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청양의 오서산 자락에는 초기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다락골성지가 있다. 성지에 세워진 기념 성당 제대 뒤에는 팔 없는 예수상이 걸려 있다. 성지를 찾아온 순례자들이 예수의 두 팔을 대신하자는 의미에서 오스트리아 조각가 셉 아우뮬러에게 특별 주문해 깎은 것이다. 십자가도, 두 팔도 없어 초라하기까지 한 예수상이 새삼 감동을 준다.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초기 천주교도들이 처참하게 도륙당해 이름 없는 ‘줄무덤’으로 남아있는 충남 청양 다락골성지. 그곳 성당의 제대 뒤쪽에서 십자가도, 두 팔도 없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팔 없는 예수상. 그 내력이 이렇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독일 남부 도시의 성당 잔해 속에서 두 팔이 떨어져나간 예수상이 발견됩니다. 탐욕과 전쟁으로 두 번 죽은 셈이 된 예수상 앞에서 신도들은 다짐합니다. ‘우리가 두 팔이 되자.’ 이 일화에 착안해서 특별히 주문 제작한 팔 없는 예수는 오스트리아 조각가 셉 아우뮬러가 여든두 살 때 만든 작품입니다. 팔 없는 예수상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두 손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믿는 이들에게, 그리고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내미는 답이 여기 있습니다. ‘너희도 사랑 가운데 행하라.’(에베소서 5:2)
내포(內浦)지방.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이 밀려들어온 충청 서북부의 땅을 이렇게 부릅니다. 뱃길을 따라 외래 문물의 드나듦이 잦기도 했거니와, 내포지방 사람들의 우직한 성품 탓도 있겠지요. 내포지방에 천주교 성지들이, 목숨까지 기꺼이 바쳤던 믿음이 유독 많았던 이유가 말입니다. 천주교가 우리 땅에 뿌리를 내린 지 올해로 230여 년. 오는 14일 내한하는 교황 프란치스코가 4박5일의 체류기간 중 두 차례에 걸쳐 내포의 성지를 방문합니다. 충남 당진의 솔뫼성지와 서산의 해미읍성. 솔뫼성지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4대에 걸친 순교의 역사가 깃든 자리이고, 해미읍성은 천주교도들을 참혹하게 도륙했던 곳입니다. 교황이 다녀가는 곳은 이 두 곳이지만, 내포 땅 곳곳에는 더 많은 눈물과 헤아릴 수 없는 죽음, 그리고 간절했던 기도가 있었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도 ‘제 목을 치는 도끼에 향기를 묻히는’ 그런 죽음의 자취 앞에서 평등세상을 향한 간절한 꿈과 뜨거운 눈물을 뭉클한 감동 속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교황의 방한을 앞두고 그 자취를 두 번으로 나눠 따라갑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공포와 처참한 살육의 공간 속에서 그들이 넘어서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내내 그런 질문이 맴돌았습니다.
충남 당진시 합덕읍 대덕리의 ‘이름 없는 순교자의 묘역’ 무덤들.
# 깊은 산중의 기도가 모인 자리를 찾아가다
▲ 이름 없는 초기 천주교 순교자의 성경 유품. 순교자가 남긴 글씨가 뚜렷하다.
충남 일대의 내포(內浦) 땅은 곳곳이 천주교 성지(聖地)다. 내포의 천주교 전통은 딴 곳과는 좀 다르다. 천주교는 실학의 영향을 받은 양반계급의 지식인들에 의해 이 땅에 처음 뿌리를 내렸지만, 이곳 내포 쪽의 천주교는 이른바 ‘양인’들이 중심이 된 신앙공동체였다. 기름진 내포평야의 땅을 소유한 부유한 양인들이 먼저 제 것을 나누며 삶으로 종교를 실천했고, 이런 모습에서 여태 본 적이 없었던 ‘평등 세상’을 보았던 하층민들이 모여들었다. 내포 땅에서 유독 천주교가 폭발적인 전파를 이룬 것은 이렇게 설명된다.
내포 일대도 그렇지만 천주교의 성지는 대개 두 곳으로 확연하게 나뉜다. 한 곳은 천주교 신도들이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참한 죽임을 당한 순교지다. 믿음의 선혈이 땅을 흥건히 적신 이런 곳들은 대부분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들이었다. 조선시대 조정에서는 이른바 ‘천주쟁이’들을 체제를 위협하는 대역죄인으로 취급했다. 신분질서를 어지럽히고 유교적 제사의례 등을 무시했다는 이유였다.
권력층이 정말로 두려워했던 것은 이들이 ‘죽음을 무릅쓴다’는 것이었다. 죽임으로도 다스려지지 않는 죄인들은 권력자들에게 얼마나 공포스러운 존재였을까. 권력자들은 그래서 천주교인들을 저잣거리로 끌고 나와 처형했다. 살해 위협으로도 천주교도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으니, 아직 천주학에 물들지 않은 이들에게라도 본보기를 보여 전염병과 같은 천주학의 창궐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순교의 성지는 대부분 지역의 중심인 읍성이거나 주요 교통로 주변이었다.
분주한 저잣거리의 정반대편 깊은 산중에도 천주교 성지가 있다.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온 이들이 신앙공동체 생활을 하던 곳들이다.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믿음으로 서로에게 의지했던 이들의 기도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대개 이런 곳들도 주민들이 박해사건 때 체포돼 끌려나가 참혹하게 몰사했지만, 살아남은 후손들은 시신을 몰래 거둬다가 무덤을 쓰고 그곳에서 믿음을 이어갔다. 분주한 저잣거리와 인적 드문 깊은 산중. 내포 땅의 성지를 찾아가는 여정은 이 두 곳을 오가는 일과 다름없다. 피 묻은 죽임의 자리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뤄두고, 먼저 이런 깊은 곳의 성지부터 찾아간다.
▲ 충남 금산 진산성지의 소박한 성당. 진산성지는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인 윤지충과 외사촌 형 권상연이 믿음을 키우며 살았던 곳이다.
# 첫 순교의 자취를 찾아가다 … 진산성지
천주교 순교의 역사를 순서대로 보자면 내포 지방에서 가장 먼저 찾아가야 할 곳은 충남 금산군 진산면 지방리의 진산성지다. 이곳은 참수로 처형된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그리고 외사촌 형 권상연이 살던 곳이다. 윤지충은 오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의 주재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리는 시복식에서 추대되는 복자(福者·성인의 전 단계) 124위 중 첫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윤지충은 1791년 모친의 장례를 치르면서 유교식 의식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체포된다. ‘고작 그런 일 때문이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유교사회에서 모친의 신주를 모시지 않고 제사상을 차리지 않는 행위야말로 패륜 중의 패륜이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가치로 보면 제사를 거부하는 건 곧 임금을 부정하는 뜻도 됐다. 혹독한 문초가 이어졌지만 그는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사촌 권상연과 함께 전주로 압송돼 풍남문 밖에서 행인들이 보는 가운데 참수됐다. 그게 바로 천주교의 첫 박해사건인 ‘기해박해’였다. 그의 죽음이 지금 천주교의 밑돌이 됐듯, 처형 당시 그의 피가 묻은 돌은 여태 전주 전동성당의 주춧돌이 돼서 믿음을 받치고 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죽임의 자리가 전주라면, 이들의 삶의 자리는 금산의 진산성지였다. 성지가 있는 지방리 일대는 박해를 피해 숨어살던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있던 곳이다. 그때도 그랬겠지만 지금도 진산성지 일대는 그야말로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고즈넉한 시골마을이다. 농촌마을의 소박한 풍경이 어찌나 푸근하던지 성지를 찾아나선 여정이 아니더라도 일부러 찾아가볼 만한 곳이다.
진산성지에는 소박한 성당이 마을 한가운데에 마치 정물 속 풍경처럼 서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참수 이후 흩어졌던 교우들이 병인박해의 피바람이 지나간 뒤 여기다가 작은 성당격인 ‘공소’를 세웠고, 이후 1927년에 번듯한 성당을 지었다. 그러나 부임할 신부가 없다는 이유로 성당은 공소로 되돌려졌다가 2009년에야 비로소 성지의 성당으로 복원됐다.
슬레이트 지붕의 목조 성당 건물은 마치 일제강점기의 소박한 초등학교 건물을 연상케 했다. 성당 맞은편에 가건물로 기념관을 만들어놓기는 했지만 성당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이곳은 ‘무엇을 보겠다’는 욕심보다는 묵상에 더 어울리는 곳이다. 여행자들을 깊은 생각으로 이끄는 건, 작은 실개천을 품고 있는 자그마한 시골마을에 가득 고여 출렁거리는 정적이다. 한 차례 소나기가 지나가자, 빗방울이 고인 참나리꽃의 주황빛은 짙어졌고 교우촌이 있었다던 진밭들 마을 쪽의 산자락마다 구름이 피어올랐다. 비 그친 논과 밭, 그리고 마을의 풍경이 더없이 평화로웠다. 성지를 찾아서 ‘고요한 마음’을 갖고 싶다면 여기만 한 곳이 또 없겠다 싶었다.
▲ 충남 당진시 합덕읍 신리성지의 종. 내포의 너른 벌판에 울려퍼지는 종소리가 평화롭다. 오른쪽 뒤의 건물이 다블뤼 주교 기념관이다.
# 숨어서 올린 기도가 더 뜨겁다 … 조선의 ‘카타콤’
충남 일대의 이른바 내포 땅으로 천주교 성지 여정을 떠난다면 꼭 기억해둘 인물이 프랑스외방전교회에서 우리나라에 파견한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다. 그는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해 활동하다 병인박해 때 체포된다. 그를 특별히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남기고 간 믿음의 자취도 자취지만, 촘촘한 기록으로 조선의 천주교사와 순교사를 남겼기 때문이다. 초기 천주교인들의 순교 사실은 대부분 그가 남긴 기록이 바탕이 됐고, 그 기록에 따라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103위의 순교성인이 나올 수 있었다.
다블뤼 주교는 당진시 합덕읍의 신리마을에 숨어있다가 관군에 체포됐는데, 그가 머물던 마을에 ‘조선의 카타콤’으로 불리는 신리성지가 조성돼있다. 카타콤이란 로마 박해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숨어살던 지하묘지이자 피신처 혹은 집회소를 이르는 이름이다. 로마 근교에 있었던 카타콤과 마찬가지로 이곳 신리는 천주교 신자였던 주민 400여 명이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며 숨어 살았다는 조선시대 최대의 교우촌이었다. 다블뤼 주교를 비롯해 이곳에서만 성인으로 시성된 순교자 다섯 명이 나왔다.
신리마을은 의외로 너른 평야를 두고 있는 들판 한가운데에 있었다. 도무지 ‘숨어 살았다’는 말이 납득이 되지않는 곳이다. 이런 곳에 왜 교우촌이 형성됐을까. 그 답이 또 한 명 기억해야 할 순교자 손자선에게 있다. 손자선은 내포 일대에서 알아주는 거부였다. ‘그의 땅을 밟지 않고 당진을 지날 수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독실한 신도였던 그는 소작농들을 따스한 사랑으로 대했고, 싼 임대료로 땅을 나눠줬다. 지주의 수탈에 시달리던 빈농들이 모여들었고 손자선의 인품에 반한 이들은 천주교의 평등사상을 알게 됐다. 신리 마을의 주민들이 모두 천주교에 귀의하는 집단 개종이 이뤄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잔디밭과 기념관, 성당, 사제관 등을 갖추고 있는 신리성지는 역사공원과 기념관으로 꾸며졌다. 하늘을 담고 있는 연못, 프랑스의 명장이 제작한 종, 다블뤼 주교 기념관 등 이곳저곳 둘러볼 것들이 많다. 손자선의 생가이자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던 국내 유일의 박해기 주교관이었던 한옥건물도 남겨져 있다. 일부 보수되기는 했지만, 대들보와 서까래 일부, 주춧돌, 기둥 등은 처음 지어질 당시의 재료들이다. 새로 지은 다블뤼 기념관의 지하에는 5만 원권 지폐의 신사임당 영정을 그린 동양화가 이종상 화백이 작업 중인 300호짜리 천주교 박해 모습을 담은 그림을 볼 수 있다. 모두 12장의 그림을 제작할 예정으로 8점이 전시돼있는데 아직 완성된 건 아니지만, 노화백이 믿음을 바쳐서 그려내고 있는 그림에서는 깊은 감동이 느껴진다. 성지를 방문한 천주교 신자들이 그림 앞에 서면 ‘저절로 성호가 그어진다’고 할 정도다.
충남 천안시 입장면의 성거산 8분 능선 성지에 들렀다가 내려왔을 때 서쪽 내포땅 일대가 핏빛 노을로 물들고 있었다.
# 선혈처럼 붉은 노을이 내포 땅 위에 드리우다
신리성지에서 멀지않은 대전리의 야산 구릉 공동묘지에 조성된 ‘이름 없는 순교자의 묘역’은 꼭 찾아가보자. 두 삽이 채 못될 정도의 흙으로 봉분을 만든 자그마한 무덤 수십 기가 나무 십자가와 함께 늘어서있는 곳이다. 이곳은 1972년 일대에서 묵주, 십자가와 함께 발굴된 목없는 순교자 시신 32구와 손자선의 후손 묘 14기가 함께 안장된 곳이다. 언제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 기록 한 줄 없는 순교자들. 그리고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멸문의 화를 입어 묻힐 제 땅 하나 남지 않았던 손자선 가문의 후손들을 거둬 최근에 거기 함께 묻었다. 이름을 남겨 성자와 복자의 자리에 오른 순교자들의 죽음도 감동적이지만,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죽어 초라하고 작은 무덤으로 남겨진 이들의 삶이 오히려 더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천주교인들이 믿음을 지키며 숨어 살던 교우촌은 신리성지 말고도 청양군 화성면의 다락골에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의 성거산 깊은 숲속에도 있다. 성지로 조성된 두 곳 모두 이름 없는 순교자들을 줄지어 묻은 줄무덤이 남아있다. 순교자들의 시신을 친척이나 교우들이 거둬 줄을 맞춰 옮겨 묻은 묘지다. 이곳 역시 무덤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한국의 두 번째 사제였던 최양업 신부 집안의 고향이기도 한 다락골성지의 성당에는 두 팔 없는 예수상이 있다. 신도들이 두 팔을 대신하자는 의미로 깎아 만든 제대 뒤편의 팔 없는 예수상 앞에서 수녀가 오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성거산성지는 지금 숨는다 해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숲속에 있다. 성거산 정상을 향해 가파른 능선을 따라 오르다 보면 그 능선의 저 아래 협곡에 마을의 자취가 남아있다. 이곳에서 거주하다 순교한 자들을 일컬어 ‘숨어있는 꽃’이란 뜻의 ‘은화(隱花)’로 부르는데, 그 이름처럼 성지 주변에는 야생화가 지천이다. 성거산성지로 내려서는 자리 쯤에서는 천안 일대는 물론이려니와 서해바다까지 내포지방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성거산성지에서 내려서는데 노을이 내리면서 붉은 기운이 서쪽 내포 일대의 하늘에 내걸렸다. 선혈보다 더 붉은색이었다. 그날 순교자들이 믿음과 바꿨던 피가 저렇게 선명했을까. 내포의 땅 위에 드리운 낙조의 붉은빛은 오래도록 사그라지지 않았다.
성지를 찾아가는 여정은 ‘걷기순례’가 제격이지만, 내포 지방의 성지들이 워낙 넓게 분포한 데다 이즈음 같은 무더위에는 아무래도 무리다. 내포의 성지를 모두 다 들러보겠다면 차로 가는 편이 낫겠다.
걷기순례를 하겠다면 충남 당진 일대의 성지를 이은 총연장 12.5㎞의 ‘버그네순례길’을 따라가는 걸 추천한다. 차로 가는 순례라면 맥락을 정하고 움직이는 편이 낫겠다. 박해의 사건을 순서대로 따라가는 방법도 있겠고, 성인이나 복자로 추대된 순교자들을 정해서 이들의 행적을 따라가는 것도 의미있다. 솔뫼성지, 신리성지, 합덕성당, 무명 순교자의 묘 등을 두루 들러보는 코스다.
충남도청에서 발간한 60쪽짜리 성지여행 안내서 ‘내포 천주교 성지를 찾아서’를 꼭 챙기자. 성지를 찾아가거나 천주교 박해사의 배경 등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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