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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의 제왕 키위의 끝없는 진화

醉月 2011. 10. 8. 09:59

ㆍ참다래의 고향 중국 쓰촨성 농업 연수동행 취재기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의 항해 비결 가운데 하나는 오렌지였다. 그는 첫 항해에서 사상 처음으로 괴혈병에 의한 사망자를 내지 않고 세계를 일주하는 데 성공했다. 비타민C의 부족으로 생기는 괴혈병은 16~18세기 대항해 시대의 뱃사람에게는 악천후나 해적보다 더 지독한 재앙이었다. 쿡 선장은 감귤류 과일과 양배추 절임으로 식단을 짜 ‘바다의 역병’으로 불린 괴혈병으로부터 부하들을 지켜냈다.

참다래의 고향인 중국 쓰촨성 일대에 자생하는 다양한 다래종의 열매. / 정세권

 


‘캡틴 쿡’이 항해하던 시절 참다래(키위)가 있었다면 그는 오렌지 대신 참다래를 인데버호에 잔뜩 실었을 것이다. 참다래 한 개에는 오렌지 2개에 해당하는 타민C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참다래는 비타민E, 칼륨, 엽산 등 각종 영양소를 다른 과일보다 월등히 많이 함유하고 있어 영양소 밀도가 가장 높은 과일로 꼽히고 있다.

서양인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 가운데 하나인 오렌지가 원래 서양 것이 아니었듯이 참다래의 고향도 키위의 나라로 유명한 뉴질랜드가 아니다. 참다래의 원생지는 싼샤(三峽)댐 건설로 수몰되고 있는 중국 창강(長江·양쯔강) 상류 지역이다. 1904년 뉴질랜드 선교사가 이곳에서 참다래 씨를 가져가 정원에 그늘을 만드는 용도로 심은 데서 비롯됐다. 참다래가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과일 상품이 된 것은 1920년 뉴질랜드 종묘업자 헤이워드가 발견한 ‘우연실생’(우연히 나타난 변이종)을 상업적으로 재배하면서다. 헤이워드라 명명된 이 품종은 현재 전 세계에 가장 많이 전파된 참다래다.

요즘은 괴혈병보다 노화나 암 예방, 피부 미용, 다이어트 등의 효능 때문에 참다래가 고급 과일로 부상하고 있다. 수요가 늘고 시장이 확대되면서 참다래 산업의 국가 간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참다래는 재배 조건이 까다롭고 수확한 뒤에도 후숙·저장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특히 재배 조건이나 저장성뿐 아니라 과육의 모양과 크기, 색깔, 맛 등을 개선한 우수 품종 개발 및 확보에 각국 정부와 참다래 업계가 사활을 걸고 있다.

고급 과일로 부상, 시장 확대
지난 8월 말 국내 참다래 업계는 중국 쓰촨성(四川省) 일대의 참다래 농장과 연구시설을 방문했다. 참다래의 고향인 중국의 산업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지만 가장 큰 관심은 그곳의 풍부한 유전자원에 있었다. 참다래 농업연수단은 한국참다래연합회 회원과 참다래 전문가 등 50여명으로 구성됐다.

참다래는 재배 및 상품화 역사가 가장 짧은 과일 중 하나다. 세계적으로 100년이 채 되지 않고 국내에 도입된 지는 30여년밖에 안 된다. 그래서인지 명칭도 여러 가지다. 국내 농가와 농촌진흥청, 한국원예학회 등에서는 참다래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국립국어대사전에는 참다래라는 단어가 없다. 키위 또는 양다래라는 이름으로 참다래를 소개한다.

중국에서는 참다래를 미호우타오( 桃)로 부른다. 열매의 색깔과 털이 원숭이의 그것과 비슷한 데서 유래했다. 양타오(楊桃)라고도 한다. 영문으로는 주로 키위(Kiwifruit)라고 표기하는데, 차이니스구스베리(Chinese Gooseberry)로 쓴 것도 가끔 눈에 띄었다.

참다래는 다래나무과 다래나무속의 식물이다. 다래나무속에는 60여종이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개다래나무·다래나무·쥐다래나무·섬다래나무 등 4종이 자생한다. 참다래는 델리시오사(Actinidia deliciosa)와 키넨시스(Actinidia chinensis) 두 종을 말한다. 과일에 털이 있는 것을 델리시오사, 없는 것을 키넨시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기이한 모양·색깔·맛 야생다래 육종
중국은 참다래 유전자원의 보고다. 리밍장(李明章) 쓰촨성자연자원과학연구원(SPANRS) 참다래연구소장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다래나무속 66종 가운데 62종이 중국에서 발견된 것”이라며 “그 가운데 80%가 쓰촨성 양쯔강 유역에 자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쓰촨성 더양시(德市)의 현급 시인 스팡(什防)에 위치한 SPANRS는 참다래 육종기지다. 개발로 사라져가는 야생 참다래를 채집·보존하고 풍부한 유전자원을 이용해 신품종을 육종하는 일을 하고 있다.

SPANRS는 지난 20년 동안 8가지 품종을 개발했고, 현재 40여 품종을 시험 중이라고 한다. 상품화한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홍양(紅陽)이다. 리 소장과 왕밍종(王明忠) 연구원이 함께 육종에 성공한 것이다. 1982년 허난성에서 채집한 야생종(Actinidia var rufopulpa)을 이용한 것으로서, 과육의 씨 부분이 붉은 색을 띠는 게 특징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참다래는 속이 녹색인 과일로만 생각해왔다. 과육이 노란색을 띠는 이른바 ‘골드 키위’가 등장한 것은 근년의 일이다. 참다래 농가에서는 참다래 종류를 그린, 골드, 레드의 3가지 계열로 분류한다. 일반적으로 델리시오사 종은 그린, 키넨시스 종은 골드 또는 레드 계열로 나타난다. 리 소장과 왕 연구원이 육종한 홍양이 바로 레드 계열이다.

야생 다래를 채집해 보존하는 쓰촨성 자연자원과학연구원의 품종원.


현재 육종기지에서 시험 중인 40여 품종은 모두 골드 계열이라고 한다. 이들에게는 아직 이름이 없고 번호만 부여되어 있다. 리 소장은 진스(金什) 1호라고 번호가 매겨진 참다래를 소개하면서 “당도가 17%, 저장 기간 6개월, 과육 크기 100~120g에 이른다”며 “완벽한 품종”이라고 자랑했다. 육종기지는 신품종시범원, 신품종양종번육모본원, 육종신재료감정원 등으로 구획돼 있었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기이한 모양과 색깔과 맛을 내는 야생 다래가 심어져 있었다.

품종 확보 위한 소리 없는 총성
중국은 최근까지도 참다래 유전자원이 유출되는 아픔을 당했다. 현재 이탈리아가 품종보호권을 갖고 있는 진타오(金桃)는 중국이 통째로 팔아넘긴 것이다. 이 품종을 중국에서 재배하려면 거꾸로 비싼 로열티를 부담해야 한다. 

현재 중국 농업부는 참다래 품종의 외국 판매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왕 연구원은 “몇 년 전 한국 참다래 회사가 접촉을 해왔으나 중국 농업부가 허가하지 않아 품종을 수출하지 못했다”며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홍양이 재배되고 있다면 그것은 비공식적으로 유출된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품종보호정책을 강화하고 2005년부터 참다래의 국제적인 품종보호권이 강화되면서 세계 참다래 산업은 품종 확보를 위한 총성 없는 전쟁을 펼치고 있다. 예전처럼 외국에서 마음대로 종자를 가져와 육종 연구를 하거나 재배를 할 수 없게 됐다. 품종을 사거나 로열티를 부담하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제스프리 골드 같은 품종에는 최고 20%의 로열티가 매겨진다고 한다.

레드 계열의 홍양 외에 중국이 자랑하는 골드 계통의 참다래 품종은 진얀(金艶)이다. 참다래 연구의 권위자인 박동만 경남농업마이스터대학 교수는 “끝이 뾰족하게 나와 수송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제스프리 골드의 단점이 해결된 것이 특징”이라며 “아직 국내에는 안 들어온 품종”이라고 말했다. 농업연수단이 청두시(成都市) 푸장현(蒲江縣)에 있는 ‘아시아 최대의 참다래 생산기지’라는 참다래국가농업표준화시범구의 진얀 농장을 방문했을 때 요소요소에 배치된 일꾼이 마치 감시원처럼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그런 만큼 우리나라도 참다래 육종전쟁의 포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국내에서는 농촌진흥청의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온난화대응농업연구센터와 남해출장소, 전남농업기술원 과수연구소 등 3곳에서 우수한 참다래 품종을 개발하기 위한 육종연구를 하고 있다. 해금, 제시골드, 한라골드 등이 국내에서 육종한 참다래 품종이다.

풍부한 유전자원, 중국정부 적극 육성
현재 전 세계에서 재배되는 참다래의 90%는 품종보호권이 없는 헤이워드다. 뉴질랜드와 이탈리아는 제스프리 골드, 엔자골드 등을 상용화하며 기술과 마케팅에서 앞서가고 있다. 중국은 풍부한 유전자원을 기반으로 국가적으로 참다래 산업 육성에 나서고 있다. 쓰촨성 참다래 농업회사는 한국 시장 진출에도 강한 의향을 드러내 보였다.

박동만 교수는 “중국은 자생하는 계통에서 우량 품종을 선발해서 품종으로 명명하는 경우가 많다”며 풍부한 유전자원을 부러워했다. 자원도 없고 기술에서도 선발 국가에 밀리는 우리나라로서는 육종전쟁에 뛰어들 무기가 딱히 없어 보인다. 모든 게 부족한 우리에게 한 가지 무기가 있다면 우수한 인적자원이라는 게 박 교수의 말이다. 그는 “연구 인력과 여건이 보강되고 예산만 확보된다면 언제라도 따라갈 수 있다”며 “연구진을 중국 등지에 많이 파견해야 한다”고 말했다.

옛 파촉 땅인 쓰촨성은 제갈공명이 중원 평정을 꿈꾸며 천하삼분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다. 성도인 청두는 촉한의 도읍지다. 그곳에는 공명의 사당인 무후사(武侯祀)가 있다. 쓰촨성 참다래 농장과 시설을 둘러본 김기태 한국참다래연합회장은 “아직은 재배 기술, 가격, 상품의 질 등 모든 면에서 중국 참다래는 우리보다도 뒤진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면서 공명이 노린 삼국정립이 실현됐듯이 쓰촨성 참다래는 세계 시장에 새로운 강자로 등극할 날을 꿈꾸고 있음에 틀림없다. 청두의 무후사와 유비묘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김기태 한국참다래연합회장
“한국 참다래가 명품 될 수 있다”


촉나라 땅에서 태어난 강아지는 해를 보면 짖는다는 말이 있다. 거대한 도가니 모양의 쓰촨분지는 맑은 날에도 연무 때문에 온전한 해를 보기 어려워서라고 한다. 습기가 많은 데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다. 참다래 농업연수단이 쓰촨성에 머무른 5일 동안 맑은 날씨임에도 쾌청한 하늘은 물론 가까이 있는 산의 실루엣조차 볼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찜통 속을 다니자면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연수단을 이끄는 김기태 한국참다래연합회장의 표정은 날이 지날수록 점점 펴지는 듯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란다.

“한·EU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이탈리아 참다래가 한국 시장을 노리고 있잖아요. 남반구의 뉴질랜드나 칠레와 달리 우리와 수확 시기가 같은 이탈리아와 중국은 국내 농가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중국은 참다래 재배기술, 가격, 저장기술 등 모든 면에서 아직 우리를 위협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거지요.”

청두시 푸장현과 두장옌시(都江堰市) 등 대규모 기업농의 농장조차 참다래 열매를 일일이 종이로 포장해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인건비 부담 때문에 상상도 못할 일이다. 참다래 농사도 중국에서는 ‘인해전술’로 하고 있었다. 개화기에 수분도 칫솔을 이용해 사람 손으로 한다는 게 농장 직원의 말이다. 아예 기계농이 불가능하게 그루 사이의 간격도 2m×3m 정도로 밀식해 놓았다.

“이탈리아 참다래는 kg당 500~600원 정도지만 냉동 컨테이너에 선적해 인천항에 들어오면 1600원이 됩니다. 이게 시중에서는 3000원 정도 하지요. 중국 참다래도 현지에서 20~60위안까지 한다니까 가격으로도 우리와 경쟁이 안 됩니다.”

김 회장은 품종 경쟁력에서도 그리 걱정하지 않는다. 레드 계열인 홍양은 이미 국내에 들어와 있고, 진얀은 국내에서 육종한 골드 계열보다 낫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 품종 중에 탐을 낼 만한 게 별로 없었다”면서 “연수 목적 가운데 하나가 품종을 살펴보는 것인데, 정작 보고 싶었던 진타오는 없었다”며 아쉬워했다. 중국과 비교하면 우리나라에도 좋은 품종이 많다는 얘기다.

쓰촨성의 연평균 기온은 섭씨 16도 정도이고 연중 200일은 햇빛을 볼 수 없다. 일조시간이 연 1500시간 정도라고 한다. 겨울에도 좀처럼 영하로 내려가지 않고 가장 추울 때가 영하 2도 안팎이다. 이런 기후 조건이 아열대 작물인 참다래의 생육에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과일의 당도 등 맛을 높이는 데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바로 이 점이 김 회장이 한국 참다래가 명품인 점을 주장할 수 있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이런 조건에서는 과수가 그리 건강하게 생육하지 못하고 질 좋은 과일을 맺을 수 없습니다. 일조량이 많고 일교차가 큰 데서 자라는 한국 참다래가 명품이 될 수 있습니다.”

과일은 일조량이 많을 때 당도가 높아지고 일교차가 10도 이상 나면 맛과 향이 더욱 강해진다. 국산 사과나 배가 미국 등지에서 인기를 얻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육종전쟁의 가장 강력한 본진 속에서 오히려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게 이해가 될 것 같다. 자원과 기술이 열세라도 맛으로 경쟁할 수 있다는 ‘참다래판 천하삼분지계’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