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신정일의 역사와 사람들

醉月 2009. 10. 3. 07:38

전북 태인, 동진강변 붉은 노을 동학혁명 아픔의 흔적 ‘조규순 영세불망비’ 뒷면 조병갑 이름 선명 …

성황산은 동학군의 마지막 격전지

태인을 진호했던 진산으로 보이는 항가산이 마을 뒤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나고 죽는다. 무수한 탄생과 소멸을 통해 역사는 진전되어온 것이리라. 정현종 시인의 시 구절처럼 “가고 싶은 자 가게 하고 오고 싶은 자 오게 하라.” 그것에 충실하면 되는데 이미 가버린 것, 또는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연민이 남는 것은 무슨 심사인가.

독일 철학자 니체는 “만물은 가고 오며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아간다”고 했다. 니체의 말처럼 가고 오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번창했다가 흥망성쇠를 겪으며 쇠퇴해간 지역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러한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면 비애라기보다 늦은 가을날 11월과 같은 쓸쓸함일 것인데, 전북 정읍시의 하나의 면(面)이 된 태인(泰仁)을 찾아가는 내 마음 역시 그러했다.

 

호남선 신태인 지나며 쇠퇴 … 한가하고 심심한 소도시

태인은 백제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마을로, 한때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적 드문 소도시로 변모해버렸다.

태인의 이름은 백제 때 대시산군(大尸山郡), 신라 때 태산군(太山郡)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조선 태종 9년에 지금의 이름 태인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정읍에 흡수되었다.

태인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바로 옆 솔다방으로 들어갔다. 다방에는 40대 중반의 뚱뚱한 여자가 차를 나르고, 황혼길에 들어선 어르신 몇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차를 한잔 마시며 말을 건넸다.

“태인이 언제부터 이렇게 쇠퇴했지요?”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태인이 이 지역의 중심지였어. 그런데 호남선 열차가 신태인으로 지나가면서 이렇게 되고 말았지. 1960년대만 해도 태인 인구가 2만여명은 되었는데, 지금은 7000~8000명이나 될랑가.”

아직도 다방이 여섯 개나 된다는 태인 거리를 천천히 지나는데, 내 눈에 비친 태인의 모습은 한가하다 못해 심심하다.

인적 드문 태인 거리.

태인에서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조선시대 제주부터 서울까지 이어지던 삼남대로가 지나던 길이 오늘날 1번 국도가 되었는데, 이 길을 중심으로 면소재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 길목에서 찾은 첫 번째 옛 흔적은 태인초등학교 아래쪽에 있는 태인 동헌(東軒, 전북유형문화재 제75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태인 관아의 건축에 관해 정곤이 쓴 다음과 같은 기문(記文)이 실려 있다.

“태인현은 곧 옛 태산과 인의의 고을인데, 아조(我朝)에서 두 고을의 이름을 아울러서 태인이라고 하였다. 읍내는 옛날 태산의 동쪽 구석에 치우쳐 있었으므로 인의의 백성들이 왕래하는 데 병통으로 여겼다. 병신년 가을 8월, 현감 황경돈(黃敬敦)군이 나와서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인 거산역 고관(古館)을 현의 객사로 삼았으나 너무 좁고 누추하였다. 오치선(吳致善)군이 무술년 겨울에 와 고관의 지세를 살피고 후청, 동서침, 낭청 동서행랑을 세웠다.”

   


신라 말의 문장가 최치원이 거닐었던 연지.

태인 동헌을 지나 마을 길을 걷는다. 골목을 돌아나가면 전주로 빠지는 우회도로가 나 있는 하마(下馬)거리라 불리는 삼거리에 향교가 있다. 예전에는 이곳 하마거리에서 남녀노소 모두 말에서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말이 사라진 자리를 차들은 쉴새없이 지나다니고, 옛날 태인군의 감옥이 있었다는 옥하(玉下)마을은 저물어가는 석양빛을 받아 고즈넉하기만 하다. 그 뒤에 병풍처럼 둘러처진 산이 성황산이다. 성황산은 성황신을 모신 산이었는데, 성황당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불에 타 사라지고 산 중턱에 현대의 산물인 산장모텔이 들어서 있다.

그렇다면 이곳 태인을 진호(鎭護)했던 진산(鎭山)은 어디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산천’조에 “죽사산(竹寺山)현의 북쪽 2리에 진산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태인 사람들에게 물어도 죽사산을 아는 이가 없었다. 증산교의 한 파인 미륵불교총본부 뒤편에 있는 항가산(恒伽山, 120m)이 진산일 듯싶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태인의 여러 곳에는 신라 말의 문장가 최치원의 자취도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최치원은 “스스로 서쪽에서 배워 얻은 바가 많다고 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뒤 장차 자기의 뜻을 행하려 했으나, 쇠해가는 나라의 정국은 의심과 시기가 많아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지 못하고 드디어 외직인 태산군 군수가 되었다.”

세상은 언제나 마찬가지다. 그런 연유로 태산군수가 된 최치원이 풍류를 즐기며 놀았다는 정자가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라는 피향정(披香亭)이다.

태인을 진호했던 진산으로 보이는 항가산이 마을 뒤로 보인다.

태인 관아·피향정 등 유적에 선조들 발자취 ‘흠뻑’

연꽃이 만발하면 향기가 그윽하다는 피향정, 앞에는 ‘피향정’ 뒤에는 ‘호남제일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태산군수이던 최치원이 연못가를 거닐며 풍월을 읊었다고 전해져온다. 피향정은 보물 제28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연지(蓮池)는 지금도 정자 아래쪽에 남아 있다. 그리고 피향정 북쪽에 애련당(愛蓮堂)이라는 정자도 있었으나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해인 1885년에 헐리고 원래 있던 상·하 연지 중 상연지는 메워져 시장과 도로가 되고 말았다.

태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칠보면 무성리에는 최치원을 모신 무성서원(武城書院)이 있는데 이곳도 가볼 만하다. 무성서원은 고종 5년(1868) 전국의 서원이 철폐될 때도 살아남은 47곳 가운데 하나로, 사적 제166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인에서 살펴보아야 할 역사 유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동학의 흔적이다. 피향정 동쪽에는 여남은 개의 공적비가 서 있는데, 그중 하나가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운 아버지 조규순의 ‘영세불망비’다.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아버지 조규순이 이곳 태인현감을 지냈던 것을 내세워 주민들의 혈세를 모아 ‘태인현감조규순영세불망비’부터 세웠다. 다른 돌과 달리 오석(烏石)에 새겨진 조규순 영세불망비는 엊그제 새긴 것처럼 너무도 선명하고, 뒷면에는 조병갑이라는 이름까지 또렷이 남아 있다. 그 비를 세우며 재미를 본 조병갑이 백성들의 물 걱정을 덜어주겠다며 원래 정읍천변에 보(洑)가 있었는데도 정읍천과 태인천이 만나는 동진강에 만석보를 만든 뒤 물세를 더 걷으면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 피향정 동쪽에는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운 ‘태인현감조규순영세 불망비’(왼쪽) 등 여남은 개의 공적비가 늘어서 있다. >

우금치 싸움에서 패한 동학군이 마지막 싸움을 벌인 곳도 태인의 성황산이다. 결국 이 싸움에서도 진 전봉준은 동학군을 해산하고 입암산 너머 순창의 피노리로 피했다가 그곳에서 관군에게 붙잡힌다. 김개남은 회문산의 종성리에서 훗날의 의병장 임병찬의 고발로 붙잡히고, 그렇게 ‘동학농민혁명’은 막을 내렸다.

이렇듯 시리고 아픈 사연을 간직한 태인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시 시외버스에 올라 전주로 향했다. 유장하게 흐르는 동진강변에 자리잡은 태인은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어가고, 어디선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가볼 만한 곳 ◀

호남고속도로의 태인나들목(IC)에서 빠져나와 태인으로 들어간다. 연못이 있는 피향정과 향교(만화정 대성, 명륜당 등), 태인 동헌, 증산교의 한 종파인 미륵불교총본부가 가볼 만하다.

태인에서 30번 도로를 타고 칠보로 가면 무성서원과 원백암 남근석, 김동수 고택이 있는 산외면이 지척이다. 30번 도로를 조금 더 따라가면 섬진강 댐에 이르는데, 근처인 쌍치면 피노리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이, 회문산 종성리에서는 또 다른 지도자 김개남이 붙잡혔다.만석보와 황토현 등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도 가깝다.

태인 백학정의 백반이 맛있다.

(문의 063-534-4290)

 

경북순흥단종 복위 노리다 숱한 희생 아직도 ‘피끝’이란 지명 남아 사건 후 ‘순흥도호부’ 폐지됐다 200년 뒤 부활 …

금성대군 모신 사당도 세워져

옛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순흥 풍경.

금성대군을 모신 사당인 금성단. ‘봉황이 깃들여 산다’는 의미가 담긴 ‘봉서루’ 누각(왼쪽부터).

가을의 끝자락, 경북 영주시 순흥면으로 가는 길은 붉게 타오를 듯 매달려 있는 사과나무로 눈이 부셨다.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나무 가로수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소백산도 가슴 시린 단풍 빛이 한창이었다.

순흥면 초입에서 처음 만난 것은 읍내리 고분벽화(사적 제313호)의 모형. 읍내리 고분은 남한에 두 개뿐인 벽화가 그려진 무덤으로 실제의 것은 거기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있어 길가에 모형을 세워놓은 것이다. 읍내리 고분은 이곳이 원래 고구려 땅이었으므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신라 고분으로 추정된다.

마을에 들어서니 순흥 안씨의 고향이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순흥 안씨들의 잘 정돈된 묘역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고려 말 학자 이색(李穡)의 ‘송안시어시서(送安侍御詩序)’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순흥 안씨는 세세로 죽계(竹溪) 위에 살았다. 죽계의 근원은 태백산에 있다. 산이 크고 물이 멀리 흐르듯, 안씨의 흥성함도 끝이 없을 것이다.”

죽계는 지금도 순흥면 안에 있는 맑은 계곡. 소백산에 둘러싸인 데다 죽계를 품고 있어 예로부터 순흥은 산 좋고 물 맑은 고장으로 사대부들의 칭송을 받았다.

 

육수 부어 먹는 순흥묵밥 … 김치 맛 일품 ‘별미’

이중환의 ‘택리지’에 실린 죽계 편을 보자.

“영천(榮川·지금의 영주를 말하는 듯하다) 서북쪽 순흥부(順興府)에 죽계라는 계곡이 있는데, 죽계는 소백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다. 이곳은 들이 넓고 산은 낮으며 물과 들이 맑고 깨끗하다. …참으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이다.”

조선 초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서거정도 순흥을 병풍처럼 감싸안고 있는 소백산을 두고 “소백산이 태백산에 이어져, 서리서리 백 리(百里)나 구름 속에 꽂혔네. 분명히 동남계(東南界)를 모두 구획하였으니, 하늘땅이 이루어져 귀신은 인색을 끼쳤네”라고 노래했다.

   


퇴락한 순흥의 오늘을 보여주듯 쓰러져가는 집.

먼저 ‘순흥묵집’에 들어가 이른 점심을 먹었다. 도토리묵이 아닌 메밀묵과 나물을 넣어 만든 비빔밥에 육수를 부어 먹는 순흥묵밥은 밥보다도 김치 맛이 일품이었다. 이제 천천히 순흥 기행에 나서는 길. 골목을 휘감아 돌아나가자 발은 자연스레 순흥면사무소에 닿았다.

지금의 순흥면사무소 뜰 안에는 ‘흥주도호부 봉서루(鳳棲樓)’라는 누각이 있어, 이곳이 순흥의 옛이름인 ‘흥주도호부’의 관아 자리였음을 짐작케 한다. ‘봉서루’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로 알려져 있는데, 순흥의 진산인 비봉산에서 봉황이 날아가면 고을이 쇠퇴한다는 전설 때문에 누각 앞쪽의 현판에는 봉황이 깃들여 산다는 의미의 ‘봉서루’라는 현판을, 뒤쪽에는 봉황을 맞이한다는 뜻의 ‘영봉루(迎鳳樓)’라는 현판을 걸었다고 한다.

‘봉서루’ 앞뜰에는 목이 잘린 석불상과 순흥을 거쳐간 관리들의 영세불망비가 세워져 있고, 조선 후기 대원군이 나라 곳곳에 세웠던 척화비가 남아 있으며, 순흥 지역의 문화유산을 모아놓은 순흥박물관도 있다.

고구려 시대 ‘급벌산군’이라는 이름으로 마을의 기틀을 잡은 뒤 오랜 기간 ‘흥주’로 불리다 고려 말 ‘순흥부’로 승격되며 번성했던 이 고장이 쇠퇴한 것은 조선시대 세조 3년인 1547년.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일으킨 단종 복위사건 때문이었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당시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돼 유배지를 떠돌다 순흥에 귀양 와 있었고, 단종은 영월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있었다. 그런데 금성대군이 순흥에서 또다시 단종 복위를 꾀한 것이다.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고을의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경상도의 선비들에게 격문을 돌리다 거사를 감행하기도 전 밀고로 발각돼 희생되고 만다. 당시 금성대군과 이보흠, 그리고 단종 복위에 동조했던 수많은 영남 선비들이 흘린 피는 죽계천을 붉게 물들이고 40리 아래에 있는 동촌리까지 흘렀다 한다. 그래서 이 지역 일대에는 지금까지도 ‘피끝’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이 ‘참사’로 ‘순흥도호부’는 폐지됐고, 이 땅은 풍기·예천·봉화로 조각조각 나뉘게 됐다. 순흥이 되살아난 것은 2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인 숙종 37년(1711). 단종이 복위되면서 순흥은 다시 도호부로 승격됐고, 이 지역에는 금성대군을 모시는 사당 ‘금성단’이 세워졌다.

‘금성단’은 순흥부사 이명희가 임금의 윤허를 받아 설치한 것으로 상단에는 금성대군, 오른쪽 단에는 이보흠, 왼쪽 단에는 모의에 연루돼 죽은 사람들을 모셔 제사 지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이 지역 사람들은 단종과 금성대군이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금성대군을 모신 사당인 금성단. ‘봉황이 깃들여 산다’는 의미가 담긴 ‘봉서루’ 누각(왼쪽부터).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의 진원지 ‘청다리’ 남아 있어

금성단 바로 옆에는 어린 시절 어른들이 흔히 놀리곤 하던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의 진원지인 작은 다리, 즉 청다리(지금의 제월교)가 있다. 죽계 상류에 있던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은 종이나 이곳 마을 처녀와 눈이 맞아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처녀와 미리 짜고 청다리 밑에 버리라 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다리 근처를 지나다 우연히 아이를 발견한 것처럼 해서 “불쌍한 아이를 주웠다”며 본가에서 기르게 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자기가 낳은 아이를 고아원이나 경찰서 앞에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버리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낭만적이라 할 수 있고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나 싶다.

소수서원은 고려 때 유학자인 안향을 기리기 위해 1542년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의 후신.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를 지내면서 ‘소수서원’이라는 임금의 친필 현판을 받아 이름을 ‘소수서원’으로 바꾸었다.

지금은 소수서원의 소나무 숲에 당간지주만 덩그러니 남았지만, 소수서원 터에는 원래 숙수사(宿水寺)라는 큰 절도 있었다. 이 절을 찾았던 시인 노여(魯璵)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그윽한 경치 찾았더니, 난초의 뜰은 10년 전의 모습이어라. 벽의 값어치는 몇 년간 시와 함께 비싸고, 절의 이름은 천고의 물과 더불어 흐르누나. 추위가 산 빛을 미니 스님은 문을 닫고, 차가움이 개울소리를 누르니 손님은 다락에 오르도다. 휘파람 불며 서성거리는 중은 해가 졌다고, 난간에 고개를 돌리면 고향생각 나누나”라는 시를 읊었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 속에서 그 한적했던 절은 사라져 서원으로 남았고, 이제는 선비촌이 조성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고 있다.

가볼 만한 곳

중앙고속도로 서영주 풍기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좌회전하면 풍기이고, 931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순흥에 이른다. 소백산 아래에 죽계계곡과 초암사가 있고, 멀지 않은 곳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 부석사가 있다. 순흥면사무소 근처에 순흥묵집(054-632-2028)이 있는데 묵밥(4000원) 맛이 그만이다.

 

고려 왕조 위한 사당 ‘숭의전’ 덕에 작은 규모에도 ‘郡’으로 승격 1914년 연천군에 편입된 뒤 쇠락 …

지역 전통음식·동식물도 찾아볼 길 없어

임진강사적 223호 숭의전 전경. 고려조 8명의 임금과 정몽주 등 충신들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 사당.

자유로를 따라 가다 문산 적성 나들목을 지나면 임진강변 ‘마전(麻田)’에 도착한다. 오늘날 행정구역으로 경기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인 이곳은 한 시절 전만 해도 마전군(郡)이었다.

이 지역이 고구려 때 마전천현(麻田淺縣)으로 불리다 신라시대 들어 임단(臨湍)으로 이름이 바뀐 뒤 ‘마전’이라는 지명이 붙은 것은 고려 초. 작은 마을이던 마전은 조선 태종 13년 현이 되었고, 문종 2년에 마전군으로 승격됐다. 조선시대 마전이 인접한 연천이나 삭령현보다 더 큰 군으로 승격된 까닭은 이 지역에 있는 사당 ‘숭의전’ 덕분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홍귀달(洪貴達)의 글을 보면 “마전은 본래 작은 현인데, 무엇 때문에 군으로 승격되었느냐, 우리 태조가 하늘 뜻에 순응하여 혁명한 뒤 왕씨(王氏)의 제사가 아주 없어질까 염려하여 여기에다 사당을 짓고 왕씨 시조 이하 몇 대의 제사를 지내게 한 덕이다. 문종조에 와서 왕씨의 후손을 찾아 제사를 주관하게 했고, 사당 이름을 숭의전이라고 했으며, 이로 인해 고을을 군으로 승격했다”고 기록돼 있다.

 

6·25전쟁 때 집중포화로 피해 커 … 지금은 ‘마전리’로 남아

하지만 군으로 승격됐다고 해서 땅이 더 넓어진 것은 아니어서 마전군의 살림살이는 빠듯했던 모양이다. 명을 받들고 오는 관리들이 먹고 잘 곳도 없고, 이졸(吏卒)이 평상시에도 비바람을 가리지 못했으며, 학사가 허물어져서 스승과 제자가 머물 곳이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군수 아문(衙門)이 사는 곳까지도 초가집에 나무 울타리를 둘러서 관가 같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오죽했으면 지역 사람들이 “이 고을은 없애는 것이 편한데, 그래도 없애지 못하는 이유는 숭의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이 전해올까?

그 뒤 30여년 동안 ‘마전’은 버려진 듯 있다가 성종 때 군수로 온 정연경이 객사와 향교, 관청을 새로 지으면서 면모를 일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때의 건물이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건물이 있던 곳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도 없어서 저마다 다르게 이야기한다. 6·25전쟁 때 사라진 마전향교 터마저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으니, 세월이 얼마나 무상한가.

마전군은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쇠락하기 시작했고, 6·25전쟁 당시 집중포화까지 맞아 이제 오가는 길손마저 드문 쓸쓸하고 한적한 마을이 돼버렸다.

   

조선시대 독립된 군(郡)이었을 만큼 번성했으나 1914년 연천군의 한 리(里)로 편입되며 쇠락한 마전 풍경(위쪽부터) .

늦가을, 마전리라고 새겨진 표지석 옆에 서서 가만히 바라보니 이곳이 군청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띄엄띄엄 있는 인가들 사이로 자동차들만 쌩쌩 지나간다. 외딴 마을에 있는 비석거리에는 비석들이 많았다는데, 그 역시 6·25전쟁 때 폭격을 맞아 사라지고 없다. 또 북쪽에는 가재가 많아서 ‘가재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지만, 흘러간 세월 속에 과연 가재가 남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라진 것이 어디 한둘이랴. 전쟁 전까지만 해도 울창한 나무 숲에는 도토리가 많았고 꿩이 지천으로 많아 도토리묵과 꿩만두가 지역 특산물이었다는데, 오늘날 지역 음식점에서 도토리묵이나 꿩만두는 찾아볼 길이 없다.

이제 마전에 남은 유적이라곤 고려시대의 흔적이 담겨 있는 사당 몇 개가 전부다. 우선 찾아볼 만한 곳은 목은 이색의 영정을 모신 ‘목은 영당’. 고려 후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이색은 이성계의 고려 찬탈을 저지하다 탄핵받아 조선 건국 뒤 나라 곳곳을 떠돌며 유배생활을 했다. ‘목은 영당’은 이색의 후손으로 청주목사를 지낸 이명근(李命根)이 그의 위업을 기리고자 이곳에 세웠다.

목은 영당을 지나면 숭의전이다. 미산면 아미리 잠두봉 위 임진강가에 있는 숭의전으로 가는 길은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적막을 깰 만큼 조용하기만 하다.

고려시대의 왕들을 모신 이곳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태조가 고려 왕조를 몰아내고 왕씨를 모두 죽인 뒤 고려 종묘의 위패를 거두어 강물에 띄워보냈는데, 이상하게도 위패들이 떠내려가지 않고 강물 위를 맴돌았다는 것이다. 살아남은 한 왕씨가 그것을 몰래 거두어 이곳에 사당을 짓고 위패를 봉안했는데, 고려 태조를 비롯한 8명의 임금과 고려 충신 정몽주 등 15명을 배향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역시 6·25전쟁 때 소실됐지만, 복구해 사적 제223호로 지정돼 있다.

 

숭의전 6·25전쟁 때 소실됐다 복구 ‘사적 지정’

숭의전은 이렇게나마 남아 있는데, 마전은 겨우 흔적만이 남아 있다니, 나는 울울창창한 활엽수 사이로 소리 없이 흐르는 임진강을 바라보면서 만감에 젖었다. 돌아보면 사라지는 것이 어디 고을뿐일까. 이곳 숭의전 부근에는 아미에서 삼회리로 건너는 아미나루가 있었다지만 그마저 사라지고 없다.

숭의전에서 멀지 않은 백석리에는 임진왜란 때 부산진첨사로 소서행장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정발 장군의 무덤이 있다. 장군이 죽은 뒤 말(馬)이 장군의 투구와 갑옷을 물고 와 이곳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인근 전곡면 신답리에는 영평천과 한탄강이 만나서 물이 아우라(러)진다고 해서 ‘아우라지’라는 이름이 붙은 ‘아우라지나루’가 있고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에는 미수 허목(許穆)이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와 살았던 은거당(恩居堂)이라는 마을이 있다. 미수가 1678년 판중추부사를 사퇴하고 귀향해 지내고 있던 중에 숙종이 그의 충절과 덕망을 기려 사우(祠宇)를 하사한 데서 붙은 이름이다.

‘성은을 입은 거소’라는 뜻이 담겨 있는 이 마을에는 지금도 미수 허목의 사당과 무덤이 남아 있다.

● 가볼 만한 곳

자유로를 따라 가는 임진강변에는 역사 유물·유적이 많다.

황희 정승이 말년을 보낸 반구정과 이이의 자취가 서린 화석정 및 자운서원이 있고,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능이 장남면에 있다.

철마가 멈춰 있는 임진각도 가볼 만하다

 

정감록비결 거론 ‘피난처’댐·쌀개방 반대 깃발 나부껴 청화선사가 일군 성륜사 자랑거리 …

조통 전설, 팽로 말 무덤 등 사연 주렁주렁

청화선사의 자취가 남아 있는 성륜사 전경.

전북 순창군에 금과(金果·금과면)가 있다면, 전남 곡성군에는 옥과(玉果·옥과면)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동으로는 남원부 경계까지 20리, 남으로 동복현까지 26리, 서로 담양부 경계까지 11리, 북으로 순창군 경계까지 11리, 서울까지 712리’ 떨어진 곳이 옥과. ‘옥으로 된 과실’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이 붙은 옥과는 조선시대 고종 때까지만 해도 독립된 군(郡)이었을 만큼 번성했으나,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곡성군에 편입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작은 면 옥과의 이름을 빛내는 것은 설옥리에 있는 옥과면의 진산인 설산(雪山)의 성륜사다. 우리 시대의 선승으로 널리 알려진 청화선사가 일군 이 절은, 설산 정상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의병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금샘·은샘과 더불어 옥과의 자랑거리다.

필자가 옥과에 간 날은 마침 청화선사의 입적 1주기라 전국 각지에서 구름같이 몰려든 사람들로 높이 523m의 야트막한 산이 온통 북적거렸다.

청화선사의 속명은 강호성(姜虎成). 1923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일본 메이지 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뒤 출가했다. 진보적 의식을 갖고 있던 그는 전남 장성 백양사 운문암에서 송만암 대종사의 상좌였던 금타화상을 스승으로 해 수행에 들어간 뒤 하루 한 끼 공양과 좌선 수양을 위한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평생 신조로 삼았으며, 이후 40여년 동안 전남 두륜산 대둔사, 월출산 삼견성암, 지리산 백장암 등 전국 각지의 사찰과 암자의 토굴에서 계율을 엄격히 지키면서 수도 정진했다고 한다.

한적한 옥과면 수리 마을.

설산 정상 조선시대 의병 식수대 ‘금샘’이

청화선사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5년. 탁발수행과 떠돌이 선방좌선을 매듭지은 뒤 6·25전쟁(1950) 때 불타버린 이후 쇠락해 있던 전남 곡성군 태안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그해 10월부터 21명의 도반과 함께 3년 동안 일주문 밖에 나서지 않은 채 묵언(默言) 수도를 하면서부터다. 청화선사의 3년 결사(結社)는 당시 세속의 이익에 급급해 수도 정진을 게을리 했던 불가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뒤 청화선사는 옥과의 성륜사를 일으켜세웠고, 미국에까지 한국 불교를 전파하다 2003년 타계했다.

선사는 평소 “모든 수행은 정견(正見)을 바탕으로 ‘선오후수(先悟後修·먼저 깨닫고 나중에 수행하는 것)’하는 것이니 불성(佛性) 체험에 역점을 두고 정진하라”고 강조했고, “불교든 기독교든 역사적으로 위대한 철학이라고 검증된 것이라면 믿어볼 만하다. 성자의 가르침은 하나 된 우주의 법칙으로, 불교나 기독교는 수행법이 서로 다를 뿐 궁극적으로 도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이러한 선사에 대해 시인 최하림은 ‘맑은 꽃 비상하게 자기를 다스린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향훈(香薰)의 큰스님’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옥과면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향교.

“정견은 바른 인생·바른 가치관·바른 철학과 같은 뜻이며, 행복을 위해서는 바른 가치관을 확립해야 하고, 거기에 따른 행동도 실천해야 한다”고 한 청화선사의 말을 음미하며 필자는 옥과의 관사(館舍) 터를 찾아나섰다.

조선시대 관사가 있던 자리에는 지금 옥과면사무소가 들어서 있어 찾기가 어렵지 않다. 면사무소 담 앞에는 지금도 관찰사 조헌영 서기순, 현감 이규현 등의 비석 21개가 서 있어 이곳이 과거의 관사 터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옥과면사무소에 들어가보니 서울대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지도를 사진 찍어다 확대해 그렸다는 옥과현의 지도도 걸려 있다. 저렇게 실재했던 옥과현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리다니.

이곳이 옥과현이던 시절, 관사 동쪽에 있던 누각 의운루(倚雲樓)를 보고 조선 전기의 문신 성임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누에 오르니 경치가 한없는데, 봄이 다되매 홀로 머리를 긁적이네. 빈 평상엔 소나무가 비 소리로 울고, 먼 촌락에는 보리 가을이로세. 관산(關山)에서 북쪽 바라보기에 신세(身世)는 동으로 흐르는 물에 부쳤다. 낮과 밤으로 시름 많은 구름이 합하니, 돌아가고픈 마음 거둘 수가 없도다.’

관사에서 멀지 않은 옥과 동헌이 있던 자리에는 오늘날 노인정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현감이 집무를 보던 집 한 채가 달랑 남아 있고, 옆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유팽로를 모신 사당인 옥산사와 서낭당 등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동헌 터였던 것은 분명하다.

이곳의 서낭당은 ‘조장군 사당’이라고도 불리는데, 단칸 맞배지붕(경사진 지붕이 맞닿아 있는 모양) 형태인 이 건물에 남녀 목신상 2개와 머리가 떨어져나간 동자 석조상 1개가 모셔져 있다. 남신상은 길이가 83cm이고, 여신상은 68cm. 그 형태를 보면 남신상은 무당이 쓰는 모자를 쓰고, 큰 눈썹에 눈이 튀어나와 있어 마치 장승 같아 보인다. 흉대를 두르고 중앙에서 묶었는데, 띠가 발등에까지 내려와 있다. 여신상은 머리에 고깔 같은 것을 쓰고, 얼굴이 남신상보다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모아쥔 두 손은 무엇인가를 들고 기원하는 모습이다. 서낭당에는 고려 신종 때 학자인 조통(趙通)에 관한 전설이 서려 있다.

   


옥과면사무소 뜰에 서 있는 관찰사, 현감들의 비석.

조통이 벼슬을 마치고 고향인 옥과로 돌아오자 평소 그를 사모하던 공주가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조통이 가까이 하지 않으니, 공주는 그만 한을 품고 죽었다 한다. 그 뒤 이 지역 무당들이 공주를 가엾이 여겨 그의 한을 풀어주고자 공주와 조통의 모습을 깎아 한자리에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다. 옥과 서낭당은 옥과군이 곡성군에 편입되기 전까지 국행(國行) 서낭당이었기 때문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 뒤에는 무당들이 돌아가며 제사를 지냈다 한다. 현재 전남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돼 있다.

 

 

술 쏟아 땅 파자 술이 … 별스런 사연 열녀비

옥과 곳곳에는 이처럼 역사와 사연이 담긴 지역들이 많다. 옥과면 합강리에는 ‘팽로 말 무덤’이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유팽로가 왜군에게 죽음을 당하자 그의 말이 주인의 머리를 물고 300리 길을 달려 생가가 있는 곳까지 와서는 아흐레 동안 여물을 마다하고 계속 울기만 하다 굶어죽은 데서 붙은 이름이다. 이웃 사람들이 충성스러운 말의 죽음을 기려 그 자리에 말 무덤을 쓰고 ‘팽로 말 무덤’이라고 불렀다. 그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옥과 동헌에서 동쪽으로 6리쯤 되는 지점에는 경양도찰방(景陽道察訪)에 딸린 대부역(大富驛)이 있었다. 이 마을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이곳에 살던 선비 송광언(宋光彦)의 아내 함평 이씨는 삯바느질해서 술꾼 남편에게 술을 사주었다. 어느 날인가도 아내는 열심히 모은 돈으로 술 한 대접을 사서 부뚜막에 올려놓았는데, 그만 실수로 쏟고 말았다고 한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황망해하다 땅을 파보니, 그 자리에서 술이 고스란히 나오는 게 아닌가. 이 사실을 안 마을 사람들은 남편을 잘 섬긴 열녀라 하여 함평 이씨의 열녀비를 세워주었다. 곳곳을 다니며 수많은 열녀비를 보았지만, 이처럼 별스런 사연의 열녀비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러한 전설만 전해져올 뿐 아무리 찾아도 열녀비가 눈에 띄지 않았다. 시제를 지내고 있는 제각에 들어가 묻자 열녀비가 근처 풍산면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사연인즉 30여년 전쯤 경지 정리를 하다 그 여인의 친정인 풍산의 함평 이씨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 열녀비를 가져갔다는 것. 마을 사람들은 이제라도 찾을 수 없겠느냐며 울상이지만, 함평 이씨 집안에서 돌려줄 리 만무하다.

‘정감록비결’에 피난처라고 알려져 있는 옥과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전란 피해를 본 적이 없는 천혜의 명당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곳에는 ‘수양댐 건설 결사반대, 안개 지역으로부터 옥과를 지킵시다’ ‘쌀 개방 반대 식량주권 사수’라는 플래카드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가볼 만한 곳

옥과에서 멀지 않은 전남 담양군에는 광주호 주변으로 면앙정(免仰亭), 송강정(松江亭), 명옥헌(鳴玉軒), 소쇄원(瀟灑園), 환벽당(環碧堂), 취가정(醉歌亭), 식영정(息影亭) 등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들이 줄지어 있다. 전남 곡성군 방향으로 가면 동악 산골짜기와 그윽하고 아름다운 절 태안사, 섬진강 등이 멀지 않다.

 

왜구 토벌 ‘홍산대첩’ 현장 매월당 발자취도 여전 동헌·객사 예전 그 모습, 한때 영화 증명 …

교원리엔 ‘청일서원’이 반겨

조선 헌종 때 지어진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홍산객사 전경.

충남 부여군 홍산면으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부여에서 백마강교를 건너가는 길이 있고, 서해안고속도로 서천 인터체인지로 들어가는 길도 있으며, 충남 보령시 미산면에서 아홉 굽이로 된 아홉사리 고개를 넘어가는 방법도 있다.

다양한 길이 뚫려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한때라도 번성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지금은 쇠락해 부여군의 한 면이 된 홍산의 백제 때 이름은 대산현. 고려시대 초기 지금의 이름이 붙은 홍산은 1895년 군으로 승격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14년 부여군에 병합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홍산’이라는 지명은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생긴 홍산의 진산 ‘비홍산(飛鴻山)’에서 따온 것. 홍산에는 이외에도 갖가지 사연이 담긴 지명이 많다. 홍산면 남촌리 서쪽에 있는 ‘옥녀봉’은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색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 남촌 남쪽에는 ‘닷전모랭이’라는 지명도 남아 있는데, 옛날에 닭전(닭시장)이 서던 곳이라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닷전모랭이 뒤에는 둘레 1030자(약 310m), 높이 7자(약 2m)의 석성(石城)인 홍산읍성이 남아 있다.

 

백제 때 대산현 … 비홍산에서 ‘홍산’ 이름 따와

홍산이 현이던 시절, 현감이 집무를 보았던 동헌도 남촌리에 있다. 한때는 동헌 자리에 파출소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잘 정돈된 동헌이 늦가을 햇살에 빛나고, 그 옆에 눈이 부시도록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그림처럼 서 있다.

만수산 무량산에 있는 김시습의 부도.

동헌에서 북촌리 쪽으로 천천히 걷다보면 좁은 골목 막다른 곳에서 한때 면사무소로 쓰였던 홍산현의 객사도 볼 수 있다. 충남 유형문화재 제97호인 홍산객사는 1836년(헌종 2년) 홍산현감 김용근이 세운 것. 홍산을 찾는 관청의 손님이나 사신들이 머물던 건물로 1871년 개수한 뒤 1983년 중수해 지금도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살펴볼 수 있다.

객사 중앙의 정당(正堂)은 정면 3칸 측면 3칸. 좌우에 날개 형상으로 부속 건물이 있는데 동익실(東翼室)은 정면 5칸 측면 2칸 건물이며, 서익실(西翼室)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돼 있다. 정랑(淨廊)은 전면에 문짝이 없어 다 트여 있는 게 독특하다. 동익실과 서익실도 전면은 개방하고, 양쪽의 3칸은 대청으로 사용했으며, 왼쪽 내부 뒤쪽의 2칸 통은 막아 온돌방을 들였다. 현판에는 ‘비홍관(飛鴻館)’이라고 쓰여 있다.

   


한적한 홍산 면소재지.

사료에 따르면 객사의 서쪽에 홍산현의 군기고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아마도 객사 뒤편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들이 그 시절 ‘과녁들’이 아니었을까 짐작만 할 뿐이다.

고려 말 왜구 토벌 전투 가운데 가장 빛나는 승전으로 손꼽히는 ‘홍산대첩’은 이곳에서 벌어졌다. ‘홍산대첩’은 고려시대 우왕 때 왜구가 침입하자 최영 장군이 거느린 고려군이 바로 이 지역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것을 기려 붙여진 이름.

동헌 뒤의 비석거리를 지나 교원리로 향하면 홍산향교가 있다. 홍산향교의 건립 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향교에 5성(五聖)과 10철(十哲), 송조 6현(宋朝六賢)과 한국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모셔놓고 때마다 제사를 지냈으며, 나라로부터 토지와 노비를 지급받아 정원 30명의 서생을 가르쳤다고도 하는데, 1894년 갑오개혁 이후 향교의 교육 기능이 사라지면서 지금은 봄가을 석전(釋奠)을 지내고 초하루 보름에 분향을 하는 곳이 되었다.

김시습을 모신 청일서원.

교원리의 청일골에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을 모신 청일서원(淸逸書院)도 있다. 이 지역에 그를 기리는 서원이 생긴 이유는 홍산에서 김시습이 말년을 지냈기 때문.

조선시대 초기 학자와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김시습은 1435년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열경(悅卿)이며, 호는 매월당(梅月堂), 법호는 설잠(雪岑).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날려 ‘한 번 배우면 곧 익힌다’ 하여 이름이 ‘시습’이 됐을 정도로 천재였다고 한다. 당시 임금이던 세종대왕이 그에게 직접 ‘장래에 크게 쓰겠다’는 전지를 내렸을 정도다.

하지만 당대의 명망가들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익히며 이름을 떨치던 그는 스물한 살 되던 해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보던 책을 불사른 뒤 머리를 깎고 방랑길에 접어들었다. 관동, 서북 지방뿐만 아니라 만주벌판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한다.

   


홍산의 동헌 모습.

부평초 김시습 만수산 무량사에서 한평생 마무리

31세에 경북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 용장사에 ‘금오산실’을 짓고, 그 집의 당호를 매월당이라 붙인 뒤 37세까지 머물면서 그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와 여러 책들을 지으며 천재성을 발휘했다. 47세 되던 해에 느닷없이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아내를 맞기도 했으나, 임금이 왕비를 폐하는 ‘폐비윤씨 사사사건(1479년)’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가 인생에 대해 비로소 초연해진 것은 오십대에 이르러서였다고 하는데, 그가 이 나라 구석구석을 정처 없이 떠돌다 만년이 되어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바로 충남 부여군 만수산의 무량사(無量寺)였다.

‘무량’이란 셀 수 없다는 뜻. 목숨을 셀 수 없고 지혜를 셀 수 없는 곳이 극락이니, 무량사는 극락 정토를 지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말년의 김시습은 무량사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곤 ‘네 모습 지극히 약하며 네 말은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에 버릴지어다’라고 자신을 평가했다고 한다. 무량사에는 지금도 진위를 확인할 수 없지만 불만이 가득한 표정의 김시습 ‘자화상’이 남아 오가는 길손들을 맞고 있다.

김시습은 59세에 무량사에서 병들어 부평초처럼 떠돌던 한평생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그는 죽음조차 평범하지 않았다. 화장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숨을 거두어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절 옆에 안치해두었는데 3년 뒤 장사를 지내려고 관을 열었더니 김시습의 안색이 생시와 조금도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되었다고 믿어 유해를 불교식으로 다비하였고, 그때 사리 1과가 나오자 부도도 세웠다.

훗날 김시습전을 지은 율곡 이이는 그를 일컬어 ‘한 번 기억하면 일생 동안 잊지 않았기 때문에 글을 읽거나 책을 가지고 다니는 일이 없었으며, 남의 물음을 받는 일에 응하지 못하는 때가 없었다…. 재주가 그릇 밖으로 흘러 넘쳐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을 만큼 되었으니 그가 받은 기운은 경청(輕淸)은 지나치고, 후중(厚重)은 모자라게 마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의 뜻은 윤기(倫紀)를 붙들어서 일월과 빛을 다투었고 그의 풍성(風聲)을 듣는 사람들은 겁쟁이도 융통하는 것을 보면서 가히 백세의 스승이 되기에 남음이 있다’고 하였다.

   


김시습이 말년을 보냈던 무량사 전경. ‘김시습이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써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다면 업적은 한이 없었을 것이다’라며 안타까움을 표해놓은 구절도 있다.

생전에 ‘그림자는 돌아보았자 외로울 따름이고, 갈림길에서 눈물을 흘렸던 것은 길이 막혔던 탓이다. 삶이란 그날그날 주어지는 것이며, 살아생전의 희비애락은 물결 같은 것이었노라’고 노래했던 매월당이여! 사람의 역사도 나라의 역사도 그렇게 지나가는 것인가. 오늘날 작은 면으로 퇴락한 홍산을 보며 매월당의 삶을 떠올린다.

가볼 만한 곳

홍산에서 부여는 지척이다.

백제의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부여에서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우리나라 정원의 원조라고 평가받는 궁남지를 둘러보는 것이 좋겠다.

부소산에 올라 백마강을 바라보며 백제의 역사를 떠올려보는 것도 좋다.

 

하늘이여 아! 개혁이여 못다 핀 조광조의 이상 기묘사화에 휘말려 최후 맞은 곳 …

‘봉서루’ 유명한 경관 詩로만 남아

‘비운의 천재’ 조광조의 한이 서려 있는 능주 전경.

오랜만에 걸음이 남도로 향했다. 전북 정읍시와 전남 장성군의 경계에 자리잡은 갈재를 넘어 접어든 곳은 전남 화순군 능주면. 멀리 무등산이 아스라이 보이는 능주는 과거의 영화를 잃어버린 채 한가롭기만 하다.

이곳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 개혁 사상가였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고장. 그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휘말려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은 곳이 바로 능주면 남정리다. 지금도 지역 곳곳에는 조광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천재이자 당대의 풍운아였던 조광조에 대한 이야기도 적잖이 전해온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광자(狂者·미친 사람) 혹은 화태(禍胎·화를 낳는 사람)라고 불렀다 한다. 적당히 머리 조아리며 요령껏 사는 이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홀로 원칙을 지키려 하는 그를 미덥지 않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앞장서 실천하는 이는 ‘미친 사람’ 취급받으며 화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당대 천재이자 풍운아 … 원칙 실천 ‘미친 사람’ 취급

하지만 조광조가 초년 시절부터 ‘광인’으로 일컬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젊은 날은 승승장구의 연속이었다. 평북으로 귀양 가 있던 김굉필에게서 열일곱 어린 나이에 성리학을 배운 그는 성리학만이 당시의 사회모순을 해결하고 새 시대로 이끌어갈 수 있는 이념이라고 확신했다. 어린 나이에 관직에 등용된 뒤에는 중종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고, 30대 젊은 나이로 사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사헌에 오르면서 개혁의 강도를 높여나갈 때까지 그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신 가운데 흠이 있는 사람들을 골라 명단에서 빼려 한 ‘개혁 작업’이 훈구척신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조광조 천하는 막을 내리고 만다.

조광조가 최후를 맞이한 유배지에 세워진 사당 전경.

중종 14년인 1519년 11월15일 밤 훈구척신파 일원이던 홍경주가 은밀하게 임금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지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정국을 어지럽히니 죄를 밝혀 벌을 주라”고 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중종은 홍경주의 주청을 받아들였고, 조광조 개혁의 강력한 동반자였던 사림에 대한 견제 심리까지 더해지면서 조정에는 기묘사화의 광풍이 불고 말았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가 줄줄이 잡혀 들어갔고, 결국 그해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되면서 그의 개혁정치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훗날 이이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하늘은 그의 이상(理想)을 실행하지 못하게 하면서 어찌 그와 같은 사람을 냈을까?’라고 말할 정도로 조광조의 실패를 안타까워했다. 이이는 조광조에 대해 ‘자질과 재주가 뛰어났음에도 학문이 부족한 상태에서 정치 일선에 나아가 개혁을 급진적으로 추진하다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가 창건한 쌍봉사 전경.

조광조는 그해 12월20일 죽음을 예감한 듯 ‘신하 한두 사람 죽이지 못한다고 해서야 임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뇌까린 뒤 바로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서른여덟 살. 조광조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임금을 어버이같이, 나랏일을 내 집 일같이 걱정하였노라. 밝고 밝은 횃불이 세상을 굽어보니 거짓 없는 이 마음을 훤히 또 비추리’라는 시 한 수였다고 한다.

조광조의 유배지에는 우암 송시열이 그를 기려 세운 ‘조광조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가 있고, 그가 거처했던 초가집 안 사당에는 조선 선비 같은 조광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 한 점이 모셔져 있다.

사실 능주는 조광조가 유배 오기 훨씬 전부터 명맥을 이어온 고장. 백제시대 이 지역의 이름은 이릉부리(爾陵夫里) 혹은 죽수부리(竹樹夫里)였다. 신라 이후 능성현(綾城縣)으로 불리다가 고려 초기에는 나주, 조선 태종 16년에는 순성현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인조 10년인 1605년에는 대비 인헌왕후 능성 구씨의 관향(貫鄕)이라는 이유로 ‘능주목’으로 승격돼 한때 번성했으나, 1914년 군면 통폐합에 의해 화순군에 편입된 뒤 면이 되고 말았다.

필자는 지금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남정리 냄평(남평)거리를 거닐고 있다. 정자가 있어 ‘정재물’이라고 불렸던 이 마을은 능주성의 북문이 있어 ‘북문거리’라고도 했다는데, 오늘날 북문이나 정자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구름만 껴도 물이 불어난다’고 하여 ‘구진다리’라는 이름이 붙은 다리도 이제는 당시의 풍광을 잃어 아무리 비가 와도 큰 피해를 볼 것 같지 않은 모양새다.

조광조를 모신 죽수서원.

죽수서원·지석강 발원지 쌍봉사 들러볼 만

자연스레 발걸음은 남정리를 지나 관영리에 이른다. 관영리는 능주목의 관청이 있던 곳으로, 번성했던 능주의 중심지였다. 지금의 능주면사무소 자리에 능주현의 관아가 있었고, 동헌에는 능주목의 정문인 죽수부리문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 자리에 있던 ‘봉서루(鳳棲樓)’의 경관은 유명해서, 조선 전기 문신 성임은 누각에 오른 뒤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날마다 달려 잠시도 한가하지 못한데, 여기 오르니 다시 한번 근심스런 마음 풀리네, 마을이 바다에 가까우니 봄은 항상 이르고, 소나무와 대나무에 닿았으니 여름에도 춥네. 발을 걷으니 산 빛이 그림기둥에 침노하고, 햇살이 비끼니 꽃 그림자가 난간에 올라오네. 길손 되어 무한히 집을 생각하는 마음, 글 구절을 가지고 억지로 스스로 위안하네.’

   


‘비운의 천재’ 조광조의 한이 서려 있는 능주 전경.

하지만 이제는 어디에도 동헌이나 봉서루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다. 두리번거리며 바라본 길 옆으로 광주선의 기차가 머무는 자그마한 능주역이 보일 뿐이다. 그 아래로 난 길을 따라가면 또 다른 정자인 영벽정(映碧亭)에 이른다. 영산강 지류인 지석강의 상류 강변에 있는 영벽정은 조선시대에 수목이 우거지고 맑은 물이 흘러 뱃놀이하기 좋은 곳이었다 한다. 조선 초기의 문신 김종직은 영벽정에서 바로 위의 연주산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연주산 위의 달은 소반 같은데, 풀과 바람 나무 없고 이슬 기운 차네. 천 뭉치 솜 같은 구름 모두 없어지려 하고, 한 덩이 공문서도 보잘것없다. 시절은 다시 중추(中秋) 아름다운 것을 깨닫겠는데, 길손의 회포 누가 오늘 밤 위안될 줄 알았으리. 갈 길은 또 서쪽 바다 따라 돌아가나, 손가락 끝으로 장차 게 배꼽이나 뻐개리라.’

영벽정 건너편 산 아래에는 조광조를 모신 죽수서원이 있고, 연주산 자락에서 바라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능주의 진산인 운산이 제대로 보인다.

죽수서원의 돌 계단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해장죽(시누대) 잎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가고 오는 세월을 회상하다가 지석강의 발원지인 쌍봉사로 향했다. 쌍봉사는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가 산수의 수려함을 보고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그런 탓인지 가장 빼어난 신라의 문화재 가운데 하나인 ‘철감선사 부도’(국보 제57호) 등 그와 관련된 여러 점의 문화유산이 있다.

깊은 신심이 아니라면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부도 옆에는 보물 제170호로 지정된 ‘철감선사 부도비’가 비신(碑身)이 없어진 채 서 있다. 이 절에는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우리나라 목탑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목탑인 대웅전(당시 보물 제163호)도 있었는데, 84년 4월 초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지금 새로 복원된 탑이 서 있지만 아쉽기만 하다.

가볼 만한 곳

능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광주에서 화순을 거쳐 가는 길과 나주에서 능주로 가는 길 등이 편하다.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운주사와 나주군 다시면의 불회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화순 지석묘 등이 일대에 산재해 찾기 쉽다. 능주역 앞 송원숯불갈비(061- 373-9165)가 맛있다.

 

영조 때 ‘정희량 반란’두고두고 수난과 상처 소론과 군사 일으켜 여러 고을 접수 …

강동마을 정온 고택 말없이 증언

빼어난 풍광으로 유명한 경남 함양군 화림동계곡.

전북 장수군에서 백두대간의 줄기인 육십령을 넘으면 아름다운 남강 줄기로 소문난 경남 함양군 화림동계곡을 만난다. 오늘의 목적지 안의면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곳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계곡 초입에 우뚝 선 거연정(居然亭). 무지개다리인 화림교를 통해 드나들게 되어 있는 거연정 앞에는 “안의현 서쪽 화림동에는 새들(新平) 마을이 있는데, 임천(林川)이 그윽하고 깊으며, 산수가 맑고 아름다워 화림제 전공이 세상이 어지러울 때 이곳에 은거하였다”라고 쓰인 화림제전공유허비(花林齊全公遺墟碑)가 서 있다. 1613년 지어진 거연정의 모양새만 봐도 화림동에 대한 이 극찬이 넘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커다란 바위 위에 8각 주초석을 놓고, 네 모서리에 활주를 세워 안정감을 더한 이 정자는 뛰어난 조형미를 자랑하는 건축물이다.

1815년 복권될 때까지 지역 사람들 벼슬길 못 나가

거연정 바로 아래쪽에는 조선 전기 문신 정여창이 지었다는 군자정이 있고, 얼마쯤 더 내려가면 동호정이 보이며, 조금 더 아래편으로는 농월정이 있다. 이처럼 많은 정자가 한곳에 모여 있는 것만 봐도 이곳의 경관이 얼마나 빼어난지 눈치 챌 수 있다.

특히 농월정은 조선 선조 때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낸 박명부가 정계에서 은퇴한 뒤 지은 정자로, 그 안에 서면 1000여평 너비로 펼쳐져 있는 너른 소나무 숲이 한눈에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2003년 가을 원인 모를 화재로 정자가 불타버려, 지금은 검게 그을린 기둥 두어 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천하의 일은 뜻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 뜻이 지극해진 뒤에는 기가 따르게 마련이다”라고 했던 박명부의 기상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아쉬움을 안고 화림동계곡을 지나면 마침내 함양군 안의면에 이른다. 안의의 진산은 성산. ‘비단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붙은 이 고장의 시내 금천 변에는 조선 태종 12년(1412) 현감 전우가 지은 뒤 여러 차례 중건된 광풍루가 서 있다.

사실 ‘안의’의 역사는 신라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이안(利安)’이라 불리던 평범한 시골 마을이 역사의 중심에 등장한 때는 고려 의종 시절. ‘감음현’이라 불리던 당시, 이 지역 사람 ‘자화’가 현의 아전인 ‘인량’ 등과 함께 임금 등을 저주했다는 무고를 받으며 체포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자화는 산 채로 강에 내던져지는 형을 당했고, 현은 천민 거주지인 부곡으로 강등돼버렸다.

   


안의를 둘러 흐르는 ‘비단내’금천,안의면 금천 변의 광풍루,‘강동마을’에 있는 정온의 고택.(왼쪽부터)

조선 태종이 이곳에 관아를 두고 ‘안음현’의 중심지로 삼으면서 이 지역은 다시 장삼이사의 고을이 되었지만, 그 평화도 오래가지 못했다. 영조 34년이던 1728년, 이 지역 출신의 정희량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관군에 진압돼 참수되는 사건이 ‘또’ 벌어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연혁’편에는 “역적 정희량이 역모하여 혁폐하고, 현의 땅을 함양과 거창에 분속시켰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사건으로 안의는 이름조차 찾을 수 없는 땅이 돼버린 셈이다. ‘정희량 사건’의 여파는 상당히 커서, 1815년 이 지역이 복권될 때까지 안의뿐 아니라 경상도 사람들은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을 정도였다. 이것이 안의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정희량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이 지역은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의면’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부활했지만, 아직도 이곳 사람들에게는 정희량 시대의 수난과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정희량은 조선 중기 학자인 동계 정온의 4대손. 그의 선조인 정온 역시 꼿꼿한 선비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정온은 광해군 시절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다 10여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했고, 병자호란이 일어난 뒤에는 청나라 군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했는데도 ‘명나라를 배반하고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끝까지 전쟁을 주장했다. 인조가 끝내 청 태종에게 항복하기 위해 성에서 내려가자, 정온은 칼로 배를 찔러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정온의 아들이 창자를 배에 넣고 꿰맨 덕에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지만, 그는 이후 고향으로 돌아간 뒤 다시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죽은 안의 사람 산 함양 사람 열 당해낸다”

그의 후손 정희량의 기세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정희량은 영조가 임금이 된 뒤 벼슬 등에서 차별받아 온 소론 일파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청주, 안음, 거창, 합천, 삼가 등 여러 고을을 ‘접수’하며 세를 떨쳤다. 하지만 거창에서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 체포돼 끝내 참수되고 만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안음현’ 조에는 “(이 지역 사람들은) 억세고 사나우며 다투고 싸움하기를 좋아한다”고 쓰여 있다. 함양군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금까지도 “안의 송장 하나가 함양 산 사람 열을 당한다”는 말이 전해진다고 한다. 부침이 심했던 안의의 역사가 바탕에 깔린 이야기일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안음현에 속했으나, 오늘날에는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로 행정구역이 바뀐 ‘강동마을’엔 정온의 고택이 남아 역사를 묵묵히 전해주고 있다. 여든 넘은 종부가 집을 지키고 있는데, 종부에 따르면 ‘정희량의 난’ 이후 정국에서 소외된 소론 집안들은 서로 혼사를 맺으며 가문의 맥을 이어나갔다. 현재 정온의 종부는 경주 최부잣집의 큰딸로, 그의 동생은 하회 유성룡 가문의 종부이며, 시고모는 전남 해남 윤선도 집안으로 시집갔다고 한다. 요즘 재벌가나 정·재계 고위 인사들의 얽히고설킨 혼맥과 다를 바 없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안의초등학교에 있는 박지원사적비.

안의에 가면 중요민속자료 제207호로 지정된 ‘허삼둘 가옥’도 볼 만하다. 이 집은 1918년 윤대흥이라는 사람이 진양 갑부 허씨 문중에 장가든 뒤 아내 허삼둘과 함께 지은 집. 윤대흥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여주인 허삼둘의 이름을 붙인 것이 이채롭다. 집 안에 들어가 봐도 경제적 실권을 쥐고 있던 안주인의 의견이 상당 부분 반영된 내부 구조가 눈에 띈다.

   


맑은 물과 조촐한 정자가 아름다운 수승대, 정온의 고택을 지키고 있는 해주 정씨 종부.

허삼둘 가옥에서 50m쯤 골목길을 따라가면 조선시대 안의현청이 있던 안의초등학교도 둘러볼 수 있다. 조선 후기 북학파의 대표적 사상가이던 연암 박지원은 55세 되던 해 안의 현감으로 부임한 뒤 5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40여권의 저술을 남겼는데, 그 덕에 안의초등학교에는 박지원의 사적비가 있다.


가볼 만한 곳

조선시대 안음현에 속했던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는

수승대(搜勝臺)가 있다. 맑은 물과 조촐한 정자, 큰 바위들이 어우러진

수승대는 거창 사람들이 나들이 장소로 애용하는 곳으로

갖가지 옛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백의정승 윤증 고택 300년 사연 켜켜이 중요민속자료 제190호로 지정 …

교촌리에는 공자 모시는 궐리사 유명

중요민속자료 제190호로 지정돼 있는 윤증 선생의 고택.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90호로 지정돼 있는 윤증(尹拯, 1629~1714) 선생의 고택이 있다. 나는 논산이나 공주를 답사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이 집을 찾는데, 그때마다 나를 반겨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조선 숙종 때 대학자인 윤증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여러 차례의 개·보수를 거쳐 지금 모습은 19세기의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이 집은 파평 윤씨 세거지지(世居之地·대대로 살고 있는 고장)인 이산을 배산(背山)하여 인접한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집 앞에는 비교적 넓은 바깥마당이 펼쳐져 있고, 아름다운 정원 뒤편에는 사랑채가 있다. 정면 4칸에 측면 2칸, 중앙에 2칸의 사랑방과 그 오른쪽에 대청이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 마루에 걸터앉아 먼산을 바라보면 세상이 달리 보이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최근엔 공사를 하고 있어 아쉽게도 그런 정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사랑채를 지나면 안채로 이어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안채 넓은 대청에 왼쪽으로는 윗방 2칸과 안방 2칸을 두고 오른쪽으로는 건넌방 2칸을 두었다. 안채 대청에 딸린 문을 열면 잘 정돈된 장독대가 보인다. 오래전에도 동학 취재 때문에 이 집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종부(宗婦) 양병호 님과 후덕한 며느리가 김치를 담고 있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대가의 가풍답게 반갑게 손님을 맞았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었다. 전주에서 동학 취재차 들렀다고 하자 “동학?” 하며 말문을 열었다.

“돌아가신 어른들에게서 들은 얘긴디, 동학군은 대적(大敵)이라고 하고 만주에서 독립운동한 사람들은 혁명가들이라고 불렀답니다. 동학군들이 전라도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 우리 집에 들렀는데, 그때가 한겨울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집 어른들이 많이 먹이고 많이 줘서 보내라고 했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사용하던 나무가 지금도 우리 집에 있어요. 동학군들 중 몇 사람이 대문간에다 불을 질렀는데 그 자리가 저기요” 하며 대문 위쪽의 검게 그을은 서까래를 가리켰다. 100여년 전 분연히 일어났던 이 땅의 민중은 무언으로 아픈 역사를 말하고 있다.

 

송시열과 사제지간 싸움, 후학들 ‘노론’과 ‘소론’으로 갈려

윤증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이다. 그는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병자호란을 만나 가족이 강화도로 피란 갔다가 어머니가 그곳에서 자결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이후 “어머님 한 분도 지키지 못한 주제에 어떻게 나라를 지키겠는가”라며 평생을 학문에만 열중한다.

김집에게서 학문을 배운 그는 김집이 “주자학에 정통한 송시열에게 배우라”고 추천하자 29세가 되던 해 우암 송시열을 찾아가 사사(師事)받으며 ‘주자대전’을 배웠다. 아버지 윤선거는 그때 아들 윤증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송시열의 우뚝한 기상은 따라가기 힘드니, 그의 장점만 배워라. 하지만 단점도 알아두어라.” 윤선거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송시열의 성격을 아들이 배울까 걱정돼 송시열에게 여러 번 편지를 보내 깨우쳐주고자 했다. 그러나 윤휴와 송시열이 ‘예송(禮訟)’논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되자, 송시열은 윤선거가 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하게 된다.

윤증 고택의 장독대.

윤선거가 세상을 뜨자 윤증은 아버지 묘비명을 써달라고 송시열을 찾아간다. 그러나 송시열은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처자를 거느리고 강화도로 피란 갔고, 청군이 쳐들어왔을 때 처자와 친구는 자결했는데 성을 탈출하여 살아남은 일과 윤휴와 절교하지 않았던 일을 들먹인다. 송시열은 선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하며 윤증을 소홀히 대한다. 이에 분개한 윤증은 송시열과 사제지간의 의를 끊는다. 그 뒤 송시열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노론’이 되고, 윤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소론’이 된다. 그리고 여러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사간 정호등이 상소하여 윤증이 스승을 배반했다고 헐뜯자 숙종은 “아버지와 스승 중 누가 더 중한가, 아버지가 욕됨을 받는데 아들의 마음이 편하겠는가”라며 윤증을 옹호한다. 윤증의 학문이 높고 깨끗하다는 소문이 온 나라에 퍼지자 숙종은 그에게 대사헌, 좌찬성 등의 벼슬을 내린다. 1709년에는 우의정의 벼슬을 내리고 출사(出仕)를 종용했지만 윤증은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한 번도 벼슬을 하지 않고 우의정에 올랐다고 해서 그를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 불렀다. 윤증은 83세에 학질을 앓다가 이듬해 정월에 세상을 떴는데, 죽기 직전에 후학들의 당파 싸움을 걱정하면서 묘비에 ‘착한 선비’라고만 쓰도록 일렀다.

   


교촌리 궐리사.

노성천과 연산천 만나는 ‘초포’ 정감록에서 거론

숙종은 그의 부음(訃音)을 듣고 아쉬워하며 시를 지었다. “유림에서 그의 덕을 칭송하도다. 나 또한 그를 흠모했지만 평생을 두고 그의 얼굴 보지 못했네. 그가 떠났다 하니 내 마음 깊이 한 쌓이네.”

계룡산이 눈앞에 들어오는 곳에 노성이 자리잡고 있다. 노성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노산(魯山)은 현의 북쪽 5리에 있는 진산으로, 일명 성산(城山)이라고도 불린다. 노산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950척이고 높이가 8척이며 그 안에 우물이 네 개 있다.”

그러나 노산성은 지금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노성의 백제 때 이름은 열야산현(熱也山縣)이었다. 신라 때는 이산현 웅주의 속현이었고, 고려 현종 9년까지 공주에 속해 있다가 그 후에 나뉘어 감무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 때 석성현을 합하여 이성현이라고 했다. 태종 24년에 연산-은진을 합해 은진으로 부르다 효종 7년에 노성현으로 분리되고, 고종 32년에 군으로 승격 11개 면을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논산군 노성면이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노성에 대해 “땅은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고, 기후가 차며, 호수가 384호요, 인구는 1591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윤증 고택에서 산등성이 하나를 넘으면 교촌리 궐리사 사당이 있다. 궐리사는 공자의 영정을 모시고 봄가을에 제사 지내는 곳으로 숙종 42년인 1716년에 건립했다. 우리나라에는 경기도 오산과 이곳 두 군데가 있다. 궐리사 동쪽에는 무주고혼(無主孤魂)을 제사 지내는 여제단 터가 있고, 향교 마을 앞에는 윤증의 아내 권씨의 열녀 정문이 있다.

노성향교.

향교 마을 남동쪽에 있는 구앞술막은 예전에 주막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두사리의 군량들은 고려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칠 때 이곳에다 군량미를 쌓아두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또 정감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역도 있는데, 예전에 노성 땅이었던 논산시 광석면 향월리의 노성천과 연산천이 합쳐지는 곳에 자리 잡은 초포, 즉 풋개가 그곳이다. 정감록에 따르면 “풋개에 배가 다니고 계룡산의 돌이 희게 되면 계룡에 도읍지가 될 것을 가히 알 때가 되리라” 했다는데, 금강 하구 군산과 서천 사이에 하구둑이 생기면서 배가 들어올 날은 요원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계룡산 자락 신도안 일대에 군 사령부가 들어서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공주시 장기와 연기 일대에 행정 복합도시가 들어선다고 온 나라가 떠들썩하니 정감록의 예언은 그냥 헛된 말은 아니었던 듯도 싶다.

가볼 만한 곳

멀지 않은 논산시 부적면 충현리에 계백 장군 묘라 전해오는 무덤이 있고, 가까운 계룡산 자락에 신원사가 있다 

 

천년 고찰 화암사 경내엔 원효와 의상대사 숨결이 극락전은 국내 유일 하앙식 목조 건물 …

봉림사 폐사지엔 세월 무심

고산 향교

만물(萬物)은 가고 가도 다 돌아가지 않으니
거의 다 돌아간 것 같으나
아직도 다 돌아가지 않았네.
가고 가도 끝내 끝이 없으니
어디에서 돌아가게 되는가?

서경덕의 위 시를 읽으면 어차피 세상은 왔다가 가는 것, 흘러간 것에 연연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직도 고산엔 연연해할 곳이 남아 있으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일반국도 17번 선형 개선에 따라 새로운 길이 나고 있는 그곳을 생가하면 가슴이 아프다. 폐사지 봉림사 때문이다.

삼기초등학교 뒤편 나지막한 봉림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봉림사. 신라 때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지만 정확한 창건과 폐사 연대를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고구려의 반룡산 연복사에 기거하던 보덕화상이 당시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이 밀교를 받아들이자 신통력으로 하룻밤 새 전주의 고덕산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때 그의 제자들이 세운 사찰들 중 하나일 것이라는 전설만 남아 있다.

지금 봉림사 터에는 그 흔한 표지판 하나 없다. 무성한 고추밭 가장자리에 감나무 한 그루가 무심히 서 있고, 밭고랑 이곳저곳에는 천년 세월 비바람에 씻긴 기왓장들이 뒹굴고 있다. 그리고 몇 걸음 내려온 곳에 있는 논 가운데의 거대한 초석들과 댓돌들은 과거 번성했던 봉림사 이야기를 말없이 들려주고 있다.

봉림사에 있었던 귀중한 문화유산들은 일제강점기 때 군산의 한 일본인 농장으로 옮겨졌고 나머지는 1970년대에 전북대 박물관 앞으로 옮겨졌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타향살이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석등’과 ‘오층석탑’ 고향 그리며 타향살이

1940년대 군산 개정의 발산리에 큰 농장을 가지고 있었던 미치야라는 일본인이 자기 정원 꾸미는 데 쓰기 위해 봉림사 터에서 석등(보물 제234호)과 오층석탑(보물 제276호)을 가져갔다. 그 뒤 해방이 되면서 미치야 농장에 발산초등학교가 들어섰지만 유물은 아직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문화유산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도 일제 잔재청산 작업이 될 터인데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천년 고찰 화암사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화암사(花巖寺) 주줄산에 있다. 가느다란 잎사귀에 털이 텁수룩한 나무가 허리띠처럼 어지럽게 드리웠는데, 푸른빛이 구경할 만하며 다른 군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세속에서는 전단목이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화암사는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된 것으로 추측된다. 전설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이곳에 있는 별장에 와 있을 때, 용추에서 오색찬란한 용이 놀고 있었고 그 옆의 큰 바위에 무궁초가 환하게 피어 있어 그 자리에 절을 짓고 화암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화암사에서 수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원효와 의상. 두 스님이 이곳에 머물 때 극락전에 봉안되었던 수월관음보살에 대해서는 “의상 스님이 도솔산에서 친견했다는 수월관음의 모습을 사람 크기로 그려서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화암사 동쪽에서는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원효대’의 전설이 전해오고, 불명산 정상 아래에는 의상대사가 용맹정진했던 ‘의상대’의 흔적도 남아 있다.

원효와 의상 이후 고려시대 사찰 기록은 남아 있는 게 거의 없다. 세종 7년(1425년)에 전라관찰사 성달생(成達生)의 뜻에 따라 당시 주지 해총(海聰)이 4년(1429년까지)에 걸쳐 중창해 이때 화암사가 대가람의 면모를 갖춘다. 그 후 화암사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극락전과 우화루 등만 남기고 모조리 소실되었으며, 훗날 명부전과 입을 놀리는 것을 삼가라는 뜻의 철영재, 산신각 등의 건물들이 ㅁ자를 형태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제 때 고산현이었지만 이젠 고산 면으로

화암사 극락전(보물 제663호)은 중국 남조시대에 유행하던 하앙식 건축 기법으로 지어진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건축물. 때문에 건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필수 답사처이기도 하다.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3칸에 맞배지붕이고 중앙 문은 네 짝으로 된 분합문이며 오른쪽과 왼쪽 문은 세 짝으로 된 분합문이다. 극락전은 남쪽을 향해 1m 정도의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다. 전면은 처마를 앞으로 길게 하기 위해 하앙을 얹은 뒤 서까래를 이중으로 만들었다.

하앙이란 하앙부제를 지렛대와 같이 이용해 외부 처마를 일반 구조보다 훨씬 길게 하는 기법으로, 특히 건물의 높이를 올려주는 장점이 있다. 하앙식 건물은 비바람을 막아주면서도 유연한 자태가 빼어나 삼국시대부터 써온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 현존 양식을 찾지 못하다가 1978년 문화재관리국이 처음 밝혀냈다.

적묵당은 우화루와 극락전 사이에 지어진 후원을 겸한 건물로 날개를 맞대고 서 있는데, 마루에 앉으면 한없는 부드러움이 세상 돌아감을 잊게 해준다.

고려 때 백문절(白文節)은 화암사를 이렇게 노래했다.

<< “어지러운 산들 사이로 급한 여울 달리는데, 우연히 몇 리 찾아가니 점점 깊고 기이하네. 소나무와 회나무는 하늘에 닿고 댕댕이 줄 늘어졌는데, 백 겹 이끼 낀 돌다리는 미끄러워 밟기조차 어렵구나. 말 버리고 걸어가니 다리는 피곤한데, 길을 이어주는 외나무다리는 마른 삭정이일세. 드물게 치는 종소리는 골을 더뎌 나오고, 구름 끝에 보일락 말락 지붕마루 희미하다. (중략) 열 발짝 못 걸어서 소나무 사립문 있는데, 두드리자 산새들이 모두 놀라 날아가네. (중략)

조용히 와서 하룻밤 자니 문득 세상 생각을 잊어버려 10년 홍진(紅塵)에 일만 일이 틀린 것 알겠구나. 어찌하면 이 몸도 얽매인 줄 끊어버리고 늙은 중 따라 연기와 안개에 취해볼까. 산에 사는 중은 산을 사랑해 세상에 나올 기약이 없고, 세속 선비는 다시 올 날 알지 못하니, 차마 바로 헤어지지 못해 두리번거리는데 소나무 위에 지는 해는 세 장대 기울었도다.” >>

   


화암사 옛길(왼쪽). 고산현감 최득지가 세웠다는 삼기정(위)과 화암사 우화루.

그윽하면서도 조용한 화암사를 알고 난 뒤에는 내 가슴 한 귀퉁이에 항상 그 절이 머물러 있는 듯하다.

봉림사 터와 화암사를 품고 있는 고산은 본래 백제 고산현[난등량(難等良)이라고도 한다]이었는데 신라 때 전주에 포함됐다. 고려 현종(顯宗)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가, 훗날 감무를 두어 진동(珍同)을 겸하게 했다. 이를 조선 태조 때 다시 나누었고, 그 뒤에 차례로 현과 군으로 바뀌었다. 고려 때 문장가인 이규보는 고산을 두고 “높은 봉우리 우뚝한 재가 만 길 벽처럼 서 있고 길이 좁아서 마을은 내려서야 다닐 수 있다”고 했다. 윤자운(尹子雲)은 “산은 가까운 성곽 따라 둘러 있고 물은 먼 마을을 안고 흐르네”라고 노래 했다. 그러나 지금의 고산은 완주군에 딸린 한가한 면일 따름이다.

고산면 성재리의 안수산 북쪽 골짜기에는 8남 8녀를 낳고 살았다 해서 ‘팔남 팔녀 난골’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아이를 적게 낳아 국가 경쟁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 오늘날 같으면 대접받았을 것이다.

만경강 상류에 자리잡은 고산은 지금도 곶감과 대추가 많이 나기로 유명하고, 그 아래 봉동은 ‘택리지’의 기록처럼 생강이 많이 난다. 하지만 고산현감 최득지가 세웠다는 삼기정 아래에는 푸르게 흘렀다는 냇가와 늙은 소나무는 사라지고 없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전해오는 말바위 밑의 논다랑이에는 봄풀만 무성할 뿐이다.

가볼 만한 곳
호남고속도로 익산인터체인지에서 빠져나온다. 고산에서 가까운 곳에 호남의 금강산이라고 알려진 대둔산이 있고, 조선 선조 때 고승인 진묵 스님의 자취가 서린 봉서사와 대아댐이 있다.

 

고요한 해미읍성 곳곳에 천주교 박해 아픔이 1866년 병인년엔 1000여명 순교 …

마애삼존불 ‘백제의 미소’로 반겨

해미읍성.

봄꽃이 피는데, 그리고 꽃잎 하나 날려도 봄이 간다는데

봄이 오는지 가는지도 바람이 부는지 모르고,

비가 내리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세월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서 “봄날 아침이었네, 누가 와서 가자고 했네.”



이성복 시인의 이 시 한 구절처럼 아침마다 길을 나서면서 얼마나 마음이 설 던가. 바다도 아니고 깊은 산속도 아니면서 푸르게 봄물이 드는 곳, 길목에 벚꽃이 피어 아름다운 곳, 진달래가 황홀한 해미를 찾아가는 기분은 말 그대로 설렘이다. ‘아름다운 바다’라는 뜻을 지닌 해미(海美)는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해서 만든 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태조 때 큰 공을 세운 몽웅역의 아전 한(韓)가에게 대광의 작호를 내리고, 고구현(지금의 홍주 속현) 땅을 분할해 정해현으로 만들어 그의 본관으로 삼게 했다. 현종 9년에 운주로 붙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다. 여미현은 본래 백제의 여촌현이었으나 신라 때 여읍으로 고쳐 혜성군의 속현이 된 곳이다. (중략) 조선 태종 7년에 두 현을 합쳐 이름을 해미라 하고, 정해를 다스리는 곳으로 삼았는데, 13년에 다른 예에 따라 현감을 두었다”고 한다.

해미는 고종 32년에 군이 되었다가 1917년에 서산시 해미면으로 바뀐다. 해미면 산수리에 있는 안흥정이라는 정자는 고려 문종 때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송나라 사신을 맞아들이고 보냈던 곳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본현 동쪽 11리 지점에 있다. 고려 문종 31년에 나주도 제고사 태부소경 이당감이 아뢰기를 ‘중국 조정의 사신이 왕래하는 고만도의 정자는 수로가 막혀 있어 배의 정박이 불편하오니, 청하건대 홍주 관하 정해현 땅에 정자 하나를 창건하여 맞이하고 보내는 장소로 삼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제서(制書)를 내려 그 말을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해미면 반양리는 옛 정해현 현청이 있었던 곳이다.

 

서해안고속도로 덕분에 사통팔달 교통 요지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사통팔달의 고장이 된 해미에 사적 제116호로 지정된 해미읍성이 있다. 순천의 낙안읍성, 고창의 모양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읍성 중 거의 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충남 덕산에 있던 병마절도사의 병영을 해미읍성으로 옮긴 것은 조선 태종 14년인 1413년이었다. 병마절도사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성이 필요하자 성종 원년(1469)에 성을 착공, 성종 22년에 완성했다. 그 뒤 병영은 효종 2년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서해안 방어의 요충지 구실을 했다. 해미읍성은 이순신 장군이 병사영의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를 했던 곳이고, 숙종 때는 온양에 있던 충청도 좌영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성 둘레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렀다고 하여 ‘탱자나무 성’이라고도 불렀다. 조선 초기의 대학자 서거정은 해미읍성을 “백마가 힘차게 세류영에서 우는데 중요한 땅, 웅장한 진번의 절도사가 큰 성을 이루었네. 아낙네의 쪽처럼 떠오르는 산이 둘러싸고 있고, 바다는 고래 물결로도 동하지 아니하고 맑고 깨끗하다”고 했다. 그것은 해미읍성을 둘러싼 가야산의 맑고 고요한 모습과 규율이 엄격한 군대의 주둔지를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 둘레 1.8km, 높이 5m, 총면적 6만여 평의 거대한 성으로 동·남·서에 세 문루가 있다. 몇십 년 전까지 성 안에 행정관청과 학교를 비롯한 민가 160여 채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모두 성 밖으로 옮겨짐에 따라 고요한 성이 되고 말았다.

   


개심사(위)와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

해미읍성은 천주교 수난의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천주교 박해 당시 관아가 있던 해미읍성으로 충청도 각 지역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잡혀와 고문과 죽음을 당했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 1000여명이 이곳에서 처형됐다고 한다. 성 안의 광장에는 체포된 천주교도들이 갇혀 있던 감옥 터와 나뭇가지에 매달려 모진 고문을 당했던 노거수 회화나무가 있다. 성 밖 도로변에는 호야나무에 매달려 고문당하면서도 굴하지 않은 신도들을 돌 위에 올려놓고 태질해 죽이는 데 쓰였던 자리갯돌이 남아 있어 천주교인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해미읍성에 따사로운 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임진왜란 화 피한 개심사는 조선 고건축 귀중한 자료

해미읍성을 지나 개심사에 이르는 길은 봄꽃들이 아우성이다. 마음을 열게 하는 절로 알려져 있는 개심사를 찾아가는 길에서 만나는 풍경은 다소 이국적이다. 김종필 씨가 3공화국 시절 조성한 거대한 삼화목장은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국립종축장으로 바뀌었는데, 저수지를 돌아가면 소나무 숲이 아름다운 개심사에 이른다. 몇 년 전만 해도 한산하기 이를 데 없던 개심사에 웬 사람들이 이리도 많은지, ‘세심동’이라고 쓰여 있는 푯돌이 낯설어 보인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은 청청한 소나무 숲이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 연못의 나무다리를 건너 돌계단을 오르면 안양루가 보인다. 근대 명필로 이름을 남긴 해강 김규진이 예서체로 쓴 ‘상왕산 개심사’라는 현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후세에 ‘건물에 비해 글씨가 너무 크다’는 평가를 받는 안양루를 돌아서면 개심사 대웅보전이 눈앞에 나타난다.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에 혜감 스님이 창건했는데 원래 이름은 개원사였다.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처능 대사가 중창하면서 개심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은 1941년 해체 수리 때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조선 성종 6년(1475) 불탄 것을 중창했으며 그 뒤 17세기와 18세기에 한 차례씩 손보았음을 알 수 있다.

개심사는 우리나라 절 중에서 보기 드물게 임진왜란 때 전화를 입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시대 고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건물들이 여러 채 남아 있다. 보물 제142호로 지정된 대웅보전과 심검당이 그것이다. 심검당은 대웅보전과 같은 시기에 지어져 부엌채만 신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나무의 자연스러움을 마음껏 살린 건물로 손꼽힌다.

1962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475년에 세 번째 중창되었고, 영조 때까지 여섯 번이나 중창을 거쳤으며 시주한 사람들의 명단과 박시동이라는 목수의 이름까지 들어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해미읍성 호야나무.

개심사에서 멀지 않은 운산면 용현리에 보원사와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다. 대부분의 폐사지가 그러하듯 내력조차 전해오지 않는 보원사지는 사적 제361호로 지정돼 있다. 보원사지 터에는 보물 제103호로 지정된 당간지주와 보물 제102호로 지정된 석조,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가장 잘 이어받았으면서 고려 탑의 전형을 간직하고 있는 보원사지오층석탑이 서 있다. 또 그 탑 너머로 고려 경종 3년인 978년에 건립된 법인 국사의 부도와 부도비가 서 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보원사 주위에 99개의 절이 있었는데, 백암사라는 절이 들어서면서 모조리 불에 타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랫자락에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다.

현존하는 마애석불 중 웃는 모습이 아름답기로 소문나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은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다. 백제의 분위기를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꼽히는 마애삼존불은 1959년에 발견돼 국보 제84호로 지정됐다. 중앙에 석가여래입상이 있고 왼쪽에 보살입상, 오른쪽에 반가사유상이 작게 조각돼 있다. ‘신비한 미소’라고도 불리는데, 부처의 표정이 빛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또 양옆의 협시보살들 또한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여자다운 모습이다. 어떤 사람들의 말로는 살짝 토라진 본부인에 의기양양해진 첩 부처라는 장난스런 이야기도 전해온다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나 편안하게 만드는 그 너그러운 웃음은 고구려의 미소를 백제화한 한국 불상의 독특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햇살이 따스하고 미소 또한 아름다운 해미 일대에서의 하루는 어쩌면 봄날에 꾸었던 꿈이 아니었을까.

§ 가볼만한 곳

근처의 수덕사와 안면도, 그리고 만리포·몽산포 등의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있다

 

푸른 물결 바람에 출렁 수몰민 한과 눈물 알고 있나 옥거리·태고정 등 명소 즐비 …

2000년 수몰되면서 옛 정취 간 곳 없어

용담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망향의 동산.

가버린 세월을 어느 누가 붙잡을 수 있고, 어느 누가 되돌릴 수 있으랴. 한때는 그 일대를 호령하며 나라가 좁다고 큰소리치던 사람들도 세월의 흐름 속에 묻혀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어떤 지역을 찾아가서 허공을 바라보면 문득 되살아나는 얼굴이 있다. 반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곳도 있는데, 안동댐에 수몰된 안동의 예안이 그렇고 금강 상류에 건설된 용담댐에 잠겨버린 전북 진안의 용담이 그렇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용담현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쪽으로 금산군의 경계까지 29리, 북쪽으로 금산군의 경계까지 22리, 남쪽으로 장수현의 경계까지 31리, 서쪽으로 고산현의 경계까지 36리, 그리고 서울에서 557리 떨어져 있다. 본래는 백제의 물거현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청거로 개명하여 진례현에 예속시켰다. 그 후 고려 충선왕 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령을 두었고 본조(本朝)에서도 이에 따랐다.”

조선 말까지만 해도 독립된 현이었다가 군이 된 용담은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용담군 군내면과 일북면의 일부를 병합, 용담면이 되어 진안군에 편입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용담은 땅이 메마르며 기후가 일찍부터 춥다”고 했다.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정도전과 함께 조선 창업공신의 한 사람인 윤소종은 시 첫머리에서 “용담 백성들은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 또 좁고 맑은 물이 여러 겹 창벽 간에 흐른다”고 했다. 또 주기(州記)에서는 “땅은 궁벽하고 하늘은 깊으며,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노후하다. 구름다리가 산에 걸리고, 돌길은 시내에 연해 있다. 동구 문은 깊숙하며, 백성들은 드문드문하다”고 했다. 용담현의 중심지였던 옥거리는 용담군 군내면 지역으로, 마을 앞으로 흐르는 내가 옥처럼 맑았다 하여 옥거 또는 옥거리라고 불렀다. 지금 옥거리에는 물이 넘실거리고, 용담댐 순환도로 옆에 있는 몇 채의 집들이 옥거리의 명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유적 한곳에 모아놓은 용담댐 ‘망향의 동산’

용담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객사 터도 고을 원님이 부임하거나 이임할 때 백성들이 나와서 환영 또는 환송하던 곳이다. 마을에서 5리쯤 떨어져 있었다는 오리정도, 소나무와 참나무가 서 있었다는 숲거리도 개울 위에 작은 다리를 놓았는데, 모양이 구름 같아서 ‘하느개’라고 지었던 그 다리도 사라진 지 오래다.

푸른 물결 너머 멀리 산 위에 정자 하나가 보인다. 용담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망향의 동산에는 팔각정과 태고정, 그리고 용담 땅을 다녀간 현령들의 영세불망비가 서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태고정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봉우리가 빼어나고 시내가 있으며 송백이 울창하다.”

   


용담향교, 태고정, 영세불망비, 선바위 모습(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태고정은 본래 상거 북쪽에 있는 정자로 현령 조정이 정자를 짓고 이락정 또는 만송정이라고 불렀다. 그 후 현령 홍석인이 이락정 터에 다시 정자를 만들고 태고정이라 고쳐 불렀다.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고, 시냇물이 수백 그루의 소나무를 에워싸고 흐르는 곳에 자리잡은 태고정은 태고청풍(太古淸風)이라 하여 용담팔경 중 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용담호에 둘러싸여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용담현에는 산천도 많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고 기록한 주줄산은 지금의 운장산이다. 구봉산과 더불어 사람들이 즐겨 찾는 산인데, 원래의 이름이 주줄산인 만큼 하루빨리 주줄산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사라지고 변해버린 게 어디 그뿐일까. 용담향교는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고려 공양왕 때 현령 최자비가 중건했으며, 이색의 시에 ‘성도와 왕화가 원근에 고루 퍼지니, 학사(學舍)는 천산만산 중이 있도다. 묻노니, 독서의 목적은 무엇인고, 효제 충신 바로 이것이로다’라고 기록돼 있다. 용담향교는 용담댐으로 인해 진안군 동향면 대량리로 옮겨졌다. 동향면에는 동향소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또한 구리향천이라는 냇가에 이름만 남아 있다. 구리향천과 금강이 만나는 곳에 자리잡은 죽도는 선조 때 1000여명이 희생당한 기축옥사의 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기만 하다.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는 용담댐은 푸르고 또 푸르다. 물이 넘실거리는 그곳에 금산으로 가는 795번 지방도로와 안천으로 가는 796번 도로가 나뉘는 안천대교가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다.

2만1000여명 정든 고향 떠나… 새 면 소재지는 송풍리

용담댐이 처음 계획되었던 것은 1930년대 일제에 의해서다. 광복 전까지 측량과 수몰지역 내의 용지 매수까지 완료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하며 용담댐은 중단된다. 50년에 매수했던 토지는 무상 반환되었다. 66년 건설부에서 용담댐 일대를 재조사하여 수몰지역민의 이주대책까지 세웠지만 계획으로 그쳤다.

용담댐 건설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서해안 개발이 본격화된 80년대 중반부터였다. 88년 8월에 전주권 2단계 지역개발사업 타당성 조사가 시행되었고 90년 12월에는 설계에 들어갔다. 92년 10월29일에 용담댐 공사가 착공되었고 96년 10월에는 총 8억t의 저수량을 확보하게 될 축조가 개시되었다. 97년 12월10일에는 용담에서 고산까지 이어지는 길이 21.9km, 지름 3.2m의 도수터널이 관통되고, 용담은 2000년에 수몰되면서 송풍리에 새로운 면 소재지가 만들어졌다.

용담댐의 유역 면적은 930km2이고, 수몰지의 이주인구는 2864가구(2만1616명)였다.

   

수많은 수몰민들의 한과 눈물, 그리고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만든 댐 안의 물은 값어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다. 물 쓰듯 쓰는 그 물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한 방울도 늘지 않았기 때문에 물이 부족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지구촌은 이미 생존을 위한 ‘물 전쟁’이 시작되었다. 20세기 자원 전쟁이 ‘석유’ 때문이었다면, 21세기는 ‘물이 재앙의 씨앗’이 될 것이다.

인구증가와 산업화 등으로 수자원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물을 물 쓰듯 하는 습관을 버리지 않는 우리들도 물 부족에 시달릴 것이 뻔하다. “산과 물을 잘 다스려야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는 동양의 오랜 지혜를 가슴에 새겨야 할 시점이 아닐 수 없다.

고려 때의 문장가인 김극기는 용담을 두고 “땅은 궁벽하고 물과 구름의 고을이로다”라고 노래했고, 성임은 “다리는 시내 굽이에 비낀 것이 어여쁘고, 집은 수풀 사이에 향해 있는 것이 사랑스럽다. 다만 궁벽한 곳에 와서 노는 것이 좋을 따름이니, 지나온 길이 험하였음을 탄식하지 말라” 하였는데 그 아름다웠던 풍경은 어디로 갔는지 헤아릴 길이 없고 푸른 물결만 바람에 출렁거리고 있다.

 

육지 속에 떠 있는 섬 자연이 빚은 걸작 ‘의성포’ 내성천 감돌아 흘러 조선시대엔 귀양지 …

비경에 물산 풍부 전국에 명성

길 위를 다니다 보면 자연의 모습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멍한 채 바라보는 곳이 많다. 낙동강의 본류와 내성천, 금천이 합쳐지는 곳에서 멀지 않은 데에 있는 의성포(義城浦)가 바로 그러한 곳 가운데 하나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 느닷없이 꺾여 굽이굽이 돌아 제자리로 오는 물도리동으로 이름난 곳은 안동의 하회마을, 정여립이 의문사한 전북 진안의 죽도, 무주의 앞섬 등이다. 그중에서도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 의성포 물도리동은 천하 비경을 자랑한다. 본래 용궁군 구읍면으로 조선시대 유곡 도찰방에 딸린 대은역이 있어 대은역, 또는 역촌·역골이라 불렸으며 대은리에서 내성천을 건너면 장안사에 이른다.

 

정감록의 십승지지 … 열한 가구 오순도순 거주

고려 때의 문인인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 고율시(古律詩)에 이곳 용궁현에 와서 원님이 베푸는 잔치가 끝난 뒤 지은 ‘십구일에 장안사에 묵으면서 짓다’라는 시를 남겼다.

산에 이르니 진금(塵襟)을 씻을 수가 없구나.
하물며 고명한 중 진도림(진나라 때의 고승으로, 자는 도림)을 만났음에랴.
긴 칼 차고 멀리 떠도니 외로운 나그네 생각이오.
한 잔 술로 서로 웃으니 고인의 마음일세.
맑게 갠 집 북쪽에는 시내에 구름이 흩어지고
달이 지는 성 서쪽에는 대나무에 안개가 깊구려.
병으로 세월을 보내니 부질없이 잠만 즐기며
옛 동산의 소나무와 국화를 꿈속에서 찾네.

시간이 있으면 며칠 머물고 가라 하시던 주지스님은 봉암사로 공부하러 떠나고, 새로 온 주지스님마저 출타 중인 장안사 뒷길로 300m쯤 오르자 전망대가 나온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의성포 물도리동은 자연이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로운지를 깨닫게 해준다.

의성포는 회룡 남쪽에 있는 마을로, 내성천이 감돌아 흐르면서 섬처럼 되어 조선시대에는 귀양지였다. 고종 때 의성 사람들이 모여 살아 ‘의성포’라 했다고도 하고, 홍수가 났을 때 의성에서 소금 실은 배가 이곳으로 와 의성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육지 속의 섬처럼 외로이 떠 있는 의성포 물도리동은 ‘정감록’의 십승지지(十勝之地)로 손꼽혔고, 비록 오지이지만 땅이 기름지고 인심이 순후해서 사람 살기 좋은 곳이었다. 신당에서 회룡으로 건너는 시무나드리(나루)에서 의성포로 들어가려면 새하얀 모래밭에 길게 드리운 다리를 만나는데, 공사장 철판을 연결하여 만든 임시 다리다. 발 아래로 흐르는 내성천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낭창낭창 휘어지는 철판을 걸어가는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이 재미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바퀴가 모래밭에 빠지지 않는 4륜 구동 경운기를 이용, 내성천을 건너기도 한다.

   


장안사, 의성포 들어가는 곳에 놓인 철판다리, 폐교된 향석초교(왼쪽부터).

철판다리를 건너면 열한 가구가 오순도순 모여 사는 의성포다.

한때 용궁군은 물산이 풍부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서울 다음으로 번화했던 곳으로 알려져, 이름난 사대부들이 즐겨 찾아왔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용궁군이 “동으로 예천군(醴泉郡) 경계까지 15리, 남으로 동군(同郡) 경계까지 35리, 서로 상주(尙州) 경계까지 12리, 북으로 동주(同州) 경계까지 9리, 경도와의 거리는 444리”로 “풍속은 화목함을 숭상한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장돈의(蔣敦義)는 “일대수는 회계수(會稽水·중국 저장성 사오싱에 있는 강 이름)와 같고, 사위산은 영가산(永嘉山)과 비슷하네”라고 했다.

용궁군은 신라 때 축산현[竺山縣, 원산(園山)이라고도 했다]이었다. 고려 성종 때 용주자사(龍州刺史)로 승격시켰으며, 목종이 자사를 파하고 군으로 강등했다. 현종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상주에 붙였고, 명종 때 감무를 두었다. 그리고 조선 태종 때 전례를 고쳐 현감으로 했다. ‘경상도 지리지’에 의하면 호수는 396호에 인구는 4545명이었다고 한다.

 

비룡산 장안사와 석성 과거의 영화 몸으로 증언

임진왜란 때는 용궁현감 우복룡(禹伏龍)이 예천 의병을 이끌고 6월15일 용궁으로 진격해온 적장 요시가와 히로이에(吉川廣家)를 무찔러 이 지역이 왜구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1914년, 용궁군은 예천군에 합병된다.

용궁군의 소재지는 원래 향석리였는데 철종 때인 1856년에 내성천과 낙동강이 범람, 현청이 떠내려가자 다음해 현청을 금산 아래 읍부리로 옮겨 향석리는 구읍이 되고 말았다. 구읍 향석초등학교 자리가 동헌이었는데, 지금은 동헌은커녕 학교마저 폐교되고 동헌 터 북쪽의 객사 터도, 객사 터 동쪽에 있었다는 수월루(水月樓)도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조선 초기의 문장가 서거정은 동헌 수월루에 올라 “몸도 한가롭지 못한데, 하물며 마음일쏘냐. 양볼에 수염은 문부 사이에서 다 희어지네. 청산에 돌아가지 못함을 부질없이 말하랴. 남쪽에 오니 청산 아닌 곳이 없다” 했고, 김수온은 “맑은 때 일 없고 몸도 한가로우니, 태수는 백중(伯仲) 사이에서 서로 즐기네. 백 잔 술 실컷 마시고, 누 위에 누워 주렴 걷으니, 남북이 모두 푸른 산일세”라고 수월루를 노래했다.

향석리에서 내성천을 건너면 보이는 산이 비룡산이다. 그 산에는 장안사와 비룡산성이 있다. 해발 189m인 비룡산은 용이 나는 형국으로, 언제 쌓았는지 모르는 석성이 있다. 둘레가 871척에 높이가 7척이며, 성안에 우물이 3개가 있었고, 산봉우리에 봉수대가 있어 동으로 예천군 서암산, 남으로 다인현 소이산, 북으로 상주시 산양현의 소산에 응했다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용궁현의 진산은 축산으로 객관 북쪽에 있었고, 용비산(龍飛山)은 현의 남쪽 2리에 있었다. 하풍진(河豊津)은 아동부의 견항진(犬項津), 예천군의 사천(沙川) 및 화천(火川)의 물이 용비산 아래에서 합쳐져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규보는 그의 시에서 “푸른 호수엔 가벼운 노 목란주(木蘭舟), 눈에 가득한 연기 파도는 모두 시름뿐일세. 올해는 점점 작년 모습이 아니니, 타향에서 고향에 놀던 것 생각하누나. 용추(龍湫)에 해 저무니 구름 모이고, 만령(蠻嶺)에도 갈 수 없으며, 옥지(신선이 먹는 약)가 창주(滄州)에서 늙는데 어찌할꼬”라고 했다.

용궁군 천덕산에 있던 백화사를 찾아왔던 이제현은 관공루기를 지었는데, “승경(勝景) 노니는 곳에는 붙잡고 오르는 것이 많은데, 이 절은 낮은 산에 머물러 가장 좋구나. 한 물은 비단 펼친 듯 멀리 뻗쳤고, 두 고개는 옷깃처럼 그윽함을 보호한다. 부처 밖과 마음 밖을 구하지 말라. 인간은 곧 꿈속에 있는 것이네. 듣기만 해도 누 이름 얻은 이치 알 수 있는데, 어찌 모름지기 주인 얼굴 가서 대할 것인가” 했다.

구읍에 남아 있는 용궁향교는 1398년에 창건되었는데 1400년(정조 2년)에 소실된 것을 거듭 중건한 것이다. 용궁향교 터를 두고 풍수지리가들은 ‘옥녀탄금형’이라고 부른다. 산성 북쪽에 있는 바위는 북처럼 생겨 둥둥 소리를 내는 것 같다고 하여 둥둥바위라고 부른다. 용궁향교는 멀리 보면 그럴듯하나, 대성전이나 명륜당 앞에 풀섶만 무성하고 향교 옆 서원은 곧 쓰러질 듯 낡아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볼 만한 곳
가까운 곳에 상주의 경천대와 사벌 왕릉, 용문산 자락에 있는 용문사, 그리고 권문해가 지은 아름다운 정자 초간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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