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폭설이 쏟아진 한라산에는 여태 눈이 그득하지만, 제주에는 진즉부터 봄이 흐드러졌습니다. 제주에서 서귀포 쪽으로 5·16도로나 1100도로를 타고 한라산의 허리를 넘어가자면 나뭇가지마다 설경이 환하고, 도로 옆으로 밀쳐낸 눈이 허벅지를 넘깁니다. 흰 눈으로 뒤덮인 산자락에서 노루며 고라니가 눈밭에서 먹이를 찾는 모습도 그리 어렵잖게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주 남쪽의 해안가로 내려서면 봄볕 아래서 늦은 동백들은 선혈 같은 붉은 꽃잎을 떨구고 있고, 매화도 팝콘 튀듯 만개했습니다. 노란 수선화는 이제 절정을 막 넘어가고 있고, 그 뒤를 이어 유채꽃이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는 중입니다. 육지에서도 조금만 더 기다리면 봄은 당도하지만, 구태여 제주까지 찾아간 건 지금 그곳에서 겨울과 봄의 풍경을 함께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주의 명소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고, 저마다의 정취가 빼어나지만 지금 제주에 간다면 그중에서도 제주의 서남쪽을 권합니다. 제주 지도를 펼쳐 놓고 피자 자르듯 섬을 4등분하면 왼쪽 아랫부분, 그러니까 서귀포 서쪽의 안덕면, 대정읍과 한경면에서 한림읍까지를 말하는 것이지요. 거기에 겨울과 봄을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자리가 있습니다. 눈 쌓인 영실기암과 한라산의 남벽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오름 녹하지악이 ‘제주의 겨울을 보는 자리’라면, 발 아래 유채밭을 두른 산방산과 초록으로 뒤덮인 대정의 들판을 내려다보는 오름 단산은 ‘제주의 봄을 보는 자리’입니다. 제주 서남쪽에는 또 귀하고 오래된 매화꽃 흐드러진 정원이 있으며, 길섶이나 밭두둑에 아무렇지도 않게 피어난 수선화도 만날 수 있습니다. 제주란 어차피 한두 번의 여행만으로는 다 끝낼 수 없는 곳. 관광지에서 관광지로 바삐 내달리기보다는 계절에 딱 맞는 지역을 골라 속도를 늦추고 풍경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이 제주여행을 더 풍성하게 꾸리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제주에서 딱 이곳들이 정답입니다.
# 겨울 한라산을 바라보는 자리… 녹하지악
녹하지악은 오름 자체로 보면 그닥 특별할 게 없다. 들머리 쪽에 줄 맞춰 도열해 있는 삼나무들이 눈에 띄긴 하지만, 한라산 허리춤의 다른 숲과 비교해 보면 나무의 크기며 숲의 규모도 한참 밀린다. 이동통신사 기지국이 들어선 정상도 굼부리가 없어 오름이라기보다 그저 평범한 야산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거기서 고개를 들어 한라산 쪽을 바라보면 짧은 탄성이 나온다. 녹하지악의 진면목은 오름 정상 부위의 능선에서 올려다보는 한라산의 풍광이다. 중산간의 너른 숲 너머로 흰 눈으로 뒤덮인 한라산의 남벽과 윗세오름이 우뚝 선 풍경이 가히 장관이다. 조금의 과장도 없이 ‘겨울 한라의 자태를 조망하는 최고의 자리’라고 기꺼이 부를 수 있다. 녹하지악에서는 해안가에 종 모양의 암봉으로 선 산방산도 내려다보인다. 섬 한가운데 우뚝 솟은 한라산 정상과 바다 쪽의 산방산 정상에 점을 찍은 뒤 자를 대고 직선으로 긋는다면 정확하게 그 직선의 딱 중간쯤에 녹하지악이 있다. 여태 겨울의 한복판을 지나가고 있는 한라산과 이미 봄이 당도한 바닷가 자락의 산방산을 다 볼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앞뒤쪽으로 다른 계절을 바라보고 있는 녹하지악의 정상쯤에는 이제 막 큰까치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남쪽의 산방산 쪽에서 흥건하게 적셔진 봄의 기운이 지금 한라산 쪽으로 밀려 올라가는 최전방의 전선(前線)이 녹하지악쯤에서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녹하지악 인근에는 초록의 차밭이 있다. 녹하지악 아래쪽의 중산간 도로변에 ‘녹차미로공원’을 운영하고 있는 제주다원이 있지만, 거기보다는 서귀포환경사업소 옆의 중산간 자락에 조성된 ‘제주차밭’을 추천한다. 이곳의 차밭은 한라산의 겨울풍경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명소로 꼽힌다. 제주차밭은 입장료를 받는 관광지가 아니라 실제 차를 심어 거두는 곳. 푸른 차밭의 이랑 너머로 눈 쌓인 한라산 남벽의 암봉이 펼쳐지는 모습은 마치 한 장의 이국적인 그림엽서 같다. 어리목이나 영실, 혹은 성판악 쪽에서 푹푹 빠지는 눈길을 디뎌 한라산에 머물고 있는 겨울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긴 하지만, 이렇게 멀찌감치 물러서서 한라의 영험한 자태를 바라보는 것도 나름 운치가 있다.
# 봄의 대정 들판을 바라보는 자리… 단산
단산은 수직에 가까운 벼랑과 바위로 이뤄진 험한 지형 탓에 관광객은 물론이거니와 주민들도 웬만해서는 오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추사 자취를 따라 유배길을 이으면서 지난해 인근 주민들이 힘을 합쳐 단산을 오르는 탐방로를 놓았다. 아직까지 단산의 이름이 관광객들에게까지 알려지지 않아 오르는 이들은 대부분 주민들뿐이다. 이즈음에는 이르게 닥쳐온 봄농사로 바쁜 주민들마저 드나들지 않는다. 그러니 단산은 늘 비워져 있다시피 하다. 가장 낮은 오르막을 용케 찾아 이어 놓은 길을 따라 오르면 단산의 정상까지는 30분이면 넉넉하다. 단산에 오르면 제주의 봄풍경 사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산방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제주의 해안과 대정의 너른 들판이 마치 두루마리 지도를 편 듯 펼쳐진다. 산방산 아래로 드문드문 밭에는 노란 유채꽃이 물감을 뿌린 듯하고, 대정의 들녘은 싱그러운 초록으로 출렁거린다. 대정의 들녘은 거센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이긴 하지만, 남쪽에는 볕이 오래 머물러 봄이 당도하는 속도가 빠르다. 겨울 무와 마늘, 쪽파, 당근을 심어 놓은 진초록의 너른 밭 사이로 마을이 들어서 있고 그 너머는 햇살이 생선 비늘처럼 반짝이는 모슬포의 바다다. 바다 너머로는 형제섬이 뚜렷하고 가파도와 마라도도 눈에 담을 수 있다. 단산을 찾아가려면 모슬포 쪽에서 출발하든 산방산 쪽에서 출발하든 상모리 마을을 지나는 도로 위에 올라서게 되는데, 그 길가에는 지금 수선화가 한창이다. 잘 가꾼 정원도, 입장료를 받는 화원도 아닌 길섶에 가녀린 수선화가 별일 아니라는 듯 무더기지어 아무렇게나 피어났다. 한번 피면 한 달 가까이 꽃대를 올리는 유채꽃과 달리 수선화는 짧게 피고 일순 져버린다. 봄날의 수선화가 더 귀하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단산의 거칠고 황량한 그늘 아래서 유배생활을 한 추사 김정희가 유독 제주의 수선화에 마음을 두었던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까.
# 제주의 봄바다에 가까이 다가서다 겨울 한라산과 봄 들판을 멀찌감치서 바라볼 수 있는 조망 명소를 둘러봤다면 다음은 가까이 다가가서 봄풍경을 즐길 차례다. 먼저 제주의 봄풍경 사진 속에 등장하는 단골 명소인 산방산부터. 산방산이야말로 익히 알려진 제주의 관광 명소다. 거대한 절벽으로 이뤄진 남성미 넘치는 산방산은 정상에서 용머리해안 쪽을 바라보는 경관이 압권이다. 하지만 산방산 등반은 철저하게 통제돼 있다. 5년간 출입을 통제해 오다 지난 2011년 2월 1일 통제기간이 풀렸지만, 그 이틀 뒤에 다시 자연훼손의 우려와 등반객들의 안전 문제 때문에 2021년까지로 통제기간이 연장됐다. 그러니 지난 7년여 동안 딱 하루만 정상 등반이 허용됐던 셈이다. 그 하루를 기다렸다가 산방산을 오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죄다 지역 사정에 밝은 제주사람들이었다. 등반 통제 이전에도 산방산을 올라본 외지 사람들은 거의 없다. 제주에 올레길이 채 놓이기도 전인 7년 전쯤에는 제주를 속속들이 여행했던 여행자들이 드물었다. 다들 이름난 관광지를 도느라 정신이 팔렸을 때이니 산방산 정상을 오를 여유를 가진 여행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관광객들에게는 한번도 오를 기회가 없었던 셈이나 다름없다. 대신 관광객들은 산의 턱밑에도 훨씬 못 미치는 산방굴사까지만 다녀올 수밖에 없다. 산방굴사로 가는 길은 좀 실망스럽다. 들머리부터 서로 다른 세 곳 절집의 목탁소리와 독경소리가 뒤섞여 있는 데다 마당에 큼지막하게 세워 놓은 매끈한 석불도 정이 가지 않는다. 낙석 때문에 얼기설기 그물을 지붕처럼 엮어 놓은 길 끝의 산방굴사도 그닥 감흥이 없다. 기도처가 기도의 정성과 간절함을 잃는 순간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관광지가 돼버린 형국이다. 여기서는 산방산보다 용머리해안이 압권이다. 산방산 아래 봉화터인 산방연대에서 용의 잔등 같은 능선을 타고 내려서 용머리해안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내려가면 바위 틈 사이로 비밀처럼 용머리해안이 나온다. 용머리해안은 ‘절경’이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다. 산방연대 쪽에서 내려서자마자 바다를 끼고 펼쳐지는 기기묘묘한 바위의 형상이 압권이다. 용암이 흐른 듯 물결을 그려 넣은 바위들이 수직의 암벽을 이루고 있는데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도무지 만들어 낼 수 없는 모습이다. 바위 앞에 일렁이는 바다의 물색 또한 선경에 가깝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파도가 거친 날에는 용머리해안의 출입이 금지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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