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의 장

고수를 찾아서 <9> 골굴사 선무도 적운 스님

醉月 2010. 4. 10. 09:51
"시대 정신문화 이끌 수 있는 무도인이 참 고수"
선무도는 단순한 무술 아닌 참선수행의 한 방편
대중포교 위해 불교금강영관 현대인 맞게 재정립
"늙어 죽는 순간까지 그동안 닦은 공력 유지하고파"



경주 골굴사(骨窟寺). 신라에 불교가 한창 번창하던 6세기에 조성된 사찰.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석굴사원. 이름부터가 신비롭다.

절로 가는 시간은 여유로웠다. 고즈넉한 길 역시 좋았다. 일 때문이 아니라면 콧노래가 절로 나올 법했다. 불교무술로 알려진 선무도(禪武道). 그것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설렘도 컸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마음은 무거웠다. 고수를 찾아 뵙겠다는 기자의 요청에 썩 내키지 않아하던 적운스님의 말이 떠오른 까닭이다. "선무도는 참선수행의 한 방편이라 무술 측면에서 접근하면 곤란하다"라는.

'함월산 골굴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일주문. 도심 속 무술도장의 문을 열고 들어갈 때는 느끼지 못했던 떨림이 전해져 온다. 먼저 마음을 추스려야 했다. '무술이면 다 같은 무술이지 뭐 그렇게까지…'라며 마음 한편에서 일었던 반감도 삭혀야 할 터.

한 스님이 아래쪽에서 일주문 쪽으로 걸어온다. 적운 큰스님. 선무도 대금강문 문주다. 사찰 안으로 들어서니 흰 진돗개 한 마리가 반갑게 스님을 맞는다. 목에는 염주를 둘렀다. '동아보살'. 17년생 암컷. 새벽이면 스님을 따라 예불까지 한다는 영물이다.

    골굴사 선무도 문주 적운 스님이 손가락의 연결상태를 통해 심리와 생리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영동좌관 수행을 하고 있다. 적운 스님 뒤쪽 제자들은 영동행관 이승형을 선보이고 있다.사진=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선무도, 깨달음을 위한 실천적 방편

먼저 궁금한 것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선무도가 무엇이냐는.

"일반인들은 선무도에 대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무술이라 먼저 생각하죠. 단순한 무술인줄로만 압니다. 하지만 선무도는 수행의 한 과정입니다. 불교의 참선은 좌선 입선 행선으로 나뉩니다. 또 '지(止-사마타:정신통일)'와 '관(觀-위빠사나:관찰)을 함께 수행하라고 가르칩니다. 선무도는 행선에 해당하는 것이고 관법수행의 일종이죠. 전통적인 불교수행법이라 보면 됩니다."

불교 문외한이 한번에 알아듣기란 어렵기 그지없다. 다만 어렴풋이 감은 온다. 왜 스님이 처음에 '고수를 찾는다'는 기자의 말에 난색을 지었는지에 대해.

그렇지만 선무도가 불교수행법이라 해서 스님들 누구나가 익힐 수는 없는 노릇. 무술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다면 힘들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적운 스님은 출가 전 태권도 사범을 지낸 무술인 출신. 10살 무렵부터 운동을 시작했으니 무도 인생만 40년이 넘는다.

"운동을 하면서 세속적인 무술보다 높은 정신적 세계를 갈구하다 보니 방황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1975년 범어사로 갔지요. 그곳에서 양익 큰스님에게 '불교금강영관'을 7년 동안 전수받았습니다. 선방선원과 태백산 토굴 등에서 수련하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본래 자리로 돌아온 것이라 느낍니다. 전생에 저는 스님이었기 때문이죠. 경주 설씨, 원효대사 44대손입니다. 승려가 된 것은 필연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범어사 양익 큰스님은 승가에 비밀리에 전해져 오던 불교무술을 집대성한 인물. 1960년대 초 전국의 고승들을 찾아 다니며 이를 체계화해 범어사에 연수관을 열었다. 양익 큰스님은 한때 내로라하는 무술인들이 범어사에 찾아가 일합을 겨루기를 원했을 정도로 유명했다. '대웅전에서 종각까지 장삼을 펼친 채 독수리처럼 날아다닌다' '수m 높이의 일주문을 뛰어넘었다'라는 말이 돌 정도. 그러나 범어사에 온 무술인들은 대부분 "서로의 길이 따로 있어 겨룰 이유가 없다"는 양익 큰스님의 말에 따라 발길을 돌렸다. 적운 스님은 행자시절 석달이 되도록 양익 큰스님의 얼굴 한 번 못뵈었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양익 큰스님의 불교금강영관은 제자들에 따라 불무도 선관무 관선무 선무도로 조금씩 모양을 달리한다. 적운 스님은 1984년 포교를 목적으로 불교금강영관을 지금의 선무도란 이름으로 바꿨다. 일반인들이 불교금강영관이라는 말을 어려워해 쉬이 접근이 되지 않았던 것. 수행내용도 무술쪽보다는 명상이나 요가 등 참선을 강조한다. 선무도 수행법은 수행관(명상을 통한 마음 수련) 건강관(수행을 통한 신체기능 강화) 사회관(건강한 심신으로 사회 공헌) 등 세 가지 측면에서 이뤄진다.

"종교는 포교를 하지 않으면 망하는 겁니다. 그래서 효과적인 포교방법을 강구하다가 실천수행을 통해 불자들의 근기를 높여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겁니다. 20여년 전에만 해도 참선수행을 하는 불자들은 드물었죠. 선무도는 행선이다 보니 종교를 떠나 빨리 확산이 되더군요. 뭐, 건강에 좋으니까."

    선무도 수행과정의 한 동작을 선보이고 있는 적운 스님의 제자. #사회 이끌 철학이 있어야 고수

적운 스님이 수행 중이던 제자 몇 명을 모았다. 뜻밖에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다. 알고 본즉, 골굴사에는 적지 않은 수의 외국인들이 선무도를 수련 중이다. 지난해에는 2000여 명의 외국인이 골굴사를 찾았다.

보물 제581호인 마애여래불좌상이 정면으로 보이는 큰법당 앞의 수련장에 적운 스님이 제자들과 함께 섰다.

본 수련 전 심신을 이완시키는 '유연공(柔軟功)' 후 적운 스님이 영정좌관(靈靜坐觀)과 영동좌관(靈動坐觀)에 들어갔다. 영정좌관은 합장의 변화와 호흡의 조화를 통해 심신의 통일적 삼매(三昧·잡념을 버리고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는 일)를 구하는 기초적인 수련법. 영동좌관은 여러 가지 수인(手印·불교에서 주문을 욀 때 두 손의 손가락으로 나타내는 모양)의 연결 동작을 통해 심리와 생리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고도의 수행법. 선무도 사범 정도의 수행경지에 이르렀을 때 전수된다. 얼핏 보아서는 일반적인 참선. 그러나 빈틈없는 모습. 무턱대고 돌진했다가는 한 방에 튕겨져 나올 것 같은 무거운 기운이 느껴진다.

선무도에서 가장 동적인 수행법은 영동행관(靈動行觀). 여러 병장기 및 권법 구사법이 포함된다. 제자들이 시연에 들어갔다. 적운 스님의 뒷줄에 선 두 제자가 몇 번 가볍게 몸을 움직인다. 그러더니 놀랍게도 차례로 공중으로 사뿐히 뛰어오른다. 그것도 두 다리를 완전히 편 상태에서. 높이가 족히 1m는 됨직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무릎을 구부린 채 뛰어도 이르지 못할 높이. 웬만한 공격쯤은 모두 피할만한 도약이다. 영동행관 이승형(二乘型). 수행자가 깨달음의 차원을 신체의 동작으로 표현하여 말 그대로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심신일여(心身一如)'의 최고치를 표현하는 것.

더 놀라운 것은 영동행관 삼승형.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공중으로 뛰어 오르는 수행법이다. 그 상태에서 앞에 앉은 사람의 머리를 뛰어 넘을 수 있다. 하지만 적운 스님은 "오늘은 이승형까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무도의 동작이 다른 무술과 다른 것은 내공수련기법이 많다는 거죠. 즉 동(動)과 정(靜)이 함께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항상 몸과 마음이 평온해질 수 있는 겁니다."

적운 스님은 현재 골굴사 선무도를 중국 소림사 못지않은 문화상품으로 발전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사찰 내에 선무도 대학을 건립 중이며 해외에 지원을 잇달아 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국제포교사인 적운 스님은 통역없이 강의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국제적인 감각도 지니고 있다.

세속 무술인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적운 스님. 고수에 대해 과연 어떤 정의를 내릴까. 즉답이 돌아 왔다.

"몇 m를 뛰어 오르고 벽돌 몇 장을 잘 깬다고 해서 고수는 아닙니다. 이 시대의 정신문화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무도인만이 진정한 고수가 될 수 있는 거지요. 또 늙어 죽는 순간까지 그동안 닦은 수행력을 유지하면서 늘 제자들에게 지혜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범어사 양익 큰스님은 좌탈입망(앉은 채로 열반)했습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제자들에게 희망을 남겨 주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선무도란
불교 전래와 함께 맹아 싹터

선무도의 역사는 불교의 우리나라 전래와 함께 시작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화랑의 교육을 스님들이 담당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시대 때는 재가에서도 심신 수련법으로 일반화된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의 의병활동 기반이 되기도 했다.

선무도는 승병제도가 폐지된 19세기 후반까지 기림사 표충사 등 주요 사찰에서 승려들의 동적수련법으로 전해져 왔다. 갑오경장 전까지 기림사에는 300여 명의 승병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 승병은 왜구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주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자취를 감췄던 선무도는 1960년대 범어사 양익 큰스님에 의해 부활된다. 대중화가 된 것은 1980년대 초 적운스님이 포교활동에 나서면서부터다. 현대 체육학적 이론을 접목한 뒤 현대인의 언어감각에 맞춰 재정립했다.

선무도의 수행은 선요가-좌관법-입관법-행관법의 순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좌관법 이상은 고도의 수련을 요구한다. 따라서 일반인들은 굳이 무술을 배운다기 보다는 참선 등을 통한 정신수양이나 기초체력 단련에 먼저 초점을 맞추는 게 바람직하다.

골굴사는 국내 및 해외에 20여 개의 지원을 두고 있다. 부산에는 보림지원, 중앙동지원, 금정지원, 서면지원 등 4곳이 있다.

총본산에서 선무도를 직접 접해보고 싶다면 현재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골굴사의 템플스테이나 템플라이프(당일 체험)를 이용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