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한국의山神_06 계룡산

醉月 2016. 9. 3. 21:59

[계룡산] 저승 상상계~이승 현상계 잇는 '산신의 원형' 그대로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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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탄탄한 문화기반 있어 가능했던 듯… 조선 왕도됐으면 달라졌을 수도

계룡산 산신은 누구일까? 남성일까, 여성일까? 통일신라시대의 오악인 지리산은 구체적인 산신의 실체가 드러나는데, 같은 오악이었던 계룡산에는 왜 나타나지 않을까? 계룡산 산신은 언제부터 유래했을까? 이런 의문을 갖고 계룡산 일대를 샅샅이 훑고 다녔다. 산신이나 계룡산 관련 전문가라는 전문가는 모두 찾아서 만났다. 산신의 실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전에 소개한 산신과는 또 다른 산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의미 있는 소득이었다. 이른바 ‘산신의 원형’성에 관한 내용이다.

먼저, 기록에 전하는 계룡산 산신부터 살펴보자. 계룡산은 잘 알려진 대로 조선의 진산이 될 뻔했던 산이다. 계룡산을 진산으로 한 신도안을 조선의 도읍지로 정하려고 1년여 조성작업을 하다가 산신의 반대로 공사를 중단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신도안과 이성계’라는 제목으로 전하는 내용이다.

‘태조가 무학대사와 함께 신도안에 도읍을 옮기려고 사흘 동안 역사를 하면서 주춧돌을 마련했다. 이때 무학의 꿈에 계룡산신이 현몽해서 “여기는 오백년 후에 정씨의 팔백년 도읍지가 될 터이니 한양으로 가라”고 했다. 그래서 한양으로 가서 처음 왕십리에 자리를 잡았다가 다시 산신의 계시를 받아 십리를 더 가서 (지금의) 자리를 잡았다.’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함께 계룡산을 비롯한 전국의 산을 돌면서 산신기도를 했다. 계룡산 사련봉(四連峰)에 살고 있는 신모가 해몽으로 태조의 건국을 예언했다고 해서, 신모를 위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는 전설도 전한다. 또 풍수 보는 사람이 신도안의 형세를 왕에게 바치면서 “이곳이야말로 새로운 도읍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에 손색없는 곳인 줄 압니다”라고 했다고도 한다. 이와 같이 계룡산은 삼국시대부터 꾸준히 명산반열에 올라 회자됐다.

중국 역사서에까지 명산 기록 나와

[한국의 산신(山神) | (8) 계룡산]
우리나라 유일의 산신제가 개최되는 계룡산 중악단 전경. 중악단을 감싸고 있는 능선이 주능선이고, 오른쪽이 정상 천왕봉이다.
계룡산신에 대한 기록은 역사서에도 나온다.

중국 역사서 <삼국지(三國志)> 예조(濊條)에 ‘(동이족은) 호랑이를 (산)신으로 여겨 제(사)를 지낸다’고 돼 있고, <신당서(新唐書)> 동이전에도 ‘신라 사람들이 산신에게 제사 지내기를 즐겨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한원(翰苑)> 백제조에 ‘鷄山東峙貫四序以同華(계산동치관사서이동화)’라고 나온다. 계산동치가 바로 계룡산을 가리킨다. 중국에까지 일찌감치 명산으로 알려졌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기록이다.

<삼국사기>권32 잡지 제1 제사조에 전국의 명산대천을 삼산오악으로 나눠 제사를 지냈다고 했다. 오악 중 서악이 바로 계룡산이다. 삼산오악을 지정한 시기는 통일신라 직후 신문왕 시절로 추정한다. 명산으로서 평가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하게 여겨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의 산신(山神) | (8) 계룡산]
한 무속인이 작두에 올라 굿을 하고 있다. 계룡산 중악단 산신제의 무속식 한 장면. / 사진 계룡산 산신제 보존회 제공
하지만 고려시대 때 계룡산에 대한 기록은 찾기 쉽지 않다. <고려사> 잡사조에서 무등산신, 금성산신, 감악산신, 목멱산신, 마리산, 지리산 등과 관계된 제사 기록은 있지만 계룡산 제사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또한 ‘국내 신지(神地) 모두에게 훈호를 주다’, ‘명산대천에 모두 신호(神號)를 내리다’, ‘국내 명산대천에 가호(加護)하다’, ‘내외의 명산대천에 가호하다’, ‘모든 명산대천으로 사전에 실린 것은 모두 신호를 내리다’ 등의 <고려사> 세가에서 보이는 가호기록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고려시대의 계룡산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았고, 왕조에 순종적인 지역으로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태조 왕건은 결혼으로 지방 호족세력들을 묶어 통치하려 한 측면이 강했고, 그 지방의 대표적인 산들을 지정해서 산신제를 지내거나 가호를 내렸기 때문이다. 꼭 명산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고려는 소홀, 조선은 왕조 내내 대접

반면 조선시대는 천도 관계로 계룡산이 매우 자주 등장한다. <태조실록> 3권 1393년 ‘전국의 명산·대천·성황·해도의 신에게 봉작을 내리다’ 편에 ‘이조에서 경내의 명산·대천·성황·해도의 신을 봉하기를 청하니, 송악의 성황(城隍)은 진국공(鎭國公)이라 하고, 화령·안변·완산의 성황은 계국백(啓國伯)이라 하고, 지리산·무등산·금성산·계룡산·감악산·삼각산·백악(白嶽)의 여러 산과 진주의 성황은 호국백(護國伯)이라 하고, 그 나머지는 호국의 신이라 하였으니, 대개 대사성(大司成) 유경이 진술한 말에 따라서 예조에 명하여 상정한 것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한국의 산신(山神) | (8) 계룡산]
중악단 앞마당에서 열리는 산신제를 불교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산신도가 걸려 있는 장면이 무불습합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듯하다. / 사진 계룡산 산신제 보존회 제공
여기서 조선 왕조에서 계룡산 산신에 호국백의 작호를 내린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엔 평가받지 않았던 계룡산이 다시 부각된 이유는 새로운 도읍지로서의 민심을 얻기 위한 명분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를 계기로 계룡산은 조선왕조 내내 일정한 대우를 받았다.

<태종실록> 28권 태종 14년(1414) ‘예조에서 산천에 지내는 제사에 대한 규정을 상정하다’ 편에 ‘예조에서 산천의 사전(祀典)제도를 올렸다. 삼가 <당서(唐書)>, <예악지(禮樂志)>를 보니, 악(嶽)·진(鎭)·해(海)·독(瀆)은 중사(中祀)로 했고, 산·임·천·택(澤)은 소사로 했고, <문헌통고(文獻通考)>의 송나라 제도에서도 또한 악·진·해·독은 중사로 했습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전조의 제도를 이어받아 산천의 제사는 등제를 나누지 않았는데, 경내의 명산대천과 여러 산천을 빌건대, 고제(古制)에 의하여 등제(等第)를 나누소서’라고 기록돼 있다.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악·해·독은 중사로 삼고, 여러 산천은 소사로 삼았다.

[한국의 산신(山神) | (8) 계룡산]
남자 무속인이 맨발로 날카로운 작두에 올라 걷고 있다. 계룡산 중악단 산신제의 무속식 한 장면. / 사진 계룡산 산신제 보존회 제공
‘경성 삼각산의 신(神)·한강의 신, 경기의 송악산·덕진(德津), 충청도의 웅진, 경상도의 가야진, 전라도의 지리산·남해, 강원도의 동해, 풍해도의 서해, 영길도의 비백산(鼻白山), 평안도의 압록강·평양강은 모두 중사(中祀)였고, 경성의 목멱, 경기의 오관산·감악산·양진, 충청도의 계룡산·죽령산·양진 명소, 경상도의 우불산·주흘산, 전라도의 전주 성황·금성산, 강원도의 치악산·의관령·덕진 명소, 풍해도의 우이산·장산곶이·아사진·송곶이, 영길도의 영흥 성황·함흥 성황·비류수(沸流水), 평안도의 청천강·구진 익수는 모두 소사이니, 전에는 소재관(所在官)에서 행하던 것이다. 경기의 용호산·화악, 경상도의 진주 성황, 영길도의 현덕진·백두산은 이것은 모두 옛날 그대로 소재관에서 스스로 행하게 하고, 영안성·정주 목감·구룡산·인달암(因達巖)은 모두 혁거(革去)했다. 또 아뢰었다. 개성의 대정(大井)·우봉(牛峯)의 박연(朴淵)은 이미 명산대천이 아니니, 빌건대, 화악산·용호산의 예에 의하여 소재관에서 제사를 행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계룡산신에 대한 제사만 따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종 13년 9월 18일 내시를 보내어 계룡산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다.’

‘태종 13년 10월 5일 내시를 보내어 계룡산의 신과 웅진의 신에게 제사 지내다.’

‘성종 24년 5월 21일 국가에서 귀후서(歸厚書)를 설치하고 태백산, 계룡산 등지의 신에게 바쳤다가 물린 물건을 주어 재목을 사는 데에 쓰게 한 것은 위로 대부(大夫)에서 아래로 사서인(士庶人)까지 다 관곽을 얻어서 상용(喪用)에 이바지하게 위한 것인데, 이제 제천정(濟川亭)을 중수하는 중들에게 옮겨 주었으니 귀후(歸厚)에서는 관곽의 재목을 사지 못하므로 인거군(人鋸軍) 30명이 다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숙종 29년 7월 29일 명산대천이 모두 소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유독 제주도 한라산만이 빠져 있어서, 이를 소사에 새로 편입시키고, 그 제례와 축문은 치악산과 계룡산의 경우에 따를 것을 윤허했다.’

이같이 계룡산 산신은 역사서에 수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는 지리산이나 토함산, 태백산, 소백산, 가야산과 같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실체는 주로 인격신이었다. 하지만 산신의 실체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계룡산에서 일부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산신이 언제부터, 어떻게 유래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계룡산 산신을 밝히는 데 결정적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산신(山神) | (8) 계룡산]
중악단 중앙에 산신도가 모셔져 있다.
우리나라의 산신의 첫 출발은 단군부터 시작한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에 나오는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 보자.

환인제석의 서자인 환웅이 인간세계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하늘의 아버지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 허락하여 환웅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와 주곡, 주명, 주병, 주형 등 인간의 360여 일을 주관하는 신령을 이끌고 이 땅에 내려온다. 그리고 신시(神市)를 연다. 마침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곰과 호랑이가 있어 환웅은 그들을 동굴에 넣고 쑥과 마늘을 주어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도록 했다. 곰은 그것을 잘 지켜 여자의 몸이 되었다. 그녀가 웅녀다. 웅녀는 결혼하고 싶어 늘 신단수 아래서 임신하기를 빌었다.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결혼해 낳은 아이 이름은 단군왕검이라 했다. 단군이 나라를 다스리다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산신이 됐다.

단군은 한민족의 시조이자 산신의 시조인 셈이다. 또한 단군은 신의 아들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다가 다시 신이 된 인물이다. 반신반인(半神半人)인 것이다. 이는 당시 원시사회의 자연과 동물을 숭배하는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사상, 천신(天神)신앙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다. 곰과 호랑이는 토템을 대표하는 동물이다. 원시인들이 숭배하는 동물을 인격화해서 사람을 낳은 신화는 당시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스토리다. 고조선의 왕인 단군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도 하는 전형적인 제정일치사회였다. 단군이라는 천신신앙, 웅녀의 탄생이 보여 주는 토테미즘, 그리고 샤먼으로서의 단군과 웅녀 등은 고대사회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사회에 이어 모계사회로 변한다. 일부 중복되는 과정이 있긴 하지만 시대적으로 구분하면 모계사회가 조금 뒤이어 나타난다. 모계사회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사회가 형성된다. 수렵채취시대의 사냥을 나간 남성들은 언제 어떤 사고로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 자연히 어머니를 중심으로 자식이 성장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확실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과 시대적 특징은 산신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지금의 지리산에서 볼 수 있는 노고할미나 마고할멈, 선도산성모와 같은 명칭의 산신의 등장은 이러한 시대적 특징과 사회적 현상을 반영한 결과다. 그만큼 오래된 산신의 원형이다. 이를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조흥윤 명예교수는 ‘본향’이라고 개념규정 한다.

산신이 상상계와 현상계 잇는 메신저 역할

그러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수렵채취시대의 신석기는 끝나고 정착생활을 시작하는 청동기와 철기시대에 접어들면서 힘을 필요로 하는 남성 중심의 강력한 리더십이 요구된다. 부족과 식량을 지켜야 할 힘을 갖춘 부족장의 역할이 점점 더 커졌다. 제정일치에서 정치권력과 제사장은 동격이었지만, 왕권이 우선시되는 사회에서는 제사장은 왕의 신하로 들어가는 구조로 변한다. 이는 산신의 지위에도 중요한 전환기를 맞게 되고 산신의 성에도 큰 변화를 준다. 남성 산신이 본격 등장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신라 4대 왕인 석탈해가 토함산 산신이 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보면 무리가 없다. 당시 석탈해는 청동기를 끝내고 강력한 철기문화를 반영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이같이 산신은 수렵채취라는 시대적, 모계사회라는 사회적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정치권력도 여실히 반영했다. 지리산과 같이 중요한 산에는 산신이 여러 명 등장하는 모습은 다양한 시대적·사회적 현상을 반영한 결과다.

이에 반해 계룡산 산신은 왜 구체적 실체가 나타나지 않고, 그냥 산신 그 자체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당연히 생긴다. 이에 대해서 조흥윤 교수는 “계룡산에는 산신의 본향이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게 바로 산신의 원형이라고 강조한다.

조 교수는 “산신을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선 원형분석 방법을 제대로 작동시켜야 한다”며 “샤머니즘적 상상계로 이를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신의 원형성에 있어서, 초기엔 무속과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원형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어떤 것은 부분적으로 바뀐다”고 말한다.

조 교수는 산신이 존재하는 근거를 (저승)상상계와 (이승)현상계로 나눈 구조로 설명한다. 상상계와 현상계를 탯줄처럼 연결하며 흐르는 강이 왕래의 통로가 된다. 상상계와 현상계는 상호보완의 관계에 선다. 어느 쪽이나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서로 다른 쪽에 생명을 준다. 상상계의 꽃으로서 현상계의 어머니를 살려내고, 현상계의 꽃밭이 상상계의 꽃밭이 된다고 한다. 이를 연결하는 통로의 강을 왕래하는 사신이 바로 산신이고, 세속적으로는 무당(샤먼)이라는 것이다. 이 산신의 원형이 바로 상상계의 꽃밭이라고 설명한다.

조 교수는 이어 산신을 본향 산신과 일반 산신 두 부류로 나눈다. 일반 산신은 전국의 명산에 있는 산신을 말하고, 본향 산신은 집안의 조상 대대로 묻혀 있는 조상신적 성격을 띤다. 제일 위로 올라가면 단군으로 대표되는 한민족의 산신으로 연결된다. 일반 산신과 본향 산신은 서로 그물처럼 얽혀 있다. 여기서 중요한 본향과 원형성은 산에 대한 인식과 개념으로도 관련된다.

산은 고래로 인간에게 성스러운 곳이다. 인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산을 신성하고도 거룩한 공간으로 믿어 왔다. 땅에서 바라보면 산은 점점 뻗어 하늘로 올라간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인간세상이 모두 발아래 펼쳐져 한눈에 들어온다. 그곳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지점이다. 그래서 산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우주축이자 우주의 질서와 안녕을 관장하는 중심으로서의 우주적 산이라는 관념이 인류 초기부터 형성돼 왔다.

힌두교·불교·자이나교의 중심산인 수메루(Sumeru)산이 그렇고, 유대교의 시온(Zion)산도 마찬가지다. 중국 불교의 4대 성지인 오대산·구화산·아미산·보타산도 이와 별 다르지 않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안 성지인 세도나도 비슷한 경우에 속한다. 이러한 관념 아래 산은 여러 신성한 성격, 즉 신령의 거처, 생산의 주관자, 생명의 공급자, 망자의 거소 등으로 인식돼 왔다. 이와 같이 애초에 산신이 존재했던 그 형태를 본향 또는 산신의 원형성이다. 어떤 성별에 대한 구분은 없다. 계룡산이 바로 여기서 그 본향의, 원형의 산신이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계룡산 산신은 그만큼 오래 됐고, 중간에 한 번도 변형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그대로 보존이 가능했을까? 이에 대해 조 교수는 “계룡산 인근은 옛날에 나도 답사를 수차례 가봤는데, 의외로 오래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신석기를 기반으로 한 철기문화 유적들이 여기저기서 발굴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결정적으로는 왕도가 아니어서 감염될 위험이 매우 적었다”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조 교수는 이어 “계룡산은 숨기도 좋고 튀기도 좋은 산”이라고 덧붙였다.

산신의 성은 보는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도

공주대 사학과 이해준 교수도 크게 다르지 않은 설명을 했다.

“계룡산 산신에 대한 정체성은 확실하게 잡히는 것이 없다. 일반적 산신으로만 본다.

다른 일반 명산은 고려시대 들어서 인격신, 지역신의 성격을 많이 띠지만 계룡산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산신의 성(性)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불교에서 보는 눈과 지배권에서 신을 보는 관점과 무속에서 보는 관점이 모두 다르다. 따라서 성도 어느 특정 성을 규정하기보다는 그때 그때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현장답사를 나가 보면 산 밑과 산 중턱이나 산 위의 문화가 상당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산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연과 가까워 과거 샤머니즘적 요소가 현재까지 상당히 강하게 남아 있다. 상여가 남아 있는 마을을 보면 자연과 인간의 삶이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라 여전히 행해진다. 산신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본다. 자연과 밀접한 관련이 있든지, 산신과 어떤 특정한 연결고리가 있으면 현재까지 강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산신이라고 해서 영생하는 것은 아니다. 한때 왕성하게 신앙되던 산신령도 시간이 흐른 뒤 죽어 소멸된 경우가 많다. 산신의 탄생을 위한 기본 조건들이 더 이상 충족되지 않고 인간의 사회적 공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면 산신은 소멸될 수밖에 없다. 결국 산신도 인간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는 얘기다.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엄청나게 두려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산신의 보살핌과 가호가 없다면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고 소멸될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종교가 있고, 산신이 있다고 한다. 계룡산 산신은 정말 산신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지, 과연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얼마나 더 지속될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유일 산신제인 ‘계룡산 중악단 산신제’
고대부터 이어온 행사 일제시대 때 중단… 무유불 3교가 함께 제례 진행

[한국의 산신(山神) | (8) 계룡산]
현재까지 유일하게 전승되는 산신제는 계룡산 산신제다. 물론 이것도 과거부터 줄곧 유지됐던 건 아니다. 구한말까지 개최되다가 일제시대 중단됐던 걸 지역 민속학자와 향토사학자들이 고증을 거쳐 복원해 냈다. 지금의 산신제를 개최하기까지 난관도 많았다. 1998년 현대판 산신제를 개최하기까지의 일등공신은 지역 민속학자인 당시 공주민속극박물관장 심우성씨.

심 관장은 내심 기도발과 영발이 좋다고 소문난 계룡산에서 세계무속대회를 개최할 계획을 가졌다. 친척관계였던 당시 충남도지사 심대평 지사와 대회 개최는 합의했지만 내용면에서는 계속 이견을 보였다. 심 관장은 “국내 기도처 1위로 꼽히는 계룡산(2위는 태백산, 3위 지리산)을 세계에 알려 지역 브랜드로 삼을 절호의 기회”라고 주장했다. 반면 심 지사는 “무속대회는 다른 종교와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있고, 도에서 예산을 지원하면 다른 종교의 반발을 감당할 수 없다”고 설득했다. 갈등 중재자로 공주대 이해준 교수를 찾았다.

이해준 교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지사한테 갑자기 전화가 왔는데, ‘다른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이 교수가 꼭 해결해야 한다’며 ‘바로 나오라’고 했다.”

이 교수는 즉시 나가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곤 한마디로 중재했다. “무속대회는 한편으로 치우치니 산신제로 유불선을 모두 포함시키면 되지 않냐”고. 그래서 지금 유불선 3교가 모두 산신제 행사의 한 부분을 맡아 진행한다. 사실 유불선 3교가 하나의 행사에 다른 식으로 진행하는 제례 그 자체만으로도 이색적이라 볼 만하다.

유교식 산신제례는 조선시대 국조오례의에 따라 국행제의 순서로 공주향교에서 진행한다.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이 차례로 나와 산신에 제를 올리고 국태민안과 무사안녕을 기원한다. 웅진단에서 수신제례도 함께 올림으로써 산천을 중시하는 원래의 산신제의 의미와 기능을 되찾고 있다.

보물 제1293호 중악단에서 열리는 불교식 산신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은 산신단으로서 그 가치를 더한다. 불교는 삼국으로 들어올 때부터 무불습합(巫佛習合) 과정을 거쳐 한반도에 안착한다.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때는 팔관회와 연등회를 통해 무불식 행사가 벌어진다. 팔관회는 불교 신자가 밤낮 하루 동안 부처의 팔계를 지키며 수행하는 불교의 법회지만 산신제 기간 중에 펼쳐진다. 연등회에서는 부처의 공덕이 찬양된다. 이들은 불교적 명칭을 취하고 있으나 그 속 내용은 고대의 천신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호국적 시조제, 기복제의 성격을 지니며, 천신·용신·산신·하천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사실에서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산천제는 고려시대까지 성행했으나 조선 들어서 쇠퇴하기 시작해 구한말과 일제를 거치면서 억압으로 일부 지역에서만 명맥을 유지했다.

무속식은 산신 용왕굿과 천황굿을 거쳐 12작두굿을 벌이고 성황당 뒤풀이로 끝을 낸다. 대회 초기에는 네팔과 동남아 일부 국가에서도 무속인들이 참가했으나 해를 거듭할수록 예산감소와 지자체의 외면으로 행사규모가 축소되고 있다. 참여인원도 매년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계룡산 산신제 보존회 김경수 사무국장은 “산신제의 기본 취지는 전통을 살리면서 현대에 희망적 메시지를 주는 행사로 발전시키고 싶으나 뜻대로 잘되지는 않는다”면서 “전국 30여 만 명에 이르는 무속인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한국 무속의 메카로 상징화하는 작업을 성공시켜 지역경제 활성화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