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아 될 뻔한 SM5, 중산층 가장의 상징으로
“삼성이 만들면 자동차도 초일류 제품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소비자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당시 김영삼 정부는 삼성의 자동차 사업 진출을 허가했다.
공장 기공식 이후 3년 만인 1998년 3월 삼성이 만든 첫 자동차가 나왔다. SM5였다.
삼성이 자동차공장을 지은 부산 신호공단은 갯벌을 메워 만든 공장부지로 자동차 공장 부지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무거운 기계 설비를 들여놓을 경우 지반이 내려앉을 우려가 있어 보강 공사로 공장 건설 비용이 커졌다.
지금도 부산 르노삼성 공장에 가면 건물과 땅이 닿는 부분에 크고 작은 균열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균열 때문에 공장이 내려앉거나 무너지지는 않는다. 공장을 지탱하는 것은 땅이 아니라 1만7000여 개의 쇠기둥이기 때문.
지금도 그렇지만 삼성은 당시에도 초일류를 지향했다. 삼성자동차 공장은 자동차 공장이라기보다는 고급 레스토랑 주방이나 무균실, 또는 미세한 먼지 하나라도 발견할 수 없는 반도체 공장에 가깝다.
‘초일류가 되는 데 필요한 돈은 아끼지 않는다’는 기업문화에 따라 거액을 들여 닛산의 조언을 들어가며 엄청난 양의 제조 설비를 사들였다. 다른 자동차 공장에서 사람이 하는 일도 삼성자동차 공장에서는 로봇이 하도록 했다.
실내 공기 정화시설도 최고급으로 갖췄으며 직원들이 잠시라도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작업위치에서 몇 걸음만 떼면 되는 거리에 휴게시설을 뒀다. 자동차 공장이기 때문에 바닥에 기름때가 묻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 삼성자동차 공장 바닥은 그대로 누웠다 일어나도 옷에 먼지가 거의 달라붙지 않을 정도다.
‘초일류 삼성’이 돈 아끼지 않고 지어놓은 공장은 지금도 다른 어느 자동차 회사와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최첨단과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최첨단 공장 설비는 초기에는 SM5의 발목을 잡았다. 과도한 시설투자로 인해 차를 팔아서는 돈이 남지 않는 구조가 된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자동차 업계에서는 “삼성자동차는 SM5를 한 대 팔 때마다 100만원 이상씩 손해를 본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왔고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삼성전자 등 막대한 이익을 내는 계열사를 둔 삼성은 자동차에서 손해 나는 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다.
‘삼성 직원만 타는 차’
‘초일류 자동차’를 기대하던 소비자에게 삼성의 첫 차 ‘SM5’는 다소 실망스러운 모습이었다. 당시 SM5의 경쟁모델이던 현대자동차의 EF쏘나타는 지금 팔리고 있는 YF쏘나타와 견주어도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곡선 속에 ‘에지’가 살아 있는, 당시 세계 자동차 디자인 트렌드를 따르고 있었다.
이에 반해 닛산과 기술제휴를 맺고 개발한 SM5는 1990년대 중반 모델인 닛산의 ‘세피로’를 기본 모델로 만들었기 때문에 외관상 EF쏘나타보다 ‘시대적으로 뒤처지는’ 모습이었다.
시판 초기 “SM5를 타는 사람은 삼성 직원밖에 없다”는 비아냥거림 속에서 실제로 삼성 직원들은 직급에 따라 SM5 520, 525 등을 구입했다. 당시 전체 판매량의 40% 가량이 삼성 임직원 판매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겉모양은 ‘구형’이었지만 이른바 ‘내장’인 기계 계통과 주행 성능은 EF쏘나타를 압도했다. ‘수입차’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안정적인 승차감과 주행성능으로 전문가들 사이에서 ‘잘 만든 차’라는 평가가 잇따랐다.
또 ‘국산화율이 높아지기 전에 구입해야 닛산 부품 비율이 높은 일제 차를 살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SM5 판매는 탄력을 받는 듯했다. 지금도 일부 중고차 시장에서는 1998년형 SM5가 2000년 이후 같은 모델보다 값이 비싸게 형성돼 있다. 외환위기를 맞아 과시형 소비가 고개를 숙이는 분위기 속에서 튀지 않고 평범, 무난하고 실속 있는 차를 선호하는 소비자도 SM5를 선택했다.
그러나 1999년 기업 간 대규모 사업부문 교환인 ‘빅딜’ 계획이 발표되면서 막 살아나려던 ‘삼성차’에 대한 수요는 자취를 감췄다.
“국내 기업의 90%가 쓰러진다”는 흉흉한 소문 속에서 삼성자동차의 취약한 재무구조는 소비자를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삼성차 샀다가 회사 망하면 애물단지 되는 것 아니냐”“AS도 제대로 못 받고 고장 나도 부품이 없어 고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소비자의 생각이었다.
대우자동차와 합병 등 다양한 빅딜 구상이 나왔지만 삼성그룹은 결국 자동차사업을 접기로 결정하고 1999년 6월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삼성모터스’의 줄임말인 SM은 그렇게 꽃도 피워보지 못한 채 사라지는 듯했다.
택시기사의 힘
2000년 4월. 프랑스 르노사가 삼성자동차를 인수했다. 새 주인을 만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상황은 열악했다. 기아차까지 인수한 현대자동차는 경차부터 RV까지, 다양한 계층의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막강 라인업을 갖추고 있었다.
르노삼성자동차는 SM5 단 한 대였다. 그것도 1990년 중반 모델. 권총, 장총, 대포까지 갖춘 상대와 가스총 하나 들고 맞서는 형국이었다. 게다가 시쳇말로 ‘뽀대’가 자동차를 고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인 한국 소비자. 이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다른 전략이 필요했다.
르노삼성이 믿는 것은 ‘사실상 수입차’인 SM5의 품질뿐이었다. 하지만 3,4년에 한 번씩 차를 바꾸는 소비자에게 ‘10년을 타도 끄떡없는 차’라는 사실을 알릴 방법이 없었다.
르노삼성은 고민 끝에 택시기사들을 공략하기로 결정한다. 하루 10~12시간 운전해야 하고 소모품 교체나 정비 등으로 차를 세울 때마다 수익에 타격을 받는 택시기사. 이들에게 잔 고장 없고 소모품 교체주기가 길며,
바꾸지 않고 오래 탈 수 있는 차량은 곧 생계 수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당시 SM5는 한국 자동차 시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르면 8만㎞, 늦어도 10만㎞에서 꼭 교환해야 하는 ‘타이밍벨트’.
그때만 해도 자동차 대부분이 고무 재질로 된 타이밍 벨트를 사용하고 있었다.
고무 재질 타이밍벨트는 제때 교환하지 않으면 끊어질 우려가 있었다. 만약 주행 중에 이게 끊어지면 차가 그 자리에서 서고 견인차를 불러야 한다. 제때 교환하려고 해도 엔진을 내리고 작업을 해야 하는 대공사이기 때문에 반나절 정도 차를 정비소에 맡겨야 했다.
그런데 SM5는 타이밍 ‘벨트’ 대신 금속 재질의 타이밍 ‘체인’을 장착했다. 타이밍 체인은 교환할 필요가 없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택시기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경쟁업체 영업사원들은 “빠르게 회전 하는 벨트를 쇠로 만들었으므로 소음이 클 수밖에 없다”고 흠집 내기에 나섰지만 ‘자동차 전문가’인 택시기사들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또 하나는 백금 점화 플러그. 보통 점화 플러그는 2만~3만㎞마다 교환해야 하지만 SM5의 점화 플러그는 10만㎞까지 바꿀 필요가 없었다.
르노삼성은 택시기사를 위한 다양한 서비스도 내놓았다. 공항에서 줄지어 선 택시들을 대상으로 무상점검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차에 대해 잘 알고 스스로 정비할 수 있는 기사들을 위해 자가 정비 코너도 운영했다.
입소문에 탄력이 붙자 “SM5는 쏘나타보다 오래 운전해도 피곤하지 않다”는 얘기도 나올 정도가 됐다.
입소문 마케팅은 적중했다. 택시기사들은 택시 승차장에서, 기사식당에서 차에 대해 얘기를 나누며 SM5를 화제에 올렸고 귀가 솔깃해진 택시 회사 관계자, 개인택시 운전자들은 SM5 계약서에 사인했다.
당시 국내 택시 수요는 연간 6만~7만대 수준. 전체 중형차 시장의 30% 규모였다. 르노 삼성은 택시시장에서 입소문 효과를 발판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2000년 SM5 판매량은 3만대 수준이었다. 그러던 게 택시기사들의 ‘도움’으로 2001년에는 두 배가 넘는 7만대가 팔려나갔다.
한번 ‘망한’ 회사, ‘그 회사 차 사면 AS 안 된다’던 SM5로서는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은 환자에 비유할 만한 대단한 변화였다.
SM5의 고속주행
택시기사들의 입소문은 기사들끼리 나누는 대화로 끝나지 않았다. 차량 구입을 고민하는 소비자는 밤늦게, 때로는 술 한잔하고 택시를 타면서 기사에게 구입 상담을 했다.
“제가 이번에 중형차를 사려고 하는데, 무슨 차를 사면 좋을까요?”
이렇게 묻는 승객에게 택시기사의 상당수는 “에스엠 파이브가 좋아요”“에스엠 파이브가 좋다더라고요”, “에스엠 파이브는 일제차로 보면 돼요”라고 대답했다.
심지어 SM5가 아닌 다른 차종을 몰던 택시기사도 “나도 다음에 차 바꾸면 SM5로 사려고요, 이 차는 잔고장이 너무 심해서 영업하는 시간보다 공장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더 많아요”라며 일반 소비자에게까지 SM5 구입을 부추겼다.
하지만 소비자들도 똑똑했다. 택시기사가 추천한다고 날름 차를 살 소비자는 아니었다.
르노는 삼성자동차를 인수하면서 르노 본사에는 없는 대단한 ‘가치’ 하나를 덤으로 얻었다. 바로 ‘초일류 정신’ 이었다.
“마누라 빼고는 다 바꿔라.” 초일류를 지향하는 삼성의 혁신주의는 삼성자동차에 이어 르노삼성자동차에까지 계승됐다.
르노삼성차 관계자는 “사실 르노의 기업문화는 다른 자동차 회사와 비슷하게 터프하고 노조는 강경하다”며 “르노삼성의 회사 분위기는 삼성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자동차는 ‘물건’ ‘구입’ ‘소유’의 개념이 아니다. 컴퓨터나 MP3, 에어컨, 휴대전화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경우는 없다.
유독 자동차만 나라에 세금을 내고 기름 넣을 때 또 세금을 내는 것은 ‘자동차’는 물건이 아닌 ‘자산’의 개념이 크기 때문이다. 또 자동차는 한번 구입하면 폐차하거나 되팔 때까지 끊임없이 소모품을 갈아줘야 하고, 엔진오일을 바꾸고, 필요에 따라서는 전자제어장치(ECU)를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다소 ‘골치 아픈’ 자산이다.
이 때문에 자동차 회사가 단지 차를 만들어 파는 회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차를 판 뒤에는 부품을 공급해야 하고 수리, 소모품 교환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해야 하며, 때로는 금융업체를 끼고 당장 목돈이 없는 소비자에게 적절한 금리에 차 살 돈을 빌려주기도 해야 한다.
새 차를 팔 때는 고객이 타고 있던 중고차를 높은 값에 팔아주며 새 차 구입이 아닌 중고차 처분에서도 자동차 제조업체가 ‘고객만족’을 실현해야 한다. 차 구입을 고려할 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차의 디자인이나 성능, 연비, 가격만 따져서는 2% 부족한 이유가 여기 있다.
아무리 최첨단 차량이라 하더라도 차를 구입한 뒤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그 차가 좋아 보일 리 없다. 반면 제품의 디자인이나 실내 장식이 당장은 마음에 안 들더라도 차를 보유하는 동안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 차를 구입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SM5 1세대 모델은 제품 자체로만 놓고 보면 분명 경쟁력이 떨어졌다.
구동 계통이나 내구성은 고객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 단기간에 먼거리를 주행하는 택시기사들의 마음에는 들었지만 일반 소비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뭔가 또 다른 시도가 필요했다. 경쟁사들이 판매대수를 늘리는 데 온 신경을 쓰고 있을 때 르노삼성은 ‘차를 판 뒤’ 고객관리 쪽으로 역량을 집중하기 시작한다.
SM5를 여성이 많이 사는 이유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가 존재하지만 고객이 ‘이유를 모르고 돈을 내는’ 대표적인 업종은 의료서비스와 자동차 정비 분야다. 의대를 나오지 않은 이상 환자는 의사의 진단이나 처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의사의 판단에 따라 진료를 받고 의사의 판단에 따라 처방을 받으며 약사의 판단에 따라 약을 지급받는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요즘이야 자동차에 대한 전문 지식이 있는 마니아층이 두터워져서 자동차 정비업소가 골치 아파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 소비자는 차를 정비소에 맡겨두고 정비사의 ‘처분’만 기다리며 내라는 액수만큼 돈을 낸다.
정비사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살짝 나사를 풀어서 기름을 흘리고 “기름이 새서 고쳐야 한다”고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객에게 얘기한 뒤 다시 조이고 공임을 챙길 수 있는 구조다.
‘어리버리한’ 운전자를 상대로 카센터가 바가지 씌우는 현장을 보도하는 것은 과거 신문과 방송의 인기 아이템이기도 했다. 이 같은 바가지는 요즘 찾아보기 힘들지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소비자가 자동차에 이상이 생기면 ‘또 바가지 쓰지 않을까’라고 덜컥 겁을 먹는 것은 자동차에 대한 지식 부족뿐 아니라 한두 번 당해본 경험에서 오는 조건반사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르노삼성은 이 점을 포인트로 잡았다. 기름밥 먹으며 기술을 익힌 ‘터프’한 정비기사들을 백화점 명품 매장 직원 수준으로 변신시켰다. 차를 고치러 간 고객이 담당 부서를 찾아 헤매지 않도록 전담 직원이 고객을 처음부터 끝까지 안내하도록 했다.
엉덩이 보기 캠페인
과잉정비는 하지 않으며 노파심에 불필요한 부품까지 교환을 요구하는 고객을 “1000㎞쯤 더 타고 오시라”고 설득하기도 했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르노삼성의 서비스 수준이 높더라”는 입소문과 함께 고객들은 차뿐 아니라 ‘서비스’를 보고 SM5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에스엠은 여자가 타는 차’ ‘르노삼성차는 여성스러운 차’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차를 잘 모르는 사람이 제품 고르는 눈이 없어 르노삼성 차를 산다’는 논리가 하나. ‘차를 잘 모르는 여성도 얼마든지 차를 최상의 상태로 관리하며 탈 수 있는 차’라는 게 또 하나다. 르노삼성자동차, 특히 SM3와 SM5를 모는 여성운전자가 많은 이유는 여성들이 ‘백화점 같은 서비스’를 원했기 때문인 결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최근 주부 최모(38·서울 강남구 대치동)씨는 르노삼성 정비센터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고객님이 운전하시는 SM5 차량의 브레이크 등 전구 하나가 고장 났으니, 오셔서 무료로 교환을 받으시라”는 것이었다.
한번 망했다가 기적적으로 기사회생한 회사. 르노삼성은 전 직원을 서비스 분야에 전진배치하고 일상 업무 시간이 아닌 출퇴근 시간에도 고객들의 차량을 유심히 관찰하도록 지시했다.
최씨가 운전하던 SM5 차량을 퇴근 중이던 르노삼성 박모(40) 팀장의 차가 따르고 있었고, 박 팀장이 최씨 차량의 브레이크 등 하나가 점등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박 팀장은 그 자리에서 최씨의 차량번호를 메모했고 다음날 고객서비스센터에 이 사실을 알려 최씨에게 연락이 간 것이었다.
품질 면에서 경쟁 차종보다 월등하다고 할 수는 없었던 SM5는 이렇게 해서 회사가 기적적으로 회생한 지 1년여 만인 2001년 6월 누적 판매대수 10만대를 넘어섰고, 2002년 6월에는 20만대, 2006년 10월 50만대 돌파에 이어 올해 8월까지 모두 68만5000대가 판매됐다.
새로운 시작, SM5 후속모델
1998년 첫선을 보인 SM5는 2005년 1월 풀체인지된 2세대 뉴SM5에 이어 1월 중순경 3세대 풀체인지 모델이 나온다.
‘일제차를 탈 수 있다’며 소비자들이 열광한 1세대에 비해 2세대 SM5는 부족한 점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차체는 똑같은데 범퍼 등의 디자인을 조금씩 달리하고 배기량이 큰 엔진을 얹힌 고급차 SM7을 판매해야 했던 르노삼성은 최첨단 고급사양과 디자인 역량을 SM7에 집중했다.
상대적으로 SM5는 초라한 형상이었다. 소비자들은 SM5를 구입하자마자 단조로워 보이는 후미등 대신 수십만원을 주고 구입한 LED 등을 달고 차체가 같은 닛산 ‘티에나’의 부품을 구해 그릴을 바꾸기도 했다.
사실 SM5의 열풍은 제품 자체의 우수성이라기보다는 고객들이 차와 함께 ‘서비스’를 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과도하게 친절한 서비스로 경쟁사의 제품보다 뒤처지는 부분을 보완해온 르노삼성은 그러나 2009년 7월 시판한 SM3부터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고객에게 다가서고 있다.
과거 닛산의 자동차를 들여다 한국 실정에 맞게 개조해 제조, 판매해오던 르노삼성은 SM3부터 차량 개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한국 연구진은 르노와 닛산의 기술진과 대등한 입장에서 디자인과 설계, 제품 테스트에 참여했다.
프랑스 르노 ‘메간’을 베이스로 만든 SM3에서는 메간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한국 시장뿐 아니라 해외 수출까지 염두에 둔 본사에서 한국의 르노삼성 기술진을 믿고 일을 맡긴 결과다.
2010년 1월에 나오는 3세대 SM5는 SM3보다 한국 기술진의 입김이 더욱 크게 작용했다. 르노 ‘라구나’를 베이스로 개발했지만 라구나의 흔적은 실내 일부 인테리어를 제외하면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SM3는 최소한 앞뒤 문짝만큼은 메간과 비슷하지만 SM5는 유리창 빼고 같은 점이 한 구석도 없다.
최근 경기 용인시 기흥구 르노삼성자동차 중앙연구소와 디자인센터에서 직접 본 SM5는 충격적이었다. 최대한 선 사용을 절제한 미니멀한 디자인, 엔진의 성능을 가늠케 하는 45시리즈 타이어와 18인치 휠, 안락함에 중점을 둔 각종 편의장치는 SM5가 더 이상 쏘나타의 경쟁 상대가 아님을 가늠케 했다.
현대자동차에서 쏘나타는 더 이상 중산층의 차가 아니다. 도발적인 디자인과 역동적인 쿠페 스타일로 쏘나타는 이제 20대를 겨냥하고 나섰다.
이에 반해 SM5는 기존 수요자 층, 즉 자녀 한두 명 있는 학부모 연령대인 30대 중반~40대 중반의 튀는 것 싫어하고 회사나 직장생활도 성실히 하며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중산층을 여전히 겨냥하고 있다.
르노삼성 관계자는 “가격 책정에서도 쏘나타의 가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SM5 고객과 쏘나타 고객은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가격 면에서 비교 당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SM5, 쏘나타와 더 이상 경쟁 안 해
SM5를 비롯한 르노삼성자동차는 ‘현대차보다 무조건 100만원 더 받는다’는 가격정책으로 소비자 사이에서 유명했다.
그런 르노삼성이 SM5 후속모델의 가격을 정하면서 쏘나타 값을 고려하지 않고 합리적인 선에서 책정하겠다는 것은 앞으로 전개될 자동차 시장의 경쟁 양상을 미리 점쳐보는 데 도움이 된다.
SM5는 사실 그동안 쏘나타의 그늘에 가려 있던 중형차 시장 만년 2등이었다. 쏘나타에 비해 생산량도 적고 소비자 사이에서도 다소 인기가 떨어지는 SM5의 경쟁력을 보완하기 위해 수준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사운을 걸며 럭셔리 이미지를 노리고 전략적으로 경쟁 차량보다 높게 제품 값을 매겼다.
자동차 시장에서 ‘마이너 업체’인 르노 삼성의 고가 정책 덕분에 덩치 큰 경쟁사들은 마음 놓고 값을 올릴 수 있었고, 후발업체들은 선발업체들의 가격정책을 따라가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제품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값을 높게 부른 측면이 있었다. 신형 SM5에 와서 가격이 경쟁 차종과 ‘별개로’ 책정된다는 것은 그만큼 품질에 대한 자신감이 커진 것으로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SM5, 국내 자동차 시장 기폭제 되나
SM5가 한 수 위로 평가받는 정비 서비스를 배경에 두고 품질과 가격 경쟁력까지 인정받는다 하더라도 국내 중형차 시장에서 점유율이 당장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수출, 내수용 전 차종을 더해 월 2만대 수준의 생산능력을 갖춘 르노삼성이 내수용 쏘나타 한 차종만 월 2만대씩 찍어내는 현대자동차의 시장 지배력을 흔들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르노삼성 안팎에서는 SM5가 장기적으로 국내 자동차 시장의 체질을 바꾸는 기폭제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동안 한국 자동차 시장은 차종에 따라 소비자가 사실상 정해진 상태에서 경쟁이 이뤄지는 구도였다. 중년은 중형차, 부자는 대형차나 수입차 식이었다. 자동차에 대한 관리는 차를 구입할 때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정비소에서 푸대접을 받아도 ‘어쩌다 한번이려니’ ‘내가 운이 없으려니’하면서 차 고친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참고 지냈다.
그렇다고 서비스 좋은 회사 제품을 사자니 제품이 다소 마음에 안 드는, 어쩌면 소비자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여러 가지 조건과 분위기에 따라 특정 차량 구입을 강요당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형 SM5가 주목받는 이유는 소비자에게 차를 고르는 제약을 일부 풀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르노삼성의 기술 발전으로 소비자는 앞으로는 더 이상 ‘2% 부족하지만 서비스가 좋으니까’ 르노삼성차를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시점을 맞게 된 것이다.
가격, 서비스, 품질을 두루 갖춘 제품이 출현한 것이다. 얼마나 많은 소비자가 계약 후 차량 출고일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을 발휘할지가 SM5를 평가하는 잣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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