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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장이 장인으로 하여금 장검을 만들게 하되 일백 번 불에 달궈내니 그 칼날이 심히 날카로워 돌을 베이고 쇠를 끊었다. 열흘에 소 열 마리를 먹자 몸이 매우 살이 찌고 스무 날에 소 스물을 먹으니 도리어 몸이 수척해지고 그믐에 소 서른을 먹으니 몸이 살찌지도 않고 수척하지 않아 평상인과 같아졌다. 날램을 쌓고 길러 중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 중이 과연 기약한 것과 같이 와서 감사를 보고 말하기를, “이 비장이 왔습니까” 감사가 말하기를 “어제 돌아왔느니라.” 이 비장이 마침 곁에 있다가 내달아서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내 이제 여기 있으니, 네 어찌 당돌함을 이렇듯이 할 수 있느냐”그 중이 말하기를, “길게 수작할 것이 아니라, 오늘 내 너와 더불어 생사를 결정하려 한다”하고 드디어 뜰에 내려 바랑 가운데에 둘둘 말아 둔 칼을 꺼내어 펴니 길이가 3척이고, 빛이 서릿발 같았다.
이 비장 또한 뜰에 내려 몸에 누른 동다리에 붉은 전복을 입고 손에 어른 크기의 백년검(百年劍)을 쥐고 발에 송곳을 박은 한 켤레의 장화를 신고 검술로 서로 대적하니 서로 나오락무르락하다가 검광이 번쩍번쩍하는 곳에 한 쌍의 은으로 만든 독처럼 두 사람이 공중에 올라 구름 속에 들어가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뜰에는 구경하는 자가 다 그 신묘함을 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날이 기운 후에 붉은 피가 방울방울 땅에 떨어지더니, 이윽고 그 중의 몸이 선화당(宣化堂) 아래 떨어지고 머리는 포정문 밖에 떨어졌다. 여러 사람이 이 비장의 무사함을 알았지만 날이 저물도록 기척이 없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황혼이 물들 때에 비로소 칼을 집고 공중에서 내려와 감사하게 여러 차례 사례하며 말하기를, “소인이 어르신의 은덕을 입어서 소 30필을 먹고 기운이 충실하고 누르고 붉은 복색으로 그 중의 눈을 현혹시켜서 그 놈을 베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던들 소인의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라며 감사가 말하기를, “중의 머리는 떨어진지가 오래인데 그대가 내려온 것은 어찌 그리 더뎠느냐” 이 비장이 말하기를, “이미 검기를 탔는지라, 고국 생각이 간절하여 그 사이 농서에 가서 선조의 분묘를 찾아 뵙고 한 차례 통곡하고 왔습니다”하였다. 이 비장의 신이하고 용맹한 검술은 예나 지금에 드물었다.
이 비장의 이야기는 신이해서 그대로 믿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다만, 이 비장이라는 인물이 어떤 중과 다투다가 그 중을 죽였고, 그 중의 스승되는 승려가 원한을 갚으려 했다고 하는 이야기 자체는 있을 법한 일이라는 점에서 전체가 만들어진 소설이라기보다는 이 비장과 승려의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윤색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늘이 낸 파락호-양천봉
양천봉(梁天奉)은 조선 후기 사람인 담정(潭庭) 김려(金鑢, 1766~1821)의 시집 '사유악부(思惟樂府)'에 등장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아마도 '사유악부'는 김려가 1801년 12월 보름날에 쓴 시이다. 김려는 열 다섯 살에 성균관에 들어가 강이천(姜彛天, 1768~1801), 김조순(金祖淳, 1765년~1832), 이옥(李鈺, 1760~1812) 등과 어울렸는데, 이들과 함께 정통 고문에서 벗어나 시정의 세태를 백성들의 상말을 써서 표현하는 ‘패사소품’ 문체를 익혔다. 32살이 되던 1797년에 강이천의 유언비어 사건에 휘말려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갔다가, 1801년 신유사옥으로 인해 다시 진해로 유배되었다. 진해에 있는 동안 부령시절의 유배생활을 그리워하며 쓴 글이다. 이 시집에는 부령에 사는 다양한 인물들을 소재로 하여 시를 썼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양천봉이다.
김려는 시 꼬리말에 양천봉에 대해 평가하는 주를 달아놨는데, “기위(騎衛)의 이름은 천봉으로, 파락호(破落戶)이다. 청나라 상인 백여 명을 허고원(虛古院) 길 위에서 때려눕혔다. 허고원은 부령(富寧) 북쪽에 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파락호는 재산이나 세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이르는 말로, 팔난봉이라고도 하는데, 자신의 권력이나 재물만을 믿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등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한당들이다. 따라서 양천봉은 도덕적으로 그다지 존경받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려의 시를 보자.
그대 무엇을 생각하나, 저 북쪽 바닷가라네. 하늘이 낸 건달 양 기위 소년 시절에 그 집안이 굉장히 부자였네. 저포((樗蒲)놀이 한 판에 삼백 꿰미 돈 던지고 팔찌에는 날쌘 매가, 마구간에는 준마가 있었지. 명천(明川) 고을 기생의 서방 노릇도 했는데 이팔청춘에다 이마가 매미 같은 여인이었지 지금은 다 털어먹고 말 거간꾼 되었는데 주먹질 발길질 그 솜씨가 대단해라 허고원 길가에서 사람들 때려눕힌 뒤에 북쪽으로 석 달이나 발길 끊었지.
시를 보면, 양천봉은 어렸을 적엔 집안이 상당히 부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놀음을 좋아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 김려는 양천봉이 저포놀이 즉, 윷놀이 한 판에 삼 백 꿰미의 돈을 날린 적도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 꿰미는 엽전 100전 즉 한 냥을 말한다. 한 번에 300냥의 돈을 도박비용으로 사용할 정도였던 것이다. 또한 그와 관련해 매와 말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년 시절에 매사냥을 하고 말을 키울 정도로 부유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재산의 많고 적음이 사람의 품성이 고매하다거나 우매하다거나 하는 것과는 상관없듯이, 그도 재산은 많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인품은 지니고 있지 못했던 듯 하다. 오죽했으면 김려가 그저 파락호라 하지 않고 양천봉을 하늘이 낸 파락호라고 언급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한다면, 집안에서 내 놓은 망나니에 가깝지 않았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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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많은 돈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팔청춘 즉, 16살의 나이에 이마가 매미 같이 고운 명천 고을 기생의 기둥서방 노릇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몰락한 뒤의 일일 것이다. 명천은 함경도에 위치한 지역으로 북어를 말하는 명태(明太)라는 이름은 명천에 사는 태(太)서방이 처음 발견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기도 하다. 도박과 여자를 가까이 하는 방탕한 생활은 양천봉의 많던 재산을 모두 소진하게 만들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돌 봐주는 부모가 죽고 형제들이 멀리하면서 결국 말 거간꾼이 되어 밥벌이를 하며 살아갈 정도로 몰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싸움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청나라 상인 백여 명을 부령 북쪽의 허고원 길 위에서 때려눕힌 일도 그런 파락호 노릇의 하나였을 것이다. 후환이 두려워서 북쪽 어느 곳으로 3개월 정도 몸을 피하기는 했지만, 청의 상인 100여 명을 때려눕힐 정도로 무예에는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상인들이란 많은 돈이 걸려있는 직업이므로 도적이나 산적들로부터 보호를 위해 경호원들을 데리고 다녔을 것이고, 그들 스스로도 어느 정도 호신을 할 수 있는 능력들을 소유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을 때려 눕혔다고 하니, 그의 솜씨는 대단했던 듯하다. 양천봉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는 김려도 주먹질 발길질 솜씨가 대단하다고 서술하고 있으니 말이다.
당시 양천봉은 하급무관직인 기위의 직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별기위 소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별기위는 조선 후기 함경도에 설치했던 기병부대(騎兵部隊)로 숙종 10년(1684)에 국경 지대인 함경도의 변방을 지키기 위해 활쏘기와 말타기의 재주가 뛰어나고 및 용력(勇力)이 있는 자 600인을 선발해 친기위라 한 것이 그 시초이다.
'연려실기술 별집' 병제에는 숙종 10년에 임금이 명을 내려 함경남북 양도에서 힘이 뛰어나고 활쏘기와 말타기의 재주가 있는 자를 가려 뽑아서 친기위(親騎衛)를 설치하였는데, 각각 3백 60명을 두어 위급할 때에 쓰게 하였다. 그 후에 군사를 더 뽑아서 감영과 병영에 나누어 소속시켰는데 모두 3천 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친기위병은 매년 음력 2월과 5월․8월․11월인 4중월(四仲月)에 날짜를 정해 각기 소속 영문에서 그 재주와 무예를 시험하였는데, 과목은 유엽전(柳葉箭)․편전(片箭)․기추(騎芻)․편추(鞭芻)의 4기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양천봉은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사유악부'가 저술된 시기는 1790년에 '무예도보통지'가 편찬이 된 이후이며, 양천봉이 하급이지만 나라의 녹을 먹는 무관직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예 그 중에서도 특히 권법에도 능한 무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세상에 쓰이지 못한 기재-진종환
진종환(秦鐘煥, 1803~1854)은 조선 철종 때인 1862년에 유재건(劉在建,1793~1880)이 지은 인물행적기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다. 이향견문록은 중인층 이하의 평범한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조선시대잡과합격자총람(朝鮮時代雜科合格者總覽)을 참고하면, 진종환의 본관은 풍기(豊基)이고 자는 중경(重磬)․호는 교릉(嶠陵)이었으며, 증조할아버지는 진재백(秦載白), 할아버지는 진동(秦洞), 아버지는 규장각 각감을 지낸 수일재(守一齋) 진동석(秦東奭)이었다.
그는 20세 때인 순조 22년(1822)에 3년마다 한번 씩 열리는 식년시(式年試)에 역과 7등으로 합격하여, 관직이 첨추(僉樞)에 이르렀다. 진종환은 성품이 담박하여 마치 무능한 것 같이 보였고, 행동거지가 소탈하여 부귀한 집안의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서예에도 재주가 있었다. 그가 종요(鍾繇, 151~230)와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서첩을 베껴 그리면 실물과 진배가 없었고, 특히 김생의 글씨를 더욱 좋아하여 그 글씨를 본보기로 삼았는데, 그의 글씨체는 힘이 있고 원숙하고 고아한 것이 마치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위 같았다. 그의 시를 읽어보면, 빼어나고 깊은 물 속 같으면서도 빛난다고 할 정도로 소릉(少陵) 즉,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진수를 깊이 터득한 듯하다. 악부체 여러 작품도 모두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와 조나라의 비분강개한 기상이 녹아 있었다.
한번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접반사가 용만(龍灣), 지금의 의주에 머무를 때, 당시 상서 우당(羽堂) 조병현(趙秉鉉, 1791~1849)이 여우와 담비의 아름다움에 대해 언급하자, 그가 그 모양과 성질을 낱낱이 들어 이야기하고, 뭇 짐승에 대해서도 남김없이 품평하는 것이었다. 이어 한의학에서 사용되는 약재인 본초에 대해서도 이름을 들며 물어보니 줄줄 외워 대답하는 데 착오가 없었다. 상서 조병현이 깜짝 놀라 돌아와 사람들에게 그를 천재라고 하였다. 그는 평소 바둑을 좋아하여 거의 적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여러 판을 내리 이긴 적은 없었으며, 국수와 대국하면 꼭 한 점을 져주었다.
언젠가 어떤 권세가가 그를 만나보고자 했더니 그는 달가워하지 않으며, “다섯 말의 쌀로 허리를 숙이는 것을 옛사람은 수치로 여겼는데, 하물며 평원군(平原君)의 문객조차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라고 말을 하였다. 평원군은 전국시대 사람으로 본명은 조승(趙勝)이고 조(趙)나라의 재상을 여러 번 한 인물이다. 그는 재상으로 있으면서 어진 성품에 빈객(賓客)을 좋아해서 수하에 수천 명의 식객(食客)들을 거느리고 있기도 했었는데, 진종환은 그런 평원군의 문객조차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그보다 인품이 못한 권세가와 만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권세가와 가까운 사람들이 진종환을 욕하고 헐뜯는 소리를 마구 쏟아냈지만, 끝내 권세가와 대면하지는 않았다. 진종환은 “나의 할아버지 때부터 나라의 은혜를 산과 바다처럼 입었으나 어리석은 못난 내 주제로는 티끌이나 이슬만큼도 보답할 수가 없다. 단지 내 분수껏 먹고 마시며 세상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게 사는 것이 아마도 자연스럽게 보답하는 길이 되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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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건이 그에게 “그대의 재주를 장차 어디에 쓰면 좋겠는가?”라고 묻자, 그는 “만약 언제 내가 군대에 있게 된다면, 군사들을 용맹스러우면서도 방략을 아는 자들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자 비장한 목소리로 웃으며 노래부르니, 맑고 매끄러운 곡조가 속세의 노래에 견줄 바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1854년 그의 나이 52세에 죽었다. 죽을 때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 초조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내가 이별의 말을 하며 흐느껴 울자, 그는 “당신의 명도 역시 다하였으니 불원간 나를 따라올 것이네”라고 하고, 손을 저어 물러가게 하였는데, 그의 말대로 그해 겨울에 아내 또한 죽었다.
그가 세상을 뜨자 정씨에게 시집간 그의 작은누이가 언문(한글)으로 그의 평생 행적을 적고 친척을 시켜 장중규(張仲圭)에게 “돌아가신 오라버님께서 좋아하신 분으로는 선생만한 분이 없습니다. 길이 전해질 글을 한 편 지어주소서”라고 부탁을 하자, 장중규가 만사를 지어주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진종환은 다양한 능력을 지녔던 인물이었는데, 병사들을 가리키면 용맹하면서도 병법을 아는 자로 만들겠다고 호언할 정도로 무예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완력은 너무 뛰어나 20근짜리 철장을 구부릴 수 있었고, 몇 장 높이를 뛰어넘을 수 있었으며, 근육이 단단하여 손으로 눌러보면 흡사 철판을 더듬는 것 같았다. 강한 쇠뇌를 당겨 쏘면 다섯 발 중 4발을 맞힐 정도였다. 담력도 있어서 한번은 맨손으로 숲 속의 호랑이를 쫓아 들어가기도 했다. 그는 창을 쓰고 봉을 휘두른 데 모두 묘한 이치를 터득했다. 언젠가 달밤에 유재건이 다른 사람들을 물러가게 하고 그를 따라 산골짜기로 들어가 무예를 한번 보여달라고 했다. 그가 작대기를 들고 사나운 기세로 18반 무예를 대략 보여주었는데, 어찌나 가볍고 민첩한지 꼭 날아다니는 듯하여 산새들이 모두 놀라 지저귈 정도였다.
진종환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어 그에 대해 알 수 없는데, 무예도보통지에 기록된 무예 특히, 창술이나 봉술에 뛰어난 인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그 재능을 꽃피워보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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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맨손으로 깨다-양익명(梁益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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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무예에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양익명(梁益命)은 조선 숙종(肅宗) 6년(1680)에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박천군수(博川郡守)와 중화부사(中和府使) 등을 지냈다. 선전관(宣傳官)으로 있던 숙종 8년(1682)에는 군관(軍官)으로 일본에 가는 통신사 일행을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집안이나, 출신에 대해서 알려주는 자료는 찾을 수 없다. 다만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을 통해서 그의 내력만을 조금 알 수 있을 뿐이다.
박천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우의정 민암(閔黯, 1636~1694)이 숙종 17년(1691) 3월에 그의 용력(勇力)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남을 숙종에게 고한 적이 있었다. 민암은 그가 돌덩이를 주먹으로 격파하고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막을 수 있으며, 또한 말타기에도 능해 나라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라고 보고하였다. 민암은 당시 무사들이 강궁을 잡아당기지도 못한다고 하면서 그의 재주를 권장해 병조(兵曹)에서 수용토록 하자고 숙종에게 건의하였다. 숙종도 이에 좋다고 답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숙종 18년(1692) 8월 9일(병술)에는 숙종이 친히 그를 불러서 무예를 관람하기도 하였다.
‘임금이 어제처럼 친히 임하여 무예 재주를 관람하고, 무릇 4일 만에 파했다. 우의정 민암이 일찍이 박천군수 양익명의 용력이 남들보다 뛰어남을 임금께 아뢰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앞으로 오도록 불러서 그의 무예를 시험했는데, 양익명이 주먹으로 돌을 치자 손이 닿는 순간 돌이 곧바로 부서졌다. 임금이 “또 능한 것이 있느냐?”라고 물으니, (양익명이) 대답하기를, “신이 서 있고 앞에서 이리저리 돌을 던지게 하더라도 막아내어 맞힐 수 없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선전관 네 사람에게 돌을 가져다가 던지도록 하니, 양익명이 손으로 받아내고 발로 차고 하여 하나도 (자기 몸에) 맞는 것이 없게 하였다. 임금이 기뻐하며 드디어 하교(下敎)하기를, “양익명이 지금 무슨 관원이냐?”라고 하자, 좌우에서 대답하기를, “전에 군수(郡守)였는데, 고적(考績)에 하등(下等)이었습니다.”라고 하니, 하등의 고적을 없애 주고, 상당한 관직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1617~1714)은 “무예(武藝)를 친히 검열하시는 것은 국가의 대사로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양익명의 재주 같은 것은 다만 맞닥뜨려 겨루는 놀이일 뿐입니다. 가까운 자리에서 시험할 것은 되지 못하니, 원컨대, 상례로 삼지는 마십시오.”라고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춘당대에 나가 양익명을 불러 그의 솜씨를 본 숙종은 그의 무예솜씨에 만족한 탓인지 하등이었던 그의 근무성적을 없애 주고, 품계에 맞는 관직을 제수하도록 하였다. 원래 조선시대 지방 관리의 근무평가는 ‘수령칠사’라고 하는 7가지 기준을 가지고 이루어졌다. 농업과 누에치는 것을 잘 할 것, 인구를 늘릴 것, 학교를 일으킬 것, 군대에 관한 사무를 잘할 것, 부역(賦役)을 고르게 할 것, 소송을 잘 처리할 것 그리고 간사하고 교활한 것 등을 없애애는 것들이 그것이다. 지방관의 성적평가는 관찰사가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에 했는데, 이 때 성적은 상상(上上)․상중(上中)․상하(上下), 중상․중중․중하, 하상․하중․하하 등 9등급으로 나누었다. 양익명은 하등이었다고 하므로 하상․하중․하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관리가 하등의 성적을 받으면, 곧바로 파직을 당해야 했으며, 하를 받아 파직된 자는 2년이 지나야 임용되었다. 즉 원칙대로라면 양익명에게 벼슬을 제수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당시 양익명에 대한 숙종의 관대함은 승정원일기 숙종 18년(1692) 9월 16일 기록에도 나타난다. 병조판서 민종도(閔宗道)가 춘당대 시재 때에 양익명에게 품계에 맞는 관직을 제수한다는 명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가 박천군수로 있다가 물러날 때, ‘해유(解由)’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자, 숙종이 이미 명령이 있었고 관직을 제수하였으니 구애받지 말라고 하기도 하였다. ‘해유’는 조선시대 관리가 물러날 때 제출해야 하는 인수인계서로 ‘해’는 임기가 만료되어 그 직책에서 해제된다는 뜻이고, ‘유’는 임기중의 업무에 대한 평가를 거쳤다는 뜻이다. 즉 ‘해유’는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인수인계하면서 재임했던 동안 출납․보관하던 물품 등의 회계가 정확함을 인정받고 책임을 면제받는 것이었다. 따라서 해유를 마치지 못한 관리는 전보될 수 없고, 혹시 특명으로 전보되어도 녹봉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해유받지 못하여 해임된 자는 관료로 천거받지 못하게 했다. 그런 양익명임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벼슬을 제수했다는 것은 그의 무예솜씨를 매우 높이 산 까닭이라 짐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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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를 보면, 이 때 양익명은 종4품의 도총부(都摠府) 경력(經歷)에 임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군관(軍官), 부호군(副護軍), 부사(府使), 영종첨사(永宗僉使), 백령첨사(白翎僉使), 창성부사(昌城府使) 등을 거쳐, 숙종 37년(1711)에는 중화부사(中和府使)에 이르렀다. 하지만, 숙종 38년(1712) 10월 28일(무인) 기록을 보면, 양익명은 전삼세(田三稅)를 은(銀)으로 바꾸어 지부(地部)에 상납할 적에 장사치들과 결탁하여 물건을 판매한 이익을 모두 자기를 살찌우는 데 사용했고, 촌가(村家)에 출입하면서 뇌물을 억지로 받은 것이 발각돼, 사간원의 탄핵을 받게 된다. 같은 날짜의 승정원일기 기록을 보면, 양익명에 대해 “본래 무식한 사람으로 눈이 있으나 글을 알지 못했으나 크고 작은 공적인 일을 군관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의 손에 맡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무예만 알고 다른 일에는 무딘 전형적인 무인이었던 것 같다.
숙종은 그를 즉시 파직시키지 않고, 좀 더 자세히 알아보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고 같은 해 10월 29일과 11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그의 파직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 대한 숙종의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성격을 알고 뛰어난 무예 솜씨를 아낀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러한 숙종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11월 5일 숙종실록을 보면, 중화부사의 이름에 조유춘(趙囿春)이라는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 결국에는 경질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1일에 그는 부호군(副護軍), 숙종 41년(1715)에는 소강첨사(所江僉使)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양익명의 무예와 관련해서는 승정원일기 영조 24년(1748) 11월 24일에도 기록이 있다. 임금이 말하기를 “윤창주(尹昌周)는 장사로서 유명했는데, 선조께서 명하여 양익명과 힘을 겨루도록 하였다. 양인이 힘을 겨루다가 바지가 찢어지기에 이르렀다. 그런 까닭에 뒤에 선조(숙종)께서는 (웃사람이) 보기 좋지 않다고 하여 다시는 각력(角力)을 시키지 않았다.”라고 하니, (좌변포도대장) (조)동점(趙東漸)이 말하기를, “(윤)창주는 훈련원에서 벽의 가장자리에 발을 붙였는데(着足), 대들보 위의 제명(題名)이 있는 가장 높은 곳입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인간으로서 가지기 어려운 신선과 같은 날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숙종이 양익명과 장사로 유명한 윤창주를 대결시킨 일화를 담고 있다. 윤창주는 을사사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윤임(尹任, 1487~1545)의 증손이다. 승정원일기의 기록만으로 살펴보면, 윤창주는 훈련원 대들보 위의 판액이 있는 위치까지 발자국을 남길 정도의 인물이었다고 하니, 그는 몸이 날래고 발차기에 능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무예에서 발질이 이어져 왔음을 말해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바지가 찢어지는 바람에 이후에는 각력 시합이 금지가 되었지만, 손에 능한 양익명과 발에 능한 윤창주의 대결은 매우 흥미로운 대결이었을 것이다.
양익명은 전체적으로 맨손무예에 능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어떤 무술을 수련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국가의 녹을 먹는 관리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권법에 능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한창인 때에 명 군사들로부터 기효신서 등에 실린 무예를 배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익명은 그러한 무예에 정통했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물론, 그가 별도의 무예를 수련했을 가능성도 완전 배제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한 확인은 추후 자료 발굴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참고로 손으로 돌을 깨는 기법은 지금도 무예를 하는 이들이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가끔 시연하곤 하는데, 이러한 모습은 고려시대에도 찾아진다. 고려 원종(元宗) 12년(1271)에 낭장(郞將) 김희목(金希牧)은 손으로 돌을 깰 수 있다는 이유로 원의 황제가 그를 불러 보고자 하므로 고려에서 보내주었다는 이야기가 고려사에 기재되어 있다.
보령소년 이야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담헌서(湛軒書) 내집(內集) 4권 보유(補遺)편에는 유(柳) 아무개가 보령(保寧)에서 만난 기이한 소년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이야기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유 아무개란 사람은 천성이 순박하고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가 일찍이 어떤 일 때문에 충남 보령 땅에 가다가 날이 저물어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길을 찾아 얼마 동안 수십 리쯤 들어가게 되었는데, 푸른 절벽이 깎아지른 듯하고 골짜기는 깊숙하였으며, 산길은 풀이 우거져서 갈 곳을 모르게 되었다. 할 수 없이 말에 내려서 방황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언덕 위에서 사람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덩굴을 잡고 올라갔다. 올라가자 두어 칸의 초가집이 있는데 소나무와 대가 우거져 있고, 그 중간에 한 소년이 누런 빛깔의 가는 대를 결어 만든 초립(草笠)에다 바지와 저고리 위에 입는 푸른색의 포(袍)차림으로 서 있는데 얼굴모습이 준수하였다.
그는 문에 기대어 서서 무언가 생각하듯 허공을 응시하다가 손님이 오는 것을 보고 바삐 마루에 내려와 영접하는데 범절이 매우 공손하였다. 유 아무개는 마음으로 이상하게 여겨 말을 거니 그 말솜씨가 유창할 뿐 아니라, 풍채와 태도도 보통보다 뛰어났다. 조금 후에 저녁 식사를 내왔는데 물과 뭍의 맛있는 음식이 가득하였다. 유 아무개는 “산중에서 이런 맛있는 음식을 어떻게 얻었습니까?”라고 물었는데, 소년은 웃기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유 아무개는 그런 모습에 더욱 놀래면서도 이상하다고 여겼다.
밤이 깊어졌는데,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차츰 가깝게 들렸다. 소년은 “손님은 조금 기다려 주시오. 내가 어떤 사람과 약속이 있으니, 잠깐 만나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소매를 떨치고 나는 듯이 가버렸다. 유 아무개가 창틈으로 엿보았다. 소년을 부르던 사람 또한 소년이었다. 두 사람은 옷과 갓이 같아서 구별이 어려웠다. 서로 손을 끌고 가는데 높은 언덕과 험한 벌판을 평지처럼 달려가는 것이었다.
유 아무개는 어떻게 놀랬는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갑자기 벽장문을 보니 자물쇠가 잠겨져 있지 않았다. 벽장문을 열어 보니 뒤 시렁에 묵은 서책들이 있는데 모두 병법(兵法)에 대한 것이었다. 또 기러기 털이 두어 상자 있었고 벽 위에는 흑장의(黑長衣)가 걸려있을 뿐, 다른 것은 없었다. 유 아무개는 소년을 더욱 의심하고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얼마 후에 소년이 돌아왔다. 그런데 소년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내가 처음에 그대를 좋은 사람으로 여겼는데, 어찌해서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남의 서책을 훔쳐보았습니까? 그대가 나를 속일 셈입니까?”라고 말을 하였다. 유 아무개는 속일 수 없음을 알고 곧 사과하였다. 그 다음에 “그대는 반드시 세상을 피하는 이인(異人)인 것 같소. 병서는 그대가 읽는다 할지라도 검은 옷과 기러기 털은 장차 무엇에 쓰려는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소년은 “나는 이미 그대가 말이 헤픈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조금 시범을 보일 터이니 구경하십시오”라고 대답을 하였다. 소년은 기러기 털을 꺼내서 방안에 흐트러뜨린 다음, 검은 옷을 입고 몇 바퀴를 질주하며 돌았다. 하지만 기러기털은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년은 달리기를 이렇게 익히는 듯하였다.
유 아무개는 크게 기이하게 여기고 이어서 그가 다른 소년과 함께 갔던 것에 대해 물어 보았다. 소년은 “아까 왔던 소년의 원수가 경상도 고성(固城) 지방에 있는데 그 사람됨이 사나울 뿐더러 또 있는 곳을 몰랐다가 오늘밤에야 마침 집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까닭에 함께 가서 죽였다”고 말을 하였다. 유 아무개는 속으로 ‘보령에서 고성까지는 거의 1,000리가 되는데 잠깐 동안에 갔다 오다니 나는 새도 그만큼 빠를 수 없다’고 생각하고 탄복을 하였다.
유 아무개는 소년과 더불어 다음날 아침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작별을 했는데, 소년은 “그대가 만약 나에 관한 말을 세상에 퍼뜨린다면 나는 반드시 그대의 일족을 다 없애버릴 것이니, 그대는 말을 조심하시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유 아무개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하고 길가에 풀을 맺어 그곳을 찾아갈 수 있도록 표시를 해두었다. 그 후 한 달쯤 뒤에 다시 찾아갔으나 끝내 소년이 있던 곳을 찾지 못했다.
유 아무개는 소년에 관한 일을 말하는 것에 두려움을 갖고 평생토록 감히 말을 하지 못하다가 죽음에 임해서야 그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죽는데, 이인에 관한 일이 세상에 끝내 전해지지 않는다면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유 아무개가 죽고 그 이야기가 세상에 전해졌는데, 이 이야기를 듣는 이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이 글에 보이는 보령에 숨어사는 소년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홍대용도 담헌서에서 보령에 숨어사는 소년은 깊은 산 속에 숨어사는 이인으로 때를 만나지 못한 인물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홍대용의 서술태도로 보아서, 그가 꾸며낸 이야기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마 홍대용도 주위에 흘러 다니는 이야기를 채록해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보령 소년이 기러기털을 이용한 달리기 연습이 실제 무인들의 수련 방법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옛 무인들의 수련 방법을 살필 수 있는 조그만 실마리일 지도 모르겠다.
숨어사는 이인- 오대산의 검협
보령 산중에 숨어사는 소년의 이야기와 동일한 기록이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글에도 보인다. 김조순의 글에 나타나는 인물은 충청도 보령이 아니라 강원도의 오대산에 거주하던 검객에 관한 기록이다.
오대산의 검협이 어떠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영조(英祖) 때 서울에 서생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성벽이 풍수의 방술을 심히 좋아하여 기회만 있으면 명당을 찾으러 다녔다. 일찍이 그는 강원도 속초에 있는 오대산에 올라가서 놀다가 가장 높은 봉우리의 정상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멀리 바라보니, 좌청룡의 지맥이 거듭 중첩된 것을 바라보고 마음으로 뻗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산줄기가 뻗어 내려가다가 우백호와 만나는 기이한 장소를 찾고자 함이 틀림없었다.
그는 그 장소를 찾기 위해 한달음에 고개를 넘고 내를 건너 몇 십리를 달렸다. 이윽고 한 숲 속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날이 저물고 사방은 어두워져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야 사람 사는 집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첩첩산중이었다.
그는 차츰 마음이 두려워졌다. 자칫하다가는 짐승의 밥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는 정신없이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길을 찾았으나, 날이 깜깜하여 동서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서생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문득 나뭇잎 사이에 반짝이는 불빛을 발견했다. 나뭇잎에 가리웠다가 다시 보이곤 하는 그 불빛은 마치 하늘에 반짝이는 별빛 같았다.
서생이 기는 듯한 걸음으로 불빛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 보니 숲이 끝나는 곳에 집이 한 채 있었다. 서생이 다가가서 문을 두드렸다. 한 젊은이가 나오더니 서생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여기는 숲 속에 호랑이와 표범이 득실거리는 곳인데 손님은 뉘시오?”
서생은 자신이 여기까지 온 경위를 설명했다. 그러자, 젊은이가 반가운 낯빛을 보이면서 말했다. “이 산중에는 사나운 짐승이 많은데다가 집이라곤 저희 한 집뿐이었지요. 손님이 다행히도 이곳을 찾아 오셨습니다.” 젊은이는 곧 서생을 맞아 방안에 안내했다. 그리고는 집안 사람에게 말하여 밥을 짓게 했고, 손님의 허기진 배를 채우게 했다. 서생이 젊은이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니 나이는 서른 남짓하고 용모가 수려하며 기개는 온화했으나 시골의 수재다운 면모는 없었다.
방안을 둘러보니 서가에는 책이 가득하고 네 벽에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서생이 젊은이의 성씨를 묻자, 그는 “천천히 말씀드리지요”하고는 즉답을 피했다. 조금 후 식사가 끝나고 젊은이는 서생과 더불어 이야기를 하면서, 서생이 본 산천의 형세나 나라 안의 산천, 풍수에 대하여 물어봄이 심히 공손하였다. 2시경이 가까웠을 때 서생에게 말하였다.
“손님께서는 피곤하실 테니 일찍 주무시지요. 저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다음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겠습니다.”
젊은이는 손님을 잠자리에 들게 한 다음 자신은 돌아앉아서 등불을 매달고 글을 읽기 시작했다. 낭랑한 목소리가 들을 만했다. 서생은 피곤한 김에 금새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문득 눈을 떠 누워서 젊은이의 등을 바라보니, 그때까지도 젊은이는 여전히 꼿꼿이 앉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문득,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마치 바람에 낙엽이 날려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안에서 주인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왔느냐?” 그러자 문밖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여왔다. “내가 왔네.” 그러자 문을 열고 사나이가 들었다가 주춤하고 말했다. “누운 사람이 누군가?” “괜찮네 산을 헤매다가 길을 잃은 사람이네.” 젊은이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서생을 가만히 흔들면서 연방 말하는 것이었다. “주무십니까? 주무십니까?” 서생이 잠시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짐짓 잠에 취한 듯 돌아누우며 코를 고니 젊은이가 말했다. “잠이 깊이 든 모양이군.”
그제서야 문밖에서 망설이던 사람이 곧 안에 들어섰다. 서생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엿보았다. 그 젊은이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몸집이 우람한 사내였다. 그는 등불 밑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옆에 서서 주인 젊은이에게 말했다.
“이제 가야지” 그러자 주인 젊은이는 몸을 일으켜 내실로 들어가더니 작은 장롱을 열고 그 안에서 비수 두 자루와 보자기 하나를 꺼냈다. 두 사람이 입은 옷을 벗고 보자기를 끌러 그 속에 든 다른 옷을 꺼내어 입었다. 하나는 청색이요. 또 하나는 황색이었다. 서생이 이 거동을 보고 크게 놀라 몸이 더욱 오싹해져 죽은 사람처럼 몸이 굳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행장을 갖춘 뒤 문을 나서더니, 바람과 같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서생은 그제야 슬그머니 자리 속에서 일어났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서가의 책을 빼내어 펴보았다. 모두 검술에 관한 책이었다. 이 젊은이들이 검객인 줄을 알았다.
서생이 다시 몸을 자리에 누이고 잠을 청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오랫동안 몸을 뒤척였다. 이윽고 닭이 울 무렵 밖에서 다시 나뭇잎이 지는 소리가 나더니, 두 젊은이가 어느 새 방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서생이 또 몰래 실눈을 뜨고 엿보았다. 두 사람이 비수를 방바닥에 던지고는 다시 옷을 갈아입고는 서로 손을 맞잡고 웃었다. 대단히 기쁜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처연하게 마주보면서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손님으로 온 젊은이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난 그만 가보겠네” 그리고는 일어나 바람처럼 나가 버리자, 주인인 젊은이는 그제야 행장을 꾸려 본디 있던 자리에다 간직하고 나서는 서생을 불러 말했다. “손님 일어나시오. 일어나 괴이쩍게 여길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소이다. 그만 잠든 체하시오.”
서생이 비로소 일어나 앉아 겨우 입을 열어 자초지정을 물었다. 젊은이는 서슴없이 말하였다. “그 사람은 바로 관북의 삼수갑산에 사는 나의 벗이오. 당초에 나는 그와 또 한 사람의 벗이 한 스승에게 배웠지요. 그런데 그 다른 한 친구가 죄도 없이 남에게 피살되었소. 우리 두 사람이 그 원수를 갚으려 했지만, 10여 년이 넘도록 기회를 얻지 못했지요. 그러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가서 그 원수를 죽이었소.”
서생이 또 물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와 같은 재주로써 어찌 10여 년씩이나 기다렸단 말이오.” “아니외다. 도술이나 방술은 하늘의 뜻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오. 그런 까닭에 신과 같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천명을 빌어야 하는 법이오. 천명이 다하기 전이니, 난들 어찌 그에게 손을 댈 수 있겠소. 오늘밤 그 사각이 바로 그가 큰 액운을 당하는 바로 그때이니, 그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이오. 그러나 이제까지 기다리는 동안 큰 고생을 겪었다오.”
“그러면 죽이는 방법은 허리나 목을 자르는 것인가요?”
“아니오. 그런 것은 검술로서는 서투른 방법이지요. 능한 자가 사람을 죽일 때는 반드시 바람처럼 호하게 마련인거요. 그 사람의 몸에 잇는 아홉 구멍에 들어가 척추로부터 발끝까지 내려가면서 가늘게 그 뼈를 쪼개고 그 창자를 실처럼 난도질하여 써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깥은 터럭 하나 다치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내부는 어육처럼 저미는 것이지요. 그런 뒤라야 직성이 풀리는 법이오”
“ 그 원수가 사는 곳은 어디이며 그 이름은 무엇이라 하오”
“영남의 아무 곳에 사는 갑부 아무개요.” 서생이 속으로 그 갑부의 이름을 마음속에 새겨 두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녀온 길을 헤아려 보니 왕복 천리가 더 되는 길이었다. 또 물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처음에는 웃고 나중에는 눈물을 흘리었소?” “속 시원히 원수를 갚고 나니 기쁘지 않을 수가 있소. 그러나 죽은 벗을 생각하니 감회가 슬프지 않을 수가 없었소.”
이 말을 들은 서생의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움츠렸던 몸을 바로 하며, 젊은이에게 경의를 표했다. “내 일찍이 세상에 격검의 방술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인연이 없어 아직까지 구경을 하지 못하였다가 오늘 다행히 그대를 만났으니 원컨대 그것을 보여주어 내 평생의 갈망을 풀어주시오.”
젊은이는 웃으며 말했다. “창졸간에 시원치 않은 재주로 손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할 것이외다”하고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몸을 일으켜 내실에 들어가서 장롱 하나를 털어 내는데, 그 속에 가득한 것이 모두 닭털이었다.
이윽고 젊은이는 검을 들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수북히 쌓인 닭털 주위를 돌면서 마치 춤추는 듯했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아서 젊은이의 몸은 간 곳이 없고, 한 줄기 흰 기운이 방안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닭털이 스스로 펄펄 날면서 춤을 추는 듯, 벽 위를 어지럽게 날았다.
푸른 등불은 펄럭이면서 바람을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차가운 빛과 서늘하고 어두운 기운이 몸 속을 파고 들어갔다. 서생이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정신을 잃은 채 몸을 떨면서 바로 앉지를 못할 지경이었다.
이윽고 쨍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젊은이는 칼을 던지고, 어느새 웃는 얼굴을 하고 서생의 앞에 서서 말하는 것이었다. “변변치 못한 기예는 끝났소. 손님께서는 잘 보셨는지요.”
서생이 눈을 휘둥그래 뜬 채 병신처럼 앉아 있었다. 한참 동안 말을 못하고 있다가 정신이 돌아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윽고 서생이 정신을 차려 방바닥을 내려다보니 몇 천이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는 닭털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것들이 모두 반으로 쪼개진 것이었다. 서생이 앞으로 기어 나와 젊은이를 껴안으니, 젊은이가 말을 했다. “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젊은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모든 것을 거두어서 다시 제자리에 간직하고 서생과 더불어 자리에 누워 잤다. 서생이 자기의 전공을 모두 버리고 젊은이에게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자 청했다. 그러나 젊은이는 들어주지 않고 말하는 것이었다. “사람이라고 누구나 다 배울 수 잇는 것이 아닙니다. 또 손님의 골상을 보니 이런 것을 배우기도 어렵거니와 배운다고 해도 역시 성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튿날 젊은이는 일찍 아침밥을 해 주고는 서생에게 나가는 길을 자세히 가르쳐주고 작별하면서 젊은이는 서생에게 경계하는 말을 했다. “근신하여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세상에 누설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모름지기 누설하는 날이면 천리 밖에서라도 나는 곧 이것을 알게 됩니다.” 서생이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을 하고는 산을 내려왔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집에 돌아가지 않고 간밤에 있었던 일이 정말 사실인지 궁금하였다. 젊은이가 말한 영남의 그 고을에 이르러, 그 성명의 부잣집을 물으니 과연 이름난 갑부 어느 동네에 산다고 했다. 그는 수소문을 해 가며 그 마을에 찾아갔다. 그리고 은밀하게 탐지하니, 동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아무 달 어느 날 밤에 병도 없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런데 시신을 빈소에 옮기고 염을 해봤지만, 그 시체가 어찌나 부드러운지 흡사 겨를 넣은 주머니 같았답니다. 생시에 뼈나 근육이 전혀 없었던 것 같아서 모두 괴이쩍게 여겼으나, 그가 무슨 병으로 그렇게 갑자기 죽었는지는 아직껏 아무도 모른답니다.”
서생이 속으로 그가 죽었다는 날을 헤아려 보았다. 바로 자기가 오대산 산중에 있는 초막에서 자던 날 밤이 틀림없었다. 그는 더욱 경탄하여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사람에게 말을 아니하다가 나이가 늙어 죽을 때가 되자, 비로소 친척들에게 말을 했다고 한다.
보령 소년 이야기와 동일하지만, 보다 자세하고 신이하다. 소년이 보여 준 무예 솜씨도 검을 이용한 것으로 바뀌었으며, 원수의 죽음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게 서술이 되어 있다. 이러한 점은 홍대용의 기록보다 뒤 시기의 기록임을 고려할 때, 좀 더 이야기에 살이 붙는 등 윤색이 이루어진 까닭에 그러한 것으로 짐작된다. 여하튼, 홍대용과 김조순이 동일한 이야기를 기록하였다는 것은 원래 숨어사는 소년에 관한 이야기가 존재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이야기 구조가 조금씩 보강되어졌음을 말해준다.
나라와 함께 죽어 산 인물-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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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階伯,?~660)은 백제의 장군이다. 의자왕 20년(660)에 신라와 당 연합군이 탄현을 넘어 백제를 공격해 들어오자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벌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계백은 전쟁에 앞서 조국의 멸망을 예감했는지 자신의 처와 자식들을 노예로 살게 할 수 없다 하여 자신의 손으로 죽인 뒤 결전에 임했다. 3천의 군사로 10배가 넘는 3만의 적을 맞아 4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결국 수적 열세를 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그가 백제의 멸망과 함께 한 충신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가 처자식을 죽이고 전장에 나선 점에 대해서는 보는 입장에 따라 약간의 논란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태도는 당시 조금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과 같은 상황에서 전장에 나갈 수밖에 없는 가장으로서의 입장과 한 나라의 장군으로서의 입장에서 오는 고뇌를 느끼게 한다.
백제의 마지막을 같이 한 계백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많이 보이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이다. 삼국사기에는 계백이 벼슬에 나아가 2품의 ‘달솔(達率)’에 이르렀다고 하고,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는 3품의 은솔(恩率)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그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가계가 어떠했는지도 불분명하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04(?)~1866(?))가 고종(高宗) 2년(1865)에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계백에 대해, ‘이름은 승(升)이며 백제동성(百濟同姓)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 왕실의 성이 ‘부여’씨이므로 그도 부여씨인 것으로 여겨진다. 단재 신채호도 조선상고사에서 ‘부여계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름이 승(升)이라고 하는 부분은 ‘계백’이라는 이름이 갖는 뜻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계백의 ‘계’는 사서에 ‘해(偕)’‘계(堦)’로도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한자의 뜻과는 상관없이 우리말 이름을 한자를 이용해 표기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음만으로 보면, ‘계’와 ‘해’는 태양을 뜻하는 우리말 ‘해’로 보인다. 그리고 ‘백’은 백제어에서 ‘백(白)’과 같이 쓰이는데, ‘백(白)’은 ‘새롭다’는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계백’ 혹은 ‘해백’은 ‘새 해’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대동지지에 한자로 ‘승(升)’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점도 그러한 생각을 갖게 한다. ‘승(升)’은 ‘해가 떠오르다’는 뜻을 담고 있는 ‘승(昇)’과 통용되는 것이다. 즉 ‘계백’ 혹은 ‘해백’은 ‘새로 떠오르는 해’를 한자를 이용해 표현한 것으로 짐작된다.
계백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고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 대부분은 황산벌 싸움에 집중되어 있다. 그의 출생에 관련된 기록은 정사라고 하는 역사서에서는 찾을 수 없다. 다만 1928년에 당시 군수였던 홍한표(洪漢杓)가 편찬한 부여지(扶餘誌)를 통해 조그만 단서나마 찾을 수 있을 정도이다. 부여지에는 ‘팔충면(八忠面)은 부여군 서쪽 20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전하기를, 백제의 충신인 성충(成忠)․계백 등 8인이 여기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지어졌다.’고 하여 지금의 부여군 충화면 팔충리를 그의 태생지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충화면 천당리에는 계백 장군이 조정의 부름을 받고 나갈 때 고향이란 표를 하였다고 하여 ‘표뜸[標村]’이라고도 불리는 상천(上天)마을이 있으며, 천등산(天燈山) 마루 동북쪽 정상에는 계백이 수련을 했다는 토굴터와 수련하면서 물을 먹었다는 백충대 우물터가 남아 있다. 이 우물터는 천등산 건물지로도 불리는데, 이곳은 계백의 어머니가 유복자인 계백을 낳을 때 난산으로 실신하자, 호랑이가 이 우물 근처 석실로 물어와 젖을 먹여 키웠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또한 계백이 천등산을 오르내릴 때에는 해묵은 왕솔이 갈대 넘어지듯 했으며, 수련할 때 바위를 디딘 곳에 자국이 생겼다는 장수 발자국 바위 등 계백과 관련된 전설들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이 지역이 계백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유복자로 태어나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는 이야기의 내용으로 볼 때, 상대적으로 좋은 집안 출신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계급에 따라 올라갈 수 있는 최고 관직이 제한되어 있는 고대 사회에서 아무리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천한 계급이었다면, 백제 16관등 중에 제2등인 달솔까지 올라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계백의 집안은 부모대 혹은 그 이전에 몰락한 귀족 계층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아마도 계백을 포함한 성충과 흥수 등은 의자왕이 왕위에 즉위한 이후, 기존의 귀족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발탁한 인재들로 여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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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의 무예수련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이야기도 있다. 부여의 충화에서 태어난 계백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계백은 낮에는 백충(百忠)재와 천등산을 달려 오르내리며 무술을 연마하고 밤에는 글을 읽었다. 백충재는 천당리(天堂里)에서 청남리(靑南里)로 넘어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백제의 충신들이 넘나들던 곳이라 하여 백충재라 불린다고 한다. 하루는 계백의 어머니가 아들의 무술공부에 큰 과제를 주었다. 그것은 백충재에서 천등산 마루의 과녁판을 향하여 활을 쏘고 그 화살보다 빨리 달려가서 화살이 과녁에 꼽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조정에 나아가 벼슬길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계백은 어머니의 명을 쫓아 매일같이 활쏘기를 익혔다. 그는 활을 쏜 후, 재빨리 말을 달려 천등산에 올랐으나 화살보다 빨리 갈 수는 없었다. 고심을 하고 있던 차에, 하루는 이상한 일이 생겼다.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그의 말을 물어 죽이고는 자기 등에 탈것을 권하는 것이었다. 계백은 호랑이의 등에 앉아 천등산 마루를 향해 활을 쏘았는데, 호랑이가 순식간에 달려서 과녁판에 이른 것이다. 화살은 그 후에야 명중되었다. 호랑이가 바로 나는 호랑이 ‘비호(飛虎)’였다고 한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에 소실된 가림방동고(嘉林坊洞考)를 참고하면, 계백의 체계적인 무예 수련은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支石里)와 서천군 마산면 나궁리(羅弓里) 사이를 가로막아선 노고산(老姑山)에서 이루어진 듯하다.
노고산 동남쪽 골짜기에 절이 있는데, 범황사(梵皇寺)라 한다. 절의 승려 혜오화상(慧悟和尙)이 차력(借力)과 둔신술(遁身術)을 알았다. 여러 승려와 더불어 노고산 석굴 중에서 도(道)를 수련하였다. 성충계백 흥수(興首)도 또한 석굴에서 신술(神術)을 배우는데 참여하였다.
노고산은 꼬부랑산이라고도 불리는데, 부여군 25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내 모든 산의 조종(祖宗)이고 산의 굽이진 형태가 마치 노인의 등 같이 생긴 것 같아서 그렇게 불린다. 노고산이란 명칭은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여겨진다. 이 노고산에 백제시대에 범황사가 있었으며, 계백은 그 절의 승려 혜오화상에게서 여러 스님들 그리고 삼충신의 일원인 성충 흥수와 더불어 차력과 둔신술을 배웠다고 한다. 계백은 혜오화상에게 무예를 배우고 천등산 등에서 수련을 이은 이후 관직에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도 이야기가 전한다.
충남 부여에 있는 백제의 궁성에서 의자왕이 밤마다 서편 하늘에 매달린 듯 반짝이는 불빛을 보며 이상히 여기다가 하루는 신하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도록 명하였다. 임금의 명을 받은 신하가 말을 달려 천등산에 이르러 등불이 반짝이는 곳을 향하여 올라갔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건장하고 잘 생긴 장사 한사람이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를 옆에 데리고 앉아서 열심히 글을 읽고 있는 것이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의자왕은 곧 이 장사를 조정에 불러 장군을 삼았다고 한다(계백과 관련한 전설은 임병고, 「계백장군 전설지 답사 및 상황리 왕총에 관한 고찰」 한국학논집, 1986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조선상고사를 보면, 의자왕 원년(641)과 2년(642)에 가금성주(椵岑城主)에 재임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계백 등이 혜오화상에게 배운 차력의 기법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상식을 벗어나기는 하지만, 그의 발자국이 남겨져 있다는 장수 발자국 바위 또는 왕솔 등이 갈대 넘어지듯 했다고 하는 이야기 등과 같이 보면, 맨손무예에 능숙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백제의 맨손무예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백제금동대향로’의 무인 형상을 통해, 그 흔적을 살필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의자왕 2년(642)에 백제의 대좌평 지적(智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상박(相撲) 즉, 스모를 관람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이 혹시 백제의 무예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해 본다.
둔신술은 말 그대로 몸을 숨기는 기법으로 여겨진다. 둔신술은 마음대로 자기 몸을 감추거나 다른 것으로 변하게 하는 기문둔갑을 떠올리게 되지만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적의 감시망으로부터 몸을 숨기며 첩보활동을 하거나 적을 암살하는 등의 기법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앞서 비호 등에 타고 활쏘기를 했다는 전설을 통해 계백이 말타기와 활쏘기 등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보인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볼 때, 계백의 무예 솜씨가 전반적으로 뛰어났던 것으로 봐도 될 듯하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