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단체&요결

如來藏과 『華嚴經』의 性起思想에 대한 考察

醉月 2012. 10. 22. 07:53
Ⅰ.들어가면서
Ⅱ.如來藏 思想
    1.如來藏의 의미
       (1) 고트라(gotra;種姓)
       (2) 가르바(garbha;藏)
       (3) 다투(dh tu;界)
    2.如來藏의 淵源
    3.如來藏 經典의 發達
       (1)『如來藏經』
       (2)『不增不減經』
       (3)『勝 經』
       (4)『涅槃經』
       (5)『寶性論』
       (6)『大乘起信論』
Ⅲ.『華嚴經』의 性起思想
    1.法界緣起
    2.性起思想
    3.性起와 緣起
Ⅳ.如來藏과 性起의 關係
Ⅴ.마치면서

Ⅰ.들어가면서
佛敎의 궁극적인 목적은 苦로 부터의 解脫에 있다. 解脫은 깨달음을 통해서 가능하며, 그 깨달음은 마음의 문제이고 修行의 문제이다. 바로 불교가 부처님의 깨달음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그것은 修行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原始佛敎이래 다양하게 전개되어 온 불교사상도 그 주된 흐름은 항상 一心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6년 고행 후 성도하신 부처님은 깨달음을 한마디로 緣起法이라고 천명했다.
원시불교이래 2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변할 수 없는 萬古의 眞理인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깨달음 當體인 緣起에 대하여 논란의 소지가 되었다.

 

經典에 근거한 불교의 연기인 一心緣起는 각 시대와 논사들에 의하여 새로운 용어를 통하여 相對的으로 설명되었다.
原始佛敎에서 緣起하는 一切萬有를 相依相資·相依相關의 因緣生起, 즉 因緣이 和合하여 生起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는 因果律에 의하여 緣起한다. 이에 대하여 불교학에서는 緣起說을 여러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一切萬有가 生起하는 원인을 一切有情이 조작하는 바의 業力에 있다고 보는 것을 業感緣起說이라 칭하고, 그 生起의 原因을 一切有情의 心識의 主體에서 일으키고 있어 이것을 각자가 본래 갖춘 阿賴耶識이 顯現하는 까닭이라고 설하는 것을 阿賴耶識緣起說이라고 한다. 그 다음에 一切諸法이 實在的인 本體 즉 眞如의 存在를 認定하여 그 本體로부터 生起한다고 설하는 眞如緣起說이 있다. 이와 같이 現象界의 本體를 인정하는 以上 現象이 즉 本體요, 本體가 즉 現象이니 그 一切現象은 서로 因이 되고 서로 緣이 되어 無盡한 緣起를 하는 것이니 이것을 法界無盡緣起라고 보았다.

 

이렇게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緣起說을 同一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 內容들을 후세 각 時代에 潮流에 따라 적합한 표현방법을 취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禪宗의 禪師들은 言語上에서 깨달음을 집착하지 말라고 간곡히 어록에서 충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처님 一代時敎에 의지해서 나를 찾아가야 한다.

 

부처님 一代時敎의 時代史적인 흐름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상이 如來藏이다.
如來藏은 마음의 본래 성질은 맑고 깨끗하며, 煩惱는 원래부터 마음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데서 발달되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如來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사상이다. 그 가능성으로서의 如來의 씨앗 즉 如來藏은 감추어져 있으나 좋은 인연과 實踐修行을 통해서 자기를 完成한다.

 

이러한 如來藏의 思想의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진실한 가르침은 무엇인가를 본 拙稿에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如來藏 思想의 淵源과 思想을 뒷받침해주는 如來藏系 經典에 대하여 살펴보고, 더 나아가 如來藏思想이 華嚴의 法界無盡緣起思想으로 나타나는 性起思想에 대하여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거시적 흐름사를 정리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보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Ⅱ.如來藏 思想

1.如來藏의 의미
如來藏은 일반적으로 범어로 Tath gata(如來)-garbha(藏)이다. garbha는 胎 또는 胎兒로 漢譯된다. 胎와 胎兒에 如來가 붙으면 如來의 胎가 되는데, 이것은 衆生(sattva)이 如來의 胎兒인 것과 胎兒가 성숙해서 如來가 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또한 如來藏과 거의 동일하게 쓰이는 개념으로 佛性이 있다. 梵語로 buddha(佛)-dh tu(性), 즉 佛의 本質, 本性을 뜻하고, 이것은 衆生에게는 佛과 같은 本性이 있고, 이 本性이 成佛을 가능케 하는 佛이 되는 요인이다. 『寶性論』에서 보면 Tath gata(如來)-garbha(藏)의 同義語로 Taht gatadh tu(如來性)의 意味가 보이는데 이는 如來界로 buddha(如來)-dh tu(界)의 의미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如來藏, 佛性이란 衆生안에 있는 佛의 因으로 成佛의 가능성, 즉 衆生自體가 지닌 능력이다.
또한 如來藏의 意味로 깨달음에 도달하는 衆生의 능력을 漢譯에서는 種姓으로 표현한다. 種姓의 原義는 梵語로 gotra(種性), 팔리어로는 gotta에 해당한다.
그러면 如來藏의 槪念과 一致하는 ㉠gotra(種性), ㉡garbha(藏), ㉢dh tu(界)의 意味를 살펴보자.

 

(1) 고트라(gotra;種性)

gotra의 槪念은 阿含의 經文중에서도 보이나 확실한 개념 부가는 아비달마불교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팔-리 聖典중에는 gotrabh 라 하는 말이 있고 비구가 修行過程에서 聖이 되기 직전의 位를 가리킨다. 漢譯에서는 種姓地라 종종 飜譯되고 gotrabh 의 bh 는 이루다 는 의미 외에 bh mi 즉 地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漢譯의 種姓地의 개념과도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種姓의 개념은 有部에 있어서는 聲聞, 獨覺, 菩薩의 種姓으로 展開되고, 이것은 四姓이 태어나자마자 신분이 달라지는 것과 같이, 三乘의 깨달음의 경지는 각기 달라진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有部에 있어 菩薩의 種姓이란 깨달음을 확정하고 있는 有情의 의미로 佛의 前身을 가리킨다. 種姓의 개념은 후에 兪伽行派의 三乘各別, 五姓各別, 一分無說과도 관계가 깊다.

 

이러한 種姓의 개념은 大乘敎學이 발달하면서 그 의미가 확대된다. 『華嚴經』은 菩薩을 如來의 家(kula)에 태어난 者라 하고 그 임무는 '佛의 系統을 保存하고 斷切시키지 않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逆說적 표현을 자주하는 『維摩經』은 阿羅漢이 된 大聲聞을 如來가 되는 種姓을 파괴하고 있다고 하여 阿羅漢에 種姓이 붙는 것을 거부하면서 煩惱에 오염된 衆生이야말로 如來의 種姓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法華經』에서는 菩薩을 佛子라 하고 大聲聞들도 마찬가지로 佛子로서의 自覺을 했을 때 無上菩提를 授記하고 있다. 『法華經』에서는 三界의 衆生은 모두 부처님의 자식이라 하여 一乘이 설해진다. 이때 佛子의 개념은 작은 냇물도 大海에 들어가면 大海의 一味로 되는 것과 같이 四姓의 出身者도 佛家에 들어가면 沙門釋種子라는 一味로 되는 것을 뜻한다. 즉 佛種의 개념도 如來藏의 의미로 포함된다.
gotra의 개념은 印度思想에서는 선천적인 능력의 意味로 사용된 것이었으나 大乘의 如來藏思想과 결합하면서 如來一家를 이루는 衆生界의 意味로 확대된다. 특히 衆生界는 차별이 없어 『涅槃經』에서의 沙門釋種子의 범위에서는 제외되는 一闡堤의 문제도, 『寶性論』에 이르면 成佛可能의 佛性을 인정하게 된다.

 

(2) 가르바(garbha;藏)

如來藏은 衆生에게 있어 如來가 될 수 있는 種姓이라면 이는 이미 言及한 바와 같이 如來의 胎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게된다. 즉 胎의 garbha 는 gotra와 매우 비슷한 개념을 취하고 있다. 印度思想史중에서 garbha가 가장 먼저 비유적으로 쓰여진 述語는 Hiranyagarbha 로 「黃金의 씨알」또는 「黃金의 胎子」라고 볼 수 있으며, Rg-veda에서 宇宙創造의 主로서 열거되는 많은 개념 가운데의 하나이다. 이때 黃金의 金의 意味는 金으로서의 性質도 나타나지만 정련되지 않은 상태의 性質도 意味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garbha는 本性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華嚴經』에서는 「入法界品」중에 善財童子를 「타타가타가르바」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때 善財는 如來를 안에 갖는 容物, 如來의 胎兒를 갖는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다.

『般若經』에서는 如來藏思想과 관련하여 dh tugarbha의 槪念이 보인다.
『般若經』에서 보이는 의미는 佛塔에서 dh tu(遺骨)를 제사지내는 건물이라는 뜻이다. 佛塔은 大乘初期에 生身佛에 대한 崇拜對象이었으나 『般若經』에 의해 崇拜對象이 塔에서 經典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밟는다.
즉 dh tugarbha 는 人格的인 佛의 변화의 측면에서 『般若經』이 등장하면서 佛法身의 容物을 담던 塔은 경전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때 容物은 如來藏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는 衆生과 밀접한 관계에 의해 설정된 般若가 大乘의 명목으로 등장한 것이므로 容物=如來藏이라는 등식은 가능하다.

 

(3) 다투(dh tu;界)

다음으로 如來藏의 意味로 또한 자주 쓰이는 것이 如來의 界의 개념이다.
界의 原義 즉 dh tu는 佛塔에서는 遺骨과 깊은 관련이 있지만 原義는 두는 장소, 土台, 의지하는 곳이다. 印度的 사고로서는 虛空界를 상정할 수 있고, 이 虛空界는 가장 보편적인 것, 불변인 것의 상징으로 『寶性論』에서는 性의 개념으로 해석하고 있다.
如來藏의 意味는 初期大乘經典에서 그 의미가 넓어지고 衆生界와 연결되지만, 실질적 意味의 정착은 中期大乘經典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다. 『寶性論』에서는 中期大乘經典중에서도 특히 『勝 經』『如來藏經』『不增不減經』을 中心으로 如來藏의 意味를 전개하고 있다. 특히 如來藏의 개념은 『佛性論』에 와서 『寶性論』내용이 정연하게 정리된다.

 

『佛性論』에서는 즉 如來藏의 藏은 所攝義와 隱覆義와 能攝義의 三義를 지닌다고 한다.

所攝의 藏이라 하는 것은 一切衆生은 모두 如來智 내에 간직되어 있다는 所藏의 의미를 갖고 있다. 즉 衆生을 如來藏이라 하여 如來에 攝持되어진 것이라는 의미다.

 

隱覆의 藏이라 하는 것은 如來가 스스로 숨어 나타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如來性은 凡夫에 있어서 煩惱에 隱覆되어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은복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중생이 바로 如來藏이라 한다.

能攝의 藏이라 하는 것은 如來로서의 一切功德을 衆生이 이미 攝持하고 如來로 되었을 때 모두 나타나진다고 하는 의미에서 衆生이 如來藏이라고 하는 것이다. 如來藏의 三義는 衆生이 如來에 含藏되어 있고, 衆生이 如來를 갖추고 있고 또한 衆生은 如來의 功德을 모두 示現할 수 있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所攝,隱覆,能攝의 三義는 이미 如來藏의 原義라 考察된 如來의 種姓, 如來의 胎와 胎兒, 如來의 界의 의미를 三義로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如來藏과 동일하게 쓰이는 佛性의 개념을 살펴보겠다.

漢譯 佛性에 상당하는 梵語는 Tath gata(如來)또는 buddha(佛)에 dh tu, garbha, gotra라 하는 性, 藏, 種姓이 다양하게 合性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중에서 dh tu란 佛이 되는 要素라는 意味이고, garbhu란 佛이 胎兒로서 胎內에 있는 狀態라는 意味이고, gotra란 佛의 家族, 同類라는 意味이다. 『寶性論』에서 如來는 三種의 佛身으로 나타내면서 如來性은 三種의 佛身을 얻기 위한 因이라고 說明하고 있다.
그러므로 『寶性論』에서의 如來藏은 佛이 되는 可能性, 佛을 얻기 위한 因이라 하는 意味로 해석해야 할 것이고, 衆生의 汚染된 마음을 정화하면, 如來藏 그 자체가 바로 如來의 淸淨한 法身이 되는 것이다.

 

2.如來藏의 淵源

大乘이전의 心性淸淨과 客塵煩惱說은 「마음을 깨끗이 하다」라는 표현과 함께 수행의 수단과 해설의 목적으로 原始經典 이래 수많은 經論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다.
우선 自性淸淨心이나 心性淸淨은 衆生이 佛이 되는 본성이 있다는 것으로 모든 衆生이 眞如性, 如來性, 佛性을 얻는 基本思想이다.
增支部經典에서는
"比丘들이여! 이 마음은 밝고 깨끗하다. 이것은 또 客塵煩惱에 의해 雜染되어있다."
또한 如來藏系思想의 중요사상으로 전개된 心性淸淨說은 相應部經典에도 잘 나타나 있다.
"比丘들이여! 마음이 雜染되어 있기 때문에 衆生이 雜染되어 있다. 마음이 淸淨하기 때문에 衆生이 淸淨하다.
『雜阿含經』卷10에서는 똑같은 의미로 「比丘 心惱故衆生惱 心淨故衆生淨」이라 표현하고 있다.
즉 위 經에서 표현된 心性淸淨의 뜻은 특히 현실의 상황에서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과 관계없이 마음은 항상 정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내용이 전개된다. 또한 增支部經典에서는 특히, 가장 중요한 마음의 상태를 如實하게 知見해서 마음을 닦아야 할 것을 主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說하고 있다.

 

"比丘들이여! 이 마음은 밝게 비추고 있다. 그것은 또한 客塵煩惱에 의해 雜染되고 있다. 無聞의 凡夫는 如實하게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無聞의 凡夫는 마음을 닦지 않는다고 나는 說하는 것이다. 比丘들이여! 이 마음은 밝게 비추고 있다. 그것은 또한 客塵煩惱에서 벗어나고 있다. 有聞의 聖弟子는 如實하게 마음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有聞의 聖弟子는 마음을 닦고 있다고 나는 說하는 것이다"

위 經文에서는 마음이 自性이라는 표현은 없다. 그러나 汚染과 淸淨의 개념을 밝게 비추고 있다고 하는 것은 有分心이라 불려지는 替在心을 나타낸다고 남방상좌부의 註釋書는 해석하고 있다. 움직이는 각 순간 마다에 움직이는 표면심은 무엇인가의 오염이 항상 부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그 이유이다.

 

部派에서 大乘으로 넘어오면 『般若經』을 위시해서『法華經』『維摩經』등의 많은 大乘經典에서 自性淸淨心이 客塵에 의해 汚染되고 있다는 敎說을 보이고 이 점은 大乘의 근본적 見解라 해도 좋을 정도이다.

大乘佛敎에서는 心의 本性이 독립해서 쓰이고, 自性과 같은 의미로 쓰인 곳에서는 空이라 표현되는 것이 특징이다. 밝게 비추고 있는 淸淨이라 하는 것을 空이라는 의미에서 해석하고 있다. 또한 淸淨心은 더욱 세분화되어 心相이 心自相,心雜染相, 心淸淨相으로 발전하여 唯識說의 三性說의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 경우 心의 自相이란 緣起인, 空(無自性)으로 阿賴耶識(無記心)을 가리키고, 心의 淸淨相은 空性(眞如一法界)을 가리킨다. 如來藏說에 있어 自性淸淨心은 空性에 일치하고 虛空의 淸淨으로 자주 비유된다. 이때의 虛空은 '없다'의 意味가 아니라, 모든 根底의 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면서도 客塵煩惱에 항상 相應하는, 그러면서도 汚染되지 않는, 眞如와도 相通하는 뜻을 내포한다.
空性을 根底로 한 淸淨心은 唯識說에 있어서 無分別智에서 後得智로, 法身에서 受用身 應化身으로 展開된다. 또한 이것은 佛土淸淨을 위해 衆

 

生의 自性淸淨心이 無變異,無分別의 眞理로 되는 것으로 如來藏說의 근본목적인 것이다.

『寶性論』에서 一切의 모든 일의 끝을 아는 것은, 出世間의 般若에 의해서 一切衆生 또는 畜生道에도 如來藏이 存在하고 있음을 如實하게 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바로 自性淸淨의 空性은 모든 衆生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如實知見은 凡夫의 煩惱心으로는 알 수 없는 菩薩의 第一의 菩薩地에서만 생기는 것이다. 즉 衆生의 如來藏이 존재하고 있음을 如實히 안다는 것은 心性이 淸淨하다는 것을 여실히 안다는 뜻과 통한다.

 

결국 如來藏은 心의 淸淨과 如實知見과 不一不異의 同義語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후의 『佛性論』에 이르면 「心淸淨界名如來藏」이라 명확히 서술되고 證明되기에 이른다. 『寶性論』卷 第4,「無量煩惱所纏品」에서 如來藏의 空義와 不空義 에 대해 如實知見을 서술하고 있는 부분도 心性淸淨에 대한 如實知見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般若經』에서는 心性淸淨을 無心이라 칭하기도 하고 , 菩提心,無等等心,廣大心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것은 『寶性論』의 因義에서 衆生의 自性을 淸淨하다고 본 意味와 매우 一致한다. 如來藏系經論에서는 客塵煩惱에 汚染된 不思議의 如來境界인 dh tu(性,界)의 淸淨을 如來藏이라 본다. 그러므로 自性淸淨을 如來藏의 同義語로 칭하는 것은 당연하나 다시 法界藏, 法身藏, 出世間上上藏도 그 同義語로 놓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것은 또한 『寶性論』에 전부 인용되고 心性淸淨의 同義語인 如來藏에는 『勝 經』에서 法界, 法身, 出世間이라는 同義語 외에 佛性이라는 것도 함께 쓰고 있다.
『寶性論』에서는 自性淸淨과 관련된 同義語들이 다양하게 결합되어 인용되어지나 그 의미는 衆生이 佛이 되는 주체로, 衆生은 空性으로 이해되는 오염되지 않는, 自性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3.如來藏 經典의 發達
如來藏思想은 모든 衆生의 本性에는 깨달음의 완성에 도달한 佛陀의 本性과 다르지 않으며 衆生이 일시적인 煩惱로 法性, 眞如, 法身을 깨닫지 못한다는 思想이다. 이러한 敎說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原始經典으로부터 部派佛敎를 거쳐 大乘經典으로 歷史的인 形成過程이 있었다.
如來藏思想은 大乘의 特徵的인 思想이나 전반적으로 정확한 組織을 세워 敎義를 형성하지는 않았던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많은 경전은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如來藏思想을 언급하고 있다. 如來藏이란 단어를 조금 사용한 경우 혹은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경우에도 그 基調가 如來藏思想과 共通的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이러한 如來藏思想이 나타나는 經典들을 槪略的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如來藏三部經이라고 하는 『如來藏經』,『不增不減經』,『勝 經』 그리고 『涅槃經』등과 論에서는『寶性論』,『大乘起信論』 대하여 정리해본다.

 

(1)『如來藏經』

『如來藏經』은 三部經中에 가장 일찍 成立한 것으로 추정되는 經典으로 매우 小部의 經典이고 如來藏을 說明한 방법도 매우 素朴하다.
中心內容은 많은 연꽃 중에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것처럼 衆生의 煩惱중에 도 如來智,如來身이 갖추어져 있어 煩惱가 滅할 때 衆生에게도 如來智, 如來身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衆生의 煩惱중에 있는 如來智,如來身이 9가지 비유로 나타난 점이 이 經의 特徵이며 中心思想이다. 9가지 비유부분은 다시 『寶性論』에 전부 인용되어 자세히 설명되어지고 있다.
      ① 시든 연꽃 가운데 佛. (萎花中의 佛)
      ② 群蜂 중에 있는 美蜜. (巖樹의 蜂蜜)
      ③ 皮檜 등에 있는 中實. (檜中의  梁)
      ④ 糞穢 중에 있는 眞金. (不淨處의 金)
      ⑤ 땅 안에 있는 珍寶藏. (貧家의 寶藏)
      ⑥ 諸果의 種子 중에 있는 芽. (菴羅果의 種)
      ⑦ 더럽고 낡은 옷에 싸인 眞金像. (弊物中의 金像)
      ⑧ 賤女가 懷妊하는 轉輪王. (貧女의 貴胎)
      ⑨ 焦黑泥模 중에 있는 寶像. (模中의 金像)
라고 들고 9가지 비유와 같이 客塵의 煩惱垢에 隱覆되어진 衆生은 모두 如來藏이라고 說한다.

 

(2)『不增不減經』

『不增不減經』은 『如來藏經』보다 더욱 小部의 經典으로 『寶性論』에 인용된 것을 참조하면 經名에 品名도 붙이고 있어, 보다 大部의 經의 一章이라 考察되나 內容上에는 거의 완벽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 經의 主題는 衆生의 깨달음의 增感에 관계없이 衆生界와 法界는 增減이 없고 衆生界와 法界는 同一界라는 것이다. 또한 衆生界를 如來藏이라고도 第一義諦(勝義諦)라고도 칭한다. 衆生을 여읜 法身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法身이 無限의 煩惱에 덮여 無始以來로 輪廻의 世界로 떠돌고 있는 狀態를 衆生이라 하고 있다. 그런데 凡夫는 이 衆生界에 대해 增減斷常의 對立的觀念을 품고 衆生界,法身에 대해 增減,斷常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한다. 더구나 法身 그 자체는 모든 對立과 時間과 空間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에 常住,不變,不異, 不盡, 不滅, 不作의 法이라 한다. 衆生界에는 如來藏이 根本的으로 결합하는 眞如法界인 自性淸淨心과 煩惱에 의해서 우발적으로 汚染된 自性淸淨心을 說하고 이것을 根本으로 하는 一切諸法의 常主를 法界라고 설한다. 이 내용은 『寶性論』에서 그대로 引用되고 있어 『寶性論』『不增不減經』에서 받은 사상적 영향은 지대하다고 생각된다.

 

『不增不減經』의 특색은 對立槪念을 否定하는 表現을 쓰고 있는 점에서 龍樹의 『中論』의 論理로 이해되어 질 수 있다. 不斷不常을 말하면서도 法身의 常住不變을 말해 모순된 論理를 보이고 있으나 이점은 對立性과 自記否定을 媒介로 하는 보다 本質的인 眞理에 도달하는 思考法이라 할 수 있다. 常住不變은 緣起와 空의 道理의 不變을 가리키는 것이다.

 

(3)『勝 經』

『勝 經』은 劉宋의 구나발다라 譯등이 있으며,『勝 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의 약칭이다. 이 경은 主人公이 승만이라는 여성으로 고살라국의 王女로 태어나 요디아라는 왕에게 시집가 兩親으로부터 佛敎入信을 전하는 편지를 받는 부분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發心한 승만부인 앞에 부처님께서 나타나서 장차 많은 사람의 佛이 될 것이라고 保證하고 부처님께서 그 說法을 承認한 形式으로 기술되어 있다.
승만 부인은 우선 戒律을 범하지 않고 慢心을 일으키지 않는 등 10개조의 誓願을 세우고 먼저 三大願, 즉 正法의 理解, 正法의 敎示, 正法의 護持를 세우고, 重要한 思想으로 攝受正法을 들고 있다. 正法이란 大乘의 一乘이고, 聲聞, 緣覺의 世間, 出世間의 모든 善法은 正法에서 나온 것이므로 二乘의 涅槃은 究極의 것은 아니라 한다.
菩薩은 凡夫의 肉體的 生死를 超越하고 經驗으로는 알 수 없는 미묘한 生死에 속박되어 있다고 설한다. 보살도 또한 마음의 中心에 無明住地라 하는 根本的인 煩惱가 潛在하고 있고 無明住地의 原因으로 生死가 일어난다고 설한다. 無明住地라 하는 根本煩惱를 滅하는 것은 佛의 法身 뿐이므로 法身을 얻는 것이 究極의 깨달음이고 이것이 大乘의 궁극적 立場임을 표명한다.
『勝 經』의 각 章 中에서 如來藏章에서는 攝受正法者가 如來藏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章으로 如來藏은 如來智의 내용으로서 10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즉,
      ① 如來만의 境地이다.
      ② 煩惱藏을 벗어난 法身의 이름이다.
      ③ 그 煩惱에 관해 如來藏은 空으로, 본래 관계가 없다. 佛德은 不空이고 그것을 구비하는 것이 法身이다.
      ④ 如來藏은 生死의 所依이다.
      ⑤ 如來藏은 無爲法의 依持,建立뿐만이 아니라 有爲法에 의해서도 依持,建立된다.
      ⑥ 涅槃을 지향하는 原動力은 如來藏이고, 이것은 六識과 刹那滅이 아닌, 識을 超越한 存在이다.
      ⑦ 如來藏은 不生不滅常恒이고, 識 이상의 法이라 해도 그것은 外道에서 말하는 아트만은 아니다.
      ⑧ 如來藏은 墮身見, 顚倒, 空, 衆生들의 行境은 아니다.
      ⑨ 如來藏은 法界藏,法身藏,出世間法藏,自性淸淨法藏이다.
      ⑩ 如來藏은 自性淸淨이라 보아야 한다.

 

如來藏章은 攝受正法者가 如來藏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장으로 『寶性論』과의 관계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특히 『勝 經』에서 보인 如來藏의 의미가 法身에서 如來智,如來智에서 如來藏의 論理로 說해지는 것이 특징이고, 如來藏의 의미가 『如來藏經』과『不增不減經』과는 다소 달라진다. 즉『如來藏經』『不增不減經』은 如來藏을 衆生界와 第一義諦로 보고 있는데 비해『勝 經』은 구체적으로 如來藏을 설명하면서 衆生의 行境은 아니라고 하고 如來의 境地라 하면서도, 如來藏이 無爲法 有爲法으로 建立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如來藏을 有垢眞如에서 無垢眞如로 가는 매우 어려운 단계라고 표현한 다양한 해석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勝 經』에서는 自性淸淨心이 如來藏이고, 如來藏이 唯識의 六識 및 七識을 넘는 것이라 說明하고 있어 心識說로서의 關心이 발견되는 점이 다르다.

 

(4)『涅槃經』

『涅槃經』의 원명은 『大般涅槃經』(범어:Mah parinirv na-s tra)이다.
『涅槃經』은 앞에서 언급한 如來藏經典과는 약간 다른 방향에서 如來藏說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즉『涅槃經』은 앞에서 언급한 如來藏과 똑같은 의미를 佛性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내고 이 점을 보다 넓은 논리로써 전개시켰다.
그 主題는 世尊의 入滅에 임해서 涅槃의 示現은 方便에 지나지 않고 사실은 如來는 常住變易하지 않고 常樂我淨의 四波羅密(四德)을 구비하는 것이라고 설한다. 如來常住의 根據는 佛性이 모든 衆生에게 있는 것을 從來에는 설해지지 않은 秘義(如來秘密法藏)로 설한다.
즉 「一切衆生은 如來藏이다」라고 하는 명제를 대신해 一切衆生에 佛性이 있다고 선언한 점에서 如來藏系經典과 일치하나 『不增不減經』과 『勝 經』에서는 佛性이라 하는 점은 보이지 않으므로 계통이 다른 類의 經典이라 보여진다.
이러한 佛性思想이 禪宗에 들어오는 흐름의 도입은 중국선종의 초조인 達摩가 2조 慧可에게 전수했다고 하는 『楞伽經』에서 극명하게 엿볼 수가 있다.

 

이 경이 다른 佛敎思想과의 관계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如來藏 阿賴耶識에 관한 설이 『勝 經』의 如來藏思想과 『起信論』의 阿賴耶識說과 같다는 것이다. 또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하여 여러 가지 교법이 있지만 그것들에게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며, 그 모든 것은 오직 一佛乘뿐이라고 하여 『法華經』의 會三歸一의 思想이 다시 환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5)『寶性論』
印度 大乘佛敎중에서 如來藏 思想을 조직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대표적 논서이다.
漢譯本으로는 後魏의 勒那摩提가 번역한 『究竟一乘寶性論』(508)이 있다.
이 책은 7종의 金剛句로서 佛(buddha)·法(dharma)·僧(sanga)의 三寶(triratna), 如來性(dh tu)·菩提(bodhi)·佛功德(guna)·佛業(karma)을 설명하고 있다. 이 중 菩提·佛功德·佛業등은 如來性을 나타내는 것으로 如來性은 佛性즉 부처로서의 성질이며, 그것이 원인이 되어 三寶가 있게 되므로 寶性(ratnagotra ;보배로운 성질)이라 한다. 이 如來性이 번뇌에 쌓여 있을 때를 가리켜 如來藏(여래의 씨앗)이라 한다. 또한 이 如來性이 더러움을 떠난 청정해진 상태를 菩提라 하며, 이것은 法身의 완전한 나타남이라는 의미에서 轉依라 한다. 그리고 이 轉依에 의하여 부처의 덕성과 자비가 나타나는 것이라 한다.
이 논서의 저술 목적은 『般若經』의 空設을 비판하고, 佛性의 실재를 밝히려 한 것으로 唯識說과 관련하여 인도에 如來藏思想의 발전을 밝히려고 論해졌다.

 

(6)『大乘起信論』

『大乘起信論』은 인도의 馬鳴(A vagho)이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이 책의 원전인 梵語 原本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현재 전해오는 것은 舊譯 眞諦本(500-569)와 新譯 實叉難陀(652-710)가 번역한 두 가지 漢譯本뿐이다.이 論은 通論的으로 여러 대승경에 공통된 교리를 말하였으므로 大乘通申論의 하나라 한다.
내용은 5분으로 나누어,
     . 因緣分으로 論을 짓는 까닭을 말하는 부분으로 序分 즉 서론을 말한다.
     . 立義分으로 論의 主題를 提示하는 부분이다.
     . 解釋分으로 그 주제를 상세하게 풀이하는 부분이다.
     . 修行信心分으로 어떻게 믿는 마음을 배양하고 수행할 것인가를 말하는 부분이다. 앞의 立義分·解釋分과 함께 正宗分으로 本論을 말한다.
     . 勸修利益分으로 수행을 勸하며 그 利益을 말하는 부분으로 流通分 즉 결론을 말한다.

 

그 중에서 立義分·解釋分은 一心(衆生心)·二門(眞如門,生滅門)·三大(體·相·用)를 말하고, 眞如와 如來藏,覺과 不覺,本覺과 始覺,三細와 六 그리고 薰習論이 설해지고 있다.

修行信心의 一分은 實踐論으로 四信·五行(施門·戒門·忍門·進門·止觀門)과 아미타불에 의한 淨土往生의 길을 말한다.
『起信論』에서는 一心을 衆生心·眞如·阿賴耶識·如來藏·本覺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설한다.
一心을 다시 두가지로 나누어 心眞如門과 心生滅門으로 나눈다. 이것은 一心의 本體인 眞如를 不變과 隨緣의 두 뜻으로 나눈 것이다. 一心을 實體와 緣起, 淨과 動의 두 방면으로 분석했다.
다시 心生滅門은 心眞如門과 달리 體·相·用이라는 三大를 갖추고 있다. 心生滅 門은 世間과 出世間의 모든 現象을 포괄하니, 이것이 곧 眞如本體의 相과 用이다.

 

그러면 一心 가운데에 왜 정반대인 두 방면이 있게 되는가? 本論은 眞如가 不變하면서도 隨緣한다는 중요한 論點을 제시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眞如가 非生非滅이고 言象을 떠났다하더라도, 無明의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면 心으로 하여금 生·住·異·滅의 四相을 있게 하니, 因緣을 따라서 生滅하여 內外와 染淨의 森羅萬象을 일으킨다. 결국 心眞如門은 心의 本體, 絶對 無差別한 一面을 나타내고, 心生滅門은 心의 生滅現象과 相對的 差別的인 一面을 드러내는 것이다.

 

Ⅲ.『華嚴經』의 性起思想

1.法界緣起
法界緣起는 범어 dharma-dh tu pra tya-samutp da의 번역어이고, '우주의 상호의존적 생성(the interpendent arising of the universe)' 또는 아마 더 좋은 번역으로 '우주인 상호의존적 생성(the interdepent arising which is the universe)'인 것 같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거대한 상호의존성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상호의존적 존재(interprntent being)의 방식을 용수가 『중론』에서 말하고 있듯이'空( nyat )'이라고 한다. 불교는 사물들을 철저히 自性(svabh va)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고 말한다. 자성을 통해서만 사물들을 독립된 존재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사물의 존재는 엄밀히 상호의존성〔相依相關性〕에서 나온다.

法界 곧 우주만유를 一大緣起로 보는 학설이다. 이것을 法界無盡緣起·無盡緣起라고도 한다. 이러한 法界緣起는 華嚴哲學의 중심이 된다. 일체의 제법은 서로서로 용납하여 받아들이고(相入) 하나되어(相卽) 원융무애한 무진연기를 이루고 전 우주와 조화와 통일을 말한다.

 

즉 중생과 부처, 번뇌와 깨달음, 생사와 열반등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圓融無碍한 것이며, 한 사물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대로 전 우주(一卽一切,一切卽一)라는 뜻에서 이러한 세계를 蓮華藏世界라고 한다. 따라서 이것은 우주의 기원에 관한 철학이라기보다는 우주의 통일성에 관한 철학이라 하겠다.

 

이 蓮華藏世界海의 묘사를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淸凉 澄觀은 보았다.

첫째는 衆生의 입장에서 한 해석이다. 즉 香水의 바다라는 것은 如來藏識이며, 그것은 또 法性海라고도 할 수 있다. 無住를 根本으로 하므로 風輪이라 했다고 할 수도 있고 또 그것은 妄想의 바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바다 속에 因果의 相, 恒沙의 性德이 있다. 즉 이것이 正因의 꽃이다. 이렇게 含藏이 돼 있다. 그런데 이 阿賴耶識의 相分중, 半은 外器가 되는데 그 까닭은 執受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 다른 半은 內身이 된다. 執着해서 自性이라 하고 覺受하기 때문이다.

 

둘째, 佛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大願의 바람으로써 大悲의 바다를 지키고, 無邊의 行華를 나타내어 二利(自利·利他)를 다 간직한다. 染의 果法과 淨의 果法이 重疊하되 無碍하기 때문에 所感의 刹의 相狀이 이와 같은 것이다.

法界無盡緣起는 事와 事가 걸림없는 事事無碍의 一眞法界이다. 法界는 緣起現前하는 宇宙萬有이다. 그러면 이 一眞法界의 體는 무엇인가? 라는 문제가 일어난다. 華嚴哲學에서는 一眞法界의 體를 一心으로 결론짓는다.

 

단 一心은 相對的인 一心이 아니라 絶對의 一心이요. 이 一心은 總該萬有의 一心이며,圓明具德一心이다.

法界緣起는 業感緣起·唯識緣起·眞如緣起(如來藏緣起)와 유기적인 관련을 갖고 있다. 즉 세계와 인생이 모두 業의 결과라는 12緣起의 業感緣起에 대하여 그 業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 唯識緣起이다. 즉 인간의 阿賴耶識에 일체법의 종자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阿賴耶識은 개인의 본성에 의해 결정되며 이 본성은 眞如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眞如緣起로서의 설명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現象世界와 眞理의 世界와의 조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法界緣起가 설해진 것이다.

 

華嚴宗에서는 一卽一切, 一切卽一이라 말하며, 혹은 한 사물은 상식으로 보는 단독의 하나가 아니요,그대로 전 우주라는 뜻에서 한 사물을 緣起의 법으로 삼고, 이것이 우주 성립의 體이며, 힘인 동시에 그 사물은 전 우주로 말미암아 성립된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우주의 만물은 각기 하나와 일체가 서로 연유하여 있는 重重無盡한 관계이므로 또 이것을 法界無盡緣起라고도 한다.

이 法界無盡緣起을 설명하는 것이 六相圓融과 10玄緣起無碍門의 敎義로 설명되고 있다. 이 思想은 緣起論의 극치로서 宇宙緣起의 주체를 어떤 한 사물에나 어떤 異體에 국한하지 않고, 낱낱 만유의 當相에서 말하는 것으로 性起를 내세우고 있다.
법계연기설의 핵심내용인 사법계,10현연기,육상원융등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1)四法界

法界란 法界緣起에서 설명했듯이 일심체상에 연기하는 만유이다. 그래서 우주만유의 낱낱 법이 자성을 가지고 각자의 영역을 지켜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을 법계라 한다. 이 법계를 설명하는데 事와 理의 구별을 세워 논한 것이 四種法界說인 것이다. 四法界란 事法界, 理法界, 理事無 法界, 事事無 法界이다.
四法界는 杜順(557-640)의 『法界觀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圭峯宗密(780-841)은 『法界觀門』을 근간으로하고 淸凉澄觀의 『華嚴經疎』를 참고하면서 注를 붙여 四種法界의 뜻을 밝히고 있다.

宗密은 法界라는 말을 註釋하면서 四宗의 法界를 이룬다고 하고 四法界·理法界·理事無碍法界·事事無碍法界의 넷을 열거하고 있다.
"청량의 『新經疏』에 이르기를, 일진법계는 총히 만유를 해섭하니 곧 일심이다. 그러나 마음이 만유를 융섭하여 문득 사종법계를 이룬다. 첫째는 사법계이니 계는 分의 뜻이다. 낱낱이 차별하여 분제가 있는 까닭이다. 둘째는 이법계이니 性의 뜻이다. 無盡事法이 동일성인 까닭이다.

 

셋째는 이사무애법계이다. 성과 분의 뜻을 갖추어 성분무애인 까닭이다. 넷째는 사사무애법계이니 일체 분제가 낱낱이 성과 같이 융통하여 중중무진이다"
그러나 본래 杜順의 『法界觀門』에는 四宗法界라는 말이 없고 三種法界을 설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종밀은 眞空觀은 理法界, 理事無碍觀은 理事無碍法界,周遍含容觀은 事事無碍法界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杜順의 설에서 事法界에 해당되는 부분이 빠진 것은 事法界가 상식적인 表象의 世界, 즉 迷惑의 世界이기 때문에 깨달음의 世界에다 열거할 수 없어 빼버렸을 것이라 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杜順의 說을 토대로 宗密의 注가 붙어 있는 『注華嚴法界觀門』에 의해 그 要旨만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事法界란, 사물을 하나하나 차별시켜 보는 세계이다.

事란 현상·사물·사건등을 界란 分을 뜻한다. 따라서 그것은 迷妄의 마음에 대한 世界이며 상식적인 表象의 世界이다. 낱낱 사물은 인연에 의해 화합된 것이므로 제각기의 한계를 가지고 구별되는 것이다. 이러한 事法界의 특징은 모든 사물에 대하여 그 다양한 차별만을 보고 공통성을 전부 무시해 버리는데 있다. 즉,물과 파도의 비유로 말하면 차별된 파도의 모양이다.

 

. 理法界란, 事法界의 무한한 다양성도 우주의 본체로서 평등한 세계를 말한다.

이는 원리·본체·법칙·보편적 진리등을 界란 性을 가리킨다. 궁극적 理는 총체적 일심진여이며, 空이며 如如이다.
다시말하면, 事法界上으로 보았을때 事事物物 차별 그대로가 절대의 존재이나 理法界上으로 보면 차별의 만법은 모두 한 마음에서 나타난 것이며, 眞如의 한 이치로부터 연기한 것으로서 평등한 一心에 돌아가며, 眞如의 一理에 돌아가 마음밖에 法이 없으며, 眞如밖에 만법이 없다. 즉, 어떠한 파도도 그 바탕은 물로서 평등한 濕性은 파도 전체에 두루한 것과 같다.

 

. 理事無 法界란, 事法界가 差別의 世界이고 理法界가 無差別同一의 世界이지만 이 두 세계가 따로 따로 獨立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事法界의 모든 현상에 無差別同一의 理法界性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보는 세계이다. 즉, 理는 事에 의해 존재하고 事는 理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되어 理와 事가 서로 원융무애한 것이 理事無 法界이다.

理와 事, 즉 본체계와 현상계가 둘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걸림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음을 말한다. 性分無碍로서 완전 자재하고 융섭하는 경계이다.

 

이 理事無 의 관계는 마치 물은 본체인 理, 파도는 현상계인 事에 비유할 수 있다.

즉 파도를 여의고 따로 물을 찾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물이 곧 파도며 파도가 곧 물인 것과 같음을 말한다. 차별의 事와 평등의 理는 서로 원융무애하다고 보는 것이다. 중생이 곧 그대로 부처이지 중생속에 부처성품을 빼고 따로 중생이 없다는 것이다.

 

. 事事無 法界란, 개체와 개체가 자재융섭하여 현상계 그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라는 뜻이다. 이것이 곧 화엄의 법계연기이다.

즉, 眞如인 一理平等한 一心에서 연기한 일체만법의 낱낱 존재가 서로 관련해서 원융무애한 것이 마치 파도와 파도가 서로 원융해서 相卽相入한 것과 같다.

 

體上으로 理事相卽이기에 事事相卽이며, 作用에 있어서도 理事相入이기에 事事相入이 된다.

규봉종밀은 사사무애법계를 10개의 거울에 비유하고 있다. 즉,
"어떤 방의 四方 四維·上下에다 10개의 거울을 설치하고 그 한 가운데에 촛불하나를 놓았을 때 그 촛불은 10개의 거울에 비쳐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쳐진 촛불은 바로 다른 거울에 또 비쳐지게 되어 거울 한 개만을 생각할 경우, 그 거울에는 우선 10개의 촛불이 비쳐진다. 이 현상은 나머지 거울에도 같으므로 도합100개의 촛불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10개씩 비쳐진 촛불이 또 서로의 거울에 비쳐지므로 하나의 거울 속에는 한없는 촛불이 비쳐지게 된다."

 

거울의 비유는 하나의 거울과 다른 하나의 거울이 서로 대응관계에 있음을 설명한다. 이리하여 일체가 일체안에 상즉상입하면서 원융무애하다는 것이다.

이상의 四法界를 법장은 『금사자장』에서 금사자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事法界는 금으로 만든 그릇의 모양이 가지가지로 차별이 있는 것과 같고, 理法界는 모양은 만가지 차별이 있으나 바탕(體)은 모두 金인 것과 같고, 理事無 法界는 金卽器, 器卽金인 것과 같으며, 事事無 法界는 器와 器가 동일해서 서로 融卽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2.性起思想

중국인들의 외래문화 수용의 태도 가운데 중요한 것의 하나는 일단 수용 후에는 그들의 언어와 사고방식으로 재구성하고 해석하여 그들 나름의 것으로 형성하는 데에 있다. 이를 테면 범어불전을 한역할 때 音寫하는 경우까지 단순한 표음문자에 심원한 미적·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표의문자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性起란 말도 범어로 gotra-Sambhava인데 이는 본래 여래성의 현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性起란 용어는 晉譯『60華嚴』(5C初) 제32품에 「寶王如來性起」라고 최초로 말하고 있으나,唐譯『80華嚴』(8C初)에서는 「如來出現」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면 性起란 말이 쓰인 용례를 『60華嚴』과 『80華嚴』에서 文句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상이 性起品에 사용된 性起라는 말의 全種類에 대해서 열거한 것인데, 이들을 종합해 보면 性起란 ①如來의 家에 生 ② 如來의 出生·出現 ③ 如來種·如來의 性을 示現하는 뜻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性起는 法性을 如來의 위에서 보는 것이다. 즉, 性起의 定義를 萬法이 性으로 쫓아 일어난다고 했다.

 

화엄2조인 두순 至嚴은 『搜玄記』에서「寶王如來性起品」의 品名을 주석하면서 '性은 體요,起는 心地에 나타나 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性이라 함은 法界緣起의 體이며 緣起의 자체가 心地에 現在함을 性起라 하는 것이다.

화엄 제3조인 賢首 法藏은 『探玄記』16권「보왕여래성기품」주석에서,
"不改를 이름하여 性이라 하고, 그 德用을 나타내는 것을 起라고 하며, 眞理를 이름하여 如라 하고 性이라 하며, 德用을 起라 하고 來라고 한다.그러므로 여래를 성기라 한다."라고 性起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不變·不易하는 法性 眞如의 理가 본래 不思議한 功德 妙用을 갖추어 지니고 있는 바 그 德用이 現起되어 世界 衆現界가 具現된다는 것이다.

 

즉 變改되지 않은 것은 如來의 體性을 나타내고, 이 變改인 如來의 德用의 眞理가 나타난 것이 性起法인 것이다.

또한 賢首法藏은 性起를 '約人性起'와 '約理性起'의 두 가지 뜻을 말하였는데 '約人'이라 함은 모든 有情의 緣起를 말함이니 모든 衆生이 그 自性에 본래 갖춘 眞如性에서 現起됨을 말함이요. '約理'라 함은 無情의 世界萬有가 眞如性의 本具의 現起되었다는 뜻를 말한다. 곧 온갖 生命은 그 生命의 原理인 佛性에서 生起함이요. 一切國土는 法性,곧 地·水·火·風 등의 法性의 顯現이라고 본 것이다.
화엄5조인 종밀은『普賢行願品疏 』에서 性起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의 법계의 마음이 모든 존재를 이룬다는 것은 두가지 도리가 있다. 첫째는 性起이며, 둘째는 緣起이다. 性은 바로 윗 귀절의 眞界이고, 起는 아랫 귀절의 萬法이다. 法界의 性은 본질의 起함을 온전히하여 모든 존재를 이루는 것이다. …… 이것은 眞性을 근본으로 삼는다.…… 본질을 온전히 하여 작용에 합치하므로 法爾는 항상 모든 존재가 된다.…… 이미 출세간의 모든 존재는 性起이다. 바로 本性 외에 다시 다른 존재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와 중생이 서로 통하고 淨土와 穢土가 융통한다. 모든 사물이 서로 攝受하며 相卽相入하여 걸림없이 융통하여 十玄門을 갖추고 중중무진하다. 진실로 모두가 性起이다."

종밀에 있어서 性起는 자연 그대로인 法爾가 항상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어남은 性起 그 자체이다. 따라서 性에 합치하는 것이 起에 합치함이다. 性과 起가 동일하지 않으면서 동일한 것이요 性이 있으므로 起가 있고, 起가 있으므로 性이 있다. 그러므로 起는 不起의 起인 것이며, 性은 不起의 起를 통하여 起한다. 그래서 만약 性起를 佛性이란 의미로 삼을 때에는 性起는 갖추고 있는 그대로이며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다. 티끌이 법계요 법계가 티끌이다.
따라서 性과 起와의 관계는 因果의 관계는 아니다. 性과 起가 합한 그 상태가 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因과 果를 초월한 果이며 본체와 현상을 초월한 本體이다. 그러므로 起는 起이면서 不起이다.
따라서 起는 언제나 不起하며 잘 不起함이 곧 起라 함은 性起에서의 起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性을 本體 또는 因, 起를 현상 또는 果라 규정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性과 起로 나누기는 하면서도 性起 자체가 나눌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명의 편의상 구분하면서도 언제나 不起의 起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阿賴耶識緣起說이나 眞如·如來藏緣起說보다 萬有의 本體를 性이라고 한 그 性자의 뜻이 가장 포괄적이고 심오하여 현대과학상으로도 萬有를 구성한 原素를 94種 또는 108種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鑛物原子만 말한 것이지만 그것이 근본은 電子 곧 陽電子·陰電子의 兩性的存在이며 그것을 결합시키는 것을 中性子라 하는바 모든 物質을 분석하여 그 原子에 돌아가면 하나의 어떤 性이 남을 뿐이다. 有情·無情이 다 하나의 存在性의 原理·原動力이 있는 것이니 이런 뜻으로 보아서도 性起라는 말이 가장 포괄적이며 다시 남음 없는 理論이다.

 

3.性起와 緣起

原始佛敎의 12緣起를 비롯하여 業感緣起·阿賴耶識緣起·如來藏緣起등의 여러 용도로 연기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그런데 성기와 연결되는 의미에서의 연기는 아무래도 화엄의 법계연기가 그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성기라는 개념이 법계연기에 연유하여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연기와 성기에 대한 견해는 물론 화엄교학자들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華嚴2조 至嚴은 法界緣起에 대하여 凡夫染法에 통하여 緣起를 드러냄이요, 菩提淨分에 통하여 緣起를 밝혀 두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지엄의 『搜玄記』에서 표현되고 있는 법계연기를 법장은 『探玄記』에서 染法緣起 染淨合說, 淨法緣起 세가지로 정리한다. 이것은 지엄의 染淨 두 분류에다 合說을 첨가한 형태이다.
지엄의 법계연기는 먼저 菩提淨分,즉 淨門을 다시 本有·本有修生·修生·修生本有의 四門으로 나누고, 凡夫染法은 다시 緣起一心門과 依持一心門으로 나누어지고, 緣起一心門은 다시 眞妄緣集門·攝本從末門·攝末從本門으로 나누어 진다. 이를 도표로 나타내고, 그것을 다시 세세히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 華嚴2조 至嚴(至相大師:602-668)의 法界緣起
+- 本 有
+-- 菩提淨分 -+- 本有修生
| +- 修 生
| +- 修生本有
▣ 法界緣起--+
| +-- 眞妄緣集門
| +-- 緣起一心門 -+-- 攝本從末門
| | +-- 攝末從本門
+- 凡夫染法-+
+-- 依持一心門

 

⊙凡夫染法의 緣起一心門;

眞妄緣集門: 眞과 妄이 어우러진 모습을 12緣起로 파악하는 법계연기.
꿈속에 일에 비유됨과 같이 眞妄이 아직 분리하지 않은 眞妄和合의 緣起의 상태에 중점을 두는 입장이다.
攝本從末門: 근본을 거두어 그 지말을 따름. 十二緣起, 즉 一切現實을 다만 妄心이 지은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이다.
攝末從本門: 12연기가 모두 참마음을 지은 것임을 말함이다.
섭말종본문은 섭본종말문과는 반대다.
마치 파다가 물을 이룸과 같고 꿈속의 일이 오직 報心의 지은 바 임과 같다.

 

⊙凡夫染法의 依持一心門; 제6식과 제7식등의 식이 제 8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성립한다고 하는 연기의 모습을 말한다.
⊙菩提淨分:4문은 어느 것이나 중생가운데 깨끗한 성품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 깨끗한 성품이 자각되는 과정을 4가지 관점에서 논한것이다.

 

本有: 연기의 본체는 분별을 떠난 절대적인 것이며, 중생은 그대로 본래적으로 완성되어 있어 뭇 성인들과 틀리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래있음 즉 本有이다. 또한 「십지품」제6 현전지에서 말하는 12연기의 교설은 12연기 그 자체가 제일의제, 즉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절대 본체인 본유를 말하면서 어디까지나 연기로써의 본유로 설명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이는 연기의 본래 절대성을 강조한 말이다.

. 本有修生: 모든 불도 실천자에게 본래 깨달음의 본성이 갖추어저 있어서 따로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다. 이 점에서는 本有라 할 수 있다. 그러나 緣이라는 문제에 초점을 모아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緣에 의하여 새로운 善을 生하는 것이다.

 

. 修生: 바른 가르침에 의하여 현실적으로 깨달음의 싹이 새로이 트는 緣起의 측면을 말한 것이다. 緣에 의하여 점차 無分別智인 根本智에 향하게 되는 緣起로 이해된다.

 

. 修生本有: 實踐에 의하여 如來藏의 本來的인 淸淨性이 나타나게 된다고 하는
緣起의 측면인 것이다.
지엄의 법계연기를 도표와 요약적 설명을 다시 바른 이해를 위하여 설명하면, 菩提淨分은 法界의 緣起 곧 깨달음의 깨끗한 연기라고 보는 입장을 말하는데, 이것은 다시 本有, 本有修生, 修生, 修生本有로 분류한다.
本有는 緣起가 본래 실답게 존재하고 情을 떠난 法界가 顯現하여 三世에 不動함을 말하는데, 부처가 보리수 아래에서 경험한 내용으로 바로 12연기를 의미한다. 곧 부처와 마찬가지로 중생에게 十二緣起가 그 자체로 근본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완성되어 있다는 입장이다. 修生은 12연기의 本有가 인연을 따라서 현실 속에서 새롭게 연기하는 측면을 표현한다. 곧 本有가 法界緣起의 불변적인 입장을 대변한다면, 修生은 인연을 따라 발생하는 性起로서 12緣起의 작용적 측면을 제시한다. 따라서 本有修生은 깨달음의 本有가 현실속에서 修生하는 것이라면, 修生本有는 현실의 修生에 의해서 깨달음의 本有가 드러나는 입장이다.

 

凡夫染法은 다시 12緣起를 설명함에 있어 그것의 물들어진 측면과 그 근거를 緣起一心門과 依持一心門으로 분별한다. 먼저 依持一心門은 말 그대로 一心에 의지하여 유지된다는 것인데, 이때 第6識, 第7識이 의지하는 근거로서 지엄은 阿賴耶識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연기의 현실 속에서 물든, 곧 작용하는 측면인 緣起一心門에 대해서는 다시 세가지로 분류한다. 곧 하나의 本識의 작용으로 眞妄의 未分離 혹은 眞妄의 和合으로서 阿賴耶識緣起로 보는 眞妄緣集門, 12緣起를 오직 妄心에 의해서 현실에 훈습하는 攝本從末門과 12緣起를 오직 眞心의 작용으로 보는 攝末從本門이 그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淨門의 법계연기의 네가지 구별은 근본적 진실이 그 자체에서 현실화하여,깨달음의 실천적 연기의 진상을 네가지 측면에서 파악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엄이 생각하는 성기는 결코 연기를 떠난 것이 아니다. 성기는 唯淨의 측면이라면 연기는 염정을 함께 具有한 것이라 할 때 성기가 염정을 초월한 측면에서의 법계연기의 참모습이라면 연기는 염정과 함께 한 측면에서의 법계연기의 참모습이라 할 것이다.
법장도 이와 통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는 『探玄記』의「性起品釋」에서 성기의 정의를 네가지로 하고 있는데 그 네 번째에서,
만약 여기서 일어난 바가 저 緣相과 같으면 곧 緣起에 속함이나 이제 일어난 바가 오직 淨用에 의거함을 밝히어 眞性을 증득함을 따르는 까닭에 性起에 속함이다.

 

이라 하여 지엄의 생각을 계승하고 있다. 법장 뿐만이 아니라 징관도 염정에 대한 비슷한 발상을 하고 있다. 그는 性起六義 가운데 제 三義로서 相奪門을 제시하고 있는데, 「性起는 唯淨하며 緣起는 染淨에 통한다. 淨은 如來大悲, 菩薩萬行이며 染은 衆生惑業인데 染으로써 淨을 奪하면 衆生에 속하므로 緣起요, 淨으로써 染을 奪하면 諸佛이므로 性起라 한다」

性起와 緣起는 부처님께서 근본적인 직각 속에서 열어 보이신 화엄의 근본도리이다.

 

일반적으로 緣起의 成立根據는 法이다. 그러므로 緣起에서의 萬物起는 法起인 것이다. 그러나 性起의 成立根據는 마음으로, 心外無物이므로 性起에서의 萬物起는 心起가 된다. 一心思想에서는 心이 곧 法이며 마음밖에 따로이 法이 없으니, 緣起는 性起가 되고, 性起는 緣起의 當體가 된다. 여기에서는 森羅萬象 그 自體가 性起, 즉 眞如의 드러남이며 如來의 나타남이 되는 것이다.

性起는 華嚴法界를 밝히는 것으로 緣起의 窮極이다. 緣起와 性起는 그 體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하나의 이 現實을 事의 방면에서 볼 때 그것을 緣起라 하고 ,理로서 볼 경우에 性起가 된다. 인간의 구체적인 현실은 하나 밖에 없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性起의 世界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거듭 설명하자면, 宇宙는 사실 하나의 生命體로 緣起하고 있어서, 어디까지가 主體이고 어디까지가 對象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自體緣起이며, 그것이 一心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性起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現前一念이 세계의 본모습(眞如)이며, 이것을 自覺한다면 분별심이 일어날 이유가 없다. 여기에서는 理論과 修行이 둘이 아니게 되며, 사실 무엇이나 바로 알아야만 그것을 바로 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우리는 華嚴性起思想의 근본의도를 알 수 있으니, 모든 衆生에게는 본래 如來性(佛性)이 갖추어져 있는데, 그 如來性이 無明으로 하여 제대로 활동치 않고 있으므로, 그것을 菩薩行을 통해서 그 본모습을 드러내게 할려는 데 華嚴性起思想 곧, 一心思想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성기와 연기의 대조를 다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賢首法藏은 『探玄記』 3卷에 四種道理를 論하여 性起와 緣起를 이해했다. 四種道理는 .觀待道理 .作用道理 .證成道理 .法爾道理이다. 이 四種道理에 각각 二門을 열어 論하고 있다.
이상에서 緣起觀은 낱낱 존재가 十玄 六相을 具足하여 一切處 一切時에 두루하며, 一塵中에 法界를 含有하고 百千經卷을 演出하고 있다. 다시말하면 法界의 전체상이 낱낱 존재 속에 충만하여 圓融無碍 相卽相入의 主伴具足 重重無盡함을 관하여 法界에 證入하는 것이다.
반면에 性起觀은 一心眞如를 관하여 이 一心眞如 本覺이야말로 本來 淸淨圓明해서 萬德의 根源이라고 觀하는 것이다. 번뇌에 묶여 있는 凡夫에게도 如來出現의 果德이 갖추어져 있어서 비로서 顯現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스스로 그러한 德으로서 因果 依正의 體用을 그대로 원만히 갖추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기와 연기가 수승하고 하열한 차이가 있기도 하고, 그 승열의 차이가 전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전자로서는 淸凉澄觀의 『玄談 演義 』50과 圭峰宗密의 『行願品疏 』卷一에서 이 性起門을 상근기가 관찰하는 경계에 배당하고, 緣起門을 중근기가 관찰하는 경계라 하였다. 또 性起門을 別敎一乘, 緣起門을 同敎一乘으로 분류하고 法性이야 말로 일체 제법에 갖추어져 있는 理性이며, 깊은 법이므로 사상의 緣起觀보다 性起觀이 수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힘이 있고 힘이 없는 것을 서로 말미암아(力無力相由)를 緣起라고 하는데, 緣起라는 말 그 자체가 어떤 結果를 내포하고 있다.그 果는 相由의 彼此 相奪로부터 生하는 果이다.

 

그러나 彼此 相由는 無自性이다. 따라서 그 果는 無自性으로부터 生한 果이므로 그 生은 不生인데 이것이 곧 性起이다. 따라서 緣을 쫓아 無自性을 보면 緣起즉 性起인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性起와 緣起는 一法上의 二義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대조표를 본 것처럼 보는 견해의 차이일 뿐 화엄교학의 궁극적 실체는 성기와 연기도 不一不異·相卽相入의 관계로 보아야 할것이다.

 

Ⅳ.如來藏과 性起의 關係

如來藏思想과 華嚴敎學의 性起의 문제를 살펴본다는 것은 불교학의 방향성에서 매우 중요하다. 如來藏과 性起의 구조의 흐름을 알아야 불교학의 흐름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흘러 왔는가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앞 부문에서 如來藏의 근원부터 전반적 如來藏思想의 흐름을 파악하고, 또한 華嚴敎學의 法界緣起속에 性起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原始佛敎의 業感緣起論부터 法界緣起까지 흐름도 정리해보았다.
이제 如來藏思想과 華嚴敎學의 關係를 고찰해 보자.

 

華嚴敎學과 如來藏思想의 밀접한 관계는 화엄 3조인 賢首 法藏에서 알 수 있다.

『入楞伽經』『大乘起信論義記』『大乘法界無差別論疏』와 이외 如來藏 系統의 다양한 經論에 注疏를 지었고, 동시에『五敎章』등에서도 항상 如來藏思想의 위치를 大乘終敎,如來藏緣起宗,實相宗,空有無碍宗,眞德不空宗 등의 이름을 나타내어 圓敎인『華嚴經』에 버금가는 위치에 두어 중요시하였다. 華嚴敎學과 如來藏思想과의 관계는 이처럼 후자가 전자에게 교학적인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이 性起思想은 如來藏思想 발전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다.

 

즉, 性起思想이『華嚴經』「性起品」에서 『如來藏經』을 거쳐서『寶性論』에 이르기까지의 그 전개 상황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①「性起品」에서 여래출현은 무량한 因行의 果로서, 석존의 成覺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 果인 法身이 갖가지 화신을 顯現시켜 여래의 업을 示現하는(sambhava)것, 즉 果海의 大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법신은 여래의 본질·性(gotra)과 다르지 않으므로 化身·如來業은 바로 如來性의 현현 즉 性起(gotra-sambhava)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法身은 因이고,如來業등은 果라는 구조를 이루는 것이다.

 

② 『如來藏經』은 『性起經』에서 말한 법신의 顯現을 중생의 개개인에게서 확인하여 중생을 如來藏(tath gata-gabra)이라고 이름했다. 즉 중생은 性起의 한 유형으로서 因인 법신의 果이지만 그와 동시에 여래와 그 본질을 같이하는 존재,다시 말해 如來性(=佛性)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또 여래가 될 수 있는 성질·자격(bija)을 구비하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③『寶性論』은『如來藏經』의 모든 중생은 如來藏이 있다.(佛性, 如來性)를 이어받아 衆生 가운데에 잠재하고 있는 如來性·佛性을 설명했다. 즉 果로서의 부처의 3신이 출생(utpatti)·顯現(sambhava)하는 바의 因(gotra=dh tu=hetu)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衆生이 成覺(지혜의 완성)하는 것을 性起라고 이름한다.

이상 性起가 설명되어지는 것을 대략적으로 설명하면, 性起=如來出現=成覺(지혜의 완성)=法身의 顯現(자비의 시현)=眞如·法性의 현현=法界(본체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다.

 

Ⅴ.마치면서

이상으로 如來藏思想과 『華嚴經』 性起의 각각의 구조를 살펴보고 더 나아가 如來藏思想과 『華嚴經』 性起의 相關關係를 대략적이나마 정리해 보았다.
如來藏思想의 흐름을 부처님의 成道 근본적 설인 12緣起의 業感緣起부터 시작하여, 唯識에서의 阿賴耶識緣起를 거쳐 『大乘起信論』의 眞如·如來藏緣起에서 정리되며 최종적으로 『華嚴經』에서 法界緣起說의 바탕이 되는 性起思想까지 이르는 거시적 흐름을 살피면서 정리했다.
이러한 내용정리는 지금 如來藏을 처음 배우는 입장에서 너무나 방대한 사상체계임을 느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러한 시대사 속에서 대략이나마 정리해나가지 않으면 불교학을 정리하는데 무의미할 것을 알고 무리한 시도를 해 보았다.

기존에 나와 있는 텍스트중 如來藏思想이란 무엇인가,如來藏과 阿賴耶識,『大乘起信論』에 나타난 如來藏, 如來藏思想의 經典등 여러 가지를 정리해보고자 했으나 그것은 너무 세부적이고 포괄적인 공부방법이 아닌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주제를 '如來藏과 華嚴의 性起思想의 관계'의 고찰문제를 조명했다.
기존에도 한국과 일본의 거장 학자들이 이 문제를 여러 서적에서 고심한 흔적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며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정리인가 알 수 있었다.

 

이것을 정의하면 如來藏思想에서는 모든 衆生이 다 如來藏(如來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眞妄和合識의 입장에서 사상을 정리했으며, 華嚴의 性起思想에서는 본래 부처인 蓮華藏世界海의 입장에서 정리했다.

 

즉 如來藏思想은 달걀(衆生)이 병아리(佛)로 변화하는 것에 비유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즉 달걀에는 닭의 정자와 난자가 수정됨으로써 장차 병아리로 변화할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즉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란이 장차 병아리로 변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달걀 그 내부에는 장차 병아리가 될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달걀이면서 동시에 달걀이 아닐 가능성(병아리가 될 가능성;如來藏)을 가지고 있다. 달걀 그 자체는 달걀이라는 것과 달걀이 아닐 가능성이 서로 대립한다. 이러한 두 대립물이 달걀이라는 사물 속에 통일되어 있다. 바로 달걀이 가지고 있는 내적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 속에 두 대립물(달걀이면서 동시에 달걀이 아닐 가능성)의 투쟁을 통해 달걀이 병아리로 변화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가지 더 비유를 들면, 꽃나무의 씨앗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꽃나무의 씨앗은 땅에 심으면 꽃나무로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도 씨앗 내부에 씨앗이 아닐 가능성, 즉 꽃나무로 변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즉 씨앗은 씨앗이면서 동시에 씨앗이 아닐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씨앗은 이러한 두 대립물의 통일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씨앗의 내적 모순이며, 이러한 내적 모순의 두 대립물의 투쟁을 통해 씨앗은 나무로 변화한다.

 

如來藏思想은 眞·妄和合이지만 이것은 不一不異이며, 不生不滅인 것인 반면, 『華嚴經』의 法界無盡緣起의 性起는 重重無盡의 事事無碍이기 때문에 如來藏思想의 內容을 會通하고 있다.

如來藏思想과 性起의 비유를 잘 표현한 것은 5조 弘忍의 제자 神秀의 게송과 慧能의 게송에서 알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깨달음 법을 한마디로 일러지만 후학들은 바라보는 견해에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에 불구하고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에 가운데 如來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구름에 가린 달이든지 본래 부처로서의 현현이든지 모두 人間尊重의 사자후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如來性起 如來藏思想을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등에서 인간 가치의 실현을 위한 종교철학적 바탕으로 체계화한다면 우리의 정신적 혼돈의 부재는 없을 것이며 깨달음의 사회화가 현실에서 드리워질 것을 확신하며 拙稿를 마치고자 한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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