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명부, '너구리' 또는 철인29호로 불린 사나이
* 한국 프로야구사에 한 획을 그었던 장명부 선수(2005년04월 타계) 인터넷 정치공론장 '폴리티즌(www.politizen.org)의 스포츠 칼럼니스트인 '꼴통차기'님의 글을 소개해 드립니다.-편집자 주.
1983년 한국프로야구는 대이변의 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전년도 우승팀인 OB의 몰락과 함께 만년 우승후보라는 달갑지 않는 꼬리표를 달게 되는 삼성, 최동원으로 상징되는 롯데가 아닌 해태와 MBC가 전후기 우승팀이 되어서 한국시리즈를 치렀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해태의 우승으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1983년을 대표하는 팀은 우승팀인 해태보다도 삼미 슈퍼스타즈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2년 전후기를 합쳐서 15승(65패)밖에 거두지 못한 삼미가 해태와 MBC에게 아쉽게 밀려서 한국시리즈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무려 52승 47패 1무를 거둘 것이라고는 미아리의 벼락맞은 대추나무집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1982년 약한 전력으로 가뭄에 콩 나듯이 승리의 기쁨을 맛 본 삼미의 1983년 시즌도 사실은 암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호균과 김진우라는 국가대표 배터리와 OB의 동냥으로 정구선 등이 보강되었지만, 타팀의 전력보강에 비교하면 전력보강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습니다. 구단간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KBO는 삼미와 해태에게 로또를 구입할 기회를 주었고, 삼미는 울며겨자먹기로 구입헐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반신반의했던 로또는 대박을 터트려서 아마 한국프로야구에서 앞으로 깨지지 않을 30승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 로또의 이름이 너구리라는 별명으로 친숙한 장명부였습니다.
엑스트라에서 조연으로
장명부는 1950년 12월 27일 돗토리현에서 태어나서 지역의 야구명문고로 이름높은 돗토리니시고교에 입학해서 팀의 간판투수로 활약했지만, 전국무대인 코시엔에는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코시엔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전국에 알리지는 못했지만, 강호로 군림했던 돗토리니시고교의 에이스였던 관계로 많은 팀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국적이 한국인 관계로 드래프트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자유계약으로 1968년 요미우리에 입단했습니다. 여담이지만, 1968년에 벌어진 드래프트는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열혈 남아로 불리는 호시노 현한신감독이 요미우리의 약속파기로 주니치로 가게 되면서 안티요미우리의 선봉에 서게 되었고, 시즈오카상고를 준우승으로 이끈 1학년이었던 김일융이 자퇴를 하면서 메이저리그구단인 샌프란시스코까지 포함된 치열한 스카우트경쟁 끝에 요미우리의 유니폼을 입게 되면서, 일본의 중학교, 고교, 대학을 다닌 적이 있는 선수는 드래프트대상에 포함되게 되었습니다.
1969년 입단 첫해를 2군에서 연습생신분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장명부는 1970년 부상으로 고생하고 있던 김일융을 제치고 먼저 1군에 데뷔할 수 있었습니다. 11경기에 등판해서 승리없이 3패만을 거두었지만, 1군 데뷔치고는 괜찮은 방어율 3.07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하지만, 당시 요미우리는 V9의 주역이었던 호리우치를 정점으로 해서 타카하시, 세키모토, 와타나베 등으로 마운드가 짜여져서 장명부가 들어갈 틈은 없었고, 부상에서 회복한 김일융 등으로 인해 1971년 2경기, 1972년 5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했습니다.
두터운 1군마운드를 뚫지 못하고 무명의 2군선수로 끝날 것으로 보였던 장명부에게 시즌이 끝난 후에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토미타 마사루의 트레이드 대상으로 야마우치 신이치와 함께 퍼시픽리그의 난카이 호크스로 팀을 옮기게 된 것입니다. 당시 난카이에는 일본 제일의 포수인 노무라 테쯔야가 감독겸 선수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노무라재생공장으로 불릴만큼 투수리드가 뛰어난 노무라라는 존재와 얕은 투수층으로 인해 1군에서 2군강등의 걱정없이 던질 수 있는 난카이는 장명부에게 있어서 한줄기 구원의 손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73년 스포트라이트는 20승을 거둔 야마우치에게 집중되었지만, 장명부도 27경기에 등판해서 7승 7패와 함께 140과 2/3이닝을 던지면서 팀의 리그우승에 공헌을 하였습니다. 일본시리즈의 상대는 8년연속 우승을 차지한 요미우리. 자신의 기량을 알아주지 않은 전소속팀을 향한 복수를 다짐하면서 3차전 선발투수로 나섰지만, 패전을 기록하고 팀도 요미우리의 9년연속 우승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조센징이라는 차별 속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직업야구선수를 향해 달린 장명부로서는 1973년의 활약으로 일본프로야구에서, 폐쇄된 일본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던진 한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74년 시즌에서는 10승에 1승 모자란 9승을, 1975년에는 에모토와 함께 팀내 최다승인 11승(12패)을 거두면서 당당히 팀의 주축투수로 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188이닝을 소화한 무리한 투구때문인지 1976년 시즌에는 6승 7패 1세이브를 기록하면서 팀내 위상도 중간계투요원으로 추락하였습니다. 야마우치, 나까야마, 후지타, 사토우 등으로 선발투수진이 짜여지면서 다시 한번 트레이드의 대상이 되어서 센트럴리그의 히로시마 카프로 이적하였습니다.
1975년 처음으로 센트럴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한 히로시마 카프는 열성적인 팬들의 지지를 받는 구단으로 유명합니다. 리그 우승 이후, 중위권으로 떨어진 히로시마는 1977년 트레이드를 통해서 전력보강을 꾀하면서 재도약을 꿈꾸지만, 시즌 개막과 함께 하위권으로 추락한 성적은 회복하지 못하고 6팀 중에서 5위를 차지하였고, 장명부도 6승 6패 5세이브로 여전히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그래도, 시즌 후반기에 예전의 구위를 회복하면서 다음 시즌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간직한 채 히로시마에서의 첫해는 끝났습니다.
1978년 장명부는 팀내 최다승인 동시에 개인 최다승인 15승에 230이닝을 던지면서 일약 팀의 에이스로 화려한 재기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1979년 전년의 무리한 투구의 영향으로 7승 9패 1세이브로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처음으로 100탈삼진 이상을 잡는 등 구위 자체는 더 나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팀도 2년만에 리그 우승을 탈환하면서 일본시리즈에 진출했고, 킨테츠와의 일본시리즈에서 2차전 선발투수로 등판해서 완투승을 거두면서 팀의 첫우승에 공헌하였습니다.
1980년 장명부는 팀내 최다승인 15승 6패를 거두면서 처음으로 개인 타이틀인 승률왕을 차지하면서 2년연속 리그우승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전년도에 이어서 킨테츠와의 일본시리즈에서 2경기에 선발등판해서 1완투승을 거둔 장명부 등의 활약으로, 히로시마는 복수에 불타던 킨테츠를 2년연속 4승 3패로 제압하면서 두번째 시리즈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1981년에도 12승 9패를 기록하면서 팀의 주축투수로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1982년 이상하게도 승리와는 인연이 멀어지면서 3승 11패 2세이브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고 있던 7월 10일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허리부상을 당하면서 시즌을 종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각한 허리부상으로 재기여부가 불투명했지만, 언제나 오뚝이처럼 일어섰기에 그 누구도 그의 부활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2월 22일 전격적으로 은퇴선언을 하면서 더 이상 그의 모습을 히로시마 시민구장에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장명부는 1970년 1군무대에 데뷔해서 100승을 채우지 못했지만 통산 91승 84패 9세이브 방어율 3.69를 거두었습니다. 프로에 입단할 때부터 언론과 팬들로부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는 인연이 멀었지만, 팀의 간판투수로 100이닝 이상을 언제나 소화한 프로야구의 음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전격적으로 은퇴선언을 한 것은 부상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통산 100승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팀내의 젊은 투수들의 성장 등을 생각하면 앞으로 자신은 찬밥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은퇴선언을 통해서 갓 프로야구가 출범한 한국에 가기 위한 신변정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장명부가 일본생활을 정리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은 단순히 금전적인 이유만은 아니었습니다. 요미우리와 난카이, 히로시마에서 활동했지만, 에이스로서 팬들의 각광을 받은 적도 없었기에 자신의 경험을 일본에서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기에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프로야구에서 자신의 경험과 앞으로 물 밀듯이 진출할 한국계 선수들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어했습니다.
철인29호라고 불리운 사나이
한국프로야구에서 최강팀이나 최약체에 가고 싶어했던 장명부는 자신의 소원대로 탈꼴찌의 희망조차 없는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하였습니다. 최강의 팀에 가서 한국의 우수한 선수들과 함께 명문팀으로 만들거나 가장 약한 팀에 가게 되면 자신의 힘으로 우승을 시키면서 만년 조연이었던 장명부가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일본프로야구에서 통산 91승을 거둔 장명부의 한국행으로 미국 마이너리그출신으로 OB 베어스를 우승으로 이끈 박철순과 한국야구를 대표하던 강속구투수 최동원이 벌일 한미일 투수대결에 많은 관심이 모아졌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강속구투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프로야구는 힘의 야구가 미덕이던 시대로, 불같은 강속구로서 타자와 정면대결하는 투수야말로 진정한 대투수로 변화구로 요리조리 피하는 기교파투수는 비겁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초 장명부에 대해서도 강속구투수로 오해해서 그의 강속구를 한국타자들이 어떻게 칠 것인가, 그리고 최동원, 박철순 등과 펼칠 한미일 속도경쟁에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소문만 무성하던 장명부가 한국야구팬들에게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 느낀 것은 아마도 배신감이었을 것입니다. 일본에서도 유명한 장명부의 엉거주춤한 투구동작과 스리쿼터에서 나오는 파리가 날아가는듯한 아리랑볼은 강속구투수 장명부를 상상한 사람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거액이지만 1억원이상의 거금을 받아서 1억원의 사나이로 불렸지만, 사람들은 일본프로야구의 퇴물을 거액을 주고 데리고 왔다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장명부의 공은 배트가 아닌 파리채로도 칠 수 있다는 평가 속에서 페넌트레이스는 시작되었습니다. 분명히 장명부의 공은 공략이 가능했고, 실제로 안타는 쳤지만 승부를 결정짓는 점수를 뺏지 못했고, 삼미선수들에게 장명부가 나오면 이긴다는 [장명부효과]까지 주면서 삼미의 물타선은 장명부만 등판하면 미친듯이 치고 점수를 올려서 승리의 연속이었습니다. 자신이 무너지면 뒤를 막아줄 투수도, 또한 임호균을 제외하고 믿을 수 있는 선발투수도 없는 팀 사정상 선발로 나와서 완투하고 다시 구원으로 등장하는 등 원맨쇼에 가까운 대활약을 펼쳤습니다. 장명부는 지금의 투수라면 당연한 체인지 오프 페이스 - 볼속도의 완급조절과 투구폼의 조절을 통해서 타자의 타이밍을 완벽하게 뺏어면서, 스크류볼을 과감하게 던지는 등 제구력을 바탕으로 몸쪽승부를 한 결과였습니다.
능글능글한 외모와 자포자기한듯한 투구폼, 그리고 타자의 심리를 꿰뚫는 볼배합 등으로 장명부를 어느 순간부터 너구리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문화적 차이 등에 따라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악역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크류볼 등을 통한 몸쪽승부는 빈볼시비가 잇달았고, 홈런 등을 맞았을 때에 글러브를 던지거나 심판의 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지나치게 어필하는 등 격한 행동으로 실력이 있을지는 몰라도 지나치게 안하무인이다던지 동업자의식이 없다던지 자신밖에 모른다던지 자신의 뜻과는 무관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982년에 벌어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을 꺽고 우승한 한국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지만 일본프로야구의 노장에게 농락당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장명부는 한국프로야구의 스타가 아닌 타도할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비난과 한국에서도 [우리]가 되지 못하고 [너희]로 취급되는 상황에 적지 않게 당혹감도 느꼈지만, 오히려 장명부는 그렇다면 한번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는 성적을 남겨주겠다면서 투지를 불태웠습니다. 전후기 통합 우승을 노리던 장명부의 삼미는 김진영감독의 구속 등으로 마지막에 이르러서 끝마무리에 실패하면서 해태의 우승으로 전기리그가 막을 내렸습니다.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는 마지막 티켓인 후기리그 우승을 향해 질주하던 기관차는 김진영감독의 근신으로 팀의 중심이 된 백인천 코치겸 선수의 간통으로 인한 구속과 몇번의 이해하기 어려운 판정으로 브레이크가 걸려서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1983년 한국프로야구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몰고 온 삼미는 전후기 모두 2위에 거치면서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기나긴 여정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김무종과 포옹하면서 울먹이던 장명부의 모습은 이제는 20년이 지난 일인데도 여전히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그가 흘린 눈물이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목표로 했던 꼴찌팀 삼미를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1983년 장명부의 활약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총 100경기 중에서 60경기에 등판해서 무려 427과 1/3이닝을 던지면서 30승 16패 6세이브 방어율 2.34를 기록하였습니다. 장명부가 거둔 30승을 평가절하시키기 위해서, 보너스 1억원이 걸린 30승을 채우기 위해서 바람잡이 선발투수를 기용해서 이길 것 같은 경기에 구원으로 등판해서 손쉽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비난도 있지만, 그것은 그가 기록한 30승 중에서 선발승이 28승(이 중 26승이 완투승)이라는 사실을 보면 근거없는 비난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84년 롯데를 우승으로 이끌면서 27승을 올린 최동원이 51경기에 나서서 284와 2/3이닝을 던진 것을 생각하면 1983년의 장명부는 너구리가 아닌 철인 28호 아니 29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자들은 장명부가 삼미가 아닌 강팀에 있었다면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장명부는 삼미였기 때문에 자신의 전부를 보여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983년 한국프로야구에 총 6명의 이방인이 진출하였습니다. 일찍이 중앙고시절 강속구를 앞세워서 전국무대를 평정하고 일본과 미국의 마이너리그와 독립리그를 거쳐서 멕시코리그에서 활동하면서 멕시코의 국적을 취득했던 이원국과 작전의 귀재라는 칭호속에 조감독이라는 애매모호한 명함으로 삼성 라이온즈를 실질적으로 지휘했던 이충남, 그리고 장명부를 위시한 주동식과 김무종, 이영구가 우승청부업자로서 고용되었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장명부가 한국행을 결정한 것은 단순히 돈만이 아닌 프로에 대한 인식조차 생소한 한국에 자신의 경험을 알려주고 싶어했습니다.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시작되었지만, 프로야구 이전에도 출신고교의 이름아래에 모여서 대항전을 치렀고, 지역연고를 중심으로 선수들을 구성한 각구단이었기에 내부적으로 학연을 중심으로 한 선후배의식이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삼미가 연고로 한 인천에도 인천고와 동산고라는 두 야구명문고를 중심으로 한 좋게 말해서 라이벌의식 - 갈등이 있었지만, 1982년의 처참한 성적과 스타플레이의 부재 등으로 학연을 중심으로 한 대립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정으로 장명부를 중심으로 선수단이 뭉쳤고, 또한 1983년 한해로 앞으로의 야구인생에 종지부를 찍게되더라도 아낌없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너구리라면에는 너구리가 없다
장명부의 경이적인 활약으로 각팀들은 전력보강을 위해서 일본으로 날아갔고, 만년 우승후보라는 딱지를 떼기 위해서 삼성은 요미우리의 에이스였던 김일융을 OB와의 치열한 쟁탈전 끝에 영입하면서 장명부와 김일융의 제2라운드가 한국에서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30승을 할 경우 보너스로 1억원을 주겠다는 구단사장의 약속이 공수표가 되면서 장명부는 분노를 넘어서 한국사회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는 더 커져갔습니다. 돈은 돈이고 야구는 야구이기 때문에, 김진영감독의 절대적인 신뢰 아래에 장명부는 투수코치를 겸하게 되었고, 1983년 이루지 못한 우승에 대한 아쉬움과 이기는 팀을 만들기 위해서 몇가지 건의를 합니다. 자신과 함께 삼미 마운드를 지켰던 임호균의 트레이드를 통한 전력보강과 일본에서의 전지훈련 등이었습니다.
최계훈외에는 특별한 신인보강이 없었던 삼미로서는 임호균과 이광길의 트레이드를 통해서 권두조, 김정수, 박정후, 우경하, 김호근 등과 해태에서 신태중을 영입하면서 내야진과 장기레이스를 대비해서 백업멤버들을 보강하였습니다. 수비의 핵인 유격수를 맡았던 이영구를 원래 포지션인 3루로 돌리고 수비력이 좋은 안정된 권두조에게 유격수를 맡기면서 기존의 정구선과 함께 안정된 내야진을 갖출 수 있었고, 임호균의 공백은 정성만과 박정후, 신태중을 장명부 본인이 직접 조련해서 선발투수로 기용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팔도유람단과 같았던 쌍방울이 창단하기 전까지 지역색이 가장 없는 구단을 트레이드를 통해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장명부의 프로는 실력으로 말한다는 생각에 인천야구의 대부로 실업야구시절 군팀인 해병대의 감독을 역임했던 김진영감독도 비슷한 생각이었습니다. OB를 제외한 5개구단이 해외전지훈련을 가졌고, 괌으로 날아간 롯데를 제외하고 삼성, MBC, 해태, 삼미가 일본에서 구슬 땀을 흘렸습니다. 특히, 삼미는 다른 팀들이 거의 단독으로 훈련하면서 일본팀과의 친선경기 몇경기를 치른 것에 비해서 장명부의 연줄로 히로시마 카프와의 합동훈련을 통해서 1984년 시즌을 준비하였습니다.
트레이드와 전지훈련을 통해서 선수단 전체의 전력이 플러스가 되었지만, 팀 승리의 70% 이상을 차지했던 장명부의 지나친 혹사에 따른 후유증과 임호균의 공백이라는 마이너스적인 요소가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했습니다. 기대와 우려 속에 우승후보(?) 삼미의 1984년 대장정은 시작되었습니다. 개막전 상대는 전년도에 내환으로 자멸했던 삼성이지만, 1984년의 삼성은 전년도와는 다른 전력이었습니다. 기존의 김시진, 권영호, 황규봉 등에 김일융과 김성래, 진동한 등이 보강된 막강한 선수층에 OB를 원년 우승으로 이끈 김영덕씨를 감독으로 영입하였습니다. 8:5로 뒤진 9회말에 구원으로 나온 김일융을 금광옥의 3점홈런으로 동점으로 만들면서 작년의 영광이 재현되는듯이 보였지만, 10회 연장끝에 한점차 패배를 기록하면서 불안감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84년 삼미는 전년도의 돌풍을 이어가지 못하고 전후반기 모두다 꼴찌로 마감하였습니다. 삼미의 추락의 원인은 역시 장명부가 전년도만큼의 활약을 펼쳐주지 못했고, 신인인 최계훈이 분전했지만 임호균의 공백을 메우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30승에 따른 보너스문제로 장명부가 태업을 했다는 말들도 있지만, 태업이라기 보다는 1982년 일본에서 당한 부상과 1983년 무리한 혹사의 후유증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83년 해태를 우승으로 이끈 이상윤선수가 2년연속(83년과 84년) 200이닝을 소화하면서 오랜 부상에 시달렸듯이 장명부의 어깨 역시 강철합금이 아닌 이상 휴식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년도의 30승에는 미치지는 못했지만, 45경기에 출장해서 261과 2/3이닝을 던지면서 13승 20패 7세이브 방어율 3.30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몫은 충분히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명부의 애제자 3인방으로 불리면서 기대를 모았던 정성만은 8승을, 보크논란으로 페이스가 흔들렸던 박정후는 5승을 거두면서 일정 역활을 했지만, 볼펜에이스로 유명했던 신태중이 시즌 개막직전에 당한 부상과 새가슴을 극복하지 못하고 1승밖에 거두지 못한 것도 삼미의 발목을 잡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호균의 트레이드 없이 선수보강이 가능했다면, 혹은 임호균급의 투수가 한명만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한해였습니다. 작년과는 달리 패하는 날이 더 많아지면서 장명부에 대한 평가는 더욱 더 나빠졌습니다. 김진영감독의 지시에 따르지 않거나 무시한다거나 석연치 않은 심판 판정에 불만을 나타내면 역시 장명부는 오만불손하다는 등 1984년에도 여전히 장명부는 [우리]가 아닌 [너희]였습니다.
장명부의 한국프로야구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은 아마도 자신과 같이 일본프로야구를 경험한 선수들을 스카우트한 것은 자신들의 기량과 경험 등을 통해서 한국프로야구 전체가 발전하기 위해서인데 자신(들)을 쓰러뜨려야만 하는 상대로 취급하는 풍토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장명부의 오해였습니다. 한국프로야구(KBO나 구단)에서 미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장명부와 같은 해외에서 활동한 선수들이 필요했던 것은 흥행을 위해서 그리고 팀의 우승을 위한 청부업자로 존재가치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특히 1983년 한국에 진출한 4명의 선수 중에 일본프로야구를 상징하는 존재가 장명부였고, 그가 미국 마이너리그출신인 박철순의 24승을 넘어서 30승이라는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82년 우승신화를 만들어낸 박철순은 한.국.인.이고, 또한 미국의 세례를 받은 것에 비해서, 장명부는 반.쪽.바.리로 made in japan이었기에, 반일과 극일의 국민적 코드가 겹치면서 그는 절대적으로 [우리]가 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영원한 이방인
천당과 지옥을 한번씩 맛본 장명부였지만, 삼미에서 믿을 수 있는 선수는 장명부가 유일했기에 1985년 그의 재기를 많은 팬들은 기대하였습니다. 시범경기에서 1위를 차지하였고, 개막전에서 전년도 우승팀인 롯데의 최동원을 무너뜨리면서 승리를 거두면서 산뜻한 출발을 보였습니다. 올해는 작년과는 다른 모습을 기대했지만, 돌아온 것은 개막전이후 18연패였습니다. 공격의 핵인 양승관과 김진우 등이 부상으로 빠졌고, 지리한 연봉협상으로 장명부의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에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기업인 삼미그룹의 부도로 전기리그를 끝으로 고위층 '마누라'와 관련이 있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청보가 인수하면서 슈퍼맨과 원더우먼 사이에서 마린보이가 태어날 줄 알았더니, 웬걸 조랑말이 탄생하였습니다. 후기리그에서는 그래도 분전하면서 OB와 MBC를 밀어내면서 4위를 차지하면서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하였습니다. 장명부는 45경기에 등판해서 246이닝을 소화하면서 11승 25패 5세이브 방어율 5.30을 기록하였습니다. 25패라는 패수도 문제이지만, 방어율이 급격하게 나빠진 것을 보면 1983년과 1984년 무리한 투구의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단입장에서는 너구리인형의 배터리를 오래가는 신제품으로 교환할지 아니면 너덜너덜 누더기가 다된 인형자체를 교환할지를 선택해야할 시점이 온 것입니다.
새술은 새부대라는 말처럼 청보로서는 전신인 삼미의 이미지가 강한 장명부보다 새로운 선수가 필요했기에 장명부와 이영구 대신에 김일융, 장명부와 함께 빅3로 손꼽히던 김기태와 김신부 등을 영입했습니다. 토사구팽이라고 할지 전혀 프로다움을 보이지 못하던 구단이 처음으로 프로다움을 보였다고 할지 장명부는 새로운 둥지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운좋게도 신생팀인 빙크레 이글스가 창단하면서 1986년에는 독수리오형제에 찬조출연할 수 있었습니다. 빙그레가 장명부를 선택한 것은 신생팀으로서 기존 팀들로부터 거의 전력보강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학야구를 주름잡았던 이상군과 한희민, 이효봉, 민문식 등이 입단했지만, 프로에서 어떤 활약을 할지 미지수였기에 프로야구를 경험한 노련한 투수가 필요했습니다. 매년 성적이 추락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닝을 소화할 수 있고, 프로야구에서 30승을 거둔 장명부는 구단 상층부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재활용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던 빙그레의 바램과는 달리 장명부는 개인 최다연패인 15연패를 포함해서 1승 18패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기록했습니다. 어느정도 승운이 없었던 관계도 있었고, 2년 계약에 연봉도 미리 지급된 관계로 1987년에도 그라운드에서 활동할 것으로 보였지만, 결정적으로 프로경험이 없는 배성서감독과의 마찰로 천당과 지옥을 오락가락했던 선수생활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선수유니폼을 벗은 장명부는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박영길감독의 추천으로 삼성의 투수인스트럭터로 1년을 보낸 후, 1990년 삼미시절 인연을 맺은 김진영씨가 롯데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를 투수코치로 기용하면서 다시 한번 야구장의 품에 안겼지만, 김진영감독의 퇴진과 함께 보따리를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동안 세상의 이목으로부터 사라졌던 장명부가 1991년 5월 성낙수와 함께 마약사범으로 구속되면서 재등장하였습니다. KBO로부터 영구제명되어서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장명부의 한국생활에서 사생활이 어떠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모은 돈을 사기당하는 등 불운의 연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가 마약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아픈 몸과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던 한국프로야구로부터, 한국사회로부터 돌아온 뿌리 깊은 차별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쯔하라 아키오로 태어나서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후쿠시 아키오로 다시 후쿠시 히로아키로 개명과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 국적변경을 한 후에 아버지의 나라 한국으로 온 장명부. 애니메이션 [보노보노]의 너부리의 모습이 떠올려지는 것은 너구리라면에는 아직 너구리 고기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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