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을 대표하는 건 험준한 산의 낮은 목을 찾아 넘는 영남대로의 고갯길 ‘문경새재’입니다. 길은 이쪽과 저쪽을 잇는 물리적인 도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만, 때로는 방향과 도덕으로 읽힙니다. 길을 한자로 ‘도(道)’라고 적는 건 이런 이유겠지요. 문경을 찾아 나선 길 위에서 물리적인 길은 버리고, 길의 또 다른 의미인 도덕과 방향, 도리를 읽어 봤습니다. 굳게 문을 걸어 잠근 사찰에서, 물 위에 석선(石船)으로 떠 있는 정자에서 만난 것은 맑은 정신과 도리, 그리고 옛사람들이 정신의 방향타로 삼았던 풍경이었습니다. # 두 번의 결사, 그리고 개혁의 정신
정혜결사는 전남 순천의 송광사에서, 그리고 백련결사와 봉암결사는 경북 문경에서 있었다. 세 번의 결사 중 두 번이 다 문경 땅에서 이뤄졌다는 얘기다. 천태종의 백련결사가 이뤄진 건 문경 산북면의 절집 미면사다. 미면(米麵). 절집의 이름이 ‘쌀과 국수’다. 경내에 우물 두 개가 있는데 매일 한쪽에는 쌀이, 다른 한쪽에서는 국수가 나왔다는 얘기가 전하는 절집이다. 고려 혼란기에 고승들이 이 절집에서 백성들과 함께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러나 지금 미면사 자리는 염소를 방목하는 묵정밭과 수풀이 돼 버리고 말았다. 아쉽게도 절터의 자취라고는 남은 게 없다. # 결사 70년… 치열한 구도의 시간 봉암결사는 문경의 희양산 아래 절집 봉암사에서 이뤄졌다. 때는 1947년 10월. 봉암사에 성철스님과 자운, 보문, 우봉스님이 ‘부처님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뜻을 세우고 모였다. 그때부터 1950년 3월까지 2년 6개월 동안 결사에 참여한 50여 명의 스님들은 가부좌를 틀고 말 그대로 뼈를 깎는 수행에 들었다. 밭매고, 나무하고, 동냥하고, 수행하고….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하면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조선조의 억불정책과 일본 제국주의 탄압을 넘어서 불교 근간을 세우기 위한 한국불교의 혁신운동이 이렇게 시작됐다. 봉암사에서 결사가 이뤄진 지 올해로 꼭 70년이다. 봉암결사가 불교계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지금 절집의 발우공양이며 금강경, 반야심경 독송의식도 결사에서 시작됐다. 봉암결사에 참여한 선승들은 불교계를 이끄는 재목이 됐다. 결사 스님 중에서 성철스님을 비롯한 4명의 종정과 지관스님 등 7명의 총무원장이 나왔다. 희끗희끗한 바위산인 희양산을 봉황의 머리로 삼고, 구왕봉과 곰틀봉을 좌우의 날개로 거느리고 있는 자리. 이곳에 결사를 이끌었던 당대 고승의 수행의 자취가 남아있다.
# 세상과 돌아앉아 있는 절집 봉암사는 세상에서 돌아앉아 있다. 1982년 조계종단이 봉암사를 ‘종립특별선원’으로 지정하면서 산문은 굳게 닫혔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연중 외부인의 출입이 허용되는 건 부처님오신날 딱 하루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부터는 개방 기간을 4월 말부터 5월 초에 열리는 ‘문경 찻사발 축제’ 기간으로 확대했다. 그래 봐야 출입이 허용된 것도 9일뿐. 하루 출입 인원은 미리 예약한 200명이다. 그것도 절집에서는 안내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딱 1시간만 머문다는 조건이다. 지난 7일 축제가 끝나면서 봉암사는 다시 문을 닫았다. 이제 1년을 또 기다려야 발길을 들일 수 있는 봉암사를 찾아갔던 건 절집이 두르고 있는 맑은 정신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앞으로 1년을 기다려서 산문을 들어설 만한 가치가 있음을 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절집의 불탑이며 법당의 그윽함으로 마음이 평안해지는 데다,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마음을 다하는 수행을 목격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동이니 말이다. 봉암사는 35년 동안 문을 닫아걸면서 ‘신비의 영역’이 됐다. 흐트러진 마음으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래서 발소리마저 조심스러워지는 수행의 맑은 정신이 가득 고인 그런 공간이 된 것이다. # 곳곳에서 맑은 기운이 출렁이다
봉암사 중심의 삼층석탑부터 모시저고리를 입은 듯 유독 흰빛으로 말갛다. 절집이 뒤로 두고 있는 희양산의 거대한 바위와 색이 같다. 탑은 단순미의 절정이다. 1100년이 넘었으되 탑 윗부분인 보주며 보륜까지 거의 완전하다. 불국사의 석가탑을 모델로 삼았다는데, 석가탑이 장중한 맛을 준다면 이 탑은 단정하면서도 날렵한 상승미를 보여준다. 절집 위쪽 숲길을 걸어 들어가 만나는 백운계곡의 마애여래좌상도 유독 희고 맑다. 일부러 그런 바위를 택했는지 바위를 파서 새겨넣은 여래상의 얼굴이 환하다. 돌에서 흰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듯도 하고, 순백의 창호문을 통과한 빛을 받고 있는 듯도 하다. 문경을 통틀어 국보는 단 한 점. 그게 봉암사에 있다. 지증대사의 부도비다. 멀리 남해에서 가져온 점판암에다 지증대사의 업적을 새긴 것이라는데, 사실 이것보다는 그 옆에 있는 보물인 지증대사 부도가 눈길을 더 붙잡는다. 통일신라 석공예술의 극치라는 말은 여기다 붙여줘야 마땅하리라. 부도는 기품이 넘치고 힘차며 아름답다. 단단한 화강암을 비누 조각처럼 세밀하게 깎아낸 솜씨라니…. 한 쪽의 지붕이 깨지는 바람에 국보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크기와 솜씨로 보면 명품도 이런 명품이 없다. 어디 이뿐일까. 봉암사에서는 목탑형식으로 지어진 극락전도, 희양산의 흰 암봉을 이고 있어 북악산을 두르고 있는 ‘청와대’와 꼭 빼닮은 수행법당의 장중함도, 절집을 가득 채운 적막 사이로 끼어드는 새소리도 모두 발길을 붙잡는다. 봉암사에서 주어진 1시간이 돌아서는 내내 아쉬울 따름이다.
# 전나무 숲길 지나 만나는 겹벚꽃 문경의 절집들은 봉암사의 기운을 받았을까, 아니면 거꾸로 문경의 절집들이 봉암사의 기운을 만들었을까. 산문을 걸어 잠근 봉암사를 빼고도 문경에는 내로라하는 기품있는 절집이 여럿 있다. 문경 산북면의 김룡사와 대승사가 대표적인 곳이다. 두 절집은 지척에 있으되 들어선 자리는 사뭇 다르다. 김룡사는 들을 가로질러 산자락 아래 들어서 있고, 대승사는 비탈진 산길을 차고 올라간 길 끝에 있다. 김룡사는 한때 48개나 되는 말사를 거느린 대찰이었다. 봉암결사를 이끌었던 성철스님이 대구 파계사 성전암의 문을 열고 나와 대중에게 최초의 법문을 한 곳도 바로 이곳 김룡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때 거느렸던 직지사의 밑으로 들어갔다. 김룡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산문 앞에 도열한 전나무다. 일주문을 지나 푸른 이끼로 뒤덮인 거대한 전나무들이 만든 어둑한 숲길 끝에 절이 있다. 숲이 깊어 꽃이 늦는 모양인지 경내에는 치렁치렁한 겹벚꽃이 이제야 지고 있다. 김룡사에는 법당 곳곳에 심은 겹벚꽃 나무의 꽃이 유난히 탐스럽다. 김룡사 절 뒤편 산비탈에는 석조약사여래입상과 오층석탑이 있다. 대충대충 깎은 솜씨. ‘어찌 저리 못생겼을까’란 말이 저절로 툭 튀어나온다. 여래상은 뭉툭한 코와 이지러진 얼굴, 몸통은 대충 윤곽만 다듬어냈다. 석탑은 이보다 더하다. 아무렇게나 돌을 썰어내서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품격이나 솜씨를 거론하기가 민망할 정도다. 그럼에도 백성들이 두 손을 모아 빌었던 건 이런 투박한 불상과 석탑 앞이 아니었을까. 화려한 외양이 아니라 그 앞에 바쳐진 지극한 마음을 생각한다면 이것도 허투루 볼 일이 아니다.
# 암자로 가는 길에 만난 극상의 숲 대승사는 공덕산 중턱에 들어선 절집이다. 사과밭과 가지를 뒤튼 노송 사이로 이어지는 비탈진 산길을 굽이굽이 한참 올라야 하지만, 말끔하게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은 넓고 번듯하다. 잇단 불사로 경내에는 법당이 빼곡한데, 그래도 건물 하나하나에서 품격이 느껴진다. 대승사 역시 유서깊은 절집이다. 김룡사 창건 한 해 전에 창건됐다. 신라 진평왕 때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바위(사불바위)가 산꼭대기에 내려앉자 왕이 친히 와서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대승사에서 산내 암자 윤필암까지 이어지는 1㎞의 숲길 중간쯤에 사불바위로 오르는 길이 있다. 거기서 사불바위까지는 20분이 채 안 걸린다. 사불바위를 앞에 두고 서면 윤필암과 묘적암 일대의 경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암자의 단정한 모습도 좋지만 신록이 녹음으로 번져가는 숲의 경관이 눈이 다 부실 지경이다. 대승사의 압권이라면 윤필암에서 묘적암으로 이어지는 숲길이다. 길은 느티나무와 소나무, 참나무, 서어나무가 이뤄낸 극상의 숲 속에 있다. 온통 초록의 바탕에다 먹으로 그린 듯한 나무둥치가 신령스러운 느낌마저 준다. 이쪽 숲에 바위벽에 새긴 마애여래 좌상이 있는데, 거기까지 오르는 계단 길의 경관이 그림과도 같다. 길 끝의 암자 묘적암은 늘 문을 닫아걸고 있는데, 그럼에도 이 길을 권하는 건 극상의 숲이 주는 청량감 때문이다. 한번 발을 디디면 좀처럼 나가고 싶지 않은 숲이 거기 있다.
# 바위로 지은 배가 떠 있는 풍경 여기까지가 문경의 사찰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제부터는 유교 이야기다. 유교의 선비문화를 상징하는 건 ‘구곡(九谷)’이다. 빼어난 자연 경관에 이름을 달아놓은 구곡은 팔경(八景)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이치 속에서 삶의 도리를 찾았던 선비들의 유가적 전통을 드러낸다. 문경 땅에는 구곡이 많다. 선유구곡, 쌍용구곡, 화지구곡, 석문구곡…. 구곡이 많다는 건 그만큼 경치가 좋은 곳이 많다는 뜻이다. 그중 금천의 물길이 흘러내리는 석문구곡에 정자 주암정이 있다. 문경의 정자를 경관만으로 순위를 매겨본다면 그 맨 앞줄에다 적어놓아야 마땅한 곳이다. 주암정은 ‘배 주(舟)’자에 ‘바위 암(巖)’자를 쓰는데 이름처럼 배 모양의 바위 위에 지어놓은 정자다. 바위 모양이 어찌나 배와 똑같이 닮았던지 신비로운 느낌마저 준다. 누구나 정자가 들어앉은 모습을 보면 ‘물 위에 배가 지나는’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정자는 500년 전 조선 현종 때 벼슬을 한 조상을 기리기 위해 인천 채씨 문중에서 해방 한 해 전인 1944년에 세운 것. 본래 금천의 물가에 있었던 것인데, 물길이 달라지면서 천변에 물을 가둬 연못을 조성했다. 비록 정자의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정자 앞에 서면 500년 전 바위배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즐겼을 옛 선비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 정자와 황금비율의 소나무 두 번째로 꼽을 곳이 진남교반 일대를 굽어보는 자리에 세워진 정자 봉생정이다. 진남교반은 문경의 명소 중의 명소로 꼽히는 곳. 일제강점기인 1933년 대구일보가 ‘경북 8경’을 정하기 위해 명승지를 놓고 투표를 실시한 결과 제1경으로 선정된 곳이 바로 진남교반이다. 제2경은 문경새재였으니 1경과 2경을 모두 문경이 가져간 셈이다. 야트막한 야산 정상에 지어진 봉생정은 거기서 물길을 굽어보는 경관도 훌륭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이 툇마루에 앉으면 돌담 너머로 보이는 기괴한 가지의 소나무다. 툇마루에 앉아보면 4대 3 황금비율의 자리에서 아름드리 소나무가 가지를 뒤틀고 서 있다. 봉생정에 새겨진 건 서애 유성룡의 자취다. 하회마을과 한양 사이를 오가는 길에 서애는 여기 봉생정에서 쉬어갔다. 여기서 그는 고모산성과 좁은 목을 넘어가는 위태로운 고갯길 토끼비리 일대의 지형과 지세를 익혔을 것이었다. 그리고 훗날 ‘징비록’을 쓰면서 이처럼 천혜의 지형을 내버려두고, 충주의 탄금대에서 적군과 맞서 결국 대패하고 만 신립 장군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 민박집 곁방이 된 정자 이야기 정자에 깃든 이야기로 말하자면 쌍용계곡의 병천정과 산양면의 원모정도 빼놓을 수 없다. 문경과 상주의 경계에 있는 병천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 송명흠이 쌍용구곡을 소요하며 머물던 정자다. 그는 영조의 면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사도세자의 구명을 주장한 대쪽 같은 선비였다. 병천정은 그러나 안내판도 없고, 하루 7만 원에 행락객들에게 잠자리로 내주는 민박집 곁방 신세다. 정자는 문경 땅에 있지만, 상주 지역 문중으로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문경도, 상주도 관리하지 않은 탓이다. 근래 보수한 산양면의 원모정은 부자의 뜨거운 정(情)이 깃든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팔순의 아버지가 자신을 업고 피란하는 아들에게 ‘나를 내려두고 가라’고 간청했으나 아들이 그 말을 듣지 않자 업은 아들의 귀를 물어뜯어 온통 피투성이가 됐단다. 결국 부자는 왜적에 붙들렸는데, 효심에 감동한 왜적도 부자를 살려줘 이를 기리려 정자를 세운 것이다. 문경새재로만 알려진 경북 문경 땅 곳곳에는 이렇게 실타래처럼 풀려나오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 이야기들이 말하고자 하는 건 하나같이 경계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지켜야 할 정신 같은 것들 말이다.
정자는 찾기가 좀 어렵다. 주암정 주소는 산북면 서중리 44-4. 봉생정은 마성면 신현3리 마을회관에서 봉생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봉생 2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으로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자그마한 언덕 위로 올라가면 된다. 병천정은 농암면 내서리에 있다. 쌍용계곡 휴게소를 먼저 찾은 뒤에 휴게소 옆의 폐업한 식당 ‘늑천정가든’ 앞에 세워둔 늑천정 비석을 따라 오르면 정자가 있다. 정자의 주인 송명흠의 호가 늑천이라 병천정을 늑천정이라고도 부른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문경새재 들머리에 문경관광호텔(054-571-8001)이 있다. 시설은 낡은 편이지만 객실은 깨끗한 편. 인근에 새재 로그하우스(010-6780-2932) 등 펜션들이 많다. 쌍용계곡 쪽에 STX리조트(054-460-5400)도 추천할 만한 곳이다. 문경온천 주변에도 온천호텔 문경(054-572-1040) 문경아리랑호텔(054-572-5080) 등 숙소들이 많다. 문경새재 입구의 문경유스호스텔 뒤편의 ‘문경산채비빔밥’(054-571-3736)은 순한 맛의 비빔밥을 낸다. 문경은 사료에 약돌을 섞어 먹여 키운 약돌돼지가 유명하다. 성보예술촌의 ‘옹기에 한가득’(054-555-1234)은 옹기 안에서 숙성시킨 부드러운 맛의 돼지고기를 내온다. 문경온천지구의 ‘봉황한정식’(054-571-5577)도 추천할 만한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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