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중세시대 전쟁영화를 자주 보는데, 그 압권은 공성전이다. 예를 들어 성 안에는 5000명의 수비 병력밖에 없지만 성 밖의 적군은 5만명이 포위하고 있다. 절대 불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마지막에는 성을 탈출해야 한다. 탈출할 때 지하로 땅굴이 파여 있어서 성 밖으로 아무도 모르게 피신할 수 있는가. 나는 공성전 영화를 볼 때마다 최후의 피신처, 즉 적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탈출할 수 있는 지하 통로가 있는가 여부를 아주 눈여겨본다. 인생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포위된 인생이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가? 36계를 생각해 놓아야 한다. 탈출 못 하면 죽는 수밖에 없다. 중국 현대사에서 마오쩌둥의 홍군은 대장정이라는 36계를 놓았다. 국토가 넓으니까 도망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초한지의 장량은 장가계로 튀었다. 엄청난 오지였던 장가계를 장량은 평소에 생각해 놓았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탈출이 가능했다.
서부영화를 보면 은행을 털어서 목돈을 손에 넣은 총잡이들이 도망가는 곳이 있다. 텍사스나 멕시코이다. 주인공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대하소설이 완성된다. 조금 도망가다가 죽어 버리면 소설이 끊긴다. 10권짜리 대하소설 여부는 죽지 않고 도망갈 수 있는 공간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한국은 국토가 좁아서 도망갈 곳이 크게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지리산이 그 도피처 역할을 하였다. 요즘 지리산을 심도 있게 조사해 보니까 지리산은 도망자의 산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적 상상력을 가동해 보면 지리산은 패자의 산이었다. 승자가 머무는 산은 아니었다. 패자는 도망가야 한다. 숨어야 한다. 숨을 수 있는 지형을 갖춘 곳이 그나마 지리산이었다. 보통 산의 10배는 크기 때문이다.
빨치산들의 마지막 은신처
지리산이 도망자의 산이고 패자의 산이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많을 수 있다. 승자의 이야기는 공식적인 역사가 되지만 패자의 이야기는 달빛에 물들어 소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리산은 소설가를 위한 산으로서는 최적의 산이다. 추적자들에게 쫓기는 자를 숨겨주고 목숨을 연명하게 해주는 산이 최고의 영지(靈地)이기도 하다. 목숨 부지만큼 큰 게 어디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지리산 전체는 영지에 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리산으로 피신해 왔던 도피자, 은둔자, 패배자들이 선호했던 은신처는 각기 시대별로 다르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그리고 근세의 의병활동과 빨치산의 은신처가 약간 다르다. 세상을 피해서 숨을 수 있는 지리산의 은신처를 상징하는 개념은 청학동(靑鶴洞)이다. 청학동에 가면 산다고 믿었다. 이 청학동이 시대별로 상황별로 각기 달랐다는 이야기이다. 청학동이 한 군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여러 군데였을 것이다. 가야·신라·백제가 대립했던 삼국시대의 청학동은 내가 보기에 세석평전인 것 같다. 고려 때는 지금 하동의 악양이 청학동이었고, 조선시대는 쌍계사 뒷길로 올라가면 나타나는 불일평전과 불일폭포 일대가 유생들이 찍었던 청학동이었다. 1894년의 동학군과 1907년의 조선의병들이 마지막으로 숨었던 요새이자 아지트는 함양군 마천면 칠선계곡과 박회성 일대이다. 박회성은 가야시대부터 주목했던 요새지형이었다. 1907년의 의병들도 일본 헌병대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요새로 꼽았던 지형이었다. 빨치산의 원조인 하준수, 즉 남도부가 광복되기 이전부터 은신해 있었던 장소 역시 이 박회성 근방이었다. 빨치산의 대장 이현상이 죽기 전까지 숨어 있었던 곳은 빗점골이다. 바로 하동 의신사(義神寺)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삼국시대의 청학동?
이번에 소개하고 싶은 곳은 세석평전이다. 내가 보기에는 삼국시대의 청학동이다. 세석평전이 왜 청학동이란 말인가? 세석평전은 우선 해발이 1500m급이다. 이건 만만한 높이가 아니다. 지리산이 수목과 계곡, 그리고 험난한 경사지역으로 둘러싸인 산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1500m의 높이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요새지형이다. 세석의 첫 번째 이점은 군사공격으로부터 방어가 유리하다는 점을 꼽고 싶다. 높이가 주는 이점이다. 이건 가야시대부터 군사 방어시설로 사용된 흔적이 있다. 지리산은 가야의 산이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은 가야국의 중심 산이었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꿋꿋따 빠따 기리’가 계족산(鷄足山)이라고 한다. ‘꿋꿋따’는 닭이고, ‘빠따’는 다리이고, ‘기리’는 산(山)이라는 뜻이다. 산스크리트어의 ‘기리’가 한반도에 들어와 입에서 발음하다 보니까 ‘지리’가 된 것 같다.
‘지리’를 굳이 한국 사람 발음대로 표기하면서 ‘智異’가 된 것이다. 한자 ‘智異’를 풀다 보면 ‘지혜가 특별하다’이고, 이걸 다시 불교적 맥락에서 해석하면 지혜가 수승한 ‘문수보살의 도량’이 된다. 지리산이라는 이름은 인도불교를 직수입했던 가야불교의 유산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 지리산 곳곳의 최초 작명(네이밍)은 가야국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가야라는 밑그림을 깔고 지리산을 보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지리산 치밭목 산장에서 밤에는 빨치산·토벌대 귀신들과 씨름하고 낮에는 등산객들을 수발하면서 30년을 머물렀던 민병태(68) 선생은 현재 지리산의 수많은 샛길과 골짜기 통로, 역사, 생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민병태의 지론에 의하면 지리산은 3구역으로 나눠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나는 반야봉 라인이다. 이쪽은 불교권이고 반야(지혜)를 강조하는 불교적 색깔이 가장 농후한 구역이다. 화엄사, 문수사(현재는 폐사), 연곡사, 칠불사 라인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천왕봉 라인이다. 여기는 유교권과 국가권력의 영역이다. 조선시대 남명학파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세석과 영신대(寺) 영역이다. 이쪽은 가야불교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화엄사, 연곡사가 속해 있는 반야봉 라인은 기운이 거칠고 강하다. 아주 센 기운이 도는 라인이고, 세석과 영신대를 포함한 가야불교 라인은 반야봉과는 또 다른 기운이다. 강하면서도 그 기운이 섬세하여 뼛속까지 지기가 들어오는 라인이 영신대 라인이라는 것이다. 반야봉 기운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화엄사의 승려들이 역대로 주먹이 세고 무술이 강했으며, 영신대는 영발(靈發)로 명성을 휘날렸다. 기운이 주먹으로 가느냐, 영발로 가느냐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지나치게 단순화한 주장이 될까? 이는 땅 기운상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지, 전개된 역사가 따로 구역이 나뉜다는 주장은 아니다.
“지리산은 가야의 산이었다”
칠불사가 가야 김수로왕의 7왕자가 성불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가야 초기부터 지리산은 가야 왕실과 귀족층들이 들락날락했던 산이다. 함양 마천의 추성(樞城)과 대궐터(박회성)를 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대에 쌓았다는 설이 있다는 점도 ‘지리산은 가야의 산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추(樞) 자도 북두칠성의 제일 첫 번째 별을 가리킨다. 북두칠성은 매일 밤에 회전한다. 시곗바늘 역할을 한다. 칠성이 회전할 때 국자 주둥이의 첫 번째 별인 추성은 돌지 않고 가만히 있다. 원을 그릴 때 가운데 꼭짓점이다. 이는 제왕을 가리킨다. 추성을 쌓고 박회성이라는 피란성을 쌓았던 가야의 구형왕 정권은 구형왕을 추성(樞星)으로 생각했다. ‘樞’는 돌쩌귀 추 자이기도 하다. 문의 경칩 부위이다. 가톨릭 추기경의 추 자도 같은 글자이다. 가야 7왕자의 칠불사, 그리고 함양 마천의 추성이 있었다면 산청 지역의 세석도 가야 망명 정권의 활동영역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세석평전은 지리산으로 피란했던 피란정권, 또는 망명정권의 주둔지였다고 생각된다. 1500m라는 높이가 우선 그렇고, 넓은 평전이라는 점이 또한 그러하다. 세석을 우리말로는 ‘잔돌밭’이라고 불렀다. 큰 돌이 아닌 잔돌이 많은 평평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최소한의 농사가 가능한 지형이기도 하다. 평평하니까. 거기에다가 물이 많다. 작물이 자라려면 물이 있어야 하는데 세석은 이곳저곳 다녀보면 물이 질척질척한 땅이다. 여름에는 충분히 여러 작물이 자랄 수 있는 조건에 해당한다. 고도가 높아서 논농사는 어렵겠지만 먹을 수 있는 몇 가지 작물은 농사가 가능한 기후가 아닌가 싶다.
영발이 발생하는 지점
세석은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에 있다. 두 봉우리 모두 1600m를 넘는 고도이다. 촛대봉에서 밑으로 약간 횡선으로 내려오면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고, 그 바위 밑에 연못이 있다. 지리산은 고지대에서 물이 나온다는 특징이 있는 산이다. 이 바위를 보통 만경대라고 부른다. 지리산의 서남쪽 방면 경치를 감상하기에 좋은 위치이다. 그 바위 밑의 연못을 근자에 청학연(靑鶴淵)이라고 이름 붙여서 부르고 있다. 이 연못은 그 주변에 석축을 1m50㎝ 높이로 쌓아서 물을 가두어 놓았다. 석축이 있으니까 연못 넓이가 제법 된다. 가로가 60~70m, 세로가 30m쯤 될까. 원래 바위 밑에서 샘물이 용출하고, 이 샘물을 가두기 위해 인공으로 석축을 쌓아 제법 물이 고인 연못이 된 것이다. 연못 수위는 1~2m쯤 되게 보이지만 그 밑으로는 진흙과 뻘이 켜켜이 쌓여 있다. 민병태 이야기로는 연못의 뻘을 파내서 연대 측정을 해보니 1000년 이상으로 올라간다고 한다. 적어도 고려시대 이전, 가야시대부터 이 연못지는 특별하게 주목받았던 성소임을 추측하게 한다. 왜냐하면 고지대의 연못은 대단한 기도처가 된다. 말하자면 영발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백두산의 천지, 한라산의 백록담도 산꼭대기의 연못이자 저수지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고구려의 초창기 산성이었던 산동지역의 오녀산성도 정상 부근에 연못이 있다.
한민족은 산 정상 부근에 연못이 있는 지역을 종교적 성지로 여기는 전통이 2000년이 넘는다. 주역으로 이런 지형을 풀면 수화기제(水火旣濟)가 된다. 물은 위에 있고 아래에는 불이 있다. 머리는 시원하고 발바닥은 따뜻한 형국에도 비유된다. 산 밑에는 암반이니까 여기에는 불기운이 올라온다고 본다. 풍수적으로 보면 촛대봉은 꼭대기가 울툭불툭 솟은 바위들이다. 멀리서 보면 촛불로 보인다. 촛대봉의 불 기운을 식혀주는 물이 바로 이 청학연이라고 근래에 이름 붙은 연못인 것이다. 유사시에는 사람이 먹는 식수로도 사용하고 농사짓는 물로 사용할 수도 있다. 기도를 할 때는 기도발을 모아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군사적·실용적·종교적 기능 3가지를 동시에 감당하는 것이 이 연못의 물이다. 우리 어머니들이 장독대에서 기도를 드릴 때 정한수를 떠 놓고 했는데, 산 위의 정한수가 바로 이 연못의 물이다. 바위 위나 밑에 물이 있어야 생각의 염파(念波)를 모아 주고 붙잡아 놓는 기능을 한다.
이 연못 위의 바위에 올라가니 ‘鶴洞壬(학동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여기가 청학동이라는 뜻인가? 아마도 조선 후기에 새겨진 글자 같다. 1862년 진주민란이 발생했을 때에도 민란에 가담했다가 쫓기던 사람들이 이 세석에 들어와서 숨어 살았다. 그 팀들이 학동 연못 주위에도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진주민란 팀들이 새겼던 글씨일까? ‘壬’은 오행으로 보면 물이라는 뜻도 있다. 이 연못이 학동의 ‘물’이라는 의미로 새겼을까? 청학이 먹는 물 말이다. 아니면 청학동 임좌(壬坐)라는 뜻일까. ‘壬坐’는 풍수에서 따지는 방향이다. 정남향에서 약간 동쪽으로 기운 방향을 가리킨다.
세석에 삶을 묻은 지리산의 전설들
조선 중기에 지리산의 청학동을 찾기 위해 다녀간 인물 가운데 류운룡이 있었다. 명재상 류성룡의 형이다. 겸암 류운룡은 겉으로는 유학자였지만 내면으로는 거의 도사급이었다. 특히 풍수도참의 전문가였다. 풍수 지관들이 애용하는 비결록에 류운룡 비결이 있을 정도다. 겸암이 지리산에 와서 남긴 기록에 청학동의 방향이 임좌병향(壬坐丙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악양에서 그 앞봉우리들의 위치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유람기를 남긴 유학자들은 대개 성리학에 깊이 빠져 있어서 하나의 유람기로 지리산을 묘사하고 문학적인 시문에 집중했다. 그러나 겸암 정도 되는 인물은 단순한 유람객이 아니다. 도가에 심취했던 인물이고 자신이 풍수도참의 프로였다. 아마추어가 아니다. 겸암이 프로라는 사실을 아는 조선 후기의 낭인과들은 다른 사람들의 유람기보다도 겸암의 기록을 가장 중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풍수도참 선수가 남긴 기록이니까. 겸암 기록에 나오는 풍수의 방향을 가리키는 표현이 바로 ‘임좌병향’이다. 겸암의 임좌병향을 읽었던 어떤 후세의 인물이 학동 연못 바위에다가 ‘鶴洞壬(학동임)’이라는 글자를 새겼을 가능성이 높다. 이 세석이 바로 겸암이 말한 청학동이라는 의도에서다. 산 밑의 악양이 겸암이 찍은 청학동이었다면, 이 세석평전도 그에 못지않은 청학동이라는 의미에서이다. 그래서 연못 이름을 근자에 청학연으로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진주민란의 피란민 이전에 훨씬 거슬러 올라가서 가야시대부터 세석은 목숨을 부지하는 요충지, 즉 군사적 요새로서의 청학동으로 기능했던 것으로 보고 싶다.
현대에 청학동에 들어와 자기 생을 마감했던 인물이 바로 우천 허만수(1916 ~1976)이다. 지리산의 전설이다. 허만수는 진주 부잣집 아들로 왜정 때 일본 유학도 갔다온 인텔리였고 부르주아였다. 시대와 불화했고 삶의 의미를 못 느낀 허만수는 40세 무렵에 지리산에 들어와 살았다. 그때가 1956년쯤이다. 빨치산의 해골들이 아직 지리산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던 시절이었다. 그 허만수가 살았던 토담집이 세석에 있다. 화전민들 몇 가구가 살았던 구역에 그 역시 머물렀다. 1961년 광주 조선대 약대생들이 약초 채집을 나와 허만수의 토담집에서 같이 찍은 사진도 있다. 세속을 떠나 지리산에서 도사처럼 살다가 생을 마감한 허만수의 거처가 세석에 있었다는 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