아우가 각각 1천만금씩 가져가버리고, 곽거는 혼자서 어머니를 모셨다. 그는 아내와 품팔이로 봉양했으나 아이 때문에 노모의 끼니가 줄어짐을 걱정하여 아이를 땅에  묻으려다가 석개로 덮여진 황금 일부를 얻었다는 줄거리이다. 손순의 얘기가 '수신기'의 영향을  받아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곽거의 경우처럼 바로 황금이 나오지 않고 돌종이 나온 것은  불교적인 영향이 짙게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설화는 어쩌면 홍효사의 창건에 따른  연기설화일지도 모른다.  

 

또는 이 설화의 중심이 되는 '돌종'을 염두에 둔다면, 이 설화는 당시 그의 효행사실이  종소리가 울려퍼지듯 널리 퍼져 그 소문이 국왕에까지 미친 것을 설화화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삼국유사는 마지막에 '효선'편을 두어 끝맺고 있다. 손순의 설화도 이 효선편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배려는 평소 효성스러웠던 일연이 효행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도 볼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불교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을 유교적인 가치관과 합일시키는 본보기로 '효'를  내세웠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일연이 살았던 고려 중기만 해도 유교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에 비해 불교는 고답적인데 머물렀으며, 신비화의 색채마저 강하게 띠고 있어  설득력이 약하다.  

 

그러므로 '효'라는 인간 근본의 덕목을 제시함으로써 불교적인 면과 유교적인 면을 통합하려는  일연은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손순의 설화가 불교적인 면이 강하면서도 신비주의에 떨어지지  않고 감동을 주어 후대에 효자설화의 한 전형을 이룬 것은 이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현풍 비슬산__관기와 도성의 만남

옛불교의 성지
  비슬산은 신라 때 포산이라 불리었다. 해발 1천84m의 이 산은 최근 대구 광역시에 편입된  달성유가 현풍의 동편에 우뚝 서 있다. 8__9세기에 들어서자 이 산에는 절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비슬산의 남서편 골짜기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사찰이 대단히 많았다고 한다. 특히  신라 흥덕왕 2년에 창건된 유가사는 신라 유가종의 총본산이었던 만큼, 이 산 일대는 향을  피우고 독경하는 소리로 가득찼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산에는 지금도 옛 절터가 많이 산재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포사2성'설화도 이 산의 절터 속에 묻혀 있다. 두 성인은 관기와  도성이라는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의 행적은 삼국유사 외에는 전혀 나오지 않아 알 수가 없다. 이  설화는 한때 비슬산의 보당암에 기거했던 일연스님이 이 산에 전해오는 설화를 채록했다가  삼국유사에 수록한 듯하다.   두 성인은 이 산에 숨어 살다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관기는 산의 남쪽 재에 암자를 짓고  도성은 산의 북쪽 굴에 거처했는데, 서로는 10여리나 떨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친해서 자주  왕래했다. 삼국유사에는 그 찾아가는 모습을 "구름을 헤치고 달빛에 휘파람을 불며 찾아갔다"고  적고 있다. 도성이 관기를 찾으려면 산의 모든 나무가 남으로 굽어 흡사 관기를 맞으려는  듯했으며, 관기가 도성을 찾으려면 반대로 나무들이 일제히 북으로 쓰러졌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두 성인의 설화는 이렇듯 짧은 얘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짧은 얘기  속에는 나무를 통해 그리움을 주고받은 두 성인의 도의 폭을 떠올려주고 있다. 그것은  삼라만상을 관통하는 그리움이며, 비슬산의 정상을 바람 속에 떠다닌 삶의 투명한 자취를  보여주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들 두 사람의 그리움은 일반 속인의 그리움과는 다른 도반끼리의 것이라 더 각별했을까.  

 

삼국유사에는 이 설화에 뒤이어 다음과 같은 짧은 얘기를 덧붙이고 있다. 도성은 처소의 뒤  높은 바위 위에 항상 자리를 펴고 앉았다가 어느 날 바위틈으로 몸을 뚫고 나가서 전신이  공중으로 올라가버렸으며, 관기도 역시 뒤를 이어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이름으로 그 유지가 전해진다고 적고 있다.

   

두 성인 내왕한 능선길
  이들 두 사람의  자취는 지금도 이 산의 거친 풀덤불 속에 남아 있다. 관기가 머물렀던 암자는  관기봉 남편에, 도성이 머물렀던 처소는 비슬산 정상인 천왕봉 바로 아래에 있다. 관기봉은  천왕봉의 남쪽 4km 밖에 돌출한 바위 봉우리이다. 그 아래에 있는 관기암은 절터의 흔적만 겨우  남아 있다.   도성암은 지금도 여전히 암자가 남아 유지가 소속암자로 되어 있다.

 

도성암의 뒤편에는 도성이  앉아 있었던 바위로 전해오는 '도통바위'가 우람하게 서 있다. 도성암에서 보면 관기봉의  봉우리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 도통바위와 관기봉은 여전히 그리워하는 모습으로 마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관기봉에서 대성사까지 두 성인 '달빛에 휘파람을 불며' 오갔다는 길은 비슬산의 정상을 넘는  약 두 시간의 능선길이다. 관기봉은 현풍에서 가재라는 비슬산 중턱의 마을을 지나 소재사를  거쳐 약 한 시간을 걸어 올라가면 닿는다. 관기봉에서 천왕봉까지의 능선 도중에 대견사지가  있다. 대견사에도 관기가 머물렀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런 만큼 관기가 도성을 만나러 간  길은 대견사를 지나 갈대와 싸리덤불이 우거진 광활한 평원을 가로질러 비슬산 천왕봉의 정상을  넘어갔다고 볼 수 있다.  

 

관기암은 갈대덤불에 덮여 그 흔적이 겨우 남아 있다. 관기암터를 지나 능선반 계곡반으로 한  시간을 걸으면 대견사지가 나온다. 대견사는 9세기 신라 헌덕왕 때 지은 절이라고 한다. 현재  축대가 남아 있으나 절터는 주춧돌만 갈대숲 속에 묻혀 흩어져 있을 뿐 완전히 버려진 느낌이  든다. 절 오른쪽 바위 끝에는 부서진 석탑의 잔해가 흩어져 있다. 이 탑은 원래 9층탑이었다는데  현재는 3층 정도의 탑석만 남아 있다. 탑은 기단의 길이가 2m 가량 된다. 절 주위에는 바위가  병풍을 치듯 둘러처져 있다. 절 앞으로는 현풍들을 지나 낙동강이 펼쳐지고, 멀리 가야산이 눈에  들어온다.   대견사지 뒤 낮은 언덕을 오르면 수백만 평의 광활한 평원이 펼쳐진다.

 

비슬산 정상까지 약  2km가량 펼쳐진 평원은 갈대숲과 싸리덤불로 우거져 장관을 이룬다.   평원의 동쪽 능선으로 난 산길에 올라서면 동쪽으로 청도군 풍각면이, 서쪽으로는 낙동강이  펼쳐진다. 낙동강 너머로는 가야산과 지리산의 연봉이 아슴하게 보인다.   더불어 산 능선을 따라 세찬 바람이 일정한 방향도 없이 불어대고, 구름이 산 능선을 휘감기도  해 옛날 관기가 '구름을 헤치고' 걸었다는 그 길이 실감난다.   약 한 시간을 걸어 평원을 지나면 작은 바위 봉우리들이 나타나고, 그 봉우리들을 넘으면  천왕봉 정상이다. 정상에서 서북쪽 계곡을 내려다보면 바로 밑에 도성암이 보인다. 그러나  도성암에 이르는 산길은 너무 가팔라 다시 한 시간을 조심스레 내려가야 한다. 도성암은 신라  혜공왕 때 창건됐다고 하며 현재 대웅전과 선원의 건물이 있다.

   

도통바위
  도성암 뒤에 서 있는 '도통바위'는 옛날 도성이 이 바위 위에서 도를 통했다는 전설 때문에 이  일대에서는 신성한 바위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인근의 무당들이 이 바위에서 치성을 드리려고  많이 오지만 절에서는 일체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삿된 도'는 영험이 없다는 것이다. 대성암에서 바라보면 멀리 관기봉이 마주보인다. 대성암의 대웅전 앞뜰에는 신라 때의  3층석탑(기단 폭 1백 60cm, 높이 2m)이 있어 그나마 옛자취를 남겨두었을 뿐 관기와 도성의  자취를 찾기는 힘들다. 비슬산은 워낙 깊은 데다 인적이 별로 없었던 곳이다.

 

그래서 이 산에  전해오는 얘기들은 수습되지 못하고 바람에 흩어져버린 안타까움만 남아 있을 뿐이다. 비슬산은  정성대왕이라는 산신이 주재하는 성지라고 삼국유사는 밝히고 있지만, 많은 절터가 사라지고  지금은 천왕봉 북쪽의 용연사와 대승암 바로 밑의 유가사가 겨우 남아 있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산세의 위용은 대단해서 관광지로 각광을 받을 날이 멀지 않은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