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와 함께한 60년 나라의 음악을 완성하다
하고 만들어온 실력으로 제대로 된 편종과 편경을 복원해 중요무형문화재가 됐다.
소리 나는 옥돌을 매단 편경. 암소 뿔로 만든 각퇴로 치면 맑은 소리가 난다.
우리 민족의 창세 설화에 의하면, 태초에 소리(율려·律呂)가 있었다. 율은 양(陽)의 소리, 려는 음(陰)의 소리를 말하니, 율려는 바로 천지개벽의 소리였다. 율려는 별을 낳고 마고를 낳아, 마고의 후손이 만물을 다스리게 된다.
세상의 조물주가 왜 하필 소리였을까. 소리는 파장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니 창조의 역동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어울림, 만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극명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동양의 악기는 단지 예쁜 소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재료를 골고루 쓰는 것이 중요했다. 나무와 쇠, 돌, 흙(도자기), 가죽, 바가지, 대나무, 실(섬유)로 만든 악기 소리를 기본 여덟 가지 소리(八音)로 삼아 온 세상의 소리를 대표했다.
각기 다른 세상의 소리가 어울려 화음을 이루는 것이 음악이고, 음악은 곧 아름다운 대동(大同)사회, 태평성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시로 일어나 예로 서며 악으로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고 한 공자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개개의 자연스러운 감성(詩)은 서로 간에 예의로 조절되며(禮) 마침내 만물이 조화로 완성되는 것, 그것이 바로 악(樂)이다. 그래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않는다(事不成則禮樂不興)”고 한 것은 세상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예악도 존재할 수 없음을 지적한 말이다. 흔히 옛 왕조의 예악 정치를 음악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사실 예악은 교화 수단이기에 앞서 온 세상이 잘 이루어졌다는 증표이자 임금이 세상을 조화롭게 만들어나가겠다는 무언의 약속과도 같았다. 음악으로 공표하는 정치 공약, 그것이 바로 왕조의 음악이었다.
곡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과 경
음악과 수학, 법칙은 한가지다. 그래서 동양에서 음을 정하는 일은 법도를 정하는 일이고, 달력과 도량형을 결정하는 일이며, 이는 별의 운행과도 관계있는 일이었다. 아름다움은 바로 그런 법칙(예)이 조화(악)를 이룰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예악사상을 표방하는 아악에는 팔음의 모든 악기가 다 들어간다. 대관현악곡인 셈이다. 팔음 중 나무와 쇠, 대나무는 가장 널리 쓰이는 악기 재료다. 그런데 돌로 만든 악기는 딱 한 가지밖에 없다. 바로 편경(編磬)이다. 소리 나는 옥돌 열여섯 개를 매단 편경은 타악기이되 음의 높낮이가 있는 유율(有律) 타악기다. 종 열여섯 개를 매단 편종 역시 유율 타악기다.
편종과 편경은 특히 아악(제례음악)에 꼭 필요한 격조 높은 악기다. 옛사람들에게 ‘예는 교사(郊祀·성 밖에서 지내는 야외 제사)보다 중대한 것이 없고, 악은 아악보다 성대한 것이 없으니,’ 제사음악에 쓰는 편경과 편종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아악의 최고봉인 종묘제례악은 처음 종소리로 연주를 시작해 마지막에 경 소리로 마무리한다. 웅장한 합주곡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경은 그래서 엄숙한 악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악기가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제작법이 끊기고 말았다.
“종묘제례악 무형문화재였던 김천흥 선생이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학생이던 일제 강점기, 일본이 만주국의 기념식에 쓰려고 이왕직아악부에 편경과 편종 제작을 맡겨 만든 게 마지막이라고 합니다. 김 선생이 소리굽쇠를 들고 조율을 도왔다고 하더군요. 일본 애들은 서양 평균율로 조율하도록 했나 봅니다.”
전후 서울에서 만난 악기와 음악인
편경과 편종을 제대로 복원해내 중요무형문화재가 된 김현곤(金賢坤·77)은 여느 장인처럼 한 길을 걸어오지 않았다. 물론 그의 평생은 악기에 사로잡힌 인생이었지만 특정 악기 하나에 전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악기, 아니 소리 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마음을 쏟아왔다.
“무엇이든 두드려보는 습관이 있어요. 섬유 빼고 모든 사물은 공명을 하거든요. 저는 사물의 울림, 거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톡톡 탁탁 툭툭…실제로 그는 걸어가며 거리의 난간, 돌기둥 등을 두드려본다. 그를 보노라니 세상은 꼭 모양으로만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소리로 자신을 더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실제로 두드리는 동작은 손에 닿는 촉감과 울리는 소리, 시각이 동시에 만족되니 중독성 강한 그의 습관이 이해된다.
세상의 모든 소리에 관심을 갖고 있는 김현곤이 악기와 연을 맺은 것은 우연처럼 보인다. 고향 순창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학할 요량으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몸을 의탁한 사진 가게가 악기사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꼭 서울 경기중학교에 가겠다는 꿈을 꿨지요. 그런데 6학년 때 사변(6·25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뒤늦게 순창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중농(中農) 정도 되는 그의 집에서는 고등학교는 고향에서 다니라 했지만 그는 무작정 서울로 떠난다. 운명의 부름이었을까. 악기가 있는 서울로 달려간 것을 보면 악기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모님 몰래 나무를 한 트럭 해다 판 돈 5000원으로 화물차 타고 남원에 가서 이리로, 거기서 통학차를 타고 대전까지 와서 역 앞 천막집에 끼어 밤을 밝히고 이튿날 기차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네요.”
전쟁 후 서울 중심가는 무법지대 같았다. 주먹이 판치고 이북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과 반공포로, 피난민이 뒤섞여 각자도생하는 아수라장에서 수줍어 말도 잘 못하는 시골 소년은 자기 앞에 펼쳐진 넓은 세상에 환호한 듯하다.
“일제 때 서울로 간 고향 사람의 주소만 달랑 가지고 왔는데, 찾아가보니 도넛 장사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 집에서 한 사흘 신세 지고 남대문 양키 시장을 기웃거리다 우연히 신의주 사람을 만나게 됐습니다.”
사람 사귀는 데 그를 따를 자는 없을 듯싶다. 반공포로로 내려온 신의주 사람과 이야기하다 거처할 곳을 부탁했다는데, 그는 아직도 그 사람의 이름과 학력, 고향에서 하던 일까지 상세하게 기억한다. 이후 그가 만난 예술가들의 이력과 그들의 애인, 시라소니 등 주먹들과 중구 일대 옛 가게들의 역사까지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전후 서울 풍경이 활동사진처럼 지나간다.
“신의주 사람 소개로 찾아간 곳이 충무로 사진 가게인데 주인 김창호는 기자클럽에서 트럼펫 부는 사람이었어요. 저는 사진기를 수리해 팔고 사진을 현상하는 일을 했는데 저녁이면 가게에 음악가가 모여들었어요.”
이후 주인은 아예 가게를 신향사(新響社)라는 악기점으로 바꾸었다. 사진기도 잘 다루었던 김현곤은 악기점을 연다는 말에 가슴이 설다. 그만큼 음악과 악기가 좋았다. 일본인이 남기고 간 악기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악기를 고쳐 파는 가게엔 자연히 음악가의 발길이 잦았다. ‘애수의 소야곡’을 지은 박시춘, 가수 남인수, 엄앵란의 아버지 엄재근과 클라리넷 주자였던 작은아버지 엄토미, 관악기라면 피리부터 오보에까지 못 부는 게 없고 색소폰도 뚝딱 만들어내던 이왕직아악부 출신의 이병우(속명 이병호. 안익태의 ‘코리아 환타지’에서 피리 독주도 했다)까지 당시 내로라하는 음악가를 죄다 만날 수 있었다. 작업복에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다니던, 한양대 건축과에 재학 중인 젊고 여윈 이봉조를 만난 것도 이때였다.
악기 수리의 달인 되다
신향사의 주인 김창호가 음악에 전념하기 위해 가게를 그만둘 무렵, 김창호의 선배인 문태민이 바로 옆에 연악사(硏樂社)를 열었다. 신향사에서 일 잘하는 김현곤을 눈여겨본 문태민은 그를 연악사로 끌어왔다.
“그분도 신의주 출신으로 미군부대 클럽에서 색소폰과 아코디언을 연주했어요. 연악사는 신의주 시절의 음악 단체인데, 그 이름을 지금 제가 쓰고 있지요.”
종로3가 지금 그의 국악기점에 연악사라는 이름을 단 것은 그의 긴 인생에서 그 시절이 화양연화(花樣年華)여서일까. 신향사 시절 선린상고에 입학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던 그는 연악사로 옮기면서 학교도 그만두게 될 정도로 바빴다.
“연악사는 규모도 컸지만 문 사장은 가게는 제게 일임하고 자신은 음악과 여자에 빠져 사는 분이었어요. 제가 안팎 살림을 도맡게 되었지요.”
그 무렵 그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학교 악단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여학생이었다. 명동의 음악감상실과 극장에서 데이트를 하며 두 사람은 사랑을 키워나갔다. 60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하루에 한두 번은 그 여학생을 떠올릴 정도로 깊이 각인된 사랑이다. 스무 살이 되자 그는 독립을 꿈꿨다.
“온갖 악기를 다루고 거래하다보니 악기점은 잘할 자신이 있었지요. 참 신기한 게, 어떤 악기든 만져보면 알겠더라고요. 소리에 대해서도 말소리는 몰라도 악기 소리는 절대음감 비슷하게 알아맞혀요. 어린 시절에 들은 음악 덕택인 것 같습니다.”
한량이던 큰형은 풍물잡이들을 불러 동네에서 크게 풍물판을 벌이는가 하면, 축음기도 갖고 있었다. 전라도의 명창과 뛰어난 연주자들을 접할 수 있었고, 그때만 해도 자주 벌어지는 굿판과 서당에서 시조창을 부르는 가객들의 노래도 그의 뇌리에 남아 있다.
“집 뒤에 대나무 밭이 있었는데, 아버지 친구 중 퉁소를 잘 부는 어른이 있었어요. 그분이 우리 집 대나무를 잘라다 퉁소 만드는 걸 본 적이 있어요. 가마솥에 삶아낸 대나무에 달군 쇠꼬챙이로 구멍을 내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김현곤은 그가 부는 퉁소 소리에 왠지 모를 슬픔에 겨워 ‘눈물이 막 나는’ 소년이었다. 또 밤이면 삼(마)을 삼는 여인네들이 들려오는 단소 소리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기억도 있다. 그런 그이기에 음악과 악기에는 본능적으로 끌렸고, 어느 악기든 잘 이해하고 잘 다루었다. 거기다 신향사 시절부터 가게 운영도 5년쯤 해보니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자만심이었던 게지요. 자금은 충무로에서 알게 된 고학생 친구가 일하는 진선미다방의 주인 윤갑숙(소설 <울지 않으련다>의 작가) 씨가 대주었어요.”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에서 원(園) 자를 따다가 ‘미원악기’라는 이름으로 악기점을 차린 김현곤은 전국 미군부대의 악기는 다 싹쓸이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출중했다. 어떤 악기를 사야 할지 아는 눈과 귀, 무엇이든 고칠 능력도 있었다. 독일에 주둔했던 미군들에게서 흘러나온 스트라디바리 같은 오래되고 고가인 바이올린에다 전후 건설붐에 새집을 지으면서 헌 악기가 쏟아져 나올 때라 돈벌이는 널려 있었다. 그러나 젊은 사장은 사업보다 연애에 빠져 있었다. 만날 여학생과 데이트하며 사업을 등한시한 바람에 3년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가게 근무 시절 저는 ‘전라도 하와이’니 ‘개똥쇠’니 이런 소리 듣지 않으려고, 또 악기 일이 좋아서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만큼 자존심과 자신감이 셌던 거지요. 그런데 망하니 자존심이 상해 그만 낙향하고 말았습니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능력과 기회가 있었건만, 그는 자존심 하나 때문에 고향에 돌아와 동네의 한 집에서 하숙을 했다.
“고시 공부를 하기로 하고 방에 처박혀 책만 봤지요. 1년 반 동안 그 여자의 일기 같은 편지를 받으며, 불면증에 시달리며…….”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하숙집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난다. 사랑을 피해 은거한 그 하숙집 딸이 바로 아내 임춘자다. 윤갑숙 씨를 소개해준 친구가 이번에는 돈을 크게 벌어 종로에 큰 악기점을 차려놓고 서울로 그를 불렀다. 종로로 돌아온 그는 ‘유한악기’라는 이름으로 다시 악기점을 운영하게 된다.
악기점을 하다 결혼한 그는 이번에는 악기 제작에 나섰다. 새로운 악기를 만들거나 악기를 개량하는 일은 늘 그의 열정을 자극했다. 1960년대 중반 교재용 악기로 실로폰이나 탬버린, 리코더, 드럼, 비브라폰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비록 전문가용은 아니지만 그는 우리나라 악기 제작의 제 1세대다. 돈을 번 적도 있지만 수출용 악기를 개발하느라 수십 명이 일하는 공장을 무리하게 운영하다 망하고, 멜로디언을 제작한다고 집 한 채 값을 날리기도 했다. 악기 제작 역시 다른 제조업처럼 모형을 개발한 다음 설비가 필요한 사업이라 돈이 많이 든다.
“제가 기독교에 몸담기 전에는 좀 괴팍한 데가 있었습니다. 사업을 하다 사기당한 적도 있지만 조금만 비위에 거슬려도 못 견뎠죠. 가정이나 돈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감정이나 흥미에 따라 일하고 사업을 정리하곤 했습니다.”
기독교와 국악기를 만나다
게다가 그에겐 타고난 방랑벽과 꿈을 좇는 열정, 그 꿈을 위해 돈과 정력을 퍼붓는 낭비벽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열정을 낭비한 사람들의 작품이라 했던가. 돈 대신 꿈을 향해 달려온 그 시절의 시행착오는 훗날 국악기를 복원하고 개량하는 데 밑받침이 되었으니 세상에 진짜 낭비란 없는 것 같다.
질풍노도로 살아온 그는 40대 말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맞는다. 바로 기독교를 만난 일이다. 악기점 하라고 자본을 댔던 그 친구가 이번에는 그를 기독교로 이끌었다.
“그 친구가 사업에 실패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더니 새벽부터 저를 찾아와 교회에 끌고 갔어요. 몇 번 끌려 다니다 목사님의 설교에 저의 자아가 깨져버렸습니다.”
악기에 대한 집착과 자기 고집으로 주변 사람은 돌아보지 않고 살아왔던 그의 자아가 깨지는 순간, 그는 새로 태어나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푸근한 성격으로 변해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됐다. 교회는 또 다른 선물도 가져다주었다. 바로 한만영 교수(서울대 국악과)와 국악원 이승렬 악기장 등 국악인들을 만난 것이다.
“교회에서 인사하고 보니 한 교수는 미원악기 시절 저를 봤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국악원 원장이 되면서 저를 국악원으로 불러 옛 악기를 보여주어 그때 처음 편종 편경을 봤네요.”
이런 인연으로 국악기에 입문하게 된 그가 처음 만든 국악기는 금속악기 방향이다.
“방향도 유율 타악기인데 국악원에서 제게 만들 수 있겠느냐고 해요. 당시 제가 실로폰이나 마림바, 차임 같은 서양 타악기를 하루 수십 개씩 조율하던 시절이었어요. 보니 원리가 똑같아요. 그래서 당장 만들 수 있다고 했지요.”
1984년 방향을 복원할 때 그는 정말로 쉽게 만들어냈다. 국악기를 만든 것은 이때가 처음이지만 그는 이미 신향사 시절 국악인 이병우 선생에게 아들처럼 사랑받으며 이 선생의 연줄로 거문고 명인 신쾌동과 뉴욕 출신 국악학자 헤이먼을 만나 연주할 때 자주 따라다닌 적이 있다.
“미국인이 갓 쓰고 우리 음악에 심취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고, 또 신쾌동 부자의 가야금과 해금 연주에 가슴이 울렸지만 양악기에 빠져 있던 때라 국악과 곧장 인연이 닿지는 못했지요.”
방향 복원에 성공한 그는 1985년 국악원의 국악기 개량사업에도 참가했다. 색소폰처럼 키(key)를 붙여 음역을 넓힌 태평소를 선보였지만 큰 각광은 받지 못했다.
“우리 악기는 음정이 정확히 정해져 있지 않고 악기도 표준화가 안 돼 있어 악기나 주법에 따라 음정이 조금씩 다릅니다. 연주자에 따라 색다른 맛이 나서 명인의 이름을 붙인 누구의 제(制·바디), 누구 류(流)가 발달할 정도로 가변성이 많다고 할까요? 그게 국악의 매력이지만 개량하기가 쉽지 않죠.”
음정이 조금씩 다른데도 멋진 병창과 합주를 이루어내는 것은 관악기일 경우 부는 힘이나 흔들어주는 농음으로, 현악기는 누르는 위치를 옮겨주거나 농현으로 조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악기가 동시에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시간차를 두고 흩어지듯 음을 맞춰가는 것도 우리 음악 특유의 기법으로 현대 음악가들이 감탄하는 대목이다.
“그래도 연습용 악기를 만들 때 적용할 기준 음은 정해두었으면 합니다. 또 창작 국악에서는 다양한 음역대가 필요하니 전통을 지키면서도 한편으로 북한이나 중국처럼 악기를 개량해나가야 합니다. 국악원 개량사업에서는 워낙 적은 돈으로 두 달 만에 만들려니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몇 차례 시연하면서 다듬었다면 좋은 결과를 얻었을 텐데요.”
꼭 관에서 지원하는 사업이 아니어도 그는 북을 죄는 장치라든지, 밋밋한 플라스틱 단소나 대금에 대나무 마디를 넣는 등 요모조모 손을 보아왔다. 양악기를 만들면서 조금씩 해오던 국악기 일은 양악기 사업이 실패하고, 또 국악기 제작자로 이름난 남갑진 씨를 만나 도와주면서 점점 비중이 높아져갔다.
“남갑진은 가야금 제작으로 국악기를 시작한 사람인데 경종도 만들고 있었어요. 제가 그때 좀 한가해서 종을 그라인더로 깎아 음정을 맞춰주었더니 굉장히 좋아하더군요. 경과 종은 제일 까다로운 게 음정을 맞추는 것이거든요.”
경돌 찾아 삼만 리
경과 종은 깎아낼수록 소리가 낮아진다. 아무리 기계로 맞춘다 해도 자칫 한순간에 음정을 놓치는 수가 있어 음감이 없는 사람은 해내기 힘들다. 이 무렵 몇몇이 경과 종을 만들었지만 음정 잡는 데 실패했는지 밑단을 잘라낸 엉터리 종이 국악원에도 있다 한다. 음감이 워낙 뛰어난 데다 솜씨도 좋은 그는 경종 만들기에 자신이 있었고, 마침 국악원의 편경과 편종 제작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곧 난관에 부딪혔다. 전국의 산을 찾아 헤맸지만 좋은 옥돌을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세종실록의 기록대로 경기도에서 남양옥을 확인한 것은 2000년대 이후다.)
“답답해서 예전 제작 기록을 찾아보니 중국 산둥 사수 지방에서 캤다는 말이 있기에 중국에 갔지요. 거기 가면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죠. 그런데 찾지 못해 온 중국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는 헤이룽장 옌볜 선양부터 저 멀리 신장과 내몽골, 윈난, 화베이, 저장, 구이저우, 둔황까지 그것도 광산이 있는 깊은 골짜기를 누비고 다녔다. 그 사이 많은 중국인과 사귀었는데, ‘한번 만난 사람은 결코 헤어지지 않는다’는 그의 인간관계 덕택에 아직도 친하게 지낸다.
“한번은 경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갔더니 까만 옥돌을 갖고 오더군요. 중국 편경은 흑경을 쓴다네요. 옥돌 구하기가 힘들어 국악원에 흑경으로 만들면 안 되겠느냐고 했더니 소리는 둘째고 옥색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겁니다.”
중국에서도 옥돌을 찾지 못한 그는 다 포기하고 국악기에서 손을 떼기로 마음먹고 공항 면세점을 오가다 우연히 옥으로 만든 건신구(호두알처럼 손에 굴리는 구슬)를 발견하고 ‘이거다!’ 싶어 사와서 깨어보니 과연 국악원의 옛 편경 조각과 같았다.
“중국에 다시 가 그 생산지를 찾는 데 또 시간이 많이 걸렸죠. 나중에 허난성 뤄양에서 좀 떨어진 진평에서 찾았습니다. 거기서도 추수 때라 며칠 기다려 인부를 겨우 구했지요.”
중국에서 돌 찾는 2년 동안 만난 사람과 사고 등 우여곡절은 무용담 소설처럼 흥미진진하다.
88서울올림픽 이후 중국에서 찾기 시작한 옥돌을 1990년 무렵 찾았고, 그 2년 뒤 편경과 편종 제작을 마쳤다. 편종의 합금 비율은 ‘악학궤범’에 자세히 나와 있어 이를 기준으로 몇 가지 재료를 가감해 만든다.
양악기로 시작한 그의 악기 인생은 중년 이후 자연스레 국악기에 집중됐다. 자신의 악기점 연악사에서 직접 만든 대금을 부는 김현곤.
유일하게 종과 경을 만드는 나라
“종은 음정을 맞추기 위해 갈아야 하는데 표면은 문양이 있어 안을 깎아야 해요. 타원형이라 깎아내기가 까다로워요. 옥돌은 가는데 가루가 엄청나게 나오고 매끄럽게 다듬는 데 손이 많이 가고요.”
이후 그는 제례와 연회에 쓰는 옛 악기를 10여 가지 복원해냈다. 2010년에는 베트남의 편경과 편종을 복원하고 그 2년 뒤 특종과 특경(아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큰 종과 경)까지 복원했다. 한국은 아악을 연주했던 유교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종과 경을 만드는 기술을 가진 나라가 됐다. 그가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공작새로 장식한 아름다운 편종과 편경 옆에 선 그는 마치 집으로 돌아온 아들 같다. 편종 틀 위에는 용이 꿈틀대고 두 기둥 받침대에는 청사자가 조각돼 있다. 편경에는 봉황과 흰 거위를 조각한다. 종은 사자후처럼 우렁차고 경은 거위의 울음처럼 청아하다는 뜻일 게다. 또 용과 사자의 푸른색은 동방의 색으로 봄과 시작을 뜻하고, 봉황의 누런색은 중앙, 흰 거위는 서쪽을 상징한다. 편경은 모든 음의 기준이 되므로 가운데이면서 동시에 음악의 끝을 장식하니 흰색을 쓴다. 시작과 끝을 알리는 두 악기를 만든 김현곤은 어린 시절 퉁소 소리에 눈물짓던 소년으로 돌아온 듯하다. 집을 떠난 소년은 멀리 세상의 모든 악기를 다 섭렵한 뒤 마침내 돌아와 다시 퉁소를 만났다. 이제 소년은 퉁소의 비밀을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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