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GOP순례_세계인의 피로 지킨 땅

醉月 2010. 4. 30. 08:50

세계인의 피로 지킨 땅 - 김종해

GOP순례

  

 

 

초봄의 비가 아직 채 녹지 못한 눈 위로 추적추적 뿌리고 있었다. 태풍전망대의 초봄은 혼란스럽다. ‘빙애여울’ 가득 나래짓하던 학들은 제갈 길로 떠났고, 다시 병사들만 남았다. 아직 겨울인 듯싶은데 언덕 한 켠에는 파릇한 새싹이 돋고 있다. 온 여름 언덕바지에 그득하던 율무도 아랫단만 남긴 채 흔적이 없다. 다만, 북에서 외롭게 내려온 임진강 줄기만 오늘도 어제처럼 유장하게 돌아 나간다. 이 땅이야말로 분단의 현장을 가장 진솔하게 보여 주는 표본이다. 임진강으로 상징되는 분단의 아픔은 연천군 중면에서 마침내 북녘의 흙을 실어 낸다. 북으로부터의 긴 여정을 침묵과 침묵만을 이어가며 흐르다 마침내 임진강은 반갑다는 듯 필승교를 애무하고 황산리와 강내리의 현무암에 구석구석 엽서를 배달하듯 물방울을 튀기며 태극모양으로 회돌이 친다. 이제 임진강은 합수머리에서 한탄강과 몸을 섞은 뒤 숭의전을 거쳐 서해를 향해 갈 것이다. 그 뒷길에는 캐나다군과 태국군이 이름도 모르던 나라에서 이 땅의 젊은이들과 함께 고혼이 되어 되찾은 거룩한 성지, DMZ를 남겨 둔 채로. 그 곳에는 봄의 초입이, 겨울의 끝자락을 붙들고 선 병사들 곁으로 아주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다국적 평화
DMZ 상에는 정체불명의 명칭도 많고 6.25를 겪으며 호칭된 영어 이름도 많다. 철원의 민들레 들판은 영어를 오히려 한글발음으로 읽어 없던 민들레 천지를 만들었고, 백마고지는 영어를 직역하여 얻은 이름이며, 펀치볼은 먹어 본 적도 없는 화채그릇을 투박하게 발음하여 얻은 이름이다. 그렇듯 이름을 잘못 발음한 미군들로 인해 그대로 이름으로 굳어 진 지명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노리’고지다. 얼핏 ‘놀이’를 연상하기 쉬우나 사실은 우리말의 ‘노루’를 잘못 발음하여 미군들이 ‘노리’라고 한 것이 미군들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 받으며 잘못된 발음까지 그대로 인수 받은 지명이 ‘노리고지’이다.

 

이곳은 일명 ‘피에 능선’(‘피의 능선’과는 다름)으로도 불린다. 피아간 3일간의 전투로만 중공군 2700명과 아군 700명이 전사한 말 그대로 시산혈해를 이룬 격전의 현장이다. 그 치열함은 고지가 약 5m 정도 깎여나갈 정도의 포격전과 용소로 불린 호수가 메워져 반달모양의 웅덩이로 변할 지경이었다. 휴전을 불과 10여 일 앞둔 1953년 7월 15일부터 16일까지 이 지역을 담당한 국군 제1사단 김만술 상사 외 소대원 34명이 중공군 1개연대병력 3,000여 명에 맞서 13시간 동안 19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승리한 신화가 새겨진 곳, 베티고지도 여기에 있다.

 

태풍전망대에 오르면 좀 어수선하다는 인상마저도 받는다. 군데군데 서 있는 탑하며 3대 종파의 종교시설, 거기에다 전망대 건물까지 어딘지 일관된 배치와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태풍전망대에서 좌측방향 임진강 건너 고지 군에서는 캐나다군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지켰으며 태국군도 이곳에서 싸웠고 국군도 이곳을 지켰다. 일전 모 신문에 실린 ‘캐나다 병사 수기’의 주인공 코트니 씨가 싸운 지역이 바로 이 곳이다. “경기도 임진강 전투에 배치되었다. (중략) 이틀째 되는 날, 한쪽 눈과 한쪽 손이 몸에 붙어 있지 않은 시신, 사지를 모두 잃은 토르소 모양의 발가벗은 시신을 목격했다. 죽음을 부르는 교전은 거의 매일 벌어졌다. (중략)


나는 어느새 늙고 병약해졌다. 그러나 내일 당장 한국이 도움이 필요하다면 58년 전 그 선택을 반복할 것이다.” 캐나다군은 1951년에는 마량산과 고왕산에서, 그리고 1953년 5월에는 전곡 서북방 18km 나부리 전투 등 임진강 지역에서 싸웠다. 이어 최후로 휴전 전에는 앞서도 말했듯 국군 1사단이 이곳을 기어이 지켜냈다. 마침내 38선 이북지역의 연천을 지키고 수복했다. 말하자면 UN의 깃발아래 뭉친 자유수호군이 연합으로 일군 승첩지가 이곳이요 다국적 평화의 상징이 된 곳이 이곳이다. 그래서 태국군의 전적비도 있고 캐나다군 전적비도 있으며 국군 소년 전차병들의 눈물어린 전적비도 이곳에 서게 된 것이다.


태풍부대의 GOP는 북에서 남으로 들어오는 물길의 관문이요 다국적으로 이룩한 평화의 개척지다. 그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임진강의 흐름이야 그저 유장하다 표현하면 그만일 수 있으나 그 흐름을 맞이하는 사연은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의 얼굴에는 늘 긴장이 고조되어 있다. 차렵처럼 펼쳐진 아득한 능선들 사이에 군데군데 박힌 들판의 아기자기함도 긴장으로 와 닿을 수밖에 없다. 북쪽에 위치한 개활지에는 24만평짜리 북한의 오장동 농장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고 휴전 후 수시로 남파간첩을 보낸 침투의 사례를 지닌 곳이기때문이다. 임진강의 물길을 이용하거나 완만한 능선을 이용하거나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물경 14번이나 침투를 감행해 왔다. 그만큼 북한군의 입장에서는
침투가 용이하다는 이야기가 되겠고 아군의 입장에서는 긴장을 늦출 수 없다는 말도 된다.


그렇다고 이 지역의 경계여건이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고왕산은 북쪽에 있어 그 정상에 서면 아군의 모습이 노출된다. 그런 만큼 최대한 아군의 노출을 피해서 철책이 서고 험지를 고르되 전방관측과 경계의 편의를 확보할 수 있어야 된다. 참 힘든 과제다. 그래서 이곳의 철책도 쉼 없이 오르락내리락, 숨이 턱에 찬다. 그래도 태풍부대 철책은 가쁜 숨을 몰아 쉬는 병사들의 번득이는 눈초리 덕분에 겨울을 무탈하게 넘겼다. 턱밑에서 영농하는 주민들도, 후방에서 ‘로하스’관광을 즐기는 행락객들도 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을 영위한다. 그걸 이 병사들은 너무 나 잘 안다. 그러나 표시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이 해야만 하는 너무나 당연한 일임을 알고 있으므로.

 

이 지역이 먼 이국의 병사들까지 피를 흘려 지켜낸 땅이므로, 그리고 이 지역의 평화를 말하자면 캐나다군이나, 미군이나, 태국군이나, 영국군이나, 김만술 소대원이나 모두 같은 선배들이므로. 중부원점, 호랑이 배꼽 위에서연천의 DMZ에 대해 이야기하기 이전에 중부원점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넘어가야겠다. 중부원점이란 지적법에 명시된 우리나라 3대 국가원점(서부, 중부, 동부) 중 하나로 북위 38도와 동경 127도선의 교차점에 위치하며 모든 측량과 지도제작의 기준이 되는 기준점을 말한다. 연천군 전곡읍 마포리의 합수머리 남쪽에 이 중부원점이 있다.

 

말하자면 공식적으로,지적법상 국토의 중심점이란 말이다. 그래서 한반도 형태를 놓고 보면 바로 호랑이의 배꼽에 해당되는 지점이다. 중부 평야와 동부 산악지대를 가름하는 곳. 게다가 백두대간에서 갈려나온 마식령산맥과 광주산맥의 사이에 위치한 추가령구조곡의 흔적이 가장 뚜렷하게 흐르는 곳이 이 지역이다. 풍부한 수원과 완만한 구릉지는 이미 호모에렉투스의 터전이기도 했고 우리의 원조상인 호모사피엔스를 거쳐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첨예한 한반도 삼국의 쟁패를 가름하는 주요지역이 되었던 곳이다. 이런 지형적 특질과 삼국시대 이후의 역사적 지정학적 위상을 고려하면 이 지역이 그냥 단순한 분단의 한 지점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떤 숙명적 비장함까지 느끼게 하는 지역이다.

 


추가령열곡(楸哥嶺裂谷) 혹은 추가령구조곡(構造谷)이란 원산의 영흥만에서 시작하여 서울을 거쳐 황해안까지 호를 거리며 전개된 좁고 낮은 긴 골짜기를 이르는 말이다. 이 지역의 특질은 물과 계곡, 그리고 언덕과 평야가 절묘한 모습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지형과 지질상 남한과 북한을 양분하는 구조선을 이루며 임진강과 한탄강으로 불리어지는 남북분단의 상징적 강이 흐르는 물길을 말한다. 이 길을 따라 놓인 도로가 경원가도였고, 철길이 경원선이었다. 예초 신생대에는 단층작용으로 형성되었고, 그 후 홍적세에 와서 그 열선으로 현무암(용암)이 분출되어 전곡, 철원 일대에 현무암을 뿌렸다. 이 용암은 멀리는 문산 부근까지 흘렀다.

 

그 결과 임진강과 한탄강은 침식작용이 더해져 현란한 단애로 이루어진 주상절리와 곰보돌로 불렸던 현무암 덩어리를 남기게 되었고, 지금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다. 물길이 꺾이는 주상절리 절벽 위에는 평지를 이루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전략적 요충지로 각광받았다. 북에서 거의 휴전선을 따라 흐르는 추가령구조곡은 때로는 동에서 서로 혹은, 서에서 동으로 물길을 회돌이 시키는데 그 구조마다 고구려 혹은 백제, 거기에다 신라까지 각각의 성과 군진을 두었다. 그리고 한강지역을 두고누 백년을 경쟁했다. 솔직히 민족 개념이 있을 리 만무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국운을 건 쟁패였고 정치적 이니셔티브를 장악하기 위한 첨예한 격전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곳이다.궁예가 현재의 개념으로 본다면 거의 이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태봉을 건국했으며 이를 눈여겨 본 일본인들은 침탈의 수단으로 최적의 국토 동서횡단로로 이곳을 택했던 것이다. 38도선 이북의 수복지역이 펼쳐지기 시작하는 곳이 이 부근부터라는 것 자체가 어쩌면 숙명적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기인한 필자의 감정이다. 이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구조곡의 형태를 보이는 대륙판 충돌의 현장이며 그 현장위에 용암이 터져 나온 장엄한 지질학적 원형을 간직한 곳이자, 국가의 명운을 건 역사의 현장으로 남은 곳이다. 그렇기에 6.25의 격전과 그런 역사적 사실들이 어우러져 더욱 장엄한 풍경을 아로 새기는지도 모를 일이다.

 


DMZ 평화의 바로미터
DMZ 어딘들 한 서리지 않은 땅이 있으랴만 태풍전망대의 봄비는 한 서린 ‘베티고지’에도, ‘피에 능선’에도 똑같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임진강이 적시는 들판 위로는 아직 파종 이전의 북녘 농장이 황량한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원래부터 이 땅은 그런 모습이었다. 물길은 유장하나 수심이 깊지 않아 무시로 비린 것들을 걷어 올릴 수 있었고 평지의 논이거나 언덕 빼기 밭이거나 간에 먹을거리에 별 걱정이 없었다. 경순왕은 망국의 회한으로 남쪽 신라 땅이 바라보이는 이 언덕바지에 유택을 마련했고 사람들은 곰보돌로 만든 맷돌로 곡물을 빻았다. 그랬던 풍요와 평화의 땅이었다. 그랬던 것이 남북분단이라는 생소한 상황 이후로는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경원선 철로는 이별의 철길이 되어 지금도 철도중단점을 남기고 녹선 철마만 외롭게 서있고, 경원가도의 흥청거리던 추억은 긴장으로 존재하는 분단의 고통만 남았다. 남북교류라는 미명하에 동과 서에서 부산스러운 소통을 할 때도 이곳은 그 부산함만큼 더 긴장했고, 오히려 소외의 적막마저 감내해야 했다. 경원선상의 소통까지 돌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역에서는 볼멘소리도 했다.


동쪽이나 서쪽이나 부동산 투기 붐이 일었고 교류센터가 생겼다. 그리고 연일 매스컴의 한복판에 등장했다. 함에도 왜 이 지역은 침잠해 있느냐는 불만이었다. 그리고 그 화살을 군으로 돌렸다. 지역 매스컴은 부추김을 더했다. 정치인들도 가세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군의 문제가 아니라 단거리 직선로 몇 Km 이은 걸 과대 포장한 프로파간다에 현혹되었다는 것을. 경원선을 잇기 위해서는 DMZ의 현시적 평화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아니 알고는 있으나 그 또한 개발이익이라는 상술에 현혹되어 눈감아 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화는 떼를 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지역의 표심을 위한 정치논리로 정착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현실적 한계가 고스란히 남은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군이 없어지면 이 지역에 다시 기적이 울리고, 금강산으로 원산으로 행락객이 붐비게 되며 임진강 물길에는 사공의 뱃노래가 가물거릴 수 있느냐의 진솔한 비판이 가해져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아니, 군이 불필요한 때가 되면 있으래도 있을 필요가 없는 곳이 솔직히 이 지역이다.

 

연천군 자체도 분단된 군(郡)이다. 군의 성격을 농경지대로 구획하든, 관광지대로 구획하든, 혹은 신흥공업지역으로 구획하든 간에 분명한 사실은 북한의 변화가 전무한 현재의 문제점을 직시한다면, 이 지역은 솔직히 진정한 평화의 온기를 잴 수 있는 바로미터 역할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이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태풍부대의 존재와 역할은 그만큼 더 클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이 지역의 평화가 진짜 GOP의 평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평화는 모두 가상이거나 임시적일 수밖에 없다. 봄비가 그치지 않는 을씨년스런 GOP의 저물녘, 태풍부대 병사들이 소대장의 인솔 하에 가파른 철책을 따라 투입되고 있었다. 개발의 논리가 아니라 제대로 된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GOP순례_ 면회가는 길

 

선사의 땅, 흔적을 찾아

 

 

인류의 시작은 70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생명의 기원’이라는 의미를 가진 ‘투마이’ 즉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가 그 주인공이다. 인간과 침팬지가 갈려 나온 직후에 나타난 가장 오래 된 인류다. 그 후 ‘오로린 튜게넨시스’,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를 거쳐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등장한다. 물론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한 종이 아니다. ‘아나멘시스’를 필두로 ‘루시’로 유명한 ‘아파렌시스’, 처음 석기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르히’, ‘보이세이’ 등을 거쳐 마침내 ‘호모 하빌리스’가 나타난다.

 

그리고 이어 180만 년 전에서 10만 년 전까지 생존했던 ‘호모 에렉투스’가 번성한다. ‘하이델베르그인’이나 ‘네안데르탈인’도 호모 에렉투스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약 20만 년 전 현생인류의 직접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가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호모에렉투스는 멸종한다. 그렇다면 호모 에렉투스들이 이 땅을 밟은 적이 있을까? 그들은도구를 만들고 불을 알았던 지구상 최강의 종족이었다. 정답은 ‘그렇다’이다. 그들의 흔적이 바로 구석기 즉 깬돌도구(타제석기)의 존재이다. 그들은 이 땅속에 삶의 흔적인 석기를 남겨두고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 도구의 제작기술은 다른 종족인 호모 사피엔스에게 전해지고 마침내 수렵과 농경의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비록 유전자의 전이는 불가했더라도 그들로부터 학습한 기능적 삶의 행태는 여전히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땅에 존재했던 호모 에렉투스의 흔적인지 이 땅에 토인으로 남은 호모 사피엔스의 흔적인지는 불명확하다. 그러나 그 아득한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타임캡슐을 열듯 그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곳, 그곳이 전곡이다.

 


1977년 봄, 햇볕이 따스하게 내려쬐는 한탄강변 주변을 젊은 미군 병사(당시 상병)가 한국인 여자친구(이상미)와 함께 거닐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데이트가 아닌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고 마침내 허리를 숙여 돌덩이 하나를 집어들었다. 최대 30만 년 전의 흔적이 다시 햇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빅터밸리 대학에서 2년 동안 고고학을 공부하다 학비를 벌려고 군대에 입대한 그는 1974년부터 한국에 파견되어 동두천의 미군부대에 근무했다.


부대주변 한탄강에서 오래된 충적지를 발견한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말마다 여자친구와 한탄강변을 관찰했다. 주먹도끼를 발견한 그는 이곳을 더욱 샅샅이 뒤져 석기 여러 점을 추가로 발견하고는 발견지점을 지도에 표시했다. 그리고 막사에서 틈틈이 작성한 보고서를 세계적인 고고학자 프랑소와 보르도(프랑스) 교수에게 보냈고 보르도 교수는 1978년 4월 서울대 고고학과 김원룡 교수를 소개해 줌으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보웬이 발견한 석기는 전형적인 아슐리안형 석기였으며 아슐리안 공정에 의해 제작된 석기가 인도 동부 이동지역에서 발견되기는 처음이었다.


보웬의 발견은 기존 고고학계의 학설을 뒤엎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아슐리안 공정’(Acheulian Industry)이란 호모 에렉투스와 초기형 호모 사피엔스의 석기제작 전통으로 프랑스 북부 솜주의 생 아슐(St. Acheul)에서 유래했다. 석재의 양쪽 면을 가공해 날을 세우는 방법으로 제작되며 사냥, 도살, 나무나 가죽, 뼈의 가공 등에 사용된 다목적 도구로 이해된다.

 

보웬이 발견한 주먹도끼는 양면핵석기라고도 하며 당시까지 아슐리안형 석기는 아프리카와 유럽에서만 발견되었다. 그래서 인도를 절반으로 잘라 동쪽으로는 주먹도끼가 없고 찍개 밖에 없어서 동아시아를 구석기시대의 미개종족으로 보았다. 이것이 모비우스 학설이고 그때까지는 정설로 받아들여 졌던 것이다. 당연히 이 발견은 모비우스의 학설을 뒤집는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고 졸지에 연천 전곡리는 세계 고고학을 다시 쓰게 하는 관심지역이 되었다. 이후 1978년 1차 발굴조사를 비롯해 2006년까지 13차례에 걸쳐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약 4,000점 이상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전곡리의 선사 유적은 한탄강이 감싸고 도는 평탄대지 위에 위치한다. 한탄강은 한때 계곡의 바닥을 이루었던 현무암대지를 침식하여 깎은 단애 그 아래를 흐르고 있으며 현무암대지는 오랫동안 침식을 받은 낮은 구릉성 산지로 둘러쌓여 있다. 전곡리 유적은 선캄브리아기에 형성된 화강편마암이 지질기저를 이루고 현무암 분출 이전 하상퇴적으로 형성된 사력층(백의리층)이 고(古)한탄강 줄기를 따라 폭 넓게 분포하고 있다.

 

강원도 철원 평강 등지에서 분출해 굳은 용암이 두터운 현무암층을 이루고 있으며 그 상부에 쌓인 점토, 모래 등의 퇴적층에서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전곡리 유적에서는 석기들이 산발적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어떤 지점에서는 수백 점이 모여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지점은 분명히 동물들을 도살하거나 사냥과 채집에 필요한 석기를 만들었던 석기 공장일 가능성이 크다. 석기의 돌조각들이 같은 돌에서 떨어진 것들도 발견되어 당시의 석기를 제작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것도 있고 어떤 자세로 제작했는지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일부 지점에서는 틈직한 자연암석이 발견되는데 이것은 당시 냇가에서 여러 사람이 합동으로 이동하여 온 것으로 생각된다.


보웬이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이 유적지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경지정리 등으로 아파트가 들어섰을까? 아님 과수원이나 되어 있을까? 그렇게 보면 보웬의 호기심이야말로 이 땅의 일상을 30만 년이나 거슬러 가게 만든 위대한 호기심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보웬은 1978년 군에서 제대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 애리조나 주립대학에서 고고학 공부를 계속했으며 애리조나주 나바호 인디언보호구역 발굴책임자로 활약하는 등 고고학자로의 길을 걸었다. 덤으로 그 당시 발견 현장을 함께 지켰던 여자친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자친구 이상미 씨는 현재, 상미 보웬(56)이 되어 애리조나 투산에서 외동딸 섀넌과 함께 그와 해로하고 있다. 해피엔딩까지 곁들인 전곡리의 발굴사다. 보웬은 지난 2005년 가족들과 함께 현장을 방문한 적도 있다. 그리고 선사의 땅 연천은 남한지역 최대의 적석총인 횡산리 유적지와 고려 태조를 비롯한 3왕과 16공신을 모신 숭의전지도 수려한 임진강가에 자리하고 있다. 아울러 동두천 소요산 자락에 위치한 평화수호 박물관도 둘러 볼만하다.

 

 

 

아미 식객

 

신망리 유일 순대국 잡숴 보셨어요?

 

 


경원선 열차길은 분단의 아픔과 아직도 굳건히 남은 시골역사의 효용성이 그대로 발휘되고 있는 곳이다. 연천역을 지나
작은 시골역인‘신망리’역 앞에는 올망졸망한 작은 마을이 겨우 겨우 옛 동리의 흔적을 유지하며 버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대저 경기 북부의 마을이나 음식들이 그러하듯 이 지역도 별반 다르지 않아 물길을 따라 매운탕을 끓이거나 고
대산에서 채취한 산채가 더러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지역의 명물이라기보다 유독 한 식당의 손맛으로 유명해진 집들이 있기도 한데 신망리의 유일 순대국집이 그러하다. 신망리에서 제일 유명한 음식집을 물어보면 이구동성으로 유일 순대국집을 알려 준다. 지금의 가게에서만 30년을 넘기며 대를 이어 같은 맛으로 명성을 날리는 순대국집이다.

 

돼지고기와 뼈를 고아 우려낸 얼큰한 국물에 밥을 말아서 내주는 것이 특징이다. 진한 들깨가루와 부속물이 아닌 각종 고기 부위를 순대와 함께 넣어서 끓여 내는데 돼지 냄새를 제거하는 비법은 며느리도 모른단다. 군인들과 지역민들 사이에 해장국으로 아름아름 알려지기 시작하다가 고대산 등산객들과 예비역들이 일부러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분점도 내고 짝퉁도 생길 정도이다. 묘하게 중독성이 있는 순대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