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지하에 수백조어치 금괴묻혀있다” |
박문영, 대원군이 고종에 준 엄청난 금괴를 추적-소설 “황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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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지하에 엄청난 분량의 금괴 묻혀
소설가 박문영은 최근 역사소설 “황제(전 3권/평민사 간)”라는 소설을 펴냈다. 이 책은 경복궁 지하에 엄청난 분량의 금괴가 묻혀 있다고 쓰고 있다. 소설을 따라가 보자.
“전하! 지금 경복궁 지하에 엄청난 분량의 황금이 묻혀 있사옵니다.”
“그래요? 이태왕 전하께서 열두 개의 항아리를 창덕궁 후원에 묻었다는 소문은 나도 들어 알고 있소.”
“전하! 제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그 이야기가 아니옵니다. 창덕궁 후원에 감춘 항아리 속 금괴는 대원위 대감께서 돌아가시자 유품으로 이태왕 전하께 전달된 것이옵니다. 이것을 아마 이태왕 전하께서 열두 개의 항아리에 분산하여 창덕궁 후원에 보관하신 것 같사옵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고 또 다른 게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항아리에 묻은 금괴의 수백 배나 더 많은 금괴가 경복궁 지하 모처에 묻혀 있사옵니다.”
“그래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좋을......”<소설 황제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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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지금 경복궁 지하에 엄청난 분량의 황금이 묻혀 있사옵니다.”
“그래요? 이태왕 전하께서 열두 개의 항아리를 창덕궁 후원에 묻었다는 소문은 나도 들어 알고 있소.”
“전하! 제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그 이야기가 아니옵니다. 창덕궁 후원에 감춘 항아리 속 금괴는 대원위 대감께서 돌아가시자 유품으로 이태왕 전하께 전달된 것이옵니다. 이것을 아마 이태왕 전하께서 열두 개의 항아리에 분산하여 창덕궁 후원에 보관하신 것 같사옵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고 또 다른 게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항아리에 묻은 금괴의 수백 배나 더 많은 금괴가 경복궁 지하 모처에 묻혀 있사옵니다.”
“그래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좋을 것인즉, 그대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
춘홍이 힘에 부쳐 잠시 쉬는 모습을 보이자 의친왕이 물었다.
“식혜라도 떠 올릴까요?”
“아닙니다. 지금 제가 얘기하는 그 황금은… 대원위 대감께서 살아계실 때 선대 대왕님들의 유지를 검사하다가 엄청난 금괴를 궁궐 창고에서 발견하여 경복궁 중건 때 지하에 금고를 짓고 거기에 안전하게 보관한 것입니다.”
“그래요? 그 이야기는 대관절 누구한테 들은 것이오?”
“대원위 대감께서 살아계실 때, 대감께 직접 전해들은 것입니다. 제가 대감의 후첩으로 들어오기 전에 남편으로 모셨던 이장렴이란 분도 그 금고를 직접 짓고 관리하는 일을 하였사옵니다. 결국 그 일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어 그 이후 대감께서 저를 거두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지금 춘홍이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 자금을 가지고 독립군을 양성한 뒤 일거에 일본의 뒤를 공격하여 제국의 부활을 성사시킬 수 있는 거금이었다. <소설 황제의 일부>
사실, 박 소설가가 쓴 “황제-제국의 부활(전3권)”은 대한민국 문화콘텐츠 공모전 소설 부문 1위 수상작이다. 출판사측은 “상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찾아간 제국의 시간 속에는 대한제국의 황제들이 지금까지 알려졌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황실을 이어가려고 엄청난 애를 썼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읽게 되는 독자들은 우리 스스로 제국의 역사를 덮어버리고 살았다는 사실과 우리가 천 년 역사의 자랑스러운 제국의 후손임을 깨닫게 한다”고 설명하면서 “일본은 수십 년간 우리나라의 금광에서 금을 캐내어 금괴로 만들어 모아놓고 있었다. 그 막대한 금괴를 밀반출하려는 정보를 입수한 장조(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어가기 전, 마지막 힘을 다하여 일본인들과 싸운 후, 그 금괴를 자신의 외가에 비밀리에 마련해 놓은 ‘人王二家’로 옮겨 놓은 후, 자신의 충실한 심복인 박상선을 통하여 아들인 정조에게 유언으로 그 사실을 알린다. 정조는 그 금괴를 자신이 사랑하는 규장각 내에 있는 ‘금서각’이라는 서고 지하에 숨겨 놓는다. 대원군은 정조 이후 버려진 낡은 서고인 ‘개유와’에서 人王二家에 대한 단서를 얻고, ‘금서각’에서 금괴의 행방을 찾게 된다. 대원군은 엄청난 분량의 금괴를 활용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이 금괴를 경복궁을 중건할 때, 동궁전 지하에 창고를 만들어 보관한다. 십 년 후, 고종은 독살되기까지 나라를 살리려고 강력한 투쟁을 하며,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고종의 아들 의친왕은 대원군의 유품에서 금괴의 존재를 확인, 이를 발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금괴는 현재 경복궁 지하에서 고요히 묻혀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박 소설가는 필자와 인터뷰를 마친 이후 필자의 E메일로 황금의 존재를 생각하게 된 근거 22가지를 보내왔다.전문 소개한다.
황금의 존재를 생각하게 된 근거 22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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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원군이 정권을 잡을 당시, 자신의 권력 기반이 취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력을 약화시킬 지도 모를 경복궁 대역사를 무리하게 추진한 점.(궁궐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된 엄청난 분량의 왕실금괴를 가장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궁궐을 새로 짓고 궁궐 지하에 비밀장소를 만들어 금괴를 보관하는 방법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2.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특별한 이유 없이 대화재 사건이 자주 일어난 사실.(금괴가 궁궐 지하에 숨겨지는 과정에서 금괴의 존재가 소수의 외부인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 사실을 알게 된 자들이 비밀리에 이를 탈취하려고 난동을 일으키다 실패함)
3.대원군이 실각하자 즉시 권력의 핵심인 민왕후를 시해하기 위한 폭발물 투척사건이 바로 민왕후 침소 근거리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당시, 경계가 삼엄했을 때인데도 이런 황당한 폭발물 투척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궁궐건축 당시 금괴 보관을 위한 비밀 지하통로를 설계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다.)
4.대원군이 죽음을 앞두고 특별한 이유 없이 자신의 정적인 아들, 고종에게 최후면담을 끈질기게 요청한 사실.(금괴의 존재를 아들에게 알리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5.대원군이 실각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일선에서 계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점.(당시의 정치는 금력으로 할 수밖에 없었는데 막대한 정치자금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6.‘비원’이란 이름의 명명과정(고종이 대원군으로부터 유산으로 받아 창덕궁 후원에 깊이 묻어 둔 금괴항아리를 일제가 찾아내지 못하자 아쉬움에 붙인 이름이란 말은 매우 타당성이 있다.)
7.순종. 영친왕. 의친왕은 고종도 죽고 나라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돈에 쪼달리지 않고 살았다는 점.(영친왕은 아카사카에 대저택을 지을 정도로 돈이 충분했고 당대 최고가의 미술품을 많이 사들였으며 최근에 영친왕컬렉션이 발견되었고 고종의 다른 아들들도 모두 최신 외제차에 운전기사를 두는 등, 풍부한 자금을 보유한 이유는 상당량의 금괴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8.의친왕이 여러 여인들과의 사이에서 여러 명의 자녀를 둘 수 있었던 경제력은 고종으로부터 충분한 금괴와 자금을 유산으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일제의 경비관계철에 따르면 의친왕은 한 때, 거의 매일 조선 최고의 음식점인 명월관에 출입을 할 수 있었을 정도의 막대한 재산가였다.)
9.대원군이 죽자마자 엄황귀비가 그동안의 현안이었던 학교 세 개를 설립할 막대한 자금을 즉시 확보하고 실행에 옮긴 점. 그리고, 그 당시 돈이 궁했던 토쿄의 의친왕에게도 엄황귀비로부터 거액의 학비가 전달된 사실.(당시 대원군의 막대한 유산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10.무엇보다도... 대원군이 정계 은퇴 이후에도 계속하여 자신의 친아들의 정권을 빼앗기 위하여 비정상적으로 노력한 점.(지하창고의 금괴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서였다고 의심해 볼 수 있는 대목임.)
11.헐버트가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대한민국으로 귀국을 강행하여 사망한 사실.(독일은행의 채권을 고종의 후손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귀국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채권은 현재, 미국 어디엔가 남아있다고 추정됨)
12.고종황제의 곁에 있다가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 유난히 많았다는 점(고종은 대원군 서거 이후, 대원군으로부터 물려받은 금괴가 풍부하여 이를 해외의 독립투쟁단체나 조선 의병의 무기구입에 지원하였을 개연성이 매우 크다. 제국군의 해체 이후 일제히 일어났던 의병들에게 풍부한 자금이 있었으나 무기를 구하지 못하여 총의 구입을 외국인에게 부탁했다는 사실은 외국의 신문기자들에게도 확인된 사항이다. 또한 독립투쟁기에 궁궐 내직에 있었던 사람 중, 뚜렷한 근거 없이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 이는 고종이 국내외 독립투쟁 단체에 보낼 자금을 전달하지 못하여 본의 아니게 착복하였거나 보관 또는 횡령의 의심이 있다.)
13.내장원경 이용익의 예금된 재산을 놓고 수십년간 일제하에서 법정투쟁이 있었던 사실(고종의 자금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14.한국은 일제 말, 세계 제4위의 금 생산국가였다는 사실과 신라왕의 왕관이 금관이었고 금동불상이 흔했다는 점.(금생산을 통하여 대규모의 금괴 형성이 가능할 수 있었던 기본적인 토양)
15.헐버트와 잘데른에 의해 독일은행에 예치된 500억원의 자금과 이 은행 예치증서 일부가 일제에 의하여 비밀리에 환전된 사실.(이는 고종의 자금)
16.의친왕이 만주로 탈출을 시도할 때에 자신의 몸에 프랑스은행의 증서를 가지고 떠난 사실(고종으로부터 물려받은 자금)
17.독립투쟁기 초기, 간도지역에서의 독립투쟁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어 일제에 대단히 큰 타격을 입히고 일본의 대륙침략을 수십년간 저지시킨 점.(막대한 자금과 전략이 투쟁단체에 흘러들었기 때문에 총기구입이 가능했을 것이고 이런 자금과 전략은 독립투쟁의지가 강렬했던 고종과 의친왕의 주머니에서 나왔다고 생각할 수 있음)
18.정조가 규장각을 설립하고 수원화성을 건축한 이후, 대규모의 인원을 이끌고 수원화성 행차를 실시하고 무력부대를 양성할 수 있었던 것은 영조 때부터 발달되어 본격적으로 축적된 금광산업 발달의 자금력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정조 시절, 갑자기 국력이 강해진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는가? 정조의 급서로 비장의 금괴는 60년 간 사라진다.)
19.조선시대 모든 금광의 소유권은 대한제국 시절까지 왕실의 소유였다.
20.고종이 황실소유의 금괴 85만냥을 12개의 항아리에 나누어 비밀장소(비원 혹은 창덕궁후원)에 매장한 후, 보물지도를 갖고 해외탈출을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독살되었다는 이지용의 증언기록.
21.춘천의 김유정문학촌에 가보면 금병산 자락의 삼포 개울가에서 사금을 채취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전국의 모든 개울가에서는 오래전부터 사금을 채취했다는 기록과 이야기가 발견되고 있으며 이 결과로 신라의 찬란한 황금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집트 도서관 소장문서기록에 의하면 ‘해동의 신라는 황금이 풍부해 개도 금목걸이를 하는 나라’라고 소개된 기록이 있다. 한국인이 한반도에 정착하게 된 동기도 바로 풍부하게 채취할 수 있는 황금, 사금의 기회가 그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추정된다. 이렇게 하여 채취된 황금은 수백년간 여러 경로를 통하여 왕실창고로 모아졌을 것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은 내장원경 이용익도 함경도 갑산에서 채취한 송아지만한 황금을 조정에 바쳐 출세에 이용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황금채취가 많은 나라였다.
22.무엇보다도 지난 백년간 경복궁 지하에 대량의 금괴가 묻혀있고, 이 금괴는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할 당시에 묻었다는 소문이 꾸준히 나돌았다는 점.(나이든 사람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소문인데 단지 물증을 발굴할 수 없을 뿐이다.) 신안 앞바다의 보물선 소문도 지난 50년간 꾸준히 나돌다가 드디어 눈앞의 사실로 발굴이 되었던 사례가 있지 않은가!
“경복궁 금괴는 물질이지만 우리정신”
소설가 박문영은 평생에 걸쳐 경복궁 지하의 금괴를 생각해왔다. 그는 “그 금괴는 대원군이 고종에게 물려준 것”이라면서 “경복궁 지하에 묻힌 금괴는 물질이지만 우리의 정신이기도하다”고 강조했다. moonilsuk@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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