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의 피로 지킨 땅 - 김종해 | |
GOP순례
초봄의 비가 아직 채 녹지 못한 눈 위로 추적추적 뿌리고 있었다. 태풍전망대의 초봄은 혼란스럽다. ‘빙애여울’ 가득 나래짓하던 학들은 제갈 길로 떠났고, 다시 병사들만 남았다. 아직 겨울인 듯싶은데 언덕 한 켠에는 파릇한 새싹이 돋고 있다. 온 여름 언덕바지에 그득하던 율무도 아랫단만 남긴 채 흔적이 없다. 다만, 북에서 외롭게 내려온 임진강 줄기만 오늘도 어제처럼 유장하게 돌아 나간다. 이 땅이야말로 분단의 현장을 가장 진솔하게 보여 주는 표본이다. 임진강으로 상징되는 분단의 아픔은 연천군 중면에서 마침내 북녘의 흙을 실어 낸다. 북으로부터의 긴 여정을 침묵과 침묵만을 이어가며 흐르다 마침내 임진강은 반갑다는 듯 필승교를 애무하고 황산리와 강내리의 현무암에 구석구석 엽서를 배달하듯 물방울을 튀기며 태극모양으로 회돌이 친다. 이제 임진강은 합수머리에서 한탄강과 몸을 섞은 뒤 숭의전을 거쳐 서해를 향해 갈 것이다. 그 뒷길에는 캐나다군과 태국군이 이름도 모르던 나라에서 이 땅의 젊은이들과 함께 고혼이 되어 되찾은 거룩한 성지, DMZ를 남겨 둔 채로. 그 곳에는 봄의 초입이, 겨울의 끝자락을 붙들고 선 병사들 곁으로 아주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다국적 평화
이곳은 일명 ‘피에 능선’(‘피의 능선’과는 다름)으로도 불린다. 피아간 3일간의 전투로만 중공군 2700명과 아군 700명이 전사한 말 그대로 시산혈해를 이룬 격전의 현장이다. 그 치열함은 고지가 약 5m 정도 깎여나갈 정도의 포격전과 용소로 불린 호수가 메워져 반달모양의 웅덩이로 변할 지경이었다. 휴전을 불과 10여 일 앞둔 1953년 7월 15일부터 16일까지 이 지역을 담당한 국군 제1사단 김만술 상사 외 소대원 34명이 중공군 1개연대병력 3,000여 명에 맞서 13시간 동안 19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승리한 신화가 새겨진 곳, 베티고지도 여기에 있다.
태풍전망대에 오르면 좀 어수선하다는 인상마저도 받는다. 군데군데 서 있는 탑하며 3대 종파의 종교시설, 거기에다 전망대 건물까지 어딘지 일관된 배치와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태풍전망대에서 좌측방향 임진강 건너 고지 군에서는 캐나다군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지켰으며 태국군도 이곳에서 싸웠고 국군도 이곳을 지켰다. 일전 모 신문에 실린 ‘캐나다 병사 수기’의 주인공 코트니 씨가 싸운 지역이 바로 이 곳이다. “경기도 임진강 전투에 배치되었다. (중략) 이틀째 되는 날, 한쪽 눈과 한쪽 손이 몸에 붙어 있지 않은 시신, 사지를 모두 잃은 토르소 모양의 발가벗은 시신을 목격했다. 죽음을 부르는 교전은 거의 매일 벌어졌다. (중략)
이 지역이 먼 이국의 병사들까지 피를 흘려 지켜낸 땅이므로, 그리고 이 지역의 평화를 말하자면 캐나다군이나, 미군이나, 태국군이나, 영국군이나, 김만술 소대원이나 모두 같은 선배들이므로. 중부원점, 호랑이 배꼽 위에서연천의 DMZ에 대해 이야기하기 이전에 중부원점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넘어가야겠다. 중부원점이란 지적법에 명시된 우리나라 3대 국가원점(서부, 중부, 동부) 중 하나로 북위 38도와 동경 127도선의 교차점에 위치하며 모든 측량과 지도제작의 기준이 되는 기준점을 말한다. 연천군 전곡읍 마포리의 합수머리 남쪽에 이 중부원점이 있다.
말하자면 공식적으로,지적법상 국토의 중심점이란 말이다. 그래서 한반도 형태를 놓고 보면 바로 호랑이의 배꼽에 해당되는 지점이다. 중부 평야와 동부 산악지대를 가름하는 곳. 게다가 백두대간에서 갈려나온 마식령산맥과 광주산맥의 사이에 위치한 추가령구조곡의 흔적이 가장 뚜렷하게 흐르는 곳이 이 지역이다. 풍부한 수원과 완만한 구릉지는 이미 호모에렉투스의 터전이기도 했고 우리의 원조상인 호모사피엔스를 거쳐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첨예한 한반도 삼국의 쟁패를 가름하는 주요지역이 되었던 곳이다. 이런 지형적 특질과 삼국시대 이후의 역사적 지정학적 위상을 고려하면 이 지역이 그냥 단순한 분단의 한 지점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떤 숙명적 비장함까지 느끼게 하는 지역이다.
그 결과 임진강과 한탄강은 침식작용이 더해져 현란한 단애로 이루어진 주상절리와 곰보돌로 불렸던 현무암 덩어리를 남기게 되었고, 지금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다. 물길이 꺾이는 주상절리 절벽 위에는 평지를 이루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전략적 요충지로 각광받았다. 북에서 거의 휴전선을 따라 흐르는 추가령구조곡은 때로는 동에서 서로 혹은, 서에서 동으로 물길을 회돌이 시키는데 그 구조마다 고구려 혹은 백제, 거기에다 신라까지 각각의 성과 군진을 두었다. 그리고 한강지역을 두고누 백년을 경쟁했다. 솔직히 민족 개념이 있을 리 만무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국운을 건 쟁패였고 정치적 이니셔티브를 장악하기 위한 첨예한 격전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곳이다.궁예가 현재의 개념으로 본다면 거의 이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태봉을 건국했으며 이를 눈여겨 본 일본인들은 침탈의 수단으로 최적의 국토 동서횡단로로 이곳을 택했던 것이다. 38도선 이북의 수복지역이 펼쳐지기 시작하는 곳이 이 부근부터라는 것 자체가 어쩌면 숙명적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기인한 필자의 감정이다. 이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구조곡의 형태를 보이는 대륙판 충돌의 현장이며 그 현장위에 용암이 터져 나온 장엄한 지질학적 원형을 간직한 곳이자, 국가의 명운을 건 역사의 현장으로 남은 곳이다. 그렇기에 6.25의 격전과 그런 역사적 사실들이 어우러져 더욱 장엄한 풍경을 아로 새기는지도 모를 일이다.
경원선 철로는 이별의 철길이 되어 지금도 철도중단점을 남기고 녹선 철마만 외롭게 서있고, 경원가도의 흥청거리던 추억은 긴장으로 존재하는 분단의 고통만 남았다. 남북교류라는 미명하에 동과 서에서 부산스러운 소통을 할 때도 이곳은 그 부산함만큼 더 긴장했고, 오히려 소외의 적막마저 감내해야 했다. 경원선상의 소통까지 돌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역에서는 볼멘소리도 했다.
연천군 자체도 분단된 군(郡)이다. 군의 성격을 농경지대로 구획하든, 관광지대로 구획하든, 혹은 신흥공업지역으로 구획하든 간에 분명한 사실은 북한의 변화가 전무한 현재의 문제점을 직시한다면, 이 지역은 솔직히 진정한 평화의 온기를 잴 수 있는 바로미터 역할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이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태풍부대의 존재와 역할은 그만큼 더 클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이 지역의 평화가 진짜 GOP의 평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평화는 모두 가상이거나 임시적일 수밖에 없다. 봄비가 그치지 않는 을씨년스런 GOP의 저물녘, 태풍부대 병사들이 소대장의 인솔 하에 가파른 철책을 따라 투입되고 있었다. 개발의 논리가 아니라 제대로 된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GOP순례_ 면회가는 길
선사의 땅, 흔적을 찾아
인류의 시작은 70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생명의 기원’이라는 의미를 가진 ‘투마이’ 즉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가 그 주인공이다. 인간과 침팬지가 갈려 나온 직후에 나타난 가장 오래 된 인류다. 그 후 ‘오로린 튜게넨시스’,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를 거쳐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등장한다. 물론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한 종이 아니다. ‘아나멘시스’를 필두로 ‘루시’로 유명한 ‘아파렌시스’, 처음 석기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르히’, ‘보이세이’ 등을 거쳐 마침내 ‘호모 하빌리스’가 나타난다.
그리고 이어 180만 년 전에서 10만 년 전까지 생존했던 ‘호모 에렉투스’가 번성한다. ‘하이델베르그인’이나 ‘네안데르탈인’도 호모 에렉투스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약 20만 년 전 현생인류의 직접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가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호모에렉투스는 멸종한다. 그렇다면 호모 에렉투스들이 이 땅을 밟은 적이 있을까? 그들은도구를 만들고 불을 알았던 지구상 최강의 종족이었다. 정답은 ‘그렇다’이다. 그들의 흔적이 바로 구석기 즉 깬돌도구(타제석기)의 존재이다. 그들은 이 땅속에 삶의 흔적인 석기를 남겨두고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 도구의 제작기술은 다른 종족인 호모 사피엔스에게 전해지고 마침내 수렵과 농경의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비록 유전자의 전이는 불가했더라도 그들로부터 학습한 기능적 삶의 행태는 여전히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땅에 존재했던 호모 에렉투스의 흔적인지 이 땅에 토인으로 남은 호모 사피엔스의 흔적인지는 불명확하다. 그러나 그 아득한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타임캡슐을 열듯 그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곳, 그곳이 전곡이다.
1977년 봄, 햇볕이 따스하게 내려쬐는 한탄강변 주변을 젊은 미군 병사(당시 상병)가 한국인 여자친구(이상미)와 함께 거닐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데이트가 아닌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고 마침내 허리를 숙여 돌덩이 하나를 집어들었다. 최대 30만 년 전의 흔적이 다시 햇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빅터밸리 대학에서 2년 동안 고고학을 공부하다 학비를 벌려고 군대에 입대한 그는 1974년부터 한국에 파견되어 동두천의 미군부대에 근무했다.
보웬이 발견한 주먹도끼는 양면핵석기라고도 하며 당시까지 아슐리안형 석기는 아프리카와 유럽에서만 발견되었다. 그래서 인도를 절반으로 잘라 동쪽으로는 주먹도끼가 없고 찍개 밖에 없어서 동아시아를 구석기시대의 미개종족으로 보았다. 이것이 모비우스 학설이고 그때까지는 정설로 받아들여 졌던 것이다. 당연히 이 발견은 모비우스의 학설을 뒤집는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고 졸지에 연천 전곡리는 세계 고고학을 다시 쓰게 하는 관심지역이 되었다. 이후 1978년 1차 발굴조사를 비롯해 2006년까지 13차례에 걸쳐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약 4,000점 이상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강원도 철원 평강 등지에서 분출해 굳은 용암이 두터운 현무암층을 이루고 있으며 그 상부에 쌓인 점토, 모래 등의 퇴적층에서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전곡리 유적에서는 석기들이 산발적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어떤 지점에서는 수백 점이 모여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지점은 분명히 동물들을 도살하거나 사냥과 채집에 필요한 석기를 만들었던 석기 공장일 가능성이 크다. 석기의 돌조각들이 같은 돌에서 떨어진 것들도 발견되어 당시의 석기를 제작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것도 있고 어떤 자세로 제작했는지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일부 지점에서는 틈직한 자연암석이 발견되는데 이것은 당시 냇가에서 여러 사람이 합동으로 이동하여 온 것으로 생각된다.
아미 식객
신망리 유일 순대국 잡숴 보셨어요?
돼지고기와 뼈를 고아 우려낸 얼큰한 국물에 밥을 말아서 내주는 것이 특징이다. 진한 들깨가루와 부속물이 아닌 각종 고기 부위를 순대와 함께 넣어서 끓여 내는데 돼지 냄새를 제거하는 비법은 며느리도 모른단다. 군인들과 지역민들 사이에 해장국으로 아름아름 알려지기 시작하다가 고대산 등산객들과 예비역들이 일부러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분점도 내고 짝퉁도 생길 정도이다. 묘하게 중독성이 있는 순대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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