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허시명의 체험여행

醉月 2009. 10. 7. 08:28

바지락 캐기
미끈미끈… 더듬더듬… ‘갯벌의 추억’

 변산이 보이는 갯벌 체험장에서 바지락을 캐는 사람들(위). 살아 움직이는 바지락.

소문으로만 듣던 꽃무릇을 보러 고창 선운사에 갔다. 땅에서 곧장 솟아난 꽃대, 그 꽃대 끝에 붉은 나비처럼 앉은 꽃이 무리 지어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이 세상을 주관하는 신이 있다면 바로 그가 수천 수만 개의 불을 지상에 밝혀놓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꽃잔치에 맞춰 선운사 입구에서는 수산물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바다를 끼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어민들을 위해 잔치마당을 벌인 것이다. 그런데 산속 절 입구에서 치르는 행사여서인지 수산물은 거의 보이지 않고 수산물 음식점만 넘쳐났다. 마침 그걸 보충이라도 하려는 듯 바닷가에서 지방자치단체 주최로 두 가지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풍천장어잡기와 갯벌 생태체험이 그것이다.

풍천장어잡기 행사는 선운사 입구의 인천강가에서 열리고 있었다. 인천강은 바다와 연결돼 있어 장어가 많이 잡히던 곳이었는데, 장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그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주변의 장어 양식장들이 공급을 대신하게 되었다. 장어잡기는 인천강가에 바닷물을 가둬 양식장어를 풀어놓고 진행되었다. 축제기간 동안 이뤄지는 깜짝 이벤트였다. 나는 장어잡기 행사를 보고 곧바로 갯벌 생태체험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실 서해안 전체가 갯벌체험장이다. 맨발로든, 장화를 신고서든 갯벌에 들어가면 그게 갯벌체험이다. 그래서 별 기대를 하지 않고 갯벌체험장이 있는 심원면 하전리 서전마을을 찾아갔는데, 그 마을 입구의 큰 바위에 전국 최대의 바지락 생산지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마을 앞에 드넓은 평야처럼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갯벌이 넓어 바닷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바다 건너로는 변산반도가 펼쳐져 있다. 염전이 있는 곰소에서부터 모항을 거쳐 격포, 그리고 서쪽 끝의 위도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위도 가는 배에서, 제주 가는 비행기에서 보았던 그 장엄한 변산반도였다.

선운사에 피어 있는 상사화(아래).

어촌계장 이수용씨(45)는 하전어촌계에서 관장하는 갯벌이 1147ha라고 했다. 그 넓이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물이 빠지면 경운기를 타고 6km쯤 나간 곳에서 바지락을 캔다는 말에 삶은 조개처럼 입이 떡 벌어졌다. 사람들이 갯벌에 흩어지기 시작하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의 규모다.

경운기가 다져놓은 단단한 갯벌 길을 1km쯤 걸어 들어가니 바지락을 캘 수 있는 갯벌이 나왔다. 그곳 입구에는 경운기를 대놓고, 호미만한 갈고리와 바구니, 그물자루를 빌려주는 어촌계원이 있었다. 신발과 양말을 벗어놓고, 장비를 빌려서 맨발로 갯벌에 들어갔다. 부드러운 갯벌의 감촉이 즐길 만했다. 혹시 조개껍데기에 발바닥을 다치지 않을까 조심스러웠지만 겁낼 정도는 아니었다. 만일 그게 걱정되는 사람은 어민들이 신는 고무장화를 준비해오면 된다.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곳까지 나가서 갯벌을 뒤져보았다. 갈고리로 갯벌을 찍어, 덩어리 진 뻘을 뒤집어 헤치자 바지락이 한두 개 눈에 띄었다. 뻘을 잔뜩 머금은 죽은 바지락도 있고, 한창 자라고 있는 작은 바지락도 있었다. 이곳 하전어촌계에서는 수시로 새끼바지락을 사다가 바다에 뿌린다. 그 바지락이 1년 반이나 2년쯤 자라 폭이 3cm쯤 되면 캘 만하고 먹을 만해진다.

구멍이 숭숭 뚫린 갯벌에 갈고리를 박아 뻘을 뒤집으니, 마치 감자뿌리에 달린 감자처럼 바지락이 알알이 달려 나온다. 이제 뻘을 헤치고 바지락을 바구니에 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타원형의 바지락만 나오는 게 아니라 긴맛도 나오고 검은빛 백합, 가무락, 동죽도 나온다. 바지락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뻘에서 태어나 뻘에서 자란 것들이다. 물론 바지락 중에도 자연산이 끼여 있다.

나는 어리석게도 어촌계장에게 종패(새끼바지락)를 뿌리고 나서 달리 영양분을 주지 않냐고 물어봤다. 양식 어장에서 먹이를 주고, 전염병이 돌지 않게 약물을 투입하는 것을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활한 뻘밭에 비료를 주면 얼마를 주고, 약을 뿌리면 얼마를 뿌릴 것인가. 종패를 뿌리고 나면 나머지는 쉼 없이 움직이는 바닷물이 모두 해결해준다. 그리고 지구의 콩팥이라는 뻘이 영양분을 제공해주고, 또 햇빛이 가세하여 찰진 바지락으로 키워낸다.   


맨발로 캐다보면 뻘마사지 절로

갓 잡은 바지락을 끓여 먹으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왼쪽)과 해거름의 서전갯벌.

어촌계장은 하전리 바지락이 다른 갯벌에서 나는 바지락보다 쫄깃하고 유통기간이 길다고 했다. 바지락 밭이 바닷물에 잠겨 있을 때보다 햇빛에 노출돼 있는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하전리 갯벌체험장은 인위적으로 만든 공간이 아니다. 자연이 선물한 체험장이다. 어민들이 어장의 일부를 체험장으로 일반인들에게 개방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쉼터와 세족장, 요리장을 짓고 있는 중이다.

이곳에서는 무한대로 바지락을 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이 밀려들면 밖으로 나와야 한다. 따라서 미리 어촌계에 연락해 물때를 알아보고 찾아가야 한다. 썰물과 밀물 때를 보는 것은 기본이지만,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작은 조금과 사리 때를 구분하여 가면 더욱 좋다. 바다에서는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사리 때가 풍어기다. 바지락 캐기 좋은 때도 당연히 이때다. 그리고 직접 캔 바지락은 그냥 가져가는 게 아니다. 어촌계에 1kg에 2000원씩 값을 치러야 한다. 어민들이 종패를 뿌리고 관리해 거둔 수확물이어서 그에 합당한 값을 치르는 것이다. 시중에서는 바지락 값이 그 곱절은 되는데, 이곳에서는 싱싱한 바지락을 직접 캐서 가져갈 수 있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1년 연중 언제든지 찾아와도 바지락을 캘 수 있는 곳이라고 하니, 바지락을 잔뜩 넣은 칼국수를 해 먹고 싶다면, 아이들에게 바다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싶다면, 간척사업이 무모하고 갯벌을 지키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싶다면 이번 주말에 서해안고속도로를 타보자.

Tips
바지락 캐기 체험장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사 나들목에서 빠져나와 선운사로 향한다. 선운사 입구에서 하전리 서전마을까지는 5km쯤 되고 선운사 나들목에서 하전리까지는 30분쯤 걸린다. 물때를 못 맞춰 가면 선운사를 구경하거나 선운리의 미당 서정주문학관을 찾아가보는 것이 좋다. 자세한 사항은 하전리 어촌계로 문의하면 된다. 어촌계 063-563-5121, 어촌계장 이수용 063-563-8771, 016-9877-8771

도자기 만들기
흙장난 ‘재미’ + 살림 장만 ‘실속’

도자기에 문양을 넣고 있는 도예교실 참가자들

흙을 만지면 기분이 좋아진다. 사람에 따라 어릴 적 흙장난하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요사이 도시에서 흙장난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흙장난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젊은 엄마들은 질겁을 하고 말린다. 흙 속에 들어 있을 무수한 세균 때문이다. 그 엄마들 입장에서 보면 옛날에, 혹은 요사이 농촌에서 아이들이 흙장난을 하면서 놀고, 때로 그 흙을 입에 넣기까지 하면서도 어떻게 무사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그만큼 도시화가 가속화하면서 현대인들은 흙으로부터 멀어졌다. 하루종일 흙을 밟지 않고 지내는 도시인도 많다. 하지만 흙맛을 아는 이들은 흙더미 속에 손가락을 푹 찌른 채 축축하고 말랑한 흙을 주무르고 싶어질 때가 있을 것이다. 이때 해볼 만한 것이 도자기 만들기 체험이다. 문화센터나 평생교육원에서도 필수과목으로 꼽히는 도자기 만들기 체험은 가장 널리 보급된 체험여행이다.

경기 광주, 이천, 여주에서는 10월30일까지 세계도자기 비엔날레 축제가 열린다. 두 달 동안 이어지니 국내에서 가장 오랫동안 진행되는 축제이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축제다.

세계도자기 비엔날레는 2회째에 지나지 않지만 이천 도자기 축제는 17회째, 광주 분원 왕실도자기 축제는 6회째, 여주도자기 박람회는 15회째를 맞이하고 있다.

이천 세계도자기센터에 있는 전통가마.

전통 도자기 공방이 가장 많은 이천의 경우는 설봉공원에서 축제가 열린다. 설봉공원은 설봉산 아래 작은 호수를 끼고 있는 시민들의 쉼터다. 공원 맨 위쪽에는 상설전시관인 이천 세계도자기센터가 있다. 도자기센터 진입통로는 거대한 흙가마 형상을 하고 있다. 흙가마 통로를 지나면 광장이 나오고, 도자기센터 옆에는 전통가마 두 개가 있다. 수시로 그곳에서 도자기를 구워내는데, 날을 잘 맞춰가면 도자기를 넣고 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설봉공원에 마련된 이천 도자기 축제 행사장의 경우만 헤아려서 올해 약 200만명의 사람들이 행사장을 찾았다. 성공적인 축제인 셈인데 그 행사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단연 도예교실, 물레 체험장이다.

도자기 제작과정은 흙으로 빚고, 문양을 넣고, 채색하고, 굽는 과정으로 이뤄진다. 도예 체험장에서는 굽는 과정을 뺀 나머지 과정들을 선택해서 체험할 수 있다.

이제 흙을 만져보자. 흙은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형태로 가공돼 있다. 그 흙을 물레에 얹고서 자기가 만들고 싶은 형태로 성형한다. 물레는 손물레와 발물레, 기계물레가 있는데, 기계물레를 사용하면 손쉽고 편리하다.   


이천 세계도자기센터의 앞마당 풍경(위).이천 도자기 축제장에서 펼쳐진 마임.

잘 치댄 흙을 물레에 척 붙이고 작업을 시작한다. 이때 중심이 맞지 않으면 흙이 날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흙을 만진 첫 느낌은 흙이 의외로 단단하다는 것이다. 영화 ‘사랑과 영혼’ 장면처럼 흙이 주르르 흘러내릴 듯 부드러울 거라는 상상과는 사뭇 다르다. 물레에 올려지는 흙은 오랫동안 치대어 반죽한 것이기 때문이다.

발로 밟거나 밀가루반죽처럼 치대는 이 과정을 충실히 하면서 성질이 다른 흙을 섞기도 하고 공기구멍도 완벽히 없애주어야 한다. 공기구멍은 나중에 도자기를 구웠을 때 금이 가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발로 기계의 속도를 조절하면서 조심스럽게 흙을 만지기 시작한다. 구워진 도자기는 15% 정도 줄어들므로 그것을 감안하고 크기를 잡아야 한다. 크기를 잡았으면 기둥을 세우듯이 흙뭉치를 두 손으로 일으켜 세운다. 그러고는 엄지로 안을 파고 들어간다. 흙이 단단하기 때문에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일이 쉽지는 않다. 초보자는 도예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안을 파고 들어간 다음 넓힐 때는 가만히 쥔 주먹을 살짝 댄다. 이제부터 아기 다루듯 흙을 살살 다뤄야 한다. 모양을 만들려고 성급하게 손을 대거나 힘을 주면 모양이 일그러지거나 아예 뭉개져버릴 수도 있다. 조심스럽게 손을 갖다 대면 그 손의 감촉만으로 흙은 저절로 모양을 달리한다. 비로소 ‘사랑과 영혼’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두꺼운 비닐(고무장갑 자른 것 등)을 손가락에 감싸 도자기의 운두를 날렵하게 다듬으면 성형은 끝이다.

온 가족 주말여행 코스로 제격

이제 문양을 넣을 차례다. 문양을 넣는 도구는 다양하다. 자기 주변의 거의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날카로운 못 등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때 문양은 되도록 선명하게 그려넣는 것이 좋다. 유약이 발라지고 구워지는 동안 그림 선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구멍을 뚫는 기법을 사용하고 싶은 욕심은 접어야 한다. 도자기를 뚫으려면 적어도 하루쯤 말린 다음에야 가능하다. 채색 역시 도자기가 말라야 하므로 당일치기 체험에서는 할 수 없다.

물레질을 하는 아이들.

도예교실에 따라 채색해볼 수 있는 마른 도자기를 준비해놓은 곳이 있다. 초등학생들은 이 도자기에 크레파스로 채색할 수도 있는데, 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는 아니지만 크레파스의 화려한 색감이 나는 도자기를 얻을 수 있다. 그림까지 직접 그리고 싶은 사람은 머그를 선택하면 된다.

도자기는 불의 예술이라고 한다. 그만큼 굽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러나 한자리에서 굽는 것까지 체험하기는 어렵다. 도예교실 중에는 기계가마를 쓰는 곳과 전통가마를 쓰는 곳이 있는데 한 가마 분량이 되어야 불을 지핀다. 그래서 도예교실에서 도자기를 굽고 나면, 빨라야 2~3주 뒤에 재벌구이까지 된 완성품을 받아볼 수 있다. 도자기 체험에 드는 비용은 1만~2만원이고, 완성된 도자기를 집에서 받아보려면 얼마간의 돈을 더 지불해야 한다.   


이천시 마장면 표교리에 있는 ‘원점도예’의 정종혁씨(44)는 1박2일로 도예교실을 운영한다. 가족여행이나 직장 야유회를 와도 된다는 뜻이다. 1박2일 체험에 1인당 4만원이고, 4인 가족은 8만원이다. 여기에는 숙박비, 흙값, 교육비를 포함해서 재벌구이 된 완성품을 받아보기 전까지의 과정을 체험하는 데 드는 가격이 포함되어 있다.

도예교실을 찾아와 접시도 만들고, 그릇도 만들고, 술병까지 만들고 난 한 가족의 가장 왈, “한살림 장만했네”였다. 이번 주말에 직접 그릇 하나 만들러 도예교실을 찾아가보자

 

전주 한옥마을
그리움 깔고 추억 덮고 ‘달빛 하룻밤’

 전주 한옥마을 풍경.

한국처럼 아파트로 뒤덮인 나라가 세계 어디에 또 있을까. 내가 누워 있는 안방의 침대, 그 아래위로 똑같은 위치에 사람들이 누워 있다고 생각하면 잠이 다 확 깬다. 연탄 아궁이에 외풍 센 개량 한옥이나마 한옥에서 살았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툇마루가 있고, 다락방이 있고, 마당이 있고, 마당 한쪽에는 개집까지 있는 그런 나지막하고 따뜻한 공간이….

옛날 집이 그리워 가족과 함께 전주 한옥마을에 갔다. 우리는 전주 한옥생활체험관을 숙소로 잡았다. 전주시에서 공들여 지은 전통 숙박업소다. 때마침 보름날이어서 그곳에서는 ‘십오야 행사’를 하고 있었다. 십오야 행사는 입장료 1만원만 내면 물국수를 맛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랑채에서 벌어지는 공연과 뒤풀이 술상까지 즐길 수 있는 아주 소박하고 살가운 행사다. 그날은 산조공연이 열렸다. 등장하는 소리꾼은 당대의 명창은 아니었지만 전주에서 나고 자란, 명창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대학생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부채를 탁 접었다 펼치며 이마에 땀이 솟도록 열창하는 모습을 보는 사이 마당에는 어둠이 깊어지고 하늘에는 보름달이 솟았다. 뜰에서 굴렁쇠를 굴리고 투호(옛날 궁중이나 양반가에서 즐겨 하던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넣는 놀이)를 한다, 갓과 두건을 쓰고 임금놀이를 한다, 먹을 갈아 두루마리 한지에 붓글씨를 쓴다, 하며 재미나게 놀던 아이들도 마당 가득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랑채 마루로 기어 올라와 턱을 쳐들고 공연에 빠져든다. 공연이 끝나자 사랑채 마루에 수많은 작은 술상이 차려졌다. 전통주 한 잔에 콩전, 콩나물, 김치 등 전주 사람들 솜씨다운 ‘여간 아닌’ 손맛의 안주들이 올라온 술상이다. 이쯤 되면 1만원을 내고 참가한 것이 송구스러울 지경이다. 전주 사람들다운 상업적이지 않은, 멋과 자존심이 깃든 자리다.

한옥생활체험관에서 숙박하는 손님에게는 이 십오야 행사를 즐길 수 있는 특전이 그냥 주어진다. 하지만 매달 보름에 이 행사가 열리는 것은 아니다.

골목길 곳곳 조상의 ‘숨결’ 가득

가람 선생의 거처였던 ‘가람다실’.오목대로 소풍 온 학생들(왼쪽부터).

전주는 경주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도시여행을 할 만한 곳이다. 우람한 나무들이 넓고 짙은 그늘을 드리운 경기전(전주시 풍남동에 있는 조선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전각·사적 제339호) 마당을 걷다 한옥들이 밀집한 교동과 풍남동을 거닐면 문득 내가 지나간 시간 속에 잠시 스며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든다. 그리고 그런 착각이 들 때 이곳이 바로 전주구나 싶다. 전주 교동과 풍남동에는 800여채의 한옥이 있다. 전주시에서 한옥지구로 지정해 집수리를 제한하고, 필요한 수리비를 제공하고 있다.

초저녁에 산책에 나섰는데 아이들이 신기한 걸 발견했다고 소리쳤다. “와! 진짜 골목길이다.” 차가 못 들어가는 좁다란 골목 입구에 서서 작은아이가 하는 소리다. 진짜 골목길을 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란다. 놀란 아이를 보며 우리가 더 놀랐다.

이곳 전주에는 일반에게 개방된 또 한 채의 유서 깊은 한옥이 있다. 전주향교의 부속건물인 ‘양사재’다. 말 그대로 선비를 기르는 집이라는 뜻이다. 전주향교는 조선시대 호남 땅에서 가장 큰 향교였다. 전주 이씨 왕가의 고향땅이라서 그럴 것이다. 양사재는 ‘오목대’ 바로 아래에 있다. 오목대는 이성계가 1380년에 남원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돌아가는 길에 전주에 들러 전주 이씨 집안 사람들과 승리를 축하하는 잔치를 벌인 곳이다. 원래 양사재 자리에는 오목대 사우(祠宇·따로 세운 사당집)가 있었는데, 1875년에 양사재가 건립되었다. 이곳 양사재에서 1951년부터 1956년 사이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선생이 기거했다. 선생이 서재로 쓰던 방에는 ‘가람다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그 방에서 집필하던 선생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다. 난초와 시와 술을 좋아했던 가람 선생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집이라, 양사재의 느낌은 각별하다.

양사재에서는 이곳을 운영하는 이들이 직접 따고 볶은 차맛을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양사재 뒤편 오목대 산자락에서 조선시대 선비들이 키우고 따 먹었을 차나무가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이곳이 차나무 자생지로는 북방 한계선이란다.   


전주 한옥생활체험관 사랑채와 마루. 양사재 전경(왼쪽부터).

양사재나 한옥생활체험관 모두 화장실은 깔끔한 양식 변기다. 그러나 한옥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면, 외풍 탓에 코끝이 시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창호지 문 사이로 아침볕이 들 때쯤 일어나 고운 모래가 서걱거리는 뜰을 걷는 맛 또한 각별하다. 두 한옥집에서는 아침밥을 준다. 작은 놋그릇들마다에 정갈한 찬들이 담겨 있는, 굳이 따지자면 칠첩반상도 부럽지 않은 융숭한 아침상이다.

참, 전주에는 이곳이 아니면 찾아보기 어렵지 싶은 또 다른 재미있는 풍속도가 있다. 전주의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슈퍼마켓에 ‘가맥’이라고 씌어 있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가맥’은 가게 맥주의 준말이다. 가게에서 맥주와 안주를 사서 마실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줄여 부르는 것이 재미있다. 길가에는 꽤 규모가 큰 가맥집들이 눈에 띈다. 명태포와 갑오징어 안주도 맛있고, 사람이 많아 닭장 속처럼 왁자지껄한 게 기분까지 즐거워진다. 어려운 서민경제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 트레이닝복 바람에 슬리퍼 끌고 나와 한 잔 걸칠 수 있는 여유가 한가로워 보이기도 한다.

가맥에서 맥주 한 병 들이켜고 들어와 여닫이 문고리를 걸고, 문풍지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을 피해보려 이불을 있는 대로 덮어쓰고 누우면 창호지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에 어른어른 추억들이 지나간다. 오랜만에 어릴 적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또 다른 하루가 추억 속에 남는다.

 

여행메모
양사재
2인 기준 동절기(10월부터 3월까지) 6만원, 4인 가족 6만5000원. 단,미취학 아동은 무료다.
모든 숙박객에게 가정식 아침식사와 전통차가 제공된다.
예약은 1주일 전에 해야 하며 전화나 인터넷으로 예약이 가능하다.
063-282-4959 www.mjeonjutour.co.kr

한옥생활체험관
사랑채, 안채 특실 10만원,
사랑채 일반(단독 화장실), 7만∼8만원
사랑채, 안채 일반(공용 화장실) 5만원
예약은 2주 전에 해야 하고, 예약할 때 이용금액의 30%를 예약금으로 입금해야 한다.
방이 비어 있을 경우에는 당일 찾아가도 숙박이 가능하다.
아침식사가 제공된다.
063-287-6300 www.saehwagwan.com

 

천수만 탐조
노을진 하늘, 새들의 군무 ‘탄성 절로’

천수만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기러기 떼(위). 해질녘의 가창오리 떼.

들판에 가을이 찾아와 갈대숲을 이루고, 그 갈대숲이 바람에 고갯짓을 시작하면 하늘에는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까마득히 하늘 높은 곳을 점점이 메우는 기러기 떼다. 기러기는 우리나라에서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가는 철새다. 기러기처럼 한철 지내고 가는 새도 있지만 잠깐 들렀다 가는 나그네새도 있다.

우리는 가을철새와 나그네새가 한곳에 모여 지내는 새들의 낙원으로 갔다. 우리나라의 유명 철새 도래지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천수만 들판이다.

천수만은 태안반도와 서산 땅의 오목한 테두리다. 물이 얕아 ‘천수만(淺水灣)’이라고 불렸던 이곳을 1984년 제방을 막아 만든 곳이 그 이름도 유명한 서산간척지다. 4700만평에 이르는 이 간척지는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한 평씩 소유할 수 있을 만큼 넓다. 현대에서 경작을 주관할 때는 비행기로 볍씨 뿌리고 농약을 쳤고, 도정은 아예 논밭 한가운데 있는 도정공장에서 했다. 자연히 농약오염이 심하지 않은 낙곡(落穀)이 많고, 드나드는 사람이 없는 적요한 곳이었다. 철새들에게는 말 그대로 낙원이었다.

과연 천수만은 새들에게 평안한 휴양지였다. 찾아오는 새의 종류만 해도 290여종이 된다고 하니 말이다. 금잔디 같은 들판 너머로 수백 마리의 새 떼가 은하수처럼 하늘을 쓸고 지나기도 하고, 잔잔한 수면 위에 새 떼가 도도하게 앉아 있기도 한다.

이곳 간척지는 아직 개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새들을 위한 배려다. 이곳에서 10월25일부터 11월 말까지 철새기행전이 열렸다.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많다 보니, 서산시와 환경운동연합, 간척지 농민들이 합심하여 철새기행전을 연 것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투어버스를 운행했다. 투어버스에는 개인용 망원경이 비치되어 있고, 버스가 달리는 동안 구수한 서산 사투리로 새에 대해 설명해주는 도우미도 동승한다.

천수만 위장막에 숨어 철새를 관찰하고 있는 탐조객들(위).안면도 할미바위 너머로 해가 떨어지는 장관을 볼 수 있는 꽃지해수욕장의 낙조.

우리는 간월도 입구에서 떠나는 투어버스에 동승해보았다. 먼 들판에서 야유회를 벌이고 있는 새 떼를 망원경으로 끌어당겨 보려 하지만 시야가 흔들려 쉽지는 않다. 하지만 물가를 지날 때는 숨을 죽여야 할 정도로 새 떼 가까이를 지나가기도 한다. 버스가 일정한 속도로 지나가는 것에는 새들도 면역이 된 모양이다. 그러나 가끔은 강 건너에 앉은 새 떼를 망원경으로 건너다 볼 기회도 있다. 지정된 탐조구역에는 갈대로 만들어진 위장벽이 설치돼 있다. 멈춰 선 버스와 사람들을 가려주는 장치다. 사람들은 이 갈대 위장벽의 구멍에 개인 망원경을 설치하거나, 혹은 탐조지점에 비치된 80배율 망원경을 통해 새를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어린 가창오리 떼 사이에 사람 같기도 하고 산양 같기도 한 시커먼 것이 앉아서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다. 도우미의 설명을 들으니 매가 기러기 한 마리를 잡아먹는 중이란다. 물위에는 가창오리와 기러기가 가장 흔하다. 재갈매기가 간간이 섞여 있고, 붉은부리갈매기들이 물위에 하얗게 떠 있기도 한다. 천연기념물인 큰고니, 멸종 위기종인 노랑부리저어새, 날씬하고 눈부시게 흰 백로, 흰뺨검둥오리, 청둥오리 등도 보인다. 새들은 사람을 천적으로 알고 두려워한다지만, 우리는 1시간 반이 걸리는 이 투어를 통해 새들의 아름다움과 귀함을 느낄 수 있었다.

새들의 낙원인 서산간척지에서 나는 쌀은 저공해 곡식으로 서산의 대표상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새옹지마라 했던가, 새들에게 좋은 모이가 돼주었던 이 쌀로 인해 이제 새들의 휴식처가 훼손될지도 모른다. 간척지가 개인에게 분양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 영농인들이 자기 땅에 들어가겠다고 번다히 출입한다면 새들은 그곳에서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새가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가, 천수만 하늘 위를 까맣게 뒤덮은 새 떼를 보며 잠깐 생각에 잠긴다.

천수만 일대의 대표음식은 이곳에서 나는 쌀과 굴로 지은 굴밥이다. 유명한 간월도 어리굴젓이 미리 밥 위에 올려진 것이다. 쉽게 생굴을 얹은 돌솥밥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이것에 야채와 양념장을 넣고 비벼 먹는다. 쌀과 굴이 좋은 이곳만의 매력적인 음식이다. 대개 충청도 특유의 청국장과 함께 굴밥을 내는 집들이 많은데, 이런 집들은 주말이면 자리가 없어서 한참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소문이 났다.   


진국집의 맛깔스런 찌개들.

천수만에서 서쪽으로 더 나아가면 안면도가 나온다. 굴밥으로 배를 불렸으면 안면도의 소나무숲을 거닐며 산소와 솔향을 흠뻑 들이마시며 소화시킬 만하다. 소나무만으로 이루어진 흔하지 않은 숲에는 들어서는 초입부터 상서로운 향이 가득하다. 산이 전체적으로 편안해서 한가롭게 걸을 만한 숲이다. 이리저리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도 한 시간 안팎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낙엽송 이파리가 떨어져 푹신하고 아늑한 길은 사진 한 방 박기에도 그만이다.

붉어진 해가 소나무 다리 언저리를 물들일 때쯤 서둘러 가야 할 곳이 있다. 이곳은 명색이 서해다. 바다에 떨어지는 해에게 작별인사를 하지 않고 떠날 수야 있나. 안면도의 꽃지해수욕장으로 달려간다. 바람이 비질을 해놓은 듯한 바다에는 해가 이미 붉게 익어 있고, 청한 바다에는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가 마주 서 있다. 운 좋게 날씨가 맑은 날이면 할미섬 뒤로 선명하게 붉어진 노을빛에 한참 취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소나무가 음영을 드러내는 할미섬 가장자리에 걸린 달도 더없이 서정적이다.

주변의 굴밥집서 별미도 만끽

서울 방향으로 향하는 이들이라면 서산 땅에 들러 나그네새처럼 잠시 지친 몸을 쉬며 배를 불려도 좋으리라. 서산의 토속음식인 ‘게국찌’를 하는 곳이다. 게국찌란 이곳에서 담근 ‘꽃게장 국물로 간을 한 김치찌개’다. 김치는 시고 게장은 국물만 남은 봄날, 버리기 아까운 게장 국물에 김치를 썰어 넣고 끓여낸 것이다. 게국찌를 먹기 위해 서산시내 ‘진국집’(041-665-7091)에 갔다.

간판도 쉬 눈에 띄지 않는 뒷골목의 허름한 단층건물인 식당은 그나마 주차장 담벼락에 허리께까지 가려져 있다. 아는 사람만 알고 찾아가는 유서 깊은 집답다. 유리가 끼워진 미세기(두 짝을 한편으로 밀어 겹쳐서 여닫는 문)를 밀고 들어서니 따뜻한 방이 불을 환히 밝히고 손을 맞는다. 이 집의 차림은 딱 한 가지다. 그저 몇 사람이 먹을 것인지만 말하면 그만이다. 이윽고 양은쟁반 가득 반찬이 담겨 나온다. 쟁반 한가운데 놓인 조치 그릇만 해도 네 가지다. 게국찌, 시래기된장찌개, 김치찌개, 계란찜. 거기에 빙 두른 느타리볶음, 각종 나물무침, 파래무침, 도라지오이무침, 콩나물무침, 새우볶음 등등이 푸짐하다. 언뜻 외갓집에 온 듯한 착각이 드는 밥상이다. 게국찌는 짜디짜면서도 웅숭깊은 맛이 난다. 시래기를 가득 넣어 끓인 된장찌개의 구수함이라니, 배가 이미 다 찼는데도 입은 수저를 계속 불러들인다. 밥을 거의 다 먹을 무렵 “이것 좀 먹어봐” 하면서 주인 아주머니가 덤으로 내주는 음식이 돼지뼈를 넣고 끓인 되비지찌개다. 옛날 이야기 같은 맛이랄까. 그 맛에 홀려 밥공기가 이미 비었는데도 자꾸 찌개를 떠먹게 된다. 이쯤 되면 내 생의 한 끼를 이렇듯 따뜻이 먹여준 것에 대해 고마움까지 느끼게 된다.

사람도 철새도 배불려 떠나는 곳이 서산인가! 해 짧은 초겨울, 한나절을 들여 한 나들이로 추억 보따리가 ‘이따만해진’ 느낌이다.

탐조정보
철새기행전은 11월 말로 끝났지만, 지금 천수만에 가면 겨울철새를 구경할 수 있다. 서산태안환경운동연합에 연락하면 그곳에서 운영하는 철새학교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 041-667-3010, 041-669-7744

 

덕포진 교육박물관
학교종 땡땡땡~ 추억 속으로 등교

추억은 힘이 된다. 3학년 2반 교실에서 실제 수업이 이뤄진다. 1970년대 당시 캠페인에 쓰인 리본들.박물관을 운영하는 두 분 선생님이 땡땡이종 아래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위부터)

장담하건대, 이곳에 가면 당신의 추억 한때가 고스란히 모아져 있다. 경기 김포의 바닷가 대곶면 신안리 덕포진 돈대로 이어지는 언덕이 막 시작되려는 즈음에 ‘덕포진 교육박물관’이라는 목재 현판이 보인다. 그곳으로 들어서면 양철 풍향계가 돌아가는 마당에 둘레둘레 장독과 농기구가 둘러서 있고 나무 타는 냄새와 함께 풍금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연통이 삐죽이 고개를 내민 뿌연 유리창에는 ‘3-2반’이라는 하얀 글씨가 보인다. 옛 추억 속의 학교를 옮겨놓은 듯하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자 주번 패찰을 단 교복과 교련복이 눈에 들어온다. 한쪽에는 앉은뱅이 책상과 오래된 책들, 옆에는 ‘아우 책상’이라는 푯말에 사과 궤짝이 책상인 척 옆으로 누워 있다. 우리의 1960년대 방 풍경이다. 옆에는 ‘엄마 아빠 학교 다닐 적엔’이라는 실물 공간이 열려 있다. 바로 3학년 2반 교실이다. 낡디 낡은 책·걸상들, 교실 한가운데 놓여 있는 무쇠 난로, 풍금과 교탁, 기억보다 그것들의 크기가 훨씬 작아서 놀랍지만 20~30년 전에 실제로 쓰던 물건들이다. 양철 연통 틈으로 구수한 냄새를 내뿜는 난로 위에는 양은 도시락들이 포개져 있다. 뚜껑이 헐거워서 그놈의 김칫국물로 가방을 온통 적셔놓던 도시락이 오랜만에 보는 촌스런 소꿉친구처럼 반갑기 그지없다.

 

 

 

 

 

 

가난과 불편도 돌아보면 그리움

금방이라도 다시 메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유년시절의 책가방. 걸스카우트복과 교련복을 입던 시절. 어느 국민학교 복도에 걸렸을 대형 포스터.(위부터)

이곳은 전시만 하는 곳이 아니다. 학생들이 교실에 모이면 시작종이 땡땡 쳐지고 수업이 시작된다. 여선생님이 들어와서 반장을 뽑고 인사를 나누고는 풍금을 울린다. 귀하디 귀해서 음악 수업을 하려면 이 교실에서 저 교실로 옮겨다녀야 했던 풍금은 왜 그리도 작은지. 여선생님이 그 풍금을 울리며 조그맣고 누리끼리한 음악 책을 펼쳐들고 동요를 선창하면 학생들은 따라 부른다. 어쩌다 나이 많은 학생을 만나면 “보리밥 먹는 사람 신체 건강해”로 끝나는 보리밥 예찬가도 함께 부를 수 있다. 노래가 끝나면 남자 선생님의 수업이 진행된다. 수업 내용은 바로 덕포진에서 벌어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관해서다.

30분 정도 진행되는 이 짧은 수업은 관람객이 많을 때는 하루에 7, 8차례도 이뤄진다. 그렇게 수업이 많은 날이면 두 교사의 얼굴은 더욱 밝아진다. 이곳은 그들이 학생들을 계속 만나고 싶어 꾸린 공간이기 때문이다.

덕포진 교육박물관을 꾸민 김동선(63), 이인숙(57)씨는 스무 해 넘도록 초등학교 교단을 지켜온 부부 교사 출신이다. 그러던 1992년 부인 이씨가 교통사고로 시신경을 다쳐 실명하면서 교단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때 남편인 김씨는 약속했다. “걱정 마. 내가 곧 학생들 만나게 해줄게.” 이씨가 마지막으로 맡은 담임반이었다는 3학년 2반은 그렇게 해서 전시 공간과 함께 다시 태어났다. 그후 사재를 다 털어 옛날 학교에서 쓰던 물건들을 사 모으는 일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교실 옆에는 당시 학생들이 쓰던 교과서며 “1973년 10월20일 17시 쥐를 잡자”라고 쓰인 캠페인 리본들, 피구할 때 쓰던 오제미, 크고 작은 주판, 세뱃돈으로 받아 좋아라 했던 500원짜리 지폐까지 있다. 지나간 시절이 와락 품안으로 안겨올 무렵 미니어처로 제작된 60년대 집과 골목 풍경도 만나게 된다. 이곳에 비치할 목적으로 만든 것은 아닌데 전시 공간에 끌어올 수 없었던 당시의 집과 골목, 축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저런 방안에 있다가 댓돌의 고무신을 신고 뛰어나가 저 꼬불꼬불한 골목에서 술래잡기와 공기놀이를 하며 뛰어 놀았다”고 신이 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전시물이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현장인 덕포진.

2층은 ‘교육자료 100년 전’이라는 상설 전시관이다. 입구에 서당 풍경을 재현해놓은 2층 전시관에는 멸공, 승공 등 그 시대의 교육이념과 굵직한 교육정책의 변화 등이 시대별로 잘 정리되어 있다. 빽빽이 들어앉은 전시물들 틈에는 일제시대 교육자료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3층에 이르면 농경문화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요즘 아이들은 학교 갔다 오면 학원에 가기 바쁘지만 당시에는 “동생 업고 밭에 나가 봐라. 오늘은 콩밭 매는 날인데 무신 학교를 가노?” 하던 시절이었다. 필통과 몽당연필말고도 추억의 농경문화가 있었다. 3층 전시장에 마련된 농기구들의 규모는 그러나 추억의 구색 맞추기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바람을 이용해 곡식의 쭉정이·먼지 등을 가려내던 풍구에서부터 아궁이에 불을 피울 때 쓰던 손풍구, 염전에서 물을 끌어들이던 물레방아처럼 생긴 무자위, 병아리를 가둬 기르던 어리와 천렵 도구 통발, 요즘의 핫팩처럼 안에 뜨거운 물을 넣어 몸을 따뜻하게 하는 데 쓴 유담뽀, 오줌장군, 인두 등 다양한 농기구와 생활용구가 전시장을 메우고 있다.

그리고 덕포진 교육박물관에서는 해마다 특별 기획전이 열린다. 2004년에는 옛날 사진전이 열릴 계획이다. 지난 시절의 우리를 또 만날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전시 공간 한쪽에 수수께끼와 속담에 나오는 옛날 물건들을 전시할 계획이다. ‘호미로 막을 것 가래로도 못 막는다’의 가래와 호미,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의 솥뚜껑이 실물로 전시되는 재미있는 기획이다.

덕포진 교육박물관에 가면 지난날의 가난이나 불편함도 추억이 된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리라 여겼던 유년의 교실로 돌아간 긴 꿈을 꾸는 것도 같다. 또 덕포진에서는 옛 스승을 만난 듯하다. 김포 땅 손돌목 바닷가 덕포진에 그리워할 곳이 또 하나 늘었다.

여행 메모
찾아가는 길 | 올림픽대로를 타고 김포-강화 방면으로 진입, 48번 국도를 타고 김포로 들어가 누산삼거리에서 좌회전한다. 덕포진-대명리 방면인 352번 도로를 타고 직진, 초지대교를 1km 앞두고 우회전한다. 선박 모양의 레스토랑이 보이는 삼거리에서 덕포진 표지판을 보고 들어가면 덕포진 교육박물관이 나온다. 박물관에서 100m 더 가면 덕포진 돈대가 나온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송정역(5호선 지하철)에서 내려 양곡행 버스(6번)를 탄다. 양곡에서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덕포진 입구에서 내려 걸어간다.
이용 요금 | 어른 2000원, 어른 단체 1500원, 청소년 1500원, 유치원 단체 800원, 어린이(5세 이상) 1000원
전화번호 | 031-989-8580
개관시간 | 오전 10시∼오후 6시30분


 

참숯가마 찜질방
불꽃은 이글이글, 땀 송송 “어~ 시원타”

숯가마 안에서 찜질하는 사람들.

뜨뜻한 구들장이 그리워지는 날들이다. 길은 빙판이고, 바람은 매서워 집을 나서면 그 순간부터 고생길이다. 만약 이런 날 길을 나선다면 온천이나 찜질방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겨울이라 운동량도 부족해 찌뿌드드한 몸도 풀 겸 숯가마 찜질방에 가기로 했다. 길이 미끄러워서 고속도로 나들목에서 가까운 숯가마로 정했다. 내가 찾아간 곳은 영동고속도로 새말나들목에서 빠져나와 안흥 방면으로 10분쯤 가면 나오는 횡성군 우천면 오원3리의 경원참숯가마다.

참숯가마 굴뚝에서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참숯가마 대표인 박영환씨(60)는 뇌출혈로 두 번이나 병원 신세를 졌던 이로, 방바닥에 5cm 높이까지 참숯을 깔고 생활하면서 참숯 효과를 체험했다. 그래서 참숯 효과에 대해서는 더 물을 필요도 없다 싶었는데, 그이가 “숯가마 근처로 암 환자 한 사람이 이사 왔는데 숯가마를 드나든 뒤 건강을 회복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인부들이 긴 쇠꼬챙이로 숯가마에서 숯을 꺼내고, 하얀 면바지에 면티를 입은 찜질객들이 숯가마 주변을 기웃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나 그들은 신기해서 보는 게 아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숯불의 기운을 쐬기 위해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작업반장은 숯에서 나오는 불기운이 몸에 좋다며, 나더러 가까이 와 불을 쪼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예전 여자들이 자궁암에 걸리지 않았던 이유가 물론 그때는 자궁암을 진단하는 방법이 없기도 했지만 아궁이에서 불을 땠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숯가마 모습.

숯을 꺼내는 가마 옆 빈 가마는 찜질방으로 이용되었다. 숯가마 입구의 높이는 어른 한 사람이 고개를 약간 숙이고 들어갈 정도. 가마 안쪽 벽면에는 황토가 발라져 있고 천장까지의 높이는 2m쯤 되었다. 그리고 공간은 10명 가량이 넉넉하게 앉을 수 있는 정도였다.

옷을 갈아입고 숯가마에 들어가 보았다. 보통 찜질방에서는 하얀 면바지와 면티를 입고, 하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다. 되도록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찜질하는 게 좋지만 너무 뜨거운 열에 화상을 입을지 모르기 때문에 옷을 입고 수건을 걸치는 것이다. 그런데 면으로 된 흰색 옷을 입는 이유는 그것들이 숯가마에서 나오는 원적외선이 가장 잘 스며드는 소재와 색깔이기 때문이란다.

숯가마에 참나무가 가득 쟁여지면, 불을 때서 가마 속의 온도를 400~700℃로 높인 다음 구멍을 막고 일주일 정도 불기운을 유지한다. 흑탄(또는 검탄)은 여기에서 일주일을 더 끈 뒤 불기운이 완전히 잦아들었을 때 손으로 꺼내는 차가운 숯이다. 백탄은 일주일이 지나면 곧바로 가마에 구멍을 내고 공기를 통하게 해 숯가마 온도를 1000℃ 이상으로 높여 이른바 ‘뜸을 들였다가’ 꺼내는 뜨거운 숯이다. 요사이 숯가마에서 만드는 숯은 대부분 겉에 흰 재가 묻어 있는 백탄이다. 백탄을 굽는 숯가마라야 숯 찜질도 가능하다.   


숯가마에서 숯을 꺼내는 모습(위).트럭으로 참나무 장작을 나르는 모습(아래 왼쪽).숯가마의 열을 이용해 3초 삼겹살구이를 하고 있다.

숯을 꺼낸 지 이틀이 지난 숯가마에 들어가 보았다. 얼굴이 따가울 만큼 뜨겁지는 않았다. 먼저 숯가마에 들어와 앉아 있던, 인천에서 온 한 아주머니가 ‘하탕’에 속한다고 친절하게 말해준다. 일반적으로 찜질방이나 숯가마는 내부 열기에 따라 꽃탕, 중탕, 하탕으로 구분한다. 꽃탕은 옆사람과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뜨거운 방으로 거적때기를 뒤집어써야 찜질이 가능하다. 그래도 1~2분쯤 있다가 밖으로 나와야 한다. 꽃탕에 들어가면 관절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마디마디가 쑤시고 얼룩이 지면서 그 부위에 꽃무늬가 생긴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아픈 관절이나 뼈마디에서 꽃바람이 빠져나오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래서 꽃탕이라는 이름도 생겼다. 꽃탕이 하루쯤 지나면 중탕이 된다. 중탕이 다시 하루쯤 지나면 하탕이 된다. 내가 들어간 곳이 바로 그 하탕이었다. 그래서 내일 꽃탕이 열릴 때 다시 와야겠다며 돌아가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하탕이라고 무시할 것은 못 된다. 열이 강하지 않으면 숯가마 안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고, 바깥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면 된다. 나는 찜질방에 익숙한 체질이 아니어서, 숯가마 안에 30분쯤 있어도 땀이 나지 않았다. 땀구멍이 열리지 않고, 오히려 피부가 바삭바삭 더 말라갔다. 맞은편에 앉은 뚱뚱한 여자가 자기는 숯가마에 세 번째 왔을 때 비로소 땀구멍이 열렸다고 했다. 몸이 숯가마 찜질방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 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한 것은 40~50분이 지나고 나서부터였다. 몸속에서 열 기운이 느껴지면서, 얼굴과 등에 땀이 배어났다. 그런데 묘하게 숯가마 안이 뜨거운데도, 그리고 천으로 입구를 가려놓았는데도 가슴이 답답하지 않고, 숨이 막히지 않으며, 머리도 아프지 않았다. 사우나나 찜질방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이었다. 그리고 숯가마에서는 달걀이 노른자위부터 익는다고 했다. 달걀을 삶으면 당연히 흰자부터 익는다. 그런데 숯가마에서 노른자위부터 익는 이유는, 원적외선에서 발생하는 복사열이 달걀 속으로 침투해 속에서부터 익혀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마에 구워먹는 삼겹살도 별미

숯가마가 일반 사우나와 크게 다른 점은 바로 이 원적외선에 있다. 원적외선은 피부의 겉면을 달구는 게 아니라, 피부 속의 온도를 높여 혈액순환을 촉진하고 땀을 흘리게 한다. 한 보고에 따르면 원적외선은 일반 열보다 80배나 깊숙이 피하층으로 스며든다고 한다.

숯가마 안에서 20분쯤 있다가 2~3분 밖에 나와 있기를 세 번쯤 반복하고 나서 다시 숯가마에 들어가니, 마치 따뜻한 공기로 된 옷을 입고 있는 듯했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데, 황토 숯가마의 기운이 내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기도 했다. 옆에 앉은 50대 중년 부인은 ‘숯가마는 종합병원’이라고 했다. 뜨거운 기운을 속으로 들이켜면 풍치의 통증이 가라앉고, 숨을 들이마시면 칼칼한 목이 터지며, 뿐만 아니라 관절에 좋고 부인병에도 좋으니 내과, 산부인과, 치과를 모두 옮겨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참숯가마 찜질방 경원참숯/ 강원 횡성군 우천면 오원3리/ 033-342-0413
횡성 강원참숯/ 강원 횡성군 감천면 포동리/ 033-342-4508
제일참숯/ 강원 원주시 소초면 흥양리/ 033-732-5761
신림참숯/ 강원 원주시 신림면 구학리/ 033-763-9070
태백참숯/ 강원 영월군 상동읍/ 033-373-3037
박달대참숯/ 충북 제천시 봉양읍 명도리/ 043-651-6604
백운참숯/ 충북 제천시 백운면 모정리/ 043-651-6604
가야참숯/ 경북 성주군 가천면/ 054-931-0931

또 한 가지 유별난 점은 숯 찜질하는 동안 흘린 땀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탈취 효과가 있는 숯이 태어난 방이어서일까, 그 이유는 딱히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숯가마 찜질을 하고 나면 목욕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경원참숯가마에서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은 참숯을 꺼내는 동안 벌겋게 달아오른 삽에 삼겹살을 올려놓고 가마 안에 3초쯤 두었다가 빼내서 먹는 삼초구이다. 삼겹살이 고온에서 순간적으로 익으면서 기름이 빠지는데, 고기가 타지 않고 찰지게 구워진다.

하탕에는 어린아이들도 들어갈 수 있어 가족이 함께 오면 좋은데 특히 노부모를 모시고 오면 더욱 좋다. 면티나 면바지를 준비해가면 탈의실에서 갈아입을 수 있다. 옷을 빌리면 2000원이고, 숯가마 이용료는 3000~5000원. 경원참숯가마는 오후 8시까지 운영하는데, 다른 업소 중에는 오후 5시30분까지 운영하는 곳도 있으니 미리 확인해보고 찾아가는 게 좋다.

 

인천 차이나타운
세월 멈춘 골목 왕서방 그림자

경인전철 종착역인 인천역에서 내리면 만날 수 있는 패루 중화가(큰 사진). 패루를 지나면 차이나타운 거리가 나온다. 한국판 자장면의 본산지인 공화춘.

중국에도 자장면이 있을까? 원래 자장면은 우리 입맛에 맞게 변형된 중국 음식이라는데, 과연 정말 그럴까? 수수께끼도 풀 겸, 중요한 이웃으로 급부상한 중국도 만날 겸 해서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은 외국의 문물과 문화가 흘러 들어온 거대한 근대의 창구다. 그 물결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전통과 만나 충돌하고 섞이면서 근대사에 족적을 남겼다. 그 가운데 중구는 개항의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차이나타운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중국인 거리로 들어서는 세 개의 길목에는 키 큰 패루가 세워져 있다. 자유공원 아래 가장 북쪽의 선린문을 가운데로 하여 왼쪽 발치께의 인천역 앞과 마주한 것이 제1패루, 오른쪽 월미주유소 앞에 서 있는 것이 제2패루다. 제1패루와 제2패루 모두 이름은 ‘중화가’이다. 여행은 제1패루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복래춘에 쌓여 있는 월병 더미(위). 풍미에서 중국요리를 먹고 있는 사람들.

중국인 거리에 들어서면 우선 중국풍의 붉은 빛이 많다. 길에도 붉은색이 화려하게 칠해져 있고 금색 용이 돋을새김되어 있는 붉은 가로등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언덕길을 쭉 오르면 붉은 건물이 새로 들어서고 있다. 거기에서 왼쪽으로 돌면 긴 석조 계단이 보인다. 산을 계단처럼 깎아 만든 길 위에 집들이 있는데, 길들은 아직도 난간을 흔적처럼 갖고 있다. 다섯 개의 층개참마다 이루어진 길들 때문에 이 길의 이름은 층층길이다. 이곳 층층길을 올라가는 석조 계단은 풍물거리로 조성되고 있다. 길 끝에는 선린문(善隣門)이 있다.

다시 삼거리로 나와 왼쪽으로 내려가면 자장면 골목이 나온다. 이 골목 깊숙이 들어서면 사거리가 나타나는데 그 사거리를 오른쪽으로 꺾어 내려가면 수수께끼 같은 자장면의 실체를 만날 수 있다. 공관처럼 네모지고 퇴락한 건물에 ‘공화춘’이라는 낡디낡은 간판이 붙은 이곳이 바로 한국판 자장면의 본산지다.

자장면은 부두 노동자들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청국 상인들이 만들어낸 음식이다. 본토의 콩으로 만든 노란 자장면과 달리 캐러멜을 넣은 춘장을 볶아 국수와 비벼 낸다. 자장면의 ‘자’는 볶는다는 뜻의 ‘작(炸)’에서 유래했다.

아쉽게도 공화춘은 이미 오래 전에 문을 닫았다. 하지만 이 일대의 음식점들은 다 청국 상인들이 만들어낸 원조의 맛을 낸다. 그중에는 공화춘 주방장이던 사람이 차린 음식점도 있다. 공화춘과 등을 대고 서 있는 ‘풍미’가 바로 그곳이다. 풍미에서는 양장피와 마파두부, 탕수육, 화권, 자장면으로 이루어진 코스메뉴를 3만원(2인분)에 먹을 수 있다. 유산슬과 오향장육, 고추잡채, 화권, 자장면으로 된 코스도 같은 가격이다. 자장면은 3000원.

이제 중국인 거리를 슬슬 걸어볼 차례다. 이곳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고 멈춘 듯 지난날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화려한 가로등과 붉은색으로 칠해진 길, 세월 속에 적막하게 늙어간 이국 풍정의 집들, 틈처럼 보이는 옹색한 골목길, 창틀과 벽까지 한 가지 색으로 칠해버린 50, 60년 전의 시멘트 가옥들은 우리의 가난한 지난날 풍경 같기도 하다.   


 

 

 

자장면 냄새 이국 분위기 물씬

1899년에 지어진 일본제일은행 건물에 들어선 월미관광특구 홍보관(왼쪽). 자유공원 누각에서 내려다본 모습. 붉은 지붕이 화교중산학교다.

인천 중구에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일본과 청국인들이 지은 근대 건물 79채가 지금도 남아 있다. 차이나타운의 두 번째 패루에서 기호신문사 맞은편 길로 들어서면 지붕에 초록색 돔을 인 단층 석조 건물을 만난다. 월미관광특구 홍보관이라는 현판이 보이는데 원래는 일본제일은행 건물이다. 후기 르네상스 건축 양식으로 1899년에 세워진 것이다. 이렇게 지은 지 100년이 지난 건물도 4채가 넘는다. 고즈넉이 낡은 풍정을 보여줄 뿐 아니라 역사를 증언하고 있기도 한 건축물들이다.

풍미 맞은편 길로 들어서면 제2패루가 내려다보이는 길과 만나는 사거리가 나타난다. 한쪽 길은 석등을 양편에 거느린 석조 계단이다. 계단 초입에 기념비가 서 있다. 석조 계단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해 인천시가 세운 것이다. 계단은 일종의 국경선이었다. 이를 중심으로 왼쪽은 ‘청관’이라 불리던 중국인들이 살던 조계지였고 오른쪽은 일본인들이 살던 조계지였다.

조계지란 외국인들이 임대하여 집단 거주했던 치외법권지역이다. 1883년 인천을 개항시킨 일본이 이 지역에 자리잡자 이듬해 중국도 중국 조계를 만들면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다. 이들 조계지가 1910년 경술국치 때까지 30년 가까이 지속되는 동안 중국인들도 우리 땅에서 상권을 쥐고 번창했다.

이 석조 계단을 사이에 두고 왼쪽으로는 나무 덧문이 달리고 이층의 주랑 안쪽으로는 외닫이문이 있는 중국식 가옥이 보인다. 화교협회 건물이다. 오른쪽에는 바둑판 같은 격자무늬 창이 툭 튀어나와 있는 전형적인 왜식 가옥이 있다.

계단 공원 위로 올라가면 공자상이 나타난다. 이 공자상을 내려다보는 존재가 있는데, 공자상 위의 응봉산에 자리잡은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이 그것이다. 자유공원은 산책길이 잘 가꾸어져 있어 사람들로 북적댄다. 망루에서 내려다보면 인천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인천역 뒤 엄청난 크기의 범선들 너머로 바다가 펼쳐져 있다. 이곳 자유공원에는 한·미 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있다.

개항 후 일본과 중국뿐 아니라 미·영·러·독·불 등의 나라도 인천에 자기들의 지계(地界)를 만들어 만국지계 시대를 열었다. 이리하여 이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만국공원이 들어선다. 만국공원은 한국전쟁 후 맥아더 동상이 세워지면서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자유공원에서 차이나타운을 내려다보면 중국에서 일본, 서구 열강과 미국 등 차곡차곡 쌓인 우리 속 외세의 역사가 보인다.

자유공원에서 내려갈 때쯤 살짝 입이 궁금하다 싶으면 들를 만한 곳이 있다. 공자상이 있는 공원으로 내려가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화교중산학교 앞에 온통 붉고 화려하게 외장을 꾸민 과자점 ‘복래춘’이 보인다. 한국 땅에서 3대째 과자점을 하고 있는 이곳에 가면 월병과 공갈빵, 찹쌀과자 등을 사 먹으며 다리를 쉴 수 있다.

현재 500여명의 화교가 살고 있는 차이나타운은 퇴락한 데다 개발 바람에 밀려 역사적 의미가 있는 건물마저 많이 훼손된 실정이다. 인천에서는 뒤늦게나마 이곳과 중구 일대의 역사 자원을 보존할 계획에 있다.

우리는 중국과 과거 파란만장했던 역사와 전혀 다른 새 역사를 열어가려 하고 있다. 곧 차이나타운의 붉은 등이 휘황하게 빛나고 닫힌 문들을 열어젖힌 청국인들이 현재진행형의 중국을 보여줄 것이다.

찾아가는 길
1호선 지하철 인천역에 내리면 길 건너편으로 ‘중화가’라고 적힌 제1패루가 보인다.
패루로 들어서면 차이나 타운이다.
차로는 신포동에서 오다 보면 올림푸스호텔 조금 못미처 월미주유소가 보인다. 주유소 앞에 제2패루가 있다.
전화번호 : 풍미 032-772-2680/ 월미관광안내소 032-765-4169

 

한지 만들기
“우리 가족 모두 제지 기술자 돼볼까”

종이의 역사 및 제작과정을 보여주는 박물관 전시실.

전주에 한지(韓紙) 만들기 체험장이 있다. 1997년부터 한솔제지가 운영했는데, 한솔제지 공장이 팬아시아페이퍼코리아로 넘어가면서 팬아시아종이박물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팬아시아페이퍼코리아는 신문용지를 전문으로 만드는 회사인데, 종이박물관은 그 회사 안에 있다. 박물관 2층에서는 동굴벽화에서 점토판과 파피루스를 거쳐 양피지와 종이에 이르기까지, 기록문화의 역사를 영상자료로 보여준다. 그리고 종이로 된 전시품들이 많이 진열돼 있다. 과거시험 합격을 통보해주던 교지, 겸재 정선의 부채수묵화, 국보 제277호 대방광불화엄경 영인본, 종이로 만든 소반, 종이를 물에 풀어 만든 호랑이 베개 등이 전시돼 있다. 종이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이뤄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박물관 1층에는 한지 만들기 체험관이 있다. 한지가 만들어지는지 모든 과정이 도구들과 함께 전시돼 있다. 그리고 직접 물에 풀어헤쳐진 닥나무 껍질 조직을 떠서 한지를 만드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아산 한올중학교 교장선생님이 교사 두 명과 함께 체험관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수학여행 사전 답사로 순천 낙안읍성과 화순 고인돌공원을 갔다가 종이박물관에 들른 참이었다. 지장(紙匠) 김태복씨(58)가 그들을 안내했다.

닥나무 재료 이용 손쉽게 ‘뚝딱’

김씨는 15살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한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전북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 학동부락에서 한지를 만들었다. 옛날에는 한지를 소규모로 만들어 사용했다. 모두가 직접 만들지는 않았고,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한지를 만들어 그것을 가져다 썼다. 한지를 만들려면 물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강이나 냇가에서 작업했다. 한지는 닥나무 껍질로 만드는데, 잎이 다 진 12월에서 1월 사이에 닥나무 밑동을 베다가 쓴다. 그리고 여름에는 닥풀(황촉규)이 쉽게 삭기 때문에 겨울 농한기 때 주로 한지를 만들었다.

김씨의 소개를 받으며 종이체험관의 한지 만드는 도구들을 살펴보았다. 한지의 재료는 닥나무 껍질이다. 껍질을 쉽게 벗기기 위해 큰 화덕에 돌을 쌓고 달군 다음 그 돌에 물을 뿌린다. 그러면 화덕의 옆면에 뚫린 구멍으로 수증기가 나오면서 동네 목욕탕의 욕조만한 통에 담긴 닥나무가 쪄진다. 껍질에서 거무죽죽한 겉껍질을 벗겨내고, 백피(白皮)만 남긴다. 이 백피를 건조대에 걸어 말린 뒤 가마솥에 표백제인 잿물과 함께 넣고 삶는다. 삶은 백피를 평평한 닥돌 위에 올려놓고 몽둥이로 두들긴다. 이것이 한지 만들기에서 가장 힘든 대목인데, 돌과 방망이가 부딪쳐 딱딱 소리가 나도록 2~3시간 동안 두들긴다. 그 충격으로 손이 붓고, 겨울철 작업이라 손등이 얼어터진다. 그 다음 백피를 물에 풀 때 서로 뭉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풀뿌리인 닥풀 즙을 준비한다.

여기까지가 한지를 만들기 위한 재료 준비 과정이다.   


① 닥나무를 찌기 위한 화덕(축소판). ② 껍질을 벗겨 백태를 만든다. ③ 백피를 두드려 조직을 연하게 만든다.

④ 닥나무 껍질이 풀어진 물을 떠서 10초 가량 열심히 흔들어야 반반한 종이가 만들어진다. 종이 뜨기 시범을 보이고 있는 지장 김태복씨.

⑤ 뜨거운 철판 위에서 한지를 말린다.

이제부터는 일반인이 체험할 수 있는, 한지 뜨기 과정이 시작된다. 잘 다진 백피를 커다란 사각 지통(紙)에 담고 물과 닥풀 즙을 넣는다. 이때 지통에 담긴 백피가 구름처럼 물에 둥실둥실 뜨게 된다.

물에 풀어진 백피를 가는 대나무 살로 만든 채로 떠내는데, 장인 김씨가 사용하는 뜰채는 양팔을 벌려 잡을 수 있을 만큼 넓고 길다. 물에 풀어진 백피의 양에 따라 물을 많이 뜨기도 하고 적게 뜨기도 하는데, 여기서 실력 차이가 난다. 채로 물을 떠서 예닐곱 번 좌우로 흔들고 나면 물이 빠진다. 그러면 채를 뒤집어 백피 조직을 덜어낸다. 이를 낱장씩 햇볕에 말리면 한지가 완성된다.

장인이 전지 크기만한 한지를 만들면, 일반 체험자는 A4 용지 크기만한 한지를 만든다. 한지 크기만 작을 뿐 만드는 방법은 같다. 대나무 살이 깔린 사각통에, 물에 풀린 백피를 떠낸 다음 열심히 좌우로 흔든다. 그러면 물이 옆으로 튀겨나가고 밑으로 빠지면서 채에 풀린 백피가 골고루 얹히게 된다. 10초 정도 흔든 다음 물을 따라내고 채에 얹힌 한지를 걷어낸다. 한지를 걷어내는 방법은 바닥에 마른 한지를 놓고 그 위에 채를 엎은 다음 채를 걷어내면, 새 한지가 마른 한지에 얹히게 된다. 체험장에서는 직접 만든 한지를 바로 가져갈 수 있도록 흡착기로 수분을 빨아들이고, 뜨거운 철판에서 한지를 건조한다. 실제 지통에서 물을 떠내 한지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5분 정도다.

종이를 풀어서 만든 조선시대 호랑이 모양의 베개.

이렇듯 옛 사람들은 냇가나 강가에 화덕과 지통을 마련해두고 한지를 만들어 썼다. 그 과정을 담은 옛 사진들이 체험관에 걸려 있다. 어린아이들도 따라 나와 닥나무 껍질을 벗기고, 화덕 옆에 물웅덩이와 수초가 보이는 사진들이다. 옛 사람들은 필요한 물건을 자급자족하면서, 그 물건의 소중함도 함께 체득하며 살았다. ‘선비는 종이를 아껴야 한다’는 얘기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종이박물관에서 한지를 만들고 나면, 한지가 천처럼 질기고 짱짱한 이유를 알게 된다. 한지는 뜰채로 두 번 작업해서 두 장의 종이를 합친 것이다. 문풍지로도 사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공정이었다.

이렇게 한지 공정을 마친 한올중학교 교장선생님은 “기대를 하고 왔는데, 기대보다 훨씬 좋네요. 무료이고 사립박물관이라 낮춰보았는데, 학생들에게도 유익하고, 학생들도 좋아할 것 같네요. 이번 수학여행 여정에 꼭 넣어야겠어요”라고 했다.

팬아시아종이박물관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 소재/ www.papermuseum. co.kr/ 063-210-8103/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5시/ 월요일 휴관/ 관람료 무료/ 20명 이상이 한지 체험을 하려면 예약.

 

천문대
별자리 찾아 밤하늘로 출발!

천문대에 온 학생들이 불곡반사망원경을 보고 있다(큰 사진). 야외에서 천체를 관측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두 곳의 국립천문대가 있다. 별 관측하기 좋은 곳(대기가 맑은 높은 산)에 자리잡은 소백산천문대와 보현산천문대다. 하지만 전문연구기관인 두 곳은 일반인이 이용할 수 없다. 다만 제한된 낮 시간에 천문대 시설과 장비만을 관람할 수 있다. 그러니 밤하늘의 천체를 관측하려면 천생 시립이나 사설 천문대를 찾아가야 한다. 현재 일반인에게 개방되는 천문대는 10여곳에 이른다. 그중 한 곳인 여주 세종천문대를 찾았다.

세종천문대는 여주청소년수련원 안에 있다. 학생들이 단체로 많이 이용하는데, 천문대 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교사들에게서 호평받는 곳이다. 수련원 건물 4층에 천문대 시설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무게 3.5t에 지름 66cm짜리 불곡반사망원경이었다. 불곡은 조선 세종 때 천체관측기구인 ‘혼천의’ 제작에 관여한 이천 선생의 호다. 국내에서 제작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지름이 큰 반사망원경이다.

저녁식사를 한 뒤 천체 학습과 관찰이 시작됐다. 천문대장 김영진씨(30)가 안내를 맡았다. 먼저 컴퓨터 프로그램인 ‘Starry night pro’를 통해서 별자리 시간여행이 시작됐다. 개기월식이 벌어지는 올 5월5일로 미리 가보고, 1000년 뒤인 3004년의 밤하늘도 볼 수 있었다. 1만2000년이 지나자 북극점이 직녀성 부근으로 움직이고, 2만6000년이 지나자 북극점이 다시 지금의 북극성 자리로 돌아왔다. 순식간에 2만6000년 동안 별자리 여행을 한 것이다.

그 다음 천문대장이 안내해준 곳은 천체투영관이었다. 천문대마다 있는 축소판 밤하늘이다. 천체투영관은 천문대를 찾는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공간이다. 세종천문대를 만든 홍영광 대표(52)는 학창시절 세종문화회관 앞에 있던 천체투영관에서 보았던 별자리가 너무 환상적이어서 천문대를 갖고 싶다는 꿈을 꾸었고, 결국 이를 실현해냈다고 말한다. 투영관의 불이 꺼지자 천장에 무수한 별들이 떴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별들이 좀더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하늘은 그야말로 별천지다. 4등성 이상의 별 500여개가 떠 있었다. 원형 돔이 지구가 자전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돌아가자 내 몸이 먼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가상의 천체와 축소판 밤하늘을 보고 난 뒤 망원경이 설치된 옥상에서 밤하늘을 직접 관찰했다. 개폐식 지붕이 있는 옥상에는 20배율에서 200배율에 이르는 쌍안경, 굴절망원경, 반사망원경이 쇠기둥에 고정돼 있었다. 버튼을 누르자 천장이 열리고 밤하늘이 드러났다. 반달이 떠 있어서 하늘은 밝은 편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별은 선명하지 않았다. 저녁 8시30분, 서쪽 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 금성이었다. 올 봄은 행성을 관찰하기 아주 좋은 시기란다. 통상 동시에 한두 개의 행성을 볼 수 있을 뿐인데 올 봄에는 동시에 5대 행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수성은 이미 지고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태양의 궤적을 따라 일직선으로 서 있었다. 망원경을 목성과 토성에 고정시켰다. 조작 버튼이 많아 초보자는 망원경을 고정하기가 어렵다. 고정된 망원경에 눈을 대니 목성이 선명하게 보인다. 목성은 태양계에서 가장 큰 행성이다. 그런데 목성 옆에, 작은 액세서리 같은 별 4개가 줄줄이 서 있다. 목성을 도는 위성이다. 망원경을 만들어 최초로 천체 관측을 시도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가 처음 발견했다고 해서 ‘갈릴레오 위성’으로 불리는 것들이다. 400년 전에 갈릴레오가 본 별을 한심하게도 나는 이제야 본 것이다.

토성을 바라보니 반지 같은 둥근 고리가 둘려 있다. 토성은 태양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성이다. 행성의 이름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외우면서 책에서 보았던 모양 그대로다. 둥근 고리는 얼음조각과 먼지로 구성돼 있다고 한다. 현재까지 발견된 토성의 위성은 31개라는데, 망원경으로 보이는 위성은 1개뿐이다.   


책 속의 행성들이 바로 눈앞에

직시관측법으로 태양을 살피고 있다.투영관측법으로 나타난 태양의 흑점.투영관측법을 통해 모인 빛으로 종이를 태우고 있다(왼쪽부터).

천체망원경으로 직접 별들을 관측하니, 하늘에 점점이 흩어져 있던 무심한 별들이 비로소 내 안에서 따뜻한 생명을 얻게 된 것 같다. 잠자리에 누우니, 목성과 그 위성들은 보석목걸이처럼 빛나고 토성은 신기한 비행접시처럼 여겨졌다.

천체 관측은 밤에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이튿날 아침을 먹고 나서는 태양 관측이 이뤄졌다. 태양은 낮에 관측할 수 있는 유일한 천체다. 태양 관측은 필터를 끼우고 직접 바라보는 직시관측법과 망원경에 맺힌 상을 하얀 판에 비춰보는 투영관측법이 있다. 하얀 판에 비친 태양에서는 잡티 같은 3개의 흑점이 관찰됐다. 그런데 조심할 점은 투영관측법을 할 때 빛이 나오는 렌즈를 직접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종이를 갖다대면 금방 연기가 날 정도로 강렬한 빛이 나오기 때문에 거기에 눈을 가까이 대면 자칫 실명할 수도 있다. 직시관측법으로 태양을 살펴보니 필터색 때문에 태양이 황도(黃桃) 빛깔을 띠었다. 흑점은 역시 3개였다. 태양의 둥근 외곽선이 아주 깔끔하고 완벽한 곡선을 이루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태양 관측을 하고 나면 천문대의 체험여행은 끝이 난다. 그러나 하늘 위의 별과 태양만 보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은 아니다. 과거로부터 전송되어온, 몇 억 광년 떨어진 별들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 100년 세월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자인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내가 중심이 되어 거대한 천체를 떠받들 듯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시린 일인지도 깨닫게 된다.

천문대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꼭 오고 싶은 우주의 중심이다.

 

여성생활사박물관의 염색 체험
빨랫줄에 휘날리는 ‘色다른 감동’

염색 체험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이 천에 황토염색을 들이고 있다(위).채현 천연염색전시관에 전시된 다양한 빛깔의 염색천들.

경기 여주 땅에 가면 폐교를 리모델링해 세운 박물관이 있다. 여주군 강천면 굴암리에 있는 여성생활사박물관이 그곳. 박물관은 높으면서도 오목한 지형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야생초 하나, 잡초 하나 뽑지 않는다는 이곳 마당에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기운이 감돈다.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마당 끝에는 훤칠한 소나무들이 시원스럽게 서 있다. 겉으로 봐서는 시골 학교 그대로인데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사뭇 달라진다. 교실 문 대신에 한옥 대문이 달려 있다. 학교 외벽의 철제 창은 그대로 두었는데 실내에는 창문마저 모두 한옥의 띠살문으로 바꿔놓았다. 벽을 한 겹 새로 댄 것이다. 이것부터 일단 예사롭지 않다.

1층 전시장 왼편부터 둘러본다. 전통 차를 마시는 다실이 있다. 전통 다기들부터 시작해서 한국 작가들의 요즘 작품과 외국의 다기들까지 전시돼 있다. 이곳에서 다도 체험과 다도 교육이 이뤄진다. 오른편은 전통염색 전시관으로 시작된다. 천장을 조각보를 붙여 꾸민 이곳에는 130여 가지 천연의 빛깔을 띤 천들이 전시돼 있다. 복합염을 한다는 이민정 관장이 만든 것이다. 무척 고급스런 문화 향기가 느껴지는 전시장이다.

여성생활사와 관련한 전시물은 2층에 따로 마련돼 있다. 이곳에는 옛날 복식에서부터 온갖 반닫이와 삼층장, 옷장은 물론 물레나 베틀, 가마, 요강단지, 골무, 비녀, 화잠, 화관, 다리미, 댕기, 그리고 곱돌 주전자와 곱돌 약멧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전시물은 보존 상태도 좋고, 깔끔하게 정돈돼 있다. 이곳의 바닥은 짙은 밤색 목재로 돼 있으며 천장은 광목천을 교직하듯 엇갈려 짜 올렸다.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이다. 이쯤에 이르면 솔직히 서울 중앙통의 박물관과 견주어도 만만치 않은 미적 자존심을 읽을 수 있다.

박물관을 돌아본 뒤에는 황토염색을 체험할 수 있다. 시골에서 살기 위해 전통 염색을 배운 지 열다섯 해가 되었고, 여주는 흙이 좋아 오게 됐다는 이관장에게서 직접 염색을 배운다. 이관장은 채현천연염색연구소도 운영하고 있다.

황토염색은 흙을 채취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황토는 산에서 채취하는데, 입자가 가는 붉은 진흙이면 더욱 좋다. 채취한 황토를 굵은 체로 치고, 다시 가는 체로 열 번 정도 반복해 쳐서 밀가루보다 곱게 걸러낸다. 이 황토가루에 물을 부으면 황토염료 준비는 끝난다. 여기에 준비해간 흰색 면 티셔츠와 수건을 넣어 주물러준다. 30~40차례 빨래하듯 주물러 황톳물이 잘 배이도록 한다. 이 황톳물은 꼭 죽 같다. 부드럽고 입자가 고와 흙 알갱이가 전혀 만져지지 않는다. 뻘밭에서 장난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다 주무른 뒤에는 꼭 짜서 햇빛에 말린다. 농도가 진한 황톳물이 마르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다 마른 뒤에는 다시 담가서 주무르고 또 말리는데, 이런 과정을 열 번쯤 해야 황톳물이 제대로 든다. 마지막으로 말린 것을 소금물(소금이 매염제 역할을 한다)에 넣어 끓이면 염색이 안정된다. 그 뒤로 몇 번 입으며 세탁하는 동안 약간 물이 빠지면서 드디어 실내에서는 옅은 황토빛이고 해 아래에선 옅은 살구빛이 도는 묘한 빛깔을 얻을 수 있다.   


손쉬운 황토염색 최고 인기

쪽물 들인 천을 널고 있다(위).여성생활사박물관에 전시된 옛 가구들(아래 왼쪽).울금염색한 천에 쪽물을 들이면 보라빛 나는 천이 만들어진다.

황토염색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가장 인기 있는 염색 체험이다. 피부가 아토피성인 자녀를 둔 부모들이 황토염색을 많이 하러 온다. 황토염색 속옷을 입으면 적외선이 방출되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습기가 차지 않는다고 한다. 또 담배를 피우거나 공기가 맑지 않은 실내에서는 황톳물 들인 광목으로 커튼을 만들어 걸어두면 공기가 정화돼 한결 개운하다.

이관장은 늘 염색작업을 한다. 그가 하는 염색작업을 지켜볼 수도 있다. 박물관 울타리 너머에는 쪽을 기르는 밭이 있다. 쪽물은 검은 빛이 도는 벽청(碧靑)이다. 여기에 명주 한 필을 서리서리 담아 치댄다. 요령은 빨래하는 것과 같다. 한자리에서 30~40차례씩 긴긴 명주를 치대다 보면 김장거리를 씻는 것처럼 힘이 든다. 섬유조직 속으로 미세한 염색 입자를 침투시키는 행위다. 이 명주를 장대로 받친 빨랫줄에 널어 말린 뒤 다시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 드디어 쪽빛 바닷물이 든다. 초록빛으로 물들이려면 황연이나 치자, 울금 들의 노란빛을 내고서 쪽물을 들이면 된다.

이곳에서는 염색말고도 차 마시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이관장은 염료를 캐기 위해 산에 갈 때도 차 가방을 들고 나갈 정도로 차를 좋아한다. 그의 주변에는 그가 직접 해온 목련차나 연차, 생강나무차 등을 나누어 마시면서 그의 차 제자가 된 이들이 많다.

여주의 여성생활사박물관에 들러 전시물을 둘러보고 황토염색을 한 뒤 차를 마시는 일은 색다르고 귀한 문화체험이다. 저마다 다른 빛깔을 내는 세상의 수많은 식물의 불에 탄 재 한 줌이 매염제로 다시 쓰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산야의 잎과 꽃들이 차로 변해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는 일도 경험하게 된다.

여성생활사박물관은 지금 한창 축제 준비를 하고 있다. 5월1일부터 6월30일까지 ‘2004 여성문화예술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축제기간에 전통 부엌용기 시연 및 체험행사, 전통 직물용기 시연 및 체험행사, 물지게 지기와 물동이 이기 체험행사, 전통염색 체험학습이 이뤄진다. 이 축제에 참여하면 사재를 털어 옛것들을 사 모아놓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누리고자 하는 개인의 열린 의식과, 전통 문화 지키는 일에도 개인보다 걸음이 늦은 관(官)의 닫힌 의식을 함께 보게 될 것이다. 임대료를 내지 않았다고 교육청이 압류딱지를 박물관 유물들에 붙여놓았기 때문이다.

염색 체험 안내
*여성생활사박물관/ 경기 여주군 강천면 굴암리 옛 강남 분교, 황토염색 체험 유치원 1만원, 일반인 2만원, 031-882-8100
*문화공간 예곡/ 충북 옥천군 청산면 옛 예곡초등학교, 참가비 4인 기준 3만원, 043-733-0978
*영장자연문화체험장/ 경기 파주시 광탄면 옛 영장 분교, 031-948-2072
*예술촌/ 강원 홍천군 서석면 검산리, 펜션식 민박 운영. 도자기·서각·염색 체험 진행, 033-436-5200, 017-282-6580
*도화헌미술관/ 전남 고흥군 도화면 구암리 옛 단장 분교, 061-832-1333

 

금산사에서의 2박3일
참선 삼매경에 세상 시름도 잊고…

대명 스님을 따라 아침 참선에 잠긴 산사체험 수련생들.

고속도로에 비가 내린다. 속도를 줄여야 하는데 오히려 더 올리고 있다. 비 내리는 고속도로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다. 빗속을 뚫고, 어둠을 뚫고 드디어 산문(山門)으로 들어섰다. 스님의 안내를 받으며 숙소로 향하는데, 댓잎 스치는 소리가 요란하고 개울물 소리가 거세다. 잠시 개울가에 서서 귀를 씻는다. 개울물 소리 따라 잡다한 나의 일상사도 씻겨 내려간다. 이 순간 숨가쁘게 달려온 내 생이 문득 멈춰선 듯 멍하다.

아련하게 들려오는 목탁 소리에 눈을 뜨니 새벽 3시15분. 3시30분부터 새벽예불이 시작되니 서둘러야 한다. 우물가에 쪼그린 채 세수를 하고 대웅전으로 향한다. 3시25분, 내 평생 이 시간에 밀린 일 처리하다 잠들기는 했어도 깨어나 하루를 시작해본 적은 없다.

금산사 대웅전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다. 대적광전은 연꽃 속에 담긴 극락,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을 구현한 곳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웅장한 불상이 여럿이다. 좀처럼 볼 수 없는 법당 구조다. 앉아 있는 여래불이 다섯, 서 있는 보살이 여섯. 불상들은 너무도 커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위압적이다. 게다가 한두 분이 아니지 않은가.

금산사 마당의 육각 다층석탑 뒤쪽으로 적멸보궁이 보인다.

예불이 시작됐다. 앞에 선 스님을 따라 눈치껏 절하고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스님을 따라 산사체험하는 수련생이 50명이다. 기업체에서 수련회 겸 해서 2박3일 산사체험을 왔다. 대리급 이상 임원들까지 참여한 행사다. 모두들 산사에서 내준 수련복을 입고 있으니, 뒤에서 보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다. 똑같은 옷을 입고 비슷한 동작으로 한곳을 향해 스님을 따라 절을 한다.

나눠준 책자를 보고 ‘지심귀명례’로 시작하는 예불문을 함께 읽고, 법당 오른쪽 신중단을 바라보며 반야심경을 읊은 뒤, 자리에 앉아 귀에 익은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로 시작되는 천수경을 듣는다. 급한 개울을 타고 내려온 물이 제 길을 잡아가듯, 부드러운 천이 자기 몸을 휘감듯, 울리는 염불소리에 실려 절을 하고 무릎 꿇고 합장하기를 거듭하다가 여래불을 바라본다. 반쯤 뜬 채로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는 눈이 “무엇 하러 여기 왔는고” 하고 묻는 듯하다.

                                                                               저녁예불을 드리기 위해 범종을 치고 있다.

“산사에서 문을 연다 해서 산사체험하러 이곳을 찾았습니다. 제게 사찰은 늘 관광의 대상이었지, 속내는 볼 수 없었습니다. 간혹 담 너머로 스님들의 생활공간을 엿보았지만, 그때마다 철조망 너머 이념이 다른 땅을 바라보듯 조마조마했습니다. 오늘은 아무 거리낌 없이 ‘수행 중이오니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경고문이 적힌 문을 열고 들어와 스님처럼 생활할 수 있어 좋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왔습니다.”

2년 전 한일월드컵 때 한국의 전통문화를 세계에 선보이는 작업의 하나로 산사체험(Temple Stay) 행사를 진행했다. 외국인뿐 아니라 내국인들에게도 특별한 행사였다. 행사는 좋은 평을 들었고, 지난 여름에도 사찰 여름수련회는 만원이었다.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한국불교전통문화체험사업단이 꾸려져 11곳 사찰을 중심으로 산사체험 행사를 정기적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이제 여름 한철이 아니라, 주말이면 언제든지 산사체험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불경 봉독·공양 … “오늘은 나도 스님”

금산사 일주문까지 포행하고 있다. 포행(布行)은 호흡에 맞춰 천천히 걸으면서 선정을 닦는 것이다.

1시간 동안의 새벽예불이 끝나고, 아침 공양 때까지 1시간가량이 남았다. 이때 참선을 하거나 불경을 봉독하는데 오늘은 발우공양을 준비하기로 했다. 발우공양은 수행하는 스님들의 전통식사법이다. 지도는 금산사 교무국장인 대명 스님이 했다. 넉넉한 웃음과 간간이 섞이는 농담이 긴장을 풀어주고, 마음속에 불심을 내려놓는다. 발우는 4개다. 발우를 펼쳐놓고, 식사를 분배하고, 음식을 먹으면서 수저질과 음식 씹는 소리, 말소리가 나지 않게 해야 한다. 공양하기 전의 예행연습이다. 밥 한 톨, 고춧가루 한 티 남김없이 먹어야 한다. 수저를 들기 전에 공양의 뜻을 되새기는 게송(偈頌)을 읊는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 받기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죽비를 세 번 치면 좌선자세를 하고 선정에 들어간다.

죽비 소리에 맞춰 배식이 이뤄지고, 죽비 소리에 맞춰 식사한다. 모든 사람이 함께 나눠먹고 반찬도 한 그릇에 담아 소박하게 먹는다. 까다롭지만, 세상 만물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인다.

예습한 대로 발우공양을 끝내고, 잠시 휴식한 뒤 아침 7시부터 금산사 사찰에 대한 안내가 이뤄진다. 금산사에는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3층 미륵전이 있다. 미륵전 안에는 11.82m나 되는 미륵본존불이 있다. 모악산 자락에 흥성했던 미륵신앙이 이곳에서 시작됐다. 뜰 앞의 잣나무를 살피고,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에 오른다. 절은 넓고 편안하다.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곳에 넓은 평지가 있고, 평지 위에 오래된 건물들이 서 있다. 매월당 김시습(1435~93)도 이곳 객실에서 하룻밤 자고 가면서 ‘구름 기운 아물아물, 골 안은 널찍한데/ 엉킨 수풀이 깔린 돌에는 여울 소리 들려오네’로 시작하는 시 한 수를 남겼다.

오전에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오후에는 다도(茶道)체험을 한다. 그런데 기업체에서 온 50명은 자체 프로그램에 따라 근처의 학교 운동장을 빌려 공놀이를 한다고 떠났다. 금산사의 산사체험은 자유롭다.

인터넷(www.geumsansa.org)에서 자신이 참여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다. 경내와 주변 산세가 아름답고, 모악산 등산도 할 수 있어서 비장한 각오를 하지 않아도 쉽게 참여할 수 있다.

기업체나 단체 체험단은 공놀이 같은 자체 프로그램을 끼워넣을 수 있다. 나는 홀로 모악산에 오른다.

2박3일의 일정을 마치고 산문을 나선다. 나는 다시 쾌속으로 세상을 달리며 생활할 것이다. 일을 좇지만, 일에 쫓겨다니기 십상이리라. 그 속에서 나를 잃을 즈음이면 이 산문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나는 돌아서서 대숲바람과 계곡물 소리와 풍경소리에 합장한다.

 

해병대 병영훈련
‘악’으로 뛰고 ‘깡’으로 구르고

고무보트를 머리에 이고 훈련 중인 병영체험 참가자들.

알겠습니까?” “악!” “대답소리가 작습니다” “아악!” “교관이 가장 좋아하는 게 뭔 줄 아십니까? 두 가집니다. 큰 목소리, 신속한 동작, 아시겠습니까?” “악!”

여기에서 단체 복창은 모두 “악”으로 통한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겠다는 뜻이다. 그 소리가 너무 강렬해, 해병대에서조차 이미 폐기한 복창이 이곳에서는 자주 들린다.

이곳은 충남 태안군 안면도 백사장해수욕장 웨스턴 레저타운에 있는 해병대 병영체험 훈련장. 다양한 체험여행이 있지만, 병영체험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풍경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추억으로, 어떤 이에게는 공포로, 또 어떤 이에게는 넘어야 할 산으로 남아 있을 병영생활을 이곳에서는 얼마든지 복습 또는 예습할 수 있다.

훈련은 해병대 교육관 출신들로 구성된 해병대아카데미에서 주관한다. 2000년 6월에 영화 ‘해안선’ 출연배우들을 교육하면서 결성된 사업체다. 훈련에 많이 참가하는 집단은 기업체나 운동선수, 학생들이다. 여름에는 가족캠프가 열린다. 때로 군대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여성단체나 장애인단체도 참여한다.

 

당일부터 3박4일 코스까지 다양

숙달된 조교의 타워레펠 시범.

오늘 훈련에 참가한 단체는 식품회사인 해찬들 영업직원들이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영업사원들이 모여서 단합대회를 하고 있다. 훈련장 구령대 옆에는 ‘2000억 달성을 위한 상반기 영업본부 전진대회’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체험 훈련에 동참한 영업본부장은 “똑같은 복장으로, 똑같은 구령에 맞춰 오늘 하루는 상하관계 없이 함께 단합심을 발휘해봅시다”라고 했다. 본부장이 함께 뛰니 평사원들도 젊은 교관들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입소식을 마친 뒤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PT(Physical Training)체조. 기본체조로 몸 풀기 동작이다. 하지만 잠시 하는 게 아니다. 두 시간가량 다양한 동작이 반복된다. 그러는 동안 몸은 녹초가 되고, 인내력도 한계에 부딪힌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찾아온 곳이니 거부하기도 어렵다. 더욱이 상사가 앞장서니 아래 직원들은 묵묵히 따라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다 보면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틀이 서서히 깨져나간다. 쉬는 시간에 이동할 때는 3인 1조가 되어 손잡고 다닌다. 사회생활을 한 뒤로 연애할 때말고 다른 사람과 손 잡고 걸어본 적이 있던가? 거의 없다. 어색하지만, 손을 잡고 다니다 보면 동료애도 새롭게 생겨난다.

점심시간이라고 해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잡담 금지에, 허리 펴고 절도 있게 먹어야 한다. 잠시 흐트러지면 “운동장에 집합!” 명령이 떨어진다. 운동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면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에 군기가 번쩍 든다.

오후에는 해상 침투하는 IBS (Inflatable boat small·공기주입형 보트) 훈련이다. 해병대만의 고유한 훈련인데, 쉽게 말하면 요즘 가장 각광받는 수상레포츠인 래프팅이다. 우리나라 래프팅의 역사는 한탄강에서 시작되었는데, 원조가 바로 해병대의 IBS 훈련이다. 래프팅은 10분 정도의 준비운동을 하고 강으로 뛰어들지만, 이곳에서는 다르다. 2시간 동안 힘든 지상 훈련을 거친 뒤, 보트를 머리에 이고 해변으로 나간다. 해변은 백사장해수욕장이다. 백사장이 많아 백사장해수욕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송림과 백사장 사이에 시멘트 옹벽을 치면서 모래가 쓸려나가 자갈층이 많이 드러나 있다. 하지만 송림이 좋고 모래톱이 넓어 시원스러운 해변이다.

   


먼 바다까지 래프팅을 하고 돌아오는 참가자들.

보트를 바다에 띄우고, 삼봉해수욕장 앞까지 바다 래프팅을 하고 돌아온다. 우렁찬 구호에 맞춰 어깨가 빠질 정도로 노를 젓다 보면, 동료들과 한배를 타고 있음을 진정으로 절감하게 된다.

해병대 훈련단 소대장 출신인 정진호 훈련본부장은 훈련에 참여하는 기업들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 번째가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 처한 중소기업체 직원들이다. 이들은 해병대 정신과 일치하는 게 많다. 해병대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해안을 통한 침투다. 침투선에서 내던져진 대원들은 적의 진지를 향해 무조건 돌진해야 한다. 뒤는 망망대해라서 돌아설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의 구호는 ‘싸워서 이기고 지면 죽어라!’다. 죽는다가 아니라, 죽어라다.

두 번째는 잘나가는 회사. 그래서 너무 평온하고 느슨해진 회사 직원들이 정신을 재무장하기 위해서 찾아온다. 세 번째는 합병한 회사 직원들이 조직 활성화 차원에서 찾아온다. 해병대는 희생정신을 통해서 단결력을 강화해나가는 집단이기 때문에, 합병 회사가 필요로 하는 정신력을 부여해줄 수 있다고 훈련본부장은 말한다.

실제 2003년에 LG전자 창원공장 전 사원 6500명이 6개월에 걸쳐 차례대로 병영체험을 하고 갔는데, 그 해에 창사 이래 최고 매출 신장세를 기록했다고 한다.

정 훈련본부장은 행여 사람들이 너무 겁먹고 두려워할까 봐서인지, 해병대아카데미는 극기훈련장이 아니라 병영체험훈련장이라고 말한다. 해병대에서 받은 사랑을 일반인들에게 나눠주고 싶어 이 일을 시작했다며, 영원한 해병다운 얘기를 했다.

PT체조에 지칠 대로 지친 대원들.

이곳의 훈련 과정은 당일, 1박2일, 2박3일, 3박4일 프로그램으로 나뉜다. 1박2일을 하면 7km 구보가 포함되고, 2박3일이 되면 집총체조, 유격훈련이 포함된다. 3박4일은 훨씬 더 치밀하게 훈련이 이뤄진다. 잠자리는 병사들처럼 내무반에서 군용 모포를 덮고, 취침 비상훈련도 한다.

허리에 줄을 메고 고공낙하 훈련을 하는 헬기레펠이나 타워레펠은 아찔하고 무서운 훈련이다. 헬기레펠 훈련에 견주면, IBS훈련은 물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려운 훈련을 할수록, 그래서 육신과 정신의 바닥을 볼수록 새로운 의욕이 충만해진다.

해병대 병영훈련은 군대를 갔다 온 이들에게는 추억여행이다. 군대를 안 간 여자에게는 남자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체험여행이다. 사람들은 힘든 상황에 처할 때, 그래서 자신이 미물에 지나지 않다고 느껴질 때, 비로소 주변을 돌아보고 동료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힘든 훈련을 하면서 부딪치는 상사와 부하직원의 눈빛, 아버지와 아들의 눈빛이 더욱 따뜻해질 수 있는 곳이 바로 해병대 병영체험장이다.

여행 메 모

웨스턴레저타운 - 안면도 백사장해수욕장에 있는 유스호스텔이다. 객실 252개, 대강당, 편의점, 식당, 운동장, 해수사우나탕 등을 갖추고 있다. 해병대 병영체험, 역사체험, 해양체험을 포함한 다양한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041-672-5537, 오뚜기식당(백사장항 횟집) 041-673-5425, 해병대아카데미 1688-4396, 부산양산 해병대체험훈련장 055-383-2002.

 

보령 머드 체험
재미 미끈 뒹굴어 피부 매끈 만들기

갯벌에 누워 있는 친구 몸 위에 갯벌을 덮어주고 있는 아이들.

서해안 최대의 휴양지는 보령 대천이다. 피서철이면 하루에 20만~30만명이 찾아온다. 그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백사장(3.5km)이 있기 때문이다. 백사장 뒤로는 음식점과 숙박 단지가 거대하게 형성되어 있다. 대천해수욕장에서는 해마다 머드축제가 벌어진다. 올해는 7월16일부터 22일까지 열려 연인원 140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왔다. 이제 머드축제는 끝났지만, 그렇다고 머드 향연까지 끝난 건 아니다. 보령에 오면 서해안의 다른 지역에는 없는 머드 마사지실이 있고, 차별화된 머드 체험장이 있다.

해안에서 갯벌 체험은 특별한 행사가 못 된다. 서해안에 널린 게 갯벌이고, 갯벌에서 뒹굴고 바지락이라도 캐면 갯벌 체험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해안 해수욕장의 태반은 갯벌을 끼고 있다. 하지만 보령시에서는 그런 평이함을 극복하고, 지역 경제의 기반으로 삼을 만한 머드축제를 7년째 벌여오고 있다.

대천해수욕장에는 상설 머드 마사지실이 두 군데 있다. 한 곳은 대천해수욕장 시민탑 옆에 있는 머드하우스로 안면 마사지와 전신팩을 할 수 있다. 또 다른 곳은 대천해수욕장 한화콘도 리조트의 머스팩실로 전신 머드팩과 얼굴 마사지를 할 수 있으며 40분 정도 걸린다. 모두 유료로 운영되는데, 머드팩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30분 정도 사우나를 해 모공을 충분히 열어두어야 한다. 머드팩을 한 다음에는 가볍게 샤워만 하고 서너 시간이 지난 뒤 비누 목욕을 한다.

머드 교도소에 갇혀 머드 식사를 받다.

이 두 곳의 머드 마사지실에서 사용하는 머드화장품은 보령시에서 만든 제품이다. 보령시가 ‘머드랑’이라는 독자 상품을 개발하고, ㈜태평양과 ㈜한국콜마가 생산, 보령시가 판매하고 있는데 지방자치단체가 만든 성공한 관광상품으로 평가된다.

보령시에서 만든 머드화장품은 보령해안 갯벌로 만들었다. 정확히는 보령시 천북면 궁포리 해안의 갯벌로 만든다. 머드는 물기가 있는 질척한 흙을 말하는데, 오랜 세월 지질학적·화학적 작용과 미생물의 분해 작용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특히 해안 머드는 동식물의 분해산물, 해조류, 토양, 염류 등이 함유되어 있다. 또한 미네랄, 벤토나이트, 게르마늄 성분들이 있어서 피부 노폐물 제거와 피부 노화 방지, 아토피성 질환에 효과가 있다.

              

 

 

 

 

 

 '자연화장품’ 쓱쓱 건강 쑥쑥

머드축제 기간 중 머드탕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

보령시에서는 머드하우스의 반응이 좋아 올 가을 40억원을 투자해 대천해수욕장 안의 머드하우스 부지에 머드체험랜드를 건립할 예정이어서 기대가 된다.

대천해수욕장 부근에서 갯벌 체험을 하려면 대천항을 지나 보령해안도로를 따라 3km 정도 가면 나오는 남곡동 해변으로 가야 한다. 대천해수욕장에는 갯벌이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레포츠 회사인 태드월드가 갯벌여행 상품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흔히 서해안에서 갯벌 체험을 하려면 5000원 안팎을 받고 호미와 장화를 빌려주는 것으로 끝이며, 갯벌에 들어가서는 저마다 알아서 논다. 하지만 태드월드에서는 안내자를 두고 2시간 정도 갯벌 체험 행사를 진행한다. 갯벌 행사에서는 해병대식 극기 훈련, 갯벌 씨름, 갯벌 축구, 조개 잡기가 진행되고, 행사가 끝나면 샤워장으로 안내한다.

남곡동 갯벌장은 물이 빠지면 멀게는 3km나 갯벌이 드러난다. 갯벌은 질퍽한 밀가루 반죽을 밟은 듯이 부드럽다. 모래알갱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고, 깨진 조개껍데기도 없어서 마음껏 뛰어다닐 만하다.

   


                                                                          대천해수욕장 시민탑 광장을 지키고 있는 머드마네킹.

갯벌 행사장에서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이 무덤 쌓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다섯 명이 나란히 갯벌에 누운 뒤 몸 위에 모래 덮듯이 갯벌을 덮었다. 붉은색 티셔츠와 모자를 쓴 갯벌 안내자들의 지시에 따르다 보면 온몸은 진흙투성이가 되어 두 눈만 보인다.

태드월드에서는 좀더 심화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3박4일, 해병대식 다이어트 극기 훈련이다. 태드월드 대표인 김재오씨는 1999년에 처음으로 해병대식 훈련을 체험여행 상품으로 내놓은 인물이다. 주로 갯벌에서 극기훈련이 이뤄지는데, 뒹굴다 보면 살이 절로 빠진다.

갯벌 체험의 또 다른 매력은 갯벌을 바르면 몸이 햇볕에 잘 타지 않는다는 점이다. 갯벌을 칠하고 난 뒤 해안에 누워 있으면 마치 자외선 크림을 바른 듯, 가면을 쓴 듯 편안하다. 머드축제 기간에 젊은이들이 온몸에 머드를 바르고 해변을 활보할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어찌나 인기가 좋은지, 해수욕장 초입에서 잘 정제된 갯벌을, 자외선 차단 크림 대용으로 한 봉지씩 팔아도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올 여름 머드 마사지를 하러 서해안을 찾아가보자. 열린 모공 속으로 머드가 들어가면 피부가 매끈매끈해진다. 모공에 스며든 머드는 노폐물과 함께 빠질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갯벌이 잘 풀어진 천연머드탕.

여행 메모

*태드월드 갯벌 체험 여행/ 비용은 1만3000원. 3박4일 해병대식 다이어트 극기 훈련, 어른 19만8000원, 학생 17만8000원. 041-932-2900

*머드하우스/ 대천해수욕장 시민탑 근처.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 안면 마사지와 팩 2만5000원, 안면 마사지와 전신팩 3만원, 마사지 안 하고 전신팩만 1만5000원. 예약하고 방문하면 기다리지 않고 이용할 수 있다. 041-931-2930.

*한화콘도 리조트 여성 전용 머드팩실/ 대천해수욕장 안에 위치. 전신 머드팩과 얼굴 마사지를 받음. 가격 콘도회원 2만5000원, 투숙객 3만원, 일반인 4만원. 931-5500(내선번호 2075)

*보령시 머드화장품/ 판매처 080-930-2200

 

소금 만들기
바닷물이 땡볕 먹고 ‘소금꽃’ 되었네

소금을 긁으며 아이들이 소금 만들기 체험을 하고 있다. 소금 바구니를 이용해 소금을 창고로 나른다(아래). 땡볕이 화살처럼 내리꽂히던 날, 초등학생들이 소금 밭두렁에 섰다. 대전의 논술학원 연필꽃에서 온 학생들이다. 요즘은 논술학원도 그저 앉아서 책 읽고 글짓기 하는 것만으로는 학부모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는 모양이다. 체험여행을 하고, 느낌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병행해야 인기를 끈다.

아이들이 바라보는 소금밭(염전)에는 간수(짠물)가 담겨 있고, 간수 위에 소금꽃이 엷게 피어 있다. 일곱 차례 넘게 증발시킨 바닷물이 염도 27도가 넘어서면 소금꽃이 피고 각진 결정체가 되면서, 서서히 바닥에 가라앉아 소금의 형체를 갖추게 된다. 소금밭 군데군데 소금 알갱이들이 가라앉아 있다.

“아저씨 이게 뭐예요?” 한 학생이 제 키만한 소금 긁는 막대를 들고 물었다.

“큰 것은 대패고, 작은 것은 곤배라고 하는데, 그것을 밀고 다니면서 소금을 모으지.”

“책에는 고무래라고 나오던데요?” 체험여행을 오기 전에 ‘소금이 온다’라는 책을 읽었다는 한 학생이 목소리를 높였다.

“응, 아저씨가 쓰는 말은 일본말일 거야. 천일염전은 일본에서 도입된 소금 만드는 법이거든. 곡식을 모으거나 펼칠 때 쓰는 고무래와 같아서 고무래라고 해도 돼.”

학생들이 고무래를 들고 소금밭으로 들어서려고 하자 아저씨가 아이들을 막아 세운 뒤 소금밭이 어떻게 생겼고, 소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능이 다른 여러 칸의 ‘소금밭’

맹물의 염도는 0도인데 바닷물의 염도는 1.5도에서 3도 사이다. 소금이 되려면 염도 25도가 넘어야 한다. 그럼 염도 3도가 안 되는 바닷물이 어떻게 염도 25도가 넘는 간수가 되어 소금으로 변할까? 염전을 보면 논밭처럼 두렁이 있어 여러 칸으로 나눠져 있다. 그 각각의 염전들의 기능이 다 다르다. 소금창고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염전에서부터 1방, 2방, 3방, 4방, 늦태 1방, 늦태 2방, 늦태 3방, 늦태 4방, 그리고 난치로 나뉜다. 난치는 바닷물을 그대로 가둬서 이물질을 제거하는 밭이다. 비가 오지 않으면 난치에서부터 늦태 4방을 거쳐 3방, 2방으로 하루에 한 방씩 바닷물이 이동한다. 하루에 한 방씩 이동하면, 소금 채취가 가능한 3방까지 도달하는 데 7일이 걸린다.

늦태에서는 본격적으로 바닷물을 증발시켜 염도가 높은 간수를 만든다. 난치와 늦태의 밑바닥은 단단한 갯벌이다. 1년에 한 번씩 테니스장을 고르듯이 롤러로 다져서 물이 빠지거나 갯벌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고무래로 소금을 긁어모으는 작업을 하는 곳은 소금창고 옆의 1방과 2방, 3방이다. 이 방의 바닥에는 타일이 깔려 있다. 1950년대에는 갯벌 다진 흙(토판)을 깔았고, 20년 전에는 항아리나 깨진 옹기(옹패판)를 바닥에 깔고서 소금을 긁었다. 천일염전이 있기 전에는 가마솥에 소금물을 끓여서 만든 자염이라는 재래염이 있었다.

   


긴 나무막대를 잡고 무자위를 돌리고 있는 모습(위).우럭을 말리고 있는 모습.

이제 학생들이 고무래를 들고서 소금밭 1방 안으로 들어섰다. 고무래를 천천히 조심해서 밀라는 아저씨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학생들은 고무래를 잡고 미끄럼을 탄다. 고무래질을 한쪽 방향으로 하면서 소금을 몰아야 하는데 왔다갔다 천방지축 밀어댄다. 그러니 바닥에 가라앉은 개흙까지 일어나 소금이 누르스름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학생들은 신나게 고무래를 밀고 다닌다.

다른 한쪽에서는 무자위(수차) 돌리기 체험이 진행되었다. 무자위는 소금밭에서 가장 신기하고 재미있는 도구다. 물레방아처럼 생긴 무자위는 요즘 소금밭에서는 볼 수 없다. 모두 모터를 사용해서 물을 빼내고 담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도와 염전을 운영하는 원창기씨(37)는 무자위를 복원하는 데 애를 많이 먹었다고 했다. 군청의 지원을 받아, 예전에 무자위를 만들던 사람을 수소문해서 나무판을 한 조각씩 맞춰 어렵게 완성했다. 무자위의 나무판은 얇아 보여도, 소금물에 늘 절여져 있어서 탄탄하다. 무자위 나무판 위에 올라서서 계단을 오르듯이 밟는데, 초등학생들 힘으로는 잘 돌아가지 않는다. 뒤에서 아저씨가 나무판을 조금씩 눌러줘야 무자위가 돌아간다. 무자위가 돌아가자 소금밭에 있는 물이 세차게 두렁을 넘어간다.

무자위 돌려 물 빼기 색다른 체험

소금밭은 평탄하게 보여도 실제는 난치부터 늦태를 거쳐 소금창고 쪽까지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물꼬만 트면 바닷물이 저절로 소금창고 옆 1방으로 흘러든다. 대신 빗물이나 오염된 간수를 빼낼 때는 무자위를 이용해서 난치 쪽으로 내보낸다. 그리고 1방에서 3방 옆에는 비 가림이 되어 있는 간수 저장소 ‘해주’가 있다. 비가 오면 1방에서 3방에 들어 있는 간수가 ‘해주’로 대피한다. 만약 간수가 빗물과 섞이면 다 버려야 하고, 다시 간수를 만들기까지 일주일을 허비해야 한다. 그러므로 소금밭에서 간수는 가장 중요한 재산이다.

뙤약볕 아래인지라 학생들은 소금밭에 오래 있을 수가 없다. 그늘이라곤 고작해야 어두운 소금창고뿐이다. 염전지대에는 그늘을 만들거나 바람을 막는 것이 되도록 없어야 한다. 탁 트인 곳이라야 소금이 잘되기 때문이다.

서해안에 염전이 많지만, 현재 염전 상설 체험장을 운영하는 곳은 충남 당진군 송산면 가곡리 성구미 염전뿐이다. 성구미는 간재미회가 맛있기로 소문난 포구다. 마을에서 시작된 10km가 넘는 석문방조제를 건너면 서해안 일출마을로 이름난 왜목마을이 있다.

성구미 포구 동네인 가곡리에서 허브농원 차브민을 운영하는 이근주씨가 염전을 운영하는 원동준씨(72)와 협의해 당진군의 지원을 받아 염전 체험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가족들이나 학생들이 많이 찾아오는데, 염전이 좀 상하긴 하지만 뜻 깊은 일이라 열심히 하고 있다”고 원씨는 말한다.

소금은 작은 금이다. 그만큼 귀하게 여기는, 우리 몸에 꼭 필요한 물질이다. 소금밭에 가면 그 작은 금이 어떻게 결정체를 이루는지 잘 알 수 있다.

여행메모
허브마을 가곡리 염전체험 안내(www.gagok.net )
허브마을 차브민에서 행사를 진행한다. 허브 및 염전 체험을 할 수 있으며, 점심식사까지 포함하여 1만5000~2만원이다. 반드시 예약해야 하고 숙박도 가능하다. 문의 041-352-7261, 018-295-9964

 

술 빚기
누룩은 꼭꼭, 술내음은 솔솔~

참가자들이 우리술 페스티벌에서 술 빚기 체험을 하고 있다

술 빚기 체험, 우리에게는 좀 낯선 일이다. 오랫동안 술 빚기가 범법 행위로 단죄돼 가정에서 술 빚는 걸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룩 만들고, 술 빚는 일이 자유롭게 된 시점은 1995년이다. 이때 조세범 처벌법 제8조에 ‘개인의 자가 소비를 위한 (술)제조를 제외한다’는 조항이 추가되면서 자가 양조가 가능해졌다. 이제 옛날처럼 제사 또는 명절을 앞두고 떡 찌듯 술을 빚어도 된다. 하지만 엄격하게 따지면 법은 또 하나의 맹점을 안고 있다. 술을 직접 빚는 것은 허락했지만, 그 술을 자신이 마셔야지 남에게 건네는 것은 불법이란다. 세상에 이런 법도 있나 싶다.

투박한 술이라도 직접 빚어 그리운 친구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그게 죄가 된다 하더라도-그 아니 행복하지 않겠는가.

최근 두 군데에서 술 빚기 체험행사가 열렸다.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우리술 페스티벌(8월25~29일)과 충북 영동에서 치러진 포도 페스티벌(8월28~29일)이 그것이다. 두 행사 모두 지역 특산물을 부각시키기 위해 마련된 축제다. 우리술 페스티벌은 농림부가 주관했는데, 우리 농산물의 가공상품인 전통술과 농민들이 직접 빚은 술을 전시 홍보하는 뜻 깊은 자리였다. 영동축제는 포도 주산지에서 열린 규모 있는 행사다. 두 곳의 축제장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이 술 빚기 체험행사였다.

와인 만들기 체험행사도 열려

우리술 페스티벌의 술 빚기 체험행사는 남선희씨가 주관했다. 남씨는 서울 북촌문화센터에서 술 빚기 강의를 진행하는 전통술 연구가다. 전시장에 우연히 들른 사람들이 “우리도 빚을 수 있어요? 빚어도 되는 거예요?” 하면서 펼쳐진 자리에 앉았다.

누룩은 발뒤꿈치로 꼭꼭 밟아야 한다.

먼저 누룩 만들기부터 시작됐다. 누룩은 우리 술의 기본이다. 누룩의 힘을 빌려, 그 딱딱하고 멍멍한 쌀을 흐물거리는 술로 만들 수 있다. 누룩을 만들려면 누룩틀과 광목, 빻은 통밀이 필요하다. 누룩틀은 높이 5cm에 지름이 한 뼘쯤 되는 둥글거나 네모난 모양의 틀이다. 누룩틀에 광목을 깔고, 그 안에 빻은 통밀을 한 줌씩 꽉 쥐어 담는다. 이때 물을 약간 축인 통밀은 손아귀에 쥐었을 때 물기가 묻어나지 않고 뭉쳐질 정도여야 한다. 물기가 많으면 누룩이 너무 단단하게 뭉쳐져 곰팡이가 잘 번식되지 않는다. 빻은 밀을 누룩틀에 넣고 광목으로 덮은 다음, 발뒤꿈치로 꼭꼭 밟아댄다. 누룩 만드는 것을 ‘딛는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렇게 만든 누룩은 20일 넘게, 메주 띄우듯 해야 한다. 요즘은 누룩을 쉽게 살 수 있다. 시장에 가도 있고, 인터넷에서도 구할 수 있다.

잘 만들어진 누룩을 콩알만 하게 빻아서 고두밥을 지어 비비면 술이 된다. 이날 체험장에서는 초보자들이 집에 가져가서도 술을 쉽게 발효시킬 수 있도록 물 대신 생막걸리를 이용해 누룩과 고두밥을 비볐다.

술 빚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누룩을 딛고 술을 만들어보면서, 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고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영동포도축제에는 인터넷 동호회 와인만들기 카페 사람들이 원정대를 모집해 출동했다. 카페 회원이 2200명인데, 120명이 이날 행사에 참여했다. 버스 한 대를 빌리고, 23대의 차량이 뒤를 따랐다. 와인 열기를 느끼기에 충분한 행렬이었다.

 

영동에 있는 와인코리아의 포도주 저장고. 일제시대 탄약창고로 쓰던 깊이 60m의 토굴이다

영동천변에 마련된 축제장에는 와인만들기 천막이 마련돼 있었다. 공동구매한 포도를 쌓아놓고, 20ℓ 발효통에 포도를 15kg씩 담기 시작했다. 한국산 오크통을 제조하는 김도영씨(011-9706-3100)는 작은 욕조만한 오크통을 만들어왔다. 그 안에 포도를 넣고 발로 밟아대는데, 포도와인 축제가 꼭 프랑스에서만 벌어지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영동, 김천이며 화성, 안성은 요즘 한창 포도 수확철이다. 지중해 포도보다 훨씬 맛있는 탱글탱글한 포도가 이 땅에서 난다. 대량 생산된 값싼 수입 와인에 밀려 우리 와인이 고전하고 있지만, 우리 포도로 맛있는 우리 와인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와인은 과일주다. 포도로 술을 담그는 것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와인만들기 동호인들의 열정을 보면서, 포도농가에서 다양한 포도와인 만들기 체험행사를 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도알과 포도껍질이 분리되고, 포도껍질의 즙이 진하게 배어나올 때까지 포도를 짓이긴다. 엄마 아빠를 따라온 아이들은 신이 나서 포도를 밟아댄다. 동호인들은 흡족하게 포도주 발효통을 들여다본다. 마치 당장 발효통을 들고 포도즙을 포도주인 양 마시고 싶어하는 표정들이다.

포도를 짓이긴 뒤에 티스푼 반 분량(2g)의 아황산염을 넣는다. 잡균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다음에 포도량의 10%에 해당하는 백설탕(1.5kg)을 넣는다. 우리 포도의 당도가 12~14브릭스(당도를 측정하는 단위)이므로, 당도를 26~28브릭스로 높여주는 작업이다. 당도가 28브릭스에서 알코올 발효가 끝나면 알코올 14도의 포도주가 된다.

다음 발효 과정은 인터넷 카페에서 친절하게 설명해주니 이를 참고하라는 카페운영자 정재민씨의 말을 들으면서, 동호인들은 효모 한 봉지(10g)씩을 받아들고 차에 올랐다. 효모는 5시간이 지난 뒤, 집에 도착할 즈음에 넣으면 된다. 이렇게 와인을 담그고, 이제 하루에 한 번씩 위로 떠오른 포도껍질과 알갱이들을 주걱으로 뒤집어주면 된다.

술 만들기, 그리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함께 빚고, 함께 나누고, 함께 즐기는 것이 축제다. 이제 오래된 축제, 추석이 다가온다. 내가 직접 만든 술로 축제를 준비한다면, 그 축제는 나의 축제가 될 것이다.

한 가족이 통에 담긴 포도를 발로 으깨고 있다

여 행 메 모

서울북촌문화센터 술 빚기 체험/ 서울 종로구 계동. 참가자가 10명이 넘을 경우 술 빚기 당일 체험행사 가능. 고두밥을 찌고 누룩과 술밥을 버무려서 3ℓ의 술을 빚어 가져가는데, 재료비를 포함해 참가비는 2만원이다. 3개월 단위로 술 빚기 강좌도 진행된다. 남선희 017-767-6411

배상면주가 산사원 술 빚기 체험/ 경기도 포천군 화현면 화현리. 10명이 넘을 경우 술 빚기 강의와 체험행사 진행. 체험행사 비용 1인당 1만원. 재료를 준비해야 하므로 인터넷이나 전화로 예약하는 것이 좋다. 관람은 무료. 031-531-9300, www.soolsool.co.kr

와인(과일주)만들기 체험/ 와인만들기(cafe.daum.net/winemania) 인터넷 카페 동호인들은 매주 목요일을 와인데이로 정하고 와인을 담그고 맛보는 행사를 한다. 매월 첫째 주와 셋째 주 토요일 오후 2시에는 초보자 교육시간을 마련한다. 정재민 011-703-3719

술 장비 및 재료 인터넷 구입처/ 와인2080(www.wine2080.com)에서는 발효통, 에어록, 증류기 세트, 약재, 누룩, 효모, 아황산염 등을 인터넷으로 판매한다. 공장일 02-2293-2026, 016-366-5256

 

 

 

산사음악회
음악에 취한 것이 어디 사람뿐이랴

음악을 듣기 위해 몰려든 관객들로 비탈진 사찰 경내가 가득 찼다.

산사음악회는 9월과 10월에 많이 열리고 있다. 줄줄이 이어지는 산사음악회의 기폭제 노릇을 한 것은 경북 봉화 청량산의 청량사 음악회다. 지난해 행사에는 9000여명이 참석했다. 아마도 한국 불교가 생긴 이래로-고려시대 팔관회나 불교 최대 명절인 석가탄신일을 제외하고-한날한시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기는 처음일 듯싶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행사는 9월18일에 열렸다. 산사음악회의 진수를 맛보기 위해 청량사를 찾아갔다.

청량산은 일찍이 퇴계 이황이 즐겨 찾았던 곳으로, 퇴계의 5대조가 송안군으로 책봉되면서 나라로부터 하사받은 봉산(封山)이다. 이런 인연으로 퇴계는 13살 때 처음 청량산을 찾은 이래로 괴나리봇짐을 메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이곳을 찾아와 독서를 했다. 55살 때는 한 달 동안 이 산속에 머물기도 했다. 이곳을 아끼는 퇴계의 마음은 그의 시조에 잘 담겨져 있다. ‘청량산 육륙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어찌하랴만 못 믿을손 도화로다/ 도화야 물 따라가지 마라 뱃사공 알까 하노라.’

퇴계가 이렇게 비장(秘藏)했던 곳이거늘, 섭섭하게도 청량사 음악회가 소문을 다 내고 말았다.

청량사는 한때 33채의 부속건물을 거느린 큰 사찰이었지만, 조선시대를 거치며 규모가 줄어 현재는 가파른 산비탈에 자리잡은 옹색한 절에 지나지 않게 됐다. 찾아오는 사람들도 대부분 바위 봉우리가 아름다운 청량산을 보기 위해서지, 청량사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청량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건물 오산당(吾山堂)이 유명하고, 산속의 김생굴이 더 유명했다. 오산당은 퇴계가 독서를 하던 공간으로, 퇴계가 ‘이 산의 주인은 나’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김생굴은 신라 명필 김생이 공부하던 굴이다.

탑 앞마당에 마련한 산사음악회 무대.

그런데 산사음악회는 단번에 청량사를 청량산의 주인으로 돌려놓았다.

오후에 비가 와서 사람들이 적을 줄 알았는데 청량사 경내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가득했다. 경사가 급한 산비탈에 간신히 자리잡은 법당 주변으로 대추나무에 대추 열리듯 사람들이 얹혀 있었다. 엉덩이를 댈 수 있는 맨땅이라도 있으면 감사한 일이었다. 우리는 화장실로 이어지는 통로 옆에 돗자리를 간신히 펼 수 있었다. 비록 화장실 냄새가 풍겼지만, 석탑 옆에 설치된 무대를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날 음악회의 주제는 ‘자비와 사랑으로 평화를’이었다. 청량사 주지인 석지현 스님은 “탄핵, 테러, 연쇄살인… 그간 우리를 슬프게 하고 부끄럽게 했던 이 모든 것들을” 버리기 위해 “이웃 종교인들과 함께 손을 잡고” 행사를 준비했다고 인사했다.

불교인들뿐만이 아니라 원불교의 교무, 천주교의 신부와 수녀, 이노주사(이렇게 노래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가 함께 만든 자리였다. 그리고 대중음악인 장사익과 국악인 박애리씨가 함께했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 7시 청량사에 머물고 있는 승려 운산의 대금 연주로 음악회가 시작되고, 승려 법능과 심진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지자 산사는 순식간에 내가 아직까지 보지 못했던 최고의 음악당으로 변해 있었다.

   

(좌)유리보전 앞에 모인 청중. (우) 숲 속에 든 청량사.

청량사는 아주 가파른 산비탈에 자리잡고 있다. 청량사 뒤편으로 바위 봉우리가 우뚝하고, 앞쪽으로 건너 산이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다. 마치 야구 글러브 속에 들어 있는 야구공처럼 파묻혀 있다. 그 파묻힌 속에서 소리가 울려퍼지자, 뒷산이 밀어주고 앞산이 막아주어 소리가 흩어지지 않았다. 사이키 조명은 법당 뒤편 산자락에 명징하게 비쳤다.

그런데 사찰에서 사이키 조명이라니! 게다가 우렁찬 노랫소리라니! 그리고 격렬한 박수와 앙코르 요청 소리까지! 종교음악의 세계에서 쉽게 허락되지 않는 행위가 이어졌다.

속삭이듯 가만가만 입을 열어 노래하는 정율 스님.

언젠가 교회 음악회에서 음악을 듣다가 환호하며 박수를 친 일이 있다. 그때 목사는 환호와 박수를 만류했다. 교회에서 음악은 경건하게 들어야지, 감정을 일으켜 달떠서 들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법당에서도 이런 훈시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범종과 법고를 칠 때,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그 소리에 몸을 맡기는 정도다. 그런데 청량사에서는 그 모든 상식이 깨져나가고 있었다. 주를 찬양하는 노래가 개사되어 부처를 찬양하고, 수녀와 정녀와 비구니가 손을 잡고 노래 부르는 파격도 이어졌다.

게다가 이 음악회에 초대받은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무대 뒤편의 산능선, 그 너머 구름 사이로 초승달이 비쭉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지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칼날처럼 번쩍이는 초승달의 눈빛이, 산을 넘어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듯했다.

앞사람에 가려 무대는 보이지 않고, 너무 멀어 노래하는 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청량산이 소리를 모아주니 좋았다. 하늘을 보니 조명을 받아 환하게 웃는 나뭇잎들, 그리고 나뭇잎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도 보였다. 음악과 자연과 종교와 내가 하나 되는 멋진 자리였다.

 

청량사 가는 길에 들른 봉화 닭실마을의 권충재 고택.

하지만 걱정도 들었다. 수천명의 사람이 법당 안팎을, 그것도 어두운 밤에 깔고 앉고 짓밟아댔으니 내일 아침이면 애써 기르던 연꽃도 금잔화도 철쭉도 수국도 만신창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찰을 열어 소리를 놓아 사람을 불러들였으니, 주지 스님의 뜻이 깊다.

인파에 쓸려 가파른 산길을 내려오는 것이 두려워 노랫소리를 뒤로 하고 산길을 내려오는데, 장사익의 화통한 노랫가락이 아련해질수록 가을 풀벌레와 개울물의 합창소리가 가까워졌다. 순간 세상 모든 소리가 음악소리로 번져왔다.

산사음악회는 법당 마당에서만 펼쳐진 게 아니었다.    



 

인삼박물관의 인삼캐기
숲 속의 보물찾기 “심봤다”

6년근으로 자라기까지의 모습.

요즘 도처에서 ‘심봤다’ 소리가 들린다. 어떤 공무원은 산삼을 캐서 불우이웃을 도왔다 하고, 민박집 텃밭에 묻어둔 산삼을 몰래 캐먹었다 낭패를 본 피서객도 있다. 또 어떤 단체는 백두대간을 타고 다니며 산삼 씨앗을 뿌린다고 하고, 어떤 지방자치단체는 지리산 자락을 산삼으로 덮어버리겠다고 호언하기도 한다. 그뿐인가. 산삼캐기 체험여행도 생겼다. 이런 소식을 접하다 보면 은근슬쩍 내게도 산삼 한 뿌리 캘 수 있는 행운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문제는 그 좋다는 산삼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캘 수 있다는 것.

산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그리 쉽지가 않다. 꿩 대신 닭이라고 우선 인삼에 대한 정보부터 알아보자. 인삼과 산삼의 성분이 다르다고 하지만, 사람이 심으면 인삼이고 새가 심으면 산삼이라는 말도 있으니 인삼의 생김새를 알면 산삼을 구별하는 감도 생길 것이다.

10월21일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인삼박물관에 가봤다. 정관장 홍삼을 만드는 부여의 고려인삼창 본관 1층에 있는 250평 규모의 박물관이다. 대한민국 최대 히트 상품이자 장수 상품의 내력을 알 수 있는 인삼박물관이 이제야 문을 열다니, 다소 늦은 감이 있다.

인삼박물관에 들어서자 인삼향이 짙게 풍겼다. 인삼을 쪄서 만드는 홍삼의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모아 만든 향이라고 했다. 인삼향을 맡으며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니, 마치 내 몸이 약탕 속에라도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홍삼을 만들기 위해서 수삼을 씻어 말린다(위).찐 홍삼.

전시관 자동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인삼의 나신이었다. 이곳에선 인간의 몸을 닮은 것을 최고의 인삼으로 친다. 두 다리를 뻗고 있는 형태의 인삼이 성분이나 약효가 좋기 때문이란다. 이는 우리 조상이 경험을 통해 확인한 사실이라고 한다.

전시용 알코올 병에 담긴 인삼의 생김새는 가지각색이다.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을 닮은 게 있고, 발레를 하듯 몸을 휘감고 있는 게 있는가 하면, 남녀가 합궁하는 형상의 인삼도 있다. 좀더 안쪽으로 들어서면 인삼의 재배와 성장과정을 볼 수 있는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사실 산과 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검은 비닐 볕가리개 설비를 갖춘 인삼밭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인삼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까이서 관찰하기란 쉽지 않다. 자칫 인삼도둑으로 오인받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인삼 뿌리는 땅 속에 있어서, 정작 땅 위로 노출된 인삼의 모습은 가늠하기가 어렵다.

   


7월에 열리는 인삼열매, 인삼딸.인삼박물관에서 가장 먼저 손님을 맞이하는 인삼부부. (위부터).

산삼이든 인삼이든 가장 쉽게 가늠하는 방법은 인삼꽃을 보는 것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삼꽃이 지고 나서 열리는 인삼열매를 보는 것이다. 열매가 예뻐서 종종 꽃으로 잘못 알기도 하는 인삼열매는 ‘인삼딸’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파란 꽃대 위에 붉은 팥알처럼 맺히는데, 산삼을 처음 캔 사람들은 십중팔구 이 열매를 보고 횡재한 사람들이다.

7월이 되면 인삼딸이 붉어진다. 열매는 이빨로도 깨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 그 열매가 땅에 떨어져 자연 상태에서 발아되는 데 21개월이 걸린다. 그래서 인삼을 밭에 심을 때는 그 단단한 껍질을 인위적으로 열어주는 `개갑(開匣)’ 처리 과정을 거친다.

개갑처리 방법은 이렇다. 인삼딸을 따서 과육을 완전히 제거한 뒤 7월 중·하순 개갑장에 넣어 약 100일 동안 물을 뿌려주면 싹이 나와 종자껍질이 벌어지게 된다. 씨앗 껍질이 열리면, 10월 하순이나 11월 초순 땅에 심으면 된다.

인삼박물관에서는 이러한 인삼의 성장과정은 물론, 인삼을 캐는 데 쓰는 특이한 도구도 살필 수 있다. 인삼을 발아시키는 개갑시루, 종자와 모래를 분리할 때 썼던 얼게미, 묘삼을 심는 조막손, 수삼 캐는 호미, 볏짚이엉을 설치할 때 쓰던 이엉매잽이(대바늘) 등이다.

인삼에 대한 상식을 이 정도 쌓은 뒤에는, 박물관 안에서 심마니 옷을 입고 인삼캐기 체험을 할 수 있다. 인공 숲이 조성된 작은 무대인데, 그 안에 더덕 도라지와 함께 인삼이 숨겨져 있다. 인삼을 찾게 되면 ‘심봤다’고 소리치면 된다. 협소하긴 하지만, 보물찾기 하듯 인삼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부여 고려인삼창에서 가장 인상적인 볼거리는 홍삼의 제조과정이다. 홍삼 제조장은 인삼박물관과 연결돼 있다. 세계 40개국으로 수출되는 정관장 홍삼이 모두 이곳에서 생산된다. 홍삼은 수삼(막 캐서 마르지 않은 인삼)을 쪄서 말린 것이다. 수삼은 금방 삭아버리기 때문에 건삼이나 홍삼으로 만들어 보관해야 한다.

그런데 홍삼은 단순하게 저장을 위한 가공상품이 아니다. 수삼을 찌는 과정에서 새로운 성분이 강화되면서 품질이 극대화된다. 홍삼이 6년근만을 사용하고(건삼은 보통 4년근이다) 최고가의 인삼가공상품으로 팔려나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인삼찾기 체험장에서 ‘심봤다’를 외치고 있는 한 체험행사 참여자

홍삼 공장에 들어서니 모자를 쓴 직원들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나오는 수삼을 갈무리하느라 여념이 없다. 수삼을 씻고, 말리고, 이를 증삼기에 넣어 증기로 찐다. 인삼의 전분이 호화(糊化, 전분의 치밀한 구조를 무너뜨리는 작업)되어 소화가 잘되게 변하고, 조직은 견고해지고 붉은 기운을 띠게 된다.

홍삼을 자연광에 건조시키는데, 다 건조되면 수삼에 함유된 75%의 수분이 14%로 떨어져, 보관이 용이하게 된다. 이렇게 가공 처리된 홍삼이 150가지의 상품으로 포장돼 세계로 팔려나간다.

인삼박물관과 홍삼 제조장을 지나 밖으로 나오니, 인삼향과 홍삼 기운으로 내 몸이 단단해진 것 같았다. 인삼 잎과 인삼딸도 단단히 보아두었으니 이제 산에 가면 산삼도 캘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신 박물관 입구의 매장을 지나오면서 내 지갑이 홀쭉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인삼박물관 찾아가기위치 충남 부여군 규암면 고려인삼창 본관.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5시. 연중무휴(주말 및 공휴일은 사전예약),

문의 041-830-3242.

홍삼 제조과정을 보려면 예약해야 한다.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간

고속도로-서논산 나들목-홍산 서천 방면-백제교-고려인삼창

 

영어마을 안산캠프
더듬더듬 영어생활 “그래도 Good!”

일요일 아침 체육관에서 요가를 하고 있는 영어마을 안산캠프 참가자들.

영어공부를 어떻게 시킬까. 자녀를 둔 대한민국 부모라면 누구나 다 하는 고민일 것이다. 학교 영어 수업은 어쩐지 미덥지 못하고 차별화되지도 않아, 학원에 보내고 가정방문 선생도 붙여보지만 성과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방학 때면 태권도학원이나 영어학원의 행사에 얹혀, 4주 해외 어학연수를 욕심 내보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다. 적게 잡아 300만원이다. 그래도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자녀를 두고 이런 고민을 하는 부모는 덜 극성스런 편이다. 초등학교 때 어학연수를 보내거나, 1년짜리 교환학생으로 보내기도 한다. 교환학생으로 가는 데는 1년에 1500만원 정도 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의욕이 넘치는 부모는 부모 중 한 사람이 아이를 데리고 아예 외국으로 가버린다. 그래서 혼자 남아 교육비와 생활비를 대고 철 따라 한번 날아갔다 오는 ‘기러기 아빠’들도 흔한 세상이 되었다.

교육열 높은 게 나쁠 거야 없겠지만 부모들의 행복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식 교육에 전력하는 것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을 간파해서일까, 경기도는 2004년 8월 대부도에 영어마을 안산캠프를 열었다. 경기도 공무원연수원을 개조해 만들었는데, 입구에 ENGLISH 영문자가 우리 마음속에 얹힌 ‘그놈의 영어’ 처럼 거대하게 세워져 있었다. 영문자 옆의 입구를 지나 넓은 운동장을 넘어서니 산자락을 등지고 선 콘도미니엄 규모의 캠프가 나왔다. 캠프 마당에 서니 대부도 앞바다가 햇빛에 얼비쳐 눈부셨다.

외국인 교사의 도움을 받으며 가족끼리 책을 만들고 있다.

주말에는 가족 단위 접수 ‘경쟁률 높아’

안산 캠프에서는 두 개의 상설 행사가 진행된다. 하나는 경기도 내 중학교 2학년생을 대상으로 한 주중 5박6일짜리 영어캠프다. 200명이 동시에 참여할 수 있는데, 학생들이 전공과목(연극 음악 미술 과학)을 선택해 실습 위주로 영어만을 사용하며 이뤄진다. 다른 하나는 주말 가족반이다. 내가 참가 신청을 한 것은 주말 가족반이었다. 참가 자격은 4명 이상 6명 이하의 가족 단위인데, 19세 이상의 보호자가 있어야 하고 5세 미만은 참여할 수 없다.

나는 10월과 11월에 걸쳐 인터넷으로 참가 신청서를 냈지만, 거푸 떨어졌다. 참가 신청자들이 많아 경쟁률이 높았다. 25세 이상 100명을 모집하는데 2500명이 지원했다. 그러니 떨어지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혼자 주말 가족반 수업을 지켜보기로 했다.

주말반 일정은 토요일 오후 4시부터 일요일 오후 4시까지 24시간 운영된다. 경기도민은 1인당 3만원이고, 그외는 1인당 6만원이다. 경기도민이라면 4인 가족이 세 끼 식사를 하고 하룻밤 지내는 데 12만원이 드니, 비교적 저렴한 가격이다. 그래서인지 영어캠프가 생긴 뒤로,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관련 기획자들이 죄다 다녀갔다고 한다.

캠프에 입소하면 먼저 방을 배정받는다. 그냥 이름을 확인하고 열쇠를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이민 왔다고 여기고 공항에서처럼 입국 심사를 밟는다. 간단한 영문 인터뷰를 하고 나서 방을 배정받는다. 인터뷰를 하는 사람은 물론 외국인이다. 수업은 저녁식사를 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이곳에서 수업이나 학습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인치권 팀장은 “영어가 생활 속에 있지 않고, 교과서 속에 있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이곳에서는 교재가 없습니다. 놀면서 배우고, 체험하면서 깨닫습니다. 외국인들과 직접 어울리면서 친숙해지는 것이죠”라고 말했다.

   

외국인 교사의 설명을 참가자들이 한 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담아듣다.

인 팀장의 말대로 저녁식사 뒤에 탐정놀이가 준비돼 있었다. 전동면도기처럼 생긴 탐정카메라가 가족당 한 대씩 제공되고, 다섯 가지 과제가 영문으로 주어졌다. 로비에 있는 선생님 등에 올라타기, 체육관에서 둘이서 동시에 물구나무서기, 도서관에서 한 사람이 혀를 말아올려 코끝에 대기 따위의 주문을 수행하고 이를 탐정카메라에 담는 일이었다. 제한된 시간에 해야 하기에 서로의 의견이 충돌하면서 소란스럽게 진행되었다.

탐정놀이가 끝나고, 저녁 9시부터는 댄스파티가 열렸다. 무대 위와 아래에서 외국인 10명과 한국인 2명의 교사가 참가자 100명을 이끌었다. 꽤 많은 수의 선생님이었다. 외국인 교사의 동작을 주저 없이 따라하는 이들은 초등학생들이었다. 차츰 분위기가 무르익자, 음악에 취해 춤을 추는 사람이 늘어났다. 의외로 ‘아버지’들의 행동이 적극적이었다. 용인 죽전에서 온 한 어머니는 “애들 아빠가 더 신났어요”라고 했다. 물론 자녀들에게 솔선수범을 보이려는 아버지의 의욕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었다.

밤 10시에 토요일 행사가 끝나고, 각기 배정받은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는 침대 두 개와 목욕탕, 텔레비전, 에어컨이 있었다. 베란다 바깥으로는 대부도의 바다가 보였다.

이튿날 아침은 체육관에서 체조 겸 요가로 하루 일정이 시작됐다. 물론 모든 대화는 영어로 이루어진다. 아침을 먹고 나서 오전 첫 번째 학습은 가족이 함께 그림책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영문으로 해설을 달았다. 책자가 완성되면, 무대 앞으로 나와서 설명을 했다. 쑥스러워하면서도 더듬더듬 가족을 소개하고, 그림을 설명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대견스럽게 보였다.

오전 두 번째 학습과 오후 학습은 조별로 나누어 음악, 과학, 미술, 요리 실습이 이뤄졌다. 음악 시간엔 외국 춤과 노래를 배우고, 과학 시간엔 태양열 전동차를 조립 경주하고, 요리 시간엔 인도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고, 놀이와 체험과 학습이 잘 버무려져 있었다.

마지막 행사는 전날 탐정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감상하는 차례였다. 행사가 끝나고 서울 계원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아들을 데리고 온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어떤가요? 재미있었습니까?”

“아이를 영어학원에 보내긴 하는데, 외국인을 직접 접할 기회가 없어서인지 겁먹고 말을 못하더니, 하루 지나니까 한결 부드러워졌어요. 당장 큰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진 않아요. 아무튼 전체적으로 좋았어요.”

참가자들 대부분이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물론 자녀들보다 부모들의 만족도가 더 커 보였다. 대한민국 부모들의 가상한 열정을 보는 듯했다. 영어마을 안산캠프를 빠져나오는데, 안산캠프가 외화유출을 막는 파수병처럼 보였다. 쓴웃음을 지어야 할지, 달디단 웃음을 지어야 할지 순간 혼란스러웠다.

영어마을 안산캠프 참가 신청

주중 5박6일 프로그램은 경기도 내 중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함. 1인당 8만원. 경기도교육청에서 신청서를 받아 경기도영어문화원에 신청. 1박2일 주말 가족반은 매월 둘째 주에 다음달 신청자를 받아 추첨 선발함. 경기도민은 1인당 3만원, 경기도민이 아니면 1인당 6만원.

www.english-village.or.kr/ansan, 문의 031-223-9707 

 

문경 옛길
왕건 설화 깃든 ‘토끼비리’ 넘어볼까

삼국시대부터 6·25전쟁 때까지 모든 전란은 이 고모산성 길을 거쳐갔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듯, 길은 끊임없이 열린다. 2004년 말에도 대구-포항 고속도로, 강릉-동해 고속도로, 충주-상주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새로 뚫렸다. 이 길 가운데 인상적인 구간은 중부내륙고속도로다. 이미 개통된 곳을 포함해서 영동고속도로 여주에서 경부고속도로 김천까지 연결된 길이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29km가 단축돼 대구를 거쳐온 차량이 대전을 거치지 않고 서울로 곧장(제한속도 시속 110km로) 올라가게 됐다. 이 길이 인상적인 이유는 상주-점촌-문경-수안보-충주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영남대로와 나란히 건설된 고속도로여서 신(新)영남대로라 부를 만하기 때문이다.

새 길이 열리면 옛길은 쇠퇴한다. 이화령이 생기면서 문경새재가 잊히고, 이화령터널이 생기면서 이화령이 잊히고, 죽령터널이 생기면서 죽령 길이 잊혔다. 그렇게 잊힌 길들이 많다. 하지만 요즘은 전통이 상품화되면서 옛길도 새삼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됐다. 더욱이 참살이(웰빙) 바람이 불고 자연 속에서 걷는 트래킹이 여행의 목적이 된 세상이니, 옛길은 훌륭한 문화상품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 옛길을 가장 발빠르게, 지역 전략상품으로 포장해 홍보하고 있는 곳이 문경이다.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뚫려 서울부터 문경까지의 152km 길을 2시간도 안 돼 다다를 수 있게 됐다. 접근성이 좋아졌으니 외지 사람도 쉽게 불러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문경에 잘 알려진 옛길로 문경새재가 있다. 문경 제1 관문인 조흘관에서부터 고갯마루인 제3 관문 조령관까지 10km는 차량이 통행하지 않는 흙길이어서 최고의 트래킹 코스로 꼽힌다. 계곡을 따라 걷다보면 관에서 운영한 숙박시설이 있었던 조령원터, 길 가던 이들이 들렀던 옛 주막, 새로 부임한 경상도 관찰사가 관인을 인수하던 교귀정, 조선 후기에 세워진 ‘산불 됴심’ 표석, 고려 공민왕의 행궁이 있었던 어류동 대궐유지를 거쳐 고갯마루에 서게 된다. 조령관이 있는 고갯마루를 넘으면 충청도 땅 충주 수안보로 이어진다. 조선시대에 경상도 선비들이 이 길을 따라 한양을 오갔다. 특히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은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이요, 죽령을 넘으면 죽죽 미끄러진다 하여 문경새재를 거쳐갔다. 게다가 문경(聞慶)은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곳이 아니던가.

토끼비리. 바위 위의 움푹 파인 곳이 짚신을 신고 지나다녔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발자국이다.

문경에는 또 하나의 잘 알려진 옛길이 있다. 158년에 열린 죽령보다도 2년 먼저인 156년 공식적으로 길이 열렸다는 하늘재가 있다. 하늘재는 계립령·지릅재·마목현·대원령으로도 불렸는데, 고구려 온달 장군이 “계립현과 죽령의 서쪽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던 그 고갯길이기도 하다.

현재 하늘재는 문경 관음리에서 올라가는 길은 아스팔트로 포장돼 있고, 충주 미륵사지로 내려가는 길은 옛길 그대로 숲이 우거진 산길이다. 숲길은 두 사람이 활개 치며 걸을 만한데, 내리막으로 2km 정도 걸으면 미륵사지가 나온다. 이런 특성 때문에 여행사에서 문경 하늘재에 관광객을 풀어놓고, 미륵사지 주차장에 버스를 대기시키는 상품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하늘재에서 내려가면 미륵사지의 입장료는 따로 내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문경에 문경새재 하늘재보다도 훨씬 멋들어진 옛길이 있다. 일제시대 때 영남 제1경으로 꼽혔던 진남교반 일대로, 이 주변에 고모산성 길과 토끼벼랑길이 있다. 교반은 두 개 이상의 다리가 있을 때 붙이는 명칭인데, 새롭게 놓은 두 개의 다리 모습이 태극문양으로 굽이치는 물줄기 산자락과 어우러져 자못 신기하고 화려했던 모양이다. 지금은 철길 하나에 다리가 세 개나 놓여 어수선하지만, 산세와 물줄기는 예사롭지 않다. 더구나 진남교반 위쪽의 복원된 고모산성은 마치 산마루에 흰 띠를 둘러놓은 듯이 굳건하다.

   


토끼비리에서 바라본 진남교반. 다리들이 모두 한곳으로 몰린 요새다(왼쪽) 기적소리 멈춘 철로에 새로운 레포츠 철로자전거가 달린다.

고모산성에 올라 진남교반을 내려다보면 물길이 난 좁은 계곡 사이로 찻길이며 철길이 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된다. 산이 막아서고 강이 굽이치는 곳에 달리 길이 없다. 토끼 한 마리가 지나갈 만한 가파른 벼랑으로 길이 나 있을 뿐이다. 천리 길 영남대로가 폭 50cm로 좁아지는 곳이 바로 여기다. 이 지방 사투리로 토끼비리라고 부르는데, 문헌에는 관갑천으로 소개돼 있다.

이 길을 처음 낸 사람이 왕건이라고 한다. 왕건이 견훤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남하하다가 이곳에서 길이 막혔다. 마침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따라 도망하는데, 그 토끼를 쫓아가다 보니 길을 낼 만한 곳을 발견하고 벼랑을 잘라 길을 냈다고 한다. 그래서 토천(兎遷), 토끼비리(벼루·벼랑)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고모산성의 성황당 앞 돌고개. 떡집 아가씨와 과거 보러 가는 선비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길목이다.

이 길을 지나야 새재도 넘을 수 있으니, 군사 요충지로 지목됐고, 일찍이 고모산성도 쌓게 되었다. 지금도 이 길은 경사 심한 벼랑에 걸려 있어서 목책을 세워 추락을 방지하고 있다. 그런데 토끼비리의 바위 벼랑길에는 짚신을 신고 다녔던 옛사람들의 발자국이 마치 공룡발자국 화석처럼 깊게 파여 있다.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폭이 좁아 달리 디딜 곳이 없어, 오로지 한 곳만을 골라 딛다보니 파인 조선시대 사람들의 발자국이다. 비록 단단하고 반질반질한 바위에 찍힌 발자국이지만, 그 자국이 훼손될까봐 딛기조차 조심스럽다. 이 길을 사람만이 아니라, 말까지 함께 지나가야 했으니 그 아슬아슬한 형국이 눈에 선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영남대로를 치고 올라올 때 이 길목에 이르러서는 군사가 지키고 있을까봐 두번 세번 염탐한 뒤에, 병력이 지키지 않는 것을 알고 춤추면서 지나갔다고 하는 길이다.

토끼비리는 가슴 아픈 길이고 놀라운 길이며, 걷기에 아까운 길이다.

옛길을 걷는다는 것은 옛일을 되새김질하는 일이기도 하다. 굳이 지난 일을 되새김질하는 것은 그 속에 이 땅에서 살다 간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토끼비리를 내려오면 석탄을 운반하다 이제 긴 휴식에 들어간 철길을 건너게 된다. 문경시는 이 철길을 활용, 철로자전거를 개발해 운영할 예정이다. 반년 동안의 시험 운행을 마치고, 2005년 2월부터 운행할 계획이다. 옛길에 새로운 길 하나가 보태지는 것이다. 옛길이 새 길이 되기도 하는 게 또한 세상 일이다

 

서울 야경 순환열차
추억 나들이 짧지만 긴 여운

개조한 순환열차.

주중, 도심 한복판에서 일을 하다, 혹은 길을 걷다 말고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 웬만한 데는 돌아올 일이 걱정돼 출발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이럴 때, 딱 좋은 여행이 있다. 게다가 창 가득 풍경을 싣고 달리는 기차 여행이기까지 하다. 시간은 수요일과 목요일 저녁 7시15분, 서울의 한복판 서울역에서 기차는 당신을 기다린다.

퇴근한 뒤거나, 아이들에게 이른 저녁을 차려주고 훌쩍 나온 사람들이 기차에 오른다. 기차는 당신이 보아왔던 여느 기차보다 쾌적하고 아름답다. 한 량에 3억원이라는 무궁화호 열차를 한 량당 2억원씩 들여 개조한 것이다. 모두 7량으로 이루어진 기차는 전체 좌석 198개, 전망 창을 갖춘 전망실과 유리 칸막이가 있는 아늑한 별실을 뒤에 달고, 가운데는 이벤트실과 카페, 나머지는 일반 객실이 이어져 있다. 객실의 안정감 있는 나뭇잎 빛깔의 의자가 널찍하게 느껴진다. 객실 바닥과 벽은 물론 화장실이 딸린 서비스 공간까지도 온통 원목 무늬 소재로 마감돼 있어 한결 아늑하고 깔끔한 분위기다. 화장실도 작으나마 호텔식 분위기를 한껏 냈다.

오랜만에 이 기차에서 친구를 만나는 이들도 보인다. 왜 뜬금없이 기차를 타자고 했냐며 친구는 웃는다. 여고 동창생 같은 아주머니들도 보이고, 연인들도 보인다. 멀리 갈 수도 아주 가버릴 수도 없지만, 떠난다는 일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드디어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분 좋은 가슴의 동계(動悸)가 시작된다. 기차는 서울의 중심을 벗어나 외곽으로 미끄러져간다.

술을 싫어하는 분에게는 무알코올 음료가 제공된다.

서울역을 출발해서 신촌, 능곡, 송추, 장흥, 의정부, 청량리를 거쳐 한강의 강변을 지나 용산에서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오는 서울 야경 순환열차에 당신은 올라 있다. 이 열차는 1963년에 태어나 2004년 5월에 생을 마감한 교외선 열차의 후신이다.

기차에는 칵테일과 마술, 그리고 음악이 실려 있다. 시작은 칵테일 페스티벌이다. 젊은 친구들이 현란한 몸동작으로 칵테일 쇼를 보여주고, 그렇게 해서 만든 칵테일을 승객들에게 한 잔씩 돌린다. 안주로 삼을 만한 다과도 한 접시씩 나눠준다. 칵테일 향기에 한결 느긋해진 눈앞으로 수색과 화전의 들과 능곡의 아파트 불빛 숲이 지난다. 이번에는 몸집이 새처럼 작은 검정 양복의 앳된 마술사가 나타난다. 마술사는 겁도 없이 코 앞으로 손을 들이밀며 마술을 시작한다. 두 눈 똑똑히 뜨고서도 승객들은 눈속임을 당한다. 기분 좋은 속임수에 탄성이 절로 터진다. 이 칵테일 페스티벌과 마술쇼는 객차를 직접 돌며 찾아다닌다.

   


이벤트홀에서 열리는 라이브 공연은 20대 청춘으로 시간을 돌려놓는다.

저녁을 먹지 못하고 기차에 올라 속이 출출하다. 작정하고 나선 사람들은 챙겨온 도시락을 꺼내 펼치기도 한다. 하지만 도시락이 없어도 상관없다. 카페 칸에 가면 저녁을 먹을 수도 있고 맥주를 마실 수도 있다.

북으로 달린 기차가 능곡을 지나 원릉을 향해 가는 들판에 이르자 달이 기다리고 섰다. 쓸쓸하고 한적한 서울의 북쪽 단층집 마당을 비추는 가로등이 이어 차창에 실린다. 이벤트홀에서 음악 라이브 공연이 시작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이벤트홀에는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찼다. 초대 가수는 거의 매번 바뀐다. 이번의 라이브 공연 주제는 ‘추억의 발라드’다. 역시 음악은 라이브가 최고다. 사랑과 이별에 대한 가사가 시간을 되돌려놓는다. 중년 부부들도 어느새 청바지 차림의 스무 살 청년이 되어버린다. 참으로 오랜만에 유행가 가사의 주인공이 되어본다.

발라드 무대가 끝나자 이번에는 ‘낭만의 라이브 콘서트’가 이어진다. 정종훈이라는 가수가 나와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전인권에서 조용필, 임지훈에서 윤도현까지 원하는 대로 불러준다. 모두가 손뼉을 치며 신청곡을 따라 부른다. 따뜻한 바닷물 같은 음악을 실은 채 기차는 이제 일영을 지나 장흥을 건너 송추의 밤풍경을 차창에 싣고 달린다.

사람들은 노랫말 속 주인공이 되어 박수 치고 함께 노래 부르며 의정부를 지나 성북, 청량리, 서울로 되돌아 들어온다. 한껏 고조되었던 분위기는 앙코르에 이은 앙코르 곡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이제 모두 자리로 돌아가 추억 속에 빠졌던 자신을 건져올려 말리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차창에는 야경만이 아니라 내 모습도 어린다. 기차가 응봉에 접어들 무렵 객차의 불이 일제히 꺼진다.

이제부터는 길고 조용히 펼쳐지는 한강 다리의 불빛과 강물에 어린 불빛을 감상한다. 제자리에 앉아서 감상해도 좋고, 좁긴 하지만 전망실로 옮겨도 좋다. 강물에 어린 가로등 빛이 촛불 같다. 오팔처럼 아름다운 한강 다리들이 나타난다. 이토록 반겨주는 화려한 서울의 불빛은 살아오는 동안 처음인 듯하다.

기차가 서울역 제자리로 되돌아온 시각은 9시40분이다.

   

마술 쇼를 선보이고 있다.

연애할 때 와봤던 곳을 처음으로 다시 가봤다고 즐거워하는 중년의 부부가 팔짱을 낀 채 총총히 사라진다. 한결 애틋해진 연인들은 아직 기차 부근을 떠나지 못하고 사진을 찍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긴 세월을 훌쩍 뛰어넘게 해준 여행을 마치고 2차를 하러 떠나기도 한다. 함께 밤나들이를 나온 동창생들끼리 “다시 볼 때까지 안녕하라”며 살뜰히 손을 흔들어주기도 한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을 때 서울 야경 순환열차에 올라보라. 도심 속에서 짧은 시간을 함께했을 뿐이지만, 생과 꿈의 한 부분을 공유했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여행 정보

요즘은 인기가 좋아 보름 전에 예약해야 야경 열차를 탈 수 있다.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밤 7시15분, 서울역에서 출발하며 비용은 2만9000원이다. 이 관광열차가 다른 날에는 강원도 눈꽃여행도 다닌다. 정동진 백두대간 눈꽃기차여행(2월4일까지 운행) 무박 2일, 서울역을 출발해 청량리를 거쳐 정동진과 백봉령, 정선을 거쳐오는 여정이다. 주중 4만9900원, 금·토요일은 5만6600원이다. 여행상품은 KTX 관광레저㈜가 주관한다. 예약 02-393-3100, 문의 1544-7788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관광객들.

 

 

 

 

 

 

 

 

 

 

경북 영주 ‘선비촌’
타임머신 타고 조선시대로 떠나요

순흥 선비촌의 전경.

중앙고속국도를 타고 충북 단양을 거쳐 죽령터널을 빠져나오면 경북 영주시가 나온다. 영주 IC를 지나 오른편으로 들어서면 인삼으로 유명한 풍기다. 거기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순흥인데, 작고 야트막한 집들을 지나자 학자수라고도 불리는 적송들이 버티고 선 숲이 나타난다. 이 숲 안에 소수서원이 있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으로 불리는 곳이다. 주세붕이 안향의 영정을 모시고 있던 사묘에 학사를 세우고 ‘백운동’이라는 이름의 서원을 꾸렸다. 이것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가 임금인 명종에게 새 이름을 지어줄 것을 건의하여, ‘소수’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임금에게 이름을 얻은 서원을 사액서원이라 하는데,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기도 하다.

영주 땅은 유학의 본고장이다. 유생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사방 10여리를 가도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소수서원 지나 청다리라고도 불리는 제월교가 나오는데, 이 다리는 우리나라 모든 아이들을 움츠러들게 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설의 본원지이기도 하다.

청다리를 지나 산 아래 들판에 7년 전부터 예사롭지 않은 공사가 진행됐다. 그 공사가 지난가을에 끝났다. 산자락 아래 일곱 채의 기와집과 다섯 채의 초가가 강학당, 정자, 누각, 저잣거리, 주막거리, 대장간, 방앗간 등과 어우러진 마을로 태어났다. 그 마을이 영주시가 7년 동안의 공사로 만들어낸 선비촌이다.

무인의 집에서 투호를 하고 있는 관람객.

짧지 않은 공사 기간이 말해주듯 선비촌은 뚝딱 흉내만 낸 곳이 아니다. 경상도 각처에 흩어져 있는 전통 가옥들을 1cm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재현해놓은 마을이다. 마을 위쪽으로는 유학을 가르치던 강학당이 있고, 그 위로는 소수박물관이 있다. 소수박물관과 선비촌, 소수서원은 서로 연결돼 있어 입장권 한 장으로 자유로이 오갈 수 있다.

강학당에서는 실제로 유교 강의가 진행되고 있고, 떡메를 직접 쳐가며 떡을 빚어 파는 저잣거리에는 문방구·도자기·옷감 등 전통적인 소품들을 파는 점방들이 골목을 이루고 있다. 집들을 재현한 솜씨 하며 한갓진 조선의 골목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

   


학생들이 선비촌에서 한학을 배우고 있다.

조용한 가옥에 들어서서 방 안을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방 안 허공에 영상이 떠오른다. 그 집에서 이루어지던 전통 생활의 일부를 보여주는 영상물이다. 가구들이 잘 차려진 방 안을 들여다보면 사람 크기의 인형들이 앉아 자녀를 훈육하는 사설과 노래를 들려주기도 한다. 센서가 방문객의 기척을 알아채서 작동되는 첨단 시설로 유교의 전통 문화를 재현해 보여주는 것이다. 문인이나 무인, 혹은 중인이나 주민들의 집들에도 저마다 제기차기나 팽이치기, 장기, 널뛰기, 투호 등을 체험할 수 있게 설비해놓았다.

그런데 정말 반가운 것은 낮 동안 전시 공간이었던 가옥들이 밤에는 체험 공간으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아침 9시까지 이 방은 일반인들에게 숙소로 제공되고 있다. 값도 아주 싸서 마당 딸린 두 칸짜리 초가를 통째로 빌리는 데도 모텔 숙박비 정도밖에 들지 않는다.

추운 날, 아이들과 함께 기와가 올려진 중인의 집 중 사랑채를 빌려 들어갔다. 약방으로 꾸며진 곳으로, 방 안에는 약장이 있고 서랍마다 약초들이 잘 정돈돼 있으며 마루 천장에는 약봉지들이 즐비하게 매달려 있다.

해가 진 뒤 거리는 어둠뿐이다. 길가의 바윗돌이 조명등 구실을 하지만 도회의 거리와 사뭇 달라서 나갈 일도 나갈 곳도 없다. 텔레비전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작은 방에 오랜만에 모인 식구끼리 노는 수밖에 없다. 간단한 도구로 할 수 있는 놀이나 끝말 잇기, 무서운 옛날이야기 하기 등. 그러고 있노라면 밖에서 죽을 사 먹으란다. “찹쌀떡, 팥죽, 호박죽”을 외친다. 팥죽을 한 그룻 시켰더니 무척 뜨겁다. 구름다리 건너 저잣거리에서 절절 끓던 팥죽이다. 밤이 더욱 깊어져 네 명의 가족이 2인용 방에 나란히 누웠다. 옛날 같으면 이런 방에 일곱 명은 잤다고 호언을 해놓고 자리에 누웠다. 일곱이 아니라 여덟 명도 잤겠다. 어찌나 외풍이 매섭던지 식구끼리 끌어안고 자느라고 좁디좁은 방이 오히려 남는다.

이러고 있노라니 참으로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 실컷 복닥대본다는 느낌이 든다. 모든 문명의 이기가 사라지고 오직 한기와 어둠만 남아 있는 선비촌에서 보낸 하룻밤은 가족이 똘똘 뭉쳐 놀고 끌어안고 자는 가족용 MT 여행이 된다.

체험행사 참여자들이 지게를 지고, 널뛰기를 하고 있다

해가 뜨자 소세간에서 소세(梳洗)를 하고 나와 햇빛이 한가로운 길을 걸으며 널도 뛰고 제기도 차고 집집마다 들어가 구경도 하고 뒤란의 토끼와 수탉, 냇가의 오리떼와 마을 안쪽의 상여가 들어찬 곳집, 남자들이 대청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노는 일종의 남성 전용 별장인 정사들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알던 한옥보다 개인의 필요에 따라 훨씬 다양하고 쓸모 있게 지어진 집들은 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주인의 생활과 직업이 느껴질 정도로 개성이 넘친다. 마을을 돌아 저잣거리를 구경하고 영주의 특산물인 풍기 인삼과 영주의 쇠고기, 순흥의 묵밥 등을 파는 주막거리에 들러 밥을 배불리 먹고 나면 영주의 선비로서 하루를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영주시에는 이곳 말고도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곳이 많다. 읍내리 쪽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6세기경의 벽화고분과 불교의 목조 건물 중 가장 아름답다는 부석사도 빼놓지 말고 돌아볼 곳이다.

영주시의 선비촌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훌륭한 문화체험 공간이다. 너무 소문이 나서 외국 손님치레로 바빠지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가보기를 권한다. 조선이라는 과거로 돌아가 넓디넓은 우주 속에 작은 단칸방, 그 안에 가족들과 알곡처럼 들어앉아 하룻밤의 진한 추억을 만들 수 있다.

여행 메모

선비촌 숙박 예약 054-638-7114/ 입장료 어른 3000원, 어린이 1000원

소수서원 054-633-2608

부석사 054-633-3464

읍내리 고분벽화 054-639-6668

 

부래미마을
갈대 우거진 생태공원 짱이야

시골에 오면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잘 논다.

봄도 되고 했으니 땅기운을 맛보기 위해 농촌체험 마을을 가보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물색하다가 부래미마을을 주목하게 됐다. 마을 사진을 보니, 야트막한 집들이 물가에 모여 있는 한적한 풍경이었다. 동네 이름도 우리말 같아 친근하다. 그 마을에 연락했더니 한 가족이 와도 농촌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부래미마을은 경기도 이천시 율면 석산2리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저수지가 있고, 저수지 앞의 큰 팻말에 마을 안내도가 그려져 있다. 저수지를 지나니, 십장생도와 송아지 몰고 가는 아이의 벽화가 그려진 마을회관이 있다. 새로 지은 마을회관에서 농촌체험 행사를 관장하는 사무장 최형두 씨가 나왔다. 지난해 결혼해 아내와 함께 이 마을로 들어온 젊은이로, 마을의 복덩이다.

체험행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우당도예원으로 향했다. 마을 안쪽에 자리잡은 도예원을 찾아가는데 부래미사슴목장, 고추농장, 동물농장, 복숭아농장 팻말들이 눈에 띄었다. 촌마을이라고 하여 ‘그냥 농사 조금 짓고 닭이나 돼지 기르는’ 줄 알았는데, 열심히 농사짓고 정성껏 가축을 기르는 심성이 느껴졌다. 마을 안쪽 산자락 사이에 도예원이 있었다.

경북 청송에서 80년대 중반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제 40대 초반에 들어선 가장들이 이끄는 대여섯 가족이 모여 있었다. 조촐한 동창 모임을 이 마을에서 하는 중이었다. 도예원에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염색과 도자기 만들기였다. 체험행사의 원조 격인 프로그램들이다. 도자기 만들기는 일반 축제나 체험장에 감초처럼 들어가는 행사다. 염색도 마찬가지. 그중에서도 황토염색이 가장 흔하고 쉽게 할 수 있는 행사다. 우당도예원에서도 이 두 가지를 주로 한다. 손맛을 볼 수 있고, 만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며, 또 완성된 물건을 가져갈 수 있으니 딱 좋은 체험행사다.

황토염색 체험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안 되었는데도 바비큐 파티가 벌어졌다. 바비큐 불 위에 된장국을 올려 식사를 하고 오후 첫 행사로 도자기를 구운 다음, 마을회관으로 내려가 두 번째 행사인 인절미 만들기를 했다. 부녀회장이 찹쌀고두밥 10kg을 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된 농기구와 짚공예품을 전시해둔 마을회관 창고에 떡판을 깔았다. 인절미를 많이 먹어보긴 했지만 떡메는 처음이라며 어른과 아이들이 번갈아가며 떡메를 쳐댔다. 웃음소리가 떡메 치는 소리만큼 높았다.

생태공원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마을 이장 이기열 씨(왼쪽),분양받은 배나무에 이름표를 달아놓았다.

20분쯤 떡메를 치고 나니 찰진 떡덩어리가 되었고, 부녀회장이 풀어놓은 콩가루 옆에 모여 앉아 모두들 인절미를 뭉친다. 체험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먹는 것을 만들고, 만든 것을 먹는 행위다. 이런 행사가 반드시 들어가야 사람들의 본능적인 만족도가 올라간다. 그런 점에서 인절미 만들기는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켜주는 행사였다.

   


도자기 만들기는 엄마, 아빠와 함께 하는 찰흙공예 시간이다.인절미를 만들기 위해 떡메를 치고 있다.마을회관 앞에서 굴렁쇠를 굴리고 있다(왼쪽부터).

다음은 마을 이장의 안내로 짚공예 체험장으로 이동했다. 비닐하우스 안에 짚멍석을 깔아둔 곳으로, 겨울에도 난방이 잘된다고 한다. 두 손을 비벼서 새끼를 꼬는 것이 기본 교육이다. 그런데 참여한 가장들이 시골 학교 출신들이라, “아빠는 어려서 이거 제대로 못 꼬면 할아버지한테 두들겨 맞았어!” 하면서 잘도 꼰다. 마을 이장 이기열 씨는 가르쳐줄 것도 없다면서 누가 길고 곱게 꼬는지 경합을 붙인다. 가장 잘 꼰 사람에게는 우당도예원에서 빚은 도자기 한 점이 경품으로 주어졌다.

이 정도의 프로그램이라면, 부래미마을은 다른 농촌마을의 체험행사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부래미마을에는 특별한 게 있다. 마을 이장 이 씨가 “생태공원에 가보자”며 앞장을 섰다. 생태공원이라 하여 도심 속의 공원이나 식물원을 연상하면 곤란하다. 마을에 습지가 있다. 농사를 지으면 질 좋은 벼를 수확할 수 있는 땅이었는데, 몇 해 묵혔더니 갈대가 우거지고 새들이 찾아오는 습지로 변했다. 그 습지 위에 400m가량 되는 나무 통로를 만들었다. 습지에 연꽃 같은 예쁜 식물을 심을까 했는데, 생태학자들의 의견에 따라 그대로 둔 상태다. 이 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식생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아주 소박하고 따뜻한 산책로이자, 자연학습장이다.

생태공원 위쪽에 우렁이양식장이 있다. 이 마을이 장차 우렁이마을이라는 별칭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한다. 마을 앞 저수지에 우렁이가 사는데, 그 우렁이의 일부를 양식장으로 이주시켜 길러서 우렁쌈밥이나 우렁이회 따위의 마을 특화음식을 낼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마을은 정보화 마을답게 인터넷이 잘 보급돼 있다. 인터넷을 이용해, 체험행사 진행의 일부분을 담당한다. 50명이 한꺼번에 찾아와도, 마을회관 체험관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은 단 한 명이다. 반찬은 미리 준비하는데, 집집마다 준비해둔 반찬이나 음식을 구매한 다음 부족한 반찬거리는 집에서 별도로 마련한다. 풍물 가르치는 이는 풍물교육을, 민박 담당은 민박을 맡아 약속된 시간에 담당자가 나와서 사람들을 인솔해간다. 배밭과 복숭아밭이 많은데, 배나무는 봄철에 한 그루당 12만~13만원씩에 분양한다. 분양받은 이들은 꽃 솎아줄 때, 열매봉지 쌀 때, 열매 딸 때 마을을 찾아와 농사체험을 한다. 배나무를 분양한 농장주인은 배나무를 도맡아 기르면서 주기적으로 배나무의 성장 상태를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인터넷에 올려준다. 따라서 배나무를 분양받은 가족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배나무의 상태를 살필 수 있다.

부래미마을에서 자랑하는 것은 현대식 건물이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전통가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소박한 시골 풍경 그대로를 지닌 곳이다. 겉보기에는 젊은 사람들이 떠나간 한적한 농촌마을과 다를 바 없지만, 차분하게 들여다보면 무덤 앞 넓은 잔디밭은 게이트장으로 쓰이고 으슥한 산비탈은 눈썰매장이 되며 마을 뒷동산은 산책로가 된다. 배꽃이 피고 복숭아꽃이 피면 꽃잔치를 하고, 농촌마을 풍경화 그리기 대회도 연다.

내 고장에 대한 자부심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다. 시멘트 벽에 둘러싸여 사는 도시인들에게 문득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소박하고 훈훈하고 자연스러운 정서로 가득 찬 곳이 부래미마을이다

 

녹차 만들기
진초록 녹차 잎에 마음을 적시다 

화개동천 산기슭에서 찻잎을 따는 아낙네들.

섬진강 가의 화개로 녹차 여행을 떠났다. 화개는 4월 초에 십 리 벚꽃길이 열리는 곳이다. 그 꽃구경 인파가 물러나면, 화개 사람들의 일손이 바빠진다. 막 벌어진 녹차 잎이 윤기를 더하기 때문이다. 곡우(양력 4월20일) 무렵이면 녹차 중에서 최상급으로 치는 우전(雨前·곡우 전에 딴 찻잎)이 나오고, 연이어 세작·중작·대작으로 커진 잎들이 나온다. 올해는 바쁜 정도가 더했다. 3월 찬바람에 꽃도 늦고 새 잎도 늦었는데, 날이 풀리면서 잎들이 앞다투어 피어났기 때문이다. 그 바쁜 철에 화개동천, 초록이 싱그러운 계곡 안으로 들어섰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를 지나, 한 민박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 6시에 화개동천 길을 나섰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어귀까지는 5km 남짓 되고, 쌍계사 어귀에서 화개동천 안쪽 신흥마을까지는 4km가 된다. 녹차 따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쌍계사 어귀에서 신흥마을 삼거리 사이의 길옆 산자락이다. 일은 아침 6시부터 시작된다. 길도 없는 개울을 바지 걷어붙이고 건너기도 하고, 줄배 시늉을 낸 널빤지배를 타고 건너서 가파른 산자락에 붙어 아낙네들이 녹차 잎을 딴다. 화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녹차밭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구례나 광양에서 건너온 이들이다.

녹차 잎 닦는 법을 시연하고 있는 산골제다 김종관 씨.

20년 동안 차밭을 일궜다는 조성호(59) 씨는 어찌나 마음이 바쁜지, 찻잎을 따는 아낙네들에게 말 붙이는 것도 만류할 정도다. 찻잎 따다 나둥그러질 정도로 가파른 차밭을 두고, 조 씨는 “차밭은 배수가 잘되는 삿갓 진 데가 좋습니다. 차나무는 돌 틈에 있는 것을 최고로 치고요”라고 했다.

쌍계사 어귀에서 한 무리의 학생들을 만났다. 부산국제중학교 2학년 학생들이었다. 어제 순천의 낙안읍성을 들렀다가 화개로 들어와 잠을 자고 쌍계사 뒤편의 불일폭포를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특수학교라 한 학년 학생이 60명으로 단출하다. 교감선생님이 인솔해 현장학습을 왔는데, 현장학습용 교재가 따로 있을 정도로 단단히 준비를 하고 나선 길이었다. 그들의 다음 일정은 녹차 체험이었다. 학생들이 산비탈을 치고 올라간 곳은 녹차 잎으로 녹차냉면을 만들어 유명해진 산골제다였다.

산골제다의 김종관 대표는 일손이 바쁘지만, 학생들이 온다기에 기꺼이 문을 열었다고 했다. 교실 밖으로 나온 것만으로도 신이 나 수다스러워진 학생들에게, 산등성이 차밭에 올라가 30분 동안 찻잎을 따게 했다. 찻잎은 새순만을 따는데, 가지 끝에 쭈뼛 올라온 엷은 잎 두 장을 똑 끊어서 따면 된다. 이때 묵은 잎이 섞이면 안 된다. 묵은 잎은 뻣뻣하고 수분이 적기 때문에 찻잎을 덖을 때 쉽게 타버린다. 녹차 잎이 타면, 찻잎 속에 탄 냄새가 배어 향이 나빠진다. 그래서 손놀림이 좋은 농부들도 찻잎을 따고 나면, 간간이 섞인 묵은 잎을 따로 골라내야 한다. 햇잎만 따는 것, 이것이 좋은 녹차를 만드는 첫 번째 조건이다.

녹차 잎을 따고 있는 부산국제중학교 학생들. 60명이 흩어져 30분 동안 녹차 잎을 땄는데도, 다 모으고 보니 가마솥에 두 번 정도 덖을 분량밖에 안 되었다. 잎이 작아 손이 많이 가고 따기도 쉽지 않다. 화개장터 옆에 자리 잡은 화개제다의 수매장에 나온 한 노인은 다섯 사람이 하루 종일 딴 녹차 잎이 7kg이라고 했다.

학생들이 딴 녹차 잎을 덖기 위한 준비작업이 진행되었다. 재래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피고, 가마솥 앞쪽에 볏짚으로 짠 멍석을 깔았다. 가마솥이 달궈지자 김종관 씨가 바가지에 물을 담아 가마솥에 뿌리며 설명했다. “초의선사가 쓴 ‘동다송’에 보면, 물방울을 뿌리면 곧바로 증발할 만큼 가마솥을 달구라고 했습니다. 그 온도가 섭씨 400℃쯤 됩니다. 장갑을 몇 겹으로 끼고 녹차를 덖지만, 솥이 뜨겁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김종관 씨가 녹차 잎을 가마솥에 넣고, 뒤집고 누르기를 반복하면서 녹차 잎의 숨을 죽이는 시연을 보였다.

   


멍석 위에서 녹차 잎을 비비고 있는 학생들.

녹차나무의 햇잎에는 수분이 75~80% 들어 있다. 그러기에 솥에 넣고 덖으면 녹차 잎들이 동그랗게 말리면서 졸아든다. 녹차 잎을 적당히 덖고 난 뒤에는 멍석에 펼쳐놓고, 손으로 비빈다. 학생들이 나서서 손으로 비벼대는데, 이때 요령은 손가락 쪽이 아니라 손바닥 쪽으로 찻잎을 가볍게 누르면서 마는 것이다. 너무 힘껏 누르면 녹차 잎이 부서지기 때문에 적당하게 힘을 주어야 한다. 학생들 틈에 끼여 직접 녹차 잎을 말아보니, 찻잎의 감촉이 말랑말랑 좋고, 손에 묻어나는 향기가 풋풋했다. 손바닥은 금세 녹차 잎 색으로 물들어갔다. 녹차 잎을 덖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솥에 넣고 네댓 번을 덖기도 하고 아홉 번까지 덖기도 하는데, 단번에 덖어내기도 한다.

덖고 비비는 작업이 끝나면 녹차 잎을 그늘에 말린다. 잎이 다 마르면 녹차가 완성된다. 겉보기에는 간단해 보이는 작업이지만 덖는 방법과 덖을 때의 온도, 도르르 말리는 녹차 잎의 정도에 따라 작업 속도를 조절하는 게 어렵다. 집에 가서 말리겠다며, 덖은 녹차를 봉지에 담아가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다음 여행지로 떠나기 위해서다.

화개에 새로 생긴 공간으로 차 문화센터가 있다. 올 5월 야생차문화축제에 맞춰 개관한 차 체험관도 있다. 200명이 함께 녹차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야외에서 녹차 잎을 따고, 딴 녹차 잎을 덖고 비벼서 말리는 작업을 할 수 있으며, 더불어 다도 체험까지 할 수 있다. 하동군의 이종국 계장은 체험장은 차 단체나 차 동아리들이, 또는 직장인이나 학생들이 단체로 찾아와 이용하기 편하다고 한다. 300개가 넘는 녹차 농가에서 숙박하면서 차를 만들 수 있도록 연계시키고 있다고 했다.

이제 화개에 오면 누구든 녹차를 만들어보고 맛볼 수 있게 됐다. 화개 산기슭을 다람쥐처럼 오르내리고, 뜨거운 가마솥에 손을 담갔다가 도톨도톨한 멍석에 녹차 잎을 비비고 나면, 녹차의 청량한 기운과 화개의 맑은 바람이 내 안에 똬리를 틀게 될 것이다.


체험 정보

녹차 체험은 우전이나 세작이 나오는 봄철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첫물차를 따고 나면 가지치기를 해서 여름에 두물차를 따내고, 또다시 가지치기를 해서 가을에 세물차를 따낸다. 그러기에 봄에서 가을까지 녹차 체험을 할 수 있다.

녹차 농가 체험은 민박료(약 3만원)를 내고, 녹차 잎 값으로 2만~3만원을 내면 할 수 있다. 하루 머물면서 녹차를 덖고 나면 자기 손으로 만든 녹차를 가져갈 수 있다. 하동차문화센터 체험 문의 055-880-2402/ 산골제다 055-883-2511/ 화개제다 055-883-2233/ 이슬제다 018-643-3445

 

칠갑산 농촌생태마을
오리야, 논 농사를 부탁해!

가파마을에서 무논에 오리를 풀어주고 있다.

사람들은 칠갑산을 두고 충남의 알프스라고 말한다. 해발 561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덜 미쳐 맑고 깨끗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칠갑산 자락에 펼쳐진 동네가 고추와 구기자로 소문난 청양 땅이다. 청양에서 첫째가는 농촌체험마을로 대치면 상갑리의 가파마을이 있다. 정보화마을(행정자치부)과 농촌전통테마마을(농촌진흥청)로 지정된 곳이다. 한국철도시설공단·코리아나화장품과 1사(社) 1촌(村) 자매결연을 하고 있고, 서울 서초구 잠원동과는 도농(都農) 교류를 하고 있는 열린 동네다.

6월 둘째 주 일요일, 가파마을에 들어서니 마을이 왁자지껄했다. 이 마을에서는 논에 오리를 풀어 농사짓는 집이 여럿인데, 이날이 바로 논에 오리를 풀어주는 날이었다. 자매결연을 한 회사의 직원 가족이 찾아오고, 잠원동 주민들도 찾아와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도시 손님들이 오리 한 마리씩을 두 손에 감싸 잡고 논둑으로 들어섰다. 엄마 아빠의 권유로 오리를 붙들었지만, 무서워서 고개는 돌린 채 오리를 붙든 두 팔만 쭉 뻗어 종종거리는 아이도 있었다. 오리는 한 마리에 2000원 하는 어린 것들이었다.

무논에는 모가 한 뼘가량 자라 있는데, 이때가 오리를 넣어주기에 적합한 시기다. 모가 너무 어리면 오리에게 짓밟히기 때문이다. 마을 이장이 징을 치자, 도시 손님들이 그물이 쳐진 무논 안으로 오리를 풀어주었다. 무논에 내려선 오리는 모 사이사이를 부지런히 헤집고 다녔다.

용두리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밑에 서 있는 멋진 장승. 해마다 새로 세우지만 역사가 오래돼 한국의 대표 장승으로 꼽힌다.

어린 오리들은 이제 농군이 되어 벼 이삭이 팰 때까지, 근 50여일 동안 잡초도 뜯어먹고 벌레도 잡아먹으면서 벼와 함께 지내게 된다.

그렇게 농사지어진 쌀이 가파마을에서 가파오리쌀로 상품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비자는 이날 찾아온 도시 손님들이었다. 지난해에 가파마을을 아홉 번이나 찾아왔다는 잠원동 부녀회장 신영희(53) 씨는 지난해에도 오리 풀어주기 행사에 참여했고, 그 오리가 농사지은 쌀을 사서 먹고 있다고 했다.

오리를 무논에 풀어주고 돌아오는 길에 마을 이장 임광빈 씨는 돌미나리가 돋아난 개울을 도시 아줌마들에게 가르쳐줬다. 금세 개울가는 돌미나리를 뜯는 아줌마들의 차지가 되었다.

또 다른 체험행사가 1억원의 지원금을 받아 마을 사람들끼리 지은 전통문화전수관 앞마당에서 열렸다. 한쪽에서는 손두부를 만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떡메 쳐서 인절미를 만들었다. 여자들은 콩을 삶는 솥단지를 둘러서고, 힘깨나 쓰는 남자들은 떡메 치는 떡판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가파마을 노인들은 그늘진 평상에 앉아 새끼를 꼬아 금줄 만들기 시범을 보였다. 아이들은 목걸이용 장승을 파고, 그 옆에서는 다식판에 송홧가루를 뭉쳐 넣어 다식을 만들었다.

   


① 누에고치와 누에를 살펴보고 있다. ②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고 있다. ③ 가파마을 전통문화전수관 앞마당에서 두부를 만들고 있다.

④ 일벌 무리 속에서 여왕벌을 찾고 있다.

할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았다. 먹을 것도 있고, 만들 것도 있었다. 만들어진 다식이나 인절미를 집에 가져갈 요량으로 챙겨넣기 바쁜 사람도 있고, 신 김치에 싼 뜨뜻한 두부를 가족들에게 먹이려고 손에 들고 뛰어다니는 이도 있었다. 손님 맞이와 체험 행사를 많이 해본 가파마을의 노련함이 돋보였다.

이날 행사를 위해 대치면 면장도 참석하고, 농업기술센터에서 생활개선을 담당하는 김미숙 계장도 나왔다. 오후에는 김 계장의 안내를 받아 칠갑산 주변의 다른 체험마을을 가게 됐다. 세 가족, 승용차 3대가 뒤따랐다. 칠갑산을 넘어 목면 본의리에 있는 누에치기 농가를 찾아갔다.

누에는 농약 치는 논밭 가까이에서는 기를 수 없다. 그래서 누에농가인 계봉농원은 작은 골짜기, 외딴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천장 높은 조립식 건물 안 그늘에서 누에가 뽕잎을 먹고 있었다. 가로 1m, 세로 2m, 높이 1m쯤 되는 한 그물망 안에서 뽕잎을 갉아먹고 있는 누에가 2만 마리쯤 된다고 했다. 모두 50만 마리쯤 되는 누에를 기르는 유원조 씨는 ‘넉잠 자고 나서 고치를 만든다’는 누에의 생태에 대해 설명했다. 대전에서 온 초등학생 선영(8)이는 유치원 다닐 때 누에를 분양받아서 기른 적이 있다며 징그러워하지 않고 누에를 만지작거렸다. 선영이 엄마는 누에 기르기가 유치원의 인기 실습과정이라고 했다.

농원 뒷산에 올라가 뽕잎을 따서 누에 먹이 주기 체험도 했다. 누에가 뽕잎을 어찌나 빨리 갉아먹는지, 여름날 소나기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누에 한 마리를 집어보니 살결이 비단만큼이나 보드랍고 가벼웠다. 누에고치에서 나오는 것이 명주, 비단이니 부드러운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누에농가에서 가장 흥미로운 체험은 누에고치에서 실 뽑기였다. 하얀 고치를 물에 넣고 끓이면, 고치의 조직이 실을 뽑기 좋게 느슨해진다. 거미줄 같은 고치실을 잡고 실패에 감으면, 고치실이 한없이 풀려나온다. 고치 하나에서 나오는 실의 길이는 무려 1500~ 2000m나 된다. 고치실이 거의 다 풀려나올 때쯤 되면 번데기가 드러난다. 예전에는 번데기 먹는 재미로도 고치실을 풀었다는데, 이젠 선뜻 번데기를 먹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계봉농원에서도 명주나 번데기는 생산하지 않고, 누에에 버섯균을 접종한 동충하초, 누에를 냉동하여 분말로 만든 누엣가루, 수놈 누에로 만든 누에그라 등의 건강식품을 만들고 있었다. 냉동된 누에의 몸속을 들여다보니 뽕잎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버섯균이 누에 몸속에서 자라 동충하초가 되는 이유를 알 만했다.

   

체험여행 정보 청양군 농촌체험 행사/ 문의 청양군 농업기술센터 김미숙 계장 041-943-2703
가파마을/ 청양군 대치면 상갑리. 당일 체험, 1박2일 체험, 맞춤체험, 연중 진행. 프로그램별 4000~1만2000원, 식사비 5000원, 문의 041-942-3709
계봉농원/ 청양군 목면 본의리. 뽕잎 따기, 누에 먹이 주기, 누에고치 실 뽑기, 예약해야 체험 가능. 직접 만든 동충하초, 누에그라, 누에환약 택배주문 가능. 문의 041-943-5795
칠갑산 양봉원/ 청양군 정산면 용두리마을. 벌집 관찰하기, 여왕벌 찾기, 꿀벌 채취, 벌꿀 택배주문 가능, 예약해야 방문 가능. 문의 041-943-5324

해가 저물기 전에 찾아간 또 다른 곳은 꿀벌체험 농가였다. 느티나무 아래, 몸은 가늘지만 표정이 깊은 장승이 서 있는 정산면 용두리마을이었다. 특성화마을(농림부)로 지정된 곳이다. 마을 안에서 꿀벌을 100통 넘게 기르는 김기수 씨는 찾아오는 도시 손님들에게 벌통 속의 벌집을 꺼내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여왕벌과 갓 태어나는 수벌을 보여주고, 벌집 속의 꿀을 채취하는 방법까지 소개해줬다. 단순히 벌꿀을 팔기 위한 설명이 아니었다.

벌통 하나 들여다보는 것도 생태학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친절한 해설이었다. 꿀벌은 위협하지 않으면 침을 쏘지 않는다는 말에 아이들은 돋보기를 들고 벌을 관찰하기도 했다. 꿀벌이 실어온 꽃가루 뭉치를 꿀에 찍어 맛까지 보고 용두리마을을 빠져나오는데, 마을 어귀의 장승이 환한 얼굴로 배웅을 했다.

논에 오리 풀어주고, 뽕잎 따서 누에 먹이고, 갓 태어나는 일벌들을 관찰하고 나니, 긴 초여름 해가 서산에 걸려 있었다. 농촌에서 이뤄지는 모든 노동이 도시 손님들에게는 생생한 현장 체험이고, 생태 기행이 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