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경덕을 유혹하고 있는 황진이의 모습을 그린 그림. 북한 인민화가 차형삼의 작품이다. |
중국에서 기 개념에 근거한 ‘기철학’이 가장 분명한 형이상학적 위상을 갖게 된 것은 북송(北宋)시대 장재(張載·1020~1077)라는 인물을 통해서다. 그는 당대 중국인의 심성을 사로잡은 불교의 정밀한 사유체계와 종교적·초월적 세계관을 대체하기 위해, 기원전에 시작된 공자와 맹자의 유학을 새로운 형태로 변모시켰다.
이른바 북송시대의 ‘신유학(新儒學)’은 내성적이고 주관적인 불교의 심성론을 넘어 기(氣)로 이루어진 새로운 우주관을 형성하면서 등장했다. 불교는 인간 삶을 고통으로 간주, 이 세상에서 벗어나 부처가 되길 열망했지만, 공맹(공자와 맹자)의 계보를 잇는 북송시대 유학자들은 삶 속에서 완전한 인격체인 성인(聖人)이 되고자 했다. 시대의 어리석음을 바로잡는다는 뜻의 ‘정몽(正蒙)’이란 작품은 성인이 되고자 한 장재의 우주론을 담고 있다. 그는 형체 없는 태허(太虛)의 기가 온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고 말한다.(‘正蒙’의 ‘太和’편)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변화 과정에서의 일시적 형태를 뜻하는 객형(客形), 즉 다양한 사물이 만들어지지만 이것은 모두 태허로 되돌아간다. 장재는 객형과 태허의 관계를 얼음과 물의 관계에 비유했다. 현상적으로 볼 때 얼음은 얼었다가 녹으면서 사라지지만 태허의 본래적 기로 돌아갈 뿐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無)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장재가 이 같은 기의 형이상학을 설파한 것은 거대한 우주 가족의 탄생을 예고하기 위해서다. 그는 광대한 세계에서 너무도 미미한 존재인 우리는 우주의 하늘과 땅을 자기 부모로, 자기 몸과 마음으로 삼을 때 비로소 모든 사람이 한 뱃속에서 태어난 한 가족이 되며 만물이 나와 더불어 사는 동료가 된다고 말한다.(‘正蒙’의 ‘乾稱’편) 현상계에서 우리는 갈등과 대립을 겪지만, 태허의 세계에서 하나의 기(氣)로 엮인 우주가족의 일원이 된다. 장재의 기철학은 신유학의 혁명적 우주론으로 급부상했고, 정호(程顥·1032~1085)의 만물일체설(萬物一體說)을 낳는 원동력이 된다. 정호는 만물과 자신을 한 몸처럼 간주하는 것이야말로 공자가 설파한 인(仁)의 참된 의미라고 보았다.(河南程氏遺書) 기(氣)가 불통해서 몸이 마비된 상태를 불인(不仁)으로 본 의학 용어를 빌려, 정호는 기가 통하여 모든 사물과 소통하게 된 상태를 인(仁)이라고 이해했다. 기의 우주론에 근거한 이들의 신유학은 중국의 유학 전통을 일변시켰고 조선 유학의 향배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조선의 기철학을 수립한 화담 서경덕(徐敬德·1489~1546)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평생을 은둔자로 산 처사형(處士形)이다. 서경덕은 성종에서 명종 때 인물로 네 번의 사화(士禍)를 모두 겪었다. 기미를 알고 선견지명이 있는 선비라면 출사(出仕)하지 않고 평생 산림에 묻혀 학문과 후배 양성에 전념한다는 말이 사림파 지식인 간에 한창 유행하던 때다. 조광조의 기묘사림을 필두로 이황·이이 등 대다수 사림이 출사했지만 대표적 처사였던 서경덕과 조식(曹植·1501~1572)은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중종 14년(1519년) 기묘사림이 현량과(賢良科·인재추천제)를 추진하면서 전국 인재 120명을 천거했을 때 개성 출신의 서경덕이 수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화담은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1540년 대제학 김안국이 추천하여 참봉직(參奉職)을 제수받았을 때도 출사하지 않았다. 정통과 이단, 군자 소인의 엄격한 구별을 강조하던 사림파의 정치성향에 동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런 내력 때문인지 기철학자 서경덕의 문헌 전승에는 기이한 행적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환상소설인 ‘전우치전’에 나타난 화담은 도술의 고수가 되어 오만한 전우치를 징벌했다. 구비(口碑) 전승에선 서경덕이 승려로 둔갑한 호랑이와 여우를 벌준 야사까지 등장한다. 박연폭포와 서경덕 그리고 자신을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부른 황진이와의 로맨스는 의도적으로 각색되었다. 30년간 면벽참선한 지족선사(知足禪師)마저 무너뜨린 황진이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서경덕을 유혹하지만 고결한 선비 화담이 끝내 지조를 잃지 않았다는 것이 이야기의 골자다. 유학자 서경덕의 내공이 불교의 선승(禪僧)이나 도사(道士)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한 이야기지만, 이면에는 다른 맥락의 인물평이 숨어 있다.
뒷날 화담의 기철학은 이황(퇴계)과 이이(율곡)에 의해 이단의 징후를 가진 것으로 비판받는다. 이이는 화담이 경전 문구에 얽매이지 않고 성찰해서 자득(自得)한 맛이 깊지만 독학했던 그의 공부법은 학자들이 본받을 수 없다고 평했다.(율곡의 ‘經筵日記’) 퇴율(退栗·퇴계와 율곡)은 서경덕의 철학을 순정유학이 아니라 불교와 노장사상이 뒤섞인 잡학이라고 봤다. 이들의 부정적 평가는 서화담 전승에서 기괴한 도술을 일삼는 기인(奇人) 서경덕의 이미지를 더욱 증폭시켰다.
서경덕 본인은 자기 철학에 대한 신념이 대단했으며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을 지었을 때는 동방(조선)에서 학자가 배출되었음을 중국과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다고 자부했을 정도다. 화담의 이런 믿음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자득을 강조한 서경덕의 학문적 성과는 중국인이 아닌 동양의 외국인으로서 유일하게 청대 국가학술사업의 대결산인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되는 영광을 누렸다. 18세기에 유득공(柳得恭·1749~1807)이 연행사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청의 저명한 학자 기윤(紀昀)이 서경덕의 ‘사고전서’ 인명수록을 언급하며 ‘화담집’을 극찬했다.(유득공의 ‘熱河紀行詩註’)
무엇이 서경덕의 학문을 특별한 논설로 만들었을까? 당시 서경덕의 학문에 대해 장재의 기철학과 소옹(邵雍·1011~1077)의 상수학(象數學)을 모방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상수학은 ‘주역’의 괘상(卦象)과 괘상에 배당된 숫자를 통해 자연현상을 설명한 유교 전통의 자연과학이라고 볼 수 있다. 서경덕은 상수학 관련 글을 썼지만, 자신은 수학으로 인해 깨달은 자가 아니며 수(數)라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이(理)를 살피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을 명시했다.(‘화담집’ 중 유사 遺事)
의구심을 확대시킨 것은 서경덕의 기철학이 장재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점이었다. 여기선 화담이 중시한 학문 태도를 엿볼 필요가 있다. “성현의 말은 이미 경전에 있고 선배들이 주석을 단 것에 대해선 다시 덧붙일 필요가 없다. 오직 논파하지 않은 것만 말하고자 한다.”(‘화담집’ 중 연보年譜) 서경덕은 선유(先儒)가 이미 말한 것이라면 자신이 굳이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럼 어디까지를 서경덕의 고유한 기론(氣論)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는 맑고 형체 없는 담연무형(湛然無形)의 태허가 기의 본래 모습, 즉 선천(先天)이라고 말한다.(原理氣) 태허는 공간적으로 외부가 없고 시간적으로 시작이 없다. 태허의 일기(一氣)는 스스로 움직여 음양 이기(二氣)로 나뉜다. 화담은 이것을 ‘기자이(機自爾)’, 즉 기(氣)의 모습이 저절로 그런 것이라고 했고, 음양이 작용하여 천지와 일월성신을 이루는 것을 후천(後天)이라고 불렀다.
그는 선천과 후천이 시공간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점, 태허가 곧 기고 기가 곧 태허라는 점을 강조한다.(理氣說) 허(虛)가 그 자체로 기(氣)라는 말은, 허무의 상태에서 존재하지 않던 기가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太虛說) 이기(理氣)의 미묘한 관계를 아는 자라면 기에 시작과 끝이 없으며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 다른 원인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하며, 화담은 이것을 “기 바깥에 이가 없다(氣外無理)”라고 표현했다.(理氣說)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처럼 이(理)가 기(氣)를 주재한다고 말했지만, 이때의 주재란 기 밖에서 기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의 변화무쌍한 작용이 바름을 잃지 않는 모습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후대에 화담의 사유를 기(氣) 중심적 이기론 혹은 기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기보다 먼저 존재하는 이(理)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경덕이 태허의 일기(一氣)와 음양의 작용을 말한 점은 북송(北宋)의 장재 철학과 다를 것이 없었다. 화담은 무엇을 두고 자기 학설이 장재, 정호, 주희와 다르며 그들이 미처 명료하게 논파하지 못한 것을 밝혔다고 자부했을까? ‘귀신사생론’의 의문에 답할 만한 대목이 있다. 서경덕은 기의 본래 상태에 취산(聚散), 즉 모이고 흩어지는 작용이 있을 뿐, 있다가 소멸되거나 다시 발생하는 유무(有無)현상은 없다고 말한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처럼 미미한 존재라도 이 기가 ‘끝내 흩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계속 강조한다. 영명한 정신 지각뿐만 아니라 거칠고 조야한 풀 한 포기까지 결국 어떤 것도 흩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바로 여기에 화담의 독창적 답이 있다.
장재는 객형(客形)의 임시적 기가 태허의 본래 기로 돌아가지만 흩어져도 원래의 기이고 다시 모여도 마찬가지의 기이기 때문에 죽어도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正蒙’의 ‘太和’편) 일견 유사해 보이는 이 대목에서 서경덕은 태허로 흩어지는 것(散)이 결코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不散)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기의 취산(聚散)을 말하지만 이곳에서 기의 불취(不聚)와 불산(不散)을 통관(通觀)할 수 있어야 비로소 ‘역(易)’의 신비한 이치를 알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화담의 창견(創見)이었다. 담일청허의 기는 글자 그대로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니라 모든 구체적 사물 속에서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는 영원한 상(象), 즉 태허를 직관했던 화담의 가장 절실한 전언이다. 비록 정신지각의 아이덴티티, 즉 개체의 자의식과 기억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지만 화담은 모든 사물이 그 자체로 담일청허의 기에서 영원히 존재한다고 보았다. 불교의 윤회나 천주교의 영혼불멸처럼 사후세계를 따로 말하지 않더라도, 삶의 내재적 지평에서 개체를 뛰어넘는 영원한 세계, 즉 내재적 초월의 이상향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현세 유학에 종교적 초월의 영역을 설정함으로써 서경덕은 유학의 지평을 영원의 도상으로 끌어올렸다. ‘줄 없는 거문고로 소리 나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고 한 화담의 시구는 유한하면서도 무한한 인간 삶의 모습을 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無絃琴銘’)
그러나 담일청허의 기로 모든 사물의 영원성을 강조한 화담의 논법은 후대의 격렬한 비판에 시달렸다. 특히 이황의 비판이 신랄했다. 그는 화담의 학설이 어느 것 하나 성현의 발언에 부합하지 않는데도 깊고 오묘한 경지를 터득했다고 스스로 오만하게 자평했고, ‘이(理)’ 자를 투철하게 이해하지 못해서 결국 형기(形氣) 일변도에 그쳤을 뿐이라고 혹평했다.(퇴계전서 중 ‘非理氣一物辨證’) 이(理)와 기(氣)가 완전히 다른데도, 화담은 영원하고 보편적인 이(理)의 고유한 속성을 기에 배속시켜서 기를 이로 혼동했다고 본 것이다.
선천·후천 사이에 존재하는 이(理)의 강력한 주재성을 이해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며 퇴계는, 화담이 기를 이(理)처럼 상존불멸(常存不滅)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의도치 않게 불교의 윤회설에 근접하는 또 다른 오류를 범했다고 평가했다.(퇴계전서 중 ‘答南時甫’) 객형이 태허로 돌아가고 또 다른 객형으로 출현한다고 본 장재의 기론도 주희에 의해 대윤회설(大輪廻說)의 일종으로 비판받았는데, 화담의 논설 역시 마찬가지 폐단을 가졌다고 본 것이다. 사실 윤회나 영혼불멸을 말하려면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개체의 고유한 자의식과 기억능력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장재나 서경덕은 태허 기의 세계에서 구체적 사물의 자기정체성을 강조하지 않았다. 다만 개별 존재를 구성하는 담일청허한 기의 영원성을 말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퇴계와 율곡이 동일한 목소리로 이들의 기론을 공격한 것은, 기의 영원불멸성 그 자체 때문이다.
퇴율은 기의 속성이 ‘생생불식(生生不息)’, 즉 기존의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다시 발생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한 번 쓰인 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기가 끝없이 발생해야 무궁한 조화를 말할 수 있다고 본 정이(程頤·1033~1107)의 우주론을 차용한 것이다. 이들에게 영원한 것은 태극의 이(理) 하나뿐이며, 기는 생멸(生滅)을 겪는 유한한 존재를 의미했다. 그런데도 유무지간(有無之間)에 놓인 기를 불멸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것은 귀신과 혼령의 상존(常存) 및 윤회를 말한 불교와 다를 게 없다. 율곡은 화담이 총명했지만 유한한 담일청허의 기 위에 ‘이통기국(理通氣局·理는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氣는 제한되어 있다)’의 차원이 더 있는 것을 몰랐다고 비판한다.(‘율곡전서’ 중 ‘答成浩原’) 율곡이 화담을 조광조, 이황에 이어 제일 마지막에 꼽은 것도 이 때문이다. 율곡은 조광조에 대해서는 출사하여 수기치인(修己治人)을 함께 달성했다고 했고, 퇴계에 대해서는 성실하게 공부했지만 주자를 모방한 것(依樣)이 심했다고 봤고, 화담에 대해서는 자득한 맛이 있지만 홀로 공부한 탓에 투철하게 이(理)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율곡별집)
조선 유학자 중 북송시대의 신유학과 이기론을 가장 먼저 깨우쳤음에도 불구하고 서경덕에 대한 당대 사림의 평가는 곱지 않았다. 16세기 초 붕당이 조성되기 전 화담은 수많은 문인제자를 배출했지만 이들은 동인·서인, 북인·남인으로 갈라서면서 정맥(政脈)에 따라 화담학파의 성격을 달리 평가했다. 화담의 직전 제자들은 스승의 우주론과 기철학을 대단히 높이 평가한 반면, 퇴계와 그 문인은 학식도 낮고 시문도 뛰어나지 못한 화담의 자질을 극존(極尊)하는 화담 제자들의 태도를 비웃었다. 광해군 6년(1614년) 문묘종사 논의에서도 이항복(李恒福)의 청원이 있었지만, 화담은 기수(氣數)에 치우쳐 이(理)를 몰랐다고 본 전대 사림의 부정적 평가로 인해 제대로 논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화담집’ 중 연보) 화담과 그 제자를 배향한 화곡서원(花谷書院)을 사액(賜額·국가가 인정한 공식서원으로 정부 후원을 받도록 함)하는 것으로 논의가 마무리됐다. 서경덕 학풍에 대한 이런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황과 이이의 철학이 조선 유학의 근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화담 철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사실 북송시대 장재의 기철학, 정호의 만물일체론, 조선에서 서경덕의 담일청허(湛一淸虛) 기론 등은 고대 유학의 이상향에 맥이 닿는 오래된 사유전통을 잇고 있다. ‘성인은 천하를 한 가족으로, 중국을 한 몸으로 여긴다’는 ‘예기’의 ‘대동사회론’이 그것이다. 대동사회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약한 자, 병든 자, 불구자, 홀로 된 자 등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 내 집 자식과 남의 집 자식, 내 집 부모와 남의 집 부모를 분간하지 않고 두루 사랑할 수 있는 이상사회를 뜻한다. 주자학자들은 대동사회론이 자기 혈친과 타인 간의 친소(親疎·가깝고 먼) 관계를 무너뜨리는 묵가류의 겸애설(兼愛說)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오민동포(吾民同胞)와 만물일체(萬物一體)를 주장한 기철학자들에겐 유학의 협소한 가족주의가 오히려 시대의 한계로 자각되었다. 나와 친족, 타인의 구별이란 곧 흩어질 일시적 객형에 불과한 것이고(장재), 모든 존재는 외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담일청허의 기로 엮인 하나의 몸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서경덕) 오늘날 공동체에선 사회적 역할분담과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해 개체 혹은 개인의 독립된 위상을 철학적으로 자리매김하려고 한다. 그러나 단절된 개인이 어떻게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우리가 사회에서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상호의존적 존재라는 점을 구명하기 위해서도 장시간의 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보면 조선 유학의 기철학 전통은 이미 상호 공존을 위한 중요한 형이상학 이념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