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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장_05

醉月 2012. 4. 29. 09:04

나전칠기 명장 1호 손대현

 “자개가 아름다운 건 옻칠이 잘 되었기 때문이죠”

 

나전칠기든 건칠기든 채화칠기든, 모든 칠기는 칠로 시작해 칠로 마무리된다. 나전칠기 명장 1호인 손대현(孫大鉉·63) 명장은 특히 칠 솜씨가 빼어나다. 스무 번 이상 이어지는 칠과 건조과정, 그리고 갈아내는 공정을 거쳐 완성되는 옻칠은 다른 화학 도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고 그윽한 빛을 내며 습기와 벌레, 열에도 강하다. 무엇보다 나무에 발랐을 때, 나무가 뒤틀리지 않게 잡아주는 힘도 있다. 옻과 자개 빛에 반해 옻칠의 세계에 뛰어든 손대현 명장은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하고 싶다고 할 만큼 옻칠의 매력에 빠져 산다.

 

그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다. 열다섯 살의 어느 날, 자개 보석함의 영롱한 빛이 그의 가슴에 와 ‘꽂힌’ 뒤로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건만 그는 아직도 아침마다 칠방 문을 열 때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전날 칠한 것이 제대로 말랐을지, 색깔은 내가 바라는 대로 나왔을지, 혹 잡티가 붙지는 않았을지 조바심과 설렘 긴장감 그리고 경건함까지, 뭐라 말할 수 없는 두근거림이 있습니다. 도공이 드디어 가마 문을 열고 작품을 처음 꺼낼 때의 설렘이랄까요? 그러니 도저히 지루해질 수가 없지요.”

그에게 매일 설렘과 짜릿함을 안겨주는 칠 작업은, 그러...   

 

“일본인이 주문한 매우 귀한 다기가 있었는데, 일 끝나고 동료들과 술 한잔하는 자리에서 누군가 ‘그런 그릇에 술을 따라 마시면 무슨 맛일까’ 궁금해해서 고량주를 따라 마시게 됐어요. 다음 날 선생님께 금방 탄로가 났지요. 선생님은 매일 작품을 꺼내 확인하시고 냄새를 맡는 버릇이 있었거든요. 잘 씻어놓았지만 향이 남았던 거지요.”

장인으로서 작품을 대하는 태도와 정신 상태에 대해 일장 연설을 들었던 기억이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이라니, 옻칠 말고 이 남자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싶다.

 

진짜 옻칠 배우고 싶어 민종태 선생을 찾아가다

그가 옻칠을 만나는 운명의 순간은 일찍 찾아왔다.

“친구 소개로 일하러 다니게 된 사무실이 서울역에 있었는데, 그 건물 2층에 나전칠기 작업장이 있었습니다. 가끔씩 들러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하고 어른들 담배 심부름도 해드리곤 했어요. 어느 날 갔더니, 마침 완성품을 포장하는 날이었는지 자개가 박힌 보석함과 쟁반을 상자에 넣고 있더군요.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무지개 색으로 반짝이는 영롱한 자개 빛깔이 가슴에 와 닿는 순간, 열다섯 살 소년은 일생일대의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 자리에서 “이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곧 ‘칠장이’로 나섰다. 그러나 당시 그 작업장에서 하던 칠은 천연 옻칠이 아니라 합성도료인 캐슈 칠이었다.

“그곳에서 3년간 캐슈 칠을 하면서 선배들에게 옻칠의 세계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옻칠의 대가로 김봉룡, 민종태, 김태희 세 분이 계시는데 그중에서도 민종태 선생님이 일도 많이 하시고 인품도 넉넉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민종태와 김봉룡 장인은 조선시대 마지막 나전칠기장인 전성규 선생의 제자다. 특히 김봉룡 장인의 나전은 디자인이 매우 뛰어났다. 스승 전성규와 함께 파리박람회에 출품한 작품은 스승의 작품이 동상을 수상할 때 은상을 수상할 정도였다. 다른 제자인 심부길 장인 역시 끊음질(자개를 끊어가면서 붙이는 섬세한 기법)의 대가였다. 전성규의 제자는 아니지만 김태희 선생 역시 옻칠의 명수이자 채화칠기로 유명했다.

“그때는 자세한 내막은 모르고 그저 선배들 이야기를 들으며 민종태 선생님을 혼자 존경하고 흠모했습니다.”

기술자와 장인의 차이는 ‘발심(發心)’에 있는 것 같다. “이왕 이 일을 시작했으니, 진짜 옻칠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1968년 다짜고짜 민종태 선생이 운영하는 성남의 작업장까지 찾아갔다. 그러나 그토록 존경해온 민 선생님은 얼굴도 못 본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사무실 사람만 겨우 만날 수 있었지요.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 꾸준히 찾아갔습니다.”

 

평생 자신이 원하는 일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루고야 마는 끈질긴 성격대로 그는 민종태 선생의 작업장을 계속 찾아갔고, 마침내 한 자리가 비게 되었을 때 출근하라는 허락을 받아냈다. 당시 일본 고객과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의 주문을 도맡아 했던 민종태 선생의 공방은 소목부와 조각부, 옻칠부, 나전부 등 직원이 서른 명이나 되는 큰 규모였다. 그는 옻칠부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니, 마냥 행복해서 열심히 했지요. 또 비록 캐슈 칠이지만 칠 작업을 몇 년 동안 해온 경험도 있는데다 선배들도 잘 가르쳐주었습니다.”

 

무릎 꿇고 작품을 받았던 일본인

공방 바로 옆에 친구와 함께 자취하던 그는 퇴근 후에도 공방에 들러 아무도 없는 작업장을 청소하고 습기가 부족하면 물을 뿌려놓곤 했다.(옻칠은 습기가 있어야 잘 마른다.) 그런 성실함은 차차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마침내 민종태 선생도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그 덕택에 옻칠부 책임자였던 선배가 독립해 나갔을 때 그는 책임자 자리를 꿰찼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일 때였다.

그가 기억하는 스승 민종태 선생은 솜씨가 좋았을 뿐만 아니라 사내답게 잘생긴 대장부의 모습이다.

“일본에서도 작품을 의뢰하러 많이 왔었는데,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오동잎 같은 문양을 넣어달라고 하면 ‘그렇게는 안 한다. 내게 작품을 부탁하려면 문양까지 내게 맡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민 선생이 그런 특별한 작품을 주문받아 만들 때면 늘 그가 마감칠을 맡아 했다. 하루는 일본 말차를 담는 ‘나쓰메’ 다기를 주문받아 제작한 적이 있는데(고량주를 따라 마셨던 바로 그 다기다) 일본인이 작품을 찾아가는 날 그는 특별한 광경을 목격했다.

“완성품을 갖고 오라는 선생님 지시로 다기를 갖고 가니 기다리던 일본인이 포장을 풀기 시작했어요. 드디어 작품이 드러나는 순간, 일본인이 갑자기 일어나 무릎을 꿇고 민 선생님께 절하고서는 공손히 꿇어앉은 채로 작품을 받아가더군요.”

그때 손대현도 자랑스러움을 느꼈고, 언젠가는 자신도 저런 경험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꿈꾸었다. 그리고 한참 뒤 그 꿈은 이루어졌다.

“1994년 신라호텔에서 초대전을 열었을 때 어느 일본인이 만나자고 기별이 왔어요. 저의 전시회를 보고 집안 대대로 물려온 보검의 칼집과 칼자루를 나전칠기로 장식하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그가 작업하는 8개월 동안 일본인은 네 번이나 그를 찾아와 대접하며 만날 때마다 200만 원씩 사례했다. 그는 속으로 ‘이미 받을 만큼 받은 것 같은데, 대체 얼마를 주려고 자꾸 이러나’ 싶었다. 마침내 작품이 완성되어 건네주던 날, 검은 옻칠 바탕에 야광패인 소라껍데기로 꽃을 만들고 우리나라 전복으로 줄기와 잎을 은은하게 표현한 모란당초문 자개가 박힌 작품을 꺼내 든 70대 노신사의 얼굴은 단박에 바뀌었다.

“그때까지 그의 표정은 매우 근엄했었는데, 작품을 보는 순간 소년같이 기뻐하더군요. 젊은 저에게 무릎을 꿇지는 않았지만 기뻐하는 그의 표정 하나만으로 제가 바라던 보상을 충분히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깊이 고개 숙여 존경을 표하며 가보로 고이 간직하겠다고 말한 노신사는 그에게 작품 값으로 다시 1000만 원을 건넸다. 장인으로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때는 바로 이런 순간일 것이다. 누군가 자기 작품의 진가를 알아봐주고 좋아해주는 것. 그는 어느 아주머니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제게 삼층장을 사간 분이었는데, 어느 날 외출했다가 몹시 불쾌한 기분이 되어 집에 돌아왔답니다. 혼자 앉아 물끄러미 삼층장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언짢은 기분이 사라지고 평화로운 마음이 들기에 왜 이런 걸까 곰곰 생각해보았더니, 바로 삼층장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더군요.”

아름다운 자개와 옻빛이 어우러진 장인의 작품은 사람의 마음을 위무하는 힘이 있는 모양이다. 그 아주머니는 세 딸에게 삼층장을 결혼선물로 주고 싶다며 선금을 주고 그에게 장롱을 세 개나 맞추어 갔다.

 

주문받은 작품만 만들어 경기 변동 못 느껴

 

민종태 선생의 공방에서 일하던 시절 이미 그의 칠 솜씨는 소문이 나서 다른 유명 공방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스승을 저버리지 않았다. 스승 역시 제자인 손대현을 아꼈다. 나중에 민 선생은 성남 공방은 처남에게 맡기고 자신의 집이 있는 이태원에서 특별히 주문받은 작품이나 견본 작품만 만들었는데, 그때 손대현을 데리고 와서 칠 작업을 맡겼다.

“선생님 댁 근처에 방을 얻어주시고 작업을 하게 하셨어요. 선생님 댁과는 5분 거리였는데, 삼시세끼 따뜻한 밥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때는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깊은 배려였다는 것을 알겠어요.”

1978년 말 결혼한 뒤 새로운 길을 개척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독립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때도 스승은 그리하라며 자신이 맡은 주문의 7할을 그에게 맡겼다.

“경기가 나쁜 때였는데, 선생님이 일을 주시니 어렵지 않게 새 출발할 수 있었지요. 그때부터 7,8년 동안은 정말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주문받은 작품만 한다.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경기가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고 산다. 1980년대 자개농 붐이 일었을 때도, 또 캐슈 칠한 자개농에 대한 인기가 사그라질 때도 그의 작품 주문 양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장인이 만든 진짜 옻칠 작품을 원하는 일부 고객은 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때도 어려움이 없었을까.

“아, 그때…그러고 보니 그때 주문이 조금 줄긴 한 것 같네요. 그래도 저는 늘 현금 주고 재료를 사고 또 작품 값도 현금으로 받으니, 주문만 좀 줄었지 큰 타격을 입지는 않았습니다.”

대규모로 납품하는 기성품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주문은 줄어도 돈을 떼이는 일은 없었다. 대신 주문이 늘어도 그가 해내는 양은 한정되어 있어 많이 만들어 팔 수도 없다. 다만 작품 값이 올라갈 뿐이다.

“손으로 하나하나 만드는 작업이기에 제 인생에 대박이란 없습니다. 손으로 직접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수입은 한정돼 있는 셈이지요. 그래도 그걸로 집도 사고 오늘날 이만큼 이루었으니 나쁜 편은 아니죠. 또 주문이 떨어져도 제 스스로 만들어보고 싶은 것이 많으니, 할 일은 언제나 있습니다.”

 

 

건칠은 삼베와 토회를 여러 장 겹쳐 그릇 모양을 잡아가는 기법이다. 삼베로 만든 그릇이라 들어보면 가볍다.

 

 

신혼 시절, 살림집 겸 공방으로 세 들어 살던 이태원 집이 경매에 넘어가는 바람에 전셋돈도 다 못 건지고 면목동으로 이사 가서 월세를 살았다. 그는 상가를 빌려 혼자 작업했는데 주문이 별로 없었다. 그때 자기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꽤나 암담했을 그때도 역시 그는 “별걱정 없이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작품에 열중했다.

“어느 날 주문이 들어와 가보니, 제가 만든 상을 사간 분이 삼층장을 주문하신 거였어요. 그때부터 주문이 조금씩 늘어 3년 만에 집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작품을 주문하는 고객은 개인도 있지만, 스승 민종태 선생 작품을 좋아했던 삼성을 포함해 최근 BMW 7시리즈의 내장을 나전칠기로 부탁했던 자동차 회사까지 다양하다. 스승과 다른 점이 있다면, 민 선생이 주로 이병철 회장의 사무실 집기나 외국으로 나가는 선물을 맡았다면, 그는 대형 PDP나 태블릿 PC 등의 외장을 꾸미는 일을 맡는다는 점이다. 물론 외국에 나가는 선물이나 리움박물관의 기념품 등 전통적인 작품도 주문받는다.

“옻칠은 나무나 도자기뿐만 아니라 가죽, 대나무, 섬유 그리고 금속이나 화학제품 등 어떤 재질에도 다 할 수 있으므로 단순한 장식 기능을 벗어나 현대 산업 기술과도 접목이 가능합니다.”

옻은 접착력이 좋을 뿐 아니라 습기를 받으면 더욱 잘 마르는 성질이 있어 녹이 슬지 않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식품을 위생적으로 보관하는 그릇의 마감재로도 뛰어나지만 칠이 발달한 일본은 선박이나 항공기 같은 금속제품에도 옻칠을 활용하고 있다.

 

보이는 자개보다 안 보이는 바탕칠을 잘해야 한다

나전칠기는 옻칠을 해나가면서 자개를 붙이고 다시 옻칠해 갈아내는 칠기의 한 분야다. 옻을 바르는 칠기 공예에는 여러 분야가 있는데 목기나 도자기, 대나무 기구 등에 그냥 옻칠만 하기도 하고, 자개를 붙이는 나전칠기, 그리고 그림을 그려 넣는 채화칠기도 있다. 또 두부나 달걀흰자, 젤라틴 등을 섞어 바르는 교칠기법과 아예 삼베와 토회를 겹쳐 바르면서 그릇까지 만드는 건칠 기법(협저칠기)도 있다. 나무에 칠한 것처럼 보이는 큰 칠기를 들어보면 의외로 가벼운 것도 삼베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단단하고 방습성이 좋으니, 이것이 칠기의 장점이다.

“나전이든 채화든 건칠이든 모든 것은 칠이 기본입니다. 칠에서 시작해 칠로 끝나는 거죠. 칠이 제대로 되어야 나중에 틀어지거나 벗겨지지 않고 제 빛깔을 유지하며 두고두고 쓸 수 있으니까요.”

작은 함에 아무 장식 없이 옻칠만 할 때도 공정은 간단치 않다. 먼저 백골에 옻액이 잘 흡수되도록 생칠을 묽게 배합해 골고루 바르고 한 사흘 말린 다음, 목재가 뒤틀리지 않도록 삼베를 붙이는데 이때는 찹쌀풀과 생칠을 섞은 호칠로 발라준다. 이렇게 하면 결속력이 매우 강해진다.

“만리장성을 쌓을 때도 중요한 성루 부분 벽돌은 찹쌀풀과 생옻을 발라 쌓아서 돌이 절대로 안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단단한 호칠에 삼베까지 발랐으니, 이렇게 만든 칠기는 튼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호칠한 베 표면은 꺼칠하므로 우선 사포로 거친 부분을 다듬어낸 다음 다시 생칠을 하고 이번에는 토회를 바르고 말렸다가 다시 토회를 얇게 바른다. 이렇게 재벌한 것이 마르면 물을 뿌려가며 숫돌로 토회를 갈아내야 하는데, 어느 정도 갈아내야 할지는 전적으로 장인의 손에 전달되는 숫돌의 느낌에 달려 있다.

토회를 갈아내면 미세한 구멍이 생긴다. 이때 토회로 메워주고 정제한 옻을 바르는데, 이것이 비로소 초칠이다. 색을 내고 싶으면 이때 물감을 탄다. 이렇게 칠한 면이 마르면 숫돌이나 크리스털로 초칠을 갈아내고 중칠, 그리고 중칠이 마르면 숯가루를 사용해 곱게 간다. 이렇게 해야 마지막 상칠을 할 수 있다. 상칠을 할 때는 특별히 백일홍이나 상추나무로 만든 숯으로 갈아낸다. 광내기 작업 역시 초벌과 재벌 과정이 있다. 마지막으로 장석과 경첩을 달아 완성하는데, 그 모든 과정 사이사이 흠이 생기면 메워주고 먼지나 붓털이 들어가지 않았는지 세밀히 살펴 일일이 보완해가며 칠을 해나간다.

기본 칠이 이 정도고, 만약 자개를 붙인다면 초칠에 들어가기 전 아교로 자개를 붙이고 인두질하고 더운 물로 풀을 뺀 다음 다시 생칠을 발라 접착력을 높여준 뒤 자개 두께만큼 황토를 입히는 토회 작업과 이를 깎아내는 작업이 추가된다. 이런 긴 작업 공정을 제대로 해내는 데는 꼬박 두세 달이 걸린다. 그런데 왜 이렇게나 많이 칠을 거듭하는 걸까.

“나무는 호흡하고 수분을 머금으면 팽창하는 성질이 있어서 뒤틀리게 마련이니까요. 옻칠을 함으로써 완전히 틀이 잡히는 것인데, 속 칠 과정을 하나라도 생략하거나 등한히 하면 언젠가는 하자가 드러나게 됩니다.”

스승 민종태 선생은 늘 “겉칠을 번드르르하게 해놓으면 속이 보이지 않지만, 속이야말로 절대로 속이면 안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까다롭고 복잡한 속 칠 기법에 대한 손대현의 믿음 역시 확고하다.

“시대에 따라 디자인이나 문양은 바뀔 수 있어도 제작과정이나 기법은 바뀌면 안 됩니다. 빨리 하려고, 쉽게 하려고 제작과정을 바꾸거나 현대화해버리면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제대로 된 기법을 잃게 될 것입니다.”

처음 눈으로 볼 때는 구별이 안 가지만 한참 뒤 자개가 떨어지거나 기물이 뒤틀리는 것은 속 칠이 제대로 안 되어서라고 한다. 그러니 기물의 생명력은 옻칠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설명을 들어서일까. 나전칠기에서 더 아름다운 것은 화려한 자개가 아니라 은은하게 빛나는 저 검은 옻빛이라는 것을 문득 발견하게 된다. 만약 자개가 여자의 색조화장이라면, 바탕 옻칠은 피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깨끗한 피부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손대현의 작품은 자개의 문양이나 빛깔도 독특하지만, 어떤 화려한 자개가 위에 앉아도 기품을 잃지 않는 것은 바로 뛰어난 바탕칠 때문이리라.

 

   

우리나라의 나전기법이 독특한 이유

옻칠의 역사는 매우 길다. 아마 인류가 목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옻칠은 시도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중국에서 시작한 걸로 알려진 옻칠은 중국 한국 일본 세 나라에서 특히 발달했는데, 한때 일본 학자들은 한나라가 우리 땅에 낙랑군을 설치한 이후 옻칠이 전해졌다고 했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 유적지인 창원 덕천리 유적에서 칠 조각이 발견되어 우리 옻칠의 역사는 청동기 시대까지 훌쩍 올라간다. 또한 아산 석관묘 청동기 유적지에서도 칠편이 나왔으며, 창원 다호리 유적지(BC 1세기)에서는 칠기가 20여 점 출토되었다. 최근에는 공주 공산성 유적지에서 백제시대 옻칠갑옷과 마갑까지 발굴됨으로써 우리 옻칠의 발전사를 엿볼 수 있다.

일본은 습기가 많은 기후 탓인지 칠기를 널리 써왔고, 근대 들어 옻 재료와 정제기법도 제일 앞서간다. 그러나 장인의 기술로 따져본다면 우리가 단연 돋보인다. 고려시대 매우 섬세하고 세련된 칠기 작품을 만들어낸 이 땅 장인들의 솜씨는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고려시대에는 기술도 발달해 전복 껍데기와 함께 바다거북 등딱지인 대모를 얇게 저며 각질 뒷면에 안료를 칠하는 복채기법을 개발해냈는데, 이 복채기법이 조선시대 화각공예의 시초가 된 셈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옻칠 공예의 대표로 나전칠기를 최우선으로 꼽는 데는 이유가 있다.

“중국도 자개를 쓰지만 우리와 달리 상감하듯 나무를 파서 끼워 넣습니다. 일본은 옻칠은 발달했지만, 자개로 장식하지 않고 금가루나 은가루를 뿌리는 시회(蒔繪)기법을 주로 쓰고요. 우리만 자개를 붙여 토회작업과 옻칠로 두께를 맞춘 다음 다시 갈아내는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전칠기는 한국의 대표공예품으로 우리 대통령이 외국을 방문할 때나 외국 원수가 방한할 때 선물로 많이 나간다. 손대현은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이 유럽 6개국을 순방했을 때 나비문양의 서류함을 만든 것을 시초로 청와대 주문도 자주 받았다.

“1989년은 제가 명장이 되기 전인데, 하얏트 호텔 가게에 납품한 제 작품을 보고 청와대에서 연락을 해왔어요. 그 기록이 남아 있었는지,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할 때도, 또 엘리자베스 여왕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도 선물을 만들게 됐습니다.”

일왕에게 건넬 선물로는 기쁠 희(喜) 자와 학 네 마리를 나전으로 박은 보석함을,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해서는 십장생 문양을 끊음질로 잔잔하게 꽉 채운 보석함을 만들었다. 그런 중요한 선물은 ‘손작업’이 그대로 살아 있는 섬세한 나전제품으로 마련한다고 한다.

 

곤지암에 세운 자신만의 성(城)

그는 13년 전 곤지암에 큰 공방을 마련했다. 이전에는 서울 성내동에 2층 건물을 사서 1층은 공방으로, 2층은 살림집으로 썼는데 비좁은 그 공방에 어느 날 덴마크 국립박물관 유물 담당 학예사가 그를 찾아왔다.

“일주일 동안 나전칠기를 체험하고자 온 것인데, 작업장에는 옷을 갈아입을 만한 공간도 없어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했어요.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어서 꽤나 불편했을 텐데도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더군요. 큰마음 먹고 찾아온 한국에서 그런 작업 환경을 보고 어떻게 생각했을지, 참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는 환경을 개선해야겠다는 생각에 성내동 건물을 팔고 곤지암에 널찍한 터를 사서 공방을 마련하고 그의 작품을 보관하는 전시장도 짓고 뒤편에는 옻나무도 심었다.

“그 때문에 집을 전세로 옮겨야 했으니 아내가 처음에 반대를 심하게 했지요. 그래도 끝까지 설득했습니다.”

그는 소년 같은 수줍은 표정과 차분한 말투를 지녔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이고 한번 마음먹은 일은 꼭 이루어내는 뚝심의 사나이다. “목표를 세우고 가다보면 어느덧 목표지점에 가닿게 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열다섯 살에 이미 운명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던가.

“목표에 다다르는 데 운명의 힘은 5% 정도라고 할까요? 물론 그때 받은 첫 느낌에 이끌려 평생 이 길을 걸어왔지만, 한발 한발 걸어온 것은 모두 저의 의지요 노력이었습니다. 도중에 발길을 돌렸다면, 그 운명조차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겠지요.”

한창 일하던 면목동 공방시절, 삼성그룹에서 서류함 스무 개를 급하게 주문받아 납품일을 맞추느라고 고생한 적이 있는데, 밤에도 자지 못하고 칠이 마르는 사이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때 무언가 살 게 있어서 택시를 탔는데, 코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고 한다.

“그렇게 애쓴 과정이 있었기에 납품도 기일에 댈 수 있었고, 좋은 평가도 받았던 겁니다. 그러니 목표 달성은 운명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 가는 발걸음에 달린 거지요.”

5%의 운명과 95%의 노력으로 살아온 그의 인생에서 이제 목표는 달성되었는가? 넒은 공방에, 자신의 뒤를 이어줄 아들도 있고 제자도 있으니, 이제 우리 옻칠 기술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기만을 바랄 뿐이란다.

“제 호(號)가 수곡(守谷)인데 예전에는 다른 호가 있었어요. 수곡이라는 호는 민 선생님께 물려받은 것인데, 민 선생님은 스승 전성규 선생님께 수곡이라는 호를 물려받아 평생 써오시다가 돌아가시기 여섯 달 전에 유언처럼 제게 이 호의 내력을 일러주시고 물려주셨어요.”

명실상부한 나전칠기의 종손임을 공인하는 수곡이라는 호는 그래서 그에게 무척 소중하다. 곤지암 골짜기에 차린 그의 공방 이름도 수곡이다.

“처음 공방을 짓고 이곳에서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새 소리가 들립니다. 작업하다 주변을 한 바퀴 돌 때면 행복하고 편안한 마음이 되어 ‘아, 이곳이 바로 나의 성(城)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지요.”

나전칠기에 반한 열다섯 살 소년은 무지개를 좇듯 칠기의 빛을 따라 이 골짜기까지 들어와 마침내 자신의 성을 건설했다. 그의 호 수곡처럼 그는 이 골짜기에 세운 자신의 성을 오래도록 지켜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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