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화산폭발이 만든 ‘불의 뫼’… 은빛 억새, 절정으로 타오르다

醉月 2023. 10. 12. 13:01

천지개벽으로 홍수가 났을 때 배를 묶어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화왕산 배바위 위에 등산객이 올라서 있다. 배바위 아래 능선에는 반짝이는 억새로 그득하다. 억새밭으로 내려서면 눈부시게 피어난 억새의 파도가 황홀할 정도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가을의 전설’ 시작되는 창녕 화왕산

화왕산 비경과 스토리

벨벳처럼 반짝이는 억새 물결
보라색에서 은빛으로 변신 중

억새군락 가운데 정방형 연못
용이 살았다고 ‘龍池’라 불러
사슴뼈 등 기우제 유물 쏟아져

산정상 남쪽엔 거대한‘船바위’
홍수때 배 묶어두었다는 전설

관룡산의 신비와 작은 경주

원효대사가 용 봤다는 觀龍寺
20분 거리엔 용선대 석불좌상
뱃머리에 부처 앉은 형상 장관

곳곳 삼국시대~통일신라 유적
만옥정 공원엔 ‘진흥왕 척경비’

300년전 얼음 보관‘석빙고’는
창녕에만 유일하게 두 개 있어


창녕=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그곳에 가야 하는 이유…‘축제가 아니어서 시끄럽지 않은 산행’

경남 창녕에 화왕산이 있다. ‘화왕(火旺).’ 뜨거운 화염을 먼저 생각해 지은 이름은 아니었다. ‘물(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붙인 비보(裨補)의 작명이었다. 창녕 땅은 본래 물의 기운으로 가득한 땅이다. 창녕에는 낙동강 물줄기가 굽이쳐 흐르고, 드넓은 습지인 소벌(우포·牛浦)이 있다. 창녕의 진산에다 ‘불의 뫼’라는 이름을 얹어둔 건 그걸 누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불이 방화선을 넘으면서 화왕은, 이제 끔찍하고 두려운 이름이 됐다.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2009년 2월 9일. 정월 대보름날이었던 그날, 참극이 벌어졌다. 해가 진 뒤 화왕산 정상의 축구장 24개 크기의 억새밭에 불을 놓았다. 윤달이 드는 해의 정월 대보름이면 늘 해 오던 억새 태우기 행사였다. 그런데 급작스러운 돌풍으로 불길이 방화선을 넘었다. 불은 사람들이 몰려 있던 배바위 쪽으로 삽시간에 번졌다. 미처 불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도 있었고, 불길을 피해 물러서다 낭떠러지로 떨어진 이들도 있었다. 7명이 죽고, 81명이 다쳤다. 국태민안을 기원하고 가정의 액을 물리쳐 달라며 연 억새 태우기가 끔찍한 재앙이 된 건 한순간이었다. 그날 이후로 화왕산 억새 태우기 행사는 중단됐다.

참극이 벌어진 이후에도, 해마다 가을이면 화왕산의 산정에는 억새가 피어난다. 사고 전까지만 해도 산비탈을 따라 펼쳐진 6만 평에 달하는 억새평원은, 잡목이 섞이지 않은 단일 억새군락지로는 국내 최대 규모였다. 억새 태우기 행사가 중단되면서 풍성하던 억새가 예전만 못하다. 불 질러 쫓아냈던 관목들이 해마다 슬금슬금 억새밭으로 밀고 들어온 탓이다.

그럼에도 화왕산 억새 산행을 추천하는 건 다른 억새 명산처럼 떠들썩하거나 부산하지 않아서다. 축제를 안 하니 인파도 한결 덜하다. 예전만 못하다고는 했지만, 이 정도의 억새만으로도 웬만한 산에 뒤지지 않는다. 이즈음 전국은 온통 장삿속으로 번잡스러운 축제의 홍수다. 이제는 ‘축제를 하지 않아서’가 거기에 가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됐다.

# 비탈에서 다채롭게 반짝이는 억새

억새밭 한쪽에서는 공공근로를 나온 이들이 잡목과 풀을 솎아내고 있었다. 드넓은 평원 규모를 생각하면 부질없어 보이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거라도 하는 것이리라. 공공근로를 하는 주민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불 놓는 일을 다신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 사이에서 ‘용기 있는 군수가 와서 내릴 결단’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산정에서 내려다본 억새는 어쩐지 성글고 칙칙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막상 억새밭으로 내려가 해를 안고 억새와 마주 서자 거짓말처럼 풍경이 달라졌다. 역광의 억새는 화사한 솜털처럼, 눈부신 수정처럼 반짝였다. 꽃 핀 억새의 아름다움에 감격하게 만드는 건 순전히 ‘방향과 빛’이다.

지금 화왕산의 억새는 절정이다. 억새는 개화 직전까지 붉은빛이 나는 보라색이었다가 가는 솜털 같은 꽃이 피면서 은빛으로, 순백으로 변하고 있다. 이렇게 절정의 시기 열흘쯤을 보내고 나면, 보석 같던 솜털이 빠지면서 억새는 갈색으로 퇴색한다. 억새는 가을을 건너며 길게 가긴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반짝거림은 길지 않다는 얘기다.

화왕산의 억새는, 어쩐지 다른 억새 명산의 억새보다 색감이 훨씬 다양한 듯했다. 억새의 바다에 은색과 순백이, 노란색과 갈색이 뒤섞였다. 비탈진 경사면을 따라 핀 억새에 빛이 닿는 각도가 달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빛의 방향에 따라 다른 색으로 일렁이는 억새 질감이 마치 벨벳 같았다.

모든 꽃이 다 그렇듯 억새꽃도 가장 아름다운 때를 겨누려면, 맞춰야 하는 건 ‘시간’이다. 화왕산 억새가 가장 아름다운 절정의 시간은 이번 주말까지. 늦어도 다음 주 중반까지다. 그 뒤에 찾아간대도 넘실거리는 억새를 볼 수 있으니, 아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정도만으로 만족하는 이유가 절정의 억새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기묘묘한 바위로 이뤄진 화왕산 1등산로의 암릉 구간.



# 오를 땐 1등산로, 내려올 땐 3등산로

화왕산을 오르는 대표적인 산행 코스는 세 개다. ‘1등산로’ ‘2등산로’ ‘3등산로’다. 이보다 더 직관적이고 간명할 수 있을까. 세 개의 등산로는 모두 화왕산 산행 들머리의 절집 도성암 앞에서 출발해 그 자리로 하산한다. 원점 회귀 코스이니 간 길을 되짚어서 내려올 이유는 없다. 추천하는 건 1등산로를 따라 화왕산에 올라갔다가, 배바위와 억새평원을 보고서 정상까지 간 뒤에 3등산로로 내려오는 코스다.

화왕산은 어떤 코스로 다녀왔냐에 따라 산에서 받는 인상이 전혀 다르다. 같은 산이 코스에 따라 어쩌면 이렇게 분위기며 경관이 다를 수 있을까 싶다. 다른 코스로 화왕산을 다녀와서 서로 화왕산에 대해 느낀 점을 얘기 나눈다면, 느낌의 차이가 커서 ‘같은 산’ 이야기를 하는지 상대방을 의심하게 될 정도다. 누구는 코를 만지고, 누구는 다리를 만졌다는 코끼리 얘기와 비슷하다.

화왕산 3등산로는 소나무 숲길을 지나서 제법 가파른 흙길을 오른다. 산행 구간 중에는 소나무 숲 외에는 이렇다 할 인상적인 게 없다. 물 흐르는 계곡도 없고, 근사한 바위도 없다. 정상의 턱밑에 이를 때까지 경관도 거의 없다. 숲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경관이래 봐야 발아래로 펼쳐지는 창녕읍 풍경이 고작이다. 2등산로가 좀 낫다고는 하지만, 전체 코스가 더 가파르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2등산로에는 숨이 턱에 닿는 ‘환장고개’가 있다. 깔딱고개를 넘어도 그만한 노고에 주어지는 특별한 경관 같은 보상은 전혀 없다. 어쩐지 억울해지는 코스다.

1등산로는 다른 등산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암릉을 타고 오르는 길이다. 거대한 바위 능선이 제법 험준하기도 하고, 가파르기도 하다. 줄곧 바위를 딛고 오르고, 어디서나 조망이 시원하게 터진다. 깎아지른 벼랑에서 난간 밧줄을 붙들고 힘을 써야 하는 구간이 많아 긴장되긴 하지만, 첩첩이 쌓여 이룬 암릉을 감상하는 맛이 제법이다. 다만 유의해야 할 건 1등산로는 ‘오르는’ 코스로는 더할 나위 없지만, 하산 코스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험준한 코스가 하산할 때 훨씬 더 위험해서 그렇다.

화왕산 정상 억새군락지 한가운데 있는 용지(龍池).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배바위와 기우제, 그리고 호랑이 뼈

화왕산은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산이다. 화왕산성으로 둘러싸인 산정의 억새군락지는 분화구의 흔적인 셈이다. 산정의 남쪽 능선에는 누가 일부러 얹어놓은 듯한 거대한 바위가 있다. 천지개벽으로 홍수가 났을 때 배를 묶어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배(船)바위’다. 화왕산 곳곳에 얽힌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배바위는 거대한 두 개의 바위가 겹쳐진 형상인데, 그 사이에 사람 하나 드나들 만한 틈이 있다. 여기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왜병에 쫓기던 곽재우가 배바위 앞에 오니 바위틈이 저절로 벌어졌다가, 곽재우가 몸을 숨기자 이내 닫히면서 왜병을 따돌렸다는 얘기다.

화왕산 정상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억새군락지 한가운데 분화구였다고 짐작되는 자리쯤에 정방형의 연못이 있다. 용이 살았던 못이라 해서 ‘용지(龍池)’라고 부른다. 산 정상에 물이 솟아 연못을 이룬 게 신기하다. 옛사람들도 그게 신기했던지 여기서 기우제를 지냈다. 20년 전쯤 발굴 과정에서 그 흔적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솥과 칼, 놋그릇, 항아리, 수막새 기와…. 더 분명한 제례의 흔적은 용지 근처에서 나온 호랑이와 멧돼지, 사슴의 머리뼈와 턱뼈였다.

용지 맞은편 언덕에는 ‘창녕 조씨 득성비’가 서 있다. 득성(得姓)이란 ‘성(姓)씨를 얻었다’는 뜻이다. 비석에 새겨진 창녕 조씨가 성을 얻기까지의 이야기는 이렇다. 신라 때 높은 벼슬아치에게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그 딸이 병에 걸려 치료를 위해 용지에서 목욕을 하는데 용이 따라 들어왔다. 얼마 뒤 딸은 용의 아들을 낳았고, 아이의 갈빗대에 ‘조(曺)’ 자가 적혀 있었다. 이에 진평왕이 아이의 성을 조씨, 이름은 ‘용을 이었다’고 해서 ‘계룡(繼龍)’이라 부르고 사위로 삼으니 그가 창녕 조씨의 시조다.

화왕산에는 형상에서 본뜬 이름을 가진 기이한 바위도 많다. 고래바위, 소원바위, 곰바위…. 이름을 달아준 소나무도 여러 그루다. 부부소나무, 세자매소나무…. 곰과 고래는 물론이고, 소원 같은 추상적 형상에도 공감이 됐다.

절집 관룡사 위쪽의 용선대 석불. 까마득한 직벽을 이룬 바위 벼랑 위에 석불을 모셨다. 고통에 빠진 중생을 극락세계로

건네준다는 ‘반야용선’을 상징한다.



# 번뇌를 건너는 배, 반야용선

화왕산은 동쪽으로 관룡산의 산줄기와 이어져 있다. 관룡산의 산세도 화왕산에 못잖아서 두 산을 이어 붙여 종주 산행하는 이들이 적잖다. ‘관룡(觀龍)’이란 산 이름은 그 산에 깃들여 있는 절집 관룡사에서 왔다. 볼 관(觀) 자에 용 용(龍) 자를 쓰니 ‘용을 보다’라는 뜻이다. 원효대사가 관룡사 절집 자리에서 100일 기도를 하다가 승천하는 아홉 마리 용을 보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원효가 봤다는 용은 화왕산 정상의 용지에 깃들어 있던, 창녕 조씨 시조를 잉태하게 했던 바로 그 용이었다.

관룡사에는 지금도 용이 있다. 대웅전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등산객이 왼편 바닥에 노출된 굵은 바위를 등산 스틱으로 쿡쿡 찍었다. 그러고는 그게 ‘화왕산의 불기운 속으로 들어간 용의 등 껍데기’라고 했다. 관룡사는 용의 기운으로 불의 기운을 가진 화왕산에 맞선다. 관룡사 범종각에서 북을 받치고 있는, 나무로 깎은 짐승도 ‘불을 먹는다’는 전설 속의 동물 ‘해태’다.

관룡사를 권하는 건 전적으로 ‘용선대(龍船臺)’ 때문이다. 관룡사에서 숲길을 따라 20분쯤 산을 오르면 사방이 수십 길의 벼랑으로 이뤄진 바위 위에 가부좌를 튼 1.8m 높이의 석불좌상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용선대다. 뒤로 물러나서 보면 부처가 바위로 지은 배의 뱃머리에 앉아 항해하는 듯한 형상이다.

불가의 법화신앙에는 고통에 빠진 중생들을 극락정토로 건너가게 해주는 ‘반야용선(般若龍船)’ 이야기가 있다. 반야용선은 번뇌를 싣고서 고행의 바다를 건네준다는 배다. 용선대는 뱃머리에다 불상을 앉히는 것으로 반야용선의 상징을 구현했다. 용선대 앞에는 두 손을 모은 이들이 줄을 잇는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이들이 뱃머리의 부처가 이끄는 대로 깊은 세속의 바다를 금방이라도 건너갈 듯하다.

용선대에 석불이 조성된 건 9세기 초반. 가장 궁금했던 건 1000년 전 저 무거운 석불을 어떻게 산 중턱 바위 위에 올릴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석불의 돌은 화강암이지만 관룡산 바위의 재질과는 다르다. 여기서 새긴 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새겨서 가져온 것이란 얘기다. 누가 이 높은 벼랑 위까지 돌을 끌어올리는 고행을 감내했던 것일까. 그리고 고행 속에서 간절하게 빌었던 소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원효가 용지에서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관룡산 아래 절집 관룡사.



# 소읍의 공원에서 만나는 유적들

이제 산에서 내려와 창녕읍을 구경해 보자. 창녕읍은 스스로를 ‘작은 경주’로 부른다. 규모나 위세는 경주에 어림없지만, 창녕에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적과 유물이 곳곳에 있어서다. 창녕이 건너온 시간의 자취를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 창녕읍 행정복지센터 근처의 만옥정공원이다. 만옥정은 250여 년 전에 있었다는 정자다. 봄이면 정자 앞에서 명창대회와 그네 뛰기 대회가 벌어졌다는데, 정자는 오래전에 사라졌고 이름만 남아 일대의 문화재를 한데 모아둔 소박한 공원이다.

만옥정공원의 가장 높은 자리에는 창녕의 대표 유물인 신라 진흥왕 척경비가 있다. 진흥왕이 이곳을 방문한 뒤에 영토 개척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국보라고는 하지만 둥글넓적한 비석의 형태도 보잘것없고, 비석에 새겨진 글씨도 태반이 지워져 판독조차 불가능하다. 척경비의 유물적 가치는 희미하게 남아 있는 신라 시대의 관직과 이름에 있다지만, 그거야 역사학자나 관심을 가질 법한 것. 여행자가 주목해야 할 것은 1500여 년 전 비석 앞에 서 있었을 진흥왕의 실존감이다. 척경비가 세워진 건 561년. 이듬해 신라는 마지막 남아 있던 가야 세력인 대가야를 정복했으니, 척경비의 건립은 진흥왕의 진군나팔이나 다름없었다.

만옥정공원에서 흥미로운 또 하나의 공간은 역대 고을 수령들의 선정비를 모아놓은 곳이다. 지방 소읍의 선정비는 엄격한 격식도, 세련된 맛도 없어서 더 흥미롭다. 서툴기 짝이 없는 솜씨로 돌을 쪼아 새긴 연꽃이며 용에서 느껴지는 건 투박한 아름다움과 파격, 그리고 해학이다. 선정비를 하나하나 살피다 보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이유다. 공원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도 있고, 고종 때 세운 척화비도 있다.

창녕읍 한가운데 남아 있는 석빙고. 가야 고분을 빼닮았다.



# 석빙고와 석탑을 지나 온천까지

만옥정공원 밖에도 유적이 곳곳에 있다. 소박한 장터와 오래된 주택가 골목 사이에 있는 유적들은, 소읍의 한복판으로 방문객들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이끈다. 개발 지체로 두터운 시간의 지층이 남아 있는 소읍 구경도 흥미롭지만, 군데군데 남아 있는 유적들이 악센트 역할을 한다.

창녕읍 한복판에는 300여 년 전에 만든 얼음을 보관하던 석빙고가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빙고는 모두 영남 지역에 있다. 경주와 안동, 청도, 대구에 하나씩 있는데, 창녕에는 유일하게 두 개가 있다. 두 개의 석빙고 중 창녕읍에 있는 게 더 크다. 거대한 석빙고 앞에 서면 심경이 복잡하다. 당시 양반 계급의 권력의 크기와 한겨울에 얼음을 떠내기 위해 동원됐을 백성들의 고통까지 생각이 가닿는 탓이다.

석빙고에서 창녕 오일장을 지나 창녕천 쪽으로 걷다 보면 술정리 동 삼층석탑을 만나게 된다. 석탑의 크기는 ‘거대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몸돌과 지붕돌, 지대석과 기단석을 큰 돌을 써서 만들었다. 단정하면서 단단해 보이는 이유다. 그래서 일찌감치 국보로 지정해 석탑의 가치를 인정했다.

창녕에는 국내 온천 중에서 용출 온도가 가장 높은 부곡온천이 있다. 1973년에 발견한 부곡온천의 용출 온도는 78도에 달한다. 한때 최고의 온천 리조트로 꼽혔던 부곡하와이의 폐업에도 불구하고 온천은 아직 건재하다. 억새 만발한 화왕산이나 관룡산 등산과 함께 다녀오기에 좋다.



■ 석빙고 앞에서 읽는 詩

조선 후기의 문신 김창협의 시 ‘착빙행(鑿氷行·얼음 뜨러 가다)’. 엄동의 강변에서 얼음 뜨는 부역에 내몰린 백성들의 고행과 그 얼음을 나눠 먹는 양반의 모습을 대비한 시가 섬뜩하다. “짧은 옷 맨발은 얼음 위에 얼어붙고/ 매서운 강바람에 언 손가락 떨어지네./…(중략)…/ 고대광실 오뉴월 무더위 푹푹 찌는 날에/ 왁자지껄 이 양반들 더위를 모르고 사니/…(중략)…/ 길가에 더위 먹고 죽어 뒹구는 백성들이/ 지난겨울 강 위에서 얼음 뜨던 자들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