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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흰바위 절벽 중간쯤 위치한 약사암은 예로부터 영험한 약사여래의 기운이 있다고 해서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가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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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인이다’는 중년 남자들이 많이 보는 TV 프로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얘기가 나온다. 사업이 망해서 산으로 들어간 사람, 죽을병에 걸려서 들어간 사람, 부부나 가족관계가 파탄 나서 들어간 사람, 인생 막장에 몰려서 들어간 사람들이다. 일단 대책 없이 산으로 들어오면 죽지는 않는다. 자살하지는 않는 것이다. 산에 들어와 있으면 나물 캐고 땔감나무 하고, 자기가 살 수 있는 움막을 지어야 하니까 자연적으로 운동이 된다.
인적 없는 적막한 자연 속에 있으면 그 자체로 명상이 된다. 구름도 보고, 밤에는 별도 보고, 저녁노을에 잠긴 바위산의 모습도 보고,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사계절의 변화를 보면서 저절로 성찰이 오는 셈이다. 전남 장성의 백양사(白羊寺)에 있는 약사암(藥師庵)은 병을 고치는 데 효험 있는 암자이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은 산에 들어오면 사는 수가 있다. 산에 들어올 때 그냥 산보다도, 영험한 약사여래의 기운이 서린 약사암에 들어오면 더 효과가 있다. 대체로 약사암은 중생들의 병을 낫게 하는 데 초점이 있는 암자다. 옛날에는 종합병원이 없었다. 병원이 없을 때에 병이 나면 어디로 가겠는가? 약사여래가 상주한다고 믿었던 약사암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매달릴 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병도 세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 육체적인 원인으로 생긴 병이다. 예를 들어 담배를 많이 피우면 폐병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 이럴 때는 담배부터 일단 끊는 것이 순서이다. 둘째 심리적인 원인으로 생긴 병이다. 인간관계의 스트레스나, 재물을 잃어 버렸을 때 오는 병이다. 홧병이 대표적이다. 이런 병은 상담이 필요하다. 셋째 귀신병(鬼神病)이다. 귀신이 들어서 오는 병이다. 귀신병은 도력이 높은 성직자나 도사, 고승을 만나야 낫는다. 약사여래는 이 세 가지 병 모두 효험이 있다. 병을 가리지 않는 게 약사여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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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사암 앞에 옥녀봉(왼쪽)과 도집봉(오른쪽)이 포진해 있어 약사암에서 빠져나가는 기운을 막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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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절벽 중간쯤 위치한 약사암, 기운 강해
이런 세 가지 병을 고치는 영험이 있는 약사암은 조건이 있다. 우선 그 터가 기운이 강해야 한다. 병을 고치려면 천지의 기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땅의 기운은 바위에서 올라온다. 바위산이나 바위로 삼면이 둘러싸인 곳이 적격이다. 그러므로 바위 절벽 중간쯤에 위치한 약사암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또 하나의 조건은 물이다. 물에서 효험이 온다. 물은 환자가 매일 마셔야만 한다. 밥은 안 먹을 수 있지만, 물은 하루라도 안 마실 수 없다. 물에는 각종 미네랄이 녹아 있다. 어떤 곳에서 나오는 물이냐에 따라 그 속에 함유된 미네랄의 성분이 다르다. 병에 효험이 있는 물은 대개 석간수(石間水)가 많다. 돌 속을 뚫고 흘러오면서 돌 속에 함유되어 있는 미네랄이 자연스럽게 물에 녹아 나온다. 특히 한국은 화강암이 많다. 화강암 지대를 통과한 물은 거의 약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자가 이러한 약물을 6개월에서 1년 정도 복용하면 피가 깨끗해지고 맑아지며, 세포가 정화되고 건강해지기 마련이다. 약사암이 갖추어야 할 조건 가운데 마지막은 그 암자에 상주하는 도력 높은 스님이다. 기도를 많이 해서 약사여래의 가피(加被)를 받은 스님이 머무르는 암자는 훨씬 효과가 높다.
바위, 물, 도인 스님. 이 세 가지 조건 가운데 앞의 두 가지만 갖추어도 영험한 약사암이 된다. 백양사 약사암은 필자가 보기에 이 두 가지 조건을 갖추었다. 우선 약사암이 자리 잡고 있는 터가 백학봉(白鶴峰)이라는 바위 절벽의 중간에 해당한다. 올라가보니 해발 370m 정도가 된다. 백양사에 절이 들어서게 된 단초는 이 백학봉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흰색의 바위 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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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사암이 있는 바위 정상 학바위에서 내려다본 백양사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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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학봉에서 영기(靈氣)가 나온다. 영기가 나와야 기도를 드리면 영험이 있고, 영험이 있어야 절이 유지된다. 멀리서 보면 이 바위 절벽 전체의 모습이 학(鶴)처럼 보인다. 가운데가 볼록 솟아 있고, 양 옆으로 퍼진 모습이 학이 앉아 있는 형상으로 보인다. 멀리서 보면 바위색이 흰색에 가까운 색깔로 보인다. 그래서 백학봉이다.
흰색은 영적으로 수준이 높은 색깔이다. 인도나 티베트에 가면 흰색 수건을 목에 걸어 주거나, 또는 브라만의 사제계급들이 입는 옷의 색깔이 흰색이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높은 브라만 계급은 흰색 옷을 입고, 그 아래 계급인 크샤트리아는 빨간색, 장사해서 먹고사는 바이샤는 갈색, 그리고 맨 밑바닥 계급인 수드라는 검정색이다. 현대 패션에서 ‘블랙 앤드 화이트’는 최하층 밑바닥과 맨 위의 정신세계가 섞인 희한한 형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위색이 흰색을 띠고 있다는 것은 보통 바위가 아닌 것이다. 정신세계에서 볼 때 흑석(黑石)보다는 백석(白石)의 차원이 높은 것이다. 백색 바위절벽에서 수도하면 그 백색의 기운을 받기 마련이다. 터 자체가 먹고 들어가는 셈이다. 풍수가에서는 백학봉의 산세를 선인독서형(仙人讀書形)이라 보기도 한다. 신선이 독서하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백양사에서 공부 잘하는 학승이 많이 배출된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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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위 절벽 사이로 솟아나오는 영천샘 주변에 암자를 지어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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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위 속에서 나오는 영천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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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 솟는 바위에 영험한 물 갖추면 충분조건
백양사 백학봉 중간에 위치한 약사암에는 바로 옆에 영천굴(靈泉窟)이 자리 잡고 있다. ‘신령스런 샘물이 나오는 굴’이다. 약사암에서 100m쯤 옆으로 돌아가면 굴 속에서 샘물이 나온다. 지금은 굴 입구에 기와지붕을 얹어 놓아서 계단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름을 ‘영천굴’이라고 붙였다는 것은 천년이 넘게 많은 사람들이 이 샘물을 먹고 병을 고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이 어찌 그냥 붙여졌겠는가?
마침 약사암을 가는데 눈발이 휘날린다. 암자에 가니 주지 스님은 출타 중이다. 주지 스님이 계셔야 여기에서 병이 나은 사람들의 생생한 영험담을 들을 수 있을텐데, 그 영험담을 듣지 못해서 섭섭하다. 하지만 호남 일대에서 옛날부터 백양사 약사암은 그 영험이 대단하다는 입 소문이 나 있는 성지이다. 백양사의 참선하는 선방(禪房)이 운문암(雲門庵)이라고 한다면, 중생들의 병을 고쳐 주는 약방(藥房)은 약사암인 것이다. 선방에서 도통하고 약방에서 병이 낫는다. 백양사 운문암이 호남의 3대 공부 터라고 한다면, 약사암은 호남에서 알아 주는 약사영험 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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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천샘이 있는 바위 절벽 안에 약사여래불을 모셔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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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집봉과 옥녀봉이 암자 앞의 기운 보호해 줘
휘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암자의 앞산을 바라보니 도집봉(道集峰)이 안산(案山)이다. ‘도가 집합되어 있다’는 뜻 아닌가? 어찌 옛날 도인들은 작명도 이리 기막히게 했을까? 왼쪽으로 보이는 봉우리는 옥녀봉(玉女峰)이라고 한다. 옥녀봉은 대개 둥그런 모습이다. 옛날 여자들이 머리를 빗고 난 다음에 뒤꼭지에 비녀를 꽂은 모습을 옥녀봉이라고 한다. 쪽진 여인의 머리 모습이 둥그렇기 때문에 옥녀봉은 둥그런 모습이다. 오행으로 따진다면 금체형(金體形)이라 하겠다.
도집봉과 옥녀봉이 암자 앞의 기운을 보호해 주고 멀리 담양의 병풍산(屛風山)이 보인다. 암자의 조산(朝山)이 병풍산인 셈이다. 암자 앞이 이빨 빠진 것처럼 뻥 트여 있지 않고, 이처럼 여러 산들이 원근에서 막아 주면서 포진하고 있으니 약사암 터가 보통이 아닌 것이다. 불치병에 걸려서 이판사판의 상황에 처했다면 백양사 약사암에 가서 죽을둥 살둥 한번 기도를 해보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궁즉통(窮則通)이라고 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