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杜門不出’_두문동 72賢을 찾아서

醉月 2009. 10. 5. 08:46

잊혀진 충신들의 발자취를 따라 이성계 역성혁명 반대해 ‘두문동’서 은거하다 탄압 …

철종·고종 때 문헌에 ‘72현’ 언급

허시명/ 여행작가 www.walkingmap.net

500년 고려의 수도였던 그 개성 땅에 은둔의 현인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고사를 만들어낸 두문동(杜門洞) 72현이다. 주간동아는 역사에 가리어진 은둔의 현인들을 찾아 긴 여정을 떠나기로 했다. 편집자 주

 

조선 왕조가 고려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마련한 숭의전 전경.

우리는 우리 안에 영웅을 만들어낸 경험이 별로 없다. 우리를 세상의 중심이라 자처한 적이 없고, 공맹(孔孟)으로 대표되는 중화사상에 사로잡혀 영웅이나 성현은 모두 중국에서 나는 줄로만 알았다. 지금도 미국 중심의 사고방식이 강해 미국에서 출세해야 한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기가 쉽다. 쉬운 예로, 아무리 한국 프로야구에서 난다 긴다 해도 박찬호의 공 하나보다도 위력이 못하다. 한류 열풍의 주인공들도 한국보다는 외부에서 재해석되어 들어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장사하는 사람들도 외국에서 히트를 친 뒤에 국내 시장에 소개되는 것이 물건 팔기 수월하다는 얘기를 한다. ‘금의환향(錦衣還鄕)’이란 말도 있는 걸 보면 제 동네에서 출세하기는 난망한 일이고, 되도록이면 멀리서 이름을 날려야 비로소 고향에서 환대받는 것이 인간사인지도 모르겠다.

조선 영조 때 72현 뜻 기리는 제사 지내

하지만 우리 안의 영웅 만들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 우리 스스로 성현의 반열에 올려놓은 존재가 두 부류 있다. 유학의 줄기를 잡아, 조선 성리학의 산맥을 형성한 동국 18현이 그 한 부류다. 면면을 살피면 신라의 설총(薛聰)과 최치원( 崔致遠), 고려의 안향(安珦)과 정몽주(鄭夢周), 그리고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로 대표되는 조선 14현이다. 그리고 또 한 부류가 고려 말의 두문동 72현이다.

두문동(杜門洞)은 좀 생소한 명칭이다. 두문동은 북한 개성시 근교의 광덕산 서쪽에 있는 동네로, 필자 역시 여행작가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처음 접했다. 동해안 왕곡마을을 들어서면서, 가장 오래된 민가 맹씨 행단에 머물면서, 단양팔경을 구경하면서, 정선아리랑의 유래를 들으면서 두문동 72현과 마주쳤다. 그들은 두문동이라는 한 공간에만 머물지 않고 전국에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후손들로부터 중시조나 문중의 큰 인물로 추앙받고, 지역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도대체 두문동 72현은 누구인가? 자연스럽게 그런 의문을 갖게 되었다.

   

태조 왕건이 물을 마셨다고 전하는 숭의전 홍살문 앞의 어수정.

우리에게는 두문동보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 말이 더 익숙하다. 사실 두문불출은 두문동에서 생긴 말이다. 두문동에 들어가서 꼼짝하지 않고 나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고려 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고 고려 왕조에 충성을 다짐한 72명의 현자들이 두문동에 은거해 꼼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도 이방원이 주축이 된 개국세력이 산에 불을 지르고 몰아댄 바람에 죽거나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두문동의 존재는 고려 말, 조선 초기에는 부각되지 않았다. 새 역사의 창조에 동참하지 않은 반골들이었을 뿐이다. 그러다 그들의 존재가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오른 시기는 성리학의 ‘의리 명분론’이 강화된 조선 영조 때다.

영조가 1760년 9월에 후릉(조선 2대 정종과 비 정안 왕후의 능) 참배차 개경 부근의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를 넘을 때의 일이었다. 영조가 지명의 연유에 대해 묻자 신하들이, 조선 태조가 즉위한 직후에 고려의 유신(儒臣)들이 출사를 거부하고 이 고개에 조복을 벗어놓고 달아났다고 해 부조현이라고 칭하며, 부조현을 지나면 두문동이 있다고 했다.

이에 영조는 그들을 기려 그 해에 부조현비를 세우게 하고, 1751년(영조 27년)에는 고려에 절의를 지킨 두문동 충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두문동비까지 세우게 했다. 이때 처음으로 두문동 72현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그런데 350여년이나 지난 뒤인데, 두문동에 들어간 명단이 그때까지 잘 남아 있어서 72현이었을까? 그건 아니다. 우리 안의 영웅을 꼽았다고는 하지만 동국 18현, 즉 동쪽나라 18현에서 알 수 있듯이 두문동 72현 또한 중화사상의 그림자 안에 있다. 공자의 제자이며 중화의 대표적인 현인으로 72현이 꼽히는데, 그에 견줄 만한 상징적인 존재로 72현을 두문동 충신으로 꼽은 것이다.

이방원 탄압 후 전국 각지로 퍼져 은둔

그 때문에 두문동 72현의 명단이 72명으로 고정된 최초의 문헌은 고종 9년(1872년)에 나타난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荇)의 후손이 편찬한 문집 ‘기우집(騎牛集) 임신본(壬申本)’이 그것이다. 그리고 두문동 72현을 새롭게 꼽은 또 다른 문헌은 1924년에 강호석이, 철종 11년 (1860)에 간행된 ‘화해사전(華海師全)’의 명단을 참조해 작성한 ‘전고대방(典故大方)’이란 인물지(人物誌)다. 물론 두 문헌은 명단에서 큰 차이가 있다. 겹치는 인물이 30명이고, 42명이 서로 다르게 선정되어 있다. ‘기우집’은 정몽주를 중심으로 고려 말 충신들을 포괄적으로 선정했고, ‘전고대방’은 두문동에 들어갔던 시기를 중심으로 좁혀 뽑아 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우리는 왜 다시 두문동 72현을 찾아나서려 하는 것일까? 두문동 72현은 단순히 충절을 지킨 상징적인 인물로 전해오는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중앙을 떠나 은둔생활을 했고, 그 은둔지를 중심으로 한 가문이 새롭게 형성돼 지역사회의 정신적 지주 구실을 하게 된다. 조선 후기에 예학이 강조되고 보학(譜學)이 강화되면서, 두문동 72현을 조상으로 둔 후손들이 선조를 기리는 작업도 많이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들의 이름이 이 땅의 한 지리적인 공간과 동행하고 있다.

연재를 시작하는 마당이니 개성까지는 가지 못하더라도 임진강 가에 있는 숭의전(경기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을 찾아가 보았다. 숭의전은 1397년(태조 6년)부터 고려 왕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다. 조선 왕조가 고려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마련해준 공간이다. 남한 땅에서는 고려 왕조를 기리는 거의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건물은 6·25전쟁 때 전소되어 1973년에 새로 건립되었으며, 고려왕 4인과 고려 충신 16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숭의전 앞 임진강을 따라가면 신라 마지막 왕의 능인 경순왕릉(경기 연천군 장남면 고량포리)이 나온다. 그래도 고려는 왕조를 지켜내려는 충신들의 이름이라도 남아 있지만, 신라는 그마저도 없다. 이 땅에서 충신열사는 국가 차원이 아니라, 문중 차원에서 지켜지는 경향이 강하다. 충신열사가 나와서 문중이 커지기도 하지만, 문중이 강해야 충신열사도 지켜낸다. 이제 두문동 72현, 그들의 운둔지와 문중을 찾아 길을 떠나보자.

 

고려의 처음과 끝을 지킨 문중 정권 찬탈 소식 듣고 미련 없이 낙향 …

敎授亭 은거 25년간 후학 양성에 매진

조승숙이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교수정.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말이 있다. 큰 인물을 배출한 땅에 대한 자부심이 담긴 말이다. 경북 안동은 퇴계와 그 후학들로 대표되는 성리학자가 많다. 그렇다면 경남 함양에는 누가 있는가? 대표적 인물로 정여창이 있다.

유학의 보급에 크게 기여했던 역대 거봉들을 모아 동국 18현이라고 부른다. 동국 18현에는 신라 사람 설총과 최치원, 고려 사람 안향과 정몽주가 포함되는데, 조선 사람으로는 일두 정여창(1450~1504)을 가장 먼저 꼽는다. 그러나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이 먼저 거론되는 까닭은 그가 정여창보다 앞서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갔고, 한훤당의 학통이 조광조로 이어지며 더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정여창 고택에서 1km 떨어진 곳

정여창이 이렇듯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훗날 그의 스승이 된 김종직이 함양군수(1473~76년 재임)로 있었던 인연도 있고, 그의 아버지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사한 충신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그의 이웃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신이자 학자가 살았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조선 성종이 조승숙을 기려 내린 글을 후손들이 비석에 새겨놓았다.

정여창의 고향인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은 한옥이 즐비한 동네로, 지금도 그의 후손들이 고택을 지키며 살고 있다. 이 개평마을에서 1km쯤 떨어진 냇가에는 교수정(敎授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두문동 72현으로 꼽히는 덕곡(德谷) 조승숙(1357~1417)이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다. 정여창의 할아버지는 조승숙과 안면이 있었을 터이고, “우리 동네에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은 충신이 살았단다”는 말을 손자에게 해줬을 것이다. 훗날 조승숙의 증손자인 조효동이 중앙에서 벼슬을 할 때, 정여창을 효자로 추천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집안이 서로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교수정은 냇가의 두둑한 언덕 위에, 허리가 휜 노송에 둘러싸여 있다. 교수정 출입문 앞에는 ‘敎授臺(교수대)’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다. 교수대 바위 위에는 일부러 판 듯한 홈이 있는데, 안내를 해준 조승숙의 20세손 조래봉(72) 씨는 “움푹 파인 홈은 별자리이고, 저 밑의 냇물은 은하수이지요”라고 했다. 냇가의 바위를 크게 다듬지도 않고, 홈 몇 개를 북두칠성 형태로 파놓고 냇물과 어울리게 하여 우주를 만들어놓았다니, 옛 사람의 풍류가 참으로 운치 있게 여겨진다. 교수대 아래에는 인의예지충신효제를 이르는 ‘八德門(팔덕문)’이 새겨진 바위가 있고, 그 아래 바위에는 ‘德谷趙先生遺墟碑(덕곡조선생유허비)’라는 글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조승숙의 후학이나 후손들이 이곳을 대단히 소중한 공간으로 기려왔음을 알 수 있다. 정자 많기로 소문난 함양 땅이지만, 교수정 교수대의 언덕만큼 정겨운 공간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소나무와 글 새겨진 바위가 잘 어울린다.

   

함양 지역 유학 일으킨 일등공신

고려 태조의 친필.

교수대 옆에는 조승숙을 기리는, 거북머리를 귀엽게 조각한 자연석 위에 높이 320cm의 비석이 있다. 비석에는 조선 성종이, 총애하던 함양 출신 문장가 유호인에게 글 짓게 하여 내린 사제문(賜祭文)인 ‘首陽明月栗里淸風(수양명월율리청풍)’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수양은 백이숙제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며 숨어든 산이고, 율리는 도연명이 은거했던 선양(瀋陽)의 마을 이름이다. 성종은 조승숙을 수양산의 밝은 달과 율리의 맑은 바람에 비유한 셈이다. 이 비석은 1882년에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조승숙은 함안 조씨로, 시조인 조정(趙鼎)의 11세손이다. 조정은 중국에서 귀화했는데, 왕건을 도와 고창성(지금 안동) 전투에서 공을 세워 고려개국벽상공신에 올랐다. 그의 선조는 고려를 세우는 데 이바지했고, 그는 고려를 향한 충절을 마지막까지 지켜냈으니, 함안 조씨 문중에 고려의 처음과 끝이 담긴 셈이다.

정여창 고택에 새겨진 큰 글씨. 충효절의의 글씨 속에 정여창 조승숙이 겹쳐 보인다.

조승숙은 부여감무(5~6품에 해당하는 지방관, 조선시대에 현감으로 바뀜)로 있다가 이성계가 정권을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향 땅 함양으로 물러나버렸다. 그의 나이 36세 때 일이다. 비록 그는 퇴임할 무렵에 한미한 지방관이었지만, 임금에게서 주목받는 능력 있는 관리였다. 조승숙은 20세(1376년)때 사마시에 합격했고, 이듬해에 문과에 급제했다. 저작랑(著作郞·나랏일과 관련된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담당)이 되어 조정에서 일했고,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는 명나라 황제를 탄복시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그가 부여감무를 자청해 외관직으로 나갈 때는 임금이 침향궤(침향나무로 만든 팔받침대)를 하사했는데, 그 궤에 “강호에 있을지라도 나라를 잊지 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조선 왕조의 부름을 받지 않고, 고향 마을 덕실에서 가까운 교수정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조승숙은 25년의 세월을 보냈다. 함양에 훗날 유학이 크게 일어난 것도 두문동 72현으로 불린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경학을 가르치던 소소당(昭昭堂) 터에, 1398년(조선 태조7년) 함양향교를 건립할 때도 명륜당 문기를 작성한 이가 조승숙이다. 모름지기 ‘우함양’의 맨 앞에 조승숙이 있다 하겠다.

조승숙이 선산에 은거한 길재에게 보낸 시에서 삶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다.

“산을 등지고 물에 다다라 속세 떠나 살아가네/ 저녁에 달 뜨고 아침에 안개 끼니 흥이 남아 있구려/ 서울에 사는 벗이 내 소식을 묻거들랑/ 대숲 깊숙한 곳에 누워 글 읽는다 하게나.”

 

산속에 묻혀 절의 지킨 한평생 조선 개국 세력 피해 목단산 입산 …

후손들은 팔공산 자락에 정착, 인천군 채수 등 배출

다의당 채귀하를 기리는 사당과 비석. 대구시 검단동 검단토성 안에 있다.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 연밥 줄밥 내 따줄게 내 품 안에 잠자주오/ 잠자기는 어렵잖소 연밥 따기 늦어가오”라는 남녀가 주고받는 농탕한 상주 민요가 있다. 삼한시대에 축조된 그 공갈못이 상주시 공검면에 손바닥만큼 남아 있는데, 곧 복원될 것이라고 한다. 공갈못 근처에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한글 번역 한문소설의 작가인 인천군(仁川君) 채수(蔡壽, 1449~1515)의 무덤과 신도비가 있다. 비신(碑身)을 받치고 있는 두툼한 해태상은 무척이나 이례적인데, 경상북도 문화재 제306호로 지정돼 있다.

채수가 이 동네에 정착하게 된 것은 공갈못 때문이다. 함창현감이던 아버지를 따라와 살던 책방도령 시절에 공갈못을 구경하러 갔다가 담 너머에 살구를 따먹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살구나무 집 딸과 혼인하게 됐다. 훗날 성균관 대사성과 호조참판을 지낸 채수는 중종반정에 본의 아니게 휘말려들어 4등공신이 되지만, 반정이 올바르지 않다고 여겨 처가 동네인 상주시 이안면 이안리에 은거하게 된다. 이안리는 공갈못에서 고개 하나 넘으면 나오는 동네다.

채수, 한문소설 지었다가 파직되기도

채수는 이 동네 쾌재정(快哉亭)에서 한문소설 ‘설공찬전’을 지었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보다 40여년 뒤의 작품인데, 1996년에 한글 번역본이 발견돼 화제가 됐다. 이 작품은 집필 당대에 한글 번역본까지 나돌았고, 조정에서 금서로 지목해 불사르기도 했다. 또 사헌부가 작가인 채수를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중종이 파직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 곡절까지 있었다. 채수가 머물던 이안리 쾌재정은 지금도 잘 보존돼 있다.

아버지 다의당의 뜻을 받들어 고향 땅에 내려와 집안을 지킨 맏아들 채영의 무덤.

채수가 이곳에 은거한 뒤로 그 후손들이 상주, 문경, 예천, 청송, 영양까지 두루 퍼져 살게 되었다. 1913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고, 17년 영남 거부 장승원(張承遠,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을 조국 광복에 협조하지 않는다 하여 처단한 항일지사 채기중(蔡基中, 192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함)이나, 문경군수와 국회의장을 지낸 채문식(蔡汶植) 씨가 모두 채수의 후손이다.

인천 채씨가 인천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경상북도에 많이 세거(世居)하게 된 것은 인천군 채수의 고조부인 다의당(多義堂) 채귀하(蔡貴河) 때문이다. 채귀하는 인천 채씨 시조의 10세손이자 중시조다. 인천 채씨 문중은 시조로부터 9대조까지의 묘는 실전(失傳)하고, 그들에 관한 기록도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기록은 채귀하로부터 다시 시작한다. 모든 인천 채씨는 채귀하로부터 비롯됐다.

   

인천군 묘소 앞에 세워진 신도비, 비석 받침돌의 해태상이 인상적이다(왼쪽). 날아갈 듯 날렵한 쾌재정.

다의당 채귀하는 고려 말에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달성군 후동(지금의 대구시 중구 후동 중앙공원 부근)에서 태어났다. 이웃한 고을 영천의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젊어서부터 사귀었고, 함께 벼슬을 했다. 벼슬이 호조전서에 이르렀는데, 1392년 정몽주가 조영규(趙英珪)에게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울면서 “세상일은 끝났도다”며 관복을 벗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두문동에 머물다가 조선 개국 세력에 쫓겨 뿔뿔이 흩어질 때 채귀하는 예성강 포구인 벽란진을 건너게 됐다.

이때 함께 강을 건넌 여덟 전서(典書·조선의 판서 직책)가 있었다. 호조전서를 지낸 채귀하·변숙(邊肅)·이맹운(李孟芸)·박침(朴沈)·조안경(趙安卿), 공조전서를 지낸 서보(徐輔)·박심(朴諶)·박녕(朴寧)이 이들인데, 이들이 벽란진을 건넌 것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팔전도(八典渡)라 불렀다.

이때 벗들과 헤어지며 지은 채귀하의 시가 몇 편 전하는데, 그중에 ‘도진분로(渡津分路·나루를 건너며 길이 갈리다)’가 있다. “다 함께 두문동을 나와서/ 배를 잡아 앞다투어 나루를 건넜네/ 고려의 국록을 아직 잊지 못하는데/ 어찌 이씨의 신하가 되겠는가/ 바다를 건너겠다는 노중련의 절개 같고/ 고사리를 캐던 백이숙제와 한가지일세/ 나라 잃은 우리들의 원한을/ 답답하여 강물의 신에게 물어보노라.”

 

1982년 다의당 기리는 의현사 마련

인천 채씨 족보에 나오는 채미도. 다의당은 채미도를 보면서 절의를 지켰다고 한다.

채귀하가 벽란진을 건너 다다른 곳은 수양산 줄기인 평산의 목단산(牧丹山)이었다. 정확한 주소지는 황해도 연백군 목단면 아현리 다의현이다. 채귀하가 다의당이란 호를 가진 것도 이 지명에서 유래됐다. 그런데 채귀하보다 목단산에 먼저 들어와 살던 이가 있었는데, 그가 목은 이색(李穡)이다. 이색은 목단산의 서쪽 탁영대에, 동쪽 배록동에는 신황의(申黃衣)가, 가운데 다의현에 채귀하가 살았다. 채귀하는 이곳에 머물며 이색과 시문을 주고받았는데, 이색에게 보낸 글귀 중에 “망국의 한을 품은 몸이/ 죽지 않고 다시 무엇을 구하겠습니까”라는 대목이 보인다. 그는 다의현에서 송경(松京·개성)을 바라보며 이렇게 읊기도 했다. “하루 종일 산막에서 대사립 달아놓고/ 멀리 송악을 바라보니 저문 구름 어둡구나/ 가을 바람에 궁궐 터는 기장 밭이 된 듯하여/ 예로부터 외로운 신하는 눈물만 흘리네.”

채귀하는 목단산 다의현에서 백이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던 모습을 그린 채미도(採薇圖)를 보면서 절의를 지키다 생을 마쳤다. 그리고 목단면 의현리 불곡산에 묻혔다.

   


채귀하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두문동으로 들어가기 전에 맏아들 영(泳)은 고향에 돌아가서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고려 임금을 받들라 했고, 둘째 부(浮)는 평양으로 가서 아비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살라 했고, 셋째 동양(東陽)과 넷째 명양(明陽)은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맏아들 채영(蔡泳)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향 마을인 대구시 후동에서 얼마간 떨어진 팔공산 자락 미대동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인천군 채수를 배출하고 경상북도 인천 채씨의 맥을 형성하게 됐다. 남북 분단이 길어지면서 다의당의 묘소를 오래도록 찾지 못하게 된 인천 채씨 문중에서는 1982년 삼한시대에 축조된 대구 북구 검단동 검단토성 안에 다의당을 기리는 의현사(義峴祠)를 마련했다. 그리고 대구시 서변동 채영의 묘소 위쪽에 단소(壇所)를 만들어 시조를 모시고 있다.

두문동 72현의 절개가 한 집안의 뼈대가 되고, 자부심이 되어 600년을 치달려온 뒤 대구 땅에 맺힌 셈이다

 

고려 향한 父子의 충절 두문동 은거하다 맹유는 순절 …

맹희도는 한산·온양에 은거하며 태조 부름도 사양

충남 아산시 배방면 맹씨행단 마을에 있는 맹희도의정려문과 효자리 비석.

두문동 72현을 기리는 합동 제사가 최초로 치러진 것은 1751년(영조 27) 10월21일이다. 영조의 명에 의해 개성유수 서종급(徐宗伋)이 제사를 지냈는데, 그때 읽은 제문에는 “여기 고려의 백성 중에 72인이 있어 조선의 신하도 하인도 아니 되고 그 뜻을 스스로 지켰네. …오직 조씨, 임씨 그리고 맹씨 성을 가진 이, 전하는 사람은 이 셋뿐이고 나머지는 찾아볼 기록이 없네”라고 했다.

조씨는 조의생(曹義生)이고 임씨는 임선미(林先味)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맹씨 성을 가진 이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어떤 기록은 그냥 맹성인(孟姓人·맹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적고 있는데, ‘전고대방(典故大方)’에는 맹호성(孟好誠)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맹씨의 가장 큰집이라 할 수 있는 신창(新昌) 맹씨 족보에는 맹호성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맹씨 문중에서는 맹호성이 혹시 맹유(孟裕)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하고 있다.

맹씨 집안에서 두문동 72현으로 꼽히는 인물로 맹유와 맹희도(孟希道) 부자가 있다. 청백리 맹사성(孟思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다. 맹희도가 머물렀던 집은 두문동 72현이 머물렀던 공간 중에서 유일하게 현존한다. 그곳이 바로 온양에 있는 맹씨행단(孟氏杏亶)이다. 맹씨행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건물이기도 하다. 전형적인 고려식 건축물인 좌우 대칭형의 工 자형으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27.5평 크기다. 1482년(성종 13)에 수리했고 그 뒤로도 세 차례에 걸쳐 고친 기록이 있다.

 

청백리 맹사성의 조부와 부친

서천군 한산면 축동리에 있는 맹희도의 효자리 비석과 맹사성의 효자리 비석.

맹씨행단에는 맹희도가 살았을 무렵부터 심어져 있던 것으로 보이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공자가 은행나무 그늘 아래에서 가르침을 베푼 것처럼, 이 행단에서도 맹희도가 가르침을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맹씨 문중에서는 맹유는 서두문동으로 들어갔고, 맹희도는 동두문동으로 들어갔다는 말이 전한다. 그러다가 맹유는 조선 개국 세력이 두문동을 불지를 때에 순절(殉節)하고, 맹희도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에 은거하게 됐다고 한다.

어찌하여 맹희도는 한산까지 내려가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한산은 목은 이색의 고향인데, 혹시 그와 인연이 있어서 그런가 싶지만 딱히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목은 이색은 맹사성이 문과 초시와 복시에 장원급제할 때 심사관이었다. 그 당시에는 과거 심사관과 합격자 사이는 사제의 인연이 맺어졌기에 둘 사이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최영 장군이 살았고, 맹희도가 살았던 맹씨 고택.

한산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2km쯤 가면 축동저수지가 있는 축동리가 나온다. 축동리 한복판이 맹골이다. 맹씨들이 살았던 골짜기라는 뜻이다. 현재는 주민 27가구 중에서 맹씨는 한 가구도 살지 않지만, 맹골 언덕 위에 돌기둥처럼 생긴 오래된 비석이 있다. 1392년 초에 고을 관리와 마을 호장(戶長)이 함께 세운 맹희도의 효자리(孝子里) 비가 있고, 그 옆에는 1399년에 세워진 맹사성의 효자리 비가 있다.

효자리 비가 그곳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 맹희도가 그 동네에 한동안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맹사성이 1391년과 1408년에 한주(韓州·지금의 한산)로 유배된 것도, 아버지가 살던 동네 한산과 인연이 있어서 취해진 조처로 보인다.

한산 축동리에 살던 맹희도는 온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여기에는 최영 장군과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였다. 맹사성의 부인은 최영 장군의 손녀였다. 맹사성의 할아버지 맹유와 최영 장군은 한 살 터울로 개성에서부터 교류하던 사이였다. 두 집안은 서로 이웃해 살았는데, 맹사성이 최영 장군 집의 배나무에 올라가 배를 따먹으려다 혼이 난 게 인연이 돼 사돈지간이 되었다.

온양의 맹씨행단은 본래 최영 장군의 아버지 최원직(崔元直)이 지은 집이다. 물론 최영 장군도 살았는데, 1388년 최영 장군이 처형된 뒤로 그의 자식들도 화를 입어 온양 집이 황폐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이 집을 개수해 들어오면서 맹희도는 “비록 빈한한 국면이나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근심을 같이하리라. 또한 정밀하게 역학을 연구하여 후생을 교육한다면 금학(今學)이 스스로 깃들리라”고 말했다.

온양 맹씨행단 마을에 있는 맹씨 정려각과 맹사성의 시조비.

맹유의 위패 개성 두문동 서원서 모셔와

맹희도는 온양에 머물면서 태조가 온양에 행차하여 불러도 몸이 아프다며 나아가지 않았다. 맹사성의 스승인 권근(權近)이 “사군자(士君子)는 나와서 정사를 돌보아야 할 때입니다. 선생은 유독 끝까지 숨어 있을 것입니까? …나는 장차 선생과 같이 은둔한 선비들이 나와서 문화(文華)를 진작하고 태평세월을 빛나게 하여 훌륭하게 정사를 도모하기 바라니 선생께서는 마땅히 힘써야 할 것입니다”고 간곡히 청을 하기도 했지만 응하지 않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 맹사성이 조선에 충성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맹씨행단에는 맹유와 맹희도와 맹사성 3대를 함께 모신 사당 세덕사(世德祠)가 있다. 매년 음력 10월10일에 제사를 지내다가 2004년부터는 양력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세덕사에 모셔진 맹유의 위패는 개성 두문동 서원에서 모셔온 것이다. 일제시대에 두문동 서원이 폐쇄될 때, 위패를 모셔가라는 연락이 와서 문중에서 세 분(맹호성, 맹유, 맹희도)의 위패를 모셔왔다. 그중에서 맹호성은 조상임을 확인할 수 없고, 맹희도의 위패는 이미 있어서 두 위패를 땅에 묻었다고 한다. 이렇게 지금 세덕사에 모셔진 세 위패는 각기 다른 사당에서 모셨던 것인지라 생김새가 다르다.

   

맹유의 묘는 실전(失傳)되고, 맹희도의 묘는 아산시 법곡동에 있다. 영조는 1750년 9월에 온양으로 온행(溫行·온양 행궁 행차)을 왔다가 맹희도의 묘가 부근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리고 손수 “충효세업(忠孝世業) 청백가성(淸白家聲)”-충효를 대대로 힘써왔으며, 청렴과 결백은 가문의 명예니라”라고 쓴 어필(御筆) 현판을 내렸다.

아버지 대에서는 충효를 지켜 명분을 세우고, 아들 대에서는 청렴한 관리가 되어 이름을 높였으니, 두 왕조 사이에서 명분과 실리를 다 차지한 집안으로 맹씨 집안만한 데도 없다

 

忠 위해 목숨 건 고려 말 삼형제 야은 뇌은 경은,

학문과 의기 모두 우열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출중

구산사 마당에서 제사를 지내는 전씨 3은의 후손들.

공교롭게도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대변인, 전병헌 씨와 전여옥 씨가 담양 전씨로 같은 문중 사람이다. 조선시대에는 문중이 곧 당파로 연결됐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세상이니 별스럽게 여길 필요는 없겠다. 담양 전씨는 조선시대에 이렇다 할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 가장 인상적인 인물로는 조선 성리학의 마침표를 찍었던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이 있다.

전우는 조선이 망하자, 서해 먼바다 왕등도로 몸을 숨겼다. 공자가 ‘논어’에서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겠다(道不行乘浮于於海)”고 한 말을 따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에는 집안 선조의 유사한 판단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유배 중 죽고 무인도로 잠적

고려가 망하자 서해 절해고도로 몸을 숨긴 충신이 있었다.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낸 뇌은(隱) 전귀생(田貴生)이다. 전우는 뇌은의 친형인 야은(隱) 전녹생(田綠生)의 후손이어서, 뇌은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었다. 야은 전녹생, 뇌은 전귀생, 경은(耕隱) 전조생(田祖生), 이 삼형제를 여말 3은(麗末三隱·목은, 포은, 야은)에 견주어 전씨 3은이라고 부르는데, 전우는 전씨 3은을 기리는 유허비문을 1899년에 짓기도 했다.

담양 전씨가 조선시대에 큰 인물을 배출하지 못한 데는 고려 말 전씨 3은의 여파가 크다. 전씨 3은이 모두 목숨을 걸고 고려 왕조를 지키려 했던 충신들이라 그 후손들이 조선 왕조와 잘 융화하지 못했다.

전씨 3은은 고려 말에 은(隱)자 돌림의 호를 썼던 10은(隱)에 꼽힐 만큼, 삼형제가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이름을 크게 떨쳤다. 따져보면 전씨 3은처럼, 삼형제가 함께 충신의 소리를 듣는 예도 우리 역사상 찾아보기 어렵다.

맏형 야은 전녹생(1318~1375)은 조선시대 서당의 주요 교재로 사용된 ‘고문진보(古文眞寶)’를 처음으로 들여온 인물이다. 1366년에 중국 연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들여왔는데,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합포(지금 마산)에서 근무할 때 간행소를 차려 책을 펴냈다. 야은은 이인임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고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선대왕(先代王) 때부터 명나라와 동맹을 맺고 원나라를 멀리하기로 했는데, 이를 어기려 드니 이인임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이인임의 위세에 눌려 야은은 옥에 갇히게 됐고, 옥관(獄官)을 맡은 최영(崔瑩) 장군에게 심하게 매질을 당한 뒤에 유배됐다가 장독이 올라 죽고 말았다. 이때 함께 상소했던 반남(潘南) 박상충(朴尙衷)도 장독으로 죽고, 정몽주(鄭夢周), 정도전(鄭道傳), 이숭인(李崇仁), 권근(權近)도 유배를 당했다.

   


전씨 3은을 모신 홍성 구산사(좌). 전씨 3은을 함께 모셔 제사를 지내는 모습.

막내 경은 전조생은 정몽주에 견줄 만큼 도학(道學)에 밝았다. 그는 “학문의 요(要)는 호기심을 좇아 한없이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거두어 두는 것이니, 마음을 거두어 두는 공부는 하나도 경(敬)이요, 둘도 경(敬)이다”로 시작되는 글인 ‘경학문(警學文)’을 남겼다. 그는 충숙왕 복위 5년(1336)에 문과에 급제했고, 충혜왕 복위 2년(1341)에 왕으로부터 “두 왕자를 부탁하니 경은 오늘 밤 짐의 말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청을 듣고 조복(朝服)이 모두 젖을 정도로 울었다고 한다. 그는 왕명을 받들어 충혜왕의 큰아들 충목왕(1337~48, 여덟 살에 즉위해 열두 살에 승하)을 따랐고, 둘째 아들 충정왕(1337~52, 열두 살에 즉위해 열네 살에 강화도로 축출)을 끝까지 보필해 강화도로 들어갔다. 하지만 강화도로 들어간 이듬해(1353년)에 충정왕이 독살당하면서 그의 행적 또한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숨어서 밭을 갈았다 하여 경은(耕隱)이라는 호를 얻었다는데, 삼형제 중에서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 큰형과 함께 죽은 박상충이 그의 죽음을 애석해했고, 정몽주 또한 그의 초상화를 보고 “때를 잘못 만나고 보니/ 그 어진 덕이 한껏 쓰이질 못했구나/ 덕은 있으나 수를 얻지 못했으니/ 알 수 없는 것은 하늘의 뜻이로다/ 안자의 나이에 비교해볼진대/ 육 년을 더 보태셨도다/ 농사꾼으로 숨어 있었지만/ 전왕을 잊어본 적이 없도다”라고 찬했다. 공자의 제자 안자가 서른두 살에 죽었으니, 경은은 서른여덟 살에 세상을 버린 셈이다.

 

둘째 뇌은 전귀생이 두문동에 은거

담양 향교 앞에 세워진 삼은전선생유허비.

조선이 태동하기 전에 경은의 자취가 지워졌음에도, 경은은 그의 형 전귀생과 더불어 두문동 72현으로 꼽힌다. 삼형제 중에서 둘째인 뇌은 전귀생은 두문동에 은거했던 인물이다. 두문동에서 나와 예성강의 벽란진을 건널 때 채귀하(蔡貴河)와 박담(朴湛)과 주고받은 시가 전해온다. “마침내 나라가 망했는데 숨은들 무슨 소용이리/ 북문을 나와 서쪽 멀리 바다 섬을 찾아가네.”

뇌은이 숨어든 서해의 섬이 어디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군산 앞바다 어청도와 보령 앞바다 외연도에 전횡(田橫) 장군의 사당이 있는데, 혹자는 어청도의 전횡 사당에 뇌은의 시가 걸린 적이 있어서 어청도로 들어간 것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추정은 제나라(기원전 391~기원전 221년)가 망하자 제나라 장수 전횡이 병사 500명을 이끌고 서해의 섬에 정착했다는 전설과 담양 전씨가 제나라의 후예라는 전설이 중첩되면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제나라 장수인 전횡이나 제나라 후예인 담양 전씨의 전귀생, 전우가 모두 나라가 망하자 서해의 섬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문중의 전통처럼 보인다.

   


전씨 3은, 삼형제가 살던 고향집은 전남의 담양 향교 자리다. 큰형인 야은이 집터를 담양부에 제공해 향교를 짓게 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치 집을 절에 희사하듯, 성리학에 집을 헌정한 격이다. 지난 세기에 담양 향교 유림과 전씨 후손들은 이를 기려 ‘三隱田先生遺墟碑(삼은전선생유허비)’를 담양 향교 앞에 세웠다. 현재 모든 담양 전씨는 전씨 3은의 후손들인데, 충청도 홍성과 경상도 울진에 많이 모여 살아 각기 구산사(龜山祠)와 경문사(景文祠)를 세워 해마다 음력 10월1일에 3은 선생을 기리고 있다.

제사가 치러지는 홍성 구산사를 찾아갔더니, 여러 대화 속에 “도학을 향한, 나라를 향한 3은 선생의 정신이 곧 담양 전씨의 정신”이라는 소리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담양 전씨 대종회 02-2297-2951~2

 

세상 부귀 등지고 불사이군 절개 지켜 치악산에 들어가 한평생 출사 거부

제자였던 태종 이방원이 직접 찾아오기도

이방원이 스승 원천석을 기다렸다는 태종대.

흥망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하노라.

고려 말에 살았던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의 시조 회고가(懷古歌)다. 그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키기 위해 치악산으로 숨어든 뒤에 출사하지 않았다. 그런 운곡을 산 밖으로 모시기 위해 태종 이방원이 직접 치악산을 찾아갔다. 이방원은 어린 시절 치악산 동쪽 각림사(覺林寺)에서 운곡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었다.

지금은 강림우체국이 차지하고 앉은 각림사 터를 지나 치악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를 따라 오르면 노고소(老姑沼)가 나온다. 이 부근에서 이방원은 한 노파를 만나 운곡의 행방을 물었다. 치악산 동쪽에는 부곡·고든치골·가래골·횡지암골 등 여러 계곡이 있는데, 노파는 운곡이 머물고 있는 곳이 가래골 삿갓바위(弁岩) 방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엉뚱한 곳을 알려주었다.

치악산에 태종과 관련한 이름 많이 남아

태종은 노고소에서 상류로 500m쯤 올라간 곳에 있는 바위에서 스승을 기다리다 끝내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그 뒤로 태종이 기다리던 바위는 ‘태종대’라 부르게 되었고, 바위 위에는 임금이 머물다 간 곳이라 하여 ‘주필대(駐臺)’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또한 태종이 말 타고 온 길은 ‘마치재’, 수레를 타고 온 길은 ‘수레너머’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태종대 위에 세워진 비석, 주필대.

한편 임금을 속인 노파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소(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는데, 그곳이 바로 늙은 할미 못인 노고소다. 그리고 노파가 잘못 알려준 계곡은 횡지암(橫指岩)이라고 칭해지게 되었다.

운곡은 치악산을 마당 삼아 돌아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가래골 삿갓바위 남쪽 봉우리 아래에 누졸재(陋拙齋)라는 초가를 짓고 머물기도 했다.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해마다 봄가을로 산 정상(비로봉)에 단(壇)을 쌓고 고려 왕들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치악산 서쪽의 원주시 행구동 석경마을엔 그의 무덤이 있다. ‘돌갱이’라고 부르는 석경마을은 돌이 많은 산길이라는 뜻이다. 마을 안쪽의 석경사(石逕寺)에는 운곡을 기리는 재실 ‘모운재(慕耘齋)’와 비석, 시비가 있다. 시비에는 앞서 인용한 회고가와, 석경마을을 배경으로 한 시조가 적혀 있다.

청려장(靑藜杖) 드더지어 석경(石逕)을 돌아드니
양삼선장(兩三仙庄)이 구름에 잠겼세라.
오늘은 진연(塵煙)을 다 떨치고 적송자(赤松子)를 좇으리라.

   


원천석이 머문 곳을 태종에게 거짓으로 알려준 노인이 빠져 죽은 노고소(왼쪽). 벌의 허리처럼 잘록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원천석의 묘.

청려장은 명아주 지팡이고, 양삼선장은 두세 명의 신선이 산다는 집이며, 적송자는 소나무다. 석경은 그냥 돌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돌갱이 마을로 보면 훨씬 구체적이 된다.

석경사 아래쪽에는 원천석의 묘가 있다. 무학대사가 묘 터를 잡아주었다는데, 요즘도 풍수가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소문난 명당이다. 벌허리 명당(蜂腰穴)으로, 벌처럼 자손이 많이 생기는 터다. 묏자리는 마치 말안장을 얹고 올라앉은 것처럼 오목하게 들어갔고, 양옆으로 경사가 심한 땅이다. 길게 뻗어나간 묏자리 끝에 허름한 무덤 하나가 눈에 띈다. 땅의 기운을 받기 위해 몰래 써놓은 무덤처럼 보이지만 원천석의 부인 묘라고 한다.

묘는 개성을 향하고 있고, 잘 자란 적송자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묘 앞은 두 사람 정도가 간신히 앉을 만큼 옹색하지만 묘한 기운이 감돈다.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작은 타협도 하지 않으려는 결기가 느껴진다.

운곡은 은거하면서 야사(野史) 6권을 저술했는데, 임종을 앞두고 “성인(聖人)이 아닌 자는 열어보지 말라”고 유언했다. 그런데 돌함에 보관돼오던 그 문서를 증손자대에서 열어보고는 ‘가문이 멸족당할까’ 싶어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석경사에 있는 원천석의 시비.

퇴계도 극찬한 한시 1144수 남겨

운곡은 정몽주나 이색처럼 정치적으로 화려한 이력을 남긴 것도, 길재처럼 사림의 종주로 추앙받을 만큼 똑똑한 제자를 남기지도 못했다.

무덤 앞의 ‘고려국자진사원천석지묘(高麗國子進士元天錫之墓)’라는 묘비명에서 보듯 그의 벼슬은 ‘진사’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원천석이 치악산만큼이나 우뚝한 존재가 된 것은 그의 지조와 그의 시(詩)에서 파생된 힘 때문이다.

그는 한시 1144수를 남겼는데, 퇴계는 “이 시가 곧 역사다”라고 평했다. 퇴계의 평가에 힘입어, 퇴계의 제자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운곡의 봉분을 새로 하고, 한강의 제자 미수(眉) 허목(許穆)은 사헌부 장령으로 있던 1670년에 비를 세워 그를 기렸다. 근자에 와서는 국가에서 묘소 옆에 사당을 지어 성역화 작업을 하고 있다.

강원도 원주 치악산은 원천석의 체취로 가득한 땅이다.

 

고려 신하 고집하다 ‘멸문의 禍’ 왕자의 난 직후 이방원 세력에게 70여명 몰살 …

단종 때 ‘설원기’ 통해 명예회복

경기 평택시 장안동에 있는 연안 차씨 선조들을 모신 의덕사.

고려가 망하면서 가장 피해를 본 집안은 개성 왕씨들이지만, 이 못지않게 멸문에 이른 집안이 연안(延安) 차씨(車氏)이다.

“산악과 같은 그 분함은 천 년이 지나간들 가시겠는가? 하해와 같은 그 원한은 만 년이 된들 끝나겠는가?”

연안 차씨, 차원부(車原)의 죽음을 놓고 박팽년이 훗날 묘사한 글이다.

차원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길재(吉再)는 책상을 끌어내고 등불을 던지며 통곡했고, 조운흘(趙云, 검교정당문학 역임)은 지팡이로 책상을 치며 통곡했다. 이방간(李芳幹, 태종 이방원의 형)은 타고 갔던 소를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고, 이양중(李養中, 병조정랑 역임)은 술독을 깨뜨리며 슬퍼했다.

차원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를 마중 나온 70여명의 집안사람들과 함께 몰살됐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뒤 곧바로 벼슬을 올려주는 왕의 교지(敎旨)가 그의 아들 차안경(車安卿)에게 내려졌는데 안경은 이를 거절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다시 교지가 차원부의 아내 평산 신씨에게 내려졌지만 신씨 또한 이를 거절하자, 이번엔 신씨를 죽여버렸다. 손자 차상도(車尙道)는 경상도 순흥으로 몸을 숨겨 고용살이로 목숨을 부지해야 했고, 그 증손자들은 전라도 순천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한순간에 연안 차씨 집안은 멸문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것이다.

의덕사에는 101인의 차씨 선조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중 99인이 고려시대까지의 인물이다.

차원부는 조선 왕조 창건에 동참하지 않았다. 고려 말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황해도 평산(平山) 수운암동(水雲岩洞)에 은거하면서, 암반 위에 매화를 심고 연못에 국화를 심으며 지냈다. 그래서 두문동 72현에 꼽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이성계보다 열다섯 살 연상으로, 이성계가 자문을 청하는 가까운 사이였다.

공신 책봉 거부한 채 평산에 은거

요동 정벌을 나선 상황에서도 이성계는 평산으로 찾아가 차원부의 조언을 구했다. 차원부는 이때 “속국이 중국을 범함이 첫 번째 가하지 못함이요, 제후가 천자를 범함이 두 번째 가하지 못함이라”는 사대주의 관점을 제시해 이성계에게 위화도회군의 명분을 주었다. 하지만 차원부는 고려의 신하로 남기를 고집했다. 조선이 창건된 뒤에 이성계가 그를 공신으로 책봉하려 하자 “비록 다섯 말의 식초를 마실지언정 공신녹권에 참여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조선 후기에 전남 순천에서 판각된 ‘설원기’ 목판본(왼쪽 사진). 운암공 차원부의 묘소에서 옛일을 얘기하고 있는 종친회 사무총장 차기탁 씨.

1398년 왕자의 난이 나던 해였다. 태조 이성계가 차원부의 흙집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서, 석 달 동안 하루에 다섯 번씩 평산으로 칙서(勅書)를 보내 차원부를 불렀다. 차원부는 옛정을 생각해 궁궐에서 보낸 말을 돌려보낸 뒤 평복을 입고 궁궐로 들어갔다. 그리고 궁궐에 머물면서 왕위 계승 문제로 고뇌하던 태조에게 해답 하나를 제시했다. “시대가 태평할 때는 적장자(嫡長子)를 우선으로 하고, 시대가 어지러울 때는 공로가 있는 자를 우선으로 하는 겁니다”라고 하여 이방원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렇게 하고서 차원부는 궁궐을 떠났다. 궁궐을 떠난 직후에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차원부는 송원과 마원 땅 부근에 이르렀을 때 살해되고 말았다. 여기에는 이방원의 오판과 하륜(河崙)의 음모가 있었다고 사가(史家)들은 평하고 있다.

먼저 태조에게 건넨 차원부의 견해가 와전됐다. 차원부는 정몽주(鄭夢周)의 외종(外從) 형제이고, 이방과(李芳果·정종) 원비(元妃)의 증조부 항렬이니 장차 이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살해 명단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실제 이유는 따로 있다고 한다.

차원부가 평산에 은거하고 있을 때 차씨 문중의 족보를 작성했다. 이 족보는 안동 권씨의 ‘성화보’와 문화 류씨의 ‘가정보’보다 앞선 우리나라 족보의 효시로, 판각되어 해주 신광사에 보관돼 있었다. 하지만 이 족보가 문제였다. 족보에는 차씨 문중과 혼맥을 형성한 집안의 서얼(庶孼)까지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빼도 박지도 못할 족보 안에는 개국공신인 정도전(鄭道傳), 조영규(趙英珪), 함부림(咸傅霖), 하륜의 혼사 비밀도 담겨 있었다.

설원기에선 차원부 희생 책임 하륜에게 돌려

차원부 사후에 내려진 교지.

정도전은 차씨 집안의 사위인 우연(禹淵)의 첩이 낳은 딸의 아들이고, 조영규는 차운혁(車云革·차원부의 조카)의 이복 누이의 남편이고, 함부림은 차원부의 이복 남동생의 사위이고, 하륜은 차씨 집안 사위인 강승유(姜承裕)의 첩의 딸의 아들이었다. 이런 사연을 차원부는 집안 족보에 상세하게 밝혀놓았다. 여기에 악감정을 품은 하륜이 왕자의 난을 빌미로 차원부의 일족을 살해하고, 해주 신광사에 보관된 족보 판본까지 불살라버렸다는 것이다.

차원부의 죽음에 가장 분노한 사람은 차원부를 궁궐로 불러들인 태조 이성계였다. 그래서 이방원 세력은 급히 차원부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려 했고, 세종과 문종을 거쳐 단종에 이르러서야 그 한 맺힌 사연을 기록한 ‘설원기(雪記)’를 펴내게 됐다.

‘설원기’는 왕명을 받들어 박팽년이 짓고, 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이석형(李石亨) 등이 주석을 달았으며, 당대에 내로라하는 관료와 선비 48명이 지은 칠언절구 72수의 추모시가 첨부됐다.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대대적인 추모 사업이 진행됐는데, 이것은 단순하게 차원부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하려는 데만 있지 않았다.

   

“골육상쟁을 벌이고 왕좌에 오른 이방원에게는 잘못이 없다. 잘못은 간악한 하륜에게 있다. 서얼 출신인 하륜의 꾐에 넘어가 이방원은 상황을 오판했다. 서얼(하륜)이 감히 적자(차원부)를 넘보다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애초에 서자들은 가만히 있어야 했다. 서자였던 이방석(李芳碩)이 왕위를 이으려 했던 것도 잘못이다. 그래서 이복 동생 방석을 죽인 방원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권력을 탐한 하륜 같은 서자들의 교활한 음모가 잘못이다. 차원부는 억울하다”는 논리가 관철된 것이 ‘설원기’다. 고로 차원부의 원한을 풀어줌과 동시에, 태종 이방원의 정당성을 부여한 책이다.

 

연안 차씨 집안은 개성 왕씨 집안과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기에, 더더욱 조선시대 내내 몸을 숨기며 살아야 했다. 현재 집성촌을 이룬 곳을 보아도 깊은 산골이나 바닷가가 많다. 그리고 하륜의 묘에는 비석을 세우기만 하면 망가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근동에 사는 차씨들이 망가뜨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차원부의 무덤은 서울 망우리에 있다가 1972년에 평택시 장안동으로 옮겨졌다. 이장을 할 때 보니 시신을 어찌나 깊이 묻었던지, 흙을 두레박으로 퍼내야 할 정도였다. 죽어서도 안심하지 못해 깊이 묻혀야 했던 차원부의 삶을 들여다보면 조선 초기의 권력 지도가 보인다

 

정선아리랑에 담은 7賢의 충절 7명의 고려 충신 거칠현동에 은거 …

조선 왕조의 미움 사 후손들 출사 막혀

정선 읍내에 새로 마련된 아라리촌의 물레방앗간.

한치 뒷산의 곤드레 딱주기 임의 맛만 같다면
올 같은 흉년에도 봄 살아나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구성진 정선아리랑의 한 가락이다. 정선아리랑의 유래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두문동 72현과 만나게 된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한치(정선군 남면 유평리)마을에서 북쪽으로 7km쯤 가면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이 나온다. 첩첩산중이라 세상 등지고 살 만한 곳이다. 앞산 백이산은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가파르다.

이 산중에 고사리를 캐먹고 살던 고려 충신 7명이 있었다. 전오륜(全五倫), 김충한(金仲漢), 고천우(高天祐), 이수생(李遂生), 신안(申晏), 변귀수(邊貴壽), 김위(金瑋)가 그들이다. 정선 땅에 강 좋고 계곡 좋고 풍광 좋은 곳이 많건만 하필 이 협소하고 험악한 산중에 들어와 살다니, 그들의 매서운 심사가 서늘하게 느껴진다.

정선은 전오륜 선조의 고향 땅

이들이 정선까지 들어오게 된 것은 전오륜과의 인연 때문으로 여겨진다. 정선은 전오륜 선조의 고향 땅이다.

전오륜은 고려 말에 우상시(右常侍)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그는 본향을 달리하는 18파 모든 전(全)씨의 시조인 백제 개국공신 전섭(全)의 후손이자, 신라 내물왕 때 백제 대광공주를 배행하고 신라에 들어가 정선군(旌善君)으로 봉해진 전선(全)의 후손으로, 정선 전씨의 파시조가 됐다. 전오륜은 1392년에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을 거쳐 정선으로 오게 됐는데, 처음에는 정선 성마령에 머물다가 관리들에게 소재가 파악되자 더 깊은 거칠현동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러나 나머지 6명은 정선과 특별한 인연이 없고, 정선에 얼마 동안 머물렀는지도 알 수가 없다. 전오륜을 찾아갔다가 잠시 머물렀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튼 이들은 거칠현동의 앞산을 백이산이라 이름 짓고 지냈다. 백이산은 주나라에 반대하여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죽은 형제 백이숙제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들은 정선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마음을 정선아리랑에 실어 읊기도 했다. 1983년에 두문동 72현에 속하는 최문한의 집안에서 공개한 자료에는, 거칠현동의 7현이 지었다는 ‘도원가곡(桃源歌曲)’이 실려 있다.

我羅理 啞肄 餓彛要 義朗 古稽露 懶慕艱多 (아라리 아라이 아나이요 아의랑 고계로 나모 간다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에 마련된 소공원(왼쪽).낙동리 서운산에 있는 전오륜의 묘소.

소리를 그저 한자로 옮겨놓은 것 같지만, “벙어리처럼 말을 삼가고 배고픔을 견디며 오로지 충의를 밝히자”는 비장한 의미를 담고 있는 가사다. ‘도원’은 고려 충렬왕 때 정선의 이름이었으니, 도원가곡은 정선가곡이나 다름없다. 이 가곡은 처음 공개될 때 큰 주목을 받았는데, 무엇보다도 정선아리랑의 존재를 고려 말까지 끌어올린 근거가 됐다.

7현 기리는 비석엔 그들의 한시 새겨져

현재 거칠현동 어귀에는 작은 공원이 마련돼 있는데, 이곳에는 7현을 기리는 비석과 사당 칠현사(七賢祠)가 세워져 있다. 또 이와 별도로 높다란 기단 위에 세워진 팔각형 비석의 한 면에는 ‘高麗遺臣七賢碑(고려 유신 칠현비)라 새겨져 있는데, 다른 7면에는 7현들의 한시가 한 편씩 새겨져 있다.

東來朝服在臣身/ 동쪽으로 올 때 가지고 온 조복으로 갈아입고
遙望松京哭滿巾/ 송도를 바라보니 애달파 눈물만 흐르네
唐虞世遠吾安適/ 요순성대 가버렸으니 어디서 머물리요
矯首西山繼絶塵/ 서산을 향하고 세상 인연을 끊네

채미헌(採薇軒) 전오륜의 시다. 이 시는 개성의 남동쪽에 있던 광덕산 부조현에서 조복(朝服)을 벗어던지고 두문동으로 들어가 머물던 상황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물론 그 동쪽을 정선 땅으로 생각해도 잘 어울린다.

그런데 아쉬움이 있다. 칠현비와 칠현사가 세워진 곳은 거칠현동의 입구일 뿐이다. 거칠현동은 공원 안쪽 계곡으로 10리나 된다는데, 조금 걸어 들어가 보니 난파(難破)돼 있었다. 그곳엔 석회암 광산이 있었다. 골동품의 가치가 있는 문짝을 불쏘시개로 써버렸던 시절처럼, 역사문화자원이자 관광자원을 깨뜨리고 있으니 가슴 아픈 일이다. 정선에 살고 있는 정선 전씨들이 군청과 광산을 찾아가 항의해봤지만, 공사는 그치지 않고 있다. 아리랑 가락이 울려 퍼져야 할 곳에 발파음이 난무하니 패망한 고려의 참상을 보는 듯하다.

   

칠현비와 도원가곡비.

거칠현동에서 1km쯤 떨어진 낙동리 삼평역 철로변에 사는 전홍렬(78) 씨는 전오륜 할아버지 때문에 정선 전씨들이 600년 가난에 들었다고 했다. 이성계와 크게 원수를 져서 전주 이씨와는 혼인도 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크게 현달한 이도 없다고 했다. 고작해야 조선 선조 때 횡성현감을 지낸 전방경(全方慶)이 있는데, 그도 어찌나 과거에 낙방을 하던지 외갓집 성을 빌려 쓰고서야 급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직으로 들어가려다가 전(全)씨라는 것이 발각돼 파직을 당하고 말았다.

전오륜은 거칠현동에서 30년가량 머물다가 말년에 경남 합천의 아들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합천은 그가 군수를 지냈고, 아들 전맹겸(全孟謙) 또한 군수를 지냈던 고을이다. 전오륜은 합천에 묻혔는데, 묘지가 합천댐 수몰지가 되면서 1986년 정선군 거칠현동의 서운산 자락으로 옮겨졌다. 이제 다시 정선의 첩첩 산자락이 전오륜의 육신을 그 옛날처럼 첩첩 에워싸고 있다.

 

 

 

‘광주의 혼’ 된 원나라의 명문가 공민왕 때 고려에 정착한 뒤 충성 다해 …

역성혁명 후 자식들에게 ‘불사이군’ 유언                  

광주 진월동에 있는 정광 묘역. 정광은 이 산자락에 띠집을 짓고 살았다.

광주광역시는 오래된 도시가 아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광주읍으로 승격되면서 승승장구한 신흥 도시다. 전라도라는 말을 낳게 한 전주나 나주에 가면 오래된 동헌이나 문루가 보이지만 광주에는 눈에 띄는 게 없었다. 그저 무등산 아래 신작로가 놓였고 사람들이 바쁘게 사는 도회지일 뿐이었다.

그런데 두문동 72현을 찾아나서면서 이런 판단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번화가로 변한 광주시 남구 진월동에 가면 616년 전에 터를 잡은 기념비적인 공간이 있다. 하남(河南) 정씨(程氏)의 시조, 정사조(程思祖)의 2세인 정광(程廣)이 은거했고, 묻힌 땅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정사조는 원나라 사람으로 1351년 12월에 고려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공주를 모시고 개경에 들어온 인물이다. 그는 노국공주를 보필하면서 어사대부(御使大夫, 관리의 감찰 업무를 맡는 관청의 정삼품 벼슬)를 지냈고, 훗날 공신으로 책봉되어 정일품인 삼한삼중대광(三韓三重大匡)으로 추증되었다.

정광의 10대조가 성리학의 창시자

정광 묘역 어귀에 세워진 신도비.

그를 따라온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정도(程度)는 오부부사(五部副使)를 지냈지만 후손이 없어 대가 끊겼고, 둘째 아들 정광은 아버지를 따라온 직후인 135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중성(殿中省, 왕실 살림을 관장하던 부서) 판사(判事)에 이르렀다.

고려 땅에 순조롭게 안착하는가 싶던 정씨 집안은 공민왕이 살해되고, 우왕·창왕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다시 한번 변화를 겪었다. 정광이 벼슬을 버리고 전라도 광주에서 서남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금당산 자락(지금의 진월동)으로 숨어버린 것이다. 정광은 이미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는 충실한 고려의 신하가 되어 있었다. 그는 “일찍이 고려가 번성한 날 엔/ 온 세상이 고려의 신하였는데/ 어찌 고려가 쇠잔할 줄 알았으랴/ 온 세상이 고려의 신하가 아니네”라고 세상을 한탄했다.

정광이 광주까지 내려오게 된 것은 아마도 그의 아내가 광산(光山, 광주광역시 광산구) 이씨여서, 처가 동네 근처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물가에 터를 잡고 띠를 베어 산수간에 집을 짓고” 살면서, 때로 무등산 정상 서석대에 올라 송도를 그리워했다.

서석대의 푸른 봄을 좋아하네(瑞石靑春也自好).
송악에 있던 나를 누가 데려왔나(雖將松岳舊顔來).
한 번 눈물에 또 한 번 통곡하네(一回含淚一回哭).
물과 산골짜기 우울한 회포를 삼키네
(水咽出溪鬱此懷).

   


무주 도남사 사당에 모셔진, 중국에서 건너온 정향·정도·정이의 영정(왼쪽). 도남사의 운치 있는 벽화 앞에서.

‘등서석음(登瑞石吟)’이라는 정광의 시다. 백제 가요 무등산가(無等山歌)는 가사가 전해오지 않으니, 무등산을 소재로 한 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걸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정광은 역성혁명에 편승하여 조선 왕조로 스며들지 않고, 외진 산간으로 스며들어 버렸을까? 더욱이 연고도 없는 자식들에게까지 훈계하는 계자시(戒子詩)를 남겨, “너 또한 고려조의 신하이거늘/ 어찌 새 임금을 섬기랴/ 만약 신하 된 도리를 안다면/ 전조의 임금 은혜를 잊지 마라”고 했다. 이 유언 때문인지 하남 정씨 집안에서는 국가적인 변란인 임진왜란 때 화순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순국한 정득운(程得雲), 정득원(程得元) 형제가 공신으로 책봉될 때까지 크게 이름을 얻은 이가 없었다.

정광이 의리를 지킬 수 있었던 힘은 그의 집안 내력에서 나왔다. 하남 정씨인 정광은 본관이 중국의 하남성으로, 송나라 수도였던 낙양(洛陽, 하남의 옛 이름)에 그의 선조가 살았다. 정광의 10대조가 바로 이천부자(伊川夫子)인 정이(程)인데, 정이는 그의 형 명도부자(明道夫子) 정호(程顥)와 함께 성리학을 창시한 걸출한 인물이다. 주자가 뒤이어 정호와 정이의 학설을 집대성하면서 성리학이 완성되는데, 이들의 성(姓)을 따서 성리학을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부른다. 성리학, 즉 정주학은 한반도에서 고려 말부터 통치이념으로 뿌리내리게 되는데, 하남 정씨는 정주학과 더불어 한반도에 뿌리내린 집안인 셈이다.

정광은 당시 불교를 숭상하고 복(福)을 구하는 시대 풍조를 보고 “나의 가문은 이천부자와 선조(先祖)로부터 불도(佛道)를 쓰지 않거늘 내 어찌 저 무리를 존숭하고 믿겠는가”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그는 예(禮)와 윤리, 도덕을 중시하는 정주학의 근본에 충실하여 고려 충신으로 남고자 한 것이다.

정광의 지조, 5월 광주정신과 어울려

세월이 흘러 1616년에 좌의정 이정구(李廷龜)와 공조판서 유간(柳澗)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 신종(神宗)으로부터 정주학을 창시한 정호, 정이 형제와 그의 아버지 정향(程珦)의 초상화를 받아 왔다. 신종이 고려에 귀화한 하남 정씨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후손에 전하라고 준 것이었다. 하지만 후손을 찾지 못하고, 유간의 후손이 가보로 간직하다가 1865년에 무주에 살던 정씨 후손을 찾아 전하게 됐다. 정씨 집안에서는 지역 유림들과 함께 전북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 정천변(程川邊)에 사당 도남사(道南祠)를 짓고, 그 초상화를 모시게 되었다.

하남 정씨 집안에서는 봄에는 광주 진월동 정광의 묘소에서, 가을이면 도남사에서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도남사는 그림 솜씨 좋은 후손이 낙향해 살면서 정갈하게 가꾸고 있는데, 광주 진월동 묘역 사당은 방치되어 황폐한 상태였다. 주변에 아파트 숲이 들어서면서 아파트부녀회에서 무덤을 옮겨달라는 민원을 넣고, 민원에 약한 지자체장들이 이를 옮기겠다고 공약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600년을 이어온 강원 정선의 거칠현동은 석회암 광산으로 파괴돼 뒤늦게 후회하더니, 광주의 역사를 증언하는 두문동 72현의 공간인 정광의 은거지는 바야흐로 아파트촌에 집어먹히려 하고 있다. 무등산의 푸른 봄을 사랑했고, 충절과 의리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던 건천(巾川) 정광의 정신이야말로 5월 광주의 정신과 다르지 않거늘, 이를 뽑아내려 하다니 서푼어치 역사의식도 없는 부끄러운 행위다.

오히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로 진월동을 지켜준 정광을 기려서, 아름다운 공원을 만들어 그의 뜻을 오늘에 되새겨야 할 것이다.

 

33살에 순절 택한 ‘두문동 三節’ 새 왕조가 두문동에 불 질렀을 때 버티다 산화 …

후손들은 순창에 터 잡고 명맥 이어

순창 호계마을에 있는 임선미의 비석과 사당.

임선미(林先味)는 누구일까? 두문동 72현을 찾아나서기 시작하면서부터 궁금했던 인물이다. 두문동 72현의 주동자로 임선미가 첫손에 꼽히기 때문이다. 마침 임선미의 후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임선미를 기리는 사당이 전북 순창에 있다고. 개성 두문동에서 순절하고, 평택 임씨의 시조인 임팔급(林八及)의 후손인데 왜 그의 사당이 순창에 있는 것일까? 이 또한 궁금하여 순창을 찾아갔다.

순창군은 전국에서 제1의 장수 고을로 꼽힌다. 2002년 서울대 의대 노화연구소에서 전국 자치단체 장수실태를 조사했는데, 인구 10만명당 29명꼴로 100세 이상 노인이 살고 있어 전국 최고를 기록했다. 65세 노인 인구도 23%를 차지해 전국 평균인 7.4%를 훌쩍 넘어섰다. 그런 순창군에서도 가장 장수 마을로 꼽히는 호계마을에 임선미의 비석과 사당 호계사(虎溪祠)가 있었다.

순창에 임선미 기리는 사당 지어

호계마을은 어귀에 들어서서야 전경이 보일 정도로, 산자락에 오목하게 둘러싸여 있었다. 마을의 형상이 날개를 펴고 있는 매와 같아 예전엔 응동(鷹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 안에는 효자비와 열녀 정려문이 있고, 변씨 재각(齋閣)도 있었다. 마을 전경도 편안하지만, 충효의 도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동네라 더욱 편하게 여겨졌다. 이 마을엔 70가구쯤 사는데 이 가운데 임선미의 후손들이 30가구쯤 된다.

                                                                                                       임선미의 위패가 모셔진 호계사.

호계사가 이 마을에 세워진 것은 1943년이다. 전남 장성의 만수산에 있던 경현사(敬賢祠)가 1942년 일제에 의해 철폐되면서, 거기에 있던 임선미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그때만 해도 임선미의 후손들은 개성의 두문동에 있는 사당 표절사(表節祠)와 두문동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남북 분단이 되면서 어렵게 되자 1960년 전남 화순에 송월사(松月祠)라는 사당을 또 하나 만들었다.

임선미의 호는 두문제(杜門霽)로 두문동의 얼굴과 같은 존재다. 조선 영조 1751년 10월21일에 두문동 72현을 기리는 첫 제사를 지낼 때, 낭독했던 사제문(賜祭文)에 “오직 조씨(曺氏), 임씨(林氏), 맹씨(孟氏) 성을 가진, 전하는 사람은 이 셋뿐이고 나머지는 찾아볼 기록이 없네”라고 했다. 이때 조씨는 조의생(曺義生)이고, 임씨는 임선미다. 맹씨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고, 훗날 맹호성(孟好誠)이라고 지칭했으나 맹씨 족보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두문동 삼절(三節)로 꼽히는 이들은 열혈 청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즘으로 친다면 한 치도 타협하지 않고 굳세게 자기주장을 펴는 대학생쯤 될 것이다. 실제 임선미는 관리가 아니라 성균관 태학생이었다. 조의생도 임선미와 가까웠고,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를 스승으로 섬겼다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면 그 또한 태학생의 신분이었을 것이다.

   


전남 화순 어은골에 있는 임선미의 사당 송월사와 임씨들의 사당 담락제.

임선미와 조의생은 앞장서서 부조현(不朝峴)을 넘어 두문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초막을 짓고 두문불출했다. 이성계는 이들을 불러내려고 부조현이 건너다보이는 경덕궁(敬德宮)에서 과거를 보게 했는데, 두문동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이성계는 두문동에 불을 놓았고, 그 불길에 모든 이들이 물러설 줄 알았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임선미, 조의생 그리고 맹씨가 그들이었다. 이들은 무너진 고려와 운명을 함께했다. 훗날 두문동비와 부조현비가 세워진 것도, 표절사와 두문동서원이 세워진 것도 이들의 저항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열혈 청년들이 모질게 버텨 산화한 참상이, 두문동을 낳고 두문불출을 낳은 것이다.

임선미가 순절했을 때의 나이가 33세였다. 급작스런 죽음 때문에, 그가 쓴 글도 그에 관한 기록도 하나 남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그의 행적이라곤 태학생 신분으로 두문동에 든 것과,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정몽주나 박상충(朴尙衷)처럼 3년 시묘를 선구적으로 행했던 것만 전할 뿐이다.

인구조사 통계상 순창 임씨 100여호 불과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용배(用培)와 셋째 용계(用桂)는 전라도 순창으로 내려가고, 둘째 용달(用達)은 개성에 남았다. 두 아들이 순창으로 내려간 것은 임선미의 아버지 임중연(林仲沇)이 원나라에 체류하면서 고려 충숙왕을 잘 보필한 공로로 순창군에 봉군(封君)된 인연 때문이다. 순창군 임중연은 순창읍 장덕리에 허리가 잘록한 벌 명당에 묻혔는데, 임선미가 3년 동안 시묘한 곳도 바로 이곳으로 여겨진다.

임선미의 아들 용배와 용계의 무덤은 할아버지 순창군을 모시듯 그 밑에 있었다. 그러다가 훗날 용배의 장손이 전남 화순으로 옮겨가 살면서 용배의 무덤이 화순 송월사로 옮겨가고, 용계의 후손들은 충남 홍성으로 옮겨가 살면서 용계의 무덤도 홍성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호계사 담 너머로 보이는 호계마을의 전경.

임선미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순창군 임중연을 파시조로 삼아 독자적으로 순창 임씨를 표방했으나, 임선미의 후손이라는 게 불리하게 작용해 원시조에 맞춰 평택 본관을 쓰면서 살아야 했다. 최근까지도 대다수가 평택 임씨로 호적을 하고 살아서, 인구조사 통계에 잡힌 순창 임씨는 100여호에 불과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순창 임씨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견해가 많아졌는데, 되돌아갈 수 있는 임선미의 후손도 순창, 화순, 홍성에 사는 1000여 가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조선을 부정하고, 목숨까지 내던진 선조 때문에 순창 임씨 후손들은 간신히 명맥을 잇고 살아왔다. 순창에 사는 후손들도 크게 출세한 사람이 없고, 그저 순창 관아의 아전을 지내면서 살아왔다.

할아버지의 사당이 있다고 전화 제보를 했던 임선광(林宣光·75) 씨는 “임씨들은 대체로 기가 세고 성질이 급한데, 선미 할아버지 역시 강직하고 불같은 성질을 가지셨던가 봐요”라고 했다. 흔히 임씨들을 두고 호랑이에 비유하는 것도 이런 성미 때문인데, 목숨까지 내던지고 충절을 지킨 임선미의 기상은 가히 호랑이 같다고 찬할 만하다. 그 때문인지 임선미의 사당이 순창 호계(虎溪)마을에 있고, 호계사(虎溪祠)라 칭해지는 것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고향에 묻혀 인재 양성 한평생 고려 멸망 2년 전에 낙향 …

성리학 학통 이으며 조선 사림의 씨앗 뿌려

구미시 도량동 밤실 사당에 있는 길재의 신위와 초상화.

고려 말을 대표하는 충신으로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꼽는다. 여말 3은인 이들은 두문동 72현에 들지만 광덕산 두문동에 들어가지 않았다. 두문동 72현이 고려 말의 충신 집단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쓰이다 보니 벌어진 현상이다.

길재(1353~1419)는 고려가 멸망하기 2년 전인 1390년(공양왕 2년) 봄에 낙향했다. 그의 나이 38세로 벼슬은 종사랑(從事朗) 문하주서(門下注書)였다. 종칠품이었으니 나이에 비해 한미한 직급이었다. 낙향의 명분은 “고향에 계신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고려 왕조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는 길에 황해도 장단현에 살던 이색(1328~96)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의 전경을 이색은 ‘목은집’에 남겨두었다.

“경서에 능통한 태학의 선비/ 귀밑털 새파란 급제(及第) 주서(注書)가/ 가족을 이끌고 고향 가면서/ 내 말을 듣자고 거듭 다지네/ 글을 읽으면 옛사람 따라갈 거고/ 책(策) 지으면 조정에 오를 걸세/ 벼슬은 뜬 것이니 서두르지 말게/ 저기 저 날아가는 기러기 보게나.”

 

 

 

 

영조 때 길재의 충절과 학덕 기려 채미정 건립

길재의 묘소 앞쪽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지주중류비가 있다.

이색은 젊은 길재에게 기러기를 가리켰고, 그 기러기에 마음을 실은 길재는 경상북도 선산에 위치한 금오산에 들어가 금오산인(金烏山人)이 되었다.

지금은 구미가 선산보다 커서 구미시 선산읍이지만, 1978년까지만 해도 구미는 선산군 안에 있는 구미읍이었다. 금오산도립공원 어귀에는 채미정이 있다. 길재가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채미정은 길재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조선 영조 44년(1768)에 건립됐다. 중국의 백이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캐 먹던 고사에서 빌려와 ‘채미정(採薇亭)’이라 이름 지었다.

채미정 아래 지금의 금오산 저수지에는 길재를 홀로 배향하는 금오서원이 있었다. 금오서원은 1570년에 건립돼 1575년(선조 8)에 사액서원이 됐고 임진왜란 때에 불타버렸다. 1602년 복원되었는데, 위치를 많이 옮겨 선산읍에 가까운 낙동강과 감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는 선산읍이 선산의 중심이었고, 선산의 선비들이 서원을 많이 출입했기에 그들의 편의를 위해 옮긴 것이었다.

“조선 인물의 반은 영남에서, 영남 인물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두 길재의 영향 때문이다. 그 씨앗은 채미정에서 뿌려졌다. 김숙자(金叔滋, 1389~1456)는 선산 사람인데, 12세 때부터 길재에게서 ‘소학’과 경서를 배웠다. 김숙자는 그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에게 성리학의 학통을 이어주었고, 이 학통은 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정붕(鄭鵬)·박영(朴英)을 거쳐 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으로 내려가면서 거대한 영남 사림파를 형성하게 된다. 조선 중기 사림파의 뿌리는 길재에게서 비롯됐고 선산에서 싹텄다.

   


길재가 11세 때 들어가 공부했던 도리사. 도리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내려다보고 있다. 금오산 자락에 있는 채미정. 길재의 고향 마을에 세워진 삼강정려각 안의 비석(왼쪽부터).

길재가 살던 봉계리(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 마을 어귀에는 그를 기린 삼강정려각이 있다. 삼강정려각에는 봉한리 출신의 충신 길재, 효자 배숙기(裵淑綺), 조을생(趙乙生)의 처로 열녀 약가(藥哥)의 비와 현판이 있다. 봉한리 마을 안쪽, 죽림사 위쪽에는 근자에 건립한 길재 유허비가 있다. 길재는 외가 동네인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길재가 여덟 살 때 이 동네에서 가재를 잡다가 지은 시가 있다.

“가재야 가재야/ 너도 어미를 잃었느냐/ 나도 어미 잃었다/ 내가 너를 삶아 먹을 줄은 알지만/ 네가 어미 잃은 것이 내 처지와 같아/ 너를 놓아주노라.”

이색·정몽주 등에게서 학문 배워

길재는 11세 때 냉산(지금의 태조산)의 도리사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도리사는 신라 불교가 처음 싹튼 곳으로, 아도화상(일명 墨胡子)이 수행했다는 좌선대가 있는 곳이다.

길재는 18세 때에 벼슬살이하는 아버지를 찾아 개성으로 갔다. 그는 개성에서 이색, 정몽주, 권근(權近)에게서 학문을 배우게 된다. 길재는 학문에 임하는 자세가 남달랐다. 권근은 “내 뒤를 이을 학자는 몇 있을 터지만 길재보(再父는 길재의 자)가 독보(獨步)다”라고 했다.

길재의 아버지 길원진(吉元進)은 보성대판과 금주(지금의 충남 금산)지사를 지냈다. 길재와 금산의 인연은 1383년에 길재가 금주지사로 있는 아버지를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그때가 그의 나이 31세로 노총각이었다. 길재는 그곳에서 중랑장(中郞將·정오품 벼슬의 무관) 신면(申勉)의 막내딸과 혼인하게 된다. 신면은 현재 청풍사(淸風祠)가 있는 곳에서 2km가량 떨어진 토골에서 살았는데 땅을 많이 소유한 부호였다.

길재가 혼인한 이듬해에 아버지 길원진이 근무지인 금주 관아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길재는 아버지를 고향으로 모셔가지 못하고 관아에서 장례를 치렀고, 묘소도 금산에 마련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묘 앞에 초막을 치고 삼년상을 지냈다. 불교식 장례가 널리 행해지고, 길어야 백 일이면 탈상하던 시절에 ‘주자가례’에 따른 것이다.

현재 해평(海平) 길씨가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이 충남 금산인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이다.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 해평 길씨 집성촌에 가면 길재를 기리는 사당 청풍사가 있다. 동네 이름이 부리면 불이리로, 발음이 같은 단어가 중복되어 있다. 부리(副利)는 삼한시대 때부터 전해오던 지명이고, 불이(不二)는 불사이군(不事二君)에서 따온 말이다. 길재가 살던 마을이라, 길재의 불사이군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런 지명을 조선시대에 붙였다.

야은 길재는 고려의 충신이지만, 조선 왕조와 선비들에 의해 시대의 충신이자 효자로 추앙받았다. 조선의 통치이념이 된 성리학을 투철하게 실천했고, 조선 사림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받은 대접이었다. 길재 개인은 고려에 충실했지만, 그의 정신은 조선의 충실한 표본이 된 것이다

 

쫓겨난 공양왕 위해 삶 바치다 유배지 간성까지 따라가 정착 …

“내가 죽은 뒤 왕 밑에 묻어달라” 유언

간성 고성산에 있는 함부열의 묘역. 가운데가 함부열의 묘이고, 비석 없는 위쪽의 묘에 공양왕이 묻혀 있다고 한다.

고려시대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간성왕이라고도 불린다. 강원도 고성군 간성에 머문 적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1392년 7월11일에 폐위된 공양왕은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8월에 공양군으로 강등돼 간성으로 쫓겨났다. 공양왕이 머문 곳은 간성읍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나오는 간성읍 금수리 마을 안쪽의 수타사로 여겨진다. 공양왕은 이곳에 머물다가 조선 태조 3년(1394) 3월14일에 삼척 궁촌리로 재차 유배된다. 그리고 한 달 뒤인 4월17일 고돌산의 살해재에서 왕자 석(奭), 우(瑀)와 함께 교살되었다. 공양왕의 무덤은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와 고양시 원당동 두 곳에 있다. 삼척 묘는 처음 묻힌 곳이고, 원당 묘는 조선 왕실에서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불러 올린 뒤에 묻은 곳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제3의 공양왕릉이 고성군 간성읍 고성산에 있다고 한다. 모두 두문동 72현으로 거론되는 강릉 함씨, 함부열(咸傅說, 1363~1442)과 관련되어 생긴 얘기다.

함씨 집안 야사에 공양왕 최후 상세히 전해져

공양왕이 강원도 유배 길에 올랐을 때, 몰래 뒤따르던 이가 있었다. 바로 고려 우왕 13년(1387)에 과거에 급제하고 홍문박사와 예부상서를 지냈던 함부열이다. 함부열의 친형은 함부림(咸傅霖, 1360~1410)으로, 이성계를 도왔으며 조선 왕조 개국공신 3등으로 개성소윤에 임명된 인물이다. 형과 동생이 조선과 고려로 갈라선 것이다. 이 때문에 간성으로 온 함부열의 후손들은 양근 함씨라고 본향을 달리 쓰기에 이르렀다. 양근은 지금의 경기도 양평으로, 강릉 함씨의 시조인 함혁(咸赫)이 삼한시대에 양평에서 부족장인 함왕주악(咸王周鍔)으로 불린 인연으로 붙은 본향이다.

함부열은 간성왕을 따라와 간성에 살게 됐다. 간성왕이 머문 수타사는 지금은 폐사되고, 애초에 5층이었을 석탑 한 기만이 밭 가운데에 덩그렇게 남아 있다. 절터는 계곡 안쪽에 있는데, 그다지 넓어 보이지는 않는다. 함부열은 수타사의 아랫마을인 금수리에 터를 잡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금수리에는 그의 종손집을 포함해서 그의 후손들이 아직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함씨 집안 야사에는 간성왕의 최후가 좀더 상세하게 전해오고 있다. 1394년 3월에 함부열은 삼척으로 두 번째 유배되는 간성왕의 뒤를 따랐다. 내려간 지 한 달 만에 간성왕을 살해하러 중앙에서 관리가 내려왔다. 역사 기록에는 중추부사 정남진이 내려왔다는데, 함씨 집안에 전해오는 얘기로는 함부열의 형 형조의랑 함부림도 동행했다고 한다. 함부열은 마주친 형에게 간청하여 다른 왕족의 시신만 거두게 하고 간성왕을 간성으로 피신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정남진과 함부림은 도저히 조정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서 간성으로 자객을 보내 간성왕을 살해해버렸다. 그게 공양왕 삼척 사망일인 4월17일에서 8일이 더 지난, 4월25일의 일이라는 것이다.

살해된 간성왕은 금수리 수타사에서 가까운 고성산 기슭에 묻혔다고 한다. 매장을 주도한 사람은 함부열이다. 함부열은 유언으로 간성왕 밑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묘에 제사 지내기 전에 왕 무덤에 축문 없는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 행여나 간성왕 무덤이 알려지면 후손들이 다칠까 봐서였다.

   


공양왕이 간성에 2년 동안 머물렀을 때 거처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타사 터(왼쪽). 다섯 봉우리로 둘러싸인 왕곡마을 바깥으로는 송지호와 동해 바다가 있다.

함부열과 간성왕의 묘는 고성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데, 금강산에서 설악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산맥들이 묘역을 휘감아 돌고 있는 명당 터였다. 안산(案山·앞산) 너머 조산(朝山·멀리 호위하고 있는 산) 자락에 관모(官帽)처럼 생긴 관대봉이 물결치는 산맥 사이에 우뚝 솟아 있다.

함부열의 묘에는 근래에 세워진 ‘고려 홍문박사 죽계공 함부열 충의비’가 있다. 함부열의 묘 위쪽에는 비석도 상석도 없는 작은 묘가 있는데, 이곳에 공양왕이 묻혀 있다고 한다. 문헌에 전하는 바가 없고, 함씨 집안에 전해오던 야사집도 실전되어 누구도 입증할 수 없는 일이 됐지만, 함씨 집안 사람들은 이를 사실로 굳게 믿고 있고 지금까지도 축문 없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함부열의 후손들은 간성 지방에 터를 잡고 살게 되는데, 함부열의 손자인 함치근(함영근은 그의 다른 이름)이 현재 전통마을로 지정된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의 왕곡마을에 살고 있다. 왕곡마을 어귀의 안내판에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고려에 충성하는 강릉(양근) 함씨가 이곳에 들어와 동족 마을을 형성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왕곡마을에 있는 함희석의 효자비(위). 왕곡마을의 전통 가옥인 함경도식 겹집.

후손 중에 효자 열녀 많아

왕곡마을에서 산 하나를 넘고 내(川)를 하나 건너면 금수리 수타사가 나온다. 강원도 문화재 제78호로 지정된 왕곡마을 가옥에는 함부열의 21대손이자, 양근 함씨 오봉파의 종손인 함정균 씨가 살고 있다. 함정균 씨의 고조부인 함희석을 기리는 효자비가 마을 복판에 있고, 4대에 걸친 5명의 효자를 기리는 양근 함씨 효자각이 마을 동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이 효자각은 1820년에 세워졌다. 왕곡마을에 전해오는 ‘지정다지기 노래’의 “집을 지으면 명당이요, 아들을 낳으면 효자를 낳고 딸을 낳으면 열녀를 낳고’라는 가사에 걸맞은 기념물들이다.

함부열은 고성에 와서 낳은 아들인 함극충(咸克忠)-왕곡마을에 터를 잡은 함치근의 아버지-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고려를 향한 지극한 충성심을 새기며 살았고, 그 후손들도 입향조(入鄕祖)인 함부열의 뜻을 좇아 고향을 지키며 살았다.

역사는 유력한 문헌만으로 구성되는 것도 아니고, 그 문헌만이 진실한 것도 아니다. 집안 어른들의 얘기를 주섬주섬 담아놓은 족보 속에, 까맣게 잊혀져버린 역사적 진실이 담겨 있기도 한다. 그런 개연성을 가지고 역사를 돌아볼 때라야, 사문화되어버린 역사적 사실을 넘어 이 땅에 살았던 인간들의 욕망과 회한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충신 함부열에 얽힌 제3의 공양왕릉 얘기도 그런 관점에서 보아야 하리라

 

팔공산 전통마을 지킨 충신의 혼 낙향해 살다 고려 망하던 날 세상 떠나 …

‘한밤마을’은 개발 바람 비켜가 아직도 옛 모습 간직

제2 석굴암으로 불리는 군위삼존석굴.

부림 홍씨 집안에 전하는 귀한 보물이 한 점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친필이다. 1926년 문중이 입수해 세상에 알린 백원첩(白猿帖)이라는 필적(筆跡)이다. 왕건이 916년 궁예의 태봉국을 공격할 무렵에 유덕양(劉悳梁)에게 써준 이태백의 시 두 편 중 한 편인데, 정몽주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유덕양의 후손인 유희억(劉禧億)에게서 얻은 글이다. 정몽주는 팔공산 동화사로 놀러 간 1387년 8월15일, 동행한 동료와 후학들에게 유려하게 휘갈긴 이 글씨를 보여주었다.

이날 팔공산 회동에 참석한 이들은 당대에 쟁쟁한 문사 14명이었다. 이재현(李齋賢)의 손자 이보림(李寶林), 이색(李穡)의 아들 이종학(李種學),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두문동 72현으로 꼽히는 김자수(金自粹), 김약시(金若時), 이행(李行), 안성(安省), 도응(都膺), 조희직(曺希直), 홍노(洪魯), 윤상필(尹祥弼), 홍진유(洪進裕), 고병원(高炳元)이 그들이다. 이들은 이날 태조 왕건의 필적을 보면서 한 편의 연시를 남겼다. 그런데 아쉽게 연시는 7명의 글만 남아 있고, 정몽주를 포함한 7명의 시는 전해오지 않는다.

정몽주와 문학적으로 깊은 인연 맺어

홍씨 문중에서 이 글을 소중하게 여기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의 선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부림 홍씨인 홍노(1366~ 92)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홍노는 조선이 개국한 날이자, 고려가 망하던 날인 1392년 음력 7월17일에 불귀의 객이 됐다. 이날에 맞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아니다.

삼존석굴이 있는 암벽을 향해 서 있는 홍노의 비석.

그의 행장(行狀)에 전하는 그날의 전경을 들여다보면, 7월 초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홍노는 7월17일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더니 “내 어젯밤에 태조 대왕(왕건)을 꿈에서 뵈었는데 오늘 돌아가리라”고 말했다. 그는 의관을 정제하고 사당에 배알한 뒤 아버지 진사공께 문안을 드렸다. 이어 마당에 자리를 펴고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한 뒤 “신은 나라와 함께 죽사오니 무슨 말을 하겠나이까”라고 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 눕더니 정오가 안 된 사시(巳時·오전 9~11시)에 운명하고 말았다. 개성과 천 리나 떨어진 팔공산 자락에 살던 홍노가 특별한 예지력을 발휘하듯, 고려 왕조와 한날한시에 운명을 다한 것이다.

홍노가 운명한 이후로, 부림 홍씨 집안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17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마치 스러진 고려를 기리는 것처럼. 그리고 홍노가 살던 마을은 그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팔공산 북쪽 제2 석굴암이라고 불리는 군위삼존석굴이 있는 마을,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와 남산리가 바로 그 동네다.

군위삼존석굴은 경주 석굴암보다 100년 정도 앞서 조성되었는데, 불교가 융성했던 시절에는 이 근처에 8만9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억불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는 초막 하나 정도로 줄어들었고, 대신에 양산서원이 이 일대를 차지해서 마을 이름도 지금까지 ‘서원’이 되었다.

   


대율리에서 가장 오래된 집인 남천 고택(왼쪽). 대율리의 운치 있는 돌담길.

하지만 요즘은 불교가 번창하고 유학이 쇠퇴하면서, 삼존석굴 밑에 석굴암이라고 부르는 큰 사찰이 들어서 양산서당을 압도하는 상황이 됐다. 양산서당 자리에는 원래 홍노를 배향한 양산서원이 있었는데, 대원군 때 훼철된 뒤로 훗날 서당이란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높다란 사찰 연수원 옆에는 홍노를 기리는 비석이 있다. 삼존석굴을 바라보고 있는 비석에는 ‘首陽白日 栗里淸風(수양백일 율리청풍)’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백이숙제가 숨어들었던 수양산의 해처럼 밝고, 도연명이 칩거하던 율리의 바람처럼 맑은 홍노의 기상을 기리는 글귀다. 양산서원이라는 이름도 수양산에서 따온 것이다.

홍노는 포은 정몽주의 문인이었다. 7세에 효경(孝敬)에 통했고, 22세에 생원이 되었으며, 25세인 1390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포은의 추천으로 한림원에 들어갔고, 이듬해 문하사인(門下舍人·종4품)이 되어 짧은 시간에 상당히 높은 관직에 올랐다. 하지만 1392년에 이르러 국운이 기울자,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사직하고 곧바로 낙향해버렸다.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포은 선생은 뵙고 왔냐고 묻자 그는 “그분의 마음을 제가 아는데 구태여 만나본들 무엇 하겠습니까. 만났으면 반드시 못 가게 붙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집집마다 성벽처럼 두꺼운 돌담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홍노는 “이제 사람도 없고, 나라도 망했다”며 더욱 체념에 잠겼고 그 때문에 병도 깊어졌다. 홍노와 동년배로 조선 왕조에서 좌의정까지 지냈던 허조(許稠)는 그를 평하기를 “나와 같이 벼슬한 많은 사람들 중에서 홍노처럼 도량이 크고 온후한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홍노는 벼슬살이 기간이 짧았고, 27세에 요절하는 바람에 그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불사이군의 충신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두문동 72현에 꼽히지 않았다. 1932년 전남 장성에 고려 충신각 경현사(景賢祠)을 세울 때 충신 130명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비로소 포함되었다. 부림 홍씨 종친회장인 홍연수(洪淵守) 씨는 “충신이라는 것이 자로 잴 수 있겠습니까, 저울로 달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로 선조의 충절이 누구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했다.

홍노의 집안과 홍노가 살던 동네에는 보물이 많다. 태조 왕건의 친필도 지니고 있고, 국보 제109호 군위삼존석굴, 보물 제988호 석불입상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값진 보물이 있다. 바로 홍노가 살고, 그의 후손이 대대로 지켜온 한밤마을, 홍노가 이름 붙였다는 대율리(大栗里)다. 집집마다 돌담을 쌓았는데, 돌담이 마치 성벽처럼 두껍다. 제주의 성읍마을이나 아산 외암리의 전통마을보다 더 굳건하고 짱짱한 돌담들이다.

   

마을 안에는 1632년에 건립된 늘씬한 대청이 있는데, 이는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청 옆에는 두 그루의 잣나무가 심어진 남천고택 쌍백당(雙柏堂)이 있다. 홍노의 위패를 모신 부림 홍씨 종택도 있다. 마을 동구 솔숲에는 홍노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한 홍천뢰(洪天賚) 장군의 비석이 있다. 또 마을 솟대인 진동단에서는 동제를 지내고, 산신당에서는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국가의 운명과 함께한 홍노의 맑은 삶이 있고, 그 삶을 기리는 후손들이 있기에 지킬 수 있었던 소중한 자산들이다. 그런데 불안한 소식이 들린다. 팔공산에 터널을 뚫어 대율리 마을로 큰길을 내기로 했단다. 예산만 확보되면 터널을 뚫겠다는데, 큰길이 나면 대율리의 평화도 깨지고, 돌담도 흩어질 테니 걱정이다. 대율리가 개발 바람에 휩쓸리더라도 부디 홍노의 혼이 머문 전통마을의 자존심은 굳게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

 

600년 한결같은 후대의 칭송 벼슬 버리고 낙향해 자나 깨나 ‘고려 회복’ 생각 …

후손들 ‘대’와 ‘정자’ 세우고 뜻 기려

영주시 구성산 암벽에 새겨진 권정을 기리는 각자(刻字)들.

“조상은 후손을 낳고, 후손은 조상을 만든다.”

고려 말 불사이군 충신들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면서 실감하는 말이다.

경북 영주시에 갔을 때다. 영주시 한복판 구성공원이 된 구성산 자락에, 조선 제일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집터가 있다. 판서(判書)가 3명이나 났다 하여 삼판서 구택터로 알려진 영주2동 431번지다. 예전에 늘씬한 한옥이 자리했다는데 지금은 양옥이 들어서 옛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이성계와 조선의 지분을 반분해도 좋을 혁명가지만, 그가 살았던 옛터에 팻말 하나 없으니 쓸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지금에 이르러 보자면, 구성산의 주인은 정도전이 아니라 그와 동시대에 살면서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권정(權定, 1353~1411)이다. 삼판서 구택터에서 구성산 굽이를 돌아들면 권정을 기리는 봉송대(奉松臺)가 있다. 그 벼랑 밑에 권정의 신도비가 있는데, 신도비 안쪽에 권정의 정신을 기린 ‘不事二君(불사이군)’의 각자(刻字)가 있다. 그곳에서 구성산을 오르면 권정을 배향했던 구호서원(鷗湖書院) 터와, 역시 그를 기리는 반구정(伴鷗亭)이 나온다. 삼판서 구택터에서 반구정까지 400m도 안 되니 아주 가까운 거리다.

이쯤 되면 정도전을 압도하는 권정이 누굴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권정은 안동 사람이다. 그가 살던 동네가 안동시 예안면 기사리(棄仕里)다. 버릴 기(棄)에 벼슬 사(仕)자를 써서 ‘벼슬을 버린 동네’인데, 권정이 벼슬을 버리고 살았대서 붙여진 600년 된 이름이다.

호 ‘사복재’는 고려를 돌이켜 생각한다는 뜻

권정은 고려 개국공신으로 안동의 태사묘에 배향된 안동 권씨 시조 권행(權幸)의 14세손이다. 그는 지금은 안동댐에 잠긴 안동시 예안면 북계촌에서 태어났다. 야은 길재(吉再)와 동갑인데, 문과 급제도 우왕 12년(1386)에 길재와 함께 했다. 충청도 괴산의 지군사(知郡事)를 역임하고, 내직에 들어 좌사간(左司諫, 중서문하성의 정육품직)을 지냈다. 임금께 올린 보고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외직인 김해부사로 옮겨 앉게 됐다. 김해부사로 있을 때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땅인 안동부 임하현 옥산동 도목촌 북쪽의 지실어촌(只失於村)에 은거했다. 태조 이성계가 승지 벼슬을 내려 그를 불렀고, 태종 이방원이 대사간과 대사헌을 내려 그를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호를 사복재(思復齋)라 했는데 이는 고려를 돌이켜 생각한다는 뜻이고, 집 앞에 정자를 지어 반구정이라 했는데 이는 옛날로 돌아간다는 반구(返舊)를 차음한 것이다. 또한 대를 지어 봉송대라 했는데 이는 송도(개성)를 받든다는 봉송(奉松)을 차음한 것이다. 자신의 호부터 머문 공간까지 죄다 고려 왕조를 받들고 회복하려는 의지로 가득 채운 것이다. 그가 죽은 뒤 촌로들이 마을 이름을 ‘지실어촌’에서 ‘기사리’로 바꾼 것도 자연스런 호응으로 여겨진다.

그의 묘는 기사리에서 멀지 않은 도목촌 옥산 자락에 있다. 그는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오래도록 그의 행적은 물론이고 묘조차 잊혀졌다. 후손들은 그가 죽은 지 194년이 지난 뒤인 1605년에야 비문(碑文)을 찾고, 1785년에 깨진 비석을 찾아 비로소 그의 묘와 행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권정의 사위인 우홍균(禹洪鈞)의 ‘유사(遺事)’라는 글도 발견됐다. 우씨 집안에 보관되어온 글인데, 우홍균은 장인 권정에 대해 “고려조에서 직간(直諫)하던 고결한 절의의 선비였으며, 명리(明理)의 학문에 뛰어났다”고 기록했다.

   

구성산 거북머리 위에 세워진 봉송대. 봉송대 뒤편으로 구성산과 기와 건물 반구정이 보인다. 안동시 예안면 기사리에 있는 권정의 유허비.(왼쪽부터)

현재 기사리에는 권정의 유허비가 있다.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500m가량 마을 위쪽으로 옮겨진 상태다. 유허비 뒤쪽의 바위에는 ‘忠節(충절)’ ‘奉松(봉송)’ ‘返舊(반구)’ ‘淸風高節(청풍고절)’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제 더는 조상의 유적을 잃어버리지 않고, 조상의 정신을 잊지 않겠다는 후손의 다짐처럼 보인다.

기사리는 예안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5리쯤 떨어져 있는데, 예안면 소재지가 내려다보이는 서쪽 산자락에는 역동(易東) 우탁(禹卓)의 묘소가 있다. 고려 충선왕 때 왕이 옳지 않은 행동을 하자 도끼를 들고 대궐로 들어가 상소했던 인물이다. 상소를 들어주든지, 들어줄 수 없다면 도끼로 자신의 목을 치라는 뜻이었다. 우탁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던 곳이 바로 안동 예안현(지금은 수몰된 안동시 와룡면 선양동)이다. 권정이 태어난 북계촌의 다른 이름이 역동 선생의 호를 빌려 쓴 ‘역동(易洞)’이었고, 권정의 사위인 우홍균이 우탁의 고손자였던 점으로 보아, 권정이 우탁의 지조와 결기를 염두에 두고 살았으리라 추정해볼 수 있다.

권정 살던 기사리에 ‘유허비’ 남아

그런데 권정이 세웠다는 반구정과 봉송대가 안동 예안면에서 자취를 감추고 영주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어떤 경위일까? 권정의 네 아들은 출사(出仕)는 했지만, 순탄하게 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큰아들 조(照)는 문과에 급제해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냈지만 말년의 행적을 알 수 없고, 후손조차 끊어졌다. 넷째 아들 시(時)도 후손이 끊겨 자세한 행적을 알 수 없다. 셋째 아들 서(曙)는 울산부사를 지냈고 그 후손들이 성주에 많이 모여 산다. 둘째 아들 요(曜)는 보령현감을 지냈는데 어떤 연유인지 관직을 버리고 처가 동네인 영주에 들어가 살았다. 영주 구성산 주변에 모여 살며 권정의 공간을 마련한 이들이 바로 권요(權曜)의 후손들이다.

구성산의 반구정은 영주에 들어간 권정의 후손들이 번창해 ‘이 땅은 선생이 사시던 곳은 아니지만 기맥(氣)이 모인 곳이니 혼령이 오르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여기면서 1780년에 마련한 것이다. 거북처럼 생긴 구성산의 거북머리 위에 봉송대가 세워진 것은 훨씬 뒤인 1948년의 일이다.

1958년 영주에 큰 홍수가 나기 전까지 봉송대와 반구정 밑은 죽계천이 휘감아돌아 호수를 이루고, 물새들이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영주의 옛 사진을 보니 강가에 우뚝 선 봉송대의 자태가 자못 멋들어졌다. 하지만 홍수가 난 뒤로 물길을 직선으로 뽑아낸 통에 호수 자리에 철길이 놓이고 민가가 들어서 옛 정취는 찾을 길이 없게 됐다.

풍광은 달라졌지만 권정을 사모하고 기리는 후손들의 정신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두터워지는 것 같다. 구성산 바위에 새겨진 ‘不事二君’의 각자가 어제 새긴 듯 선명하다. 권정은 한때 후손들조차 그 행적을 잊을 정도였으니 두문동 72현을 헤아릴 때에 거론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다시 두문동 72현을 꼽는다면 기사리로 명명된 마을에서 사복재로 호를 짓고, 반구정과 봉송대를 세워 고려를 회복하려 했던 권정의 이름을 뺄 수는 없을 것이다.

 

죽음으로 지켜낸 ‘가문의 절개’ 형조판서 벼슬 받으러 가던 중 태재서 자결 …

“비석 세우지 말라” 대대손손 강직 이어받아

묘비를 세우지 말라 하여 뉘어놓은 신도비. 원래는 땅에 묻어두었는데 근자에 땅 위로 올리고, 새로 비석을 만들어 세워놓았다.

두문동 72현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는 죽음에 이르러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않고, 비석을 눕혀두었다. 김자수 묘는 경기도 분당 서현역에서 광주시 오포읍으로 넘어가는 태재마루 근처 오포읍 신현리 상태마을에 있다.

고려 향한 충절 목숨 바쳐 실천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은 태종 13년(1413) 11월14일이다. 태종으로부터 형조판서로 부임하라는 전갈을 받고, 고향 안동에서 한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아들 근(根)이 초상 치를 준비를 갖추고 뒤를 따랐다. 김자수는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독약을 준비한 상태였다. 벼슬을 받으면 고려를 향한 충절을 저버리는 일이 되고, 벼슬을 받지 않으면 집안이 풍비박산 날 진퇴양난의 처지였다. 그가 추령(秋嶺, 현재의 태재로 추정)에 이르렀을 때 “나는 지금 죽을 것이다. 오직 신하의 절개를 다할 뿐이다. 내가 죽으면 바로 이곳에 묻고, 비석을 세우지 말라”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平生忠孝意 평생토록 지킨 충효
今日有誰知 오늘날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一死吾休恨 한 번의 죽음 무엇을 한하랴만은
九原應有知 하늘은 마땅히 알아줌이 있으리라.

김자수가 남긴 절명사(絶命詞)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태재에서 맞이한 것은 눈앞으로 한양 땅이 펼쳐지고, 등 뒤로 포은 정몽주(鄭夢周) 묘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 물러설 수 없는 선택의 시간이 온 것이다. 한양이냐, 정몽주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정몽주의 길을 택한다. 태재에서나, 그가 묻힌 곳에서나 직선거리로 4km 떨어진 곳에 정몽주의 묘가 있다.

有忠有孝難 충이 있으면서 효가 있기는 어렵고
有孝有忠難 효가 있으면서 충이 있기도 어려운데
二者旣云得 이 두 가지를 이미 다 얻었건만
況又殺身難 하물며 살신의 어려움까지야.

그의 죽음을 두고 황희(黃喜)가 지은 만사(輓詞)다. 그는 충신이면서도 지극한 효자였다. ‘삼강행실록’에 효행이 전할 정도로 효자의 표본이었다.

김자수는 고려 충정왕 3년(1351)에 태어났다. 10세 때 아버지를 잃었고, 20세 되던 공민왕 19년(1370) 생원시에 합격, 개성 성균관에 입학한다. 당시 성균관 책임자는 대사성 이색(李穡)이었고, 선생으로 박상충(朴尙衷)·정몽주(鄭夢周)·김구용(金九容)·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이 있었다. 김자수는 성균관에 머문 지 1년이 안 되어, 편찮은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고향 안동으로 내려간다. 한겨울 얼음장 밑에서 잉어를 잡고 눈 덮인 대밭에서 죽순을 캐어 드렸지만 어머니의 수명을 연장시키지는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에 따라 3년 시묘살이를 한다. 그때의 정경을 문익점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에 있는 김자수의 묘. 산을 넘으면 정몽주의 묘가 있다(왼쪽 사진).

조선 후기 김자수 어머니 묘 앞에 세운 정자, 추원재.

始見安東居堊子 처음에 안동에서 악차(堊次·무덤 옆의 뜸집)에 있는 사람 보았는데
剖氷求鯉自恢恢 얼음 깨고 잉어 구하여 무척 기뻐하더구먼.
筍生雪裏誠心厚 눈 속에서 죽순이 난 것은 참으로 효성이 지극함인데
雉下苦前孝烈開 거적자리 앞의 꿩이 내린 것은 효열(孝烈)의 열림이지.

훗날 김자수의 효행과 시묘살이한 묘소 주변을 ‘시묘동(侍墓洞)’이라 부르고, 그가 살던 안동 남문 밖에 ‘孝子高麗道觀察使金自粹之里(효자고려도관찰사김자수지리)’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후 비석은 어머니 묘소가 있던 시묘골인 안동 월곡면 노산리로 옮겨졌다가, 월곡면이 안동댐으로 수몰되자 어머니 묘소와 정자 추원재(追遠齋)와 함께 1973년 안동시 안기동 정자골로 이전한다.

명필 추사 김정희가 15대孫

안기동으로 이전했을 때 앞에 하천이 흐르고 논밭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천이 복개되고 아파트가 들어서 주택가가 되었다. 김자수의 동네라고 칭해준 효자비 비각 안에는 순조 18년(1818)에 김노경(金魯敬)이 짓고 그의 아들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직접 쓴 글을 새긴 현판이 있었는데, 2005년에 누군가가 훔쳐갔다. 김정희는 김자수의 15대손으로 아버지와 선조의 묘를 찾은 것이었다.

안동댐이 생기면서 안동시 안기동으로 옮겨진 김자수의 효자비와 비각.

1374년 김자수는 문과에 장원급제, 사간원 정언(正言) 벼슬을 하다가 여수 돌산도로 귀양 가기도 했지만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형조판서를 지내다 고려가 망하자 안동으로 낙향한다. 그에게 아들 하나와 손자 넷이 있었다. 아들 근(根)은 평양소윤을 끝으로 아버지를 따라 벼슬을 버린 듯하다. 손자 넷은 조선 왕조에 합류, 벼슬길에 올랐는데 넷째 김영유(金永濡)가 대사헌과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김자수 고손자인 김세필(金世弼)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변론하다 유배되었고, 그의 아들 김저(金儲)는 을사사화 때 사사(賜死)되었다. 김자수 무덤에 차마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비석을 눕혀서 묻어둔 후손은 8대손인 김홍욱(金弘郁)이다. 김홍욱은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때 소현세자 강빈(姜嬪)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달라는 응지상소(應旨上訴·임금의 요청에 응해 올린 상소)를 올렸다가 효종이 직접 지휘한 심문을 받던 중 매 맞아 죽은 인물이다. 김홍욱은 죽음에 이르러 “언론을 가지고 살인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고 말할 정도로 대찼다. 김홍욱 자손 중 정승이 8명, 왕비가 1명이 나왔는데, 김정희도 그 자손이다. 추사 또한 지조가 강하고 타협하지 않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상은 주로 경주 김씨 족보와 신도비에 기록된 행적을 중심으로 기술한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동국여지승람’에는 그가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그가 조선에 들어와 벼슬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는 때로 ‘조선왕조실록’의 진위 논란까지로 확대되는데, 대체로 1665년 영동의 초강서원에 김자수가 배향된 이후에는 가전(家傳)되어 오는 이야기가 우위를 확보한다.

 

고려 향한 일편단심 눈물과 그리움 한평생 무등산 자락에 정착해 정자 짓고 생활 …

조복 입고 통곡하며 송도 향해 절 올려

광주 무등산 자락에서 가장 유서 깊은 동네로 성산계곡을 꼽을 수 있다. 조선시대 정원의 한 전형을 이루는 양산보(梁山甫)의 소쇄원과 임억령(林億齡)의 식영정이 있고 창평, 고읍에 이르면 오이정(吳以井)의 명옥헌, 정철(鄭澈)의 송강정과 송순(宋純)의 면앙정이 있어서 정자 문화가 꽃을 피웠던 곳이다.

이 정자 문화의 원조가 계곡 가장 위쪽에 자리잡은 독수정(獨守亭)이다. 무등산뿐 아니라, 전라남도에서 가장 오래된 산정(山亭)이다. 정자의 주인은 고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전신민(全新民)이다. 그는 무등산과 특별한 연고가 없었다. 그저 개성으로부터 멀리 떠나와 머문 곳이 무등산 자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향도 아니고, 그의 부모가 살던 땅도 아니고, 처가 동네도 아니었다. 오가다가 눈여겨봐둔 땅도 아닌 듯하다. 지금도 예전의 풍광을 지니고 있을 만큼 산이 첩첩하고 옹색하다. 소쇄원이나 식영정이나 개울가에서 들판을 내려다보며 넉넉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공간이라면, 독수정은 첩첩산중에 자리하고 있다. 전신민은 이곳에 숨어살며, 무등산의 고려 때 이름인 서석산(瑞石山)에서 글자를 취하여 호를 서은(瑞隱)이라고 했다.

그가 머문 동네는 소쇄원에서 2km 떨어진 담양군 남면 연천리의 산음동이다. 개울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전신민의 신도비가 있고, 그 옆에는 5대(代)에 걸쳐 아홉 효자가 난 전신민의 후손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비석 앞쪽으로 활처럼 휜 길을 따라 오르면 키가 훤칠한 고목들이 산자락을 가릴 정도로 가득하다.

공민왕 때 병부상서 지낸 무인

이곳이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된 독수정 원림(園林)이다. 원림에는 오래된 회화나무 3그루와 자미나무·매실나무가 있고,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다.

원림 안에 또 하나의 비석이 있는데, 이는 전신민의 아들 전오돈(全五惇)을 기리는 기단비(基壇碑)다. 전오돈의 행적을 후손들이 오래도록 잊고 지내다가, 1470년에 작성된 전씨세보(全氏世譜)를 발견하고 그의 행적을 새롭게 확인하면서 세운 비석이다.

전신민은 무인(武人)이었고, 그의 아들 전오돈 역시 무인이었다. 전신민은 공민왕 때 북도안무사 겸 병마원수를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까지 지냈다. 전오돈은 정오품 벼슬의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는데, 왜적을 무찌른 공로로 우왕(禑王)으로부터 금 50냥을 하사받은 적이 있었다. 그가 곧바로 금 50냥을 사양하자, 도당(都堂)에서 말하기를 임금께서 내린 것은 사양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오돈은 “그러면 이미 내 물건이 되었으니, 청컨대 도당에 올립니다”며 금 50냥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일을 두고 많은 이들이 칭송하였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전신민은 독수정에 올라 통곡하며 절을 올렸다. 이태백의 시에서 이름을 따온 독수정(왼쪽). ‘서은실기’에 실려 있는 독수정 14경(오른쪽 위). 전신민은 무등산 산음동에 은거하다가 그곳에 묻혔다.

전신민은 아들 오돈과 함께 무등산에 들어왔다. 처음엔 제계(齊溪)라는 동네에 살다가, 산 하나를 넘어 산음동에 터를 잡았다. 전신민은 재계정(宰溪亭)과 가정(稼亭)을 짓고, 조복(朝服)을 입은 뒤 그 정자에 올라 송도를 향해 통곡하며 절을 했다고 한다. 전신민이 나이 들어 두 정자를 오가는 것이 불편해지자, 전오돈은 아버지를 위해 집 앞에 독수정을 지어드렸다. 독수정은 이태백의 시 ‘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백이숙제는 누구인가, 서산(수양산)을 외롭게 지키다 굶어죽은 사람이라네]에서 따온 구절이다.

독수정은 북향을 하고 있는데, 이는 송도(개경)를 염두에 둔 것이다. 독수정에서 100m도 안 떨어진 산 안쪽에 전신민이 살고 그 후손들이 대대로 살던 집이 있다. 집은 개축한 일자형 건물이고, 그 옆에 재실을 겸한 연천리 산음동 새마을회관이 새로 들어섰다. 전신민의 묘소는 그 집 뒷산에 자리잡고 있다. 활 한 바탕 거리인데, 누에등처럼 흘러내린 산자락에 자리잡은 묘에는 ‘瑞隱全先生之墓’라고 적힌 비석이 서 있다.

스스로 ‘미사둔신’이라 칭해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하고 남은 여자를 미망인(未亡人)이라고 부르듯, 전신민은 스스로를 ‘미사둔신(未死遯臣·죽지 못하고 달아난 신하)’이라 칭했다. 독수정을 지을 무렵에 지은 그의 시가, 독수정을 지키고 있다.

風塵漠漠我思長 자욱이 이는 티끌 시름도 깊어라
何處雲林寄老蒼 어느 구름 숲에 늙은 몸을 숨길-고
千里江湖雙雪    머나먼 천 리 길에 흰 귀밑머리 나부끼고
百年天地一悲凉 한평생 천지간에 슬픔 가득 서늘해라
王孫芳草傷春恨 임은 이미 가셨어도 한 많은 봄풀 돋고
帝子花枝月光    꽃가지 두견새는 달빛에 울음 우네
卽此靑山可埋骨 이 산골 푸름 두르고 백골로 묻힐지라도
誓將獨守結爲堂 두 나라 아니 섬기리 홀로 지킬 집을 짓네

독수정 건물은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후손들이 개축한 탓에 문화재로는 지정되지 못했다. 하지만 지역민들의 아쉬움이 컸는지, 독수정을 둘러싼 숲을 지방 기념물로 지정해 독수정 공간을 보호하고 있다. 독수정 마루에 앉으니 쓸쓸하고 적막하다. 한낮에도 인적이 드물어, 그 옛날처럼 서은공이 찾아와 한바탕 곡을 하고 갈 것만 같다.

 

전신민의 후예들
전신민의 후손은 300명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무등산 산음동에 들어온 뒤 전씨 집안은 간신히 이어져 내려왔다. 무인 집안이라 아무래도 사람을 여럿 해쳤을 테니 그 때문에 손이 귀한 듯하다고 한 후손은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산음동에 살았던 전규환 씨는 조선 명의로 소문나 전국각지에서 찾아오는 이가 많았다. 현재 문중 일은 전기종 씨가 맡고 있다.

 

태조가 내린 벼슬 다섯 차례 거절 판서·좌의정으로 유혹해도 ‘불사이군’ 불변 …

후손들이 뜻 기리는 전시관 건립 추진

고려 벽화가 출토된 박익의 묘.

송은(松隱) 박익(朴翊, 1332~1398)을 기리는 사당으로 경남 청도의 용강서원, 밀양 덕남사, 산청 신계서원, 거제도 송령사가 있다. 후손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에 그의 사당이 있는데, 독특한 것은 그 사당에 모두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박익의 후손인 박대성 화백이 그린 초상화로 통일됐지만, 그 이전에는 비슷하지만 제각기 다른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사당엔 위패만 모셔져 있기 쉬운데 박익의 경우처럼 초상화가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묘사한 화상시(畵像詩)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화상시는 박익과 동시대에 살았던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그리고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초상화를 보고 정몽주가 먼저 운을 뗐다. “긴 수염 십 척 장신 잘도 그렸네(畵出長髥十尺身)/ 볼수록 두 얼굴이 참으로 똑같네(看來尤得兩容眞)/ 세상 이치가 자취 없다고 말하지 마소(寞言公道無形跡)/ 죽어도 죽지 않은 사람 되겠네(死後猶存不死人).” 정몽주는 박익과 박익의 초상화를 나란히 보고서 이 시를 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자리에 길재와 변계량도 함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정몽주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시를 지었다. “봉황의 눈, 범의 눈썹, 십 척 장신에(鳳目虎眉十尺身)/ 담홍 반백의 두상이 참으로 똑같네(淡紅半白兩相眞)/ 그림으로 선생 얼굴 살펴보니(畵圖省識先生面)/ 그림 속에도 죽지 않을 정신 그려져 있네(不死精神影裏人).” 이렇게 읊은 길재는 박익보다 21살이 어려서 박익을 선생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밀양 한 동네 출신으로, 아들의 친구이기도 했던 변계량은 “풍후한 얼굴 덕스러운 몸매(豊厚形容德有身)/ 아무리 보아도 하늘이 내린 분이네(看看優得出天眞)/ 눈 덮은 긴 눈썹, 무릎에 드리운 수염(眉長過目髥垂膝)/ 그림과 사람 마주해도 분별하기 어렵겠네(兩對難分影外人)”라고 묘사했다.

정몽주와 학문 교류, 이성계와 전장 누벼

초상화를 그리고, 그 초상화를 보고 시를 짓는 흥미로운 풍속도가 고려 말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 정몽주와 길재가 보았던 박익의 초상화는 언제 소실됐는지 알 수 없다. 훗날 박익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이 세워질 때마다 이 화상시를 근거로 새로운 초상화가 그려지고, 영정 봉안문(奉安文)까지 마련됐다.

< Tips> : 밀성은 밀양의 옛 이름이다. 밀성 박씨와 밀양 박씨는 같은 이름이지만, 송은공파는 시조 밀성대군의 이름을 좇아 본향을 밀성으로 사용하고 있다.

   

송계마을에서 가까운 후사포리에 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 박익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심었고, 이 은행나무에서 한 자씩 따서 밀성 박씨 은산파와 행산파가 생겼다.

박익은 1332년에 태어나 1352년(공민왕 2) 이색(李穡), 박상충(朴尙衷)과 함께 과거에 급제했다. 나이로는 이색보다 네 살 어리고, 이성계(李成桂)보다 세 살, 정몽주보다 다섯 살이 많았다. 박익은 문인이었지만, 이성계와 함께 전장에 나가 남으로 왜구를, 북으로 홍건적과 여진족을 물리치기도 했다. 벼슬은 예문춘추관과 직제학을 지냈으며 고려가 망하던 해에는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박익이 예조판서를 지내기 전, 고향인 밀양 땅 송계마을(현재의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송악마을)에 은둔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정몽주가 이곳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정몽주에게 건넨 시가 있다. “송계마을 숨은 선비 집을 찾아오셨소(來訪松溪隱士家)/ 석양에 문은 닫혀 있고 꽃이 지는데(夕陽門掩落花多)/ 술통 앞에 두고 나의 깊은 마음을 묻는가(樽前問我幽閑意)/ 주렴 밖에 반쯤 보이는 저 청산이 내 마음이라오(簾外靑山半面斜).”

정몽주가 타살되고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열자, 박익은 또다시 송계마을로 내려오고 만다. 뒷산이 송악(松岳)이고, 마을이 송계(松溪)인 것은 송도(松都, 開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이성계는 전장에 함께 나섰던 박익에게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연달아 내리며 조정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하지만 박익은 눈멀고 귀 멀었다는 핑계를 대며 태조가 내린 교지와 예관을 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마지막에는 좌의정을 내렸으나 역시 나서지 않았다. 다섯 번 불렀어도 한 번도 나서질 않아 ‘오징불기(五徵不起)’라고 하는데, 그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고려를 향한 충절을 지켰다.

박익의 묘 남쪽 벽에 그려진 벽화.

그는 네 아들에게 남긴 유언에서 “나는 왕씨의 혼령으로 돌아가거니와 너희들은 이씨의 세상에 있다. 이미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었으니 온 힘을 다해 충성을 하라. 선천과 후천으로 부자간에도 시대가 달라졌다”며 조선에 충성할 것을 당부했다. 박익의 후손들은 이 유언 때문에 조선시대에 집안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박익은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화악산 자락에 묻혔다. 묏자리는 경남의 최고 명당으로 꼽힐 만큼 활달하다. 묘는 사각형으로 고려 양식을 띠고 있고, 돌단이 둘러져 있어 웅장하다. 이 때문에 두 차례나 도굴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2000년 9월 두 번째 도굴꾼이 지나간 뒤, 동아대 박물관 주관으로 무덤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이때 고분벽화와 지석, 혼유석 등이 출토돼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밀성 박씨 송은공파 박익의 후예들
박태준(전 국무총리·포스코 명예회장), 박숙현(전 국회의원), 박재규(전 통일부 장관·경남대 총장), 박판제(초대 환경부 장관), 박철언(전 국회의원), 박종구(삼구그룹 회장·고려대 교우회장), 박번(동양강철 회장), 박치현(흥아상사 명예회장), 박영석(전 국사편찬위원장), 박영관(세종병원 원장·이사장), 박성상(전 한국은행 총재), 박대성(화가), 박중훈(영화배우), 박한제(서울대 문리대 교수), 박영진(경남지방경찰청장), 박판현(신라오릉보존회·박씨대종친회 사무총장), 박희학(송은공파 총무), 박종탁(박씨문화원 원장)

   

소산 박대성 화백이 그린 박익의 초상화.

박익 무덤에서 고분벽화 등 출토

고려 말 고분벽화는 존재 자체가 아주 드물다. 천장과 북쪽 그림은 지워지고, 동·서·남쪽 그림은 훼손된 상태지만 빼어난 솜씨를 확인하기에는 충분한 정도로 남아 있었다. 매화와 대나무가 그려진 동쪽 벽에는 머리를 땋아 올린 세 명의 여자가 손에 찻상과 그릇을 든 채 걷고 있고, 역시 나무가 그려진 서쪽 벽에도 네 명의 남녀와 술병을 들고 있는 한 여자의 그림이 있다. 남쪽 벽에는 슬픈 눈망울을 한 말의 고삐를 잡고 있는 두 남자가 있다. 고려시대 생활상을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풍속화인 셈이다. 무덤은 다시 덮여 긴 잠에 들어갔고, 벽화는 2005년 2월에 국가문화재 사적 제459호로 지정됐다.

밀성 박씨 송은공파 문중에서는 미려한 고분벽화가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120자의 입지잠(立志箴)과 168자의 지신잠(持身箴)을 저술한 송은 박익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벽화묘 전시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600년이 지났건만, 두문동 72현으로 꼽히는 송은 박익의 삶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세 아들 ·큰손자 잃고 멸문당할 뻔 유배된 뒤 모진 핍박 …

이방원과의 인연으로 2차 왕자의 난 후 가문 재기

우탁의 조부인 우중대의 묘. 등잔형 명당이라 후손들이 이곳에서 멀리 나가 살아야 잘 산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바로 옆에 단양 우씨 시조부터 5세조까지 모신 단이 있다.

파란만장(波瀾萬丈)이란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일까? 양호당(養浩堂) 우현보(禹玄寶, 1333~1400)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살아서 얼마나 환호하고, 얼마나 절망하고, 얼마나 비통하고,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가 세상을 뜬 지 6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가 느꼈을 영욕(榮辱)은 아직 삭혀지지 않았을 것만 같다.

고려 말 최고의 명문가로 한산 이씨와 단양 우씨를 꼽을 수 있다. 한산 이씨는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두 부자(父子)가 중국에서 연달아 급제하면서 문명(文名)을 떨친 집안이다. 단양 우씨는 우탁(禹倬)이 두각을 보였고, 우현보에 이르러 아들 5형제가 모두 급제하면서 고려 말의 막강한 문벌이 됐다.

두문동 72현을 꼽을 때, 구성 인원이 다른 두 개의 명단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정몽주를, 다른 하나는 우현보를 앞장세운다. 우현보는 이색,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 삼인(三仁)으로 꼽힌다. 이색, 정몽주, 길재로 구성된 고려 말 삼은(三隱)이 후대의 영향력을 반영한 명단이라면, 삼인은 당대의 세력 구도와 영향력을 반영한 명단이다.

선죽교에서 살해된 정몽주의 시신 거둬

우현보의 집안에서 크게 이름을 얻은 인물은 시조 우현(禹玄)의 8세손인 역동(易東) 우탁이다. 그는 도끼를 들고 임금에게 상소를 할 만큼 결기 있는 선비였고, 작가가 분명한 우리말 노래 형식을 갖춘 최초의 시조 ‘탄로가’를 지은 시인이었다. 또한 역학(易學)에도 뛰어나 ‘역동(易東)’이라 불린 성리학자였으며, 훗날 퇴계 이황이 안동에 역동서원을 세워 추앙했을 정도로 후대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우탁에게 늦도록 아들이 없어 들인 양자가 우길생(禹吉生)이다. 그는 나라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숭록대부(三重大匡崇祿大夫)에 올랐고 적성군에 봉해졌는데, 특히 정몽주가 일찍이 스승으로 모셨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 우길생의 아들이 우현보다. 우현보가 10세 때에 우탁이 세상을 떠났으니, 우현보는 할아버지를 충분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현보는 1333년에 태어나 1355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최고 권력자인 시중(侍中) 벼슬에 올랐다. 그는 당대에 상례(喪禮)를 삼년상으로 하고 동성동본 혼인 금지, 유학 증진, 의관(衣冠) 제도 확립 등에 힘썼다. 안향에서 우탁으로 이어진 성리학의 기반을 넓히는 데 기여한 셈이다.

우현보에게 가장 큰 자랑거리는 아들 5형제, 홍수(洪壽)·홍부(洪富)·홍강(洪康)·홍득(洪得)·홍명(洪命)이 모두 과거에 급제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5형제가 정부 요직에 두루 포진했으니, 한 집안에서 국사(國事)를 논할 정도였다. 더욱이 큰손자인 우성범(禹成範)이 공양왕의 부마(사위)가 되면서 왕실과 튼튼한 인연을 맺기도 했다. 이 때문에 우씨 집안은 성리학 정착에 기여한 신진 사대부 집안이면서도 왕실의 외척으로 왕의 비호를 받는 집안이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게 된다.

   

아파트와 송림에 둘러싸인 월곡역사박물관. 문중에서 만든 유일한 박물관이다(왼쪽 사진).

단양 우씨 시조단과 재실 희역당이 있는 단양군 적성면 애곡마을.

비극이 찾아온 것은 1392년 4월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면서부터다. 참살된 정몽주의 시신을 거둬준 이가 바로 우현보였다. 우현보는 계림(경주)으로 유배당하고, 아들 5형제도 뿔뿔이 유배를 당했다. 그해 7월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내쫓기던 날, 우성범은 개성 남문 밖에서 공개 참살되고, 조선 개국이 선포된 뒤에는 유배지에 있던 첫째 홍수, 넷째 홍득, 다섯째 홍명이 장살(杖殺·곤장을 맞고 살해)됐다. 곤장을 많이 맞으면 장독이 올라 죽는 수도 있지만, 사형(死刑)이 따로 있었으니 죽지 않을 만큼 때리는 게 장형(杖刑)이다. 그런데 세 형제가 죽음에 이른 것은 죄다 정도전(鄭道傳)의 사주로 빚어진 일이라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후손들 대구에 시민공원 겸한 박물관 만들어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의 우탁 출생지에 세워진 사적비.

정도전의 어머니가 단양 우씨인데, 어머니의 외할머니가 노비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도전은 벼슬을 받을 때마다 곤혹스런 처지에 놓였었다. 고려시대는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어머니가 천민이면 그 자녀도 천민의 신세였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우씨 집안에서 의도적으로 자신의 출신 성분을 거론하며 음해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고려와 함께 몰락한 우씨 집안이 극적으로 부활한 것은 이방원이 주도한 제2차 왕자의 난 때였다. 정종 2년(1400년)에 우현보의 문하생인 이래(李來)가 이방원의 바로 위 형인 방간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우현보에게 알렸고, 우현보는 이 사실을 둘째 아들 홍부에게 알려 이방원에게 대응하게 했다. 이방원은 즉시 사병을 움직여 방간의 사병들을 제거했고, 정종으로부터 권력까지 승계할 수 있었다.

고려의 원수이자 집안의 원수인 조선에 우현보가 돌연 협조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왜일까? 이는 우현보와 이방원의 인연 때문이었다. 이방원이 과거에 급제할 때 우현보가 시험관을 맡았다. 당시 급제자들은 자신을 입신시켜 준 시험관을 은문(恩門)이라 칭하며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그들 사이에서는 스승과 제자보다도 더 강한 인연이 맺어졌다. 이 같은 인연이 이방원에게 결정적인 제보를 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홍부와 셋째 아들 홍강은 원종공신이 돼 우씨 집안은 정치적인 재기를 했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시대에도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양호당 우현보의 후예들
우승흠(대종회 회장대행), 우영제(대제학공파 회장), 우문식(오파회의 총무), 우종택(예안군파 회장), 우기정(대구컨트리클럽 회장), 우종호(전 외교통상부 대사), 우윤근(국회의원), 우원식(국회의원), 우진명(미성산업 대표), 우대규(한일약품 회장), 우윤근(서울화수회 회장), 우종근(판서공파 회장), 우억기(전 성균관 부관장), 우국일(예비역 장군), 우광택(부장판사)

   

대구시 달서구에 가면 월곡역사박물관이 있다. 아파트 동네에 송림 언덕과 대나무로 울타리를 친 시민공원을 겸한 박물관이다. 우현보의 후손들이 마련한 것으로 한 문중이 세운 우리나라 유일의 박물관이다. 홍명의 후손인 우배선(禹拜善)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신이 되고, 그 후손이 박물관 동네에 모여 살다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생긴 보상금으로 마련한 것이다. 요사이 도시 외곽에 신도시 개발 바람이 불면서 부자 문중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이 자산을 사회로 환원할 줄 아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 몸을 아끼지 않은 우현보와 그의 후손 우배선의 정신이 그의 집안에 면면히 내려오기 때문이다.

우현보는 고려가 무너진 뒤 은거하면서 당호를 독락당(獨樂堂)으로 고쳤다. 그는 “지난 것은 모두 꿈이고 진실이 아니니, 앞으로 오는 것도 어떻게 진실임을 보증하겠는가”라고 했다. 파란만장한 삶 끝에 이른 우현보의 심정이 담긴 말이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나는 다만 한 사람의 망국(亡國)의 대부다. 나를 선영에 묻지도 말고, 또한 자손들도 이곳에 묻지 말라”고 했다. 그의 무덤은 휴전선 너머 장단 고현(古縣)에 있다.

 

부귀권세 버리고 험난한 의리의 길 정몽주 살해한 조영규를 “만세의 흉인”이라 비판 …

조선에 협력 안 해 귀양살이

바닷가 소나무에 둘러싸인 월송정.

요즘이야 소 타고 다니는 사람을 보기 어렵지만, 예전에는 말처럼 소도 타고 다녔던가 보다. 조선 초기 청백리로 알려진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소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해 그가 재상인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맹사성보다 여덟 살 연상이자, 두문동 72현으로 꼽히는 이행(李荇, 1352~1432)은 호가 기우자(騎牛子), 즉 소를 타는 사람이다. 당시 말이 귀해서 이행이 소를 탔던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조선 개국공신인 권근(權近, 1352~1409)은 이행의 소 타는 모습을 보고 “무릇 눈으로 만물을 볼 때 바쁘면 정밀하지 못하고 더디게 보아야 그 오묘한 데까지 다 얻을 수 있다. 말은 빠르고 소는 더딘 것이라 소를 타는 것은 곧 더디고자 함이다”라고 논했다. 권근이 20대에 쓴 글이니 이행은 이미 20대에 소를 즐겨 탔음을 알 수 있다.

이행의 자는 주도(周道)다. 자(字)는 성년이 되면 갖게 되는 또 하나의 이름인데, 흔히 본명과 상통하게 붙여진다. 곧 이행의 이름과 자를 풀면 ‘여러 길을 두루 다니라’는 뜻이 된다. 만약 이행이 요즘 세상에 태어났다면 여행가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울진 월송정에 이행의 시 남아

이행은 이미 7세 때에 “천리마를 타고 천지간을 주유하겠다(我乘千里馬 周遊天地間)”는 포부를 밝혔다. 그의 시문을 정리한 ‘기우집(騎牛集)’을 봐도 금구(김제시 금구), 금성(나주), 부안, 진보(청송군 진보), 이천(강원도 이천), 청하(영일군 청하), 고창, 우봉(황해도 금천) 등의 지명을 제목에 넣은 시가 눈에 띈다. 그는 또한 물맛을 잘 변별할 줄 알아서 “충청도 달천의 물이 제일이고, 한강 한가운데를 흐르는 우중수(牛重水)가 둘째이며, 속리산의 삼타수(三陀水)의 맛이 셋째”라고 평하기도 했다. 세상을 많이 주유한 뒤라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인 셈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00여년이 지났건만, 행복하게도 그를 기억하고 그를 주인으로 삼는 명소가 있다. 관동팔경 가운데 가장 남단에 위치한 울진 월송정이다. 월송정과 관련해서는 경기체가 ‘관동별곡’을 지은 안축(安軸, 1287~1348)의 시가 있고 숙종의 어제시(御製詩)까지 전해오지만, 이행이 지은 시 ‘평해 월송정’이 바다를 향한 정자의 중앙 상단에 걸려 있다.

“동해의 밝은 달이 소나무에 걸려 있네(滄溟白月半浮松)/ 소를 타고 돌아오니 흥이 더욱 깊구나(叩角歸來興轉濃)/ 시 읊다가 취하여 정자에 누웠더니(吟罷亭中仍醉倒)/ 선계의 신선들이 꿈속에서 반기네(丹丘仙侶夢相逢).”

이 시 현판 옆에는 순찰사로 내왕했던 김종서(金宗瑞, 1390~1453)의 ‘백암거사찬(白巖居士贊)’이 걸려 있다. 김종서는 그 글에서 “해상의 푸른 소나무와 같이, 소나무 위에 걸린 밝은 달과 같이, 선생의 기백과 절의는 천추만세에 이르도록 빛날 것이라”고 했다.

백암은 이행의 또 다른 호다. 월송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백암온천이 있는데, 백암온천이 기댄 산이 백암산이다. 이행은 백암산 기슭의 날라실(飛良縣)이라는 마을에서 살았다. 월송정에서 10리쯤 떨어진 마을인데, 어머니 평해 황씨의 고향이라 이곳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이후 기회가 될 때마다 내려와 지냈다. 달밤이면 소를 타고 월송정까지 노닐러 가던 곳이기도 하다.

이행의 후예들
이주형(제헌의회 의원), 이우성(퇴계학연구원장), 이운성(시인), 이성림(우성I&C 회장), 이희국(LG전자 사장), 이긍희(전 MBC 사장), 이배영(전 서울 은평구청장), 이완구(한나라당 충남도지사 예비후보), 이성순(영주FM방송 본부장), 이희수(한양대 교수)

   


①밀양 산외면 엄광리 재궁동에 있는 단향비. 이행을 중심으로 그의 조부, 손자의 관직과 이름을 새겼다.

② 밀양강이 내려다보이는 금시당과 백곡서재. ③ 평해 날라실 마을의 성황당. 동제를 지내기 위해 정리를 하고 있다.

그가 소를 타고 노닐던 정경을 당시 고려에 머물던 일본 승려 석수윤(釋守允)이 ‘월하기우도(月下騎牛圖)’에 담아놓았고, 그 그림을 보고 권근과 성석연(1357~1414)은 시를 짓기도 했다. “…소 등에는 시인이 실려 있구나(牛背載詩人)/ 마을은 궁벽하다 청산은 첩첩(村僻山千疊)/ 한 바퀴 달이 둥실 물에 비치니(波明月一輪)/ 흰 갈매기 더불어 마냥 친하니(白鷗相與狎)/ 호탕한 것 누가 있어 길들였더냐(浩蕩有誰馴)”고 권근은 노래했다.

후손들, 음력 10월10일마다 제사

이행은 17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0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때 시험관이 이색(李穡, 1328~1396)이어서 평생 사제 관계를 맺게 됐다. 그래서 이색이 탄핵을 받을 때에 그는 이색을 지지했고, 그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풍류도 있었지만 의리도 있던 사람이었다. 정치·외교적인 능력도 좋아, 제주에 건너가 성주(星主) 고신걸(高信傑)을 설득하고 그 아들을 데리고 와서 비로소 제주를 복속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조영규(趙英珪, ?~1395)가 정몽주를 살해하자 “만세(萬世)의 흉인(凶人)”이라고 대놓고 비판했고, 고려가 망하자 “서쪽으로 수양산을 바라보아, 주나라 곡식을 어찌 차마 먹으랴”며 두문동에 들어갔다.

그는 조선에 협력하지 않아 평해 월송정 마을로 귀양 가기도 했는데, 말년은 주로 집안 별장이 있던 황해도 강음 예천동에 칩거했다. 그와 시문을 주고받던 친구였던 권근·성석린·성석연 등은 개국공신으로 조선에 합류했지만, 그는 그들과 원수지간이 되지 않으면서 지조를 지켰다. 아들에게도 “신왕(新王) 또한 성인(聖人)이다. 너는 나와 처지가 다르니 모름지기 잘 섬겨라”고 했는데, 그 말을 좇아 아들 척()은 직제학까지 올랐다. 이행은 천수를 누려 81세까지 살다가 황해도 금천군 설봉산 아래에 묻혔다.

이행의 후손들은 남북이 분단되어 성묘를 할 수 없게 되자 경남 밀양에 이행의 조부부터 손자까지 5대를 함께 모신 단향비(壇享碑)를 마련하고 음력 10월10일이면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밀양은 이행의 고손자인 이사필(李師弼)이 연산군 때에 어지러운 정국을 피해 처가 동네로 내려와 살면서 여주 이씨 집성촌이 된 곳이다.

밀양강 가에는 아름다운 정자가 많은데 월연정은 이행의 6세손인 월연 이태(李)가 주인이고, 금시당은 이행의 7세손인 이광진(李光軫)이 주인이다. 밀양강과, 새로 뚫린 대구-부산 간 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는 금시당에는 백곡서재가 있다. 백곡서재는 백곡공 이지운(李之運, 1681~1763)을 기려서 지은 건물인데, 이지운은 임진왜란 때 무너진 금시당을 복원하고 ‘철감록(感錄)’을 편찬했다. ‘철감록’에 실린 이행의 글과 자료를 여주 이씨 문중에서 1872년에 따로 편집한 책이 ‘기우집’이다. 기우집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두문동 현인들의 명단을 72명으로 처음 확정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필자가 지금에 이르러 두문동 72현을 찾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王氏 귀신이 될지언정 李家의 신하는 못 한다” 두문동에 들어가 순절 …

유언 따라 봉분도 만들지 않아

물계서원의 봄 향사를 준비하기 위해 회의를 하고 있다.

경남 창녕에 가면 물계서원이 있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학문을 연구하는 사설 교육기관이자 명현(明賢)을 기리는 곳으로, 대체로 지역공동체의 유림이 주체가 돼 건립했다. 그런데 물계서원은 다르다. 한 가문이 주체가 돼 만들어졌다. 1724년 창녕 성씨 가문에 의해서였다.

좌의정까지 지낸 이복원(李福源, 1719~ 1792)은 물계서원에서 조상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것을 두고 “고금에 창녕 성씨 일가뿐이며, 천하에 물계서원 하나뿐이다. 아, 거룩하다”고 평했다. 비록 대원군 때 물계서원은 무너지고 1995년에 다시 세워졌지만, 여전히 국내 유일의 문중 서원이다. 그렇다고 집안사람만 드나드는 것은 아니다. 봄, 가을 제사와 서원 행사는 지역의 타성(他姓) 유림들이 앞장서 치른다.

호를 ‘두문자’로 하고 불사이군 뜻 마음에 새겨

1809년 물계서원에서 두문동의 역사를 정리한 ‘두문동선생실기(杜門洞先生實記)’가 간행됐다. 성석주(成碩周, 1649~1695)가 그의 직계 선조이자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의 행적을 기록한 것에 두문동 관련 자료를 덧붙여 펴낸 것이다.

성사제의 호는 두문자(杜門子)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의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겠다는 의지를 호에 새긴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는 ‘공자건두문불출(公子虔杜門不出)’에서 유래한 말로 여겨지는데, 성사제는 자신뿐 아니라 아들의 이름까지도 두문불출의 의미를 담아 두(杜)라고 고쳤다고 한다.

성사제는 신현(申賢, 1298~1377)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신현은 안향과 우탁의 도통(道統)을 이색, 원천석, 정몽주에게 연결시켜준 유학자다. 원천석 감수, 범세동 편찬, 성사제가 증보(增補) 작업에 참여한 ‘화해사전(華海師全)’은 신현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술한 책이다. 조선시대 내내 잊혀졌다가 1931년 군산에서 발견된 ‘화해사전’은 비록 위서(僞書)의 논란이 있지만, 고려 말 유학의 계통과 성리학의 이해 수준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료다.

성사제는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해 문장과 책문(策問)을 만지는 일을 주로 했고, 벼슬은 보문각 직제학(直提學·정사품)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그는 “차라리 왕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가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寧爲王氏鬼不作李家臣)”고 말하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그는 부인에게 “나는 고려의 신하라 신조(新朝·조선)에 벼슬해서 조상을 욕보이지 않을 것이고, 이제 곧 죽을 것”이라며 “아들을 데리고 고향(창녕)으로 돌아가서 선영을 지키라”고 했다.

현재 물계서원에는 21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모두 창녕 성씨 사람들의 것이다. 그중에서 고려 말 충신으로 성여완(成汝完)과 성사제가 있고, 조선 개국공신으로 성석린(成石璘)이 있다. 성여완은 고려가 망하자 경기도 포천 왕방산으로 숨어들어 조선에 협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큰아들 석린이 조선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냈고, 둘째 석용(石瑢)과 셋째 석연(石王因)이 대제학 벼슬을 해 두문동 72현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성여완과 성사제는 당숙과 조카 사이고, 성석린과 성사제는 6촌 형제다. 성사제는 조선 왕조에 협력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을 테지만 단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내가 죽더라도 시체를 염하지 말 것이며, 봉분도 만들지 않음이 옳을 것이다”는 말을 남겼고, 결국 두문동에서 순절하고 무덤도 없이 잊혀졌다.

   

① 시조 재실 안의 시조 비와 600년 된 느티나무. ② 성사제를 기리는 망송각 안의 망제단. ③ 망송각 처마의 소박한 문양. ④ 시조 묘 동산에 자리 잡은 시조 재실.

성사제의 존재가 다시 부각된 것은 1796년(정조 20) 유생들에 의해서였다. 그의 행적을 알게 된 유생들이 개성유수에게 알리고, 유수가 임금에게 보고했다. 그 결과 1808년(순조 8) 개성 표절사에 그의 이름이 오르게 됐다. ‘두문동선생실기’가 간행된 것은 그 이듬해의 일이다.

정조 때 유생들에 의해 성사제의 행적 부각

현재 창녕에 사는 성씨의 9할은 성사제의 후손이다. 부인 성산 이씨와 아들 두는 고향에 내려와 아버지의 유지를 잘 받든 셈이다. 물계서원 건립을 주도한 이들도 물론 성사제의 후손이다.

성사제의 후손은 무덤조차 없는 것을 아쉬워해, 1812년에 창녕읍 조산리의 부인 성산 이씨 묘 옆에 망송각(望松閣)을 짓고 그 안에 망제단(望祭壇)을 마련했다. 망송각 아래쪽에는 신도비(神道碑)도 세웠는데, 신도비는 현재 창녕 성씨 시조 묘가 건너다보이는 대지면 대지초등학교 앞쪽으로 옮겨져 있다.

두문자 성사제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것은 충(忠)이었고, 효(孝)였다. 나라를 위한 충은 자신이 지켰지만, 선조를 위한 효는 아들에게 맡겼다. 그렇게 충효를 삶의 지표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도비가 건너다보고 있는 시조 묘의 사연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성사제는 시조 성인보(成仁輔)의 6세손이다. 성인보는 창녕 지역의 호장(戶長)이었는데, 연초에 개경에 임금을 알현하러 갔다가 병을 얻어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동행했던 아들 송국(松國)이 자신의 효성이 부족해 아버지가 객지에서 돌아가셨다고 자책하며, 나라에서 제공한 우마차와 장례비를 마다하고 몸소 지게에 아버지의 시신을 지고 천 리 고향 길을 내려왔다. 고향에 이르렀을 때 눈이 내려 하룻밤을 묵게 됐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시신 주변에 호랑이 발자국이 있었다. 시신엔 탈이 없어서, 호랑이 발자국을 따라가 보니 야트막한 언덕에 눈 녹은 양지가 있었다. 송국은 그곳에 아버지를 안장했는데, 호랑이가 잡아준 명당이라 하여 지금도 풍수가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시조 묘에서 가까운 곳에 물계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좋은 터에 조상을 모시고, 그 정신까지 모시고 있는 셈이다. 사육신 성삼문(成三問)과 동국 18현의 한 사람인 우계 성혼(成渾)의 위패도 모시고 있는데, 나라와 운명을 함께한 성사제의 존재가 있기에 더욱 빛나는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