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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나이원의 '중의양생' _05

醉月 2012. 3. 4. 08:15

 

명의(名醫) 전기

예전의 많은 대의학자는 모두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지금 말로 표현하자면 바로 초능력(特異功能)이다. 예를 들어 편작은 제환공의 병을 보고는 환공의 병세가 어떻게 발전할지 알았다. 화타는 조조의 뇌풍(腦風)을 보고 뇌에 종양이 자라고 있음을 알고 수술을 하고자 했다. 이런 대의학자의 일화를 살펴보면 그들의 의술(醫術)이 어떻게 그토록 신기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삼국지의 신의(神醫) 화타(華佗) (上)

 

‘삼국지연의’ 제78회의 제목은 “풍질을 고치는 신의(神醫 화타)가 죽고 간웅(奸雄 조조)의 수명이 다하다(治風疾神醫身死, 傳遺命奸雄數終)”이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조조가 관우(關羽) 부자를 죽인 후 조조는 매일 밤 악몽을 꾸었다. 눈을 감기만 하면 관공이 나타나 조조는 매일 밤 두려움에 떨었다. 조조가 문무(文武) 신료들에게 연유를 묻자 백관(百官)들은 감히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둘러댔다. 누군가 ‘낙양행궁(洛陽行宮)’의 옛날 궁전 안에 요괴가 많이 있으니 마땅히 새로운 궁전을 지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조조는 “좋은 의견이오! 그럼 새로 짓도록 합시다. 새 궁궐의 이름은 건시전(建始殿)으로 합시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유능한 목수를 묻자 한 신하가 ‘소월(蘇越)’이라는 목수를 추천했다. 조조는 소월을 불러들여 어떻게 궁궐을 지을지 상의했다. 소월은 며칠 후 궁전 설계도 초안을 바쳤다.


조조는 “설계도는 좋은데 이에 적당한 대들보를 어디에서 구할까?”하고 물었다. 소월은 “성 밖 30여 리에 약용담(躍龍潭)이라는 연못이 있고 그 옆에 약용사(躍龍祠)라는 사당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시면 높이가 10여 장 가량 되는 큰 배나무가 있으니 그것을 쓰시면 됩니다”라고 답했다.


조조는 기뻐하며 일꾼을 시켜 그 배나무를 베어 오게 했다. 하지만 나무가 너무 단단해 일꾼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나무를 벨 수 없었다. 사람들이 조조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조조가 직접 현장을 방문했다. 그가 나무를 바라보니 높이 뻗은 가지가 대지를 덮을 듯했다.


조조는 “대체 어떤 요사스런 귀신이 있기에 자르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라며 자신의 보검을 들어 나무를 내리쳤다. 그러자 나무에서 새빨간 피가 나와 조조의 몸에 튀었다. 조조는 깜짝 놀라 말을 타고 황급히 궁으로 돌아왔다. 조조는 궁에 돌아온 후부터 잠을 이룰 수 없었으며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아무리 약을 먹어도 좋아지지 않았다.


이때 화흠(華歆)이란 신하가 찾아와 “대왕께서는 신의(神醫) 화타를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조조는 이름은 알고 있지만, 실제 의술이 어떤지는 모른다고 답했다. 그러자 화흠이 이렇게  말했다. “화타는 이 세상에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의술이 고명(高明)합니다. 그는 병자의 상황에 따라 약이나 침을 쓰고, 뜸을 뜨거나 외과수술을 한다고 합니다. 만약 오장육부(五臟六腑)가 아픈 환자가 있는데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으면 다음에는 마비산(麻沸散)이라는 약을 먹여 환자를 죽은 듯이 취하게 만든 후 예리한 칼로 배를 가르고 수술을 하며 약으로 장부를 씻어냅니다. 이 사이에 환자는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데 다 씻은 다음 약을 묻힌 실로 배를 봉합니다. 이렇게 한 후 다시 약을 복용하면 한두 달이면 낫게 하는 신기한 재주가 있다고 합니다.”


화흠은 조조에게 또 다른 일화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화타가 길을 가다 한 사람이 길가에 쓰러져 앓는 소리를 들었다.(환자의 소리를 듣고 진단하는 것은 한의학 진단에서 중요한 방법의 하나다. 소위 망문문절(望聞問切) 사진(四診) 중에서 문진(聞診)에 해당한다.) 화타는 신음소리를 듣자마자 “음식이 체해 내려가지 않아서 생긴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환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화타는 즉시 마늘과 야채즙 석 되를 먹게 했다. 그러자 환자는 한 마리 큰 뱀을 토해냈고 그 후 소화가 잘 되었다.


또 광릉(廣陵) 태수 진등(陳登)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하며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음식을 먹을 수 없는 병에 걸려 화타를 불러 치료를 청했다. 화타가 약을 쓰자 단번에 석 되나 되는 벌레를 토해냈는데 머리는 붉은색을 띠었고 머리와 꼬리를 심하게 흔들었다. 진등이 이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묻자 화타가 대답했다. “이것은 태수께서 업(業)을 많이 지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평소 생선회를 즐겨 드셨기 때문에 이런 독이 생겼습니다. 이번에 치료하긴 했지만 삼 년 후에 또 재발할 것이니 그때는 구할 수 없을 겁니다.”라고 했다. 과연 진등은 화타의 말처럼 삼 년 뒤에 죽었다. 이 일화로부터 우리는 약을 써서 병을 치료해도 나중에 또 재발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화흠은 또 다른 일화를 들려주었다. 어떤 사람이 미간(眉間)에 혹이 생겨 몹시 가려웠다. 화타를 불러 물어보니 화타는 “당신 몸 속에 날아다니는 동물이 있소.”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서 듣던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며 불가사의하게 여긴 것이다. 그러자 화타는 “간단합니다. 내가 칼로 갈라 보겠소” 하고는 칼로 혹을 째자 안에서 정말 노란 참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화타는 “노란 참새가 날아갔으니 환자의 병이 곧 나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 환자는 그때부터 정말 가렵지 않게 되었다.


또 다른 일화는 어떤 사람이 개에게 발가락을 물렸는데 물린 상처에 두 개의 살덩어리가 자라났다. 하나는 몹시 아팠고 다른 하나는 몹시 가려웠는데 둘 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화타가 살펴보더니 “아픈 살점 속에는 바늘이 10개 들어 있고 가려운 살점 속에는 바둑알 두 개가 들어 있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지만, 화타가 칼로 살점을 잘라내자 과연 그가 말한 대로 바늘과 바둑알이 나왔다.

 

삼국지의 신의(神醫) 화타(華佗) (下)


화흠이 화타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자 조조의 마음이 움직였고 화타를 불러오게 했다. 화타는 불려 온 후 조조를 보자마자 말했다.


“대왕의 머리가 아프신 것은 풍병(風病)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병의 뿌리가 뇌 속에 있는데 풍연(風涎)을 빼내지 못하면 아무리 탕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제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마비산(麻沸散)’을 마신 후 마취가 되면 예리한 도끼로 머리를 가르고 풍연을 빼내시면 병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습니다.”


조조가 “나를 죽이려는 것이냐”라며 크게 화를 내자 화타는 말했다. “대왕께서도 전에 들어보지 않으셨습니까? 관공(關公 관우)이 독화살에 맞아 오른쪽 어깨를 다쳤을 때 제가 그의 뼈를 파헤치고 독을 제거했지만 관공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이렇게 작은 병에 무엇을 그리 의심하십니까?” 


조조는 “팔이 아파서 뼈를 깎아내는 것이야 참을 수 있겠지만, 어찌 사람의 머리를 가른단 말이냐? 네가 관공과 친하다고 하니 지금 관공이 죽은 것을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냐?”라며 더욱 화를 내며 화타를 끌어내게 했다. 가후(賈詡)가 “이렇게 훌륭한 의사는 세상에 흔치 않으니 그를 죽이시면 안 됩니다”라고 건의했지만 조조는 화타가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 화타를 감옥에 가뒀다.


감옥에 갇힌 화타는 자신의 남은 생이 길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오(吳)씨 성을 가진 옥졸(獄卒)이 화타를 정성껏 보살펴주었다. 화타는 그에게 말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부탁 하나 함세. 내가 ‘청낭서(靑囊書)’라는 책을 쓴 것이 있는데 우리 집에 가서 책을 가져가게나. 자네가 나를 잘 보살펴준 대가로 그 책을 줄 테니 내가 죽은 후 내 의술이 실전(失傳)되지 않게만 해주게나.”


나중에 화타가 감옥에서 죽임을 당한 후 그 옥졸은 화타의 책을 열심히 공부해 좋은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는 사직서를 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가 집에 돌아가자 그의 아내가 마당에서 ‘청낭서’를 태우고 있었다. 그가 황급히 달려갔으나 책은 다 타버렸고 겨우 한두 장만 남아 있었다. 화가는 그가 왜 이렇게 귀한 책을 불태우느냐며 아내를 꾸짖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화타가 아무리 명의(名醫)라 해도 사지(死地)에 처해 자기 목숨조차 구하지 못했는데 그따위 의술은 배워서 뭐 하게요? 당신이 장차 의학을 배우면 또 이런 상황에 처할지 모르니 난 당신이 의사가 되는 것을 절대 허락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얼마 후 조조의 증상은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매일 악몽을 꾸었으며 온갖 난잡한 것들을 보았다. 또 새벽 삼경이면 깨어나 머리가 어지러운 것을 느꼈다. 신하들이 제단(祭壇)을 설치해 참회(懺悔)하고 뉘우치면 환각증세가 좀 나아질 수 있으니 시도해보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조조는 총명한 위인인지라 자신에 대해 잘 알았다. “나는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나쁜 일도 많이 했다. 이미 천지(天地)에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설령 천신(天神)에게 빌어도 가망이 없을 것이다.”


그는 더는 자신이 살 방법이 없음을 알았다. “과인의 천명(天命)이 이미 다했으니 어찌 병이 낫기를 구하겠는가?” 그러면서 제단 설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기가 상초(上焦)로 치밀어 올라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얼마 후 사망했다.

 

한방외과 마취약


마비산은 이미 오래전에 실전(失傳)되었지만 고서(古書)에는 이 약의 마취 효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상과대성(傷科大成)’에는 ‘마약(麻藥)’과 ‘정골마약(整骨麻藥)’이라는 두 가지 마취약이 나온다. 이 약을 먹으면 사람의 정신이 흐릿해져 아무것도 모르게 되며 칼로 배를 갈라 수술을 할 수 있다. 이 약은 섬수(蟾酥 두꺼비), 반하(半夏), 요양화(鬧羊花 철쭉), 호초(胡椒), 천오(川烏), 초오(草烏), 필발(蓽發), 마황(麻黄) 등을 잘 건조해 가루로 만든 후 술에 타서 마신다.


아마 화타가 조조의 뇌를 수술하기 위해 쓰고자 했던 마비산도 대략 이와 흡사할 것이다. 섬수는 독이 있어서 조금만 먹어도 혀끝이 마비된다. 반하(半夏)와 요양화 역시 말초신경을 마비시킬 수 있는 약이다. 정골마약에도 천오, 초오, 섬수, 호초, 반하 내지 남성(南星) 등  독이 함유된 약재가 많다.


청(淸)나라 때의 관찬의서(官撰醫書)인 ‘의종금감(醫宗金鑒) 외과심법(外科心法)’에는 ‘섬수산’, ‘정골마약’ 및 ‘겉에 바르는 마약(麻藥)’ 등이 있는데 모두 사람을 마취시켜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나온다. ‘상과대성(傷科大成)’에는 또 마약을 해독하는 방법으로 ‘감초탕(甘草湯)’을 복용하면 즉시 깨어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자료를 보면 옛날 의사들이 마약을 쓸 때는 해독약도 미리 준비해두었음을 알 수 있다.


‘후한서(後漢書)’에 나온 화타의 처방과 방제(方劑 처방)는 몇 가지에 불과하고 그가 사용한 약재도 몇 가지 되지 않았다. 화타는 약을 쓸 때 무게를 달지 않고 손으로 집어 약재의 분량을 알아냈다. 침이나 뜸으로 치료할 때도 불과 몇 군데 외에는 건드리지 않았다. 만약 병의 통증이 심해 침을 놓거나 한약만으로 치료할 수 없으면 마취시킨 후 외과적인 치료법을 사용했다. 환자의 배나 등, 내장의 적취(積聚 병소의 덩어리)를 빼내거나 가위로 병이 생긴 부위를 잘라낸 다음 잘 씻고 환부의 오물을 제거한 후 바늘로 수술 부위를 봉합했다. 또 봉합부위의 피부에는 고약(膏藥)을 발랐는데 4,5일 정도 지나면 부스럼이 생기면서 회복되었다.


그러므로 화타는 외과(外科)의 비조(鼻祖)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서양의학의 역사에 기재된 최초의 수술보다 약 1363년 전의 일이다. 중국 고대의 의학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투시력을 지닌 편작 (上)

 

명의(名醫)의 대명사로 알려진 편작(扁鵲)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는 의술은 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그는 어느 지역을 가든 그 지역의 특수한 병을 고칠 수 있었다. ‘사기(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편작은 부인과, 소아과, 노인전문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환자를 보았다. 편작은 일찍이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몸에 병이 너무 많은 것이다. 의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병을 고칠 방법이 너무 적은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풍속을 따르되 못 고치는 병이 없어
편작은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의 풍속에 잘 적응했다. 그래서 그는 어느 지방을 가든 그 지방 사람들이 원하는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었다. 가령, 편작이 한단(邯鄲)을 지나갈 때 한단에서는 남자들이 부인(婦人)을 몹시 아껴 부인과 질환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대하의(帶下醫)’ 즉, 지금 식으로 말하면 부인과 전문의가 되었다. 낙양을 지날 때는 이 지역 사람들이 노인을 공경한다는 것을 알고는 ‘이목비의(耳目痺醫)’를 표방해 전문적으로 노인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었다. 여기서 이목비란 눈과 귀가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함양(咸陽)에 가자 함양 사람들이 어린이를 아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소아과 전문의를 표방하기도 했다.


사실 역사(歷史)상 많은 명의(名醫)가 모두 이와 같았다. 어떤 종류의 질환이든 그 병에 대한 정확한 약물(藥物)과 처방(處方)을 내릴 수 있었으며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 중 한 명인 이동원(李東坦)은 한의학에서 흔히 비토파(脾土派)의 창시인으로 불린다. 그가 치료한 환자는 대부분 돈 있는 집안의 귀한 자식으로 대개 사생활(私生活)에 문제가 많아 ‘신허(腎虛)나 비허(脾虛)’ 질환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대체로 소화기인 중초를 따뜻하게 하고 양기(陽氣)를 보(補)하며 양기를 끌어올리는 처방을 내렸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환자가 거지나 가난한 사람이었다면 분명 처방이 달라졌을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역시 금원사대가의 일원인 주단계(朱丹溪)는 한의학에서 ‘한량파(寒凉派)’로 불린다. 이는 그가 애용한 처방이 주로 한량하고 자음(滋陰)을 위주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만약 비위가 허약한 사람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이동원(李東坦)과 유사한 처방을 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좋은 의사라 할 수 있겠는가?


편작이 이렇게 다양한 질환을 모두 치료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환자의 증상이 어떤 병에 속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의학에서는 병의 증상을 확실히 감별한 후 치료에 임할 것을 강조한다. 장중경의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병증(病症)의 표리(表裏), 한열(寒熱), 허실(虛實) 등에 대해 아주 분명히 구별한 후에야 서로 다른 처방을 구사한다. 즉 먼저
‘팔강(八綱)’에 근거해 증상을 세밀히 구별한 후 치료에 들어가는데 이렇게 해야 병을 제대로 치료할 수 있다.

 

편작도 치료할 수 없는 여섯 부류
편작은 일찍이 성인(聖人 좋은 의사)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병을 알고 그 병이 장차 어떻게 발전해나갈지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그는 과거의 병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차 발생할 병까지도 볼 수 있다. 불가(佛家)의 말에 따르면 좋은 의사는 소위 ‘숙명통(宿命通)’이라 불리는 능력을 갖고 있어 과거와 현재는 물론 장래를 볼 수 있었다. 그가 병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병을 잘 치료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천하의 명의 편작에게도 치료할 수 없는 환자가 있었다. 그는 구체적으로 여섯 가지 종류의 환자를 거론했는데 어떤 사람들인지 살펴보자.


첫째, 교만하고 방자해서 이치를 따지지 않는 사람. 다시 말해 사람이 너무 교만해서 아무리 설명을 해도 듣지 않으며 이치를 말해도 따르지 않는 환자를 말한다. 이런 사람의 병은 고칠 수 없다.
둘째, 몸을 가벼이 여기고 재물을 중시하는 사람. 즉, 자신의 몸보다 재산을 중시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처럼 자신이 가진 털끝 하나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사람은 병을 치료하기가 몹시 어렵다.
셋째, 의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사람. 사실은 이런 환자가 가장 흔하다. 가령 마땅히 옷을 따뜻하게 입어야 하지만 오히려 얇게 입거나, 기름을 적게 먹어야 하는데 기름을 많이 먹거나, 채식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생선이나 육류를 많이 먹거나, 찬 것에 주의해야 하는데 찬 음식을 함부로 먹는 등이다.
넷째, 음양(陰陽)이 동시에 병들어 장부(臟腑)의 기(氣)가 일정하지 않은 사람. 병의 증상 자체가 음과 양이 뒤섞여 있고 장부의 기가 불안정하면 치료하기 어렵다.
다섯째, 너무 허약해서 약조차 먹을 수 없는 사람.
여섯째, 무당의 말을 믿고 의사를 믿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지금도 적지 않은데 가령 점을 치거나 부적을 사용해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사람들은 치료하기가 어렵다.

 

투시력을 지닌 편작 (下)

 

명의(名醫)의 대명사로 알려진 편작(扁鵲)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는 의술은 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그는 어느 지역을 가든 그 지역의 특수한 병을 고칠 수 있었다. ‘사기(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편작은 부인과, 소아과, 노인전문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환자를 보았다. 편작은 일찍이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몸에 병이 너무 많은 것이다. 의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병을 고칠 방법이 너무 적은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스승과의 우연한 만남
중국 고대에 훌륭한 의사들은 모두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사부가 제자를 찾아내는 방식으로 선발되곤 했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학문을 배우듯이 공개적으로 전수(傳受)받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대에는 어떤 사람이 의학을 배우고 싶어도 스승의 허락을 받지 못하면 배울 수 없었다. 스승은 그 사람이 배움을 전수받을 만한 인물인지 심사숙고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기술을 전수해주었다.


‘사기’에는 편작이 장상군(長桑君)을 스승으로 모신 일화가 나오는데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편작은 본래 발해군(渤海郡) 출신으로 정(鄭)나라 사람이다. 성은 진(秦)이고 이름을 월인(越仁)이라 했다. 그는 젊을 때 여관에서 매니저로 일했다. 당시 여관에 투숙한 손님 중에 나이가 아주 많이 들어 보이는 사람이 있었는데 기상이 평범하지 않았다. 편작은 그를 매우 특별히 대했으며 아주 공경하게 대했다. 편작은 늘 주도면밀하게 그를 모셨으며 진실하고 정성스럽게 그의 모든 일을 솔선해서 도와주었다.


노인은 진월인(편작)을 줄곧 십여 년간 관찰한 후에야 그의 본성이 순진(純眞)하고 자비하며 선량해 결코 일반사람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그가 일반인이 겪을 수 없는 고생을 겪어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진월인에게 자신의 초상(超常)적인 의술을 가르쳐주기로 했다.


어느 날 노인이 편작을 불렀다. “내게 한 가지 비방(秘方)이 있는데 나는 이제 나이가 너무 많아 쓸모가 없구나. 이런 것들을 모두 네게 전해줄 터이니 부디 사양하지 말거라.”


편작은 공경하게 그의 말에 따랐다. 그러자 노인은 품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어 약과 함께 편작에게 건네주었다. 노인은 “너는 이 약을 ‘상지수(上池水)’와 함께 마시거라”라고 지시했다. 여기서 상지수란 하늘에서 내려왔으나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은 빗물이나 이슬 등을 가리킨다. 노인은 상지수에 자신이 준 약을 섞어 30일간 마시면 많은 것을 알게 될 거라고 말했다.


편작은 노인이 지시한 대로 30일간 상지수에 약을 섞어 마셨다. 그러자 30일 후 갑자기 벽 뒤쪽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수련계(修煉界)에서 말하는 ‘투시(透視)능력’이 생겨 벽 뒤편에 있는 사물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사람 신체 속의 오장육부를 직접 볼 수 있었으며 오장육부 어디에 덩어리가 맺혔는지 볼 수 있었다. 환자를 만나면 어떤 의사보다 병의 원인을 명확히 알고 치료하니 사람들이 경외심 또한 커질 수밖에 없었다. 편작이 노인을 극진히 돌본 우연한 행동이 역사상 가장 뛰어나고 위대한 의사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편작의 이야기는 사람의 덕행(德行)이 좋으면 특별한 만남과 안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일러준다.

 

편작이 ‘난경’을 저술한 이유
예전이나 지금이나 어떤 사람이 인체 내부의 병을 볼 수 있다면 이를 넘보거나 이용할 생각을 품는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 어쩌면 복권을 뽑는 것처럼 그를 부추겨 횡재를 얻으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편작은 매우 총명했다. 그는 맥(脈)을 이용해 환자의 병을 진단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은 그가 단지 진맥(診脈)을 통해 병을 진찰한다고 생각할 뿐 그에게 투시능력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편작은 이처럼 맥을 보는 방법과 이론을 정리해 ‘난경(難經)’이란 책을 저술했다.


‘난경’에는 기색(氣色)을 관찰하는 방법을 언급하는데 장부의 상태 내지는 병세(病勢)가 얼굴로 드러나는 기색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사실 얼굴, 손, 머리카락이 자라는 방식, 피부 상태, 혈관이 피부에서 드러나는 현상은 모두 내장과 관련이 있다. 때문에 이런 것은 병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난경’은 제1난부터 61난까지 모두 어떻게 진맥을 할 것인가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또 오장육부와 경락 간의 상호관계에 대해 언급했다. 사실 편작은 투시능력을 지니고 있어 오장육부의 각종 상황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맥을 짚을 때는 또 맥의 상태와 장부의 관계가 하나로 연결된 것을 알았으며 이렇게 써낸 책이기 때문에 실용성이 매우 높다.  지금도 많은 한의사가 ‘난경’에 기재된 방법에 근거해 진맥(診脈)하고 치료에 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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