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9층목탑은 김춘추 세력의 풍수 조작품
그 결과 선덕여왕은 탑 건설 1년 후에 사망하고 김춘추는 태종무열왕이 된다.
경북 경주시 구황동의 황룡사지. 경주 시내 한복판, 2만4000여 평에 달하는 드넓은 부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봄풀이 파릇파릇 솟아나기 시작한 대지엔 건물의 초석(礎石)으로 사용된 돌덩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나무에 물이 오르는 3월 초인데도 마냥 황량하기만 하다. 이곳이 신라 최대 사찰인 황룡사 터이며, 당시 신라인의 자랑거리인 80m 남짓 높이의 9층목탑이 있었던 곳임을 간파해내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다만 전문가들이 드문드문 배열된 초석과 거기서 발굴된 유물들, 그리고 역사 기록을 통해 유추해낸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전한다.
황룡사는 1400여 년 전인 553년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16년의 공사 끝에 완공한 절이다. 황룡사에 처음부터 신라의 상징인 9층탑이 있었던 건 아니다. 진흥왕 사망 직전에 1장6척(약 4.5m)의 장륙존상(丈六尊像)이 조성됐고, 그의 아들 진평왕에 의해 584년 부처상을 모신 금당이 조성됐다. 이어 선덕여왕이 통치하던 645년에 이르러 9층목탑이 조성됐다.
황룡사 9층목탑과 분황사 모전탑
현재 황룡사지엔 금당터의 주춧돌, 장륙존상과 좌·우협시보살을 모신 초석, 그리고 9층목탑의 주초석이 남아 있다. 역사가 거짓이 아님을 증명이나 하려는 듯 천 년 넘게 그 자리를 굳건히 사수하고 있다.
지금 필자는 7세기 중반 이후 신라 수도 서라벌의 상징물인 황룡사 9층목탑의 한가운데 자리에 서 있다. 요즘 건물로 치면 30층 높이에 달하는 이 탑의 위용은 대단했다. 1238년 몽골의 침입을 받아 목탑이 불에 타버리기 전까지 고려의 시인 묵객들도 탑 꼭대기에 올라 그 장엄함을 노래할 정도였다. 당시 신라인들은 외국의 사신 등 귀한 손님들이 찾아올 때마다 탑 꼭대기까지 데리고 가 구경시켜 주었을 것이다. 절들이 하늘의 별처럼 펼쳐지고, 탑들은 기러기가 줄지어 날아가는 듯 배치된(社社星張 塔塔雁行) 서라벌의 전경과 위엄 서린 궁궐들을 보여주면서, 내심 이 탑이 주위 아홉 나라를 제압하는 기운이 서린 곳임을 자부했을 것이다.
옛날의 영화로운 모습은 사라졌지만 현재 남아 있는 60여 개의 초석과 그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심초석(心礎石)이 9층목탑의 잔향(殘香)을 드리운다. 초석들은 마치 정사각형 바둑판 위의 바둑알처럼 가로세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돼 있는데, 바둑판 모양의 탑지(塔址) 한 변의 길이만 약 22.2m, 면적으로 치면 150평에 달하니 어마어마한 규모다.
필자는 경주에 갈 때마다 황룡사 9층탑지와 황룡사의 수호사찰 분위기를 풍기는 분황사의 모전탑(국보 제30호)을 찾곤 했다. 풍수학을 전공한 필자는 두 탑의 서로 다른 기운에 묘한 감흥에 빠지곤 했다. 분황사를 중심으로 시계 방향으로 탑돌이를 하다보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기(天氣, 일종의 에너지라 치자)가 탑 주위를 감싸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탑을 돌면 그 청량한 기운에 흠뻑 취해 발걸음이 약간 비틀거릴 정도다.
반면 황룡사 9층탑은 다르다. 150평 규모의 탑지 전체로 거대한 기운이 쏟아진다. 또 이 탑지의 기운은 심초석을 중심으로 그 북쪽의 금당터 기운과 남쪽의 중문터 기운에 의해 더욱 압축되면서 중앙에서 증폭되는 느낌이다. 기운이 워낙 강해 ‘기를 받기 위한’ 목적으로 오래 머물러 있다간 되레 해로움을 볼 수 있을 정도다. 분황사 탑의 기운이 맑고 가볍고 청량하다면, 황룡사 탑의 기운은 태풍의 강력한 회오리바람처럼 중후하고 묵직해 사람이 직접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닌 것도 같다. 필자는 이번 답사에서 이 탑에 서린 기운의 정체를 풍수적 측면에서 본격적으로 밝혀보기로 작정했다.
풍수라는 학문은 흔히 ‘바람’과 ‘물’의 논리라고 한다. 바람을 갈무리하고(藏風), 물을 얻는(得水) 곳이 명당이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외형적으로 겨울철 서북풍의 거센 바람이나 계곡에서 불어오는 칼바람 등을 피할 수 있으며, 지기(地氣)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작동하는 물을 만나는 곳에서 대개 좋은 터가 형성되게 마련이고, 그런 곳에 살면 사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바람은 천기(天氣), 물은 수정(水精)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풍수학의 고전 ‘장서(금낭경)’라는 책이 있다. 기독교인이 성스러운 책으로 떠받드는 성경처럼 동양의 풍수학자들이 풍수 바이블로 인정하는 책이다. 이 책은 풍수의 핵심이 ‘기(氣)’라고 정의한다. 한마디로 풍수란 생기(生氣)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葬者 乘生氣也). 땅속에 흐르는 생기는 다른 표현으로 지기(地氣)라고도 하며, 이 지기를 ‘타기’ 위해 풍(風)과 수(水)의 역할이 강조된다.
사실 이 풍과 수를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우리 풍수’와 중국 풍수가 달라질 수 있다. 중국 풍수 논리에 의하면 지기(생기)는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이 경계를 짓는 곳에 멈춘다고 한다. 반면 우리 고유의 풍수는 바람을 하늘의 기운(天氣)으로 보고, 물 역시 하나의 기운 덩어리(水精)로 취급한다. 즉, 지기는 천기를 만나 갈무리되거나 수정의 기운을 얻어야 비로소 명당이 되는 것이다. 이는 중국 풍수 논리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확장된 개념이다.
우리 조상이 남긴 유적의 경우 통일신라 이후 유입된 중국 풍수 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많다. 청동기 시대에 조성된 고인돌, 평지에 세워진 신라 고분, 비탈진 돌벼락에 세워진 암자 등은 중국 풍수 논리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곳이다. 산의 모양새를 보는 형세파 이론이나 좌향과 방위를 따지는 이기파 이론을 끌어들여 해석한 시도도 있으나 견강부회라는 비난을 비껴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풍수 이론으로 살펴보면 이들 유물 대부분이 지기와 함께 천기, 혹은 수정 기운이 뭉쳐진 곳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기운이 눈에 보이거나 이론적 틀로 설명되기 힘들다는 점에서 중국 풍수의 그늘에 가려져 묻혀 있었을 뿐이다.
심초석에 떨어지는 황룡의 기운
황룡사 9층탑은 바로 천기가 나선형으로 회오리치듯 탑지 전체로 내려 쏟는 형국이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곳은 당연히 탑지 중앙의 심초석이다. 심초석으로 떨어지는 천기는 심초석을 덮은 큰 암석에서 휘어지면서 굴절되는 양상이다.
심초석 구조는 땅바닥에 박힌 타원형의 거대한 심초석 위에 다면체 모양의 육중한 암석이 얹힌 형태다. 전체 무게만도 30t에 달한다. 심초석에 올려진 암석은 그 윗면이 북쪽 방향을 바라보며 경사진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선형으로 내려오는 하늘의 천기가 이 암석의 경사진 면을 따라 회전 방향이 틀어지면서 서쪽으로 직진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필자는 눈을 들어 서쪽을 바라봤다. 봄비가 살포시 내려 주변이 맑게 보이지 않았으나 저 멀리 선도산이 눈에 들어왔다. 이 기운은 선도산으로 뻗치고 있음이 분명했다. 직감적으로 무언가 작위적인 냄새가 풍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심초석을 덮은 이 돌의 이상한 모양새에 주목했다. 원래 심초석은 목탑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의 받침돌을 가리키는 것으로 수평으로 평평한 게 대부분이다. 백제 미륵사지 석탑이나 신라 감은사지 석탑 등 지금까지 전국의 탑을 발굴, 복원하는 과정에서 황룡사의 것처럼 윗면이 경사진 뚜껑돌이 배치된 심초석이 나타난 경우는 없었다.
물론 무게가 10t이나 되는 이 암석이 심초석에 보관해놓은 부처의 사리장비를 보호하기 위해 올려놓은 것이라고 볼 수는 있다. 1964년 정부가 목탑터를 재정비하려고 민가의 담장을 헐어내는 과정에서 이 돌이 발견됐는데, 바로 그해 12월 어느 날 도굴꾼이 공업용 잭으로 이 돌을 들어 올려 심초석 상단면 가운데에 있던 구멍(사리공)에서 부처의 사리함과 공양구 일체를 훔쳐가는 사달이 생김으로써 돌의 용도가 밝혀졌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이 돌은 단순히 심초석의 사리공을 보호하려고 마련해놓은 장치일 뿐인가. 하필이면 그다지 멋있게 생기지도 않은 화강암에 윗면이 경사지도록 깎아놓고 배치해놨다는 건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다. 바로 인근에 조성한 장륙존상의 그 웅장하고 화려한 면모의 주춧돌과는 너무도 대비되는 촌스러운 모양새다. 그것도 장륙존상이 조성된 후 몇 십 년이 지나 백제 장인인 아비지(阿非知)까지 데려와 심혈을 기울여 지은 9층목탑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이 암석은 심초석이 아니라고 보거나, 고려 시기 목탑이 소실된 후 어떤 목적으로 심초석 위에 가져다 놓은 것일 수 있다는 등 추측만 남발했다.
사실 심초석을 덮은 돌에는 역사의 숨은 내막이 있다. 기록엔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 풍수의 눈으로 보면 이 심초석의 비밀이 자연스럽게 풀린다. ‘심초석’이란 ‘타임 게이트(time gate)’를 통해 1400여 년 전의 역사 속으로 날아가보자.
때는 진흥왕 14년 봄꽃이 화려한 2월 어느 날, 진흥왕은 담당 관청에 명해 월성(月城·반월성, 경주시 인왕동 소재)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한다. 그런데 진흙의 늪지대인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궁궐 조성 계획을 포기하고 대신 절을 짓게 했고, 대공사 끝에 완공된 절 이름도 황룡사라 부르게 한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이 간단한 문구가 황룡사의 건립 연유다. 이로써 황룡사는 신라를 지키는 호국사찰로 그 입지를 다지게 된다.
전설적 영물인 용이 황룡사 터에 출현했다는 건 다분히 과장된 이야기일 수 있다. 용의 출현은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신성한 용을 끌어들임으로써 왕권 강화를 꾀한 진흥왕의 정치적 술책일 수 있다는 설도 제기된다.
그러나 풍수적으로 보면 용의 출현이 아주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황룡사 터에 스크루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듯 쏟아져 내리는 에너지(천기) 덩어리는 기에 민감한 사람에겐 마치 용이 출현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가끔씩 동해에서 일어나는 용오름 현상을 승천하는 용의 출현으로 인식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실제로 천 년 전의 신라인들은 수중릉인 문무대왕릉이 있는 바다에서 용오름 현상이 발생하자, 자신이 죽은 뒤 동해를 지키는 호국의 용이 되겠다고 다짐한 문무대왕이 용으로 현신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아무튼 용(천기)을 호국의 상징이자 왕권 수호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은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에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 밑그림은 승려 안홍(安弘·579∼640)과 자장에게서 이미 나타나 있었다. 안홍은 그가 지었다고 하는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 “신라 제27대 여왕이 임금이 되는데, 비록 도는 있으되 위엄이 없으므로 구한(九韓·아홉 나라)이 침범하게 된다. 만일 용궁(대궐)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쳐들어오는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분히 조선시대 예언서인 ‘정감록’ 같은 참서적 성격이 짙은 이 기록의 저자가 당대의 고승으로 인정받는 안홍이라는 점에서 예언의 신빙성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643년(선덕여왕 12년)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승려 자장(590~668) 역시 안홍과 같은 제안을 함에 따라 9층탑 건립의 명분이 갖춰졌다.
9층목탑의 건설 책임자 김용춘
선덕여왕 역시 자신의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묘수가 필요한 터였다. 그는 재위 기간 내내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받아 시달리고 있었다. 선덕여왕 11년(642)엔 낙동강 서안의 군사 요충지인 대야성(大耶城)마저 백제 장군 윤충(允忠)에 의해 함락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라의 존립이 위협받을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643년 당나라 태종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르지만, 당 태종으로부터 여자가 왕이어서 이웃 나라들로부터 경멸을 받고 있으므로 당나라 황족을 신라왕에 앉히라는 조롱까지 들었다. 내부적으로도 여왕 퇴위론에 시달리던 선덕여왕은 9층탑 건립을 통해 황룡사에 깃들인 용의 보호를 받아서 자신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음을 정치적으로 홍보할 필요가 절실했다. 즉 왕권 수호와 권위 회복의 염원으로 탑을 건설케 했다.
9층목탑은 건립 계획 3년 만에 세워진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올랐다가 4년 만에 폐위된 진지왕(재위 576~579)의 아들인 김용춘이 9층목탑 건축을 현장에서 지휘하는 총감독이었다는 점이다. 하룻밤 사이에 귀교(鬼橋)를 세운 비형랑의 실제 인물이라고도 추측되는 김용춘은 자신의 아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를 수 있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소망하던 사람이었다.
김용춘은 눈 맑고 귀 밝은 이의 조언을 들었거나, 아니면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황룡사 9층목탑 건설을 진두지휘하면서 아들을 위해 풍수적 장치를 했을 개연성이 가장 큰 인물이다. 심초석 위에 구멍을 뚫어 사리를 넣은 뒤 이를 보호하려고 뚜껑돌을 마련해놓아 남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하면서, 황룡 기운이 다른 곳으로 향하도록 돌의 각도를 교묘히 틀어 깎아낸 것이다.
실제로 황룡사의 천기가 선덕여왕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은 역사가 증명한다. 황룡사 9층탑이 세워진 지 불과 1년 만인 647년 ‘비담의 난’이라는 대규모 반란을 맞았고 그 와중에 선덕여왕은 사망하고 만다. 선덕여왕 처지에서 보면 황룡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철저히 외면당하고 만 꼴이다.
진지왕릉으로 떨어지는 황룡 기운
그렇다면 황룡사 기운의 실제적 수혜자는 누구인가. 필자는 그 해답을 서쪽으로 뻗어나간 선도산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자동차로 10분 남짓 달렸을까. 그곳은 태종무열왕릉이 있는 곳에서 선도산 정상 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진지왕릉(경주시 서악동 산 92-1)이었다. 목탑지의 기운은 선도산 자락에 자리 잡은 이곳으로 정확히 연결돼 있었다. 목탑지에서느낀 중후하면서도 굳센 권력의 기운이 이곳에서도 똑같이 감지됐다.
진지왕릉을 자세히 살펴봤다. 재위 3년 만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죽은 진지왕의 무덤은 그 손자인 태종무열왕의 무덤보다 규모가 다소 작고 초라해 보였다. 그런데 무덤 위에 심어진 잔디 한쪽의 색깔이 유달리 검게 보였다. 천기가 직접적으로 떨어지는 곳이었다. 잔디가 죽은 것은 아니지만, 워낙 강한 기운을 받다보니 잔디의 색깔이 변한 것이다.
황룡사 목탑의 기운은 오행으로 보면 금(金)의 기운이 분명했다. 금의 기운은 다른 한편으로 권력과 명예의 기운이기도 하다. 또한 금의 기운은 금극목(金克木)의 이치에 의해 목의 기운을 제압하는데, 진지왕릉을 덮은 목기운의 잔디가 금에 의해 제압을 당해 변색됐을 것이다. 물론 잔디 색깔이 거무스레해졌다고 해서 금 기운이 강한 곳이라고 단정해선 안 된다. 수맥에 의하거나, 다른 살기(殺氣)에 의해서 그런 현상이 생길 수도 있다.
황룡사 9층목탑의 기운이 4~5km 떨어진 진지왕릉까지 이어지는 걸 감지하면서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혹도 한쪽에서 들었다. 국내에서 기(氣)풍수 전문가로 알려진 지한 선생에게 필자의 기운 감정에 대해 조언을 부탁했다.
“황룡사 9층탑의 천기는 워낙 강력해 사람이 직접 이용할 수 있는 기운이 아닐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 기운의 정체를 파악해낸 뒤 무덤 쪽으로 기운을 옮기고 무덤에 서려 있는 지기와 함께 중화시킨 뒤 산 사람에게 사용하려 한 듯 보입니다.”
지한 선생은 실제로 천기를 직접적으로 이용할 수 없을 경우 중개지를 거치는 일종의 풍수적 장치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황룡사 기운은 진지왕릉의 기운과 함께 섞여 다시 월성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진지왕릉에서 또 다시 뻗어 나오는 기운을 쫓아 따라가보았다. 그곳은 정확히 월성이 있는 경주박물관 뒤쪽이었다. 아마도 김춘추가 살던 집터였을 것이다. 진지왕릉의 기운을 받을 수 있으며, 대권 의지를 불태운 이로는 김춘추가 가장 유력하기 때문이다. 역사 기록엔 김춘추가 어디서 살았는지 소개돼 있지 않다. 그러나 풍수의 안목으로 보면 할아버지인 진지왕 무덤의 기운을 받고 있는 김춘추의 집터까지 잡아낼 수 있다. 이게 바로 풍수의 묘미다.
실제로 김춘추는 황룡사 목탑이 세워진 지 10년 만인 654년 왕위에 올라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지는 태종무열왕이 되고, 그 아들인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 또한 김춘추는 진골 신분으로서 최초로 왕이 됨으로써 성골 집권 시대를 끝낸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풍수의 눈으로 보자면 황룡사 9층탑의 기운을 제대로 활용한 사례에 해당한다. 황룡사 9층탑은 변방에 있던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병합해 통일을 이룩하게 할 정도로 강력한 권력의 기운이었던 것이다. 또 9층탑의 기운을 이용한 김춘추의 집터는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빈 터이지만 천 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권력의 기운이 살아 꿈틀거린다.
경주엔 정부의 지원으로 월성 왕궁 등 신라 유적을 복원하는 사업을 위해 2025년까지 1조6622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투입될 것이라고 한다. 복원은 원형 그대로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선 현대인의 시각이 아니라 고대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풍수학은 바로 고대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사상 중 하나다. 풍수적 사유체계가 원형 복원사업에서 배제돼서는 안 될 절대적 이유이기도 하다.
후기: 취재를 마치고 우연찮게 태종무열왕의 직계 후손인 경주 김씨(55)를 만날 수 있었다. 신원을 밝히길 꺼린 그는 경주 풍수 얘기를 나누던 끝에 자신의 부친으로부터 들은 얘기와 너무나 흡사하다고 놀라워했다. 경주의 석굴암과 문무대왕릉, 선도산의 명당, 그리고 황룡사 9층목탑 등은 태종무열왕 이후 경주 김씨들이 왕권 수호를 위해 조성한 비보(裨補) 풍수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경주 김씨 직계 자손들 사이에 구전으로 내려온다고 한다. 그래서 다음 호엔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지 탑을 통해 경주 풍수를 조망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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