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정마철 호젓한 휴식_충북 보은

醉月 2016. 6. 25. 23:13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 북문 쪽 성벽의 모습. 벼랑 아래쪽으로 까마득하게 쌓은 외벽은 1500년의 시간에도 자를 대고 자른 두부 모처럼 반듯하게 선이 살아있는데, 벼랑 위쪽의 내벽은 복원한 지 10여 년 만에 허물어지고 있다. 각종 중장비까지 동원한 지금의 기술로도 아득한 시간 저편 신라인의 노고와 솜씨를 재현하지 못한다는 증거다.


장마가 시작됐습니다. 여름휴가를 행락으로 생각한다면 길고 지루하게 이어지는 장마는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휴가를 재충전의 시간으로 받아들인다면 장마 기간이야말로 호젓하게 휴가를 떠날 귀한 시간입니다.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는 휴가지의 무질서도, 바가지 상혼도 없습니다. 호젓한 한옥 툇마루에 앉으면 처마의 낙수 소리와 후드득 호박잎에 비 듣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잠깐 비가 그친 사이에 계곡으로 들면 청류와 비가 말끔하게 씻어낸 숲 속의 청아한 새소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속세를 떠나왔다는 뜻의 속리(俗離). 그 속리산 언저리 충북 보은 땅에 옛집이 하나 있습니다. 하천의 섬 안에서 오롯이 세월을 비껴 앉은 고택, 선병국 가옥입니다. 잘 간수되지 않은 마당에 개망초 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고, 담쟁이와 나팔꽃 넝쿨로 뒤덮인 흙 담장은 그 끝이 어딘지 모르게 이어져 있습니다. 장마의 풍경을 가장 아름답게 내다볼 수 있는 곳이 고택의 장독대입니다.

한옥 툇마루에 앉으면 수백 개가 넘는 장독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운치 있는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중문의 문턱을 넘어서면 시간은 뒤로 가고, 두고 온 현실 세계가 아득해지는 곳. 구름 낀 뒷산의 뻐꾸기 소리가 겹쳐질 무렵 고즈넉한 그곳에 앉는다면, 그건 곧 속리된 어떤 곳에 멈춰 서 있는 겁니다. 충북 보은으로 가려면 피반령과 수리티재, 말티재 같은 긴 고갯길을 넘어야 합니다. 속리의 세상으로 가는 길에 이만 한 고개 하나 없다면 아니 될 말이지요.

그 고갯길을 넘어가면서 보은 땅을 기웃거립니다. 속리산 문장대, 오랜 시간으로 허물어져 가는 삼년산성과 이른 아침 볕으로 한 폭의 수묵화가 되는 임한리의 솔밭, 보청천 물길 옆 논둑에 덩그러니 서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 대청호 수몰민들이 옮겨 사는 회남면까지…. 거기서 만난 것들은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절경은 아니었으되, 모난 마음을 두드려서 둥글게 해주는 한없이 순하고 부드러운 경관이었습니다.


충북 보은의 선병국 가옥의 안채. 뒤로는 긴 담을, 앞으로는 행랑채를 마주 보고 있는 이 건물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집 안에는 이 비슷한 모양의 사랑채와 사당이 또 있다. 선병국 가옥은 담으로 구획되는 게 아니라 천변의 섬 전체를 집으로 삼는다.



# 고래 등으로 모자라는 거대한 집

이건 집의 규모가 아니다. 땅의 크기로 보면 마치 하나의 작은 마을 같다. 띄엄띄엄 들어선 안채와 사랑채는 각각 독립된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사당도 별도의 담에 독립건물처럼 서 있다. 드넓은 장독대를 끼고 있는 담장 밖의 집도 있고 화려한 지붕을 이고 있는 효열각도 있다. 담과 담 사이의 너른 길로는 차까지 드나드는데, 이걸 다 합쳐서 ‘한 채’의 집이란다. 이곳이 바로 충북 보은의 선병국 가옥이다.

선병국 가옥은 흔히 ‘99칸 집’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134칸짜리 집이었다. 지금 남아 있는 것만도 110칸에 이른다. 칸은 방의 개수가 아닌 치수를 말한다. 한 칸이 1.5평 정도이니 건평만 660㎡(200여 평)가 넘는 셈이다. 건물이 앉아 있는 담 안쪽의 면적만도 1만3000㎡(4000여 평).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뤄진 부지가 9만9000㎡(3만여 평)에 달한다. 아무리 고래가 크다 해도 이렇게 클 리는 없을 테니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란 표현도 실제 집 크기를 비유하기에는 한참 모자란다.

조선 시대의 민간가옥은 땅과 건물 크기가 제한돼 있었다. 이른바 ‘가사(家舍)규제’다. 흔히 ‘민간에서 99칸 집을 지으면 안 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근거 없는 속설이다. 세종 때 허용된 여염집의 대지는 대군과 공주 이상은 3900㎡(1170평), 7품 이하 하급직은 516㎡(156평)까지, 서인은 257㎡(78평)가 소유 상한선이었다. 집의 칸수는 대군 60칸, 공주 50칸, 2품 이상 40칸이었다. 서민 이하는 10칸 이상 집을 지을 수 없었다.

민간가옥의 규제는 99칸보다 훨씬 더 엄격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선병국 가옥이 이렇게 대궐 같은 집을 지을 수 있었던 건 왕정이 쇠락해 가던 1900년대 초반에 세워진 개화기 한옥이었기에 가능했다. 전남 고흥 일대에서 거대한 부를 일군 보성 선씨 집안이 1909년 보은의 명당에 터를 잡고 내로라하는 당대 최고의 대목을 불러다가 배불리 먹이고 후한 품삯을 줘서 자그마치 12년에 걸쳐 지은 집이 바로 이곳 선병국 가옥이다.

# 오래된 고택에서 고시원을 하는 까닭

선병국 가옥은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삼가천의 물줄기 가운데 자리한 삼각주에 들어서 있다. 마치 ‘육지 속 섬’의 형상이다. 풍수지리에서 ‘연꽃이 물에 뜬 형상’으로 일컬어지는 명당이다.

선병국 가옥은 문화재다. 하지만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출입도 통제하지 않으니 입구에서 쭈뼛거리지 않아도 된다. 규모를 보자면 도대체 이런 집에 사람이 살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이 거대한 저택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대궐 같은 이 집 주인은 농부다. 주 소득원은 당연히 농업이다. 벼농사만도 6만6000㎡(2만여 평)쯤 짓는다.

그래서일까. 이 집은 안동 일대의 말끔한 고택들과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엄청난 규모에도 마음 한편이 짓눌리지 않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내내 깃들어 사는 사람 냄새 때문이리라. 담벼락이 담쟁이와 나팔꽃 넝쿨로 뒤덮여 있고, 집 마당 한쪽에는 잡풀이 우거져 있어 부실하게 보전되는 것 같아 아쉽긴 하지만, 그건 주인 내외가 관리하기에는 어림도 없을 만큼 집이 거대한 탓이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주인 식구뿐만이 아니다. 본채 맞은편 행랑채에는 간혹 트레이닝복 차림의 고시생들이 문을 밀고 나온다. 이즈음 고시원은 공부하는 장소라는 애초의 뜻 대신 ‘값싼 주거시설’의 한 형태인 ‘고시텔’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선병국 가옥의 고시원은 말 그대로 고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오리지널 고시원’이다.

▲ 속리산의 문장대. 속리산 정상은 천왕봉이지만 빼어난 경관 때문에 4m가 낮은 문장대가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선병국 가옥의 고시원은 대를 이어오는 가업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집주인의 증조부는 전남 고흥에 대흥사라는 사립학당을 세우고 각지의 인재를 모아 무료로 교육 및 시설을 제공했다. 보은으로 집을 옮긴 그 아들 역시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었다. 저택 동편에 관선정을 짓고, 보은향교에도 기숙사를 설치해 후학을 양성한 것이다. 그 역시 아버지처럼 모든 비용을 부담했다. 당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던 셈이다. ‘위선최락(僞善最樂·선행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는다)’이라고 적힌 안채 현판의 글이 그 실천 이념이었을 것이다. 늘 공부하는 사람이 머물게 하라는 유지를 받들어 지금도 행랑채에 고시생을 받고 있다. 이제는 그 옛날처럼 무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말이다.

# 1000만 개 돌덩이로 쌓아 올린 성

보은은 예부터 경상·전라·충청의 교착지점이라 이곳을 점령하지 않고는 그 어느 쪽으로도 진출할 수 없는 삼남의 요충이었다. 서북진을 하려던 신라와 남진을 꿈꾸던 백제가 여기서 치열하게 맞섰다. 신라는 보은의 오정산 능선에다 크고 단단한 성을 지었다. 지금 군청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다. 동원된 인부만 3000명. 3년에 걸쳐 지었다고 해서 ‘삼년산성’이란 이름이 붙었다.

고대의 성곽이 무슨 구경거리냐 싶겠지만, 산자락을 넘어가는 거대한 산성 앞에 서면 그런 의문은 쏙 들어간다. 성벽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느낌은 위압감이다. 그만큼 높고 거대하다. 높은 곳의 성벽이 아파트 8층 높이를 넘는다. 성곽의 두께가 자그마치 8m다. 성벽 위로 트럭이 다녀도 남을 만한 넓이다. 성은 납작하게 사다리꼴로 다듬은 돌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쌓아 만들었다. 쌓은 돌만 25만㎥가 넘는다. 1㎥에 40개의 돌을 썼다면, 성곽에 무려 1000만 개의 돌덩이가 쓰인 것이다.

성벽의 위용이나 조형미는 복원해 놓은 서문 쪽이 가장 압도적이지만, 근래 복원한 쪽의 성곽은 1500년 전 신라 사람들이 쌓은 솜씨에 비하면 어림도 없다. 복원과정에서 돌을 하나하나 손수 쌓은 게 아니라 성벽 안쪽에는 돌을 마구잡이로 붓고 외벽만 짜 맞춘 것이니 그럴 수밖에. 신라 사람들은 안쪽부터 돌을 하나하나 맞춰 성벽의 각을 잡았다. 성곽의 동문 쪽에는 하나의 흐트러짐 없이 자를 대고 자른 두부 모처럼 반듯한 옛 성벽의 외벽이 남아 있다. 짜 맞춘 돌들이 마치 하나의 돌처럼 완벽한 면(面)이 돼 있는 외벽을 쓰다듬다가 전율이 일 정도다.

옛 삼년산성의 조밀한 축성기술은 새로 복원한 성곽이 10년도 안 돼 벌써 무너지고 있는 것에서 더 돋보인다. 각종 중장비를 총동원해 쌓은 성벽이 10년도 안 돼 무너지고 있는데, 삼국시대 당시 쌓은 그대로 남아 있는 성벽의 부분은 1500년이란 시간을 이어왔으니 말이다.

이렇듯 단단하게 지은 성이어서 그럴까. 이 성에 주둔했던 신라의 부대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을 붙잡은 전투부대가 이곳에서 출발했다. 신라가 얼마나 이 성을 자랑스러워했는지는 태종무열왕이 백제의 옛 땅을 넘보던 당나라 사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여 접견했던 것에서도 드러난다. 구태여 사신을 이곳까지 불러들였던 건 높고 단단한 이 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당나라 사신을 위압하려 했던 것이리라.

대청호 수몰민들이 모여 사는 회남면 소재지의 담벼락에 그려진 옛 풍경. 대청댐이 들어서기 전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버스를 실은 뗏목이 강을 건너다녔다.


# 흑백사진 속 아늑한 시골 마을

따로 일러주지 않는다면 필시 그냥 지나칠 게 분명하다. 회인에서 571번 지방도로를 따라 회남면으로 드는 길에서 만나는 마을 말이다. 대청호 상류의 가는 물길과 이어지는 이 도로 위는 산 첩첩한 시골 마을을 지나간다. 그만그만한 집들이 모여 있는 일대의 마을이 얼마나 아늑하고 푸근하던지…. 마치 한 세대 전쯤 정겨운 시골 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아늑한 분지의 마을에는 흙 담벼락의 집들이 처마를 잇대고 있다. 담장에는 농염한 능소화가 피어났고 천변에 심어둔 옥수숫대는 벌써 키 높이보다 높이 자랐다. 뜨거운 볕 아래 키 큰 포플러나무가 서 있는데, 개울가에는 이른 더위에 물가로 나온 마을 사람들이 다슬기를 잡거나 고기떼를 쫓고 있었다. 청보리를 베어낸 밭 자리에서는 고라니 한 마리가 껑충거렸다. 이렇게 아늑한 풍경들은 ‘눈’이 아닌 ‘마음’을 붙잡았다. 자꾸자꾸 뒤돌아 보게 되는 곳. 여기야말로 여행하고 싶은 곳이라기보다는 ‘살고 싶은 곳’이다.

회인면 소재지에는 흑백사진 속에서 막 나온 듯한 상점들이 있다. 정 미장원, 달동네식당, 회산양화점, 청주닭집…. 이렇게 지나온 회인면 소재지도 손바닥만 했지만, 회남면 소재지에 비교하면 대처다. 대청호를 낀 자그마한 언덕 위에 영화 세트장처럼 생뚱맞게 들어선 회남면 소재지는 서른 남짓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다. 대청댐 수몰로 이주해온 이들이 36년째 이곳에 모여 산다. 거기에 아흔한 살의 이옥순 할머니가 지키고 있는 ‘한일슈퍼’가 있다. 말이 슈퍼지 작은 구멍가게다. 주인 할머니는 평상에 나와 앉았고, 손님들이 손수 물건을 찾아 값을 치르고 거스름돈을 꺼내 가져간다.

이 할머니는 36년 전까지 수몰지역에서 ‘한일식당’을 했다. 돼지머리를 썰어 내고 닭국밥을 팔았다. 음식 솜씨가 있는 데다 인심도 후해 한창 손님이 몰려들 때는 막걸리 열두 말을 파는 날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마을이 수몰된 뒤 보상금 9만 원을 받고 이곳으로 옮아와 내내 슈퍼를 운영했다. 없는 살림에 육남매를 키워 내느라 단 한번도 ‘좋았던 시절’이 없었단다. 지금이야 슈퍼는 소일 삼아 하는 일. 그는 간혹 고향의 흔적을 찾아오는 수몰민들을 만나 옛 얘기를 나눌 때가 가장 즐겁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배고팠던 어린 시절, 식당을 하던 할머니가 건네준 누룽지 맛을 잊지 못한다는 이가 찾아와 손을 꼭 붙들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수몰민들과 할머니가 추억하는 과거는 지금 회남면 서른 가구의 집 담벼락에 벽화로 그려져 있다. 버스째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 장면이며 강변 마을의 아름다운 경관이 낡은 담벼락에 풍속화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 여행정보 = 선병국 가옥은 장맛으로 이름났다. 이 집의 간장은 햇간장을 담가서 이전의 간장독에 섞어 맛을 더하는 이른바 ‘덧간장’. 처음 담근 간장의 근본이 350년 전부터 내려왔다. 몇 해 전, 한 대기업 회장이 이 덧간장 1ℓ를 수백만 원에 사가 화제가 됐다. 선씨 집안의 종부는 된장과 고추장을 팔고, 고추장 만들기 체험도 무료로 진행한다. 선병국 가옥은 민박도 한다. 잠자리는 담 밖에 새로 지은 개량된 한옥에 있다. 043-543-7177

속리산과 법주사는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지금 법주사 대웅보전 앞에는 보리수나무가 흰 꽃을 소담스럽게 피워 냈다. 속리산까지 가서 법주사만 들르기에는 아깝다.

법주사를 지나 속리산 세심정 휴게소까지 이어지는 부드러운 산책로를 추천한다. 상가지구에서 도보로 50분 남짓, 법주사에서는 20분이면 닿는다. 속리산은 국립공원이지만 아직도 등산로에 파전이며 막걸리 따위를 파는 휴게소들이 남아 있다. 세심정 휴게소도 그런 곳이다. 속리산을 등반하겠다면 세심정에서 문장대로 오르는 코스를 추천한다. 속리산 최고봉인 천왕봉보다 해발고도 4m가 낮은 문장대를 찾는 이들이 더 많다. 세심정에서 본격적인 등산코스가 시작되는데 문장대까지는 3.3㎞ 남짓. 왕복 4시간 이상 잡아야 한다.

보은에는 또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여럿 있다. 임한리의 솔밭공원과 원정리의 느티나무다. 워낙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 군청에서 만든 관광안내지도에도 표시돼 있다. 솔밭공원은 가지를 뒤튼 소나무들이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곳이고 원정리 느티나무는 그림엽서 속 사진처럼 너른 논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다.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먹을까 = 숙소는 대부분 속리산 입구에 몰려 있다. 보은읍에서는 최근 들어선 산토리니 호텔(043-544-2259)을 추천한다. 이른바 ‘부티크 호텔’을 표방하는 곳이다. 놀이시설과 산책로 등을 갖춘 충북알프스 자연휴양림(043-543-1472)도 권할 만하다. 한정식을 내놓는 경희식당(043-543-3736)과 버섯전골로 이름난 가야식당(043-543-4419) 등이 손에 꼽힌다. 보은읍에서는 대추왕순대찜을 내는 국보식당(043-543-6369)이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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