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단체&요결

月窓居士의 술몽쇄언(述夢灑言)

醉月 2011. 4. 19. 08:48
월창거사(月窓居士) 김대현(金大鉉)의 꿈에 대한 명저 술몽쇄언(述夢灑言)을 소개한다

 

꿈으로 인생을 말하다

꿈으로 인생을 말하고, 인생을 꿈으로 설명하는 사유의 결정판과도 같은 책이 있다.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격찬을 받으며 회자되는 술몽쇄언(述夢灑言)이 바로 그 책이다 

월창거사(月窓居士) 라 불리우는 조선후기의 사람 김대현(金大鉉)이 지었다는 이 책은 꿈에 비유하여 읽는이로 하여금 내밀한 사색의 시간을 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작가에 대하여 그를 월창거사라 이른다는 말밖에 나와있지 않으나, 이능화의 <불교통사>에 보면 월창거사가 김대현의 호라고 나와있다.

 

그는 일찍이 유가와 도가에 능통한 사람이었는데, 40세가 넘어 <능엄경>을 읽고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후 <자학정전(字學正典)>과 이책 술몽쇄언만 남기고 자신이 지은 모든 책을 불사르고 불학(佛學)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불교적 세계관의 바탕위에 쓰여진 글임에도 불구하고 佛이라는 글자가 한번도 나오지 않는 이 책에서 월창거사는 꿈과 깨어있음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세상 사람들은 깬것을 떳떳함(常)이라고, 꿈꾸는 것을 환상이라 한다. 꿈이라는 것은 깨지 않은 것의 이름이고, 깨었다 함은 미혹하지 않은 것을 일컫는 말이다 "

 

이 글은 술몽쇄언 의 <知常>편에 나오는 글이다. "知常" 이라는 의미는 영원불멸의 무엇인가를 안다는 뜻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삶이 마야이고, 매트릭스라면 우리에게 참된 것은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월창거사는 이런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일원(一元)은 천지의 꿈이고, 일세(一世)는 사람(人物)의 꿈이다. 일원은 큰 꿈이고, 일세는 작은 꿈이다.
만물 중에는 그 생명이 만 년 천 년 가는 것이 있고, 백년 십년 가는 것이 있으며, 잠깐 났다가 곧 죽는 것이 있다.
장수(長壽)한다는 것은 긴 꿈이요, 요사(夭死)한다는 것은 짧은 꿈이다.
꿈을 깨기 전이라면 수(壽)가 비록 만 년 천 년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즉 만 년 천 년의 긴 꿈속의 일일 뿐이다. 저 하룻밤의 꿈이 어떤 것은 해(歲)를 지나는 긴 꿈이 있고, 어떤 것은 찰라의 꿈이 있다.
길고 짧음이 비록 다르나 모두 다 환각(幻覺)으로 오는 것이니, 한 번 웃고 말아야 할 것인데,
꿈속에 사는 이들은 오히려 간절히 연모(戀慕)하여 마지 않는도다."

 

<壽千> 편에 나오는 위 문장은 모든 것이 꿈인 바에야 생명의 길고 짦음이 무어 그리 중요하겠는가를 역설하고 있다.

하룻밤의 꿈인 것을 알지 못하고 그토록 삶에 아둥바둥 집착하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운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술몽쇄언은 세상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든지 간에 곂코 인간세계를 벗어날 수 없음을 마지막 장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世界>편의 다음 문장은 우리가 깨어나야 할 꿈의 깊이가 얼마나 아득한지를 시사하고 있다

 

"열 사람이 함께 잠을 잘대에 제각기 꿈 하나씩을 꾸게 되면, 각자의 꿈속에는 천지만물이 있고 영광과 치욕이 있고 장수와 단명이 있을 것이다. 한방 안에서 반밤(半夜)사이에 열 개의 세계가 개벽되어, 오램과 잠깐인 것이 서로 가지런하지 않으며, 정식(精識)과 대경(對境)의 차리가 이와 같다. 그리하여 甲의 꿈속에서 乙의 꿈속의 세계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을의 꿈속에서 갑의 꿈속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대체로 그 환상속에서 보는 것이 환상의 경계밖에 나가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하니 세상 사람들이 삼천대천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괴이하다고 할 수없다.

 

월창거사 김대현은 최후의 장에서 어떻게 꿈에서 깨어 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해 준다. 마지막 정념(正念)이라는 장에서 그는 꿈으로 비유한 인생이라는 거대한 환영을 어떻게 하면 벗어 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것을 도거(悼擧)라고 한다. 도거하는 자는 산란(散亂)하게 된다. 마음속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완공(頑空)이라 한다. 완공한 자는 꿈이 혼침(昏沈)하게 된다. 생각이 있어도 꿈이 되고 없어도 또한 꿈이 된다. 그러니 전도(轉到)된 몽상을 멀리 떠난 뒤라야 정념(正念)이러고 말 할 수 있다. 正念이란 것은 한 생각 한 생각이 무념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어 고요히 움직이지 않으며, 아는 것이 없이 알며, 주착함이 없이 머무르게 된다. 지극히 짦은 순간의 생각도 일직이 꿈속에 있는 일이 없다

이것을 見性이라 한다.

 

정념이란 수행의 과정이다. 자신의 본성을 보기 위해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념 곧 바른 마음은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한 마음이며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다. 세상의 모든 꿈을 깨기 위해서 무념의 상태에 도달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술몽쇄언은 매 장마다 차근차근 꿈을 깨쳐 나가는 길을 서서히 열어가고 있다.

책을 한줄한줄 음미해서 읽어가는 여정이 미망으로부터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다.

깊은 잠을 자고 깨어난 아침, 창을 통해 쏟아지는 밝은 햇살을 맞을때처럼 말이다

 

01 상(常)과 환(幻)   세상사람들은 깬 것은 떳떳하다[常] 하고 꿈꾸는 것을 환상(幻想)이라 한다.
 꿈이란 깨지 않은 것을 이름하고 깨었다 함은 미혹(迷惑)하지 않는 것을 일컫는다.
 꿈이 환상(幻想)이라면 꿈속에 있는 것은 무상(無常)한 것이리라.
 그러므로 깨어 있음이 떳떳한 것이라면 꿈 밖에 벗어난 것이라야 할 것이다.
 세상의 소위 대장부는 과연 그 어떤 것이 떳떳한 것이고 어떤 것이 무상한 것인지 알고 있는가.
 떳떳함이란 변하지 않고 환상도 아닌 것이다.
 실로 자기 몸 가운데 변하지 않고 환상도 아닌 존재가 있음을 알아야 떳떳함을 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02 몽환(夢幻)  깨어서 생각하면 꿈속에서 하던 행동이 다 망동(妄動)이고 본 것이 다 환상이다.
 대체로 꿈꾸는 사람은 아는 것이 다 환상(幻想)임을 깨닫지 못하고 생각이 깨지 못함을 모른다.
 그리고는 도리어 꿈밖을 벗어난 말을 가리켜 허망하다고 한다.
03 대몽소몽
   (大夢小夢) 

 일원(一元)은 천지의 꿈이고, 일세(一世)는 사람(人物)의 꿈이다. 일원은 큰 꿈이고, 일세는 작은 꿈이다.
 만물 중에는 그 생명이 만 년 천 년 가는 것이 있고, 백년 십년 가는 것이 있으며, 잠깐 났다가 곧 죽는 것이 있다.
 장수(長壽)한다는 것은 긴 꿈이요, 요사(夭死)한다는 것은 짧은 꿈이다.
 꿈을 깨기 전이라면 수(壽)가 비록 만 년 천 년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즉 만 년 천 년의 긴 꿈속의 일일 뿐이다.  

 저 하룻밤의 꿈이 어떤 것은 해(歲)를 지나는 긴 꿈이 있고, 어떤 것은 찰라의 꿈이 있다.
 길고 짧음이 비록 다르나 모두 다 환각(幻覺)으로 오는 것이니, 한 번 웃고 말아야 할 것인데,
 꿈속에 사는 이들은 오히려 간절히 연모(戀慕)하여 마지 않는도다.

04 망성(忘成)  꿈속에도 또한 천지 만물이 있다. 그것은 천지와 만물이 나의 꿈속으로 와서 들어온 것인가.
 아니면 내가 가서 천지와 만물을 본 것일까. 그런데 꿈에 갑과 을이 함께 술을 마셨다 해도
 갑과 을은 같은 꿈을 꾸지 않으니 어찌 오고 감이 있었겠는가. 다 내 마음이 스스로 허망(虛妄)하게 이룬 바로다.
05 생사몽(生死夢)  세상 사람들은 삶을 참이라 하고, 죽음을 환상(幻想)이라 한다.
 죽음을 환상이라 한다면 죽음이란 산 사람의 꿈이고, 사는 것을 잠깐 얹혀 있는 것이라 한다면
 산다는 것은 죽은 사람의 꿈이 된다.
 대체로 살아도 깨지 못하였으면 그 삶은 참이 아니고, 죽어서도 깸이 없다면
 그 죽음은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삶을 알면 죽음을 알고, 죽음을 알면 돌아간다는 것을 알 것이다.
 돌아간다는 것을 아는 자는 생사(生死)의 꿈 밖으로 뛰어나온 사람이다.
06 몽아각아
   (夢我覺我)
 깬 것을 나라고 한다면 꿈꾸는 자는 누구인가.
 또 꿈꾸는 것을 나라고 한다면 깬 자는 누구인가.
 깨어서 꿈을 알지 못한다면 깨었다는 것은 꿈의 환상일 것이고,
 꿈에서 깸을 알지 못한다면 꿈은 깸의 환상일 것이다.
 따라서 살아서 죽음을 알지 못한다면 산다는 것은 죽음의 변형(變形)일 따름이고,
 죽어서 삶을 알지 못한다면 죽음은 삶의 변형일 것이다. 꿈과 깸이 서로 변형일 뿐이라면,
 그래서 그 사이에 나를 찾으나 진실한 곳을 알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한 사람도 참 나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아아! 온 세상이 바야흐로 꿈속에 있는 것인가.
07 유무(有無)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사람이 난다는 것은 없던 것이 홀연히 있게 되는 것이고,
 죽는 다는 것은 있던 것이 갑자기 없어지는 것이다.'라고 한다.
 또 혹은 있다고 하고 혹은 없다고 하며,
 오래되면 장차 없어지리라고 한다.
 이것은 다 정식(情識)의 망령된 추측이고 무생(無生)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라고 한다.
 홀연히 꿈을 꾸고 홀연히 깨고 하므로 능히 꿈을 꾸기도 하고 능히 깨기도 하니
 주인공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꿈이 있기도 하고 꿈이 없기도 하니,
 능히 꿈을 꿀 수도 있고 꿈을 꾸지 않을 수도 있는 주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죽고 사는 것도 큰 꿈이다. 깨고 잠자고 하는 것은 작은 꿈이다.
 작은 꿈은 큰 꿈을 따라 그 속에 있게도 되고 없게도 된다.
 그리고 큰 꿈은 꿈 아닌 것에 의지하여 숨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한다.
08 몽중몽(夢中夢)  꿈속에서 고관(高官)이 되고 진귀한 보물을 얻고
 아름다운 여인을 얻으며 귀한 아들을 낳는다.
 이에 사업을 이루고 전지(田地)와 저택을 마련한다.
 자녀를 교육하여 영화를 찾고 미인과 즐거움을 누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홀연히 꿈을 깨면, 그 사람이나 환경은 다 사라진다.
 무엇을 잃어버린 듯 어리석게 미련을 남긴다.
 본래 이 꿈이 없었던 그 전에는 이러한 미련이 일찌기 없었는데,
 꿈이 이미 사라진 이제 미련이 오히려 남아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람들은 경륜(經綸)이 겨우 이루어 지려는가 했을 때 홀연히 죽는 일이 있다.
 만일 그들이 죽어서 어리석은 미련이 오히려 남아 있다면,
 신(神)은 어둡고 혼(魂)은 탁하며 정(精)은 맺히고
 넋은 굳어서 곳을 따라 아득히 헤매다가 물건을 만나면 나타날 것이니
 그리하여 꿈속의 꿈, 환상 중의 환상이 되어 이르지 않는 데가 없게 된다.
09 몽각일야(夢覺一也)  꿈속에서 간혹 괴로운 경우를 만나 신음하거나 매우 고초를 당하면,
 깬 뒤에도 오히려 숨결이 헐떡여지고 몸이 거북하다.
 꿈이란 것은 환상(幻想)일 뿐인데 그 영향을 실지로 받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객관경계는 마음이 만든 것이고 업(業)은 스스로 부른 것이다.
 본래부터 이런 일이 없던 것을 허망(虛妄)하게 그런 꿈을 꾸었으며,
 본래부터 이런 꿈이 없는데도 허망하게 그 고통을 받는다.
 그래서 신 매실(梅實)의 이야기를 들으면 입안에 침이 생기고,
 깎아 지른 듯한 벼랑을 밟았다고 생각하면 발바닥이 찌릿한 느낌을 받는다.
 이야기를 듣는 것은 거짓인데 능히 실상(實相)을 낳고
 벼랑 밟는 걸 생각하는 것은 허망한 것인데 능히 본체를 요동한다.
 이것은 유무(有無)가 서로 통하였고 허와 실이 서로 통한 증거이다.
 따라서 꿈과 깸이 하나이고 사(死)와 생(生)이 하나이며 유와 무가 하나이다.
 그러한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죽은 뒤에는 아는 것도 없고 받는 것도 없다고 한다.
 이것은 유무(有無)의 이치를 모르는 소치이다.
10 혼백(魂魄)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혼(魂)은 올라가고 넋(魄)은 내려간다.
 형체는 썪고 정신은 사라지는데
 다시 무엇이 있어서 죄와 복을 받으며 괴로움과 즐거움을 알겠느냐.'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도대체 꿈속의 사람들도
 역시 그러면 아는 것이 있고 받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저 꿈속의 사람이 몸뚱이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으면서,
 동으로 가고 서로 가는 주체는 누구이며,
 현실의 몸뚱이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괴로움을 받는 것은 누구인가.
 또 소위 올라간다는 혼(魂)과 내려간다는 넋(魄)은 앎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앎이 없다면 누가 올라가고 내려가는가.
 또한 앎이 있다면 한 사람이 두가지로 아는 것이니 이럴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는 올라가고 하나는 내려간다면 그 안다는 것은 어느 곳에 해당하는가.
 이미 혼백이 올라가고 내려간다는 뜻을 알지 못하거니 어찌 형체와 정신이 있고 없는 이치를 알 수 있으랴.

11구원(仇怨)

 꿈속에서 남과 원수를 지어 분노하고 원망을 하다가 깨어서 생각하면 그것은 환각(幻覺)이고 허망뿐이다.
 원수도 없고 원망할 주체도 없다. 실로 나를 원수로 삼는 자도 없는데 내가 원망하는 것은 망령된 행동일 뿐이다.
 내가 진실로 망령된 짓만 하지 않으면 실로 원수는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원한을 품어서 독기가 엉키고 맺혀서 죽은 뒤에도 오히려 그 기운이 흩어지지 않고
 악귀(惡鬼)가 되고 도깨비가 되는 일이 있다.

 이것은 다 자신의 마음이 불러 온 죄업(罪業)의 힘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진실로 마음을 평화롭게 가지고 스스로 반성한다면 모든 것이 다 꿈이고 환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백세(百世)에 걸쳐 맺어진 인연도 한 생각으로 소멸된다.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2 취몽(醉夢)

 취중(醉中)에 사람이 스스로 옳다고 하다가 깬 뒤에야 비로소 취한 것을 알고

 본성(本性)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꿈속의 사람이 스스로 옳다고 우기다가 깬 뒤에야 비로소 꿈 이였으며 본성이 아님을 알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옳다고 고집하지만 기혈(氣血)에 취하고 정식(情識)에 꿈꾸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소위 알고 생각하는 것과 옳고 그름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과 원망하고 연모(戀慕)하는 것은
 다 취중의 심정과 꿈속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밝고 깨끗한 성품-淸淨性-속에야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는가.

13 음양굴신
  (陰陽屈伸)
 양(陽)이 극에 이르면 음(陰)이 생기고, 음이 극에 이르면 양이 다시 온다.
 한 번 굽히면 한 번 펴고 한 번 전진하면 한 번 후퇴하는 것은 진리의 떳떳함이다.
 복(福)이 지나치면 장차 화(禍)가 오게 되고 뉘우침이 깊으면 길조(吉兆)가 싹트게 된다.
 남을 원수로 여기면 꿈에 그의 욕보임을 당하게 되고 남을 속이면 꿈에 그 사람의 성냄을 받게 된다,
 이것은 겉으로는 속일 수 있지만 마음은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것이며 요행으로 모면할 수는 없다.
14 억지와 초연(超然)  세상에는 간혹 물질이나 몸뚱이에 초연(超然)하여 아무 근심이 없는 이가 있다.
 사람들은 억지로 그렇게 한다고 하여 하기 어려운 것을 억지로 하는 것은 인정(人情)에 가깝지 않다고 한다.
 대저 꿈속에서도 사물(事物)에 근심과 기쁨을 이끌어 얽어 매는 일이 있지만 깨어 보면 아무 것도 없다.
 진실한 사람은 몸과 마음에 자연히 일이 없다. 이 어찌 억지의 정으로 그렇게 하랴.
 본래 일이 없는 것인데 다시 무엇을 억지로 근심한단 말인가.
15 무아(無我)

 꿈꾸기 전에는 꿈속의 천지(天地)를 볼 수 없고, 이미 깨고 난 뒤에는 꿈속의 세계를 다시 볼 수 없다.
 이것은 다 내 생각의 망동(妄動)인 때문이다.
 나기 전에는 이 세계를 보지 못하며, 이미 죽은 뒤에도 이 세상의 사물을 볼 수 없다.
 이 세상의 사물은 다 내가 벌여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있는 뒤에 라야 세계(世界)와 사물이 있는 것이다.
 마음에 진실로 "내"가 없다면 세계와 사물이 "나"에게 어찌 있으랴.

16 능지(能知)의 지혜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일찌기 옛 사람은 '인간의 생사(生死)란 곧 한 기운[一氣]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다.
 기운이 모이면 물체(物體)를 이루었다가 기운이 흩어지면 따라서 물체도 없어진다.
 그런데 기운이 모여서 물체를 이루면 자연히 그 속에 정신이 생겨 물체와 함께 성장하고 아는 것이 이루어 진다.
 물체가 오래 되면 그 형체는 낡아지고 정신은 쇠약하며 혼미하여져서 물체와 함께 없어지고,
 그리하여 마침내 빈 것으로 돌아간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나고 죽음을 살펴보니 이 말에 의심되는 바가 있다.
 사람이 처음 났을 때 생각은 아직 없지만 신령한 정신이 환하게 밝으며

 사람이 곧 죽게 되었을 때 수족은 비록 혼란하여져도
 신령한 마음은 전과 다름이 없다. 이른바 기(氣)의 모이고 흩어짐이 단속(斷續)이 없고
 정신의 혼미함과 밝음이 증감(增減)이 없다. 그러나 난다는 것은 본래 없던 것이 홀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고
 죽는다는 것은 본래 있던 것이 홀연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생사(生死)를 꿰뚫어서 한결 같다면 그 처음과 끝을 누가 능히 구명(究明)할 수 있으랴.
 알 수 없는 일은 그 속에 과연 이 법칙이 있는 것이냐고 하였다. 나는 대답한다.
 "이 법칙이 밝혀지지 못한지 이미 오래다. 너는 잠자고 깨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꿈꾸고 깨는 것이 서로 갈아 들어서 천 번 변하고 만 번 바뀌며 지혜(知解)가 성립하고 괴멸하며
 생각이 단속(斷續)함을 몇 번이나 하였던가. 그러한 많은 변환 속에 그 변환을 따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것에 의하여 꿈꾸기도 하고 이것에 의하여 변화하기도 한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무엇이 꿈꾸고 깨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바뀐 것을 알겠는가.
 알아지는(無知) 지혜는 알 줄 아는(與知) 지혜와는 다르니

 네가 어찌 알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알아지는 지혜만 알려 하는가.

17 귀호(鬼狐)

 도깨비나 여우에게 홀린 사람은 다만 그것의 교태와 고운 얼굴만 보기 때문에

 사랑하고 연모하고 친근하게 하여 그것의 농락을 받고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정신을 빼앗기고 기운을 소모하여 죽게 되어도 달게 여긴다.
 그러다가 뒤에 그것이 여우나 도깨비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머리털이 서고 소름이 끼쳐서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게 된다.
 요사이 세상 사람들이 여인의 자태와 얼굴 모습에 미혹하여 어리석게 사모하여

 제 몸이 어떻게 되는지를 잊어버린다.
 기운을 손상하고 재물을 소모하여 도깨비나 여우에게 홀린 것보다도 더욱 심하여서

 죽어도 뉘우칠 줄을 모르고 있으니
 도깨비나 여우에게 죽는 것과 무슨 차별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 여인이 눈썹두덩과 뺨에 분 바르고 연지 칠한 꼴이 귀신이나 도깨비와 다름이 이 무엇이며
 간교한 말과 얼굴 빛이 여우가 사람을 홀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또 남의 집 재산을 손해 보이고 남의 골육 사이를 이간질하고는 손바닥 뒤집듯 변심하여서

 또 다른 남자에게 애정을 주고
 단장(丹粧)하여 껴안는 그 마음 가짐은 도리어 도깨비나 여우보다도 더욱 심한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마음이 미혹하여 꿈속에 빠져서 죽음도 돌아보지 않으니 다시 무엇을 더 깊이 생각하랴.
 그러나 대저 여색(女色)이 능히 나를 미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미혹 되는 것이며,
 환경이 능히 나를 얽어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얽매인 것이다.
 환경이 다르고 정이 치우치는 곳에서는 언제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하게 하여 생각하고 헤아려 보라.
 그리하여 마음이 항상 자재(自在)하여 꿈의 지경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저것이 어찌 나를 홀리게 하고 미혹하게 할 수 있으랴.

18 귀천(貴賤)

 옛날에 낮에는 종 노릇을 하고 천자가 되는 꿈을 꾸는 사람이 있었으니 실로 알지 못하겠도다.
 이 사람의 경우 천자가 낮이면 종의 꿈을 꾸는 것인가, 종이 밤이면 천자의 꿈을 꾸는 것인가.
 깼을 때의 세상 사람들은 나를 천(賤)하다 하고 꿈 세상의 사람들은 나를 귀(貴)하다고 하는구나.
 그러므로 귀하다 천하다 하는 것은 남에 있고 내게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귀하고 천한 것이 나에게는 실로 뜬구름 같은 것이며

 밤과 낮은 다 마음이 만드는 환상(幻想)의 세계일 뿐,
 천하다 해서 무엇을 근심하며 귀하다 해서 무엇을 교만하랴.
 세상에서 부(富)하고 귀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거만하게 구는 자는 깊은 잠을 깨지 못한 잠꼬대이다.

19 탐욕(貪慾)

 사람들이 부귀(富貴)를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세상을 구제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권한이며
 또한 몸을 기르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근본이라고 믿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마음을 수고하고 몸을 위태롭게 하여 화를 다투고 욕됨을 찾고 있으니

 자기 스스로도 구제할 겨를도 없는데
 어느 여가에 세상을 구제하고 남을 이롭게 하며 자신을 보양하고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부(副)는 쓰는 데 모자람이 없음을 말하고 귀(貴)는 몸이 영화롭고 이름이 높음을 일컫는다.
 녹봉(祿俸)이 이미 쓰기에 넉넉하고 벼슬이 이미 이름을 영화롭게 할만하면,
 마땅히 분수를 지키고 명에 순종하여 선행을 닦고 직책에 부지런함으로써,
 몸이 늙어 가고 자손을 위하는 좋은 방편으로 삼아야 할 터인데,
 더욱 부를 탐내고 싫어할 줄 모르니 한 벌 옷 한 그릇 밥 그 밖에 또 무엇을 더 할 것인가.
 이미 귀하면서 더욱 올라가기를 바라니 말 한 필 수레 하나 그 위에 또 무엇이 더 필요한가.
 이로 말미암아 아들은 교만해가고 딸은 사치해져서 복이 지나치므로 재앙이 생기게 되는 것이니
 자신을 위한 방편으로도 현명하지 못하며 자손을 위하는 방편으로도 또한 서투르다.
 목숨이 다하여 영혼이 몸에서 떠나가면 만 상자에 쌓아 둔 황금이 나에게 소용없는 것이며
 천가지 계책이 다 허망한 웃음거리 일 따름이다.
 생전의 변화는 문득 꿈이고 환상(幻想)이며 죽은 뒤에 죄업(罪業)은 산처럼 쌓이니
 도대체가 다 스스로 불러온 것으로서 뉘우쳐도 이미 어찌 할 수 없으리라.

20 업(業)과 명(命)

 선(善)과 악(惡)이 업(業)이라면 경사와 재앙은 명(命)이라 할까,

 사람에게 있는 것이 업이고 하늘에 있는 것이 명이다.
 스스로 닦고 원망하지 않는 자는 업(業)이란 자신이 스스로 지은 데서 오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다.
 순순히 받아들이고 근심하지 않는 자는 명(命)이란 이미 정(定)함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꿈속의 일들을 생각해보면,
 한 가지의 치욕도 모두 자기 마음대로 된 것이 아니니 명(命)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한 가지 물건 한 가지 일이 다 마음이 지은 것이니 세계는 곧 한 생각일 뿐이다.
 하하! 번쩍 깨달으니 비로소 옛 사람들이 근심하지 않은 뜻을 알겠도다.

21 살생(殺生)

 겨울 꿩은 기름지고 살찌며 봄 준치는 달고 아름답다.
 세상 사람들은 온 천지가 생물을 길러 사람을 먹인다 고 하면서 새와 짐승으로 철 따라 반찬을 한다.
 활을 쏴서 사냥하고 그물을 쳐서 잡는 것을 떳떳한 일로 여기며

 죽이고 베고 삶고 요리하는 것을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뭇 생물들은 모두가 동일한 성품에서 태어난 것이니
 비록 감정과 지혜와 업력(業力)은 다르지만 제 나름의 성명(性命)을 받았기 때문에
 품류(品類)가 각각 같지 않은 그대로 모두가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한가지 이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교묘한 자는 졸렬한 자를 속이면서 힘으로 싸워서 잡아먹고 덫을 놓아 잡으니
 이것이 과연 하늘의 공급이며 물건이 스스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범과 이리가 사람을 잡아 먹고 모기는 사람의 피를 빨아 먹으니
 그러면 사람의 피와 살은 저것들을 기르기 위하여 살찌는 것인가.
 뭇 생물들이 약육강식을 하는데 사람도 또한 생물과 서로 싸운다는 책망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대저 생물들의 형체가 비록 크고 작음은 다르나 제각기 성명(性命)이 있으며,
 스스로 사랑하고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씨가 있어서 괴로움과 아픔을 알고
 어미와 새끼의 모성애가 있고 암수의 애정이 있어 함께 다니기를 좋아하고 따로 떨어지기를 슬퍼한다.
 요사이 세상 사람들은 한 끼 밥을 위해 몇 생물의 슬픔을 앗으며

 두 젓가락에 몇 생물들이 사랑의 이별을 당하게 하는가.
 그 새끼를 죽이면 어미의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지고 수컷을 삶으면 암컷이 그 솥 속에 몸을 던진다.
 눈동자를 굴리며 흘겨 보는 그 슬픈 모양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표정이 역력하며
 혹 꿈에 나타나서 살려 달라고 빌어 보이기도 하는 것은 신령한 성품이 막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조금도 느낄 줄 모르고 아무 깨달음도 없이

 오직 영양과 맛 좋은 것에 탐하고 있는 것이다.
 측은하게 여기는 어진 마음이 어디 갔으며 만물에게까지 미치는 의로움이 어디 갔는가.
 아아!슬프다, 이 세상의 혼미한 꿈이여 길고도 길구나.

22 취착(取着)  자세히 살피니 사람의 몸은 셋방 같고 생각은 품팔이 하는 것이다. 어째서 셋방인가.
 셋방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때가 이르면 물러나야 하고,
 사람의 몸이 아무리 아름답다 하여도 목숨이 다하면 버리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품팔이라 하는가. 품팔이는 이 일을 하다 다하면 저 일을 해야 하고
 우리의 생각도 종일 바쁘게 이리저리 쫓기므로 한 가지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번뇌는 이 일에 이끌리지 않으면 반드시 저 일에 이끌려서 잠시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거니
 어찌 품팔이라 하지 않으랴.
 그런데 집은 돈만 있으면 다시 세 낼 수도 있지만 우리 몸뚱이는 수명이 한 번 다하면 대신 할 물건이 없구나.
 품팔이는 일을 마치면 쉴 수가 있지만 번뇌의 수고로움은 잠시도 쉴 수 없다.
 이와 같이 꿈속의 마음과 몸도 반드시 어디에 이끌리고 매달리면서 그것을 참이라 하고 즐겁다고 한다.
 또한 죽어서도 붙잡고 매달리는 것이 없으면 매우 허전하게 여기 나니,
 안타깝다. 죽어서도 살아서도 꿈에서도 깨어서도 자유자재 할 줄 모르는구나.
23 대화(大化)

 사람은 하루에 一만 二천 五백 번 호흡하는데 태양은 사람이 한 번 호흡하는 사이에 四백만 리를 가나니
 대화(大化)의 빠름이 이와 같도다. 사람이 그 사이에 살고 있으니 어떻게 한가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루가 쉴새 없이 자라서 어느 덧 장년이 되고 장년이 되면 노쇠하지 않는 날이 없이 지나가니
 잠깐 사이에 늙음에 이른다. 그러니 늙고 자라는 때를 제외하면 남는 세월이 얼마 되지 않는데,
 그 가운데 질병. 근심. 고통이 반 이상 차지한다.
 부귀하면 사무에 얽매이고 가난하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려 항상 바쁘다.
 날마다 바쁘게 시달림 받고 하루도 뜻대로 살 수 있는 날은 없다.
 걱정하고 계획하고 따지고 헤아리고 번민하여 한 생각도 자기의 마음대로 자유 자재할 때가 없다.
 이와 같은 일생을 살다가 어느덧 죽음을 당하면 살아서 하던 버릇(習性)과 관념으로 마치 꿈꾸듯 살게 된다.
 이와 같이 되풀이하여 잠깐 사이에 몇 겁(劫)을 거듭하다 보면

 살아 있을 때의 총명도 흐려져서 깨닫지 못하게 되는데 하물며
 죽은 뒤의 혼(魂)이 소 되고 나귀 되어 아득하거니 어찌 지혜있고 깨달음이 있기를 기대할 수 있으랴.
 옛 사람이 말하기를 "몸을 금생(今生)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生)을 기다려 제도하랴."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 했으니 그 뜻이 지극히 간절하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꿈속에 살면서 한 사람도 머리를 들어 생각하는 이가 없으니 슬프다,

24 환몽(幻夢)

 파리는 궂은 냄새를 따라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하고, 벌은 울긋불긋한 꽃을 찾아 분주하게 넘나든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미물(微物)의 행동이 가볍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꿈속에서 청하니 동으로 갔다 서로 옮겼다 하면서

 즐거움을 만나면 기뻐서 웃고 걱정거리를 만나면
 슬퍼 운다. 뜻은 환경에 따라 구르고, 마음은 일을 쫓아 변한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꿈의 환상이란 무상한 것 이다.'라고 한다.
 총명하고 지식이 있다는 사람들도 아침에는 동쪽에서 웃고 저녁에는 서쪽에서 성낸다.
 전에는 장(張)에게 쫓아 다니더니, 이제는 이(李)를 따라서 세력을 따라 나아가고 물러서며
 이익을 보아 마주하기도 하고 등을 돌리기도 하나니, 그 행동이 어찌 벌이나 파리만 하며 꿈속의 환상만 하랴.
 세상에 이런 꿈속에 살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25 애증(愛憎)

 꿈꾸면서 홀연히 울고 웃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꿈의 장면은 쉽게 바뀐다고 한다.
 그런데 꿈속에서 울고 웃는 것도 또한 슬프고 즐거움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꿈의 내용이 잘 변한다는 것은
 곧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情識)은 떳떳하지 못한 까닭이니, 어찌 특별히 꿈에서만 그리 하겠느냐.
 옛날 위(衛)나라 임금에게 총애하는 신하가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복숭아를 먹다가 나머지를 임금에게 바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가 진정 나를 생각하는구나. 한 개 과일 맛에서도 나를 잊지 않다니.'라고 한다.
 밤에 그 어머니의 병이 중하다는 말을 듣고 궁궐의 문을 열어 궁궐의 말을 내어 타고 나가니

 임금이 또 말하기를 '저 사람은 참으로 효자로구나. 죽음의 형법도 돌아보지 않았으니.'라고 했다.
 그 뒤 임금의 총애가 풀어짐에 좌우에서 날로 그의 단점을 들춤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그 사람의 나쁜 것을 알고 있는지 오래다. 먹다 남은 것을 과인에게 올렸으니

 그 마음에 임금이 없는 것이고 밤에 궁궐의 문을 열고 임금의 말을 훔쳐 탔으니

 마음에 법이 없는 것이로다.'라고 했다.
 전날 사랑할 때는 얼마나 사랑스러웠더니,
 이제 미워함에 일마다 미워 하거니 세상 사람들의 시비를 누가 능히 정할 것이냐.

26 탐심의 주취

 아름답고 요염한 여인을 만나 음란한 마음을 일으키는 사람은 꿈에 보면 반드시 껴안게 되고
 황금이나 비단을 보고 탐심을 내는 사람은 꿈에 반드시 달려들어 빼앗을 것이니 그것은 왜 그런가.
 현실적으로는 감히 범하지 못했지만 마음은 이미 죄를 지은 때문이다.
 옛날에 시장에서 밝은 대낮에 남의 황금을 도둑질하다가 관리에게 잡힌 사람이 있었는데 이 때 심문을 하니
 대답하기를 '눈 앞에 황금만 있고 그 주인이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했다고 한다.
 대저 욕심의 불길이 훨훨 타오르면 연기가 공중을 가리듯이 마음이 취하고 눈이 어두워져서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아아! 사람이 불의(不義)를 범하고 차마 하지 못 할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라 해도

 처음부터 어찌 사람의 마음이 없었으랴.
 악한 잡념이 한 번 일어나면 집착(執着)이 심하여지고 정히 오로지 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버릇이 오래되면 뜻이 변하고 점차 부끄러움도 모르게 되며, 마침내 몸을 돌보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사정이 크게 달라지면 형세는 급하고 마음이 바빠서,

 드디어 금수(禽獸)의 행동에 이르러도 마음에 달게 여긴다.
 그리하여 살아서는 악(惡)을 퍼뜨리고 뒷 세상에 더러운 냄새를 풍기거니,

 어찌 대낮에 남의 황금을 빼앗는 일에 그치랴.
 한 개비 작은 불이 능히 태산을 다 태우고, 한 생각 작은 악이 하늘을 삼키는 큰 죄를 짓는 계기가 된다.
 서리를 밟으면 반드시 얼음 어는 날이 곧 올 것이니 가히 두렵지 않으랴.

27 인연 (因緣)

 속언(俗言)에 '평소의 마음이 취중(醉中)에 나오고 정(情)이 있는 것은 꿈속에 보인다.'는 말이 있다.
 꿈이 비록 헛된 환상(幻想)이지만, 반드시 원인이 있어서 이루어진다.
 하물며 인생의 영고성쇠(榮枯盛衰)가 그 원인이 없으랴.
 옛말에 '전세(前世)의 인연을 알고자 하거든 이 생에서 받는 것이 그것이고 내세(來世)의 인연을 알고자 하거든
 금생(今生)에 짓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했다. 사람의 일에 비추어 관찰한다면,
 운을 타고 세력을 얻어 함부로 형벌과 복을 지어 덕으로 가르치고

 기세를 부리지만 감히 원수로 삼아 원망할 수 없다가,
 운이 가고 세력이 없어지면 묵은 감정과 옛 빚이 때를 타고 한꺼번에 몰아 닥친다.
 세상 사람들은 다만 앞서고 뒤서는 시세(時勢)만을 알고 뜨겁다 차다 하는 인정-炎凉世態-만을 알 뿐
 그 원인이 먼 데 있음을 생각하지 않으니 진실로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무엇을 한탄 하겠는가.

28 꽃과 나비  봄 동산에 온갖 꽃들이 아름다움을 다투고 뭇 새들이 노래를 함께 한다. 보면 사랑스럽고 들으면 싫지 않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광경들이 얼마나 가겠는가. 백일을 지나지 않아서 헛됨을 이룬다.
 저 총명과 지혜가 무리에 뛰어나서 세상을 울리는 자, 혹 머리 속에 만(萬) 권(卷)의 지식을 쌓아 두기도 하고
 이름이 온 나라를 진동하기도 하지만 그 기개가 얼마나 가겠는가. 백년을 못 가서 꿈으로 변하고 말 것이니,
 꿈속에 드날린 이름이고, 지하에서 잠든 귀신일 따름이며 일생동안 고심한 것이 무엇인가.
 장차 남에게 바치기 위해 한 짓이었던가. 그러나 그림자를 잡아서 남에게 준들 무엇이 남에게 유익한 것이며,
 장차 자신을 위하려 했다면 헛된 이름뿐 실지는 없으니 무엇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 것이랴.
 자신을 위해서 정신을 소모하였을 뿐이며 남에게 전한다고 도(道)를 깎고 덕(德)을 잃었던 것인가
 아아!슬프다. 차라리 꽃과 새가 성하고 시드는데 무관한 것만도 못하구나.
29 연객(燕客)

 꿈속에서 혹 집안 식구의 상사(喪事)를 당하면 슬퍼하여 마지 않으며,
 혹 문장의 이름을 얻고 대학자가 되는 수도 있지만 꿈을 깨고 나면 슬픔을 찾으려 해도
 그 감정의 원인은 간 곳이 없고 학식을 구하려 해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정식(情識)이란 환상이며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연(燕)나라 사람이 어릴 적에 고향을 떠나 초(楚)나라에 가서 자랐다.
 그 뒤에 연 나라 손님과 고향에 돌아 가게 되었는데, 연 나라 국경에 들어서니
 산을 보나 물을 보나 슬퍼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지나치게 상심하는 그를 본 손은 거짓으로 한 무덤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당신 부모의 무덤이라 하였다. 그러자 몸을 던져 절하고 엎드려 통곡하다가 기절하였다.
 손이 말하기를 '어서 일어 나세요. 내가 술에 취하여 잘못 가리켜 드렸으니 용서 하세요.'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실망하여 눈물을 거두었다. 또 다시 한 무덤을 가리키며,

 '이것은 정말 당신 아버지의 무덤이요.'라고 하니,
 그 사람은 주저하는 듯 사방을 둘러보고, 한 마디 곡(哭)을 하고 그친 뒤 두 번 절하고 일어났다고 한다.
 대저 물질이 나를 얽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얽히는 것이며,
 환경이 나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속박되는 바이다.

30 명실(名實)  귀중한 보물을 얻으면 비밀하게 감추어 자취를 숨기면서 오직 남이 알까 두려워하니,
 보물을 얻는 것은 실지이고 이름을 얻는 것은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의 보물을 얻으면 헛된 이름을 겁내는 것은 이름이 복(福)에 보탬이 되지 않고
 화(禍)를 부르기에 알맞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실제가 있는 명예도 현혹 되어서는 안되거늘 실로 없는 이름이 어찌 화(禍)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령 꿈에 삼공(三公)의 벼슬을 얻었더라도 깬 뒤의 한 잔 술만 못한 것이니,
 실제로 있는 일은 비록 작더라도 소중하지만 빈 이름은 비록 크더라도 천한 것이기 때문이다.
31 오공(悟空)

 내전(內典)에 '처음으로 정각(正覺)을 이루니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일시에 녹아 없어지는 것이

 마치 꿈속에서 산이 있고 강이 있고 사람이 있고 만물이 있어서

 몹시 애착(愛着)하고 연모(戀慕)하여 실제로 있는 것처럼 하다가 홀연히 잠을 깨면
 즉시 사라져 없어지므로 그렇게 애착하고 연모하던 생각도 이미 마음에 공(空)했고
 산하와 인물의 모습도 또한 공(空)했을 뿐인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꿈을 깬 깨달음도 이러하니 하물며 세상을 뛰어난 정각(正覺)의 깨달음에 있어서 어찌 알겠느냐.

'수련단체&요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관책진[禪關策進]   (0) 2011.04.23
修心正經  (0) 2011.04.20
達摩 易筋經  (0) 2011.04.15
禪家龜鑑  (0) 2011.04.08
윤회는 없다  (0) 2011.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