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황원갑의 한국사 명장열전

醉月 2010. 10. 29. 08:49

 황원갑(黃源甲) 1945년 강원도 평창 출생

 춘천고등학교,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수료.

 1969~ 2001년 월간스포츠, 한국일보 기자,  서울경제 특집부차장, 문화레저부장,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1983년 신동아 복간기념 논픽션 공모 당선,

 저서 ; 소설집 <비인간시대><나를 여왕이라 부르라><연수영> 

           역사서 <역사인물기행><인물로 읽는 한국풍류사><민족사의 고향을 찾아서><한국의 인맥>

           <역사인물유적순례><경제사의 현장><고승과 명찰><한국사를 바꾼 여인들><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한국사 제왕열전><부활하는 이순신> 등

 현재 ; 한국소설가협회, 한국문인협회, 대한언론인회, 단군학회, 조선학회, 고구려발해사학회 회원,

 

대제국 고구려 기틀 다진 용장 부분노 , 병법 통달한 지장 … 계략으로 선비족 토벌

고구려의 건국 수도 졸본성. 부분노 장군은 이 시기에 동명성왕을 도와 제국의 토대를 다졌다. 필자 제공

삼실총 벽화의 고구려 무사도. 부분노 장군도 이처럼 늠름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국방일보는 오늘부터 매주 목요일에 ‘한국사 명장열전’을 게재합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명장들의 위대한 삶을 각종 사료를 통해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묘사하면서 박진감 있게 펼쳐 나가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큰 교훈과 함께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연재를 맡은 황원갑 씨는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한 소설가이자 30년간 한국일보 등에서 근무한 언론인 겸 역사연구가입니다. 편집자 

부분노(扶芬奴)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과 제2대 임금 유리명왕(琉璃明王)을 보좌해 건국 초기 대제국의 기틀을 다진 장수였다. 그의 대표적 군공은 동명성왕의 명령에 따라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해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고, 유리명왕 때에는 선비족(鮮卑族)을 토벌해 속민으로 삼은 것이다.

 특히 선비족을 토벌할 때에는 처음부터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탁월한 지략으로 적군을 공략, 단순히 용맹만 빼어난 장수가 아니라 병법에도 통달한 지장이라는 사실도 보여줬다. 그의 선비족 토벌과정은 손자병법을 비롯한 중국 고대의 병법서들이 이미 삼국시대 이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연구되고, 실전에 응용됐다는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한다.

 부분노는 삼국사기에 겨우 두 차례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기록만으로도 그는 탁월한 장수였고, 나라를 위해 세운 공로가 매우 컸음을 알게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재위 6년(서기전 32년) 조에 이렇게 나온다.

 ‘겨울 10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부분노를 시켜 태백산 동남방에 있는 행인국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고을을 만들었다.’

 부분노와 함께 행인국을 정복한 오이는 동명성왕(추모성왕·鄒牟聖王)이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망명할 때 그를 수행한 세 사람의 심복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나머지 두 사람은 마리(摩離)와 협보(陜父)라고 기록은 전한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이름은 고주몽(高朱蒙)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정확한 이름은 추모다. 추모는 부여말로 ‘활 잘 쏘는 이’ 또는 ‘우두머리’를 가리킨다고 한다.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이 있던 중국 길림성 집안시의 광개토태왕 훈적비는 이렇게 시작된다.

 “예전에 시조 추모왕께서 나라를 세우실 때 북부여로부터 나오셨는데, 천제의 아들이시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시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셨는데, 나실 때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으셨다.”

 추모성왕이 뒷날 고구려의 국모로서 여신으로 신격화된 유화부인(柳花夫人)의 아들로 태어난 것은 서기전 58년 음력 5월 5일. 그 지난해 어느 여름날, 유화는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解慕漱)를 자칭하는 한 바람둥이에게 정조를 빼앗기고 임신하게 된다.

 유화가 몸을 버려 임신하자 사내는 ‘천제의 자손은 함부로 서민과 혼인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달아나 버린다. 그러자 하백은 가문의 망신이라면서 유화를 집에서 내쫓아버린다. 처녀가 아이를 배자 사내는 달아나고 아비는 집에서 쫓아내 유화는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 강물에 몸을 던진다. 그러나 지나가던 어부가 물에서 건져 부여의 금와왕(金蛙王)에게 바친다.

 금와왕이 어찌된 일이냐고 묻기에 유화는 할 수 없이 해모수라는 사람에게 정조를 빼앗겨 임신하고 부모에게 쫓겨난 사정을 이야기한다. 금와왕이 그 말을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비록 버림받은 여자라고 하지만 그지없이 아름다워 자신의 후궁으로 삼을 욕심으로 궁궐로 데리고 가서 방 하나를 주어 머물게 한다. 그렇게 해서 유화는 달이 차자 추모를 낳게 된다.

 추모는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할 줄 알았고, 또 골격이 튼튼하고 외모가 영특하게 생겨 보는 사람마다 장차 왕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금와왕이 뒷날 자신과 자기 아들의 왕위가 위태로울까 두려워해 일찌감치 죽여 후환을 없애려고 했다. 그러나 여러 유력자, 곧 부족장들이 한결같이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의 혈육이라는 이처럼 비범한 아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므로 죽이지 못 하고 유화부인에게 돌려주어 기르도록 허락했다.

 유화의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활을 매우 좋아했고 잘 쏘았다. 나이 일곱 살이 되자 스스로 활을 만들어 궁궐 안팎을 돌아다니면서 무엇이든 보이는 대로 쏘는데 백발백중의 신궁(神弓)이었다. 신궁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2000여 년 전 당시의 무기라면 칼과 창·도끼, 그리고 활이 고작이었고, 특히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적이나 짐승을 명중시킬 수 있는 활의 명인은 무리의 우두머리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그때 금와왕에게는 아들이 일곱이나 있었는데 무엇을 하고 놀아도 추모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맏아들 대소(帶素)가 부왕에게, “아버지! 저 과부의 자식 추모를 하루빨리 죽여 없앱시다. 일찌감치 후환을 없애자고요!” 하고 졸랐다. 하지만 중앙집권도, 절대왕권도 확립되지 않은 부여시대에는 왕이라도 부족장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추모처럼 비상한 인물을 마음대로 죽일 수는 없었다. 금와왕은 기회를 보아 무슨 구실이든 붙여서 죽여 없애려고 추모에게 왕궁의 마구간에서 말먹이는 천한 일을 시켰다. 그때 추모의 나이 19세였다.

 아마도 부분노는 추모가 이처럼 부여왕국에서 매일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위태로운 젊은 시절을 보낼 때의 친구였는지도 모른다. 추모의 목숨을 노리는 금와왕과 왕자들의 의도가 갈수록 노골화하자 하루는 어머니 유화부인이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야, 장차 왕자들이 너를 해코지할 터이니 일찌감치 방도를 마련해 둠이 좋지 않겠느냐?”

 추모가 부여에서 망명한 것은 21세 때인 서기전 38년. 그 지난해에 혼인한 아내 예씨(禮氏)는 임신 중이었다. 추모는 오이·마리·협보 세 명의 심복만 이끌고 부여의 도성을 빠져나와 마침내 졸본부여, 오늘날 중국 길림성 환인에 이르렀다.

 추모의 망명 집단은 비류수 강변에 마을을 이뤄 근거지를 마련한 뒤 새로운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고, 자신의 성을 고씨(高氏)라고 했다. 하지만 부여에서 쫓겨 온 젊은 망명객에 불과한 추모가 이들 소수의 추종세력만으로 고구려 건국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이룩했다고 볼 수는 없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조는 이 대목에서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왕이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매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고, 왕이 죽으매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말도 있다’고 덧붙였다.

 당시 주몽의 나이 22세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건국이 맨주먹의 추모가 새장가를 잘 간 덕분에 식은 죽 먹듯이 손쉽게 이뤄졌을 리는 만무하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동명성왕이 망명, 고구려를 건국한 비류수 하류의 졸본부여 땅. 왼쪽 뒤편에 졸본성이 있었다.                       필자 제공

졸본성 동문터. 지금은 오녀산성으로 이름이 바뀌고 중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북부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도망쳐 온 불과 21세의 젊은이가 아무 밑천도 없이 그저 인물 하나만 잘난 덕에 아들 없는 졸본부여 왕의 사위가 되고, 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해 아무 문제도 없이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고 시조가 되었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어찌 믿을 수 있는가.

 사실 추모는 졸본부여에서 소서노(召西奴)라는 부잣집 과부 딸을 새 부인으로 맞았던 것이다. 21세의 추모가 소서노를 처음 만났을 때 소서노는 29세. 나이도 8세 연상이요, 게다가 두 아들까지 딸린 과부였지만 추모가 소서노를 만난 것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격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연타발은 졸본부여의 유력한 호족이었을 뿐만 아니라 으뜸가는 부자였다.

 추모로서는 연타발 부녀의 막강한 영향력과 막대한 재물이 절실히 필요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리 절세의 영웅이라도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인재와 재물이 필요한 법인데, 추모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연타발과 소서노 부녀를 만났던 것이다.

 추모가 동부여에 본부인이 있는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밝혔는지 총각이라고 속였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은 혼인을 했고, 결과적으로 추모는 소서노의 재물을 풀어 사람들을 모으고 궁실을 세우고 성벽을 쌓는 등 한 해 동안 전심전력해 마침내 고구려를 건국했으니 그때가 기원전 37년 10월이었다.

 추모라는 걸출한 젊은 영웅이 졸본부여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라는 새 나라를 세웠다는 소식이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수많은 씨족과 부족이 찾아와 신민으로서 보호받기를 자청했을 것이고, 수많은 용사와 재사도 찾아와 대왕의 신하가 됐을 것이다. 어쩌면 부분노도 이 무렵 추모대왕의 장수로 발탁된 것은 아니었을까.

 추모대왕은 건국 직후부터 자신이 오래전부터 품어보고 키워 온 원대한 꿈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바로 단군왕검의 조선과 해모수의 부여를 잇는 천손(天孫)의 나라, 대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세운 수십 개의 나라를 합쳐 다시 하나의 대제국으로 아우르고자 했다.

 즉위 원년에 대왕은 군사를 이끌고 가장 가까운 말갈족을 쳐서 멀리 쫓아버리고, 그 다음에는 비류수 상류의 송양국을 복속시켰다. 추모대왕과 활솜씨를 겨뤄 상대가 되지 않자 송양왕이 항복하고 나라를 바쳤던 것이다. 대왕이 망명 동지인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령해 태백산 동남쪽에 있는 행인국을 쳐서 그 땅을 영토에 편입시킨 것은 재위 6년째인 서기전 32년의 일이었다.

 또 재위 10년 11월에는 장수 부위염(扶尉厭)을 보내 북옥저를 쳐서 없애고 영토로 삼는 등 쉴 새 없이 국토를 확장하고 백성을 늘려 힘차게 부국강병의 길을 달렸다. 이러한 정복사업에 오이·마리·협보·재사·무골·묵거 등 개국공신들과 더불어 부분노 장군의 활약도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추모대왕 동명성왕은 서기전 19년 9월에 재위 19년 만에 세상을 떴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40세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19년 조에 이르기를, ‘여름 4월에 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돌아오니 왕이 기뻐해 태자로 삼았다’고 했는데, 그 5개월 뒤에 동명성왕이 세상을 뜬 것이다. 이렇게 유리명왕이 고구려의 왕위를 이었고, 부분노 장군은 동명성왕에 이어 2대째 제왕을 섬기게 됐다.

 부분노가 다시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11년, 서기 9년이다. 그해 4월에 유리명왕이 여러 신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선비족이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려 하지 않으며, 정세가 유리하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앉아 지키므로 우리나라에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소. 만일 이 선비 오랑캐들을 무찌르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큰 상을 내리겠소.”

 그러자 부분노가 나서서 말했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튼튼한 나라로서 사람들이 용감하지만 미련한지라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계략으로써 굴복시켜야 합니다.” 유리명왕이 말하기를,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니 부분노가 이렇게 대답했다.

 “첩자로 하여금 적의 성안에 들어가게 해 거짓말로 우리 고구려는 땅이 좁고 군사가 약하므로 겁이 나서 감히 선비를 치지 못한다고 하면 놈들이 틀림없이 우리를 만만히 여겨 수비를 게을리 할 것입니다. 소장이 그 틈을 타 정병을 거느리고 지름길로 가서 산속에 숨어 적의 성을 노리고 있겠습니다. 이때 대왕께서 약간의 군사를 오랑캐의 성 남쪽으로 보내시어 싸움을 걸게 하신다면 놈들은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이때 소장은 정병을 이끌고 놈들의 성으로 쳐들어가고, 대왕께서는 날쌘 기병을 거느리시고 놈들을 양쪽에서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유리명왕이 부분노의 전략에 따라 선비족 토벌군을 일으켰다. 선비족이 고구려 군사를 얕잡아 보고 성문을 열고 출전하자 부분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군사를 거느리고 성문 안으로 짓쳐들어갔다. 그러자 소수의 고구려 군사를 추격하던 선비족이 이것을 보고 크게 놀라 다시 성으로 되돌아왔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부분노가 성안에서 수많은 적군을 목 베어 죽이고, 유리명왕은 강병들을 거느리고 성 밖에서 달려드니 선비족은 앞뒤로 협공당하게 되자 마침내 항복하고 고구려의 속민이 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 유리명왕은 전공이 으뜸인 부분노에게 상으로 식읍을 내리니 부분노가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모두 대왕의 빛나는 무위(武威) 때문이지 제게 무슨 공로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유리명왕은 식읍 대신 황금 30근과 좋은 말 열 필을 부분노에게 상으로 주었다. 이 기록을 보면 부분노는 용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병법에도 통달한 지장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적진에 간첩을 들여보내고, 아군이 약한 듯이 보이는 허허실실의 전법 등이 모두 손자병법 등에 나오는 전략전술에 꼭 들어맞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초기나 그 이전부터 손자병법 등 중국의 병법서들이 들어와 연구되고 실전에 응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부분노 장군은 이렇게 삼국사기에 딱 두 차례만 등장하고 기록에서 사라져버렸다.

 부분노 장군이 선비족을 토벌할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왜냐하면 부분노 장군의 나이가 40세에 세상을 떠난 동명성왕과 비슷하다고 보면 유리명왕 11년에 그의 나이가 50세가 약간 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그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부분노는 백전노장으로서 유리명왕을 도와 고구려 창업기의 부국강병책을 추진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다음주에는 명림답부(明臨答夫) 편이 이어진다.


좌원대첩 이끈 고구려 첫 국상 명림답부, 한나라 대군 통쾌하게 무찌른 영걸

고구려인들도 신성시하던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천지.                                                                             필자 제공

국내성에서 요동으로 가는 길. 명림답부도 이 길을 통해 오랑캐를 물리치러 갔을 것이다.

고구려의 황성 옛터. 국내성은 이제 초라한 폐허만이 남았다.                                                                   필자 제공


 고구려 제7대 임금 차대왕(次大王) 20년(165년).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불길한 조짐이 일어났다. 정월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은 나라에 무슨 큰 변고가 일어날 것이라고 술렁거렸다. 과연 그해 3월에는 대왕의 동복형인 태조대왕(太祖大王)이 별궁에서 세상을 떴는데 그때 나이가 119세였다.

 이어서 그해 10월에는 연나부(椽那部)의 조의선인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차대왕의 학정과 백성들의 고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군사를 모아 차대왕을 죽여 버렸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군사혁명에 성공한 명림답부는 그동안 숨어 살던 태조대왕의 막내 아우인 고백고(高伯固)를 찾아내 왕위에 앉히니 그가 곧 신대왕(新大王)이다.

신대왕은 즉위 2년째인 서기 166년 정월에 명림답부를 국상(國相)으로 삼고 벼슬을 더해 패자(沛者)로 삼아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맡겼다. 국상이란 그때까지 국왕의 정무를 보필하는 좌보와 우보를 통폐합한 최고위 직이니, 이는 곧 뒷날 사람들이 말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수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명림답부는 이처럼 고구려·신라·백제를 통틀어 최초의 반정에 성공하고, 고구려 최초의 국상 자리에 앉아 출장입상(出將入相)하며 정권을 좌지우지한 영걸이었다. 삼국사기 ‘열전’ 명림답부 편에 따르면 그는 신대왕이 세상을 뜨기 3개월 전인 179년 9월에 113세의 고령으로 죽었다고 했으니, 이를 역산해 보면 그는 태조대왕 14년(66년)에 출생한 셈이 된다.

 명림답부가 태어날 무렵은 태조대왕의 모후인 부여태후(夫餘太后)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수렴청정을 끝내고 21세의 대왕이 친정에 나선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119세로 역사상 가장 장수한 임금인 태조대왕의 양위는 정상적이 아니라 아우 수성(遂成·차대왕)의 공갈협박에 못 이긴 것이었다. 태조대왕에게는 후계 1순위인 태자 막근(莫勤)이 있었는데, 재위 80년(132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해 가을에 수성이 심복들을 거느리고 왜산에서 사냥을 즐기고 술판을 벌였다. 이때 관나부의 우태 미유, 환나부의 우태 어지류, 비류나부의 조의 양신 등이 수성에게 이렇게 알랑방귀를 뀌었다.

 “전에 모본왕이 죽었을 때 그 아들 익이 싹수가 없어서 중신들이 재사(再思)를 세우려 했으나 재사가 늙어서 그 아들에게 양보한 것은, 형이 늙으면 아우에게 양위하게 하려 함이 아니갔습네까? 지금 대왕은 이미 늙어 꼬부라졌는데도 왕위를 사양할 의사가 없으니 대인은 이 일을 서둘러야 하지 않갔습네까?”

 그러자 수성이 이렇게 대꾸했다.

 “기렇치만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관례가 아니갔음메? 대왕이 비록 늙었다 하지만 이미 태자가 있는데 어찌 내가 감히 분에 넘치는 일을 바랄 수 있갔시오.”

 미유가 말했다. “에헤이! 아우가 어질면 형의 뒤를 잇는 일은 옛날 옛적에도 있었으니 기렇게 겸손하지 마시라요!”

 그 무렵 조정 대신인 좌보 패자 목도루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수성에게 반역할 생각이 있음을 알고 병을 핑계로 벼슬을 버렸다. 그러나 수성의 기대와는 달리 대왕은 좀처럼 왕위를 물려줄 기미가 없었다. 그로부터 6년의 세월이 흐른 태조대왕 86년(138년). 그해 가을에도 수성이 또 사냥을 갔다가 5일 만에 돌아왔다. 수성의 행동거지가 갈수록 수상하자 그의 아우 백고가 말했다.

 “형님! 자고로 재앙과 복은 오는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이 그것을 불러들이는 것이라고 합네다. 지금 형님은 임금의 아우라는 근친으로서 백관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지위가 이미 매우 높고 공로 또한 매우 큽네다. 마땅히 충의의 마음과 예절과 겸양으로써 욕심을 억제하여 위로는 대왕의 덕을 따르고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하지 않갔시오?”

 수성은 “키잉!” 하고 콧방귀로 대답을 대신했다. 태조대왕의 수명은 억세게 길었다. 그로부터 다시 8년의 긴 세월이 흘러 태조대왕 94년(146년). 그해 가을에 수성이 또 왜산에 가서 사냥하면서 심복들에게 말했다.

 “휘유! 이거 지루해서 미치갔구나야! 대왕이 늙어 꼬부라졌지만 죽지 않고 나도 갈수록 늙어가니 이젠 더 기다릴 수가 없다 그기야! 이젠 임자들이 구체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하지 않갔네?”

 이렇게 전개된 상황은 마침내 태조대왕의 양위로 이어지게 된다. 그해 10월에 우보 고복장이 태조대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수성이 무리를 모아 반역하려고 획책하니 빨리 처형해야 됩네다!” 하지만 이미 수성 일파의 공갈협박에 못 이긴 대왕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이젠 힘이 없으니 어쩌갔음메? 수성에게 양위할 수밖에 없지 않갔음둥?” 그러고는 그해 12월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왕위를 내주고 별궁으로 물러나 은퇴하고 말았다.

 마침내 고대하던 왕위에 오른 차대왕은 자신의 즉위에 공이 큰 심복들을 중용한 반면, 바른 말로 간하는 충신들은 사정없이 숙청하는 등 살벌한 공포정치를 펼쳤다. 즉위에 일등공신인 미유와 어지류를 각각 좌보와 우보로 삼고 양신을 중외대부로 삼는 등 중용하고, 자신을 죽이라고 충언했던 고복장은 목을 날려버렸다.

 이처럼 늙은 형을 몰아내다시피 하고 왕위에 오른 수성이 곧 차대왕인데, 즉위 당시 그의 나이도 이미 76세의 고령이었다. 수성이 즉위해 공포정치를 벌이자 자연히 민심이 이반되고 정국도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독재자들일수록 자신의 정권안보에 관해서는 신경이 날카롭기 마련이다. 그 역시 권좌가 불안했기에 태조대왕의 태자요 자신의 친조카인 막근에게 자객을 보내 암살해 버렸다. 그러자 막근의 아우인 막덕(莫德)은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생각하고 아예 자살하고 말았다.

 명림답부는 이러한 때에 몸을 일으켜 우리 역사상 최초의 유혈혁명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혁명의 성공보다도 명림답부가 고구려사를 빛낸 것은 좌원대첩(坐原大捷)을 통해 한나라 침략군을 통쾌하게 무찌른 전공에 있었다.

집안 교외의 산성하 고분군. 국내성 시대 고구려 황족·귀족의 무덤들이다. 명림답부의 묘도 이 가운데 있지 않을까.
환도산성은 국내성 외곽 방어 요새였다. 명림답부는 이 시기에 활약했다.                                                  필자 제공

차대왕 재위 20년(165년) 3월 별궁에서 쓸쓸히 노년을 보내던 태조 대왕이 세상을 떴다. 그리고 7개월이 지난 그해 10월에 연나부의 조의선인 명림답부가 군사를 일으켰다. 차대왕의 20년에 걸친 폭정을 종식하기 위해서였다. 명림답부에 의해 목숨이 끊어질 때에 차대 왕도 96세였으니 천수를 누릴 만큼 누린 셈이다.

 차대왕을 제거한 명림답부는 태조 대왕의 두 아들이 모두 죽고 없기에 그의 막내 아우인 백고를 모셔와 왕위를 잇게 했다. 그가 신대왕. 그러나 신대왕도 보위에 오를 때는 이미 77세의 고령이었다.

 또 추산해 보건대 명림답부도 군사를 일으켰을 때 그의 나이 99세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가 죽은 것이 신대왕 15년(179년) 113세 때였다고 했으니 출생은 태조 대왕 14년(66년)이요, 혁명을 일으키던 차대왕 20년에는 99세가 되기 때문이다.

 신대왕은 차대왕이 맏형 태조 대왕의 보위를 넘볼 때에 목숨을 걸고 이에 반대했기에 지난 20년간 도성인 국내성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중에 숨어 살고 있었다. 혁명에 성공한 명림답부는 사람들을 풀어 백고를 찾아 궁궐로 모시고 와 보위에 오르게 했다.

 이렇게 집권한 명림답부는 신대왕으로 하여금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게 하는 등 화합정책을 펼쳐 차대왕의 폭정으로 피폐해진 민심부터 어루만지도록 했다. 이에 따라 생업을 버린 채 산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던 백성도 제 고향 제 집으로 돌아와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신대왕은 행정조직을 개편해 좌보·우보제도를 없애고 국상을 신설해 초대 국상으로 자신의 즉위에 일등공신인 명림답부를 임명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제거하고 신대왕을 추대한 뒤 고구려 최초의 국상이 된 명림답부의 가장 큰 공적이라면 좌원대첩(坐原大捷)을 통해 후한(동한)을 굴복시킨 일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 4년(168년) 조에 ‘한나라 현도군 태수 경림(耿臨)이 침범해 와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이므로 왕은 스스로 항복하여 현도 군에 복종할 것을 청했다’는 대목이 있다.

 이는 참으로 허황하기 그지없는 사대주의 모화사상가 김부식다운 망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창 기세를 뻗어가는 대제국 고구려가 다 망해 가는 한나라, 그것도 황제의 친정(親征)이 아닌 일개 지방관인 태수가 쳐들어와 겨우 수백 명의 군사가 전사했다고 해서 항복을 자청하고, 한나라 자체도 아닌 현도 군에 복종을 맹세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린가 말이다. 어찌하여 이런 망발이 비롯되었을까.

 당시 한나라의 사정은 고구려가 조금만 더 강한 힘으로 밀고 들어가면 나라가 거덜날 위험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 고구려가 점차 강성해 요하를 건너 요서와 북경 지방은 물론 산둥반도 일대까지 고구려 무사들의 말발굽 아래 무참하게 짓밟히는 사태가 쉴 새 없이 이어지자, 이러한 열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보려고 틈만 나면 요서지방의 한나라 태수들이 고구려의 서쪽 변경을 노략질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한의 현도 태수 경림이 열세를 인정하고 고구려에 화해를 청한 역사적 사실을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왜곡해 기술한 것을 김부식이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대로 베껴 쓴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강성에 위기를 느낀 후한은 당분간 고구려의 기세를 눌러놓은 뒤 국내 문제를 해결하고자 신대왕 8년(172년) 11월에 수만 대군을 동원해 쳐들어왔다. 당시 사정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이렇게 전한다.

 한나라에서 대군으로 우리나라(고구려)를 공격했다. 왕이 여러 신하에게 공격과 방어 어느 쪽이 유리한지 물으니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한나라는 군사의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업신여기는데 만약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적들은 우리를 비겁하다 하여 자주 올 것이요, 또한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야말로 한 사람이 문을 지켜도 만 사람을 당하는 격입니다. 한나라 군사가 아무리 수가 많더라도 우리에게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군사를 내어 막아 버리소서.”

 그러자 명림답부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아 이제 강병으로써 멀리 쳐들어오니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군사가 많은 자는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지켜야 한다는 것은 병가(兵家)의 상식입니다. 이제 한나라 적들이 천리길에서 군량을 운반하매 오랫동안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니, 만약 우리가 구렁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고 곡식 한 톨 없이 들판을 비워 놓고 기다리면 적들은 반드시 열흘이나 한 달이 넘지 않아서 굶주리고 피곤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강병으로써 친다면 필승할 것입니다.”

 왕이 그렇게 여겨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한군이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장수와 사졸들이 굶주려 퇴각하매 이때 명림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해 좌원에서 교전하니 한나라 군사가 크게 패해 한 필의 말조차 돌아가지 못했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주어 그의 식읍으로 했다.

 한편 삼국사기 ‘열전’ 명림답부 편도 좌원대첩의 내용이 이 기사와 거의 같은데, 다만 이때 한나라 대군을 이끌고 온 자가 현도 태수 경림이라고 밝힌 점만 다르다.

 이처럼 고구려의 국력 신장기를 이끈 당대의 영걸 명림답부는 113세로 세상을 떠났다.

 신대왕은 친히 찾아가 조문하고 7일간 조회를 중지했으며, 예를 갖춰 질산에 장사 지내 20여 호를 묘지기로 뒀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명림답부가 옹립했던 신대왕도 붕어하니 그의 나이 또한 당시로써는 고령인 97세였다고 사서는 전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명림답부 사후 그의 손자로 추측되는 명림어수(明臨於漱)가 동천왕(東川王) 4년(230년) 국상에 임명됐고, 역시 그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명림홀도(明臨笏覩)가 중천왕(中川王) 9년(256년) 대왕의 사위인 부마도위가 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그의 출신부족인 연나부는 여러 명의 왕비를 배출한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명림답부는 일세의 영걸이면서도 훌륭한 인격자였다. 그가 강력한 독재자인 차대왕을 제거할 정도면 제왕보다 더욱 강력한 무력과 치밀한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이 제위에 오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새로운 임금을 내세워 충성을 다 바쳤던 것이다. 어찌 명림답부를 가리켜 의롭고 장하다 하지 않을쏜가.

신라 최초 출장입상한 영걸 석우로, 부국강병의 길 달려 천년제국 터전 다져

서라벌 옛터 경주 노서동고분군 일대. 석우로 등의 활약에 의해 신라는 부국강병의 길을 달려 천년제국을 이룩했다.

거제시 전경. 석우로가 처음으로 전쟁에 나갔던 남해안 연안 포상팔국의 한 곳으로 비정된다.         <필자 제공>


  석우로(昔于老)는 신라 1000년사에서 최초로 출장입상(出將入相)한 출중한 영웅이지만, 비열한 정치적 암수에 걸려 비극적 최후를 맞은 불행한 인재이기도 했다.

 그는 신라 석씨 왕조를 연 탈해이사금의 5세손이다. 즉, 석탈해의 아들 각간 석구추(昔仇鄒)의 아들이 제9대 벌휴이사금이요, 석벌휴의 둘째 아들 석이매(昔伊買)의 아들이 바로 석우로의 아버지인 제10대 임금 내해이사금이었다.

 서기 230년 3월 어느 날 내해이사금이 세상을 떴다. 그에게는 장남이며 태자인 우로가 있었지만 사촌동생이며 사위이기도 한 석조분(昔助賁)에게 왕위를 물려 준다는 괴상한(?) 유언을 하고 눈을 감았다.

 다음 왕위는 틀림없는 내 차지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우로는 졸지에 뒤통수를 강타당한 셈이 됐다. 심복들이 입을 모아 울분을 터뜨렸다.

 “세상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는 기라! 이렇게 안면몰수를 하다니 말이 되는교? 그동안 태자님께서 비상한 지략과 용맹으로 많은 전공을 세우셨고, 우리 신라의 국력신장에 큰 역할을 한 기야 온 세상이 잘 아는 사실이 아닌교? 그런데 우찌해서 당연히 차지해야 할 왕위를 빼앗기고 매부의 신하가 돼야만 한단 말인교?”

 심지어는 울분에 못 이겨 쿠데타를 부추기는 부하 장수도 있었다.

 “확 뒤집어 엎어야 된다카이! 세상에 이럴 수는 없는 기라!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 아니고 뭐꼬?”

 심복들의 노기 서린 성토를 묵묵히 듣고 있던 우로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흥분하지 말고 침착들 하거레이. 아무리 화가 나도 참아야제. 우리가 힘이 조분이네보다 약하니 당장은 별수 없지 않겠노? 그러니까 경거망동하지 말고 자기 위치를 잘들 지키는 기 좋을 끼구마!”

 내해이사금이 자신의 맏아들 우로를 제쳐두고 조카 조분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은 ‘묵은 빚’을 갚기 위함이었다. 사정은 이랬다. 벌휴는 즉위한 뒤 장남 골정(骨正)을 태자로 삼았으나 골정이 먼저 죽었다. 그때 왕위 계승의 우선권은 골정의 아들 조분에게 있었지만 너무 어렸으므로 내해가 유력한 귀족들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죽을 때가 되자 본래 왕위 계승자였던 조분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이었다.

 석우로가 전쟁터에 나가 처음으로 공을 세운 것은 내해이사금 14년(209년) 7월. 가야를 구원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남해안에 있던 ‘포상팔국(浦上八國)’, 즉 8개 부족국가가 연합해 가야를 침공하니 가야의 왕자가 신라로 달려와 급히 구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에 내해이사금이 태자 우로와 둘째아들 이음으로 하여금 6부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가야를 구원토록 했다. 우로와 이음은 이 싸움에 출전해 여덟 나라의 우두머리 장수들을 모두 목 베어 죽이고 6000명의 포로까지 잡아서 서라벌로 개선했다.

 우로는 부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오른 매부 조분의 신하가 됐다. 그리고 조분이사금 즉위 이듬해인 231년 7월에 이찬 벼슬에 대장군 직위를 맡아 군사를 이끌고 출전, 오늘의 경북 김천 지방인 감문국을 토벌했고, 다시 조분왕 4년 7월에는 오늘의 영일만에서 침공해 온 수만 명의 왜구를 철저히 소탕했다. 두 달 동안에 걸쳐 벌어진 이 싸움에서 우로는 바람을 이용한 화공을 펼쳐 왜구의 대 함대를 모조리 불태워 적군을 전멸시키는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우로는 그처럼 병법에 밝고 전략전술에 탁월한 명장이었다.

 석우로는 조분왕 15년(244년) 정월에 재상인 서불한에 올라 정치와 군사를 총괄하는 막강한 권력자가 됐다. 하지만 그는 지위와 권력에 자만하지 않고 자신의 본분을 잘 지켜 임금을 충실히 보필했다.

 그 이듬해 10월에 고구려가 북쪽 국경을 침범하므로 우로가 또다시 총사령관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출전해 싸웠지만 이기지 못 하고 오늘의 경기도 포천 지역인 마두책으로 후퇴해 방어에만 전력을 다했다.

 음력 10월이면 가을의 문턱을 넘어서 겨울로 들어서는 계절이다. 특히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져 한겨울이나 다름없이 매우 추웠다. 하지만 우로는 자신이 총사령관이라고 하여 혼자 따뜻이 잠자지 않고 일일이 군영을 돌아다니며 모닥불을 피워 군사들을 위로하니 사졸들 모두가 감격했다.

 조분이사금이 재위 18년 만인 247년 5월에 죽자 우로는 또 한 번 왕위에 오를 기회를 빼앗기게 된다. 이번에는 우로의 큰아버지 골정의 장남인 첨해가 그 뒤를 이었던 것이다.

 당시 첨해가 내해왕의 태자였던 우로와 두 조카를 제치고 왕위에 오른 것은 그의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당시 우로의 무력적 기반이 왕위를 차지할 정도로 강력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만일 조분이사금이 별 유언도 없이 죽었고, 또 그의 두 아들이 너무 어려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면 왕위는 전통에 따라 내해이사금의 태자였으며 조분이사금의 처남 겸 맏사위인 석우로에게 돌아가는 것이 마땅했을 것인데, 왕위 계승권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던 첨해가 왕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그 과정에 무력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일러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우찌 이럴 수가! 아무래도 나는 임금이 될 팔자가 아닌가보제!”

 석우로는 또 한번 통한의 눈물을 머금어야 했다.

 그렇게 즉위한 첨해이사금은 조분이사금 때와는 달리 고구려와 왜에 더이상 강경책을 쓰지 않고 유화정책을 추진했다.

 새 임금이 지금까지 적대관계였던 고구려와 왜에 저자세를 취하고 나오니 수십 년을 두고 일선에서 사졸들과 더불어 피를 흘리며 싸워 온 역전의 명장 석우로는 크게 실망하고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석우로는 ‘참군인’이었다. 정치에는 초연한 자세를 지키며 여전히 자신의 본분을 다해 첨해이사금 즉위 초 사량벌국이 배반해 백제에 붙자 즉시 군사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응징했다.

 그런데 첨해이사금은 재위 2년(248년) 정월에 이찬 장훤(長萱)을 석우로와 같은 벼슬인 서불한에 임명해 정사를 나눠 맡도록 했다. 이는 무슨 뜻인가. 석우로의 막강한 힘을 두려워한 옹졸한 임금 첨해이사금의 견제책이었다.

고대의 해전은 함대를 접근시켜 활을 쏘고 돌과 창을 던지거나 뱃전을 타 넘어가 육박전을 벌이는 것이 보통이었
다. 석우로는 포상팔국의 반란과 왜구의 침범을 화공으로 막아 대승을 거뒀다.

삼천포는 석우로가 첫 출전에서 대승을 거둔 포상팔국 중 하나로 추정된다.

경북 포항 영일만은 석우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수만 왜군을 여지없이 무찌른 역사의 싸움터다.      필자 제공


 당대의 영웅 석우로가 왜군들에게 어처구니없이 살해당한 것은 첨해왕 7년(252년) 4월이었다. ‘삼국사기’는 당시 사정을 이렇게 전한다. 왜국에서 사신이 왔는데 재상인 우로가 접대를 맡아 주연을 베푼 자리에서 취중에 이런 농담을 했다.

 “조만간에 내가 쳐들어 가서 너거 임금을 소금 굽는 종으로 만들고, 너거 왕비는 부엌데기로 만들끼데이!”

 왜왕이 사신으로부터 이 말을 듣고 노발대발해 우도주군(于道朱君)이란 장수를 보내 신라를 쳤다. 왜군의 기세가 워낙 흉맹하므로 첨해이사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을 할 정도였다. 그때 우로가 나서서 아뢰었다.

 “오늘의 환란은 신이 말을 삼가지 못한 데서 일어난 일이니 지가 다 책임을 지겠습니더.”

 그런 다음 왜군 진영으로 가서 이렇게 말했다.

 “전일에 내가 한 말은 농담일 따름이었는데 너거들이 이렇게 군사를 출동할 줄이야 내 어찌 알았겠노?”

 그러자 왜군들이 그 말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를 붙잡아 섶 위에 올려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돌아가 버렸다.

 그때 우로의 아들은 어려서 걷지 못했으므로 다른 사람이 그를 안아 말에 태워 돌아왔는데, 이 아이가 뒷날 즉위한 흘해이사금이다.

 일세의 영웅 석우로는 이렇게 비명에 가고 말았으니 당대 으뜸 가는 영웅의 최후 치고는 참으로 허망했다.

 그러나 이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동안 석우로가 조정에서는 재상으로, 전장에서는 대장군으로 숱한 공을 세웠는데, 이는 그의 사람됨이 결코 경박하지 않고 신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우로가 비록 국왕의 유화적인 대외정책에 불만이 있고, 왜인들이 밉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해도 술김에 아무렇게나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을 정도로 경솔한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이러한 기록 또한 어쩌면 우로의 위세와 명성에 위협을 느낀 첨해왕 일파가 왕권 안보를 위해 음모를 꾸민 결과가 아니었을까. 그 결과 왜군을 이용한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음모가 획책됐고, 이에 따라 신라 조정의 묵인 아래 우로가 왜군에 의해 목숨을 빼앗긴 것인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왕실의 어른이요, 조정 신하의 우두머리 재상인 석우로가 왜군에게 피살당한 치욕을 당하고도 첨해이사금이나 신라 조정이 취한 조치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강력히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라 하겠다.

 또 어쩌면 ‘삼국사기’에 첨해이사금의 왕비나 자식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은 이 일로 인해 첨해이사금이 석우로의 심복을 비롯한 추종 세력에게 깊은 원한을 샀고, 급기야는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閼智)의 후손인 미추이사금의 반정을 불러 일으킨 계기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석우로의 죽음은 그의 아내인 조분이사금의 누이요, 뒷날 흘해이사금의 어머니인 명원부인(命元夫人)의 통쾌한 복수극으로 이어진다. 때는 미추이사금 재위 시였다. 왜국에서 사신이 왔는데 명원부인이 임금에게 나아가 이렇게 아뢰었다.

 “폐하, 왜국에서 사신이 왔다카는데, 전에 지아비의 일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사사로이 접대를 하고 싶사오니 윤허하여 주소서!”

 이에 미추이사금이 좋다고 허락했다. 명원부인은 연회를 베풀어 왜국 사신이 만취하자 뜰에 장작불을 활활 피우게 한 뒤 장사들을 시켜 왜의 사신을 묶어 꿇어앉히게 했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소리 높이 꾸짖었다.

“이 간악한 섬 원숭이 놈아! 뻔뻔스럽고 간교한 잔나비 새끼야! 네놈들이 내 남편을 죽인 뒤 내 하루도 편히 발 뻗고 잠을 이루지 못했구마! 내 오늘 네놈을 죽여 황천에 계신 낭군께 제사를 베풀어 올리고자 하노라! 여봐라, 저놈을 냉큼 불속에 집어넣지 않고 뭣들 하노?”

 명원부인은 그렇게 왜국 사신을 불태워 죽임으로써 남편의 원수를 갚았다. 왜군이 이에 분개해 서라벌을 침공했으나 신라군의 방어가 굳세므로 그냥 물러갔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의 이 대목 끝에 가서 이렇게 자신의 평을 곁들였다.

 - 우로가 당시 재상으로서 정치와 군사를 장악해 싸우면 반드시 이겼고, 혹 이기지 못해도 패하지는 않았으니 그의 지략이 정녕 남보다 특출한 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 한마디의 실수로 자신의 죽음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일으켰으며, 그의 아내가 원수를 갚은 것도 변괴라 할지언정 정당한 일은 아닌 바,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의 공적도 기록될 만하다고 하겠다. -

 김부식의 논평은 그의 옹졸한 역사관과 남존여비 사상에 따른 비뚤어진 여성관에 따른 것이니 그렇다고 치고, 어쨌든 석우로는 신라 초기의 역사를 빛낸 비상한 영걸이었다.

 그는 태자였지만 두 차례나 거듭해 왕위를 빼앗긴 비운을 안은 채 묵묵히 충성스러운 신하가 돼 조정에서는 대신으로서 정무를 주관했고, 또 전쟁에 임해서는 탁월한 용병술로 침략군을 물리침으로써 신라의 국력 신장에 크게 기여하고 국가의 위상을 드높인, 신라 초기의 영웅호걸이었다.

 어느 시대 어떤 나라든 국가에는 이처럼 탁월하고 출중한 인재가 많아야만 부국강병과 국리민복을 도모할 수 있는 법이다.

 다음주에는 우산국(울릉도)을 정벌하는 등 신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킨 김이사부(異斯夫)를 소개한다.
김이사부, 우산국 정복하고 신라 전성기 이끈 영웅

경주 계림. 김이사부를 비롯한 신라(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의 탄강설화가 서린 사적지다.
울릉도의 관문 도동항. 울릉도는 진흥왕 때 김이사부가 정복한 우산국이었다.

  김이사부(異斯夫)는 신라 제22대 임금 지증마립간 때부터 제24대 임금 진흥왕 때까지 출장입상(出將入相)하며 신라 전성기의 부국강병책을 이끈 당대 으뜸가는 영걸이었다.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이사부가 내물이사금의 4세손이라고 했다. 이사부가 사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6년(505년) 2월이다. 왕이 친히 나라 안의 지방조직을 주(州)와 군(郡)으로 나누고, 행정·군사 책임자로 군주(軍主)를 뒀는데, 오늘의 강원도 삼척 지방인 실직주(悉直州)의 군주로 이사부를 임명했다는 기록이다.

 이로써 미뤄볼 때 이사부가 태어난 것은 그 이전 임금인 소지마립간 재위 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사부가 한 지역의 책임자가 됐을 때 그의 나이가 최소한 20세는 넘었을 것이고, 만일 20세에 실직주 군주가 됐다면 그가 태어난 해는 485년, 곧 소지마립간 7년으로 역산되기 때문이다.

 이사부가 태어날 무렵은 거의 해마다 북쪽에서 고구려와 말갈이, 남쪽에서는 왜구가 침범하던 때였다. 그러나 백제·가야와는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지마립간은 자비마립간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479년 2월에 즉위해 재위 21년 9개월 만인 500년 11월에 세상을 떴는데, 그에게는 정비 선혜부인(善兮夫人)과 후비 벽화부인(碧花夫人) 두 왕비가 있었다. 선혜부인은 뒷날 법흥왕 김원종(原宗)의 왕비가 되는 보도(保道)와 오도(吾道) 두 딸을 낳았고, 벽화부인은 아들 하나를 낳았다.

 정비 선혜부인은 이벌찬 내숙(乃宿)의 딸로 소지마립간 사이에서 보도를 낳고, 임금 몰래 묘심(妙心)이라는 중과 사통해 오도를 낳았다. 오도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고 김대문(大問)의 “화랑세기”에 자세히 나온다. 또 선혜나 묘심, 오도의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삼국유사”에 선혜부인과 묘심의 간통사건을 전해주는 기록이 실려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

 제21대 비처왕(소지왕) 즉위 10년(488년)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 이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처럼 말했다.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 살펴보이소!”

왕이 경호무사에게 명해 뒤쫓게 했다. 무사가 남쪽으로 피촌(避村)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박 터지게 싸우는 것을 한참 구경하다가 문득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잃어버리고 길가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때 한 노인이 연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렸는데 겉봉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것을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야!’ 무사가 돌아와서 왕에게 바치니 왕이 말했다.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떼어보지 않고 한 사람만 죽는 것이 낫지 않겠노?” 그러자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란 서민이요, 한 사람이란 임금 아니겠는교?”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겉봉을 떼어보니 속에 ‘금갑(琴匣)을 쏘아라!’라고 쓰여 있었다. 왕은 곧 궁에 돌아가서 거문고갑을 쏘니 거기에는 젊은 중놈이 궁주(왕비)와 몰래 간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형을 당했다.

 그 편지가 나온 연못이 오늘의 경주 서출지(書出池)인데, 그러나 여기에서 두 사람을 처형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화랑세기” 제1세 풍월주 위화랑(魏花郞) 조에 따르면 ‘보도의 아우 오도는 선혜황후와 묘심이 사통해 낳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사부는 귀한 혈통을 타고난 데다 뛰어난 머리와 담력을 지녀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내 신라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인재로 성장했다.

 지증마립간 6년(505년) 2월에 실직주 군주가 됐던 이사부가 우산국(于山國), 즉 울릉도 정벌의 쾌거를 이룩해 신라의 국위를 떨친 것은 그로부터 7년 뒤인 지증마립간 13년(512년) 6월이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굴복시킨 것으로 나오니, 아마도 그는 실직주 군주에 이어 오늘의 강릉 지방인 하슬라주까지 신라의 영역을 확보해 그 군주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지증마립간 13년 조는 이렇게 전한다.

 - 13년 여름 6월에 우산국이 귀순 복종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했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지방은 100리이며, 지세가 험준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자 우산 사람들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위세로는 굴복시킬 수 없으니 꾀로써 항복시킬 수 있다 하여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전선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러 거짓으로,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놓아서 너희들을 밟아 죽이겠다!”고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무서워서 곧 항복했다.-

 한편 “삼국유사” ‘기이편’ 지철로왕(智哲老王 : 지증왕)조도 이 사실을 이렇게 썼다.

 - 또 아슬라주(명주) 동해안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곳에 우릉도(于陵島, 지금은 羽陵島라고 쓴다)가 있다. 주위가 2만7130보나 된다. 섬의 오랑캐들은 그 깊은 바닷물을 믿고 교만하여 조공하지 않았다. 왕은 이찬 박이종(朴伊宗)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했다. 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 위에 싣고 가서 그들을 위협했다.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자를 놓아버리겠다!” 섬 오랑캐들은 두려워서 항복했다. 왕은 이종을 포상해 아슬라주의 장관을 삼았다. -

 다음은 “삼국사기” ‘열전’ 이사부 조의 기록이다.

 - 이사부(혹은 苔宗이라고도 한다)는 성은 김씨이며, 내물왕의 4세손이다. 지도로왕(智度路王 : 지증왕) 때에 바닷가 지방의 관원이 되어 거도(居道)의 권모를 물려받아 말놀음으로써 가야를 속여 이를 쳐서 빼앗았다. 13년 임진(512년)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합치려 했으나 그 나라 사람들이 어리석고… -

 이사부의 이름을 이종 또는 태종이라고도 쓴 까닭은 신라의 향찰식 이름인 ‘잇마루’를 한문으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이는 ‘거칠마루’- 거칠부를 황종(荒宗)이라고 표기한 것과 같다.

 이렇게 이사부는 이찬 벼슬로 실직주와 하슬라주 군주를 역임하며 우산국을 정벌하는 등 공을 세우고, 진흥왕이 즉위한 이듬해인 541년 3월에 오늘의 국방부장관 격인 병부령에 올라 신라의 군권을 장악한다.

 이사부가 신라 중앙정계의 거물이 된 것은 진흥왕 즉위 직후였는데, 여기에는 당시 어린 임금을 대신해 섭정을 하던 진흥왕의 생모요 자신의 정부인 지소태후(只召太后)의 힘이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진흥왕이 불과 7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지소태후가 섭정이 되어 신라 왕실은 물론 정사까지 좌우했다. 따라서 진흥왕 재위 초기 10년 안팎은 지소태후의 세상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녀의 정부(情夫) 이사부는 병부령으로 군권을 장악해 이를 뒷받침한 것으로 보인다.

 이사부는 비록 진골이었지만 신하의 신분으로 태후를 섬겨 1남 3녀를 낳았으므로 그녀가 낳은 자식들에게도 아버지가 아닌 신하로 대해야만 했다.

강원도 삼척시 정라진항 방파제. 삼척은 이사부가 지방장관을 맡았던 신라의 실직주였다.

강릉 경포대 일출. 강원도 강릉 지역은 김이사부가 다스렸던 신라의 하슬라주였다.

  신라는 지증왕 3년(502년)에야 순장제도를 금했다. 그 이전까지는 신라도 가야처럼 임금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을 함께 생매장한 미개한 야만국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그때까지 사라(斯羅)니 사로(斯盧)니 서라벌(徐羅伐)이니 하고 여러 가지로 부르던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고, 임금의 칭호도 거서간·차차웅·마립간 등으로 부르던 것을 이웃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왕으로 바꾸었다.
 지증왕 6년에는 나라 안 각 지방의 행정구역을 주·군·현으로 나누었고, 지증왕 13년에는 우산국을 복속시켰으며, 그 이태 뒤인 지증왕 15년에 임금이 죽자 처음으로 시호를 바쳤다.

 514년 7월 지증왕이 재위 13년 8개월 만에 죽자 태자 김원종이 즉위하니 그가 법흥왕이다. 지증왕의 왕비는 연제부인(延帝夫人) 박씨로 원종과 입종 두 왕자를 낳았다. 그런데 ‘삼국유사’ ‘기이편’에 지증왕이 연제부인을 배필로 맞게 된 재미있는 사연이 나오는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22대 지철로왕(智哲老王)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또는 지도로요, 시호는 지증이니 시호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또 우리말로 왕을 불러 마립간이라고 하기는 이 임금 때부터 시작되었으니(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눌지왕부터 마립간이라고 불렀다), 왕은 영원(永元) 2년 경진(500년)에 즉위했다.
 왕은 생식기의 길이가 1척 5촌이나 되매 알맞은 배필을 얻을 수 없어 사람을 세 방면으로 보내어 배필을 구했다. 사신이 모량부 동로수 나무 아래에서 보니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덩어리 한 개를 물었는데 두 끝을 서로 다투어가며 깨물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웬 계집아이 하나가 나와서 말하기를, “이 마을 재상 댁 따님이 여기에 와서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들어가 숨어서 눈 똥이외다”라고 했다.
 그의 집을 찾아가 보니 여자가 키가 7척 5촌이나 되었다. 이 사실을 자세히 왕에게 아뢰었더니 왕이 수레를 보내어 궁으로 맞아들여 왕후로 봉하니 신하들이 모두 치하했다. -

 그러니까 지증왕의 왕비 연제부인 박씨는 똥이 굵고 키가 큰 덕분에(?) 음경이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임금의 배필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지증왕에 이어 즉위한 법흥왕은 선왕에 이어 국가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재위 4년(517년) 4월에는 병부를 설치해 국방체제를 확립하고, 7년(520년) 정월에는 법령을 반포하고 관복을 제정했으며, 15년(528년)에는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숨어서 몰래 포교하던 불교는 왕실의 비호 아래 급격히 교세를 신장할 수 있었고, 왕실은 불교를 이용해 왕권 안정을 꾀할 수 있었다.

 또 재위 18년(534년)에는 상대등(上大等)이라는 직위를 신설, 이찬 철부(哲夫)를 초대 상대등에 임명했으니, 상대등은 곧 고구려의 국상(國相)과 마찬가지로 문무백관의 우두머리인 수상을 뜻했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한 국력신장에 힘입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후발주자라는 불리함을 딛고 부국강병을 이룩했다는 자신감으로 재위 23년(539년)에는 연호를 제정해 건원(建元) 원년으로 했다. 이는 신라가 더 이상 약소국이 아니라 당당한 황제국이라는 선포였다. 법흥왕이 연호를 세우고 황제를 자칭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가야국의 항복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는 532년에 구형왕이 왕비, 노종(奴宗)·무덕(武德)·무력(武力) 세 왕자와 더불어 나라의 보물을 바치고 신라에 항복했다. 법흥왕은 구형왕에게 금관국을 식읍으로 주고, 셋째아들 김무력을 조정에 입조시키니, 무력의 아들이 서현(舒玄)이요, 서현의 아들이 곧 유신(庾信)이다.

 540년 7월에 법흥왕이 재위 26년 만에 죽고 진흥왕이 제24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불과 7세의 진흥왕이 즉위하자 지소태후는 섭정을 맡아 왕실 내부를, 중요한 국사는 중신인 이사부와 거칠부에게 맡겼다. 진흥왕 즉위 이듬해에 이사부로 하여금 병부령을 삼아 군권을 장악하게 한 데에는 그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지소태후는 진흥왕 5년(544년)에 신라 최초의 대사찰인 대왕흥륜사를 완공하고, 그 이듬해에는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거칠부 등에게 명해 ‘국사’를 편찬하게 했다. 당시 이찬이요 병부령인 이사부는 이렇게 말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국사(國史)란 임금과 신하들의 착하고 악함을 기록하여 시비선악의 평정을 만세에 보이는 것인데 국사를 편찬한 것이 없다면 후세에서 무엇을 보겠습니까?”
 그러자 진흥왕이 이를 옳게 여겨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해 글하는 선비들을 널리 모아 그들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했다.

 진흥왕 11년(550년)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함락시키고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했다. 진흥왕은 두 나라 군사가 서로 싸우느라고 피로한 틈을 타서 이사부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 두 성을 빼앗고 군사 1000명을 주둔시켰다. 이 일을 계기로 신라와 백제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됐다.

 연호를 개국(開國)이라고 바꾼 그 이듬해에는 거칠부가 왕명에 따라 대각간 구진(仇珍), 이벌찬 비대(比臺), 잡찬 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일곱 장수와 더불어 백제와 함께 합동작전을 벌여 고구려를 쳤다. 백제군이 먼저 평양성을 쳐부수므로 거칠부 등이 이긴 기세를 타서 죽령 이외 고현 이내의 10군을 빼앗았다.
 이사부와 더불어 부국강병책을 앞장서 추진함으로써 진흥왕대의 신라중흥, 신라 전성기를 이룬 거칠부는 이찬 벼슬로 올랐다가 진지왕 원년(576년)에 상대등이 되어 신하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늙어서 은퇴한 뒤 집에서 죽었다고 했는데, 그때 향년이 78세라고 했다.

 진흥왕 14년(553년)에는 황룡사를 창건하고, 그 이듬해에는 명활성을 수축했는데, 전날의 복수를 위해 백제의 성왕(聖王)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치다가 자신도 전사하고 군사들도 전멸당한 것도 그해였다. 진흥왕은 승세를 타고 한강 하류, 오늘의 서울 일대까지 영토를 넓혀 순행했으니 북한산순수비가 당시에 세운 것이다.
 또 진흥왕 23년(562년) 7월에도 백제가 변방을 침범하므로 군사를 보내 10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9월에는 가야의 남은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므로 이사부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를 평정했다. 나이 겨우 15~ 16세였던 화랑 사다함이 이사부의 부장으로 출전해 전공을 세운 것이 그때였다.

 이처럼 진흥왕 재위 시에 신라의 부국강병책을 앞장서 실행해 신라사상 최대의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신라 전성기를 이룩한 영걸 이사부는 진흥왕 재위 시 어느 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의 조카뻘이며 관직에서도 이사부가 이찬 때에 대아찬으로 하위에 있던 후배 거칠부가 진흥왕 사후 진지왕 즉위 직후 상대등에 임명됐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진평왕 원년(579년)에는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임명했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이사부가 그 전에 죽었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온달, `바보' 소리 들으며 눈먼 노모 봉양한 효자
온달 장군이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한 아단성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 온달산성이다.
온달산성 아래 관광단지에 세워진 온달 장군 조형물.

 온달(溫達)은 신라에 빼앗긴 옛 땅을 되찾기 위해 남정 길에 올라 아단성(阿旦城)에서 싸우다가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한을 남긴 채 전사한 고구려의 용장이다. 오랜 세월을 이어온 우리 역사에서 빛나는 이름을 남긴 영웅·호걸·기인·재사는 많지만 ‘바보’ 소리를 들으면서도 역사의 무대를 유유히 가로질러 간 인물은 온달밖에 없다.

남루를 걸치고 저자를 헤매며 구걸해 눈먼 홀어머니를 봉양했다는 효자 온달, 바보라고 놀림을 받던 온달을 지아비로 섬겨 무술과 담력이 뛰어난 맹장으로 거듭나게 한 평강공주(平崗公主), 신분의 장벽을 뛰어넘은 이들의 사랑은 피로 얼룩진 삼국 쟁패사의 한 장을 풍류의 멋으로 장식하고 지나간 한 줄기 향기로운 바람과도 같았다.

  고구려 제25대 임금 평강왕은 평원왕이라고도 했는데, 그의 성명은 고양성(高陽成). 양원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양원왕 13년(557년)에 태자로 책봉됐고, 2년 뒤인 559년 3월에 부왕이 돌아가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평강왕이 담력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고 전한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평강왕의 가족으로는 두 명의 왕후와 세 명의 왕자, 한 명의 공주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재위 7년(565년) 정월에 왕자 원(元)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고 했고, 제27대 영류왕 조를 보면 ‘왕의 이름은 건무(建武) 또는 성(成)이라고도 하며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다’라고 했으니 최소한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제28대 보장왕 조에는 ‘왕의 이름은 장(藏) 또는 보장(寶藏)이라고도 하며, 나라를 잃었으므로 시호는 없다. 건무왕(영류왕)의 아우인 대양왕(大陽王)의 아들이다’라고 돼 있다. 따라서 평강왕에게는 뒷날 그의 뒤를 이어 영양왕으로 즉위하는 맏아들 고원, 영양왕의 뒤를 이어 영류왕이 되는 고건무, 그리고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쿠데타에 의해 왕좌에 올랐다가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이 된 고보장의 아버지 대양왕 등 세 아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평강대왕에게는 이 세 아들 말고도 외동딸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 고대사를 빛낸 여걸의 한 사람인 평강공주다. ‘고구려본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우리가 그녀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은 ‘열전’ 온달 편에 실려 전해오기 때문이다.

평강공주의 이름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성은 고구려의 왕성(王姓)인 고씨(高氏)라는 사실이 분명하지만, 평강공주란 다만 ‘평강왕의 딸’이란 뜻이지 이름은 아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열전’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온달은 뭇사람에게 바보라고 놀림받던 미천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 울보 공주로 유명했던 평강공주와 거리를 헤매며 구걸하던 바보 온달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강공주가 무슨 까닭에 잘 울었으며, 온달은 어찌하여 구걸하는 바보에서 하루아침에 공주의 신랑이 되는 행운을 잡을 수 있었는지 그 사연을 깊이 생각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당시 동북아 최강국으로서 중국의 숱한 하루살이 제국을 우습게 여기던 대고구려의 공주가 무엇이 부족하고 아쉬워 다 해진 누더기를 걸치고 저자를 헤매면서 동냥하던 온달에게, 그것도 제 발로 찾아가 아내가 됐을까. 과연 이러한 비상한 사건(?)이 엄격한 신분제도의 절대왕권 시대에 실제로 일어나기는 했던 것일까. ‘열전’ 온달 편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 온달은 평강왕 때의 사람이다. 그의 얼굴은 멍청하게 생겨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속마음은 순박했다. 집이 몹시 가난해서 항상 밥을 얻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거리를 오갔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고 했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니 왕이 놀리면서 말했다. “네가 늘 울기만 하여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크더라도 반드시 사대부의 아내는 될 수 없으므로 꼭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야겠다…. -

 공주는 어려서부터 잘 우는 버릇이 있었다. 아무리 달래고 꾀어도 한번 터진 공주의 울음보는 막힐 줄을 몰랐다. 그러자 어느 날 부왕은 이런 말로 공주의 울음을 달랬다.

 “오냐 오냐. 너 자꾸만 그렇게 울어보라우야. 그렇게 울면 널 어떤 사내가 각시로 데려가갔네? 그렇게 자꾸만 울기만 한다면 다음에 커서 좋은 신랑에게 시집가기는 다 틀린 줄 알라우야. 자꾸 그렇게 울기만 한다면 저기 저자를 헤매고 다니며 비럭질하는 바보 온달이란 녀석에게 시집보내고 말기야!”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공주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더니 새까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왕을 쳐다보며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아바지. 바보 온달이가 누구야요?”

 아마도 온달이란 이름을 처음 듣기에 신기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온달의 이름을 듣자마자 신통하게도 공주가 울음이 뚝 그쳤던 것이다.

 그때 평양성 하부(下部)에는 출신 성분을 알 수 없는 매우 가난한 모자가 살고 있었으니 늙고 눈먼 홀어미는 성도 이름도 없었고, 울퉁불퉁 아무렇게나 생긴 그의 아들은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해서 사람들이 온달이라고 불렀다. 우리 옛말에 100을 ‘온’이라 하고 산을 ‘달’이라 했으니 온달이란 수많은 산처럼 장대한 몸집의 사내란 뜻이었을 것이다.

추측건대 이를 한문자로 옮겨 쓰면서 온달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본편의 주인공인 온달 장군을 봉성 온씨(鳳城溫氏)들이 문중의 도시조로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참고로 덧붙인다.

 온달 모자가 사는 형편은 매우 가난했다. ‘삼국사기’는 온달이 몹시 가난해 날마다 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저자를 헤매며 밥을 얻어 눈먼 노모를 봉양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속마음은 순박했지만 얼굴이 멍청하게 생겨 사람들로부터 바보라고 놀림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긴다. 온달이 당당한 체격을 지닌 젊은이였다면 하다못해 산에서 땔감나무를 해다가 팔거나, 건축공사장에서 인부로 일을 하거나, 아니면 군대에 들어가 군인 노릇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지가 멀쩡하고 힘 좋은 젊은이가 굳이 바보 소리까지 들으며 구걸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은 온달이 걸식을 해다가 눈먼 노모를 봉양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온달의 이름은 평양 성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고, 마침내 대궐까지 들어가 대왕에게도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됐으며, 그래서 공주가 울 때마다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소리로 울음을 그치게 했던 것이다.

 거짓말도 자꾸 하면 참말처럼 들리기 마련인가. 날이면 날마다 울면 울 때마다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소리는 마침내 평강공주의 귀에 못이 박일 정도가 됐고, 그렇게 해서 온달이라는 이름이 공주의 머릿속에 단단히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북주<北周> 침략군 무찌른 배산<拜山>전투의 주역
온달산성 북벽. 차곡차곡 돌을 쌓아 올린 전형적인 고구려식 산성이다.

온달산성 아래 온달동굴에도 온달장군의 전설이 서려  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공주의 나이 꽃다운 열여섯 살이 됐다. 공주가 어여쁜 처녀로 자라서 시집갈 나이가 되자 대왕은 공주의 혼처를 물색했다. 사건은 공주의 혼사 이야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부왕이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출가시키려 하자 공주가 울며불며 이렇게 따지고 들었기 때문이다.

 “폐하! 소녀를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시갔다니 그것이 무슨 말쌈이십네까? 소녀는 골백번 고쳐죽어도 다른 데로는 시집가지 않갔습네다!”

 “아니, 공주야! 너 지금 무스거 소리를 하고 있는 기야? 다른 곳으로 시집가지 않갔다니, 기렇다면 네가 이미 점찍어 둔 사내라도 있다는 말이야 뭬야? 날래 고해 바치라우야!”

 “폐하께서 소녀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르지 아니하셨습네까? 네가 자꾸 울기를 좋아하니 다음에 크면 온달의 각시로 주마고 아니하셨습네까? 그러고도 이제 와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시갔다면 그 말쌈이 거짓 말쌈이 아니고 무엇이갔시오? 소녀는 죽어도 온달을 낭군으로 삼고야 말갔습네다!”

 그제야 대왕은 공주의 말이 실없는 농담도 아니고 단순한 생떼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불같이 노해 대궐이 떠나가도록 소리쳤다.

 “예끼, 천하에 고약하고 발칙하고 무엄한 간나이 같으니! 네 어찌 이토록 방자하게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기야! 너는 대고구려의 황녀가 아니냐? 그럼에도 미천한 온달의 각시가 되갔다 기런 말이야?”

 “대고구려 천자이신 폐하께서 하신 말쌈이오니 더욱 중하지 않갔습네까? 저자의 이름 없는 필부도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아바지 대왕께옵서 어찌 거짓말쌈을 하시갔시오? 소녀는 대왕폐하의 딸인 까닭에 폐하의 말쌈에는 거짓이 없음을 만천하에 널리 알리고자 더욱 온달에게 시집가고자 하옵네다!”

 말꼬리가 잡힌 데다 말문까지 막혀버린 대왕이 분노에 못 이겨 냅다 고함을 질렀다.

 “예라, 고얀 년! 나쁜 년! 넌 이제부터 내 딸이 아니야! 너같이 못된 년은 애당초 낳지도 않은 것으로 칠 터이니 썩 물러가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도 말라우야! 아, 썩 나가지 못 하갔네?”

 그렇게 하여 공주는 궁궐에서 쫓겨나게 됐다. 그때 공주는 금팔찌 수십 개를 지니고 대궐을 나왔다고 했으니 이는 부왕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녀는 무엇이 부족해 고귀한 공주의 신분도 버리고 부왕의 내침을 자초해 화려한 대궐을 등졌을까.

어쩌면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새장 속에 갇힌 새와 다름없는 궁중 생활이 싫어 넓디넓은 바깥 세상의 자유를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미 몰락한 집안의 하급무사인 온달과 몰래 만나 사랑을 키워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에는 공주가 홀로 궁에서 나와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길을 물어 온달의 집으로 찾아갔다고 했다. 그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평강공주는 마침내 온달의 색시가 되어 함께 살게 됐다. 그렇게 해서 천대받던 신분의 온달은 하루아침에 팔자를 고쳐 비록 몰래 한 혼인이지만 고구려 대왕의 사위가 됐던 것이다.

 공주는 출궁할 때에 갖고 나온 금팔찌며 보석을 팔아 집과 땅과 노비와 소 따위를 사들여 집안을 새롭게 일으키고 가꾸었다. 집을 사고 땅을 사서 노비들로 하여금 밭을 갈게 한 공주는 온달도 더 이상 놀고먹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바보 소리를 들을 만큼 우직한 온달을 고구려의 그 어떤 사내보다도 더욱 날쌔고 용감한 장수가 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주는 터를 고르고 마구간을 세운 다음 온달에게 돈을 주고 저자에 나가서 말을 사 오라고 시켰다.

 온달이 시키는 대로 마장(馬場)에 가서 병들어 보잘것없어 보이나 나라에서 못 쓰겠다고 내놓은 말을 사왔는데, 공주가 먹이고 정성껏 돌보니 금세 늠름한 준마의 모습을 되찾았다. 온달은 그로부터 자고 일어나면 말달리고 활쏘고 창검 휘두르며 열심히 무술을 익혔다.

 그렇게 갈고 닦은 실력이 마침내 빛을 보게 됐으니 그것은 고구려에서 해마다 음력 3월 3일이면 평양성 교외 낙랑의 언덕에서 대왕이 친히 주재하는 사냥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온달이 그 대회에서 공주가 가꿔 준 그 말을 타고 그동안 연마한 무술 솜씨를 한껏 발휘하니 말달리기도 으뜸이요, 활시위를 당겨 쏘면 쏘는 대로 모조리 잡는지라 보는 사람마다 놀라 혀를 내둘렀다. 그의 눈부신 솜씨는 마침내 대왕의 눈에도 띄어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됐다.

 “어허, 근래에 보기 드문 용사로다! 저기 저 황소처럼 억세고 범처럼 날쌘 무사가 어느 부에서 온 누군고? 이리 데리고 와 보라우! 짐이 친히 만나보고 상을 내려야 되갔어.”

 그렇게 해서 온달은 처음으로 장인인 평강대왕과 대면하게 됐다.

 “그래, 이리 가까이 와 보라우. 네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에 사는가 날래 말해보라우야?”

 “네이! 천한 놈의 이름은 온달이라 하옵고 하부에 사옵네다!”

 “아니 뭐가 어드래! 네가 바로 그 바보 온달이라 그기야? 세상에 이럴 수가!”

 대왕은 놀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옛날부터 입버릇처럼 ‘바보 온달 바보 온달’ 하다가 사랑하는 외동딸을 빼앗긴 바로 그 녀석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아비의 뜻을 어기고 제멋대로 대궐을 뛰쳐나간 공주에 대한 분이 덜 삭고 화가 덜 풀렸음인지 대왕은 그 자리에서는 온달을 자신의 사위로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회는 또다시 찾아왔으니, 그것은 북주(北周) 무제(武帝)의 군대가 요동으로 침범해 전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쳐들어온 나라가 후주(後周)라고 했는데 이것은 틀린 기록이다. 후주는 고구려가 망한 다음인 서기 951년부터 960년까지 존재한 중국 오대(五代) 최후의 왕조였고, 실은 선비족의 한 갈래인 우문씨(宇文氏)가 세운 북주로서 556년부터 581년까지 겨우 25년간 지탱하다가 수 문제(隋文帝) 양견(楊堅)에게 망한 하루살이 제국인 것이다. 중국 북방을 석권해 한때 강성을 뽐내던 이 북주의 무제가 고구려를 노략질하러 쳐들어오자 평강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배산(拜山)의 들판에 나아가 적군을 여지없이 물리쳤다.

 이때 범처럼 사납고 날쌘 용사가 있어서 스스로 선봉이 돼 적진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용감하게 오랑캐들을 무찌르니 싸움이 끝난 뒤에 논공행상을 하는데 그 용사의 전공이 단연 으뜸이었다.

 대왕이 불러보니 이번에도 또 온달이 아닌가. 대왕이 그제야 무릎을 철썩 치며 이렇게 소리쳤다.

 “바보, 아니 온달아! 너 오늘 정말로 화끈하게 잘 싸웠지 뭐갔네! 과연 너는 내 사위다 그기야! 내 이 자리에서 너를 고구려의 대형(大兄)으로 삼갔노라!”
고구려의 명장 단양 아단성에 잠들다

북한이 주장하는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 합장묘.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동명왕묘 인근에 있는 진파리 4호 무덤이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 온달산성 아래 온달동굴 내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나 중국의 사서들에는 온달의 이름이 단 한 군데도 나오지 않지만 ‘동사강목’에는 온달을 대형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평강왕 19년(578년)의 일로 기록돼 있다. 어쩌면 온달은 순박한 성격의 하급무사였다가 인재등용의 무대인 낙랑언덕의 사냥대회와 북주의 침략을 격퇴하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당시 고구려 군부의 신진세력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평강공주와 눈이 맞아 몰래 한 연애 끝에 대왕에게 발각돼 공주가 궁에서 쫓겨나 동거를 하다가, 마침내 임금의 사위로 인정받고 대형이란 벼슬까지 받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온달 내외는 그때부터 도성의 변두리인 하부에서 중심부인 상부로 옮겨가 살기 시작했다. 또 평강왕 28년(587년)에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천도했을 때에도 온달의 가족은 상부의 귀족들과 함께 이주했을 것이다. 장안성은 양원왕 8년(552년)에 쌓은 새 도성으로서 고구려의 천도는 장수왕 15년(427년) 환도성에서 평양성으로 남천한 지 159년 만의 일이었다.
 새 서울로 옮긴 지 3년뒤인 서기 590년 10월에 온달의 장인이요 공주의 친정아버지인 평강왕이 재위 32년 만에 죽고 태자가 즉위하니 곧 영양왕이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위·진 남북조 시대가 끝나고 수나라가 일어나 주변국들을 위협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로서도 새로운 강적의 등장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서북쪽 요하 방면의 방어도 문제지만 근래 들어 팽창한 국력을 주체하지 못해 걸핏하면 남쪽 국경을 침범하는 신라 역시 골칫거리였다. 등과 배 양면의 적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을까, 그것이 당면 최대의 안보문제였다. 이에 따라 새로 즉위한 대왕은 긴급 어전회의, 요즈음으로 치면 비상 국가안보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온달이 이렇게 말했다.
 “신 온달이 아뢰고자 합네다. 이제 수나라 오랑캐는 통일전쟁을 마무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대군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우리에게는 방비할 시간의 여유가 있다고 봅네다. 그동안 후방의 적을 제압해 후환을 없애는 것이 상책인가 합네다.”
 “신라를 먼저 치자는 말이디요? 하지만 군사를 양분하면 힘도 그만큼 쪼개질 터인데 그래도 괜찮갔소?”
 “폐하,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은 본래 우리 고구려의 영토인바 신라 간적들에게 빼앗긴 이래 그 땅의 백성이 늘 통분하며 부모의 나라인 우리 고구려를 잊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두고만 보갔습네까? 대왕께서 신을 불초하다 마시고 군사를 맡겨 주신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옛 땅을 회복하여 폐하의 심려를 덜어드리고자 하옵네다!”
 그 자리에는 영양왕 8년(598년) 수 문제의 30만 대군과 영양왕 12년(612년) 수 양제의 백만 대군을 여지없이 무찌른 주역인 영양왕의 이복동생 고건무(高建武)를 비롯해 강이식(姜以式)·을지문덕(乙支文德) 같은 명장과 대신들도 배석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온달 장군의 말이 옳다고 동의했으므로 그날 국가안보회의는 온달을 총수로 하는 남정군을 파견하기로 결론이 났다.

 대궐에서 집으로 돌아온 온달은 아내 평강공주와 자식들에게 자신의 출전을 알리고 작별을 했다. 그때 눈먼 홀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떴지만 사랑하는 평강공주와 귀여운 자식들과는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 정말 몰랐다. 이튿날 군사들을 점고하고 출정식을 거행하는 자리에서 온달은 이렇게 맹세했다.
 “군사들아, 잘들 들으라우! 우리에겐 승리 아니면 죽음뿐이야! 신라 놈들이 아리수(한강) 이북 우리 땅을 빼앗았으니 이번 싸움에서 모조리 되찾지 못하면 내 결코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갔어야!”
 그리고 군사들을 이끌고 도성을 출발해 질풍노도처럼 남쪽으로 진격했다. 그때 온달이 되찾고자 출전한 계립현 이서, 죽령 이북, 고현 이내는 오늘날 강원도 지역 대부분이다.
 진격을 거듭한 온달의 고구려군은 신라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악전고투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운명의 땅 아단성(阿旦城)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 편은 전한다. ‘드디어 떠나 신라군과 아단성 밑에서 싸우다가 유시에 맞아 길에 쓰러져 죽었다.’
 그렇다면 온달이 실지회복의 한을 품고 전사했다는 아단성은 어디일까.

지금까지 아단성은 서울 성동구 광장동과 구의동에 걸쳐 있는 백제의 옛 성터 아차산성(阿且山城)으로 비정해 온 것이 학계의 정설이 되다시피 했다. 아차산성을 온달의 전사지 아단성으로 추정한 이유는 첫째, 아단의 단(旦)과 아차의 차(且) 두 글자의 모양이 비슷한 데서 비롯된 착각과 견강부회의 결과요, 둘째는 위치가 한강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즉, 온달의 말 가운데 ‘신라는 우리 한수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 한 구절을 들어 온달의 마지막 싸움터를 오늘의 서울 한강 북쪽 아차산성으로 추정한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를 비롯한 어느 사서나 지리지를 찾아봐도 아차산성이 곧 아단성이란 대목은 없다.
 또한 ‘한수 이북’을 두고 말하더라도 한강 하류인 오늘의 서울 강북만이 아니라 남한강 상류 이북은 모두 해당하는 말이니, 온달이 가리킨 한북의 땅은 곧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군인 오늘날 강원도 대부분과 충북 일부를 가리킨 것이다. 이 가운데 충북 단양군 영춘면은 본래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이니, ‘삼국사기’ 지리편에 따르면 아단 두 글자가 붙은 지명은 오로지 이곳밖에 없다.

 옛 지명이 을아단인 영춘면에 가면 성산이 있고, 그 정상부에 온달이 쌓았고, 온달이 이곳을 되찾기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전설에 따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온달산성’이라고 부르는 고구려 산성이 있다. 사적 264호로 지정된 온달성 아래에는 천연기념물 261호인 온달동굴이 있고, 근처에는 온달의 묘라고 전해오는 고구려식 대형 적석총도 있으며, 온달 부부의 전설이 서린 지명이 많다.
 졸지에 총수를 잃은 고구려군이 온달의 유해를 군영으로 옮겼다가 도성으로 운구하려고 했으나 영구가 땅에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열전은 이에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이제 돌아갑시다!” 하자 그제야 관이 움직였다고 한다. 관이 움직이지 않았을 리는 없고, 온달의 전사를 원통하게 여긴 군사들의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평양 도심에서 동남쪽으로 22㎞ 지점인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동명왕릉 인근에 진파리 4호 무덤이 있는데, 북한에서는 이것이 바로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합장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천대받던 하급 무사를 낭군으로 삼아 고구려 제일의 용장이 되도록 정성껏 내조한 적극적 성격의 고구려 여걸 평강공주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고구려 대왕의 사위가 되고 실지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온달 장군의 지순한 사랑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여전히 크나큰 감동을 안겨준다.

을지문덕, 수나라 대군 전멸시킨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기록화
을지문덕 흉상.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다.

일찍이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申采浩)가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에서 이렇게 말했다. ‘을지문덕은 우리나라 4000년 역사에 유일무이한 위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전 세계 각국에도 그 짝이 드물도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30만 대군을 전멸시킨 살수대첩(薩水大捷)의 주역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아도 그의 가계가 어떻게 되는지, 언제 태어나 언제까지 어떤 벼슬을 지냈으며, 언제 어디에서 죽었고,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에 관한 기록이 매우 간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38년 5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조만식·최윤옥·김병연·김성업 씨 등 평양의 지식인들이 평남 강서군 저차면 현암산에 있는 을지문덕 장군 묘의 보수 모임을 조직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강서군은 현재 남포시에 편입돼 있고, 을지문덕 장군의 유적에 관해 현재로서는 더 이상의 취재가 불가능해 매우 아쉽다.

‘삼국사기’ ‘열전’ 을지문덕 편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 을지문덕의 집안 내력은 자세하지 않다. 그의 성격이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지혜와 재주가 있었고 겸해 글을 지을 줄 알았다. -

 그리고 끝 부분에 가서는 저자의 평으로 이런 말을 달아놓았다.

 - 수양제(隋煬帝)의 요동전쟁은 군사를 출동시킨 규모에 있어서 전고에 없이 굉장했건만 고구려는 한 모퉁이의 작은 나라로서 그를 맞아 국토를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거의 다 없애버린 것은 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경전에 이르기를 ‘인재가 없으면 어찌 나라 노릇을 할 수 있으랴(‘춘추좌전’)’ 했으니 과연 그렇다. -

 살수대첩은 영양왕 23년(612)에 일어났다. 그 당시 을지문덕이 50대라면 그는 평원왕 2년(560)께에 태어났고, 만일 60대였다면 양원왕 11년(550) 무렵에 태어난 것으로 역산된다.

 을지문덕이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는 평원왕이나 양원왕 재위 시에 평양 근처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평양 인근 평남 증산군·평원군 지방에 을지문덕에 관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또 이맥(李陌)이 지은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도 이런 대목이 실려 있다.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석다산(石多山, 평안도 증산현 서북쪽에 위치) 사람으로 일찍이 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꿈에 삼신(三神)을 뵙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해마다 3월 16일이 되면 말을 타고 마리산(摩利山)으로 달려가서 제물을 올리고 경배하고 돌아왔으며, 10월 초사흘이 되면 백두산에 올라 삼신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삼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신시(神市)의 옛 풍속이었다.

 홍무(洪武) 23년에 수나라 군사 130만여 명이 바다와 육지로 쳐들어왔다. 이때 을지문덕은 기묘한 계책을 내어 병사를 출동해 그들을 멸하고 추격해 살수에 이르러 드디어 크게 쳐부쉈다. 수나라 수군과 육군이 함께 무너져 요동성으로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2700명 정도였다.

 양광(楊廣 : 수 양제)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을지문덕이 허락하지 않고 영양무원호태열제(?陽武元好太烈帝) 또한 추격을 엄명했다.

을지문덕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승승장구하는데, 한 갈래 군사는 현도 방면에서 태원에 이르고, 한 갈래는 낙랑 방면에서 유주에 이르러 그 주·현으로 들어가 그들을 다스리는 한편, 그 유민들을 불러서 안정시켰다. (중략) 양광은 임신년에 고구려를 침범하기 위해 전대미문의 성대한 출병 준비를 했다. 우리 조의군(?衣軍) 20만으로 양광의 군사들을 거의 모두 멸했으니, 이것은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니겠는가.

 을지공 같은 이는 곧 만고에 한 시대를 창출한 거룩한 호걸이로다.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조선 개국공신)이 명나라 사신 축맹(祝孟)과 더불어 백상루(百祥樓·평북 안주 북성)에 올라가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 살수 질펀하게 흘러 푸른 하늘 울렁이는데/수나라 군사 백만 명을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냈네/지금까지 어부와 나무꾼의 말에 남아 있으니/나그네의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네 -

 을지문덕이 태어났다는 마을의 석다산은 현재 평남 증산군 석다리에 있으며, 높이는 해발 270m. 석다리에는 을지문덕이 어린 시절 글 읽고 무술 훈련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 평남 평원군 화진리 불곡산 동굴 속에서 글 읽고, 석다산 남쪽의 마리산으로 말을 타고 다니며 무술 훈련을 했다는 전설도 있다.

 어느 날 을지문덕이 불곡산 석굴 속에서 책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때 큰 구렁이 한 마리가 그를 해치려고 기어 들어왔다. 잠결에 괴이한 살기를 느낀 을지문덕이 눈을 뜨면서 번개같이 칼을 휘둘러 구렁이의 목을 쳤다. 그때 칼로 내려친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돌로 만든 책상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 지금도 그 석굴에는 모서리가 떨어져나간 돌 책상이 남아 있다고 전한다.

 한편 이웃 평원군 운봉리의 대원산에도 을지문덕의 전설이 있다. 을지문덕이 무술 훈련을 하면서 활을 쏘는데 과녁이 잘 보이지 않기에 높이 자란 나무들을 칼로 쳐서 시야가 훤히 트이게 만들어 놓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나무들은 을지문덕이 칼질을 한 그 높이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고수전쟁(高隋戰爭)이 일어나기까지 고구려와 중국의 사정을 살펴보자.

고구려는 당시 영양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영양왕은 유명한 평강공주(平崗公主)의 오라비요, ‘구걸하는 바보’에서 하루아침에 평강공주의 남편이 되고 고구려의 용장으로 변신한 온달(溫達) 장군의 매부였다.

 수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한 것은 영양왕이 즉위하기 1년 전인 589년. 북주의 외척인 양견(楊堅)이 정권을 장악한 뒤 581년에 왕을 내쫓고 수나라를 건국하니 그가 바로 수 문제(隋文帝)다.

양견은 589년에 남쪽의 진나라까지 멸망시킴으로써 남북조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했다. 이 같은 수의 등장은 동북아시아 국제 정치 질서에도 당장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동안 고구려는 북주, 북제와 등거리 외교관계를 통해 될 수 있는 한 전쟁을 피하려고 했고, 백제 또한 북주, 북제와의 외교관계를 이용해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했는데, 남북조시대가 무너지고 수나라가 등장하니 새로운 관계설정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에 백제는 재빨리 수나라 건국 직후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신라도 이에 뒤질세라 수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신라는 수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자 611년에 고구려 정벌을 청하는 이른바 ‘걸사표(乞師表)’를 보내기도 했고, 백제는 수나라의 2차 침공 직전에 고구려 원정의 향도(嚮導) 노릇을 자청하기도 했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대결이었다.

 선제 공격을 개시한 것이 고구려였다. 영양왕은 재위 9년(598)에 1만 명의 말갈 기마대를 친히 거느리고 요서지방 공격을 단행했다. 이는 거란과 말갈 여러 부족의 지배권을 확보해 요서와 요동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고구려 - 수나라 `지상 최대의 전쟁'제1차 고수전쟁을 승리로 이끈 강이식 장군 영정. 강이식 장군은 진주강씨 시조다(왼쪽). 강이식 장군 묘가 있는 중국 심양 원수림에 남아 있는 석물들(아래).

살수대첩을 그린 민족기록화.

제1차 고수전쟁을 승리로 이끈 강이식 장군 영정. 강이식
장군은 진주강씨 시조다. 

강이식 장군 묘가 있는 중국 심양 원수림에 남아 있는 석물들.


 이에 격노한 수 문제는 그해 6월에 즉각 30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 정벌을 명령했다. 마침내 제1차 고수전쟁(高隋戰爭)이 터진 것이다. 수 문제의 명령을 받은 그의 넷째 아들 한왕(韓王) 양량(楊諒)과 원수 왕세적(王世積)은 육군을 이끌고 임유관을 지나 요동으로 진격했으나 홍수와 군량 보급의 두절에 질병까지 돌아 대부분의 군사가 죽었다. 한편 주라후(周羅喉)가 이끄는 수군도 동래를 출발해 평양으로 향하다가 발해에서 풍랑을 만나 숱한 군선이 침몰하는 바람에 대부분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해 9월에 30만 대군 중 살아서 돌아간 자는 불과 1, 2만 명뿐이라고 했다.

 이렇게 수나라의 제1차 고구려 원정은 참패로 끝났는데, 이러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9년 조의 내용은 ‘수서’의 기록을 요약한 것에 불과하고,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그 실상이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단재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서곽잡록’과 ‘대동운해’라는 책을 인용해 당시의 정황을 이렇게 썼다.

 - 영양대왕이 수 문제의 모욕적인 글을 받고 대로하여 군신에게 묻자, 강이식(姜以式)이 “이 같은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회답함이 가하다”고 적을 칠 것을 주장, 대왕이 이를 기꺼이 좇아 병마원수로 삼아 5만 정병을 임유관으로 보내고, 먼저 예(濊)의 병력 1만으로 요서를 침공해 수나라 군사를 유인하고, 거란병 수천으로 바다 건너 산동반도를 공격하여 1차 고수전쟁이 개시되었다. -

 따라서 이 기록에 따르면 이때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의 원수는 진주 강씨 시조인 강이식 장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강이식 장군의 무덤은 중국 심양현 원수림에 있다고 전한다.

 수나라의 1차 침공을 대승으로 마무리한 고구려는 한숨 돌릴 겨를도 없이 이번에는 남쪽 후방의 우환거리인 신라와 백제 응징에 나섰다. 또 다시 수나라가 침략해 올 경우 배후에서 있을지도 모를 공격을 미리 차단해 놓기 위해서였다.

 영양왕은 전쟁 2년 뒤인 재위 11년(600) 정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 교섭을 모색하는 한편,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역사서를 5권으로 간추린 ‘신집’을 편찬하게 했다. 지금은 실전(失傳)됐지만 이 ‘신집’에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빛나는 사실이 실려 있었을 것이고, 이는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의 자부심을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양왕은 재위 14년(603)에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주를 치게 하고, 18년(607)에는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해 포로 3000명을 잡아왔으며, 다시 그 이듬해에는 신라를 공격해 포로 8000명을 잡아와 모두 고구려 지역에 배치함으로써 혹시 있을지 모를 신라와 백제의 북진을 미리 차단했다. 그런데, 그동안 수나라에서는 정변이 있었다. 604년 7월에 수 문제의 둘째 아들 양광이 아비와 형을 죽이고 제위를 찬탈해 수 양제로 등극했던 것이다. ‘제2의 시황제(始皇帝)’ 소리를 들은 양제는 즉위하자 낙양에서 오늘의 북경인 탁군에 이르는 대운하를 건설하고, 아비 때 실패한 고구려 원정의 기회를 노렸다.

 610년부터 본격적인 고구려 원정 준비에 들어간 양제는 611년 2월에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612년 정월에 마침내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수서’는 이때 양제가 동원한 군사가 24군에 113만 3800명이라고 전한다. 그뿐만 아니라 군량 등 물자 수송에는 그 2배의 인원이 동원됐다고 하니 이는 거의 300만에 이르는, 중국 역사상 아니, 세계사상 최대 규모의 원정군이었다.

 2월에 요하에 이른 수나라 대군은 부교를 가설, 요하를 건너려고 했으나 고구려군과의 첫 접전에서 선봉장 맥철장(麥鐵杖)과 전사웅(錢士雄), 맹차(孟叉) 등이 전사함으로써 초전부터 여지없이 사기가 꺾이고 말았다. 그러나 요하를 건넌 수군은 요동성을 포위했다. 고구려 군사와 백성은 용감히 싸워 성을 잘 지켜냈다. 6월이 될 때까지 요동성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 하자 양제는 자신이 직접 요동성으로 달려와 독전을 했으나 그래도 성은 요지부동이었다. 초조해진 양제는 가장 신임하는 장수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에게 30만5000명의 정예군을 주고 평양성을 직접 공격토록 명령했다.

 한편 내호아(來護兒)와 주법상(周法尙)이 이끈 해군은 황해를 건너 대동강 입구에서 고구려의 방어군과 접전을 벌였다. 이들 수군은 평양을 공격하는 우문술·우중문의 대군과 합류, 그들에게 군량과 무기를 보급하기 위해 해로로 평양을 공격한 것이다.

 첫 전투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내호아의 수군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성까지 단숨에 이르렀으나 성은 텅 비어 있었다. 이는 평양방어군 총사령관인 고건무(高建武)의 탁월한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건무는 영양왕의 이복동생으로서 뒷날 영류왕으로 즉위한다. 수군은 고구려군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허겁지겁 평양성으로 난입했는데, 이때 성 밖에 매복하고 있던 고구려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내호아는 간신히 목숨을 구해 도망칠 수 있었다.

 양제의 특명을 받은 우문술과 우중문은 요동성을 우회, 압록강에 이르렀다. 그런데 기습작전을 펼쳐야 할 군사들이 모두 100일분의 식량과 무기를 지니고 있었으니 처음부터 진격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군량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베겠다!”는 엄명을 내려도 너무 무거워 몰래 땅에 파묻는 자가 많아 군량이 이내 떨어져버렸다.

 고구려의 대신이요 총사령관인 을지문덕 장군이 우문술과 우중문의 수나라 군대 본영에 나타난 것이 그 무렵이었다. ‘삼국사기’, 사실은 ‘수서’의 기록이지만 사서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전한다.

 을지문덕 장군은 적진으로 찾아들어가 우문술과 우중문 등에게 항복하겠노라는 뜻을 전했다. 사실은 항복이란 거짓이고, 항복한다는 핑계로 적군의 허실을 탐지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우중문은 출전에 앞서 양제로부터 “고구려왕이나 을지문덕이 오거든 반드시 사로잡으라”라는 밀명을 받고 왔기에 을지문덕이 제 발로 찾아오자 이게 웬 떡이냐면서 속으로 기뻐하며 을지문덕을 붙잡아 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위무사로 종군한 상서우승 유사룡(劉士龍)이 “항복하겠다고 제 발로 찾아온 적장을 생포한다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고, 또 대국의 체면도 말이 아니다”면서 한사코 반대했다. 우중문은 할 수 없이 을지문덕을 돌려보냈다. 물론 틀림없이 왕을 모시고 와서 항복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놓아준 것이다.

 그런데 을지문덕을 그대로 돌려보낸 뒤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듯했다. 나중에 황제가 이 일을 알면 내 목이 달아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곧 을지문덕에게 사람을 보내, “꼭 할 말이 있으니 빨리 돌아오라”고 했다.

하지만 범의 아가리에서 벗어난 을지문덕이 그런 잔꾀에 넘어갈 리가 만무여서 돌아보지도 않고 금세 압록강을 건너가 버렸다. 다 잡은 적장, 제 발로 걸어온 을지문덕을 놓쳐버린 우문술과 우중문은 속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군량마저 동이 나 버렸다. 우문술은 퇴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우중문과 의논하니 우중문이 펄쩍 뛰며 반대했다.

 “장군은 수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하찮은 적군을 쳐부수지 못 했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뵙겠소이까?”

 우중문이 황제까지 들먹이며 나서자 우문술도 할 수 없이 그의 주장에 따라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을지문덕의 뒤를 쫓았다.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왔다.

청천강서 수나라 주력군 궤멸시킨 영웅`청야전술'로 고구려 영토 깊숙이 적군 유인 30여 만명 가운데 2700명 정도 살아 돌아가<淸野戰術>

오늘의 청천강 모습
살수대첩 민족기록화

   평남 안주 백상루. 청천강을 바라보는 절경지에 위치하며 진주 촉석루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 누각으로 꼽힌다.


 고구려는 을지문덕 원수의 작전 계획에 따라 청야전술(淸野戰術)을 구사하고 있었다. 청야전술이란 성 밖에 있는 집이건 밭이건 모두 비워놓아 적군에게 곡식 한 톨 돌아가지 않게 하는 계책이다.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군사들이 더욱 지치도록 하루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모두 일부러 져 줌으로써 적군을 고구려 영토 더욱 깊숙이 유인했다. 적군은 마침내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외곽까지 육박했다. 그러자 을지문덕 장군이 다시 사자를 적진에 보내 이렇게 거짓항복을 청했다.

 “만약 너희가 군사를 돌이킨다면 우리 태왕 폐하를 모시고 가서 항복하겠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들을 조롱하는 저 유명한 오언시를 지어 보낸 것도 바로 이때였다. ‘삼국사기’ ‘을지문덕 열전’에 실린 그 시의 내용은 이렇다.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고/ 기묘한 방략은 지리를 통달했도다/ 싸워서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족함을 알고 돌아감이 어떠리(神策究天文 / 妙算窮地理 / 戰勝功旣高 / 知足願云止). -

 그제야 을지문덕에게 속은 것을 알아차린 우문술 등은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곳곳의 요충에 매복, 기회만 기다리고 있던 고구려군이 지친 수나라 군사들을 사정없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수군이 결정적 타격을 입은 것은 오늘의 청천강인 살수에서였다(살수가 요동에 있었다는 일부의 주장도 있다). 여기에서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는 등 수군은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전설에는 을지문덕 장군이 상류를 막았다가 적군이 반쯤 건넜을 때 둑을 터뜨려 수장(水葬)을 시켰다고 했으나 이는 전술적으로 무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고, 곳곳에서 매복에 걸려 계속 패퇴하다가 주력군의 대부분이 살수에서 궤멸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해서 압록강을 살아서 건너간 자는 30만5000명 가운데 2700명뿐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살수대첩의 전말이다.

 우문술의 패전 소식을 들은 수군의 내호아도 남은 배를 끌고 퇴각해 버렸다. 보고를 받은 수양제는 패전 책임을 물어 우문술을 쇠사슬로 묶어 돌아가고 말았다. 귀국한 수양제는 우문술을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을지문덕을 놓아 보낸 죄를 물어 유사룡은 목을 쳤다.

 한편, 그 옛날 살수였던 청천강이 흐르는 평안도 안주 땅에는 살수대첩에 얽힌 ‘칠불사(七佛寺)의 전설’이 서려 있다. 살수싸움이 있기 전에 일곱 명의 고구려 병사가 스님으로 변장해 바지를 걷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강가에서 이 광경을 본 수나라 군사들이 그곳 여울이 얕은 줄 알고 서로 먼저 강을 건너려고 아우성치며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상류에서 큰물이 쏟아져 내리고, 사방에서 고구려 군사들이 몰려나와 활을 쏘고 투석하며 수나라 군사를 무찔렀다. 그 뒤 고구려에서는 부처님의 가호로 수나라 군사를 물리칠 수 있었다면서 감사를 표하기 위해 칠불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그때 스님으로 변장한 일곱 명은 고구려 병사가 아니라 일곱 부처님이었다는 것이다.

 천하의 주인으로 자처하던 수양제는 부자 2대에 걸쳐 소국인 고구려에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자 이를 갈며 분통해했다. 그래서 그 이듬해인 613년 4월에 또 다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다시 고구려 정복에 나섰다. 이것이 제3차 침범이었다. 수양제는 평민으로 강등시켰던 우문술을 다시 등용, 대장군으로 삼아 선봉을 맡게 해 평양성으로 진격토록 하고, 왕인공(王仁恭)에게는 신성을 공격토록 했다. 그리고 자신은 친히 요동성을 공격했다. 고구려는 이번에도 철벽 같은 수성전을 펼치는 한편, 사람 한 명 곡식 한 톨 남기지 않는 청야전술을 펼쳐 수나라 군사들의 진을 빼놓았다.

 수나라 군사들은 성벽보다 높은 누각인 비루당, 성벽을 넘기 위한 높은 사다리인 운제(雲梯), 성벽을 부수는 충거(衝) 따위의 공성기를 동원해 맹렬히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성은 20일이 넘도록 함락되지 않았다. 수양제는 100만 개의 흙 포대를 성벽 높이로 쌓아 군사들로 하여금 그 위에 올라가 성을 공격토록 하는 한편, 성벽보다 더 높은 8층 수레로 성을 공격토록 명령했다.

그래도 고구려 군사들은 무서운 투지로 용감하게 싸워 단 한 명의 수나라 군사도 성안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는 사이에 수양제에게 급보가 날아왔다. 후방에서 군량 수송의 총책임을 지고 있던 예부상서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였다. 수양제는 급히 회군, 양현감의 반란부터 진압했다.

 3차에 걸친 고구려 정벌이 그렇게 물거품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수양제는 이듬해인 614년 2월에 또다시 전국적인 총동원령을 내려 군사를 소집했다.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해 7월에 제4차 출병을 단행했으나 소득이라고는 수군 장수 내호아가 요동반도 남해안의 비사성을 탈취한 것이 전부였다. 전쟁은 지지부진해지고 공격하는 수나라나 방어하는 고구려나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양국은 화친책을 모색하고, 이에 따라 수양제는 다시 군사를 돌이킬 수밖에 없었다.

 장장 16년 동안 4차에 걸친 수나라의 침공은 그렇게 끝났는데, 그것으로 모든 것이 전처럼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무리한 고구려 원정으로 수나라의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의 삶이 곤궁해지자 각지에서 반란이 쉴 새 없이 일어났던 것이다. 611년에 시작된 농민들의 봉기가 해가 갈수록 중국 각지로 퍼져나가고, 여기에 호족과 귀족들까지 군웅 할거함에 따라 수나라 조정의 통제력은 약화됐다. 그러다가 617년에 마침내 수양제가 친위군의 쿠데타로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수양제를 죽인 사람은 그의 ‘평생 동지’였던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宇文化及)이었다. 수양제의 피살로 수나라는 중국을 재통일한 지 불과 40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이연(李淵)이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니 그것이 당나라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 고구려에서도 영양왕이 재위 29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이복동생 고건무(高建武)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영류왕이다.

 살수대첩 이후 을지문덕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612년의 살수대첩 이전부터 수나라에도 알려질 만큼 뛰어난 인물로서 출장입상(出將入相)했던 고구려의 대신이요 전쟁영웅인 을지문덕의 자취가 그 뒤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조선조 세조 때인 1458년에 양성지(梁誠之)는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며 모셔야 할 역사적 인물로 12명의 왕과 24명의 신하를 추천했는데, 고구려에서는 시조 추모성왕(鄒牟聖王)과 영양왕, 그리고 을지문덕 장군이 천거됐다. 그리고 숙종도 1680년에 관리를 보내 을지문덕의 사당에 현판을 다시 만들고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돌이켜 보건대 을지문덕이 없었다면 고구려가 수나라에 멸망당했을지도 모르고, 만일 그렇게 됐다면 아비와 형을 죽이고 제위를 찬탈한 패륜아, ‘제2의 시황제’ 수양제에 의해 신라와 백제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뒷날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없었다면 조선왕조가 왜적에게 멸망당하고, 어쩌면 명나라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런 까닭에 이순신과 더불어 을지문덕을 우리 역사상 으뜸가고 버금가는 명장이라고 추앙하는 것이다.
김유신, `삼국통일 이끈 신라의 대표적 명장'
김유신 장군 초상
길상사는 김유신 장군의 출생지 충북 진천에 세워진 사당이다.

 김유신(庾信)은 신라가 당나라와 합세해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소위 삼국을 통일 하는데 가장 공이 큰 인물로 신라 천년사의 대표적 명장으로 꼽힌다. 이는 김부식이 ‘삼국사기’ ‘열전’ 10권 중 3권에 걸쳐 김유신전을 엮었다는 사실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김유신에 관한 평가는 용장·지장의 면모를 두루 갖춘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는 찬사가 있는가 하면, 필요에 따라서는 암수와 흉계도 마다하지 않은 음흉하고 사나운 모략가라는 부정적 혹평도 있다.

 김유신은 김해김씨 시조 김수로왕의 후예로 신라에 항복한 금관가야의 왕손이었다. 그가 젊은 시절 일찍 출세하지 못한 까닭도 성골(聖骨)이나 진골(眞骨)처럼 신라 정통 귀족이 아니라 가야계라는 출신 성분이 불리하게 작용한 탓도 있었다.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萬明夫人)은 진평왕의 모후인 만호태후(萬呼太后)와 진흥왕의 동생 숙흘종(肅訖宗)의 딸이다. 만명이 길에서 김서현(舒玄)과 눈이 맞아 야합한 끝에 김유신을 낳은 것이다. 김서현은 법흥왕 때 신라에 항복한 가야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셋째 아들 김무력(武力)의 아들이다. ‘삼국사기’ ‘열전’은 김유신의 출생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 처음에 서현이 길에서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의 딸 만명을 보고 마음에 들어 그에게 눈짓해 중매도 없이 야합하게 됐다. 서현이 만노군 태수가 돼 만명을 데리고 함께 가려 하니 숙흘종이 그제야 자기 딸이 서현과 야합한 줄 알고 그를 미워해 딴 집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집 대문에 벼락이 쳐서 지키던 자가 놀라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만명이 구멍으로 빠져나와 곧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달아났다. -

 그렇게 해서 김유신은 만노군(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유신이 태어나기 전에 이상한 태몽이 있었다. 서현은 화성과 토성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꿈을 꿨고, 만명은 황금 갑옷을 입은 동자가 구름을 타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해 스무 달 만에 김유신을 낳으니, 때는 진평왕 17년(595)이었다. 현재 진천읍 상계리 김유신의 생가 터에 길상사라는 사당이 세워져 있고, 그가 소년 시절 무술을 연습했다는 치마대와 연보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또 그 뒤의 태령산은 김유신의 태를 묻은 산이라고 한다.
 만명이 서현을 따라 만노군으로 도망친 뒤 만호태후는 오래도록 서현을 사위로 인정하지 않다가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또 그 아이가 잘 생겼다는 말도 들었다. 외손자가 보고 싶은 만호태후는 아이를 데려오라고 해 안아 보니 과연 생김새가 영특한지라 “참으로 너는 나의 외손자로다!”하고 좋아했다.

 김유신이 화랑이 된 것은 15세 때. 당시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낭도를 가리켜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화랑세기’는 김유신이 그 해에 만호태후의 명에 따라 11세 풍월주 하종(夏宗)의 딸 영모(令毛)를 아내로 맞았다고 전한다. ‘김유신 열전’은 유신이 17세에 고구려·말갈·백제가 신라의 강토를 침범하는 것에 비분강개해 외적을 물리칠 뜻을 품고 중악에 들어가 석굴에서 수련했다면서, 이때 난승(難勝)이라는 이인을 만나 비법을 받았다고 하는데 난승은 그 비법을 전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함부로 퍼뜨리면 안 된다! 또한 만일 옳지 못하게 사용하면 도리어 그로 인해 재앙을 당하리라.”
 그 이듬해에 김유신은 홀로 보검을 지니고 인박산에 들어가 향을 피워 놓고 적국을 물리칠 힘을 달라고 기도한 뒤 이렇게 빌었다.
 “천관(天官·천신)은 빛을 드리워 보검에 영험을 내리소서!”
 그러자 사흘째 되는 밤에 두 별의 환한 빛이 내려뻗쳐 칼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했다. 하지만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에는 김유신이 한때 천관(天官)이란 여인에게 빠졌다가 어머니의 엄한 훈계로 애마의 목을 치면서 매정하게 천관과의 인연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준다. 천관은 오랫동안 기생이라고 전해졌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 신당(神堂)의 여제관이라는 설이 유력해지고 있다.

 김유신이 화랑 중의 화랑인 풍월주가 된 것은 입산수도를 마치고 하산한 18세 때였다. 비록 외할머니 만호태후의 후광으로 풍월주가 되기는 했지만 가야 출신이라는 성분 때문에 신분 상승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 할아버지 김무력의 벼슬이 신라 16관등 가운데 으뜸인 각간(角干)이었으나 아버지 서현은 제3위인 소판(蘇判)에 그친 것만 봐도 그의 가문이 쇠락해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세운 계획이 누이동생을 왕족 김춘추(春秋)에게 시집 보내는 일이었다. 김유신에게는 보희(寶姬)와 문희(文姬) 두 여동생이 있었다. 언니 보희가 어느 날 밤 이상한 꿈을 꿨다.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눴는데 그 오줌이 흘러내려 서라벌이 모두 잠긴 꿈이었다. 이튿날 문희에게 그 꿈 이야기를 했더니 문희가 비단치마를 주고 언니의 꿈을 샀다. 그리고 열흘 뒤 김유신이 김춘추를 불러 자기 집 앞에서 공을 차고 놀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끈을 밟아 찢어 버렸다. 그리고 집안으로 불러들여 누이동생에게 옷을 꿰매 주게 했다. 보희는 부끄러워 나오지 않고 문희가 그 옷을 꿰매 줬다. 그렇게 해서 김춘추는 문희를 품에 안아 마침내 임신을 시켰다.

 김춘추는 폐위당한 진지왕 손자로 김유신보다 9세 연하였다. 하지만 김춘추에게는 이미 정부인인 보량(寶良)이 있어서 이 오입사건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했다. 보량은 딸 고타소(古陀炤)를 낳고 죽었는데, 고타소는 뒷날 대야성에서 백제군에게 죽은 김품석(品錫)의 아내가 된다.
 김춘추가 아내의 눈치를 보며 사내답지 못하게 우물쭈물하자 화가 난 김유신은 하루는 집에 나뭇단을 쌓아 놓고 문희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나섰다. 마침 남산에 올라갔다가 이 연기를 본 선덕공주(善德公主)가 주변을 둘러보며 어찌된 일인지 물었다. 수행했던 조카 김춘추의 얼굴이 붉어지며 사실대로 고했다. 그러자 공주가 “이기 마카 니 때문에 생긴 일인데 빨리 가서 구해주지 않고 뭐하고 있노!”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김춘추는 문희를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였고, 문희는 얼마 뒤 보량이 아이를 낳다가 죽자 정실 부인이 되었다. 문희는 뒷날 문무왕이 되는 법민(法敏)을 낳았다.
 그렇게 해서 김유신은 마침내 신라 왕실과 인척관계가 되는 데에 성공했고, 이를 발판삼아 가야 출신이라는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권력의 서열이 바뀔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사실 대장부가 할 짓이 아닌 음흉한 계략으로 볼 수 있지만, 어쨌거나 김유신이 무인으로서 두각을 드러낸 것은 역시 전쟁터였다. 때는 진평왕 51년(629), 김유신이 34세 때였다. 그해 8월에 이찬 임영리(任永里), 파진찬 김용춘(龍春)과 김백룡(白龍), 소판 김대인(大因)과 유신의 부친 김서현 등이 왕명에 따라 고구려의 낭비성(충북 청주)을 쳤다. 이때 고구려군의 맹렬한 반격으로 신라군의 사상자가 많았다. 그러자 하급 부대장 급인 중당당주로 출전했던 김유신이 적진으로 돌격, 적장의 목을 베어 돌아오니 신라군의 사기가 충천,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켜 5000여 명의 적군을 죽이고 1000여 명을 사로잡아 마침내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 낭비성 전투를 분기점으로 김유신은 승승장구, 신라 군부의 실력자로 급부상하게 된다.
적은 군사로 백제 대군과 맞서 대승
김유신 장군 집터, 서라벌 옛터 경주시 반월성 인근에 있다.
김유신 장군의 집터에 남아 있는 옛 우물 재매정.
김유신 장군이 화랑 시절 입산해 수도했다는 동굴.

 김유신은 압량주(경북 경산) 군주(軍主)가 됐다가 선덕여왕 13년(644)에 제3위 소판(蘇判)으로 승진했다.

그해 9월 상장군이 돼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7개 성을 쳐 크게 이겼다. 그 이듬해 1월에 서라벌로 개선했으나 백제가 또 침공한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김유신은 가족을 만나지도 못하고 다시 출전해 백제군 2000여 명을 죽이고 승리했다. 그리고 3월에 서라벌로 돌아왔는데 또다시 백제군이 공격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김유신은 이번에도 집에 들르지 않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병기를 수리해 서부전선으로 출전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이때 집 앞을 지나가다가 잠시 멈춰 물을 떠오라고 해 마신 뒤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출중한 리더십은 장졸들을 감동시켰고, 군사들은 목숨 바쳐 싸우기로 결심했다. 국경에 이르자 백제군이 그 기세를 보고 그대로 물러가 김유신은 싸우지 않고도 이기고 돌아왔다.

 그런데 선덕여왕 16년(647) 정월에 수상인 상대등 김비담(毗曇)이 염종(廉宗)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명목은 ‘여왕이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선덕여왕이 백성들의 고통은 돌보지 않고 자신의 원찰인 분황사를 짓고, 첨성대를 만들고, 황룡사 구층탑을 세운 것 등을 구실로 삼은 것이지만 사실 그들의 본래 목적은 정적(政敵) 김춘추와 김유신을 제거하고 왕위를 빼앗는 데에 있었다.

 김춘추가 비록 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로 성골(聖骨)에서 진골(眞骨)로 몰락했지만 선덕여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데다 김유신의 강력한 무력지원까지 업고 있으니 이들을 제거해야만 자신들이 왕좌를 차지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김비담의 쿠데타군은 명활성에 진을 치고 김유신이 이끈 정부군은 월성에 진을 쳐 열흘간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유성이 월성에 떨어졌다. 비담이 이를 보고 “큰 별이 떨어지면 반드시 귀인이 죽는다는 말이 있데이. 반드시 우리가 이기고 유신이 저놈아가 진다는 징조가 아니고 뭐겠노, 그자?”라고 좋아했다. 그 말을 들은 반란군의 함성이 천지를 울렸다. 선덕여왕이 이 소문을 전해 듣고 벌벌 떨자 꾀 많은 김유신이 이런 말로 위로했다.

 “길흉이라카는 기 사람 하기에 달린 기 아니겠십니꺼? 폐하께서는 쪼매도 걱정하지 마이소!”

 그리고 그날 밤 불붙인 허수아비를 연에 달아 띄워 올리니 마치 별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튿날 아침 김유신이 군사들에게 “간밤에 마카(모두) 봤제? 떨어졌던 별이 도로 하늘로 올라가는 걸 말이데이?”라고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그리고 다시 사기가 오른 군사들을 휘몰아 마침내 비담의 반군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김유신은 비담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군부에서 최고의 실력자가 됐다. 그런데 그해에 늙고 병든 선덕여왕이 재위 16년 만에 죽고 신라 왕실에서 남녀를 통틀어 마지막 성골이며 선덕여왕의 사촌동생인 김승만(勝曼)이 뒤를 이으니 진덕여왕이다. 진덕여왕은 이찬 김알천(閼川)을 수상 상대등에 임명했지만 실권은 이미 이찬 김춘추와 그의 처남인 대장군 김유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진덕여왕 2년(648)에 김춘추가 원병을 청하러 당나라에 사신으로 간 동안 김유신은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했다. 전에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 부부가 죽은 대야성을 탈환, 김춘추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진덕여왕이 “적은 군사로 백제의 대군과 맞서 싸우려면 어렵지 않겠느냐”고 묻자 김유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승패는 군사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백성의 민심에 달린 깁니더. 지금 우리 백성이 한마음이 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라카니 백제 군사가 많다꼬 겁낼 이유가 하나도 없는 기라예!”

 김유신은 군사를 선발해 훈련시킨 뒤 대야성으로 진격, 근처 계곡에 군사를 매복시키자 과연 백제군이 공격해 왔다. 김유신이 한참 싸우다가 거짓 패해 후퇴했다. 그리고 백제군이 추격하자 복병을 일으켜 앞뒤에서 협공, 백제군을 크게 무찔렀다. 결국 이 싸움에서 백제의 장수 8명을 사로잡고 1000여 명을 죽였다. 김유신은 승리를 거뒀지만 백제 진영에 사자를 보내 이렇게 제의했다.

 “대야성 도독 김품석과 그의 부인 김씨의 유골이 너희 나라에 묻혀 있지 않노? 지금 우리에게 잡혀 있는 너거들 장수 여덟 명과 그 두 사람의 유골을 바꾸는 기 어떻겠노?”

 살아 있는 장수 8명과 이미 죽은 사람 해골 2구와 맞바꾸자는 데 싫어할 까닭이 없다. 교환이 이루어진 뒤 김유신은 승세를 타고 공격을 계속, 백제의 12개 성을 점령해 2만여 명을 죽이고 9000여 명을 생포하는 대승을 거뒀다. 그 공로로 김유신은 최고위 이찬(伊?) 벼슬에 상주행군대총관에 올랐다. 이어서 그는 백제의 9개 성을 공격해 9000여 명의 목을 베고 600여 명을 사로잡는 전공을 올렸다.

 ‘삼국사기’의 이런 기록을 보면 신라는 김유신 혼자 힘으로도 능히 백제를 정복하고도 남았을 터인데 무엇이 부족해 굳이 당나라 오랑캐 군사를 이 땅에 불러들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진덕여왕 3년(649) 8월에 백제의 좌평 은상(殷相)이 신라의 7개 성을 치므로 여왕이 대장군 김유신을 비롯해 장군 죽지(竹旨)·춘(陳春)·존(天存) 등에게 나아가 막게 했다.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지만 열흘이 지나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김유신이 도살성(충남 천안) 아래 군사를 주둔시킨 뒤 또 매복계로 대승을 거뒀다. 이 싸움에서 김유신은 백제의 최고사령관인 은상을 비롯해 달솔 자견(自堅) 등 장수 10명과 군사 8980명을 죽이고, 달솔 정중(正仲)과 군사 100명을 생포했으며, 말 1000필과 갑옷 1800벌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뒀다.

그런데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은 이 대목에서 또 ‘돌아오는 길에 백제의 좌평 정복(正福)이 군사 1000명을 이끌고 항복했지만 모두 놓아 줘 마음대로 돌아가게 했다’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좌평은 백제에서 으뜸가는 관직으로 재상(정승)급인데 그가 1000명이나 되는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했지만 모두 놓아 줘 돌아가게 했다? 과연 이런 비상식적인 소리가 납득이 가는 소린가.

 그런데 진덕여왕이 재위 8년 만인 654년 3월에 죽었는데, 성골의 대가 끊어져 버렸으므로 처남 매부 간인 김춘추가 즉위하니 그가 태종무열왕이다. 무열왕은 즉위 이듬해에 60세의 김유신을 대각간(大角干)에 임명하고 오래 전부터 꿈꾸던 대업인 백제와 고구려 정벌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무열왕 7년(660)에 김유신은 문무백관의 으뜸인 상대등에 올랐다. 몰락한 가야 왕족이 마침내 신라 최고의 관직에 오른 것이다. 상대등이 된 김유신은 무열왕을 보필해 어린 시절부터 키워 온 삼한통일의 꿈을 실현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유신에게 조미압(租未押)이라는 자가 찾아왔다. 그는 본래 신라의 지방관(현령)이었는데 백제군에게 포로로 잡혀 가 백제 조정의 실력자인 좌평 임자(任子)의 종노릇을 하던 인물이다. 그가 신라로 도망쳐 와 김유신을 찾아왔던 것이다.

 김유신은 조미압을 간첩으로 이용하기로 작정하고 그에게 밀명을 줘 백제로 되돌려 보냈다. 그 밀명이란 임자에게 가서 “만일 신라가 망하면 내가 그대에게 의지하고, 백제가 망하면 내가 그대를 보호해주겠다”는 말을 전하라는 것이었다. 조미압이 백제로 돌아가 임자에게 그 말을 전하니 임자가 이를 수락했다. 간첩 조미압은 임자와 김유신의 연락책 노릇을 맡았다. 그렇게 하여 백제의 내부사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게 된 김유신은 마침내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해 무열왕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사후 `흥무대왕' 추봉 …왕족 아닌 신하로 유일
김유신 장군 묘. 경북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기슭에 있다.
경주 통일전 앞에 세워진 태종무열왕·문무왕·김유신의 사적비.

 김유신은 태종무열왕(김춘추)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백제 의자왕이 극악무도하여 그 죄가 크니 이는 실로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그놈아를 처벌하고 백성들을 구할 때가 아니겠는교?”

 그해 6월 태종무열왕은 마침내 백제정복군을 일으켜 태자 김법민(法敏)과 함께 남천정(경기 이천)으로 북상해 진을 쳤다. 이는 고구려를 치려는 듯이 보여 백제를 기만하려는 양동작전(陽動作戰)이었다.

한편 당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기 위해 갔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仁問)이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유백영(劉伯英)과 함께 13만 대군을 안내해 덕물도(덕적도)에 이르렀다. 신라와 당군은 7월 10일 사비성(부여)에서 만나 함께 공격하기로 약조했다.

 대장군 김유신은 장군 김품일(品日)·김흠순(欽純) 등과 함께 정예부대 5만 명을 이끌고 백제로 진격했다. 그런데 백제의 도성으로 통하는 마지막 요충지 황산벌(충남 논산)에는 백제의 제2품관인 달솔 계백(階伯) 장군이 5000 결사대를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다.

 이 싸움에서 김유신은 초전에 4전 4패하는 망신을 당한 끝에 자신의 친동생인 김흠순의 아들이며 친조카인 김반굴(盤屈)과 김품일의 아들 김관창(官昌) 등 두 어린 화랑을 제물 삼아 가까스로 백제군을 물리치고 사비성으로 진격했다. 황산벌 전투의 전말은 다음 ‘계백 장군 편’에서 상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백제의 항복을 받아 내기 전에 김유신의 성격을 전해 주는 일화가 있다.

황산벌 전투 때문에 신라군이 약속 날짜보다 하루 늦게 도착하자 소정방이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文潁)의 목을 베려고 했다. 군율을 내세워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고 신라군의 지휘권까지 장악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이에 김유신이 분노해 “뭐라꼬? 그렇다면 내 당군과 먼저 싸운 뒤에 백제를 쳐야겠데이!” 하고 나섰다. 이에 기가 죽은 소정방이 한발 물러섰다. 결국 사비성을 공격한 것은 예정보다 이틀이 늦은 7월 12일. 의자왕은 겨우 1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웅진성(공주)으로 달아났다가 그달 18일 항복하고 말았다.

 백제를 멸망시킨 뒤 소정방은 김유신·김인문·김양도(良圖) 세 사람에게 백제 땅을 식읍으로 나눠 주겠다고 회유했다. 이에 김유신은 “소 장군이 황제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 임금의 소망을 들어주고 우리나라의 원수를 갚아 준 것은 고맙지만 우리만 특별대우를 받을 수는 없는기라!”하고 거절했다.

소정방은 출전하기 전 황제 고종으로부터 백제를 정복한 뒤 신라까지 쳐서 속국으로 만들라는 밀명을 받고 왔던 것이다. 이를 알아챈 김유신이 당군과 일전을 불사하려고 하니 소정방은 할 수 없이 군사 1만을 사비성에 주둔시킨 뒤 의자왕과 왕자·대신 등 2만여 명의 포로를 이끌고 회군했다.

 김유신은 백제를 정복한 공로로 대각간(大角干)에 올랐다. 당시까지 신라 16관등 중 최고의 벼슬은 각간이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대각간 벼슬을 만들어 내린 것이다. 그런데 무열왕이 삼한통일 대업의 완수를 보지 못한 채 그 이듬해인 661년 6월 재위 8년 만에 59세로 죽었다. 그 뒤를 이어 태자 법민이 즉위하니 제30대 문무왕이다.

 문무왕은 국상 중임에도 당군이 고구려를 공격하며 지원군을 보내라는 바람에 김유신을 비롯한 장졸들을 파견했고 자신도 뒤따랐으나 백제광복군에 막혀 평양성까지 당도할 수가 없었다.

문무왕 2년(662) 정월에 김유신은 김인문·김양도 등 아홉 장군과 함께 평양의 소정방에게 군량을 수송하게 됐다. 그는 이미 68세의 고령이었지만 자청해 이 일을 맡았다. 그러나 소정방이 군량만 받고 철수하는 바람에 김유신의 신라군도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문무왕 4년(664) 정월, 70세가 된 김유신은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왕은 궤장과 안석을 내려 그대로 조정에 출사하게 했다.

 신라가 또다시 당과 합세해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그로부터 4년 뒤인 문무왕 8년(668). 그 지난해 고구려는 집권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은 뒤 아들 삼형제가 권력투쟁을 벌이는 바람에 나라가 사분오열됐고, 당 태종의 패전 이후 설욕의 기회만 노리던 당나라가 이적(李勣)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고구려정복군을 일으킨 것이다.

신라도 그해 8월 문무왕이 친히 김유신을 비롯해 30명의 장군과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향해 북진했다. 하지만 당군이 철군하는 바람에 신라군도 회군했다가 그 이듬해인 문무왕 8년 6월 당군의 공격 재개에 맞춰 고구려로 다시 출병했다.

 당시 김유신은 대총관에 임명됐지만 74세의 고령에 풍질까지 앓고 있어 왕이 서라벌에 머물도록 권해 출전하지 못했다. 그해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됨으로써 고구려도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

 고구려를 정복한 뒤 문무왕은 그해 10월 논공행상에서 일등공신인 김유신에게 태대각간 벼슬을 내렸다. 대각간이란 신라 최초·최고의 벼슬에 태(太)자 한 자를 더 보태준 것이다.

삼한통일의 위업을 이룬 김유신은 문무왕 13년(673) 음력 7월 1일 노환으로 죽으니 그때 나이 79세였다. 그 뒤 흥덕왕 10년(835)에는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했으니, 왕족이 아닌 신하로서 왕으로 추봉된 사람은 신라는 물론 우리나라 역사에서 김유신이 유일하다.

 김유신도 사후에 신장(神將)으로 민중의 추앙을 받았다. 이는 그가 삼한통일을 이룬 신라 천년사의 대표적 명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백전백승의 명장이었다. 전세가 불리할 때도 있었지만 결과는 반드시 승리로 막을 내렸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라면 신라는 굳이 당나라 군사를 불러들일 필요도 없이 김유신 한 사람의 힘으로 백제도 정복하고 고구려도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유신은 지략과 용맹과 신통력까지 겸비한 하늘이 내린 명장이 아니었던가.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김유신에 관한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렸다. 한 쪽은 여전히 그가 삼국통일을 통해 민족 일체성을 이룩한 우리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는 찬사를 보내는 반면, 다른 한 쪽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김유신의 전공은 대부분 과대포장된 것으로 그는 명장이라기보다 일세의 간웅(奸雄)이요, 모략꾼에 불과하다고 혹평한다. 이런 주장을 내세운 대표적 인물이 민족주의 사학자인 단재(丹齎) 신채호(申采浩)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시각은 김유신과 김춘추가 외세인 당을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인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이른바 삼국통일을 한 결과 우리나라 영토가 대동강 이남으로 형편없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반된 시각은 최근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김유신이 민족사상 최고의 영웅이요 명장이라는 찬사가 여전한가 하면, 외세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민족반역자로 매도하는 사람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이다. 김유신은 과연 명장인가, 아니면 음모꾼에 불과했는가.
계백, 황산벌에서 빛난 백제 최후의 장렬한 투혼
계백 장군 영정.
계백 장군 동상. 부여군청 앞 네거리에 세워져 있다.

 서기 660년 음력 7월 9일 백제의 도읍 소부리(사비성 : 부여)의 마지막 방어선인 황산(黃山) 연봉. 대장군 김유신(庾信)의 신라군 5만 명은 우세한 병력으로 달솔 계백(階伯) 장군이 이끄는 백제의 5000결사대를 일시에 짓밟고 돌파하고자 총공격을 개시했다. 북과 징이 귀청을 찢고 군사들의 아우성과 군마의 울부짖는 소리가 산과 들과 하늘을 진동했다. 화살이 비 오듯 날고, 군기가 펄럭이고, 창검이 무수한 무지개를 그렸다.

하지만 10배의 신라 대군은 백제 5000결사대의 무서운 기백과 투혼을 당할 수 없어 패하고 물러나기를 네 차례나 거듭했다. 백제 망국의 비극적 대서사시는 이렇게 황산벌에서 막을 올렸는데, 쓰러져 가는 나라의 잔병 5000명으로 5만 대군을 맞아 4전 4승의 신화를 남긴 계백은 어떤 인물인가.

 한평생을 전쟁터로 떠돌며 숱한 싸움을 치르고 수없이 죽을 고비를 겪어 온 백전연마의 용장 계백. 그 역시 가정에서는 둘도 없는 지아비였고 아버지였으나, 출전에 앞서 그는 사랑하는 처자식의 목숨을 손수 끊어 줄 수밖에 없었다. 전쟁노예가 당해야 할 비인간적 치욕을 고려할 때 처자를 죽인 계백의 처사는 비정하고 냉혹한 게 아니라, 당시의 윤리적 가치관으로는 오히려 뜨겁고 지극한 가족애요, 인간애의 발로였다.

 계백은 또한 절박한 극한상황인 전투 중임에도 적의 무용(武勇)을 아끼는 마음에서 소년화랑 김관창(官昌)을 살려 보냄으로써 도량 넓은 대장군의 풍모를 보였으며, 죽을 때와 자리를 바로 찾아 장렬한 최후를 기꺼이 맞은 진정한 무인이었다.

 1300여 년 전 만고충신 계백 장군과 5000결사대가 순국의 붉은 피를 뿌리며 장렬하게 숨져 간 슬픈 역사의 무대 황산벌은 이제 백제 후예들의 농토로 변했지만, 수락산 기슭에 잠든 계백의 무덤은 이 벌판과 백제 망국의 한 서린 역사를 말없이 일러주는 듯하다.

 백제의 마지막 도성 소부리에서 동쪽으로 약 30㎞ 떨어진 황산벌에 계백 장군이 이끄는 5000결사대가 다다른 것은 의자왕 20년(660) 음력 7월 9일 새벽. 어제 오후 늦게 도성을 떠나 밤새 달려 온 것은 최후의 방어선이요, 전략적 요충인 황산의 관문을 침략자인 신라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연봉을 이룬 야산의 능선과 골짜기들 너머로 희부옇게 동녘이 터 오고 있었다. 밤새 한잠 못 자고 행군해 온 장병들은 저마다 핏발 선 눈을 들어 훤하게 밝아 오는 동쪽 하늘을 쳐다 보고 사방을 둘러봤다. 숯고개(炭峴)를 넘어 진격 중이라는 신라의 5만 대군은 아직 한 명도 보이지 않았지만, 백제 군사들은 누구나 이곳이 바로 최후의 싸움터가 되고, 그리하여 단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무덤이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두려워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았다. 어쩌다가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운 판국에 빠져들긴 했지만 우리 백제가 한때는 북방의 강국 고구려의 도성까지 함락시키고 그 임금 고국원왕을 죽였는가 하면, 한때는 멀리 중국 대륙까지 건너가 수십만 위(魏)나라 대군을 파죽지세로 깨뜨리며 종횡무진하던 부국강병이 아니었던가. 그런 긍지와 자부심 속에서 연마 단련해 온 백제군인지라 비록 신라군이 5만 대군이라 해도 겁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우리 백제군의 원수(元帥)는 상승장군 계백 달솔이 아닌가 말이다. 다 늙은 김유신쯤이야 여지없이 짓밟고 이 위기에서 벗어나 나라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신라군을 물리치고 소부리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덕물도(덕적도)에 상륙했다는 당나라 오랑캐 따위야 보나마나 마구잡이로 끌어모아 온 오합지졸에 불과할 것이니 13만 대군이든 130만 대군이든 모조리 황해 바닷속에 쓸어넣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두 눈에 힘을 주고 창검과 방패를 꽉 움켜쥔 군사들도 있었다.

 황산벌은 300~400m의 야산들로 둘러싸인 20만여 평의 분지로 북쪽에 황산성, 동쪽에 황령산성과 깃대봉, 남쪽에 국사봉과 산직리산성, 모촌리산성들이 감싸주고 있는 수도 외곽방어의 마지막 요충이었다.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천험의 요새인 숯고개를 이미 적에게 넘겨준 지금, 이 황산벌의 최후 방어선조차 무너지고 만다면 적의 대군은 일사천리로 무인지경을 가듯 소부리로 밀고 들어갈 터였다.

 드디어 산등성이 위로 7월의 아침 해가 눈부신 햇살을 내쏘며 떠오르자 그 빛을 받은 5000결사대의 기치와 창검, 투구와 방패가 마지막 아우성이라도 치듯 무섭게 번쩍거렸다.

 “잘 들어라! 모든 군사는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좌우에 부장(副將)들을 거느린 마상의 계백 장군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일장 유시를 시작하자 보금자리에서 단꿈을 깬 산새들도 놀라 여기저기서 푸드덕거리며 허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백제의 싸울아비들아! 나의 사랑하는 용사들아! 우리는 이제 마지막 싸움터에 다다랐도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도다! 오늘 한판의 싸움으로 우리 모두, 그리고 그대들의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처자, 경각에 달린 우리 백제국의 운명이 걸려 있는 것이다. 군사들아, 이 사실을 명심하라! 적은 우리보다 열 배나 많은 5만 대군이라 한다. 그대들 각자가 죽기를 각오하고 용맹을 다해 싸우지 않으면 물리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백제의 용사들아! 두려워할 것은 조금도 없다. 신라군을 겁내는 백제 군사는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있을 수 없다! 우리 백제군이 신라군과 싸워서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옛날 옛적 서토(西土 : 중국)의 춘추시대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지금 우리와 똑같은 5000군사로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70만 대군을 쳐부순 적도 있었도다! 그뿐이랴, 불과 15년 전 요동전쟁 때도 고구려의 양만춘(楊萬春)은 안시성에서 수십 배가 넘는 당나라 오랑캐를 물리치고 이세민(李世民 : 당태종)의 눈알을 화살로 쏘아 맞춰 마침내 그로 인해 죽게 만든 사실은 그대들도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하건대, 우리 5000백제군이 한 사람당 신라병 10명씩만 당한다면 능히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나라의 위기를 구할 수 있으리라. 그것이 곧 우리 모두가 살 길이요, 그대들의 가족을 살리는 길이 되는 것이다. 싸움터에서 죽을지언정 결코 물러나지 않는 것이 우리 백제군의 전통임을 명심하고 분발 감투하라! 모두 알아들었는가?”

 계백 장군의 사자후에 이어 5000결사대가 목청을 합쳐 피를 토하듯 내지르는 대답 소리가 우렁차게 황산벌과 능선의 골짜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계백은 장수들을 불러 모아 작전 지시를 하고 군사들을 배치했다. 장군 자신은 중군으로서 산직리산성에 머물고, 좌군은 황령산성을, 우군은 모촌리산성을 지키게 했다. 적은 수의 군사로 10배의 적군을 평지인 황산벌 너른 들판에서 정면으로 맞서 싸운다는 것은 병법의 병자도 모르는 자나 하는 짓이므로 지형지물을 교묘히 이용해 신라군이 산마루 좁은 관문을 타넘고자 할 때 일시에 삼면에서 협공해 승리를 거두려는 상승장군 계백다운 탁월한 전략이었다.

 군사들이 좌·우·중군 3영(三營)으로 포진을 마치자 전부터 산성을 지키고 있던 진수병(鎭戍兵)들이 급히 주먹밥을 만들어 나눠 줬다. 장졸들이 어쩌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아침밥을 먹을 동안 계백은 잠시나마 쉬시라는 부장들의 권유도 마다하고 군막을 나서서 산성 주변을 거닐었다.
나당연합 18만 대군 수륙 양면으로 침공
백제 5000결사대의 마지막 싸움터 황산벌.
계백과 5000결사대가 포진한 황산성 옛터.


 어제 아침, 임금으로부터 출전 명령을 받기 전부터 계백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대세를 만회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늦었다는 사실을. 이토록 허망하게 무너져버릴 정도로 허약한 나라가 아니었는데 이 지경이 되고 말다니,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지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다 해도 아니 싸울 수는 없었다. 그저 팔다리를 묶고 앉아 적에게 운명을 내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힘껏 싸워 막아내야만 했다. 하루 종일 사군부(司軍部)의 무독(武督)·좌군(佐軍)·진무(振武) 등 무관들을 이끌고 사비성 내 5부(五部) 5항(五巷)을 돌아다니며 군사들을 불러 모았다. 가까스로 5000명을 끌어 모은 것은 뉘엿뉘엿 해가 기울어 갈 무렵이었다.

 계백은 출전에 앞서 마지막으로 집에 들렀다. 하지만 그것은 처자식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일러 주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었다. 나라가 망하고 도성이 함락되면 적군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와 1만 호(戶) 5만여 구(口)의 소부리 온 처자를 무참히 유린할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일이었다. 어찌 처자식을 원수들의 손에 노예로 내줄 수 있으랴. 어찌 신라와 당나라 침략군의 더러운 발아래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짓밟히게 버려둘 수 있으랴! 계백은 처자식의 가슴을 차례로 찔러 숨을 끊어줬다. 그리고 온 집안에 불을 질러 시신조차 적군의 손에 닿지 않게 만든 다음 성을 빠져나와 동으로 말머리를 돌렸던 것이다.

 “적군이 나타났다!”

 “신라놈들이다!”

 군사들의 외침소리에 계백은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뜨고 현실로 돌아왔다. 이제 마지막이군. 좋아! 올 테면 얼마든지 와 봐라. 이 계백이 백제의 마지막 투혼을, 마지막 힘을 후회도 유감도 없이 보여주리라! 계백은 칼자루를 힘껏 움켜잡았다.

 계백의 출신 가계와 성장 내력에 관해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어디에도 기록돼 있지 않을뿐더러, 그의 성명조차 분명하지 않아 본성(本姓)이 왕족인 부여씨(夫餘氏)라는 설도 있고, 백제 귀족으로 8대 성씨의 하나인 해씨(解氏)의 음이 와전돼 계(階)가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지금은 정확히 상고할 수가 없다.

 의자왕이 즉위한 것은 641년 3월. 무왕의 태자인 그는 결단성이 있고 효성이 지극하며 형제간의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 즉위 이듬해에 신라의 김유신이 가잠성(충북 괴산)을 공격할 때 의자왕은 정병 1만 명을 윤충(允忠)에게 주어 대야성(경남 합천)을 함락하고 신라의 서쪽 변경 40여 개 성을 빼앗았는데, 그때 대야성주는 김춘추(春秋)의 사위 김품석(品釋)이었다. 딸과 사위가 백제군에게 죽었다는 흉보를 들은 김춘추는 종일 이를 갈며 기필코 백제를 멸망시키겠노라 맹세를 하고 그때부터 고구려로 당으로 쫓아다니며 군사를 빌려 원수 갚을 일에만 몰두했다.

 647년 선덕여왕이 죽고 사촌인 진덕여왕이 즉위했다. 진덕여왕 2년(648)에 김춘추는 셋째 아들 김문왕(文王)을 데리고 당에 건너가 당 태종 앞에 꿇어앉아 군사를 내어 백제를 쳐 달라 간청하고, 중국의 의관을 가져다 입고 쓰며, 법흥왕 이래의 신라 연호를 버리고 당의 연호를 쓰는가 하면, 아들들을 장안성에 인질로 남겨뒀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52세의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태종무열왕이다. 신라가 당과 연합, 백제정벌군을 발진시킨 것은 무열왕 7년(660) 5월 26일. 무열왕은 대장군 김유신, 장군 김진주(眞珠)·김천존(天存) 등과 5만 대군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떠나 6월 18일 남천정(경기 이천)으로 북상했다.

 한편 당 고종의 명령을 받은 소정방(蘇定方)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仁問)과 함께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산동반도를 출발, 황해를 건너 6월 21일 덕적도에 상륙하니 무열왕은 금돌성(충북 음성)에 머물며 태자 김법민(法敏), 뒷날의 문무왕을 보내 당군을 영접하고 양군이 수륙으로 진격해 7월 10일 사비성을 총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면 그동안 백제는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는가. 즉위 이듬해 윤충 등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개 성을 함락시켜 위세를 떨친 의자왕은 그 뒤에도 계속해 장군 의직(義直)·은상(殷相) 등을 보내 신라를 치고, 재위 15년(655) 8월에는 수상인 상좌평 성충을 보내 동맹을 맺은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30여 개 성을 쳐서 빼앗았는데, ‘삼국사기’에는 바로 그해부터 매사가 빗나가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즉 그해 2월 태자궁을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수리하고, 궁궐 남쪽에 망해정을 세웠는데, 그 이듬해 3월에 ‘술 마시고 노는 것을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이 극간하니 왕은 노하여 성충을 옥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뒤부터는 감히 간하는 신하가 없어졌다고 한다.

 성충이 옥중에서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 하므로 한 말씀 더 드리고 죽으려 하나이다. 신이 항상 시세(時勢)의 변화를 관찰한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듯합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는 그 지리를 살펴 늘 상류에 처해 적을 맞아 싸운 연후에야 가히 보전할 수 있겠사오니, 만약 적군이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숯고개를 막고 수로로는 기벌포(伎伐浦)를 지켜 그 험난한 곳에 의지해 막아 치는 것이 옳겠나이다.’하는 글을 올리고 28일간을 굶다가 이승을 버렸다. 이보다 앞서서 또 다른 충신인 좌평 흥수(興首) 또한 의자왕의 미움을 받아 고마미지(전남 장흥)로 귀양 가 있었다.

 의자왕은 657년 정월에는 41명이나 되는 왕자를 모두 좌평에 임명하고 식읍을 줬다는 믿기 힘든 말을 김부식은 기록했는데, 영특하고 총명하던 의자왕이 재위 20년 중 무슨 까닭에 마지막 4~ 5년간 급작스럽게도 황음무도한 폭군으로 전락했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그렇게 하여 나당연합군 18만 대군이 동서 수륙 양면으로 침공해 온다는 급보에 접한 백제 조정은 그제야 대책회의를 열었는데 의견이 분분했다. 좌평 의직은 “당나라 오랑캐들은 바다를 막 건너와 피곤하고 지쳤을 테니 상륙할 때 바로 치면 이내 깨질 것이요, 오랑캐 군사가 무너지면 신라군은 겁을 먹어 저절로 물러갈 것”이라고 했고, 좌평 상영(常永)은 “당군이 도착한 지 오래되지 않아 전의가 식지 않았을 것이니 기진맥진할 때까지 기다렸다 쳐야 하고, 먼저 만만한 신라를 침이 옳다”고 주장했다. 용단을 내리지 못한 의자왕은 귀양살이하는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계책을 물었다. 흥수가 말하기를, “탄현과 기벌포는 국가의 요충이라 장부 1인이 칼을 들고 막으면 만인을 막을 수 있는 곳이니 수륙의 정병을 뽑아 두 곳을 지키게 하고, 대왕은 도성을 방비하다가 되받아치면 백전백승하리다”고 했다. 성충이 죽어가며 올린 말과 같았으나 친 신라파가 극력 반대했다.

 “흥수가 오랜 귀양살이로 대왕을 원망하며 늘 해치려는 마음을 먹고 있을 테니 어찌 그의 말을 따르겠나이까? 당군은 기벌포를 지나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게 하여 치면 항아리 속의 자라를 잡듯이 양 적을 일시에 격살할 수 있으리다.”

 의자왕이 들어본즉 저 말도 옳고 이 말도 옳은 것 같아 결단을 내리지 못하다가 다시 금쪽같은 시간만 허비했다. 변경의 급보가 연달아 들이닥치고, 마침내 신라군이 숯고개를 넘어 무인지경을 가듯 소부리로 쳐들어온다는 보고에 당시 백제 16관등 중 좌평 다음 2품관인 달솔 계백으로 하여금 급히 나가서 막으라고 시켰던 것이다.

 

적군의 용감한 기상까지 사랑한 대장부

황산벌 수락산 기슭에 있는 계백 장군의 묘.
황산벌 전적지에 세워진 계백 장군의 사당 충장사.
백제 망국의 한을 싣고 백마강은 오늘도 부소산 낙화암과 고란사 아래로 유유히 흐르고 있다.

 천험의 요새 숯고개를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쉽사리 타넘은 김유신은 계백이 진 치고 있는 황산의 연봉 앞에 마침내 나타났다. 백제군의 대장기가 산직리산성에서 펄럭이는 것을 본 김유신은 맞은편 곰티산성에 본영을 두고 이내 공격 명령을 내렸다.

 둥둥둥둥! 전고(戰鼓)가 울리고, 군기가 펄럭이고, 돌격의 사나운 함성이 산과 들과 하늘을 진동했다. 백제군이 불과 수천 명으로 보잘것없다고 여긴 김유신이 우세한 대군으로 일거에 짓밟아 버리고 돌파하려 했던 것이나 그것은 오산이요 오판이었다. 목숨 따위야 이미 초개같이 버리기로 작정한 일당백의 투혼으로 맞받아 쳐내려오는 백제 5000결사대의 무서운 기백을 김유신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약해 보이는 적도 과소평가는 금물. 백제군은 세 군데 산성에 의지하고 고리처럼 연결돼 산길을 올라오는 신라군을 밀어붙이니 아무리 10배의 대군이라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백제 결사대의 총수 계백은 백전연마의 용장이요 탁월한 지략의 명장이라는 사실을 김유신은 67세의 노령 탓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가.

 전후 4차에 걸쳐 공세를 취했건만 ‘삼국사기’에 빛나는 그 숱한 김유신의 전공은 어찌된 노릇인지 5만 대군으로 5000군사를 당하지 못해 패배에 패퇴를 거듭하니 소정방과의 약정 기일은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 참 큰일이다 싶어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가고 속에서 불이 날 지경이었다. 그날 종일 4전 4패해 군사들은 기세가 꺾이고 기력이 떨어지니 김유신은 이튿날 아침 모촌리산성을 치던 좌장군 김품일(品日), 황령산성을 치던 우장군 김흠춘(欽春 : 欽純) 두 대장을 곰티산성 본영으로 불러 작전회의를 열었다.

 “우리가 열 곱의 대병으로 이기기는커녕 하마(벌써) 1만 가까이 손해만 봤으니 우찌 면목을 세울 수 있겠노? 오늘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적을 깨치고 대국병(大國兵)과 합류해야 한데이, 알겠노? 약조를 어겨 소(蘇)장군 혼자 싸우다 지기라도 하면 우리 신라군의 체면은 어디 가서 찾으며, 또 당나라 그눔아들이 저거들만 싸워 이긴다캐도 그 망신을 우찌 당할 긴가 그 말이데이!”

 이에 흠춘이 화랑인 아들 반굴(盤屈)을 불러 이르기를,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을 다해야 마땅하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를 다해야 마땅하지 않겠노? 오늘 이 위급한 때에 니가 목숨을 내걸지 않고서 우찌 충효를 다할 수 있겠나 그 말이데이! 니 알아 들었제?” 반굴이 긴 대답 소리도 없이 “네잇!” 한 마디만 남기고 이내 저의 낭도들을 거느리고 백제군에게 달려 들어가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러자 품일 또한 화랑인 아들 관창(官昌 : 官狀)을 불러 세우고 이르기를, “내 아들은 나이가 이제 겨우 열여섯이나 의지와 기개가 마카(모두) 용감하기 짝이 없는기라! 관창아! 니는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의 모범이 될 수 있겠제?” 관창이 역시 “네잇!” 하는 대답 소리 한 마디 끝에 필마단기로 백제 진중으로 달려 들어가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웠으나 사로잡히고 말았다. 계백이 적장의 갑옷과 투구를 벗겨 본즉 아직 어린 소년인지라 차마 죽이기 아까운 마음이 들어 “어허, 네 용기가 가상하구나!” 길게 탄식하며 살려서 돌려보냈다.

 관창이 제 아비 품일에게 돌아가 말하기를 “내사 적진에 돌격했지만 적장의 목을 따고 대장기를 빼앗아오지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닌 기라예!” 그러고 나서 맨손으로 곰티재 아래 샘물을 떠 목을 축인 다음 말을 달려 창을 휘두르고 뛰쳐나갔다. 그리하여 힘이 다해 또다시 생포되니 계백은 “이 소년이 죽기를 작정했으니 어찌 그 장한 뜻을 받아 주지 않겠는가!” 하고는 관창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냈다.

 품일이 아들의 머리를 쳐들고 줄줄 흐르는 피가 옷소매를 시뻘겋게 적시는데도 울부짖었다. “느그들 마카 보거레이! 내 아들놈의 얼굴이 아직도 산 것 같구마!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내사 참마로 기분이 좋다 그기라!” 이에 신라군이 하나같이 잃었던 용기와 죽었던 힘을 불러일으켜 북 치고 함성 울리며 성난 파도같이 밀고 들어가니, 마침내 일세의 명장 계백 장군과 5000결사대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지 못했어도 4전 4승하던 기력이 떨어져 총공세를 펼치는 적군을 당하지 못해 산성의 요새로부터 황산벌로 밀려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것이 전쟁의 원리. 일당백의 투혼과 기백으로 버티던 결사대도 중과부적으로 밀리고 밀려 벌판 여기저기에서 살점을 가르고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좌군은 황령산성에서 밀려 시장골(屍葬谷)에서 전멸하고, 우군은 모촌리산성에서 밀려 충곡리(忠谷里)에서 전멸하고, 계백의 중군은 황산벌을 가로질러 청동리산성 아래에서 전멸했다. 7월 10일 온종일 걸린 싸움에서 5000결사대는 처절하게 학살당하고 계백 또한 충장산·충훈산으로도 불리는 수락산 아래서 전사하니 계백의 최후는 곧 백제의 최후나 마찬가지였다.

 돌이켜보건대 반굴과 관창 신라 소년 화랑의 용기도 가상하지만, 전투 중인 그 같은 시급하고 절박한 극한 상황 아래에서도 용장한 기상을 사랑하고 아껴서 적을 살려 보낸 계백 장군이야말로 참으로 뜨거운 인간애를 실천한 도량 넓은 대장부요 민족의 거인이라 하겠다.

 황산벌 전투가 계백군의 전몰로 끝나고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123년간 영화를 자랑하던 백제의 도성 사비성은 맥없이 함락되고 낙화암·대왕포의 한 맺힌 전설을 남긴 채 700년 백제사는 허망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소정방의 13만 대군은 좌평 의직의 방어군을 격파하고 백강(白江 : 금강)을 거슬러 올라와 7월 11일 김유신의 신라군과 합류해 사비성을 포위하니, 의자왕과 태자 효(孝)는 웅진(공주)으로 달아났으나 7월 18일 투항하고, 이로써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당시 백제는 5방 37군 700여 성, 76만 호를 거느린 국세로 능히 몇 달은 버틸 수 있었을 것을 어찌해 단 일주일 만에 제대로 전쟁다운 전쟁도 치러보지 못하고 멸망당하고 말았던가. 그것은 결국 허약하고 무능한 지배층이 불러온 무비유환(無備有患)이었다.

 그해 660년 음력 7월 18일 사비성이 무너지자 신라와 당군이 백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고 아비규환의 피바다 속에서 도성은 7일 밤낮을 철저히 불타고 파괴당해 지상에 버티고 서서 남은 것이라고는 소정방의 군공을 새긴 5층 석탑 하나뿐이었다. 석탑에 자신의 군공을 새긴 소정방은 8월 17일 의자왕과 왕자 4명, 대신 90여 명, 그밖에 남녀 2만 명을 포로로 이끌고 바다를 건너갔다.

 역사는 흘러가도 산하는 남는다. 부소산 아래 백마강은 되풀이되는 역사의 흐름처럼 여전히 흘러갔다. 바다 건너 끌려가는 왕과 대신과 혈육들을 피눈물로 울부짖으며 떠나보낸 망국의 유민들은 어찌 하늘 아래 같은 사람으로서 사람을 이토록 무참히 학살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절규하며 나라를 되세우기 위해 용감히 일어섰으니 그것이 곧 3년간 이어진 백제의 광복운동이었다.
연개소문, 당 태종 패퇴시킨 고구려 최후의 명장

연개소문의 초상화.

강화도 하점면 고인돌공원의 연개소문 유적비. 연개소문이 강화에서 태어났다는 설화
에 따라 세운 것이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용장한 고구려사를 빛낸 최후의 영웅이었다. 그가 집권하는 동안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이었고, 따라서 연개소문은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지배하던 당시 전 중국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연개소문에 대한 공포심은 당나라가 망한 뒤에도 오래도록 중국인들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연개소문이 오랫동안 임금과 대신들을 마구 죽이고 국정을 전횡한 포악한 독재자로만 알려져 왔던 것은 고구려의 멸망과 더불어 고구려인의 손으로 기록된 역사가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망한 뒤 고구려 역사는 중국인들의 손에 의해 쓰였고, 그 뒤 고려시대에 김부식이 당나라와 신라 측의 입장에 따라 당시 고구려의 역사와 연개소문의 행적을 ‘삼국사기’에 기록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나라와 신라인들에게 공포의 대상, 증오의 대상이었던 까닭에 연개소문은 세상에 두 번 다시 나타나서는 안 될 부정적 인간상으로 각인됐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해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법. 제왕에게 무조건 충성을 바쳐야 하고, 대국을 섬겨야 하는 시대가 지나가자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다. 그는 동명성왕이 건국하고,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이 전성기를 이룩하고,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이 위엄을 드높인 천손(天孫)의 나라 대고구려의 역사를 마지막으로 빛낸 불세출의 영웅으로 재평가됐다.

 자기 나라 자기 겨레의 역사를 지키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근래 중국이 ‘동북공정’이니 뭐니 해서 국가적 사업으로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탈취하고자 광분하는 이유를 간파하고 직시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 엄연한 한국사인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사 일부로 둔갑시키려는 저의는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동포가 많이 살고 있는 동북 3성, 곧 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 등에 대해 ‘만주는 우리 땅’이니 ‘고토 회복’이니 하는 소리를 꿈에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만주대륙은 고조선의 발상지요, 고조선 다음에는 부여와 고구려·발해가 차례로 일어섰던 우리 고대사의 중심지였다. 백제는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왔고, 신라도 건국의 주체세력인 박혁거세 일족이 만주에서 남하했으니, 결국 만주는 우리 민족사의 요람이요 근거지였다. 중국이 고구려와 발해가 현재 자기네 영토에 있었던 나라라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중국사의 일부라고 강변하는 것은 역사패권주의, 역사제국주의에 다름 아니다. 중국 사학자들은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 중앙정권의 지방통치기구에 불과하고, 그 주민은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이라는 터무니없는 궤변을 연발하고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고조선과 부여도 만주 땅에 있었으니 그 역사가 중국사의 일부라고 역사를 왜곡·날조하고 탈취하려 획책하고 있으니 울분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사태가 이토록 비상한 지경에 이른 것은 우리 모두가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고, 역사교육을 소홀히 한 데서 비롯된 자업자득이다. 그런 까닭에 중국인들에게는 대대손손 공포의 대왕으로 군림했던 고구려 최후의 명장 연개소문의 위업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일찍이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연개소문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연개소문은 당 태종 이하 당시 전 중화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신·구 ‘당서’가 비록 그 국가적 수치를 꺼려 당시의 전쟁 사실을 적을 때 연개소문의 공격적 사실을 빼고 방어전의 사실만 썼을 뿐이다. 그럴뿐더러 그 방어전의 기사 가운데도 오직 안시성의 한 번 전역(戰役)을 ‘당의 군사가 그들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고 적은 것 이외에는 당 태종이 승리한 것으로 적었다. 그러나 그 ‘막리지, 더욱 교만 방자했다’ ‘막리지, 감히 나오지 못했다’ 등 문구의 측면을 보아 당인의 연개소문에 대한 공포가 어떠했는지 증명할 수 있다. 이위공(李衛公)의 ‘병서’에 ‘막리지는 자칭 병법가였다’고 한 비웃는 말의 이면에서 연개소문의 전략을 감탄한 의사가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만일 연개소문이 죽지 않았으면 당의 군사가 고구려의 한 치 땅을 빼앗지 못했을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

 단재는 연개소문이 당 태종의 침략전쟁 때 방어전만 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습을 가해 중국 내륙까지 진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은 ‘삼국사기’ 열전 개소문 편에서 이렇게 썼다.

 -그가 바른 도리로써 임금을 섬기지 않고 잔인·포악한 짓을 제멋대로 하여 대역죄까지 지었다. ‘춘추’에 임금을 죽인 역적을 토벌하지 않는 것은 그 나라에 현인이 없음이라고 했는데, 연개소문은 제 몸뚱이를 보전하여 제 집에서 죽었으니, 이는 요행이라 할 수 있겠다.-

 사대주의 유학자 김부식이 볼 때 대국(당)과 신라의 원수였던 연개소문이 집에서 편히 죽어서 참으로 아쉽다는 소리다. 연개소문에 관한 역사적 평가는 이처럼 극명하게 엇갈리지만, 그는 분명히 출중한 지용과 비상한 통솔력으로 고구려와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바꿔 놓은 일세의 영걸이었다. 연개소문은 고·당 전쟁의 주역이었으며, 중국사에서 가장 훌륭한 제왕으로 꼽히는 당 태종 이세민의 유일한 맞수였다.

 연개소문이 영류왕 17년(631)부터 당나라 침공을 막기 위해 동북쪽으로 부여성에서 남쪽으로 발해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는 공사를 지휘했다는 기록을 볼 때 그는 영양왕 18년(607) 쯤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가계에 관해서는 맏아들 연남생의 묘지명에 ‘천남생(泉男生)의 증조부는 자유(子遊)이고 조부는 태조(太祚)다. 나란히 막리지를 역임했는데, 부친 연개소문은 대대로를 역임했다. 조부와 부친이 야금(冶金)에 뛰어나고 활을 잘 다루었다. 아울러 병마를 장악하고 나라의 권세를 모두 잡았다’고 나온다. 그런데 연남생의 성씨가 무슨 까닭에 천씨가 되었는가. 이것은 이세민 아비의 이름이 이연(李淵)이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천씨로 둔갑시킨 것이다. 저희 임금 이름과 같기 때문에 남의 나라 집권자의 성씨를 제멋대로 바꾼 것이다.

 연개소문은 동부대인 연태조의 아들로 태어나 영웅적 기상과 비범한 의기로 15세에 이미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떨쳤다고 한다. 아버지가 죽어 그 직위를 계승하고자 했으나 여러 사람이 그의 성품이 ‘포악’하므로 거부했는데, 그는 여러 사람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간청하면서 만일 옳지 않은 일을 저지를 경우 죽여도 좋다는 다짐까지 했다고 전한다.

 그렇게 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된 연개소문은 영류왕 14년부터 천리장성 축조를 감독하며 점차 두각을 나타내고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가 유혈혁명을 일으킨 것은 영류왕 25년(642) 9월이었다.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킨 직접적 원인은 영류왕과 대신들이 자신을 제거하기로 모의했기 때문이다. 이런 모의를 미리 알아낸 연개소문은 대신 180여 명을 수도 장안성 남쪽 교외에 열병식을 거행한다고 초청해 모조리 죽여 버렸다. 선수를 친 것이다. 그리고 군사를 이끌고 황궁으로 쳐들어가 영류왕을 죽이고, 그의 아우 고대양(高大陽)의 아들 고보장(高寶藏)을 새 황제로 내세웠다. 그렇게 하여 연개소문은 최고 권력자가 됐다.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킨 간접적 원인은 영류왕과 친당파 대신들이 당나라에 대해 굴욕적인 저자세 외교정책을 펼쳐 연개소문을 비롯한 강경파 군부의 불만과 분노를 샀기 때문이었다.
굴욕적 저자세 외교정책에 반기
고구려 안시성전투 기록화.
고구려 무사들의 기상을 보여주는 고분벽화의 기마수렵도.

  연개소문의 거사로 목숨을 빼앗긴 영류왕은 이름이 고건무(高建武)로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다. 영양왕 23년(612) 수양제의 침략으로 고·수전쟁이 벌어지자 영양왕은 건무를 평양성방어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건무는 수나라 군사를 대파하고 평양성을 지키는 큰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618년에 영양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그런데 황제가 된 영류왕은 전쟁영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양왕의 강경책과는 반대로 유화적 외교정책을 채택했다.

 한편, 그 해에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그 이듬해에 영류왕은 사신을 보내 당나라 건국과 고조 이연(李淵)의 즉위를 축하했다. 그러자 당은 사신을 보내 고·수전쟁 중 생긴 포로 교환을 제의했다. 영류왕이 응하자 수나라와 목숨 걸고 싸웠던 대부분의 장수들은 이런 굴욕적 유화책에 불만을 품었다.

 그런데 영류왕 9년(626)에 당에서 정변이 일어났다. 이연의 둘째아들 이세민(李世民)이 친형인 태자 건성과 동생인 원길을 죽이고, 아비를 위협해 왕위에 오른 이른바 ‘현무문의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형제를 죽이고 아비를 협박해 왕좌를 차지한 패륜아 이세민이 바로 중국사의 대표적 성군이라는 당 태종이다.

 당 태종은 중국통일이 마무리되자 이번에는 천하통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영류왕이 이런 속셈도 모르고 또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당의 국경을 표시한 지도(봉역도)까지 바쳤다. 고구려의 계속되는 저자세 외교에 자신감을 얻은 이세민은 이듬해인 631년에 장손사(長孫師)를 사신으로 보내 수나라 전사자들의 해골을 수습해 매장하고 위령제를 지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세운 전승기념물인 경관(京觀)까지 제멋대로 허물어버리고 돌아갔다. 이런 오만방자한 처사에 고구려 무장들의 분노는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부친의 뒤를 이어 동부대인과 막리지에 올라 천리장성 축조를 감독하며 이런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던 연개소문은 이대로 뒀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류왕을 끼고 도는 주화파 대신들이 사사건건 강경책을 주장하고 나서는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들었다. 그러자 연개소문이 선수를 쳐서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임금을 죽이고 집권자가 됐다는 보고를 받은 이세민은 아연 긴장했다. 연개소문이 607년에 출생했다면 이세민은 598년에 태어났으니 9세 연상이다. 이세민은 말했다.

 “개소문이 자기 임금을 죽이고 국정을 독판치고 있으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병력으로 고구려 땅을 빼앗기는 어렵지 않으나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거란과 말갈을 시켜 그들의 버릇을 길들이고자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그러자 이세민의 처남인 재상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대답했다.

 “개소문이 자기의 죄가 큰 줄 알고 우리가 토벌할까 두려워서 방비를 든든히 하고 있사오니 폐하께서 우선 참고 계시면 개소문이 방심을 하게 돼 더욱 교만하고 게을러져서 그의 죄악이 갈수록 커질 터이니 그렇게 된 뒤에 쳐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 무렵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백제의 장군 윤충(允忠)이 대야성을 함락시킬 때 성주 김품석(品釋)이 죽었다. 김품석은 김춘추(春秋)의 사위였다. 다급해진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한편 김춘추를 고구려로 보내 구원을 요청토록 했다. 하지만 김춘추는 연개소문에 의해 감금당했다가 아무 소득도 없이 도망치다시피 귀국해야만 했다.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당은 보장왕 3년(644)에 분쟁을 조정한다는 명목으로 현장(玄奬)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고 화친할 것을 권했다. 마침 신라를 공격해 두 성을 함락한 연개소문이 황제의 부름을 받고 돌아와 현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신라와 적대하는 것은 어제오늘에 생긴 일이 아니다. 수나라가 우리를 침범했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500리의 땅을 도둑질해 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가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결코 화해할 수 없다!”

 그러자 현장이 이렇게 반문했다.

 “이미 지난 일을 따져서 무엇 하겠는가? 옛 땅을 찾기로 말한다면 귀국이 차지하고 있는 요동도 옛날에는 모두 중국 땅이었다. 그러나 우리 당나라는 그것을 돌려달라고 하지 않는데 유독 고구려만 옛 땅을 찾으려고 고집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이에 연개소문이 대노해 천둥처럼 호통쳤다.

 “이런 고약한 오랑캐 놈을 봤나! 우리 요동 땅을 옛날 중국 땅이라고 하는 것은 유철(劉澈 : 한 무제)이 도둑질해 이른바 한사군(漢四郡)을 뒀던 것을 말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따진다면 지금 당의 영주나 유주도 모두 옛날 우리의 군현이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반드시 되찾고 말 터이니 너는 날래 돌아가서 너의 왕 세민이한테 그렇게 전하라우! 알갔네? 날래 돌아가라우야!”

 현장의 귀국보고를 받은 이세민은 마침내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켰다. 보장왕 4년(645) 4월에 요하를 건넌 당군은 개모성과 요동성을 함락시킨 뒤 백암성을 공격했다. 비겁한 성주 손대음(孫代音)이 당군과 몰래 내통하는 바람에 백암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당군은 이번에는 안시성으로 진격해 성을 겹겹으로 포위했다. 당시 안시성에는 지용을 겸비한 출중한 장수 양만춘(楊萬春)이 성주로 있었다.

 안시성전투는 그해 7월에 본격적으로 불붙었다. 이세민은 포차나 당차 같은 공성무기로 하루에 6, 7차씩 공격해도 별 효과가 없자 7월 15일부터 9월 15일까지 60일간 50만 명을 동원해 성벽보다 높은 토산을 쌓았다. 그러나 토산은 며칠도 안 가서 무너졌다. 그러자 고구려 결사대 수백 명이 재빨리 성벽을 통해 밀고나와 토산을 점령했다. 그리고 참호를 파서 당군의 진격을 막은 뒤 수비를 굳건히 했다.

 이후 양군은 토산을 두고 4일간 치열한 접전을 벌였는데 결과는 고구려군의 승리였다. 때는 음력 9월 말. 찬바람은 불어오고 양식도 떨어져가고 있었다. 안시성은커녕 자기들이 쌓은 토산조차 탈환하지 못한 이세민은 마침내 이번 전쟁이 승산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남은 길은 퇴각뿐. 결국 이세민은 후퇴명령을 내렸다. 이세민이 급히 퇴각을 결정한 것은 추위도 추위지만 무엇보다 연개소문이 당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유격전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사서는 이세민의 퇴각을 이렇게 전한다.

 - 황제가 생각하기를 요동은 일찍 추워져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마를 오래 머물게 할 수 없으며, 또한 군량이 장차 떨어지겠으므로 군사를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 안시성 밑에서 군사로 시위를 하고 돌아가니 성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성주가 성에 올라 절하며 작별하니 황제는 그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칭찬하면서 겹실로 짠 명주 100필을 주어 임금 섬기는 성의를 격려했다. -

 참으로 웃기는 소리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군사를 이끌고 황급히 도망치기에 바쁜 판국에 무슨 여유로 군사 시위를 하며, 또 패퇴하는 주제에 적장을 가상타고 칭찬하며 상까지 줬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렇게 해서 제1차 고·당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는데, 이세민은 죽기 전까지 패전의 치욕을 잊지 못하고 설욕의 기회만 노렸다. 하지만 워낙 혼이 난 탓에 정면공격은 못하고 그 대신 산발적이며 국지적인 도발을 꾸준히 계속했다.
세 아들 `골육상쟁' 고구려 멸망 앞당겨
사수전투 기록화. 연개소문은 이 전투에서 방효태의 당군 5만을 전멸시켰다.
고구려 벽화의 중갑무사의 전투도.
 보장왕 8년(649) 4월에 연개소문의 숙적 당 태종 이세민이 죽었다. 그가 죽기 전에 고구려를 치지 말라고 유언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이는 허구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고구려에 설욕하지 못한 것을 필생의 한으로 여기고 있어서 수많은 전함을 건조하고 30만 대군으로 제4차 고구려원정을 꾀하다가 죽어버린 것이다. 그의 사인은 아마도 연개소문에게 패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양만춘 또는 연개소문에게 맞은 화살촉의 독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고, 패전하고 퇴각할 때 피부병과 등창이 나서 앓다가 죽었다고도 하며, 패전의 치욕을 당한 원한이 만성두통이 돼 죽었다는 설도 있으니, 어느 쪽이 맞든 결국 그는 연개소문 때문에 죽은 셈이다.

 이세민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이치(李治, 당 고종)는 아비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보장왕 14년(655)에 정명진(程明振)과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또다시 고구려를 치게 했으나 실패했다. 또 보장왕 17년과 그 다음해에도 정명진과 설인귀(薛仁貴) 등을 보냈으나 역시 패퇴했다. 보장왕 19년(660) 8월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고 여세를 몰아 그해 12월에 또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 이듬해 4월에 초조해진 이치는 35만 대군을 동원해 친정에 나서려다가 여러 대신이 말리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장수들을 보내 계속해서 고구려를 공격토록 했다. 그해 9월에 연개소문은 맏아들 남생(男生)에게 군사 수만을 주어 압록강을 지키게 하니 당군이 감히 강을 건너지 못했다.

 보장왕 21년(662). 당군은 정월부터 또다시 고구려를 침공했다. 연개소문은 머리끝까지 분노했다. 그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해 사수싸움에서 당군 총사령관인 방효태(龐孝泰)와 그의 아들 13명 및 전군을 몰살시키고, 평양을 침공하던 소정방까지 패퇴시켰다. 그리고 사서는 연개소문이 보장왕 25년(666)에 죽고 그의 맏아들 남생이 막리지를 세습해 권력을 장악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정말로 보장왕 25년에 죽었는가 하는 데에는 많은 논란이 있다.

 중국 하남성 낙양박물관에 있는 남생 묘지명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 남생의 나이 9세가 되자 선인(仙人)의 지위를 주었다. 15세에 중리소형을 주었고, 18세에 중리대형을 주었으며, 23세에 중리위두대형으로 고쳐 임명했고, 24세에 나머지 관직은 그대로 하고 장군을 겸하게 했다. 28세에 막리지로 임명하고 삼군대장군을 겸해 주었으며, 32세에 태막리지로 더해 군국을 총괄하는 아형원수가 되었다. -

 남생이 막리지가 된 해는 보장왕 20년(661)이니 그 이전에 연개소문이 죽었다고 볼 수는 없다. 연개소문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 사수대첩에서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형제 등 5만여 당군을 섬멸한 해가 그 이듬해가 아닌가. 또한 666년에 죽었다는 설도 그해에 남생이 당으로 도망치는 등 여러 사건이 벌어진 것을 볼 때 납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이 죽은 해는 662년부터 665년 사이, 즉 663년 또는 664년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연개소문이 필자의 추정대로 607년에 태어나 664년에 죽었다면 그때 그의 나이 환갑도 안 된 58세였다. 그의 사인은 전혀 기록이 없지만 아마도 과도한 국정의 부담 때문에 심장마비로 돌연사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세의 영걸 연개소문은 그렇게 죽었는데, 그는 죽기 전에 남생·남건·남산 세 아들을 불러 이렇게 유언했다고 ‘일본서기’는 전한다.

 “너희 형제는 고기와 물같이 화합해 벼슬을 다투는 짓을 하지 마라.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불세출의 영웅이었지만 ‘자식 농사’는 잘못 지었다. 그가 죽은 지 2, 3년도 안 돼 세 아들이 권력투쟁을 벌여 결국 고구려의 멸망을 앞당겼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이 그런 유언을 한 것도 평소 세 아들의 사이가 나쁜 것을 알았다는 방증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세 아들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은 연개소문 역시 남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싫어한 독재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형제 간의 골육상쟁은 남생이 수도 장안성을 비운 사이에 일어났다. 남생이 남건과 남산에게 국정을 맡기고 지방순시를 떠난 사이에 어떤 자가 형제 간을 이간질했다. 그 자가 두 동생에게 “남생이 두 분이 자기를 싫어하므로 장차 두 분을 제거하려 합니다”라고 하자 두 동생이 이를 믿지 않았다. 그러자 또 다른 자가 이번에는 남생에게 “남건과 남산이 태막리지가 돌아오면 저희들의 권력이 빼앗길까 두려워 도성으로 못 들어오게 하려 합니다”라고 했다. 삼형제는 처음엔 이 말을 믿지 않다가 마침내 서로를 의심하게 됐다. 남생이 비밀리에 심복을 장안성에 보내 사실을 알아오라 시켰는데 그만 동생들에게 붙잡혔다. 이 일이 직접적 원인이 되어 형제 간의 갈등은 상쟁으로 번졌다.

 남건은 황명을 빙자해 남생을 소환했으나 남생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남건은 남생의 아들이며 자기 조카인 헌충(獻忠)을 죽여 버렸다. 이로써 내전이 벌어졌다. 국내성을 장악한 남생은 이어서 오골성을 점령하고 남건·남산 두 아우와 무력충돌했다. 오골성에서도 쫓겨난 남생은 결국 아들 헌성을 당나라로 보내 항복했다. 그러자 당 고종은 남생에게 요동도독 겸 평양방면 안무대사란 벼슬을 줬다. 고구려의 최고집권자가 하루아침에 자기 나라를 공격하는 적국의 최고사령관으로 둔갑한 것이었다. 이것이 보장왕 25년(666) 9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당은 대군을 일으켜 본격적인 고구려 정복에 나섰다.

 한편 고구려는 남건이 막리지가 되어 국정을 전담하고 당군의 침략을 막으려 했지만 한번 기울기 시작한 국운은 둑이 터진 제방과도 같아 걷잡을 수 없었다. 보장왕 27년(668) 고구려의 내분을 둘도 없는 호기로 삼은 당은 반역자 남생을 길잡이 삼아 5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설상가상으로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淵淨土)까지 12개 성을 들고 신라에 항복했다. 신라도 20만 대군을 동원, 고구려를 공격했다. 남건·남산이 죽을 힘을 다해 도성을 지켰지만 이미 때는 늦어 그해 9월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추모성왕의 개국 이후 28황제 705년을 이어오던 대제국 고구려, 우리나라 5000년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개척했던 고구려는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다.

 결과적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원인은 당나라의 거듭된 침공도 있었지만, 연개소문의 못난 세 아들 때문이었다. 고구려의 위엄을 사방에 떨치던 불세출의 영웅 연개소문, 고구려 최후의 자존심 그 자체였던 연개소문이 지하에서 그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비분하고 원통해했을 것인가. 그래서 역사 교육을 소홀히 하지 말고, 되풀이되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끝으로 연개소문의 형제들을 살펴본다. 연개소문에게는 반역자가 된 아우 연정토 외에 최근 연수영(淵秀英)이라는 (이복)누이동생도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연수영은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낭자군(娘子軍)을 이끌고 조력했고, 고당전쟁 때는 고구려 요동함대의 총수로서 당 수군을 맞아 연전연승한, 고구려는 물론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장군, 그것도 수군 장수였다. 연수영에 대해서는 다음호에 소개한다.
연수영, 唐 무찌른 우리 역사 최초 여장군
연수영이 처음 성주로 부임해 수군을 양성한 요동반도 남해안 석성 유적.
연개소문과 연수영 남매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돈황석굴의 벽화.
우리 역사에는 여왕도 있었다. 또 여왕에 못지않게 권력을 휘두른 태후와 왕비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남자들 못지않게 맹렬히 활약한 여장부도 많았다. 그러면 여성 장군도 있었을까? 대답은 ‘그렇다’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따르면 가야시대에는 여성으로만 구성된 여군부대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가야시대 고분에서 투구와 갑옷을 입고 무장한 상태의 여성 시신이 발굴됨에 따라 이를 근거로 여성 군사지휘관의 존재를 추정하게 된 것이다.

 동명성왕 고주몽(高朱蒙)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고, 나중에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망명해 새 나라를 세운 백제의 국모 소서노(召西努)도 여자의 몸으로 군사를 거느렸으며, 때로는 전투에 앞장섰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정규군 장수도 있었을까? 있었다. 고구려의 연수영(淵秀英)이 바로 그렇다. 그녀는 정규군 장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1300여 년 전 고대에 해군 최고지휘관이었다. 연수영은 다름 아닌 당시 고구려의 최고집권자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누이동생이었다.

 비록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고구려 말기 해군기지가 있던 발해만의 비사성과 석성 등지에서 연수영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비석이 발굴된 것은 근래. 비록 금석문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고구려 말기에 연수영이란 여장군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요녕성 청석관 유적에서 연수영에 관한 비문을 처음 발굴한 사람은 1940년대에 개주 현장을 지낸 신광서라고 하며, 우리나라 학자로는 1995년에 건안성과 청석관 일대 연수영의 유적을 답사하고 비석의 사본 일부를 구해 온 고구려사 연구가인 한민족역사연구소 김금중(錦中) 소장으로 알려졌다. 이어서 당시 고구려연구회 이사장인 서경대 서길수(徐吉洙) 교수, 고구려 해양사를 연구한 동국대 윤명철(尹明喆) 교수 등이 현장을 답사했는데, 현장에 서 있는 것은 중국 측에 의해 새로 세워진 안내판에 불과했다고 한다. 내용도 하나같이 이러저러한 전설이 있다는 식이었다.

 연수영이란 존재를 우리 학계가 주목한 것은 2003년에 중국 측이 청석관 유적지를 유네스코에 등록한 것이 계기였다. 그동안 국내에선 연수영 관련 비문 발굴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다가 유네스코 등록을 계기로 비로소 공론화한 것이다. 현지 전설이나 비문에 고구려와 당의 해전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심지어는 연수영의 사당까지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학계는 아직도 연수영의 존재를 우리나라와 중국의 그 어떤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연수영 관련 유적은 현재 중국의 해군기지가 됐고, 비문 등도 중국정부에서 기밀로 엄중하게 관리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접근할 수 없는 실정이다.

 한편, 중국의 야사인 ‘서곽잡록’과 ‘비망열기’라는 책에도 연수영의 전설이 실려 있다. 연수영의 이름이 연소정 또는 개수영으로 나오는 자료도 있다. 하지만 사서에 나오지 않는다고 엄연한 사실(史實)을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국의 사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대표적인 정서로 인정하는 ‘삼국사기’에도 수많은 오류가 있지 않은가. 사서의 기록보다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인들의 손으로 새겨진 비문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금도 고구려의 크고 작은 성들이 있던 요동지방에 가면 여러 곳에 연개소문과 연수영의 전설이 생생하게 서려 있다. 특히 연개소문과 연수영 남매가 머물던 곳에서는 우리 동포 조선족이 아닌 중국인들도 당태종보다 연개소문을 신장(神將)처럼 추앙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연수영은 610년 무렵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일설에는 연수영의 아래로도 연수진이란 여동생이 더 있었다고 전한다. 집안이 대대로 무장을 배출한 만큼 연수영도 어려서부터 무술을 수련했을 것으로 보인다.

연개소문이 비뚤어진 나라를 바로잡고자 혁명을 일으킨 것은 영류왕 25년(642) 9월이었다. 연수영도 오라비가 주도한 이 혁명에 자신이 거느린 낭자군(娘子軍)들을 이끌고 참여했을 것이다.

 연수영이 고구려의 전략적 군사요충인 석성 도사(성주)로 부임한 것은 오빠와 함께 혁명을 일으키고 보장왕을 새 황제로 내세운 직후였다. 연수영이 중앙정계를 떠나 변경의 지방관으로 내려간 이유는 분명치 않다. 연수영이 도사로 있던 석성 소장루에서 발견된 비문 내용을 소개한다. ‘소장루는 연개소문이 자기 누이 개수영(연수영)을 위해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원래 있던 누각은 없어졌고 지금 있는 것은 원래대로 고친 것이다. 연수영은 여자 장수라 다른 장령들과 내성에서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에 홀로 이 누각에서 산 것이다. 개수영은 문예·군략·무예가 뛰어났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으뜸 장수가 됐다. 연수영은 나라를 연 이래로 수군의 장수로는 다른 장수들을 능가해 가장 뛰어났다. 이곳 소장루는 날마다 군무를 처리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연수영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며, 활약상도 주로 642년에서 651년의 10년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고구려가 당에 멸망했고, 그 시기의 역사는 중국인의 손으로 쓰여 온전한 고구려의 역사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아 있는 명문(銘文)의 편린을 통해서나마 연수영이 남성 못지않게 문무의 재능이 탁월하고, 지략과 리더십이 출중했다는 사실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혁명 이후 중앙의 요직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할까. 자신의 지분(持分)을 포기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혹시 연개소문 (이복)남매 간에 무슨 내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평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적군(당군)이 쳐들어오면 육지보다 바다에서 막아야 한다. 바다는 하늘이 내린 요새이니 이 바다를 지키는 장수가 되고 싶다.” 그래서 그녀는 수군 장수가 됐고, 당나라와 전쟁이 벌어지자 눈부신 활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연수영은 요동반도 남해안 장산군도 지역에 여러 성곽을 개축하고, 전함을 수리 건조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등 수군 양성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것이 643년 무렵. 이에 따라 고구려의 해군력은 이전보다 훨씬 증강하게 됐다.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켜 황제를 바꾸고 최고 권력자가 됐다는 보고를 받은 이세민은 고구려정벌군을 일으켰다. 보장왕 4년(645) 4월에 요하를 건넌 당군은 요동성·개모성·백암성을 점령하고 안시성을 포위했다. 당시 안시성 성주는 지용을 겸비한 출중한 장수 양만춘(楊萬春)이었다.

 그러면 고당전쟁(高唐戰爭)에서 연수영은 어떤 활약을 했던가. 지금까지 알려진 금석문의 기록들을 토대로 살펴본다.
당나라에 연전연승 …고구려 해전사 빛낸 여걸
장산군도 해협은 연수영과 고구려 수군이 최대의 승리를 거둔 곳이다.

조선시대의 주력선 판옥선. 우리나라 고대 해군의 전함도
이와 비슷한 구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사성은 연수영이 수군 원수로서 요동함대의 본영으로 삼던 역사의 현장이다.
 보장왕 1년(642)에 석성도사로 부임한 연수영은 당군의 침략에 대비, 수군의 증강부터 착수했다. 그녀는 5000명의 군사를 수군으로 양성했으며, 70여 척의 전함도 건조했다. 연수영은 실권자 연개소문의 누이동생이라는 후광이 아니라 남자 장수 못지않게 문무에서 탁월한 능력과 비상한 통솔력으로 부하 장졸의 신망을 받았다.

 보장왕 4년(645)에 드디어 당군이 쳐들어왔다. 전쟁이 터지자 연수영은 당군의 수군기지인 창려도로 진격해 적함 100여 척을 불태우고, 곧이어 성산성의 적군을 쳐서 무찌르니 죽은 당군이 2만 명에 이르렀다. 연수영은 이 군공으로 석성도사에서 수군장군 겸 모달로 승진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군사를 이끌고 대흠도와 광록도 등지에서 각각 적선 50여 척을 불사르고 8000여 명의 적군을 죽였다. 하지만 아군은 연수영의 빼어난 군략 덕분에 피해가 거의 없었다.

 잇달아 노백성과 가시포에서도 적선 80여 척을 불태우고 적군 5000여 명을 죽이는 전공을 올렸다. 이 전공으로 연수영은 수군군주로 승진했으며, 본진을 광록도 부근 노백성으로 옮겼다.

 이 시기의 중국 측 사서인 ‘신당서’와 ‘구당서’에 당시의 해전 전황이 거의 백지상태인 것은 연수영에게 당한 참패가 너무나 치욕스러웠기 때문에 이를 은폐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역사가들이 자기네 치욕은 감추고 주변국의 빛나는 역사는 모두 깔아뭉개는 것을 역사서술의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당시 해전에서 적장 설만철은 구사일생으로 달아났고, 전함 200여 척, 군사 1만5000명 이상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연수영의 빛나는 연승 행진은 계속됐다. 창려와 성산 전투에서 적선 100여 척을 격침하고 적군 2만여 명을 죽였으며, 대흠도와 광록도 해전에서도 적선 100여 척을 격침하고 적군 8000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뒀다.

 수군의 연전연패에 대노한 당 태종 이세민은 설만철·구행엄·왕대도 등 수군장수들에게 총공격령을 내렸다. 이에 당군이 가시포와 노백성을 침공했지만 연수영의 고구려 수군에게 전선 80여 척과 군사 5000여 명을 잃고 퇴각했다.

 사학자 서길수, 전영미 박사 등이 연구한 비사성 발굴 비문에는 보장왕 4년 음력 8월 15일에 벌어진 요동반도 남해안 대장산도 해전에서 당군은 1000여 척의 전함에 10만여 대군을 동원했으나 연수영의 고구려 수군에게 대패해 총 군세의 절반인 수백 척의 전함과 3명의 대장을 비롯해 5만여 명의 병력을 잃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지역 전설에 따르면 당시 연수영이 거느린 고구려 수군의 병력은 당군의 5분의 1에 불과한 2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다음 달에 패전보고를 받은 이세민은 이렇게 소리쳤다고 ‘구당서’는 전한다.

 “적보다 5배나 많은 군사로도 이기지 못했으니 장차 어찌하랴!”

 그 이듬해인 보장왕 5년(646)에는 산동반도 봉래포 해전이 있었다. 당나라 본국을 원정한 이 해전에서도 연수영은 대승을 거뒀고, 그 전공으로 수군원수가 됐다. 그러나 또 해가 바뀐 647년 7월. 이세민은 우진달을 청구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산동성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공격토록 하고, 이세적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육로로 침공토록 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연수영과 고구려군의 맹렬한 반격에 아무 소득도 없이 패퇴했다. 그 이듬해에도 설만철이 청구도행군대총관이 되어 3만 명을 이끌고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을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결사적 응전에 퇴각했다. 연수영은 즉각 보복공격을 가해 적선 수백 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으나 군비(軍備)가 바닥나는 바람에 부득이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남을 시기하고 모략하는 부류의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연수영의 등에 비수를 박은 사람은 어이없게도 그녀의 둘째 이복오라비 연정토였다. 648년 7월, 연정토 일당의 참소로 연수영은 파직되고 부여성으로 유배당했다. 수군원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연정토였다. 연정토는 수군총수가 되자마자 군공을 탐내 그해 9월에 당의 수군기지인 신성도 협량곡을 공격했다가 참패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동생들의 군권 다툼에 노한 연개소문이 연정토를 파면해 옥에 가두고 그의 일당에게 철퇴를 가했다. 그리고 억울하게 귀양살이하던 연수영을 다시 등용해 수군군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고구려는 내분에 휩싸여 국론이 분열되고 국력이 약화된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나라가 망한 것은 예외 없이 내우외환 때문이다. 부국강병과 국리민복을 제쳐둔 채 집안싸움이나 하는 나라는 망한다는 진리를 역사는 교훈으로 일러주고 있다.

 보장왕 19년(660) 8월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그해 12월에도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 소득이 없었다. 보장왕 21년에 당군은 정월부터 또다시 고구려를 침공했다. 머리끝까지 노한 연개소문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해 사수싸움에서 당군 총사령관인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 및 전군을 몰살시키고, 평양을 침공하던 소정방까지 패퇴시켰다.

 연개소문은 보장왕 23년(664)께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58세쯤 됐을 것이다. 맏아들 남생(男生)이 막리지를 세습해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겨우 3년도 안 돼 세 아들이 권력투쟁을 벌여 결국 고구려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보장왕 27년(668), 고구려의 내분을 둘도 없는 호기로 삼은 당은 반역자 남생을 길잡이 삼아 5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설상가상으로 연정토까지 12개 성을 들어 신라에 항복했다. 신라도 20만 대군을 동원해 당군과 합세, 고구려를 공격했다. 남건·남산 등이 죽을 힘을 다해 도성을 지켰지만 이미 때는 늦어 그해 9월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동명성왕이 개국한 대제국 고구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일세의 여걸 연수영의 최후에 관해서는 오고성에서 발굴된 비석이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 개화(開化) 12년 신해 8월 태대형 연정토, 을상 선도해, 대신 계진 등이 태대사자 연수영이 모반을 도모한다고 참소하니 태왕도 연수영이 다른 뜻을 품었다고 의심했다. 태왕이 고심하다가 연수영을 파면했다. 풍문에는 연수영이 반역을 꾀했다는 참소로 사사됐다고도 하고, 전리로 방출돼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다. 나라사람들은 연수영의 무죄를 믿었기에 이를 매우 통탄했다.… -

 이래도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다고 연수영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곤란하다. 중국이 연개소문이나 연수영을 고구려의 인물로 인정해 그들의 숨결과 자취가 서린 청석관과 석성, 비사성 등 유적을 유네스코에 등록할 것으로 보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고구려는 ‘중국 변방의 지방정권’이고, 고구려인은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이라고 역사를 왜곡하고 탈취하기 위해서다. 사정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실증주의의 탈을 쓰고 일제 식민사관과 중화 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사학자들은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또 아직도 한국사의 영역이 압록강·두만강 이남에 국한된다느니, 이제 민족이란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느니 하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내뱉는 민족적 자존심도 주체성도 없는 일부 사학자가 여전히 강단에서 활개 치는 사실도 참으로 개탄스럽다.
장문휴, 바다 건너 당 군사 요충지 기습 성공
발해의 첫 도읍지 오동성


  장문휴(張文休)는 발해국의 대장군이다. 그의 이름과 행적은 우리나라 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중국의 ‘구당서’와 ‘신당서’에만 겨우 한두 줄이 나올 뿐이다. 따라서 그의 가계가 어떻게 되는지, 그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장수가 됐는지는 역사의 수수께끼다. 다만 알려진 사실은 장문휴 장군이 발해 제2대 제왕인 무제(武帝, 大武藝) 14년(732) 9월에 황명을 받들어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 하구를 출발, 해로로 당나라 등주, 오늘의 산동성 봉래현 동남부를 기습 공격해 초토화시켰다는 점이다.

 당시 등주는 당나라 동해안의 중요한 경제적·군사적 요충지였으므로 수만 명의 육·해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군은 장문휴가 지휘하는 발해 원정군의 공격이 너무나 신속했으므로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한 채 궤멸당하고 말았다. 장문휴는 전격 기습작전으로 당군을 섬멸한 뒤 곧장 등주성을 공격, 등주자사 위준(韋俊)을 잡아 죽이고 숱한 당군을 격살했다. 그리고 처음 공격할 때와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철군했다. 그야말로 질풍노도, 전광석화 같은 기습작전이었다.

 당시 당나라 임금 현종(玄宗)은 장문휴 장군이 거느린 발해군의 공격을 받아 등주가 완전히 파괴되고 자사까지 죽었다는 패전 보고를 받자 노발대발해 우령군장군 갈복순(葛福順)에게 발해군을 토벌하라 명령했지만 갈복순이 등주로 달려갔을 때 발해군사와 함대는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뒤였다.

 현종은 등주의 패전을 잊지 않고 보복할 날만 기다리다 그 이듬해 1월에 발해의 반역자 대문예(大文藝)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발해를 치게 하는 한편, 당나라에 숙위(宿衛)로 와 있던 신라 왕족 김사란(思蘭)을 급히 귀국시켜 신라로 하여금 발해를 공격하도록 했다. 당시 신라 임금은 성덕왕(聖德王). 발해를 양면에서 협공하려는 현종의 이 기도는 결과적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대문예는 발해 시조 고제(高帝) 대조영(大祚榮)의 둘째아들이니 무제에게는 친아우였다.


 

발해 원정군의 등주 공파도

 당시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대동강 이남을 지배권으로 하고 있었기에 발해의 건국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신라가 사대주의로 섬기던 당나라도 형식적이나마 고제에게 사신을 보내 ‘발해군왕’이란 왕호를 내렸지만, 신라는 발해가 사신을 보내 건국을 통보하고 양국의 우호를 청했을 때 고제에게 신라의 5품관에 불과한 대아찬 벼슬을 주는 오만방자하고 주제넘는 짓을 했던 것이다.

 반역자 대문예가 앞장선 당군은 발해를 향해 유주를 출발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승산 없는 싸움이라 군사들의 사기가 엉망이었다. 게다가 당나라는 동·서·북 삼면에서 해·거란·돌궐·토번 등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고 있었으므로 강성한 발해를 침공할 형편도 못 되었다. 결국 발해원정은 군량 등 충분한 보급이 이뤄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계절도 엄동설한인지라 싸우다 죽기보다는 얼어서 죽고 굶어서 죽는 군사가 더 많았다. 결국 당나라 원정군은 발해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저절로 무너져 중도에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김유신(庾信)의 손자 김윤중(允中)을 비롯한 4명의 장군이 거느린 신라군도 길이 험한 데다 눈까지 한 길이 넘게 내리는 바람에 절반이나 얼어 죽자 도중에 포기한 채 되돌아가고 말았다.

장문휴 원정군의 등주 공략도.

 그 이듬해인 발해 무제 15년(734) 1월에 또다시 신라의 숙위 김충신(忠信)이 현종에게 글을 올려 발해를 치겠다고 자청해 현종이 이를 허락했으나 아무 성과도 없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뒤부터 당과 신라는 발해를 치려는 마음을 다시는 먹지 못했다.

이렇게 서쪽으로 당의 침략 야욕을 철저히 깨뜨리고 남쪽으로 신라의 도발 의도를 확실히 꺾어 놓은 발해는 이후 8세기 초까지 흑수말갈을 비롯한 동쪽과 북쪽의 여러 종족을 굴복시켜 광대한 영토를 개척하고, 일본까지 복속시킴으로써 동북아시아에서 당과 대등한 대제국의 위세를 널리 떨칠 수 있었다.

 비록 발해사에 관한 기록이 빈약하지만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장문휴와 같이 출중한 장수의 탁월한 전공 덕분이요, 또한 그와 같은 명장을 발탁한 위대한 제왕인 무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장문휴 장군이 어느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당나라를 원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발해군의 규모와 마찬가지로 등주를 지키던 당군의 병력이 얼마였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필자는 장문휴가 거느린 원정군의 규모가 1만 명 안팎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1만 명 이하는 당나라 수비군이 최소한 수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볼 때 너무나 위험부담이 컸으리라는 점이다. 아무리 전광석화 같은 기습공격이라도 절대적인 병력의 열세에는 위험부담이 반비례로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사대 성격의 원정대라 하더라도 1만 명을 밑돌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면 3만 명 이상이라면 이러한 대군을 수송할 함대의 규모가 수백 척에 이르고 또 군량과 마초, 무기 등 이들 대군을 뒷받침할 병참부대까지 고려할 때 신속 정확한 기습작전이 불가능했으리라고 추측된다.

 또한 작전기간에 관해서도 필자는 압록강 하구에서 등주까지 왕복 소요시간까지 포함해 5~ 10일의 단기전이라고 본다. 현종이 보고를 받고, 그의 명을 받은 갈복순이 군사를 이끌고 등주로 달려갔을 때, 발해군이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작전기간이 10일을 넘지 않은 단기전이었음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발해의 당나라 원정은 장문휴 장군의 산동반도 기습 작전 한 가지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장문휴 장군의 해군을 이용한 기습작전 외에도 무제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요하와 대릉하를 건너 요서의 영주와 평주 지방을 점령하고, 오늘의 북경 가까운 만리장성까지 진격했다는 것이다. 이 설의 근거는 ‘신당서’의 ‘발해의 대무예(무제)가 군사를 이끌고 마도산에 이르러 성읍을 점령했다’는 기록이다. 마도산은 요하 서쪽 요서의 산이다. 이에 따라 당군은 발해군의 침공에 대비해 400리에 걸쳐 요소의 길목을 막고 큰 돌로 참호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치통감’에도 ‘대문예를 유주로 보내 군사들을 징발해 싸우게 하는 한편, 유주절도사로 하여금 하북체방처치사를 겸하게 하고 상주·낙주·패주·기주·위주 등 모두 16개에 이르는 주와 안동도호부의 병력까지 통솔하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수륙 양면을 통한 당시 발해군의 원정이 단순한 소규모 기습작전의 범위를 넘어 전면전의 성격을 띤 대대적인 당나라 정벌작전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기록이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장문휴 장군을 소개하는 까닭은 우리 역사에서 발해사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발해가 고구려를 이은 나라요, 따라서 발해사는 당연히 우리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발해는 물론 고구려의 역사까지 탈취,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역사패권주의의 흉계를 공공연히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원정작전 전격 감행 唐의 배신 응징
발해 수도 상경 용천부 유적의 황성 옛터.
 발해의 두 번째 도읍지 상경 용천부에 남아 있는 유적.
 발해 무제(武帝)가 대장군 장문휴(張文休)에게 당나라 원정을 명한 까닭은 반역자 대문예(大文藝) 때문에 비롯됐다. 대문예는 무제의 친동생이었다.

 고제(시조 大祚榮) 원년(698)에 발해는 중앙과 지방의 정치·군사 기구를 정비하고, 그때까지 복속하지 않고 있는 주변의 말갈족을 굴복시켜 인구와 군사력을 늘리는 한편, 밖으로는 멀리 떨어진 돌궐로 사신을 보내 국제적 위상 확보에도 힘을 쏟았다. 이에 발해를 무력으로 제압할 여력이 없는 당나라는 외교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고제 7년(705)에 발해가 사신을 보내 건국을 통보하자 당에서도 측천무후(測天武后)에 이어 왕위에 오른 중종(中宗)이 사신을 보내 건국을 축하했다. 고제는 국가의 토대를 탄탄히 굳힐 동안 당과의 불필요한 대결을 피하기 위해 둘째아들 대문예를 답사로 보내 양국은 일시적이나마 화평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제가 세상을 뜬 것은 719년. 그의 뒤를 태자 대무예가 이으니 제2대 무제다. 무제는 즉위하자 연호를 인안(仁安)이라고 선포했다.

 대문예는 그렇게 당에 사신으로 파견됐다가 숙위라는 명칭으로 그대로 머물렀는데, 이는 당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인질인 셈이지만 발해로서는 당나라 수도 장안에 심어 놓은 정보원인 셈이었다. 하지만 이 대문예가 뒷날 친형인 대무예가 즉위한 뒤 본국을 배반하고 당에 망명하는 반역자가 된 것이다.

 발해와 당의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천하의 주인을 자처하는 당의 제국주의적 야욕 탓이었다. 당은 거란이 716년에 투항한 데에 이어 726년에는 흑수말갈까지 항복해 오자 이를 좋은 기회로 여겨 그들로 하여금 발해를 공격하도록 부추겼다. 말갈족은 원래 7개 부족이 있었다. 그런데 흑수말갈을 제외한 6개 부족은 이미 발해에 복속하고 흑수말갈만이 따로 떨어져 놀면서 정세를 관망하다가 마침내 더 강한 쪽이라고 판단한 당나라에 붙었던 것이다. 흑수말갈이 항복하자 현종은 그 지역에 흑수주를 설치하고 당나라 감독관인 장사(長史)를 파견해 통치하고자 했다. 이에 무제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흑수말갈이 우리의 길을 빌려서 당과 통했고, 또 다른 때에는 돌궐에 토둔(吐屯)을 요청하면서 우리에게 먼저 알린 뒤에 우리 사신과 동행했다. 그런데 지금은 당나라 관리를 요청하면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이는 분명히 당과 공모해 우리를 앞뒤에서 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고 나서 동생 대문예에게 외삼촌 임아상(任雅相)과 더불어 흑수말갈을 치도록 명했다. 무제는 그동안 당나라가 우호적으로 나온 것이 가식이라는 사실에 새삼 분노해 배신자 당나라를 응징하기로 결심하고, 이에 앞서 당의 동맹세력이 돼 버린 배후의 흑수말갈부터 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총수로 임명한 대문예가 배신을 했다. 대문예는 당나라에 가 있는 동안 친당파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대문예가 황명을 거역하자 무제는 노발대발했다. 아우가 당에 가 있는 동안 간도 쓸개도 다 빼앗긴 채 돌아왔다고 여긴 것이다. 무제는 적국인 당의 편을 들어 반대하는 대문예에게 다시 한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흑수말갈을 정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친당주의자, 패배주의자가 된 대문예는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기는 했지만 결국 당나라와 맞서는 것이 두려워 흑수말갈의 경계에 이르자 다시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이번 원정의 중지를 간청했다.

 이에 격분한 무제는 더는 참지 못하고 즉시 대문예를 파면하고, 그 대신 사촌형 대일하(大壹夏)를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비겁한 동생 대문예를 불러들여 죽여 버리려고 했다. 부국강병의 원대한 꿈을 실현시키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친동생이라도 죽여 없애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그러자 대문예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군사들을 버린 채 허겁지겁 당나라로 망명했다. 당 현종은 대문예의 항복을 쌍수로 환영하며 그에게 우효위 장군의 벼슬을 내렸다.

 무제는 대일하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정벌하게 해 마침내 항복을 받아내고 그들을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성격이 불같은 무제의 분노가 거기에서 풀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당 현종에게 마문궤(馬文軌)와 물아(勿雅)를 사신으로 보내 대문예의 죄상을 열거하고 그를 잡아 죽일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자 입장이 난처해진 현종은 대문예를 신강성으로 피신시킨 뒤 마문궤와 물아는 그대로 장안에 잡아둔 채 홍려소경 이도수(李道邃)와 원복(源)을 발해에 사신으로 보내 이르기를, ‘대문예가 곤궁에 빠져 우리나라에 귀순했는데 그를 어찌 죽일 수 있으랴. 또 지금 그를 영남지방으로 보냈기에 장안에는 없다’는 내용의 궁색한 변명을 했다. 영남은 지금의 중국 남부 광동성 일대 광서장족자치구를 가리킨다. 하지만 무제는 당나라의 속임수를 빤히 꿰뚫고 있기에 이렇게 강력 항의했다.

 “당나라가 대국이라면 마땅히 신의를 보여야 함이 마땅하거늘 어찌 속임수를 쓸 수 있겠는가? 듣건대 우리나라의 반역자 대문예가 아직 영남지방으로 가지 않았다고 하니 반드시 그를 잡아 죽이기 바라노라.”

 그러자 현종은 대문예를 정말로 영남지방에 피신시켰다. 하지만 무제는 반역자 대문예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낙양에서 무술이 뛰어난 자객들을 모아 대문예를 찾아내 암살토록 시켰다. 결국 이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제가 당나라와 대문예에 대한 원한을 결코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무제 9년(727)에 무장한 대규모 사절을 일본에 보내 일본의 복속을 받아낸 뒤, 치밀한 작전계획에 따른 극비훈련을 마친 끝에 732년에 마침내 당나라 원정을 단행했다.

이에 앞서 730년에 당의 압제를 받아오던 거란의 족장 가돌칸이 당에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의 꼭두각시놀음을 하던 거란 출신 송막도독을 잡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가돌칸은 거란족의 최고 권력자가 되자 돌궐과 동맹을 맺고 해족과 손잡은 뒤 당나라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나라가 거란과 해족의 공격으로 정신없게 되자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고 여긴 무제는 당나라 원정 명령을 내렸다. 그 응징작전의 총사령관이 바로 장문휴 장군이었던 것이다. 장문휴 장군의 등주 공습이 대성공을 거둠에 따라 산동성 일대는 공황상태에 빠지고, 그 뒤 오랫동안 발해의 영향권에 속하게 됐다.

 발해 제2대 황제 무제는 기록에 따르면 재위 18년 만인 737년에 죽고 그의 태자 대흠무(大欽茂)가 뒤를 이으니 그가 제3대 제왕 문제(文帝)다. 문제는 즉위하자 연호를 대흥(大興)으로 고쳤다. 그리고 재위 17년(754)에는 수도를 첫 도읍지 오동성에서 오늘의 흑룡강성 영안시 동경성 발해진 소재 상경용천부로 옮겼다.

 그 뒤 발해는 성장, 발전을 계속해 중흥조로 불리는 제9대 선제(宣帝) 대인수(大仁秀) 치세에는 고구려 전성기의 강역을 거의 회복하고 5경 15부 62주를 거느리며 ‘해동성국’의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대장군 장문휴의 당나라 원정 이후 행적은 어떤 사서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청해진의 영웅 장보고, 동북아 해상 무역왕국의 `군주'

장보고 장군 표준영정.
장보고 장군 동상. 중국 산동성 영성시 법화원에 세워져 있다.
전남 완도읍 장좌리 주민들이 해마다 음력 정월대보름에 베푸는 장보고장군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반만년 오랜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숱한 사나이가 드넓은 바다에 도전해 삶과 죽음의 투쟁을 벌여 왔고, 바다를 무대로 웅지를 펼치고자 몸부림쳤다.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 한반도 남쪽 바다 다도해의 한 섬에서 때로는 바다처럼 너그럽고 때로는 바다처럼 무섭게 일렁거리며 끓어넘치던 한 용사가 일어났으니 그가 바로 장보고(張保皐), 일명 궁복(弓福)이다.

장보고는 신라 후기에 무적함대를 만들어 바다를 개척하고 동북아의 제해권을 손아귀에 틀어잡은 위대한 바다의 영웅이었다.

 이름 없는 변방의 섬사람으로 태어나 제 나라에서 이름을 날리기도 힘든데 그는 중국대륙으로 건너가 용명을 떨쳤으며, 신라에 돌아와서는 청해진(淸海鎭)을 세우고 왜와 당의 해적들을 쾌도난마처럼 소탕해 안전하고 가까운 뱃길을 열어 놓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장보고는 중국대륙과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잇는 해운을 개척한 데에 이어 멀리 동남아까지 교역권을 넓히고 바다를 호령하니 그 장한 기개는 해상 무역왕국의 군주(君主)와 다름없었다.

 바다를 통한 해외 진출이라는 우리의 꿈을 1000여 년 앞서 펼쳐 보인 풍운아 장보고, 해양 개척의 신기원을 세운 멋진 바다의 사나이 장보고, 그는 비록 추악한 정권 쟁탈전에 말려든 끝에 자객의 마수에 걸려 비극적 최후를 맞았지만 그가 이룬 위업은 오래도록 우리 역사에 살아남아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장보고는 신라 변방 이름 없는 한 섬에서 태어났는데 그 섬이 뒷날 그가 청해진을 세우고 무적함대의 해군기지인 동시에 해상교역의 중심지로 삼은 오늘의 전남 완도다. 그가 태어난 해는 정확하지 않지만 신라 제38대 임금 원성왕(元聖王· 785~798) 때로 추정된다. 그가 청해진을 설치한 해가 제42대 임금 흥덕왕(興德王) 3년(828), 그로부터 13년째가 되는 제46대 임금 문성왕(文聖王) 3년(841)에 암살당했으므로 30대에 귀국해 40대에 죽었든, 40대에 귀국해 50대에 죽었든 출생 시기가 그 무렵으로 역산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대체로 원성왕 때부터 거의 해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흉작이 겹친 데다 사방에 도둑 떼가 들끓고, 왕실은 진골(眞骨) 귀족끼리의 왕위 싸움이 끊일 새 없어 온 나라가 난파선처럼 표류하고 있었다. 가난한 섬마을, 걸핏하면 왜와 당의 해적들이 떼 지어 몰려와 노략질을 해 사람들을 죽이고 잡아가는 바닷가에서 자라며 소년 장보고는 무엇을 꿈꾸었을까. 끝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점점이 떠 있는 섬들, 훨훨 날아 섬들 사이로 사라져 가는 갈매기들을 바라보며 소년은 무슨 생각에 빠져들었을까.

 장보고는 9세기 초 동양 삼국에 널리 이름을 떨친 국제적 풍운아였으므로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 모두 그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 측 기록은 ‘신당서’ 동이전과 신라전의 기사를 가리키는데, 이는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번천문집(樊川文集)’ 중 ‘장보고·정연전’을 인용한 것이다. 일본 측 기록은 천태종(天台宗)의 고승 자각대사(慈覺大師) 엔닌(圓仁)의 기행문인 ‘입당구법순례행기’와 ‘일본후기’ ‘속일본기’ ‘속일본후기’ 등이다.

 장보고의 성명이 우리나라에서는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 중국 측 기록은 장보고(張保皐), 일본 측 기록은 장보고(張寶高)로 네 가지가 된다. 궁복의 복(福)이나 궁파의 파(巴)는 흔히 아이들을 가리킬 때 쓰는 꾀보니 울보니 먹보니 잠보니 하는 ‘보’의 차음(借音) 표기요, 궁(弓)은 ‘활’의 차자(借字)로서 그의 본래 우리 이름은 ‘활 잘 쏘는 아이’라는 뜻인 ‘활보’가 아니었을까. 또한 장보고란 성명은 당나라에 있을 때 활궁변의 장(張)이란 중국 대성(大姓)을 쓰고 이름에서 ‘복’이 ‘보고’로 변했는지도 모른다. 장보고(張寶高)란 이름은 일본 측 기록에만 나온다.

 전남 완도읍 장좌리 주민의 구전에 따르면 장보고는 소년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마을 앞 조금섬(將島 : 將軍島) 앞바다에서 고기잡이와 무술을 익혔다. 나이 15세가 되자 키가 6척에 기골이 위괴(偉魁)하고 성품이 강직해 의로운 일을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목숨도 아끼지 않아 사람들이 장수감이라고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장보고에게는 정연(鄭年 : 鄭連)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잠수한 채 50리를 헤엄쳐가도 끄떡없을 만큼 물에 익숙했고 무술에도 뛰어났지만, 나이는 장보고가 몇 살 위였으므로 장보고를 형이라 부르며 함께 붙어 다녔다.

 두목의 전기에 따르면 ‘장보고가 서주(徐州)에서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된 것은 30세 때’라고 했으므로 전후 사정을 고려하면 그가 정연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간 시기는 20세 안팎, 즉 서기 810년께로 추측된다. 고국을 떠나 당으로 건너간 장보고와 정연이 처음 머문 곳은 지금의 강소성 금산현인 서주 땅이었다.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취직(?)을 한 곳이 무령군(武軍)이란 서주절도사의 아군(牙軍 : 本軍). 아마도 처음엔 외국 출신이니 말단 졸병으로 입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남보다 뛰어난 힘과 기예로 미뤄볼 때 금세 부대 안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것이다. 당나라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란 높은 벼슬까지 한 장보고가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828년 이전의 일이었다.

 819년 소장 진급 때부터 828년 청해진 설치 때까지 약 10년 동안 장보고의 행적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당나라 동해안에는 여러 곳에 신라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는데 이를 신라방(新羅坊)이라 했으며, 산동반도 등주 문등현, 강소성 초주·사주·양주 등의 신라방이 그것이다. 신라방에는 거류민들의 자치기구인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가 있었고, 그 책임자는 압아(押衙)로서 역시 같은 신라인이 맡고 있었다. 장보고는 군복을 벗자 급격히 거류민이 늘어나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산동반도 문등현에 자리 잡아 신라인들을 결집시키기 시작하니 곧 신라방의 중심인물로 떠오르게 됐다. 신라인들이 장보고를 중심으로 뭉치게 된 이유는 그의 사람됨이 워낙 출중하고 포용력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그가 본래 섬사람으로 바닷가에서 태어나고 자라 바다를 잘 안다는 점과, 무령군 소장으로 쌓아올린 장수로서의 경력 또한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신라방 사람들이 주로 종사한 사업은 해상교역 활동이었는데, 당이나 신라나 왕권이 약화되니 변경의 치안이 말이 아니었다. 특히 바다를 휩쓸고 다니는 해적들의 횡포 때문에 뱃길은 늘 위험했다. 군인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장보고는 항해교역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사설함대를 조직해 무역선단을 보호했다. 눈길을 중국~한국~일본을 잇는 국제항로로 돌렸던 것이다.

 장보고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신라 사람들의 무역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고 번창하게 됐고, 장보고의 명성과 지위 또한 자꾸만 높아져 갔다. 사람들은 장보고를 ‘장 대사(張大使)’라고 높여 불렀으니, 대사란 중국에서 절도사를 가리키는 칭호였다. 뒷날 그가 귀국해 청해진을 설치하고 역시 대사라는 신라 관등직급에는 전무후무한 관직을 받은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장보고가 이토록 지위를 굳히고 위명을 떨치게 됐음에도 굳이 신라로 귀국한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이유 또한 바다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동북아 해상 항로 장악한 `해상무역왕'

청해진 옛터인 전남 완도 장좌리의 장군섬.
복원한 장보고 당대의 교역선 모습.
우리나라에서 해적이라면 왜구를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그 당시에는 중국 해적, 즉 당구(唐寇)의 횡포가 더욱 심해 신라나 당이나 큰 골칫거리였다. 더구나 장보고는 당구들이 신라의 해안지방을 습격하고 어린이들을 약탈해 이른바 신라노(新羅奴)란 이름으로 마구 팔아넘기는 참담한 실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뿐인가.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그 같은 노예무역을 하는 해적들 가운데는 당구나 왜구뿐만 아니라 같은 신라의 해적인 신라구(新羅寇)까지 있어 장보고의 의협심과 동포애에 불을 질렀다.

 비록 신라구가 왜구나 당구처럼 대규모로 해적질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라 서남 해안의 일부 해상세력가들은 유리걸식하다가 마지막 시도로 당에 이주하기를 희망하는 동포들을 배에 태워 당나라에다 신라노로 팔아넘기는 피도 눈물도 없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또 그런 해적들 때문에 정상적인 무역항로가 위협받는 것도 사실이었다. 장보고는 자신의 힘으로 바다를 휩쓰는 해적들을 소탕하고 동포들이 짐승처럼 노예로 팔려가는 참상을 뿌리 뽑고자 결심했다. 이를 위해서 신라·당·왜 삼국 항로의 중간지점을 확보, 해상무역의 거점을 삼는 동시에 해적들을 쓸어 없애는 함대기지로 만들고자 작정했다.

 그때 머리에 떠오른 곳이 고향인 완도였다. 장보고는 고향 친구 정연을 불러 그런 계획을 털어놓고 함께 돌아가기를 권했다. 하지만 정연은 거절했다. 심복 부하들과 가족을 거느리고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는 완도에 자리 잡고 세력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완도를 거점 삼아 기지를 건설한 이유는 자신의 고향으로 지형지세에 익숙한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완도가 신라·당·왜를 잇는 삼각항로의 중간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재물을 풀어 사람들을 모으고 기본적인 시설을 한 다음 장보고는 임금을 만나러 금성(金城), 곧 서라벌로 향했다. 그때 임금은 흥덕왕. 후사 없이 죽은 형 헌덕왕의 부군(副君 : 왕태제)으로 뒤를 이어 즉위한 지 3년째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이렇게 나온다.

 -흥덕왕 3년 4월, 청해진 대사로 궁복(성은 장씨로 일명 보고)을 삼았다. 그는 먼저 당의 서주로 들어가서 군중소장이 됐다가 뒤에 귀국해 왕을 배알하므로, 왕은 군사 1만 명으로 청해를 진수(鎭守)하게 했다. -

 완도가 생겨난 이래 최초의 대역사(大役事)를 일으킨 것이다. 기지의 틀을 갖춘 다음 장보고는 장정들로 하여금 지리산과 남해안 일대에서 아름드리 통나무를 베어 날라 방주선(方舟船)이란 전함을 건조했다. 장보고는 바다의 왕자답게 탁월한 항해술을 터득하고 있었으므로 그가 만든 선박 역시 종래의 신라선이나 중국 배와는 달리 성능과 규모가 더한층 뛰어났다.

 장보고는 장도의 청해진 성을 자신의 거성(居城)으로 삼고, 170m 떨어진 맞은편 본섬의 장좌리에는 본영을 설치해 주력부대를 배치한 뒤 본격적인 해상활동에 나섰다.

 삼국사기는 흥덕왕이 군사 1만 명을 줘 청해를 진수토록 했다고 썼지만 이는 믿을 수 없는 말이다. 당시 신라는 3년간에 걸친 김헌창(憲昌)·범문(梵文) 부자의 반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끝이어서 1만은커녕 100명의 군사라도 변방 수비군으로 내주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따라서 1만이란 군사는 장보고가 재물을 풀어 모집한 군사로 보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이다.

 막강한 장보고의 무적함대가 파도를 가르며 바다를 헤쳐 나가면 감히 상대할 적이 없었다. 해적선이 보이기만 하면 그대로 쫓아가 박살을 내고 모조리 수장(水葬)시키니 그로부터 해적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바다의 청소작업이 끝나 해상항로를 장악한 장보고는 전부터 구상해 온 사업에 착수했다. 바로 해상무역의 독점이었다. 물론 청해진이 본점 격이었고 당나라 산둥반도, 등주 적산포가 지점 격이었는데 중국에 파견하는 무역선단은 견당매물사(遣唐買物使)가 인솔하는 교관선(交關船)이요, 일본에 파견하는 무역선단은 회역사(廻易使)가 인솔하는 교관선단이었다.

 장보고는 신라 조정으로부터도 정치적으로 인정받았지만, 국왕의 신하로서가 아니라 독립적이며 독자적 방법으로 자신의 해상왕국을 이끌어 나갔다. 거기에는 장보고의 탁월한 군사적 자질과 아울러 폭넓은 도량, 뜨거운 의협심,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독특한 인간미가 크게 작용했다.

 836년 12월 흥덕왕이 재위 11년 만에 죽었는데 그때 왕자 김의종(義琮)은 당나라에 가 있었다. 후계자 없이 왕이 죽자 그 틈을 노린 왕족 사이에 치열한 왕위쟁탈전이 벌어졌다. 흥덕왕의 종제 균정(均貞)과 다른 종제 헌정(憲貞)의 아들 제륭(悌隆) 숙질 간의 왕위쟁탈전이 벌어져 양파는 각자 족병(族兵 : 私兵)을 이끌고 궁중에서 한바탕 피바람을 몰아치며 무력충돌을 일으켰고, 그 결과 균정은 칼에 맞아 죽고 태종무열왕 김춘추(春秋)의 후손 김양(陽)은 화살에 맞아 부상당하고 균정의 아들 우징(祐徵)은 가까스로 도망쳤다. 그리하여 제륭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제43대 임금 희강왕이다. 희강왕은 즉위한 이듬해(837) 정월 죽을 죄 외에는 모든 죄수를 용서해주고 자기를 지지해준 흥덕왕의 조카 시중 김명(明)을 상대등에, 이홍(利弘)을 아찬에서 시중으로 승진시켰다.

 한편 우징은 일단 목숨은 구했지만 아비를 잃었으므로 원한이 뼛속까지 사무쳐 원수를 갚겠노라고 이를 갈았는데, 그 이 가는 소리를 들은 김명·이홍 일파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주목받게 됐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우징은 그해 5월 가족을 이끌고 서라벌을 탈출, 청해진으로 들어갔다. 장보고는 9년 전 흥덕왕 때 시중으로 있으면서 편들어 준 우징인지라 두말 않고 선선히 그를 받아들여 보호해 줬다.

 그러나 희강왕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 이듬해인 838년 정월, 야심만만한 김명이 이홍과 합세해 군사를 일으켜 왕의 측근들을 마구 학살하니 실권 없는 허수아비 임금은 왕위를 보전할 수 없어 궁중에서 목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김명이 스스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곧 제44대 임금 민애왕이다.

 어릴 때부터 친구였고 당나라에서 함께 고생하던 정연이 돌아온 것이 그 무렵. 정연은 장보고의 권유를 뿌리치고 당에 남아 있었지만 벼슬은 떨어지고 군대에서 쫓겨나 춥고 배고픈 신세가 되자 죽어도 고향에서 죽겠다며 귀국해 장보고를 찾아왔다. 장보고는 너그러운 사람, 의리의 사나이였다. 다투고 절연하다시피 헤어졌던 정연이었지만 반겨 맞아들인 데다 부장(副將)을 삼아 수하에 거느렸다.

 장보고의 이런 두터운 우정은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두목으로 하여금 감동한 나머지 전기를 짓게 했고, ‘신당서’ 신라전에도 편찬자가 장문의 기사로 높이 평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왕위쟁탈전 휘말려 비극적 최후 맞아
장보고 무적함대의 해적선 소탕 기록화.
청해진의 유적인 목책 잔해.
 김양은 김해에 숨어 화살에 맞은 상처를 치료하고 있다가 김명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를 모아 청해진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장보고와 우징 등을 만나 거사를 권유했다.

 “이제 들은 바와 같이 김명은 임금을 시해하고 스스로 보위에 오르고, 김이홍 또한 임금을 해친 자이니 함께 하늘을 볼 수 없소이다. 원컨대 장군의 힘에 의지해 이 원수를 갚고자 하니 군사를 빌려 주시기 바라오.”

 장보고가 대답했다.

 “옛사람의 말에 의로운 일을 보고 따르지 않으면 어찌 용맹하다 하겠소. 내 비록 용렬하나 힘을 다해 도우리다.”

 그리하여 부장 정연에게 군사 5000명을 주고 “이 일은 네가 아니면 맡을 사람이 없다”고 하며 출전시켰다. 전투지휘는 백전연마의 용장 정연이 맡았지만 장보고는 김양으로 하여금 평동장군(平東將軍)이란 형식적 최고사령관을 삼고, 그 아래 정연을 비롯한 염장(閻長)·장변(張弁)·낙금(金)·장건영(張建榮)·이순행(李順行) 등 여섯 장수로 보좌토록 했다.

 838년 12월 청해진을 떠나 육지에 오른 장보고의 군대는 오늘의 전남 나주 남평인 철야현에서 민애왕이 대감(大監) 김민주(敏周)에게 딸려 보낸 군사와 마주치게 됐다.

그러나 애초에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정연이 기병대 3000명을 휘몰아 질풍노도처럼 돌격하니 단 한 차례 접전에 관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이듬해 정월 19일에는 금성과 가까운 달구벌, 대구까지 진격해 민애왕이 남은 군사를 모두 모아 보낸 이찬 김대흔(大昕)과 대아찬 김윤린(允璘)의 부대까지 대파하니 반은 죽고 반은 도망쳤다. 승세를 몰아 금성으로 쳐들어간 군사들은 민가에 숨어 있던 국왕을 찾아 목을 쳐 죽여 버렸다.

 이에 김우징이 즉위하니 신무왕이다. 신무왕은 장보고의 은덕과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청해진 대사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읍 2000호를 내렸는데, 천신만고 끝에 임금이 된 신무왕도 그해 7월 23일 등창이 나 죽고, 태자 경응(慶應)이 왕위에 오르니 문성왕이다. 문성왕도 아비 신무왕과 함께 청해진에서 난을 피하며 장보고의 신세를 진 바라 그에게 진해장군(鎭海將軍)을 제수하고 많은 선물을 보냈다. 감의군사니 진해장군이니 하는 직함 역시 대사와 마찬가지로 신라 관직에서는 전무후무한 명예직이었고, 장보고가 중앙 정계 진출을 시도해 받아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썩어빠진 왕족과 귀족들의 왕위 다툼, 권력 쟁탈전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으나 약자를 돕고 의협심이 강한 성품에서 힘을 빌려 준 때문에 주는 대로 앉아서 받은 것뿐이었다.

 그런데 일단 왕위를 굳히고 정권을 안정시킨 조정의 입장에서 볼 때 청해진과 장보고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 막강한 군사력과 재력으로 혹시 딴마음이라도 먹는다면? 정권은 원래 의심이 많은 게 속성이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가 양측 사이에 걸려 있었으니 그것은 신무왕이 청해진에서 군사를 얻을 때 장보고에게 “이 일이 성공하기만 하면 장군의 딸을 맞아 며느리를 삼으리다”고 한 약속이었다.

 비록 약속을 한 아비는 죽었지만 그 일이 마음에 걸려 매듭을 짓고자 문성왕은 신하들과 의논했다. 그런데 그런 일은 만고에 없다고 모두 반대했다. 진골로 태어나지 않고서는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지녀도 6두품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을 만큼 출신 성분을 중시하는 신라에서 근본도 모르는 섬 촌놈의 딸이 왕비라니 말도 안 된다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왕은 이미 박씨 부인이 왕비로 있어서 차비(次妃)로라도 맞아들이려던 생각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 소문이 장보고의 귀에 흘러 들어갔다. 급할 때는 쫓아와서 통사정을 하고, 원하지도 않은 약속까지 먼저 해 놓고는 부귀영화를 다시 누리게 되니까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해? 그만둬라 그만둬! 썩어빠진 놈들! 장보고가 내뱉은 소리가 발 없는 말이 되어 금성으로 달려갔다. 왕과 대신들은 전전긍긍 어쩔 줄 몰랐다. 막강한 세력을 가진 장보고가 홧김에 군사들을 몰아 쳐들어오면 꼼짝없이 어육이 될 판이었다. 장보고를 누가 무슨 힘으로 막는단 말인가….

 이때 나선 자가 염장. 그는 본래 무주(광주) 사람으로 김양이 무주도독으로 있을 때부터 거느리던 심복이었다. 이 자가 장보고를 없애겠노라고 자청하고 나선 것이었다.

결국 조정에서는 암살이란 비열한 방법을 택하기로 하고 만일 성사된다면 청해진의 지휘권을 준다는 조건으로 염장을 파견했다. 청해진으로 달려간 염장은 그럴듯한 거짓말로 장보고의 비위를 맞췄다. 장보고는 대범한 인물인지라 별 의심 없이 염장을 맞아 잔치를 베풀고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윽고 밤이 깊었다. 장보고가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자 염장은 칼을 뽑아 장보고의 가슴을 힘껏 찔렀다. 일세의 쾌남아, 바다의 풍운아 장보고는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으니 841년 11월이었다. 장보고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모반을 일으켰다면 진작 군사를 일으켜 풍우처럼 휩쓸어 버렸지 우유부단하게 해를 넘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뜻은 드넓은 바다에 있었지 속 좁은 소인배의 추악한 음모가 난무하는 육지에 있었던 건 결코 아니었다.

 청해진의 활발하던 교역 활동은 이내 마비상태에 빠져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문성왕 13년(851) 2월 청해진 혁파로 찬란하던 해상왕국은 영화의 막을 내리고 그 주민들은 내륙 깊숙한 벽골제(碧骨堤), 지금의 전북 김제로 강제 집단 이주당하고 말았다.

 1000여 년 전 동양 삼국의 무역항로를 지배하던 해상왕국 완도, 완도읍에서 5㎞ 떨어진 장좌리는 옛날 장보고가 있던 곳이라고 해서 전에는 장재리(張在里)라고 불렀다. 장좌리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장보고장군제라는 당제를 베풀어 장보고의 위업을 기리고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한다. 장보고는 죽어서 신장(神將)이요 수호신이 된 것이다. 왕조 중심의 이른바 정사(正史)에서는 중앙 정계 진출이나 꾀하다 몰락당한 시골 장수쯤으로 무시당한 장보고였지만, 그가 바다를 호령하던 곳, 그 옛날 청해진의 향토사 속에서는 그의 위대한 기상이 살아남아 오늘도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일본 교토 북쪽 히에이산(比睿山)의 적산선원에서 장보고를 적산대명신(赤山大明神)으로 받들고 있으며, 16세기 전국시대의 명장 다케다 신겐은 장보고를 가문의 수호신인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으로 받들었다. 또 장보고가 산동반도 등주에 세웠던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이 산동성 영성에 복원돼 그의 위업을 흠모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세의 풍운아 장보고의 암살은 장보고 개인의 비극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이후 우리나라는 해양진출, 해상제패의 원대한 꿈을 꿔보기는커녕 비좁은 국토 안에서 집안싸움을 하거나 몽골족·여진족·왜구들에게 침범과 노략질을 연거푸 당하는 부끄러운 역사를 되풀이해 왔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것이 통렬한 역사의 교훈이 아니겠는가.
신숭겸, 태조 왕건을 옹립한 고려 개국 일등공신
신숭겸 장군과 고려 태조 왕건
신숭겸 장군의 영정
신숭겸 장군의 용산단. 평산 신씨 시조단으로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에 있다.
  신숭겸(申崇謙)은 평산 신씨의 시조다. 그는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더불어 궁예왕(弓裔王)의 기병장군이었으나 무력혁명을 일으켜 태조 왕건(王建)을 새 황제로 옹립한 고려의 개국 일등공신이다.

 그는 태조 10년(927)에 왕건이 공산전투(公山戰鬪)에서 견훤(甄萱)이 이끈 후백제군과 싸우다 포위당해 전세가 매우 위급할 때에 왕건을 구하기 위해 힘껏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신숭겸의 지극한 충성심과 무장다운 장렬한 전사도 역사에 길이 빛날 만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왕건을 대신해 전사하지 않았다면 왕건의 목숨은 공산에서 끝났을 것이고, 따라서 왕건에 의한 삼한통일의 대업도 이뤄지지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아니, 역사의 물줄기는 견훤에게 흘러가 어쩌면 견훤이 삼한통일을 이룩했을지도 모른다.

 ‘고려사’ 열전 후비·종실·공주 다음 일반 인물편의 첫머리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는데, 그리 길지 않으므로 그 전문을 소개한다.

 - 처음 이름은 능산(能山)인데, 광해주(光海州) 사람이다. 체격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났다. 10년(927)에 태조가 공산 동수(公山桐藪)에서 견훤과 싸우다가 불리하게 되어 견훤의 군대가 태조를 포위했는데 형세가 매우 위급했다. 이때 신숭겸이 대장으로 있었는데 원보 김낙()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다. 태조가 그의 전사를 몹시 슬퍼했으며,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고 그의 아우 신능길(申能吉)과 신철(申鐵), 아들 신보락(申甫)을 모두 원윤으로 등용하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했다. -

 신숭겸의 처음 이름은 능산이라고 했다. 성도 없었다는 말이다. 신라 말에 성씨는 왕족이나 귀족에게만 있었으니, 능산은 성조차 없는 궁벽한 시골의 천민 출신이었다. 그가 광해주 사람이라고 했는데, 광해주는 오늘의 강원도 춘천이고, 그의 묘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 의암호반에 있다. 신숭겸의 묘는 전국에 10여 군데가 있다고 한다. 그 까닭은 공산전투에서 전사한 신 장군의 시신을 나중에 수습했는데, 목이 없어졌기에 왕건이 황금으로 두상을 만들어 장사를 지내게 했다. 그리고 도굴을 염려해 가묘를 나라 안 곳곳에 여러 개를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답사한 춘천에 있는 신숭겸의 묘도 똑같은 봉분 세 개가 나란히 있는데, 어떤 것이 정말로 신 장군의 묘인지 알 수가 없다.

 또 그의 본관이 된 평산은 오늘의 황해도에 있다. 하지만 정작 그가 태어난 곳은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이다. 구룡리의 용산재는 신숭겸 장군의 재실이며, 평산 신씨 후손들이 제향을 올리는 시조단이다. 같은 구룡리의 신공정은 그가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마셨다는 샘물이다. 인근 죽곡면 삼태리에는 그가 젊은 시절에 무술을 연마하면서 자신이 아끼는 애마를 매어 뒀다는 계마석이 있다. 죽곡면 원달리의 태안사 들머리에는 신숭겸 장군의 무공을 기리는 ‘장절공 태사 신선생 영적비’가 서 있고, 오곡면 덕산리 천덕산 기슭에도 조선 선조 22년(1589)에 건립돼 숙종 21년(1695)에 사액된 그의 사당 덕양사가 있다. 또 태안사 뒷산에는 이런 전설이 서려 있다. 신숭겸 장군이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대신해 전사하자 신 장군의 용마가 그의 머리를 물고 이곳 고향 땅으로 달려와 태안사 뒷산에서 사흘 동안을 밤낮으로 울다가 굶어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이곳에 장군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곡성군의 성황당은 오랜 옛날부터 신숭겸 장군을 성황신으로 모셔왔다고 한다.

 어쨌든, 신숭겸 등이 왕건을 옹립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내쫓을 당시 후고구려, 즉 태봉국의 도읍은 강원도 철원이었다. 그런데 철원과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한반도 남쪽 전남 곡성에서 출생한 성도 없는 촌사람 능산이 어떻게 하여 궁예의 마군장군이 됐을까. 또 그의 고향인 곡성은 당시 견훤의 통치권에 속하던 후백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능산은 어떻게 해 견훤의 부하가 되지 않고 후고구려의 장수로 입신출세할 수 있었을까.

 신숭겸이 언제 태어났는지, 전사하던 태조 10년에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는 아무 기록이 없다. 공산전투에서 전사할 당시 50세였다면 그는 877년에 태어난 셈이다. 877년은 신라 헌강왕 3년, 발해 경왕 8년, 중국은 당 희종 4년이다. 공교롭게도 당시 이 세 나라가 모두 내우외환으로 망국의 길을 걷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또한 만일 이 추산이 맞는다면 신숭겸 장군은 태조 왕건과 동갑내기가 된다. 왕건은 그해 1월에 송악에서 태어났으며, 20세가 되던 해인 896년에 송악의 호족인 아버지 왕륭(王隆)과 함께 궁예왕의 휘하에 들어갔다. 왕건과 신숭겸이 태어날 무렵은 신라가 망국의 내리막길로 굴러떨어지고 있을 때였다.

국정이 어지러워지자 나라 안 곳곳에서 도둑 떼가 일어났고, 해안지방은 왜구가 걸핏하면 쳐들어와 살인·강간·약탈·방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특히 남해안은 능산이 태어날 무렵에서 약 40년 전에 장보고(張保皐) 장군이 암살당하고 그가 창설한 무적함대의 기지인 청해진(淸海鎭)이 폐허로 변함에 따라 왜구들이 수시로 침범과 노략질을 자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라의 관군은 이름뿐이지 변경의 국방은커녕 도성 서라벌의 치안조차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왕실에서는 걸핏하면 왕위쟁탈전이 벌어져 피비린내가 가실 줄 몰랐고, 해마다 계속되는 천재지변과 흉작으로 먹을 것 없는 백성들은 저마다 살길을 찾아 고향을 등지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힘 있는 자들은 도둑이 되고, 힘없는 자들은 떠돌아다니면서 유리걸식을 하고, 그럴 힘도 없는 사람들은 꼼짝없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참담한 실정이었다.

그런 가운데 곳곳에서 영웅호걸이 몸을 일으켜 이른바 후삼국시대의 막이 올랐다. 가장 먼저 일어선 나라는 견훤의 후백제였다. 견훤은 효공왕 4년(900)에 오늘의 전북 전주인 완산을 도읍으로 삼아 백제를 건국하고 황제를 칭했다. 그러자 이에 질세라 그 이듬해에는 궁예가 오늘의 개성인 송악을 도읍으로 고려를 개국함으로써 신라-후백제-후고구려가 정립하는 이른바 후삼국시대의 막이 올랐다.

 ‘삼국유사’는 궁예가 진성여왕 10년(896)에 철원을 도읍으로 삼아 국호를 고구려를 부활시킨다는 뜻에서 고려라 하고 왕이 됐다고 했다. 궁예는 898년에 금성(김화) 태수 왕륭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의 아들 왕건을 송악태수로 삼고 송악에 궁궐을 건축하도록 시켰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옛 상전이던 양길과 기훤의 연합군까지 격파하고, 왕건으로 하여금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까지 점령토록 해 그의 세력권은 북쪽으로는 대동강 이남, 남쪽으로는 금강 유역까지 넓어지게 됐다. 그리하여 마침내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고려를 개국, 황제를 칭했으니 그 해가 효공왕 5년(901)이었다.

 그리고 903년에는 오늘의 양산 지방 호족인 김인훈(忍訓)이 견훤의 공격을 당해 구원을 청해오자 왕건을 보내 이를 구하도록 했다. 왕건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자 궁예는 청년 장수 왕건을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궁예가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정한 것이 그 이듬해인 904년이었다. 마진은 마하진단(摩訶震檀)의 약칭이니 곧 ‘동방의 대제국’이란 뜻이요, 무태란 병란을 평정하고 태평성대를 구현한다는 뜻이다.
사냥 나가 평산을 식읍으로 하사받은 `신궁<神弓 >'

표충사. 신숭겸 장군 전사지에 세워진 사당으로 순절단·충렬비·표충재가 있다.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소재.
신숭겸 장군의 묘.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있다.
전남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의 덕양사는 신숭겸 장군의 사당이다.
  황제 궁예는 1년 뒤인 905년 7월에 송악에서 철원으로 환도하고 연호를 성책(聖冊)으로 고쳤다. 또 909년. 왕건을 해군대장군에 임명, 황해를 남하해 후백제의 배후인 나주 지역을 점령토록 했다.

해군을 거느린 왕건은 후백제가 중국의 오월(吳越)로 보내는 배를 나포하고, 이어서 종희(宗希)와 김언(言) 등을 부장으로 해 25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도와 고이도를 점령했다. 견훤은 친히 정예 수군을 거느리고 오늘의 목포에서 영암 북쪽인 덕진포에 이르는 해안에 포진했다. 육지에도 후백제의 육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전투 결과 후백제 함대는 절반이 불에 타고 500여 명이 전사했다.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간신히 도주했다. 왕건이 궁예의 장수가 된 이후 가장 크고 빛나는 승리였다. 또한 이로부터 왕건은 후고구려의 대표적 장수가 됐다. 견훤은 그 이듬해인 910년에 친히 보병과 기병 3000명을 거느리고 나주성을 포위했다. 급보를 받은 궁예는 다시 왕건을 파견했고, 왕건은 또다시 견훤의 군사를 물리쳤다. 그 다음해인 911년에 궁예는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泰封)으로, 연호는 수덕만세(水德萬歲)로 바꾸었다.

 그러면 능산이 후고구려군에 들어간 것은 언제였을까. 왕건이 궁예를 내쫓고 즉위한 것이 그의 나이 42세 되던 918년이다. 왕건이 처음 나주를 공략하던 909년에 그의 나이 33세. 필자의 생각으로는 능산이 나주에서 가까운 곡성 출신이지만 그가 20세 안팎에 고향을 떠났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아마도 궁예의 군대에 먼저 들어갔다고 본다. 왕건을 추대할 당시에 이미 기병장군이란 군부의 실력자가 돼 있지 않았던가.

 어쨌든 ‘고려사’에 신숭겸 장군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쿠데타를 모의하던 918년 6월이다. 그 전에는 어떤 전투에서 무슨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궁예는 어떻게 몰락하게 됐을까. 승려였던 궁예는 당시 미륵신앙에 몰두해 스스로 미륵불의 현신이요 생불이라고 자처해 자신이 불경을 저술하는가 하면, 관심법(觀心法)을 행한다면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황후 강씨와 두 아들까지 죽였다고 전한다. 이 정도면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다.

군사들과 함께 거친 잠자리와 음식을 마다하지 않고, 재물을 똑같이 나누며, 백성들의 미륵신앙에 부응해 자신이 곧 세상을 구하고자 현신한 미륵불이라며 희망을 불어넣어 준 일세의 영웅 궁예가 어찌해 광기에 사로잡힌 폭군으로 돌변했는지는 역사의 수수께끼다. 그렇게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왕건은 유력한 장수들의 추대로 우두머리가 돼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창업했던 것이다. 당시의 사정을 ‘고려사’ ‘세가’ 태조즉위조는 이렇게 전한다.

 - 그해(918) 6월 을묘에 기병장군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이 비밀리에 짜고 밤중에 태조의 저택으로 가서 그를 왕으로 추대할 뜻을 함께 말했다. … 궁예는 산골로 도망쳤으나 이틀 밤을 지낸 뒤에 배가 몹시 고파서 보리이삭을 몰래 잘라 먹었다. 그 뒤 곧 부양(평강)의 백성에게 살해당했다. -

 아무리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해도 생불로 추앙받던 당대의 영웅 궁예가 겨우 이틀을 굶었다고 해서 보리이삭을 훔쳐 먹다가 자신의 백성에게 맞아 죽었다는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궁예를 내쫓은 왕건은 정식으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로 고쳤다. 왕건을 추대한 신숭겸 등 4명의 기병장군은 개국 일등공신이 됐다.

 능산이 언제 신숭겸으로 개명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신숭겸이 평산을 식읍으로 받아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된 사연은 이렇게 전해온다. 능산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새 황제 왕건을 수행해 평산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삼탄이란 개울을 건널 때 기러기 세 마리가 날아갔다. 왕건이 여러 장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 맞히겠는가?” 이때 능산이 나서면서, “신이 쏘아 보겠습니다. 몇 번째 기러기를 쏠까요?”하니 왕건이 웃으면서, “셋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맞혀 보라”고 했다. 능산이 시위를 당겨 화살을 날리자 과연 셋째 기러기가 맞아 떨어졌다. 기러기를 주워오게 해 살펴봤더니 화살이 어김없이 왼쪽 날개에 꽂혀 있었다.

 왕건이 감탄하며 세 마리 기러기가 날아가던 평산을 그의 식읍으로 하사하고 관향으로 삼게 했다. 또 기러기가 날아가던 곳 주변의 땅 300결을 궁위전(弓位田)이라고 했는데, 이는 뛰어난 활솜씨로 하사받은 땅이란 뜻이다. 그렇게 하여 능산은 평산 신씨 시조가 됐다. 어쩌면 신숭겸으로 개명한 것도 식읍과 더불어 신씨 성을 하사받은 것이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태조 10년(927) 9월. 견훤은 경상도 북부를 공략하다가 느닷없이 말머리를 돌려 서라벌을 기습했다. 신라는 고려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구원병이 이르기 전에 서라벌은 함락당하고 말았다. 견훤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새 임금으로 앉힌 뒤 수많은 재물을 약탈해 돌아갔다. 이에 노한 왕건이 친히 기병 5000을 거느리고 견훤을 치러 내려갔다. 양군은 오늘의 대구 팔공산 동쪽 은해사 들머리에서 맞붙었다.

초전은 고려군이 우세한 듯했다. 하지만 곧 전세가 역전됐다. 후백제군이 고려군의 매복을 알아차리고 이를 역이용해 역습을 가했던 것이다. 고려군은 밀리기 시작해 공산 남쪽 기슭 동수 입구 미리사 앞에서 궤멸당했다. 후백제군은 승기를 잡자 황제 왕건이 지휘하는 중군을 그물처럼 겹겹이 에워싸고 시시각각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왕건의 장수들이 결사적으로 방어했으나 파도처럼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후백제군에게는 역부족이요 중과부적이었다. 이때 대장 신숭겸이 비장한 각오를 하고 나섰다. 황제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희생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신숭겸은 왕건과 옷을 바꿔 입었다. 그리고 경호무사들로 하여금 황제를 모시고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빠져나가도록 한 뒤에 자신이 황제의 전차를 몰고 적진으로 돌격했다.

후백제군은 고려의 황제를 잡아 큰 공을 세우려고 그를 수십 겹으로 포위했다. 그리하여 신숭겸은 마침내 머리 없는 시체가 되어 전장에 나뒹굴고 말았다. 만고의 충신이요 용장인 신숭겸은 그렇게 장렬히 전사했다. 참으로 무인다운 죽음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고려군이 신숭겸 장군의 시신을 찾으려고 했으나 목이 없었기에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신숭겸은 신체에 특징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왼쪽 발에 나 있는 북두칠성 모양의 검은 사마귀였다. 그것을 근거로 전사자의 시체를 일일이 살펴보다가 마침내 신숭겸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군의 목은 이미 후백제군이 왕건의 목인 줄 알고 가져 가서 없었다. 뒷날 왕건은 공산 기슭 신 장군이 전사한 곳에 순절단을 만들어 그의 충성심을 기렸다.

공산이 현재와 같이 팔공산으로 이름이 바뀐 것도 이 전투에서 고려 태조 왕건이 신숭겸과 김낙 등 여덟 명의 장수를 잃은 것에서 비롯됐으며, 당시 왕건이 패주하던 길목에 새벽달이 떠 있었다고 해 반야월(半夜月)이라는 지명도 생겼다고 한다.

 비록 공산전투에서는 참패를 당했지만 태조 왕건이 결국 신라와 후백제의 항복을 받아내 삼한을 통일하고 500년 고려조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신숭겸을 비롯한 장수와 군사들의 희생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