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때 만주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면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동북아 전쟁으로 확대되며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을 수도… 한반도의 상흔은 더욱 깊었을 것 | ||||||||||||||||||||||||||||||
맥아더가 만주를 폭격했다면? 그것도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면? 과연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까? 20세기는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기억되는 전쟁의 세기다. 한국전쟁은 제한전쟁이었다.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계사의 시각에서 보면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다. 대신 한반도 안에서 치러진 전쟁이라는 사실은 전쟁의 밀도, 야만의 강도, 그리고 구토의 정도를 크게 했다.
노회한 맥아더, 전쟁 확대에만 골몰
여전히 전쟁의 상처는 깊다. 60년이 지났지만, 전쟁의 트라우마가 한반도를 배회한다.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수만 가지 시선이 있다. 여기서 만주 폭격론을 재검토하는 이유는 그것이 전쟁을 이해하는 또 다른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맥아더, 문제적 인물이다. 한국에서 맥아더는 여전히 이데올로기다. 그는 누구인가?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의 나이 일흔 살이었다. 그는 언제나 1등이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전선에서 최연소 사단장을 지냈다. 또 최연소 웨스트포인트 교장, 최연소 육군참모장, 최연소 소장, 최연소 대장 등 그의 경력 앞에는 수많은 ‘최연소’ 기록이 붙었다. 1918년 처음 ‘별’을 달았고, 잠깐의 전역 기간을 제외한다 해도 거의 30년을 장군으로 지낸 ‘만년 장군’이었다.
맥아더 편에는 장제스의 재기를 바라는 노회한 중국 로비스트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념 빼면 시체인 미 공화당 반공주의자들이 강력한 동맹군이었고, <타임>과 <라이프>를 소유한 헨리 루스 같은 든든한 후원자도 있었다. 루스 같은 이들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환호했다. 드디어 미국과 중국이 대결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중국 공산당을 무찌를 기회가 온 것이다. 역사에서 그들은 패배했다. 만주 폭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문제를 둘러싼 전투의 과정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진짜 전쟁만큼이나 치열한 전투였다. 한국전쟁이 발생한 초기 미국은 다급한 나머지 장제스의 군대를 투입하는 방안을 실제로 검토했다. 그러나 애치슨 국무장관 등은 이러한 제안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장제스를 밀어주는 행위가 전쟁을 크게 만들 위험성이 있고, 그것은 미국 외교정책을 망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합리적 이성을 가진 미국의 당국자들은 장제스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장제스가 1949년 1월21일 그동안 모아놓은 금괴를 챙겨 대만으로 도망갈 때까지, 미국은 장제스 정권에 총 25억달러 규모의 지원을 했다. 그러나 미국이 지원한 돈은 장제스 정권의 ‘부패의 아가리’에 족족 들어갔다. 무기는 부패의 사슬을 거쳐 공산군 차지가 됐다. 장제스의 행적을 아는 사람들이 그의 재기를 어떻게 믿겠는가.
한국전쟁 초기 제한전쟁론을 생각하던 워싱턴 입장에서 맥아더의 호언은 언제나 눈엣가시였다. 인천상륙작전은 그런 점에서 맥아더를 살렸다. 맥아더는 성공 확률이 5천분의 1로 평가되던 이 작전을 성공시켰다. 맥아더의 담대함이 빛을 발하던 순간이었다. 만약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 직후에 은퇴했다면, 그는 영원한 전설로 남았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맥아더에게 십자군 원정의 야망을 다시 한번 불러일으켰다. 과도한 욕심은 현실 판단의 시야를 흐리게 했다. 맥아더는 중공군을 얕잡아봤다. 중국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입만 열면 중국과의 전쟁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오판은 나중에 그의 무능을 증명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반면 마오쩌둥은 이미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 전쟁이 곧 자신의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인민군이 남침한 직후 미국이 7함대를 대만해협에 보냈을 때, 마오쩌둥은 해전이나 공중전으로 미군과 붙는 것보다 한반도 땅 위에서 맞붙는 게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공군은 대만해협을 건너는 대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걸어서 건넜다.
장제스 군대 투입 계획을 워싱턴서 제동
미군은 패배했다. 압록강에서의 참패는 인천상륙작전의 승리를 덮을 만큼 컸다. 결국 한국전쟁의 솜씨 좋은 구원투수, 매슈 리지웨이 장군이 8군의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리지웨이는 한국전쟁을 새로운 국면으로 돌려세웠다. 그는 중공군에 쫓겨 서울을 다시 내주면서 황급히 도망치던 국면을 일시에 정비하고, 한반도의 허리에서 팽팽한 교착 국면을 이어갔다. 리지웨이의 승리는 맥아더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트루먼은 맥아더의 해고를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명분은 맥아더가 제공했다. 그즈음 공화당 대표 조지프 마틴과의 서신 교환에서 맥아더는 “장제스의 군대를 활용해서 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야 한다”며 “이러한 생각에 반대하는 세력과 최대한 강경하게 맞설 것”이라고 썼다. 맥아더는 이 편지를 공개해도 좋다고 말했다. 4월5일 마틴이 편지를 공개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는 직격탄이었다. 그즈음 도쿄 주재 다른 나라 대사관들은 본국에 맥아더의 확전 의사를 보고하느라 바빴다. 이런 정보를 접한 트루먼 대통령은 책상을 내리치면서 “이런 매국노가 있나?”라며 혀를 찼다고 한다. 4월11일 맥아더는 해임됐다.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맥아더가 도쿄를 떠날 때 25만 명의 일본 사람들이 미·일 양국의 국기를 흔들며 눈물을 흘렸다. 미국에 도착해서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뉴욕을 지날 때, 그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노회한 장군은 자신의 해임 관련 청문회에서 연설을 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군가의 가사를 인용하며 소회를 밝혔다. 여기에는 공화당의 욕심도 작용했다. 그들은 청문회가 맥아더를 위한 무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무대에서 ‘겁쟁이 대통령에게 모함을 받고 배신당한 위대한 애국자’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맥아더와 공화당은 군중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전사자가 늘어나고, 전선은 교착되고, 민주당 정부가 중공에 타협적 자세를 취하는 상황에 미국인이 실망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심리는 이미 1950년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의 패배로 확인됐다. 그러나 맥아더와 공화당이 간과한 것이 있다. 미국 국민은 아시아에서 더 큰 규모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맥아더와 공화당은 그것을 몰랐다. 사흘 내내 이어진 청문회는 맥아더의 오판과 독선, 그리고 자기과시의 면모를 들춰내는 계기가 됐다. 워싱턴의 합동참모, 국방부 고위 관료, 한국전쟁 참전 관계자들 모두 맥아더의 오판으로 압록강에서 당한 쓰라린 패배의 기억을 강조했다. 맥아더는 청문회에서 장제스의 군대가 “약 50만 명의 정예부대”이며 전투력 면에서 “중국 공산군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런 주장에 수긍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맥아더는 결국 졌다. 트루먼은 역사의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근거를 남긴 반면, 맥아더는 1952년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잊혀진 사람’이 됐다. 대통령은 그의 부관 출신이면서 언제나 맥아더가 가진 반대의 덕목을 지녔던 아이젠하워에게 돌아갔다. 노회한 장군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맥아더의 오판·무능 까발린 청문회
만약 맥아더 세력이 승리해서 만주를 폭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아가 원자폭탄을 터트렸다면? 원자폭탄은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절대무기지만, 가장 사용하기 힘든 무기이기도 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 서구의 문명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양심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가 승리에 대한 집착을 능가할 만큼, 핵폭탄의 피해는 과학이 아니라 도덕적 판단 대상이 됐다. 한국전쟁 당시는 1949년 8월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을 한 이후였기 때문에, 핵전쟁의 공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워싱턴에서는 한국전쟁 초기부터 원자폭탄 사용이 거론됐지만, 당시 미 국방부는 한국전쟁이 핵무기를 사용할 만큼의 절박성이 있는지 결론내리지 않았다. 이후 중공군이 개입하고 전세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원자폭탄의 사용 가능성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1950년 11월30일 트루먼 대통령도 기자회견에서 원자폭탄의 사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리고 맥아더가 1951년 2월11일 워싱턴에 보고한 내용에는 ‘적의 주요 보급로에 원자력 방사능 폐기물을 설치해서 만주 지역과 한반도를 영원히 분리하겠다’는 구상이 들어가 있었다.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생각이었다. 물론 원자폭탄은 끝내 투하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만약 투하되었다면, 맥아더 신봉자들의 생각처럼 한국전쟁의 조기 승리로 이어졌을까?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동북아 정세, 전쟁에 대한 중국의 인식, 이 모든 것을 고려해보면, 원자폭탄은 중국의 전쟁 의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한다면 수류탄으로 대응하겠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인도 총리 네루를 만났을 때는 “중국 인구가 얼만데”라며 미국의 원자폭탄을 ‘종이호랑이’로 비유했다. 일본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패배의 조종이었지만, 만약 중국에 떨어졌다면 그것은 새로운 전쟁의 시작을 알렸을 것이다. 무엇보다 스탈린의 생각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스탈린은 어떻게 해서든지 3차 세계대전을 피하려 했다. 전후 소련 체제의 안정과 미국과의 국력 격차를 고려한 선택이었다.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입장에서 미국의 발목을 한반도에 묶어 유럽에서의 대결을 피하고, 그 과정에서 동유럽 사회주의를 강화할 시간을 벌게 해주었다.
발칸반도가 3차 대전 전장 됐을 가능성 커
하지만 한국전쟁이 동북아 전쟁으로 확대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미국과의 전면전을 다소 꺼렸던 스탈린도 더는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기 어렵게 된다는 뜻이다. 당시 동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야심찬 유럽 부흥계획인 마셜플랜으로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티토의 경우 분명한 탈스탈린 노선을 견지하며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스탈린은 3차 세계대전의 전장으로 발칸반도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1950년 6월 “발칸 대신 한국에서 전쟁이 났다”는 평가가 분명 있었다. 새로운 전장으로 베를린은 너무 직접적이고, 대만이나 일본 침공은 역부족이었다. 만주 폭격 명령이 떨어졌다면 한반도와 발칸반도의 역사도 조금 뒤바뀌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렇게 되면 우파가 불안한 승리를 거둔 그리스에서도 다시금 내전의 불길이 타올랐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3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한국전쟁은 어떻게 되었을까? 휴전협상은 미루어졌을 것이다. ‘비기기 위해 죽어야 하는 전쟁’이라는 누군가의 넋두리처럼, 38선을 중심으로 지루한 살상의 밀고 당기기를 계속했을 것이다. 3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미국과 소련의 집중력이 분산됐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만큼 내전의 광폭함은 심해졌을 것이다. 승패를 가리지도 못하면서 누구도 매듭을 짓지 못하는 전쟁, 그렇게 되었다면 아찔한 뿐이다. 야만의 기억들은 지금도 충분하다. 그 전쟁이 몇 년 더 지속되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염화실의 향기_02_도견스님 (0) | 2010.01.25 |
---|---|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08 (0) | 2010.01.23 |
백양산_선암사 벽화 (0) | 2010.01.19 |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07 (0) | 2010.01.17 |
떡과 우리문화 (0) | 2010.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