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냉전의 유적지 DMZ를 찾아서

醉月 2010. 4. 1. 09:16

멍돌’의 한국사



오리산은 한반도 땅덩어리를 빚어낸 증인이고, 그 산이 토해놓은 현무암 대지는 현생 인류보다 더 나이가 많은 고인류를 탄생시켰다. 따라서 그 산은 인류의 어머니 같은 산이다. 그리고 그 산이 토해놓은 멍돌, 구멍 숭숭 뚫린 그 검은 돌은 한국사를 낱낱이 기억하고 있는 기록바위이다.

30만 년이나 되는 나이배기 돌

현무암. 화산이 토해놓은 식은 용암 덩어리, 마그마가 지표로 분출할 때 가스가 빠져나가면서 올록볼록 박색으로 얽은 곰보돌. 그보다 숭숭 구멍 뚫린 구멍돌. 바쁜 세상에 세 글자나 쓸 게 뭐있나. 그냥 멍돌이라 부르면 되지. 그래서 현무암을 멍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일까? 아니면 푸르죽죽 멍든 색깔을 띤 멍든 돌이 많아 멍돌이 되었을지 모른다. 현무암의 원산지 철원에서는 그 돌을 멍돌이라고 부른다. 발단은 그 멍돌을 토해놓은 평강고원 오리산(鴨山:453m)이다. 원산으로 가는 경원선 열차가 평강역으로 들어서기 십여 리 전에 무심코 지나쳤던 낮은 산, 봉긋 솟은 평강고원에 한 줌 흙덩어리처럼 산 같지 않은 산, 장암산(1,052m)을 배경으로 군인들이 멋대로 이름 붙였을 뿐 사실은 무명산인 낙타고지(432.3m)와 나란히 도토리 기재기 하듯 서 있는 정말 DMZ 너머로 도토리만 하게 보이는 산. 그러나 오리산은 한국사를 탄생시킨 산이다.

강원도 평강군과 세포군 경계에 있는 높이 599m의 낮은 고개, 추가령(楸哥嶺)에 떨어진 빗방울은 북쪽으로 굴러가면 동해가 되고 남쪽으로 굴러가면 서해가 된다. 추가령 북사면에서 안변 남대천이 발원하고 남사면에서는 역곡천이 시작돼 한탄강 임진강을 만나 한강이 되어 서해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원산 영흥만에서 서울을 거쳐 서해안까지 호를 그리
며 이어지는 좁고 낮은 긴 골짜기, 서쪽의 마식령산맥과 동쪽의 광주산맥 사이에 끼어 있는 협곡, 지형상·지질상 남한과 북한을 양분하는 구조선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20세기 들어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눈 분단선, 그 골짜기가 추가령을 가운데 두고 펼쳐지기 때문에 이름도 추가령구조곡이다.

이 골짜기를 중심으로 북쪽은 억겁의 나이를 먹은 고생대 지층으로 쌓여 있다. 반면 남쪽은 젊은 중생대 지층이 넓게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 갈수록 지층의 나이가 더 젊어지고 있다. 땅의 구조상으로도 골짜기 남북은 확연히 다르다. 북쪽의 마식령산맥 이북의 산맥 방향이 대체로‘동북동-서남서’의 랴오령(遼寧)방향으로 뻗어 있고, 남쪽은 광주산맥 이남의 산맥은‘북북동-남남서’의 중국방향으로 뻗어 있다. 이 골짜기에서는 중생대 백악기라고 하는 먼먼 옛날 화산이 폭발했다. 철원평야의 금학산은 이때 분출한 화산체이다. 제주도, 울릉도, 길주명천지구대, 백두산과 개마고원에서 화산활동이 활발하던 신생대 제4기에도 용암이 분출했다. 그 생생한 얘기를 지금 한탄강의 기기묘묘한 모습들이 증언하고 있다. 한라산, 백두산처럼 용암이 분화구를 통해 뿜어 나오지 않았다. 지각에 벌어진 틈을 따라 점성이 묽은 마그마가 쿨럭 쿨럭 흘러 나왔다. 평강 오리산과 평강 북쪽 검불랑에 지각틈새가 벌어져 있었다.

오리산과 검불랑이 토해놓은 용암은 순식간에 철원, 평강, 이천, 김화, 회양 등 무려 650㎢에 달하는 지역을 검붉은‘쇳물의 바다’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마그마는 이미 물길을 잃어버린 한탄강을 뒤덮고 임진강 물길을 틀어막으며 멀리 문산까지 97㎞나 흘러갔다.‘ 쇳물의 바다’에 빙하기가 다가왔다. 그리고 얼마 후 간빙하기가 되어 그 두꺼운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주변 지역보다 겨우 140여m 밖에 높지 않은 오리산이 나타났다. 정상에 직경 125m의 분화구를 중심으로 해발 평균 330m의 평강고원이 드러났으며 그 남쪽으로는 그보다 낮은 해발 평균 220m의 철원평야, 더 남쪽 한탄강변에도 좁은 용암대지가 생겼다. 평강, 철원, 포천, 연천, 파주까지 무려 직경 150㎞에 이르는 현무암대지가 생겼다. 추위와 더위에 땅은 오므라들기도 하고 펴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 벌어진 현무암 대지의 틈새를 비집고 한탄강이 흐르면서 온갖 조화를 부렸을 것이다. 그‘수태극 산태극’한탄강이 구비치는 전곡리 현무암 대지, 멍돌 퇴적층에 30만 년 인류의 세월이 숨겨져 있었다는 기막힌 사실이 밝혀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바로 30만 년 전 고인류가 쓰던 아슐리앙 주먹도끼가 발견됨으로써 한반도 인류사를 까마득히, 까마득히 끌어올렸다. 멍돌 반석을 파헤치며 흘러내리는 한탄강, 임진강 단애 위에는 수많은 산성과 돈대, 포대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거기가 그 옛날 고구려 신라,백제가 치열하게 각축하던 땅이라고 가리키고 있는것이다. 궁예왕은 철원 풍천원 벌판에 한양성에 버금가는 큰 성을 쌓았다. 고려사는 그가 청주사람 1천 호
를 끌어다가 1년 만에 그 성을 쌓았다고 적고 있다. 그들은 모두 석수장이였을까. 그러나 그 큰 성을 그렇게 빨리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무진장으로 나뒹굴고 있는 현무암, 나무처럼 가볍고 다듬기 쉬운 그 멍돌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궁예는 1천 년 후 한국사를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구축한 궁예도성은 지금 DMZ 속에 잠들어 있다. 

 

좀 쓴 돌,
하얗게 머리 센 까마귀


 궁예도성 남문 석등(石燈)의 실물은 지금 없다. 사진도 사라진 줄만 알았다. 철원군지(鐵原郡誌)에 실린 흑백사진 한 장이 석등의 유일한 흔적이라고 알려져왔다. 어디에 실린 우표딱지만 한 사진을 잡아 늘릴 수 있는 데까지 확대한 복사판이다. 사진 속으론 모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멍돌처럼 작은 구멍들이 가득 뚫려 있어서 제주도 돌하루방을 연상케 하고 있었다. 애꾸눈 궁예 왕이 지천으로 나뒹구는 ‘곰보 바위’하나를 들어다가 아무렇게나 쓱쓱 깎아 도성 남대문 앞에 턱 세워 놓았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2007년 11월, 문화재청이 공개한 석등은 그렇게 시시하지 않았다. 조악한 그 곰보돌 조각이 아니었다. 키 280㎝ 짜리 화강암 조각은 의연하고 수려했다. 각목을 세우고 판자를 댄 울타리 속에서 보호받고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1940년 7월 30일자로 국보 118호로 지정할 때 찍힌 모습일지 모른다. 궁예도성은 후 삼국시대에 세워진 완벽한 인공도시이다. 이 도시 디자인에는 신라 경주의 예술성을 패러디할 만큼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으며, 대동방국(大東方國)의 수도를 건설하려는 궁예의 의지도 강력하게 반영되고 있었다. 따라서 다보탑이나 석가탑보다도 2세기 후에 축조된 석등은 신라 예술품보다 더 정교하고 품위 있게 다듬어졌을지 모른다. 일본이 국보로 지정했던 그 기막힌 돌조각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행방을 모른다. 막연히DMZ 속 풍천원벌판에 나동그라져 묻혀 있을 것이란 추측만 무성하다. 석등처럼, 역사 속의 태봉국왕 궁예(弓裔)도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모습이다. 고려사는 그때 백성에게 피살되었던 궁예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918년 6월) 이리하여 (궁예가) 변복을 하고 도망쳐 나가니 궁녀들이 궁 안을 깨끗이 하고 태조(왕건)를 맞아들였다. 궁예는 산골로 도망하였으나 이틀 밤이 지난 후 배가 몹시 고파서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 먹다 바로 부양(평강) 백성들에게 살해됐다.’‘궁예는 평강 땅 삼방(三防)에서 너무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훑어 먹다 밭일을 하던 농사꾼들에 들켰다. 농사꾼들은 그를 돌로 쳐 죽였다.’


 역사는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폭정과 괴벽의 엉터리 애꾸눈 왕을 장수나 군졸도 아닌 무지렁이들이 통쾌하게 교살했다.’고 행간에서 속삭이고 있다. 그리고 궁예가 누구이냐고 묻는 이들에게‘왕은 애꾸눈의 장애인이었고, 자신을 메시아라고 여긴 미륵신앙의 광신도였으며, 부인과 자식을 쳐 죽인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결국 피신 길에 보리이삭을 훑어 먹다가 농민들에게 붙들려 돌에 맞아 죽은 인격 파탄자였다.’고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미륵의 세상을 갈망하던 하층 농민들이 미륵불을 돌로 쳐 죽인 무지함, 백성이 왕을 쳐 죽인 대역죄, 즉 자식이 어버이를 쳐 죽인 패륜을 고스란히 철원 사람들의 옛 조상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었다. 급기야 역사의 이간에 홀랑 넘어간 그 우매한 백성들마저 궁예를 노망난 고집쟁이로 농락하고 있다. “철원돌이 왜 저렇게 구멍이 숭숭 뚫렸는지 알아? 그 옛날 궁예 왕이 못마땅해 돌마저 그를 돌아선 거지.”1988년 여름, 한탄강가에서 만난 83세의 노인 안일봉씨 얘기로는 철원 벌판에 지천으로 나뒹구는‘멍돌’마저왕을 배신한증거라는 것이다. 왕건이 궁예성을 에워쌌다. 대세는 기울었는데도 궁예는 투항하지 않았다.

 

 “나는 안 망한다. 저 돌에 좀이 쓸면 내가 망할까.”궁예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때 갑자기“쉿,쉿”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궁궐 안팎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크고 작은 돌마다 좀이 쓴 옷처럼 뻥뻥 구멍이 뚫리며 돌가루를 쏟아냈다. 궁예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돌에 좀이 쓸었다고 투항할 건 또 뭔가.“ 돌 따위는 필요 없어. 까마귀 머리가 하얗게 세면 내가 망할까. 나는 안 망한다.”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머리 하얀 까마귀떼가 하늘을 뒤덮었다.그때서야 궁예는 자신의 때가 끝났다는 것을 깨닫고 도망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저 곰보 돌은 그렇게 얽은 것이야. 그때 그 머리 하얀 까마귀 떼는 서해 갯벌로 날아가 갈가마귀가 됐대요. 정말 강화도에서 봤는데 갈가마귀 머리가 하얗더라고.”갈가마귀도 까마귀다. 목과 배가 흰색인 소형종 까마귀다. 그 까마귀는 아마 서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송악, 즉 왕건파의 세력을 의미했을 것이다.

역사서는‘궁예가 어렸을 때 까마귀가 무엇을 물고 와서 바리때에 떨어뜨렸는데, 이를 집어보니 왕(王)자가 쓰인 아참(牙讖)이었으며,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은근히 자부심을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설은 친히 하늘이 내린 예언서를 물고 왔던 그 까마귀의 배신까지 이끌어 냈다. 더구나 그가 대동방국의 꿈을 담고 건설한 궁예도성을 받치고 있던 현무암 주춧돌에 좀이 쓸게 함으로써 그의 이상이 구멍 뚫린 야망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리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궁예에게는 멍돌이 좀 쓸어 쓸모없는 돌이었지만,태조 왕건에겐멋진 돌배로 현신시키고 있다.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임진강‘썩은소(朽沼)’엔 이런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 왕족 왕씨(王氏)를 멸족시키려 했다. 왕씨들은 살아남기 위해 전씨(田氏, 全氏)·김씨(金氏)·옥씨(玉氏)·금씨(琴氏)·박씨(朴氏) 등으로 변성해 피신하고 있었다. 태조의 신주조차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됐다. “우리들이 모두 이렇게 변성을 하더라도 우리 조상님은 한 분이니, 왕건 태조(王建太祖) 할아버지의 신주는 우리들이 안전한 곳에 편안히 머무시도록 해 드립시다.”송도의왕씨 몇 사람은돌배를 만들었다. 그리고 왕건 신위를 싣고 예성강을 따라 흘러갔다. 예성강 합수머리에 도달한 돌배는 웬일인지 임진강을 역류하기 시작했다. 황해도 안악까지 올라갔던 돌배는 다시 강을 따라 내려와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절벽 밑에 멈췄다.

 

“이곳을 피신 장소로 태조 할아버지께서 정하신 듯하니, 이곳에 모시도록 합시다.”왕씨들은 쇠로 만든 닻줄로 돌배를 매어 놓고 사당 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왔을 때 쇠 닻줄은 썩어 끊어져 있고, 돌배는 어디론가 흘러가고 없었다. 돌배는 10여 리 하류 ‘누에머리(蠶頭)’절벽에 붙어 있었다. 그들은 절벽 위에 사당‘숭의전(崇義殿)’을 짓고 태조 왕건의 신위를 모셨다. 지금도 청명한 날에는 누에머리 절벽 밑에 가라앉은 돌배가 보인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태조 왕건의 신위를 싣고, 예성강, 임진강을떠돌던 전설속의 돌배는 분명 구멍 숭숭 뚫린 멍돌이 소재였을 것이다. 마그마가 대기 중에 방출될 때 휘발성 성분이 빠져나가면서 지름 4㎜ 이상의 기공이 생긴 암괴, 속돌 또는 경석이라고도 하는 부석(浮石), 멍돌 중에서도 다공질인 부석은 비중이 작아 물에 뜬다. 그 멍돌이 돌배로 깎여 왕건에게 헌신된 것이다.

 

“나를 따르지 말라”군탄리 작별 인사

 

궁예도성의 주춧돌까지 빼어내 좀이 쓸어 구멍 뚫린 돌로 폄하하는 것은 분명 강자의 횡포였다. 그러나 좀쓴 돌로 내팽개쳐진 철원 벌판의 멍돌 속에는 철원 사람들만 간직하고 있을 것 같은‘안티 왕건’이 배어 있다. 궁예왕에 대한 숭모와 연민, 안타까움을 구비 전설들에 담아놓고 있었다. 어쩌면‘미륵을 죽인 무지, 왕을 죽인 대역죄, 어버이를 죽인 패륜’의 불명예를 벗겨달라는 하소연일 것이다.


 왕건의 군사 역모가 있던 날, 왕은 자신의 나라 도읍지를 마지막으로 순방한 것 같다. 그날 밤 왕은 남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나왔다. 숨을 가다듬기 위해 찾아 갔던 첫 피신처는 철원읍 대마리, 도성 서남쪽의 중어성. 도성 외곽에 세웠던 12개 산성 가운데 한 요새다. 왕은 이 요새를 버렸다. 더 서쪽으로 나가 연천군 신서면 승양리의 승양산성으로 들어갔다. 포천군 관인면의 또 다른 외곽성 보개산성은 승양산성의 동쪽에 있었다. 왕은 자신의 외곽성을 순회하는 게 틀림없었다. 왕건은 왕을 뒤쫓았다. 그러나 왕은어느새 더 동쪽철원군 갈말읍 명성산성으로 들어가 최후 보루를 구축했다. 그러나 그는 그 산성에서 군대를 해산한다. 그리고 통곡하는 군사들을 뒤로하고 홀로 북쪽으로 떠난다. 그래서 그 산성은‘울음산성’, 그 산은 ‘울음산’이다. 충성스러운 군사들은 왕을 뒤쫓아 갔다. 갈말읍 군탄리에 이르렀다. 왕은“나를 따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한탄강을 건넜다. 왕은 멀리 평강고원으로 사라졌다. 군사들은 탄식하며 울었다. ‘군사들이 슬피 울며 탄식한 곳’, 바로‘군탄’이다. 그러니까 군탄리인 것이다.

 

1,000년 후 육당 최남선은 금강산 가는 길가 삼방협에서 궁예를 만났다. 육당 최남선은 금강산 유람 길에 우연히 궁예 최후의 전설을 들었다. 그는 ‘풍악기유’에 이렇게 옮겨놓았다.

 

‘남루한 차림의 고려왕(궁예)이 발붙일 땅을 찾지 못하고 삼방 골짜기로 들어왔다. 삼봉 최고지에 올라 은피하여 재도할 땅을 둘러볼 즈음에 문득 한 스님을 만나 혹시 용잠호장할 땅이 없겠느냐고 물으니, 스님이 말하기를 이 속에 들어와서 살길을 찾는 것은 어리석다고 했다. 이에 크게 절망하고 그곳에서 깊은 연못을 향해 그대로 몸을 던지니 물에는 빠지지 아니하고 우뚝 선 채로 운명했다.’

 

왕은 자신의 나라 군마사육장인‘성모루성’(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오목동)을 지나고, 멀리 궁궐의 불빛을 바라보며 풍천원을 횡단해 도성의 북쪽 작은 냇가에 이르렀다. 평강 하갑리 동북쪽이다. 왕은 갑옷을 벗었다. 작은 내는 그런 이유로‘갑천(甲川)’이란 이름을 얻었다. 정예병들을 양성하던 검불랑 군사훈련장을 지나 삼방협의 깊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갑옷을 벗어던진 왕의 옷차림은 남루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왕은 그 차림으로 스님을 만났을 것이다.

 

궁예 사후 1천년 만에 또 한 사람의 장수가“나를 따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간 한탄강 멍돌 언덕에서 군사들과 헤어지고 있었다. 1963년 8월 30일 오전,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 육군 제5군단 비행장.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육군대장이 대통령으로 출마하기 위해 군대를 떠나고 있었다. 박정희 의장은 “다음의 한 구절로써 전역의 인사로 대신할까 합니다.”란 말로 전역연설을 끝냈다.


 “오늘 병영을 물러가는 이 군인을 키워주신 선배, 전우 여러분, 그리고 군사혁명의 2년 동안‘혁명 하(下)’라는 불편 속에서도 참고 편달 협조해주신 국민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리며 다음의 한 구절로써 전역의 인사로 대신할까 합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

한탄강 승일교의 전설

 

 

남북합작 또는‘ 영웅의 다리’

 

철원 사람들은 한탄강은 결코 범람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평야 가운데 낮은 곳은 10m, 깊은 곳은 30m나 움푹 파인 협곡 속으로 흐르는 이 강은 정말 어떤 홍수에도 강물이 넘쳐흐를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속설은 때때로 거짓말을 한다. 1996년 7월 26일 새벽 시간당 70㎜의 폭우가 철원평야를 급습했다. 날이 밝자 구름 속에서 해가 비쳤다. 작은 다리들이 끊어지고, 둑이 무너졌다. 사상자가 발생하긴 했지만, 사람들은 장마는 이 정도로 끝나는가보다 했다.


그러나 새벽 폭우는 예비폭격과 같은 것이었다. 오후가 되자 다시 융단폭격이 시작됐다. 서해를 건너 온 바람은 너무 많은 비구름을 싣고 있는 것 같았다. 낮게 뜬 검은 구름은 평강고원에 기대앉아 옴짝달싹하지 않고 앉아 빗물을 쏟아 부었다. 서풍은 무거운 비구름 대를 싣고 조금씩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광주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다. 평야를 떠난 비구름은 산맥의 크고 작은 골짜기들을 찾아다녔다. 8월 2일 오전, 서풍은 비구름을 다 덜어 놓고 나서야 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가버렸다. 단 1주일 동안 1년 치 강우량의절반이 넘는 평균 715㎜ 이상의 비를 쏟아 부었다.

 

한탄강은 평강군 현내면 신정리에서 발원해 36㎞ 쯤 남쪽으로 흘러 철원군 갈말읍 정연리‘민들레 벌판’에서 DMZ를 건넌다. 그리고 철원, 포천, 연천을 지나며 100㎞를 더 흘러 연천군 미산면에서 임진강으로 유입된다. 그때 이 136㎞의 강 유역이 고스란히 융단폭우를 맞고 있었다. 남대천·영평천·차탄천이 먼저 범람하면서 한탄강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드디어 강물은 협곡의 낮은 절벽들을 뛰어넘어 평야로 밀어닥쳤다.


들판 너머 외딴 마을은 수상 가옥들처럼 물바다에 떠 있었고, 마을로 가는 도로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두 줄 가로수만 겨우 머리만 내밀고 서있었다. 여느 때는 한탄강 다리들이 모두 까마득한 절벽 위에 걸려있었다. 그러나 물난리를 겪고 있는 동안 대부분 겨우 목만 내놓고 물속에 잠겨버렸다. 어떤 다리는 무너져 내렸고, 어떤 것은 기울었다. 이 다리들이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건강진단을 받을 필요가 생겼다.


‘1948년생’인 승일교는 그 강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7일간에 걸친‘물과의 전쟁’을 치르고 난 늙은 교량은 지쳐 있었다. 그의 든든했던 교각은 무게 9톤 이상을 지탱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것은 더 이상 교량 역할을 할 수 없다는‘퇴역선고’를 의미했다.


‘길이 120m, 높이 35m, 너비 8m’한탄강 단애 위에 턱 걸려 있는 이 아치형 구조물은 웅장하면서도 경쾌 했다. 도무지 한국인의 머릿속에서는 나오지 않았을 것 같이 이국적이기도 했다. 어떤 이는 다리 미학의 극치라고 평가했다. 또 어떤 이는‘한국판 콰이강의 다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승일교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승일교는 퇴역신고를 하면서도 제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한글로는 ‘승일교’ 라고 썼다. 그러나 한자이름은 ‘承日橋’ 또는‘昇日橋’로 달리 불렸다.


‘承日橋’는 그럴듯한 구비설화에 근거한 것이다.‘ 북한이 반쪽을 놓고, 남한이 반쪽을 마저 놓아 완성한 남북합작품. 따라서 다리 이름 승일교(承日橋)의 승(承)은 당시 남한 최고 통치자 이승만(李承晩)에서, 일(日)은 북한의 최고 통치자 김일성(金日成)에서 따온 것이다.’


철원은 휴전선에 갈려 ‘남철원’ 과 ‘북철원’으로 나뉘었다. 따라서 남철원이 북쪽에 잃어버린 땅이 있는 것처럼, 북철원도 남쪽에 잃어버린 땅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마치 이 깊은 이데올로기 강에 걸려 있는 상징의 다리이기나 한 것처럼 철원 사람들은 철석같이 남북합작교라고 믿고 있었다. ‘승일교는 곧 철원’인 것이다.
신경림의‘승일교 찬시’도 철원 사람들의 승일교 전설을 그대로 옮겨 담고 있다.

 

 

「이 다리 반쪽은 네가 놓고
나머지 반쪽은 내가 만들고
짐승들 짝지어 진종일 넘고
강물위에서는 네 목욕하고
그 아래서는 내 고기 잡고
물길따라 네 뜨거운 숨결 흐르고
조상님네 사랑이야기
만주 넓은 벌 말 달리던 이야기
네 시작하면 내 끝내고
초저녁달 아래서 시작하면
새벽별 질 때 끝내고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너와 내가 닦고 낸 길
형제들 손잡고 줄지어 서고
철조망도 못 막아
지뢰밭도 또 못 막아
휴전선 그 반은 네가 허물고
나머지 반은 내가 허물고
이 다리 반쪽은 네가 놓고
나머지 반쪽은 내가 만들듯…」


 


시인도 이 다리는 승일교(承日橋)라는 그 이름대로 남과 북이 반쪽씩 지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승일교 찬가’를 새긴 화강암 비석 앞면은 이 같은 승일교 설화는 사실과 다르다고 정정하고 있다. 고 박승일(朴昇日) 대령을 추모하는‘영웅의 다리’라는 것이다.

 


박승일 대령의 다리, 昇日橋


“이 다리는 북괴가 강제노력 동원으로 절반정도를 구축하고 남침하였으며, 휴전 이후 우리가 완공한 것으로써 6·25전쟁 당시 이곳 한탄강을 도강, 민족의 염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북진하던 중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전사한 고 박승일 연대장의 애국 충정을 기리기 위해 제5군단장 이성가 장군이 1958년 12월 3일 이 다리를 완공, 당시 연대장의 이름을 따서‘승일교’라 명명한 것이다.”


고 박승일(朴昇日) 대령. 그는 육사 1기생으로 1950년 11월 26일 평남 덕천·영원 지구 전투에서 연대를 지휘하다 생사불명이 된 비운의 장교이다. 11월 24일대동강을 향한 대공세에 나선 UN군 사령부는 크리스마스 이전에는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한국군 제2군단 제6, 7, 8보병사단이 미 제8군의 우익을 맡고 있었다. 한국군은 제6사단을 예비대로 남기고 제7, 8사단은 진격작전에 투입했다.


첫날 진격은 아주 순조로웠다. 중공군은 이미 퇴각해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작전 이틀째를 맞으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11월 26일 중공군은 야간 대공습을 감행했다. 중공군은 공격 패턴은 여기서도 유효했다. 그들은 처음엔 치고 빠지면서 한국군을 유인했다. 한국군 제7, 8사단이 영원, 덕천지구에 들어갔을 때는 마치 커다란 자루 속 깊이 들어간 꼴이 됐다.

 

그들은 간단하게 영원·덕천을 쓸어버렸다. 덕천에서 빠져나오는 퇴각로는 군우리 방면과 북창 방면 두 개의 도로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이미 퇴각로는 막혀버렸다. 제7사단예하 제8연대가 간신히 북창으로 가는 도로를 뚫었다. 연대 병력 일부와 사단장만 살아 돌아왔다. 사단본부에서 가장 떨어진 좌익을 맡았던 제3연대는 군 우리 방면으로 혈로를 뚫었다. 그러나 연대장을 비롯한 병력의 50%가량이 전사했거나 행방불명이 됐다.


중앙을 맡았던 제5연대, 제50포병대대도 사실상 전멸했다. 영원, 맹산에 퇴각 루트를 트고 있던 제8사단도 십여 차례에 걸쳐 포위 공격을 당하면서 제16연대 하나만을 건질 수가 있었다. 그때 덕천과 영원을 빠져나오면서 제7, 8사단은 4명의 연대장을 잃었다. 박승일 대령, 고근흥 대령, 김영로 중령 등 3명의 연대장은 생사불명(포로가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이 되었다. 그리고 박광혁 중령은 전사했다.


1958년 겨울 육군 제5군단장 이성가 장군은 이 가슴 아픈 전사를 되새기며 그때 산화한 박승일 대령에게 다리 하나를 바친 것이다. 4명의 연대장 가운데 박승일 대령이 승일교의 주인이 된 것은 아마도 그의 이름과 승일교의 한글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박승일 대령의 다리.’그 군사설화가 탄생할 무렵, 그 곳은 민간인이 함부로 가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거긴 전선에서 머지않은 곳으로 간주돼 일반 주민들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됐다. 이러한 통제는 40여 년 이나 지속돼 1980년대 후반까지도 다리 입구에서는 늘 초병들이 다리를 지켰다. 이 다리는 걸어서는 건널 수 없었으며, 다리 아래로 내려가 한탄강변의 낚시를 즐기거나 한탄강 단애의 멋진 풍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행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곳은 민간인들에게는 절대 통제구역이었으며, 군인들에게는 ‘치외법권구역’이었다. 그‘치외법권 구역’에서 군인들은 “때려잡자 김일성!”이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따라서 김일성을 이기겠다는‘승일교(勝日橋)’라면 모를까,‘ 북쪽이먼저, 남쪽이나중에’하며사이좋게합작 했다는‘승일교(承日橋)’는 철없는 사람들의 낭만에 불과했을 것이다. 군인들은 한탄강변에 흘러내려오는 그 군사설화를 주목했다. 그리고 1985년 10월 1일 국군의 날에 맞춰 화강암 비석에 그 설화를 기록했다. 남북이 합작해 건설한 다리라는 그 위대한 민간설화를 희석하기 위해서라도‘박승일 대령’의 승일교를 새길 크고 웅장한 화강암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누구일까?”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대홍수가 휩쓸고 간 그해 여름 승일교는 그렇게 물으며 통행금지 딱지를 붙이고 퇴역하고 있었다.

 
아치 브리지를 완공하라


퇴역한 승일교가 헐리지 않는 것은 천만다행이다. 승일교 아래쪽에 한탄대교를 건설하는 대신 승일교는 보존하기로 한 것이다. 학계에서는 교량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주민들은 남북합작교라는 설화적 의미에 더 비중을 두었다. 군인들에게는 승일교야말로 ‘영웅의 다리’였다. 케케묵은 다리지만 잘 보존하자는 의견에 대해 철원 지방 유지들은 물론 군인들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다만 철원의 유지들은 이 기회에 ‘영웅의 다리’로 새겨진 비문을 지우고 대신 구비설화를 옮겨 쓰기로 입을 모으고 있었다. 그해 5월, 철원의 유지들은이미‘승일교 교명(橋名) 정립 계획’을 만들었다. 철원군 동송읍 이길리에서 살던 김영배씨가 앞장섰다. 그는 DMZ 속에 묻혀있다고만 할 뿐 이어도처럼 아무도 가보지 못한 궁예도성을 소년시절 직접 가본 사람이다. 철원지방의 옛날 얘기들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어서 본인이야 사양하건 말건 향토사학자로 통하는 분이다.


철원군 동송읍장을 지낸 김호선(金浩善), 이길리 조봉수(趙鳳秀)씨, 그리고 타계한 진창진(陳昌鎭)씨를 대신해 장남 호장(鎬章)씨 등이 증언한 승일교 역사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1948년 당시 철원은 북한 땅이었다. 북한은 한탄강에 다리를 놓기로 했다.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와 갈말읍 문혜리 사이의 한탄나루가 적지였다. 그곳은 1940년 일본인이 철판 배를 만들어 사람과 우마차, 자동차를 실어 나르던 곳이다. 해방 후 내대리 임(任)씨가 그 배를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1948년 8월 늦장마가 지나갔다. 그해 안엔 더 이상 홍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한탄교(漢灘橋)란 이름의 다리 공사가 착공됐다. ‘소련식 유럽 공법’으로 화제가 됐던 교량설계는 철원 농업전문학교 토목과장 김명여(金明呂) 선생이 맡았다. 교사의 작품으로는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는 일본 큐슈(九州)공전 출신으로 진남포 제련소 굴뚝을 설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철원, 김화 주민들은 이 공사에 5∼10일 간‘노력공작대’로 동원됐다. 2개의 교각을 세우고, 북쪽 부분 아치형 교각공사가 완성될 무렵 6·25전쟁이 터졌다.


다리 공사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951년 8월부터 1953년까지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에 미 제3사단 10공병대대 C중대가 미 제101 예비사단 102연대 1대대에 배속돼 주둔하고 있었다.그들은 승일교 남쪽 미완의 아치형 교각에 철제 기둥을 설치하고 미송(美松) 상판을 깔아 임시 개통했다. 미군들에 의해 다리가 완공되던 날 한국인 노무자들은 다리 첫머리에 한자로‘承日橋’라고 검은 글씨를써넣었다는 것이다.


최근 승일교와 관련한 미군 측 기록이 발견됐다.

 

철원평야에 묻힌 ‘전설의 도시’
 


이태준의 소설 속에서는 그의 고향 철원 땅 이름들이 그림지도처럼 다정하다. ‘칠송정, 쇠치망, 안악골, 독서당, 한내천, 밤까시, 새우젓고개, 서문거리…. 소설 속의 지명들이 은근히 암시하고 있는 시대상을 발견하는 것도 이태준 소설의 또 다른 재미이다.


단편‘촌뜨기’에서는 주인공 장군이가 떡전거리에서 새파란 사환아이에게 철썩 따귀를 얻어맞는다. 금성 친정붙이로 쫓아 보내는 아내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사환 아이 자전거에 부딪친 것이다. 관공서 심부름이나 하는 사환 아이에게까지 따귀를 얻어맞는 장거리 민초들의 굽을 대로 굽은 모습을 삽화처럼 표현하고 있다.


장편‘제2의 운명’에서는‘철원역에서 기차를 내려 철길을 따라 서울 쪽으로 약 5리 걸어 용담마을에 이른다.’며 고향집을 기차타고 갈 수 있다고 자랑하고 있다. ‘이따금 우르르하고 기차가 도시풍경을 가득 가득 담은 차창을 끌고 지나갈 때, 나는 꽃이면 꽃을 들고, 고기꾸럼지면 고기꾸럼지를 들고 높이 휘둘러 원산 금강산으로 가는 아름다운 아가씨들의 일빈(一嚬)을 낚아 보는 것도 한내다리에서나 할 수 있는 낚시질이다.


’수필집 <무소록>에서도 그렇게 썼듯이 기찻길 고향마을 풍경은 그가 단골로 쓰던 소재다. 일제가 작심하고 건설한 계획도시 철원이 얼마나 크고, 화려한 지를 은근히 내비치고 있다.


<해방전후>는 그가 남한에서 마지막 찍어낸 소설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현’이 낙향한 강원도 산읍(山邑)이 아마 철원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는 분명히 ‘철도에서 팔십 리를 버스로 들어오는 곳,’‘가까이 임진강 상류가 있어 낚시질로 세월을 기다릴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팔십 리 밖에 역이 있는 임진강 상류, 거긴 그가 소년 시절 얹혀 살던 오촌집이 있는 안협이다. 용담마을 그의 고향집에서는 경원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을 그리며 달려가고 있다. 그는 거기서 한평생을 우향우와 좌향좌를 거듭하며 살았다.


그리고 43세가 되던 해 영원히 좌향좌를 하고 말았다. 소설 속에서도 그는 고향 철원과 결별하고 더 북쪽, 지금은 북한 철원의 군청소재지가 된 안협에 가 있었다. 그가 월북하던 1946년 7월 또는 8월, 그때 철원은 1년여 째 북한의 강원도 도청소재지 노릇을 하고 있었다. 8·15광복과 함께 강원도는 38선 이북으로 넘어간 11개군(철원군, 이천군, 평강군, 통천군, 고성군, 회양군, 김화군, 화천군, 양구군, 인제군, 양양군)의 수부도시가 된 것이다. 그때 철원은 짧았지만‘철원시’로 불리었다.


1946년 9월, 북한은 함경남도 원산시 안변군 문천군과 경기도 일부지역을 강원도에 편입시키는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했다. 그때 도청소재지를 원산으로 빼앗겼다. 일제가 러일전쟁 그 순간부터 유라시아로 가는 길목의 교두보로 삼았던 철원, 북한이 강원도 도청소재지로 삼았던 그‘철원시’, 이태준이 자신의 소설 행간 속에 담아두던 그 철원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철원평야에 숨어있다는 사라진 그 도시 여행은 초봄이 좋다. 겨우내 텅 비어있던 평야에 트랙터가 오가며 거름냄새를 풍기고, 지뢰밭을 가득 메운 아카시아나무 숲 너머로 평강고원의 둥근 어깨가 드러나는 4월이 좋다. 이때쯤이면 겨우내 무채색 풍광에 가려져 있던 옛 도시의 무너진 시멘트 기둥과 벽채, 주춧돌들이 얼굴을 내밀고, 작은 내에 걸려있는 녹슨 철교가 봄볕에 익어 더 검붉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건 한국전쟁과 함께 사라졌다는 도시, 전쟁이 끝났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달려왔을 때 신기루처럼 사라졌던 옛 철원의 자취이다. 철원 사람들에겐 2개의철원이 있다. 구 철원이 또 하나 있다. 어떤 이들은 구철원을‘민북철원’(민통선 북방 철원)이라고도 부른다. 4월은 막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그 벌판, 민통선 북쪽에 있는 옛 철원이 전설로 환생하는 계절이다.

 
민통선 속에 묻힌 옛 철원


DMZ 일대의 군사 작전과 군사시설 보호하고 군사적 보안유지를 목적으로 만들었다는 민통선(Civilian Control Line)의 설정 배경은 이렇다. DMZ 일대는 3년의 한국전쟁 기간 동안 2년간 전장의 한복판이 되었던 지역이다. 전장에 민간인들은 살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 피란민이 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났다. 그들은 귀향을 서둘렀다. 묵어 자빠진 농토를 다시 일궈야 했다.


그러나 1954년 2월 미 육군 제8군사령관의 직권으로 귀농선이 설정되었다. 6·25전쟁이 휴전으로 막을 내린 후 미 육군은 민간인의 귀농(歸農)을 규제하는 귀농선을 설정하고, 그 북방의 민간인 출입을 금지하였다. DMZ는 휴전협정에 의해 설정됐다.


그곳엔 원칙적으로 군대의 주둔이나 무기의 배치, 군사시설 설치를 금지하기로 약속돼 있는 땅이다. 그러나 귀농선은 미군의 직권으로 설정됐다. 그 후 DMZ방어 임무를 한국군이 담당하게 됐다. 한국군은 한국인들에게 토지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1958년 6월, 이 금단의 선을 민간인 통제선(민통선)으로 이름을 바꾸고 통로를 만들어주었다. 군 작전이나 보안상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영농을 허가했다. 민통선 북방지역의 영농은 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한다는 효과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북한의 계획적인 선전촌에대응할 수 있는 수단도 됐다.


그 무렵 북한은 남쪽에서 관측이 잘 되는 지역을 골라 집단농장과‘유령마을’이 분명할 테지만 그럴듯한 아파트촌을 건설해 놓고 있었다. DMZ를 따라 1959년부터 99개의 자립안정촌이 건설됐다. 1968∼1973년에는 12개의 재건촌이 건설됐다. 그리고 1973년 2개의 통일촌이 건설됐다. 주민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에도 출입영농이 허용됐다. ‘일출부터일몰까지’, 즉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만 농사일을 할 수 있는 제도이다.


행정구역이 복구되지 않은 강원도 지역 52개 리, 경기도 지역 51개 리에 출입영농이 허용됐다. 민통선 북방지역 전역에서 사실상 영농이 실시된 것이다. 1985년, 그해는 민통선 인구가 피크를 이뤘다. 민통선 전역에 총 112개 마을, 8,799세대, 3만 9,72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주둔 군인들은‘민통선 사람’임을 확인하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동원했다. 1980년대까지는 남자이든 여자이든 빨간색 야구 모자를 씌웠다. 빨강은 불자동차 외에는 한국인, 특히‘빨갱이 집단’을 코앞에 둔 전선지역에서는 금기된 색이다. 군인들은 역설적으로 빨강 모자를 쓸 수 있는 사람은 특별히 분류될 수 있는 계층이라는 점을 착안했을 것이다. 1990년대는 출입증명서인‘쯩’소지여부를 따졌다. 그리고 2000년대는 검문소 전자감식기에 카드를 집어넣었을 때 거부 반응 유무에 따라 ‘민통선 사람’인지를 따졌다.


1959년 4월 10일 월하리에 72세대가 입주함으로써 철원평야에도‘빨강 야구모자’가 등장했다. 1960년엔 김화 마현리, 1967년엔 대마리, 1971년엔 정연리, 1972년엔 양지리, 그리고 1980년 11월엔 관전리에 ‘민통선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민통선엔 이 선이 설정된 이래 이를 고수하려는 군인들과 이를 밀어 올리려는 주민들의 개척 의지로 늘 힘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언제나 출입절차 간소화, 규제 완화 등을 꾸준히 요구했다. 생존권의 요구는 언제나 절실한 것이다. 농민들은 한 발짝, 한 발짝 민통선을 북상시켰다. 철원평야에서도 민통선을 몇 차례 후퇴했다.


월하리에서 관전리로 자전거로도 달려 올라갈 수 있는 낮은 고개가 넘어간다. 북쪽을 향해 마치 말굽쇠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낮은 산을 밖에서 안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평안북도 혜산이 종점인 3번 국도를 가로막고 있던 철원의 민통선도 그 말굽쇠 고개 너머로 후퇴했다. 고개마루 옛 관전리에서는 늘 북쪽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골짜기에서 퍼져나간 작은 벌판은 점점 넓어지다가 멀리 평강고원에 맞닿아 있었고 둥근 그 고원의 끝은 언제나 하늘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옛 철원은 그 고개마루 아래 전개되고 있었다. 월하(月下), 중리(中里), 관전(官田), 사요(四要), 외촌리(外村里) 등 5개 마을, 그 옛날 철원읍 그리고 짧았지만 강원도청소재지이던‘철원시’의 노른자위 땅은 그 곳에서부터 전개되고 있었다.
철원에선 關東이 보인다


철원평야는 27만 년 전 평강 남서쪽 오리산에서 화산이 폭발했을 때 분출된 용암이 흘러가다 굳어버린 현무암대지이다. 그 끝없이 펼쳐진 검은 바위밭을 일군 태봉국을 왕건이 점령했다. 고려왕국은 옹고집에 포학하기 그지없었던 애꾸눈 왕 궁예의 황성옛터를 돌아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역사도 그 땅을 궁예와 함께 내팽개쳐 버린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 벌판에서 일제가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먼저 철원이 왜 관동과 관북의 관문, 더 나가 유라시아의 교두보 그리고 금강산의 현관인지를 발견했을 것이다.


1914년 9월, 일제는 서울~원산을 잇는 길이 223.7km의 경원선 전 구간을 개통했다. 그러나 현재 남쪽은 용산~신탄리 사이의 89km만 운행하고 있다. 가곡, 평강, 학계, 이목, 검불랑, 성산, 삼방협, 신고산, 석왕사, 용지원, 남산, 안변, 배화, 갈마, 원산에 이르는 북한구간은 지금 ‘강원선’으로 이름이 바뀐 북한철도이다.


남북 구간을 이으면 그 길은 관북, 유라시아로 가는 길이지만, 한편으로는 관공으로 가는 길이다. 1927년 9월 11일, 안변~흡곡 사이에 철도가 놓였다. 1937년 12월 1일 철길은 양양까지 남하했다. 관북 및 강원도지방의 자원 수송이 목적이었다. 양양군 서면 장승리에 자철광광업소가 1937년에 개광되고 광업소에서 양양역까지 자철광 수송을 위한 케이블카도 이때 설치됐다.


그 자원수송로는 관동과 서울을 잇는 여객교통수단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강릉사람들이 양양 역까지 와서 서울 가는 기차를 타기도 했으며 원산여고나 원산사범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의 통학길이기도 했다. 열차는 새벽 5시에 출발하는 첫 열차와 10시, 오후 4시와 9시 등 하루 4차례 운행했다. 금강산 외금강 역을지났기 때문에 금강산 유람객, 수학여행이나 소풍가는 학생들도 이 철도를 이용했다. 동해북부선은 강릉·삼척·울진·포항까지 연장하여 동해남부선을 통해 부산까지 연결시킬 계획이었다. 이 철도는1950년까지 14년 동안 이용됐다.


철원에서는 내금강으로 가는 내륙 길도 보였다. 철춘철도주식회사가 금강산철도를 부설한 목적은 창도 일대에 풍부한 철을 철원을 경유해 경원선을 통해 흥남 제련소로 수송하는 데 있었다. 1921년 철원·창도 구간에 철도부설이 착수되었고 1926년 완공해 기차를 운행했다. 1926년부터 1931년까지 철도를 내금강까지 부설했다. 51.6㎞의 난구간이었다. 화계에서 해발 1,000m의 단발령까지 스위치 백 시설을 하는 등 고도의 토목 및 철도기술이 도입됐다. 그해 7월 1일부터 111.6㎞ 전구간을 전철화 했다.


당시 동력공급처는 금강산수력발전소였다. 북한강 상류를 막아 통천 방면으로 역류시키는 유역변경식 발전 시스템이었으며 1만3,000㎾의 전력을 생산했다. 이 철도는 1936년부터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가 운영하다가 1942년 1월 1일자로 경성전기주식회사가 인수했으며 1945년 8월 15일 이후는 북한이 운영했다.


그러나 1944년 10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수물자 조달용으로 창도·내금강 간 레일을 걷어냈고, 여객과 화물 수요처인 서울과도 교통이 단절됨으로서 북한의 전철 이용은 미비했다. 1937년 기준 여객 15만 3,092명, 수화물 16,420매, 화물 1만 423톤을 수송한 기록이 있다. 당시 운행횟수는 1일 8회, 요금은 7원 50전(쌀 1가마)이었다. 철원, 사요, 동철원, 동송, 양지, 이길, 정연, 유곡 등 본역 3곳, 간이역 4곳은 DMZ 남쪽에 있다. 김화, 광삼, 하소역은 DMZ속에 들어가 있거나 인접해 있다.


그리고 항정, 백양, 금성, 경파, 화감, 남창도, 창도, 기성, 현리, 하파, 화계,오랑, 단발령, 내금강역은 북한 땅에 있다. 따라서 앞으로 복원하겠다는 금강산전기철도는 철원·유곡 간24.5㎞구간이다. 87.1㎞는 유보되는 셈이다. 레일은 걷혀있다. 그러나 철둑, 철교, 전력을 공급하던 송전탑, 옛 역사터는 지금 그 자리에서 유적이 되어 있다. 한국철도사, 특히 전기철도사의 살아있는 역사책이다.


동해북부선의 시발지인 안변역은 지금 DMZ에 관광용으로 복원해 놓은 철원 월정역에서 경원선으로 111.7㎞ 거리이다. 철원 역에서 내금강까지는 111.6㎞이다. 철원은 내외금강에 비슷한 거리의 철도를 연결해 놓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강원도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가장 빠른 수송로를 연결해 놓고 있었다.


철원역에서 관북과 관동과 내금강이 빤히 바라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궁예와 함께 내팽개친 땅. 그러나 일제는 그 땅에서 대곡창의 꿈을 보았을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유독 철원평야에 눈독을 들였던 것 같다. 그들은 제대로 개간되지 않은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철원에 첫발을 디뎠을 때, 이 대지는 논보다는 밭이, 농경지보다는 황무지가 더 넓었을 게 분명했다.


한일합방은 1910년에 이뤄졌지만, 일본은 이미 2년 전인 1908년부터 한국 전역의 토지조사를 시작했다. 일본의 국책회사 동양척식은 이 조사를 토대로 1924년까지 철원평야 6만㏊를 소유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과 원주민인 조선인은 결코 남남이 아니라고 선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일본 민간 기업은 착취를 위한 이 농장이름을 우린 결코 남남이 아니란 뜻으로 ‘불이(不二)농장’이라고 지었다.


그 농장은 1만 240㏊를, 팔랑(八郞)농장은 1,000㏊를 소유했다. 1937년 일본이 발간한 철원읍지에는 당시 철원읍 인구가 4,269가구, 19,693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학교 5, 은행 4, 행정기관 34, 여관 식당 술집은 103 군데나 됐다. 1932년 작은 촌락이 읍으로 승격된 이래 커다란 도시로 발전한 것이다. 1990년대 초에 발행된 철원군지는 1945년 8월 15일 현재 철원읍 인구가 37,855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철원평야가 묻혀 있다는 ‘1940년대의 도시, 옛 철원’은 사실인 것이다.

 


결국 無知가 마저 파괴한 도시


그 옛 철원이 전쟁 후 단 한 번 영화 속에서 그 처절한 모습을 비춘 적이 있다. 1965년 박상호 감독이 내놓은 영화‘비무장지대’에서는 전쟁고아가 된 남매가 비무장지대 안에서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 그때 무대가 됐던 폐허의 도시가 옛 철원이다. 영화 속의 도시는 처절하게 무너져 내려 있었다. 그러나 즐비한 시멘트 더미와 수십 개나 되는 창문을 달고 있는 건물 벽체들은 상상 밖으로 큰 그 도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했다.


그 도시를 군인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세기동안‘출입영농’이 지배했다. 따라서 지금 남아 있는 그 도시는 영화‘비무장지대’속에 모습을 드러냈던 전쟁이 앗아간 그‘철원시’가 아니다. 반세기 동안 헐리고, 다듬어지고, 농경지에 밀려난 도시의 흔적일 뿐이다. 이 때문에 그 도시를 찾아갈 때는 늘 보물찾기 하듯 조심스러워야 하며, 퍼즐을 맞추듯 온갖 상상을 짜깁기 해야 하는 것이다.


옛 철원의 시가지는 처음부터 2차선 도로로 설계되었던 것 같다. 대각선으로 마주보고 서 있는 두 건물 잔해 사이로 난 군사도로가 최근 2차선 아스팔트로 포장됐다. 마치 새 도시계획대로 도로를 내고 건물을 지은 것처럼 딱 들어맞았다. 건물과 도로 사이가 4m나 5m쯤 떨어진 것이 좀 이상했지만, 인도를 내고 측백나무 울타리 안에 작은 앞마당을 낸다면 그만큼은 필요한  공간이다. 그 도로를 따라가며 서있는 철원제일감리교회, 노동당사, 농산물검사소, 얼음창고, 철원 제2금융조합은 이젠 웬만한 사람이면“아, 저거”하고 아는체를 할 만큼 낯이 익혀졌다.


철원제일교회의 대리석 현관 기둥은 밑둥만 남아 있다. 중국인 벽돌공이 쌓았다는 벽체는 교회 뒤쪽 한아름 넓이로 겨우 보존돼 있다. 한강 이북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손꼽혔다는 이 건물은 건축선교사라는 특별한 직함을 가지고 있던 W. M. Vories의 작품이다. 그는 유독 이화여대 캠퍼스에 애착을 보이기도 했다. 이화여대 본관, 체육관, 음악관 등 총 10여 개의 건물이 그의 작품이다. 이화여대를 짓고 원산중앙교회, 철원제일교회, 태화사회복지관, 평양요한학교를 차례로 설계했다. 철원제일교회는 보리스를 대표하는 한국내 건축으로 평가받을 만큼 당시 걸작이었다.


노동당사는 기념사진 찍는 곳으로 더 유명해 졌다. 카메라 파인더에 노동당사가 다 나오도록 하자면 도로 건너편 태극기, 새마을기, 철원군기가 나부끼는 게양대에서 찍어야 한다는 등 포토라인을 아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 건물의 건축미가 어떻고, 공법이 어떻다는 얘기를 들려줄 사람은 없고, 수많은 반공인사들이 그 안에서 고문당했다는 얘기는 식상해 있었다. 우르르 몰려가 사진 한 장을 찍고, 간이휴게소 화장실을 다녀오면 끝이다.


한국의 상수도 역사는 길지 않다. 그러나 철원에는 1936년 1일 급수량 1,500톤의 상수도가 건설돼 2,500명이 수돗물을 먹었다. 율리리의 철원수도국 저수탱크와 정수장은 북한군이 300여 명의 양민을 수장시켰다는 슬픈 얘기를 담고 그 자리에 남아있다. 구 철원경찰서의 건축연대는 미상이다. 관전리 언덕 위의 이 집은 일제시대엔 서슬 퍼런 일본인 순사들이 근무했을 것이다. 해방 직후 소련군이 북위 38도 이북을 점령했을 때는 그들의 주둔군 사령부였으며, 공산치하에서는 철원군 내무서였다. 그 옆에 60 베드 규모의 강원도립철원의원의2층 벽돌건물 자리도 남아 있다.


1936년 기준 철원읍세(鐵原邑稅) 일반자료에 따르면 당시 조선식산은행 철원지점의 예금고는 일본 돈으로 1,788만 원, 대출고는 1,205만 원. 동주금융조합의 예·대금은 113만 원과 63만 원, 철원금융조합은 78만원과 33만 원, 철원 제2금융조합은 50만 원과 34만 원이었다. 관전리에는 식산은행, 동주금융조합, 철원금용조합이 금융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제2금융조합만 외촌리에 혼자 떨어져 있었다. 이들 은행 건물은 모두 파괴됐다. 철원 제2금융조합만 커다란 벽난로 같은 금고자리를 지키고 있다.


왜가리는 옛부터 명당을 찾아와 둥지를 트는 새로 알려져 왔다. 군청도 그 고장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잡아 짓는다. 그렇다면 옛 철원군청 자리는 명당자리가 틀림없다. 수 백 마리 왜가리가 날아와 앉아 지뢰밭 아카시아 나무숲을 하얗게 물들이는 왜가리 서식지는 목조 기와집이던 철원군청이 있던 자리다. 공산치하에서도 역시 최고 행정기관인 철원인민위원회가 들어가 있던 곳이다.


사요리 지뢰밭은 철원보통학교 자리다. 1906년 4월 30일 개교해 해방당시 한 학년에 송(松), 죽(竹), 매(梅), 앵(櫻) 4학급씩 24학급 2,600명이 재학하던 학교이다.공산치하에서도 학교는 계속돼 37, 38, 39회 등 모두 3회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했다.


여공이 1,000명이나 됐던 종연방적 철원공장 자리는 원래 경마 20필이 달리던 경마장이었다. 그 경마장 자리에 1932년 제사공장이 들어섰다. 이 공장은 공산치하에서도 평강·김화·금성·화천·포천·연천에서 생산된 누에고치를 수집해 가동했다.


얼음 창고는 그 외양만으론 그 이름 자체가 실감 나지않는 건물이다. 신라시대 사람들도 얼음 창고인 석빙고를 지을 때 한 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도록 건축적 기법을 발휘하는 지혜를 보였다. 그에 비하면 땅 위에 덩그렇게 서 있는 철원평야 얼음 창고는 그냥 직사각형시멘트 구조물일 뿐이다. 오히려 겨우내 산명호 얼음을 깨어다 쌓아놓았다가 한여름 호사가들의 피서용으로 팔아먹은 일본상인의 상혼이 더 번쩍이는 것 같았다.


농산물검사소는 일본인 관리가 농산물의 품질조사를 하면서 유난히 한국농민에게 까탈하게 굴던 곳이었고, 철원이 북한 땅이었을 때는 찬바람이 쌩쌩 이는 북한검찰청사로 쓰이던 곳이다.


옛 번화가를 지나 외촌리에 이르면 80명의 역무원이 근무하는 2층 붉은 벽돌역사와 구름다리, 금강산전기 철도회사와 전철차고도 들어앉아 있었다는 철원역이다. 부지만 5만평에 이르던 경원선의 가장 큰 경유 역엔 지금 아무 것도 없다. 녹슨 철길, 엉성한 플랫폼, 어쩌면 불이 들어올 것 같은 신호기가 서 있지만 모두 관광용으로 재현한 이미테이션이다.
이 도시의 마지막 모습은 어땠을까. 영화‘비무장지대’에 무심코 모습을 드러냈던 옛 철원 최후의 모습조차 지키지 못한 것은 누구 책임일까. 누가 이 도시를 파괴했으며, 그 파괴된 도시를 누가 증거인멸 하듯 청소해 놓았을까. 철원에서 만난 한 노인은 “철원역은 2차대전 때 B-29 폭격을 맞고 파괴됐다.”고 말했다. 옛 철원은 일본이 패망하기 전부터 이미 부서지고 있었다는 단서이다. 또 한 노인은“철원 시가지가 B-29 조종사들의 폭격 훈련장이 됐다.”고 말했다. 그건 옛 철원 도심이 재래식 무기들의 탄약 처리장으로 이용됐을개연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어떤 노인은 1956년 여름“3층집 철원제일교회 지붕 밑에서 비를 피했으며, 대리석 벽돌 따위를 뜯어다 집을 지었다.”고 말했다. 그건 도시가 마지막으로 부서진 것은 전쟁 후였다는 증언이며, 한편으로는 피라미드의 벽체를 뜯어다 건축자재로 쓰던 그 수탈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결국 이 도시를 앗아간 것은 전쟁과 무지였던 셈이다. 그 도시의 길과 집의 내력을 담은 두꺼운 역사책 한 권, 그 도시 사람들의 말과 생각을 담은 설화집 한 권을 묻어놓고 옛 철원은 사라졌다.

 

철원 노동당사 ‘북한의 건축’일까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북한 노동당 철원군당사 24계단에는 셔먼탱크의 캐터필러 자국이 박혀있다. 계단은 나이가 들었다. 닳고 헐었다. 탱크의 자국도 이미 환갑나이를 먹었다. 닳고 헐고 메워져 겨우 흔적만 남아있다. 그래도 그 자국이 내 말을 좀 들어보라며 속삭이고 있다.

1950년 10월, 유엔군은 전 전선에서 북위 38도선을 회복했다. 미군 셔먼 탱크들은 3번 국도를 따라 철원평야를 횡단하고 있었다. 남해안 삼천포에서 시작된 이 국도는 압록강변 초산이 종점이었다. 그들은 초산까지 단숨에 달려갈 기세였다. 잿더미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던 남북전쟁의 북군 영웅 윌리암 셔먼의 이름값답게 그들 앞에서 나치의 타이거탱크는 새발의 피였다. 그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주역들이 한국전선에서 북진하고 있었다. 갑자기 셔먼 탱크가 멈춰 섰다. 90도로 방향을 틀어 노동당사와 정면으로 마주섰다. 노동당사, 공산당의 심벌, 수탈의 건물 그리고 철원, 평강, 김화 포천, 연천지방을 장악하며 반공인사들을 사찰하고 무자비하게 고문하던 공포의 공안기관, 비표를 단 공산당 열성당원들이 내부공사를 했다는 비밀스러운 건물, 1950년 10월에서 1952년 6월 사이 양민 500명을 총살한 기록이 있는 끔찍한 처형장, 이를 증명하듯 한국군 수색대가 집단 학살 사체를 발굴한 곳. 노동당사, 그건 저주의 건물이었다.

탱크는 기압 소리처럼 굉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돌진했다. 계단? 그건 장애물에 불과했다. 거침없이 계단을 무너뜨리며 정문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서서히 포신을 수평으로 내려 그 저주의 그 건물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스트레이트를 날리려는 복서처럼 탱크는 잔뜩 몸을 웅크렸다. 시뻘건 불덩어리를 토해내는 순간이었다. 탱크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들썩 몸을 솟구치고 시커먼 연기 속에 묻혀버렸다. 벽돌덩어리, 나무토막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잠시 후 탱크는 후진해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승리의 세레머니인 듯, 온 몸의 먼지를 털듯 포신을 위아래, 좌우로 흔들며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정말 초산까지 가려는지 북쪽으로 사라졌다.

물론 상상이다. 그러나 그런 추리가 가능할 만큼 노동당사의 정문 맞은 편 벽은 소형자동차가 빠져나갈 만한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뚫린 벽으로 낮은 언덕이 들어와 앉아있다. 벽을 뚫고 나간 포탄은 그 언덕에 명중했을 것이다. 정말 포탄이 떨어진 자리인지 움푹 파인 구덩이 하나가 늘 대나무만 한 큰 키의 돼지풀섶에 가려져 있었다. 어떤 이는 철사 줄에 묶인 수십구의 사체가 발견됐다는 문제의 방공호가 그 구덩이라고 주장했다. 그 슬픈 언덕 넘어 철원평야 위로 빈 하늘이 펼쳐졌다. 노동당사 감상법은 그렇게 뚫린 벽에 서서 분노에 찬 눈으로 그 언덕을 바라보거나 상념에 찬 눈으로 멀리 철원평야를 바라보다 돌아오는 것이다.


‘ 북괴 노동당 철원군당’의 罪牌


철원, 그 대읍부향(大邑富鄕)은 지금 흔적만 남아있다. 관전리에 겨우 우물터만 남아있는 조선식산은행 철원지점, 동대문 밖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었다는 철원제일감리교회, 달랑 금고 자리만 남아있는 철원제2금융조합 등의 유지가 철원읍 전성시대의 흔적이다. 농산물검사소의 원명은‘곡물검사소 철원출장소’이다. 철원지방의 농산물 품질 검사하던 이 건물은 해방 후 북한이 검찰청 간판을 달았다. 문만 만들어 달면 지금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이 건물 맞은편에는 얼음 창고가 서있다. 비중이 작아 물에 뜨는 돌, 부석(浮石)은 큰 구멍이 숭숭 뚫린 화산 분출물이다. 열전도율이 작기 때문에 그 돌로 빙고(氷庫)를 지을 수 있다. 한탄강 고석정 칠담, 용이 산다는 현무암 동굴은 그 옛날 천연 빙고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재에 밝은 일본인 식당주인이 거기서 힌트를 얻었을 것이다. 그 창고는 겨울에 산명호의 얼음을 채취해 놓았다가 여름에 꺼내 팔던 인공 빙고였다. 비교적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건물은 그런 것들이다. 대읍(大邑) 철원, 그 전설의 도시는 이미 오래 전 싹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유독 노동당사만 독야청청하다. 비록 지붕이 벗겨지고, 3층 바닥이 내려앉았지만, 벽체가 떼어져 나가고, 성한 자리 하나 없이 총알 세례로 곰보 벽이 되었지만, 서슬 퍼런 그 기백은 아직도 쌩쌩하다. 정수리가 함몰되고, 옆구리에 구멍이 뚫렸지만, 성냥갑을 확대해 놓은 것 같은 직육면체의 꼿꼿한 모습은 한 점 흐트러진 데가 없다. 평양의 누가 저 모습을 보았다면 철원평야의 일제 잔재를 다 쓸어버린 최후의 혁명가, 온갖 회유와 협박을 참고 견뎌 온 비전향수 또는 아직도 저항하고 있는 최후의 파르티잔으로 비유했을지 모른다. 정말 노동당사의 끈질긴 생명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이 작심하고 설계한 매우 특별한 건물일까. 그래서 철원평야에 즐비하던 일제의 모든 건물이 흔적도 없이 박살났는데도 그 혹독한 전화를 견뎌낸 것 일까. 그러나 너무 견고해 포화를 이겨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말이다.

 

‘ 무철근 큰크리트 벽돌조’라는 이 상한 공법을 쓴 노동당사야 말로 약하디 약한 건물이다. 이를 증명하듯 노동당사 3층 바닥은 송두리 채 무너져 2층 바닥 위에 얹혔다. 지붕 서까래를 얹었던 부분에만 비죽비죽 쇠못이 솟아있다. 기와 덮기를 한 지붕을 그 쇠못이 지탱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지붕이 손바닥만큼도 남지 않고 다 날아가 버렸다는 것도 노동당사는 애초부터 지진 같은 천재지변을 염두에 둔 건물이 아니라는 증거다. 다만 모양만 육중하고 위엄 있게 폼을 냈던 것 같다. 비록 외관이긴 하지만 그 건물이 쌩쌩하다는 것이 몹시 헷갈리는 것이다. 해답을 계단에 새겨진 캐터필러 자국이 암시하고 있었다. 공산군에게 노동당사는 깃발 같은 것이다. 들고 갈 수 있다면 그들은 가져갔을 것이다. 한국군으로서는 기필코 빼앗아야 할 대상이다. 얼마나 악이 받쳤으면 정문을 향해 탱크로 밀고 올라가 봤을까. 계단에 새겨진 탱크자국에 성난 병사의 북받치는 숨소리가 묻어있는 것만 같다. 따라서 노동당사는 평강 고원 너머로 도망가는 공산군으로부터 노획한 전리품인 것이다.

전리품 취급을 한 기록도 남아있다. 1984년 9월 29일과 12월 4일 북한은 인천항과 동해안 북평항 그리고 판문점을 통해 태풍 셀마가 할퀴고 간 중부지방에 수해물자를 보내왔다. 그 고도의 정치적 제스처를 계기로 남북관계는 해빙무드에 접어들고 있었다. 머지않아 통일도 될지 모른다는 기대를 하는 이들도 많았다. 한국인에게는 공통적으로 통일 얘기만 나오면 DMZ를 연상하는 버릇이 있다. 최전선 고지에 올라가 철책선 너머 DMZ와 북한 땅을 바라보려는 민통선 출입 수요가 늘어났다. 철원평야의 무너진 전쟁유적들이 그때 일제히 자신의 이름을 찾아 명찰을 달았다.‘ 철원제일감리교회’‘얼음창고’‘철원역’‘월정역’등… 노동당사는 특별한 명찰을 달았다. 이 건물은 구체적으로 그 내력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건물 이마에 머리띠처럼 긴 판자 띠를 달았다. 가로 6m, 세로는 1m 쯤 되는 기다란 간판 모양의 판자엔‘이 건물은 6·25 전 북괴 노동당 철원군당으로 국민을 착취하던 곳이었음’이란 글이 씌어있었다. 화난 사람이 쓴 것처럼 약간 흘림 글씨였다.‘ 북괴노동당’의5자는붉은 글씨로 강조했다.

그 글은 사람들에게 이 전리품을 맘껏 조롱하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죄 패를 붙이고 처연하게 서있는 그 모습에서 문득 골고다 언덕의 예수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때 예수도 조롱받고 있었다. 십자가에 양손과 양발을 못 박힌 지 6시간 만인 금요일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 마르코(Saint Mark)는 사도 베드로의 통역비서를 하면서 전해들은 금요일의 그 사건을 수식 없는 문체로 신약성서에 이렇게 기록 했다. “군병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찌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 쌔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으니라. 그 위에 있는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마가복음 15:16-32)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의 머리맡 죄 패에는‘유대의 왕, 예수’라고 씌어있었던 것처럼 노동당사는 그 커다란 송판 띠를 머리에 쓰고 있었다. 골고다 언덕의‘유대의 왕’처럼‘북괴노동당 철원군당 으로 국민을 착취하던 곳’이란 죄 패도 달고 있었다. 그리고‘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했던 것처럼, 노동당사를 찾아오는 이들에게“이 건물을 저주하라”고 충동하고 있었다. ‘ 남한 현대사의 유일한 북한 건축’ 남북관계는 때때로 벼락같은 변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李仁模)의 북한 송환은 놀라운 뉴스였다. 해방 후 노동당에 입당, 공산주의자가 된 그의 노동당 이력은 공교롭게도 해방 직후 태어난 노동당사와 일치한다. 1952년 빨치산 토벌대에 검거돼 7년간 복역한 그는 좌익 지하활동을 하다 다시 체포된다. 두 차례에 걸쳐 34년간 옥살이를 했다.

1988년 석방된 그는 이듬해 월간‘말’지에 북에 있는 가족을 그리는 수기를 연재한 것을 계기로‘그를 북으로 보내주자.’는 의외의 운동이 벌어졌다. 1993년 3월 19일 그는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돌아갔다. 그에게 이젠‘비전향 장기수’의 꼬리표가 아무 의미 없었다. 그 무렵 노동당사도 머리에 달고 있던 죄 패를 떼어냈다. 1994년 6월 26일 밤,‘ 비무장지대 노동당사 평화를 위한 열린 음악회’란 긴 이름의 공연이 열리던 그 밤, TV 화면에는 그 거추장스러운‘죄 패’가 비치지 않았다. 노동당사 앞면 42개의 부서진 창문엔 그날 밤 50여 년 만에 불이 밝혀졌다. 테라스와 창문 위에 사람이 올라서 있었다. 그들은 마네킹처럼 서있지만 모두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동당사가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 저주의 건물에 평화를 덧씌우기 한 기막힌 이벤트에 노동당사는 마침내‘전향’하고 있었다.

북으로 돌아간 이인모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는 ‘신념과 의지의 화신'으로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를 다룬 영화와 찬가까지 만들어졌다. 모교인 파발인민학교는‘리인모인민학교’로 개명됐다. 2007년 6월 16일 그는 80세로 사망했다. 60년을 공산주의자로 살면서 그 가운데 34년을 공산주의를 위해 옥고를 치를 그의 장례식은‘인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시신은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그런 이인모의 소식을 듣는 동안 노동당사에서도 많은 일이 벌어졌다. 1994년, 그 무렵 그룹‘서태지와 아이들’은 젊은이들에게 전설이었다. 그해 8월, 3집 앨범‘발해를 꿈꾸며’의 뮤직비디오 배경으로 노동당사가 찍혀나갔다. 이미‘열린 음악회’에서 평화를 염원했던 노동당사는 순식간에 평화의 상징물로 각인 됐다.

그해 영변 핵 기지 실험용 원자로에서에서는 사용 후 폐연료봉을 재처리한 사실이 발각됐다. 핵무기 제조용 플루토늄을 추출한 사실이 밝혀지자, 미국 클린턴 정부가 영변 폭격계획까지 세웠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와중에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 또 북한의 정치공백이 전쟁을 일으키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휩쓸었다. 그러나 그런 극도의 긴장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거긴 이미 평화 NGO들의 순례지이며, 공연장이자 전시장이 되고 있었다. 2000년 10월 21일 오후 ASEM 서울 대회에 참가한 세계 민간단체(NGO) 리더들은 한국의 그 많은 볼거리를 제쳐놓고 노동당사를 찾아갔다. 그들은‘캐터필러의 계단’에서“한국 DMZ를 평화의 텃밭으로 만들자.”는 평화지대 선언문을 채택했다. 작은 키, 동근 얼굴, 긴 머리에 검정 색 트랜치 코트를 입은 여성이 있었다. 그녀가‘평화를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겠다고 말할 때까지 아무도 그녀가 아일랜드의 민중가수인 줄 몰랐다. ‘나는 간절히 원한다(There is something inside so strong)’를 선창하자 이내 합창이 돼버렸다. 평화를 염원하는 세계시민의 공연이 이뤄진 셈이다.

그때 노동당사는 한 미술대학 졸업반 학생들의 작품 전시장이 돼있었다. 금가고 깨어지고, 어떤 곳엔 총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거친 벽을 따라 한반도기 가 그려진 수십 장의 손수건이 걸려 있었다. 설치작품 속의 크고 작은 거울들은 제각기 만추의 평화로운 평야 풍경을 흉물스러운 건물 안으로 끌어들여 놓고 있었다. 급기야 한국문화재청이 1900년 이후 지어진 보전가치가 있는 건축물 208가지를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때 노동당사도 그 반열에 올랐다. 2002년 5월 27일 근대문화 유산 등록문화재 제 22호로 지정됐다. ‘남한 현대사에 남아있는 유일한 북한 건축’이라는 사실이 지정 이유였다. 노동당사는 마침내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관광혁명 금강산전기철도

“감영 안(營中)이 무사(無事)하고, 시절이 3월인 때, 화천(花川)의 시냇길이 금강산(楓岳)으로 뻗어 있다.
행장을 간편히 하고, 돌길에 지팡이를 짚고, 백천동을 지나서 만폭동 계곡으로 들어가니, 은(銀) 같은 무지개 옥같이 희고 고운 용의 꼬리 같은 폭포가 섞어 돌며 내뿜는 소리가 십리 밖까지 퍼졌으니, 멀리서 들을 때에는 우렛소리(천둥소리) 같더니, 가까이서 보니 눈이 날리는 것 같구나.”

 


지금 관동별곡의 그 길 발자국을 밟으며 금강산전기 철도가 따라가고 있다. 그 옛날 일본의 구상은 그 철도를 외금강까지 연장해 안변에서 양양으로 이어진 동해북부선과 연결한다는 것이었다. 영락없는 강원도 관찰사 송강의 순회로(巡回路), 관동별곡의 그 길인 것이다. 그러나 철원 유곡리에서 한 번 끊기고 다시 김화 암정리에서 마저 끊긴 그 길로 이제 전철은 가지 않는다.

 


금강산전기철도. 그 냉전유적은 그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다. 철원역에서 출발한 금강산 전철은 사요, 동철원, 동송, 양지, 이길역을 지나 6번째 역인 정연역에 도착했다. 철원에서 정연리까지는 18km. 몇 군데 잡초에묻힌 녹슨 다리 허리엔 ‘금강산 가는 철길’이란 흰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철도는 정연리에서 한탄강을 건너갔다. 철교는 ‘금강산 90키로’란 흰 글씨를 허리에 붙이고 강을 건너 민들레 벌판에 당도했다. 이토록 슬픈 듯, 애달픈 듯 이름을 가진 지명이 있을까. 그러나 민들레 벌판엔 민들레가 피지 않는다. ‘민들레 벌판’은 전쟁이 빚어낸 지명이다. 전쟁 전엔 거기 그런 이름을 가진 벌판은 없었다.

1987년 여름, 철원군지 편찬위원들은 생뚱맞게 등장한 ‘민들레 벌판’이라는 지명을 놓고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모두들 그 벌판에 나뒹구는 현무암 덩어리, 천연두 자국보다도 더 박색으로 얽은 숭숭 구멍 뚫린구멍돌, ‘곰보돌(variolite)’에 혐의를 두고 있었다.


그 돌은 고열에 견디다 못해 온몸에 다닥다닥 발진을 일으키는 천연두를 앓은 어린아이 얼굴이었다. 바위마다 돌마다 온통 새까맣게 타다 못해 온몸에 가스가 빠져나간 구멍으로 박박 얽어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남남서에서 북북동 방향으로 양분하고 있는 추가령 열곡대, 그 불안한 협곡에서 30만 년 전 화산이 폭발했다. 평강 서남쪽 5km 거리에 솟아 있는 오리산(鴨山) 그리고 경원선 검불랑역 부근 680고지였다. 철원과 평강, 이천, 김화, 회양에 엄청난 현무암대지를 만들었다.


한탄강이 이 용암대지를 갉아내 곰보돌을 끊임없이 남쪽으로 굴려 내렸을 것이다. 한탄강에 커다란 현무암 돌덩어리 들판이 형성됐다. 철원사람들은 그 구멍 숭숭 뚫리고, 박박 얽은 돌덩어리들을 ‘구멍돌’이라고불렀다. 나중엔 ‘구’자도 빠졌다. 그냥 ‘멍돌’로 고쳐 불렀다.

 

멍돌로 뒤덮인 벌판 ‘멍돌 들’은 마을에서 멀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바위 벌판이기 때문에 사람들의머릿속에서도 먼 ‘먼 멍돌 들’이 됐다. ‘구멍돌’도 ‘멍돌’이 되는 판에, ‘먼 멍돌 들’은 어느새 ‘먼들’이 됐을 것이다. 이 지방의 방언음운은 ‘ㅓ’ ‘ㅕ’를 ‘ㅔ’로 발음하는 버릇이 있다. 철원이 낯선 군인들에게는 ‘먼들’이 ‘멘들’로들렸을 것이다. 미군은 작전지도에 이 ‘먼들’을 ‘Mendle’로 표기했다.

 

어떤 이들 귀에는 영어로 옷을 갈아입은 ‘먼들’이 ‘민들레’로 들렸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그걸 ‘민들레’로읽기도 했을 것이다. 정작 이 민들레 벌판엔 민들레가 피지 않는다.


민들레 벌판의 신화

 

민들레 벌판을 동서로 가르며 한탄강이 남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그리고 DMZ와 금강산전기철도가 한탄강을 건너 나란히 민들레 벌판을 남북으로 가르며 동쪽으로 달려가고 있다. DMZ와 금강산전기철도와 한탄강이 만나는 그 민들레 벌판 언덕은 그 옛날 시인묵객의 체취가 묻어나는 곳이다.


‘창랑의 물 맑으면 갓끈을 빨 것이요, 창랑의 물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던 굴원의 어부사를 민들레 벌판에서 만난다는 것은 참 의외이다.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월탄(月灘) 황근중(黃謹中)은 조선조 광해군 원년(1608) 광해정란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정연리 민들레 벌판에 정사를 짓고 하필 어부사의 시구를 따다 ‘창랑정(滄浪亭)’이라고 편액했다.


그러나 지금 민들레 벌판에서 그 이름은 너무 호사스럽다. 병자호란을 겪던 인조 13년 육진서 돌아오던 월탄의 외손 정대화(鄭大和)는 외할아버지가 지은 창랑정에 투구와 갑옷을 벗어 걸어두었다. 청나라 병사 ‘조선 장수의 집’이라며 창랑정을 불태웠다. 월탄의 5세손 참봉 황손(黃遜)이 할아버지의 그 창랑정을 복원했으나 6・25전쟁 와중에 전소됐다.


창랑정은 혼자 멋을 부리기가 쑥스러운 듯 한탄강가의 육모정(六牟亭), 무릉정(武陵亭), 적벽(赤壁), 약수(藥水), 월탄(月灘), 백운봉(白雲峯), 풍혈(風穴)을 모아 ‘정연 8경’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금 여기가 월탄이고 저기가 백운봉이라고 짐작될만 한 곳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전나무 숲이사라진 ‘정연 8경’은 별 볼일 없는 바위 언덕이다.


금강산전기철도는 이 바위언덕 위에 현대판 전설 하나를 새겨놓았다. 철길 없는 금강산전기철도변에서 천연덕스럽게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전선휴게소’의 사연은 이렇다. 전선휴게소 주인 김영범・김순희 부부는 민통선마을 정연리 출신들이다. 멍돌 바위 틈새로 영산홍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봄날이었다.


동네오빠와 동네동생은 남몰래 한탄강 멍돌 바위 뒤에서 마주 앉았다. “오빠는 희망이 뭐야?” “나는 저 푸른 민들레 벌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평생 살 거야.” 마침 남진의 노래 ‘님과 함께’가 공전의 히트를 하고 있었다. “오빠의 사랑하는 우리 님은 누군지 참 좋겠다.” 동생은 그가 누군지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오빠는 숨이 막혀 더 이상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동생도 숨이 막혀 더 이상 물을 수 없다고 말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리고 남편은 연애시절 약속을 지켰다. 민들레 벌판이 개간되기 시작됐다. 남편은 군청을 찾아가고, 군부대에 애원하며 10여 년을 매달렸다. 그리고 전선휴게소를 지었다. 정말 ‘푸른 민들레 벌판 위에 세워진 그림 같은 집’이었다. 하필 왜 전선휴게소일까? 언젠가 끊어진 저 철길이 이어져 열차가 오게 될 것이다. 그때를 기다리며 미리 휴게소를 세운 것일까?


민들레 벌판에서도 철길은 농로로 변해 있었다. 농로는 유곡리에서 끝났다. 북쪽의 오성산과 남쪽의 성제산 사이에 넓은 개활지가 펼쳐졌다. 철길이 그 DMZ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무심히 DMZ 한가운데를 지나 구김화읍 읍내리를 향해 다시 남쪽으로 빠져 나오게 될 것이다. 읍내리 앞으로는 남대천이 흐르고 있다. 50리밖 금성에서 흘러오는 강이다. 그 옛날 금강산 가는 철길과 도로는 모두 이 강을 거슬러 나란히 북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길들은 지금 암정리에서 모두 끊겨버렸다. 남대천 철교마저 철책선 앞에서 무너져 있었다.


그동안 금강산전기철도는 역과 역 사이를 5리, 10리 간격으로 아기자기하게 이어져왔다. 철원~사요(四要)1.6~동철원 3.2~동송(東松) 6.0~양지(陽地) 10.3~이길(二吉) 14.2~정연(亭淵) 17.5~유곡(楡谷) 21.5~금곡(金谷) 24.5~김화(金化) 28.8km. 그 남한 땅 10개 역은 지뢰밭에 풀 섶에 묻혀있다.


그리고 북한 땅 14개 역은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광삼(光三) 33.0~하소(下所) 36.3~향정(杏亭) 40.1~백양(白楊) 45.8~금성(金城) 51.0~경성(慶城) 54.0~탄감(炭甘) 59.6~남창도(南昌道) 65.6~창도(昌道) 67.6~기성(岐城) 75.3~현리(縣里) 82.7~도파(桃披) 90.0~화계(花溪) 94.7~내금강(內金鋼 ) 116.6km.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는 말은 옳다. 1944년 이후 열차는 마의태자의 망국한(亡國恨)이 서린 단발령을 넘
어가지 않았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일본은 창도에서 내금강까지 50km에 이르는 오로지 관광 목적의 이사치스런 철도를 걷어내 군수물자로 조달했다.


그 후 금강산 전철은 금강산까지 가지 못했다. 나머지 역들도 6・25전쟁 발발 당시 북한의 전쟁물자 수송을 끝으로 모두 사라졌다. 철원~내금강 간 116.6km 구간 가운데 지금 전철이 움직이는 곳은 없다.
사라진 전철, 그 냉전유적이 복원된다. 우선 남쪽 구간 철원~유곡 간 22.9km를 복원키로 했다. 이 사업에투입될 예산은 437억 1,000만 원이다. 산술적으로 그 다섯 배인 2,200억 원을 투입하면 전구간의 복구가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북한은 북쪽 구간을 복구할 의사가 없을 것이고, 재원조달 방법도 없을 것이다. 결국 투자비용이 고스란히 남쪽 몫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그것도 북한이 문을 열어줄 때만 가능할 것이다.


반조각도 못 되는 5분의 1 조각 금강산 전철 관광열차는 당분간 철원~유곡 간을 왔다 갔다 하며 DMZ관광이나 하게 될지 모르며, 전선휴게소 김씨 부부는 승차권을 팔며 조금 일거리가 늘어나게 될 것이다. 금강산 전철의 복원, 그것은 잃어버린 반세기 세월을 복원하는 것이다. 번득 의문 하나가 뇌리를 스치고 있다. 누가, 왜 금강산 전철을 놓았을까.

 

어떤 기록은 금강산전기철도 건설은 창도 일대에 무진장으로 묻혀 있는 유화철이 발단이라고 적고 있다.
일본은 이 유화철을 어떻게 본국으로 반출할지를 찾고 있었다. 일제는 전략물자 조달을 위해 적재적소에 제련소를 세우는 정책을 채택, 1933년 10월 함경남도 흥남 흥남제련소를 세웠다. 진남포제련소, 장항제련소와 함께 이 땅의 3대 제련소였다.


1914년 경원선이 개통됐다. 창도 일대의 유화철을 철원으로 끌어내면 경원선을 통해 흥남으로, 다시 일본으로 손쉽게 반출할 수 있었다. 철춘(鐵春)철도주식회사의 ‘철춘’은 철원과 춘천의 첫 자를 따다 붙인 이름이다. 1921년, 그 회사가 철원역에서 추가령 열곡대를 따라 가장 토목경비가 적게 드는 경제성 있는 철도부설을 착수했다. 1926년 창도까지 철도가 이어졌다. 유화철 화차는 증기기관차가 끌고 다녔다. 창도를 출발
한 기차는 철원으로 나와 경원선을 타고 평강고원을 넘어 흥남제련소로 들어갔다.


창도에서 내금강까지는 지척의 거리이다. 창도에서 유화철광이 터지자 금강산 관광수요가 폭발했다. 1931년 7월 1일, 창도~내금강 간 50km에 이르는 이상한 철도가 부설됐다. 전력을 공급하는 전기철도가 등장했다. 전기기관차는 내친김에 철원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철원역에는 이 철도를 운영하는 금강산 전기철도 주식회사가 설립됐다. 총 연장 116.6km, 소요시간 4시간, 역무주재원 역 14개, 간이역 14개소를 갖춘 관광철도가 등장한 것이다. 1937년도 통계(철원읍지)에 따르면 하루 8회를 운행하던 그해 이 철도를 이용한 승객수는 15만 3,992명이었으며, 수하물량은 1만 6,420개에 1만 423톤. 당시 운임이 쌀 한 가마 값에 맞먹는 7원 56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관광수입을 빚어내던 철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금강산전기철도사는 수백 번 곱씹으며 되새겼던 얘기다. 금강산전기철도를 복원하면서 묻히고 사라진 진짜 스토리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북한강 물줄기 화천(花川)의 기적
1915년 송강 정철의 그 시내길 화천을 일본인 실업가 구메다미노스케(久米民之助)가 걷고 있었다. 54세의이 공학박사는 거의 공상 수준의 구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회양군 안풍면 판유리(板踰리)에서 북한강 상류의 큰 물줄기를 발견했다. 강은 표고 500여 미터 높이에서 흐르고 있었다. 만폭동 계곡을 빠져나온 강은 백천동을 지나, 회양 땅을 휘돌아 창도를 향해 남행하고 있었다. 강은 화천, 춘천, 가평을 지나 양수리
에서 남한강을 만나 서해에 이르기까지 320km, 무려 800리 길을 흐르고 있었다.


태백산맥, 그 등줄기가 바다로 가는 그 길을 멀게 하고 있었다. 판유리에서 통천 동해바다까지는 48km, 고작 100리. ‘구메(久米)’에게는 그게 매력 있었다. 태백산맥에 굴을 뚫어 화천의 물고를 그곳으로 튼다면 수 백 미터의 낙차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해 쪽 가파른 경사지로 떨어뜨린 물로 수차를 돌린다면 1만kw 정도의 전력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는 다섯 달 째 화천을 측량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시도해보지 못한 아시아 최초의 유역변경식 발전소를 꿈꾸고 있었다. 그는 “은 같은 무지개, 옥같이 희고 고운 용꼬리 같은 폭포, 멀리서는 우렛소리, 가까이서는 눈 날리는 것 같다.”던 그 물줄기를 에너지로 계산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그 에너지의 공급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철원에서 내금강까지 전기철도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철도로 관광객을 금강산으로 끌고 온다는 구상이었다.

 

‘구메(久米)’는 기상천외의 돈벌이를 생각해 놓고 있었다. 서쪽으로 흐르던 물줄기를 동으로 돌려놓는 것,그것은 물을 에너지로 둔갑시키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금강산유람을 금강산관광이라는 돈벌이로 바꿔놓는 혁명이었다.


한반도를 디자인 하던 일본인들에게 금강산은 무척 매력 있는 땅이었다. 경원선 노선을 결정할 때도 금강산 경유는 논란거리였다. 통감부철도관리국이 1909년 호남선 철도 건설계획을 내놓자 조선총독부 내부에서는 ‘호남선보다는 경원선이 먼저’라는 건의도 함께 제기됐다. 금강산을 철도로 연결시키겠다는 야심을 내비친 것이다. 당시 서울과 관북, 관동을 잇는 교통은 두절상태로 봐야 한다.

 

이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경원선 철도부설은 절실했다. 그러나 금강산을 관광지로 개발할 경우 일본, 만주지방에서까지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어 철도 경영상 흑자를 낼 수 있다는 것이 경원선 철도부설 당위성 이었다. 따라서 “경원선 노선은 반드시 금강산 아래쪽으로 바싹 붙어서 통과되도록 부설해 기차를 타고 가면서도 금강산을 바라볼 수 있도록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들이었다.


그 노선은 아마도 송강이 관동으로 가던 그 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송강이 말과 가마를 타고 가던 그길은 철도를 적합하지 않았다. 금강산에 가까운 회양쪽은 너무 높은 산들이 가로 막고 있었다. 도무지 철도가 철령을 넘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경원선은 금강산을 포기하고 삼방고개를 넘는 길을 택했다. 거의 100km를 우회해 동해안으로 넘어갔다.


증기기관차로는 험준한 산을 넘어 금강산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그 아쉬움을 ‘신작로’로 달랬다. 경원선의 평강과 원산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신작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내금강 장안과 외금강온정리까지 직영 자동차를 운행했다.


증기기관차가 갈 수 없는 금강산. 아마 ‘구메(久米)’는 무릎을 쳤을 것이다. 그는 그을음 나지 않고, 힘 좋고, 젠틀한 전철을 생각해 냈다. 이미 서울 한복판에 전차가 활개 치며 다니고 있기 때문에 그 교통수단은 낯익어 있었다. 다만 어디서 그 전력을 공급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송강의 금강산으로 가던 그 화천에서 유역변경식 발전소의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드디어 대역사가 시작됐다. ‘구메(久米)’는 금강산 철도 부설허가 신청서를 총독부에 제출했다. 작은 기관차와 작은 객차 그리고 궤도가 좁은 경편철도(輕便鐵道)였다. 경편철도는 금강산 산길에 알맞은 철도였다.
그의 신청서대로라면 강원도 화천 땅으로 철도가 지나갔다. 그는 철원~화천 82마일, 화천~말휘 19마일의 노선을 결정했다. 총 자본금은 500만 엔, 본사는 동경에 두기로 했다. 연간 영업수익은 32만 4,229엔. 따라서 충분히 흑자경영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금강산 경편철도의 주식 모집은 대인기였다. 총 5,325명이 응모해 신입주식 1만 790여 만 주를 모집했다. 모집예정을 350배나 초과했다. 연간 50만 엔씩 넣기로 한 불입자금이 눈 깜짝할 사이에 모아졌다.
1921년 9월 5일, 판유리(板踰리) 화천에서 통천군 백양면 중대리(中臺里)까지 추지령(楸地嶺)밑으로 터널을 뚫기 시작했다. 중부 영서지방에서 관동과 관북지방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은 해발 643m의 추지령을 넘어 통천읍으로 내려갔다. 서쪽 70리의 철령(鐵嶺:685 미터)과 함께 국도가 태백산맥을 넘어가는 유명한 고개이다.


착공 2년 만인 1922년 9월 4일, 추지령 밑으로 길이 1,442m짜리 굴이 뚫렸다. 회양군 회양면・풍안면의 북한강 상류의 물이 땅 속에 묻힌 철관을 관통해 동해안 가파른 산비탈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1923년 11월 14일, 중대리(中臺里) 발전소 1호기가 완공되고 166.9km 거리에 66kv를 송전할 수 있는 목주(木柱) 송전선로가 세워졌다. 이듬해 1월 30일부터는 경성전기가 금강산 전철로부터 수전을 개시했으며, 그해 8월 1일 철원~김화 구간에 전기철도 운전을 개시했다. 그리고 1925년 4월, 중대리 발전소가 7,000kw 규모로 마저 준공됐다. 중대리발전소에서 내버린 방수는 향천리(香泉里)발전소로 들어가면서 2천6백kw를
생산하게 됐다.

 


1927년 2월, 720kw 규모의 판유리(板踰里) 발전소가 준공됐다. 판유리 발전소는 저수지의 방수를 이용하는 방법인 언제식(堰堤式) 발전소다. 1928년 11월 22일, 중대리 발전소에서 1차 발전을 끝내고 방수된 물을 이용한 향천리(香泉里)발전소가 준공됐다. 3,250kw 규모였다. 때맞춰 1931년 7월 1일 철원역에서 내금강산역에 이르는 116.6km의 전철 구간이 완전 개통됐다.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는 이들 구간의 공사를 8회에 걸쳐 준공했다. ▲1924년 8월 1일, 철원~김화 ▲1925년 12월 20일, 김화~금성(金城) ▲1926년 9월 15일, 금성~탄감 ▲ 1927년 9월 1일, 탄감~창도(昌道)▲1929년 2월 9일, 창도~현리 ▲ 1929년 4월 15일, 현리~화계(花溪) ▲ 1930년 5월 15일, 화계~말휘리(末煇里) ▲ 1931년 7월, 말휘리~내금강. 금강산수력발전소에서 생산해낸 전기는 모두 1만 7천 570kw 규모였다.

 

장진강수력발전소의 25분의 1, 조진강수력발전소의 30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력은 금강산전기철도가 철원에서 내금강까지 객차 15량, 화차 18량을 끌고 가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오히려 전력이 남아돌았다. 사실 금강산전기철도에 필요한 전력은 중대리, 향천리 판유리 발전소의 생산량만 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태백산맥 동해안쪽 산비탈에 계단식 발전소를 건설한 것은 전철 수요뿐만 아니라 남는 전기를 경성으로 송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1936년 11월 20일,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는 4번째 발전소 신일리(新日里) 발전소(2,600kw)를 준공했다.
마지막으로 건설됐지만 추지령 밑으로 빠져나와 1차 중대리 발전소의 터빈을 돌리고 쏟아져 내려오는 북한강 물을 받아 2차 발전, 하는 하늘 아래 2번째 발전소인 셈이다.


전력은 더 남아돌았다. 따라서 서울 방면으로 2천 5kw의 전력을 송전하면서 철원・포천・평강・통천 일대의 8천 8백여 호가 전깃불을 밝혔다. 광산, 정미소 등 모두 2만 9천여 호가 금강산발전소의 전기혜택을 받았다. 비로소 구철원읍이 밤마다 불야성을 이뤘다던 그 전깃불의 출처가 밝혀진 것이다.


금강산, 신문명까지 열린 그곳은 전기불과 관광, 돈과 환락, 모든 것이 풍부한 곳이었다. ‘꽃을 잡고’와 ‘능수버들’을 불러 인기를 모았던 평양 명기 선우일선은 그 무렵 ‘조선팔경가’를 내놓았다.

 


에~ 금강산 일만 이천 봉마다 기암이요
한라산 높아 높아 속세를 떠났구나
에헤라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다
명승의 이 강산아 자랑이로구나


 

관광열차는 매일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5시 10분 막차까지 7회를 운행했다. 그러나 성수기엔 8회까지 연장 운행했다. 철원에서 내금강까지 소요시간은 4시간에서 4시간 30분, 요금은 6원이었다. 그 후 대동아전쟁의 전쟁자원으로 내금강 일대의 철로를 걷어가 마지막 관광열차가 운행되던 때는 최고 7원 56전까지 올라갔었다. 서울 용산역에서 경원선을 타고가다 철원역에서 금강산 전철을 갈아타자면 자그마치 운임은 21원42전이나 됐다. 당시 목수 일당이 1원 90전, 쌀 한 말값은 3원 50전이었다.


최초의 금강산수력발전소는 온 땅의 꿈과 낭만과 사치의 상징으로 태어나던 금강산관광산업을 가동할 에너지원으로 탄생했었다.

 

북한강의 사생아, 평화의 댐

 

 

 

1986년 11월 7일, 파로호엔 가을 산이 내려앉아 있었다. 구만리 선착장에서 출발한 통통선 2대가 가을 산을 받아 담고 붉게 타오른 호수를 가르며 북상하고 있었다. 파로호는 화천댐에 막힌 북한강이 빚어놓은 호수이다. 배는 그 호수를 따라 북한강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환경・자연생태・수질・기상・토목・국토계획・국제법 등 7개 분야 11명의 권위자들로 구성된 ‘북한강 상류 종합학술조사단’이 타고 있었다. 카키색 오리털 점퍼와 검정 야구모자 차림이었다. 요란한 엔진 소리에 파묻힌 그들은 말이 없었다.


양구군 방산면 천미리(天尾里)는 이름처럼 까마득히 높은 백석산 줄기가 긴 꼬리를 내려 호수 속에 담가놓고 있었다. 맞은편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비수구미(備水九尾)에서는 해산(日山)에서 뻗어 내려온 산 뿌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북한강 구절양장이 유난히 잘록하게 허리띠를 동여맨 곳이다. 비수구미와 천미리로 민통선이 건너가고 있었다. 배가 멈췄다. 민간인은 더 이상 북상할 수 없다. 땅에서 지키는 규정이 호수에서도 적용되고 있었다. 통통선 엔진이 꺼지자 잡티 하나 없는 천연의 적막이 내려앉았다. 비수구미! 그곳은 절제절명의 위기에서 이 나라를 건져낼 숨겨놓은 땅인지모른다.


8일 전인 10월 30일, 이규효(李圭孝) 건설부장관은 경천동지할 대북 성명을 내놓았다. “북한이 북한강에 대규모 댐을 축조하고 있으며 그 댐이 붕괴될 경우 한강 하류 전역을 급류가 강타하여 강원・경기・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허리에 상상을 초월하는 재해를 가져오게 될 것”이란 요지였다. 이 황당한 상황을 동아일보는 1면 머리기사로 이렇게 요약했다.


<정부는 최근 북한이 중동부 휴전선북방 인접지역에 대규모 댐 건설에 착수, 하류지역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은 물론 각종 용수 손실 생태계파괴 등 심각한 타격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 발전소 건설계획을 즉각 중지할 것을 촉구했다. 이규효 건설부장관은 30일 성명을 발표, 북한 측이 지난 21일 착공한 金剛山 발전소는 수원 확보를 위해 북한강 본류와 금강천의 합류지점 하류에 대규모 댐을 축조하게 됨으로써 북한강 하류 우리 측의 화천・춘천・의암・청평・팔당 등 5개 댐의 용수를 고갈시키는등 우리 국토에 여러 가지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라며 이의 즉각 중지를 요구했다. 李장관은 특히 북한이 추진 중인 금강댐이 붕괴될 경우 화천 등 5개 댐을 순식간에 차례로 파괴하면서 한강 하류 전역을 급류가 강타, 강원・경기・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황폐화시킬 상상을 초월하는 재해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李장관은 “이런 점에서 우리는 북한당국이 추진하고 있는 금강산발전소 건설계획이 하천 이용에 관한 국제관례를 무시하고 국토의 평화적 이용에 역행하는 처사로 단정하면서 특히 이 댐의 안전문제는 바로 우리의 사활(死活)이 걸린 최대 관심사임을 분명히 지적하며, 남북으로 관류하고 있는 수원(水源)의 이용문제가 북한당국의 일방적인 목적에 의해 결정될 사항이 아님을 명백히 밝혀둔다.”고 강조했다.


李장관은 “우리는 금강산발전소건설계획은 당장 중지돼야 마땅하다고 보며 북한당국이 우리의 이러한 정당한 입장에 동의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히고 ‘우리 정부는 북한 측이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거부할경우 적절한 대비책을 철저하게 강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울러 밝힌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정부가 분석한 바로는 북한은 북한강과 금강천이 합류하는 휴전선 북방 10km, 강원도 창도군 임남리 부근 계곡에 해발 400m 높이의 저수용량 2백억 톤 규모의 대규모 댐을 축조하고 상류지역인 회양에서 안변까지 산허리를 통과하는 30~60km의 수로터널을 뚫어 물을 역류, 안변군 신화리에 시설용량 80만kw 이상의 수력발전소 건설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이 발전소 건설을 통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뒤진 동부지역 원산지방에 전력과 함께 공업 농업 생활용수를 공급하겠다는 것이 명분이나 사업의
비경제성은 물론 군사력까지 동원하고 있고 지나친 댐규모로 보아 또 다른 저의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정부의 우려이다.


실제 댐이 완공돼 담수가 시작될 경우 북한강 상류의 수자원을 남에서 동북방향으로 역류시켜 남쪽하류지역의 화천 등은 연간 18억 톤의 용수 감소가 불가피하며 금강산・설악산 등 한반도 동부지역의 자연생태계에도 무서운 타격이 우려되고 있다. 더욱이 만수위까지는 10년 이상 걸린다고 하나 2백억 톤 저수용량의 대규모 댐이 자연 또는 인위적인 파괴가 온다면 수도권 등 하류지역의 피해는 치명적이어서 9억 톤의 물만 저수했다가 풀어도 초당 30만 톤의 급류가 흘러 105명의 인명과 9백 22억 원의 재산을 앗아간 지난 1984년 9월의 한강홍수 때보다도 10배가 넘는 물난리를 겪게 된다는 것이 정부의 분석이다.>


그해 여름 정부는 북한이 유역변경식으로 ‘금강산발전소’를 건설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고사령부가 6월 10일 자로 ‘금강산발전소’를 착공하라는 명령을 군부에 하달한 직후이다. 북한이 1년 전 러시아 기술자들에 의뢰해 ‘금강산발전소’ 설계를 완성해 놓은 사실도 알려졌다. 그리고 착공 명령이 떨어진지 4개월 후인 10월 21일, 북한강에서 성대한 ‘금강산발전소’ 건설 기공식을 가진 사실도 확인됐다.


‘금강산발전소’는 낮선 이름이 아니다. 금강산 전기철도에 전력을 공급하던 북한강 상류 회양 화천(花川)의 수력발전소가 ‘금강산수력발전소’다. 1921년 9월 5일 일본인 실업가 구메다미노스케(久米民之助)는 회양군 회양면 안풍리에서 통천군 백양면 중대리까지 태백산맥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기 시작했다. 2년 만인 1922년 9월 4일, 추지령(楸地嶺) 밑으로 길이 1,442m짜리터널이 완성될 무렵 회양면 판유리에 북한강 상류 화천을 가로막은 댐이 건설됐다. 금강 산록 명우리(鳴牛里)일대에 화천을 담은 면적 0.93km², 둘레 11.1km의 인공호수가 생겼다. 금강 산록의 아름다운 산정호수가 터널로 태백산맥을 빠져나가 동해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태백산맥 동쪽 비탈에 동양 최초의 유역변경식 발전소가 건설됐다. 그리고 총 1만 3,970kw의 전력을 생산해 냈다.


북한이 건설한다는 ‘금강산발전소’는 60년 전 구메(久米)가 건설한 ‘금강산수력발전소’의 완전 판박이다.
북한은 그 옛날 일본이 자원수탈용으로 활용했던 그 아이디어를 슬쩍 차용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북한은 옛 금강산발전소를 무한대로 증폭하려는 것 같았다. 북한이 옛 금강산수력발전소로부터 복재한 그 괴물은 물만 먹고 자라고 있었다. 최대 200억 톤까지 몸집을 불릴 작정이다. 양순한 괴물은 원래 없다. 그가 심술을부리면 어떻게 되는 건가. 북한강물을 마시다, 마시다 너무 마셔 뻥하고 배가 터지면 어떻게 되는 건가. 만화도 아니고, 삼국지도 아닌 이 황당무계한 북한강의 긴급 뉴스에는 모두 가슴을 쓸어내렸다.

 
비수구미에 대응댐을 막아라
국민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북괴’라는 단어도 다시 등장했다. 그 북괴를 응징해야 한다는 규탄대회가 일제히 폭발했다. 첫 ‘북괴 금강산댐건설 음모 규탄대회’는 강원도 화천에서 열렸다. 10월 31일 오전이었다.
금강산댐이 들어서는 임남리는 DMZ 북쪽 첫 동네, 화천은 DMZ 남쪽 첫 동네이다. 북한강 물길로 60리 이웃이다. 그 윗동네의 보가 막히면 맨 먼저 가뭄을 탈아랫동네가 화천이다. 그리고 윗동네 보가 터지면 맨먼저 물에 잠길 아랫동네가 화천이다. 화천 사람들이 맨 먼저 들고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이 장관이 밝힌 “적절한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쪽에서 물을 막아 북쪽을 강타할 수도 있겠지만,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강은 없다. 그렇다면 비책은 적절한 장소에 ‘방조(防潮)댐’을 막는 것이다. 화천읍 하남리 삼화리 김종옥씨(金鍾玉 당시 70)가 그 ‘비책’을 귀띔했다. 그는 그 옛날 북한강을 거슬러 금강산을 몇 차례나 다녀 온 사람이다. 북한강 강마을들이 손금 보듯 환하다. 구만(九萬), 동촌(東村), 비수구미(備水九尾), 천미(天尾), 수상(水上), 수동(水洞), 어운(漁雲), 과호(科湖), 사천(泗川)…. 노인은 이들 강마을 중 천미(天尾)와 비수구미(備水九尾)를 지목했다. 거긴 백석산의 꼬리와 해산의 꼬리가 마치 강줄기를 동여매듯 엉켜 있는 곳, 북한강 물이 머물듯 멈칫거리는 여울목이다.


여기다 방조댐을 막으면 물은 북한강 지류 금성천으로 역류해 북한의 금성 땅을 침수시키게 된다. 북쪽이먼저 수공을 걸어오고 있지만, 결국 역수공에 말리게된다. 결국 북한은 수공용 금강산댐을 포기하게 된다

 

북한강에 내려앉은 ‘막간의 평화’

 

 

DMZ가 건너가는 북한강 상류 오작교의 용사들은 벌써 오래 전부터 북한강 계곡에서 쏟아져 내리는 스산한 바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DMZ 넘어 북한강 상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2000년 늦가을부터 오작교 교각이 하루가 다르게 삐죽하게 높아지고 있었다. 강이 내려가고 있었다. 오작교 교각에 새겨진 눈금자에서는 나날이 강물의 수위가 떨어지고 있었다. 장마 때는 10m, 가뭄 때도 2m가 넘던 오작교 수위가 드디어 무릎 아래까지 푹 꺼져 내려갔다. 물속에 잠겨 있던 검은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바닥의 작은 돌멩이뿐만 아니라, 바위 결을 따라 줄지어 매달려 있는 물고둥 떼도 환하게 들여다보였다.


오작교 아래 차가운 물속엔 전 세계에서 한강 유역에서만 발견되는 한강 황쏘가리가 서식하고 있었다. 예부터 시문과 도자기, 그림에 등장할 만큼 외모가 멋진 그 귀하신 몸은 천연기념물 190호답게 DMZ 철책선이 지나가는 깊은 물속 바위굴에 살고 있다고 알려져 왔다.


쏘가리는 비단 같은 비늘을 붙이고 있어서 금린어(錦鱗魚), 꼭 돼지고기 맛을 낸다고 물속의 돼지고기,수돈(水豚), 그냥 맛잉어라고도 불린다. 민물고기의 왕인 것이다. 거긴 쏘가리 중의 쏘가리, 모든 민물고기의 왕인 한강 황쏘가리가 기거하시는 곳이다. 그러나 그런 얘기도 전설이 되고 말았다. 감쪽같이 강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황당한 사건에 대해 오작교 용사들은 막연하나마 감을 잡고 있었다. 사라진 강이 능선 너머에 호수가 되어 담겨 있다는 입소문을 듣고 있었다.

 

미 종군기자 스탠 카터가 남북으로 고구마처럼 엎드려 있는 능선의 미2사단 전방대대 구호소를 찾아갔을때 한 어린 부상병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단장(斷腸)의 능선은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전설의 고구마 능선 너머에서 정말 전설 같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능선 너머 검은 산록에 어느 날 거대한 호수가 태어나고 있었다. 임남댐 동쪽 10km쯤, DMZ에서 북쪽으로 8~9km쯤 떨어진 그곳은 그냥 깊은 계곡이었다. 전선의 병사들은 캄캄하기만 하던 그 골짜기가 어느 날 시퍼렇게 채색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이었다. 2001년 여름,
장마가 막 지나가자 짠하고 거대한 호수가 나타났다.“붕괴될지 몰라! 댐이 터지면 우리가 있는 이 소초는 꼴까닥 물에 잠길 것이고, 저 산등성이는 안전할까?” “거기까지 기어 올라갈 만한 시간 여유는 있을까? 물이 서서 달려온다잖아?”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는 동안 오작교 용사들은 그런 불안으로 지새웠다. 강물이 마른 만큼 상류의 댐은 몸집이 더 불어날 것이다.


휑하게 바닥이 들어난 북한강 계곡에서는 늘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때마다 가슴이 시려오는 것을 느끼며 그들은 ‘사이트-1’에서 ‘사이트-2’, 다시 ‘사이트-3’로 등고선을 높여가며 대피 훈련을 거듭했다. 없다던 임남댐이 당초 시나리오대로 가고 있는 게 밝혀졌다. 그렇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던 댐 붕괴 사태도 당초 시나리오대로 가고 있을 것이다. 과연 북한강에서는 모든 일이 당초 예측했던 그대로 가고 있었다.
2002년 1월 16일, 오작교 용사들은 처참한 아침을 맞았다. 밤새 얼음장이 뒤집히고 오작교가 물속으로 숨바꼭질하고 있었다. 까마득히 높은 중대막사까지 뛰어 올라갔을 무렵 그들은 겨우내 허옇게 얼어붙었던 북한강이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 몸부림치는 것을 뒤돌아보았다. 멀리 남쪽으로 북한강 계곡이 온통 흙탕물의 바다에 잠기고 있었다. 임남댐에 갇혀 있던 북한강이 분노하며 쏟아져 내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정체모를 흙탕물은 18일 동안 쏟아져 내렸다. 임남댐에서 담수를 시작한 이후 북한강은 겨우 초당 1~2톤의 물이 흘러내렸다. 그 물이 2002년 1월 16일 갑자기 초당 16톤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1월 17일부터 2월 3일까지 18일 동안 무려 180~267톤으로 불어났다.


물부터 채운 미완의 금강산댐
그 흙탕물의 정체를 미국의 지구관측 위성 이코노스(Ikonos)가 밝혀냈다. 흙탕물 사건 2개 월 후인 4월 24일, 이코노스는 북한강 상공을 날아갔다. 닷새 후, 국내의 한 TV방송이 위성이 찍어 보낸 영상을 방영했다.
놀랍게도 있지도 않다는 문제의 그 댐인 거대한 사력댐이 모습을 드러냈다.


댐은 문제가 있었다. 두 곳이 함몰돼 있었다. 무너져 내린 것이다. 무너진 부위 하나는 댐 정상에 있었다.
폭 20m, 깊이 15m 정도의 웅덩이가 파여 있었다. 그 자리로 물이 월류(越流)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사진엔 물이 담겼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두 번째 함몰 위치는 댐체 중간으로서 월류했다면 물이 떨어졌을 그 자리이다. 정상 함몰 부위 바로 밑이기 때문이다.


사력댐에 물이 넘친다는 것은 곧 붕괴를 의미한다.
그 정도의 웅덩이가 생기고 말았다는 것은 댐 수위를 급히 낮췄다는 뜻이다.

어디로 어떻게 물을 뽑아냈을까?


이를 이렇게 구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00년 10월 20일 2단계 공사를 마쳤을 때 임남댐은 높이 105m(해발 305m)까지 축조됐다. 설계계획 121.5m(해발 321.5m)에 아직 16.5m가 덜 쌓였다. 그 상태에서 담수에 들어갔다. 나날이 수위가 올라갔다. 2001년엔 여름 장마 물까지 고스란히 받아 담았기 때문에 그해 말수위는 만수위 100m(해발 300m)에 육박했을 것이다.


2단계 공사를 마친 댐 정상 105m까지는 5m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댐 정상부가 꺼지며 물이 넘치는 초대형 사고가 일어났을 것이다. 댐을 살리는 길은 가뒀던 물을 포기하는 것이다. 물을 포기하는 방법은 방류다. ‘여수로(餘水路)’를 통해 토해 놓거나, ‘방류구(放流口)’를 통해 발전 또는 용수공급을 하는 것이다.

여수로는 남는 물(餘水)을 쏟아 내는 수로다. 사력댐은 대게 댐 상단부에 설치한다. 당연히 홍수기의 만수위 때만 기능을 발휘한다. 당시 임남대 여수로는 무용지물이었다. 여수로는 댐을 정면으로 바라봤을 때 댐 왼쪽 400~5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문제는 댐은 아직 105m밖에 높이지 못했는데 여수로는 110m 지점(해발 310m) 산꼭대기에 뚫려있고, 수위는 어느새 100m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여수로는 댐보다 5m, 수위보다 10m나 높은 공중에 매달려 있는 형국이었다.

 

바로 미완의 댐에서 사고가 터지 는 바람에 여수로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방류구는 필요에 따라 항상 물을 빼낼 수 있는 시설이다. 따라서 댐 중간 높이쯤에 설치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주방류구는 상류 조정지댐으로 뚫려있다. 조정지댐에 입구를 둔 길이 45km짜리 수로터널이 주방류구인 것이다. 이 방류구를 통해 빠져나갈 수 있는 물의 양은 초당 200톤으로서 최대 700~800톤에 달한다. 화천댐의 발전용 방류구의 방류량이 185톤인 점을 감안하면 임남댐은 방류구를 통한 수위 조절이 곤란했을 것이다.


그런 구조적 결함을 대비한 듯 댐 왼쪽 산 중턱 75m(해발 275m) 쯤 높이에 다른 방류구를 설치했다.
이 방류구는 작은 지천을 통해 북한강 본류로 연결되고 있었다. 임남댐의 체중을 급히 줄일 수밖에 없었던 그 때, 분명히 이 방류구를 통해 비상 방류를 했을 것이다. 당시 수위는 75m에서 더 이상 떨어뜨리지 못했다. 댐의 방류구의 위치가 75m 지점이기 때문이다. 임남댐에 가둬뒀던 9억 톤의 물이 5.9억 톤으로 줄어들면서 하류에 더 이상 위험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이것이 그해 1월 흙탕물 소동의 전말이다.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말뚝 몇 개박아놓고 개미새끼 한 마리도 없는 상태’라던 그곳, 20톤짜리 트럭 1천 대가 13년 동안 흙을 퍼 날라야 하고, 그 댐에 물을 채우는데 다시 14년이 걸린다던 그곳, 그래서 아직은 그곳에 없다던 임남댐, 그 금강산 댐이 그곳에 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완전 작품화한 5공 각본이라고 했던 댐이 무너질 뻔한 가공할만 한 실제상황으로 바뀌고 있지 않았는가. 그런대도 누군가가 일관되게 그 댐에 대해 거짓말을 해온 것이 틀림없다.


없다던 임남댐의 경위를 탈북자들의 증언이나 신문 잡지 등에 소개된 전문가 기고 등의 자료를 모아 재구성하면 이렇다.


임남댐은 1986년 6월 10일 최고사령부로부터 임남언제 착공 명령을 하달 받아 착공된 댐이다. 공사현장에는 ‘610관리국’이란 부대명칭도 수여받은 ‘영광된 군대’가 와 있었다. 그들은 3만 2,000명의 병력을 갖춘 조선인민군의 최정예 군단급 공병대이다. 댐 축조공사는 이 부대의 1개 여단이 맡고 있었다. 2개 여단은 ‘창도-회양-안변’으로 이어지는 45km 물길공사(수로터널공사)를 맡고 있었다.


1987년 10월, 평화의 댐은 착공 8개월째를 맞고 있었다. 해산(일산) 기슭에 가배수로 터널은 이미 뚫렸고, 강을 건너지르는 가물막이 댐도 윤곽을 드러냈다. 임남댐은 착공 1년 6개월을 맞고 있었다. 그쪽도 가배수터널을 뚫어놓고 가물막이 댐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광된 군대’는 북한강 급류를 가로막는 공사에 고전하고 있었다. 가물막이 댐은 완공될 만하면 홍수가 휩쓸어버렸다. 무려 3차례나 가물막이 댐이 유실됐다. 1988년 5월, 남쪽의 평화의 댐은 1단계 공사가 완공됐지만, 임남댐은 아직도 가물막이 댐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상황반전은 그 후에 일어났다. 1991년 겨울, 임남댐 공사현장에는 금강산발전소 1단계 공사를 하루빨리 완성하라는 최고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졌다. 1992년 말, 드디어 가물막이 댐을 축조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1996년 6월, 45km의 도수터널이 완공됐다. 3달 후인 9월, 드디어 높이 88m, 저수용량은 9.1억 톤의 임남댐 1단계공사를 준공하고 ‘금강산발전소’의 시험발전도 성공했다.


임남댐은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지만 1999년 6월부터 2단계 공사를 본격적으로 재개했다. 그리고 2000년10월 20일 2단계 공사를 마치면서 담수에 들어갔다. 담수 중에도 댐을 높이는 공사는 계속됐다. 2001년 9월말쯤에는 댐 높이를 105m까지 높여놓았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사고가 터졌다.


북한이 임남댐을 착공한 1986년부터 2001년까지 15년 동안 북한강에서는 상상으로나 가능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남쪽 수많은 정치가들은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수많은 남쪽전문가들조차 아무런 예측도 내놓지 못했다. 과거 전두환 정권이 임남댐, 즉 금강산댐을 과대 포장해 국민을 바보로 만들었다면, 그 후 노태우 정권은 ‘회피’, 김영삼 정권은 ‘침묵’, 김대중 정권은 ‘축소’ 포장해 국민을 바보로 만들고 있었다.

 

2002년 5월, 국민의 정부는 급기야 평화의 댐 2단계 증축공사를 선언했다. 1단계 공사만 완공해 놓고 사실상 방치해 놓았던 평화의 댐 증축만이 흙탕물 사태의 대안이었다.


평화의 댐은 정권 유지용이라고 몰아붙였던 국민의 정부의 주역들이 그 댐을 증축하겠다고 선언해야 하는 체면은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북한의 수공을 대비해야 한다며 햇볕정책의 실패를 자인하는 것도 망신스러웠다. 그러나 체면을 구기고 망신을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당장 올 여름 장마부터 대비해야 하는것이다. 정말 시간이 없었다. 2002년 봄, 북한강 골짜기는 긴박하고 초조한 숨소리가 몰아쳤다.


무엇이 그토록 불안하게 했을까. 흙탕물 사건 후 다급하게 소집된 민간전문가들은 임남댐의 무엇을 경고했을까? 우선 댐의 구조적 문제이다. 임남댐은 하상이 해발 200미터, 안변청년발전소로 가는 방류 터널은 해발 270m 지점에 있다. 270m 위에 있는 물은 발전소로 가고, 이 밑의 물은 항상 고여 있는 구조이다. 임남댐이 완공돼 댐 높이가 121.5m까지 올라가면 댐 정상의 해발 표고는 321.5m에 이른다. 즉, 임남댐은 해발270m에서 만수위까지의 물을 가용할 뿐 나머지 물은 가둬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임남댐은 견고성에서 신뢰를 잃어버렸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골짜기 양쪽 산을 폭약으로 무너뜨려 흙을 쌓는 소위 ‘100만산 폭파’공법까지 동원하며 유례가 없는 속성 공사를 단행한 것으로 밝혀지지 않았는가. 특히 전체 공정이 완공되지 않았는데도 물을 채운 무모함은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연간 강우량이 1,300mm에 이르는 이 다우지역에 가공할만한 비가 내린다면 정말 임남댐은 붕괴될지 모른다.


임남댐의 최대 저수용량은 26억 톤이다. 만일 댐이 붕괴돼 26억 톤의 물이 쏟아져 내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한강엔 초당 15만 톤 정도의 물이 흐르게 된다. 한강 둑이 범람해서 서울의 4대문 안은 다 물 속에 들어가게 된다. 물론 금강산댐의 최악의 경우를 예상해 축조한 평화의 댐, 그 하류의 화천댐도 무너져 완전히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1986년 가을 대한민국을 경악케 하던 그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평화의 댐 높이를 25m 높이는 긴급 공사로 장마철을 대비하기로 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는차제에 북한강에서 댐 붕괴 위협을 완전히 불식시키기로 한 것 같았다. 댐 높이를 20m 더 올리기로 했다.
1988년 1단계 공사가 끝난 그 자리에서 무려 45m가 더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2005년 10월, 평화의 댐은드디어 높이 125m, 길이 601m에 최대 저수용량 26억 3,000만 톤 규모의 석괴댐으로 다시 태어났다.
마침내 북한강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국민의 정부가 20년 동안 끈질기게 쫓아다니던 금강산댐 망령을 말끔히 씻어내고 말았다. 이제 남북 간엔 아이들의 보(洑)싸움 놀이 같은 시시한 전쟁을 할 일은 없어졌다.그러나 그런 속단은 너무 일렀다.

 

‘대통령 아저씨께 드리는 편지’
2003년 2월 27일. 화천군청 광장에서는 ‘파로호 살리기 범국민서명운동 돌입 선포식’이 열렸다. 화천여중길숙희 양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소녀는 자신이 쓴 ‘대통령께 드리는 편지’를 낭독했다.


“대통령 아저씨! 죽어가는 파로호 때문에 화천 사람들의 얼굴이 아주 어둡습니다. 파로호에 살고 있는 어떤 할머니는 몸이 많이 아파 할아버지가 농약을 먹고 자살하자는 말씀을 하셔서 기어이 울고 말았다는 얘기도 들었으며 파로호에서 고기를 잡는 아빠 친구 한 분은 아침에 아이가 등교하면서 학교에 가져가야 된다
고 만 원을 달라고 하는데 집에 돈이 한 푼도 없어서 울면서 떼를 쓰는 아이를 오히려 때려서 보내고 술을마시고 말았다는 얘기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화천군의회 및 화천군평화의댐피해대책위원회가 공동주관한 이 서명운동 선포식은 정부와 국민을 향한시위였다. 군수(정갑철)가 먼저 머리띠를 두르고 서명운동 전국 투어에 앞장섰다. ‘대통령에게 드리는 편지’에서 소녀가 밝힌 것처럼 파로호에 기대 살고 있는 화천사람들은 가계도 마음도 모두 황폐화돼 가고 있었다.


화천은 물의 고장이다. 늘 물이 많아 걱정이 많은 고장이다. 금강산 댐 소동도 물이 한꺼번에 많이 쏟아져내릴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 화천군민들은 파로호에 그 많던 물이 사라졌다고 걱정하다 못해 스스로 소요사태를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 많던 파로호의 물은 어디로 간 것일까?
임남언제, 즉 금강산댐이 들어서 있는 곳은 조선조 초 강희백(姜希伯)이 “땅이 독 속같이 편벽하여 숨어살기 알맞다.”고 지목했던 땅이다. 그 독 같이 움푹 파인 골짜기 끝, 태백산맥의 안막에는 통구(通溝)라는지명을 가진 곳이 있었다. 구(溝)는 인공수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통구는 태백산맥에서 가장 살점이 얇은곳이어서 언제가 물길이 날 것이라고 내다본 예언적 지명이었을까. 북한의 금강산수력발전소 콘셉트는 ‘독속같이 편벽하여 숨어살기 알맞은 그 골짜기에 북한강, 임진강 물을 모아 가둬두고, 통구에 동해안으로 통하는 수로터널을 뚫어 물길을 돌려놓아 안변 원산 지방에서 발전도 하고 용수로도 쓰게 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내놓은 ‘금강산발전소건설 백서’에 따르면 북한강에는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창도군에 임남댐,회양군에 포천 1, 2댐, 전곡댐, 신명리댐을 차례로 건설해 이들 댐에 총 40억 톤의 물을 가두는 것으로 돼 있다. 임진강 수계에도 내평댐(5.1억 톤)과 장안댐(6.2억톤)에 총 11억 3,000만 톤을 저수하게 된다. 임진강 상류의 장안댐에 고인 물은 수로터널을 통해 내평댐으로, 내평댐의 물은 역시 52.8km의 수로터널로 임남댐으로 이어진다. 두 강에서 모은 50억 3,000만 톤의 물은 45km의 수로터널을 통해 조정지 댐으로 보내고 여기서 동해안으로 떨어뜨리며 300미터의 낙차를 얻어 안변청년발전소가 80만kw의 전력을 생산케 한다는것이다.


임남댐 1단계 공사를 마치던 1996년 그 댐 상류 30km 지점엔 3억 톤 규모의 포천 1댐이 완공됐다. 나머지 댐들도 2000년을 전후해 모습을 드러냈다. 북한이 이들 댐을 공개할 리 없다. 그러나 구글어스는 북한강과 임진강 상류에 숨어있는 이들 댐을 고스란히 공개하고 있다.


북한강 수계의 회양군 포천리 포천 1, 2댐과 전곡리의 전곡댐 그리고 임진강 수계의 장안댐, 내평댐, 회양군 전항리의 전항리 조정지 댐은 콘크리트중력식 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회양군 신명리의 신명댐과 안변청년발전소 조정지댐은 반달처럼 단아한 모습의 콘크리트아치형 댐이다.


이미 1996년부터 북한강과 임진강은 서서히 말라가기 시작했다. 급기야 북한강 오작교 아래 천연기념물190호 한강 황쏘가리가 사라지던 무렵 임진강에서도 봄 황복(黃鰒, river puffer)이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서해로 흘러가는 북한강, 임진강을 7개 댐으로 물 샐 틈 없이 틀어막아 태백산맥 너머 동해안으로역류시키는 대역사가 ‘파로호 사호화(死湖化)’, ‘임진강 사천화(死川化)’의 주범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가슴이 시려오는 서늘한 바람결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북쪽은 남쪽과의 보싸움 놀이에서늘 이기고 있었다. 남쪽이 평화의 댐 증축으로 임남댐, 금강산댐 사태를 대비하자 북쪽은 또 다른 수공전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마치 당태종이 하북(河北)의 반란자 흑달을 칠 때 그의 땅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낱낱이차단해 말려버렸던 건갈공법(乾渴攻法) 같았다.


과연 강을 말려버리는 그 수공 현장은 처참했다.남아프리카의 ‘동가(donga)’ 북아메리카의 ‘아로요(arroyo)’ 그리고 유대광야의 ‘와디(wadi)’가 있다면 지금 북한강에는 ‘흐르지 않는 강, 메마른 강(TheBarren River)’이 있다. 남북한은 금강산댐과 평화의 댐 사이 50리에 달하는 북한강 골짜기를 인공 하곡(河谷), 마른 골짜기로 개조했다.

 


‘흐르지 않는 강’의 경고
‘흐르지 않는 강.’ 어느 날 갑자기 강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앞으로 그곳에서 기필코 무슨 일인가가 터지고야 말 것이라는 경고인지 모른다. 정말 몇 차례 경고가 있었다. 2002년 5월 31일 북한 국토환경보호성은 북한 적십자사를 통해 전화통지문 한 통을 남쪽으로 보내왔다.


“장마철을 앞두고 임남언제의 물을 6월 3일부터 뽑는다는 것을 귀측에 알린다. 우리의 사전 통보 조치는 어디까지나 뜨거운 동포애와 인도주의 정신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수자원을 관리하는 북한의 정부기관은 바닥이 허옇게 드러난 파로호 사정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물 반, 고기 반’이라던 파로호 고기잡이는 옛 이야기가 돼버렸다. ‘내륙의 바다’라면서 고기잡이를 하거나 낚시관광을 업으로 삼던 어부들은 대부분 직업을 바꿨거나 어디론가 돈벌이를 떠나 있었다. 횟집, 낚싯배 대여점 등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파로호 구만리 선착장의 계단식 언덕은 폐광촌처럼 변해 있었다. 북한은물이 그립다 못해 물이 고픈 그 파로호에 ‘인도주의 정신’으로 물을 보내 주겠다고 말했다.


6월 3일, 드디어 그날이 왔다. 바닥이 드러난 강 위에 걸려 있는 오작교의 시멘트 교각은 유난히 높고 가늘어 보였다. 교각에 새겨진 눈금자의 수위는 1미터에서 두 뼘 정도 내려간 60~70cm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후2시, 임남댐에서 방류가 시작됐다는 통보가 전해졌다.

 

오후 2시 20분 쯤, DMZ 남방한계선 앞의 북한강이 검붉은 장마 물로 변했다. 임남댐 여수로를 빠져 나온 북한강은 20분 만에 11km를 달려 내려왔다. 사람이 있는 힘을 다해 100m를 뛰는 속도와 비슷한 초속 8~9m의 무서운 스피드였다.


그 장마 물이 거품을 일으키며 쏜살같이 오작교 밑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강 가장자리 버드나무 숲이 춤을 추며 흙탕물 속에서 숨바꼭질하고 있었다. 오작교 그 눈금자가 순식간에 3.4m까지 뛰어올라갔다.
그 골짜기에 옛날처럼 북한강이 돌아왔다. 멀리 떠났던 북한강 어부들도 파로호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인도주의 정신은 인내력이 부족했다. 돌아온 북한강은 채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되돌아 가버렸다. 6월 27일 오전, 오작교 용사들은 다시 강이 사라진 사실을 발견했다. 임남댐은 고작 24일 동안만 물을 방류했을 뿐이었다.


2004년 8월 14일, 광복절을 하루 앞둔 그날 오후, 돌연 북한으로부터 한 통의 짤막한 전화통지문이 답지했다.


“비가 많이 내릴 것에 대비해 15일 오전부터 임남언제의 일정수량을 방류할 계획이다.”


그들은 2002년 5월 이후 2년 동안 임남댐의 수문을 다시 걸어 잠갔었다. 마침내 그들이 ‘8・15 경축선물’로 배고픈 파로호에 물을 주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두번째 역사적 사건은 북한의 그 ‘인도주의적 정신’만 작용한 것이 아니다. 임남댐의 1차 방류로 꿀맛 같은 물맛을 맛본 남한 정부는 끊임없이 북한을 향해 손을 벌였다. 2003년 5월 19일부터 23일까지 평양에서 제5차 남북경협추진위원회가 개최됐다. 이 자리에서 남북은 장마에 대비하여 임남언제 방류와 관련된 내용을 사전 통보하기로 합의했다. 사실은 남는 물은 흘러 보내사이좋게 나눠 쓰자는 남쪽의 호소를 북쪽이 받아준 것이다.


2004년 6월 2일부터 5일까지 평양에서는 제9차 남북경협추진위원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도 남쪽은 임남언제의 방류계획을 사전에 통보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건 요청이 아니라 올핸 꼭 물을 흘러 보내 달라는 간청이었다.


‘8・15 방류’는 남한의 물 구걸에 북한이 적선한 것이다. 2002년 한 번, 2004년 또 한 번, 남쪽은 그때 두차례의 ‘인도적 정신’으로 포장된 그 물을 받아 마시면서 비로소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물을 보내는 것도,안 보내는 것도 모두 북쪽이 맘먹은 대로라는 사실을….


북한강의 보싸움 놀이는 강 아래쪽 아이들이 더 크고 더 튼튼한 보를 쌓음으로써 아래쪽 아이들의 승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위쪽 아이들은 영악하고 교활했다. 보싸움 놀이인 척하면서 도랑 하나를 송두리째 막아 자기들 논에 물고를 댔다. 그건 도랑 아래쪽 농지를 황폐화시키는 것이다. 아이들답지 않게 생존권 문제를야기한 위험천만한 놀이이다.


북한강에서만 연간 18억 톤의 물이 사라졌다. 남쪽은 이 박탈당한 ‘기득수리권(旣得水利權)‘의 탈환을 시도할 것이고, 북한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순순히 응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강에 남북 간 새로운 물 분쟁의 시한폭탄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한 것이다. 북한강 물 분쟁 제2라운드는 과거보다 더 지루하고 더 머리를써야 하는 복잡하고 골치 아프게 전개될 게 뻔하다.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도 평화와 평화 사이에 전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전쟁 사이에 잠깐 평화가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남북으로 깊게 파인 북한강 계곡에서는 하루해가 유난히 짧다. 햇볕 쬐는 한낮처럼 북한강에 갈등과 갈등 사이 잠시 짧은 평화가 놀러와 앉아있는 것인지 모른다.

 

죽어도 사는 돼지풀의 ‘귀화 60년사’

 

 

길가에 민들레는 노랑저고리


“길가의 민들레는 노랑저고리
첫 돌맞이 우리아기도 노랑저고리
아가야 아장아장 걸어보아라
민들레야 방실방실 웃어보아라”
강소천의 동요에서는 민들레가 길가에 핀다.
류시화의 ‘민들레’에서는 그 꽃이 가슴에 핀다.
“민들레 풀씨처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게
그렇게 세상의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니까 민들레는 사람 곁에 피는 꽃이다. 늘 곁에 피는 꽃이니까 부르는 이름도 많다. 앉은뱅이, 안진방이, 미염둘레, 문들레, 그냥 들레라고도 한다. 으레 앉은뱅이를 심으니까 서당을 앉은뱅이집이라고도 부른다. 민들레는 “나쁜 환경을 견디어내는 인(忍), 뿌리를 잘려도 새싹이 돋는 강(剛), 꽃이 한 번에 피지 않고차례로 피므로 예(禮), 여러 용도로 사용되니 온 몸을 다 바쳐 세상에 기여하여 용(用), 꽃이 많아 벌을 부르므로 덕(德), 줄기를 자르면 나오는 흰 액이 젖처럼 나므로 자(慈), 약으로 이용하면 노인의 머리를 검게 하여 효(孝), 흰 액은 모든 종기에 들어 인(仁), 씨앗은 스스로 바람타고 멀리 가 후대를 만드니 용(勇)을 지녔다.”는 수사로 치장한 꽃이다. 그러면서도 낮을 대로 낮은 자세로 겸손해 하는 그 꽃을 공부하는 아이들이본받아야 한다. 이 때문에 서당 훈장을 민들레의 한방 이름을 빌어 포공(蒲公)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 길가의 민들레, 서당 마당가의 앉은뱅이가 요즘은 고산에 핀다. 깊은 계곡에 핀다. 시도 때도 없이 봄여름 가을까지 줄기차게 핀다. 서쪽 임진강에서 한탄강을 건너 광주산맥 대성산 적근산을 타넘고 북한강을 건너 문등리 계곡, 단장의 능선, 펀치볼, 백암산, 향로봉산맥을 타고 내려 동해에 가라앉는 DMZ를 따라가며 온통 민들레 밭이다.


길가의 민들레들이 왜 DMZ로 갔을까? 해답 힌트는 민들레꽃을 비늘처럼 감싸고 있는 모인꽃싸개잎(총포)의 각도다. DMZ 민들레의 총포는 한결같이 뒤로 젖혀져 있다. 서양민들레인 것이다. 토종 민들레는 흔히 볼수 있던 길가의 민들레, 하얀 꽃의 흰민들레, 한라산의 작은 꽃을 피우는 좀 민들레의 3종류이다. 거기 민들레가 그런 것들이려니 했는데, 그 토종은 사라지고 서양에서 건너온 귀화민들레가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것이다.


서양민들레는 쌍떡잎식물 초롱꽃목 국화과의 여러해살이 풀이다. 뿌리가 땅속 깊이 들어가고 줄기는 없다.
3월부터 9월까지 봄, 여름, 가을 가리지 않고 줄기차게 꽃을 피운다. 자가 수정 능력이 있기 때문에 벌과 나비가 없어도 한 송이 꽃만 있으면 수없이 종족을 퍼뜨릴 수 있다. 외고집 토종은 3월부터 5월까지 고고한 척 꽃을 피우며, 벌 나비가 중매를 해야 암수가 짝을 짓는 그 순수를 고수하다가 DMZ 영토를 서양민들레에게 통째로 넘겨주었다.


그들은 멀리 유럽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 왔을 것이다. 또는 대서양을 건너고 태평양을 횡단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는 ‘민들레 전설’처럼 멀리 지구 반대편에서 DMZ로 날아왔는지 모른다.
“40일 동안 온 땅에 비가 내려 홍수가 날 것이다. 큰 방주를 만들라.” 하나님은 노아에게 명령했다. 정말로굵은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홍수다. 모두 몸을 피하자!” 땅에 기는 것. 나는 것, 걷는 모든 한 쌍으로 선택되지 못한 짐승들은 뒤늦게야 야단법석을 떨었다. “진작 노아 할아버지의 말을 들을 걸.” 기지도 걷지도 못하는 작은 꽃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민들레도 친구들 걱정을 했다. “사슴이랑 토끼는 방주에 탔을까? 발이 빠르니까 무사히 올라탔을 거야.”


물이 민들레의 발꿈치를 건들기 시작했다. 발이 땅에 붙어 있는 민들레는 그만 겁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아아,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이대로 가면 난 죽고 말텐데.” 장대 같은 비에 어느새 물은 민들레 허리까지 찼다.
드디어 검붉은 흙탕물은 턱 밑까지 차올랐다. 곧 흙탕물 속에 휩쓸리고 말 처지였다. 애를 태우던 그새 그의 머리는 하얗게 세고 말았다. 민들레는 눈을 감았다.


“하나님, 낮을 대로 낮은 이 보잘것없는 풀을 구원해 주소서.”


갑자기 씽하고 바람이 불어왔다. 민들레의 하얀 머리가 꽃씨를 달고 두둥실 하늘 위로 떠올랐다. 아! 세상은 온통 물로 뒤덮여 있었다. 살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멀리 노아의 방주가 떠 흘러가고 있었다. 민들레는 방주 지붕 위로 살짝 뛰어내렸다. 조그만 구멍으로 방주 안이 들여다보였다. 사슴이랑 토끼도 거기에 있었다. 모두들 눈을 감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 같았다.


마침내 비가 그치고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민들레는 산중턱 양지바른 곳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 후 방긋 웃는 민들레 노란 꽃은 다시 피게 되었다.」


그때 민들레가 뛰어내린 그곳이 DMZ였을까? 사실 서양민들레는 방주에 매달려 DMZ까지 긴 여행을 했을 개연성이 아주 높다. 1950년 6월 27일, 미국은 6・25전쟁 당시 해군과 공군을 먼저 참전시킨다. 이틀 후인 6월 29일 영국이 해군을 그리고 미국이 지상군을 투입한다. 이를 시발로 UN군 측은 미국, 영국, 캐나다, 터키,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룩셈부르크 등 16개국에서 193만 7,970명의 전투부대를 파견한다. 노르웨이(623명), 덴마크(630명), 스웨덴(160명), 이탈리아(128명), 인도(675명)에서는 의료부대를 파견했다. 공산 측에서는 중국과 구소련이 참전했다. 당사국인 남북한을 합하면 무려 25개국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3년여 동안 전쟁을 치른것이다. 유례없는 국제전이었다.


그때, 지구 반대편 어느 항구였을 것이다. 하늘을 날던 민들레 꽃씨는 동방의 작은 나라 전쟁터로 떠나는 배를 보았을 것이다.


“거기선 왜 전쟁이 일어났을까? 전쟁터로 가는 저 어린 병사는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있을까? 포탄 떨어지는 고지마다 내가 노란 꽃을 피워 두려운 마음을 달래줘야지.” 민들레 꽃씨는 살며시 병사의 철모 위에 내려앉았는지 모른다.

 
“돼지풀의 숙주는 워커다”


돼지를 닮기는커녕 어떤 놈은 한 여름내 키가 4~5m나 자랄만큼 너무 늘씬해서 울타리용으로도 심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하는 전혀 돼지 같지 않은 풀이 돼지풀이다. 그러나 꽃가루나 줄기 속의 진이 살갗에 묻으면 영락없이 두드러기가 나는 독초이자, 글루코사이드 성분만 추출해 세균전이나 화학전처럼 고대전쟁에 동원된 전력이 있는 기분 나쁜 풀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절대 혼자 자라지 않고 무리 지어 크면서 덥석덥석 다른 풀밭을 점령하는 풀기도 하며, 겨울이오면 죽어버리지만 해동이 되기 무섭게 마른 뿌리에서, 그리고 여름내 날려 보낸 꽃씨에서 또 새싹이 돋는풀이다. 또한 헐벗은 땅을 더 좋아할 뿐더러 시멘트 더미에서도 고개를 내밀고, 아스팔트 균열을 뚫고도 몸을 비비고 나오는 지겹게 끈질긴 풀이 바로 돼지풀이다.


돼지풀, 그 풀은 ‘죽어도 사는 풀’인 것이다.
‘돼지풀’은 영어 ‘Hog-Weed’의 우리말 직역이다. 빅토리아시대, 태양이 지지 않던 대영제국의 부호들은 코카사스 지방에 자생하는 이름 없는 풀을 정원용으로 들여왔다. 그러나 낭패였다. 너무 무섭게 자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옆의 나무, 꽃밭을 점령해 말려버렸다. 게걸스럽게 퍼먹고 펑펑 살만 찌는 못 생긴 돼지같았다.

 

“정원용은 무슨? 돼지 입술에 립스틱이지. 그냥 돼지풀이라고 해!” 그래서 ‘돼지풀’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 고약한 독초가 이 땅에 어떻게 침입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1980년 대 초 한 일간지가 DMZ 일대에 돼지풀이 서식하고 있으며, 남부 지방에서도 발견된다고 보도한 것이 이 귀화종에 대한 첫 기록이다. 우리나라 자생식물 중에 ‘돼지풀’이란 없다. 따라서 돼지풀이란 영어 이름 ‘Hog-Weed’의 직역이다.


전선의 군인들은 돼지풀이란 이름을 매우 헷갈려 했다. 전선의 봄은 늘 산 아래서 오게 마련이다. 산 아래서 서성이던 연두색 봄이 조금씩, 조금씩 산정을 향해 기어 올라올 때면 늘 쑥처럼 생긴 이파리 몇 개를 단낯선 풀이 돋고 있었다. 어린 그들은 외롭고 가냘 퍼보였다. 그들은 포탄이 떨어졌던 자리였을 것 같은 빈땅이나 산비탈의 벌거벗은 땅을 덮어보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태생적으로 그런 땅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했다. 처음엔 몇 포기가 뿌리를 내리다가 나중엔 빈 땅이 보이지 않도록 새파랗게 뒤덮어 버리기 일쑤였다.
한여름 그들의 키가 훌쩍 자라버리자 병사들은 그 풀밭이 두려워졌다.


“북쪽의 투사들이 저 속에 숨어 들어올지 몰라. 없애버려!” 여름내 사람 키보다도 서너 뼘이나 더 커버린풀밭은 무참히 박살나고 말았다. 마침 희끄무레한 색깔의 보잘것없는 꽃을 가득 피웠던 풀밭은 절규하듯 꽃가루를 내뿜었다. 그날 밤, 병사들은 세상에 복수하는 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풀밭을 용감히 짓밟던 용사들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옆구리에, 팔에 가득 두드러기가 돋은 것이다.


“너는 고약한 성미의 풀. 쑥도 아닌 것이 쑥처럼 생겨 두드러기를 돋게 하는 풀, 네 이름은 두드러기 쑥!” 기지의 용사들은 그 풀을 ‘두드러기 쑥’이라고 부른다. 전선의 용사들에겐 이름 때문에 당한 황당한 경험이 또 있다. DMZ 속에 들어앉아 있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마을이 있었다. 수입천(水入川)이란 강이 흘렀다.
그 강에는 문둥이가 죽어 물고기로 변했다는 전설을 지닌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 문등리에는 그 옛날 문둥이 촌이었다는 전혀 신빙성 없는 유래가 있었다. 차마 ‘문둥리’라고 할 수 없어 ‘문등리’가 됐고, 한창 전쟁 중이었을 때 북한군은 이 마을을 없애 버리기 위해 군사기지로 위장시켜 놓아 자연스럽게 미군기의 공습을 받게 했으며, 그 바람에 폐허가 됐다는 것이다. 수입천엔 온 몸이 얼룩무늬이고, 새빨간 눈을 가진 이상한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 그 때 그 불쌍한 문둥이들이 물로 뛰어들어 그 물고기로 변했으며, 아직도 슬피 울고 있어 빨갛게 충혈된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후임병사들은 빨간 눈 물고기의 그런 내력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빨간 눈은 공산주의에 세뇌된 빨갱이처럼 보였다. 얼룩덜룩 위장한 몸도 기분 나빴다. 무엇보다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어디서도 본일이 없는 낯선 물고기였다. 그렇다면 북한의 물고기다. 이 북한 물고기는 멍청한 것인지, ‘깡’이 좋은 것인지 바위틈에 꼬리도 흔들지 않고 가만히 기대 있다가 거의 손에 잡힐 때쯤에야 슬쩍, 그것도 몇 뼘 정도만몸을 피하며 신경을 건드렸다. 돌땅을 치고, 발로 몰아 어쩌다 한 마리 잡아냈을 때, 놈은 빨간 눈으로 째려보고 있었다.


“말해! 너 어디서 왔냐?” 빨간 눈은 아가미를 벌렁거리다 죽어가면서도 말하지 않았다. “좋다. 공산당에 세뇌된 물고기, 이제부터 너는 김일성 물고기다!” 수입천, 내린천, 북한강의 열목어(熱目魚)가 밝혀지기까지 그리고 동해안 남강의 산천어(山川魚)가 밝혀지기까지 그들은 모두 ‘김일성 물고기’였다. 열목어가 ‘김일성 물고기’로 살아온 것처럼, 돼지풀도 오랜 세월 ‘두드러기 쑥’으로 살아온 셈이다.


그들은 어디에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뒷자리 DMZ에 나타난 것일까? 사실 돼지풀은 어디서든 혐오를 받는존재이기 때문인지 ‘원적지’를 놓고도 티격태격하고 있다. 유럽이나 북미 쪽에서는 원산지가 코카서스 산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아시아에서 온 독초라는 것이다. 그러나 독성이 있는 것, 없는 것, 키 큰 것, 키 작은 것을 합해 약 20종이나 자생하고 있는 지중해 연안에서는 북아메리카가 원산지라고 보고 있다. 1925년일본인 야마도리 이카이(山鳥一海)가 펴낸 ‘만주식물목록’도 만주벌판에 북미원산(北美原産)인 돼지풀이자생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무라고 하기에는 풀같고, 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나무를 닮은 이 생명체의 원산지는 대체로 북미라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대륙을 횡단하거나 대양을 항해했을까? 전쟁으로 황폐화된 DMZ를 멋지게 꾸미기 위해 그 옛날 빅토리아시대의 탐험가처럼 누군가 정원용으로 들여온 것은 아닐까? 정원용으로 옮겨 심은 것은 아니지만, 이 풀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반도를 여행한 수백만 명의 군인들을 따라 상륙했을개연성이 매우 높다.

 


달리는 신간센의 뒤로 눈 덮인 후지산(富士山). 바로 그 일본의 상징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시즈오카(靜岡)시로 가야한다. 시즈오카는 일본 제일의 기록이 수두룩하다. 면적이 일본 제일이고, 차(茶) 생산량이 제일이다. 전자 악기의 출하액이 일본제일이고, 온천여관 수가 일본에서 제일 많으며 참치 하역이 제일 많은 곳이다. 국제무역항 시미즈항(淸水港)이 원동력이다. 1952년 그 시미즈항에 혐의를 둘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6·25 전쟁은 발발 3년째를 맞고 있었다. 미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던 시미즈항에서는 수많은 전쟁물자가 하역됐으며 또 한국으로 실려 같다. 그것들이 쌓여있던 돼지풀이 발견된 것이다. 어디든 한 번 침입하면 2~3년 내에 대군락을 형성하는 게 이 풀의 특징이다.


조금씩,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던 이 풀은 1969년쯤엔 혼슈 지방 전역에 퍼져있었다. 따라서 돼지풀은 미군병사들의 워커에 묻어 일본을 징검다리로 딛고 한반도로 건너왔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중공군이 6·25전쟁에 얼마나 참전했는지는 사실 그들의 희생자 수와 함께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수수께끼이다. 1950년 10월 19일 한만 국경을 넘기 시작한 중공군 규모는 18만 명 정도이고, 11월에는 12만 명이 추가로 장진호 부근으로 출발했다. 어림잡아 30만 명에 이른다는 계산이다. 미국 펜타곤에서는 6·25전쟁 중중공군 사망자를 22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해전술을 구사한 중공군의 참전규모는 상상을 초월할지 모른다. 이들이 모두 한만국경을 넘어 참전했다. 이 대목에서 만주벌판에 돼지풀이 자생한다는 야마도리 이카이(山鳥一海)의 ‘만주식물목록’의 기록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중공군은 그들의 군화 ‘상해농구화’에 또 한 무리의 돼지풀을 묻혀왔을 것이다.


상상이긴 하지만, 캄 프럼 아메리카(come from America)와 캄 프럼 차이나(come from China)는 외양에서 구별될 것 같다. DMZ의 돼지풀은 단풍잎돼지풀(Ambrosia trifida L.)과 그냥 돼지풀(Ambrosiaartemisiifolia var. elatior) 등 두 가지이다. 단풍잎돼지풀은 말이 잡초지 키나 줄기 굵기가 해바라기보다도 더 크고, 피마자처럼 큰 잎을 달고 있어서 차라리 나무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이 풀이 바로 미국인들조차 질색을 하고 손을 내젓는 ‘자이언트 돼지풀’이다. 알아보나 마나 아메리카에서 워커에 묻어 들어왔다면 바로 그것들일 것이다. 반대로 돼지풀은 외양이 동양적이다. 좀 키가 작고 이파리나 줄기도 단풍잎돼지풀에 비해 가냘프다. 그렇다면 만주에서 중공군 상해 군화에 묻어 들어온 것은 바로 저것들이다.


이들은 무리 지어 살면서 다른 잡초들은 그들의 영역에 얼씬도 못하게 한다. 단풍돼지풀과 돼지풀이 섞여 사는 법도 없다. 섞여 살기커녕 분명히 그들은 다투고 있다. 같은 국화과, 같은 이름인데도 이것들은 서로땅 뺏기를 하는 것 같았다. 개활지에 단풍잎돼지풀 무리가 있으면, 돼지풀 무리는 산비탈 쪽에 모여 살면서 치열한 영역다툼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피차 감정이 많은 것 같았다.


“아니, 쟤들은 뭐야? 한국 DMZ엔 우리가 먼저 왔잖아. 빨리빨리 꽃을 피워. 우리 종족을 더 많이 번식시키자고.” 마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아메리카 돼지풀과 만주 돼지풀은 비무장지대에서 땅 뺏기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이후 전 전선에서 총성이 멎었다.
단풍잎돼지풀의 숙주 ‘워커’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상해농구화’의 중공군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워커’와 ‘상해농구화’를 따라왔던 아메리카 돼지풀과 만주 돼지풀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의 전쟁은 끝나지않았다. 마치 자신들의 숙주인 ‘워커’와 ‘상해농구화’가 못다 이룬 땅 뺏기를 대신 하듯, 전쟁을 하던 사람들은 그 전쟁을 잊었는데, 그들의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꽃비석이 되어드릴 게요.”
여름은 돼지풀이 꽃피는 계절이다. 돼지풀 꽃가루가 온 대지를 오염시키는 계절이다. 드디어 세상은 돼지풀과 단풍잎돼지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들은 ‘생태계위해 외래식물’이란 낙인이 찍혔다. 서양등골나무와 털물참새피, 물참새피, 애기수영, 도깨비가지 갯드렁새도 뿌리 뽑아 낼 ‘생태계 위해 외래식물’로 낙인찍혀 박멸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위해식물 뿌리 뽑기 캠페인’이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만고풍상을 다 겪으며 온갖 장해에 면역이 된이 귀화식물을 물로 보는 것이다. 혹시 서양등골나무와 털물참새피, 물참새피, 애기수영, 도깨비가지 갯드렁새라면 모를까, ‘귀화 60년’의 돼지풀, 단풍잎돼지풀을 멸종 시키겠다는 이 자연개조 정책은 무모하기 그지없다.


영국은 100년도 더 된 빅토리아여왕 시대에 겪은 돼지풀 악몽을 20세기에도 재현했다. 1971년 구룹 제네시스(Genesis)가 낸 앨범인 ‘단풍잎 돼지풀의 귀환’(The Return Of The Giant Hogweed)은 영국인들에게 1세기 전 불쾌했던 그 경험을 되새기게 했다. 특수한 조명이 환상적이며 기괴한 상황까지 연출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마치 칭기스칸의 군대가 유럽으로 진격해올 때처럼 전율을 느끼며 들어야 했다.

 


뒤돌아 달려!
아무것도 그들을 못 말려
모든 강과 수로 주변에서 그들의 힘은 자라고 있어
그들의 씨를 말려야해!
그들을 멸망시켜야만 해
그들은 도시마다 어둡고 무거운 경계심을 자극하는 냄새를 뿜으며 침투하고 있어
그들은 무적이야
그들은 우리의 모든 제초제에 내성을 갖고 있는 것 같아
오래 전 러시아 어느 언덕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한 탐험가가 늪에서 자생하는 돼지풀을 발견했지
그가 돼지풀을 뽑아들고 고향으로 가져온 거야
그 가엾은 녀석들은 흥분했어, 복수할 방법을 찾고 있지
대왕괴물은 잊지 않았어
런던으로 온 그는
큐 왕립식물원 로열가든에 돼지풀을 선물했지
시간을 낭비하지 마!
그들은 다가오고 있어.
바로 서둘러야 해, 우리를 지켜야하고 피난처를 찾아야만 해
밤을 틈타 공격해야 해!
그들은 무방비야
그들이 독액을 활성화하기 위해선 태양이 필요해
아직까지 그들은 무적이야
아직까지 우리의 모든 제초제에 내성을 갖고 있어
멋진 시골의 신사가 경작된 정원을 갖고 있었지
거기서 모든 대지에 단풍잎 돼지풀을 심었어
그 가엾은 녀석들은 흥분했어, 복수할 방법을 찾고 있지
대왕괴물은 잊지 않았어
머지않아 그들은 탈출해서 씨를 퍼뜨릴 거야
전력을 다해 맹공격을 해서, 인류를 협박할 거야
단풍잎 돼지풀의 춤
위대한 돼지풀은 복수를 한 거야
사람들은 우리의 분노를 몸으로 느낄 거야
그들을 돼지풀의 가시로 죽일 거야
Heracleum mantegazziani

단풍잎 돼지풀은 살아있어

 

여우야! 사향노루야! 뭐 하니?

 

 

 

열하일기의 조선 우황청심환
연암의 열하일기에는 죽는 사람도 일으켜 세운다는 명약 우황청심환(牛黃淸心丸)이 쉬지 않고 등장한다.
“7월 3일. 어느 시골마을에서 훈장이란 노인에게 책을 얻어 볼까 하여 청심환 한 알과 부채 한 자루를 선물하였다./7월 13일. 길가에서 참외를 파는 노파가 참외 값으로 억지를 부리면서 청심환을 요구하였으나 돈으로 해결하였다. (…중략…) 고려보를 지나면서 상점주인장이 자기 딸을 수양딸로 받아달라는 청탁을 받고 극구 사양하면서 그에게 청심환 한 알을 주었다. /8월 6일. 발을 다친 하인을 위해서 돈 2백 닢과 청심환다섯 알에 나귀를 세내어서 빌렸다./(…중략…) 혹정이란 청나라 관리가 은 두 냥을 보내며 청심환 한 알을청하기에 두 알을 전해주었다.”


8월 17일 자 일기가 백미다.
연암은 천길 석벽 길을 가다가 어느 절에서 쉬게 된다. 중 둘이 뜨락 난간아래서 오미자 두어 섬을 볕에 말리고 있었다. 무심코 두어 알을 입에 넣었더니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 하나가 노발대발 꼴사납게 소리를 질러댔다.


마침 담뱃불을 붙이러 들어오던 마두 춘택이가 이꼴을 보고 성을 내며 달려들었다. “나리께서 이 염천에 냉수 생각이 나서 마당 가득히 널어 논 오미자 두 어알 집어 해갈할 생각이었는데 뭐가 어째?, 하늘 높은줄 모르고 물 깊은 줄 모르는 이 대가리 벗겨진 도둑놈아!”


중도 입에 거품을 물고 대들었다. “네 놈에게는 하늘같이 높은지 몰라 무서울지라도 내겐 무슨 대수겠느냐. 관운장이 살아나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질지라도 내겐 무서울 게 없다.”


급기야 춘택이 중의 뺨을 올려붙였다. 중은 그래 어디 쳐 보라는 듯 대들었다. 춘택이 주먹을 날려 중을 쓰러뜨렸다. 그래도 중은 남의 오미자를 훔쳐 먹고 되래 바리때 같은 놈을 시켜 주먹다짐을 한다고 소리 소릴 질러댔다.


춘택이 벽돌 한 장을 빼들어 내리칠 기세이자 그때야 중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허나 이게 웬일인가? 중 하나는 아까부터 멀찌감치 서서 이 광경을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도망가는 중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한 참 후 중 두 사람은 아가위(산사) 2개를 들고 와 사과하면서 청심환을 청했다. 청심환을 얻기 위한 수작이었던 것이다.


청심환은 중국 송나라 때의 의서인 ‘태평혜민화제국방’이라는 책에 처음 기재됐다. 따라서 오랜 역사를 지닌 중국의 약이다. 중국인들은 중국 명약을 두고 왜 그토록 조선 청심환에 열광했을까?


청심환에는 사향과 우황이란 두 약제가 들어있다. 특히 우황이란 약제의 역할이 중요하여 ‘우황청심환’이란 이름까지 유래시켰다. 우황이란 담석에 병이 든 소에서 얻는 것이다. 이 우황의 품질이 최고인 곳이 제주도이기 때문에 제주산 우황으로 만든 조선의 우황청심환의 효과는 중국제 청심환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사향은 어떤가. 시저는 이집트를 정복하러 갔다가 오히려 클레오파트라의 치마폭에 휘감기었으며, 시저를 비난하며 재차 정벌에 나섰던 안토니오 마저 그 여인의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바로 그 사랑의 미약이 사향이다. 양귀비, 황진이 그리고 조세핀, 공간과 시간을 달리 살았던 이 세 여인이 애용하던 소지품도 다름 아닌 사향노루의 향기였다. 이들 여인이 지니고 있던 향기의 진원지를 역추적, 옛 사향지로를 따라가면 티벳 그리고 운남성이다.


그렇다면 연암의 우황청심환에 들어있던 사향은 중국산이었을까. 물론 조선 나라 어디에서 발정한 암놈을 유혹하기 위해 마음껏 최음제를 발산하다 잡힌 수놈 사향노루 배꼽과 음낭사이에 달린 향낭에서 얻은그 기막힌 약제일 것이다.


청나라는 조선 사향가루가 들어간 조선 우황청심심원에 열광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고의 조선 우황청심환을 제주산 우황으로 조제한 것이라고 밝히면서도 사향 산지를 입도 벙긋하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었을까.

 


함경북도 무산, 은덕은 지금도 북한이 사향노루 보호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사향산지다. 금강산 지리산등 한반도 전역에 사향노루가 서식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조 때 세종대왕은 사향은 국산이 아니요 희귀한것이기에 약으로 쓴다는 핑계로 수입해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리면서 마치 조선 땅엔 사향노루가 서식하지 않는 것처럼 밝히고 있다. 사향노루를 사냥하는자는 엄벌에 처하기까지 했다. 그건 사향노루가 서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국산이 아니요’라는 말은 있기는 있지만 희귀하기 때문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어디인들 사향노루가 시글시글 서식한다면 사향이 단위 무게 당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물질이 되지못했을 것이다. 클레오파트라가, 조세핀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미약(彌藥)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은 우황청심환의 나라지만 가짜가 많아 나라에서 직접 관리하는 조선 우황청심환을 진환이라고까지 불렀다. 세종의 ‘국산이 아니요’라는 말은 없는 척 하자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지 모른다. 산삼 나는 산에 금산 봉표를 세우고, 황장목 숲에도 금벌 봉표를 세웠다.


그러나 사향노루는 사냥을 법으로 금지하면서도 봉표를 붙이지 않았다. 이것만은 중국 황제를 군주로 모시고 신하된 의무를 다 함으로써 국가 안전을 보장받았던 조선이지만, 중국 진상품에서는 제외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긴 것인지 모른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던 곳


“초연히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파.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어쩌면 한명희의 ‘비목(碑木)’이 그 사향의 산지를 암시하고 있을지 모른다. 한명희가 없었더라도 가곡 ‘비목’은 태어났을지 모른다. ‘초연히 쓸고 간 깊은 계곡’은 광주산맥의 백암산이 빚어놓은 북한강 깊은 골짜기이다. 6・25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치러졌던 자리다. 이 노래는 그 두렵고, 적막한 계곡, 달빛 쏟아지는 밤이면궁노루, 그 사향노루가 울어 댄다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봉표조차 세우지 않고 꼭꼭 숨겨놓았던 그 조선조의 사향 산지가 거기일까? 정말 바로 북한강 유역은 진환의 주원료를 생산하던 숨겨놓은 땅인지 모른다. 1932년 10월6일 그 해 따라 유난히도 가을가뭄이 심해서 강원도청 산업과에서는 회양군청 직원, 그리고 내금강면 24개 리에서 차출된 주민들이 합동으로 방화선(防火線) 개척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석함을 발견했다. 백자 사발 4점과 향로 1점 그리고 은제사리구 등이 들어있었다. 백자에는 여러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그 가운데 ‘대명홍무 24년 신미 4월 일 방산사기장심의 동발원비구신관(大明洪武 二十四年辛未 四月日 方山砂器匠沈意 同發願比丘信寬)’란 글귀가 있었다. 홍무 24년(1391)은 조선 태조의 건국(1392년) 바로 전 해이고 백자를 만든 사람은 심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밝혀졌고 고려백자로는 제작연대가 분명한 가장 오래된것임을 입증하는 문화재로 밝혀졌다.


이성계는 이때 고려 말의 무신(武臣)이었는데 장차 왕이 되고자 하는 큰 뜻을 품고 양구 방산에서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고 그것을 몰래 강원도 금강산 내금강 최고봉에서 보면 저녁에 뜨는 달이 마치 이 봉우리 끝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는 월출봉에 묻어 두었던 것이다.


평화의 댐이 걸려있는 북한강 천미리에서 항령고개를 넘어가면 그 방산자기의 고장 양구군 방산이다.
‘흰 돌산’ 백석산은 옹기흙산이다. 그 산의 백토는 그 옛날 화천・홍천・인제, 저 멀리 횡성 사람까지 동원해 경기도 광주 분원까지 실려 갔다. 북한강에 어름이 풀리면 백토 더미는 ‘갯대기 배’에 실려 북한강으로 내려갔다. 양평 양수리에서 남한강으로 들어서 다시 광주로 옮겨지는 대장정을 마치면 관기로 빚어져 궁궐로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다.

 

따라서 방산 백토는 그 누구도 함부로 손 댈 수 없는 왕실용이다.


그 백토더미를 드높은 항령을 넘어 북한강 마을 천미리로 옮겼다는 것이 의문이다. 그 흙이 그토록 요긴할 뿐 아니라 궁중 자기의 원료가 될 만큼 백토 중의 으뜸이었다면, 당연히 도자사(陶瓷史)는 대문짝만 하게 실렸어야 하지만 그런 기록은 없다. 얼핏 생각나는 것이 ‘조선판 사향지로(麝香之路)’이다. 백토는 위장용 소품, 갯대기배는 수송수단, 북한강은 수송로로 꾸며진 나라의 모처로 들어가는 사향의 비밀 루트였다는 추측은 터무니없지 않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갯대기 배’가 떠나던 천미리 북한강에서 정말 그곳이 조선조판 ‘사향지로’의 출발지였을 추측을 뒷받침할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2005년 환경부는 ‘사향노루의 서식지관리 및 인공증식 기술개발용역 사업’을 발주했다. 사라지기 직전인 저들의 암수를 붙잡아 인공수정 해가면서 종족을 증식시키자는 것이다.


문화재청으로부터 오대산 일원 그리고 화천·양구·인제지역에서 천연기념물 216호 사향노루4마리에 대한현상변경(포획)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그해 9월 북한강 계곡에서 3살짜리 수컷 1마리를 포획하는데 성공했다.


사향노루가 세상에 얼굴을 내민 기록은 흔치않다. 사향노루는 대체로 죽어서 기록을 남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기록은 모두 낮 뜨거운 ‘잔혹사’이다.


“1965년 충남 예산, 전남 구례에서 각각 1마리씩 밀렵, 강원도 화천, 홍천에서 수 미상 밀렵. 1968~1970년 강원도 강릉 소금강에서 3마리 밀렵, 1970년 강원도 화천군 수상리에서 1마리가 확인. 1971년 6월 충북영동에서 수컷 1마리 밀렵. 1971년 10월 18일 경기도 고양에서 수컷 1마리 포획 창경원에 입원(入苑), 1972년 폐사. 1973년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 고성군 건봉산에서 발견. 1975년 12월 15일~1976년 1월 15일사이평창군 봉평면 속칭 보래령에서 암컷 4마리, 수컷 1마리 밀렵.”방사한 기록도 있다. 1987년 12월 강릉 소금강 삼산 4리에서 사향노루 1마리가 생포됐다. 그러나 산양을붙잡은 이들은 이 귀하신 몸을 놓아주었다. 그 무렵 올무나 덫에 거린 야생동물을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는 풍조가 있었다. 그러니까 북한강 사향노루는 18년 만에 산 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멸종위기 1급의 그 귀하신 몸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흐르다.’던 바로 그 곳에서 어렵사리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DMZ, 그곳을 멸종위기 종들이 은신하고 있는 생명의 피신처로 주가를 올려놓았다.


여우도 ‘토종 동요’도 사라지던 때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밥 먹는다
무슨 반찬
개구리 반찬
살았니?(죽었니?)
죽었다 (살았다)”


이 동요의 일본어 버전은 이렇다.
“狐なの 狐なの 何をするのか
食事する
何の おかず
蛙 おかず
暮したの? 死んだの?
死んだ (暮した)“


‘쎄쎄쎄 아침 바람 찬 바람에’, ‘한 고개 넘어가 두 고개 넘어가’, ‘숨바꼭질 할 사람 여기 붙어라.’ 이들 동요처럼 ‘여우야 뭐 하니?’도 일본서 건너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럼, 일본 동요가 건너오기 전 아이들은 무슨노래를 부르며 놀았을까? 아마 한국 여우가 사라지던 일제 강점기, 우리의 ‘토종’ 동요도 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사라진 우리 동요를 복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노인들의 기억 속에 묻어있는 옛 이야기 속엔 당장 동요로 튀어나올 것 같은 싱싱한 가락이 흘러 다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경상도 지방에서 전해져오는 ‘여우 곶감 낚시’ 같은 민담이다.


“여우는 독신이다. 그의 밤 사냥은 토끼·꿩·오리·들쥐·곤충에 이르기까지 먹이사슬 전체가 대상이다. 물론 동요처럼 개구리도 먹는다. 과일도 즐겨먹어서 민가에 내려와 곶감까지 빼먹는 고난도 서리를 할 수 있다. 여우가 출몰할 만한 곳에 곶감을 매달아 놓는다.


첫 번째 것은 따 먹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게 머리 높이에, 두 번째 것은 가볍게 점프를 해야 입이 닿을 높이에, 그리고 세 번째 것은 도움닫기로 점프를 해야 입이 닿은 높이에…. 세 번째 곶감에 꽂인 굵은 낚시가 일을 쳤다.

‘여우가 범에게 가죽을 빌리란다.’고 했던가. 무모한 용맹을 발휘하던 여우는 입천장에 낚시 바늘을 꿰고 대롱대롱 매달려 몽둥이 든 사냥꾼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우는 단 한 번 ‘곶감 낚시’에서 망신을 당했을 뿐, 민담 속에선 언제나 요사하고 교활한 존재다.
아홉 개의 꼬리를 달고 도술을 부리거나, 외로운 산길나그네를 홀려버리고, 공동묘지를 파내는 괴기스러운 동물이다. 온통 그런 얘기들만 남겨놓고 여우는 오래전 떠나갔다. 1978년 지리산에서 올무에 걸린 사체로발견된 후 영원히 종적을 감추었다.


그 때 그 시신인 듯 여우가 돌아 왔다. 역시 그때처럼 사체였다. 2004년 10월 23일, 국립환경연구원은 멸종된 것으로 추정됐던 토종 야생 여우가 DMZ 인근지역에 서식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산양의 고장 강원도 양구에는 ‘산양을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별난 주민 모임이 있다. 10월 중순 이들 회원들이 양구군 동면 덕곡리 군부대 인근 야산에서 특이한 모양의 동물 사체를 발견했다. 국립환경연구원의 연구진이 급파됐다. 7~8년생 수컷 여우로 판명됐다.


귀 끝과 발끝이 까맣고 꼬리 끝이 하얀 우리 토종, 레드 폭스는 이번에도 26년 전 그때처럼 사체로 모습을드러냈다. 그러나 그건 죽은 여우든 산 여우든 이 땅에 분명히 여우가 있다는 메시지다. 비록 사체였지만죽은 여우 한 마리가 DMZ를 사라져 가는 희귀동물의 피신처, 이 환경파괴의 대홍수 시대를 건너가는 ‘노아의 방주’로 만들고 있었다.


서제막급(筮臍莫及)과 수구초심(首丘初心)
수컷사향노루 한 마리가 언제나 코끝에 밀려오는 향기를 맡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냄새가 있을까?”


사향노루는 어디선가 흘러오는 향기의 진원지를 찾아 나섰다. 봄처럼 산 너머 남촌에서 오고 있을까? 사
향노루는 산을 넘어가 봤다. 큰 강이 흐르고 있었다. 향기는 강 건너서 풍겨오는 게 틀림없었다. 강을 건넜
다.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향기는 들판 끝에서 풍겨오고 있었다. 달리고 달려서 세상 끝에 이르렀다.
그래도 향기는 코끝에서 맴 돌 뿐, 거기도 진원지는 아니었다. 사향노루는 지친 발걸음을 돌렸다.


“아, 거기일지 몰라.”


문득 바위산이 생각났다. 어쩌다 햇볕 속에 얼굴을 내 보일뿐 높은 그 산은 늘 구름에 가려 있었다. 너무 높아 아무도 가지 않는 바위산 너머에 어쩌면 향기의 샘이 있을 것 같았다. 사향노루는 바위타기 명수답게 갈라진 발굽으로 바위 모서리를 밟으며 한없이, 한없이 석산을 올라갔다. 드디어 바위산 정상에 올라섰다. 산 아래서 올라온 골바람이 사향노루 배를 타고 치솟아 올라왔다. 바람결에 그 향기가 더 진하게 실려 왔다.


그때 사향노루는 골바람이 타고 온 절벽에 하얗게 꽃을 피운 솜다리 떼를 보았다.


“아, 솜다리 꽃 향기였구나.”


바람결에 솜다리들은 앙증맞은 꽃을 흔들었다. 정말 사향노루는 솜다리 꽃 향기인양 그 향기를 맡고 있었다. 사향노루는 솜다리꽃 그 고운 얼굴을 만져보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한 발짝, 한 발짝 절벽 바위 틈새로발을 내디뎠다. 훅하고 더 진하게 향기가 얼굴을 스쳤다.


“조금만 더, 조금만….”


그때였다. 사향노루는 이끼 낀 바위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향기를 찾아가던 사향노루는 높이를 알 수 없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북한강 깊은 계곡에도 향기를 찾아 헤매는 수컷사향 노루 한 마리가 있는지 모른다. 가곡 ‘비목’ 속에서나만날 수 있을 것이라던 그 수컷 궁노루 한 마리가 홀연히 나타나 사람들을 열광시키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러나 사향노루는 서제막급(筮臍莫及)의 숙명을 안고 태어난 짐승이다.


수컷사향노루 한 마리가 풀을 뜯다 그만 사냥꾼의 화살에 맞고 말았다.


“이 혹 때문이야. 너는 왜 내게 생겨나 나를 죽게 한단 말이냐!”


배꼽에 매달린 원망스러운 사향주머니를 떼어 내버리려고 한껏 고개를 숙여봤지만 입은 배꼽 까지 닿지않았다. 미리 배꼽을 떼어 내버렸어야 하는 데…. 뒤늦은 후회만 막급했다.


DMZ는 사향노루가 이 땅 마지막 서제지탄(筮臍之歎)의 자리로 감춰둔 곳인지 모른다. 그는 멀리 여행을하지 않는 붙박이 습성 때문에 북한강 기슭에서 오리 밖에도 나가보지 않았을 것이다. 저만 아는 바윗길을내놓고 늘 그 길을 오가며 살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용케도 그의 서식처를 찾아냈다. 사향주머니 때문에슬픈 그 짐승의 마지막 서식처가 그만 온 세상에 노출되고 말았다.

 

DMZ에서는 철새도 인간이다

 

 

 

리만해류(Liman Current)는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북서계절풍에 등을 떠밀려 유속이 빨라진다. 나라(奈良)시대 역사서 니혼쇼키(日本書紀)는 고대인들이 연해주 연안을 따라 내려와 동해안을 거쳐 대한해협에 이르는 이 해류에 북서풍이 불기를 기다렸다가 일본으로 항해했다고 적고 있다. 1987년 1월, 작은 배 한척이 대화퇴 부근에서 그 해류에 실려 표류하고 있었다. 1월 15일 새벽 1시, 청진항을 빠져나온 청진의과대학 병원 의사 김만철(金萬鐵)씨 일가 11명을 태운 50톤 급 청진호였다.


1월 20일 일본 후쿠이(福井) 외항에 도착한 표류선을 일본 해상보안청은 쓰루가(敦賀)항으로 예인했다.김씨는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따뜻한 남쪽 나라’는 다시 오키나와(沖繩), 타이완을 거친 25일 간의 긴 항해 끝자락에 있었다. 2월 8일 우여곡절 끝에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겨울철새들에겐 DMZ가 ‘따뜻한 남쪽 나라’이다. 철원평야는 시베리아 아무르강이나 중국 흑룡강에서 날아오는 겨울철새의 첫 기착지이다.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겨울철새를 사진에 담는 진익태씨의 철새 캘린더를 보면 첨병이 기러기이다. 기러기 가운데도 창백한 긴 다리를 지닌 쇠기러기가 선발대다. 9월말은 아직 철원평야의 추수가 끝나지 않을 때이다. 이때 쇠기러기 50여 마리가 먼저 날아온다는 것이다. 10월 초순, 드디어 기러기는 본대를 편성해 철원평야를 점령한다.


해마다 조금씩 늘어나 가장 많이 날아왔던 2000년 가을엔 20만 마리나 됐다. 전 세계 기러기는 모두 50만 마리라는 기록이 있다. 철원평야에 40%가 날아온다는 계산이다. 쇠기러기는 “끼룩, 끼룩”하는 울음소리때문에 금방 식별된다. 온통 쇠기러기 떼지만 그 가운데는 몸길이가 76〜86cm나 되고 “과하한, 과하한”하며 바리톤 울음소리를 내는 큰기러기도 4,000여 마리나 된다.


가끔 작은 몸집에 짧은 목, 흰 깃털의 흰기러기도 10마리 정도 끼어 있을 때도 있다. 흰기러기의 본적지는북아메리카 툰드라지방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 희귀조는 대륙을 횡단하는 대장정 중 난기류를 만나 어디론가 쏜살같이 떠밀려가다가 쇠기러기 떼를 만나 합류한 미조(迷鳥)가 분명하다.


재두루미도 부지런한 철새이다. 9월 말이면 어김없이 선발대 50여 마리가 찾아온다. 이어 기러기 떼가 하늘을 뒤덮을 때가 되면 두루미 본대까지 합류해 이 세계적인 희귀조는 철원평야에만 800여 마리에 이른다. 청둥오리, 가창오리는 철원평야 겨울철새의 후발대. 그러나 10월말이면 이들도 20만 마리가 평야를 뒤덮는다.
그리고 어느새 독수리 떼도 검은 바위처럼 큰 몸집을 웅크리고 앉아 두리번두리번 평야를 바라보고 있다.

두루미, 쇠기러기, 큰기러기, 흰기러기, 가창오리, 호사비오리, 대머리독수리, ‘철원평야의 새들’이 이때쯤이면다 모이는 것이다.

 

대머리독수리가 DMZ를 향한 대장정은 마치 ‘따듯한 남쪽 나라’를 찾아가는 리만해류의 조각배처럼 처연했다. 정말 뜻밖이었다. 독수리가 추락한 것이다. 1993년 12월 14일 강원도 화천면 사내면 사창리는 겨울답지않게 포근했다. 오후 3시 40분께 줄지어 서 있는 미루나무를 향해 커다란 검은 새 한 마리가 아주 느리게날아왔다.


한 군부대의 초병이 이 새를 감시하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무척 큰 새였다. 큰 새도 이 지역을 처음 와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착륙방법이 서툴러 보였다. 가는 나뭇가지를 휘어잡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동안이었다. 큰 새는 나뭇가지에서 미끄럼을 타듯 밀려 내려가다가 땅바닥으로 추락해 버렸다. 잠시 후 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초병이 달려가 붙들려고 하자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투항해 버렸다. 큰 새는 몽골서 날아 온 독수리였다. 1981년 포항지방에서 2마리가 발견된 이래 12년만의 공식방문이었다. 그러나 독수리는 아주 체면을 구겨버렸다. 3일 후인 17일 오후 3시 30분께 비슷한 사건이 또 일어났다. 독수리 한 마리가 사창리에서 3km쯤 떨어진 삼일리의 한 부대를 방문했다. 그 새도 나뭇가지에 매달렸
다가 추락했는지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는 넓은 영내를 순시하듯 걸어 다녔다. 흰 수염이 달린 얼굴을 좌우로 흔들며, 거드름을 피듯 걸어가는 모습은 위엄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도 한 병사가 달려가자 저항 없이 포로가 됐다.


‘추락한 독수리’ 는 강원도 춘천의 산림환경연구소로 긴급 후송됐다. “하늘의 왕자가 왜 추한 모습으로 떨어졌을까?” 독수리를 ‘생포’한 초병에서부터, 이들을 자동차에 싣고 급히 후송하던 운전기사, 소문을 들은 주민들까지 모두 궁금해 했다. 대부분 동물 사체까지 깨끗이 해치우는 이들 ‘청소용’ 독수리가 밀렵꾼들의 독극물에 희생된 꿩이나 고라니의 사체를 먹은 ‘약물중독자’들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병인은 전혀 다르게 진단됐다. 너무 굶어 탈진했다는 것이다.


아마 그 겨울은 배고픈 독수리가 추락하는 계절이었던 모양이다. 새해 들어 독수리의 추락사건은 하루가 멀게 발생했다. 1994년 1월 26일 오후 2시께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사방지리에서 날아가던 독수리가 DMZ철책을 들이받고 땅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이틀 후인 28일 오후 2시 30분께는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백석동에서 군부대 정문 앞을 서성이다가 붙잡혔으며, 29일 오후 1시께는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화지리 3거리에서 집 잃은 아이처럼 갈팡질팡하다가 주민의 트럭에 덜렁 들려 태워지기도 했다.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에서는 한 식구인 듯한 4마리의 독수리가 닭장을 습격하다 주민에게 ‘체포’되기도 했다.


추락하며 또는 잘 착륙하며 독수리는 그 후 해를 거르지 않고 나타났다. 1995년 겨울 20마리가 발견되더니, 이듬해 40마리, 그 이듬해는 60마리, 1998년엔 100마리, 1999년 150마리로 늘어났다.
국립환경연구원은 12월 23일 현재 DMZ 인접지역 12개 장소에서 독수리가 월동을 하고 있으며 그들은 최소 837마리라고 밝혔다. 지역별로는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두지리 일대에서 300마리,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토교저수지에서 227마리,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현리에서 170마리의 독수리 떼가 월동하고 있는 것이 발견됐다.


2002년 12월 21일, 문화재청이 조사한 독수리 개체수는 더 늘어났다. 전국에서 무려 1,236마리가 월동하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30여 년 만에 제주도에서도 16마리가 발견됐다. DMZ를 중심으로 한 한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큰 월동지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미망 두루미의 목 메인 망부가
철새들에게 DMZ는 정말 ‘따뜻한 남쪽 나라’일까? 비밀은 DMZ 북쪽 평강고원에 솟아 있는 오리산(452.2m)에 숨겨져 있다. 27만 년 전 추가령 열곡대 지금의 오리산과 경원선 철도 간이역인 검불랑역 북쪽4km쯤 되는 해발 680m의 이름 없는 산 2군데에서 화산이 폭발했다. 두 화산의 용암은 아주 묽었다. 검불랑 용암은 북쪽으로 흘러갔다. 오리산 용암은 남쪽으로 96km나 흘러갔다. 추가령과 전곡, 고랑포, 사이의낮은 골짜기들이 용암으로 메워졌다. 강원도 철원과 평강을 중심으로 이천, 김화, 회양 사이에 해발 200〜500m, 너비 650km² 용암대지가 형성됐다. 대지는 오랜 세월 풍화로 깎이고 먼지가 쌓여 기름진 땅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이 대지를 철원평야라고 불렀다.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곰보돌’만 아니라면 이 평야가그 옛날 화산이 폭발해 빚어졌다고 믿을 사람이 없다.


그 대지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그때의 열정을 식히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평야 한가운데로 6km를 흘러 한탄강으로 들어가는 영상 15도의 따듯한 실개천이 그 증거이다. 이 개천이 솟는 샘이 샘통(泉桶)이다.
이 물이 철새들에게 얼어붙은 평야의 오아시스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샘통이 철새를 불러 모으고 있다.
또 다른 비밀이 있었다. DMZ이다. DMZ가 철원평야로 철새를 불러 모으고 있었다. 철원평야는 평강고원의 봉래호에서 물을 댔다. DMZ가 그 물길을 끊어버렸다. DMZ 일대에 저수지들이 생겼다. 금연, 용화, 강산,토교, 하갈, 산명, 강포저수지가 물을 받아 담았다. 이들 저수지들은 내년 봄을 위해 겨우내 3억 톤에 이르는 물을 가둬 두고 있었다.


민통선 북방지역은 마구 파헤쳐지고 있었다. 이들 저수지의 물길이 닿을 만한 곳이면 모두 논으로 개간됐다. 그러나 철원평야에서는 개발이 자연보전이었다. 추호도 철새를 위한 농지개간이거나, 저수지 건설이 아니었는데도 그 무모한 자연파괴가 철새를 불러 모았다. 저수지와 샘통의 신선한 물을 철새들에게 철원평야만한 낙원이 없게 했다. 그 물을 받고 있는 철원평야는 강원도 쌀 총생산량의 5분의 1을 쏟아놓고 있었다. 곡창은 풍부한 먹을거리를 늘 인간에게만 제공하는 게 아니다. 콤바인이 지나간 논바닥에는 지천으로 널린낙곡이 새들을 부르고 있었다. 벼 벤 그루터기에서 월동하는 갖가지 애벌레, 논바닥에 자라고 있는 겨울 풀,얼음장 밑의 물고기…. 그것들을 얻기 위해 철새들은 연해주에서, 바이칼에서, 몽골고원에서 먼 여행을 떠나온 것이다.


그보다 또 다른 비밀이 있었다. 철새처럼 DMZ를 찾아온 민통선 사람들이 새들을 부르고 있었다. 새를 기다리는 민통선 사람들의 얘기들이 전설이 되어 철원벌판에 흘러 다니고 있었다. 1999년 6월 9일, 라디오 방송 CBS는 ‘과부 두루미’ 전설을 얘기하고 있었다. 1993년 1월 17일 철원평야에서는 ‘SEOUL KOREA-1993017-KBT’라고 새겨진 말목 가락지로 한껏 멋을 낸 미망두루미가 자신의 고향인 시베리아 앙카호를향해 떠났습니다. 이 두루미는 한 달여 전 사방지리에서 남편과 사별했습니다. DMZ의 한 병사는 눈 덮인벌판에서 이상하게 며칠째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두루미 한 마리를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이레 째 되던 날두루미가 사라졌습니다. 쌍안경으로 두루미를 찾던 병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두루미가 쓰러져 버린 것입니다. 병사가 달려갔을 때 또 한 마리의 두루미가 누워 있었습니다. 쓰러진 두루미의 남편이었습니다. 이미 남편은 죽은 지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았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시신 옆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인은이레 동안 남편의 시신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지요. 놀라운 얘기가 한국조류협회 회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들은 탈진한 부인 두루미를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두루미는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새지만, 그의 고상한 품위와는 달리 식사는 꿈틀거리는 미꾸라지를 즐깁니다. 두루미는 그 고단백 식사로 한 달 만에 기력을 회복했습니다. 조류협회 회원들은 이 슬픈 여인을 자작나무 숲이 에워싸고 있는 아름다운 앙카호로 날려 보내기로 했습니다. 기념으로 말목 가락지를 선물했습니다. 그건 그녀가 다시 철원평야를 찾아왔을 때 사람들이 “아, 그 부인이다”하고 알아차리게 하기 위한 표식이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활주로를 달리듯, 이 덩치 큰 새도 도움닫기 공간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북쪽을 향해 두 줄로 섰습니다. 그 끝에 여인이 섰습니다. 최무영씨가 가슴 아린 송시를 낭독했습니다.

 
오늘
얼어붙은 철원벌에서
목 메인 망부가를 듣는다.
이레 낮
이레 밤을 지새워
하늘에 사무치고 땅을 울리던
뜨거운 울음소리 듣는다.
삭풍보다 맵고
눈보라보다 치열한 정절로
망부의 시신을 지키며
이승과 저승의 문턱을 넘나들던
네 거룩한 사랑.
너 무어라 부를까
춘향이라 부르기엔
인간의 어휘가 너무 때 묻고
열녀라 부르기엔
은장도 칼날보다 새푸른 너의 눈빛이
너무 애잔하구나
오늘
다투고, 배신하고, 갈라서기를
삼시 세 때 밥 먹듯 하는
썰렁한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따뜻한 불씨 하나 묻어놓고
우리 곁을 떠나는 너.
잘가라
비록 남은 생애가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다 해도
산다는 것은 좋은 일
살아있음은 하늘의 축복이므로.

 


“잘가!”, “잘 가세요!”, “안녕. 아줌마!”

어른들과 아이들은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두루미가 날기 위해 달려가려다 말고 조류보호협회 김성만 회장에게 다가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부리로 김회장의 손을 툭툭 치더래요. 그는 한 달 동안 한 시도 두루미 옆을 떠나지 않고 보살폈던 사람이거든요. 이윽고 비상한 두루미는 2백여 명의 환송객 머리위를 다섯 바퀴나 돌다가 까만 점이 되어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조류협회 철원지회장이던 김종식 씨는 그 미망인 두루미의 또 다른 애잔한 비밀을 알고 있
었습니다. 사람들이 남편두루미 무덤을 만들어주고 그 곳에 비목도 하나 세웠는데, 그날 떠난 미망인 두루미가 이튿날 그 무덤가에 와 있더랍니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사라졌더래요. 무덤가에 찍힌 두루미 발자국이 아리도록 가슴에 와 찍히더랍니다. 그 후 ‘SEOUL KOREA-1993017-KBT’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철원사람들은 해마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찾아오는 두루미 떼가 그녀의 안부를 전해오고 있다고믿고 있습니다.

 

 

 

철원평야의 흥부새 전설
철원벌판에는 살아있는 새의 전설도 있었다. 새벽마다 쇳소리를 내며 날아오른다는 철원 양지리 토교저수지의 새벽 새떼를 보러갔었다. 새벽 새떼를 보기 위해 석양에 그곳으로 향했다. 지뢰밭 속에 묻혀 있는 덕분에 온전히 늙어갈 수 있는 버드나무들이 허연 살을 드러내고 있는 숲 띠가 한탄강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강을 건너 숲을 지나면 들판이다. 동쪽, 서쪽 어느 쪽으로도 눈이 모자라게 아득히 철원 뜰이 펼쳐졌다. 낮은 산 양지쪽으로 양지리가 앉아 있었다. 언덕 위의 작은 교회 하얀 종탑은 그때 저녁 해를 받고 있었다.

 

오로지 새를 보러 가던 그날 DMZ 마을은 평화스러웠다. 백종한 씨의 민박 ‘철새 보는 집’은 토교저수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석양에 빨갛게 익은 붉은 벽돌집이 작은 소나무 동산에 기대 있었다. 백씨는 월정역 철의 삼각지 전망대 패션을 따다 집을 지은 것 같았다. 평강고원이 그림처럼 들어앉아 있는 전망대 전망창처럼, 벽 한쪽을 다 털어 낸 백씨네 커다란 유리창에는 노을이 내려앉은 저수지 긴 둑이 들어앉아 있었고그 위로 기러기 떼가 V자를 그리며 그림처럼 날아갔다. 그날 밤 백씨가 처음엔 슬프다가 나중엔 행복해지는 ‘흥부새’ 이야기를 들려줬다.


전쟁이 끝났을 때 철원평야는 목이 말랐다. DMZ가 평강고원에 있는 봉래호, 보양호에서 흘러오는 봇도랑을 잘라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그 옛날 토교천에 놓였다는 ‘흙다리’(土橋) 전설을 생각해 냈다. 그곳은 27만년 전 평강고원 오리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흘러가다 멈춘 동쪽 끝 협곡이다. 그 골짜기를 가로막는 거대한흙다리 공사가 1972년부터 5년간 진행됐다. 하기산 아래 진촌 고길 신대 마을을 물속에 가라앉힌 100만 평짜리 연못이 생기면서 철원평야는 물 걱정을 안 하게 됐다.


양지리에 커다란 호수가 생겼다는 사실을 시베리아에서 먼저 알고 있었다. 겨울 철새가 찾아온 것이다.
그 옛날부터 양지리를 찾아오던 두루미, 재두미가 이 호수를 다른 철새들에게 가르쳐 준 것 같았다. 호수는처음 청둥오리 가창오리 떼가 찾아오다 이젠 쇠기러기떼가 점령해 버렸다.


발단은 그 새떼였다. 늘 책상에 앉아 공상하기를 즐기는 정책입안자들은 새도 사람의 법을 따르는 줄 알고 있었다. 새떼를 보고 간 그들은 철원평야를 자연생태계 보전지역으로 묶어 철새를 사람들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그건 사람이 농사를 지어야 철새가 날아온다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 법칙을 모르는 무식한 결정이었다. 민통선 사람들은 새를 보호하겠다고 사람을 쫓아내는 정치 앞에 단단히 화가 났다.
“자, 새를 쫓아 버리자고. 간단해. 농약 몇 병이면 씨를 말릴 수 있어!”


사람들은 점점 격앙돼 갔다. 백씨는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새를 해치지 말자고 설득했다.
“철원평야에 떨어진 낱알을 주어먹겠다고 새가 왔지, 우리가 새의 영역에 쳐들어와 새를 못 살게 하는 건아니잖은가. 그걸 모르는 정치인들이 답답할 뿐이지, 사람을 찾아 온 새가 무슨 죄가 있나? 새가 못사는 땅에 사람은 살겠나?”


몇 사람이 백씨 편에 섰다. 그들은 눈 쌓인 벌판에 ‘새 밥’을 뿌리기 시작했다.
‘흥부새’가 출현한 건 바로 이 무렵이다. 민통선 밖에서 두루미가 찾아오는 양지쪽 맑은 물로농사를 짓는 양지리 쌀이 으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양지리 오대쌀 인기가 상승했다. 누군가 논에 청둥오리를 키워보자고 제안했다. 오리가 해충 잡아먹고, 논김매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기분 좋은 농사였다. 쌀값이 더 올라갔다. DMZ 고엽제 파동으로 철원쌀 인기가 말이 아닌데도 정작 양지리 DMZ 쌀은 앉은자리에서,그것도 몇 만원씩 값을 더 받았다. 이듬해는 모내기를 마치자마자 논 떼기로 다 팔려버렸다.


철원평야 한 쪽 끝에서 시샘이 일어났다.
“철새가 돈을 물고 왔대. 양지리만 흥부가 사나? 우리도 새에게 밥을 줍시다.”
이웃 마을에서도 철새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새를 서로 사랑하겠다고 새 터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새벽 새가 비상하는 것도 볼거리고 새 터 싸움도 볼거리라며 새 관광을 오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백씨는 떠밀리듯 민박을 열었다. 그리고 새 구경하는 집이면 창문이 커야 한다며 아예 한 쪽 벽을헐어 전망대 같이 창을 냈다. 그 창문에 멋진 그림이 비치게 하려는 것인지, 이번엔 토교저수지 둑에 덩치큰 대머리독수리가 내려앉았다.

 

삶의 숨소리와 열림의 기약, 155마일을 더듬으며

 

 

낮잠에서 깬 고라니 한 마리가 연못을 찾자 몸단장을 하던 물까치가 튕기듯 날아오르더니 이내 안심해버리듯 얼마 날지도 않고 다시 고라니 옆으로 자리를 잡는다. 어차피 같이 살아 온 이웃이었으므로. DMZ의주인공은 이제 마음껏 자란 나무와 풀들, 그리고 개울을 따라 모였다가 흩어지는 산과 들의 짐승들 하며 하늘을 가로 지르다 피곤을 씻거나 아예 둥지를 틀고 자리 잡은 새들이다. 예성강과 한강어귀의 교동도에서부터 개성남쪽 판문점을 지나 중부의 철원, 금화를 거쳐 동해안 명호리에 이르는 장장 155마일 248km에 이르는 군사분계선. 그 비운의 선을 품고 56년을 존재해 온 남북 4km의 긴장과 평화가 함께 존속하는 모순의 땅DMZ.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따라 설정된 6천4백만평의 광대한 면적을 지닌 국토의 중심이자 섬처럼 홀로 남은 땅. 예시당초 이 땅은 평화의 땅이어야 했다. 그러나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던 군사적대치의 태생적 한계를 지닌 평화였고 그 평화는 견제가 고조될수록 비로소 안심하는 의문의 땅이었다. 유사 이래 이런 상황이 없었으므로 쳐다볼수록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세월의 더께가 쌓인 DMZ는 이제그냥 긴장 속에 방치된 땅이 아니라 곤혹스러움의 의문을 걷어 내야 하는 과제로 우리에게 던져졌다. 자연
생태학적으로는 6・25의 상처를 씻고 놀라운 복원력을 발휘하여 이 땅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생태의 보고가 되었으며, 정치사회학적으로는 민족공동체임을 확인하는 열어야 할 미래의 땅으로 자리매김 했다.


우리 일상 속에 DMZ는 없다. 분단에 대한 아픔을 잊으려 하는 만큼 DMZ는 멀어져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늘 가슴 먹먹하게 하는 아픔으로 다가오는 이름, DMZ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생경하게 느끼지 않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깨물어 유독 아픈 손가락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 아픔과 생존이 공존하는 DMZ를 더듬는다.

 


DMZ를 아십니까?


1950년 발발한 6・25는 3년 10개월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산천은 황폐해졌고 숱한 인걸도 간 데 없었다. 그 전쟁의 끝에 미국을 비롯한 유엔 16개국과 중국, 북한은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휴전선은 기존의 38선이 아니라 휴전 조인 당시의 양군의 접촉선에 따라 합의 결정되었고 조인 즉시 양군은 남북으로 2Km씩물러나 주둔하게 되었다. 이 지역을 DMZ(비무장지대, Demilitarized Zone)라 명명했다. 이른바 상호간 적대행위 방지를 위한 완충지대였던 것이다.


6・25 이후 50년을 훌쩍 넘긴 시간동안 남북 양쪽의 분계선 사이 비무장지대는 인적이 끊어진 상태로 계속보존되어 온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특수지역으로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또 15km를 내려와 군작전 및 군사시설보호와 보안유지를 목적으로 ‘민간인 통제선’(Civilian control line)을 설정함으로써 군인을제외한 일반인들은 물경 17km에 걸쳐 발길을 끊어야했다. 옥빛으로 흐르던 마을의 개울물도 처녀 총각이부끄럽게 눈길을 건네던 물레방아도, 사시사철 차디차게 솟아나던 우물터도 모두 그대로였다. 고갯길을 돌아 이웃 마실로 소통하던 신작로도 휑하니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고 왜놈의 눈치를 봐 가면서도 근근히 마친 초등학교조차 고스란히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경기의 동두천, 고양, 파주, 김포, 양주, 연천, 포천 그리고 강원의 철원, 화천, 양구, 인제, 고성에 걸쳐 2도14개시 군, 24읍면, 213개리가 토막 나 버렸거나 섬처럼 남았다. 그러나 휴전선 방어 임무를 국군이 담당하면서 1958년 6월부터 군 작전과 보안상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출입영농과 입주영농이 허용되기 시작했고 민통선 통제권이 완전히 이양된 후에는 국토이용의 제고와 북한의 계획적인 선전촌에 대응하기 위하여 1959년부터 99개의 자립 안정촌을 건립하였고 6,70년대에는 12개의 재건촌을 건립하였다. 경기의 대성동자유의 마을을 비롯하여 연천, 파주, 철원, 양구, 화천, 인제, 고성 등 거의 전 지역이 개방된 추세이다. 사실8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선전촌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선전촌, 자립안정촌, 통일촌 등의 개념은 이미 없어진 상태이며 오히려 민통선을 북상시킴으로 민북 마을도 많이 줄어들었다. 대성동이나 대마리처럼 GOP나DMZ 내에 거주하는 인구나 왕래자도 거부감 없이 자유왕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실태다.


한편 DMZ는 잃은 것만 가득한 땅은 아니었다. 개발과 인구증가에 따른 국토의 변화는 자연의 훼손이라는 필연적 결과를 가져 왔으나 이 불침의 무인지대는 고스란히 전화와 인공의 침범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었으며, 휴전 후 끊임없는 북한의 도발로부터도 한국의 안보를 지켜 낸 역할을 일정부분 해 온 것은 사실이다.
뿐이랴, 추가령 지구곡의 웅대한 계곡을 간직하고 펀치볼의 지형적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지질학의 산교육장이요 숨죽이고 조용히 누워 있는 숱한 역사의 숨은 보고이자 근대사의 한 획을 긋는 개발현장이 살아있는, 건축과 촌락의 보존지 역할도 하고 있다. 언젠가 다시 확인해야 할 조상의 땅이자 후손들에게 가감없이 물려줘야 할 미래의 땅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땅


전술했듯 비무장지대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길이 248km, 폭 4km로 면적은 한반도의 0.5%에 달하는992 평방미터이다. 휴전 이후 5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간의 출입이 통제된 자연 보전상태로 이어져 왔다. 자연보전과 보존은 다르다. 인위적 노력이 가미된 복원과 보호를 내포한 보존은 DMZ와 무관한 일이다.
더 진솔하게 표현한다면 그 오랜 세월의 갈피를 넘기며 DMZ는 방치되어 있었고 어쩌면 그 방치 덕분에 온전히 보전된 우리나라의 유일한 자생적 복원지역이다. 참으로 아이러니요 한편으로는 자연의 놀라운 힘에 경외를 느끼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비무장지대는 우리가 그냥 잃어버린 땅만은 아니다.


DMZ의 생태계는 기후와 식생, 하천과 바다 등의 지형적 차이를 감안할 때 크게 4개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서쪽으로부터 한탄강과 임진강, 한강 등을 포함하는 서해도서지역과 한탄강 상류 수계와 용암지대로 형성된 중서부 내륙지역, 산악지역과 고층 습지를 포함하는 중동부 산악지역, 그리고 동해안의 석호와 습지를 포함하는 동부해안지역이 그것이다. 이 DMZ 생태에 대해서 ‘할아버지, 연어를 따라오면 한국입니다’의저자 함광복은 이렇게 표현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은 풀과 나무가 마음껏 자라고, 새와 물고기가 거칠것 없으며, 온갖 야생동물이 뛰어놀아도 그들의 훼방꾼은 없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런 상상이 발단이었을 것이다. 반세기 전 남과 북은 전쟁으로 서로 한 쪽을 잃었지만 그 반사이익으로 ‘자연생태계의 보고’ 하나를 얻은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뒤늦게 찾아가본 그곳은 자연이 자신들의 새 질서를 꾸며가며 아주 특이한 자연생태계를 전개해 놓고 있었다. 전장을 찾아왔던 돼지풀이 토착식물을 밀어내며 치열한 영역 다툼을 하고 있었고, 인간이 떠난 빈 마을을 아카시아, 버드나무, 갈대숲이 차지해 놓고 있었다.

 

지뢰가 묻힌 그곳을 사람들은 두려워했지만 자연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 땅을 점령해 버렸으며, 그 속엔 이미 사라져버린 조나 팥, 귀리, 면화, 감자 따위가 혼자 자라고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런가 하면 멀리 시베리아에서 두루미, 재두루미가 그리고 몽골 고원의 독수리가 떼를 지어 찾아 왔으며, 멸종한 줄만 알았던 산양 떼가 살고 있었다.”


강화의 교동도를 기점으로 김포・파주 일대를 아우르는 서부도서지역의 경우 서해5도로 불리는 백령도와대청도, 소청도 등이 원래 북한의 옹진반도와 연결된 지역이었다. 강화도 역시 염화수로를 사이에 두고 김포반도와 떨어져 있으나 원래가 한 몸이었다. 그러다 해면 상승으로 섬으로 남게 되었는데 강화야 이미 인천시로 편입되어 섬의 전 지역이 도시화되고 있으나 물범과 가마우지의 낙원 서해5도에는 장단반도로 꾸역꾸역 모여드는 몽골 독수리와 함께 민물참게가 지천인 임진강 지천에 이르기까지 조선조 최대의 집성지로 보기 힘들 정도로 생태계가 유지되고 있다.


파주와 연천, 포천과 철원을 연결하는 중서부 내륙지역은 임진강과 한탄강으로 대표되는 내륙 구릉의 원형을 보여주며 이미 철새들의 낙원으로 자리 잡은 지 한참이다. 철원의 토교저수지나 샘통은 조류보호지로 이미 지정된 상태이고 대마리 일대도 청둥오리를 비롯한 철새들이 장관을 이룬다. 아울러 산지와 평야가 혼재된 지역답게 다양한 식생형태를 보여주는 이 지역의 식물군도 곤충들의 낙원이 되고 있음은 익히 알려진사실이다.


강원지역으로 넘어가 본격적인 산악지역으로 불리는 중동부 산악지역은 산양 및 사향노루 서식지가 있는산정부근과 산능선 뿐 아니라 겨울이면 먹이를 구하러 내려오는 계곡부근까지 다양한 동물군이 서식하고있다.

아울러 천혜의 절경을 감추어 둔 계곡으로는 양서류와 어류들도 1급수에 이르는 맑은 물과 함께 옛이야기 속의 자연모습을 그대로 재현시켜 놓았다. 두타연, 향로봉, 펀치볼, 백암산은 물론 양구의 용늪도 군사지역이었기 때문에 보존이 가능했다. 한편에서는 용늪의 예를 들면서 천연보호지역에 군사시설물이 들어서훼손되었다고 했지만, 용늪의 발견 이후 오히려 생태관찰자들이 묻혀 온 외래 식물들로 인해 생태계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동해안 지역은 화진포를 포함하여 금강산에 이르기까지 절경이 아닌 곳이 없지만 금강산 관광을 비롯하여 워낙 인공의 손을 많이 타 가장 우려되는 곳이기도 하다. 건봉산을 중심으로 향로봉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횡격실 능선은 남강을 기점으로 험준한 산악과 동해가 만나 다양한 동물군과 식물군을 보여 주고는 있지만 특히 북한쪽 산림생태계가 워낙 열악하여 산양을 비롯한 동물군의 자연스런 왕래가 제한을 받을 지경이다.


그리고 건봉사 중건을 비롯하여 건봉산 일대의 산자락도 이미 대로가 뚫려 있는 상태이며 명파리를 제외하고는 민가가 전무하덩 민북지역도 이젠 관광지나 요식업을 중심으로 다 개발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다만 고진동 계곡을 비롯한 계곡일대에는 워낙 심산이다 보니 아직도 풀이 무성한 옛길과 산촌의 흔적은 물론 각종동식물의 생태가 잘 살아 있다.

 

 


원시림에 묻힌 역사의 보고


우리가 DMZ에 진짜로 묻어 둔 것은 역사의 현장이다. DMZ야말로 6・25 이후 구비문학처럼 전승되어 오는 역사의 실체들이 숱하게 잠들어 있다. 선사시대의 이 지역은 석기인들의 중심부였다. 민통선 지역과 그주변의 구석기 유적은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지만 양구의 선사유적을 볼라치면 아직도 미확인 지뢰지대만큼 미개척의 요지들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의 구석기 유적은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주 금파리의 구석기 유적이나 동파리의구석기 유적, 연천 삼거리 유적과 학곡리의 지석묘, 철원 장흥리의 구석기 유적, 양구 해안분지의 선사유적등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상당수에 이른다.

 

특히 이 지역은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에서 보듯 구멍무늬 토기, 붉은간토기 등 동북지방의 토기 문화와 팽이형토기로 대표되는 서북지방의 토기문화가 융합하여 한강유역과 남부지방으로 전파시켜 주는 중간매개적 역할을 하고 있듯이 고인돌 역시 북방식과 남반식이 같이 존속하므로 남방 문화와 북방 문화가 혼재되어 있어 한반도 남북 문화의 점이적 위치에서 그 길목 역할을 했음을 보여 주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다.


선사유적만이 아니다. 고조선과 삼국시대, 그리고 태봉의 도읍이 고스란히 DMZ 안에서 잠들어 있다. 특히 파주와 연천을 중심으로 분포된 적석총이나 각종 성은 3국 쟁패의 현장이 고스란히 녹아 있고 초기 백제와 고구려의 영향, 신라의 유적이 한 곳에 모여 마치 종합박물관을 재현해 놓은 듯하다. 특히 민통선지역에서 삼국시대 고분으로 가장 먼저 출현한 것은 적석총이다. 알다시피 적석총이란 돌무지무덤으로 고구려의독창적인 무덤형식이다. 이 적석총이 백제의 영역이었던 민통선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점은 이 지역에 고구려의 문화적 영향이 짙게 스며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다음으로 확인되는 무덤이 신라의 석실묘다. 이는 신라 진흥왕이 백제와 함께 한강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이 지역에 신주를 설치한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물증이 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신라의 경순왕이 고향 경주를 향하는 길목에서 잠들어 있음도 흥미롭다. 3국 쟁패의 현장은 산성을 통해서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준다. 파주 오두산성과 연천 호루고루성, 그리고 파주의 덕진산성이 대표적이다. 연천 호루고루성과 파주 덕진산성은 임진강 북안에 설치된 고구려의 방어시설이며, 파주의 오두산성은 백제의 관미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DMZ 유적의 백미는 철원평야에 숨어 버린 궁예의 도성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태봉의 강역이 고성, 간성,인제, 화천, 김화, 철원, 평강, 연천, 장단, 김포, 검단, 강화로 이어져 마치 지금의 민통선을 겹쳐 놓은 듯한 인상마저 준다. 훗날 자신의 영토가 공백의 땅이 되리란생각을 하기라도 했듯 말이다. 또한 백제의 건국세력인 온조 집단이 남하하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결정적단서도 이 DMZ 안에 남아 있다.


민통선 지역은 고려시대 개경의 외곽지역으로 왕도의 문화에 젖었던 곳이며, 조선조에 와서도 한양의 북쪽에 인접하여 그 곳의 문물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였던 땅이다. 고려와 조선을 잇는 1,000년 세월의 경기향반 어투가 원형으로 남아있던 곳도 북부경기 민통선 지역이며 임꺽정의 본거지로 알려진 고석정도 철원의 민북에 있다. 양구의 방산 도요지는 백자로 주가를 올리던 곳이며 강화의 섬 전체는 왜침에 대항한 고려무인의 흔적과 양이에 대적했던 조선 맹장들의 혼백으로 가득한 땅이다. 고려벽화묘로 유명한 권준의 무덤이며 동의보감의 저자 의성 허준의 묘도 임란의 명장 정발, 박진 장군의 묘도 모두 민통선 안이다. 병자호란 시 철원지역에서 싸우다 전사한 1,000여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유골을 한데 모아 만든 무덤인 전골총도 민통선 안이요 철원 일대의 유교유적이 고려초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집중된 특이한 곳도 철원 민북지역이다. 남북이 분단된 가장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곳을 대라면 철로의 단절일 것이다. 철원역과 경원선 철도, 금강산 전기철도 등은 말 그대로 세월의 무상함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현장이 되고 있다. 또한 구 철원일대에 산제한 노동당사, 은행, 제사공장 터, 얼음창고, 감리교회 등 아직 잔해로 남은 흔적은 전쟁의 아픔과 재현해야 할 또 하나의 역사 복원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증거물로 존재하고 있다.

 


새로운 미래를 여는 땅


DMZ는 닫혀있는 곳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닫혀있기 때문에 열려야 하는 곳이고 닫힘 속에 갇혀 있는잊어버린 기억들을 이제 깨워야 된다. 그것은 미래를 향해 우리가 해야 할 당위적인 의무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인공으로서의 권리이기도 하다. 그것은 민족모순의 해결이나 채무화된 반세기 전의 묵은 한 이전으로의 복기가 아니다. DMZ의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되 살아있는 것들은 살아있는 대로 복원해야 하는것들은 또한 그것대로 지키며 새로 만들어야 되는 것이 DMZ에 대한 우리의 자세다. 생태환경은 생태환경대로 문화적 유산은 문화적 유산대로 어떻게 지켜 나갈 것인가가 이제 우리에게 놓여진 과제다.


분단현실을 왜곡해서도 안 될 것이지만 방치해서도 안 되듯 이제 잠든 이 고요의 땅을 스스로 일어서도록하는 방도는 분명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관광과 아스팔트를 까는 것만이 다시 예전 소통의 역할을 하던 중부 허리로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특정인 몇몇의 문제도 아니며 정략적 접근도 더더욱 안 될 일이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고라니 한 마리까지 고스란히 되살려 낸 이 땅의 자생력을 확인 할 수 있는 실험장, DMZ는 그 존재만으로도 위대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제 ‘냉전의 유적지 DMZ를 찾아서’는 편집실의 엮음을 끝으로 연재를 마친다. 그동안 장장 11회에 걸쳐고견을 주신 DMZ의 최고 권위자 함광복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다음호부터는 GOP를 중심으로 비주얼을 곁들인 새로운 콘텐츠로 독자 곁을 찾으려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잠 못 이루는 GOP와 DMZ의 생생한 숨소리를 전할 것을 약속드린다.


“독수리까지 돈을 물고 왔대. 양지리만 흥부네 동넨가? 자, 배고픈 독수리에게 우리도 먹이를 줍시다.”
독수리 먹이 주기는 그렇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정말 사람들은 ‘흥부새’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가 돈을 물고 올 리 없다. 그러나 새들은 DMZ, 늘 가슴 졸이는 그 땅에 먼 나라 이야기를 몰고 오고 있었다. 그건 민통선 사람들에게 희망이었다. 미래였다. 그리고 세계였을 것이다. 그래서 덩치 큰 이방새, 대머리독수리에 더 열광했는지 모른다.


대머리독수리가 착륙하던 무렵 북한 땅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는 소식이 흘러 들어왔다. 어떤 이는 북한으로 남하한 시베리아 독수리 떼가 굶주리다 못해 DMZ를 넘어 남쪽으로 왔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독수리 추락 지점마다 ‘독수리 살리기’ 미담이 줄줄이 생산됐다. 군인들은 자신들의 취사 창고를 열어 냉동 닭이나, 생선을 먹여 기력을 회복시켰다.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 사진작가 김종식 씨도탈진한 독수리 2마리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 12,000원씩 들여 20일 동안 닭을 사 굶주린 독수리의
배를 채웠다.


1994년 2월 20일, 바로 한 해 전 미망두루미가 고향으로 돌아갔던 철원평야에서는 이들 추락한 1세대 독수리들의 방사식이 거행됐다. 그들의 ‘자연 복귀식’은 거창했다. 국회의원, 군수, 한국조류보호협회 임원 등이 참석했으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수의사까지 동원됐다. 대부분 참석자들은 정장차림이었다. 이들은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밟고 서서 “하나, 둘, 셋” 구령에 맞춰 우리의 뚜껑을 열었으며, TV 카메라들은 그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 방영했다. 독수리가 한국 DMZ에 등장하던 그해 겨울은 그렇게 요란했다.


비록 추락하는 모습으로 등장했지만 독수리의 한국탐사는 매우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몽골로 돌아간 그들은 더 많은 동료들을 몰고 왔다.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어디서나 겨울화제가 됐다. 두루미 같은 점잖은 새는 늘 굶주려 초췌해 보이는 독수리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까마귀들은 이 ‘집단 구걸자’를가만두지 않았다. 새까맣게 달려들어 공중전에서 타격을 준 후 땅으로 떨어지면, 집단 폭행으로 쫓아버렸다. 재빨리 도망가지 못한 것들은 날개가 꺾인 채 신음하다가 얼어 죽기도 했다. 미처 사람에게 발견되지 못해 사경을 헤매는 것들도 있었다. 그들은 영양제 주사로도 회복하지 못했다. 주민들은 그들을 땅속에 묻거나, 화장해 장사 지내 주기까지 했다. 민통선사람들은 ‘왕따’가 된 독수리들을 보살핌으로써 우리가 얼마나자연을 사랑하는지를 세상에 과시할 궁리로 농한기를 보내는 것 같았다.


2000년 11월 16일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현리 선안뜰에는 이색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었다. 독수리들아!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서 반갑구나. 마을 독수리보호회가 독수리들의 긴 여정을 맞이하며 주최한 독수리 환영식장이었다. 논바닥 독수리 잔칫상에는 죽은 닭, 돼지를 푸짐하게 늘어놓았다. “뭐야, 독수리가 글을 읽기라도 한단 말이야?” “맞아. 기왕 쓸려면 몽골말로 쓰든지. 몽골산이니까.” 농담, 폭소로 식장이 어수선한데도 마을 이장님은 정말 독수리는 알아듣지 못할 독수리 환영사를 끝까지 다 읽고 있었다.

 

아, 철새들에겐 DMZ가 ‘따뜻한 남쪽 나라’일 게 틀림 없다. DMZ에선 그렇게 철새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서식처가 노출되긴 여우도 마찬가지다. 주검으로 발견된 수컷여우는 외상이 없었다. 올무나 덫에희생된 것은 아니었다. 곶감 낚시라면 모를까, 그 영리한 짐승이 어설픈 사냥감이 될 리 없다. 입가에 묻어있는 핏자국이 사인을 추정할 수 있었다. 여우는 독극물을 먹은 들쥐 따위의 소동물을 잡아먹고 희생됐을 것으로 보인다.


아, 그러니까 여우는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으로 이어지는 옛 전쟁터에서 득실거리는 등줄쥐를 잡아먹고살았을 것이다.


등줄쥐, 담배 2갑 무게인 몸무게 200g의 작은 쥐. 등에 흰줄이 있는 쥐, 그러나 보통 들쥐, 한국의 대표 쥐이다. 그 쥐의 단정치 못한 화장법, 배설법이 문제였다. 등줄쥐는 화장을 좋아한다. 외출 중에도 쉴 새 없이 앞발에 침을 발라 앙증스런 모습으로 화장을 한다.


앞다리를 잘근잘근 씹거나, 침 묻힌 발로 온 몸을 마사지하기도 한다. 작은 체구의 이 쥐의 배설량은 정말‘쥐 오줌’이다. 그 작은 양의 오줌을 아무 데나 질금거렸다. 그러나 침으로 얼굴을 닦는 지저분한 버릇이나,방정치 못한 배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침과 오줌 속에 우글거리는 바이러스, 유행성출혈열의 병원체, 한탄바이러스 그것이 문제였다. 오죽하면 유행성 출혈열이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가을철엔 ‘지뢰보다 더무서운 존재’라고 했을까.


배고픈 여우가 유행성출혈열을 박멸한답시고 그 등줄쥐 굴을 파헤쳤을 것이다. 아니면, 단정치 못한 배설로 풀 섶을 더럽히는 등줄쥐떼를 곶감낚시 때의 그 오만으로 기습하다가 그만 곶감낚시를 물어버렸던 낭패처럼, 쥐약 먹은 등줄쥐를 삼키는 절제절명의 실수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포탄으로 사태 난 황토 언덕 빼기자신의 황토굴을 향해 눈을 감았을까.


역시 문제는 여우가 이 땅에서 마지막 눈 감을 자리로 DMZ에 점찍었던 수구초심(首丘初心) 명당터가 온세상에 노출됐다는 것이다. 그 후 4~5년째 어디서 사향노루나 살았든 죽었든 여우를 보았다는 소식은 없다.

 


적어도 돼지풀의 지독한 생존력, 죽어도 살고야 마는 근성을 안다면, 그들을 뿌리 뽑기가 얼마나 무모한지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꽃가루 퍼레이드는 ‘우리의 모든 제초제에 내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전력을다해 맹공격을 해서, 인류를 협박할 것’처럼, 정말 ‘흥분해 복수할 방법을 찾고 있는 것’처럼 더 맹렬히 산위에서 골짜기로, 강 건너 벌판으로 종족을 번식시켜 가고 있다.


도대체 누구에게 복수를 한다는 것일까? 큐 왕립식물원 로열가든을 엉망으로 만들어 복수하려던 것처럼, 자신을 전장 한복판으로 데려온 ‘워커’와 ‘상해농구화’에 대한 복수로 머지않아 세계유산으로 지정받으려는 고상한 꿈에 젖어 있는 DMZ 자연생태계에 치명적인 훼방을 놓자는 것일까?


돼지풀 숲가에 어김없이 피어 있는 서양민들레의 노란 꽃이 이런 말을 할 것 같다.
“그날 병사의 투구에 내려앉았던 민들레 꽃씨는 그의 어깨에 앉았다가 배낭으로 날아가기도 하면서 낯선 나라를 여행하고 있었다. 거기가 어딘지도 모를 높은 고지에 올랐을 때 자욱한 포연이 앞을 가렸다. 거긴 전장이었다. 거긴 파헤쳐져 땅 위에 풀포기마저 말라버린 절망의 땅이었다. 병사는 집에서 너무 멀리 와 있다고느끼고 있었다. 보고 싶은 이에게 갈 수 없었으며, 두려운 마음을 전할 수도 없었다. 민들레 꽃씨는 병사의들먹이는 어깨에 앉아 그의 가쁜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총성과 포성이 귀청을 때리고, 불빛이 작열하는 밤이 지나갔다. 아침 햇살이 피 흘리며 쓰러진 병사의 가냘픈 뺨 위에 내려앉았다. 민들레의 솜털 같은 꽃씨도 병사의 뺨에 내려앉았다. ‘당신이 머문 자리에 내가 머물겠어요. 너무 먼 낯 선 땅에 당신이 와있었다고 내가증언할 게요. 열여덟인가요, 스무 살인가요? 당신이 고귀한 피를 흘린 자리에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 해마다 봄여름 가을, 철도 없이 꽃비석이 되어드릴 게요. ’ 그래서 그때 전쟁터였던 DMZ엔 봄부터 가을까지 노란민들레꽃이 핀다. 젊은 주검이 뒹굴었던 자리마다 귀화한 서양민들레가 노란 꽃을 피운다. 거기서 얼마나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는지를 알아보려면 민들레 꽃송이를 세어보면 된다.”


그러니까 산 위에서 골짜기로, 강 건너 벌판으로 끝없는 민들레 노란 꽃 행렬은 전쟁을 증오하는 시위다.
전쟁이 얼마나 무참히 자연을 개조하는지를 몸으로 가리키는 경고다. ‘전쟁의 대가가 이런 것이다’라는 자연의 복수인 것이다. 돼지풀이 무엇을 복수하려는 것인지 알 것 같다. 아마도 전쟁일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인간의 탐욕일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전쟁으로 황폐화시켜 내버린 DMZ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기로 했을 것이다. 그건 인간에 대한 멋진 복수이다.


‘달맞이꽃, 개망초, 소리쟁이, 개비름, 다닥냉이, 자운영, 수박풀, 컴프리, 오리새, 클로버 …. 그리고 돼지풀,단풍잎돼지풀, 서양등골나무, 털물참새피, 물참새피, 애기수영, 도깨비가지, 갯드렁새까지 합하면 이 땅은 귀화식물의 천국인지 모른다. 낯선 환경에서 정착한 그들은 하나같이 억척스럽기 그지없는 존재다. 그러나 이들 귀화종들은 한결같이 다른 어떤 식물보다 태양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연의 얼개가 잘 짜여 있는 우거진 숲은 곁눈질도 하지 않는다. 거긴 그들이 살곳이 아니다. 오로지 자연이 훼손된 나대지, 포탄이 살점을 떼어낸 산비탈. 햇볕 쏟아지는 메마른 땅, 쌍떡잎식물 장미목 콩과의 두해살이풀 가는 갈퀴에서부터
달걀 모양의 잎을 단 낙엽교목 히어리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토종들이 포기하고 떠난 자리에 터를 잡았을뿐이다. 돼지풀, 단풍잎돼지풀을 DMZ로 부른 것은 인간이다.

 

날아라 장단독수리, 열린 공간으로

 

 

새해의 신 새벽이 열렸다.
만물은 움츠려들고 송악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칼날처럼 차갑다.
더 이상 갈무리가 남은 풀잎조차 없다.
한여름의 초록으로 싱싱하던 들판이나
적벽에 걸려있던 돌단풍도
이젠 모두 은둔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묵은해를
어둠의 저편으로 밀어내고 찬연한 새아침은 밝았다.
간밤에도 무탈하게 뜬눈으로 밤을 밝힌
초병들의 발길은 아직 피곤을 묻힌 채
소초를 향하고
아침 그림자는 서해를 향해 길게 누웠다.
그림자조차 무거운 모습이다.
이제 초병들은 하루를 접고 길고 단
아침잠에 빠져 들 것이다.
GOP의 하루는 아침이 되어야 끝난다.
부지런한 기러기 떼는
벌써 초병들의 머리 위로
사선을 그리며 일상에 나섰다.
갑자기 불어 닥친 한파에도
다행히 무리의 모습에는 변화가 없다.
철책에는 아침 이슬이 아닌
성에가 하얗게 끼었지만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또다시 남녘의 온풍이 불어 올 때까지는
찬바람과 함께 할 도리밖에 없음을
초병들은 다들 소리 한번 내지 않지만
익숙하게 알고들 있다.
역사의 치열함이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가장 극명한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는 곳,
장단반도를 가로 지르는 DMZ에서 맞은 아침이다.

  

역사와 함께하다.

삼국은 늘 이곳에서 화합할 수 없었다. 고구려의 남하도, 백제의 수성도, 신라의 전진도 항상 이곳에서 틀어지곤 했다. 임진나루 건너기가 그만큼 어려웠음이라기보다, 이 지역이 갖는 지정학적 위치가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한반도의 지형을 살펴보면 원래가 길목일 수밖에 없었던 곳이었다. 동고서저의 지형 특성상 경주를 제외한 역사시대의 모든 수도는 서쪽 넓은 평야를 끼고 세워졌고 그 수도의 기능은 비록 나라가 없어졌다손 치더라도 민초의 삶이나 지방 중심도시의 기능은 그대로 존속되었음으로 하여 서해 뱃길이나 타면모를까 괴나리봇짐을 매었든, 봉물꾸러미를 걸머졌던 간에 이 나루 한 모퉁이에 모일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것은 임진나루가 원초적으로 지닌 태생적 운명이었다. 신라의 마지막 군주 경순왕이 1,000년 도읍을 자기 손으로 왕건에게 넘기고 남쪽 고향땅이 그리울 때면 하루걸이로 찾을 수 있었던 곳도 이 곳이었고, 그러고 보면 아마도 임진나루를 건너야 비로소 옛 땅에 온 듯한 정감을 느낄 수 있었을 터이다. 물론 묘는 현재의 행정구역상 연천에 위치하고 있으나 오죽했으면 죽어서라도 임진나루 건너에 유택을 장만했을까 싶다. 조선조에 넘어 와서는 북방의 호적들이 조금치라도 이상을 보일라 치면 송악산의 봉수를 받아 곧장 한양의 북벽 북한산 봉수대로 전달하던 중간 봉수가 이곳이며 6·25의 시작과 마지막을 함께 한 결전의 장소도 이 곳이다.

 

평양 205km, 서울 56km라는 이정표야 예전의 그것과는 다르다 하겠지만 평양에서 길을 떠난 나그네야 임진 나루를 건너면 한양이 지척이었을 것이고 자유의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훗날 엄청난 삶의 모습을 달리한 운명의 장소도 여기였다. 6·25의 전화가 남긴 비극의 현장은 이제 남과 북이라는 이질적 형태의 체제를 소통시키는 통로로 변했으며 야밤, GOP선상에서 바라보면 깜깜한 북쪽으로 몇 줄기 빛이 보이는데 ‘개성공단’이란다. 분열과 화합을 반복하며 민족사의 치열한 생존경쟁을 목도한 땅. 미래를 향한 이상적 낙관이 팽배하기도 했지만 GOP라는 이성적 현실장치 앞에서는 차분해질 도리밖에 없는 장단반도에는 늦은 야밤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내디디며 초소로 투입하는 병사들의 긴장감은 오히려 강도가 더 높아져 있었다.

 


고라니와 독수리의 땅에 서다


유감스럽게도 장단반도의 생태계는 다른 DMZ지역보다 훼손이 심하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대로를 건설하고 사람들의 왕복이 잦아진 탓이 첫 번째 원인이다. 그만큼 이 지역은 사람의 발길을 막고 있는 민통선과 철책의 혜택을 보지 못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생태적으로만 본다면 말이다. 그러함에도 임진강의 풍부한 갯벌과 장단반도의 넓은 들판으로 인해 큰기러기, 쇠기러기, 개리,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등의 철새는 물론, 아무르강을 건너고 압록강을 건넌 몽골의 독수리들까지 수백 마리가 날아와 겨울을 나는 새들의 천국이요 멧돼지와 고라니로 상징되는 들짐승들까지 지천으로 돌아다니는 동물원이기도 하다. 대체로 철새들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지만 겨우내 철새무리를 볼 수 있음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이미 이곳을 종착지로 선정한 무리도 상당할 것으로 보여진다.


제1보병사단의 표식에는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독수리가 힘찬 나래짓을 하며 펼쳐져 있다. 그런데 그 1사단의 책임지역이 우리나라 최대의 독수리 월동 서식지다. 참 잘 어울리는 상징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아쉽게도 6·25전사를 통해 가장 명예로운 전투를 치른, 국군 제1의 전통을 자랑하는 이 부대와는 다르게 장단반도의 독수리들은 겁쟁이다. 아니, 스스로 사냥을 할 줄 모르는 종이다. 그러다 보니 텃새인 까마귀나 까치에게도 슬금슬금 밀려나는 꼴이 여간 어색하지 않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순박한 독수리들이 이곳에 날아들기 시작한 것은 참으로 우연이었다.

 

북서풍의 강한 바람에 떠밀려서 일까? 기진한 독수리가 발견되고 인심 후한 마을 사람들이 닭이나 죽은 가축고기로 살려 보냈는데 그게 불과 20년도 채 안 되었다. 그녀석이 이윽고 기운을 차려 자연으로 돌아갔는데 고향 몽골로 가서 친구나 친척에게 남쪽의 인심을 전했을 터이고 먹거리가 귀한 겨울의 몽골보다 훨씬 섭생에 유리한 곳이 있다고 알렸지 않았을까. 그 뒤로 매년 몇 마리씩 찾더니 10여 년 전부터는 300여 마리가 넘는 엄청난 규모의 식객들이 몰려 온 것이다. 그게 장단반도의 겨울하늘을 장관으로 만드는 독수리의 정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고라니에 관한 이야기다. 필자는 이해는 하면서도 대안 없이 평가 절하하는 DMZ의 자연에 관한 비아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해 해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한쪽으로만 파고들면 들수록 어두운 구석은 드러나는 법이다. 그걸 모르는 이가 없음에도 대안도 없이 문제점만 나열해 놓는 그런 논자들의 지적 척박함을 감내하기가 힘들었다.


장단반도에 고라니가 많은 것은 전쟁과 철책으로 인해 먹이사슬이 깨져 버렸다는 것이고 따라서 고라니가 많다는 것은 지극히 비정상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래서? 먹이사슬을 복원하기 위해 여우도 풀어 놓고 동물원의 호랑이도 두어 마리 풀어 놓자는 건지 그 다음의 대안이 없다. 통일이 돼야 한다고, 그래서 철책을 모두 걷어 내야 된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고라니의 생태를 위해 걷어내는 철책 안으로 인위적, 물리적 훼손 없이 보존이 가능할 것이냐는 생각해 봤을까? 자연은 결코 인간의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장단반도의 고라니들도 여느 고라니와 다르지 않게 겁쟁이다. 어미가 마른풀을 뜯고 있는 지척 풀섶에는 어김없이 몸을 숨기고 있는 새끼 고라니를 볼 수 있다. 천적이 없음에도 그렇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강안을 따라 설치된 철책 안으로 어떻게 들어갔으며 들어간 고라니는 그 곳에
서 일가를 이루고 일생을 마감하느냐는 것이다. 주위에 물어봐도 모르겠단다.

 


GOP철책 안의 고라니는 이 침울한 정경에 그나마 한 점 생존의 활기를 확인시키는 마스코트임이 확실하다. 물병아리 옆에 슬그머니 다가가 목을 축이다가도 서로의 몸짓에 놀라 달아나는 텅 빈 옹달샘은 DMZ만 지닐 수 있는 한 폭의 풍경화다. 이제 이곳으로 늑대도 오고 솔부엉이도 찾아와 생태의 균형을 얼추 맞추어 낼 것이란 희망을 가져도 본다. 장단천변의 참게들이 예전처럼 꼬물거리고 임진강 황복의 입에 감기는 식감이 콩요리 만큼 어렵잖게 맛볼 수 있듯, 자연은 아직 시간을 더 필요로 하지만 그래도 거기에 맞게 형성되게 될 것이므로.

  

삶과 미래, 그리고 열림


흔히 서부전선 지역을 평지로 인식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고지전으로 일관하다시피 한 6·25의 잔흔은 결코 평야에 선을 그어 놓은 곳은 없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평지에서 고지를 오르는 것이 훨씬 더 힘들다. 체감 높이가 그렇다. 고지의 능선을 따라 걷는 다는 것이 오히려 편할 수 있다는 말이다. 동부전선의 산악군에 위치한 초병들이 서운해 할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동부전선이 쉬운 곳이란 말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지금은 워낙 언론에 노출되고 거의 관광지화 되어버린 지역이어서 특별할 것도 없을 듯싶지만 그럴수록 긴장감은 배가 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된다. 개성관광까지 오가고 전직대통령이 걸어서 넘기도 했던 길이지만 불과 몇 십 미터만 벗어나도 숨이 턱에 차오르는 능선과 고지가 있다. 신세대다운 명칭이다. 이름하여 맥도날드 고지. 고지의 정상에는 초소가 있고 그 초소의 세 배 정도 더 높은 참나무 꼭대기에 까치가 난공불락의 안전가옥을 올려놓았다. 따지고 보면 까치야말로 전방의 이상 징후를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는 감시병이다. 까치와 함께 겨울의 삭풍을 마주해야하는 초병들의 일상이야말로 이 땅이 아직은 분단의 아픔이 남은 현장이라고 웅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이 청춘들이야 말로 DMZ를 수놓는 아련한 동화다.


그러나 초병들만의 장단반도는 아니다. 구수하게 콩요리 익는 냄새로 진동하는 통일촌은 오래 전에 이미 정착민들의 삶이 뿌리를 내렸고 이제는 마을버스까지 대교를 건너 오간다. 하루에도 수십 대의 관광버스가 찾고 임진강 이남의 사람들은 민통선 이북이라는 생경함 하나에도 기꺼이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이제 못갈 땅도 없을 듯싶다. 임진각 언저리 망배단에 올라 눈물로 자유의 다리를 쳐다보던 그 세월을 넘어 이제 장단반도가 고향이거나 송악이 고향인 사람, 혹은 북녘으로 한 걸음이라도 더 내 딛고 싶은 이들은 기꺼이 장단반도의 흙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 뿐이랴. DMZ조차도 새들만 다니는 금단의 땅이 아니다. 우리 전기도 흘러 들어가고 라면도 들어가고 초코파이도 들어간다. 아마 변화란 그렇게 시작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이곳은 열린 미래를 기약하는 땅이기도 하다. 아무리 철옹의 장벽으로 차단해도 인지상정과 인륜은 꺾지 못하는 법이다. 맥도날드 고개에서 바라보는 개성공단에는 밤에도 옹기종기 불이 밝혀져 있다. 북쪽의 모든 지역이 암흑으로 휘장을 드리우고 있음으로 인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밝음의 정체. 그것이 미래다. 미래는 밀물이 몰려오듯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하고 우리가 가기도 하는 것이 미래다. 이 땅에 서서 언젠가는 과거에 고라니와 독수리가 초병들과 일상의 숨소리를 함께 나누었다고 회상할 것이다. 그것이 오늘의 시점에서는 미래다. 그 미래를 가장 선명하게 예측해 볼 수 있는 열린 땅, 장단의 DMZ는 그래서 닫혀 있는 곳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면회 가는 길

 

자운이 서린 율곡의 길을 따라

 

임진나루 주변이 황량함으로 그림그려진다면 스스로 임진나루터의 내력을 모르고 있다고 자책해도 좋다. 그러나 사실 불과 6,70년 전만 하더라도 조용함과 분주함, 중후함과 그윽함이 함께했던 한양의 북쪽 해자가 파주였음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아니 잊고 산 세월의 골이 그만큼 깊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고려조에는 개경의 송악산이 콧등이라면 인중부분이 파주 땅이었고 조선조에는 한양의 지척이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이 땅이 파평 윤씨나 덕수 이씨 등 숱한 향반들을 품고 있던 융숭 깊은 동리였기도 했다. 그리고 여느 곳 못지않게 배향 유림 또한 상당수에 이르러 가히 추로지향이라 할 만한 전통의 모습도 갖추고 있었다. 더욱이 한강과 임진강이 합수하여 황해로 이르기 전의 풍족한 토사로 농토는 기름지고 넓었으며 그로인해 부지런만 떤다면 어로와 농사를 함께 건사해도 좋을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었고 그 덕분에 근동의 민초들까지 허기진 이가 없을 만큼 풍요도 지닌 곳이었다. 뿐이랴. 물길을 따라 흘러 왔거나 혹은 물길을 건너기 위한 포구나 나루의 목마다 장이 서고 사람들이 집산하던 부산함을 안고 있던 곳이기도 했다. 혹, ‘사돈(査頓)’이라는 용어가 이곳이 본관인 고려조 명신 윤관 장군에 얽힌 우리나라 고유 말인 동시에 말이 생겨난 곳이 이 곳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파주에는 그런 모습의 고색은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다. 통일로를 따라 북쪽으로 가는 도로는 더 더욱 그렇다. 일산을 비롯한 고양시 일대가 모두 신도시로 화한 지도 한참이며 아직 접경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파주마저도 남북교류와 LCD공단의 입주 등으로 이미 미군들의 지프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돌아 나오던 기지촌의 흔적이나 군인들이 휴갓길에 들러 허기를 채우던 동리주막 같은 지붕 낮은 가게 따위는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 이곳은 지하철과 연계된 경의선이 철책 앞까지 왕래하고 시내버스가 철책을 뚫고 군사분계선 코앞까지 들어가고 있으므로 더 이상 전방지역, 혹은 민통선이라는 엄정성이 낯설어진 곳이기도 하다.

 

그나마 율곡과 사임당의 흔적이 살아 있음은 면회 가는 길에 의미하나를 찾아보고자 한다면 나름대로 발길 디딜 만 하달 것이다. 율곡이 살아생전에는 퇴계와 더불어 유가의 쌍봉으로 우뚝했던 분인데 낙향 후, 그리고 사후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한층 더 가볼만 한 곳이라 할 것이다. 율곡이 직접 터를 골랐다는 부모의 합장묘도 함께 한 곳에서 볼 수 있다. 자유로나 통일로를 따라가다 율곡의 흔적과 만날 수 있는 곳은 두 곳이다. 하나는 임진강 절벽 위에 서있던 화석정이 그 곳이고, 자운산 자락에 자리한 자운서원과 자운산 묘역이 또 한 곳이다. 전술했듯 자운서원은 조선중기 대학자이자 정치가요 성리학의 큰 줄기를 내린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율곡은 강릉 북평촌의 외가에서 출생하였으나 본향인 파평면 율곡리에서 성장하였고 세상을 떠나기 전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던 곳도 파평(파주)이었다.

 

율곡은 마흔아홉에 세상을 떠났으나 문묘와 전국 20여 개 사원에 배향되었다. 율곡의 호도 이곳 지명에 기인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 7년(1615년)에 세운 이 서원은 효종 1년(1650년)에 자운(紫雲)이란 이름으로 사액서원으로 격상됐다. 그 후 김장생과 박세채를 추가로 배향하였으나 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사원 철폐령에 의해 폐쇄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고 6·25를 맞아서는 그나마 남아 있던 제단마저 완전히 파괴된 것을 1970년에 1차로 중건하였고, 최근에 강당과 동재, 서재, 협문, 외삼문 등을 신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자운서원은 자운산 일대의 율곡 관련 유적지를 통칭하는 고유명사로 쓰이고 있는데 가족묘와 기념관, 신도비 등이 구역 내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이 지역 율곡 흔적의 백미는 율곡과 신사임당이 잠들어 있는 자운산 가족묘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정확한 사연은 아직도 ‘카더라’ 수준의 정보만 있을 뿐 연유가 확실치 않은 묘지의 배치다. 선산 중심부의 맨 위에 율곡의 첫째 부인인(율곡은 부인이 셋이었다) 곡산 노씨의 묘가 자리하고 좌우가 아닌 상하 쌍분의 형태로 율곡의 묘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아래로 율곡의 맏형 부부인 이선과 부인 곽씨의 합장묘가, 그리고 그 아래에 율곡의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가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능선의 묘역을 마주하고있는 우측에는 율곡의 큰누님 매창(梅窓, 작은 사임당으로도 불렸으며 특히 매화그림을 잘 그렸다)과 매부 조대남의 합장묘 등이 있으며 좌측에도 이이의 장
손 이제 부부묘 등 율곡의 가족묘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임진강가에 이르렀으나 칠흑 같은 어두움으로 나루조차 찾기 힘들었는데 그때 나룻가의 정자를 태워 불을 밝혔다는 그 화석정이 복원되어 있다. 율곡의 본향이 율곡리였을 뿐 아니라 율곡역시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는데 율곡리 마을의 뒷산에 임진강을 굽어보며 서있는 아담한 정자가 바로 화석정이다. 율곡은 장년이 되어서도 이곳을 자주 찾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에는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시와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화석정은 그리 웅장한 맛은 없다. 그러나 위치한 자리에서 바라보는 임진강의 짙푸른 물결과 그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파주들녘의 조화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 풍광을 보고 여덟 살의 율곡이 지었다는 유명한 시가 바로 팔세부시(八世賦詩)이다. 도저히 여덟 살의 아이가 지었다고 보기 힘든 절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林亭秋巳晩 騷客意無窮(숲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깊었으니 시인의 생각이 한이 없어라)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먼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붉구나)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다)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늦가을 화석정에서 바라보는 풍광의 처연함을 이만큼 표현하기도 힘들다. 그 외에도 파주를 지나면서는 윤관 장군의 묘역이나 파주삼릉 등도 공원화되어 있어 둘러볼만 하다 할 것이다.

  

DMZ순례_ 아미 식객

  

장단콩’은 우리에게 낯익은 이름이다. 현존하는 우리 콩 중에서 제일 유명세를 타고 있는 콩이라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콩은 백태 즉, 메주콩을 일컫는 말로서 장단콩이란 용어도 품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장단지역에서 나는 콩의 통칭이다. 아시다시피 장단은 거의 대부분 지역이 민통선 안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1940년대에만 해도 6만 명의 군세를 가지고 있던 제법 큰 군에 속했다. 장단의 콩이 유명해진 것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임진강이 만들어 놓은 충적평야와 군데군데 조성된 작은 구릉지대가 만나 모래 섞인 참흙으로 형성된 이 지역의 토양이 콩을 재배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토양이었다. 콩이야 원래가 만주와 한반도가 원산지인지라 전국적으로 널리 잘 자라기는 해도 유독 이 장단지역이 고래로 유명했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1913년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콩의 샘플을 채취 분석하여 장려 품종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장단백태’다.
아마 한반도 최초의 공식 장려보급품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단콩만으로 보자면 분단은 비극과 회생의 양극단을 걷는다. 분단으로 민간인의 발길을 거부하던 땅에 1973년 통일촌 사업으로 100핵타르의 콩 재배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20년간 폐경지로 변해있었던 덕분에 오히려 지심이 좋아져 수확이 더 많아졌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장단콩의 바탕이 되
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더 이상 장단백목은 재배하지 않는다. 그보다 수확이 좋은 ‘대원, 태광, 황금’ 등의 품종을 재배한다. 장단에는 자유의 마을(대성동)과 통일촌이 있는데 그 중 통일촌이 콩요리로 유명하다. 슬로우 푸드가 각광을 받고 우리 땅에서 나는 우리 식물이 몸에 좋은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 거기에다 콩음식이야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 것인가. 자연의 바람과 민통선 안이라는 천연의 지심으로 일구어낸 우리 음식 콩요리는 직접 체험도 가능하다. 매년 장단콩 축제도 열리는데 올해로 14회째를 맞는다.

 

가격은 1인분에 5~6000원 정도이며 청국장, 된장, 콩비지, 두부요리 등 메뉴도 다양하다.

통일촌까지 운행되는 마을버스도 있다.

 

영하 30도, 남대천 이상무

 

 

 

독하게 추운 날이다. 오성산에서 광삼평야를 향해 내달리던 능선이 저격능선(일명 피의 능선)에서 잠시 움찔하더니 광삼평야에 도착해서는 늪지대로 숨어 버린다. 그런 형색이다. 아마 고지의 바람을 피하려 내려 왔다가는 계곡이라 불러도 좋을 광삼들의 골바람에 놀란 모양이다. 어제 밤의 초소 온도는 영하 30도였다. 그래도 착한 젊은이들은 방한두건에 눈만 내 놓은 채 군말 한 마디 없이 철책을 향했다. 아는지 모르는지 무슨 처절한 원혼곡이라도 되는 듯 쉴 새 없이 바람은 이어졌고 아침 햇살에 물소리가 깨어나자 고라니 두 마리가 아침 갈증을 달래러 물가로 내려왔다. 겨우 겨우 남대천이 얼굴을 내밀었다.

 

 

철의 삼각지대에 서다
‘진백골’(眞白骨)로 불리는 섬쩍지근한 명칭의 이 부대(사단장 소장 유영조)와 이 지역을 이야기하자면 일단 6·25 최대의 격전지 ‘철의 삼각지전투’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철의 삼각지’란 배호가 부른 낭만적 노래 가사나 전설이 가득한 호사가의 ‘카더라’ 통신에 등장하는 용어가 아니다. 6·25 당시 중부전선의 심장부로서 그 지리적 중요성이 매우 큰 평강, 철원, 김화를 잇는 삼각축선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 피아 간의 전황으로 볼 때 이 지역의 확보 없이는 중부전선을 장악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휴전 전 뿐 아니라 6·25 전(全)기간을 통하여 이 지역은 피나는 쟁탈전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철의 삼각지 일대는 아군이 공격하기에는 불리하고 적이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지형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 아군의 입장에서는 야속한 지형이기도 했다. 물론 그만큼 피해도 컸다. 이 천연적인 난공불락의 요새를 두고 당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팸플리트’ 장군이 “적이 전전선의 생명선으로 사수하려는 이 ‘아이언 트라이앵글’(Iron Triangle)을 무너트려야 한다”는 명령을 내리는데, 바로 여기서 비롯된 명칭이다. 좌단의 백마고지 전투와 저격능선전투로 기록된 김화지구전투는 6·25전사 중 가장 처절하였지만 철원곡창지대를 확보하게 된 값진 희생의 현장으로 남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오성산을 머리에 이고 오늘도 진백골 용사들이 지키는 이 지역의 내력이다.

 

 

한편, 이 지역을 담당하는 진백골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때는 1946년 남북이 분단되고 혼란한 정국 하에서 38선 이북지역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한 반공청년들이 월남하게 된다. 이들은 1946년11월 30일, 반공청년운동단체인 서북청년단을 결성하고 해방정국 하의 좌익을 척결하는 반공운동의 전위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다가 1948년 9월,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이었던 지청천의 대동청년단에 흡수되는 과정에서 대거 18연대에 자원입대하게 된다. 철저한 반공정신으로 무장된 이들은 “죽어 백골이 되어서라도 끝까지 조국을 수호하고 두고 온 북녘 땅을 자유의 품으로 되찾고 말겠다”는 굳은 각오로 철모 좌,우측에 백골을 그려 넣고 전투에 참가하였다. 62년 정식으로 부대 애칭을 ‘백골부대’라고 선정했지만 6·25 당시의 사단장 철모에도 백골이 그려져 있었던 것을 보면 이미 이때 전 부대원이 백골정신으로 전투에 임했다고 봄이 타당할 것 같다. 이들이 바로 38선을 최초로 돌파한 그 용사들이었으며 6·25전쟁 기간 동안 죽음을 두려워 않는 용맹성으로 가장 전투를 잘하는 부대라는 명성은 물론, 적들에게는 부대명칭만으로도 기가 질리게 만든 백골용사들이다.
전군 최다 전투유공 대통령 부대표창 수상부대라는 기록을 갖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이 부대의 전통은 지금도 계속된다. 휴전 후 지금까지 완전작전의 기록을 가진 유일한 부대가 아닌가 싶다. 작년 3월 18일, 이 지역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일본인 하나가절단기를 휴대하고 월북을 기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 백골 경계병에게 포착, 입체적인 포획작전으로 일본인을 체포한 이른바 ‘3.18 완전작전’이 벌어졌다. 철저하고 규정에 입각한, 원칙을 준수한 평소의 경계태세에 기인한 것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남북화해라는 용어가 난분분할 때도 백골장병들은 ‘꼭 온다’는 명제 하에 ‘한 놈 잡자’를 구호로 외쳤다. 그 결과가 완전작전의 역사를 차곡차곡 갱신하고 있는 것이다.

 

 


민들레 씨앗을 퍼뜨리자
DMZ는 많은 식자들의 호기심이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휴전 후 57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 복원된 생태계에 대한 관심, 민북 지역으로 불리는 개척민들의 삶, 남북대치의 현장이라는 사회적 관심, 그리고 호기심이 더해진 관광성 개방에 이르기까지 이제 더 이상 금단의 땅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잦은 발걸음들이 있었다. 이곳도 예외는 아니다. 철원 전체를 놓고 봐도 더 이상 휴전선 주변이 군인들만 기거하는 곳이 아니다. 도처에 산재된 지뢰지대는 불편함으로 남아 있지만 용케도 잘 피해 다니는 산짐승들의 통로는 무성하다. 그런 가운데도 억척스럽게 개척이 된 곳에는 휴전선 바로 턱밑까지 기름진 오대쌀을 경작한다. 북으로 길게 누운 광삼평야를 적신 남대천은 한탄강에 이르기 전까지 김화와 갈말의 오대쌀에 자양분을 공급하고, 한탄강과 만나서는 경기 북부의 들을 풍요롭게 만든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려되는 바도 없지는 않다. 여전히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엄연한 접적지대라는 것이다. 철원은 예로부터 강원의 최대 곡창지였다. 그런 관계로 들판을 가로 지르는 철길이나 5번국도가 관통한 교통의 요지였다. 당연히 물산의 집산지이자 행정과 금융 등 경제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이 땅이 향유했던 풍요의 양만큼 전쟁의 폐해도 컸다. 전술했듯 철의 삼각지로 불리는 격전지라는 말은 군사적 의미를 넘어 국가적 차원의 전략 요충지였던 셈이었다. 당연히 피아 간 공격과 방어에 대한 성공을 보장받기 위해 치열한 전투는 물론, 지뢰를 비롯한 각종 방어기재도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누군들 광삼평야를 가로 지르는 긴 기적소리를 아쉬워하지 않으랴. 그러나 현실은 그렇다. 이미 철로는 사라졌고 사라진 철로를 복원하기에는 여건이 불비함을 인정해야 된다. 북적되는 인파는 없으나 철새들은 쉼 없이 나래짓을 하고 추가령 유곡의 가파른 절벽에는 짙푸른 물이끼가 살아나지 않았는가? 춥고 배고픈 시절, 목숨을 걸고 이 땅을 개척한 새로운 토인들의 땅도 넓어지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 시간의 문제이며 상황의 문제이다.


금강산 철길을 옆에 두고 서 있는 전선교회는 ‘민들레’ 들판의 초입이다. 토성리에서 정연리 다리를 향하다 보면 휴전선이 도로를 가로 막고 서 있는데 그 너머가 ‘민들레 들판’이다. 들판 이름 참 예쁘다. 그런데 사실은 이 들판의 원래 이름은 민들레 들판이 아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물어봐도 민들레 들판이라고 한다. 심지어 토성리에 있는 민속체험마을의 이름이 민들레 마을이다. 도대체 민들레는 어디서 날아 왔으며 어디로 간 것일까? 우습게도 이 들판의 원래 이름은 ‘맨들’이었다. 들판은 들판인데 아무것도 나지 않는 ‘민둥 들판’이란 말이었다. 아마 추가령 지구대를 덮고 있는 현무암이 그대로 뭉쳐져 있어 그랬으리란 추측을 할 뿐이다. 그것이 6·25를 거치면서 군사지도에 ‘Mendle’이라고 표기를 했는데 그걸 발음기호대로 다시 한글로 읽다보니 ‘민들레’가 되어 버린 것이다. 또 다른 일설도 있다. 김화평야에서 북쪽으로 한참을 올라가야 나오는 멀리있는 평야 라고 ‘먼들’ 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영문표기로 ‘민들레’라고 발음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도 그런들 어떠리. 이제 아무도 이 들을 맨들이라 하지 않는다. 병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파된 민들레 들판에는 ‘전쟁 전에는 민들레가 많았는데 지금은 나지 않는다’는 그럴듯한 전설 하나가 보태져 있다. 맨들에도 무성한 들풀이 억새들과 어우러져 있는 것을 보면 민들레인들 왜 못 자라겠는가. 그렇게 변해 가는 것 또한 역사 아닌가? 민들레 들판이 정말 샛노란 민들레로 가득해질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때는 또 “원래는 민들레 들판이 아니었는데 병사들의 입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지명 민들레 들판에 진짜 민들레가 피어 이제는 ‘정식으로 민들레 들판’이 되었다”고 소개가 될지도. 그런 것이 비단 민들레 들판 하나에 한정된 일은 아니다. DMZ의 원래 모습은 사람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야생의 현장으로 탈태했다. 그것도 역사이니 현상을 존중하자는 말이다. 맨들이란 이름도 인간의 작명이고 민들레 들판이란 이름도 역시 인간의 작명이다. 악의적 동기가 포함되지 않았다면 개명도 역사일 수 있다. 그 들판 자체가 훼손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과거를 회상하고 복원하려는 것만 좋은 것은 아니다. 사실 복원이란 없다. 아무리 똑같이 만들어도 그것은 과거의 모습으로 만든 오늘의 가공물일 뿐이다. 역사가 어떻게 복원이 되는가? 시간은 이미 흘러가 버린 것을. 똑 같은 이치다.

 

 

계웅산에서
사방이 한 눈에 들어오는 요지다. 비록 좌전방으로 주봉인 오성산이 자리하고 있어도 그렇다. 광삼들녘은 말할 것도 없고 김화의 넓디넓은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해도 풍광을 감상할 겨를이 없다. 추위는 올 들어 최고의 혹한이란다. 그러나 빨개진 볼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병사들이 있음으로 광삼평야는 덜 외로울 것이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이미 적응이 된 들짐승들도 함께 지내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렇다. 아무리 억센 환경이라 할지라도, 척박하거나 비옥하다 할지라도 그런 모든 것들이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조화이며 자연이다. 자연에는 추한 것이 없다. 그냥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물화처럼 칼바람 속에서 전방을 주시하는 병사나 그 병사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겁 없는 들짐승이거나 똑 같이 존재하는 자연이고 그들이 함께 이 땅에 있음으로 DMZ는 존재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 이곳도 변할 것이다.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독도에 풀어 놓은 토끼가 야생화 되면서 독도의 생태계를 혼란시켰듯 또 다른 인간의 손길이 닿을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57년의 세월동안 지금의 이 모습이 변치 않고 진행되어 온 자연현상이라는 사실이다. 혹, 변화에 대한 유혹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또 다른 57년의 세월을 책임질 수 있는 안목을 전제로 다가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DMZ의 오늘에 서서 미래를 쳐다보는 순례자의 조심스런 제안이기도 하다.

 

 

 

GOP순례_ 면회 가는 길

 다시 울릴 기적을 기다리며

 


서울에서 금강산을 가자면 철원에서 전기철도로 환승해야 했다. 용산에서 출발한 증기기관차는 연천과 신탄리를 지나 철원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뱉어 놓으며 물을 채우는 동안 금강산으로 가는 사람들은 전기철도로 갈아탔다. 원산행은 이내 철원평야를 가로 질러 월정, 평강을 거쳐 삼방산과 ‘우르르’ 함흥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는 신고산을 지나, 안변을 거친 뒤 원산으로 갔다. 그리고 당시에는 참으로 신기했던 전기열차를 탄 사람들은 사요리, 동철원, 정연리, 금화, 향정, 금성, 창도, 현리를 지나 마의태자처럼 단발령을 넘은 후 금강산 장안사까지 달릴 수 있었다.

 

이 길에는 한탄강을 끼고 늘어 선 추가령 유곡도 있었고 김화평야를 비껴 광삼들판의 남대천을 건너는 곳도 있었다. 근동 최대의 역이었던 철원역의 번잡함 못지않은 감봉리 광산지대나 북정령 광산지대, 남창도 광산지대도 지나게 되어 있던 철로였다. 호사가들이야 유람으로 금강산을 향하기도 했겠지만 탄부나 민초들이야 삶의 끈을 조여 매기 위한 생존의 길이기도 했다. 지금도 유일하게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금강산 전기철도를 따라 가 본다.

 

금강산 전철은 경원선의 중심역이었던 철원역을 시발점으로 하여 종착지인 내금강까지 총연장 116.6km에 달하는 다목적 철로였다. 1931년에 ‘철춘철도주식회사’에서 부설하고 금강산 전기철도주식회사에서 별도관리 및 운영했는데 당시 금강산까지는 4시간 반이 걸렸다. 일제가 한반도에 부설한 대부분의 철도가 그랬듯, 이 철도의 성격도 자원수탈이 목적이었다. 일제는 창도(昌道)의 풍부한 지하자원인 유화철(硫化鐵)에 관심이 있었다. 금화는 예부터 유화철의 주요산지였다. 이를 흥남을 경유,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주민들의 강제 노력동원과 중국인들을 고용하여 1차로 1921년부터 1926년까지 부설하고, 2차로 1926년부터 1931년에 걸쳐 창도에서 내금강까지 부설하였다. 그리고 2차 부설시 전기시설로 전환하고 금강산관광과 자원수송을 병행하였다.


이 전철은 매일 8회 운행하였으니 당시로서는 상당히 많은 편수였다. 그러나 산업용이나 일본인 등의 기득권층들이 운용한 것을 제외하면 일반인들에겐 그림의 떡이기도 했다. 내금강까지의 요금이 당시 쌀 한가마 값인 7원 56전이나 했으니 지금으로야 쌀 한 가마가 별거 아닌 듯하지만 초근목피의 민초들이야 무슨 금강산 유람이었겠는가. 당연히 보통사람들은 엄두도 못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6년 당시 연간 이용객은 약 15만 4천여 명. 하루 약 420여 명의 승객이 이용했으니 내금강 유람도 만만찮았으리란 추측이 된다.


정연리 한탄강 계곡에 남아 있는 전철교량은 2004년 9월 4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12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한탄강의 상류에 걸쳐있는 교량을 비롯하여 이 철길의 흔적은 지금의 휴전선을 따라 지나갔다. 암정교 옆을 지나 남대천과 나란히 달리다 용양보에서 남대천을 건너 광삼평야로 내닫는다. 지금도 정연리 철교와 함께 암정교를 지나고 나면 남대천 둑 옆으로 수로가 파여진 또 하나의 둑이 나란히 달리는데 그 수로가 전기철도 길이다. 그리고 암정교와 용양보 사이에는 도로원표가 하나 탄흔을 새긴 채 길가에 댕그랗게 서 있는데 과거 간이역 자리였으며 지금도 그 동네의 이름은 ‘역전’이다. 그 길이 수탈의 길이었든, 행락의 길이었든 근대사에 힘들게 만들어진 흔적임에는 확실하고 그렇기에 그 때의 은은한 감상에도 잠겨 보게 하는 것이다. 장삼이사의 왁자지껄한 장터도 역 마당에서는 벌어졌을 테고 이별과 만남도 이루어졌을 일이다. 그것이 반세기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현장으로 남아 있다.

 

아울러 이 지역에는 암정교가 남아 있어 예전의 또다른 삶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김화읍 암정리 남대천에 놓여 있는 이 암정교는 1930년 무렵 건설된 연장 140m, 폭 4m, 높이 7m의 철근콘크리트 교량이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야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일지 몰라도 당시로는 화천과 김화, 평강, 금성을 오가는 인마의 길목이었고 6·25 때는 이 일대가 저격능성전투 등으로 격전을 치르는 가운데 피아 간 진격과 후퇴의 통로이자 자유를 찾아 월남하는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린 다리이기도 하다. 지금은 낡고 파괴되어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으나 건립 당시에는 김화일대에서 가장 웅장하고 멋진 다리로서 정월 대보름에 답교놀이도 행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병자호란 때 몇 안 되는 승첩지인 이 곳 진터골(김화 자모산성)에서 청나라 호적을 무찌른 평안도 병마절도사 충장공 유림장군 대첩비와 홍명구공의 충열비와 이들을 배향한 충열사도 있다

 

구름과 병사의 숨소리만 머물 수 있는 곳

 

 

날짐승도 바람도 잠시 스치는 객(客)일 따름이다. 민통선 이북에는 김일성 고기로 오해 받던 열목어 옆으로 연어가 회귀하는 모래 고운 하천 하나가 있다는 오래 된 이야기가 전해왔다. 그러나 결코 60년의 세월동안 아무에게나 모습을 보이지 않는 하천은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감추어져 있었고, 하천에 일상을 비추는 깊은 골짝에는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그 아버지에서 아들에게로 이어지는 군인들의 숨소리만 거칠게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하천의 이름을 사천천(沙川川)이라고 부른다는 대답 외에는 동리가 있었을 법한 개울가 제법 널찍한 언덕바지에도 흔적은 간 데 없다. 하기야 이 지역에서 이런 곳이 어디 이 곳 뿐이랴. 을지부대가 자리를 튼 강원도 중동부, 여차하면 하늘 세 평밖엔 보이는 것이 없는 산첩첩 물골골의 오지. 하기야 이런 표현도 이젠 전설이 되었다. 휑하니 뚫린 길은, 신작로길 탈탈거리며 넘나드는 오
지가 아니라 기분 좋게 다가가는 관광지로 변모시켰고 그 변모만큼 인심도 모습도 변화한 곳이 인제다. 그래도 아직 마치 전인미답의 정글처럼 존재하는 땅, 인제의 DMZ에는 봄이 오려면 멀어도 한참 멀었다.

 

 

50소초 가 보셨습니까?

“안 가봤음 말하지 마세요. 4,000계단 밟아 봤어요? 안 밟아봤음 말을 하지 마세요.” 개그가 아니다. 필자의 진담이다. 필자도 4,000계단은 못 밟았다. V자 계곡 양쪽으로 열병하듯 늘어 선 능선(?)에 놓여진 계단이 각 각 2,000개씩이니 한 쪽만 오른 필자야 당연히 2,000계단 남짓 밟았나?


하긴 왕복했으니 4000계단 이상을 밟은 것은 분명하다. 그래도 그랬다. 이게 무슨 능선이냐고. 검독수리가 앉을 자리조차 변변찮은 고지 꼭대기에서 쏟아져 내린다는 표현이 적절한, 가파르다 못해 아찔한 절벽을 꺼이꺼이 오르면 그다음은 반대편으로 그만한 절벽이 또 내리 꽂힌다. 그 양쪽 계곡을 만들고 있는 아슬아슬한 고지 위에 손바닥만 한 공터 하나를 내고 겨우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대한민국 최 오지 소초, 들어나 봤나 50소초.


오르기 전, 사단의 정훈공보참모는 내게 분명 사기를 쳤다. 걱정하지 마시라고. 보급로조차 없는 것이 아니라 보급로가 없을 따름이고 그 대신 울릉도의 그것처럼 모노레일이 놓여 있어 롤러코스터보다는 속도가 느리지만 느긋하게 오를 수도 있고 보급용 케이블카도 가설되어 있다고. 그러나 현장에서의 현실은 보급품 수송용이지 결코 인마를 나르는 모노레
일도 케이블카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예시당초 그걸 태워 줄 심사도 아니었다. 기왕의 취재길이니 돌아 갈 수도, 어린애처럼 칭얼댈 수도 없는 일. 까짓 못 오를게 뭐 있냐 싶어 출발한 고행의 행군은 앞사람과 최소한 2m 이상의 간격을 유지해야 비로소 이동이 가능했다. 조금만 빨라도 앞 사람의 신발 뒤꿈치에 콧잔등이 작살이 날 지경이었으므로. 백두대간의
웬만한 칼등고개는 다 올라 본 필자의 산행 경력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참담한 현실 앞에 공갈로 일관한 사단의 참모에게 적개심을 불태우며 오를 수밖에 없었다.


철조망은 3중으로 설치되어 있으나 신형 철조망을 세울 공간이 부족한 관계로 신·구형 철조망이 군데군데 서로 교차하고 얽혀 있는 모습이다. 그만큼 능선의 경사가 가파르단 말이다. 하긴 오죽하면 보급로는 물론이고 교통호조차 만들 공간이 없었겠나.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걸을 공간조차 허용치 않는 이 능선을 웃으며 영하 25도가 넘는 칼바람 속에서도
오르내리는 사천리 병사들이야말로 이 지역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먹고 마시는 보급품 하나까지 땀과 노고에 절어 있는 눈물의 물건이다. 새들도 바람도 한번은 아찔함에 움찔거릴 수밖에 없는 산정. 멀리 눈을 허옇게 뒤집어 선 채 우뚝한 금강산이 새삼스럽다.

 

 

50소초의 병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농구골대 하나를 겨우 세워 놓은 정도의 손바닥만 한 공간이 다인데다 그마저도 공을 떨어뜨리면 남강을 따라 해금강에서나 줍던지 자유낙하에 가까운 남쪽 경사로는 고진동 계곡의 바위틈에서나
겨우 찾을 수 있을 정도이니 그도 선뜻 엄두내기가 쉽지 않을 터이다. 당연히 뜀박질은커녕 오로지 경계근무와 순찰, 작업이 움직임의 다 일 수밖에 없다. 이 짙푸른 무청 같은 청춘들이 감내해야 할 지형적 제한이다. 그럼에도 한결같이 밝
은 표정의 잘생긴 아들들은 오히려 불가사의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코끝에는 면도날 같은 북풍한설이 예리하게 날아드는데 턱 밑에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는 몸은 땀과 범벅이 되어 발길이 천근만근이다. 정말, 정말 50소초의 병사가 건네는
물 한 모금이 달았다.

 
GOP에서 붕어빵 드셔 보셨습니까?


“안 먹어 봤음 말을 하지 마세요.” 살을 할퀴고 지나가는 삭풍을 피해 들어간 펀치볼 소초에서 건네준 붕어빵은 단맛을 넘어 ‘정’(情)의 진수를 맛 뵌다.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아니다. 이미 가을 무청 걷이를 끝낸 해안들에는 적막감마저 돈다. 겨울의 바람만 가칠봉 능선을 타고 흐르며 이 어둠이 조용히 내리는 소초를 싸고 있다. 을지 전망대에서 바라 본 GOP는 시작도 끝도 없어 보인다. 사천천을 비켜 구곡양장을 넘다 보면 능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으로 물줄기를 내는 또 하나의 천이 나온다. 제법 천길이 넓다. 임북천이다. 임북천은 인제에 이르러 내린천과 합수하여 소양강에 물줄기를 댄다. 그리고는 강원 서부와 경기를 훑어 이윽고 서해로 흘러든다. 사천천이 연어의 귀소길을 역으로 거슬러 남강에다 물을 부으며 동해의 해금강 자락을 적시지만 임북천은 남으로 흐른다. 그 임북천을 따르다 다시 서쪽으로 보급로를 타길 한참, 거짓말처럼 산중 평지가 드러나고 마치 운석이 떨어진 자국처럼 웅덩이로 남은, 이름하여 펀치볼(Punch bowl)이 ‘짠!’ 하고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가 을지대대의 출발점이다. 좌로 서희 장군이 넘었다는 서희고개를 시작으로 평평해 보이는 이 능선이 해발 1,000m가 넘는다. 여름에는 후투티도 날아들고 서화분지에서 불어오는 흙바람도 일지만 겨울의 펀치볼 정상은 병사들의 체온 외에는 그 어떤 온기도 없다. 외로움을 탈 듯도 싶은데 병사들의 표정에는 구김이 없다. 봄이 오고 바람결이 순해지면 을지전망대로 해안분지로 관광객도 제법 오긴 하지만 눈 쌓인 고지의 저물녘은 적막강산이다. 잘생긴 미남 중대장이 순찰을 나선다. 그의 순찰길이야 목적지가 있을 터이지만 순찰의 끝은 없을 듯 보인다. 오로지 부하들의 볼을 부벼 주고 어깨를 안아 줄 뿐, 사실 이 엄동의 삭풍에 중대장인들 왜 아니 추울 것이며 왜 아니 고독할 건가. 속으로만, 속으로만 삭히는 그들의 적막은 수도승의 인고와 동일한 모습이다.


이 길고 아찔한 GOP에서 인위적 낭만은 오히려 가증스러움이다. 을지부대 GOP는 그래서 ‘전방’의 상징으로 회자된다. 정상에 서 있기에는 오금이 저린, 아찔한 현기증을 유발하는 이 모진 고지의 꼭대기마다 붕어빵을 나누듯 작은 즐거움 몇 개로 존재하는 삶은 젊음까지 유보한다거나 젊기 때문에 기꺼이 칠흑의 밤도 감내하는 아름다운 우직함이 있기에 빛난다. 과년하나 여식에게 혹 필자가 모르는 남자친구가 이런 GOP에 근무하는 병사라면 절대 절교편지를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겠다. 그들은 대한민국 청년의 2% 이내에 포함되는 아주아주 특별한 인물들이므로.

 
인제에서 금강산을 향하다


인제라는 명칭은 참 특이하다. “인”은 기린(麒麟)을 뜻한다, 성인이 이 땅에 나면 나타난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사슴의 몸, 소의 꼬리, 말의 발굽과 갈기를 가졌다는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동물. 그 동물의 발굽(제:蹄)을 닮았다는 동리가 인제다. 어차피 말의 발굽을 가진 기린이라면 ‘마제’(馬蹄)라고 이름 할 일이지 굳이 인제라 명명한 연유는 뭘까? 인제가 그런 땅이다. 하긴 인제의 옛 명칭은 고구려 때는 저족(猪足)현이라고 하여 돼지의 발굽에 지형을 빗대었고 신라 때는 회재현이었다가 고려조로 넘어 와서 얻은 이름이 인제다. 산세의 험준과 골의 깊음만 가지고 말한다면야 또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런 모든 합이 오묘함과 함께 감춰진 모습이 더 깊은 맛을 내기에, 도저히 딱 잘라 표현할 말이 없기에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기린의 발굽을 갖다 붙인지도 모를 일이다. 인제에서는 내린천을 따라 내륙의 더 깊은 곳으로 숨어 버리거나 아니면 서화 쪽 길고 긴 길을 따라 금강산으로 가거나 진부령 고갯길을 훠이훠이 넘어 동해에 닿거나 그도 아니면 도저히 끝이 없을 듯한 내설악으로 아예 입산해 버리거나 하는 수밖에 없다.

 


‘강원총람’에 따르면 인제에는 1,000m가 넘는 산이 무려 96개, 800m가 넘는 봉우리는 강원도 전체의 1/5인 200개가 넘게 솟아 있다. 산이 많고 가파른 만큼 민초들의 삶도 그에 못지않게 팍팍하기 이를 데 없어 몇 마지기 안 되는 다락논의 소출이야 봉제사 젯메쌀 대기도 벅찰 지경이었지만 대신 산채향은 지천에 그득하여 그래도 빈 입은 채웠다. 동해 거진항을 거쳐 진부령에 몸을 푼 명태는 진부령 골짝의 덕장을 빼곡히 매웠고 한겨울의 눈을 온몸으로 받아주기도 하다가, 햇살
도 머금다, 모진 바람에 지느러미를 뒤틀다가도 이내 풀리고 얼길 겨우내 되풀이하다 폭신한 살결로 거듭나는 황태가 된다. 이게 또한 인제의 진부골짝에는 산중비린 것의 대명사가 되었으니 지금은 명물 대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감록
에는 내린천변의 삼둔사가리를 최고의 피장처로 꼽았다. 달둔, 살둔, 월둔의 삼둔은 내린천 중에서도 물내림의 시발지요, 아침가리, 곁가리, 적가리, 연가리는 인제쪽 방태산 북쪽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첩첩골이라는 말과 다름 아니다. 그래서 접근성을 떠나 사통팔달로 길이 뚫린 지금이야 참살이 웰빙시대 운운하지만 DMZ는 또 다르다.


오로지 외길로 북을 향하는 서화축선만이 인제의 을지부대를 말해 준다. 길은 여전히 구불구불이고 예전 금강산길이 그대로 남아 옛 발취도 가늠해 볼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이 이 지역을 말하는데 하등의 수식이 되지 못함은 예전보다 더 오지화 된 현실에 있다. 숱한 지역에 걸쳐 민통선이 무색해지고 철책의 코앞으로 영농선이 북상했지만 이 지역만은 북상할래야 할 수 조차 없는 산악으로 형성되어 있어 더 그러하다. 사람 사는 냄새도 적당히 피우고 채작의 땀흘리는 정경이라도 바라볼 수 있을 때 그나마 외로움도 덜 타는 법이다. 이곳은 아니다. 60여 년 전에는 서화를 넘어 임북천변으로 옹기종기하게 마을이 있었고, 향로봉이 바라보이는 고갯길 너머 사천천변에는 사천리라는 당당한 지명을 가진 동리가 있어 막걸리 냄새도 풍겼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군데군데 대전차 장애물만 황토 먼지를 뒤집어 선 채 뎅그러니 남아 있을 따름이다. 아마 금강산을 향했거나 산판을 위했거나 간에 옛길의 원형을 간직한 몇 안 되는 길인 것만은 확실하다.

 


을지부대와 인제는 서로 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공존의 교집합 면적이 넓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넋두리가 회자되던, 혹독한 추위와 험했던 길도 묵묵히 견디며 이 땅을 지킨 토인의 모습을 견지해 준 것도 을지부대 군인들이었고, 그 군인들과 함께 부비며 살아 온 원주민들도 을지부대없는 인제 원통은 쉽사리 상상할 수 없는 일인지라 더 그렇다.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없는 비경이라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좋은 시절을 맞았다고는 하나 그래도 아직은 군복으로 가득한 서화축선의 현실은 50년 전과 다를 바 없어 보여 더 애잔하게 와 닿는다. DMZ기행에 사족 하나를 붙인다면, 함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인심은 솔직히 관광지 특유의 불친절이 스멀스멀 스며들고 오지라는 핑계로 물가도 만만찮다. 척박은 했으나 인정이라도 남아있던 예전의 인제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해서 타지에서 온 군인들이나 군인가족들에겐 불편함이 없지 않다. 인제의 행정력이 주민의식 계도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두고 볼일이다. 왜 우리나라의 관광지는 하나같이 비싼 물가와 불친절에 찌들어야 되는지 아쉬움이 크
다. 인제가 군사도시인가 관광도시인가를 고려하기 이전에 원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배려가 아쉽다.

  

GOP순례_ 면회 가는 길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백담사 가는 길은 만만찮은 행로였다. 왕복 2차선의 용대리 입구에서 내려 하염없이 걷고 또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소(沼)나 담을 만나면 목도 축이고 땀도 훔쳐가며 산바람을 맞던 그런 길이었다. 지금은 그런 운치는 없어졌지만 우리에게 그만큼 친숙하게 다가온 것은 사실이다. 백담사에 도착해서도 다시 봉정암이나 오세암이 있는 내설악 쪽으로 등행하자면 웬만한 인고를 감내하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일. 해서 독한 신심을 지닌 간절한 불자이거나 다리 힘이 한창 튼실한 젊은 산꾼들이나 오르는 길이었다. 어찌보면 지금처럼 교통이 좋은 시절에 백담사 무금선원이나 무문관이 높은 명성을 자랑하는 이유도 그만한 적멸의 기반이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흔히 설악산을 말하면 얼른 떠올리는 것이 외설악이 자리한 속초이지만 기실 설악의 대부분은 인제에 속해있다. 이름하여 내설악이다. 근자에 와서 지난 정권의 수장 한 사람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안식구까지 대동하고 들어 가 심신을 수양했는지 울분을 삭혔는지는 가늠할 길이 없으나 그 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더니 만해 선생의 정진절집이었다는 것과 융합되어 작금에는 제법 붐비기까지 하는 명소가 되었다. 백담사는 사실 고색창연한 고찰의 융숭깊음을 자랑하는 외모는 아니다. 창건이야 이 땅의 웬만한 가람이 모두 3국 시대에 자리 잡았다고 전해지고 휴전선 이남의 사찰은 원효나 의상, 자장 등 역사책에 한 면을 아로새기는 고승들의 존함이 제일 첫머리에 장식되는 일종의 공식같은 전형이 있지만 이 백담사도 다르지 않은 내력을 지니고 있다.

 


백담사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외가평에서 동남쪽 약 8Km 되는 내설악 쪽에 있는 절이다. 절집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아 지금도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건봉산 건봉사의 말사다. 서기 647년, 진덕여왕 원년 자장율사가 아미타삼존불을 조성, 봉안하면서 창건한 절이다. 원래 절의 위치는 현재의 장소가 아니고 한계리 장수대 부근에 창건하고 사찰명도 ‘한계사’라 명명했다. 그러나 백담사는 참 화재를 많이 입은 절이다. 좀 장황한 듯하나 만해선생이 저술한 ‘백담사 사적’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690년(신문왕 10년)에 최초의 화재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719년(성덕왕 18년)에 재건하였는데 당시 낭천현(지금의 화천군)의 비금사를 옮겨왔다는 전설이 있다. 다시 785년(원성왕 원년)에 다시 불탔으며 790년에 한계사터에서 아래 30리 지점에 옮겨 중건하고 절 이름을 ‘운흥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984년(고려 성종 3년)에 다시 불타 버려 운흥사지 북쪽 60리쯤 되는 곳으로 이전하고 987년 ‘심원사’로 개명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조까지 전승되다가 1432년 다시 화재가 나 폐허가 되었으나 2년 뒤 심원사지 아래 30리쯤 되는 곳에 법당과 요사채를 세우고 ‘선구사’라 하였으나 1443년 불타버렸고, 1447년 옛 터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다시 절을 세워 ‘영축사’라 하였다.

 

그러나 이도 10년을 못가 1455년 6번째 화재로 불타버리고 이듬해 옛 절터의 상류 20리 지점으로 옮겨 중건하여 ‘백담사’라 하였으나 1772년(영조 51년) 다시 불이 나 1775년 최붕, 태현, 태수 등이 다시 초암을 짓고 6년 동안 머물면서 법당과 향각 등의 건물을 중건하고 심원사라 하였다가 1783년(정조 7년)에 절 이름을 다시 백담사로 바꾸었다. 그러나 1915년에 160여 칸의 백담사가 다시 불탔고 4년 뒤에 중건했으나 이 오지도 6.25는 피해갈 수 없었다. 그 후 다시 중건에 중건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숨 가쁜 중건사다.전설에 의하면 사찰에 화재가 너무 잦아 이름을 고쳐 보려고 애를 쓰던 중 어느 날 주지 스님의 꿈에 신령스런 백발노인이 나타나 청봉에서 담을 세어 100개가 되는 곳에 사찰을 앉히면 삼재(水災, 火災, 風災)를 면하리라고 현몽하기에 지금의 자리에 절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런들 어떠리. 이미 이 계곡을 돌고 굽이치는 담이 어디 백 개뿐이랴. 백 개면 어떻고 천 개면 어떠리. 선경으로 청수가 깨질 듯 흐르고 그만큼 맑은 바람이 골을 채우고 있는 데 숨이 턱 막히는 절창의 나뭇결 스치는 소리에 더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결빙된 계곡 위로 소도담도 자취를 감추었지만 백색 바위를 붙들고 있는 얼음 위로 튕겨 나가는 겨울의 햇살은 겨울계곡미의 정수를 보여준다. 흔히 외설악 천불동계곡을 현란하다고들 하지만 내설악 백담계곡이나 수렴동계곡, 구곡담계곡은 변화무상한 현란함 속에서도 깊고 부드럽다.

 

 

그래서 만해의 명저도 이곳에서 탄생했나 보다. 만해는 ‘님의 침묵’을 탈고하며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 갑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라고 겨울 내설악의 밤을 무겁게 노래했다.그랬을 것이다. 아직 해가 중천인데도 침묵하는 백담사 계곡은 무겁다.


현재 백담사에는 만해에 관련된 건물만도 기념관을 비롯, 5개에 달하고 기존의 법당, 법화실, 화엄실, 나한전, 관음전, 산신각 외에도 일주문, 금강문, 만복전, 적선당, 요사체 등 16개의 건물로 제법 웅장한 가람모양을 하고 있다. 기돗발 세다는 오세암이나 봉정암도 부속암자로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심교를 관통하며 흐르는 계곡에 펼쳐진 돌탑의 그 간절함들은 그것만으로도 장관을 이루고, 그런 간절함이 닿을 수 있는 기(氣) 또한 그만큼 세어선지 폐관 정진의 도장 무문관도 유명하다. 그렇다. 어쩌면 백담사야말로 무문(無門)의 정수를 보여주는 장소로 가장 적절하지 않나 생각이 들게 한다. 문이 없어 어디로 통하는 대도의 문이 없으므로 무문이요, 문이 아닌 곳이 없어 시방세계가 그대로 무문인 득도의 극으로 가는 길.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세계에 한번쯤 힐끗 구경이라도 하고 싶다면, 수미산에 오를 수야 없
지만 바라보기라도 하고 싶다면 백담의 계곡을 훠이훠이 돌아 백담사로 발길 한번 해 봄도 좋을 듯하다. 수미산 턱밑이 그곳이다.

 

 

 

아미 식객

동해 바다향기에 진부령 눈바람을 버무린 맛

 

인제에는 옛날 무심이라는 씨 없는 배가 유명했다고 한다. 진상품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이 무심이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지역이 지역인지라 산삼, 석청, 목청도 특산물이었는데 보기 힘들다. 그래도 청정자연이 온전하게 남은 이 지역은 산채나 토종의 이름을 단 입맛 돋우는 먹거리의 보고다. 더덕, 참나물, 두릅, 곰취, 고비 같은 산나물은 송이, 느타리, 석이버섯 등과 어우러져 산채의 원형을 맛보인다.

 


다행히 무심이 이상으로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는 특산물이 있으나 바로 황태다. 황태는 겨울철 생선인 동해의 명태를 진부령과 미시령을 통해 인제 북면의 진부령으로 실어 나른다. 현지에서 배가르기를 마친 명태는 다시 진부령 청정수로 목욕재계 시켜 두 마리씩 코를 꿰어 덕장에 건다. 눈이 오면 눈을 뒤집어쓰고 밤이면 온몸을 얼렸다가 따스한 낮 햇살에 몸을 풀길 네 달. 외형은 통통하고 붉은색을 띠고 속살은 노랗게 변한다. 양념을 가미하면 속살 깊이까지 잘 스며들어 부드럽고 담백한 맛이 나며 간장해독, 숙취제거, 공해해독, 노폐물제거 등 효능이 좋아 남녀노소 구분 없이 각광받고 있다. 구이를 하거나 국으로 끓이거나 조림, 찜 등 무엇으로 조리해도 감칠맛이 난다. 이번 호의 아미식객은 인제군 북면에 위치한 송희식당의 ‘황태구이 정식’을 맛보았다. 상차림도 깔끔하고 특히 자연산 산채와 황태국도 곁들여져 이 지역의 청정맛을 보기에는 적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