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지리산 도인들 시사 전문가 뺨치네요

醉月 2009. 9. 19. 09:29
지리산 도인들 시사 전문가 뺨치네요
청학동 도인촌 김덕준 촌장“지금은 易(역)이 바뀌는 때, 올바름 찾아 새 시대 열어라 10년 뒤 한국이 세계 중심 된다”
이만훈 기자의 사람 속으로
 

입추(立秋)를 맞아 국가안녕을 기원하는 치성을 드리기 위해 모인 도인촌 사람들.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덕준 촌장이다.

세상이 시끄럽다. 민초들은 먹고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이고, 정치꾼들은 하고많은 날 물고 뜯기에 열중이다.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다. 문득 지리산 청학동이 떠오른다. 서양인에게 유토피아가 있다면, 중국인에게는 무릉도원이, 우리에게는 청학동이 아니던가?

그날은 비가 몹시 쏟아졌다. 남도는 멀쩡하다는 말을 믿고 하염없이 퍼붓는 빗줄기 속에 서울을 출발했는데, 가는 내내 물세례를 받으며 허우적댔다. 밤 10시가 다 돼서야 간신히 도착했다. 청학동의 하늘마저 뻥 뚫린 듯 퍼부어 대는 양이 비를 몰고 내려갔음이 분명하다.

청학동에서도 맨 윗자리에 도인촌이, 도인촌 머리에 천제당이 자리하고 있다. 도인촌은 민족종교의 하나인 유불선합일갱정유도(儒佛仙合一更定儒道·이하 갱정유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고, 천제당은 이들이 천제(天祭)를 올리는 제당이다. 빗줄기가 여전히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곳곳에서 피어 오르는 물안개도 그렇고, 오가는 이가 없어서인지 마을이 온통 적막에 싸여 마냥 신비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천제당에 오르니 한 노인이 “빗속에 오시느라 욕보셨다”며 반가이 맞는다. 작달막한 체수에 상투를 틀고 유건(儒巾)에 한복을 입은 품이 얼핏 보아도 도인풍이다. 바로 도인촌 촌장 청강 김덕준(80) 옹이다. 맞절로 수인사를 마치자마자 김옹은 대뜸 “혼란의 시기인 만큼 어느 때보다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일갈한다.

공연스레 한 방 맞은 것 같아 짐짓 혼란한 시기라고 하는 까닭을 물었다. 대번 국내 경제 사정이며 정치, 북핵 문제는 물론 국제 문제까지 쳐들며 얽히고 설킨 상황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산중도인이 아니라 마치 시사전문가 같다. 하지만 이내 도인으로서의 ‘정체’를 드러낸다.

국내외 상황을 한참 설명하다 ‘혼란의 이유’를 드러내는 대목에서다. “지금은 역(易)이 바뀌는 때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우주의 운행이 음의 시대에서 양의 시대로 바뀌는 와중이라는 말이지요. 이 같은 변역의 시대에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마련입니다.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세상의 기운이 그렇게 작용하기 때문이죠. 한마디로 말세(末世)입니다.”아니 이 노인네도 말세타령인가?

“하지만 말세라는 것이 일부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절망적이도록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려면 구시대는 정리되게 마련이죠.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진통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하지만 당연한 일이라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고 맞추려는 노력이 절대 필요하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으니까요. 벌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구시대의 존재로 치부되는 것을 뜻합니다. 청산의 대상이 되는 거죠. 하늘의 뜻이란 이런 것입니다.”

김옹은 말세를 극복하고 새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도(道)라고 강조한다. 도대체 도란 무엇이란 말인가?

“도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이는 신과 소통하는 경지를 말하고, 또 어떤 이는 밥 먹고 차 마시는 일에 이르기까지 도 아닌 것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각인각색이죠.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각자 주어진 자리에서 이 세상 만인의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도니까요. 문제는 이처럼 간단한 원리를 깨닫기도 어렵거니와 나아가 실천하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욕심으로 눈이 멀어 눈앞에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죠. 서로 자신의 이익만 챙기려는데 어찌 평화가 있을 수 있겠어요? 그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결국 마음을 다스려 눈에 씌워진 껍질을 벗겨내는 일입니다.”


지리산 도인촌의 도인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기심을 죽이고 이타심을 키우라는 말이다. 참 간결한 말씀이다. 진리를 이리도 간결하게 드러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상당한 내공이다.

김옹이 31세에 청학동에 들어와 올해로 50년째 닦는 도는 ‘갱정유도’다. 갱정유도는 도조(道祖)인 영신당주(迎新堂主) 강대성(姜大成·1890~1954) 선생이 1928년 전북 순창 회문산 금강암에 들어 1년여 수행 끝에 도통해 창도한 민족종교다.

동서양의 정신적 지주인 유·불·선(*기독교를 도교와 같이 분류)을 유교를 중심으로 하나로 통합해 참된 인간의 길을 찾고, 궁극적으로는 도덕선심(道德善心)이 충만해 만민이 평화를 누리는 신천지를 이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갱정유도는 특히 새로이 펼쳐지는 신천지의 중심을 바로 한반도로 보고, 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도덕심을 회복하는 등 대비를 할 것을 가르친다.

이 같은 교리로 추종자가 한때 전국적으로 50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번성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옹은 “변역의 시기에 겪는 지금의 혼란이 진정되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으면 10여 년 안에 우리나라가 중심이 되는 좋은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지극히 국수적이고 아전인수격으로 보이지만 나름의 논리는 있다.

“좀 복잡하고 어려운 말이지만 우주도 우리가 겪는 것과 마찬가지로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가 있어요. 우리에게는 사계절이 한 번 도는 데 1년이 걸리지만 역의 원리상 우주가 한 번 도는 데는 인간세를 기준으로 4,320년(*모든 변화는 음양이 서로 교차하면서 일어난다. 변화의 기본 단위는 1년으로, 하루는 12지에 맞춰 열두 시간이요, 1년은 12×360=4,320시간. 또 우주의 한 시간은 인간세의 1년에 해당되므로 우주의 1년을 계산하면 이렇게 된다)이 걸립니다. 그런데 전반기 2,160년은 봄·여름으로 만물이 자라는 양(陽)의 시대이고, 후반기 2,160년 역시 가을·겨울로 만물이 성장을 멈추는 음(陰)의 시대죠. 알다시피 양은 동쪽을 가리키니 동양의 시대요, 음은 서쪽을 가리키니 서양의 시대예요. 지나간 문명의 성쇠를 보아도 알 수 있듯 문명의 초반에는 동양이 우세하다 후반에 서양으로 넘어가 오늘에 이르잖아요? 하지만 이미 우주의 1년이 다하고 이제 다시 새로운 1년이 시작됐어요. 그러니 이번에는 당연히 동양의 차례죠. 그러면 왜 우리나라냐? 동양에서도 가장 동쪽 땅이 한반도 말고 더 있습니까? 일찍이 최수운 선생님이 ‘천하 대운이 동양으로 온다’고 한 말씀이나, 강증산께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신 것이 다 같은 맥락입니다.”

김옹이 주장하는 ‘한반도중심론’의 ‘근거’는 이뿐만 아니다.“불교를 보세요. 발상지인 인도에서 사라진 지 오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잖습니까?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가장 기세 좋은 곳이 우리나라죠. 유교도 중국에서는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 정신과 전통이 남아있는 곳이 우리나라입니다. 그뿐입니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마지막으로 대치하는 곳도 우리나라라는 말입니다. 이렇듯 모든 종교와 사상,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이 땅을 종착지 삼아 모여 있는 것은 이곳이 바로 새로운 시작의 터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1930년 광양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김옹은 어릴 적 부모를 따라 하동으로 옮겨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갱정유도를 처음 접한 것은 해방 후 좌우익의 대결로 혼란이 극심하던 열아홉 살 때. 갱정유도 도인들과 함께 도조를 만나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말씀’을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생활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10여 년을 보내는 사이 결혼도 하고 전쟁도 겪었다. 특히 난리통에 친구 등 숱한 이들의 주검을 보면서 구도의 결심을 굳혔다. 휴전이 되면서 그동안 비어 있던 청학동으로 도인들이 들어갔다는 소식도 들렸다. 청학동은 좌우익 이념 갈등이 한창이던 무렵 빨치산 소탕을 위해 당국의 소개(疏開)정책에 따라 한동안 비어 있던 터였다.

“서른 한 살이었으니 큰아들을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예요. 이미 위로 딸 둘이 더 있었고요.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어물거리다가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가타부타 뭐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평소 도인들과 사귀며 지내는 것을 아셨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형님이 나무라며 말리셨습니다. 아내도 ‘그런 산속에 가 어린 것들과 어떻게 사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남들도 사는데 왜 못 산다고 하느냐. 도를 닦는 일이 어디 잘 먹고 잘살기 위한 것이냐’고 했더니 더 이상 군말이 없었습니다. 내가 고집이 센 편인데다 구도에 대한 마음이 워낙 간절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이 대목에서 다섯 살 아래인 부인은 반농담조로 “일방통고식으로 윽박질렀다”며 “당시 법도가 그러하니 어쩔 수 있었겠느냐”며 웃었다) .

31세에 청학동에 들어가


김덕준 옹이 곧 좋은 세상이 온다며 파안대소하고 있다.
하지만 청학동 가는 길은 멀고도 힘들었다. 지금이야 차를 타고 안마당까지 갈 수 있지만 당시에는 길 없는 길을 가야 했다. 혼자도 아니고 갓난 아들까지 다섯 식구가 움직이는, 그야말로 고생길이었다.

악양까지 버스로 이동한 뒤 산을 넘어 도착하기까지 꼬박 하루가 걸렸다. “솥단지와 양재기 몇 개, 이부자리와 옷가지 몇 벌이 전부였습니다. 어린애를 둘러업은 데다 이고 지고….꼭 피난길 행색이었죠. 이제껏 말은 안 했는데 정말 그때 애들 어머니가 욕 많이 봤습니다.”

청학동에 도착해보니 다섯 집이 있었다. 급한 대로 얼기설기 움막을 지었다. 그리고 곧바로 수련을 시작했다. 먹고 사는 것은 틈틈이 산나물·버섯·약초 등을 채취해 해결했다. 나중에는 벌도 치고 화전을 일구어 감자·콩·팥 등도 심었다. 특히 지대가 높아 종자용 감자가 잘됐다.

하지만 생필품을 마련하려면 짐을 꾸려 하동까지 지고가 물물교환해야 했다. 농산물을 지고 산길을 오가노라면 꼬박 사흘이 걸렸다. 당시만 해도 주막이 있어 잠은 그곳에서 해결했다. 한푼이라도 아낄 요량으로 밤을 도와 집으로 오다 산짐승을 만나 까무러친 일도 있다. 청학동에 들어와 딸 둘에 아들 셋을 더 낳았다.

식구가 늘어난 만큼 어쩔 수 없이 하동 나들이도 잦을 수밖에 없었다. 사정을 아는 부모형제와 친구들이 “사서 고생한다”며 혀를 차기도 했지만, 한 번도 고생이라고 여겨본 적이 없다. 단지 도를 닦는 데 필요한 수행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을 뿐이다.

“수련은 끝이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공부하고, 그에 따라 실천하며 생활하는 것 자체가 수련입니다. 알기만 하고 다른 짓을 하면 안 하느니보다 못합니다. 처음 이곳에 와서는 아는 것이 없어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목욕재계한 뒤 경(經) 공부를 했습니다. 신화경(神化經)·해인경(海印經)·신조귀래경(神助歸來經)·내명경(來明經)·천은안위경(天恩安位經) 등을 소리 내어 스물한 번씩 읽는데, 다 마치려면 네 시간이 걸립니다. 하루에 네 번씩 하다 보면 잠잘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였죠. 평소에는 다 못하니 철 따라 날을 잡아 ‘보름수련’ ‘백일수련’을 했습니다. 이때는 아예 집에서 나와 산속에 수련당을 지어놓고 밥을 해먹으며 용맹정진(勇猛精進)합니다. 이렇게 해도 최소 20년은 걸려야 하늘의 뜻을 무늬만이라도 감잡을 수 있으니까요. 50년을 해도 뚜렷하지 않은 것이 바로 도입니다.”

김옹은 지금의 청학동을 탄생시킨 1세대다. 행정구역으로는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인 청학동은 지리산 삼신봉(1,284m) 동쪽기슭 해발 800m에 위치한 산골마을이다. 도대체 청학동이 어떤 곳이기에 그가 멀쩡한 하동을 등지고 100리 산속을 찾아 들어간 것일까?

“청학동은 예부터 신선이 푸른 학을 타고 노닐던 지상선경이라 하여 무병장수하고 전쟁과 환란, 천재지변이 없는 이상향으로 여겨왔습니다.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청학동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나 풍수지리상으로나 진정한 청학동은 이곳뿐입니다. 고려 때 학자인 이인로(1152~1220)의 <파한집(破閑集)>에 ‘진주 서쪽 147리 거리에 청학동이 있는데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사방이 옥토로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고, 그 속에 오직 청학이 서식하는 까닭에 이렇게 부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신라 때 고운(孤雲) 선생께서 난세를 피해 이곳에서 잠시 유하셨다는 전설이 있고, 도선국사께서도 ‘진주재를 넘어 청학동에 이르니 평생 처음 보는 땅’이라고 하셨습니다. 무학대사 또한 이곳을 둘러보시고 청학동결(訣)을 남기셨죠. 그런데 이곳은 삼신봉 밑에 자리하고 있어요. 삼(三)은 신성한 수입니다. 정·반·합의 완성을 뜻하기도 하고, 천·지·인을 뜻하기도 하죠. 우리에게 유·불·선도 같은 맥락입니다. 청(靑)은 동쪽을 가리키는 동시에 목(木)으로 만물이 생겨남을 뜻합니다. 이를 종합하면 유·불·선이 하나돼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지덕을 갖춘 곳입니다. 무학대사께서 달사(達士=도사)가 수없이 나올 것이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죠.”


서당 훈장인 막내아들 가족과 함께한 김덕준 옹 부부.

실제로 이곳에는 신라시대부터 수많은 사찰이 있었고, 그 흔적으로 미륵골·상불지·관음골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지금의 도인촌도 조선시대에 ‘진주암’이 있던 자리다. 본격적으로 마을이 생긴 것은 300년 전. 일제 때는 많은 독립운동가가 탄압을 피해 이곳에 숨어 활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하의 명당도 인간들의 패악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환란의 무풍지대’라는 청학동도 한국전쟁 때 빨치산 소탕을 위해 주민들이 강제로 쫓겨나는 ‘변’을 당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에 대해 김옹은 “변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라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헌 것을 비운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청학동에 다시 사람이 모여든 것은 휴전 이후로, 맨 처음 갱정유도인 세 명이 각자 구도를 위해 혈혈단신 들어왔다가 나오지 않자 나중에 가족이 따라와 집을 짓고 가구를 이룬 것이 시초다.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없는 첩첩산중 비처(秘處)에 숨어들었지만 도인들 사이에 알음알음으로 전해져 몇 년 지나지 않아 열두 가구가 생겨나면서 마을을 이루게 됐다.

초창기에는 생활의 어려움 등으로 드나듬이 있었지만 1970년대 초 외부에 알려질 때까지 이 가구 수는 유지됐다. 청학동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모 식품회사가 발효유 TV 광고를 찍으면서 청정한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이곳 주민을 등장시킨 것이 계기였다. 흑백광고였지만 놀라움이었다.

개명천지에 아직도 상투에 갓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고, 사내애들도 바지저고리 차림에 머리를 땋아 늘어뜨리고, 학교 대신 인성교육을 한다며 서당을 고집하고…. 남들한테는 신비감을 줬지만 사실 당시 주민들의 살림살이는 말이 아닐 정도로 어려웠다. 특히 1967년 지리산이 국내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화전과 사냥이 금지되는 바람에 산에 모든 것을 기대던 생활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길 없는 산비탈을 타고 10리가 넘는 곳에 초등학교가 있고, 바느질 한 땀도 호롱불에 의지해야 하는 삶-. 아무리 도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당장 입에 풀칠이 어렵게 되자 이번에는 청학동을 떠나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녀들이 커가는 데다 하나 둘 외지인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묻어 들어오는 ‘바깥 물’이 청학동을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는 사실 어려웠어요. 주민이 130명쯤 되는데 살길이 막막해졌으니까요. 그래서 나를 포함해 몇몇이 나섰지요. 국회의원이고 도지사고 수없이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래서 이나마 길도 생기고 전기도 들어온 것입니다. 청학동이 행정상 단일 동(洞)마을로 된 것도 이 때입니다.”

70리 떨어진 횡천에 가야 볼 수 있던 ‘신작로(대로)’가 근처 아래까지 연결되고, 마을로 통하는 산길은 새마을 운동의 취로사업으로 주민들이 닦았다. 바깥세상과의 통로가 마련된 것이다. 1978년에는 전기도 들어왔다. 그러자 외부인의 출입도 잦아지고 마을의 ‘명성’도 높아졌다.

그동안 주민의 자녀들 교육기관이었던 서당이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생계수단이 없던 주민이 벌이 수단으로 외부인에게 전통적인 방법 그대로 한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인성교육 차원에서 예절도 가르쳤다. 입시 위주의 교육에 지친 도시의 어린이와 학부모한테 먹혀 들었다.

그러자 마을을 나갔던 사람이 하나둘 돌아와 마을 아래에 서당을 차렸다. 도인촌 아래는 성장한 자녀들이 분가해 이미 조그만 마을이 형성돼가던 참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붐이 일기 시작해 1990년대 초반에는 무려 스무 곳이 넘는 서당이 들어서 방학 때만 되면 청학동은 학생들로 붐볐다.

나중에는 공교육에서 탈락한 아이들이 학교 대신 이곳을 찾아 아예 먹고 자며 서당 교육을 위해 장기간 머무르는 등 대안교육의 명소로 이름을 날리며 오늘에 이르렀다. 요즘에는 방학 때 찾아오는 학생보다 평소 체험학습 형태로 오는 수가 더 많아 한 번에 500명 가량 수용할 수 있는 기업형 서당도 세 곳이나 된다.


마을 촌장에 뽑혀

김옹은 도인촌에 들어온 뒤 줄곧 이곳을 지켜온 몇 안 되는 청학동 터줏대감이다. 현재 도인촌에서 그보다 나이가 많은 이는 두 사람밖에 없다. 한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으나 중간에 외지로 나갔다 다시 들어왔고, 한 사람은 입촌이 김옹보다 늦다. 그래서 도인촌 ‘짬밥’으로는 김옹이 최고참인 셈이다.

김옹이 촌장에 추대된 건 6년 전. 마을의 어른인데다 젊은 시절부터 20여 년 동안 총무 일을 보아온 터여서 마을 대소사 처리에 그만한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촌장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마을의 상징이자 존재 근거이기도 한 천제당을 관리하고 천제를 모시는 것.

천제는 50년 전부터 치러 왔는데, 지금의 천제당은 마을 도인들이 갹출해 땅을 마련한 다음 군의 건축비 지원으로 7년 전 옛 터에 지은 것이다. 천제는 음력 4월8일과 10월8일, 그리고 추석에 크게 올리고, 24절기와 1년에 여섯 번 드는 경신(庚申)일에도 치성을 드린다. 이밖에 네 번의 중양일(重陽日·3월3일, 5월5일, 7월7일, 9월9일)에는 산제(山祭)를 모신다.

제사는 유가의 법을 따른다. 다만 육고기와 비린내 나는 생선은 쓰지 않는다. 대신 포를 올린다. 선인들이 비린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공식 행사만 1년에 무려 서른일곱 번이나 모시는 일이 어디 만만한 일인가? “제사를 모시는 비용이 제법 듭니다. 지금까지 우리 도인끼리 갹출해 행사를 치러오는데 힘에 부칩니다.

그래서 제사 때 군수를 모셔 지원을 요청하려고 해도 한밤중에 하기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벽 1시에 목욕재계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제사를 지내노라면 중간에 소변도 못 보면서 진행하는데도 새벽 6시쯤에야 끝나기 때문입니다.” 김옹은 행사가 없는 날에도 늘 천제당에서 살다시피 한다.

천제당은 늘 개방돼 있어 찾아오는 외부인을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도인촌 생활에 대한 호기심에서부터 ‘도란 무엇인가’ 등 심오한 부분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일일이 응대해주는 것도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늘 신이 난 모습으로 친절하기 짝이 없다.

“굳이 캐묻지 않으면 어려운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그저 곧 우리나라에 대운(大運)이 찾아와 세계의 중심이 될 터이니 항상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일러주고는 합니다. 그러면 어떤 이는 반갑게 듣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이상한 눈초리를 하기도 합니다.”

도인촌을 특별지구로

김옹은 국민들한테 자신감을 심어주고 행복하기 위한 삶의 방식을 알려주는 것일 뿐인데 자신들을 사이비 종교집단처럼 백안시하는 이들도 있어 안타깝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손님이 없을 때 늘 나라와 국민이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도인으로 사는 것이 어렵지 않으냐는 질문에 “잘 먹고 잘살지는 못하지만 안빈낙도라는 것이 있다”며 “어렵다고 생각했으면 지금까지 이렇게 살고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자신은 도를 닦는다는 목표가 있으니 그렇다치고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고충이 없었을까? “입에 풀칠하는 거야 게으름 피우지 않고 꾸무럭거리면 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식구들이 탈이 났을 때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공기 좋고 물이 좋아서인지 다행히 식구들이 큰 병치레는 하지 않았어요. 배탈이나 고뿔 같은 소소한 것은 약초로 해결했습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아이들이 커서는 여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한복차림에 머리는 길렀죠, 학력은 없죠. 그러니 누가 거들떠나 볼까 마음고생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런데 묘합디다. 이 문제도 술술 풀린 것을 보면 지금 생각해도 정말 청학동이다 싶습니다.”

김옹의 자녀 8남매는 하나같이 ‘무학’이다. 서당공부가 전부일 뿐 나라가 인정하는 졸업장은 한 명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모두 제 짝을 찾아 잘사는 것을 보면 청학동의 지덕(地德)을 본 것이라며 김옹은 자녀 출가기를 펼친다.

“무슨 짝인지 몰라도 서울 등 도시에서 자라고 대학까지 나온 애들이 우리 자식들이 좋다고 합디다. 사돈 되는 분들도 몇 집은 처음에는 반대하다가도 나중에는 허락해 모두 잘살고 있어요.”


도를 닦는 것은 장소불문, 시간불문이다.

요즘 청학동은 옛날의 청학동이 아니다. 길이 포장된 지 오래고, 차 없는 집이 없다. 진주와 하동을 각각 하루 두 차례, 다섯 차례씩 오가는 버스 노선도 생겼다. 각종 생필품을 파는 가게도 여럿이고, 민박집도 곳곳에 있다.

밤이면 가로등도 켜지고, 여기저기서 반짝이는 전깃불 빛이 산속 마을임을 잊게 한다. 특히 도인촌 입구부터 천제당에 이르는 오르막길마저 몇 년 전 돌로 포장해 길옆으로 늘어서 있는 산죽나무지붕의 초가집들과 대비를 이루면서 관광지 같은 느낌이 절로 든다.

한마디로 신비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래서 예전 사진 속 청학동을 상상하고 찾아온 사람들은 100% 실망한다. 그네들 생각에는 도를 닦는 곳이라면 으레 엄숙하고 신비한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없기 때문이다. 당초 청학동이 생겨난 이유가 거의 상실돼버린 오늘에도 과연 이곳이 ‘도의 성지’일까?

“솔직히 말해서 예전보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져 도를 닦는 분위기는 많이 망가진 것이 사실입니다. 주위가 어수선한데 집중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도인들 중에는 아무도 모르는 산속으로 들어가 한 달 혹은 백일씩 수련하고 나오고는 하는 이도 많아요. 하지만 도인들의 생계에는 도움이 되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마을에서 전혀 도를 닦을 수 없을 정도도 아니니까요. 또 그동안에는 배우고 익히는 데 주력했지만 이제는 깨달은 것을 널리 알려야 하는 단계인데 일부러 찾아 다녀야 할 판에 그런 수고를 더는 이점도 있기는 합니다.”

어쩔 수 없다는 표현이 지극히 현실과 타협하려고 애쓰는 것 같아 안쓰럽다. 하지만 김옹은 “어차피 도를 닦는다는 것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며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해도 심지만 굳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김옹은 도인들이 생계문제로 자꾸 도인촌을 비우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현재 도인촌 11가구 가운데 세 집이 집을 비운 상태다. 살고 있는 도인들 중에도 근거만 도인촌일 뿐 아랫마을에 서당을 차려놓고 생활하는 이가 여럿 된다. 아랫마을까지 아우르는 청학동 전체 53가구 가운데 20가구가 도인가구인 것만 봐도 사정을 알 수 있다. 저간의 형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보다 잿밥에만 팔려있다”고 비아냥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김옹은 촌장으로서 도도 살리고 사람도 살리는 길이 없을까 고민한다. 그는 “당국에서 도인촌을 특별지구로 지정해 지원해줄 것”을 제안한다. 그러면 도인촌도 살고 궁극적으로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도 오히려 플러스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청학동이 변화의 물결 속에 고민에 빠져 있는 가운데서도 청학동의 아이덴티티를 그나마 유지시켜주는 것은 도인들의 차림새. 그 중에서도 애 어른 할 것 없이 기른 머리는 아직도 이곳이 ‘도인들의 터’임을 웅변해주는 문장(紋章)이다.

“하늘의 변화에 따라 도래하는 새로운 시대는 앞서 말한 대로 양의 세상이요, 낮의 세상입니다. 계절로 치면 가을 겨울이 지나고 봄이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봄기운에 맞춰 모든 것을 자라도록 하는 것이 순리죠. 따라서 머리를 기르는 것도 우주의 섭리에 맞추는 것일 뿐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머리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자르지 않는 것이에요. 그런데 머리를 자르는 것보다 파마하는 것이 더 나쁩니다. 싹을 자르면 다시 자랄 수 있지만 불로 지지면 영원히 재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다시 한번 말합니다. 지나간 음의 시대에는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해도 됐지만 새로운 시대에는 머리를 소중히 해야 합니다. 머리가 보배이기 때문이죠. 왜냐고요? 인간이 소우주라는 것은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소우주의 가장 꼭짓점이 바로 머리입니다. 그러니 우주의 기운을 제대로 받으려면 안테나와 마찬가지인 머리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갓을 쓰는 것도 같은 까닭입니다.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다잡기 위한 장치의 의미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소중한 머리를 온전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죠. 옛날 어른들이 다 뜻이 있어 그런 것을 법으로 삼은 것이에요. 상투를 우리는 상두라고 하는데, 이는 북두칠성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네 번, 뒤로 세 번 틀어 올리죠. 상투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꽂는 동곳은 북극성을 의미합니다.”

이 같은 믿음으로 김옹은 청학동에 들어온 이래 지금까지 한 번도 이발소에 가본 적이 없다. 머리뿐만 아니라 콧수염·턱수염 등 몸에 난 터럭을 한 올도 다치게 한 적이 없다. 그의 아들들도 그렇고, 손자들도 대부분 그렇다. 그렇다면 한복은 왜?

“한복은 곧 선복(仙服)입니다. 양의 시대에 맞는 옷입니다. 흰색은 밝음을 뜻합니다. 도포 끈을 청띠로 매는 것은 푸른 색이 생(生)을 상징하기 때문이죠. 반대로 검은 색은 죽음의 색이니 절대 안 됩니다.”

하여 김옹의 외출 정장은 영락없는 조선시대 모습이다. 가죽신이나 미투리 대신 흰 고무신을 신는 것을 빼면 말이다. 지금이야 연세가 지긋해 그런대로 멋도 느껴지지만 한창 젊어 서울 나들이를 할 때도 같은 차림새였다니 꽤나 쑥스러웠을 법도 하건만 그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한다.

“서울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을 때 나는 그들을 보고 웃었습니다. 사람이 짐승과 구별되는 것이 의복을 입는다는 것인데, 제대로 의관을 정제한 것을 보고 웃으니 그게 우스운 일이죠. 차림을 갖춘다는 것은 스스로 다스릴 줄 안다는 표시입니다.”

김옹은 연치에 비해 엄청 건강한 모습이다. 안경 없이도 깨알만 한 글자로 씌어진 경(經)을 읽고, 휴대전화를 사용할 정도로 청력도 정정하다. 평생 청정한 곳에서 청정한 생활을 해온 까닭이리라.

“아침에 일어나면 영선도인법(迎仙導引法)을 합니다. 퇴계가 하신 운동법으로 일종의 체조와 같은 것인데, 그것만 해도 건강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이는 당할 수 없는 법이라 요즘에는 무릎이 아파 지팡이를 짚고 다닙니다.”

김옹은 평소 야채를 많이 먹는다. 개고기를 제하고 다른 고기도 먹지만 치성을 드릴 때는 사흘 전부터 일절 육식을 삼간다. 술은 제사 뒤 음복이나 반주 정도 하고, 석 잔 이상 마셔본 적이 없다. 그는 “인간과 신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담배에 대해서는 “천하에 몹쓸 것”으로 치부한다.

세상을 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신도 10대 때는 뭣 모르고 담배를 피웠지만, 도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김옹의 얼굴은 늘 온화하다. 대화하는 방식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식이다. 하지만 자신한테는 엄격하다. 치성을 드릴 때는 사흘 전부터 목욕재계하는 것은 기본이고, 요즘도 새벽 4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평화문’이나 ‘해인경’을 읽으면서 수련을 한다. 저녁에도 8시쯤 식사를 마치면 10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수련을 빼놓지 않는다. 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