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의 장

허인욱의 무인이야기

醉月 2010. 10. 21. 08:53

최영의의 저서에 등장한 바늘던지기의 명수 강포

 

극진가라테 창설자인 최영의(1923~1994, 일본명 오야마 마쓰다쯔)의 <백만 인의 가라테>에는 신라인 차력의 명수 강포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옛날 신라시대에 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신라군은 적의 기습을 받아 고전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승려모습을 한 사람이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갑주와 투구로 몸을 가린 적들 사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훨훨 날아다니며 몇 차례 손을 휘저었다. 그렇게 몇 번인가 손을 휘둘렀더니 마상의 적병이 굴러 떨어졌다. 순식간에 열 몇 명의 병사들이 땅에 나뒹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얼굴을 감쌌고, 괴로움으로 몸을 뒤틀었다. 모두 장님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 멀리에서 바라본 적장은 불교가 성한 신라에는 도사가 많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이것이 '마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적장은 크게 두려워하며 후퇴했다. 이틈을 이용해 신라군은 응원군의 도래를 기다려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려가 바로 신라의 기인 강포였다.

그는 어렸을 때 좌골(골반을 이루는 한 쌍의 뼈)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소아마비 환자였던 것이다. 그는 산중의 절에서 기거하며 차력을 동경했다. 원래 아이들은 차력을 동경하지만, 몸이 부자유스런 그의 이런 관심은 보통 아이들에 비해 남달랐다. 그는 누운 자세로 수련을 시작했다. 그 수련은 바늘을 던져서 벽에 달라붙어 있는 파리를 잡는 일이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격법에 심심풀이로 열심히 또 끈질기게 바늘을 던졌다.

바늘 던지기가 그에게 알맞은 운동이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수년간 수련한 결과 마침내 호흡에 맞춰 바늘을 던질 수 있게됐다. 당연히 백발백중, 과녁을 벗어나는 일은 없게 됐다. 오랜 병도 쾌유되었다. 강포는 이 바늘던지기를 하나의 계기로 삼아 연차력(練借力)을 시작했다. 그 결과 놀랍게 체력이 붙었다. 바늘던지기는 못으로 발전되었고 그 위력은 커져갔다. 어떤 자세나 각도, 또 아무리 작은 점과 같은 표적도 빗나가지 않았다. 이후 그는 용맹을 떨쳤고, 어디를 가더라도 승복 소매 속에 못을 넣고 다녔다. 범이 출몰하는 산길도 태연스럽게 다녔다. 범의 눈을 멀게 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포의 바늘던지기 수련을 최영의는 일종의 연차력이라고 하고 있다. 그는 차력을 약(藥)차력, 신(神)차력, 연(練)차력의 3종류로 나누고 있다. 이 가운데 약차력은 약을 복용하여 자신의 체력을 바꾸는 방법을, 신차력은 일종의 호흡법을 포함한 일종의 정신수련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약차력은 약 복용을 통해 본래 자신의 힘보다 더 많은 힘을 내는 방법을, 신차력은 주술적인 방법까지 동원해 힘을 얻는 방법을 말한다. 즉, 꾸준한 노력을 통해 힘을 키우는 일반적인 방법과는 동떨어져 있다. 반면에 연차력은 유연하고 강력하며 민첩한 체력을 만들어내는 방법이라고 한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무예 수련의 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강포의 존재는 역사서에는 찾아볼 수 없다. 때문에 그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백만인을 위한 가라데를 저술한 최영의 총재

(사진출처 : 네이버 블로그)

그런데 강포의 사연과 비슷한 이야기가 성대중(1732~1809)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마귀가 소사(지금의 경기도 평택시)에서 왜적과 싸울 때의 이야기이다. 그는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조선의 원병 제독으로 파견되었고, 첫 전투에서 양쪽 군대가 서로 포진하게 되는 상황을 맞았다. 이때 한 왜병이 검을 휘두르며 기세등등하게 도전해 왔다. 이에 긴 창을 쥔 절강 출신의 병사가 나가 대적하였으나 얼마 못 가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를 지켜본 그의 아들 네 명이 연이어 나가 싸웠으나 모두 죽었다. 검을 잡은 왜병이 더욱 앞으로 다가오자 조명 연합군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마귀가 군중에 상금을 내걸고 왜병에 대적할 자를 모집하였으나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이때 무명옷을 입은 조선 병사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는 마귀에게 읍하고는 맨손으로 그 왜병을 잡겠다고 자원했다. 모든 병사들은 미친 짓이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마귀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우선 나가서 대적하게 하였다. 왜병도 맨손으로 춤을 추기만 하는 병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검을 멈추고 비웃었다. 얼마 후에 검을 휘두르던 왜병이 갑자기 쓰러졌다. 무명옷을 입은 맨손의 병사는 적장의 검으로 목을 베어 바쳤다. 이 광경을 본 왜군들은 크게 기가 꺾였고, 마침내 연합군이 승리하는 쾌거를 이뤘다.

마귀는 그 무명옷을 입은 조선 병사의 공로를 인정하고 검술을 아는지 물었다. 조선병사가 알지 못한다고 말하자, 마귀는 어떻게 왜병의 목을 벨 수 있는지 물었다. 병사는 “어려서 앉은뱅이가 되어 혼자 방에만 있었고,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서 바늘 한 쌍을 창문에 던지는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날마다 동이 틀 무렵 시작해 날이 어두워지면 그치기를 반복하였다. 처음에는 던지는 족족 바늘이 빗나가 떨어졌다. 이후 오랫동안 연습하자 바늘이 구멍에 들어가 8, 9척 안의 거리는 던지는 대로 명중하게 되었다. 3년이 지나자 먼 데 있는 것이 가깝게 보였다. 가는 구멍은 크게 보였고, 던졌다하면 손가락이 마음과 일치되어 백발백중하게 되었다. 기술이 완성되었지만 써먹을 데가 없었다. 때마침 전쟁이 일어났고, 그의 앉은뱅이 다리도 펴져 적장에게 사용할 수 있었다. 왜군은 그가 맨손으로 춤을 추자 이를 비웃고 무시하여 검으로 베지 않았고. 이를 틈타 눈에 바늘을 꽂은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마귀가 왜병을 살펴보니, 정말로 눈에 바늘이 한 치쯤 박혀 있었다고 한다.

최영의와 성대중의 이야기가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최영의의 강포이야기가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나오는 무명인의 이야기를 차용한 것인지는 분명하지는 않다. 아마도 성대중의 <청성잡기>의 이야기가 구전되는 과정에서 신라인으로 와전되었고, 이 이야기들은 최영의가 기록한 것이 아닐까라는 짐작일 뿐이다.

차력은 풀이하면, 힘을 빌린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갖고 있는 본래의 힘 이외의 힘을 빌린다는 것인다. 이에 대해 태권도로 통합되는 5대 모체관 중의 하나인 중앙기독청년회(YMCA)권법부 출신이자, 강덕원의 창설자인 박철희(1933~?) 사범은 “차력은 어떤 누군가로부터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최대로 발휘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기의 종주 - 문노(文弩)

격검에 뛰어난 화랑의 수장

<화랑세기>라는 책을 보면, 신라 화랑의 검술과 관련해 한 인물이 여러 차례에 거론되고 있다. 바로 문노(文弩, 538~606)다. 그는 격검에 매우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랑의 우두머리인 8대 풍월주를 진평왕 즉위 초기인 579년부터 582년까지 역임하기도 했다. 고구려와 백제 멸망에 큰 공을 세웠다.

15대 풍월주인 김유신(595~673)은 그를 두고 기운이 넘쳐흐르고 굽힐 줄 모르는 씩씩한 기세의 우두머리라는 뜻의 ‘사기(士氣)의 종주(宗主)’라고 추앙할 정도였다. 김유신이 가야계임을 고려할 때 나라를 잃고 박해를 받는 같은 처지였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노가 화랑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기에 그러한 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신라는 왕실의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 포석사에 문노의 초상화를 안치하고, 신궁의 선단에서 그에 대한 대제를 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문노의 증조할아버지는 비지(比知), 할아버지는 호조(好助), 아버지는 비조부(比助夫)이며, 어머니는 가야국 문화공주라고 한다. 기록에 따라면 문화공주는 왜국으로 보이는 야국왕이 바친 여자라고 한다. 하지만 문노 스스로는 가야가 외조라고 말하고 있다. 후에 검술 제자인 사다함이 가야를 칠 때 같이 갈 것을 청하자, “어머니의 아들로 외조의 백성들을 괴롭힐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거절한 것으로 보면, 문노의 어머니인 문화공주는 가야계 유민일 가능성이 높다.

이후 신라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정권을 장악한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지소태후는 문노의 아버지인 비조부를 내치고 등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비조부는 바둑 따위를 두며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지소태후가 실세로 떠오른 진흥왕(540~576) 집권 초기에 정계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문노는 어려서부터 격검을 잘하였고, 의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용맹하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아랫사람 사랑하기를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였다. 청탁에 구애되지 않고 자신에게 귀의하는 이들은 모두 어루만져 주었다. 그로 인해 그는 명성을 크게 떨쳤고, 낭도들이 죽음으로 충성을 바치기를 원할 정도였다. 문노의 낭도들은 협기가 많았다고 한다.

이후 많은 전쟁에 참가하며 공을 세웠다. 17세 때인 554년에는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金武力)을 따라 백제를, 18세 때인 555년에는 북한(北漢)에 나가 고구려를, 20세 때인 557년에는 국원에 나가 북가야를 공격할 때 참가했다. 모든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나, 보답을 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부하 가운데에 한명이 불만을 표하자, 그는 “대저 상벌이라는 것은 소인의 일이다. 그대들은 이미 나를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어찌 나의 마음을 그대들의 마음으로 삼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아마도 아버지 비조부가 정계에 밀려난 것이 아들인 문노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화랑세기>와 <삼국유사>의 문노


최근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문노역으로 열연하고 있는 정호빈

제대로 된 대우를 받게 된 것은 6대 풍월주인 세종과의 만남 이후부터였다. 세종은 풍월주가 되자, 문노의 집으로 찾아와 신하로 삼을 수 없으니, 형이 되어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이에 문노는 그를 섬기기로 하였다. 세종은 진흥제에게 문노가 여러 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영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거나, 낭도 금천이 사사로이 사람을 죽여 벌을 받게 되자 의리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변호하여 작위를 받게 하는 등 문노에게 최선을 다한다. 이로 인해 문노의 무리 또한 세종에게 귀의하였다고 한다.

문노 일파는 풍월주 세종을 따라 지방에서도 공을 세웠는데 지위는 얻지 못하였다. 이에 7대 풍월주인 설원랑에게 불복하고 별도로 하나의 문파를 세웠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설원랑과의 세력 다툼에서 밀려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낭도들이 두 갈래로 나뉘게 되었다고 한다.

두 문파는 서로 경쟁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설원랑의 문파는 정통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였고, 문노의 파는 높고 깨끗한 의논들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서로 위아래를 다툰 것이다. 나라사람들은 문노의 무리를 나라를 지키는 신선이란 뜻을 가진 ‘호국선(護國仙)’이라 불렀다. 설원의 무리는 ‘속세를 떠나 유람하기를 즐겨한다’하여 구름 위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운상인(雲上人)’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설원의 무리는 골품이 있는 사람들 즉, 귀족계급들이 많이 따랐고, 초택인 민간인들은 문노의 무리를 많이 따랐다.

진흥대왕 사후 즉위한 진지왕은 지도부인을 총애하였다. 지도부인의 아버지 기오가 문노와 종형제간이어서 지도부인은 문노를 따랐다. 그로 인해, 그녀는 왕에게 권하여 문노를 국선으로 임명하고, 후에 9대 풍월주가 되는 비보랑(秘宝郞)을 부제(副弟)로 삼게 하였다. 이후 설원이 문노에게 풍월주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문노는 국선으로 화랑의 우두머리가 된 까닭에 선화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의 검술 제자로는 9대 풍월주가 되는 비보랑이 있으며, 5세 사다함도 12살 때부터 그에게 검술을 배워 격검에 능했다고 한다. 11세 풍월주가 되는 세종과 미실의 아들 하종(夏宗)도 문노에게 검술을 배워 그 정수를 얻었다고 한다. 14세 풍월주인 호림공도 용력이 많고 격검을 좋아하여 문노의 문하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것으로 봐서 그에게 검술을 배웠을 것으로 보이며, 정예인 임종, 대세, 수일 등도 그에게 검술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문노를 모두 따른 것은 아니었다. 사다함의 낭도 중에 하나인 미실의 동생 미생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문노는 미생이 12살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말에 오르지 못하자 “무릇 낭도가 말에 오르지 못하고 검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하루아침에 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꾸짖은 적이 있었다. 미생을 야단치는 것을 본 사다함은 자신이 사랑하는 동생이라고 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문노는 사다함의 태도 때문에 다시는 이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미생은 이 때문인지 검도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속으로 문노를 꺼리며 경의를 표하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사다함은 매우 곤란해 했다. 이상은 화랑세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로 인해 정확한 사실여부는 조금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삼국사기> 김흠운(金歆運)전을 보면, 김흠운(?~655)이 어려서부터 화랑 ‘문노(文努)의 문’에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어 참고가 된다. 이 기록은 문노가 606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김흠운을 직접 연계되었다기보다 문노의 뜻을 잇는 무리들의 문하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여하튼, 화랑세기의 문노(文弩)와 삼국사기의 문노(文努)는 같은 인물이지만 다른 글자로 표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책은 모두 문노의 존재를 알려주는 자료이다. 이는 문노를 허구의 인물로 치부할 수만은 없게 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기록의 부재로 문노의 검술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돌을 베다-김유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김유신의 무예와 검


경북 경주시 충효동에 위치한 김유신 장군의 묘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낸 김유신(金庾信, 595~673)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仇衡)왕의 증손자이다. 구형왕의 셋째 아들인 김무력(金武力)은 진흥왕을 도와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운다. 무력은 진흥왕이 한강 하류 서해안 일대를 통치하기 위해 553년 새로 설치한 주의 군주가 된다. 무력의 아들인 김서현(金舒玄) 또한 여러 전쟁에서 큰 업적을 거둬 금관가야 왕족이 신라에서 명문가로 자리를 잡는데 한몫을 한 대장군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만노군(萬弩郡), 지금의 충북 진천에서 태수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이 때 김유신이 태어났다. <삼국유사>에는 해와 달 그리고 다섯 개의 별, 즉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났기 때문에 등에 일곱 개의 별 무늬가 있었고, 그에게는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천에 있는 태령산은 김유신의 태를 묻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김유신의 무예 수련과 관련해서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의 나이 15세에 화랑이 되었고, 당시 사람들은 흡족한 마음으로 복종하였으며,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일컬었다.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611년), 공의 나이 17세 때였다. 고구려·백제·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며 슬퍼하고 한탄하여 침략해 오는 적을 평정할 뜻을 품었다. 그래서 혼자 중악(中嶽) 석굴에 들어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늘에 고하며 맹세했다.

“적국이 무도하여 승냥이와 이리 그리고 범이 되어 우리 강역을 침입하여 소란을 일으켜 편안한 해가 거의 없습니다. 나는 한낱 미약한 신하로서 재주와 힘을 헤아리지 않고 뜻을 재앙과 어지러움 소탕에 두고 있으니, 하늘은 아래를 굽어보시고 저에게 능력을 빌려주십시오.”

4일 째 되던 날, 문득 한 노인이 갈포로 만든 옷을 입고 와서 말하기를, “이 곳에는 독충과 맹수가 많아 무서운 곳인데, 귀소년이 여기에 와서 혼자 거처하니 웬일인가?”라고 하였다. 김유신이 대답하기를, “어른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존명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노인은 “나는 일정한 주소가 없이 인연을 따라 행동을 하는데, 이름은 난승(難勝)이라고 한다네”라고 하였다. 공이 이 말을 듣고서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거듭 절하며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근심이 되어 여기 와서 만나는 바가 있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바라건대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애달피 여기시어 방술(方術)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노인은 잠잠하여 말이 없었다. 하지만 공이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여 6,7차까지 마지않으니 그제야 노인은 “그대는 아직 어린데 3국을 병합할 마음을 가졌으니 장한 일이 아닌가?”라며 비법을 전하면서 “조심해서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일 의롭지 못한 일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작별을 하며 2리쯤 갔다가 다시 쫓아가 바라보니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오직 산 위에 5색과 같은 찬란한 빛이 나타나 있을 뿐이었다.

건복 29년(612)에 이웃한 적병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와 이르니, 공은 더욱 비장한 마음을 격동하여 혼자서 보검을 들고 인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서 향을 피우며 하늘에 고한다. 기원하기를 마치 중악에서 맹세하듯 빌었더니, 천관신(天官神)이 빛을 내리어 보검에 신령스러운 기운을 주었다. 3일 되는 밤에는 허숙(虛宿), 각숙(角宿) 두 별의 뻗친 빛이 환하게 내려 닿으매 공의 검이 동요하는 것 같았다.


김유신은 17세에 중악에 들어가 난승이라는 이인에게 방술을 배웠다고 한다. 이에 대해 <화랑세기>는 “중악에 들어가 노인에게서 비결을 받았다. 신변에는 늘 신병들이 있어 좌우에서 호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검이 스스로 움직인다는 점은 무예보다는 신이한 능력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워


김유신 장군의 영정(왼쪽)과 최근 선덕여왕에서 김유신 장군역을 맡은 엄태웅

하지만 현재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들이다. <삼국사기>의 기재된 김유신 관련 기록은 김유신의 현손인 김장청(金長淸)이 지은 <행록(行錄)> 10권을 바탕으로 하여 서술한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조차도 만들어 넣은 말이 많다고 할 정도이므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한병철·한병기는 1997년 출간한 <독행도>에서 김유신이 ‘신검주(神劍呪)’ 주문수도를 했다는 구술을 기록해 놓고 있다. 그들이 기록한 신검주는 이렇다.

상기천검 이기 천지진동(上氣天劍 理氣 天地振動)
지기천검 이실 상천진동(地氣天劍 理失 上天振動)
천검상이 천상 천변만화(天劍相異 天上 千變萬化)


이 신검주를 5백 회 이상 주송하면 심신이 진동하고 천지의 진동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언급처럼 검증되지 않은 것이므로 신빙할 수는 없다. 김유신의 신이한 검술 수련은 허균(許筠, 1569~1618)의 시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도 보인다.

대령신이란 바로 신라 대장군 김공 유신입니다. 공이 젊었을 때 명주에서 공부하였는데, 산신이 검술을 가르쳐 주었고, 명주 남쪽 선지사에서 칼을 주조하였는데, 90일 만에 불 속에서 꺼내니 그 빛은 햇빛을 무색하게 할 만큼 번쩍거렸답니다. 공이 이것을 차고, 성내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오곤 하였는데, 끝내 이 칼로 고구려를 쳐부수고 백제를 평정하였습니다.

허균은 김유신이 명주(溟州) 대령산(大嶺山), 즉 지금의 강릉 대관령에서 검술을 수련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자료이므로 기록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다만, 앞서 언급한 자료들은 그가 이전에 배워 알고 있던 무예들을 17~18세 때 산 속에 들어가 집중 수련했다는 정도로 보면 좋을 듯하다. 물론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이인을 만나 좀 더 나은 기법을 익혔을 수도 있다. <삼국유사>에는 18세가 되는 임술년(612)에 검술을 익혀 국선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화랑세기>에는 김유신이 풍월주의 위에 오르는 날 낭도들과 병장기를 만들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단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무예수련을 한 사실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김유신의 검술 수련과 관련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기록도 참고가 된다.

단석산(斷石山) :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한다. 부의 서쪽 23리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신라의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을 구해 월생산의 석굴 속에 숨어 들어가 검술을 수련하였다. 칼로 큰 돌들을 베어서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斷石寺)라 하였다”라고 한다. ……. 인박산(咽薄山) :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김유신이 보검을 지니고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고 병법을 기도하던 곳이다”라고 한다.

김유신이 신검을 구해서 단석산과 인박산에 들어가 검술 수련을 하였다고 한다. 단석산은 경주에서 약 40리 떨어진 건천읍에 있는 산으로 경주 부근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김유신이 석굴 속에 들어가 검술을 수련하였는데, 돌을 베어 그 벤 돌들이 산더미 같이 쌓였다고 한다.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시문집인 <이계집(耳溪集)>의 ‘대각간(김유신)의 묘에서 비 내리기를 기원하는 글[大角干墓祈雨文]’에도 “돌을 자르며 검을 훈련하다[斬石試劒]”라는 글귀가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 또한 그렇게 믿을 만한 사실은 아닐 것이다.

다만, 돌을 잘랐다는 전설은 그의 검술이 힘을 위주로 한 검술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정도는 해 볼 수 있게 한다. 이 점은 김유신이 술을 먹고 잠이 든 사이에 말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천관녀로 알려진 창기의 집으로 가자 말을 참(斬)하고 안장을 버리고 돌아왔다는 <파한집(破閑集)>의 기록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참(斬)’은 ‘끊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 관헌들은 참형(斬刑)을 몸과 머리가 다른 곳에 있다는 즉 분리되었다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신수이처(身首異處)’라고 말하기도 했다. 즉, 김유신이 말을 참했다는 것은 그의 검술이 상당한 힘이 수반되는 검술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중.일에서 모두 김유신과 비슷한 사례 전해져


아규 세키슈사이
재미있는 점은 야규신가게류[柳生新陰流]로 유명한 일본의 야규[柳生]가의 유조(流祖)인 야규 세끼슈사이 무네요시[柳生石舟齊宗嚴, 1529~1606]가 큰 돌을 잘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중국 소주 호구산(虎丘山)에도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천하의 명검을 시험해 보기 위해 시험 삼아 잘랐다는 전설이 담긴 시검석(試劒石)이 존재한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검과 관련한 한·중·일 삼국 간의 유사성을 볼 수 있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야규 세끼슈사이가 익힌 신카게류[新陰流]는 가미 이즈미 이세노카미 노부쓰나[上泉伊勢守信綱, 1508~1577(추정)]가 창안한 것이다. 아이스 이코오사이 히사타다[愛洲移香齋久忠, 1452~1538]의 카게류[陰流]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아이스 이코오사이 히사타다가 우토[鵜戶] 신궁에서 수련을 하던 중 꿈에 원숭이 모양의 신이 나타나 검의 비법을 전했기 때문에 엔삐카게류[猿飛陰流]라고도 한다. 카게류는 강하고 직선적인 정면 공격이 주특기였는데, 상대를 벨 때는 뛰어오르며 자신의 몸을 검과 하나로 하여 내던지듯 베는 형식이었다고 한다. 야규의 신카게류도 원래 이러한 형식을 바탕에 두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명의 장수 척계광(戚繼光, 1528~1588)이 신유년 즉, 1561년 진중에서 얻은 영류지목록(影流之目錄)이 <기효신서>에 실려 있는데, 원비(猿飛)·원회(猿回) 등의 명칭이 있는 것으로 봐서, 아이스 이코오사이 히사타다의 카게류인 것으로 보인다. 이 카게류는 <기효신서>의 장도(長刀)에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에서 편찬된 <무예제보(1598)>의 장도, <무예도보통지(1790)>의 쌍수도(雙手刀)로 이어진다. 즉, 한·중·일 3국의 검술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비도술을 사용한 연개소문

흉악하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연개소문

정사라고 하는 역사서 등에서는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때문에 그에 대한 사실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연개소문이 603년 5월 10일에 태어났다는 서술이 정사로 인정받기 어려운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조대기(朝代記)’에 기재되어 있다. 또한 시루메봉 밑에서 태어나 무예를 닦았다는 설화가 강화도 고려산(해발 436m)에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강화도에는 이외에도 연개소문이 군사들을 훈련시켰다는 ‘치마대’와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5개의 연못인 ‘오련지’가 남아 있기도 하다. 연개소문의 가계에 대해서는 그의 장남 연남생(634~679)의 묘지명에 나타나 있다.

증조할아버지는 자유(子遊)이며 할아버지는 태조(太祚)로, 모두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고, 아버지 개금(蓋金)은 태대대로(太大對盧)였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쏘아 군권을 아울러 쥐고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하였다(천남생묘지).

연개소문의 집안은 연자유-연태조-연개금(연개소문)으로 이어졌다. 막리지나 대대로를 역임했을 정도로 고구려 내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집안이었음을 보여준다. 가족관계는 천남생(泉男生)의 아들인 천헌성(泉獻誠) 묘지명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남생과 헌성의 성이 모두 ‘연(淵)’이 아니고 ‘천(泉)’씨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 고종 이연(李淵)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서 같은 뜻을 가진 ‘천’으로 표기한 것이다.

<삼국사기>에도 연개소문의 이름을 ‘개금(蓋金)’으로도 기재하고 있다. 황윤석(1729~1791)은 그의 시문집인 <이재유고>에서 ‘금’이 우리말로 ‘소(蘇)’ 즉, ‘쇠(蘇伊)’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렇게 표기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유재고>를 좀 더 참고하면, 황윤석은 ‘개(蓋)’의 음을 ‘합(合)’으로 보면서, 희다는 뜻의 ‘백(白)’과 같은 글자로 보고 있다. 당시 백은 희(希)·해(諧)·하(何)로 불러, 서로 가깝다고 본 것이다. 이런 견해를 참조한다면, ‘개소문’은 ‘흰쇠’라는 우리말을 음차한 것으로 볼 여지도 있을 듯하다. 연개소문 집안이 대대로 쇠를 잘 다루는 야금술에 뛰어났다면, 그러한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인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갓쉰동전’을 바탕으로, ‘개소문’은 ‘갓쉰동’을 음차한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연국혜라는 재상이 나이 50살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조선상고사 외에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사실인지 의심이 드는 부분이 있으므로 그런 설이 있다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듯하다. 참고로 <니혼쇼키(日本書紀)>에는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로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은 스스로 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며, 대중을 현혹시켰다. 그의 생김새는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지와 기개가 커서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 동부(또는 서부) 대인인 그의 아버지 연태조가 대대로(大對盧)의 관직에 있다가 죽었다. 연개소문이 마땅히 그 직을 계승해야 했지만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미워하여, 그 자리에 오를 수가 없었다. 그는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면서 그 관직을 임시로 맡기를 청하면서, 만약 옳지 못함이 생기면 비록 버려져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였다. 그러자 여러 사람이 불쌍하게 여겨 계승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여전히 흉악하고 잔인함이 말할 수 없을 정도여서 여러 대인이 왕과 더불어 몰래 그를 살해기로 의논을 모았는데, 그만 그 일이 누설되고 말았다. 개소문은 자기 부(部)의 군사를 모두 소집하여 장차 열병할 것처럼 하여 술과 음식을 성의 남쪽에 성대히 차려놓고 여러 대신을 불러 함께 보자고 하였다. 손님들이 이르자 모두 죽이니 그 수가 100여 명에 달하였다. 이어서 궁궐로 달려가 영류왕을 죽이고 조카 장(臧)을 왕(보장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이후 연개소문은 나라 일을 마음대로 하였는데 매우 위엄이 있었다. 몸에 다섯 개의 칼을 차고 다녀, 좌우에서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는 매번 말을 타거나 내릴 때 항상 귀족의 장수로 하여금 땅에 엎드리게 하여 그 등을 밟고 디뎠으며, 밖을 돌아다닐 때에는 반드시 군대를 풀어서 앞에 인도하는 자가 긴소리로 외치면 사람들이 모두 도망칠 정도로 나라 사람들이 대단히 고통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앞선 내용은 <삼국사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서술한 것이다. 이 표현대로라면, 연개소문은 매우 음흉하고, 거칠 것 없으며,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기록은 ?구당서? 등의 중국 기록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았다는 문제가 있다. 중원의 역사가들이 자신들의 최대 적이었던 연개소문을 좋은 쪽으로 서술해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다섯 개의 칼을 차고 다니는 뛰어난 무예인


막리지 대도비전에 기록되어 있는 연개소문에 대한 그림

반면, 앞서 언급한 환단고기에서 개소문은 매우 긍정적이다. 그가 부하들에게 상을 베풀 때는 반드시 나눠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여 부하들이 모두 감동하여 한 사람도 다른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신채호 또한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연개소문에 대하여 ‘조선역사 4천년 이래 최고의 영웅’이라고 극찬을 하고 있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천남생묘지명>을 보면, 연개소문이 활을 잘 쏘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무예 솜씨에 대해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아들의 묘지명에 기록된 내용이므로 가장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서울 명동에서 만난 노상운(盧象雲)이란 노인으로부터 <김해병서(金海兵書)>라는 책을 저술했다는 구전을 기록하고 있다. ‘김해’가 연개소문의 자(字)이며, 고려 때에도 병마절도사가 지역에 부임할 때 임금이 김해병서를 한 벌씩 하사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당의 장수 이정(李靖)이 그의 제자이며, 무경7서의 하나인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이 연개소문에게 배운 바를 정리하였지만 그 글에는 연개소문을 숭상한 구절이 많으므로, 당·송인들이 원본을 위조하여 현재 전해지는 책은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김해병서의 존재는 <고려사>에도 보인다. 1036년(정종 2) 서북로병마사가 왕에게 이 병서가 무략(武略)의 요결이니 연변의 주(州)·진(鎭)에 한 책씩 하사하기를 아뢰어 왕이 이를 따랐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저술했다는 구전의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구전대로라면, 여기에는 고구려 시대의 온갖 병법 외에 연개소문의 무예 세계도 포함되어 정리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 인용하고 있는 갓쉰동전에도 그의 무예 수련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갓쉰동이 7세 되던 해에 어떤 도사가 나쁜 액운으로부터 아이를 구해 내기 위해서는, 부모와 15년 동안 서로 만나지 않아야 한다고 하여, 강원도 원주의 학성동에 버려졌다. 그 지역의 장자(長者) 유(柳)씨의 집에서 종으로 자란 갓쉰동은 그 곳에서 어떤 노인을 만나 검술·병서·천문·지리 등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도 연개소문이 다섯 개의 칼을 차고 다녔다고 기록하고 있어, 검술에도 일가견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어떤 노인으로부터 검술을 배웠다는 갓쉰동전의 이야기는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므로, 그냥 그런 이야기가 있다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연개소문의 검술과 관련해서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독목관(獨木關)>·<분하만(汾河灣)>·<살사문(殺四門)>·<어니하(淤泥河)> 등의 경극과 명(明) 성화(成化) 7~14년(1471~1478)에 북경에서 간행된<신간전상당 설인귀과해정료 고사(新刊全相唐 薛仁貴跨海征遼 故事, 이하 고사)>에 ‘막리지 비도대전(莫利支 飛刀對箭)’을 통해서 단편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경극의 이야기들은 대강의 줄거리가 비슷하다. 당 태종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위기에 처하자 설인귀(薛仁貴)가 구해준다는 이야기로 연개소문과 설인귀가 주연이고, 당 태종이 조연이다(이덕일·김병기,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김영사, 2004, 41~56쪽 참조).

송·원 시기 구어 형식의 민간문학인 평화(平話)의 하나인 <설인귀정료사략(薛仁貴征遼事略)>에는 “키는 열 척인데, 진홍색 사복(獅服)을 입고 적규마를 타고, 허리에는 두 개의 활집을 메고, 등에는 다섯 자루의 비도를 둘러맸으니, 바로 고려 장군 갈소문(曷蘇文)이다”라고 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경극에서도 연개소문을 등에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언월도를 들고 있는 용맹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마치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의 원형처럼 보인다.

<막리지 대도비전>의 그림을 보면, 오른쪽 아래에서의 칼을 사용하여 당 태종 이세민을 공격하는 사람이 막리지 연개소문이고, 오른쪽 위쪽에 ‘천자’라고 쓰인 인물이 이세민이며, 연개소문과 이세민 사이의 중간 왼쪽에 연개소문이 던진 4자루의 칼에 신전(神箭)을 겨누고 있는 인물이 설인귀(薛仁貴, 613~682)이다. 설인귀는 철륵도행군총관(鐵勒道行軍摠管)이 되었을 때, 10여 만의 적병과 대치한 적이 있었는데, 화살 세 발을 쏘아서 적의 용맹한 기병 셋을 단번에 죽여, 적군의 사기를 꺾어 모두 항복을 받아냈다고 할 정도의 활쏘기 명수였다. 막리지대도비전은 연개소문이 칼로 당태종을 공격하자 주인공 설인귀가 활을 쏘아 구해주고 있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고사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비도가 일어나 공중에서 춤을 춘다.
화살이 날아가 비도와 대적하니 먼지가 일고
비도가 화살을 대적하니 노을빛이 찬란하고
화살이 비도를 대적하니 화염이 일어나네
공중에서 두 가지 보배가 대적하니
뛰어난 두 장수가 신통력을 겨룬다.


연개소문이 등에 다섯 개의 칼을 차고 있다는 역사서의 기록들이 반영되어 5개의 비도를 사용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그가 검술에 능했다는 점 또한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검을 던지는 연개소문의 검술을 고구려 특유의 비도술(飛刀術) 혹은 비검술(飛劍術)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고사의 묘사와 막리지대도비전의 그림을 보면, 4개의 긴 칼이 연개소문의 손을 떠나 이세민을 향해 날아가자, 이를 설인귀가 신전을 쏴서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칼을 던져 마음대로 움직여 상대방을 해할 수 있는 단계는, 무협지 속에나 나올 법한 ‘이기어검(以氣御劍)’의 경지이다. 현실 속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아마도 연개소문이 칼을 쓰는데 있어, 상대방이 대적하기 힘들만큼 빨리 사용했기 때문에 ‘나는 칼’이라는 의미의 비도 혹은 비검으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설인귀, 천자를 구한 고구려인?

설인귀에 활약에 의해 지명전설이 전해져


2006년 중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설인귀전기의 포스터

신전을 쏘아 연개소문의 비도를 막고 이세민을 구한 설인귀(薛仁貴, 614~683)는 <신당서>나 <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강주(絳州) 용문(龍門), 지금의 산서(山西) 하진(河津)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자치통감>에는 그의 이름이 ‘예(禮)’였으며, ‘인귀’는 자(字)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남북조시대의 무장이었던 설안도(薛安都)의 6대 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당서> 설인귀 열전을 보면, 그는 어려서부터 집이 가난하여 농사로 생업을 삼았다. 선조의 산소를 옮기려고 할 때, 그의 부인 유(柳)씨는 “나리께서는 세상을 덮을 재주를 가지고 계시지만 때를 만나야 비로소 발휘할 수 있습니다. 지금 천자(당 태종)께서는 친히 요동을 정벌하려고 맹장을 구한답니다. 기회입니다. 나리께서는 어찌 공명을 도모함으로써 스스로 명성을 얻지 않으시렵니까? 금의환향한 다음에 이장해도 늦지 않으실 겁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설인귀는 장사귀(張士貴)를 찾아가 군졸에 응모하였다고 한다.

또한 설인귀와 관련된 이야기는 감악산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지역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주목을 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적성현(積城縣)……감악(紺嶽)이 있다. 신라 이래로 소사(小祀)로 되어 있다. 산마루에 사당이 있는데 매년 봄과 가을에 왕이 향과 축문을 보내 제사를 지낸다. ……세간에서 전하기를 신라 사람들이 당(唐)의 장수 설인귀를 모셔서 산신으로 삼았다고 한다.

설인귀가 감악산의 산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도 기록되어 있다. 1813년에 간행된 이만부(李萬敷, 1664~1732)의 <식산선생별집(息山先生別集)>에는 감안산에 돌로 쌓은 단 위에 산비(山碑)가 있으며, 곁에는 설인귀 사당이 있다고 하고 있다. 산비는 문자가 없는 몰자비(沒字碑)인데, 지역사람들은 ‘비똘대왕비’, ‘빗돌대왕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를 설인귀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분명 설인귀와 적성면이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려준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이 지역의 지명 전설에서도 그러한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어 흥미를 끈다. <파주군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서술을 볼 수 있다.

* 마지리(馬智里)……당의 장수 설인귀가 주월리(舟月里)에서 태어나 장성하여 용마와 갑옷, 투구, 칼을 얻은 후 적성 일대에서 훈련하였다고 한다. 그의 말발굽이 이곳 마지리를 가장 많이 지나갔다고 하여 마제리(馬蹄里)라 하였는데, 발음이 변하여 마지리가 되었다고 한다.……말굽두리 설인귀가 주월리에서 이곳으로 말을 타고 달릴 때 말굽소리가 요란스럽게 났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 무건리(武建里)……옛날 설인귀가 이곳 산골짜기에서 무술을 연마한 곳이라 한다.

* 설마리(雪馬里)……설인귀가 칠중성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말을 달려 훈련했으므로 설마치(薛馬馳) 또는 설인귀가 추운 겨울에 눈이 쌓인 상봉을 거쳐 감악산봉으로 말을 달려 무예를 쌓았다하여 설마리라 했다.


마지리, 무건리, 설마리에 설인귀의 출생과 무예 연마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전반기의 사정이 반영된 <적성현읍지(積城縣邑誌)> 고적(古蹟)조에는 한배미라고도 하는 주월리에 위치한 육계토성(六溪土城)에서 설인귀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기도 하다.


지명이외의 또 다른 전설


설인귀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감악산비

이 밖에도 설인귀와 관련된 전설들이 존재한다. 경기도에서 펴낸 <전설지>를 보면, 설인귀는 적성면 주월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하루는 상산 김씨 집안에서 묘를 쓰는데 아름드리나무가 많아 동리 사람에게 캐도록 했다. 이때 설인귀가 자청하여 캐기를 원하였다. 그는 계속 빈둥거리다가 묘 쓰는 날이 되자, 술 세 항아리와 돼지 한 마리를 먹고는 단숨에 나무를 뽑아 버렸다. 그 후 설인귀가 율포리 강 석벽에 서 있을 때, 석벽이 갈라지며 용마가 나왔다. 그는 이 말을 잡아타고 백운리에서 나온 궤 속에 든 갑옷, 투구, 칼 등을 착용하고 적성 일대를 돌아다니며 무예 훈련을 했다고 한다.

<경기민속지>에 실린 다른 전설에도 흡사한 이야기가 전한다. 주월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설인귀는 어려서부터 한 말이나 되는 밥을 먹었다. 집에서 이조차 견디기 어렵게 되자, 감악산 객현리의 외가로 보냈다. 하지만 커갈수록 점점 많이 먹게 되자, 외가에서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외삼촌이 호랑이한테 물려죽게 하려고 설인귀에게 쟁기를 지고 가서 밭을 갈게 하였다. 설인귀는 백호가 나타나자, 잡기 위해 따라갔다가 각담 속에서 갑옷과 투구, 신발 등이 들어 있는 궤짝을 발견하였다. 또 고개를 넘어가다가 칼바위에서 칼을 얻었으며, 솔말에서는 백마를 잡아 타게 되었다. 이후 감악산 정상 부근에 위치한 ‘설인귀굴’에서 무예 훈련을 했다고 한다(‘설인귀굴’은 임꺽정이 숨어 지냈다고 해서 ‘임꺽정굴’이라고도 한다).

설인귀가 주월리에서 태어났으며, 적성 지역에서 무예훈련을 했다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 기록은 출생과 성장과정 등의 이야기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적성 지역에 전하는 이야기들에서는 그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중국측 자료를 좀 더 살펴보면, 설인귀와 관련된 서술이 645년 안시성 공격 이후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설인귀와 관련된 전설들은 중국 봉천성(奉天省) 지역에서도 전해지고 있다. 먼저 연개소문으로부터 당 태종의 어가를 구해줘서 어니(淤泥)에서 어니(御泥)로 바꾼 심양의 서쪽에 위치한 어니하, 설인귀(설예)가 돌을 사용하여 말고삐를 죄었다는 요양현의 예가대촌(倪家臺村), 요동 전투 시 고구려 기병에 몰리자 설인귀가 군사를 감추었다고 하는 개평현의 장군동(將軍洞), 요동 정벌시 그가 쌓았다는 고려성(高麗城) 등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이 구전들도 고구려와의 전투 이후의 이야기이지,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가난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농업에 종사했다거나, 부인 유씨와의 일화가 <신당서>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그렇게 말하기 어려운 면도 존재한다. 그런데 <신당서>에 대해, 중국 송(宋)나라 사람인 주변(朱辯)은 ‘기록된 양이 <구당서>에 비해 배 정도이기는 하지만, 모두 소설에서 취한 것들’이라는 평가를 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설안도의 6대 손이라든가, 강주 용문현 사람이라는 것도 그대로 믿기 어렵다. 그러면서 설인귀가 고구려인이었고 무예에 능하였지만, 신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자 당에 들어가 장수가 되어 고구려를 공격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설인귀에 대한 확실하지 않은 고증들


경극 득목관의 대본 표지(오른쪽은 연개소문, 왼쪽 창을 들고 있는 인물이 설인귀)

청시기인 1682년에 편찬된 <산서통지(山西通志)> 하진현(河津縣)조를 보면, 백호강(白虎岡)이 설인귀의 옛 마을이다. 또한 백호강의 아래 백저촌(百抵村)에 위치한 홍삼탄(紅蔘灘)은 설인귀가 기러기를 쏜 곳이기 때문에 사안탄(射雁灘)이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허나 중국에도 설인귀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므로 함부로 단정하기 어려운 점도 존재한다.

하지만 설인귀는 당 태종이 그에게 “짐은 요동을 얻은 것을 기뻐하지 않고, 그대를 얻은 것을 기뻐한다”는 말이 <구당서> 등의 역사서에 전할 정도로 비중이 있는 인물이었다. 더불어 <연개소문>편에 언급했듯이, 송 혹은 원시기부터 민간문학과 <독문관>, <어니하>, <분하만>, <살사문> 등 적어도 4종류 이상의 경극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탄생에 대한 전설이나 성장기에 대한 기록이 의외로 적다는 데에 의아함을 품을 수밖에 없다.

앞서 설안도의 후손으로 서술되어 있는 <자치통감>의 기록도 완전히 믿음이 가지 않는다. 6대조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기록은 아예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6대조보다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가 더 알기 쉽다. 그러나 6대나 떨어진 설안도가 선조라고 하는 것은 믿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후대에 누군가가 설인귀의 내력을 거짓으로 꾸며 넣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러한 의아함은 설인귀가 안시성을 공격할 때 기이한 옷[奇服]을 입고 활약을 해서 유격장군을 제수받았다는 <자치통감>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같은 동족이라고 한다면, 기이한 옷을 입었다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인귀가 한족(漢族)과는 다른 민족일 가능성을 남기고 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다산시문집>에서 설인귀는 삭방(朔方)에서 출생하였으므로, 북적(北狄) 사람이라고 하고 있기도 하다.

1770년 간행된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의 <청천집(靑泉集)>, <감악산기(紺岳山記)>에는 설인귀가 본래 동인(東人) 즉, 고구려인으로 아버지를 감악에 장사지냈고 스스로 안동도호가 되어 자주 와서 살펴봤다는 말이 전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지명총람(韓國地名總覽)> 파주조를 보면, 적성 부근에서 태어난 설인귀가 감악산에서 무술을 익혔으며, 당에 가서 모국(母國)인 고구려를 쳤고, 후에 이를 자책해 죽은 뒤 감악산의 산신이 되어 우리나라를 도왔다고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국내에 전하는 이야기들도 설인귀가 살았던 시대의 기록은 아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편에서 언급했지만, <구당서> 설인귀열전을 보면, 그는 662년 천산에서 화살 세발로 적을 물리쳐 ‘장군삼전정천산(將軍三箭定天山)’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화살의 명수였다. 한 해 앞선 661년에도 당에 적대적인 위구르족의 회홀(回鶻)을 치기 위해 설인귀가 출전하게 되었다. 전날 내전에서 연회를 베풀어졌다. 이때 당 고종은 설인귀에게 다섯 겹의 갑옷에 활쏘기를 명령하였는데, 곧바로 다섯 겹의 갑옷을 뚫어 고종을 기쁘게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러한 당나라의 활쏘기와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연개소문의 손자 연헌성과 관련해 <책부원귀(冊府元龜)>에 전한다. 690년 측천무후는 금과 은 등의 보화를 내걸고 재상 및 남,북아문의 문무 관원 가운데 활을 잘 쏘는 사람 다섯 명을 가려내어 시합을 시켰다. 뽑힌 5인 중 내사인 장광보(張光輔)가 먼저 헌성에게 1등을 양보했다. 헌성은 다시 우옥검위대장군 설돌마지(薛咄摩之)에게 양보하였다. 설돌마지가 다시 헌성에게 양보하여, 이에 헌성은 “폐하께서 활을 잘 쏘는 5인을 뽑으라고 하셔서 뽑힌 사람은 대부분 당 관리 출신이 아닙니다. 신은 이 뒤로 당 관리들이 활을 잘 쏜다는 명예가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번의 활쏘기는 그만 두옵소서”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연헌성의 활솜씨가 독보적이었음을 말해준다. 아마도 헌성은 연씨 집안에 내려오는 활쏘기를 배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 일화에서 설인귀와 관련해 눈길이 가는 점은 활쏘기에 능한 자들이 대부분 비한족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출생과 성장에 대해 의문이 많으며, 오히려 중국보다는 경기도 파주 적성 지역에 전설이 많은 설인귀의 출자와 관련해, 그의 뛰어난 활솜씨가 묘하게 겹쳐지는 것이다. 과연 지나친 상상일까?

장보고와 정년 그리고 송징

장도를 지키는 신

장도는 전라남도 완도에 있는 섬으로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의 본영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장보고(張保皐, ?~841년 또는 846년)에 대한 기록은 사실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당의 시인 두목(杜牧, 803~852)의 <번천문집(樊川文集)>에 서술된 장보고와 정년(鄭年)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장보고의 원래 이름은 <삼국사기>에는 궁복(弓福), <삼국유사>에는 궁파(弓巴)로 남아있지만,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나 <속일본후기(續日本後記)> 등의 일본 측 기록에는 장보고(張寶高)로 기록되어 있다. 정년 또한 이름의 한자가 련(連)으로도 쓴다는 점과 장보고보다 10살이 어렸다는 점 외에는 정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바는 없다.


안동장씨족보의 일부분

다만, 역사적 자료로 이용하기 어려운 <인동장씨족보(仁同張氏族譜)>(1997)에 의하면, 장보고의 아버지는 장백익(張伯翼)이고,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부(蘇興府) 사람이라고 한다. <안동장씨세보(安東張氏世譜)>(1999) <절강세계(浙江世系)>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정년 또한 <경주정씨월성위파세보(慶州鄭氏月城尉派世譜)>(2004)를 보면, 이시찬(伊尸湌: 이찬?) 벼슬을 지낸 파동(坡同)과 석(昔)씨의 아들이며, 문성왕 원년(840)에 대각간(大角干)으로 시림군(始林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물론 족보의 이야기는 그 근거가 될 만한 기록을 찾을 수 없으므로 완전히 믿을 바는 되지 못한다.

여러 기록들을 바탕으로 장보고와 정년의 행적을 살펴보면, 어린 시절을 바닷가에서 보낸 두 사람은 당의 서주(徐州)에 가서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小將)이 되었다. 이들이 당으로 간 이유는 뛰어난 무예실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골품제 사회인 신라에서는 섬사람[海島人]이라고 하여 업신여김을 당할 정도로 한미한 집안 출신인 이들은 관직에 등용되기조차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819년에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의 손자 이사도가 독립적으로 관할하던 ‘평로치정’과의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후에 장보고와 정년은 어떠한 이유인지 모르지만 사이가 벌어졌다. 홀로 신라에 귀국한 장보고는 흥덕왕에게 신라인이 노비로 팔려가고 있는 사정을 말하면서 이를 막기 위해 진영 설치를 건의하였다. 이에 흥덕왕은 군사 만 명을 주어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당에서 지위를 잃고 추위와 굶주림에 방황하던 정년도 청해진으로 장보고를 찾아와 화해를 했다. 836년 12월 신라에서는 흥덕왕 사후에 벌어진 왕위계승쟁탈전에서 김우징(金祐徵)의 부친 균정이 패배하였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김우징은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하였는데, 민애왕의 찬탈소식을 들은 우징은 만약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약속하고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이에 장보고는 정년에게 군사 5천명을 주어 민애왕을 축출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옹립하였다. 하지만, 신무왕이 6개 월 만에 죽고 장보고도 문성왕 3년(846)에 염장(閻長)에 의해 암살당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 측 기록에서는 841년에 죽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당대 기록이라는 점에서 좀 더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장보고와 송징은 동일인물이 아닐까?


장보고 초상화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재당신라인들을 규합하여 중국과 일본 등을 아우르는 국제무역을 주도하였다. 중국 산동 지역의 문등과 강회지역의 연수, 강남지구의 명주(지금의 영파) 등지에 장보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입당구법순례기>에 의하면, 산동 지역에 위치한 적산(赤山) 법화원(法花院)은 장보고가 설립한 것으로 1년에 500석의 곡식을 수확할 정도로 큰 절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해외여행을 할 때 장보고 등의 신라인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은 승려들과 관계가 있는 절들, 예를 들면 적산선원(赤山禪院)이나 온죠지[園城寺] 등에는 ‘적산대명신(혹은 신라대명신)’이나 ‘신라명신’ 등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데, 대부분 장보고를 형상화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원래 청해진이 설치된 장도의 배후 마을인 장좌리에서 마을을 지켜 주는 신에게 공동으로 지내는 당제에서 장보고는 빠져있었다는 점이다. 옛 당제에서 주신은 송징(宋徵)이었고, 부신으로는 정년(우측)과 고려시대 승려 혜일(慧日)대사(좌측)가 모셔져 있는 반면, 장보고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호국신사(護國神祠) : 현의 남쪽 칠장리(七長里)에 있다. 세상에서 ‘모시는 신은 송징이다’라고 한다”고 하여 조선 전기에도 송징이 주신이었음을 알려준다.

1885년에 편찬된 <호남진지(湖南鎭志)>에는 송징을 ‘고려말’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1929년에 편찬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장도단(將島壇)과 관련하여, ‘고려장사’ 송징이 청해 장도에서 무술을 닦았는데, 지략과 무용을 겸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장도의 토성도 고려 장사 송징이 쌓은 성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기도 하다. 고려 사람이라는 점을 바탕으로 몽골과 항전을 벌인 삼별초의 장군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씨족원류>를 살펴보면, <진천 송씨> 조에서 고려 말 사람으로 송징을 찾을 수 있기는 한데, 동일인인지는 명확치 않다.

하지만 장보고와 많은 관련을 맺고 있는 정년이 부신으로 모셔져 있는데, 장보고가 아닌 송징이 주신으로 모셔져 있다는 점과 장도의 토착 해양 세력인 송징이 결국 부하였던 엄 장군과 딸에게 배신당해 까투리 섬으로 퇴각했다가 엄 장군이 쏜 화살에 맞아 패망했다는 점이 장보고의 몰락 과정과 비슷하다. 이런 점에서 장보고와 동일인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장보고가 역적으로 몰려 죽었으므로 그를 드러낼 수가 없었고, 송징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제사를 지내왔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느 견해가 좀 더 설득력을 가졌는지는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하여튼 현재 장도에서는 장보고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던 1982년부터 그를 신격에 포함시켜 4위의 당제를 지내고 있다.

장보고와 정년이 당에서 무령군 군중소장의 지위에 올라갈 수 있었던 점은 그들의 뛰어난 무예솜씨가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를 보자.

(장보고와 정년은) 모두 신라 사람인데, …두 사람 모두 싸움을 잘하였다[善鬪戰]. 년은 특히 바다 속에서 50리를 헤엄쳐도 숨이 차지 않았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보고가 (정년에게) 조금 뒤졌으나, 년이 보고를 형으로 불렀다. 보고는 연령으로, 년은 기예로 항상 서로 맞서 아래에 들지 않으려 하였다. 두 사람이 당에 가서 무령군 소장이 되어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騎而用槍 無能敵者], 대적할 자가 없었다.

두 사람 다 싸움을 잘하였는데, 바다를 건넌 당에서조차 대적할 만 한 자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말타기와 창술에 능했다고 한다. 정년은 50리를 헤엄쳐도 숨이 차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수영실력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자치통감>에는 당시 무령군의 사졸들은 교만하다거나, <구당서>에서는 서주의 땅이 중요하며 병사들이 매우 강하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이 높은 관직은 아니지만, 소장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무예실력이 출중했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장보고의 무예에 대해서 이헌경(李獻慶, 1719~1791)은 <간옹선생문집(艮翁先生文集)>에서 “무령군 장군 장씨가 철창(鐵槍)으로 말을 날듯이 타고 만인 가운데로 들어가니 당의 무사가 모두 수치스러워 죽었다”라고 표현을 하였다. 한편, 장보고의 이름과 무예를 연결 지어 보는 견해도 있다. 장보고의 원이름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궁복’ 혹은 ‘궁파’였는데, 이 이름이 활쏘기와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파(巴)의 소릿값은 ‘보’였는데, 신라 말 ‘복’이나 ‘보’는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궁복’이나 ‘궁파’는 ‘활보’로 읽을 수 있다. 이는 ‘활 잘 쏘는 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朱蒙)이 활을 잘 쏘아서 그 이름이 붙은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적산선원에는 있는 ‘신라명신’과 관련한 그림을 보면, 왼손에는 활을 오른손에는 화살을 들고 있어 활쏘기와 어떠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

고려 장사로 언급되고 있는 송징의 무예솜씨는 <동국여지승람>에 기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사현(射峴) : 완도에 있다. 전설에 이르기를, “옛날에 섬사람으로 이름을 송징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무용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활을 쏘면 60리 밖에까지 미쳤다. 활시위가에서 피가 나왔는데, 지금도 반석에 활의 흔적이 남아 있으므로 그곳의 이름을 사현이라 부른다.”고 한다.

완도에 있는 사현이라는 곳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송징이 60리 밖에까지 활을 쏠 수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60리는 현재의 거리로 따지면 24km 정도가 된다. 따라서 현실에서는 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다만 그가 활쏘기에 능했음을 말해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이 고로(故老)들에게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지은 석천집의 <송대장군가>에서도 볼 수 있다. 일부를 보면, “허리에 찬 화살 크기는 나무둥치만 하고, 칼집에 든 칼은 북두칠성 찌르겠네. 활을 힘껏 당기면 그 화살 육십 리를 백보 거리처럼 날고, 활촉이 높다란 벼랑에 헌 짚신 꿰듯 박히더라네”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1859년에 간행된 동환록(東寰錄)의 <호계석(虎溪石)>조에는 “돌 (한쪽)면에 화살촉 자국이 있는데 송징이 활을 쏜 곳이라고 전한다”는 언급이 있다. 구전에도 계속되는 흉년과 관리들의 착취로 인해 주민들이 힘들어하자, 송징이 세금으로 낸 곡식을 운반하는 배인 세미선이 완동(阮洞)쪽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남선리 앞바다를 지나가야 하므로 장도에서 활을 쏘아 막고, 개머리를 지나 서해안으로 가려하면 정도리(正道里) 송댓여[宋大將軍嶼]에서 활을 쏘아 세미를 빼앗았다고 한다. 하나같이 송징이 활쏘기의 명수였음을 말해준다.

장보고가 활에 능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서는 창술에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송징은 대개 활쏘기와 관련해서 이야기들이 집중되어 있다. 만일 송징이 장보고와 동일 인물이었다면, 창술에 능했다는 얘기가 더욱 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같은 인물로 보기에 어려운 점도 있다.


합기도의 원류는 신라의 무예


지난 6월 열린 공수도대회 경기 장면(본 글과 관련없음)

덧붙이자면, 일본 중세인인 ‘신라사부로 미나모토 요시미쯔[新羅三郞 源義光, 1045~1127]’가 전쟁에 출전할 때마다 장보고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는 적산명신(신라명신)상 앞에서 승리의 의식을 치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손 중에 한 사람이 ‘다이또오류 아이키쥬쯔[大東流 合氣柔術]’(이하 다이또오류)로 유명한 다께다 소오가쿠[武田惣角, 1859~1943]다. 이는 한국 합기도 발전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다께다의 제자라고 하는 최용술(崔龍述, 1899~1986)은 국내에 야와라[和]를 전했으며, 그것이 발전하여 수많은 한국 합기도가 나타나게 된 단초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최용술이 진짜 다께다 소오가꾸의 제자인가에 대해서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최용술이 일본에 있으면서 어떤 종류의 유술을 배워 국내에 전파하였지만, 다이또오류인지는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이또오류를 배운 것이 확실한 한국사람으로는 장인목(張寅穆)을 들 수 있다. 그는 다께다의 제자인 마쯔다 토시미[松田豊作]로부터 대동류를 배웠으며, 면허개전까지 받아왔기 때문이다. 장인목의 기술들은 허일웅-송일훈으로 이어지며, 그 맥을 잇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는 합기도의 원류가 되는 다이또오류가 신라의 무예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언급되고 있다. 최용술은 1985년 KBS-2TV의 <비밀의 거튼>이라는 프로그램에 출현해 스승인 다께다가 “이 무술은 너희 나라 무술이니, 너의 나라에 가서 보급시켜라”라고 말했으며, 장인목도 그의 스승인 마쯔다 토시미로부터 “이 무술은 원래 신라무술이었는데, 일본으로 건너 온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김이수, <합기탐구>, 홍경, 2000, 10쪽, 21쪽)고 한 것이다. 이후 합기도 수련자들 및 관심 있는 이들이 다이또오류의 유래에 대해 살펴보면서 ‘원래 우리무술’이었음을 강조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무예사도 역사의 일부분이므로 역사적인 유래나 관련성 등 사실을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이런 연구는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열정이 과열되어 자칫하면, 국수주의로 빠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살짝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다이또오류가 우리나라 특히, 신라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은 우리나라 사람에게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원래 우리나라에서 갔으니 ‘우리 것’이라는 식의 주장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다. 혹 그런 견해를 십분 받아들여, 원래 신라에서 넘어갔다는 점은 사실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 무예는 그 순간 우리 무예가 되는 것인가? 1000여 년 전에 일본에 전파되어 그 나라 사람의 몸짓에 맞게 동작이나 박자가 변화가 이루어진 무예가, 사람들이 우리문화와 거리가 있다고 이질감을 계속 느끼는 무예가 과연 우리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무예의 원류가 우리나라임이 확정되면 없던 실력이 생길까?

원류 논쟁은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원류가 누구냐’가 아니라 ‘누가 더 잘하느냐’이다. 축구 종가는 영국이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축구라는 단어를 보면 브라질을 떠올리고 브라질 축구를 배우려고 한다. 왜냐하면, 브라질이 영국보다 축구를 더 잘하기 때문이다.

어느 무예를 수련하던지 원류 논쟁에 시간을 쏟기보다, 1초라도 아껴서 한 번이라도 더 수련해, 보다 나은 실력의 무예인이 되는 게 훨씬 가치 있지 않을까.

'불같은 성격' 이순신

이순신의 힘, 활쏘기, 검술은 과연 어느 정도?

서애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옥당(玉堂) 즉, 홍문관(弘文館)의 관리로 있을 때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한강을 건너려고 했다. 강물은 불어나고 건너는 사람이 많아, 서로 배에 앞 다투어 오르느라 나루터가 자못 소란스러웠다. 이 때 무인으로 보이는 길손이 혼자 평복 차림으로 말을 끌고 배에 올랐는데, 어느 술 취한 자가 뒤따라올라 와서는 그가 자기보다 배에 먼저 오른 것을 가지고 화를 내며, 욕을 해 댔다. 심하게 욕을 하자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분개했다. 그럼에도 불구, 정작 길손은 머리를 숙이고 채찍을 늘어뜨린 채, 강을 다 건너도록 아무 것도 듣지 못한 척 하고 있는 것이다. 유성룡은 그의 그런 태도에 속으로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덧 배가 나루터에 닿자, 길손은 말을 먼저 몰고 내려, 말의 뱃대끈을 바짝 조이고 있었다. 술에 취해 길손에게 무례한 말을 한 자도 계속 욕지거리를 하면서 뒤따라 내렸다. 유성룡이 그의 말을 가만히 듣자니 대갓집 하인이었다. 지속되는 욕지거리에 참고 있던 길손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왼손으로 말고삐를 잡은 채, 오른손으로 술 취한 하인을 움켜잡았다. 마치 맹호가 토끼를 후려치듯 민첩한 행동이었다. 그러더 칼을 뽑아 목을 베어 강물에 던져 넣어버리고는 낯빛도 변하지 않고 말에 올라 곧장 떠나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나루터에서 그 모습을 본 자들이 모두 크게 놀라 넋이 빠져 있는데, 유성룡만은 그를 기특하게 여겨 “이 사람은 대장감이다.”라고 감탄하였다. 유성룡은 항상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훗날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었다고 한다.



이순신의 모습(출처=이순신 세계화사이트)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전하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성대중은 유성룡이 이순신을 알아본 것은 사실 이 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율곡이 천거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유성룡이 옥당 즉 홍문관의 관리로 있을 때라고 한다. 이순신의 나이 26세(1570)에서 31세(1576) 사이에 있었던 일로 보인다. 유성룡의 관력을 살펴보면, 29세(1570) 봄에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34세(1575)에는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 35세(1576)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역임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인지는 조금 더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李芬, 1566~1619)이 지은 (이충무공) 행록(行錄)을 보면, 유성룡은 같은 동네에서 살던 옛 친구로, 언제나 이순신이 장수의 재목임을 알아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20대 중․후반에서야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존재를 알았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항복의 백호전서에도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본디 그와 한 마을에 살면서 젊어서부터 서로 친구가 되어 남달리 그를 잘 알았으므로, 매양 순신에게 장수의 재능이 있음을 허여하였다”고 하고 있다.

이순신은 장수로써는 많은 업적을 이루었지만, 무인으로서는 크게 부각되지는 않은 면이 있다. 앞서 언급한 (이충무공) 행록(行錄)을 좀 더 살펴보면, 무과에 급제시까지 이순신의 행적을 알려준다. 이순신은 어려서 놀 때부터 여러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하면, 친구들이 반드시 이순신을 장수로 삼았으며, 어려서 두 형을 따라 글공부를 했는데 재주가 있어 성공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항상 붓을 던져버리려야 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몸에 기운이 넘쳐 가만히 앉아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은 아닌 듯하다. 백호전서에도 “순신은 아이 적에 놀이를 하면서도 항상 전진(戰陣)의 모양을 만들어서 놀았고, 어려서부터 호걸스럽고 얽매이지 않아서 남들의 침범이나 기만을 받지 않았으며, 동리 사이에서 혹 불쾌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때마다 상대방을 꺾어 굴복시키고야 말았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이 무예를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22세 때인 1566년 겨울이었다. 21세가 되는 1565년에 보성군수(寶城郡守)였던 방진(方震)의 딸과 결혼을 했는데, 장인 방진은 무변 출신으로 힘이 다른 사람보다 월등했다. 또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순신의 무예훈련은 대부분이 장인 방진으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배우면서 쌓여갔다.

행록을 보면, 이순신은 힘이 다른 사람보다 세었고, 말타기와 활쏘기에도 능해 당시에 같이 놀던 사람들 중에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순신의 힘이 남들보다 뛰어났음은 무과에 합격한 후 조상의 묘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넘어져 있는 석인상을 혼자 힘으로 세운 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수십 명의 하인을 시켜 일으켜 세우게 하였으나 일으키지 못하자, 그들을 꾸짖은 이순신이 웃옷을 벗지 않은 채로 등으로 밀어서 석인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당시 보는 사람들이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27세 때인 1572년 가을에 무과시험을 봤는데, 달리던 말이 고꾸라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가 죽었을 것으로 생각을 했다. 그는 한쪽다리로 일어서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그 껍질을 벗겨 싸맸더니 사람들이 장하다고 하였다고 하였으나, 결국 합격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가 무과에 합격한 것은 32세 때인 1577년 봄이었다.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에는 이순신은 담력과 지략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고 하고 있어, 그의 무예 실력을 살펴볼 수 있는 단서가 되고 있다. 이순신이 활쏘기에 능했음은 난중일기 등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공무 중 틈이 나면 활쏘기를 자주 하였다. 한 번 쏠 때 대개 10순 내지 15순을, 많으면 20순을 쏘았다. 1순은 화살 5대를 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보통 50시 내지 75시, 많게는 100시를 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활을 쏠 때, 쇠로 만든 활인 철전(鐵箭)과 애기살이라고 불리는 편전(片箭)을 함께 쏘기도 했는데, 많게는 철전과 편전 각각 5순씩을 쏘았다. 6월 29일자 기록을 보면, 철전과 편전 그리고 사후 모두 18순을 쏘았다고 한다.

이순신의 활쏘기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활을 쏠 때 과녁에 적중한 화살 수가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1592년 3월 28일 기록이 유일한데, 이 날 이순신은 10순을 쏘아, 5순은 다 맞히고, 2순은 4회, 3순은 3회를 맞혔다고 기술하고 있다. 1순은 5시를 쏘는 것을 말하므로, 10순은 총 50번을 쏜 것이다. 그 중 42시를 적중시키고 8시를 놓친 것이다. 물론, 이런 사례만을 가지고서 그의 활쏘기 실력을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이순신의 칼에 대한 자료가 수록된 원융검기
이순신은 1594년 9월 4일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1540~1597)과 활쏘기를 했다. 원균은 9푼을 지자 술에 취해 돌아가기도 했으며, 1596년 정월 28일에 경상우도순찰사 서성과 활쏘기 시합을 해서는 7푼을 이기고 군관 3명과도 시합을 해서 이겼다. 29일에는 서성과 다시 시합을 해서 9푼 차이로 이겼다. 28일 시합에서는 7푼 차이로 진 서성은 섭섭한 기색을 보였는데, 이순신은 그러한 태도를 보며 ‘우습다’고 표현했다.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은 그가 1593년 3월 17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1561~1597)와 활쏘기를 하였는데, 그의 모양이 형편없다고 하면서 ‘우습다’라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억기는 무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따라서 이순신이 우습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의 활솜씨가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의 활솜씨는 (이충무공) 행록에 실려있는 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43세 때인 1587년 당시 조정에서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는데, 조산만호(造山萬戶)였던 이순신이 그 일을 관장하게 되었다. 그 지역이 너무 멀고 병졸이 적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군사를 증가시켜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병사가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한 상태에서 그해 8월에 비적이 둔전의 목책을 습격하여 포위하자 이순신이 선두에 있는 붉은 털옷을 입은 자 수 명을 연속해서 활로 싸서 쓰러뜨리자, 적들이 도망을 쳤다. 이운룡과 함께 추격하여 사로잡힌 군사 60여 명을 되찾아왔다. 한창 교전 중에 화살에 왼쪽 다리를 맞았는데, 몰래 스스로 화살을 뽑았는데, 그의 안색이 변하지 않아 군중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1596년 3월 6일 일기를 보면, <함평(咸平)․남해(南海)․다경포만호(多慶浦萬戶) 등이 칼쓰기를 수련하였다[用劍]. 땀이 지금까지 흐른다[咸平․南海․多慶浦萬戶等用劍 汗流至今].>라고 기재되어 있다. 함평현감 손경지와 남해현감 박대남 그리고 다경포만호 윤승남 등이 검술 수련을 하였다고 한 것이다. 이순신이 검술 수련에 동참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땀이 지금까지도 흐른다’라는 서술이 바로 이어져 있다. 일기를 쓰는 순간까지도 땀이 날 정도였다면, 이들과 같이 이순신도 검술 수련을 했던 것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앞서 칼로 무례한 이를 처벌한 청성잡기의 기록과 같이 볼 때, 검술 수련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순신이 사용한 장검은 아산 현충사에 2자루가 소장되어 있다. 길이가 197.5cm이고 무게는 5.3kg에 달하는데, 그 두 검에는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색을 바꾼다(三尺誓天 山河動色).”와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과 물을 물들인다(一揮掃蕩 血染山河)”라는 문구가 각각 새겨져 있다. “갑오 4월에 태귀련(太貴連)․이무생(李茂生)이 만들다(甲午四月日 造太貴連․李茂生作)"라는 문구도 있다. 이는 1594년 4월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칼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용하기에는 길고 무게도 상당하기 때문에 의장용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이순신이 1597년에 지은 「한산도가(閒山島歌)」를 통해서도 대도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쌍룡검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올라
큰 칼[大刀] 어루만지며 깊은 시름 할 때에
어디서인가 들리는 오랑캐 피리소리가 시름을 더하네>

이외에 현재는 그 소재를 알 수 없지만, 이순신이 사용하던 검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순조대에 훈련대장을 지낸 박종경(朴宗慶․1765~1817)은 그의 저서인 돈암유고(敦巖遺稿) 「원융검기(元戎劒記)」조에서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쌍룡검(雙龍劒)을 병부상서 심상규(沈象奎)가 주어서 소장하고 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검에는 “주조해서 쌍룡검을 얻으니 긴 세월의 기운이 아직도 굳세다. 산과 바다에 맹세하니, 충의로 인하여 일어나는 분한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鑄得雙龍劍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는 시가 새겨져 있다. 이 때문에 ‘쌍룡검’이라고 불린다. 이 검은 1910년 일본에서 발행된 조선미술대관이라는 책에 사진이 실려 있어, 이 무렵까지는 칼이 전해져 왔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서지학자인 고 이종학에 의해 알려졌다.

난중일기에는 활쏘기 외에도 당시 군사들에게 시킨 신체훈련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용어들이 보인다. ‘각력’과 ‘초월’이 그것이다. 1594년 9월 21일자 기록을 보면, 해질 무렵, 여러 장수들에게 초월(超越)을 시켰다. 또한 군사들에게 각력(角力)을 시켜 서로 겨루게 하였는데, 저녁이 깊어 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난중일기를 보면, 1595년 7월 15일에 경상수사가 오자 함께 이야기하고 각력으로 승부를 시켰다고 하는 기록, 1596년 4월 23일에도 군사들 중에 힘센 사람을 뽑아 각력을 시켰더니, 성복(成卜)이란 자가 가장 뛰어났으므로 상으로 쌀 한 말을 주었다는 기록, 같은 해 5월 5일에는 여러 장수들과 회의를 하면서 각력을 시켰는데, 낙안군수 임계형(林季亨)이 일등이었다는 기록 등을 좀 더 찾을 수 있다. 이 때의 각력은 지금의 씨름과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씨름을 시킨 것은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병들의 노고를 풀어주고자 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초월은 ‘뛰어넘기’로 풀이되는데, 어떤 장애물을 설치하고 그 것을 뛰어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구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다. 여하튼, 당시 장군 혹은 병사들의 기본 훈련에 씨름과 뛰어넘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2술 보유자, 검객 아무개 이야기

유한준 기록에 임진왜란 1592~1598년 사이의 실존 인물


유한준 초상화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은 조선 후기 학자로 자는 만천(曼倩) 또는 여성(汝成)이고, 호는 저암(著庵) 또는 창애(蒼厓)이다. 남유용(南有容)의 문인으로 영조 44년(1768) 진사시에 합격하고 김포군수․형조참의 등을 지냈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송시열(宋時烈)을 추앙하여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늘 곁에 두고 지냈다고 한다. 그림에도 능했으나 전하는 작품은 없다. 유한준의 글을 모은 자저(自著)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 잡저(雜著)조에는 「검객기문(劒客記聞)」 또는 「검객모사(劍客某事)」라는 제목으로 이름을 알지 못하는 조선시대 검객에 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유한준은 이 검객 이야기를 병자년에 기록하였다고 하는데, 그가 살았을 시기의 병자년은 영조 32년(1756)이다.

그 내용을 보자.

검객 아무개는 호서와 영남 사이에 사는 사람이다. 그 선조가 그 무슨 성인지 자세하지 않다. 사람들이 성과 이름을 물었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 뒷날 검술로 명성이 있었기 때문에 ‘검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버지가 일찍이 재물(모으는 것)을 추구하였는데, 호서와 영남 사이를 들고나고 하다가 어떤 사람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하지만 그가 누구에게 살해되었는지 몰랐다. 때마침 현령이 그 일의 죄과를 살피다가 검객의 아버지를 살해한 자를 잡아죽였다. 검객이 비록 하늘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는 있었으나, 그 집안은 이미 몰락하고 말았다.

(검객은) 사방으로 떠돌아 다녔는데, 사람됨이 격검을 좋아했다. 검술 배우기를 3년 동안 하자 능통하게 되었는데, 밤에 달이 밝으면 홀로 검을 휴대하고 깊은 산 외진 계곡의 사람이 없는 곳에 들어가 검을 익히고 돌아오는 것을 변함없이 하였다.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수련을 한 까닭에) 다른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였다.

만력(萬曆) 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平秀吉]가 병사를 크게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였다. 조선에서는 군막에 검사를 불러, 정예하고 용감한 검사 9인을 뽑아 전쟁터에 나가게 했다. 검객 또한 뽑힌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옷차림을 하고 (전쟁터에) 9인이 보내졌다. 9인은 검술로써 모두 한 사람으로 백을 당해낼 정도여서 천하에 적이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이 검사들로 전투를 하게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검사를 출전하게 하여 서로 대응하게 했다. 왜 검사는 그 검술에 초립(草笠)을 사용하였다. 초립을 사용하는 법은 검법이지만 별법(別法)이기도 하다. (9인의 검사가 왜검사와) 더불어 싸움을 벌였는데 (왜검사는) 번번이 초립을 움직여서 8검사의 머리를 순서대로 잘랐다. 다음은 검객에게 미쳤는데, 검객은 왜검사가 천하의 이인(異人)으로 당적할 수 없음을 생각하였지만, 이미 싸움은 벌어졌다. (검객은) 몸을 떨쳐 곧바로 뛰어올라 공중으로부터 (검을) 내려 베었다. 왜검사가 이제 응대하려고 할 때 문득 (왜검사의 초립) 끈이 끊어지면서, 왜검사의 눈은 (가려져서) 볼 수 없게 되었고 손에서 칼을 꺼내지도 못했다.

(검객의) 검이 이미 (왜검사의) 머리 위로 떨어졌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검객은 “그 (끈이) 해져 끊어진 틈을 타지 않았다면 저 왜검사는 내 검에 죽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검객은) 매번 전투하는 날 저녁이면 제단을 설치하고 검사에게 제사지냈다. 술 9잔을 늘어놓았는데, 좌우에 8잔, 중앙에 1잔이었다. 혹자가 그 이유를 물어보니, (검객은) “여덟 검사는 내 친구이고 왜검사는 나의 스승이다”라고 말하였다. 후에 몸을 재상에게 의탁하였는데, 항상 총애를 받았다. 하루는 재상이 부(府) 중에 앉아서 사무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한 늙은 승려가 곧바로 들어오더니 계단을 올라와서 재상을 찔러 죽이려고 하였다. 좌우가 크게 소란스러웠는데, 검객이 서서 보다가 크게 소리를 지르고 가슴에 품고 있던 검을 꺼내 쳐죽였다. (늙은 승려는) 옛날 원수 집안의 아들이었다.



검객모전
(검객이) 재상에게 “10일 뒤에 또 한 승려가 올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뒤에 과연 왔는데, 검객을 불러 말하기를, “죽은 승려는 내 제자다. 나와 더불어 검으로 싸울 수 있는가”라고 했다. 검객이 “할 수 있다”고 말을 하자, 곧 검으로 싸움을 하였다. 검이 서로 마찰하는데 서리와 눈에 빛이 일었다. 공중에 두 개의 푸른 독이 있어 서로 아래로 갔다 위로 갔다 하는 것같이 보였다. 얼마 동안 사이를 두고 피 3,4 방울이 땅에 떨어졌다. 서서히 내려오며 (검객이) 크게 읊조리기를, “승려가 쓰려졌습니다. 검에는 12술이 있는데 그 한 가지를 승려가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검에 매우 능했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사직하며 “신이 오래 동안 머물고 가지 않은 것은 한번은 공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은혜를 이미 갚았으니, 사직하기를 청합니다”라고 말했다. 재상이 “내가 너에게 무슨 은혜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검객이) 대답하기를, “저는 다름이 아니라 공이 호서와 영남 사이에서 현령으로 재임할 때 원한을 갚아 준 자의 아들입니다. 재상이 바로 깨닫고 크게 놀랐으나,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을 시켜 쫓아가게 했으나 이미 떠나가서 (어디로 갔는지) 끝내 알지 못했다.

유한준의 기록에 의하면, 이름을 알 수 없는 검객은 임진왜란(1592~1598)을 전후한 시기에 살았던 인물로, 임진왜란 전에 아버지가 살해당한 후 유랑하다가 12술의 검술을 익혔고, 왜적을 막는데 사용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준 재상에게 은혜를 갚은 후 그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이름을 모르는 검객이 익혔다는 12술의 검법이 어떤 기법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검객이 유한준보다 대략 150여 년 전의 인물이므로 그가 직접 목격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임진왜란 전에 조선에도 검술에 능한 이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왜적을 막아내기 위해 힘을 다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조선에 독자적인 검술이 있었을까?

재미있는 점은 임진왜란 시기에 조선이 검사들을 모아 왜적에게 대응하려는 적극적인 태도가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조선 검객들의 실력이 왜검사의 상대가 안되었다는 점이다. 9인의 조선 검사가 간신히 초립을 이용한 변칙적인 검술을 구사하는 1인의 왜검사에게 쩔쩔매고 그 중에 8인은 죽고, 1인만이 살아남은 것이다. 살아남은 1인도 실력이 아닌 운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당시 왜인의 검술이 뛰어났음은 분명해 보인다. 유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이여송이 거느린 명군(明軍)이 벽제역(碧蹄驛) 남쪽의 여석령(礪石嶺)에서 왜병과 대적을 할 때, 명군은 북방의 기병으로 짤막하고 무딘 칼을 휴대했는데, 왜병의 칼은 모두 서나 자나 되고 예리하기가 비길 데가 없을 정도여서, 이들이 긴 칼을 좌우로 휘둘러 치자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져서 감히 그들의 날카로운 기세들 대적할 수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예제보(武藝諸譜)의 무예교전법 국가편처(國家偏處)조를 보면, 왜적과 대진할 때, 왜적이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해 오면 조선 군사들이 비록 창을 잡고 있고 칼을 차고 있어도 칼은 칼집에서 빼지 못하고 창은 겨뤄보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국내에 칼쓰는 법이나 창쓰는 법이 전승되어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원인 설명이 이어진다. 이 서술은 무예도보통지, 기예질의(技藝質疑)조에 그대로 실려 있다.


'선조실록'에도 선조 27년(1594) 7월 정해조를 보면, 이번에 귀순한 왜인 중에는 검을 잘 쓰는 자도 있고 창을 잘 쓰는 자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검술이 전해 오지 않았는데, 근일에 약간 전습하니 이는 만세에 유익한 일이다라는 언급이 있다. 조선의 임금인 선조조차도 조선에 검술이 전해오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서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말로 조선에는 검술이나 창술 등의 기법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만도 않았던 듯 하다. '선조실록'을 보자.

(선조 31년 4월 경신) 임금이 ‘우리나라 칼 쓰는 법(我國用劍技)’을 보여주니, 유격(遊擊)이 말하기를,“기법은 좋으나 다만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도록 가르친 뒤에야 쓸 수 있습니다”하였다. 또 ‘우리나라의 말달리는 법(我國馳馬技)’을 보이면서 말 위에서 서기도 하고 안장 위에 거꾸로 서기도 하니, 유격이 보고는 잘한다고 하였다.

선조 31년(1598) 선조가 우리나라 칼쓰는 법을 보여주었다고 하니, 명의 유격장군 진인(陳寅)이 기법은 좋으나 담력이 필요하다는 대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기록에서 주목해 볼 것은 ‘우리나라 칼쓰는 법’을 보여주었다고 하는 서술이다. 이 점은 우선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중국인에게 배운 것을 보여줬다는 의미로, 둘째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검법을 보여줬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중국인 교사에게 배운 것을 진인에게 보여줬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에는 검술이 남아 있지 않다는 서술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선조가 ‘우리나라 칼쓰는 법’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만약 중국군에게 배운 것이었다면, ‘아국용검기(我國用劍技)’보다는 우리 군대의 칼쓰는 기법이라는 뜻의 ‘아군용검기(我軍用劍技)’라고 표현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말타는 법(我國馳馬技)’이라 하여, 조선만의 독특한 기예인 마상재를 뒤이어 보여주게 했다는 점도 검법이 명나라 군에게 배운 것이 아닌, 우리나라 만의 독특한 것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게 한다.


무비지조선세법중거정세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검법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 것인가에 도달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조선 전체를 범위로 보는 것이 아닌 조선군 내에 훈련을 해 오던 검법이 인멸된 것으로 범위를 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상식적으로 조선군 내에서 군사를 훈련시킬 검법이나 창법이 전래되는 것이 없는 것이었지, 민간에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선조가 우리 검법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 말은 조선의 군대 내에 기본적으로 훈련되어 오던 검법이 인멸되어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보는 게 훨씬 타당해 보인다. 임진왜란 이전 내에 조선 내에도 나름대로 검술을 훈련시킨 기록들이 보이는 것으로도 그러한 견해에 힘이 실린다.

(세종 18년 6월 계미) 백성에게 싸움을 가르치지 않음은 맹씨(孟氏 : 맹자)의 훈계이오나, 하물며 싸워서 이기고 적을 공격하는 데 있어 훈련의 공이 없이 갑자기 싸우게 된다면, 어찌 백전백승의 공적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연변의 백성과 구자(口子)의 군사들에게 모두 말달리고, 칼 쓰는 재주를 연습하게 하고(馳馬試劍之藝), 또 중대한 때를 당하여 적에게 대응하는 계략을 가르치게 하여, 장수가 된 자는 상과 벌을 엄히 보여 항상 권장과 징계를 가하여 사람마다 일당백의 재목을 이루면, 적이 두려워하여 변방을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종실록'의 세종 18년(1436) 기록을 보면, 검술을 연습시키자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조선의 군대 내에 검술이 전수되었기에 언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어렵게 증거를 들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칼이 존재하면 그 쓰는 법이 존재했을 것임은 당연하다. 다시 말하면, 임진왜란을 당하고 난 후 조선 정부 내에서 검법이 없다고 오가는 말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조선 정부군 내에 군사 훈련을 위해 전습되던 검법이 거의 인멸되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으로 한정해서 봐야 됨을 말해준다. 이러한 점은 '무비지(武備志)' 조선세법(朝鮮勢法)조를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모원의(茅元儀)가 말하기를, “……지금은 그 법이 전하지 않는다. ……근래에 호사자(好事者)가 있어서 조선이 그 세법을 구비하고 있음을 얻어 진실로 중국(中國)이 잃은 것을 사예(四裔)에서 구하니, 서방의 등운(等韻)과 일본(日本)의 상서(尙書)가 유일한 것이다.”

'무비지'의 저자인 모원의가 중국의 검술이 전해오지 않은 것을 조선에서 구했다고 말하고 있다. '무비지'는 1621년에 편찬되어진 책으로 모원의가 15년의 세월을 소비하고서 고금의 병서 2천여 종을 검토 정리하여 간행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1598년에 종결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무비지' 편찬 시기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무비지'의 조선세법은 임진왜란기에 조선에서 명으로 흘러 들어간 검술 중의 하나로 봐도 큰 비약은 아닐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에 조선 독자적인 검법이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신비의 차력 명수-장씨

 

최영의(1923~1994)의 '백만인의 가라테'에는 차력의 고수인 ‘장’씨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장은 성으로 보이는데, 이름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 최영의는 차력은 글자 그대로 힘을 빌리는 것으로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자기의 힘에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힘을 얻는 것을 말하며, 한국에서 초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비술을 종합한 것이라고 했다.

차력가 장씨와 관련된 이야기는 한국의 어떤 시골, 산악지대에 둘러싸인 분지의 마을에서 일어난 것이다. 당시 신문화의 물결이 이 산 깊은 분지로 밀어닥쳐서 사람들 사이에 머리를 단발하는 일이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이 마을은 지금도 옛날처럼 상투를 틀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매년 이 분지 마을은 농작물이 풍부하게 영글었고 가을이 되면 마을 사람이 타작을 위해 모두 나서는 바쁜 시기가 된다. 그럴 때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슬며시 한 중년의 상투를 튼 사나이가 나타나는데 장 씨라는 남자였다. 막벌이로 나섰다고 보면 된다. 장 씨는 일꾼들 틈에 섞여서 부지런히 일을 하고는 말도 없이 어느 새 마을에서 사라졌다. 마을 사람은 그가 제때에 나타나지 않으면 “올해는 녀석이 오지 않는 것인가!” 라는 이야기를 했다.


조선권법 그림
배운 것도 없고 욕심도 없고 즐거움이 있는지 없는지 특별한 문구의 말도 없이 묵묵히 일하고는 때때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저 사람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제 아무리 본인이 말이 없이 묵묵히 있어도 서로 상대하는 중에는 무엇이건 알게 되는 것이어서 그가 차력을 수련한 남자라는 소문이 돌았다. 차력은 아이들에게 동경의 대상이며 어른들에게도 신비롭게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온화하고 점잖았다. 마을의 일꾼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끔 장 씨에게 차력을 보여 달라고 조르기도 했지만, 장 씨는 웃으면서 그저 듣기만하고 말을 흘렸다. 차력의 차자 소리도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가을 들어 수확이 끝나자, 마을에선 가까운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서 축제가 개최됐다. 이해의 풍작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이 축제엔 인근 사방에서 힘이 센 장사들이 모여들어서 마을의 마당에서 씨름을 하고 힘을 겨뤘다. 그해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성대한 씨름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장 씨는 아무리 권해도 이 씨름대회에 나가지 않았다. 이것만은 몇 번 권해도 응하지 않았다. 보기로는 보통 일꾼과 다름이 없는 골격, 근육이어서 힘 자랑하는 젊은이와 씨름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장 씨의 태도가 너무 무기력해 보였다. 마을에선 ‘차력을 수련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거짓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이야기까지 나돌게 되었다.

그런데 그해의 씨름 경기에서 끝까지 싸워서 승리해 장사가 된 남자와 장씨가 사소한 일로 말썽을 일으키게 되었다. 100명이나 되는 상대를 이긴 골격이 억센 거구의 장사가 상품인 소를 마당에 매어놓고 여러 사람의 축하를 받으면서 막걸리로 술잔치를 벌리고 떠들어댔다. 과연 씨름 장사답게 많은 씨름꾼에 둘러싸인 중에서 한결 돋보였고 술기운을 잔뜩 띤 수염이 가득한 얼굴은 장사다웠다. 한참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무렵 여러 사이에 섞여서 조용히 앉아 있는 장씨를 본 장사는 취기에 털 많은 팔뚝을 걷어올렸다. 장사는 “이봐, 장 씨, 차력가는 술을 통째로 단숨에 마신다고 하는데 여기 나와서 한번 마셔봐. 자 여기로 오라니까”라며 명령조로 말을 했다. 그런데 장 씨는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이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때가 막 잔치가 끝나려고 할 때였는데, 장 씨가 바로 그때, ‘아 아’ 하며 크게 하품을 하였다. 이것을 본 장사는 “이놈 봐라” 하면서 노려보았다.

장 씨는 황망히 손을 입에서 떼고 목을 움츠리고 그 자리를 모면하려고 했지만 장사는 성큼 일어섰다. “이놈 버릇없는 놈. 앞으로 나와”하면서 무섭게 소리쳤다. 이제까지 떠들썩했던 술자리는 일순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았다. 장은 붙잡히면 큰일이라고 사람들 뒤로 다람쥐처럼 숨어서 곤란함을 피하려고 했다.



백만인의 가라테에 실려있는 차력사 장의 이야기

“더는 참을 수 없다. 한마디 사과도 않고 도망치는 터무니없는 놈이다.”라고 하고는 씨름 장사는 달려나가서 장 씨의 뒷덜미를 잡아채서 술자리 한가운데로 끌어냈다. 그러면서 우람한 주먹으로 장의 콧등을 마음껏 치면서 동시에 박치기를 먹였다. 쿵하는 예리한 소리가 나면서 장 씨는 숨을 죽인 사람들 앞에서 뒤로 크게 쓰러졌다. 그런데 곧 “푸푸푸…”하는 낮은 웃음소리가 함께 의식을 잃고 기절했으리라고 생각한 장 씨가 성큼 일어나더니, 흐르는 코피를 닦았다. 그 장 씨의 한쪽 손엔 비틀어 잘린 상투가 피가 흥건히 묻은 채 손에 들려 있었다. 어느 사이에 비틀어 잘렸는지 누구의 눈에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일어난 것이었다.

이 때 ‘헉’하는 소리가 났다. 머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장사가 고통을 견디다 못해 비명을 지른 것이다. 금시 몸이 큰 남자의 얼굴은 머리에서 흐른 피로 붉게 물들고 말았다. 큰일이었다. 술자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어쩔 줄 몰랐다. 그래도 노인들의 지시로 술을 머리에 붓고 세척한 다음 지혈을 위해 된장을 바르고 응급조치를 취하는 한편, 의원을 불러오게 했다. 그러는 동안에 군중 사이에서는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것은 소문대로 차력술의 위력을 눈앞에서 똑똑히 보게 된 데 대한 놀라움의 탄성과 찬탄의 소리였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 장 씨는 찬탄의 대상이 된 사람이 자신아니라느 듯이 여러 사람과 함께 쓰러진 사나이의 머리를 치료하는 일을 거들어주고 있었다. 인연이란 이상한 것이어서 거구의 장사와 그 후 이 둘은 형제처럼 사이가 좋아져, 친한 친구가 되었다.

또 어느 때 이 지방 일대에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는데, 격렬하게 내린 비 때문에 홍수가 나서, 탁류가 마을을 삼켰다. 어느 마을 산의 급경사면의 가운데에, 어른 넷이 껴안아도 안을 수 없을 정도의 바위가 묻혀 있었는데 탁류로 바위 주위의 흙이 씻겨나가자 비탈을 미끄러져 굴러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 그 때 여기를 돌보려고 온 장 씨가 이것을 보자 진흙탕 경사면을 마치 나르듯이 달려가서 바위를 따라가 손으로 받아 막았다. 바위가 미끄러지는 것을 보자 사람들은 이 바위아래에 있는 농가와 그 안의 사람을 다치게 될 것으로 절망했지만, 장 씨의 초인적인 활약으로 집도 부서지지 않았고 사람도 구했다. 장씨는 이 때 바위를 손으로 막는 바람에 몸의 절반이 진흙 속에 빠져들었다. 뒤에 장 씨가 받았던 바위를 안전한 장소로 옮기는데 10인 이상의 도움이 필요했다. 후에 이 바위를 옮길 때 장정 네다섯이 달려들어서 겨우 움직였다고 한다. 어째든 그가 바위를 쫓아갔을 때의 모습은 그 빠르기가 천마와 같았으며 바위를 막아섰을 때의 그 힘은 범을 능가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마을 사람들의 과장이 아닌 마음으로부터의 소감이었다.

가을이 되어 추수할 때가 되었다. 마을이 타작으로 바빠지면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장은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났으며 타작이 끝나자 역시 홀연히 사라졌다. 어느 때 차력에 대해서 끈덕지게 질문하는 마을 사람에게 장 씨는 한마디만 나직하게 말했다. “힘이란 쓸수록 강해지는 것입니다. 수련만 제대로 한다면 반드시 신의 힘이 체내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도중에 차력을 그만둔 의지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당시 최영의는 장 아무개 이야기를 50년 전의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책이 1969년(소화 44)에 발간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차력가 장 씨는 3․1운동이 벌어졌던 1919년경을 전후한 시기에 살았던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더 이상의 이야기는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을 준다.

최영의는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집이 부유해서 일하는 사람을 20여 명 정도 두었다고 한다. 그 당시 일꾼 중의 한 사람이 덕수였는데, 그로부터 어떤 무술을 배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 배운 무술이 어떤 종류였는지 명확하지 않다. 중국 ‘남권’이라고도 하고 ‘택견’이라고도 하며, ‘차비’ 혹은 ‘잽이’라고도 한다. '백만인의 가라테'의 저자 소개를 보면, 그는 9세 경에 권법을 배워 중학 2년에 초단이 되었다고 하고 있어 권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 세계의 무예를 소개하는 내용에는 조선의 무예를 서술하면서 그 특징으로 박치기와 머리카락(댕기머리?) 치기, 어깨치기 등의 특이한 기법이 있었다고 하며 발을 사용하는 소년과 선비의 대결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조선권법’이라고 기재하고 있어, 권법이 특정 무예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여하튼, 이 때 무술을 배우는 과정에서 덕수로부터 들었거나, 당시 동네에 널리 알려져 있던 차력사 이야기를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검선(劍仙)부자-김체건과 김광택

척이지사 김체건


무예도보통지 왜검조 관련 기록
김체건(金體乾)은 무예도보통지에 실려 있는 왜검을 조선에 전한 인물이다. 조선 후기 뛰어난 무인이었던 김체건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김체건에 관련한 이야기는 무예도보통지 왜검조에 실려있다.

군교 김체건은 잘 달리는 자로 민첩하고 무예에 정교하였다. 숙종 때 사신을 따라 일본에 들어가서 검보를 얻어서 그 검술을 배워 왔다. 임금이 체건을 시험하였는데, 체건이 칼을 떨치고 발굽을 들고 엄지발가락으로 서서 걸었다(무예도보통지, 왜검).

김체건은 몸이 날래고 무예에 능했으며, 숙종 때 사신을 따라 일본에 가서 검보를 얻어 왜검술을 배워왔다고 한다. 왜검을 익히기 전에 이미 다양한 무예를 습득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왜검을 익히는 과정은 그의 아들의 전기인 「김광택전」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김광택)의 아버지 체건은 척이지사(斥弛之士)이다. 숙종 때에 훈국의 무예를 더욱 수련하였다. 도법(刀法)으로는 섬나라 오랑캐만 한 것이 없었다. 군졸로 하여금 (왜검을) 익히게 하려 하였으나, 왜에서 비밀로 하여서 배울 수가 없었다. 체건은 스스로 원해서 그 기법을 얻고자 왜관으로 몰래 들어가 고노(雇奴)가 되었다(문암문고 「김광택전」).

무예도보통지에는 사신을 따라 일본에 갔다가 왜검보를 얻어와서 검술을 배웠다고 한 반면에 「김광택전」에는 숙종 때 김체건이 왜관에 들어가 검술을 습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약간의 차이가 난다. 하지만, 모두 김체건이 왜검을 배웠음을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김체건에 대해서 「김광택전」에는 척이지사라고 서술하고 있다. ‘척이’는 대개 ‘척이불기(斥弛不羈)’와 같은 용례로 많이 쓰이는데, 구속되는 바 없이 행동하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좋게 말하면 호탕한 성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안하무인의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후에 아들 김광택에게 서예를 가르쳤다고 한 점에서 학문에도 얼마 정도의 소양을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의 신분은 군교였다. 군교는 서예(誓隷)․나장(羅將)․사령(使令) 등으로 불린 상급아전(上級衙前)으로, 왕이나 고위관직자의 경호, 범법자의 체포와 구금, 방범순찰 등의 업무에 종사하는 부류로 중인계급이었다. 김체건의 집안도 중인 계급이었고 그 아버지의 직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안하무인이 인물이 된 것도 중인이라는 신분으로는 학문을 통해 문관으로 진출할 수 없었던 점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구덩이를 파고 왜검을 배우다


동래부사접왜도
「김광택전」을 보면, 김체건이 스스로 원해서 왜관에 들어갔다고도 하지만, 훈국 즉, 훈련도감에서 군졸들로 하여금 왜검을 익히게 하려했다는 점에서 정책적으로 그를 선발하여 왜검을 배워오게 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점은 숙종실록을 통해 확인된다.

(숙종 8년 10월) 훈국 군병 중에 발놀림이나 몸놀림이 몹시 빠르고 날래고 힘이 있으며 무예에 능한 1인을 유혁연(柳赫然)이 재직시에 동래에 내려보내 왜인의 검술을 배우게 했고, 근래에 금위영(禁衛營)으로 소속이 옮겨진 자가 있는데, 이번의 가는 길에 데리고 가서 저쪽의 기예를 배우게 하자고 청하였다.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우의정 김석주(金錫冑, 1634~1684)가 청(淸)에 사행을 가면서 금위영 소속의 무인의 동행을 요청하고 있는 기록으로, 동래왜관(東萊倭館)에 1인을 파견하여 왜검을 학습한 사실을 알려준다. 왜검술을 배운 이와 중국의 기예를 배우도록 하는 이가 동일한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긴 하지만, 유혁연이 훈련도감에 재직할 때 동래에 병사 한 명을 파견하여 왜검술을 배우게 한 것은 부정할 수 없고, 무예도보통지나 「김광택전」을 통해, 그 1인은 김체건이 확실해 보인다.

김체건이 언제 동래왜관에 파견되었는지는 명확히 제시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유혁연이 훈련도감에 재직할 때임을 고려하면 그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유혁연이 처음 훈련대장으로 임명된 해는 현종 10년(1669) 6월이다. 그리고 숙종 6년(1680) 3월 기록에 훈련대장으로 김만기(金萬基, 1633~1687)가 임명되고 있다. 유혁연은 숙종 6년(1680) 서인들이 남인을 숙청시키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났을 때 남인이었던 그도 영해(寧海), 지금의 경북 영덕으로 유배되었다. 따라서 약간의 변동사항은 있을 수 있지만, 이 시기 전까지를 유혁연이 훈련대장으로 재직한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김체건은 1669년 6월부터 1680년 3월 이전의 어느 때에 동래로 파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좀 더 그 범위를 줄일 수 있다. 「김광택전」에 숙종 때에 내려보냈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혁연이 훈련대장으로 재직한 숙종 시기는 숙종 즉위년(1674) 8월부터 숙종 6년(1680) 3월 이전이다. 약 5년 정도의 기간임을 말해준다. 왜관파견 시기는 승정원일기 숙종 5년(1679) 7월 27일 기록을 통해 좀 더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있다.

유혁연이 말하기를 “검술은 천하에 모두 있는데, 일본이 가장 낫습니다. 우리나라만 홀로 전해 익히는 사람이 없어, (신의) 마음은 항상 분하게 여겼습니다. 신이 1인을 동래에 내려보내 전하여 익히도록 하고자, 부사 이서우(李瑞雨)에게 검술을 배울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형세를 살펴보라고 말을 보냈습니다. 지금 그 답을 받아본 바 (검술을) 전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신의 관리 하에 배울 수 있는 1인이 있으니, 이 사람을 내려보내 검을 배우게 하고자 하는데,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보내라. 좋다.”라고 하였다.

이서우(1633~1709)는 당시 동래부사였다. 유혁연이 왜검술을 익히게 하기 위해 이서우에게 왜관의 형세를 먼저 살펴보게 한 후에 왜관에 들여보낼 수 있다는 답을 받은 후에 숙종에게 아뢰고 있으며, 숙종은 이를 허락하고 있어, 숙종 5년에 김체건이 왜관에 잠입했음을 알 수 있다.

동래왜관은 숙종 4년에 새롭게 설치되었다. 조선시대 왜관은 개항장의 설정과 변천에 따라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였는데, 중종 5년(1510) 삼포왜란으로 폐쇄되었다가, 1512년 임신조약으로 인한 국교 회복과 동시에 처음에는 제포(薺浦) 만을 개항했고, 부산포를 추가하였다. 그런데 1541년 제포에서 조선의 관병과 왜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자, 제포를 폐쇄하고 왜관을 부산포로 옮겼다. 1544년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으로 다시 통교가 중단되자 왜관도 폐지되었고, 다시 명종 2년(1547) 정미조약의 체결로 부산포에만 왕래를 허락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다시 폐쇄되었던 왜관은 선조 40년(1607) 국교 회복과 더불어 부산항 내 두모포(豆毛浦)에 새로 설치되었다가 숙종 4년(1678) 초량(草梁)으로 옮겼던 것이다. 왜관이 초량으로 옮기면서 많은 일손이 필요했고 동래부사였던 이서우를 통해 김체건을 고로(雇奴) 즉, 머슴으로 왜관에 잠입시킨 것으로 보인다.



왜관도
김체건이 정체를 속이고 머슴으로 왜관에 들어가 배우려고 할 정도로 당시 조선 정부에서 검술에 대한 정보에 목말라 있었음을 말해준다. 김체건이 이 곳에서 왜검을 배운 과정은 「김광택전」에 잘 나타나 있다.

왜에는 신검술이 있었는데 그 또한 비밀이라 하여, 이웃나라 사람은 볼 수가 없었다. 체건은 그 서로 겨루는 것을 엿보고, 번번이 땅속에 움을 파고 숨어 엿보고 따라하였다. 수년이 지나 드디어 왜의 기술을 다하여 더 배울 것이 없었다. 임금(숙종) 앞에서 시범을 보였는데, 환상인 듯하여 사람들을 끝없이 놀라게 하였다. 또한, 재를 땅에 뿌려놓고 맨발로 양쪽 엄지발가락을 이용하여 재를 밟았고, 그리고 나는 듯한 칼춤은 춤의 경지에 이르러, 재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으니, 그 몸의 가볍기가 이와 같았다. 임금이 그를 기특하게 여겨 훈련도감의 교사에 임명하였다. 오늘날 모든 영에서 병사들이 하는 왜도는 체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김광택전」).

당시 일본인들도 자신들의 검술을 보여주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국에 해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김광택전」을 통해, 김체건이 이런 상황에서 왜검을 배우기 위해 택한 방법은 그들의 훈련 장소에 움을 파고 몰래 엿보는 것이었다. 아마도 일을 하는 틈틈이 왜인들 모르게 몰래 엿본 기법들을 연습하였을 것이다. 왜관에는 많으면 1천명 이상이 거주를 하였지만, 실제로는 약 500~600여 이상의 인원이 거주하였고, 그 중에서 검술을 전문적으로 수련한 왜인들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몇십 명 정도였을 것이다. 왜관 내에 거주하는 왜인들 중 무인들 사이에서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수련을 훔쳐보면서 왜검을 익혔을 것이다.

김체건은 그렇게 수년 동안 이어져서 그 왜검법을 터득하게 되자, 다시 김체건은 훈련도감으로 복귀하였다고 하는데, 그 기간은 길게 잡아도 숙종 5년(1679) 7월부터 일본에 통신사행이 출발하는 숙종 8년(1682) 5월 이전의 3년 여 정도로 보인다.

그는 임금인 숙종 앞에서 그가 배워온 바를 시연하였는데, 재를 뿌리고 움직이면서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고 춤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로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김체건이 몰래 훔쳐보고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데는 그가 왜관에 파견되기 이전부터 ‘조선세법’이나 ‘본국검’ 등 검술에 능숙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점은 '숙종실록'에서 몸놀림이 몹시 빠르고 날래고 힘이 있으며 무예에 능한 1인을 선발하여 보냈다는 점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왜관에 파견되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주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사행을 따라 일본에 가다

'무예도보통지' 왜검조를 보면, 숙종 때 사신을 따라 일본에 들어가서 검보를 얻어서 그 왜검술을 배워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점은 사도세자의 유고 문집인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의 「무예육기연성십팔반설(藝譜六技演成十八般說)」조에도 군문인(軍門人) 김체건이 일본에서 8종의 검법을 배워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승정원일기' 영조 10년 9월 29일자 기록을 보면, “왜검의 법은 일찍이 통신사행 때 별도로 장교(將校)를 보내어 다른 나라(일본)에서 배운 것이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김체건이 사신을 따라 일본에 가서 검법을 배워온 것은 사실로 보인다.

숙종 당시 사행은 숙종 8년(1682)과 숙종 37년(1711)․숙종 45년(1719) 세 차례에 걸쳐 있었다. 숙종 37년(1711)․숙종 45년(1719) 이 두 시기에 김체건이 일본 사행에 동행을 하지 않았을 것임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 10년(1738) 10월 8일의 기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훈련대장 장붕익(張鵬翼, 1674~1735)이 영조에게 ‘왜검은 선조(先朝) 무오(戊午)년에 김치근(金致謹)이라고 불리우는 자를 보내어 왜국에서 배워오게 한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조 10년 이전의 무오년은 숙종 4년(1678)이다. 이 해에 김치근이라는 이가 왜검을 일본에서 배워왔다는 것이다. 숙종대에 왜검을 배우기 위해 갔던 이는 '무예도보통지' 등의 기록을 통해 김체건이 확실하기 때문에 김치근이라는 인명은 김체건의 이름을 명확히 알지 못한 장붕익의 오해, 또는 당시 임금과 장붕익의 말을 옮긴 사관의 실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숙종 4년에는 통신사행이 없었다. 따라서 가장 가까운 숙종 8년의 사실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이고, 이 때 김체건이 사행에 동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숙종 8년의 사행은 5월부터 11월까지였는데,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가 장군직을 물려받자 축하사절로 파견한 것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연행을 담고 있는 역관 김지남(金指南, 1654~1718)의 '동사일록(東槎日錄)'에는 통신사 일행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지만, 김체건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체건의 직위가 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가 맡은 임무를 드러낼 수 없었고 또 본명을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당시 사행에는 무인으로는 선전관(宣傳官) 양익명(梁益命)과 마상재인 오순백(吳順伯)․형시정(邢時廷) 등이 동행하였다. 오순백은 앞서 언급한 숙종 8년 통신사행의 기록을 담은 '동사일록'과 홍우재(洪禹載)의 '동사록(東槎錄)'을 보아도 5월 15일 통신사행이 경북 예천에 머물렀을 때, 사또가 그로 하여금 검무를 추게 했다. 그의 검무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루었고,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보는 자마다 그의 기이한 재주를 칭찬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오순백이 마상재 뿐 아니라, 검무에도 매우 빼어났음을 말하는데, 오순백과 관련한 기록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 가능성이 매우 적기는 하지만, 혹 오순백이 김체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통신사 행렬 부분

김체건이 사행을 따라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까지 가면서 검보를 얻어 기법을 익혔는지 아니면, 혼자 사행에서 떨어져 나와 일본 각지를 돌며 왜검을 익혔는지는 명확치 않다. 그가 왜관에서 머슴살이를 몇 년 동안 해서 일본어에도 능숙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후자의 추정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배운 기법에 대해서는 '무예도보통지'에는 토유류(土由流)․운광류(運光流)․천유류(千柳流)․유피류(柳彼流)의 4류가 있다. 이들 유에 관해서 토유(土由)를 토전(土田)으로 보면서 발음이 같은 호전(戶田)류로, 운광은 운홍류(雲弘流)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 '능허관만고'에는 왜검이 토유류부터 유피류까지 8류 였다고 하고 있으며, '무예도보통지'에는 이 4류도 중간에 실전되어 운광류 만이 행해지고 있다고 하고 있다. 즉,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되는 시기에는 김체건이 전한 많은 기법이 유실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추론은 무예도보통지에 기재된 왜검법의 세 명칭을 통해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토유류: 기(起)-장검재진(藏劍再進)-장검삼진(藏劍三進)
운광류: 기(起)-천리(千利)-속행(速行)-산시우(山時雨)-수구심(水鳩心)-유사(柳絲)-종(終)
천유류: 기(起)-초도수(初度手)-장검재진(藏劍再進)-장검삼진(藏劍三進)-종(終)
유피류: 기(起)-종(終)

운광류에는 천리․속행․산시우․수구심․유사 등 중국에서 유래된 검법과는 다른 일본에서 유래된 세로 보이는 세명이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반면 나머지 3류 중에는 유피류에 초도수라는 세명 만이 전하고 있어, 세명 혹은 기법이 유실되었음을 말해준다.

숙종 8년의 일본 사행은 이해 11월 16일에 임금에게 돌아와 그 결과를 보고하였는데, 김체건도 이 시기 즈음에 돌아왔을 것으로 보인다. 정식 사행과는 별개의 임무를 띠고 갔으므로 사행단과 별도로 일찌감치 귀국했을 수도 있다.

숙종 8년 11월에는 김석주(金錫冑)가 청에 사은사(謝恩使)로 가게 되었는데, 이보다 한달 앞서 그를 동래에 내려보내 왜인의 검술을 배웠고 금위영(禁衛營)으로 소속을 옮긴 자를 데려가 저쪽(청)의 기예를 배우게 하자고 청하여 숙종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내기도 하였다. 김석주가 언급한 인물이 김체건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김체건은 일본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위영으로 소속이 옮겨졌고 숙종 8년 11월의 사은사를 따라 청에 가서 그 곳의 무예를 습득해 왔을 가능성도 살필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 「병기총서(兵技總叙)」조를 보면, 숙종 16년(1690) 11월에 내원(內院)에서 훈련도감에 속한 왜검수의 기법을 시험하였다고 하는데, 김체건으로부터 왜검을 익힌 훈련도감의 왜검수들을 시험한 것으로 봐도 무방해 보인다. 이후 김체건의 행적은 숙종 23년(1697)에 나타난다. 별무사(別武士)로 재직하던 그는 정월에 운부(雲浮)․장길산(張吉山)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 이영창(李榮昌) 및 그의 아우 이영만(李榮萬)과 종 중길(仲吉) 그리고 처 선옥(仙玉) 등을 뒤쫓아서 체포하기도 했다. 숙종 25년(1699) 6월에는 종4품 무관직인 두모포(豆毛浦) 만호(萬戶)를 지냈으며, 숙종 37년(1711) 10월에는 별무사에 재직했다.

김체건에게는 1710년 이전에 태어난 아들 김광택이 있는데, 「김광택전」에 따르면, 광택이 7․8세였을 때까지는 김체건이 살아 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체건은 1717년, 1718년 이후에야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체건의 아들 김광택

「김광택전」에는 “김광택은 서울 사람이고 아버지는 체건으로, 광택 또한 능히 그 부친의 기이한 술법을 전해 받았으니……”라는 서술이 있어, 김체건에게 김광택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며, 그도 아버지의 검술을 이어받아 뛰어난 검객이 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김광택에 관해서는 '승정원일기'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좀 더 알 수 있다. 영조 33년(1757)에 영조가 김체건의 아들 광택을 불러 본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래는 전문이다.

(영조 33년 11월 21일) 영조가 주서(注書: 승정원의 정7품직)에게 명하여 김체건의 아들 광택을 (궁에) 들어오도록 불렀다. 임금이 어영대장으로 하여금 물어 말하기를, “너는 김체건의 아들로 아명이 노미(老味)인가?”라고 하였다. 광택이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너는 지금 어느 곳에 있으며, 하는 일은 무엇인가”라고 말하자, 광택은 “전 어영대장 홍봉한(洪鳳漢)의 집에 머물고 있으며, 하는 일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문관도, 무관도 아닌 것인가? 그렇다면 군교는 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자, 광택이 “성상의 가르침이 이와 같은데 감히 받들어 행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내가 잠저시에 사패 시노비의 아들이다. 경자(庚子)년 직숙할 때에 이 사내가 들어와 나를 시종하였는데, 그 때 나이가 겨우 십여 세였다. 글에 능해 ‘위선최락(爲善最樂)’ 4 글자를 섰다. 그 후에 살았는지 죽었는지 막연하여 알지 못했는데, 들으니 홍봉한의 집에 있다고 하여 불러 본 것이다. 이 사람이 비록 미천하지만 숙직할 때 본 적이 있는 자로 지금 생각 생각하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 금위영에 교련관이 비어 있으니 이 사람을 차출하는 것이 가한가?”라고 하였다. (구)선복(具善復)이 말하기를 지금 비어 있으므로 하교에 따라서 차출할 수 있습니다. 상이 “오늘 행하라.”라고 말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김광택의 아이 때 이름이 노미였고,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인 연잉군(延礽君) 시절의 경자년 즉, 1720년에 영조를 시종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아이들의 이름을 오래 살라는 뜻으로 천하게 짓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 놈 저 놈’ 할 때의 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김광택은 당시에 10여 세 였다고 한 점을 볼 때, 1710년 이전에 태어났던 것으로 보이는데, 재미있는 점은 영조가 김광택이 자신의 사내 종으로 사패로 받은 시노비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일천즉천(一賤卽賤) 즉, 부모 중 한쪽이 천인이면, 자식은 천인이 되는 것이 신분제의 기본이었다.영조가 김체건의 아들이냐고 묻는 것으로 볼 때, 광택의 어머니가 계집 종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패로 받은 시노비의 아들임을 명확히 기록하고 있어, 원래는 공노비였다가 숙종 혹은 경종으로부터 연잉군 시절에 영조가 내려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김체건이 1710년 이전에 영조(당시 연잉군)의 호위를 담당한 적이 있었고 그 때 영조의 계집 종과의 사이에서 김광택이 출생한 것으로 짐작된다. 김광택이 관노였음은 '승정원일기' 영조 23년(1747)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영조 23년 정월 22일) 이이명(李頤命)이 약원(藥院)에 재직할 때, 김체건의 아들 국표(國標)를 불러 나라를 위하여 ‘위국망신(爲國忘身)’ 4자를 쓰게 하고 광택으로 그 이름을 고쳤다. 이 (아이)는 관비 소생으로 나(영조)의 사내 종이다. 와서 이 일을 알렸는데, 내가 국표에게 명하여 이이명이 고친 광택으로 그 이름을 삼게 했다.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이 약원(藥院) 즉, 내의원(內醫院)에 재직하고 있을 때에 김체건의 아들 국표를 불러 광택으로 그 이름을 고쳤다는 기록과 함께 광택이 관비 소생으로 영조의 사내 종임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원래 정식 이름은 국표였는데, 이이명이 개명해주었고, 영조가 이를 허락해 ‘광택’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보면, 김광택은 문장과 서예에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다.’라는 뜻의 ‘위선최락(爲善最樂)’과 ‘국가를 위하여 몸을 잊는다.’는 의미의 ‘위국망신(爲國忘身)’ 등의 글씨를 영조와 이이명이 쓰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광택의 글쓰기 솜씨는 아버지 김체건으로부터 배운 것으로 보인다. 「김광택전」을 보면, “(김광택이) 7․8 세에 (아버지) 체건이 하루는 문을 밀고 빈 관사에 가서 붓을 물에 담궈 관청 위의 현판을 베껴 썼다. 대자(大字)를 배운 까닭에 (글씨가)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예 솜씨는 아버지의 영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버지의 검술을 이어받다


무예도보통지 왜검교전보
광택은 아버지인 김체건이 죽기 전까지 검술을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김체건이 터득한 검술은 조선의 검술과 왜검술이었다. 중국의 검술까지도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는 3국의 검술에 능통했으며, 검으로는 당대 최고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2국 혹은 3국의 검술을 수련했을 것이다.

「김광택전」을 보면,
‘검무[舞劍]는 신의 경지에 들어섰는데, 만지낙화세(滿地落花勢)를 하면, 몸이 감추어져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광택 또한 능히 그 아버지의 기이한 술법을 전해 받았으니 또한 다르다 하겠는가?’ 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광택도 아버지의 검술을 이어받아 고수의 반열에 올라섰음을 알려준다. 온 땅에 꽃잎이 떨어지는 듯한 ‘만지낙화세’를 하면 몸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질 정도였다. 물론 이 만지낙화세의 주체가 김체건인지 광택인지는 조금 불분명하다. 물론 주체가 김체건이라 하더라도 아버지의 검술 솜씨를 김광택이 그대로 물려받았을 것이고, 그도 같은 경지에 올라섰을 것으로 보인다. 만지낙화세를 김광택도 했으리라 봐도 큰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만지낙화세’는 무예도보통지의 본국검․제독검․예도․쌍수도․쌍검과 왜검 항목에서는 보이지 않는 세명이어서 김체건 혹은 김광택에 의해 새롭게 창출된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점은 ?무예도보통지? 왜검조에 김체건이 검법을 행하는 사이에 새로운 뜻이 나와 교전지세(交戰之勢)를 이루므로 「교전보(交戰譜)」라 하였다는 서술을 통해서 확인된다. 김체건에 의해 창의적으로 새롭게 덧붙인 부분이 있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김광택의 무예솜씨가 뛰어났음은 그의 생사를 모르다가 만난 영조가 그를 영조 33년(1757)에 그가 하는 일이 없다고 하자, 금위영의 교련관으로 제수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교련관은 장교 중에서 선발하며 군대를 교련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사법(射法)․진법(陳法)․강서(講書)에서 수석한 자를 뽑았다. 그만큼 능력이 요구되는 자리였던 것이다. 그런 자리에 김광택을 앉힌다는 것은 김체건의 아들이라는 점 외에 그의 무예솜씨가 뛰어났기에 가능한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연암집의 김신선전
김광택에 대해 영조는 그의 생존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도 김체건도 사망하고 영조가 임금에 즉위하는 과정에서 김광택과의 연락이 끊긴 듯한데, 이 시기에 김광택은 신선술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광택은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김신선을 따라, 자(字)를 ‘무가자(無可者)’라고 하고는 각식(却食)과 경신(輕身)의 술법을 배웠다. 서울에서 풍악(금강산)까지 400리를 가는데 김신선은 짚신 한 켤레로 3번을 왕복해도 신이 닳지 않았다. 광택 또한 짚신 한 켤레로 두 번을 오고가도 닳지 않았다. 태식(胎息)에 능하며 겨울철에도 옷 하나로 지냈다. 나이 80에도 얼굴이 어린아이 같았으며, 죽는 날에 사람들은 시해(尸解)한 것으로 여겼다(「김광택전」).

김광택은 김신선을 따랐다고 하는데, 김신선은 박지원(朴趾源)의 연암집(燕巖集)에 보이는 김홍기(金弘基)로 본다.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김홍기(金洪器)’로 되어 있기도 하다.

김홍기는 하루에 수백 리를 돌아다녀도 신발은 새 것 같았으며, 더워도 땀 흘리지 않고, 추워도 떨지 않았고 밥은 몇 숟갈만 먹고도 며칠을 지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기름(油)․장(醬)․물고기(漁)․고기(肉) 등은 먹지 않았으며, 야밤중에 일어나 앉아 뼈마디를 움직였다고 청장관전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두 기록을 같이 보면, 신선으로 불리는 김홍기는 하루에 수백 리를 갈 정도의 빠르게 걸으면서도 신발이 하나도 헤어지지 않는 경신법, 음식을 가려먹고 적게 먹는 음식을 섭취하는 각식, 호홉법인 태식, 뼈마디를 움직이는 도인법에 능통했던 것으로 보이며, 김광택도 그로부터 이러한 신선술을 배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광택전」의 저자 유본학은 “우리나라에 검은 옷을 입는 무리가 많지만, 도가(道家) 무리가 적다. 그 중에 수련으로 이름을 얻은 자는 오직 김 신선 한 명으로 세상에서 모두 그를 말하고 있는데, 오히려 광택이 있는 것은 알지 못했다”라고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가 신선술에 심취해 있던 시기는 영조가 즉위하는 1724년부터 영조가 그에게 교련관을 제수하는 1757년까지의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그는 검술 수련과 함께 신선술을 수련하며 백두산을 오가기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선술을 배운 김광택은 나이가 80이 되어서도 얼굴이 어린 아이 같았다고 하는데, 그가 80정도까지는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김광택은 1710년 이전에 태어나 1790년 이후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그가 죽자 시해한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시해는 육신을 버리고 혼백만이 빠져나가 신선이 되는 것을 말한다.

「김광택전」에 그의 관직은 종3품의 첨사(僉使)까지 이르렀다고 하는데, 승정원일기 영조 43년(1767)에 고금도첨사(古今島僉使)인 김광택을 찾을 수 있다. 교련관의 무리[流]는 모두 만호(萬戶)․첨사를 얻어 수령(守令)이 되고 있다는 우서(迂書)의 기록과 부합한다. 이외에 위도첨사(蝟島僉使)나 경복궁위장(景福宮衛將) 등의 관직에 있던 김광택 등이 찾아지기는 하지만, 동명이인들로 김체건의 아들 김광택으로 보기는 어렵다.

유본학은 김체건과 김광택 부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하고 있다.
체건은 능히 검기를 얻어 충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였다. 만약 그 재주를 사용하였다면, 곧바로 변방을 안위케 하여 공을 세웠을 것이다. 광택 또한 능히 그 부친의 기이한 술법을 전해 받았으니 또한 다르다 하겠는가! 또한 이는 검선의 무리[劍仙之類]가 아니겠는가! 오히려 판관 상득용이 기이한 선비를 좋아하여, 광택과 더불어 서로 알고 지내며 일찍이 그 일을 (나에게) 이야기하니, 그런 까닭에 그것을 기록하였다. 무릇 위항인(委巷人) 들은 기이한 재주가 있고 남다른 데가 있어도, 자취가 없어져 전하는 것이 없으니 또한 얼마나 한스러운지가! 어찌 체건과 광택뿐이겠는가? 거듭 애석하고 안타깝다!(「김광택전」)

김체건과 김광택을 검선의 무리라고 하면서 크게 쓰이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들을 포함한 위항인들이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지녔더라도 자취가 남아있지 않은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위항은 ‘좁고 지저분한 거리’로 사대부와 상민 사이의 중간계층, 넓은 의미의 중인이 사는 지역을 말한다. 능력있는 중인들이 세상에 쓰이지 못한 현실을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김광택전」에는 판관(判官) 상득용(尙得容)이 김광택과 교류를 한 사실과 그가 김광택에 관한 일을 유본학에게 말해서 「김광택전」이 서술되었다고 한다. 상득용은 태어난 해와 죽은 해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는 영의정 상진(尙震)의 후손이며, 동기(東耆)의 아들로 수문장(守門將), 화량진첨사(花梁鎭僉使) 등을 역임하였다. 승정원일기의 고종 19년(1882)조를 보면, 고(故) 판관 상득용에게 좌승지를 추증하라고 하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판관직도 역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광택의 검술 혹은 선도술의 제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무예도보통지 편찬에 관여한 백동수(白東修)가 김광택의 제자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김광택과 교류를 한 상득용이 무과출신임을 고려할 때 그가 혹 김광택으로부터 검술과 선도술을 배웠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또한 명확치 않으므로 조심스러울 필요는 있다.

'장사(壯士)' 이병식

 

이 이야기는 1873년인 고종 10년에 서유영(徐有英:1801~?)이 쓴 문헌설화집인 금계필담(錦溪筆談)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스스로 힘에 자부심을 갖고 살던 이병식(李秉軾)이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 스스로의 힘을 드러내지 않고 살고 있음을 알게 된 후 조심하며 살았다는 내용이다. 이병식은 영조(英祖) 때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 존재를 다른 기록에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뛰어나게 힘이 센 사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판서 구윤명(具允明, 1711~1797)의 집에서 말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성질이 몹시 사나와 길들이기가 힘들었다. 그 말은 마부도 짓밟고 물어 죽이자, 후환을 없애기 위해 구윤명이 이병식을 불러 죽이게 하였다. 말이 그를 보고 빨리 뛰어 올라 밟고 물려고 하였다. 이병식이 그 앞 다리를 끼고 앞에 다가서서 말을 꼬리를 잡고 뜰 가운데로 끌어내려 두 서너 번 빙빙 돌리고 들어서 땅에 내팽개치자, 드디어 죽어버렸다.

구윤명은 그 용맹스러움을 장하게 여겨 그를 조정에 천거했다. 이후 무과에 급제하여 금군(禁軍) 벼슬을 제수 받았다. 그가 대궐의 후원인 북원(北苑)에서 번을 서고 있을 때 심한 추위를 만났는데, 해묵은 회나무가 큰바람에 뽑혀 길을 가로질러 막고 얼어 붙어버렸다. 이 때 금군의 군사 수백 명이 큰 밧줄로 힘을 합해서 잡아끌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이병식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그도 하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이에 술을 사서 먹을 것을 권하니 취하기에 이르렀다. 이병식이 술기운에 몸을 내던지고 나서서 누운 회나무 아랫부분을 잡았으나 얼음이 쌓이고 얽혀서 땅에 붙어서 일으켜지지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윗부분을 손으로 들어올렸더니 나무가 찢어지면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그의 신력에 감탄했다.

이병식의 집은 인천에 있었다. 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금의 서울 마포 서남쪽 잠두봉 아래에 있는 양화진(楊花津)에 이르렀다. 양화진은 양천에서 강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나루터로 조선시대 한강을 건너는 3진 중의 하나이다. 그가 진에 도착했을 때는 뱃사공이 배를 저어 언덕으로부터 멀어져서 이미 수 십 보나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얼굴이 험상궂게 생긴 한 중이 배에 타고 있었는데 한 부인의 가마 옆에 앉아서 가늘고 긴 대를 줄로 엮어 만든 발을 걷어올리며 부인을 희롱하고 있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연약한 탓인지 보고도 어찌할 형편이 못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몹시 분개한 이병식이 단 번에 뱃머리에 뛰어 오르더니 주먹을 휘둘러 그 중을 때리고 차서 물밑으로 던져버렸다. 옆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 중에 통쾌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형록 나룻배


그런데 그가 집으로 돌아 온 지 한 달 여쯤 지나서 마침 밭을 갈고 있는데, 한 중이 손에 쇠지팡이를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그 중의 얼굴이 몹시 흉악했다. 그 중이 밭 두렁 위에 서서 묻기를, “이병식이가 이 마을에 산다고 하는데, 그 집이 어디요?”라고 하자, 그는 두려운 생각이 나서 쟁기를 놓고 대답하기를, “이병식이는 며칠 전에 나들이를 떠났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이다. 그런데 스님은 왜 그 집을 알고자 하십니까”라고 하자 중이 말하기를, “이병식이가 내 문하에 있는 중을 죽였다고 하여, 장차 그 놈과 힘을 겨루어 보고 또 원수를 갚으려 하오”라고 했다.

이에 그가 손을 들어 먼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서쪽 편에 절벽이 우뚝 솟아 있고 밑에는 큰 바다가 있는데 이병식이는 늘 그 위에 올라앉아서 양다리를 밖으로 뻗고서 건장한 남자들로 하여금 뒤에서 차도록 했으나 꼼짝도 않았습니다. 스님도 과연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중이 말하기를, “나도 한 번 해보고자 하니, 그대는 나를 위해 그 곳을 가르쳐주오”라고 했다.

그는 몰래 기뻐하며 중과 함께 그 절벽에 이르렀는데, 중은 지시하는 바위 꼭대기에 앉아서 양다리를 밖으로 뻗고 그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그대는 나를 걷어 차보오”라고 했다. 이때 이병식은 젖 먹던 힘을 다하여 계속 서너 번 찼으나 잠자리가 기둥을 흔드는 것과 같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중은 갑자기 돌아보며 말하기를, “지금 그대가 차는 것이 조금은 아픈 듯 하니, 힘은 좀 있는 것 같구만”하고는 드디어 옷을 걷어 떨치고 일어나며 말하기를, “이제 이병식이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 꼭 다시 오리라”라고 하며 곧 쇠지팡이를 잡고 천천히 걸어 가 버렸다. 이병식이 두려워서 간담이 서늘하여 그 뒤를 밟아 따라가 보았더니, 잘 생긴 젊은 서생 하나가 몹시 파리한 모습으로 조그만 당나귀를 타고 오는데 그 중과 밭 사이의 좁은 길에서 마주 치자, 중은 쇠지팡이로 당나귀를 후려쳐서 도랑으로 떨어뜨리고는 쇠지팡이를 메고 가버렸다. 이를 본 이병식은 매우 분개하였으나 감히 움직이지도 못하고 도랑을 굽어보다가 서생을 구출하려 하니 그는 기어서 뚝 위로 올라왔으나 당나귀는 이미 죽어 있었다. 서생은 머리를 숙이고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갑자기 혼자 말하기를, “내 평생에 사람을 죽이려 하지 않았으나, 만약 이 중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가 사람을 상하는 일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하고는 중을 보니 이미 멀리 가고 있었다.

그는 급히 의관을 바로잡고 분연히 일어나 그를 빨리 따라 가는데, 그 빠르기가 나는 것 같았다. 그는 순식간에 중을 따라가서 등 뒤에서 한 길 쯤 뛰어 올라 두 손으로 중의 양쪽 어깨를 누르고 다시 오던 길을 따라 가버리니, 중은 똑바로 서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마치 나무 인형 같았다.

이병식은 처음엔 서생이 필시 중에게 죽으리라 생각하고 한탄하여 마지않다가 그 광경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중을 피하여 길을 돌아가다가 이병식에게 묻기를, “갑자기 천벌이 내렸습니까? 저 중이 글쎄, 길 가운데 서있는데 허리 아래는 땅에 박히고 두 눈은 튀어나오고 입을 쩍 벌린 채 혀를 빼물고 죽어서, 그 모양이 이상하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소이까”라고 하는 것이다.

이병식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마음을 풀고 급히 가서 보니 중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어 한숨을 쉬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망령되게 한낱 깊은 생각 없이 혈기만 믿고 함부로 부리는 소인의 용기를 믿었다. 스스로 천하무적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에는 신통한 힘을 가진 사람이 많은 것을 몰랐는데, 이것은 진실로 우물 안의 개구리일 뿐이구나!”라면서 탄식하였다. 후에 그는 사람을 대할 때마다 이 일을 말하고, 감히 스스로 용력(勇力)이 많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밖에 하늘이 있다는 사실은 지금에도 유용한 이야기가 아닐까.

악독한 승려를 베다-비장 이 아무개

 

앞서 이병식의 이야기와 관련해서 청구야담에 '검술 이 비장이 싸워 승려를 베다'라는 야담을 참고할 수 있다. 이 아무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주러 왔던 명 이여송의 동생 이여매의 후손이다. 비장 이 아무개라는 사람의 이야기로 못된 중을 죽였다가 그의 스승과 대결하는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이여매의 후손 중에 이 비장(裨將)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비장은 조선시대에 감사나 절도사 등의 지방장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幕僚)․막비(幕裨)․막객(幕客)․막중(幕中)을 가리킨다. 조선 후기에는 의주․동래․강계․제주의 수령 및 방어사를 겸한 수령들이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 하였는데, 감사나 수령이 부임할 때, 궐패(闕牌) 앞에서 임금의 명령을 알리는 의식이나 민정에 대한 염탐을 비장을 시켜서 하기도 하였다.

비장 이 아무개는 힘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검술에 능통했다. 일찍이 전라감사의 막중으로 갈 때 금강(錦江)에 다다라 우연히 한 부녀자의 행차와 함께 배에 들었다. 배가 중류에 갈 때쯤 크고 성질이 모지락스럽고 악독한 한 승려가 강변에 이르러 사공을 높이 불러 “배를 빨리 대라”고 하였다.

이에 사공이 배를 돌리려고 하자 이 비장이 사공을 꾸짖어 물리쳤다. 그러자 그 중이 공중에 몸을 솟구치며 배에 뛰어들어 와서는 부인의 가마인 교자를 보고 발을 들쳐 보고 말하기를, “모양과 태도가 극히 아름답다”하고 희롱의 말을 방자하게 하였다. 이 비장이 한 주먹으로 타살코자 하였으나, 그 중의 용력이 어떠함을 알지 못하여 참고 있기는 하였으나, 분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더니, 배에서 내려 육지에 올라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비록 아무리 모지락스럽고 악독한 놈이나 승려의 풍속이 판이하고 남녀가 유별하거늘 네가 어찌 감히 양반의 내행을 무수하게 희롱하고 방자하게 침욕하니 네 죄는 마땅히 죽으리라”하고 가졌던 쇠도리깨로 힘을 다하여 쳐죽여 주검을 강 중에 던지고 감영에 이르러 순찰사를 보고 금강에서 지낸 일을 자세히 고하고 절도사가 있는 막부에서 머물러 있었다.


김홍도 평양 감사의 격검 장면


머물러 있은 지 수개월이 지난 후에 관아의 대문인 포정문(布政門)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매우 요란하자 감사가 그 까닭을 물은 즉 문을 지키는 사령이 들어와 아뢰기를, “어디서부터 온 완고한 승려가 사또를 뵙겠다고 합니다만, 기색이 거칠고 퉁명하고 말이 온화하지 않고 거칠기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자 시끄럽게 떠듭니다”며 말을 마치지 못하였는데, 그 중이 미쳐 깨닫기도 전에 들어와 바로 청 위에 올라 감사를 뵈었다. 감사가 묻기를 “네 어느 곳의 중이며 무슨 일로 왔느냐” 그 중이 거만스럽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소승은 강진(康津) 땅에 있습니다. 이 비장이 막중에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감사가 말하기를, “이 비장이 마침 서울로 올라갔느니라” 그 중이 말하기를, “언제 돌아옵니까” 감사가 말하기를, “한달 말미를 받고 올라갔으니 다음 달 10일 사이에 내려올 것이다.” 그 중이 말하기를, “그러하면 소승이 그 때 다시 올 것이니 이 비장 제가 비록 하늘로 오르고 땅으로 들어간다 해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삼가 피하지 말라 하십시오”하고 하직하고 갔다.

감사가 이 비장을 불러 중이 하던 말을 알리고 또 말하기를, “그대 능히 그 중을 대적할 수 있느냐” 이 비장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소인이 집이 가난하여 고기를 항상 먹지 못하여서 기력이 없습니다. 만일 날마다 큰 소 한 필씩 먹기를 한 달을 하면 어찌 저 중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감사가 말하기를, “이는 불과 천금을 허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무엇이 어렵겠느냐”하고 즉시 고기를 공급하는 사람에게 분부하여 “한 달을 한하여 매일 큰 소 하나씩 바치거라”하였다. 이 비장이 또 청하기를, “누른 비단 동달이와 붉은 비단 전복을 지어 주십시오”하니, 감사가 또 허락하였다.


이 비장이 장인으로 하여금 장검을 만들게 하되 일백 번 불에 달궈내니 그 칼날이 심히 날카로워 돌을 베이고 쇠를 끊었다. 열흘에 소 열 마리를 먹자 몸이 매우 살이 찌고 스무 날에 소 스물을 먹으니 도리어 몸이 수척해지고 그믐에 소 서른을 먹으니 몸이 살찌지도 않고 수척하지 않아 평상인과 같아졌다. 날램을 쌓고 길러 중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 중이 과연 기약한 것과 같이 와서 감사를 보고 말하기를, “이 비장이 왔습니까” 감사가 말하기를 “어제 돌아왔느니라.” 이 비장이 마침 곁에 있다가 내달아서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내 이제 여기 있으니, 네 어찌 당돌함을 이렇듯이 할 수 있느냐”그 중이 말하기를, “길게 수작할 것이 아니라, 오늘 내 너와 더불어 생사를 결정하려 한다”하고 드디어 뜰에 내려 바랑 가운데에 둘둘 말아 둔 칼을 꺼내어 펴니 길이가 3척이고, 빛이 서릿발 같았다.

이 비장 또한 뜰에 내려 몸에 누른 동다리에 붉은 전복을 입고 손에 어른 크기의 백년검(百年劍)을 쥐고 발에 송곳을 박은 한 켤레의 장화를 신고 검술로 서로 대적하니 서로 나오락무르락하다가 검광이 번쩍번쩍하는 곳에 한 쌍의 은으로 만든 독처럼 두 사람이 공중에 올라 구름 속에 들어가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뜰에는 구경하는 자가 다 그 신묘함을 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날이 기운 후에 붉은 피가 방울방울 땅에 떨어지더니, 이윽고 그 중의 몸이 선화당(宣化堂) 아래 떨어지고 머리는 포정문 밖에 떨어졌다. 여러 사람이 이 비장의 무사함을 알았지만 날이 저물도록 기척이 없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황혼이 물들 때에 비로소 칼을 집고 공중에서 내려와 감사하게 여러 차례 사례하며 말하기를, “소인이 어르신의 은덕을 입어서 소 30필을 먹고 기운이 충실하고 누르고 붉은 복색으로 그 중의 눈을 현혹시켜서 그 놈을 베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던들 소인의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라며 감사가 말하기를, “중의 머리는 떨어진지가 오래인데 그대가 내려온 것은 어찌 그리 더뎠느냐” 이 비장이 말하기를, “이미 검기를 탔는지라, 고국 생각이 간절하여 그 사이 농서에 가서 선조의 분묘를 찾아 뵙고 한 차례 통곡하고 왔습니다”하였다. 이 비장의 신이하고 용맹한 검술은 예나 지금에 드물었다.

이 비장의 이야기는 신이해서 그대로 믿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다만, 이 비장이라는 인물이 어떤 중과 다투다가 그 중을 죽였고, 그 중의 스승되는 승려가 원한을 갚으려 했다고 하는 이야기 자체는 있을 법한 일이라는 점에서 전체가 만들어진 소설이라기보다는 이 비장과 승려의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윤색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늘이 낸 파락호-양천봉

양천봉(梁天奉)은 조선 후기 사람인 담정(潭庭) 김려(金鑢, 1766~1821)의 시집 '사유악부(思惟樂府)'에 등장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아마도 '사유악부'는 김려가 1801년 12월 보름날에 쓴 시이다. 김려는 열 다섯 살에 성균관에 들어가 강이천(姜彛天, 1768~1801), 김조순(金祖淳, 1765년~1832), 이옥(李鈺, 1760~1812) 등과 어울렸는데, 이들과 함께 정통 고문에서 벗어나 시정의 세태를 백성들의 상말을 써서 표현하는 ‘패사소품’ 문체를 익혔다. 32살이 되던 1797년에 강이천의 유언비어 사건에 휘말려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갔다가, 1801년 신유사옥으로 인해 다시 진해로 유배되었다. 진해에 있는 동안 부령시절의 유배생활을 그리워하며 쓴 글이다. 이 시집에는 부령에 사는 다양한 인물들을 소재로 하여 시를 썼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양천봉이다.

김려는 시 꼬리말에 양천봉에 대해 평가하는 주를 달아놨는데, “기위(騎衛)의 이름은 천봉으로, 파락호(破落戶)이다. 청나라 상인 백여 명을 허고원(虛古院) 길 위에서 때려눕혔다. 허고원은 부령(富寧) 북쪽에 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파락호는 재산이나 세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이르는 말로, 팔난봉이라고도 하는데, 자신의 권력이나 재물만을 믿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등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한당들이다. 따라서 양천봉은 도덕적으로 그다지 존경받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려의 시를 보자.

그대 무엇을 생각하나,
저 북쪽 바닷가라네.
하늘이 낸 건달 양 기위
소년 시절에 그 집안이 굉장히 부자였네.
저포((樗蒲)놀이 한 판에 삼백 꿰미 돈 던지고
팔찌에는 날쌘 매가, 마구간에는 준마가 있었지.
명천(明川) 고을 기생의 서방 노릇도 했는데
이팔청춘에다 이마가 매미 같은 여인이었지
지금은 다 털어먹고 말 거간꾼 되었는데
주먹질 발길질 그 솜씨가 대단해라
허고원 길가에서 사람들 때려눕힌 뒤에
북쪽으로 석 달이나 발길 끊었지.

시를 보면, 양천봉은 어렸을 적엔 집안이 상당히 부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놀음을 좋아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 김려는 양천봉이 저포놀이 즉, 윷놀이 한 판에 삼 백 꿰미의 돈을 날린 적도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 꿰미는 엽전 100전 즉 한 냥을 말한다. 한 번에 300냥의 돈을 도박비용으로 사용할 정도였던 것이다. 또한 그와 관련해 매와 말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년 시절에 매사냥을 하고 말을 키울 정도로 부유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양천봉)
하지만 재산의 많고 적음이 사람의 품성이 고매하다거나 우매하다거나 하는 것과는 상관없듯이, 그도 재산은 많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인품은 지니고 있지 못했던 듯 하다. 오죽했으면 김려가 그저 파락호라 하지 않고 양천봉을 하늘이 낸 파락호라고 언급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한다면, 집안에서 내 놓은 망나니에 가깝지 않았을까.


그는 많은 돈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팔청춘 즉, 16살의 나이에 이마가 매미 같이 고운 명천 고을 기생의 기둥서방 노릇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몰락한 뒤의 일일 것이다. 명천은 함경도에 위치한 지역으로 북어를 말하는 명태(明太)라는 이름은 명천에 사는 태(太)서방이 처음 발견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기도 하다. 도박과 여자를 가까이 하는 방탕한 생활은 양천봉의 많던 재산을 모두 소진하게 만들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돌 봐주는 부모가 죽고 형제들이 멀리하면서 결국 말 거간꾼이 되어 밥벌이를 하며 살아갈 정도로 몰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싸움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청나라 상인 백여 명을 부령 북쪽의 허고원 길 위에서 때려눕힌 일도 그런 파락호 노릇의 하나였을 것이다. 후환이 두려워서 북쪽 어느 곳으로 3개월 정도 몸을 피하기는 했지만, 청의 상인 100여 명을 때려눕힐 정도로 무예에는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상인들이란 많은 돈이 걸려있는 직업이므로 도적이나 산적들로부터 보호를 위해 경호원들을 데리고 다녔을 것이고, 그들 스스로도 어느 정도 호신을 할 수 있는 능력들을 소유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을 때려 눕혔다고 하니, 그의 솜씨는 대단했던 듯하다. 양천봉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는 김려도 주먹질 발길질 솜씨가 대단하다고 서술하고 있으니 말이다.

당시 양천봉은 하급무관직인 기위의 직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별기위 소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별기위는 조선 후기 함경도에 설치했던 기병부대(騎兵部隊)로 숙종 10년(1684)에 국경 지대인 함경도의 변방을 지키기 위해 활쏘기와 말타기의 재주가 뛰어나고 및 용력(勇力)이 있는 자 600인을 선발해 친기위라 한 것이 그 시초이다.

'연려실기술 별집' 병제에는 숙종 10년에 임금이 명을 내려 함경남북 양도에서 힘이 뛰어나고 활쏘기와 말타기의 재주가 있는 자를 가려 뽑아서 친기위(親騎衛)를 설치하였는데, 각각 3백 60명을 두어 위급할 때에 쓰게 하였다. 그 후에 군사를 더 뽑아서 감영과 병영에 나누어 소속시켰는데 모두 3천 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친기위병은 매년 음력 2월과 5월․8월․11월인 4중월(四仲月)에 날짜를 정해 각기 소속 영문에서 그 재주와 무예를 시험하였는데, 과목은 유엽전(柳葉箭)․편전(片箭)․기추(騎芻)․편추(鞭芻)의 4기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양천봉은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사유악부'가 저술된 시기는 1790년에 '무예도보통지'가 편찬이 된 이후이며, 양천봉이 하급이지만 나라의 녹을 먹는 무관직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예 그 중에서도 특히 권법에도 능한 무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세상에 쓰이지 못한 기재-진종환

진종환(秦鐘煥, 1803~1854)은 조선 철종 때인 1862년에 유재건(劉在建,1793~1880)이 지은 인물행적기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다. 이향견문록은 중인층 이하의 평범한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무예도보통지 기창(진종환)
조선시대잡과합격자총람(朝鮮時代雜科合格者總覽)을 참고하면, 진종환의 본관은 풍기(豊基)이고 자는 중경(重磬)․호는 교릉(嶠陵)이었으며, 증조할아버지는 진재백(秦載白), 할아버지는 진동(秦洞), 아버지는 규장각 각감을 지낸 수일재(守一齋) 진동석(秦東奭)이었다.

그는 20세 때인 순조 22년(1822)에 3년마다 한번 씩 열리는 식년시(式年試)에 역과 7등으로 합격하여, 관직이 첨추(僉樞)에 이르렀다. 진종환은 성품이 담박하여 마치 무능한 것 같이 보였고, 행동거지가 소탈하여 부귀한 집안의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서예에도 재주가 있었다. 그가 종요(鍾繇, 151~230)와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서첩을 베껴 그리면 실물과 진배가 없었고, 특히 김생의 글씨를 더욱 좋아하여 그 글씨를 본보기로 삼았는데, 그의 글씨체는 힘이 있고 원숙하고 고아한 것이 마치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위 같았다. 그의 시를 읽어보면, 빼어나고 깊은 물 속 같으면서도 빛난다고 할 정도로 소릉(少陵) 즉,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진수를 깊이 터득한 듯하다. 악부체 여러 작품도 모두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와 조나라의 비분강개한 기상이 녹아 있었다.

한번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접반사가 용만(龍灣), 지금의 의주에 머무를 때, 당시 상서 우당(羽堂) 조병현(趙秉鉉, 1791~1849)이 여우와 담비의 아름다움에 대해 언급하자, 그가 그 모양과 성질을 낱낱이 들어 이야기하고, 뭇 짐승에 대해서도 남김없이 품평하는 것이었다. 이어 한의학에서 사용되는 약재인 본초에 대해서도 이름을 들며 물어보니 줄줄 외워 대답하는 데 착오가 없었다. 상서 조병현이 깜짝 놀라 돌아와 사람들에게 그를 천재라고 하였다. 그는 평소 바둑을 좋아하여 거의 적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여러 판을 내리 이긴 적은 없었으며, 국수와 대국하면 꼭 한 점을 져주었다.

언젠가 어떤 권세가가 그를 만나보고자 했더니 그는 달가워하지 않으며, “다섯 말의 쌀로 허리를 숙이는 것을 옛사람은 수치로 여겼는데, 하물며 평원군(平原君)의 문객조차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라고 말을 하였다. 평원군은 전국시대 사람으로 본명은 조승(趙勝)이고 조(趙)나라의 재상을 여러 번 한 인물이다. 그는 재상으로 있으면서 어진 성품에 빈객(賓客)을 좋아해서 수하에 수천 명의 식객(食客)들을 거느리고 있기도 했었는데, 진종환은 그런 평원군의 문객조차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그보다 인품이 못한 권세가와 만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권세가와 가까운 사람들이 진종환을 욕하고 헐뜯는 소리를 마구 쏟아냈지만, 끝내 권세가와 대면하지는 않았다. 진종환은 “나의 할아버지 때부터 나라의 은혜를 산과 바다처럼 입었으나 어리석은 못난 내 주제로는 티끌이나 이슬만큼도 보답할 수가 없다. 단지 내 분수껏 먹고 마시며 세상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게 사는 것이 아마도 자연스럽게 보답하는 길이 되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보석사 감로탱화에 보이는 갈래창(진종환)
유재건이 그에게 “그대의 재주를 장차 어디에 쓰면 좋겠는가?”라고 묻자, 그는 “만약 언제 내가 군대에 있게 된다면, 군사들을 용맹스러우면서도 방략을 아는 자들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자 비장한 목소리로 웃으며 노래부르니, 맑고 매끄러운 곡조가 속세의 노래에 견줄 바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1854년 그의 나이 52세에 죽었다. 죽을 때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 초조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내가 이별의 말을 하며 흐느껴 울자, 그는 “당신의 명도 역시 다하였으니 불원간 나를 따라올 것이네”라고 하고, 손을 저어 물러가게 하였는데, 그의 말대로 그해 겨울에 아내 또한 죽었다.

그가 세상을 뜨자 정씨에게 시집간 그의 작은누이가 언문(한글)으로 그의 평생 행적을 적고 친척을 시켜 장중규(張仲圭)에게 “돌아가신 오라버님께서 좋아하신 분으로는 선생만한 분이 없습니다. 길이 전해질 글을 한 편 지어주소서”라고 부탁을 하자, 장중규가 만사를 지어주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진종환은 다양한 능력을 지녔던 인물이었는데, 병사들을 가리키면 용맹하면서도 병법을 아는 자로 만들겠다고 호언할 정도로 무예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완력은 너무 뛰어나 20근짜리 철장을 구부릴 수 있었고, 몇 장 높이를 뛰어넘을 수 있었으며, 근육이 단단하여 손으로 눌러보면 흡사 철판을 더듬는 것 같았다. 강한 쇠뇌를 당겨 쏘면 다섯 발 중 4발을 맞힐 정도였다. 담력도 있어서 한번은 맨손으로 숲 속의 호랑이를 쫓아 들어가기도 했다. 그는 창을 쓰고 봉을 휘두른 데 모두 묘한 이치를 터득했다. 언젠가 달밤에 유재건이 다른 사람들을 물러가게 하고 그를 따라 산골짜기로 들어가 무예를 한번 보여달라고 했다. 그가 작대기를 들고 사나운 기세로 18반 무예를 대략 보여주었는데, 어찌나 가볍고 민첩한지 꼭 날아다니는 듯하여 산새들이 모두 놀라 지저귈 정도였다.

진종환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어 그에 대해 알 수 없는데, 무예도보통지에 기록된 무예 특히, 창술이나 봉술에 뛰어난 인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그 재능을 꽃피워보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돌을 맨손으로 깨다-양익명(梁益命)

 

맨손무예에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양익명(梁益命)은 조선 숙종(肅宗) 6년(1680)에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박천군수(博川郡守)와 중화부사(中和府使) 등을 지냈다. 선전관(宣傳官)으로 있던 숙종 8년(1682)에는 군관(軍官)으로 일본에 가는 통신사 일행을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집안이나, 출신에 대해서 알려주는 자료는 찾을 수 없다. 다만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을 통해서 그의 내력만을 조금 알 수 있을 뿐이다.


무예도보통지 권법 2인
박천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우의정 민암(閔黯, 1636~1694)이 숙종 17년(1691) 3월에 그의 용력(勇力)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남을 숙종에게 고한 적이 있었다. 민암은 그가 돌덩이를 주먹으로 격파하고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막을 수 있으며, 또한 말타기에도 능해 나라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라고 보고하였다. 민암은 당시 무사들이 강궁을 잡아당기지도 못한다고 하면서 그의 재주를 권장해 병조(兵曹)에서 수용토록 하자고 숙종에게 건의하였다. 숙종도 이에 좋다고 답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숙종 18년(1692) 8월 9일(병술)에는 숙종이 친히 그를 불러서 무예를 관람하기도 하였다.

‘임금이 어제처럼 친히 임하여 무예 재주를 관람하고, 무릇 4일 만에 파했다. 우의정 민암이 일찍이 박천군수 양익명의 용력이 남들보다 뛰어남을 임금께 아뢰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앞으로 오도록 불러서 그의 무예를 시험했는데, 양익명이 주먹으로 돌을 치자 손이 닿는 순간 돌이 곧바로 부서졌다. 임금이 “또 능한 것이 있느냐?”라고 물으니, (양익명이) 대답하기를, “신이 서 있고 앞에서 이리저리 돌을 던지게 하더라도 막아내어 맞힐 수 없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선전관 네 사람에게 돌을 가져다가 던지도록 하니, 양익명이 손으로 받아내고 발로 차고 하여 하나도 (자기 몸에) 맞는 것이 없게 하였다. 임금이 기뻐하며 드디어 하교(下敎)하기를, “양익명이 지금 무슨 관원이냐?”라고 하자, 좌우에서 대답하기를, “전에 군수(郡守)였는데, 고적(考績)에 하등(下等)이었습니다.”라고 하니, 하등의 고적을 없애 주고, 상당한 관직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1617~1714)은 “무예(武藝)를 친히 검열하시는 것은 국가의 대사로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양익명의 재주 같은 것은 다만 맞닥뜨려 겨루는 놀이일 뿐입니다. 가까운 자리에서 시험할 것은 되지 못하니, 원컨대, 상례로 삼지는 마십시오.”라고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춘당대에 나가 양익명을 불러 그의 솜씨를 본 숙종은 그의 무예솜씨에 만족한 탓인지 하등이었던 그의 근무성적을 없애 주고, 품계에 맞는 관직을 제수하도록 하였다. 원래 조선시대 지방 관리의 근무평가는 ‘수령칠사’라고 하는 7가지 기준을 가지고 이루어졌다. 농업과 누에치는 것을 잘 할 것, 인구를 늘릴 것, 학교를 일으킬 것, 군대에 관한 사무를 잘할 것, 부역(賦役)을 고르게 할 것, 소송을 잘 처리할 것 그리고 간사하고 교활한 것 등을 없애애는 것들이 그것이다. 지방관의 성적평가는 관찰사가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에 했는데, 이 때 성적은 상상(上上)․상중(上中)․상하(上下), 중상․중중․중하, 하상․하중․하하 등 9등급으로 나누었다. 양익명은 하등이었다고 하므로 하상․하중․하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관리가 하등의 성적을 받으면, 곧바로 파직을 당해야 했으며, 하를 받아 파직된 자는 2년이 지나야 임용되었다. 즉 원칙대로라면 양익명에게 벼슬을 제수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당시 양익명에 대한 숙종의 관대함은 승정원일기 숙종 18년(1692) 9월 16일 기록에도 나타난다. 병조판서 민종도(閔宗道)가 춘당대 시재 때에 양익명에게 품계에 맞는 관직을 제수한다는 명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가 박천군수로 있다가 물러날 때, ‘해유(解由)’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자, 숙종이 이미 명령이 있었고 관직을 제수하였으니 구애받지 말라고 하기도 하였다. ‘해유’는 조선시대 관리가 물러날 때 제출해야 하는 인수인계서로 ‘해’는 임기가 만료되어 그 직책에서 해제된다는 뜻이고, ‘유’는 임기중의 업무에 대한 평가를 거쳤다는 뜻이다. 즉 ‘해유’는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인수인계하면서 재임했던 동안 출납․보관하던 물품 등의 회계가 정확함을 인정받고 책임을 면제받는 것이었다. 따라서 해유를 마치지 못한 관리는 전보될 수 없고, 혹시 특명으로 전보되어도 녹봉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해유받지 못하여 해임된 자는 관료로 천거받지 못하게 했다. 그런 양익명임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벼슬을 제수했다는 것은 그의 무예솜씨를 매우 높이 산 까닭이라 짐작된다.



무예도보통지 권법

승정원일기를 보면, 이 때 양익명은 종4품의 도총부(都摠府) 경력(經歷)에 임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군관(軍官), 부호군(副護軍), 부사(府使), 영종첨사(永宗僉使), 백령첨사(白翎僉使), 창성부사(昌城府使) 등을 거쳐, 숙종 37년(1711)에는 중화부사(中和府使)에 이르렀다. 하지만, 숙종 38년(1712) 10월 28일(무인) 기록을 보면, 양익명은 전삼세(田三稅)를 은(銀)으로 바꾸어 지부(地部)에 상납할 적에 장사치들과 결탁하여 물건을 판매한 이익을 모두 자기를 살찌우는 데 사용했고, 촌가(村家)에 출입하면서 뇌물을 억지로 받은 것이 발각돼, 사간원의 탄핵을 받게 된다. 같은 날짜의 승정원일기 기록을 보면, 양익명에 대해 “본래 무식한 사람으로 눈이 있으나 글을 알지 못했으나 크고 작은 공적인 일을 군관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의 손에 맡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무예만 알고 다른 일에는 무딘 전형적인 무인이었던 것 같다.

숙종은 그를 즉시 파직시키지 않고, 좀 더 자세히 알아보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고 같은 해 10월 29일과 11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그의 파직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 대한 숙종의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성격을 알고 뛰어난 무예 솜씨를 아낀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러한 숙종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11월 5일 숙종실록을 보면, 중화부사의 이름에 조유춘(趙囿春)이라는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 결국에는 경질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1일에 그는 부호군(副護軍), 숙종 41년(1715)에는 소강첨사(所江僉使)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양익명의 무예와 관련해서는 승정원일기 영조 24년(1748) 11월 24일에도 기록이 있다.
임금이 말하기를 “윤창주(尹昌周)는 장사로서 유명했는데, 선조께서 명하여 양익명과 힘을 겨루도록 하였다. 양인이 힘을 겨루다가 바지가 찢어지기에 이르렀다. 그런 까닭에 뒤에 선조(숙종)께서는 (웃사람이) 보기 좋지 않다고 하여 다시는 각력(角力)을 시키지 않았다.”라고 하니, (좌변포도대장) (조)동점(趙東漸)이 말하기를, “(윤)창주는 훈련원에서 벽의 가장자리에 발을 붙였는데(着足), 대들보 위의 제명(題名)이 있는 가장 높은 곳입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인간으로서 가지기 어려운 신선과 같은 날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숙종이 양익명과 장사로 유명한 윤창주를 대결시킨 일화를 담고 있다. 윤창주는 을사사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윤임(尹任, 1487~1545)의 증손이다. 승정원일기의 기록만으로 살펴보면, 윤창주는 훈련원 대들보 위의 판액이 있는 위치까지 발자국을 남길 정도의 인물이었다고 하니, 그는 몸이 날래고 발차기에 능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무예에서 발질이 이어져 왔음을 말해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바지가 찢어지는 바람에 이후에는 각력 시합이 금지가 되었지만, 손에 능한 양익명과 발에 능한 윤창주의 대결은 매우 흥미로운 대결이었을 것이다.

양익명은 전체적으로 맨손무예에 능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어떤 무술을 수련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국가의 녹을 먹는 관리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권법에 능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한창인 때에 명 군사들로부터 기효신서 등에 실린 무예를 배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익명은 그러한 무예에 정통했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물론, 그가 별도의 무예를 수련했을 가능성도 완전 배제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한 확인은 추후 자료 발굴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참고로 손으로 돌을 깨는 기법은 지금도 무예를 하는 이들이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가끔 시연하곤 하는데, 이러한 모습은 고려시대에도 찾아진다. 고려 원종(元宗) 12년(1271)에 낭장(郞將) 김희목(金希牧)은 손으로 돌을 깰 수 있다는 이유로 원의 황제가 그를 불러 보고자 하므로 고려에서 보내주었다는 이야기가 고려사에 기재되어 있다.

보령소년 이야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담헌서(湛軒書) 내집(內集) 4권 보유(補遺)편에는 유(柳) 아무개가 보령(保寧)에서 만난 기이한 소년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이야기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유 아무개란 사람은 천성이 순박하고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가 일찍이 어떤 일 때문에 충남 보령 땅에 가다가 날이 저물어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길을 찾아 얼마 동안 수십 리쯤 들어가게 되었는데, 푸른 절벽이 깎아지른 듯하고 골짜기는 깊숙하였으며, 산길은 풀이 우거져서 갈 곳을 모르게 되었다. 할 수 없이 말에 내려서 방황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언덕 위에서 사람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덩굴을 잡고 올라갔다. 올라가자 두어 칸의 초가집이 있는데 소나무와 대가 우거져 있고, 그 중간에 한 소년이 누런 빛깔의 가는 대를 결어 만든 초립(草笠)에다 바지와 저고리 위에 입는 푸른색의 포(袍)차림으로 서 있는데 얼굴모습이 준수하였다.

그는 문에 기대어 서서 무언가 생각하듯 허공을 응시하다가 손님이 오는 것을 보고 바삐 마루에 내려와 영접하는데 범절이 매우 공손하였다. 유 아무개는 마음으로 이상하게 여겨 말을 거니 그 말솜씨가 유창할 뿐 아니라, 풍채와 태도도 보통보다 뛰어났다. 조금 후에 저녁 식사를 내왔는데 물과 뭍의 맛있는 음식이 가득하였다. 유 아무개는 “산중에서 이런 맛있는 음식을 어떻게 얻었습니까?”라고 물었는데, 소년은 웃기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유 아무개는 그런 모습에 더욱 놀래면서도 이상하다고 여겼다.


보령소년 이야기가 수록된 저서
밤이 깊어졌는데,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차츰 가깝게 들렸다. 소년은 “손님은 조금 기다려 주시오. 내가 어떤 사람과 약속이 있으니, 잠깐 만나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소매를 떨치고 나는 듯이 가버렸다. 유 아무개가 창틈으로 엿보았다. 소년을 부르던 사람 또한 소년이었다. 두 사람은 옷과 갓이 같아서 구별이 어려웠다. 서로 손을 끌고 가는데 높은 언덕과 험한 벌판을 평지처럼 달려가는 것이었다.

유 아무개는 어떻게 놀랬는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갑자기 벽장문을 보니 자물쇠가 잠겨져 있지 않았다. 벽장문을 열어 보니 뒤 시렁에 묵은 서책들이 있는데 모두 병법(兵法)에 대한 것이었다. 또 기러기 털이 두어 상자 있었고 벽 위에는 흑장의(黑長衣)가 걸려있을 뿐, 다른 것은 없었다. 유 아무개는 소년을 더욱 의심하고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얼마 후에 소년이 돌아왔다. 그런데 소년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내가 처음에 그대를 좋은 사람으로 여겼는데, 어찌해서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남의 서책을 훔쳐보았습니까? 그대가 나를 속일 셈입니까?”라고 말을 하였다. 유 아무개는 속일 수 없음을 알고 곧 사과하였다. 그 다음에 “그대는 반드시 세상을 피하는 이인(異人)인 것 같소. 병서는 그대가 읽는다 할지라도 검은 옷과 기러기 털은 장차 무엇에 쓰려는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소년은 “나는 이미 그대가 말이 헤픈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조금 시범을 보일 터이니 구경하십시오”라고 대답을 하였다. 소년은 기러기 털을 꺼내서 방안에 흐트러뜨린 다음, 검은 옷을 입고 몇 바퀴를 질주하며 돌았다. 하지만 기러기털은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년은 달리기를 이렇게 익히는 듯하였다.

유 아무개는 크게 기이하게 여기고 이어서 그가 다른 소년과 함께 갔던 것에 대해 물어 보았다. 소년은 “아까 왔던 소년의 원수가 경상도 고성(固城) 지방에 있는데 그 사람됨이 사나울 뿐더러 또 있는 곳을 몰랐다가 오늘밤에야 마침 집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까닭에 함께 가서 죽였다”고 말을 하였다. 유 아무개는 속으로 ‘보령에서 고성까지는 거의 1,000리가 되는데 잠깐 동안에 갔다 오다니 나는 새도 그만큼 빠를 수 없다’고 생각하고 탄복을 하였다.

유 아무개는 소년과 더불어 다음날 아침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작별을 했는데, 소년은 “그대가 만약 나에 관한 말을 세상에 퍼뜨린다면 나는 반드시 그대의 일족을 다 없애버릴 것이니, 그대는 말을 조심하시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유 아무개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하고 길가에 풀을 맺어 그곳을 찾아갈 수 있도록 표시를 해두었다. 그 후 한 달쯤 뒤에 다시 찾아갔으나 끝내 소년이 있던 곳을 찾지 못했다.

유 아무개는 소년에 관한 일을 말하는 것에 두려움을 갖고 평생토록 감히 말을 하지 못하다가 죽음에 임해서야 그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죽는데, 이인에 관한 일이 세상에 끝내 전해지지 않는다면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유 아무개가 죽고 그 이야기가 세상에 전해졌는데, 이 이야기를 듣는 이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이 글에 보이는 보령에 숨어사는 소년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홍대용도 담헌서에서 보령에 숨어사는 소년은 깊은 산 속에 숨어사는 이인으로 때를 만나지 못한 인물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홍대용의 서술태도로 보아서, 그가 꾸며낸 이야기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마 홍대용도 주위에 흘러 다니는 이야기를 채록해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보령 소년이 기러기털을 이용한 달리기 연습이 실제 무인들의 수련 방법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옛 무인들의 수련 방법을 살필 수 있는 조그만 실마리일 지도 모르겠다.

 

숨어사는 이인- 오대산의 검협

보령 산중에 숨어사는 소년의 이야기와 동일한 기록이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글에도 보인다. 김조순의 글에 나타나는 인물은 충청도 보령이 아니라 강원도의 오대산에 거주하던 검객에 관한 기록이다.

오대산의 검협이 어떠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영조(英祖) 때 서울에 서생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성벽이 풍수의 방술을 심히 좋아하여 기회만 있으면 명당을 찾으러 다녔다. 일찍이 그는 강원도 속초에 있는 오대산에 올라가서 놀다가 가장 높은 봉우리의 정상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멀리 바라보니, 좌청룡의 지맥이 거듭 중첩된 것을 바라보고 마음으로 뻗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산줄기가 뻗어 내려가다가 우백호와 만나는 기이한 장소를 찾고자 함이 틀림없었다.

그는 그 장소를 찾기 위해 한달음에 고개를 넘고 내를 건너 몇 십리를 달렸다. 이윽고 한 숲 속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날이 저물고 사방은 어두워져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야 사람 사는 집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첩첩산중이었다.

그는 차츰 마음이 두려워졌다. 자칫하다가는 짐승의 밥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는 정신없이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길을 찾았으나, 날이 깜깜하여 동서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서생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문득 나뭇잎 사이에 반짝이는 불빛을 발견했다. 나뭇잎에 가리웠다가 다시 보이곤 하는 그 불빛은 마치 하늘에 반짝이는 별빛 같았다.

서생이 기는 듯한 걸음으로 불빛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 보니 숲이 끝나는 곳에 집이 한 채 있었다. 서생이 다가가서 문을 두드렸다. 한 젊은이가 나오더니 서생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여기는 숲 속에 호랑이와 표범이 득실거리는 곳인데 손님은 뉘시오?”


고분벽화 등

서생은 자신이 여기까지 온 경위를 설명했다. 그러자, 젊은이가 반가운 낯빛을 보이면서 말했다. “이 산중에는 사나운 짐승이 많은데다가 집이라곤 저희 한 집뿐이었지요. 손님이 다행히도 이곳을 찾아 오셨습니다.” 젊은이는 곧 서생을 맞아 방안에 안내했다. 그리고는 집안 사람에게 말하여 밥을 짓게 했고, 손님의 허기진 배를 채우게 했다. 서생이 젊은이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니 나이는 서른 남짓하고 용모가 수려하며 기개는 온화했으나 시골의 수재다운 면모는 없었다.

방안을 둘러보니 서가에는 책이 가득하고 네 벽에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서생이 젊은이의 성씨를 묻자, 그는 “천천히 말씀드리지요”하고는 즉답을 피했다. 조금 후 식사가 끝나고 젊은이는 서생과 더불어 이야기를 하면서, 서생이 본 산천의 형세나 나라 안의 산천, 풍수에 대하여 물어봄이 심히 공손하였다. 2시경이 가까웠을 때 서생에게 말하였다.

“손님께서는 피곤하실 테니 일찍 주무시지요. 저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다음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겠습니다.”

젊은이는 손님을 잠자리에 들게 한 다음 자신은 돌아앉아서 등불을 매달고 글을 읽기 시작했다. 낭랑한 목소리가 들을 만했다. 서생은 피곤한 김에 금새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문득 눈을 떠 누워서 젊은이의 등을 바라보니, 그때까지도 젊은이는 여전히 꼿꼿이 앉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문득,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마치 바람에 낙엽이 날려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안에서 주인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왔느냐?”
그러자 문밖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여왔다.
“내가 왔네.”
그러자 문을 열고 사나이가 들었다가 주춤하고 말했다.
“누운 사람이 누군가?”
“괜찮네 산을 헤매다가 길을 잃은 사람이네.”
젊은이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서생을 가만히 흔들면서 연방 말하는 것이었다.
“주무십니까? 주무십니까?”
서생이 잠시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짐짓 잠에 취한 듯 돌아누우며 코를 고니 젊은이가 말했다.
“잠이 깊이 든 모양이군.”

그제서야 문밖에서 망설이던 사람이 곧 안에 들어섰다. 서생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엿보았다. 그 젊은이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몸집이 우람한 사내였다. 그는 등불 밑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옆에 서서 주인 젊은이에게 말했다.

“이제 가야지”
그러자 주인 젊은이는 몸을 일으켜 내실로 들어가더니 작은 장롱을 열고 그 안에서 비수 두 자루와 보자기 하나를 꺼냈다. 두 사람이 입은 옷을 벗고 보자기를 끌러 그 속에 든 다른 옷을 꺼내어 입었다. 하나는 청색이요. 또 하나는 황색이었다. 서생이 이 거동을 보고 크게 놀라 몸이 더욱 오싹해져 죽은 사람처럼 몸이 굳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행장을 갖춘 뒤 문을 나서더니, 바람과 같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서생은 그제야 슬그머니 자리 속에서 일어났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서가의 책을 빼내어 펴보았다. 모두 검술에 관한 책이었다. 이 젊은이들이 검객인 줄을 알았다.

서생이 다시 몸을 자리에 누이고 잠을 청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오랫동안 몸을 뒤척였다. 이윽고 닭이 울 무렵 밖에서 다시 나뭇잎이 지는 소리가 나더니, 두 젊은이가 어느 새 방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서생이 또 몰래 실눈을 뜨고 엿보았다. 두 사람이 비수를 방바닥에 던지고는 다시 옷을 갈아입고는 서로 손을 맞잡고 웃었다. 대단히 기쁜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처연하게 마주보면서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손님으로 온 젊은이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난 그만 가보겠네”
그리고는 일어나 바람처럼 나가 버리자, 주인인 젊은이는 그제야 행장을 꾸려 본디 있던 자리에다 간직하고 나서는 서생을 불러 말했다.
“손님 일어나시오. 일어나 괴이쩍게 여길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소이다. 그만 잠든 체하시오.”

서생이 비로소 일어나 앉아 겨우 입을 열어 자초지정을 물었다. 젊은이는 서슴없이 말하였다. “그 사람은 바로 관북의 삼수갑산에 사는 나의 벗이오. 당초에 나는 그와 또 한 사람의 벗이 한 스승에게 배웠지요. 그런데 그 다른 한 친구가 죄도 없이 남에게 피살되었소. 우리 두 사람이 그 원수를 갚으려 했지만, 10여 년이 넘도록 기회를 얻지 못했지요. 그러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가서 그 원수를 죽이었소.”

서생이 또 물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와 같은 재주로써 어찌 10여 년씩이나 기다렸단 말이오.”
“아니외다. 도술이나 방술은 하늘의 뜻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오. 그런 까닭에 신과 같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천명을 빌어야 하는 법이오. 천명이 다하기 전이니, 난들 어찌 그에게 손을 댈 수 있겠소. 오늘밤 그 사각이 바로 그가 큰 액운을 당하는 바로 그때이니, 그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이오. 그러나 이제까지 기다리는 동안 큰 고생을 겪었다오.”

“그러면 죽이는 방법은 허리나 목을 자르는 것인가요?”

“아니오. 그런 것은 검술로서는 서투른 방법이지요. 능한 자가 사람을 죽일 때는 반드시 바람처럼 호하게 마련인거요. 그 사람의 몸에 잇는 아홉 구멍에 들어가 척추로부터 발끝까지 내려가면서 가늘게 그 뼈를 쪼개고 그 창자를 실처럼 난도질하여 써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깥은 터럭 하나 다치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내부는 어육처럼 저미는 것이지요. 그런 뒤라야 직성이 풀리는 법이오”

“ 그 원수가 사는 곳은 어디이며 그 이름은 무엇이라 하오”

“영남의 아무 곳에 사는 갑부 아무개요.”
서생이 속으로 그 갑부의 이름을 마음속에 새겨 두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녀온 길을 헤아려 보니 왕복 천리가 더 되는 길이었다. 또 물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처음에는 웃고 나중에는 눈물을 흘리었소?”
“속 시원히 원수를 갚고 나니 기쁘지 않을 수가 있소. 그러나 죽은 벗을 생각하니 감회가 슬프지 않을 수가 없었소.”

이 말을 들은 서생의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움츠렸던 몸을 바로 하며, 젊은이에게 경의를 표했다. “내 일찍이 세상에 격검의 방술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인연이 없어 아직까지 구경을 하지 못하였다가 오늘 다행히 그대를 만났으니 원컨대 그것을 보여주어 내 평생의 갈망을 풀어주시오.”

젊은이는 웃으며 말했다. “창졸간에 시원치 않은 재주로 손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할 것이외다”하고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몸을 일으켜 내실에 들어가서 장롱 하나를 털어 내는데, 그 속에 가득한 것이 모두 닭털이었다.

이윽고 젊은이는 검을 들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수북히 쌓인 닭털 주위를 돌면서 마치 춤추는 듯했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아서 젊은이의 몸은 간 곳이 없고, 한 줄기 흰 기운이 방안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닭털이 스스로 펄펄 날면서 춤을 추는 듯, 벽 위를 어지럽게 날았다.

푸른 등불은 펄럭이면서 바람을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차가운 빛과 서늘하고 어두운 기운이 몸 속을 파고 들어갔다. 서생이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정신을 잃은 채 몸을 떨면서 바로 앉지를 못할 지경이었다.

이윽고 쨍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젊은이는 칼을 던지고, 어느새 웃는 얼굴을 하고 서생의 앞에 서서 말하는 것이었다. “변변치 못한 기예는 끝났소. 손님께서는 잘 보셨는지요.”

서생이 눈을 휘둥그래 뜬 채 병신처럼 앉아 있었다. 한참 동안 말을 못하고 있다가 정신이 돌아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윽고 서생이 정신을 차려 방바닥을 내려다보니 몇 천이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는 닭털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것들이 모두 반으로 쪼개진 것이었다. 서생이 앞으로 기어 나와 젊은이를 껴안으니, 젊은이가 말을 했다. “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젊은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모든 것을 거두어서 다시 제자리에 간직하고 서생과 더불어 자리에 누워 잤다. 서생이 자기의 전공을 모두 버리고 젊은이에게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자 청했다. 그러나 젊은이는 들어주지 않고 말하는 것이었다. “사람이라고 누구나 다 배울 수 잇는 것이 아닙니다. 또 손님의 골상을 보니 이런 것을 배우기도 어렵거니와 배운다고 해도 역시 성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튿날 젊은이는 일찍 아침밥을 해 주고는 서생에게 나가는 길을 자세히 가르쳐주고 작별하면서 젊은이는 서생에게 경계하는 말을 했다. “근신하여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세상에 누설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모름지기 누설하는 날이면 천리 밖에서라도 나는 곧 이것을 알게 됩니다.” 서생이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을 하고는 산을 내려왔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집에 돌아가지 않고 간밤에 있었던 일이 정말 사실인지 궁금하였다. 젊은이가 말한 영남의 그 고을에 이르러, 그 성명의 부잣집을 물으니 과연 이름난 갑부 어느 동네에 산다고 했다. 그는 수소문을 해 가며 그 마을에 찾아갔다. 그리고 은밀하게 탐지하니, 동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아무 달 어느 날 밤에 병도 없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런데 시신을 빈소에 옮기고 염을 해봤지만, 그 시체가 어찌나 부드러운지 흡사 겨를 넣은 주머니 같았답니다. 생시에 뼈나 근육이 전혀 없었던 것 같아서 모두 괴이쩍게 여겼으나, 그가 무슨 병으로 그렇게 갑자기 죽었는지는 아직껏 아무도 모른답니다.”

서생이 속으로 그가 죽었다는 날을 헤아려 보았다. 바로 자기가 오대산 산중에 있는 초막에서 자던 날 밤이 틀림없었다. 그는 더욱 경탄하여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사람에게 말을 아니하다가 나이가 늙어 죽을 때가 되자, 비로소 친척들에게 말을 했다고 한다.

보령 소년 이야기와 동일하지만, 보다 자세하고 신이하다. 소년이 보여 준 무예 솜씨도 검을 이용한 것으로 바뀌었으며, 원수의 죽음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게 서술이 되어 있다. 이러한 점은 홍대용의 기록보다 뒤 시기의 기록임을 고려할 때, 좀 더 이야기에 살이 붙는 등 윤색이 이루어진 까닭에 그러한 것으로 짐작된다. 여하튼, 홍대용과 김조순이 동일한 이야기를 기록하였다는 것은 원래 숨어사는 소년에 관한 이야기가 존재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이야기 구조가 조금씩 보강되어졌음을 말해준다.


 

나라와 함께 죽어 산 인물-계백


계백
계백(階伯,?~660)은 백제의 장군이다. 의자왕 20년(660)에 신라와 당 연합군이 탄현을 넘어 백제를 공격해 들어오자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벌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계백은 전쟁에 앞서 조국의 멸망을 예감했는지 자신의 처와 자식들을 노예로 살게 할 수 없다 하여 자신의 손으로 죽인 뒤 결전에 임했다. 3천의 군사로 10배가 넘는 3만의 적을 맞아 4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결국 수적 열세를 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그가 백제의 멸망과 함께 한 충신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가 처자식을 죽이고 전장에 나선 점에 대해서는 보는 입장에 따라 약간의 논란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태도는 당시 조금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과 같은 상황에서 전장에 나갈 수밖에 없는 가장으로서의 입장과 한 나라의 장군으로서의 입장에서 오는 고뇌를 느끼게 한다.

백제의 마지막을 같이 한 계백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많이 보이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이다. 삼국사기에는 계백이 벼슬에 나아가 2품의 ‘달솔(達率)’에 이르렀다고 하고,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는 3품의 은솔(恩率)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그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가계가 어떠했는지도 불분명하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04(?)~1866(?))가 고종(高宗) 2년(1865)에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계백에 대해, ‘이름은 승(升)이며 백제동성(百濟同姓)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 왕실의 성이 ‘부여’씨이므로 그도 부여씨인 것으로 여겨진다. 단재 신채호도 조선상고사에서 ‘부여계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름이 승(升)이라고 하는 부분은 ‘계백’이라는 이름이 갖는 뜻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계백의 ‘계’는 사서에 ‘해(偕)’‘계(堦)’로도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한자의 뜻과는 상관없이 우리말 이름을 한자를 이용해 표기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음만으로 보면, ‘계’와 ‘해’는 태양을 뜻하는 우리말 ‘해’로 보인다. 그리고 ‘백’은 백제어에서 ‘백(白)’과 같이 쓰이는데, ‘백(白)’은 ‘새롭다’는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계백’ 혹은 ‘해백’은 ‘새 해’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대동지지에 한자로 ‘승(升)’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점도 그러한 생각을 갖게 한다. ‘승(升)’은 ‘해가 떠오르다’는 뜻을 담고 있는 ‘승(昇)’과 통용되는 것이다. 즉 ‘계백’ 혹은 ‘해백’은 ‘새로 떠오르는 해’를 한자를 이용해 표현한 것으로 짐작된다.

계백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고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 대부분은 황산벌 싸움에 집중되어 있다. 그의 출생에 관련된 기록은 정사라고 하는 역사서에서는 찾을 수 없다. 다만 1928년에 당시 군수였던 홍한표(洪漢杓)가 편찬한 부여지(扶餘誌)를 통해 조그만 단서나마 찾을 수 있을 정도이다. 부여지에는 ‘팔충면(八忠面)은 부여군 서쪽 20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전하기를, 백제의 충신인 성충(成忠)․계백 등 8인이 여기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지어졌다.’고 하여 지금의 부여군 충화면 팔충리를 그의 태생지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충화면 천당리에는 계백 장군이 조정의 부름을 받고 나갈 때 고향이란 표를 하였다고 하여 ‘표뜸[標村]’이라고도 불리는 상천(上天)마을이 있으며, 천등산(天燈山) 마루 동북쪽 정상에는 계백이 수련을 했다는 토굴터와 수련하면서 물을 먹었다는 백충대 우물터가 남아 있다. 이 우물터는 천등산 건물지로도 불리는데, 이곳은 계백의 어머니가 유복자인 계백을 낳을 때 난산으로 실신하자, 호랑이가 이 우물 근처 석실로 물어와 젖을 먹여 키웠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또한 계백이 천등산을 오르내릴 때에는 해묵은 왕솔이 갈대 넘어지듯 했으며, 수련할 때 바위를 디딘 곳에 자국이 생겼다는 장수 발자국 바위 등 계백과 관련된 전설들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이 지역이 계백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유복자로 태어나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는 이야기의 내용으로 볼 때, 상대적으로 좋은 집안 출신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계급에 따라 올라갈 수 있는 최고 관직이 제한되어 있는 고대 사회에서 아무리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천한 계급이었다면, 백제 16관등 중에 제2등인 달솔까지 올라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계백의 집안은 부모대 혹은 그 이전에 몰락한 귀족 계층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아마도 계백을 포함한 성충과 흥수 등은 의자왕이 왕위에 즉위한 이후, 기존의 귀족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발탁한 인재들로 여겨진다.



삼강행실도 중 계백오전
계백의 무예수련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이야기도 있다. 부여의 충화에서 태어난 계백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계백은 낮에는 백충(百忠)재와 천등산을 달려 오르내리며 무술을 연마하고 밤에는 글을 읽었다. 백충재는 천당리(天堂里)에서 청남리(靑南里)로 넘어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백제의 충신들이 넘나들던 곳이라 하여 백충재라 불린다고 한다. 하루는 계백의 어머니가 아들의 무술공부에 큰 과제를 주었다. 그것은 백충재에서 천등산 마루의 과녁판을 향하여 활을 쏘고 그 화살보다 빨리 달려가서 화살이 과녁에 꼽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조정에 나아가 벼슬길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계백은 어머니의 명을 쫓아 매일같이 활쏘기를 익혔다. 그는 활을 쏜 후, 재빨리 말을 달려 천등산에 올랐으나 화살보다 빨리 갈 수는 없었다. 고심을 하고 있던 차에, 하루는 이상한 일이 생겼다.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그의 말을 물어 죽이고는 자기 등에 탈것을 권하는 것이었다. 계백은 호랑이의 등에 앉아 천등산 마루를 향해 활을 쏘았는데, 호랑이가 순식간에 달려서 과녁판에 이른 것이다. 화살은 그 후에야 명중되었다. 호랑이가 바로 나는 호랑이 ‘비호(飛虎)’였다고 한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에 소실된 가림방동고(嘉林坊洞考)를 참고하면, 계백의 체계적인 무예 수련은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支石里)와 서천군 마산면 나궁리(羅弓里) 사이를 가로막아선 노고산(老姑山)에서 이루어진 듯하다.

노고산 동남쪽 골짜기에 절이 있는데, 범황사(梵皇寺)라 한다. 절의 승려 혜오화상(慧悟和尙)이 차력(借力)과 둔신술(遁身術)을 알았다. 여러 승려와 더불어 노고산 석굴 중에서 도(道)를 수련하였다. 성충계백 흥수(興首)도 또한 석굴에서 신술(神術)을 배우는데 참여하였다.

노고산은 꼬부랑산이라고도 불리는데, 부여군 25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내 모든 산의 조종(祖宗)이고 산의 굽이진 형태가 마치 노인의 등 같이 생긴 것 같아서 그렇게 불린다. 노고산이란 명칭은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여겨진다. 이 노고산에 백제시대에 범황사가 있었으며, 계백은 그 절의 승려 혜오화상에게서 여러 스님들 그리고 삼충신의 일원인 성충 흥수와 더불어 차력과 둔신술을 배웠다고 한다. 계백은 혜오화상에게 무예를 배우고 천등산 등에서 수련을 이은 이후 관직에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도 이야기가 전한다.

충남 부여에 있는 백제의 궁성에서 의자왕이 밤마다 서편 하늘에 매달린 듯 반짝이는 불빛을 보며 이상히 여기다가 하루는 신하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도록 명하였다. 임금의 명을 받은 신하가 말을 달려 천등산에 이르러 등불이 반짝이는 곳을 향하여 올라갔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건장하고 잘 생긴 장사 한사람이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를 옆에 데리고 앉아서 열심히 글을 읽고 있는 것이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의자왕은 곧 이 장사를 조정에 불러 장군을 삼았다고 한다(계백과 관련한 전설은 임병고, 「계백장군 전설지 답사 및 상황리 왕총에 관한 고찰」 한국학논집, 1986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조선상고사를 보면, 의자왕 원년(641)과 2년(642)에 가금성주(椵岑城主)에 재임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계백 등이 혜오화상에게 배운 차력의 기법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상식을 벗어나기는 하지만, 그의 발자국이 남겨져 있다는 장수 발자국 바위 또는 왕솔 등이 갈대 넘어지듯 했다고 하는 이야기 등과 같이 보면, 맨손무예에 능숙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백제의 맨손무예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백제금동대향로’의 무인 형상을 통해, 그 흔적을 살필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의자왕 2년(642)에 백제의 대좌평 지적(智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상박(相撲) 즉, 스모를 관람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이 혹시 백제의 무예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해 본다.

둔신술은 말 그대로 몸을 숨기는 기법으로 여겨진다. 둔신술은 마음대로 자기 몸을 감추거나 다른 것으로 변하게 하는 기문둔갑을 떠올리게 되지만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적의 감시망으로부터 몸을 숨기며 첩보활동을 하거나 적을 암살하는 등의 기법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앞서 비호 등에 타고 활쏘기를 했다는 전설을 통해 계백이 말타기와 활쏘기 등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보인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볼 때, 계백의 무예 솜씨가 전반적으로 뛰어났던 것으로 봐도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