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이 태백산 산군(山群)이고, 오른쪽이 소백산 자락이다. ‘양백지간(兩白之間)’이라고 부르는 두 산 사이에 충북 단양 의풍리와 경북 영주 마락리, 남대리가 있다. 오른쪽 소백 능선에 구름이 걸려 있는 곳이 소백을 넘는 가장 높고 험준한 고개 마구령이다. 마구령 아래로 소백을 관통해 영주로 넘어가는 부석 터널이 뚫려 개통을 기다리고 있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부석터널’ 개통 앞둔 강원 영월·경북 영주
왕위 뺏긴 단종의 유배지 영월
복위 꿈꾼 선비들 모였던 영주
비극적인 역사 이어주는 터널
장릉·청령포·김삿갓계곡 거쳐
부석사·소수서원·선비촌까지
한 번에 들르는 여행코스 완성
고치령 고갯마루에는 ‘산령각’
산신 된 단종 · 금성대군 신당
무속인 발길 이어지는 두레골
사육신들 위패 모신 ‘창절사’
조선민화박물관‘어변성룡도’
시험앞둔 관람객들에게 인기
단양·영월·영주=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길이 달라지면 여행도, 풍경도, 느낌도 달라집니다. 달라진 길 위에서 시간은 압축되거나 팽창되고, 풍경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며, 긴장되거나 때로 이완됩니다. A에서 B로 갈 때와 B에서 A로 갈 때의 풍경은 다르고, 내리막에서 본 풍경과 오르막에서 본 풍경이 같을 리 없습니다. 길이 바뀐다는 건 ‘관점(觀點)’이 바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달라진 길은 시선을 바꾸기도 하지만, 때로는 ‘태도’나 ‘방향’에까지 개입하니까요.
달라진, 아니 달라질 길을 다녀왔습니다. 소백산을 넘는 고갯길, 마구령입니다. 높고 험준한 고개를 굽이치며 넘어가는 좁은 길이었습니다. 그 아득한 고개 아래로 직선의 터널이 뚫렸습니다. 소백의 아랫자락을 파고드는 길은 ‘부석 터널’입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소백산의 이쪽저쪽을 건너다니는 길이 놓이고 나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과연 무얼 얻고, 무얼 잃게 될까요. 뚫렸으되 아직 개통되지 않은 터널을 오가고, 터널이 놓이면 사라질지도 모를 소백산의 고갯길 몇 개를 넘나들었던 건 그걸 가늠해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소백산을 넘는 세 개의 고갯길
소백산은 설악산이나 지리산이 그런 것처럼 독자적인 산 이름이 아니다. 최고봉인 비로봉(1439.7m)을 위시해 국망봉과 제2연화봉, 신선봉, 형제봉, 묘적봉 등 수많은 봉우리가 이어진 거대한 산군(山群)을 통칭해 소백산이라고 부른다. 대청봉이 중심이 된 산군을 설악산이라 하고, 천왕봉을 지붕으로 한 산군을 지리산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산군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건 산세가 깊고 거대하다는 의미다. 소백산의 크고 험준한 능선은 아득하게 이어져서 강원과 충북, 그리고 경북의 경계를 이룬다. 산이 경계를 이루면 그 산에는 경계를 넘는 실핏줄 같은 길이 있게 마련이다. 험준한 능선의 가장 낮은 목을 타고 넘으며 길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소백산을 넘는, 세 개의 고개가 있다. 죽령(竹嶺)과 고치령(高峙嶺), 마구령(馬駒嶺)이다. 이 중에서 주목해야 하는 건 마구령이다.
세 개의 고갯길을 구분해보자. 먼저 죽령. 소백산군의 가장 서쪽, 그러니까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소백산의 가장 왼쪽을 파고들어 넘는 고개가 죽령이다. 고개 이쪽은 충북 단양의 대강이고, 저쪽이 경북 영주의 풍기다.
죽령은 소백산 도솔봉과 연화봉 사이 능선의 낮은 목을 넘어간다. 고개 정상의 해발 고도는 소백산 고갯길 중 가장 낮은 689m다. 죽령은 삼국시대에 열린 가장 오래된 길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영남 지방과 호서 지방을 잇는 중요한 통로이기도 했다. 죽령이 열린 건 신라 이사금 5년(158년). 길의 역사가 자그마치 1866년이나 된다. ‘삼국사기’에 그 얘기가 나온다. 조선 시대로 넘어와서도 죽령은 문경의 새재, 영동의 추풍령과 더불어 ‘영남대로 3대 관문’으로 꼽혔다.
지금도 5번 국도가 이 고개를 타고 넘어간다. 고개 아래 옛 죽령터널로 1942년부터 옛 중앙선 열차가 다녔으며, 2019년부터는 중앙선 복선전철화 사업으로 완공된 신(新)죽령터널로 기차가 다닌다. 2001년에는 중앙고속도로 개통으로 차량이 다니는 죽령터널이 뚫렸다. 신(新), 구(舊) 두 개의 철도 터널과 하나의 국도 고갯길, 또 하나의 자동차 터널이 있는 셈이다. 죽령을 땅 위로, 땅속으로, 차로, 또 기차로 넘어다니고 있는 셈이다.
# 고치령과 마구령, 강원·경북을 잇다
다시 지도를 꺼내본다. 소백산을 넘는 죽령 오른쪽에 고치령이 있고, 마구령은 거기서 더 오른쪽 끝에 있다. 이 두 고개 아랫마을에 가보면 혼란스럽다. 소백 지맥의 험준하고 긴 능선이 당연히 충청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경계의 선(線)이라고 믿었는데, 뜻밖에 고치령과 마구령 고개 이쪽과 고개 너머 저쪽 마을이 다 경북 영주 땅이다.
고치령이나 마구령 너머 남쪽은 경상도 영주 땅인 거야 당연한 일. 그런데 북쪽의 고개 들머리 역시 영주 땅이다. 영주가 가진 땅이 소백산을 넘어서 북쪽 자락까지 스미듯이 넘어와 있는 셈이다. 소백산맥이 경북과 충북, 그리고 강원의 경계를 이룬다는데, 소백을 넘는 고개 이쪽저쪽이 다 영주 땅이니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지도를 읽고 이정표를 살피니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고치령이나 마구령 들머리에 닿기 직전, 이미 강원 영월과 충북 단양 땅을 차례로 딛고 건너왔던 것이다.
고치령과 마구령 고개는 ‘강원과 경북을 잇는다’고 할 수 있다. 강원 영월 땅을 길게 건너와서 징검다리 돌 하나를 딛듯 아주 짧게 단양 땅을 거쳐서 영주로 들어와 고개를 넘는다. 짧게 딛는 단양 땅이 게다가 오지 중의 오지로 꼽히는 영춘면 의풍리다. 고치령이나 마구령이 마치 강원과 경북을 직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금성대군의 피가 묻은 혈석(血石). 두레골의 ‘금성대군당’ 안에 있다.
영월에서 영주 땅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서 대번에 떠올려지는 건 단종이다.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돼 억울한 죽임을 당한 곳이 영월이라면, 조카 단종의 복위를 꿈꾸던 금성대군과 그와 의기투합한 선비들이 무자비하게 도륙된 곳이 소백산 너머 영주의 순흥 땅이다. 여행자에게 영월에서 영주로 넘어간다는 건, 이런 이야기의 행로를 따라간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길이 곧 이야기’다. 단종의 유배와 죽음, 그를 구하려던 금성대군과 선비들의 비극적 최후 이야기가 영월 장릉과 청령포에서 고치령과 마구령 넘어 영주의 순흥 땅으로 유장하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 단종, 태백의 산신이 되다
고치령과 마구령 고개는 지척에 있다. 단양 의풍리에서 Y자 형태로 갈라진 두 갈래 길 한쪽이 고치령을, 다른 한쪽이 마구령을 넘어간다. 가서 보면 이런 험준한 산길이 굳이 두 개가 필요했을까 싶다. 고치령 아래가 마락리고, 마구령 아래는 이웃한 마을 남대리다. 두 고개 사이의 거리는 6㎞ 남짓에 불과하다.
지금은 마구령을 넘는 길이 더 번듯하다. 마구령을 넘는 길은 ‘935번’이란 번듯한 도로번호까지 부여받은 지방도로다. 고치령 너머에 부석사가 있으니 차량 통행도 더 많다. 마구령 아래로 터널이 놓이게 된 이유다. 거기에다 대면 고치령은, 최근 들어 말끔하게 포장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디지털 지도를 확대해봐야 겨우 나오는, 군데군데 비포장 구간이 있는 산길이었다.
과거에는 반대였다. 고치령이 훨씬 더 넓고 큰길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영월에서 순흥까지 곧바로 이어지는 고갯길이라서다. 지금 순흥은 작은 면(面) 단위 시골이지만, 조선 시대 순흥은 지금으로 치면 도청 소재지쯤 되는 ‘도호부’였다. 안동과 겨룰 정도로 일대의 중심 도시였다는 얘기다. 순흥이 몰락한 건 단종 복위 운동 때문이었다. 이 일로 ‘반역의 땅’이 된 순흥은 격하되고 갈기갈기 찢겨서 이웃 지역으로 편입됐다.
쇠락한 순흥 땅과 무인지경이 된 고치령 뒤에 ‘역사’가 있다. 이런 생각이 가져다 주는 건 역사가 먼지 쌓인 책이 아니라 현실로 넘어온 듯한 실감이다. 역사를 길잡이 삼아 여행하는 재미와 유익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고치령 고갯마루에는 ‘산령각(山靈閣)’이 있다. 산신령을 모신 전각이란 뜻인데, 단종과 금성대군이 각각 태백산과 소백산의 산신이 돼서 산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고치령 아랫마을 사람들이 지은 신당(神堂)이다. 백성들이 원통한 사정을 호소하고 소망을 의탁하는 대상으로 억울한 죽임을 당한 이들이 많다. 억울하게 죽었다면 자신들의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사정도 잘 알아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으리라.
맨 위 사진은 단종이 유배됐던 강원 영월의 청령포. 기와집이 단종이 기거하던 어소(御所)다. 가운데는 김삿갓 유적지의 조형물. 김삿갓의 두상과 함께 만들어놓은 천도복숭아는 환갑잔치에서 김삿갓이 읊은 시 속에 나온다. 아래는 경북 영주를 대표하는 명소인 부석사. 마구령 아래 부석 터널에서 나오면 부석사 입구까지 차로 10분이 채 안 걸린다.
산령각은 끊임없이 다시 지어졌다. 6·25전쟁 때 불탔다가 1966년 다시 지어졌고, 2001년 소실됐으나 2004년 다시 세워졌다.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을 기리고, 그 죽음을 측은해 마지않는 백성들의 마음은 불타도 허물어지지 않고 세월이 가도 잊히지 않았다. 적막한 길 위에 있지만 잘 관리되고 있는 고치령 고갯마루 산령각이 그 증거다.
# 금성대군의 피가 묻은 돌이 있다
단종과 금성대군, 그리고 성황당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고갯길 얘기에서 살짝 빠져나와 금성대군 피가 묻었다는 돌, 그러니까 혈석(血石)을 모시고 있는 단산면 두레골 ‘금성대군당(堂)’ 얘기를 하고 가자. 영주시 단산면 단곡리 두레골 깊은 곳에 금성대군 신당이 있다. 금성대군의 혈석을 모셔 두었다는 신당이다.
1900년대 초반, 순흥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초군청(樵軍廳)’이란 기구가 만들어졌다. 참봉 벼슬을 하던 김교림이 사회가 혼란스러웠던 개화기에 질서 회복을 위해 결성한 농민조직이다. 일종의 자치기구였던 셈인데, 조직의 우두머리를 뽑아서 관과 토호를 견제하는 한편, 마을의 안녕과 질서 등을 위한 의례 등도 전담했다. 초군청이 주관한 가장 큰 행사는 산신제였다.
초군청은 두레골에 산신각을 짓고 산신에 제를 올리다가 1930년 무렵 금성대군의 피가 묻었다는 혈석을 옮겨와서는 산신각 위에다 금성대군당을 짓고 거기에 모셨다. 이 바람에 제례의 중심이 산신에서 금성대군으로 옮아가면서 산신제는 ‘금성대군 추모제’가 됐다. 초군청 조직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와 매년 정월 보름에 금성대군당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초군청은 수소를 제물로 쓰고 엄동설한에 제관들 모두 냇가의 얼음을 깨고 목욕재계를 한다는 원칙 등을 고집스럽게 지켜오고 있다.
무속인들 사이에서 금성대군당 성황신이 특히 영험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무속인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마침 두레골을 찾아갔던 날에도 무속인 몇몇이 굿을 하고 있었다. 금성대군당 안의 혈석에는 흰 고깔과 무명실 뭉치가 씌워졌고, 제물로는 소머리가 올려져 있었다.
금성대군당이 있는 두레골은 좁디좁은 산골길을 굽이굽이 들어가야 해서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는데, 두레골 바로 위쪽에 절집 장안사가 새로 들어서면서 찾아가기가 한결 쉬워졌다. 단산면 단곡리로 들어가서 장안사 이정표만 보고 들어가면 절집 못미처 오른쪽으로 금성대군당이 있다.
# 부석 터널이 여행자에게 주는 선물
이제, 마구령 얘기다. 마구령은 경북과 충북, 강원, 이렇게 3도의 사람들이 장을 보러 넘나들던 옛길이다. 영월장이 멀었던 영월 사람이나 단양 영춘의 장이 영 허술하다 느꼈던 단양 사람들은 마구령 넘어 영주의 부석장을 드나들었다. 마구령은 장꾼들이 ‘말을 몰고 다닌 고개’라는 데서 나온 지명이라는데, ‘매기재’라고도 불렀다. 마구령 고개의 경사가 워낙 심해서 한 발 한 발 오르는 게 논을 매는 것처럼 힘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마구령 들머리인 남대리는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오지였다. 6·25전쟁이 난 걸 마을 주민들이 한 달 반쯤 지나서 지나가던 피란민에게 들어서 알았을 정도라고 했다. 1976년이 돼서야 전기가 들어왔고, 1981년에 전화를 처음 놓았다. 그 시절에 남대리 주민들은 수확한 고추나 팥, 콩 따위를 짊어지고 마구령 넘어 장에 가서 소금이며 생선으로 바꿔왔다. 지금은 체험마을도 있고, 번듯한 펜션도 들어섰지만, 남대리는 아직도 성글게 들어선 집과 오래된 집들로 오지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마구령 아래로 터널이 뚫렸다. 도로도 다 놓고, 터널 내부 공사도 거의 다 끝났다. 지난달 일대에 폭설이 쏟아졌을 때는 지역 주민들에게 터널을 임시 개통하기도 했다. 정식 개통은 6월 초쯤으로 예정돼 있다. 2016년 공사를 시작했으니 공사 시작 8년 만에 개통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당초 공사를 시작할 때는 고갯길 이름을 따서 ‘마구령 터널’이었는데, 새로 세운 이정표를 보니 ‘부석 터널’이 됐다. 터널이 영주시 부석면에 있어서 그렇게 붙였겠지만, 내심 관광객들을 부석사로 끌어들이려는 포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부석 터널의 길이는 3.03㎞. 시속 60㎞의 속도로 달리면 3분이면 통과한다. 그 길고 두텁고 험준한 소백산을 3분 만에 이쪽저쪽으로 오가는 것이다.
보통 새 길을 개통하는 효용은 단축된 소요시간으로 가늠한다. 그런데 부석 터널을 개통한다고 해도, 수도권에서 출발하는 여행자의 목적지 도착 소요시간은 달라지지 않는다. 부석 터널 너머에 부석사가 있지만, 수도권에서 부석사를 가려면 아무도 그 길로 가지 않는다. 그 길보다 훨씬 더 빠른 고속도로와 국도가 있어서다.
부석 터널 개통으로 달라지는 건, 여행지에서 여행지로 건너가는 동선이 편리해진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한 번 여행으로 묶어서 볼 수 있는 권역이 늘어난다. 부석 터널을 이용하면 영월에서 곧바로 영주로 건너갈 수 있다. 영월의 장릉과 청령포를 보고서 김삿갓계곡을 거쳐 곧바로 영주의 부석사와 소수서원, 선비촌까지 두루 엮어서 둘러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부석 터널이 여행자들에게 주는 선물은 ‘더 풍성한 여행’이다.
# 영월과 영주를 잇는 여행의 동선
부석 터널 개통 이후, 영월과 영주를 잇는 동선에서 가봐야 할 곳들로 미리 동선을 짜보자. 먼저 단종의 자취를 밟자면 단종이 잠들어 있는 장릉과 유배지 청령포는 기본 중의 기본. 사육신을 모신 사당 ‘창절사’도 빼놓을 수 없겠다. 창절사는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피살되거나 절개를 지킨 사육신을 비롯한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겸 서원이다. 지난 2022년 11월에 보물로 지정됐는데, 그걸 기념해 지난 4일부터 방문객에게 서원을 개방하고 문화 해설을 해주고 있다.
고치령 정상의 산령각에 모셔진 위패. 태백산신은 단종, 소백산신은 금성대군을 뜻한다.
부석 터널 개통으로 가장 수혜를 받게 되는 명소는 영월의 김삿갓계곡이 될 듯하다. 김삿갓계곡 주변으로 문학관과 유적지와 묘가 있는데, 영월에서도 가장 외진 데다, 여기가 한 번 들어가면 고스란히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는 막다른 골목 같은 지형이어서 여행자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았다. 그런데 부석 터널이 개통된 뒤 영월에서 영주의 부석사로 넘어간다면 김삿갓문학관과 묘역을 거쳐 갈 수밖에 없다.
김삿갓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유독 비석이 많다. 이해할 수 있다. 김삿갓이 남기고 간 게 오로지 시(詩)밖에 없고 그를 추념하거나 기리는 것도 오로지 글뿐이니, 글과 시를 돌에 적어 세워둘 수밖에 없었으리라. 수려한 계곡 사이로 조성된 공원을 느긋하게 둘러보면서 돌비석에 새겨진 해학과 풍자의 시를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김삿갓계곡 못미처 조선민화박물관도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민화는 감상을 목적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재액을 물리치는 벽사의 기원이나 복을 받기를 바라는 기복신앙이 어우러진 ‘우리’ 그림이다. 서민들은 물론이고 사대부의 병풍이나, 여염집의 벽장문까지 두루 걸렸던 민화는 당시 사람들과 통과의례를 함께해 온 생활문화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 민화 180여 점과 현대 민화와 춘화 등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중에 물고기가 변해 용이 된다고 해서 과거 급제와 입신출세를 기원하는 ‘어변성룡도’가 가장 인기다. 관람객들이 시험을 앞둔 자녀의 합격 등을 기원하며 사진을 찍어간다. 박물관에 걸린 민화가 관람객에게 벽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까치호랑이, 구운몽도 등 수준급의 민화도 좋지만, 입장료만 내면 들을 수 있는 흥미진진한 민화 해설이 특히 인상적이다.
부석 터널을 넘어 영주 땅으로 들어가면 최고의 명소는 단연 부석사다. 거기에 깃든 역사는 물론이고 공간의 미감이나 건축적 미학으로 잘 알려진 곳이라 더 보탤 이야기가 없다. 영주에 갔다면 소수서원이나 선비촌도 빼놓을 수 없다.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을 추모하는 제단인 금성대군 신단도 가봐야 하겠고, 금성대군이 숨진 뒤 싹을 내지 않고 죽은 듯 있다가 200여 년이 지난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고 당시 희생된 순흥의 선비들을 기리는 제사를 올리자 연초록 잎을 내며 살아났다는 은행나무도 보고 와야겠다.
■ 김삿갓의 평생시
영월의 김삿갓면에는 김삿갓 묘와 생가, 문학관이 있다. 평생 방랑하는 삶을 선택했던 김삿갓의 시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 고단함이 녹아 있다. 그가 말년에 자기 삶을 돌아보며 쓴 시가 있다. 제목은 ‘평생시(平生詩)’. “…울타리에 뿔 걸린 양처럼 궁벽한 길…바람과 달과 함께한 내 행장은 빈 주머니 하나…돌아가기도 어렵고 우두커니 서 있기도 어려운데 얼마나 방황하며 길 가운데 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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