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막걸리, 문화가 되다

醉月 2009. 10. 21. 08:21

문화가 된 막걸리의 무한 진화

잘 말린 통밀을 으깨어 반죽한다. 반죽 덩어리를 틀에 넣고 면 보자기 따위로 덮고서는 발뒤꿈치로 30분 정도 꼭꼭 밟는다. 그 다음, 볏짚 등을 밑에 깔고 35℃ 정도 온도에서 보관한다. 너무 뜨겁지 않도록 살피면서 3주 정도 지나면 이 덩어리에 곰팡이가 핀다. 이게 막걸리 빚는 곰팡이균을 띄운 누룩이다.
이 누룩을 아주 되게 찐 밥(고두밥)에 넣고 버무린다. 깨끗한 물을 밥이 잠길 정도로 붓고 잘 섞는다. 이걸 항아리에 담아 겨울에는 5~6일, 여름에는 2~3일 정도 보글보글 발효시킨다. 밥알이 가라앉으면서 희뿌연 물이 떠오를 때쯤 삼베자루에 담아 꼭 짠다. 알코올 도수에 따라 물을 더 섞거나 하면서 술을 맞춰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진한 쌀뜨물 같은 액체가 바로 막걸리다.

   
막걸리 빚는 법을 거칠게 정리한 것이다. 20~30대 젊은이에게야 술 박물관에서나 접할 수 있는 낯선 이야기이지만, 1965년 박정희 정부가 쌀로 술 담그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을 펼 때까지만 해도 전국 집집마다 ‘숙지’하고 있던 ‘생활 레서피’였다. 김치 담그는 것처럼 집집이 고유의 ‘비법’이 대물림되었으므로 딱히 표준 레서피라 할 것도 없었다.

이제 이렇게 막걸리를 만드는 곳은 거의 없다. 부산 산성 막걸리 등 몇몇 술도가가 전통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막걸리를 만드는 대규모 양조장에서는 전통 밀누룩 대신 일본식 쌀누룩(입국)을 사용한다. 밀누룩은 다루기가 어려워 술이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누룩을 띄우는 일 역시 일본에서 개발된 제국기(누룩 곰팡이를 배양하는 기계)를 이용한다. 발효되는 곳 역시 항아리가 아닌 매끈한 스테인리스 통이고, 발효통 온도도 25℃가 넘지 않도록 자동 관리된다. 삼베자루도 옛말이다.  

 

돌아온 막걸리의 귀환

흥미로운 일이다. 옛 기술이 사라지는 마당에 막걸리는 하루가 다르게 우리 곁으로 돌아오고 있다. 젊은 여성의 술자리, 회사 회식, 일본 열도 등에서 막걸리 찬가가 울려퍼진 지 오래다. 편의점 판매량에서 막걸리가 와인을 앞질렀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 도대체 왜 막걸리가 인기를 끄는 걸까. 각종 매체의 보도 속에도 현상은 넘쳐나는데 납득할 만한 ‘분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만난 막걸리 전문가(양조장 장인·술 평론가·식품학자·기자 등)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도대체 왜 막걸리가 뜬 겁니까?”

대답과 해석은 다양했다. 등산 인구가 급격하게 늘면서 이른바 ‘하산주’로 막걸리가 애용됐다는 설명부터 효모와 유산균이 살아 있는 건강 발효식품이어서라는 과학적 이유까지(효모가 살아 있는-비살균- ‘탁주’인지, ‘살균 탁주’인지 구분하기 위해 막걸리 병 라벨을 살피는 건 이제 애주가들 사이에 기본이다). 일본에서 분 ‘맛코리’(막걸리의 일본식 발음) 열풍이 한국에 늦바람을 불러왔다는 설도 있고, 농경민족인 한국인 유전자에 막걸리가 각인돼 있기 때문이라는, 자못 비장한 해석도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각종 보도에서 흔히 나온 내용이다.  

술 품평가 허시명씨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간 해석을 내놓는다. 그는 요즘 술 문화가 ‘놀이’의 성격이 짙어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는 와인 열풍 영향이 크다. 와인이 유행하면서 포도의 품종과 테루아(토양)을 논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처럼 막걸리의 산지와 원료 등을 논하는 이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막걸리마다 누룩이 다르고, 재료가 다르고(밀이냐, 쌀이냐) 가장 중요한 ‘물 맛’이 다른 만큼 이야깃거리가 풍성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소백산 물에 진천 쌀로 만든 ○○막걸리는 전직 대통령 아무개가 즐겨 마셨다’라는 식의 ‘스토리텔링’이 가능해진 것이다. 기껏해야 오비냐 하이트냐, 참이슬이냐 처음처럼이냐 따위밖에 논할 수 없던 소주·맥주 문화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실제로 각 지역의 이름난 막걸리를 맛보기 위해 ‘막걸리 투어’를 떠나는 마니아도 늘고 있다.

 

인기 비결은 ‘맛’과 ‘알코올 도수’
좀 더 원초적인 분석도 있다. “맛있어서다.” 천안양조장 이상철 이사는 막걸리 열풍이 거센 까닭을 ‘맛’ 때문이라고 본다. “지구상에 알코올 도수가 11도 이하로 낮은 술은 막걸리와 맥주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단맛·신맛·탄산맛을 동시에 가진 술은 막걸리밖에 없다.”
일본에서 막걸리가 인기를 끄는 비결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에도 탁주(도부로쿠)가 있다. 우리 막걸리와 비슷한 방법으로 만들지만, 물을 섞지 않아 알코올 도수가 15도나 된다. 우리 막걸리(6~8도)보다 두 배 이상 높다. 언뜻 맛보면 거칠고 투박한 느낌이다.

   
양조 시설이 발달했어도 막걸리를 빚을 때는 늘 주의를 요한다. 누룩을 섞기 전 고두밥(위)
국순당연구소 신우창 박사는 “일본 탁주는 담백하면서 도수는 높아 여성이 마시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 막걸리는 단맛과 신맛이 풍부하고 탄산감이 있는 순한 술이어서 여성이 마시기 편하다”라고 설명했다. 사케 소믈리에 임은영씨도 “일본 여성은 ‘도부로쿠는 아저씨 술’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 막걸리는 순하고 맛있어서 그런 거부감이 없다”라고 비슷한 분석을 내놓았다.
간단히 말해 우리 막걸리가 맛있으면서도 알코올 도수는 낮은, 부담 없는 술이라는 것이다. 그중 눈여겨볼 것은 ‘단맛’이다. 등산으로 땀 흘린 뒤 마시는 막걸리가 유난히 맛있는 것도 이 단 맛이 크게 작용한다. 일부 산꾼은 아예 막걸리에 사이다를 섞은 ‘막사이다’를 즐길 정도다. 여기에 막걸리 맛의 비밀 하나가 숨어 있다. 바로 감미료다. 

막걸리의 재료는 뭘까. 전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한 막걸리에 표시된 성분을 보자. 백미 90%, 이소말토올리고당 10%, 첨가물 아스파탐 0.01133%, 구연산 0.005% 등이다. 아스파탐(aspartame)은 인공 감미료다. 단맛이 설탕의 200배에 달해 조금만 첨가해도 음식 맛을 바꿔놓는다. 결국 올리고당까지 합하면 막걸리 성분의 10% 이상이 단맛을 내는 요소로 구성된 셈이다. 전문가들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막걸리 중 아스파탐을 쓰지 않는 제품은 거의 없다고 지적한다. 한 주류 전문 기업이 최근 내놓은 생막걸리에도 아스파탐이 들어간다.

그럼 본디 우리 막걸리는 어떤 맛이었을까. 옛 문헌에 그 힌트가 나와 있다. 주영하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조선 중기의 문인인 장유(張維)는 ‘음주에 대한 나의 해명’(飮酒自解)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조렸다. “시골 막걸리 시금털털하긴 해도, 그 속에 묘한 맛 들어 있네.”  

이런 전통의 맛을 간직한 막걸리는 없을까. 있다. 허시명씨가 ‘이것이 본래 우리나라 막걸리 맛’이라고 평가한 송명섭막걸리(전북 정읍)가 그렇다. 인공감미료 없이 빚은 이 막걸리는, 처음 먹어본 사람은 흠칫 놀랄 만큼 밋밋한 맛을 자랑한다. 단맛에 길들여진 세대로서는 ‘대략 난감’한 맛일 가능성이 높다. 기자 역시 송명섭막걸리를 처음 마셔보고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야말로 ‘시금털털한’ 맛이었다.    

문제는 이런 전통 막걸리가 지금 대중의 입맛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전통주진흥협회 조재선 회장은 “요즘 술은 너무 달다. 술은 기본적으로 쌉싸래해야 한다”라고 지적하지만, 주류업계에서는 단맛에 길든 소비자의 입맛을 무시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한 주류 기업 관계자는 “지금으로서는 감미료를 넣지 않은 막걸리는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라며 난색을 표했다. 전통적 시각으로 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 하는 이도 있다. 이상철 이사는 아예 “막걸리를 음료로 볼 필요가 있다”라며 이렇게 주장한다. “본래 막걸리는 농사 짓다 허기를 채우고 힘을 돋우기 위해 마셨던 음료에 가까웠다. 술이 아니라 음료로 보면 어느 정도 단맛이 용인될 수 있다.” 주류업계의 한 컨설턴트도 “어차피 우리나라 술에 감미료는 필수다. 막걸리뿐 아니라 소주에도 각종 감미료가 들어가지 않나. 감미료 막걸리를 배격하기보다는 좀 더 다양한 맛의 막걸리를 시장에 내놓아 소비자의 입맛을 업그레이드시킬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결국 상당수 전문가는 막걸리의 단맛과 낮은 알코올 도수가 인기의 큰 비결 중 하나임에 동의하는 셈이다. 그래도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은 더 있다. 우리가 막걸리에 대해 가졌던 ‘안 좋은 추억’이다. 흔히 막걸리는 ‘머리가 아프고, 속이 불편한 술’로 여겨졌다. 대체 무엇이 바뀌었기에 막걸리의 이미지가 달라진 걸까. 
1980년대까지 막걸리의 주원료는 밀가루였다. 정부가 쌀로 막걸리 빚는 것을 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밀 막걸리는 유통 기한이 짧다. 사흘만 지나도 시큼한 맛이 난다. 일부 밀주업자들은 신 맛을 없애기 위해서 가성소다 따위를 술에 넣었다. 높은 온도에서 발효시키는 것도 문제였다. 냉장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양조장에서 한여름 실온 상태로 막걸리를 발효시키곤 했다. 그러면 메탄올, 프로파놀 등 숙취를 유발하는 물질이 많이 생긴다. 더욱이 주류 판매 지역제한 때문에 도시 지역은 늘 공급부족 상태인 반면 시골에는 술이 남아돌았다. 결국 일부 업자들이 불법으로 막걸리를 도시로 유통하는 과정에서 며칠씩 묵은 ‘질 나쁜’ 막걸리가 술꾼들에게 공급된 것이다. 널리 알려졌듯 발효를 촉진하기 위해 카바이트를 사용한 것도 문제였다.   
 
이런 술을 마시고 뒤끝이 멀쩡하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1990년 쌀 막걸리 제조가 허용되면서 새로운 막걸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서울탁주 등 대형업체가 양조시설을 현대화하면서 한층 더 위생적인 막걸리가 보급됐다. 2001년 주류 판매 지역 제한이 풀리면서 업체 간 경쟁이 유발된 까닭도 컸다.

   
발효통에서 익어가는 막걸리


결국 ‘카바이트 밀 막걸리’가 아닌, 현대화된 쌀 막걸리를 ‘생애 첫 막걸리’로 접한 이들이 막걸리를 선입견 없이 접하게 된 것이다. 임은영 사케 소믈리에는 “막걸리에 대해 안 좋은 추억을 가진 이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그런 기억이 없는 젊은 여성이 막걸리에 대해 더 개방적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라고 설명했다. 
 
‘막걸리 인프라’는 아직 태부족

이제 마지막 질문. 막걸리 열풍이 그저 한때의 트렌드로 그치고 마는 것일까, 아니면 지속 가능한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는 우리 사회 전반의 ‘막걸리 인프라’를 들여야봐야 한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에는 막걸리 전문가가 태부족이다. 과거 양조장에서 ‘머슴 취급’ 당하던 무학(無學)의 막걸리 기술자들이 지금도 상당수 양조장의 공정을 책임지는 형편이다. 막걸리와 관련한 연구나 논문이 전무한 것도 당연하다(최근 일본인이 펴낸 한국 막걸리 술도가 기행 서적이 인기를 끄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이처럼 축적된 연구가 별로 없다보니 막걸리가 ‘스토리 있는’ 술의 반열에 오르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어떤 누룩을 쓰는지, 어떤 통에서 발효시키는지, 물 맛은 어떤지, 술도가의 내력이 어떠한지 등 발굴하고 집대성해야 할 분야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질 나쁜 원료 문제도 약점이다. 지금도 대다수 양조장에서는 가격이 싼 수입 쌀을 사용한다. 아스파탐 등 첨가물 표시 없이 ‘백미 100%’라고만 원료를 공개한 막걸리 업체도 수두룩하다. 

마케팅이나 디자인 면에서도 갈 길이 멀다. 관계자들은 ‘막걸리=싼 술’이라는 인식부터 깨뜨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좋은 원료를 사용한 고급 막걸리도 시장에서 받아들여져야 막걸리의 다양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싸구려 플라스틱 통으로 성의 없이 만든 제품 디자인도 뜯어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퓨전요리사 김학수씨는 “한 이태리 요리사가 플라스틱 병에 담긴 막걸리를 보더니 ‘어떻게 저걸 손님에게 내놓을 수 있느냐’라며 걱정하더라. 일본 청주처럼 유리병에 넣고, 라벨에도 원산지 표시를 강화하는 등 다양한 정보를 담아 내놓을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다행인 것은 ‘양질 전환’의 조짐이 보인다는 점이다. 10월14일 문을 여는 ‘막걸리학교’는 막걸리 품평가를 꿈꾸는 이들의 수강 신청이 쇄도하면서 강좌 접수 3일 만에 인원이 꽉 찼다. 와인에서 막걸리로 관심 영역을 바꾸는 전문가도 하나둘씩 는다. 전국 750여 개에 이르는 양조장에서 365일 단 하루도 빠짐없이 술독을 살피며 신명을 바쳐 술을 빚는 ‘장인’의 삶도 다시금  조명되고 있다. 이들이 곧 우리 술 문화를 맛깔스럽게 숙성케 할 ‘누룩 곰팡이’들이다. 

 

“막걸리에 미친 사람 더 많이 나와야”

막걸리 열풍을 들여다보기 위해 술 전문가 두 명이 만났다. 오랫동안 전통주 연구에 골몰해온 조재선 한국전통주진흥협회 회장, 술 품평가 허시명씨(막걸리학교 교장)가 그들이다. 막걸리 붐을 이어가기 위한 해법 등을 두고 머리를 맞댔다.  

사회: 왜 막걸리가 인기를 끌게 됐을까.

   
조재선 한국전통주진흥협회 회장
조재선: 소비자 조사 등 구체적인 근거가 없어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곤란하다. 하지만 막걸리는 소주보다 훨씬 먼저 인기를 끌던 술이다. 일제시대에 막걸리가 획일화되고 식사 패턴이 서구화되면서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와인 열풍에 대한 반발, 우리 것에 대한 관심, 유산균과 효모가 살아 있는 ‘웰빙 술’이라는 인식 때문이라 본다. 

허시명: 한국인은 술을 가지고 논다. ‘소맥 폭탄주’를 마시는 게 놀이문화 아닌가. 그러나 와인 마시는 사람은 술을 섞어 마시지 않는다. 이 와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논하는 것이 놀이다. 그런데 막걸리도 와인처럼 술의 내용을 두고 이야기할 수 있는 술이다. 뭘로 만들었는지, 어느 지역 술인지 등. 막걸리는 현대 소비자의 문화 다양성을 충족하는 경향이 있다. 기업 임원 같은 이들도 외국인에게 대접할 수 있는 우리 술로 막걸리를 꼽는다. 

사회: 과거 막걸리는 뒤끝이 안 좋은 술로 인식돼왔다. 오늘날 막걸리가 뭔가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인가.

조재선: 막걸리는 가장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술이다. 누룩과 곡물만 있으면 며칠 만에 만든다. 그러다보니 다른 술에 비해 트림이 나오고, 배가 부른 단점이 있었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는 이게 좋은 요건이었지만, 현대인은 싫어한다. 옛날 막걸리는 품질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다. 누룩  냄새가 너무 심하고, 재료 관리도 엉성했다. 하지만 이제 기술 발전으로 적당한 향과 탄산감을 주게끔 바뀌었다. 

   
허시명 술 품평가
허시명: 과거에는 양조장 간에 경쟁이 없었다. 좋은 술을 만들어 차별화하지 않았다. 포천막걸리가 인기가 좋다보니 타 지역에서 만든 가짜 술을 만들어 내다 팔 정도였다. 하지만 2001년 주류 판매 지역제한이 풀리면서 무한경쟁이 시작됐다. 양조장 장인들이 질 높은 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게 된 것이다. 잣 막걸리, 복분자 막걸리 등 차별화된 막걸리가 등장하면서 소비자의 입맛도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사회: 좋은 막걸리가 지녀야 할 요건은 뭔가.

조재선: 모양·향·맛·촉감 등이 모두 중요하다. 술이 너무 묽거나 진하면 안 된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뒷맛이 깔끔해야 한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맛’이라고 할까. 단맛·감칠맛·쓴맛도 적절하게 조화되어야 한다. 첫맛은 쓰고, 뒷맛이 달콤해야 좋다. 누룩 냄새가 심하게 나도 좋지 않다. 쌀도 중요하다. 화학 비료로 키운 쌀과 유기농 쌀은 엄연히 맛이 다르다.

허시명: 맞다. 재료를 투명하게 공개할 필요가 있다. 과일 막걸리라면 어떤 과일을 썼는지 공개해야 한다. 좋은 재료를 쓰고, 그 재료 본연의 맛이 잘 드러나면 좋은 막걸리다. 전통에 너무 연연할 필요도 없다. 술은 과학이다. 우리 나름의 양조 기술이 변형되면서 만들어진 게 지금 우리가 먹는 막걸리다. 전통에 집착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조선시대에 먹던 게 전통주인지, 일제시대에 먹던 게 전통주인지···. 과거 일방적으로 먹을 수밖에 없던 밀 막걸리로부터 벗어나 차츰 다양한 술을 접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우리 술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두 사람이 만났다. 조재선 한국전통주진흥협회 회장(왼쪽)과 허시명 술 품평가(오른쪽).
사회: 막걸리 붐을 이어가려면 살펴봐야 할 일이 많을 것 같다.

조재선: 술 전문가를 체계적으로 길러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양조학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없다. 정부에서 대학에 양조학과를 만든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졸업해서 취업할 곳도 마땅치 않다. 국순당연구소 등에 연구기관이 관련 연구자를 통털어도 전국에 10명이 안 될 것이다. 전국에 술 장인이 많이 있지만, 모두 따로 논다. 그들의 노하우가 데이터베이스화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한동안은 막걸리에 미친 사람이 더 나와서 그런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 

허시명:  막걸리 양조 공정을 좀 더 규격화·표준화해야 할 것이다. 가장 좋은 제조법을 일반화해서 그걸 토대로 품질관리에 힘을 써야 한다. 더불어 가격과 내용 면에서 다양한 술이 쏟아져나와야 한다. 제품 디자인을 개선하는 등 상품으로서 가치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대담 내내 두 전문가가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이 있다. 그동안 우리 양조업계가 좋은 술 만들기에 게을렀다는 것이다. 지역에서 주류 판매를 독점하는 등 제도적 혜택에 안주하며 돈만 벌어들였다는 것이다. 정부 역시 세금 걷을 생각만 했지, 아무런 뒷받침을 해주지 않았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막걸리 바람은 이제 막 불기 시작한 건지도 모르겠다.

 

막걸리와 환상의 마리아주는?

막걸리의 세계화를 고민하는 이들이 염려하는 대목 종 한 가지는 딱히 어울리는 안주가 없다는 점이다. 워낙 농사일 중간에 힘을 돋우기 위해 먹던 술이라 안주 문화가 협소하다. 기껏해야 김치와 파전을 떠올리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막걸리가 인기를 끄는 일본에서도 안주는 대부분 ‘지짐이’류다.

업계 전문가들 생각도 마찬가지다. 파전, 두부김치 등 막걸리는 기본적으로 한식과 어울리는 음식이라는 지적이다. 여기에 젓갈이나 홍탁과 같은 발효식품이나 낙지구이 등 매콤한 음식이 더해질 수 있다. 다양한 나물도 막걸리와 잘 어울린다. 한 요리사는 “막걸리가 고기구이 등 서양 음식문화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술이 되기는 어렵다. 다만 쌀을 주식으로 삼는 아시아권에서는 통할 수 있으리라 본다”라고 말했다. 세계화하기에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이야기다. 

   
‘막걸리 식초에 잰 고등어 초회’와 찹쌀가루를 입혀 부친 호박전


그럼에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이들은 있다. 가령 서울 홍대앞 한 막걸리 레스토랑에서 내놓은 ‘치즈 위에 올린 젓갈 모듬’ ‘막걸리식초에 잰 고등어 초회’ 등이 그렇다. 얼핏 억지스러운 조합 같지만 의외로 막걸리 마니아 사이에서 평가가 괜찮은 편이다. 호박과 다른 채소들에 찹쌀가루를 묻혀 튀긴 업그레이드 호박전도 인기다. 레스토랑 관계자는 “막걸리와 어울리는 안주를 찾는 일은 요리사로서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일이다. 손님들이 막걸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뛰어넘었듯 요리사도 새로운 음식을 꾸준히 개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호프식 생맥 막걸리를 아시나요?

충남 천안시 구성동에 있는 천안양조장 마당에는 눈에 익은 기계 한 대가 있다. 얼핏 보면 영락없이 생맥주 따르는 기계 같지만, 몇 해 전 이상철 이사가 개발한 ‘생막걸리 기계’다. 이 기계는 막걸리를 밀봉 용기에 담아 생맥주처럼 따라 마실 수 있도록 했다. 밀봉해 잡균이 들어가지 않으므로 완전 숙성된 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 시중에 나오는 막걸리는 유통 기한을 고려해 미숙성 상태에서 출고된다. 

그러나 이상철 이사의 ‘발명품’은 만들자마자 벽에 부딪쳤다. 법규상 탁주 유통 용량이 ‘2ℓ 미만’으로 제한됐기 때문이다. 소주도 4ℓ짜리 담금주가 있고, 맥주도 5ℓ짜리 케그가 나오는 마당인데 막걸리만 그렇다. 1970년대 막걸리가 많이 팔리던 시절, 세무 당국에서 탈세를 막기 위해 2ℓ 미만의 병입된 술만 유통을 허가했기 때문이다. 요즘도 가끔 볼 수 있는 20ℓ짜리 대형 통(일명 ‘말통’)은 엄연히 불법이다. 진화한 막걸리의 출현을 제도가 막아서는 형국이다.

그럼 막걸리를 맛있게 먹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막 출고된 막걸리를 구입해 상온에서 2~3일, 냉장고에서는 5일 정도 더 숙성시킨 뒤 마시는 것이다. 이상철 이사는 “생막걸리의 경우 좀 더 오래 유통시키기 위해서 80%쯤 발효된 상태에서 출고한다. 출고된 뒤 5일쯤 지난 막걸리가 탄산감도 적당하고, 목넘김도 부드러워 가장 맛있다”라고 말했다.

   
천안양조장 이상철 이사가 생막걸리 기계에서 술을 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