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미 해군 창설의 역사

醉月 2022. 1. 20. 19:00
미 해군 창설의 역사
해적에게 공납하던 국가에서 세계최강의 해군 보유국으로 발돋움하다
미 해군은 창설 당시부터 최강의 해군은 아니었고 오히려 신생군의 빈약한 전력에 불과했다. <출처: George Skypeck / Mobile Riverine Force Association>

해군력은 진정한 국제적인 무력이다. 지구의 3/4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지상군이 기동할 수 없는 지역을 이동할 수 있다. 특히 지상군이 이동할 수 없는 지역으로 세계의 어느 곳이라도 이동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핵심적인 수로를 지키거나 해안이나 인구밀집지 근처까지 상당한 병력을 전개할 수 있다. 특히 해군력은 타국의 주권영역을 침범하지 않거나 갈등이 없이 수천 해리를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해군력은 상당한 전력을 국제 공공재인 대양을 활용하여 세계로 투사할 수 있는 국제적 무력이다. <출처: 미 해군>

이러한 해군력은 국가에게 상당한 외교적 역량을 제공한다. 상당한 군사력을 특정한 지역에 배치하여 동맹이나 협력국가를 지원하고 안전을 보장하며, 적대적 세력의 도발행위를 막거나 위협할 수 있다. 해군력을 강압적으로 사용하는 활동을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라고 부르며, 근대 제국주의 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서도 중요한 국가적 역량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단순히 위협뿐만 아니라 타국의 방문을 통한 친선외교나 국제적인 재난의 발생시 구호나 인도적 지원물자의 제공 등에 있어서도 해군이 발휘하는 역량은 상당하다.

일찌기 포함외교로 개항당한 일본은 운요호라는 300톤도 되지 않는 증기추진 범선으로 조선에게 강화도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기도 했다. <출처: Public Domain>

사실 해군력이란 국가의 성장에 따라 그 성쇠가 좌우된다. 특히 해군력은 선진국형 전력이다. 역사적으로 해상로를 장악한 세력이 세계의 무역과 통상을 좌우해왔으며,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지금의 미국에 이르기까지 무역의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국가들은 응당 그에 걸맞는 해군력을 보유해왔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미중패권경쟁도 군사력의 분야에서는 해군력의 대결이 부각된다.

해적이 두려워 헌납까지 했던 미국

미 해군은 19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빈약한 연안해군에 불과했다. 미 식민지 주민들은 독립전쟁에 앞서 대륙해군(Continental Navy)부터 창설하여 최소한의 전력을 갖춰나갔다. 그러나 세계 최강의 영국해군과 맞서 싸워야 했던 죠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파리에 있던 벤자민 플랭클린(Benjamin Franklin)을 통하여 프랑스 해군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 결과 프랑스 함대가 1781년 9월 5일 체서피크 해전에서 영국군을 격파함으로써 영국군의 추가적 증원을 막을 수 있었고, 결국 영국 육군은 1781년 10월 19일 미 독립군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독립전쟁에 앞서 대륙해군부터 창설하여 전력을 갖췄지만 결국 프랑스 해군의 도움을 요청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림은 미 대륙해군함으로 1775년 12월에 취역한 알프레드함의 모습이다. <출처: U.S.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그런데 미국은 독립이 이루자마자 대륙해군을 해체하고 보유했던 선박들을 팔아버렸다. 제헌의회가 더 이상 해군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협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의원들의 생각은 틀렸다. 바르바리 해적들에 의해 미국의 상선들이 약탈당하면서 무역에 위협이 가해졌던 것이다. 의회는 1784년 곧바로 호위함 6척의 구매를 승인했고, 1798년에는 해군성(Department of Navy)의 설립을 인가했다.

바르바리 해적들은 15세기말부터 19세기초까지 3백년간 북아프리카 일대를 거점으로 선박을 약탈하고 노예를 잡는 등 악행으로 악명을 떨쳤다. <출처: Heritage History>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한심스러웠던 것이었냐 하면 미국의 상선들은 바르바리 해적들의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독립 이전 영국 상선의 깃발을 달았을 때는 해적들이 감히 건드리지 못했지만, 독립 이후 더 이상 보호해줄 강력한 해군이 없었던 미국 상선들은 가장 인기 높은 나포의 대상이었다. 외교관 자격으로 파리에 있던 토마스 제퍼슨은 나포된 선박과 선원들을 석방하기 위해 여러 국가들과 접촉했는데, 스페인 정부가 협상을 도와주면서 제시한 해결책은 남달랐다. 나포를 막으려면 조공을 제공하라는 것이었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도 했던 미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토마스 제퍼슨은 나포된 자국 선원 석방을 위하여 만방으로 뛰어다니다가 결국 석방금을 통한 해결을 채택했는데, 결국 조공외교라는 굴욕적인 결과를 낳았다. <출처: Public Domain>

결국 제퍼슨은 모로코와 알제리에 조약을 제안했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거나 혹은 엄청난 비용의 요구가 뒤따랐다. 특히 알제리에 10년이나 억류되었던 미국 선원 115명의 석방에는 무려 1백만 불이 소요되었는데, 이는 1795년 당시 미 정부예산의 1/6에 해당하는 말도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런 사건들이야말로 미국이 해군력을 다시 추구하게 된 강력한 계기가 되었다. 물론 해군력이 생겨났지만, 양성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후에도 미국은 상선의 안전통행과 인질석방을 위해 매년 1백만 불을 계속 지급했는데, 이는 당시 기준으로 미 정부 지출의 10%에 해당하는 기준으로 알려진다.

전쟁 속에서 존재의미를 찾다

해양에서의 자신감은 독립 후 미국에서 필수적이었는데, 유럽에 대한 수출이야말로 생명선과도 같았다. 결국 토마스 제퍼슨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미국은 트리폴리 토후의 과도한 공납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트리폴리는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제퍼슨은 미 해군에게 대응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트리폴리 제1차 바르바리 전쟁(1801~5)으로 미국은 해군력으로 북서 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들에서 준동하는 해적들을 소탕했다. 이러한 경험은 미 해군은 물론 미국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한편 제퍼슨은 1802년 해군사관학교를 창설하기도 했다.

결국 미국은 해군력을 증강하여 토마스 제퍼슨이 대통령이 당선된 후 바르바리 해적과 전쟁에 나섰다. 제1차 바르바리전쟁으로 미 해군은 자신감을 갖고 자국의 이익을 지켜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영국이 나폴레옹 전쟁에 몰두하던 사이 미국은 영국 식민지인 토론토 등을 점령하면서 1812년 미영전쟁이 펼쳐졌다. 막강한 영국해군은 미국의 주요 항구들을 봉쇄했고, 이를 바탕으로 워싱턴 DC, 볼티모어, 메릴린드, 뉴올리언스, 루이지애나 등 주요 해안도시들을 점령했다. 그러나 미국의 호위함들은 단편적인 전투를 통하여 작은 승리들을 축적했고, 특히 레이크에리 전투에서 페리(Oliver Hazard Perry) 제독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북서부 제해권을 회복했다.

1812년 전쟁에서 미 해군은 레이크에리 전투에서 영국을 제압하고 승리의 기반을 마련했다. <출처: Murray Draper & Co.>

이후 미 해군은 정체성을 찾아가면서 조직을 점차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 의회는 예산에 엄격한 제한을 둠에 따라 함선의 크기에는 제약이 있었지만, 척수는 어느 정도 늘어남에 따라 점차 조직도 증편되기 시작했다. 우선 1812년 전쟁에서 급조된 체서피크베이 소함대(Chesapeake Bay Flotilla)나 소형포함을 모아서 활동하던 모기함대(Mosquito Fleet)가 있었지만 전후에 곧바로 사라졌다. 다만 1813년 창설되었던 뉴올리언즈전대(New Orleans Squadron)는 이후 카리브 해적들을 상대하면서 상선들을 보호했다. 1821년 태평양전대(Pacific Squadron)가 창설되어 페루의 독립을 도왔고, 미국인 소유 설탕농장이 번성하던 하와이에서 미국의 국익을 지켜냈다.

페리 함대의 일본원정은 일본에게 '쿠로후네(黒船)'에 대한 공포를 일으키면서 개항과 함께 메이지 유신의 계기를 제공했다. <출처: Public Domain>

한편 해적의 기승은 심각하여 1815년부터 1822년 사이 무려 3천여 척의 미국 상선이 카리브해에서 해적에 나포되었다. 이에 따라 1822년 서인도전대(West India Squadron)가 정식으로 창설되어 해적을 소탕하고 세미놀 전쟁으로 플로리다 원주민들을 정리했다. 1838년에는 국내전대(Home Squadron)가 창설되어 대서양의 상선보호를 담당하는 한편, 동인도전대(East India Squadron)가 창설되어 중국과의 교역에 대응했다. 동인도전대는 중국의 아편전쟁에서 미국민과 재산을 지켜냈고 1852년에는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의 원정으로 일본의 개항을 이끌어냈다. 한편 미국의 태평양 내해를 담당하는 태평양전대는 멕시코전쟁(1846~8)에서 캘리포니아를 획득하면서 임시정부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대양해군으로 깨어나다

19세기 중반이 되면서 미 해군의 군함들은 전 세계의 항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면서 미 해군은 분열됐다. 경험많은 사관들이 남부로 넘어갔고 노포크 해군공창에서는 군함 11척과 포 2천문이 노획되었다. 그럼에도 링컨 대통령은 남부 해상봉쇄령(Union Blockade)을 발령하였고 해군은 1861년말까지 해상봉쇄에 성공하여 남부의 경제가 무너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해군은 미시시피강을 따라 남부의 주요거점을 타격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북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남북전쟁은 세계최초로 철갑함(ironclad) 사이의 교전이 벌어지고 초기형 잠수함이 투입되는 등 미 해군의 역량을 키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남북전쟁은 철갑함(사진, 시티급 배런 데칼브함)과 잠수함 등을 등장시키면서 미해군에게 혁신의 계기를 제공했다. <출처: U.S. National Archives>

남북전쟁 직후 국내전대는 북대서양전대(North Atlantic Squadron)로 재편되었으며, 1868년 동인도전대를 대신하여 아시아전대(Asiatic Squadron)가 창설되어 중국과 일본과의 통상을 담당했고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남북전쟁 이후 1870년대에는 남북전쟁 시기의 철갑함들이 대부분 퇴역하면서 쇠퇴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1881년 가필드 행정부에 들어와서는 상황이 심각하여 당시 헌트(William H. Hunt) 해군성 장관은 해군력 증강을 건의했다. 당시 해군함 140척 가운데 작전 가능한 함은 불과 52척으로, 17척의 철갑함은 가운데 14척은 남북전쟁 시기의 노후함이었기 때문이다.

">마한은 자신의 저서 "해양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 1660-1783"을 통하여 해군력의 사상적 기반을 제시했다. <출처: Public Domain>

1882년 헌트의 예산증액 요청은 기각당했지만, 같은 해 이집트전쟁이 시작되자 의회는 1883년 남북전쟁 이후 최초로 신형함 건조를 승인했다. 특히 미 해군 최초의 전함인 텍사스함과 메인함도 건조를 승인받아 1889년부터 ‘백색 전대(White Squadron, 또는 Squadron of Evolution)’라는 미래형 부대를 창설할 수 있었다. 해군력에 대한 열망은 새로운 해군사상을 낳기도 했다. 해군대학장이던 마한(Alfred Thayer Mahan) 대령은 1890년 ‘해양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 1660-1783(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 1660-1783)’이라는 저서를 통해 국력과 해군력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면서 미국에 해양강국이라는 강력한 안보의 화두를 던졌다. 드디어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벗어나 세계로 향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인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해군성 차관보로 부임하면서 미 해군력 건설을 더욱 강화되었다. <출처: US National Archives>

마한의 교리는 해군성의 트레이시(Benjamin F. Tracy) 장관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그는 200척 해군의 건설계획을 제안했다. 그러나 의회가 이러한 과감한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아직 일렀고, 대신 1890년 해군건설법에 의하여 전함의 추가건조를 승인했다. 특히 해군력 증강에 열정적이던 젊은 정치인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가 1897년 해군성 차관보로 부임하면서 건강이 나빴던 롱(John D. Long) 해군성 장관을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했다. 특히 마한의 이론에 정통했던 루즈벨트는 최신 전함 위주로 해군력을 건설하는 한편, 맥킨리(William McKinley) 대통령이 스페인과의 전쟁을 결심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해군이 영토확장을 주도하다

1898년 결국 미서전쟁(Spanish American War)이 발발하면서 착실히 준비해온 미국의 해군력은 빛을 발했다. 루즈벨트 차관보는 이미 전쟁 시작 이전에 듀이(George Dewey) 제독에게 전쟁을 준비시켜, 아시아전대는 개전 이전에 홍콩을 출항하여 마닐라베이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에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카리브 전선에서는 전력을 북대서양전대와 유격전대(Flying Squadron)로 나누어 쿠바 상륙부대의 보호와 스페인 함대의 견제 임무를 수행했고, 특히 산티에고 해전에서 적 주력을 격파함으로써 완벽한 승리를 장식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마지막 식민지인 쿠바를 붙잡고 있던 스페인을 아메리카 대륙에서 축출했고, 태평양에는 괌과 필리핀이라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현대화된 미 해군 함대는 구형함 위주의 스페인 해군을 제압하면서 승리를 굳혔다. 그림은 1898년 5월 1일 아시아전대의 마닐라만 해전을 묘사한 것이다. <출처: US Naval History & Heritage Command>

그러나 당시 스페인 해군은 현대화에 실패하여 과거 무적함대의 영광은 사라진 지 오래였기에 현대적 유럽해군과 승부할 경우는 그 결과는 미지수 였다. 또한 미 해군은 자국 군항에서 무려 7천 해리나 떨어진 태평양에서 해전을 펼치는 위험함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해군력을 더욱 신중하게 건설해야 한다는 교훈이 도출되었다. 그리고 미 해군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전력건설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1901년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었다.

해군차관보를 지내면서 해군력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루즈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야심찬 해군력 증강사업이 지속되었다. <출처: US National Archives>

이미 해군차관으로서 해군력을 국력으로 바꾼 바 있었던 루즈벨트는 야심찬 해군증강을 기획하여 전함을 공격적으로 증강했다. 또한 조직개편도 꾸준히 착수하여 1902년 북대서양전대는 북대서양 함대로, 아시아전대는 아시아함대로 격상되었다. 1905년에는 유럽함대가 북대서양함대에 편입되었고, 1907년에는 남대서양전대까지 흡수하면서 북대서양함대는 대서양함대로 개편되었다. 이와 함께 태평양전대와 아시아함대 일부가 통합되어 태평양함대가 새롭게 창설되었다. 이에 따라 취임 당시 세계 6위였던 미해군 전력은 무려 2위까지 상승하여 미국은 영국 다음으로 강력한 해군력을 확보했다.

도쿄만에 입항하는 대백색함대. 미국은 대백색함대의 세계 순항에서 마지막으로 일본에 기항하면서 강력한 해군력을 과시하면서 기고만장한 일본에게 경고를 보냈다. <출처: Public Domain>

루즈벨트는 강력한 해군력을 강한 국력으로 바꾸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부드럽게 말하되 몽둥이는 큰 걸 들고 다니면 멀리 갈 수 있다.(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 you will go far.)”라는 자신의 말처럼 루즈벨트는 해군력을 마음껏 활용한 포함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특히 중미지역에 운하를 만들면 해군력을 활용하는 전략적 역량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니카라과 운하건설안을 중지시키고 프랑스로부터 파나마 지역을 구매했다. 당시 이 지역을 통치던 콜롬비아 정부에 대항하여 파나마 반군을 지원하여 독립시키고, 해군력을 파견하여 콜롬비아의 위협을 막으면서 장래 파나마 운하의 기반을 다졌다. 또한 최신 전함 16척으로 구성된 대백색함대(Great White Fleet)를 창설하여 1907년부터 전세계를 순항하면서 미 해군력을 과시하도록 했다. 특히 대백색함대는 1908년 10월 일본 요코하마에 기항하면서, 러일전쟁 승리 이후 기고만장해졌던 일본에게 경고를 보냈다.

해군력이 국력에 끼치는 영향

이렇듯 미 해군은 창설 초기부터 절대로 강한 군대가 아니었다. 국제교역의 중요성과 해군력의 상관관계를 몰랐던 정치인들의 눈에는 해군력이란 그저 예산의 낭비에 불과했다. 그러나 유럽이란 시장에 목숨을 걸고 있던 신흥공업국가로서 정체성을 깨달은 미국은 부지불식간에 해군력을 키우고 있었다. 더욱이 유럽으로부터 신대륙의 자유로운 권리를 보장하고 자유롭게 세계무역을 영유하기 위해서는 해군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강력한 해군력에 바탕한 루즈벨트의 'Big Stick' 독트린을 풍자한 윌리엄 알렌 로저스의 시사만화 <출처: amhistory.si.edu>

특히 미국도 제국주의 경쟁에 뒤늦게 참여하면서 해군력을 급격히 증강시켰다. 특히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는 자국의 최신 전함으로 구성된 함대를 전세계로 파견하면서 마음껏 자국의 해군력을 과시했다. 이를 통하여 미국은 제국주의 시대의 한 축을 차지하는 열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고, 추후 1차대전으로 영국의 영향력이 쇠퇴해가자 미국의 해군력이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분명 해군력은 손쉽게 건설할 수 있는 군사력이 아니며, 엄청난 비용이 소요된다. 그러나 세계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려는 국가라면 반드시 갖춰야 하는 힘이라는 점을 미 해군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저자소개

양욱 | 군사학 박사(군사전략)

해외에서 교육훈련과 보안업무를 수행해왔으며, 현재 국방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 한남대 국방전략대학원, 육군사관학교, 육군3사관학교 등에서 군사전략과 국방정책 등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국방안보포럼 WMD센터장, 국방로봇학회 대외협력부회장이자, 공군과 육군의 정책자문위원과 정부 평가위원으로 국방 및 안보정책에 관해 자문하고 있다. 본 연재 '무기백과사전'의 총괄 에디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