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대한민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

醉月 2008. 10. 7. 19:34
  대한민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 - 충북 괴산 선유동 
 人心과 山水 좋고 사람 때가 덜 묻은 곳
 
편집자주 : 이 글은 <대한민국에서 살기 좋은 곳 33>의 저자가 직접 전국 곳곳을 돌아본 후, 자기 자신이 가장 살고 싶은 곳으로 충북 괴산을 택해 정리한 글이다.

[교통]
괴산군 청천면이나 증평에서 3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금평리 삼거리에서 32번 지방도를 만나서 5km쯤 가면 화양동에 닿고 선유동은 그곳에서 멀지 않다.

辛正一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걷기 대표
⊙ 1954년 전북 진안 출생.
⊙ 現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이사장.
⊙ 저서 : <신정일의 한강역사문화탐사> <다시 쓰는 택리지 1~5> <한국사의 천재들>(공저)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 고을을 가다 1~3>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 <영남대로>
    <삼남대로> <대한민국에서 살기 좋은 곳 33> 등 다수.
<선유동 마을 전경.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이 땅에 사대부가 살 만한 곳”으로 선유동을 꼽았다.>

“군자는 살 만한 곳을 반드시 가려서 택한다.”(공자)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관심사는 비슷하다. 먹고살기가 팍팍하면 그저 밥 세끼 굶지 않고 살기를 갈망한다. 그러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좋은 곳에 집 짓고 건강하게 사는 것을 원하게 된다.
 
  좋은 땅이란 어디일까. 간단하다.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 그곳이 좋은 땅이다. 바로 ‘내가 가서 머물러 있을 때 마음이 가장 편안해지는 곳’이다.
 
  “찾아 헤매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발견을 해야 할 것이며, 판단을 할 것이 아니라 보고 납득해야 할 것이며, 받아들이고 그 받아들인 것을 소화해 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본성이 삼라만상과 유사하며, 삼라만상의 한 조각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금강산 이남 가장 빼어난 山水”
 

선유동 계곡을 따라 이어진 소나무 숲길.

  독일의 작가 헤르만 헤세의 말이다. 나는 몇 십 년간에 걸쳐 이 나라 산천을 돌아다녔다. 자연의 신비로움에 자연스레 눈을 떴고, 어느 순간 나도 하나의 자연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러다 내가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도 괜찮겠다고 여겨지는 곳을 행운처럼 만났다. 바로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의 仙遊洞(선유동)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역사에 한 획을 그은 李滉(이황)과 李浚慶(이준경), 宋時烈(송시열) 등 수많은 대학자들이 즐겨 찾았으며, 그들이 오래도록 代(대)를 이어 살고자 했던 곳이다.
 
  “이 땅에 사대부들이 살 만한 곳은 어디인가.”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선유동을 선택했다. 그는 이곳을 이렇게 설명했다.
 
  “칠성대 서쪽으로 嶺(영) 등성이를 넘으면 外仙遊洞(외선유동)이 되고, 조금 내려가면 파곶이다. 골이 깊숙하고 큰 시냇물이 밤낮으로 돌로 된 골과 돌벼랑 밑으로 쏟아져 내리면서, 천 번 만 번 돌고 도는 모양은 다 기록해낼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금강산 만폭동과 비교하여 웅장한 점은 조금 모자라지만, 기이하고 묘한 것은 오히려 낫다 한다. 대개 금강산 다음으로는 이만한 水石(수석)이 없을 것이니, 당연히 三南(삼남) 제일이 될 것이다.”
 
  이곳은 본래 청주군 청천면의 지역으로 소나무가 무성해 ‘松面(송면)’이라 불렀다. 송면리는 조선 宣祖(선조) 때 朋黨(붕당)이 생길 것을 예언했던 東皐(동고) 이준경이 장차 일어날 임진왜란을 대비, 자손들의 피란처로 지정해 살게 했던 곳이다.
 
  이준경은 廣州(광주) 사람으로 고려 判典校寺事(판전교시사) 遁村(둔촌) 이계집의 후손이다. 어려서 黃孝獻(황효헌)에게 <소학>을 배우고 조금 자라서는 종형 延慶(연경)을 좇아 靜庵(정암)의 학설을 들었다. 검소하여 오락을 물리치고 오직 글 읽는 것으로 낙을 삼았고, 권태로워지면 글씨를 익히며 말하기를, “이 마음으로 하여금 잠시도 해이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했고, 어떤 때는 활을 쏘며 말하기를, “四肢(사지)로 하여금 安逸(안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후에 영의정을 지냈다. 그가 정승이 되자 남명 曺植(조식)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바라건대 공은 義(의)로 솟기를 소나무와 같이 하여도 아래로 뻗기를 칡넝쿨과 같이 넝쿨지지 마시오.” (<德川師友錄(덕천사우록)> 중에서)
 
  그는 남명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정사를 처리해 당시 영상 중에서 업적이 가장 많았다는 평을 받았다. 나이 74세에 유명을 달리한 후에는 忠正(충정)으로 시호를 받고 선조 廟庭(묘정)에 배향됐다.
 
  이준경은 동서 분당이 되기 전에 붕당 출현을 예언했던 인물이다. 1571년(선조 4년) 당시 영의정이던 이준경이 李珥(이이)를 중심으로 붕당의 조짐이 있자 죽음에 앞서 유차를 올렸다.
 
  “지금 벼슬아치들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붕당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큰 문제로서 나중에 반드시 나라의 고치기 어려운 환란이 될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접한 栗谷(율곡) 이이는 소를 올려 변명했다.
 
  “조정이 맑고 밝은데 어찌 붕당이 있겠습니까? 이는 임금과 신하를 갈라 놓으려 하는 것이옵니다. 사람이 죽음에 임해서는 말이 착한 법인데 이준경은 죽음에 이르러 그 말이 악하옵니다.”
 
  율곡이 그 자신을 변호하면서 이준경을 비판하자 삼사에서는 율곡의 편을 들어 이준경의 벼슬을 추탈하기 위해 탄핵했다. 그때 그런 움직임에 반대하고 나섰던 사람이 西厓(서애) 柳成龍(유성룡)이었다. 유성룡은 “대신이 죽음에 임하여 올린 말에 옳지 못한 것이 있으면 그 말을 물리치는 것은 가능하지만 죄까지 주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라며 이준경을 변호했다.
 
  결국 이준경의 예언이 들어맞아 그가 죽은 뒤 4년 만에 乙亥分黨(을해분당)으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된다. 율곡 이이는 이준경을 비판했던 것을 부끄럽게 여겨 동서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1589년 10월 조선 역사상 가장 큰 역모사건으로 ‘정여립 사건’이라고 일컬어지는 己丑獄死(기축옥사)가 일어나고 3년 뒤에 미증유의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율곡은 그 뒤 <석담일기>에서 이준경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공이 정승이 되어 인심을 진정시키려고 힘써서 시설하는 것이 없으니 士林(사림) 중에 부족하게 여기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淸德(청덕) 있어 문에 뇌물이 없으니 혹은 ‘어진정승’이라 칭하였다.”
 
 
  이준경과 이황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
 
  ‘솔면’이라고 부르는 송면리에는 이준경이 그 자손들을 데리고 집을 짓고 살았다는 ‘이 동고 터’ 또는 ‘이정승 터’라 불리는 집터가 남아 있다. 그의 자손들이 거처했던 선유동 부근은 다른 지역과 달리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 솔면 서남쪽 삼거리는 청천, 상주, 괴산으로 가는 세 갈래 길이 있다. 솔면 남쪽에는 예전에 숲이 우거졌었다는 숲거리가 있고 솔면의 서쪽에 있는 소는 가래나무가 있어서 ‘가래소’라고 부른다.
 
  화양천 상류에 있는 선유동 九曲(구곡)은 신라 사람 孤雲(고운) 崔致遠(최치원)이 이곳을 逍遙(소요)하면서 선유동이라는 명칭을 남긴 데서 유래된 곳이다. 조선시대 퇴계 이황은 칠송정에 있는 함평 이씨 댁을 찾아왔다가 이곳 비경에 사로잡혀 아홉 달을 돌아다닌 뒤 아홉개의 이름을 지어 글씨를 새겼다.
 
  주자학을 창시한 朱熹(주희)는 성리학의 탐구에 이상적인 장소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계곡으로 보았다. 그는 그러한 형세를 갖춘 계곡을 중국 남부에서 발견한 뒤 武夷九曲(무이구곡) 이라고 지었다. 그 뒤 1곡에서 9곡에 이르는 물의 굽이마다 그 모양새에 합당한 이름을 붙인 뒤 성리학의 경지에 비유했다. 이황을 비롯한 조선의 선비들은 그것을 본받아 아름다운 산천에 구곡을 지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이이의 석담구곡과 송시열의 근거지였던 화양동구곡이다.
 
  괴산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이곳은 30m 높이의 커다란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고 바위에 ‘仙遊洞門(선유동문)’이라는 글씨가 음각된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곳에서부터 李退溪(이퇴계)가 이름 지은 선유구곡이 펼쳐져 있다. 바위가 깎아지른 듯 하늘에 솟아 있는 驚天壁(경천벽), 옛날에 암벽 위에 청학이 살았다는 鶴巢岩(학소암)이다. 학소암 위에 있는 바위로 화로처럼 생겨서 燃丹爐(연단로)라고 부르는 이곳은 옛날에 신선이 약을 달여 먹었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臥龍(와룡)이 물을 머금었다 내뿜는 듯이 급류를 형성하여 폭포를 이룬 곳이 臥龍瀑(와룡폭)이고 방석같이 커다란 모양의 바위가 爛柯臺(난가대)다. 바둑판의 형상을 한 커다란 암반인 棋局岩(기국암), 거북같이 생긴 龜岩(구암), 두 바위가 나란히 서 있고 뒤에는 큰 바위가 가로놓여 그 사이에 석굴이 있는 隱仙岩(은선암) 등이 선유동구곡으로, 주위의 수석층암과 노송이 어우러져 세속과는 거리가 먼 이상향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중 난가대와 기국암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서려 있다. 조선 명종 때의 일이다. 한 나무꾼이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하러 갔다가 바위에서 바둑을 두는 노인들을 발견하고 가까이 가서 구경을 했다. 한 노인이 그에게 “여기는 신선들이 사는 선경이니 돌아가라”고 했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나무꾼이 옆에 세워둔 도끼를 찾았는데 도끼자루는 이미 썩어 없어진 뒤였다.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니 낯 모르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누구인가 물었더니 그의 5대 후손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간 날을 헤아려 보니 그가 바둑 구경을 한 세월이 150년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도끼자루가 썩어 있던 곳을 난가대라고 불렀고 노인들이 바둑을 두던 곳을 기국암이라고 부르게 됐다.
 
  그보다 더 재미있는 전설이 서린 곳이 은선암이다. 옛날 하늘에서 선녀가 이곳으로 내려와 목욕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멀리서 보고 있던 총각 나무꾼이 선녀가 벗어 놓은 옷을 숨겼다. 결국 그 선녀는 돌아가지 못한 채 나무꾼과 살게 되었다. 대부분의 전설들은 나무꾼과 선녀가 아들 딸 잘 낳고 살다가 총각이 감춰 두었던 옷을 내주자 곧바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 은선암의 전설은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자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깨어 보니 꿈이었고 그 사이 그가 백발의 노인으로 변해 있더라는 것이다.
 
  시간의 무상함이 여러 가지의 전설로 남아 있는 선유동에는 이름난 바위들이 많이 있다. 바위 위에 큰 바위가 얹혀 있어서 손으로 흔들면 잘 흔들리는 흔들바위, 바위에서 물이 내려가는 것과 같은 소리가 들린다는 바위는 ‘울바우’다. 울바우 옆에 있는 바위로 사람의 배처럼 생겨서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바위가 ‘배바우’고, 근처가 모두 석반인데 이곳만 터져서 문처럼 되어 봇물이 들어온다는 바위는 ‘문바우’라고 불린다. 또한 큰 소나무 일곱 그루가 정자를 이룬 칠송정터 등이 이곳 송면리의 선유동을 빛내는 명승지다.
 
  공자는 <논어>에서 “智者(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仁者(인자)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動的(동적)이고 인자는 靜的(정적)이며, 지자는 낙천적이고 인자는 장수한다”고 했다. 산과 물이 아름다운 이곳은 그 둘을 모두 겸비한 곳이다.
 
  이곳 선유동에 남아 있는 仙遊亭(선유정) 터는 220여년 전에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던 정모라는 사람이 창건하고 八仙閣(팔선각)이라고 이름 지었고, 그 뒤에 온 관찰사가 선유정으로 고쳤다. 지금은 사라지고 그 터만 남아 있다.
 
  선유동에서 화양천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아직도 尤庵(우암) 宋時烈(송시열)의 자취가 진하게 남아 있는 화양동구곡에 이른다.
 
  “華陽洞(화양동)은 파곶 아래쪽에 있는데, 파곶 물이 여기에 와서는 더욱 커지고 돌도 또한 기이하다. 우암 송시열이 주자의 운곡정사를 본떠서 그 가운데 집을 지었다. 또 주자가 大義(대의)를 회복하던 일을 모방하여, 洞中(동중)에서 明(명)나라 神宗(신종) 황제를 제사하다가 후일에는 사당을 세워 萬東廟(만동묘)라 하였다.”(<택리지> 중에서)
 
화양계곡 주변에 있는 송시열의 사당.

 
  화양동구곡에 얽힌 내력
 
우암 송시열 영정.

  1975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화양동 계곡은 원래 청주군 청천면의 지역으로, 黃楊木(황양목)이 많아 黃楊洞(황양동)이라 불리었다. 그러다 孝宗(효종) 때에 이르러 우암 송시열이 이곳으로 내려와 살면서 華陽洞(화양동)으로 고쳐 불렀다.
 
  벼슬에서 물러난 송시열은 곧바로 이 화양동에 들어앉아 암서재를 지어 글을 읽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때 송시열은 화양동계곡의 기이하고 아름다운 곳 아홉 군데에 이름을 붙이고 화양구곡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 노론의 聖地(성지) 중의 성지였던 華陽洞書院(화양동서원)과 만동묘가 있다.
 
  화양동서원은 1695년(숙종 21년)에 이곳에 머물며 후진을 양성했던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해 그의 문인인 권상하, 정호 등의 노론계 관료와 유생들이 함께 세웠다. 나라 안 44개에 이르는 송시열 제향의 서원 가운데 대표적인 서원이 된 화양동 서원은 1696년에 사액을 받았다.
 
  영조 때에 송시열이 문묘에 배향되자, 이 서원의 위세는 날로 더해져 국가의 물질적 지원은 물론 유생들이 땅을 기증하여 강원도를 비롯한 삼남 일대에 토지가 산재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서원은 민폐를 끼치는 온상으로 변해 갔다. 제수전 징수를 빙자, 각 고을에 보내는 이른바 華陽墨牌(화양묵패)를 발행해 때로는 官令(관령)을 능가할 정도였다. “서원의 제수 비용이 필요하니 어느 날까지 얼마를 봉납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는 수령들에 대해서는 통문을 보내 축출했다. 福酒戶(복주호)와 福酒村(복주촌)을 운영하며 양민들에게 避役(피역)을 시켰다. 또 그 대가로 돈을 거둬들였고 잘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사형을 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폐습이 심화되자 1858년 영의정 김좌근이 복주촌 폐지를 요청했다. 1871년, 노론사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원이 철폐됐다.
 
  당시 당쟁의 폐해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알려주는 장소가 남아 있다. 암서재 바로 근처에 있던 일명 큰절이라고 부른 煥章寺(환장사)가 바로 그곳이다. 화양동서원이 한창 드날리던 시절 이 절의 한 스님은 이곳에 들르는 사람들의 형태만 보고도 그 사람이 어떤 당파에 속해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냈다고 한다.
 
 
  노론의 성지, 화양동 서원
 
  예를 들어 만동묘 앞을 지날 때 공경하고 근신한 뜻을 안 보이며 활달하게 떠들고 지나가는 사람은 진보적이던 南人(남인)이었다. 또한 만동묘에 이르러서 쳐다만 보아도 감개무량하게 여기고 몸을 굽혀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은 보수적인 老論(노론)이고, 그저 산수구경을 간단히 하고 만동묘 구경도 절차를 무시한 채 절에 와서는 중을 곧잘 꾸짖었던 사람들은 혁신적인 노론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속해 있던 당색이 인격이나 言動(언동)에까지 배어 버린 것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이와 같이 당색과 인간이 절충 융합해 있었던 같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색에 대한 강인한 집념은 당색에 따라 옷의 디자인이나 헤어스타일도 다르게 했다. 노론 가문의 부녀자는 저고리의 깃과 섶을 모나지 않고 둥글게 접었다. 치마 주름이 굵고 접은 수가 적으며 머리 쪽도 느슨하게 늘여서 지었다. 이에 비해 소론 가문의 부녀자는 깃과 섶을 뾰족하고 모나게 접었다. 이처럼 모난 디자인을 ‘唐(당)코’라 불렀다. 소론 가문을 당코로 속칭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치마 주름 수도 많고 잘며 머리 쪽도 위쪽으로 바짝 치켜 지었고 이 같은 옷매무새나 머리모양은 그들 당의 정신과 너무나 잘 부합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곧 노·소론의 분당 원인은 주자학을 바라보는 보수와 혁신적 해석 때문이었다. 곧 보수·혁신이 그 분당의 분기점이었다. 당코처럼 날카로운 디자인, 잔주름 많은 치마, 바짝 올려 붙인 머리 쪽이 혁신적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완곡한 옷깃, 굵은 치마 주름, 느슨한 머리 쪽은 보수적 이미지를 물씬 나게 한다.
 
  그러한 당색들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제눈에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끌만 보인다는 속담이 무색하지 않게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화양동서원에 딸린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군을 보내 준 명나라 신종과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이 사당 역시 화양동서원과 같이 폐단이 극심했으므로 순조 1년인 1907년에 철폐되었다가 근간에 다시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넘게 나오는 우암의 이름인 ‘시열’을 조선시대 영남지방에서 개 이름으로 지었던 적이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지역에선 어떤 연유로 개 이름을 시열이라고 짓는지 알지도 못한 채 짓는다.
 
  조선시대 기호학파에서 공자나 孟子(맹자)처럼 떠받들어 ‘宋子(송자)’라고 불린 송시열이 왜 흔한 개의 이름이 됐을까? 조선시대에 일반 사람들이나 남인들은 송시열을 송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를 송자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노론이라는 당파뿐이었고 노론에 원한이 깊었던 사람들은 개를 사다가 시열이라는 이름을 짓고 그 개를 구박했다는 것이다.
 
  송시열은 파곶과 선유동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파곶은 선유동의 그윽하고 폭포가 있는 것만 못하고, 선유동은 파곶의 넓고 툭 트인 것만 못하니, 사람의 품질과 학문도 서로 같지 않음이 더러 이와 같다.”
 
  선유동에서 구불구불한 ‘불란치 재’를 넘어가면 內(내)선유동이라고 부르는 가은 선유동에 이른다. 가은 선유동은 충북 괴산군 송면의 선유동 구곡과 함께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1km에 이르는 아홉개의 계곡으로 이름이 높다. 골이 깊고 수목이 울창하여 기이한 봉우리 사이로 맑은 물이 흘러 굽이마다 소와 폭포가 있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니 선유구곡이라 부른다. 위에는 칠성대와 학소굴, 그리고 금세 용이 올라간 듯한 용추가 있다.
 
 
  아홉가지 절경을 정원처럼 여기고 산다면
 
  이중환에게 있어 살 만한 곳이란 어떤 곳일까.
 
  “무릇 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하는 것이다. 거처하는 곳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들이 촌스러워진다. 그러나 산수가 좋은 곳은 생활의 이익이 풍부하지 못한 곳이 많다. 사람들이 자라처럼 모래 속에 숨어 살지 못하고, 지렁이처럼 흙을 먹지 못하는 바에야, 한갓 산수에만 취해서 삶을 영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름진 땅과 넓은 들, 그리고 지리가 아름다운 곳을 가려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좋다.
 
  그리고 십리 밖, 혹은 반나절 길쯤 되는 거리에 경치가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 가끔씩 생각이 날 때마다 그곳에 가서 시름을 풀고, 혹은 하룻밤쯤 자고 돌아올 수 있는 곳을 마련해 둔다면 이것은 자손 대대로 이어져 나가도 괜찮은 방법이다.
 
  옛날에 주 부자가 무이산의 산수를 좋아하여 냇물 굽이와 산봉우리마다에 글을 지어서 빛나게 꾸미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주 부자는 그곳에다 살 집은 두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봄이 계속되는 동안에 저곳에 가면 붉은 꽃과 푸른 잎이 서로 비치는 것이, 또한 제대로 나쁘지 않다’하였는데 후세사람으로서 산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것을 본받을 일이다.”
 
  중국 북송시대의 郭熙(곽희)는 <林泉高致(임천고치)>의 山水訓(산수훈)에서 살 만한 곳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군자가 산수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전원에 거처하면서 자신의 천품을 수양하는 것은 누구나 하고자 하는 바요. 천석이 좋은 곳에서 노래하며 자유로이 거니는 것은 누구나 즐기고 싶은 바다.”
 
  <林園十六志(임원십육지)>를 지은 서유계는 “사람 사는 마을 근처에 산수를 가히 감상할 만한 곳이 없으면 性情(성정)을 도야할 수 없다”고 했다.
 
  옛사람들의 충고를 받아들여선지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나라 안의 경치 좋은 곳에 작은 집을 짓고 정자를 만든 뒤 말년의 삶을 영위했다. 현대인들 역시 살 만한 사람들은 강가나 산, 그리고 바닷가에 별장을 짓는 것이 유행처럼 됐다. 그것이 지금은 재물을 불리는 방법으로도 활용되고 있지만 삶이란 것이 어디 그런 것인가?
 
  홍만종이 지은 <순오지>에 “율곡과 퇴계는 자기들이 살 곳을 가려 살았는데, 그들은 반드시 산수의 취지에 중점을 두고 골랐던 것”이라는 말이 있다. 필자 역시 그들의 취지에 동감한다. 그래서 몇 십 년간에 걸쳐 이 땅을 주유하며 산천을 바라보고 사람이 살기에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곳은 바로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경치가 좋은 곳’이다.
 
  장유 서익손은 <명세설신어>에서 “내게 눈이 있고 발이 있으면 어디든 경치 좋은 산천이 있으면 즉시 간다네. 그리하면 내가 바로 이 경치 좋은 산천의 주인이 되네”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산수 좋고 인심 좋고, 아직은 사람들의 때가 덜 묻은 곳이 선유동이다.
 
  이름 그대로 神仙(신선)들이 노닐던, 이곳을 사랑했던 先賢(선현)들이 최치원, 이준경, 이황, 송시열 등이다. 이 괴산 선유동에 자그마한 집 한 채 짓고서, 마음 비우고, 세상을 관조하면서 고개 너머에 있는 가은 선유동과 화양동의 아홉 가지 경치를 내 정원처럼 여기고 살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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