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강릉 "숨겨진 속살"을 찾아서

醉月 2016. 3. 30. 21:36

대관령의 산줄기를 병풍으로 삼은 강원 강릉의 학산 자락 아래 옛 절 굴산사 터를 540년 동안 지켜온 소나무 거목. 고사한 가지를 잘라낸 흔적과 비바람에 찢긴 상처가 남아 있지만 활개 치듯 가지를 기기묘묘하게 뻗은 채 우람하고 당당하게 서 있다.


강원 강릉에서 소나무는 웬만한 수령과 크기로는 명함조차 내밀지 못합니다. 딱히 어디라고 할 것 없이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훤칠한 금강송들이 우람하게 서 있으니 말입니다. 활개를 치듯 서 있는 것도 있고, 늘씬한 자태로 하늘을 떠받치듯 서 있는 것도 있습니다. 대관령의 산자락에도, 오래된 한옥의 담 옆에도,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에도 맑고 청량한 기운의 소나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강릉의 소나무 중에서 누군가 ‘딱 한 그루만 꼽아달라’고 한다면 여기를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기묘하게 자란 오죽헌의 율곡 소나무도, 곧은 정신처럼 수직으로 치솟아 자라는 선교장의 소나무도, 고즈넉한 옛 절터에서 불붙은 화염처럼 가지를 펼쳐 하늘을 가리고 서 있는 이 나무의 위용에다 대면 어림도 없을 듯합니다.

신기(神氣) 넘치는 그 나무가 강릉 구정면 학산리의 학산(鶴山) 아래 신라의 최대 사찰이었다던 옛 절 굴산사의 터를 지키고 있습니다. 옛 절터 깊숙한 언덕 위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자리에서 저 혼자 우뚝 서서 보낸 시간만 540년. 발굴 작업이 중단된 절터 안쪽으로 조심조심 들어가 거북 등 같은 둥치 앞에 바짝 다가가 서보아야 이 소나무가 뿜어내는 당당한 기운을 만날 수 있습니다. 소나무 앞에는 보호수임을 알리는 팻말 하나만 달랑 세워져 있습니다만, 고작 이 정도로 대접하는 게 못내 안타까웠습니다.

강릉은 ‘쉬운’ 여행지입니다. 명성으로 순서를 정하면 맨 앞에 정동진이나 경포호가 꼽힐 것이고, 오죽헌과 선교장이 그 뒷줄에 놓이겠지요. 여기다가 커피로 이름난 안목 해변이나, 좌판마다 갓 잡아올린 생선이 펄떡거리는 주문진시장을 끼워 넣으면 쉽게 여행코스가 만들어집니다. 쉽다는 건 그만큼 익숙하다는 것. 이렇게 익숙한 풍경에는 기대가 없습니다.

강릉에서 구태여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을 기웃거렸던 건, 낯선 것들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이름난 곳보다 그 명성에 가려진 곳들을, 익숙한 방법보다 낯선 방법으로 여정을 찾아 나선 길이었습니다. 그 길에는 율곡과 신사임당에서 허난설헌까지 문학으로 잇는 길이 있었으며, 600년 묵은 율곡매가 틔워낸 연분홍 매화의 기품과 어둑한 초당 숲의 훤칠한 소나무로 행로를 잡을 수도 있었습니다. 스러진 옛 절터 빈 공간의 충만함을 둘러보는 여정과 벚꽃이 만개할 무렵 경포호반을 따라가는 열두 개 정자 순례는 또 어떻고요. 강릉의 덜 익숙하되, 그래서 더 아름다운 곳으로 찾아갑니다.

강릉 경포호를 끼고 있는 누각 경포대에 환하게 불이 밝혀졌다. 보름을 살짝 넘긴 날이었지만, 제법 환한 달빛이 경포호 위로 떠올랐다. 옛사람들은 경포호에서의 달맞이를 최고의 풍류로 쳤다지만, 누각의 밤 풍경이 지금처럼 화려하지 않았으리라.




# 강릉의 신화와 역사의 중심 학산

강릉이라면 누구나 바다부터 연상하지만 내륙에는 제법 너른 들을 품고 있는 그윽한 마을도 있다. 구정면 학산리의 학산(鶴山)마을. 여기야말로 강릉의 신화와 역사, 그리고 정신문화를 관통하는 곳이다. 강릉지방에는 ‘생거학산(生居鶴山)’이란 얘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다. 사람이 태어나면 학산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 학산의 중심에 신라 말엽의 선승인 ‘범일국사’가 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범일은 ‘국사(國師)’가 아니었다. 국사란 불가의 법계 중 가장 높은 등급으로 지덕(智德)이 높아 나라의 스승이 될 만한 승려에게 조정(朝廷)에서 내리던 칭호다. 범일은 신라의 3명의 왕, 그러니까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으로부터 나라의 스승인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되어달라 초청받았다. 그러나 그는 나서지 않았다. 대신 그는 굴산사에서 40년을 머물며 수도에만 전념했다.

범일은 과격했다. 불법의 깨달음이란 언어가 아니라 ‘마음’에서 온다고 믿었다. 이른바 ‘진귀조사설’이다. 뭐 별스럽지 않은 주장처럼 보이지만, 교학 불교가 대세이던 당시에는 이만저만한 반역이 아니었다. 선의 원류를 석가모니불에 두지 않고, 석가모니의 스승 진귀 조사의 법맥에서 찾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경전 공부가 아니라 좌선수행을 통한 직관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범일의 파격적인 주장으로 불교는 낮은 자리로 내려왔다.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이들도 이제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강릉을 비롯한 영동지역에서 범일의 그늘은 넓고 짙다. 범일은 죽어서 대관령의 성황신이 됐다.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대관령국사성황’이 바로 범일이다. 범일은 삶을 보살피고 자연재해로부터 보호해주는 수호신이 된 것이다.

범일의 자취가 뚜렷한 곳이 바로 이곳 학산이다. 범일은 학산에서 나고, 또 죽었다. 해가 담긴 우물물을 마신 마을의 처녀에게서 범일은 태어났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 뒷산 학바위에다 버렸는데, 며칠 뒤 가보니 학이 돌보고 있었단다. 그제야 처녀는 자식을 거두었고, 그 자식은 열다섯의 나이에 불가에 입문,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와 선승으로 법맥을 떨쳤다.

# 굴산사지의 소나무에서 범일을 보다

학산마을은 강릉에도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푸근하다. 대관령의 자락으로 우뚝 솟은 칠성산과 매화봉을 병풍으로 삼고 야트막한 산자락 아래 고즈넉하게 마을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 범일이 창건한 절집 굴산사가 있었다. 신라 말기 이른바 ‘구산선문’의 맨 앞줄에 섰던 사굴산파가 여기 굴산사에서 범일국사에 의해 문을 열었다.

지금은 절집의 자취가 모두 폐허가 돼서 당간지주와 석불, 부도탑만 띄엄띄엄 남아있지만, 한때 번성했던 절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건 압도적인 크기의 당간지주다. 기를 매단 깃대를 세우는 돌로 된 당간지주의 높이가 자그마치 5.4m. 게다가 옛 절터의 중심에서 절집의 문이 되는 당간지주까지의 거리가 400m가 넘는다. 그러니 승려 수만 200명을 헤아렸다는 신라 때 굴산사는 학산마을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을 것이었다.

절집이 들어섰던 너른 터에는 범일의 탄생설화가 깃든 우물, 그리고 부도 한 기가 전부다. 이마저도 1936년 병자년 대홍수로 드러난 것이다. 절터와 기와가 발견되면서 범일국사의 자취가 모습을 처음 드러냈다. 그 이후 몇 번의 발굴에도 찾을 수 없었던 절집의 흔적이 2002년 태풍 루사로 발견됐다. 루사가 강릉 일대를 휩쓸고 가면서 절집 터의 농가들이 다 쓸려 내려간 자리에 비로소 건물지와 담장, 계단 등의 자취가 드러난 것이었다. 범일의 자취와 사굴산문의 위용이 마치 현몽처럼 나타난 것이다.

굴산사 절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세련된 솜씨로 빚어낸 부도, 그리고 부도를 마주 보고 봉긋하게 솟은 작은 언덕 위에 활개를 치고 서 있는 소나무였다. 범일의 탄생설화가 깃든 우물을 복원해 놓기도 했는데, 오히려 그게 너무 옹색해서 거슬렸다.

길가에서 본 소나무는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절터 깊숙한 부도 쪽으로 돌아 들어가자 그제야 소나무는 신령스러운 기운을 뿜어냈다. 거대한 둥치와 구불구불한 가지를 부챗살처럼 펴고 있는 모습이 탄성을 자아냈다. 굵은 가지 몇 개를 잘라냈고, 비바람에 찢긴 흔적도 남아 있긴 했지만, 병자년의 대홍수와 태풍 루사를 이기고 450년 동안 제자리를 지켜온 소나무는 아직도 기운이 성성했다. 소나무보다 500년이 넘는 시간 저편에 범일이 있지만, 그 나무 앞에서 범일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 허난설헌의 비극과 초당의 솔숲

▲ 강릉 오죽헌의 담장 너머로 환하게 꽃을 피운 율곡매. 수령 600년의 늙은 나무 가지 끝에서 연분홍의 매화가 가득 피어났다.

강릉의 소나무를 얘기하자면 초당 숲을 빼놓을 수 없겠다. 훤칠하게 자란 붉은 금강송이 경포호와 해안 사이에서 깊은 숲을 이루고 있는 초당동의 솔숲이다. 숲은 허난설헌의 생가터를 끼고 있다.

허난설헌. 그는 400여 년 전 시대와 불화하며 고통의 삶을 살면서도 빼어난 시를 남긴 조선시대 여인이다. 여섯 번의 파직과 세 번의 유배를 거쳐 좌참찬까지 올랐다가 역모죄로 저잣거리에 죽은 채로 매달린 일곱 살 터울의 동생 허균의 삶도 드라마틱하지만, 질곡과 고통 속에서 스물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뜬 허난설헌의 삶도 못지않다.

사실 허난설헌이 살았던 생가는 남아있지 않다. 동생 허균이 역모의 죄로 능지처참되고 멸문지화를 당해 가문 전체가 풍비박산 나면서 생가는 사라졌을 것이었다. 그러다 200년 전쯤 집터에 집이 들어섰고, 몇 사람의 주인을 거쳐 강릉시가 그 집을 사들였고 그 집을 단장해 개방하고 있다.

비극의 가족사가 새겨진 생가터에 세워진 집은 수수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안채 마당의 매화나무는 꽃을 환하게 틔워냈는데, 솟을대문 앞 벚나무 노거수는 아직 꽃눈을 닫고 있었다. 벚꽃 잎이 분분하게 날릴 때라면 더 좋으리라. 한 번도 꽃으로 피어나지 못했던 허난설헌의 비극적인 삶 위로 그를 위로하듯 벚꽃 잎이 화려하게 흩날린다면 말이다.

생가터 안채 담 너머에는 제법 너른 솔숲이 있다. 온통 둥치를 곧게 뻗은 금강 소나무들이다. 도열한 소나무들이 이루는 숲의 청량함과 깊이감이라니…. 봄볕 아래 소풍 온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초록의 솔숲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쯤에서 허난설헌이 남긴 시 한 편. ‘가을의 호수는 맑고도 넓어 푸른 물은 구슬처럼 빛나는데/ 연꽃 무성한 곳에다 목란 배를 매어 두었네/ 임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 따서 던지고는/ 행여나 누가 보았을까봐 한나절 혼자서 부끄러웠네’ 아마도 시 속의 호수는 생가터의 솔숲 끝에서 만나는 경포호였으리라.

# 경포호, 강릉 풍류의 중심

경포호는 100년 전까지만 해도 지금 크기의 두 배에 달했다. 당장 먹고 사는 데 급급했던 1960년대 호수 주변 습지를 농경지로 개간하고, 1970년대 초 경포호로 유입되던 경포천과 안현천 물길을 바다로 직접 이으면서 경포호의 크기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오래전 강릉을 찾은 선비들의 풍류가 그랬듯, 지금의 여행도 경포호가 중심이다. 언덕 위의 경포대에 들어서 호수를 굽어보거나, 호수 주위를 가볍게 산책하고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그러나 이것 말고도 경포호를 더 깊이, 그리고 더 느긋하게 보는 방법이 있다. 호수 주변의 열두 개 누각과 정자를 두루 둘러보며 걷는 것이다.

첫 번째 노정은 물론 강릉을 대표하는 정자 경포대다. ‘거울같이 맑은 호수’를 이름으로 삼은 웅장한 정자 경포대는 고려 때 세워졌다. 경포대에는 과거에도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몰려들었다. 누각 안쪽에 내걸린 현판이 이를 증명한다. 현판에는 숙종 임금의 시도 있다. ‘난초지초 동과 서로 가지런히 감아 돌고/ 십리 호수 물안개는 물속까지 비추네/ 아침 햇살 저녁노을 천 만 가지 형상인데/ 바람결에 잔을 드니 흥겨움이 무궁하네.’ 숙종은 이곳에 직접 와보지 않았지만 궁중 화가를 시켜 그림을 그려오게 하고 그 그림을 보고 이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그림 한 장의 풍류로 마음의 술잔을 들었던 셈이다.

경포대 용마루 아래 걸린 ‘제일강산(第一江山)’이란 크고 힘찬 글씨는 중국 송나라 명필 미불의 것이라는 주장과 명나라 서예가 주지번의 글씨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본래 ‘천하제일강산’이란 현판을 내걸었는데,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천하(天下)’란 글자가 떼어졌다는 뒷얘기도 전한다.

# 경포호의 12개 정자와 율곡매의 안부

경포호 서쪽에는 별당으로 지은 정자 해운정이 있다. 500여 년 전 강원 관찰사가 송시열에게 청해 현판 글씨를 받아 걸고 여름이면 대청에 네 짝의 문짝을 들어 올려 실내를 전부 개방해 호수를 바라보며 별당생활을 하던 곳이다. 물길이 바뀌고 매립이 이뤄져 경포호는 저 멀리 물러가고 말았지만 기단과 처마를 높인 정자의 품격은 여전하다.

이 밖에도 호수를 따라가면 금란정과 방해정, 경호정과 호해정, 석란정 등이 이어진다. 호수 주위로 차로가 놓이면서 예전만큼의 풍류는 없지만, 누각과 정자마다 저마다 사연이 담겨 있어 느긋한 걸음으로 여유 있게 돌아보는 맛이 괜찮다. 이 중에서 상영정은 호수를 내려다보는 나지막한 언덕에 있어 비가 내리는 날 처마 아래 툇마루에 앉아서 호수를 바라보는 자리로 딱 제격이다.

마지막으로 이즈음 강릉을 찾았다면 기별을 꼭 물어야 할 것 한 가지. 다름 아닌 오죽헌의 율곡매다. 율곡매는 자경문 안쪽 오죽헌 곁에서 자라는 매화나무다. 둥치는 검고 굵고 수피는 거친 데다 딱따구리의 극성에 밑동에는 플라스틱 망까지 덮여 있다. 그런데 그 가지 끝에 피어난 매화가 하늘하늘 여린 분홍빛이다. 매화나무의 수령이 600년을 넘겼으니 율곡의 생전에도 제법 굵은 가지 끝에 이렇게 서정적인 꽃을 피웠으리라. 매화는 지난 주말에 절정을 향해가고 있었다.

오죽헌 마당에는 신사임당 배롱나무와 율곡 소나무도 있다. 둘 다 아름드리 거목인 데다 배롱나무는 매끄러운 수피의 가지가 마구 뒤틀린 모습이, 소나무는 낭창거리는 붓으로 그린 듯 유연하게 몸을 기울여 자라는 수형이 눈길을 붙잡는다.

다들 모르고 지나치지만, 율곡의 초상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 뒤쪽에도 검은 대나무 숲 너머로 힘차게 치솟은 소나무들이 이룬 숲이 비밀처럼 숨어 있다. 돌담을 끼고 금강송의 붉은 가지들이 청량한 기운을 뿜어내는 곳이다.



◇굴산사지 가는 길 =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강릉갈림목에서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남강릉으로 내려온다. 어단리 쪽으로 좌회전해 현천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해 금평로를 따라 물길을 끼고 달리면 학산 오독떼기전수관이 나오는데 전수관 건너편이 굴산사지다. 오죽헌을 가려면 강릉나들목으로 나와 경강로를 타고 강릉시청 방향으로 가다가 홍제교차로에서 좌회전한다. 여기서 7번 국도를 따라 강릉문화원 앞을 지나 강릉대 앞길로 접어들면 바로 오죽헌이다. 허난설헌 생가터는 경포호의 남쪽에 있다. 강릉시내 한복판인 강릉역오거리에서 YMCA 쪽으로 방향을 잡아 교통로와 동명로를 따라 직진한 뒤 한전 사옥을 지나 좌회전해서 들어가면 된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경포해수욕장 일대에는 호텔과 모텔은 물론 제법 분위기 있는 펜션들도 많다. 굳이 해수욕장이 아니더라도 강릉의 해안을 따라 포구마다 펜션이나 모텔들이 즐비하다. 가족여행이라면 경포 해변의 씨마크호텔(033-650-7000)이나 라카이 샌드파인리조트(1644-3001)를 가장 추천할 만하다.

강릉 사천면 사천진 포구에는 물회집이 모여 있다. 이 중 장안횟집(033-644-1136)이 첫손으로 꼽히는 곳이다. 물가자미를 뼈째 썰어서 푸짐하게 내온다. 1만5000원짜리 물회를 시키면 우럭미역국이 딸려 나온다. 강릉 도심에서는 이른바 ‘대학로’로 불리는 신영극장 일대의 골목에 있는 금학칼국수(033-646-0175)를 추천한다. 메뉴는 칼국수와 콩나물밥 단 두 가지. 된장을 풀고 고춧가루를 가미한 국물에다 얇게 밀어낸 칼국수를 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