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입추를 넘겨도 기세등등한 폭염 말입니다. 장마가 채 물러가기도 전부터 시작된 한증막 같은 더위가 도대체 끝이 날 줄 모릅니다. 주어진 며칠 동안의 휴가만으로는, 이 더위를 보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수도권에서 멀지 않은 근교의 서늘한 계곡으로 짧게 떠나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맑은 바람과 차가운 계곡 물로 소름이 돋고, 이가 딱딱 부딪치는 그런 계곡으로 말입니다. 휴가를 얻지 못했거나, 이미 다녀온 이들을 위해 수도권에서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서늘한 계곡을 뒤져 봤습니다. 계곡이 웬만큼 깊어서는 더위를 떨쳐버리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겨눠 찾아간 곳이 경기 북부의 지붕을 이루고 있는 명지산과 화악산 일대입니다. 해발 1000m를 훨씬 웃도는 산중을 넘나들면서 경기 가평과 강원 화천의 깊고 서늘한 계곡을 찾아 나선 길입니다. 장마 끝에 경기 북부 일대에 쏟아진 비로 일대의 계곡마다 차고 맑은 물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계곡이라고 다 같은 건 아닙니다.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너른 평지형 계곡이 있고, 울창한 숲이 하늘을 가린 좁은 산지형 계곡이 있습니다. 평지형 계곡은 물놀이에 좋고, 산지형 계곡은 더위를 피하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이들 계곡에는 자연이 마치 제 것인 양 돈 받고 평상을 내주곤 닭백숙이며 매운탕 따위를 내는 업소들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계곡을 점령하고 돈을 챙기는 이들의 장삿속에 눈살이 찌푸려질 때도 있지만, 가족들과 평상에 앉아 계곡 물에 담가 둔 수박 한 덩이 쪼개서 나눠 먹으며 더위를 잊을 수 있다면, 굳이 나무랄 일만은 아닌 듯했습니다. 게다가 가평과 화천 일대의 계곡은 구태여 돈을 내지 않고도 천막 하나 쳐두고 그늘 아래 몸을 담글 수 있는 곳이 넉넉했습니다.
# 75번 국도와 391번 지방도 경기 가평의 북쪽은 산으로 깊다. 해발 1000m를 오르내리는 연인산, 명지산, 화악산의 지맥이 첩첩이 겹쳐진다. 산과 산이 만나서 협곡을 이루는 자리에는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계곡이 있다. 장마의 막바지에 경기 북부에 제법 많은 비가 내려 지금 계곡마다 맑고 차가운 물이 가득하다. 가평의 계곡을 찾아가는 길에서 꼭 기억해 둘 것은 도로번호 ‘75번’의 국도와 ‘391번’ 지방도로다. 이 두 도로는 가평읍 북면에서 갈라진다. 길을 가르는 건 경기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화악산(1468m)이다. 두 갈래 길 중에서 왼쪽 길이 75번 국도이고, 오른쪽이 391번 지방도다. 이 길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두 개의 길이 줄곧 물놀이하기 좋은 긴 계곡을 끼고 이어지기 때문이다. 먼저 75번 국도부터. 가평읍에서 도마치 고개를 넘어 화천 쪽으로 이어지는 75번 국도는 명지산과 화악산을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이 도로에 올랐다면 구태여 지도를 펼칠 필요도 없다. 줄곧 가평천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너른 반석과 모래사장이 펼쳐진 가평천 변에는 수많은 유원지가 있다. 급한 여울로 흐르는 곳도 있고, 너른 암반 사이로 유순한 물길이 흐르는 곳도 있다. 보로 막은 물길이 너른 호수처럼 잔잔한 곳이 있는가 하면, 시원스레 흰 포말로 물줄기가 쏟아지는 곳도 있다. 가평천의 유원지에서는 음식점이나 민박집이 물가에 천막을 쳐놓고 음식을 팔거나 자릿세를 받는다. 휴가 피크 시즌에는 평상 하나당 하루 5만 원 안팎. 예전에는 상인들이 마치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자리를 독차지하고 횡포를 부렸지만, 요즘은 행락객들이 인근에 자리를 펴거나 그늘막을 치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구태여 유원지가 아니더라도 천변은 넓고, 자리는 많다. 이 길에 오른다면 미리 장소를 정해둘 것 없이,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 자리를 펴면 된다. # 가평천 계곡서 즐기는 한나절 물놀이
호수유원지는 가평천을 통틀어 물길의 폭이 가장 넓다. 보로 막은 물이 울창한 숲 아래 마치 수영장처럼 가둬져 있다. ‘호수’라는 유원지 이름도 그래서 붙여졌다. 물이 깊지 않아서 아이들과도 안심하고 놀 수 있다. 계곡 가의 명당자리는 상인들이 쳐놓은 평상과 천막이 차지하고 있지만, 자리 값을 치른다 해도 그리 아깝지 않은 곳이다. 호수유원지 쪽이 넓은 수영장을 연상케 한다면 독바위 유원지는 계곡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곳이다. 발목을 담그고 다리 아래서 느긋하게 낮잠을 잘 수도 있고, 제법 깊은 물에서 몸을 담글 수도 있다. 두 유원지는 다리 하나를 두고 이쪽저쪽에 있어, 한쪽에다 자리를 잡으면 양쪽을 오가며 즐길 수 있다. 용이 살았다는 못. 용소(龍沼)란 이름은 어디든 흔하다. 가평천에도 용소가 두 개 있다. 하나가 75번 국도의 화악산 약수 못미처 도대리에 있는 용소폭포다. ‘다이빙 계곡’으로 더 알려진 용소폭포는 계곡에서의 물놀이가 시들한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암반 위에서 다이빙을 하며 즐기는 곳이다. 계곡은 근육질 젊은이들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또 한 곳의 용소는 가평천 상류 쪽에 있다. 75번 국도가 도마치고개에 닿기 전에 왼편으로 수묵화처럼 그윽한 풍경을 그려내는 용소가 있다. 이 폭포는 도대리의 용소폭포와 구분하기 위해 ‘적목 용소’라고 불린다. 적목 용소는 자그마하지만 워낙 수심이 깊어 해마다 익사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급기야 2014년 여름에 여기서 다섯 명이 숨지자 폭포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됐다. 지금은 다리 위에서 경관 감상만 할 수 있는데, 서늘한 숲에서 두 단을 이뤄 쏟아지는 폭포의 그윽한 운치와 매혹적인 코발트 빛의 물색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더위가 저만치 물러간다. # 가마솥더위도 위세 잃는 곳…조무락골 75번 국도를 말하면서 이곳을 빼놓을 수는 없다. 한낮에도 하늘을 가린 숲으로 어둑한 계곡 ‘조무락골’. 경기 북부의 계곡 중에서 가장 서늘한 계곡 하나를 꼽으라면 화악산과 석룡산 사이의 깊은 골을 적시며 흐르는 여기, 조무락 계곡을 들 수 있겠다. 조무락(鳥舞樂). 새들이 즐겁게 춤추며 지저귄다는, 제법 운치 있는 이름이다. 이름만 그런 게 아니다. 초록 이끼로 가득한 계곡을 끼고 소(沼)와 담(潭)과 폭포가 끊이질 않는 이 계곡은 전체가 비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75번 국도의 지나가는 작은 다리 ‘38교’에서 계곡은 시작된다. 초입의 계곡은 식당과 펜션들의 차지다. 상인들이 계곡 한쪽으로 평상을 놓고 손님을 받고 있는데, 구태여 여기다가 자리를 펴지 않아도 좋다. 자그마치 6㎞나 이어지는 계곡의 상류 쪽이 한산하고 경관도 더 빼어나며, 물놀이하기도 좋다. 계곡으로 한발 한발 더 들여놓을수록 점입가경이다. 계곡을 옆에 끼고 이어지는 진초록의 숲 그늘을 따라 오르면 청량한 물소리와 새소리가 서늘하다. 계곡이 온통 그늘이라 돗자리 하나만 펴놓고도 더위를 잊을 수 있다. 숲 밖은 뜨거운 열기로 벌겋게 달아오른 날이었지만 거짓말처럼 숲 안은 차가웠다. 밖과 안의 기온 차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계곡의 딱 중간쯤에 복호동 폭포가 있다. 초록 이끼와 양치식물들이 그득한 어두운 숲에서 실타래를 걸어놓은 듯 계곡을 타고 쏟아지는 폭포의 비밀스러운 모습에서는 귀기 어린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 물놀이를 즐기며 더위를 식히러 찾아갔더라도 복호동 폭포까지는 꼭 다녀오자. 계곡 초입에서 폭포까지는 2.7㎞ 남짓의 거리지만, 가파른 구간이 없는 데다 산길이 그늘 속으로 이어져 그리 힘들이지 않고 다녀올 수 있다. # 화악산 너머 계곡서 이상향을 만나다 이제 가평읍 북면의 두 갈래 길 중 오른쪽 391번 지방도로를 따라갈 차례다. 이 도로는 화악산의 능선을 타고 넘어가는 줄곧 가파르고 굽은 산길이다. 길은 화악천 물길을 끼고 잘 단장된 캠핑장과 세련된 펜션을 지나간다. 계곡 곳곳에 들어선 캠핑장은 따로 추천할 곳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모두 쾌적했다. 피서철의 한복판이지만, 캠핑장에는 드문드문 빈자리도 있었다. 화악천은 가평천에 비하면 수량이 적지만 군데군데 맑은 소(沼)에서 물놀이를 즐기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391번 도로는 가평과 화천을, 아니 경기도와 강원도를 가른다. 도의 경계가 화악산의 고개 끝의 화악터널이다. 터널을 지나자마자 길옆으로 자그마한 전망대 겸 휴게소가 있다. 휴게소 주변에는 더위를 피해 여기까지 올라온 이들이 야영을 즐기고 있었다.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대라 바람 끝이 서늘했다. 전국이 열대야로 들끓는 날이었지만, 해질 무렵 이곳의 온도는 21도까지 내려갔다. 경기 가평 쪽에서 화악계곡을 타고 올라온 391번 도로는 화악터널을 지나 강원 화천 쪽으로 내려선다. 화악산의 화천 쪽에는 용담계곡이 있다. 본래 이름보다 ‘곡운구곡(谷雲九谷)’으로도 더 잘 알려진 계곡이다. 곡운구곡이란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곡운 김수증이 지어 붙인 이름이다. 당쟁과 사회에 연루돼 곤욕을 치렀던 김수증은 말년에 계곡의 경관에 마음을 뺏겨 여기 터를 잡고 아홉 곳의 경관에다 저마다 이름을 붙였다. 그 후 곡운구곡의 빼어난 경관은 후대의 선비들까지 불러들였다. 매월당 김시습이 거쳐 갔고, 다산 정약용이 이곳의 경관을 글로 남기기도 했다. 곡운구곡은 외지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한여름에도 붐비지 않는다. 평상과 천막을 쳐놓고 돈을 받는 상혼도 없다. 1곡 방화계부터 9곡 첩석대까지 경관을 차례로 감상하고 마음에 드는 자리를 택해 자리를 펴고 호젓하게 물놀이를 즐기면 된다. 다만 구곡 중 최고의 경관인 군부대 앞의 4곡 백운담은 지금 출렁다리 공사로 접근할 수 없다.
# 절정의 연꽃으로 뒤덮인 강변마을 가평에서 75번 국도를 타고 도마치재를 넘거나, 391번 지방도로로 화악산을 넘으면 강원 화천 땅이다. 한낮의 뙤약볕 아래 더위에 숨이 턱턱 막히기는 도시나 지방이나 마찬가지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사뭇 다르다. 도시의 여름밤은 낮 동안 달궈진 시멘트건물과 아스팔트가 뿜어내는 열기로 여전히 뜨겁지만, 경기 북부의 도시는 그래도 해만 지고 나면 선선하다. 서울에 폭염 경보가 내려진 날, 강원 화천읍의 아침 최저기온이 18.5도까지 떨어졌다. 가마솥 같은 폭염이 계속되는 날에도 화천에서는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한 대기 속에서 느긋한 산책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어붙인 목적지가 곡운구곡에서 차로 20분이면 닿는 화천 하남면 서오지리의 건넌들 마을이다. 건넌들 마을은 한때 화천에서 가장 넓은 들이 있었다는 북한강변의 마을인데, 춘천댐이 들어서면서 그 너른 들이 죄다 수몰되고 말았다. 수몰된 낮은 습지에는 13년 전에 조성된 너른 연밭이 있다. 지금 연밭에는 수련과 연꽃, 어리연꽃이 가득 피어나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습지 둑 너머의 북한강 수면 위에도 습지에서 번져나간 흰 어리연꽃이 가득 피어났다. 너른 습지에 피어난 붉고 흰 연꽃과 싱그러운 초록의 연잎, 그리고 북한강 수면을 뒤덮다시피 한 흰 어리연꽃이 어찌나 화려하던지…. 여름날 적막 속에서 피어난 꽃 앞에서 그걸 봐주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75번 국도나 391번 지방도로 변에는 펜션들이 즐비하지만 8월 중순까지는 빈방을 찾기 어렵다. 방이 있더라도 피서철에는 평소의 두 배가 넘는 숙박요금을 받으니 수도권에서 출발한다면 당일로 다녀오는 것이 낫겠다. 화천읍의 모텔을 숙소로 택하는 것도 방법이다. 화천읍도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하다. 화천읍 중앙로 일대에 모텔들이 몰려 있다. 모텔 리즈텔(033-442-2230)은 좀 낡긴 했지만, 방을 깔끔하게 관리하고 있어 평판이 좋다. 가평읍에는 송원막국수(031-582-1408)가 이름난 맛집이다. 메밀도, 김치도 중국산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맛은 괜찮은 편이다. 목동리에는 막국수·손만두 등을 내는 식당이 많다. 목동막국수(031-582-1955)와 두부만두전골을 내놓는 인천집(031-581-5533), 잣국수로 이름난 명지쉼터가든(031-582-9462) 등이 알려진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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