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해설

醉月 2026. 4. 20. 22:40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 가운데 하나이다. 보통은 간략히 《화엄경》(華嚴經)이라고 부른다. 다른 이름으로는《잡화경》(雜華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화엄경》은 한번에 쓰인 것이 아니라 2세기 무렵부터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여러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품(品)들이 결집된 것이다. 품은 불교 경전에서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한 장면을 뜻한다. 오늘날까지 산스크리트어 원문이 남아있는 것으로는 〈십지품〉과 〈입법계품〉이 있다. 〈십지품〉은 기원후 150년 이전에, 〈입법계품〉은 기원후 162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부처님은 이 사실을 깨달으신 뒤 가장 먼저 화엄경을 통해 그 세계를 열어 보이셨습니다.
일체 유심조라는 이 한 문장은 단순한 가르침을 넘어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설명하는 출발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신 직후 한동안 침묵 속에 머무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여셨을 때 가장 처음 설하신 경전이 바로 화엄경이었습니다.
대승경전의 왕이라 불리는 이 경전에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세계의 전체 모습이 
아무런 축소 없이 있는 그대로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가르침을 가장 먼저 설하시고도 부처님께서는 이후 수십 년간 
다른 경전들을 따로 설하셔야 했습니다.
화엄경의 가르침이 너무 깊고 방대하여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중생이 알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보신 세계는 마음이 곧 세상을 만들고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였습니다.
누구의 마음 속에나 부처의 지혜가 이미 갖추어져 있었으나 
그 말씀을 들은 중생들은 자기 안에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였기에
부처님의 첫 가르침은 침묵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가르침을 나누어 설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반야심경으로 공의 이치를 밝히셨고 
금강경으로 집착을 내려놓는 법을 전하셨으며 
법화경으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진실을 열어보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따로 따로 배워온 이 경전들이 사실은 
화엄경이라는 하나의 큰 바다에서 갈라져 나온 강줄기였던 것입니다.
일체 유심조,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 
이 네 글자가 화엄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이 이 말씀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으로 알고 계십니다.
그것은 일체 유심조의 본래 뜻과는 거리가 먼 오해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란 단순한 생각과는 다릅니다.
업을 짓고 세계를 만들어가는 근원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화엄경에는 이 마음의 이치 위에 펼쳐지는 거대한 세계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의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들어있고 
온 우주가 하나의 티끌 속에 비친다는 법계 연기의 세계입니다.
꽃 한송이가 피면 온 세상이 함께 움직이고 
내가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 생각이 온 법계에 퍼져나갑니다.
나와 세상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처음부터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 
화엄경이 보여주는 세계의 참모습입니다.
또한 화엄경은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중생의 마음 속에 이미 부처와 같은 지혜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무명과 번뇌에 가려져 있어서 스스로 알아보지 못할 뿐이라고 
부처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이것이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담긴 핵심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지금 느끼는 괴로움도 흔들림도 
사실은 무명에 가려져 있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무명만 걷어내면 본래 갖추어져 있던 
부처의 지혜가 드러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갖추어져 있는 그 지혜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화엄경은 그 길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살이 걸어가야 할 십지의 수행단계가 있고 선재동자라는 한 구도자가
53명의 스승을 찾아 떠난 위대한 순례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 모든 수행의 끝에는 
보현보살의 열 가지 큰 서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이 법문에서는 화엄경이 어떤 경전인지부터 시작하여
일체 유심조의 교리적 의미와 법계 연기의 세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어서 비로자나불의 의미, 십지 수행의 길, 선재동자의 구도 여정까지
화엄경의 전체를 빠짐 없이 해설 해 드리겠습니다.
이 법문을 끝까지 들으시면 마음이 세상을 만든다는 그 말씀이
단순한 격언을 넘어선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바꿀 수 있는 가르침을 오늘, 가슴에 품어보십시오.
부처님께서 가장 처음 여신 그 말씀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화엄경의 정식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입니다.
대방광이란 크고 넓고 한량 없다는 뜻이며
불화엄이란 부처님의 공덕으로 장엄된 세계을 의미합니다.
이 이름 자체가 화엄경이 어떤 경전인지를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세계가 얼마나 광대하고 장엄한지를
이름 석자에 담아 놓으신 것입니다.
화엄경은 대승경전 가운데서도 가장 방대한 경전으로 꼽힙니다.
현재 우리가 읽을 수 있는 한역본은 두 가지입니다.
동진 시대에 번역된 60권본과 
당나라 시대에 번역된 80권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80권본은 39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국 불교에서는 이 80권본을 주로 의지하여 읽고 있습니다.
산스크리트 원본은 이보다 훨씬 방대하였을 것으로 전해지나
완전한 형태로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거대한 경전의 구조를 이해하려면
7처 9회라는 틀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화엄경의 설법은 한 장소에서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일곱 곳의 장소에서 아홉 번에 걸쳐 설법이 펼쳐졌습니다.
보리수 아래 보광명전,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타화자재천
그리고 다시 보광명전과 급고독원까지 일곱 곳에 이릅니다.
설법의 장소가 인간 세상에서 천상으로 다시 천상에서 인간 세상으로
오르내리는 구조입니다.
첫 번째 설법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보리수 아래에서 시작됩니다.
이 자리에서 화엄경의 서문에 해당하는 세주묘엄품이 설해졌고
부처님의 깨달음이 온 법계에 퍼져나가는 장엄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이어서 보광명전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설법이 이루어졌고
부처님의 이름과 공덕, 사성제의 깊은 뜻이 밝혀졌습니다.
네 번째 설법부터는 장소가 천상으로 올라갑니다.
도리천에서는 십주, 야마천에서는 십행, 도솔천에서는 십회향, 
타화자재천에서는 십지가 설해집니다.
보살이 수행해 나가는 단계가 높아질수록 
설법의 장소도 더 높은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장소가 바뀌는 것을 넘어 수행의 경지가 깊어질수록
마음이 열리는 세계가 넓어진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 아홉 번째 설법은 다시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급고독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자리에서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떠나는 
입법계품이 설해졌습니다.
천상의 높은 가르침이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위에서 
실천 되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모든 설법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신 적이 없습니다.
보리수 아래에 앉으신 그 자리에서 한 번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설법의 장소는 인간계에서 천상계로 천상계에서 
다시 인간계로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란 한 자리에 앉아서도 
온 우주에 두루 미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모든 곳에 계시고 말씀하지 않으면서도 
온 법계에 가르침이 퍼져나간다는 것이 
화엄경이 보여주는 부처님의 참 모습입니다.
다른 경전들과 비교해 보면 화엄경의 특별함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반야심경은 260자에 공의 이치를 압축하였고 
금강경은 집착을 내려놓는 법을 한 가지 주제로 깊이 파고 들었습니다.
법화경은 삼승이 사실은 하나라는 일불승의 진실을 밝히는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 경전들은 각각 부처님 가르침의 한 측면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화엄경은 그와 달리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세계의 전체 모습을 
한꺼번에 펼쳐 보이신 경전입니다.
마음의 이치, 세계의 구조, 수행의 단계, 깨달음의 완성까지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경전 안에 온전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화엄경을 경전의 왕이라 부르는 것이며 
부처님 가르침의 전체 지도라 일컫는 까닭입니다.
또 하나, 화엄경에는 다른 경전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전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직접 설법의 주체가 되십니다.
제자가 묻고 부처님께서 답하시는 형식으로 법문이 전개됩니다.
그러나 화엄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대신 
문수보살, 보현보살, 법혜보살 등 수많은 보살들이 법을 설하십니다.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아 보살들이 가르침을 전하는 형식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깊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란 한 분의 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빛이 온 법계에 충만에 있기에 그 빛을 받은 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법당에서 경전을 읽을 때에도 그 순간 우리의 입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고 화엄경의 설법 주체로서 비로자나불이라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석가 모니 부처님은 인도 가비라성에서 태어나시고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역사 속의 부처님이십니다.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시기까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을 걸으신 분이십니다.
비로자나불은 이 석가 모니 부처님의 깨달음 그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묶이지 않고 온 우주를 빛으로 비추는 법신불 
그것이 비로자나불입니다.
비로자나불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화엄경 39품의 내용을 관통하는 핵심사상을 정리하면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일체 유심조입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이 가르침은 화엄경의 출발점이자 결론이기도 합니다.
둘째, 법계연기입니다.
모든 존재가 서로 의지하고 서로를 포함하며
하나도 홀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세계관을 전하고 있습니다.
셋째,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의 지혜를 갖추고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여래출현품에서 밝히신 이 선언은 화엄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놀라운 소식이기도 합니다.
넷째, 보살행입니다.
깨달음은 혼자 얻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중생과 함께 나누는 실천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화엄경은 설하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사상을 앞으로 하나씩 차례로 풀어나가겠습니다.
화엄경이 한국 불교에 미친 영향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신라시대 의상 대사는 화엄경의 핵심을 
210자의 법성게로 압축하여 전하셨습니다.
법성원융무이상이라는 첫 구절로 시작되는 이 게송은
오늘날에도 전국의 사찰에서 독송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법성게를 외우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 법성게의 근본이 되는 경전이 바로 화엄경입니다.
의상 대사는 화엄경을 배우기 위해 먼 바닷길을 건너 
당나라로 구법의 여정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오신 뒤 부석사를 창건하시고 
화엄 사상을 널리 펼치신 것입니다.
의상 대사의 화엄일승법계도는 210자의 게송을 도인으로 그려놓은 것으로
화엄경의 무한한 세계를 한 장의 그림 안에 담아낸 것입니다.
이 법계도를 보면 시작점에서 출발하여 수많은 굽이를 지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옵니다.
끝이 곧 시작이고 시작이 곧 끝이라는
화엄경의 원융무애 한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구조입니다.
또한 해인사에 봉안된 팔만 대장경의 이름
해인이라는 두 글자 역시 화엄경에서 비롯 된 것입니다.
해인삼매 곧 바다에 비친 도장처럼 온 세계가 부처님의 마음에 남김없이
비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인사라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화엄경의 세계가 그 안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사찰인 화엄사 역시
이름 그대로 화엄경을 근본으로 삼아 세워진 도량입니다.
화엄경은 이렇게 한국 불교에 뿌리 깊은 곳에 스며들어
오늘날까지 우리의 수행과 신앙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화엄경은 부처님 가르침의 출발점이자 완성입니다.
다른 경전들이 깨달음의 한 측면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화엄경은 깨달음 전체를 비추는 큰 거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 큰 거울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화엄경의 가장 핵심이 되는 네 글자
일체 유심조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일체 유심조,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뜻입니다.
화엄경 전체를 관통하는 이 네 글자는
타화자재천에서 설해진 십지품 가운데 나옵니다.
원문을 살펴보면 삼계는 오직 마음이 지은 바라고 전하십니다.
여기서 삼계란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를 말합니다.
욕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감각과 욕망의 세계입니다.
색계는 욕망은 벗어났으나 형체가 남아 있는 세계이며
무색계는 형체마저 사라진 순수한 정신의 세계입니다.
이 세가지 세계가 모두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부처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마음이라는 
단어와는 결이 다릅니다.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기고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는 단순한 인과가 아닙니다.
화엄경이 설하는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층위에 있습니다.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는 생각만이 아니라 의식 아래에서 끊임 없이
작용하는 근원적인 힘 
업을 짓고 세계를 만들어가는 그 작용 전체를 가리킵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붓과 물감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림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화가의 마음입니다.
산을 그리겠다고 마음 먹으면 산이 나타나고 
바다를 그리겠다고 마음 먹으면 바다가 펼쳐집니다.
화엄경에서는 이 비유를 직접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교묘한 화가와 같아서 능히 다섯 가지 세계를 그려낸다.
심여공화사 능화제세간이라고 설하십니다.
여기서 다섯 가지 세계란, 오온으로 이루어진 존재의 전체를 뜻합니다.
색, 수, 상, 행, 식, 곧 물질과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인식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모여 우리라는 존재를 이루고 있으며,
이 모두가 마음에 붓끝에서 그려진 것이라고 화엄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화엄경은 이 비유를 더 확장하고 있습니다.
화가가 물감의 색을 만들어 내듯,
마음도 온갖 세계의 빛깔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물감 자체에는 본래 정해진 그림이 없듯이,
마음도 본래 정해진 세계가 없습니다.
어떤 색을 섞느냐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듯,
어떤 마음을 일으키느냐에 따라 세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화가가 그림 바깥에 서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화엄경의 마음은,
세계 바깥에서 세계를 조정하는 별도의 존재와는 다릅니다.
마음이 곧 세계이고,
세계가 곧 마음입니다.
마음과 세계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
일체 유심조의 핵심 가운데,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가르침을 좀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화엄경은, 마음이 세계를 만드는 방식을 업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업이란, 몸으로 짓는 행위, 입으로 짓는 말,
뜻으로 짓는 생각, 이 세 가지를 통칭합니다.
우리가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 생각이 말이 되고 행동이 되어
세계에 흔적을 남깁니다.
그 흔적이 쌓여 다시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그 인연이 또 다른 생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 끊임없는 순환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형성되어가는 것입니다.
화엄경은 이 업의 작용을,
선업과 악업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이 세 가지 독이 마음을 움직이면,
악업이 쌓이고,
그 악업이 괴로운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반대로 보시와 지계와 인욕,
이러한 수행이 마음을 움직이면,
선업이 쌓이며,
그 선업이 맑은 세계를 열어줍니다.
같은 마음이되,
어떤 방향으로 작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업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한 번 지은 업이 영원히 고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새로운 업을 짓고 있으며,
그 업에 따라 세계는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업에 묶여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화엄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지금 이 순간,
마음을 돌리는 것으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경전의 말씀은 아는데,
삶에서는 여전히 흔들리는 그 간극을 느끼셨던 분이 계실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 흔들림조차도 마음이 지어낸 것입니다.
화가 날 때 화를 만들어낸 것은 상대방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은 인연이 되었을 뿐,
화라는 감정을 지어낸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외로움 역시 같은 이치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혼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외로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혼자 있다는 사실을 외로웠다고 인식하는 마음이
외로움을 지어내는 까닥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말은,
마음만 바꾸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뜻일까
이 부분에서 많은 오해가 생깁니다.
화엄경의 일체 유심조는,
마음 먹기에 따라 세상이 바뀐다는 자기 계발식 가르침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핵심은,
마음이 세계를 만든다는 사실을 자각하라는 것입니다.
자각 없이 마음을 바꾸려 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집착이 됩니다.
내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화엄경이 말하는 마음 공부의 출발점입니다.
화엄경은 이 마음의 작용을,
더욱 정밀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마음이 청정하면 세계가 청정하고,
마음이 오염되면 세계가 오염된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계란 물리적인 땅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삶 잔체를 뜻합니다.
같은 세상에 살고 있어도,
마음이 맑은 사람이 경험하는 세계와 마음이 흐린 사람이,
경험하는 세계는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어 봄날 벚꽃이 흩날리는 풍경을 볼 때,
마음이 고요한 사람에게는,
그 풍경이 정토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심에 잠긴 사람에게는,
같은 풍경이 무상함의 상징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꽃은 같은 꽃이되
마음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세상을 만든다는 뜻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또한 화엄경은 이 마음을 한 겹 더 깊이 들여다 봅니다.
마음의 본래 모습은 청정하다고 설하십니다.
번뇌와 망상에 가려져 있을 뿐,
마음 그 자체는 본래 맑고 밝은 것입니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어도,
그 위에는 언제나 맑은 하늘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일체 유심조의 가르침은,
마음이 세계를 만든다는 사실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마음의 본래 모습이 청정하다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마음이 만들어낸 괴로운 세계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마음이 만들어놓은 괴로움의 세계에도 함께 허물어 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짓는 업이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 속에서 다시 업을 짓는 이 순환을 어떻게 하면 깨뜨릴 수 있을까
화엄경은 그 답을 마음의 자각에서 찾고 있습니다.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순간,
업의 순환에 끌려다니지 않게 됩니다.
마음이 만든 것임을 알면,
마음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이 분노는 내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고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분노에 휩슬리는 힘이 약해집니다.
슬픔이 밀려올 때에도,
이 슬픔의 뿌리가 마음에 있음을 바라보면,
슬픔 속에 잠기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설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화엄경이 가르침는 마음 공부의 첫걸음입니다.
일체 유심조는 단순한 네 글자 안에
화엄경의 세계관 전체가 압축되어 있는 가르침입니다.
마음이 세계를 짓고,
그 세계가 다시 마음에 돌아오며,
그 마음의 본래 모습은 청정하다는 것.
이 가르침 위에서,
화엄경은 더 넓은 세계를 펼쳐보이고 있습니다.
마음이 만든 이 세계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 연결의 이치를 법계연기라 합니다.
법계 연기,
이 네 글자는,
화엄경이 바라보는 세계의 구조를 가장 정밀하게 담아낸 말입니다.
법계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세계를 가리키며,
연기란 서로 의지하여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모든 존재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
법계 연기의 출발점입니다.
연기라는 말은,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 가운데,
하나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초기 가르침에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저것이 생긴다고 설하셨습니다.
원인과 결과가 서로 의지하여 일어난다는 이 가르침을,
인연법이라고도 합니다.
화엄경의 법계 연기는,
이 연기의 가르침을 우주 전체의 규모로 확장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연기는,
하나의 원인이, 하나의 결과를 낳는 직선적 관계를 말합니다.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고, 싹이 자라면 꽃이 핍니다.
그러나 화엄경의 법계 연기는,
이러한 직선적 관계를 넘어섭니다.
씨앗 속에 이미 꽃이 들어있고,
꽃 속에 다시 씨앗이 들어있습니다.
씨앗과 꽃과 흙과 물과 햇빛과 바람이,
모두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가 전체를 품고 있고,
전체가 하나 안에 비치는 세계,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상즉상입이라 합니다.
상즉상입 서로 곧 같고,
서로 들어가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상즉이란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상입이란 하나 안에 전체가 들어가 있고,
전체 안에 하나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성립하는 세계가,
화엄경이 설하는 법계의 참모습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화엄경은 매우 아름다운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석천의 궁전에 무한이 많은 보배 구슬로 엮인 그물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 그물을 인드라망이라 합니다.
하나 하나의 구슬은 맑고 투명하여,
다른 모든 구슬의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첫 번째 구슬 속에 두 번째 구슬이 비치고,
두 번째 구슬 속에는 다시 첫 번째 구슬이 비칩니다.
그 뿐 아니라 첫 번째 구슬 속에 비친 두 번째 구슬 안에,
다시 첫 번째 구슬이 비치고, 그 안에 또 두 번째 구슬이 비칩니다.
이러한 상호 반영이 끝없이 겹겹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인드라망의 비유를 잠시 마음에 그려보십시오.
하나의 구슬이 깨지면, 나머지 모든 구슬에 비치던 그 빛도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의 구슬이 더 밝게 빛나면, 나머지 모든 구슬도 따라 밝아집니다.
어떤 구슬도 혼자서는 빛나지 못하고,
어떤 구슬도 홀로 어두워지지 않습니다.
모든 구슬이 서로의 빛을 받아 비추고,
서로의 어둠을 나누어 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법계 연기의 핵심입니다.
화엄경은 이 세계의 구조를, 네 가지 법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법계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개별적인 사물과 현상의 세계로,
나와 너, 산과 강, 이 절과 저절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층위입니다.
둘째는 이법계로 
개별적인 현상 너머에 있는 보편적인 이치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모든 것이 공하고, 모든 것이 연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진리의 층위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설하시는 공의 세계가,
바로 이 이법계에 해당합니다.
셋째는 이사무애법계 입니다.
이치와 현상이 서로 걸림없이 하나로 통하는 세계로,
공이라는 이치가 눈앞에 구체적인 현상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공을 깨달으면 세상 만물이 달라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이사무애법계의 이치 때문입니다.
네째는 사사무애법계로,
화엄경만의 고유한 세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상과 현상이, 이치를 매개로 하지 않고도,
직접 서로 걸림없이 통하는 세계입니다.
나와 너가 이치상으로만 하나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상 그대로 서로 스며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산이 곧 강이고, 강이 곧 산이며,
나의 한 걸음이 온 법계에 두루 미치는 세계 ,
이것이 사사무애법계가 가리키는 경지입니다.
이 네가지 법계를 물과 파도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사법계는 파도 하나 하나를 각각 독립된 것으로 바라보는 눈이며,
이법계는 파도 너머 있는 물 자체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이사무애법계는 파도가 곧 물이고,
물이 곧 파도라는 것을 아는 눈이며,
사사무애법계는 모든 파도가 서로 스며들어 하나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아는 눈입니다.
화엄경은 우리의 눈을 이 사사무애법계까지 열어주고자 설하신 경전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 두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사사무애법계는 모든 것이 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이되,
그 산과 강이 서로 걸림 없이 통한다는 뜻입니다.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있는 그대로 서로 통하는 것,
이것이 화엄경이 말하는 무애의 참된 의미입니다.
우리의 일상으로 옮겨보면, 나와 이웃이 서로 다른 존재이되,
그 다름 속에서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경전에서 설하시는 연기가 원인과 결과의 사슬이라면,
화엄경의 법계 연기는 그물입니다.
사슬은 한 방향으로만 이어지지만,
그물은 모든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코를 당기면, 그물 전체가 함께 움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작은 행위 하나가,
온 법계에 파문을 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법계 연기의 세계에서는,
크고 작음의 구별도 허물어 집니다.
화엄경은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가고,
큰 것이 작은 것 속에 머문다고 설하십니다.
한 알의 티끌 속에 온 세계가 담겨 있어도,
티끌은 커지지 않고, 세계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것은 물리적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이 크기에 갇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큰 것과 작은 것이 분명히 다르게 보이지만,
법계의 눈으로 보면,
티끌 한 알 속에도 온 우주가 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화엄경은 한 찰라 속에 영겁이 들어 있고,
영겁이 한 찰라 속에 머문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길고 짧음도,
법계 연기의 세계에서는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법당에서 합장하는 그 한순간이,
법계 연기의 눈으로 보면,
무한한 시간을 품고 있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나와 남이, 따로 떨어져 있다는 생각,
나의 행위가 나에게만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
이러한 분별이 화엄경의 법계 연기 앞에서는 허물어 집니다.
내가 한 마디 말을 내뱉으면,
그 말은 온 법계에 울려 퍼지고,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 파동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닿아 있습니다.
오래 수행하셨어도,
왜 내 수행이 세상에 무슨 영향을 미치겠느냐고 
생각하셨던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법계 연기의 눈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법당에서 올리는 절 한번,
마음속으로 외우는, 염불 한 마디가,
인드라망의 구슬 하나를 밝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하나의 구슬이 밝아지면,
그 빛은 온 법계의 구슬에 두루 비치게 됩니다.
우리의 수행은,
결코 나 혼자만의 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밝아지면, 세상도 함께 밝아지고,
내가 고요해지면,
세상도 조금씩 고요해지는 것이,
법계 연기가 알려주는 수행의 참된 의미입니다.
화엄경이 설하는 법계 연기의 세계는,
추상적인 철학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 세계관 위에서,
화엄경은 한 가지 중대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연결된 모든 존재의 마음속에,
이미 부처의 지혜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선언이 담긴 경전의 대목을,
여래출현품이라 합니다.
여래출현품,
화엄경 80권본가운데,
재 37품에 해당하는 이 대목은,
화엄경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선언이 담긴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신 까닭이 무엇인지,
그 근본 이유를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래출현품에서 부처님께서는,
보현보살에게 이렇게 설하십니다.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이 모든 중생이,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으되,
어리석음과 집착 때문에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이 한 구절이,
여래출현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이 말씀을 한 글자 한 글자 풀어보겠습니다.
먼저, 부처님께서는,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라고 감탄하셨습니다.
경전 속에서 부처님이 이토록 깊이 감탄하시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도 놀라실 만큼,
이 진실이 크고 깊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 놀라움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중생이,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기서 여래의 지혜란,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의 지혜를 말합니다.
덕상이란, 부처님이 갖추고 계신,
한량없는 공덕과 장엄한 모습을 가리킵니다.
중생의 마음 속에,
부처님과 다를 것이 없는 지혜와 덕이,
이미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법당 앞에서도 고요해지지 않는 마음 때문에,
스스로를 탓하셨던 적이 있으실 줄 압니다.
내가 부족해서,
내 수행이 모자라서,
깨달음은 아직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엄경의 여래출현품은,
그와 정반대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이 순간에도 부처님과 같은 지혜가
온전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 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일까
부처님께서는 그 이유도 함께 밝혀 주셨습니다.
어리석음과 집착 때문이라는 것이며,
경전의 원문에서는,
이것을 전도망상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도란 뒤바뀌었다는 뜻이고,
망상이란 허망한 생각입니다.
있는 것을 없다고 여기고,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는,
뒤바뀐 인식 때문에,
본래 갖추어진 지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무명의 작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나와 남이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고,
삶과 죽음이 단절되어 있다고 느끼며,
괴로움이 밖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분별 하나 하나가,
본래의 지혜를 가리는 가림막이 되고 있습니다.
가림막이 하나가 아닌 겹겹이 쌓여 있기에,
우리는 눈앞에 있는 지혜를 보지 못하고,
멀리서 찾으려 하게 되는 것입니다.
화엄경은 이 가르침을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비유는,
큰 경전이 한 알의 미세한 먼지 속에 들어있는 것과 같다고 전하십니다.
경전은 분명히 그 안에 있으되,
먼지가 너무 작아서 아무도 꺼내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천안을 가진 이가 나타나 먼지를 깨트리고,
그 안에 있는 경전을 꺼내어,
중생에게 펼쳐보입니다.
여기서 큰 경전이란 부처의 지혜를,
미세한 먼지란 중생의 마음을,
천안을 가진 이란 부처님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 비유도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화엄경은, 중생의 마음속에 있는 부처의 지혜를
광명에 비유하고 있기도 합니다.
해가 구름에 가려져 있어도,
해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구름이 걷히면, 해는 본래 자리에서 그대로 빛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무명의 구름이 걷히는 순간,
본래 빛나고 있던 부처의 지혜가 저절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본래 빛나고 있던 것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부처의 지혜가 들어있으되,
무명이라는 먼지에 가려져 있어서,
스스로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신 까닭이
바로 이 먼지를 깨트려주기 위함이었다고 화엄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을 하나 짚어 두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에게 지혜를 새로 넣어주시는 것과는 다릅니다.
본래 갖추어져 있는 지혜를,
볼 수 있도록 가림막을 걷어 주시는 것입니다.
밖에서 들여오는 것과는 다릅니다.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깨달음이란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되찾는 과정이라는 것이,
여래출현품이 전하는 가장 근본적인 메시지입니다.
이 가르침은 여래출현품에만 담겨 있지 않습니다.
화엄경의 다른 대목에서도,
같은 진실이 반복하여 확인되고 있습니다.
특히 60권본 화엄경에서는,
이 대목을 보왕여래성기품이라 부르고 있으며,
부처의 성품이 본래부터 일어나 있다는 성기 사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성기란, 깨다름의 성품이 새로 생겨나는 것을 넘어,
본래부터 있었다는 뜻입니다.
80권본의 여래출현품과 60권본의 성기품이,
같은 진실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래 갖추어져 있다는 그 지혜는,
구체적으로 어떤 지혜를 말하는 것일까
화엄경에서는 이것을 여래지,
곧 여래의 지혜라고 부릅니다.
여래지는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법계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는 지혜이며,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한 눈에 알아보는 지혜입니다.
나아가 마음이 곧 세계임을 체득하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앞서 살펴본 일체 유심조와 법계 연기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온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
여래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여래지는 흔히 불성이라는 말로도 표현됩니다.
불성이란,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이라는 뜻입니다.
화엄경의 여래출현품이 전하는 불성은,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의 의미를 넘어섭니다.
이미 완전한 부처의 지혜가 갖추어져 있되,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씨앗이 싹을 틔워, 꽂이 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꽂이 이미 만개해 있으되, 다만 가림막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점이 화엄경의 불성 사상이 다른 경전의 불성론과 구별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래출현품의 가르침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부처의 지혜는 모든 중생에게 평등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출가자 뿐 아니라 재가자에게도 수행을 오래 한 사람 뿐 아니라
이제 막 불법을 접한 사람에게도 이 지혜는 동등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크기나 양의 차이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가지고 계신 지혜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혜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인간을 넘어 모든 중생에게 이 지혜가 두루 갖추어져 있다고
화엄경은 설하고 있습니다.
법계 연기의 세계에서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부처의 지혜 또한 모든 존재에게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부처님은 그 지혜를 온전히 드러내셨고
우리는 아직 가림막에 가려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 뿐입니다.
가림막의 두께가 다를 뿐 가림막 안에 있는 지혜의 빛은 같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법문을 보고 계시는 이 순간에도
그 지혜의 빛은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꺼지지 않고 비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을 잠시 가슴에 품어보십시오
나는 부족한 중생이 아니라
부처와 같은 지혜를 본래 갖추고 있는 존재이며
다만 그것을 아직 보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 한가지 자각만으로도 수행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밖에서 무엇을 구하는 수행에서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수행으로 전환되기 때문입니다.
여래출현품은 부처님께서 왜 이세상에 나오셨는지 밝히는 동시에
우리가 왜 수행해야 하는지에 근본 이유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행이란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발견하는 여정입니다.
이 여정의 중심에는 온 우주를 빛으로 비추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 존재를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이라 부릅니다.
비로자나불 산스크리트어로 바이로차나
두루 비추는 빛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입니다.
화엄경 전체의 설법을 주관하시는 부처님이
바로 이 비로자나불이십니다.
우리가 법당에서 뵙는 석가모니불과는 어떤 관계인지
이 부분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화엄경을 읽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모습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삼신불이라 합니다.
법신, 보신, 화신 이 세 가지가
하나의 부처님 안에 함께 갖추어져 있습니다.
먼저 법신이란 진리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형체도 없고 색깔도 없으며 소리 또한 없습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온 우주에 두루 가득 차 있되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 법신이 바로 비로자나불입니다.
비로자나라는 이름 자체가
태양처럼 온 세상을 빠짐 없이 비추는 빛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태양은 어둠을 가리지 않고 높은 곳이나 낮은 곳을 구별하지 않으며
선한 이와 악한 이를 나누지 않고 모든 곳에 빛을 보냅니다.
비로자나불의 광명도 이와 같아서
모든 존재에게 분별 없이 두루 비치고 있습니다.
보신이란 오랜 수행의 공덕으로 이루어진
장엄한 부처님의 모습을 말합니다.
한량 없는 겁 동안 보살행을 닦아
그 공덕이 원만하게 갖추어진 부처님이십니다.
화엄경에서 설하시는 노사나불이 보신에 해당합니다.
보신불은 보살들을 위해 설법하시며
깨달음의 장엄한 세계를 보여주시는 부처님이십니다.
화신이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신 부처님을 가리킵니다.
약 2500년 전 인도 가비라성에서 태어나시고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십니다.
45년간 설법하신 뒤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바로 화신불이십니다.
여기서 핵심을 짚어보겠습니다.
법신과 보신과 화신은 세 분의 다른 부처님이 아닙니다.
하나의 부처님을 세 가지 측면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달에 비유하면 이해가 쉬울 수 있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하나이되 강물에도 비치고
연못에도 비치며 마당의 물그릇에도 비칩니다.
달은 하나인데 비치는 곳은 무한합니다.
비로자나불이 하늘의 달이라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세상이라는 연못에 비친 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화엄경이 전하고자 하는 뜻이 분명해집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비로자나불의 광명이
이 세상에 나타난 모습이십니다.
인도 땅에서 태어나시고 인간의 말로 가르침을 전하시고
인간의 몸으로 열반에 드신 것은
중생이 만날 수 있는 형태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다 하여
비로자나불의 광명이 꺼진 것은 아닙니다.
법십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욕신은 이 세상을 떠나셨으나
비로자나불의 법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온 법계를
비추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찰에 가면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고 
대적광전이나 비로전에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비로자나불상은 양손으로 지권인을 맺고 계신 모습이 특징입니다.
왼손의 검지를 세우고 오른손으로 감싸쥐는
이 손 모양은 이치와 지혜가 둘이 아님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중생의 무명을 지혜의 빛으로 감싸 안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왼손의 검지가 중생을 상징하고 그것을 감싸쥔 오른손이
부처의 지혜를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스님들도 계십니다.
어느 해석을 따르든 중생과 부처가 하나로 만나는 자리를
손 모양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같습니다.
통도사의 금강계단 해인사의 대적광전, 석굴암의 본존불, 
이 모두가 비로자나불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특히 석굴암의 본존불은 항마촉지인을 맺고 계시지만 그 안에
담긴 사상적 배경이 화엄경의 비로자나불 세계관과 닿아
있다고 보는 견해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국 불교에서 비로자나불은 단순히 화엄경 안에만 
머무르는 존재가 아니라 
사찰 건축과 불상 조성의 근본에 자리하고 있는 부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다음에 사찰을 찾으실 때 비로전이나 대작광전 앞에 
서 보십시오
지권인을 맺고 계신 비로자나불의 모습 속에서 화엄경의 가르침이 
살아있음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화엄경에서 비로자나불이 설법의 중심이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앞서 살펴본 대로 화엄경에서 비로자나불은 
직접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침묵 가운데 앉아 계시되 그 몸에서 나오는 광명이 온 법계를 비추고
그 광명을 받은 보살들이 법을 전하는 구조입니다.
보리수 아래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시면서도 온 법계에 가르침이
퍼져나가는 것 
이것이 법신불만이 할 수 있는 설법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깊이 새겨보십시오
진리는 본래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언어와 문자를 넘어선 자리에 있습니다.
비로자나불이 침묵 속에서 광명으로 설법하시는 모습은 바로 
이 가르침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말씀이 없되 가르침이 있고 소리가 없되 법이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고요한 밤 법당에 홀로 앉아 묵묵히 염불하실 때 그 고요함 속에서 
무언가를 느끼셨던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을 감싸오는 듯한 느낌 그것이 
비로자나불의 광명이 닿는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로자나불의 빛은 특별한 수행을 한 사람에게만 비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에게 쉼 없이 비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빛을 알아차리느냐 알아차리지 못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따름입니다.
화엄경은 이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연화장 세계라 부르고 있습니다.
연화장 세계란 연꽃 위에 장엄하게 펼쳐진 세계라는 뜻입니다.
이 세계는 비로자나불의 과거 수행 공덕으로 이루어진 불국토로써
한량 없는 세계가 겹겹이 포개어져 있습니다.
하나의 세계 속에 또 다른 세계가 있고 그 세계 속에 또 다른 세계가
끝없이 펼쳐지는 구조입니다.
법계 연기에서 살펴본 상즉상입의 원리가 이 연화장 세계의 구조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화엄경은 이 연화장 세계를 묘사하면서 이 세계가 먼 곳에 따로 있지
않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곧 연화장 세계의 일부입니다.
마음이 맑아지는 만큼 지금 이 자리가 연화장 세계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일체 유심조에 가르침과 같은 맥락입니다.
마음이 청정하면 세계가 청정하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이 연화장 세계를
통해 구체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비로자나불은 일체 유심조의 가르침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고 설하셨는데 그 마음의 가장 깊은 곳 가장
근원적인 자리에 비로자나불의 광명이 자리하고 있다고 화엄경은 전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다는 여래출현품의 가르침과 비로자나불이
온 우주를 비추는 빛이라는 가르침은 하나로 통합니다.
결국 같은 진실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본래 모습이 곧 비로자나불의 광명이라는 뜻입니다.
화엄경이 설하는 비로자나불은 먼 하늘 위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의 마음 속에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빛나고 계신 부처님이십니다.
그 빛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 곧 보살의 수행입니다.
화엄경은 그 수행의 구체적인 단계를 십지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십지품, 화엄경 가운데에서도 보살이 걸어가야 할 수행의 길을 
가장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깨달음이라는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계를 밟아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화엄경은 이 십지품을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보살이 처음 발심하여 마침내 부처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열 가지 단계를 거치게 되며 
이것을 십지라 합니다.
첫째는 환희지로 보살이 처음으로 보리심을 일으킨 자리입니다.
깨달음을 향한 뜻을 세우는 순간, 
크나큰 기쁨이 일어나기에 환희지라 이름합니다.
오랜 어둠 속을 걸어오다가 처음으로 빛이 비치는 방향을 
발견한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보살은 보시 바라밀을 주된 수행으로 삼습니다.
둘째는 이구지로 때를 여윈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거친 번뇌가 가라앉는 단계이며 계율을 지키는 수행, 
곧 지계 바라밀이 이 단계의 중심이 됩니다.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업이 점차 청정해지기 시작합니다.
셋째는 발광지입니다.
지혜의 빛이 밝아지는 단계로 인욕 바라밀을 통해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기릅니다.
수행 가운데 겪게 되는 시련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힘이 이 단계에서 길러집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억울함이나 분노도 
이 발광지의 눈으로 보면 인욕 수행의 인연이 될 수 있습니다.
넷째는 염혜지로 지혜의 불꽃이 타오르는 단계입니다.
정진 바라밀을 주된 수행으로 삼으며 
게으름을 벗어나 쉬지 않고 수행에 힘쓰는 자리 이기도 합니다.
화엄경은 이단계에서 37가지 깨달음의 요소인 삼십도품을 
닦아야 한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전 단계에서 발견한 빛을 꺼뜨리지 않고 끊임 없이 살려나가는 것이 
이 단계의 과제입니다.
다섯째는 난승지로 
이기기 어려운 것을 이긴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선정 바라밀이 이 단계의 중심이 됩니다.
세간의 지혜와 출세간의 지혜를 함께 갖추어야 하기에
쉽게 오를 수 없는 경지라 하여 난승이라 이름합니다.
이 단계에서 보살은 사성제의 이치를 완전히 체득하게 됩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끌려가지 않는 힘이 이 난승지에서 갖추어집니다.
여섯째는 현전지입니다.
진리가 눈앞에 나타나는 단계로 반야 바라밀을 주된 수행으로 삼습니다.
공의 이치가 머리로 아는 것을 넘어 
마음으로 직접 채험되는 자리 이기도 합니다.
반야심경에서 설하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이치가 
이 현전지에서 비로소 살아있는 체험이 됩니다.
일곱째는 원행지입니다.
수행의 범위가 한없이 넓어지는 단계로 방편 바라밀을 통해
중생을 제도하는 다양한 방법을 익힙니다.
자기 수행만으로 그치지 않고 다른 중생을 이끌어주는 힘이 
이 단계에서 무르 익습니다.
여덟째는 부동지로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를 가리킵니다.
원 바라밀이 이 단계의 중심이며 
모든 번뇌가 더이상 보살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물이 낮은 것으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자리입니다.
화엄경에서는 이 부동지를 보살 수행의 가장 큰 전환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르면 수행이 더이상 애쓰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고 
저절로 흘러가게 됩니다.
아홉째는 선혜지입니다.
뛰어난 지혜 단계로 력 바라밀을 통해 중생의 근기를 살피고
각각에 맞는 법을 설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하나의 가르침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 하지 않고
중생의 형편에 따라 무한한 방편을 펼치는 것이 이 단계의 특징입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다양한 경전을 설하신 것도
바로 이 선혜지의 지혜와 통하는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열째는 법운지로 
구름이 비를 내려 대지를 적시듯
보살의 가르침이 모든 중생에게 두루내리는 단계입니다.
지 바라밀이 원만해지며 부처의 경지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이 단계의 이른 보살은 한량 없는 삼매에 들어
한량 없는 부처님을 뵙고 한량 없는 중생을 교화합니다.
법운지의 보살은 비로자나불의 광명을 받아 온 법계에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 열 가지 단계를 살펴보면 한 가지 흐름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닦는 수행에서 시작하여
점차 다른 중생을 위한 수행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시에서 출발하여 지혜에 이르고 지혜에서 
다시 방편과 서원으로 나아가는 이 흐름은
보살도의 핵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지의 각단계에는 십바라밀이 하나씩 대응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 방편, 원, 력, 지, 이 열 가지 바라밀은
우리가 일상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수행 덕목입니다.
십지가 보살의 경지라 하여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실 수 있으나
그 출발점인 보시는 지금 이 자리에서도 시작할 수 있는 수행입니다.
이웃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도 보시이며
분노를 참고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는 것도 인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전을 잃고 법문을 듣는 이 시간 자체도 
정진 바라밀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라밀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에서 온 것으로 
피안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괴로움의 이 언덕에서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 바라밀은 그 건너감을 위한 열 가지 수행 방편인 것입니다.
수행을 오래 하셨어도 내가 과연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드셨던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십지의 가르침은 깨달음이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단계 한 단계 밟아 나가는 과정 자체가
곧 깨달음이라고 화엄경은 설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그 자리가 
십지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또한 십지에서 주목할 점은 각 단계가 
이전 단계를 부정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전 단계를 포함하면서 더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환희지의 기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기쁨 위에 이구지의 청정함이 더해지고
그 위에 발광지의 지혜가 더해집니다.
이것은 법계 연기에 원리와 같은 구조입니다.
하나의 단계가 다른 단계를 품고 있고 전체가 하나 안에 담겨 있습니다.
화엄경의 십지는 점진적 수행과 본래가 갖추어진 지혜의 관계에 대해서도
깊은 시사점을 설하십니다.
여래출현품에서는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의 지혜를 갖추고 있다고 설하셨습니다.
그런데 십지품에서는 그 지혜를 드러내기 위해 
열 단계의 수행이 필요하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는데도 단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씨앗이 이미 땅속에 있다 하여
꽃이 저절로 피지는 않습니다.
물을 주고 햇빛을 쐬고 바람을 맞아야 비로서 꽃이 핍니다.
십지의 수행이 바로 그 물과 햇빛과 바람의 역할을 하는 까닭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십지의 수행이 부처에 지혜를 새로 만들어 내는 과정은 아닙니다.
본래 있는 지혜 위에 겹겹이 쌓인 무명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는 과정이라 보아야 합니다.
환희지에서 한 겹을 벗기고 이구지에서 또 한 겹을 벗기며
법운지에 이르러 마지막 가림막까지 걷어냅니다.
이것이 화엄경이 설하는 수행의 참된 의미입니다.
이 십지의 수행이 혼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산을 오르는 이에게 길을 아는 안내자가 필요하듯 보살의 수행에도
스승의 인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화엄경은 이 스승과의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선재동자라는 한 구도자가 53명의 스승을 찾아 떠난 위대한 순례
그 이야기를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입법계품 
화엄경의 마지막품이자 가장 긴 대목입니다.
80권본 전체 39품 가운데 이 입법계품 하나가 전체 분량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화엄경이 이토록 많은 분량을 이 한 품에 할애한 까닭은 
이 이야기가 화엄경의 가르침을 하나로 묶어내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선재동자라는 한 소년에서 시작됩니다.
선재동자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받고 발심한 뒤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문수보살은 선재동자에게 남쪽으로 가서 선지식을 찾아뵈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선지식이란 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스승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선재동자는 이 말씀에 따라 첫 번째 선지식을 찾아갑니다.
그 첫 번째 스승은 덕운비구라는 수행자였습니다.
덕운비구는 선재동자에게 보살이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침을 마친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이 한 가지 법문밖에 모른다.
더 깊은 가르침을 구하려면 다음 선지식을 찾아가라고 전하셨습니다.
이 구조가 53명의 선지식을 만날 때까지 반복됩니다.
선재동자가 한 스승을 만나면 그 스승은 자기가 아는 가르침을 전해준 뒤
반드시 다음 스승을 소개해 줍니다.
한 분의 스승에게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다음 스승을 찾아나서는 것이
선재동자의 구도 여정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이 드러납니다.
53명의 선지식 가운데에는 비구나 비구니 같은 출가 수행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자, 바라문, 의사, 선인 등 다양한 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수밀다라는 이름의 기녀도 선지식으로 등장하고 
덕생동자와 유덕동녀라는 어린이도 선재동자의 스승이 되어줍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잠시 되새겨 보십시오.
깨달음의 스승은 절 안에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 속에도 병을 고치는 의사 속에도 
깨달음의 씨앗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길가에서 노래하는 이 속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화엄경은 전하십니다.
법계 연기의 세계에서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깨달음 역시
어느 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고 온 세상에 두루 퍼져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53명의 선지식 가운데 몇 분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선지식인 덕운 비구는 선재동자에게 염불삼매의 법문을 전해 주었습니다.
부처님을 한결같이 생각하며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경지에 대해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침을 마치신 뒤 다음 스승인 해운비구를 찾아가라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해운비구는 선재동자에게 보살의 대비심에 대해 가르쳐 주었습니다.
바다가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듯 
보살은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자기 일처럼 품어 안아야 한다고 
전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한 스승의 가르침이 끝나면 다음 스승에게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선재동자의 구도 방식이었습니다.
선지식 가운데 자행 동녀라는 어린 소녀는 
무생법인의 지혜를 선재동자에게 전해 주었으며
이 가르침의 깊이는 실로 놀라웠습니다.
모든 존재는 본래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이치를 
이 어린 소녀가 선재동자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가르침이 얕은 것이 아니며 
수행에 깊이는 겉모습으로 해아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또 다른 선지식으로는 선견비구가 등장합니다.
선견비구는 경행 삼매를 닦으시는 분으로 걸음걸음마다 
깨달음이 열리는 수행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법당에서 포행을 할 때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곧 수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선지식의 가르침을 통해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수밀다라는 선지식은 기녀의 모습으로 선재동자 앞에 나타났습니다.
세간의 눈으로 보면 가장 세속적인 직업을 가진 이가 
보살의 지혜를 전하는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바수밀다는 중생이 자신을 찾아올 때 각각의 근기에 맞는 방편으로 
법을 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상에 얶매이지 않고 본질을 바라보라는 화엄경의 가르침이 
이 선지식의 모습 속에 살아 있습니다.
미륵보살을 만났을 때 선재동자는 비로자나장엄장이라는 
거대한 누각에 들어 가게 됩니다.
그 누각 안에는 한량 없는 누각이 또 들어있었고 
각각의 누각에 또 한량 없는 세계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법계연기의 상즉상입을 직접 눈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재동자는 이 광경을 통해 그동안 배워온 화엄경의 가르침이 
단순한 이론이 아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미륵보살을 뵌 뒤 선재동자는 다시 문수보살을 찾아갑니다.
처음 출발했던 그 자리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53번째 선지식으로 보현 보살을 만나며 
순례의 대장정이 마무리됩니다.
끝이 다시 시작으로 돌아오고 시작이 곧 끝과 만나는 
이 구조는 화엄경의 원융무애 한 세계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선재동자의 여정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이 드러납니다.
53명의 선지식은 모두 서로 다른 가르침을 전해 주었습니다.
같은 가르침을 반복한 분은 한 분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보시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있고 
인욕을 통해 이르는 길도 있습니다.
선정과 반야와 방편을 통해 이르는 길 또한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본 십바라밀이 이 선지식들의 가르침 속에 
하나 하나 구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매 선지식이 가르침을 마친 뒤
나는 이 한 가지 밖에 모른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스승이라 하여도 진리의 전부를 
혼자 품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한 사람의 가르침 안에 완결되지 않으며
끊임없이 다른 스승을 찾아가는 구도의 과정 자체가 
곧 수행이라는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겸손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보살도 자기 가르침이 전부라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배움에 끝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의 겸양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선재동자의  53 선지식 순례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구도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선재동자는 한 스승에게 배운 뒤 만족하여 머물지 않았습니다.
한 스승을 만나면 다시 길을 나서고
또 다시 다음 스승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53번을 쉬지 않고 걸었습니다.
수행이 더디게 느껴지는 날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경전을 읽어도 마음이 예전과 타를 바 없다고 느끼셨을 수도 있습니다.
선재동자의 이야기는 그런 우리에게 멈추지 않는 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의 수행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한 분의 스승에게만 의지하여 모든 것을 얻으려하기보다
삶속에서 만나는 모든 인연을 스승으로 삼아보십시오.
이웃의 한마디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고
자연의 모습에서 법문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눈이 열리면 온 세상이 선지식이 됩니다.
선재동자의 순례가 마침내 보현 보살에 이르렀을 때
보현 보살은 선재동자에게 열 가지 큰 서원을 전하셨습니다.
이 열 가지 서원은 화엄경 전체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기는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선재동자가 걸어온 긴 여정의 끝에서
마침내 실천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화엄경이 설하는 깨달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선재동자처럼 직접 걸어가고 직접 만나고
직접 배우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살아있는 깨달음이 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일체 유심조, 법계연기, 여래출현품,
비로자나불, 십지의 가르침을 되새겨보겠습니다.
이 가르침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 될 수 있는지
이어서 함께 나누어보겠습니다.
화엄경의 가르침은 경전 안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일체 유심조, 법계연기,
여래출현품의 뜻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
이제 그 이야기를 나누어보겠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의 마음은 세계를 짓기 시작합니다.
오늘도 무거운 하루가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면
그 생각이 하루에 빛깔을 만들어 냅니다.
반대로 오늘 하루도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같은 아침이 전혀 다른 아침이 됩니다.
바깥 세상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달라진 것은 오직 마음뿐입니다.
이것이 일체 유심조가 일상에서 작용하는
가장 가까운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족 사이에서도 이 가르침은 그대로 작용됩니다.
오래 함께 살아온 가족이기에 서로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식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생각 
배우자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서운함
이러한 감정이 쌓이면 같은 집에 살면서도 마음은 멀어집니다.
그런데 화엄경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감정을 만들어 낸 것은 상대방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은 인연이 되었을 뿐
서운함이라는 감정을 지어낸 것은 나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관계의 매듭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이웃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때문에 내가 괴롭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화엄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 괴로움을 지어내는 것은 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을 바꾸려 하면 괴로움이 커지지만
내 마음의 작용을 알아차리면 괴로움이 스스로 엷어지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만든 것이기에 마음을 돌리면 세상도 함께 돌아갑니다.
법계 연기의 가르침도 일상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는 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연이 얽혀 있습니다.
아침에 먹는 밥 한 그릇 속에도 농부의 땀과 비와 햇빛과 
흙의 힘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길에서 마주치는 이웃,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 
스쳐 지나가는 바람 한줄기까지
모든 것이 인연의 그물 안에서 서로를 떠 받치고 있습니다.
인드라망의 구슬이 서로의 빛을 비추듯 
우리의 삶도 수많은 인연의 빛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자각이 깊어지면 원망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나에게 괴로움을 준 사람도 법계 연기에 눈으로 보면 
나와 분리될 수 없는 인연입니다.
그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원망의 대상으로 보이던 이가 
사실은 나의 수행을 키워준 선지식이었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화엄경이 일상에 전하는 깊은 지혜입니다.
이것은 억지로 용서하라는 뜻과는 다릅니다.
상처를 받은 마음을 무시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상처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한 번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상처를 준 사람을 향해 있던 눈길을 
잠시 내 마음쪽으로 돌려보십시오.
그 순간 원망의 무게가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느끼시는 외로움에 대해서도 
화엄경은 다른 눈을 열어줍니다.
자녀가 곁을 떠나고 벗들이 하나 둘 멀어지며 
몸도 예전 같지 않은 날이 많아지셨을 것입니다.
홀로 남겨진 듯한 그 막막함을 견디기 어려우셨던 
밤이 있으셨을 줄 합니다.
그러나 법계 연기의 세계에서는 
진정으로 홀로인 존재란 없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한한 인연의 그물속에 
지금 이 순간에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혼자라고 느껴지는 그 순간에도 비로자나불의 광명은 
쉬지 않고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떠난 가족을 그리워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분과 나 사이에 인연은 육신이 떠났다 하여 끊어지지 않습니다.
법계 연기의 세계에서는 한 번 맺어진 인연의 빛이 
영원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올리는 기도 한 번 
마음속으로 전하는 회향 한 마디가 소중합니다.
인드라망의 구슬을 통해 그 마음이 그분에게 닿아 있다고 
화엄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돌리면 세상이 달라진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을 
구체적인 수행으로 옮기는 방법도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첫째 아침에 일어나서 합장 한 번 하시고
오늘 하루 만나는 모든이가 나의 선지식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십시오
선재동자가 53명의 스승을 찾아 나섰듯
우리의 하루도 그렇게 시작될 수 있습니다.
둘째 누군가에게 서운함이 올라올 때 잠시 멈추고 
이 감정은 내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고 한 번만 알아차려보십시오.
알아차림 하나가 업의 순환을 멈추는 첫 걸음이 됩니다.
감정을 억느르라는 뜻과는 다릅니다.
서운함을 느끼되 그 서운함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셋째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 하루 만난 인연들을 떠올리며 
잠시 회향해 보십시오.
나의 수행과 공덕이 모든 존재에게 
두루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짧은 회향이라도 그 마음 하나가 법계에 퍼져나간다고 
화엄경은 전하십니다.
넷째 화엄경의 가르침을 더 깊이 체득하고 싶으신 분은 
법성게를 매일 한 번씩 독송해 보십시오.
법성원융무이상 이 첫 구절에 화엄경의 모든 이치가 담겨 있습니다.
의상 대사께서 화엄경의 방대한 세계를 
210자에 압축하신 이 게송을 날마다 한 번 외워보십시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일체 유심조, 네 글자를 사경으로 써보시는 것도 
마음 공부의 좋은 방편이 됩니다.
글씨를 쓰는 동안 마음이 자연스럽게 한 곳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네 가지 실천은 특별한 시간을 내지 않아도 
일상 속에서 바로 할 수 있는 수행입니다.
절에가야만 수행이 되고 경전을 펼쳐야만 법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재동자의 선지식이 절 밖에도 계셨듯이 
우리의 수행 역시 삶의 모든 순간 속에 열려 있습니다.
화엄경의 가르침을 일상에 가져오면 세 가지가 달라집니다.
마음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을 알면 
바깥을 원망하는 마음이 줄어듭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외로움의 무게가 가벼워집니다.
내 안에 부처의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면 
스스로를 탓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이 가르침은 더 깊이 와닿으실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밖으로 향하던 눈이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안을 들여다볼 때 화엄경의 가르침이 길잡이가 되어줍니다.
마음 안에 이미 부처의 지혜가 갖추어져 있기에 
밖에서 무엇을 더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한 가지만 마음에 품어도 남은 세월이 훨씬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물론 아는 것과 체득하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 이 법문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다 하여
내일부터 삶이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언젠가 반드시 싹을 튀우게 되어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떨어진 화엄경의 씨앗이 
내일의 삶을 조금씩 바꾸어나 갈 것입니다.
십지의 가르침에서 살펴보았듯이 깨달음은 한순간에 찾아오지 않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늘의 알아차림이 내일의 수행으로 이어지고
그 수행이 또 다른 알아차림을 불러오는 과정 속에서 점차 밝아지는 것입니다.
화엄경은 이 모든 가르침에 끝에서 한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론으로 그치지 않고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수행의 길
보현보살의 열 가지 큰 서원이 바로 그것입니다.
보현행원품 화엄경의 모든 가르침이 마침내 실천으로 귀결되는 자리입니다.
보현 보살은 선재동자에게 그리고 이 법문을 보고 계신 모든 이에게
열 가지 큰 서원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열 가지 서원을 보현십원이라 하며 
부처로 가는 길의 구체적인 이정표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첫째는 예경제불로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라는 서원입니다.
여기서 모든 부처님이란 불단에 모셔진 부처님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법계 연기의 세계에서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모든 존재 안에 깊은 불성에 예를 올리라는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합장하며 삼배를 올리는 그 절 한 번이 
이미 예경제불의 실천이 되고 있는 까닭입니다.
둘째는 칭찬여래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라는 서원이며 
입으로 짓는 선업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염불을 하거나 경전을 독송할 때 
그것이 바로 칭찬여래의 수행이 됩니다.
셋째는 광수공양으로 
널리 공양을 올리라는 서원입니다.
보현 보살은 물질적인 공양보다 법공양.
곧 수행으로 올리는 공양이 가장 으뜸이라고 전하십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그 가르침을 다른 이에게 전하는 것이 
최상의 공양이라는 뜻입니다.
넷째는 참회업장으로 
과거에 지은 업장을 참회하라는 서원입니다.
일체 유심조의 가르침에서 살펴보았듯 
우리의 마음이 업을 짓고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참회란 그 업의 뿌리를 돌아보고 마음을 바로 잡는 수행입니다.
보현 보살은 이 참회를 행할 때 끊임없이 쉬지 않고 
몸과 입과 뜻으로 지은 모든 업을 낱낱이 돌아보야 한다고 전하십니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돌아보며 
잠시 참회의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이것도 이 서원의 실천이 될 수 있습니다.
다섯째는 수희공덕으로 
다른 이의 공덕을 기뻐하라는 서원입니다.
남의 수행과 선행을 시기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는 마음.
이것만으로도 큰 공덕이 쌓인다고 화엄경은 설하고 있습니다.
이웃이 좋은 일을 하면 진심으로 기뻐해주고 
다른 분이 수행에 진전이 있으면 함께 경하해 주는 것.
이러한 마음 하나가 보살의 수행이 됩니다.
여섯째는 청전법륜으로 
부처님께 법을 설해 주시기를 청하라는 서원입니다.
우리가 법당에서 법문을 청해보고 이렇게 화엄경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이 시간도 청전법륜의 실천에 해당합니다.
일곱째는 청불주세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래 머무르시기를 청하라는 서원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 서원은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 전하는 모든 이가 함께 세우는 원력이기도 합니다.
여덟째는 상수불학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라는 서원입니다.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쉬지 않고 걸어간 것과 같은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홉째는 항순중생으로 
항상 중생에게 순응하라는 서원입니다.
보살은 자기 수행만으로 그치지 않고 중생의 형편에 맞추어 
함께 나아가는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열째는 보개회향으로 
지금까지 쌓은 모든 공덕을 남김없이 
모든 중생에게 돌리라는 서원입니다.
나 혼자의 깨달음으로 끝내지 않고 
모든 존재와 함께 부처의 길로 나아가겠다는 
보살의 서원이 이 마지막 대원에 담겨 있습니다.
인드라망의 구슬 하나가 밝아지면 
온 법계의 구슬이 함께 밝아집니다.
나의 공덕이 곧 모든 존재의 공덕으로 이어진다는 
법계연기의 이치가 이 회향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 열가지 서원을 살펴보면 하나의 흐름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부처님께 대한 공경에서 시작하여 
자기 업장을 참회하고 남의 공덕을 기뻐하며 
마침내 모든 공덕을 중생에게 돌리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나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나아가고 끝내는 모든 존재를 품는 것 
이것이 보현행원이 보여주는 보살도의 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지에서 살펴본 보살 수행의 흐름과 같은 구조입니다.
자기 수행에서 출발하여 점차 다른 중생을 위한 수행으로 나아가는 길 
보현십원은 그 길의 가장 구체적인 지도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목이 약속한 것을 다시 되새겨보겠습니다.
누구나 부처로 가는 길 
화엄경은 이 길을 보현보살의 열가지 서원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것도 
깊은 산 중에 들어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덕을 찬탄하며 
공양을 올리고 업장을 참회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수행입니다.
여래출현품에서 밝혀주셨듯이 우리의 마음 속에는 
이미 부처의 지혜가 온전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보현십원은 그 지혜를 드러내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의 길입니다.
보현 보살의 서원이 특별한 까닭은 한 번 세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함이 없는 원력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보현 보살은 허공이 다하고 중생이 다하며 
번뇌가 다하여도 나의 서원은 다하지 않으리라고 전하십니다.
이 서원의 크기가 곧 화엄경이 바라보는 세계의 크기기도 합니다.
끝이 없기에 지금 이 순간 한 걸음을 내딛는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이 법문을 통해 화엄경의 세계를 함께 걸어왔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직후 가장 먼저 여신 말씀.
대승경전의 왕이라 불리는 이 경전 속에서 
우리는 일체 유심조의 뜻을 살펴보았고 법계연기의 세계를 만났습니다.
모든 중생 안에 부처의 지혜가 갖추어져 있다는 놀라운 선언을 들었으며
비로자나불의 광명이 온 우주를 비추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지의 수행단계와 선재동자의 순례를 함께 걸으며
이 가르침을 우리의 일상에 가져오는 방법까지 나누어 보았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을 한마디로 모아보겠습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고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부처의 지혜가 갖추어져 있으며
그 지혜를 드러내는 길이 
보현보살에 열가지 서원으로 열려 있는 것입니다.
긴 시간 동안 화엄경의 방대한 세계를 함께 걸어오셨습니다.
쉽지 않은 가르침도 있었고 마음에 깊이 와닿는 대목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단 한 구절이라도 마음에 남으셨다면
오늘 이 법문은 그 한 구절로 충분합니다.
화엄경의 씨앗은 이미 여러분의 마음속에 떨어졌습니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것은
오늘 이후 여러분의 하루 하루 속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처음 이 법문을 시작할 때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이 법문의 끝에서 같은 말씀을 한 번 더 전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본래 부처의 마음입니다.
이 법문이 우리의 마음에 한줄기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나무 비로자나불
나무 보현보살 마하살,
원컨대 이 법문을 들으신 모든 분이 
화엄경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일체 유심조의 지혜로 날마다 새로운 세계를 여시며
보현 보살의 서원을 따라 부처로 가는 길 위에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