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전통무기
신기전과 화차의 앙상블
현대판 다연장 로켓포
지구상에서 살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인류는 어떠한 형태로든 무기를 손에 들고 다녔다. 우선은 사냥을 통해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을 위협하는 맹수나 적대적인 다른 인간의 위협에 대항하여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일명 ‘근력무기’의 시대에는 신체적으로 크고 강건한 요즘 용어로 ‘짐승남’이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닐 수가 있었다. 예컨대,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장수들은 하나 같이 덩치가 크고 수십 합을 겨루어도 지치지 않는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바로 체격과 체력이 개인의 출세와 부귀까지 좌지우지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13~14세기경부터 본격적으로 화약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양상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힘이나 체력보다는 머리나 손재주가 중시되는 시대가 되었다. 어떻게 하면 화약의 폭발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소량의 화약으로 보다 강한 폭발력을 얻을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 주 관심사가 되었다. 그 결과 세총통, 승자총통에서부터 황자총통에 이르기까지 대소형의 화약무기가 개발되어 실전에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화약무기 중에서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스스로 날아가는 무기였다. 요즘에야 당연한 상식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근력이든 화학적 폭발력이든 무엇인가 힘을 가해야 피사체를 날려 보낼 수가 있던 시대에는 참으로 독특한 무기였음에 분명하다. 다른 화약무기들은 화약의 힘으로 모체격인 무기에서 분리되어 나온 총탄이나 석환 등이 날아간데 비해, 이는 무기 자체가 움직여 가서 목표물을 타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무기 중에 우리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신기전(神機箭)’이다. 그동안 신기전의 발사 재현시범이 몇 차례 매스컴에 방영되기도 하고, 특히 몇 해 전에는 대중영화로도 제작되어 일반인들에게 꽤 알려지게 된 전통 화약무기이다. 영화에서도 그려지고 있듯이 신기전이 그 위력을 여지없이 발휘하는 것은 조선의 화약무기 전성기였던 세종 대였다. 세종 30년(1448)에 신기전이라는 용어가 기록에 처음 등장한 이래 발전을 거듭하여 1474년에 이르면 여러 종류의 신기전 - 대신기전,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 중신기전, 소신기전 - 으로 세분화되어 목표물의 특성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로켓형 화약무기는 세종 대에 처음 등장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신기전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무기인 ‘주화(走火)’는 이미 고려 말에 개발되어 사용되어 왔다. 우리나라 전통 화약무기의 아버지격인 최무선이 <화통도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로켓무기인 주화를 만들어 내었다. 그는 ‘달리는 불’이라는 의미에서 이를 ‘주화’라고 명명하였다. 긴 화살대의 전면에 매달아 놓은 화약통의 점화선에 불을 붙이면 화약이 타들어가면서 가스가 뒤로 분출되고 그 힘으로 화살이 앞으로 날아가는데, 그 모습이 달려가는 것과 흡사하다고 본 것이다. 화약통은 종이를 여러 겹으로 말아서 만들었기에 그 안에 들어있는 화약가루에 불이 붙으면 여지없이 타들어 갔다. 이러한 놀라운 최무선의 발명품은 1387년에 「화통도감」이 문을 닫으면서 제대로 위력을 떨치지도 못한 채 잊히고 말았다.
그러다가 여말선초의 왕조교체기를 수습하고 새로운 왕실이 안정을 되찾아 가는 세종 대에 이르러 다시 꽃을 피우게 되었다. 북방개척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신무기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던 세종 대에 여진족 정벌에 효과적인 무기로 고려시대의 주화가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에 형태는 기존의 주화와 유사하나 이를 보다 발전시켜서 그 명칭을 신기전으로 바꾸었다. 세종 대에는 화기를 개량하고 이를 표준화 및 규격화하였는데 신기전도 이에 해당하였다.
신기전에 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기록물인 <국조오례의서례>의 ‘병기도설’에 의하면, 신기전은 네 종류 - 대신기전, 산화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 - 로 발전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근본적으로는 화살의 길이와 화살에 부착된 발화통의 크기가 종류를 나누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
대신기전은 말 그대로 신기전들 중에서 가장 긴 것이었다. 발사체격인 대나무 화살의 길이가 무려 5.6미터에 달하였고, 무게도 최대 5.5킬로그램에 육박하였다. 이처럼 길고 무거운 화살을 날려 보내려다 보니 부착된 화약통의 길이도 약 0.9미터나 되었다. 추진체 역할을 하는 화약통의 경우에 머리 부분에 발화통을 장착하고 양쪽에 조그만 구멍을 뚫어서 약선으로 연결하였다. 목표지점에 다다랐을 때 자동적으로 발화통을 폭발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여기에서 특히 발화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발화통 안에는 화약과 더불어 쇳가루가 섞여 있어서 공중에서 발화통이 폭발할 때 쇳가루가 사방으로 튀면서 파편의 역할을 하였기에, 비록 치명상은 입히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적의 인마(人馬)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약불의 열기로 바싹 달구어진 쇳가루가 적의 얼굴이나 몸에 박혔을 것으로 생각하면 신기전의 위력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신기전은 주로 강폭이 넓은 압록강 하구에서 강 건너편의 여진족 진영을 향해 발사하였다. 사거리가 최대 2킬로미터에 달하였기에 화살이 충분히 강을 건너 적진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불을 흩어놓는 신기전’이라는 의미의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산화신기전은 무게가 최대 5킬로그램에 길이가 5.3미터에 달하였고, 추진체인 화약통의 길이는 거의 0.7미터에 육박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대신기전과 제원이 비슷하였지만, 그 용도 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대신기전의 응용품에 해당하는 산화신기전은 약통의 상단부에 발화통 대신에 지화통과 소형의 종이폭탄인 소발화통을 서로 묶어서 점화선으로 연결해 놓은 형태였다. 따라서 신기전이 목표 지점에 도달하면 점화선에 불이 붙어서 이것이 소발화통을 폭발시키는 오늘날의 시한신관이 장착된 공중폭발 포탄과 유사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바로 머리 위에서 소형 폭탄이 일시에 전율적인 소리를 내면서 폭발하였기에 이러한 무기를 이전에 전혀 접해본 적이 없던 여진족 군사들은 혼비백산하였다.
중신기전은 전체 길이가 약 1.4미터에 0.2미터 정도의 화약통을 달고 있었다. 몸체를 대나무로 만들고 끝에는 화살촉을 부착하여 살상효과를 내었다. 화약통의 앞부분에 종이로 만든 조그만 발화통을 장착하여 목표물에 도달하면 발화통이 폭발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중신기전의 사거리는 최대 250미터에 달하였다. 통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각 신기전
의 성능을 고려할 경우에 아마도 중신기전이 조선시대에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지막으로 길이 1미터 정도의 대나무 화살을 모체로 제작된 소신기전을 꼽을 수가 있다. 말 그대로 신기전 중에서 가장 작은 축에 속하는데, 길이 1미터에 화약통은 약 0.15미터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소형이다 보니 화약통만 부착되어 있고 다른 신기전들과는 달리 발화통이 장착되지 않아서 살상효과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소형이었기에 상대적으로 기동성이 우수하였고, 무엇보다도 150미터 이내의 근거리 표적을 공격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비록 조준사격이 불가능하였지만, 신기전은 삼중 효과를 갖고 있던 조선군의 필살기였다. 우선은 발사 시에 연속적인 폭
발음과 함께 뒤쪽으로 연기를 뿜으면서 날아갔기에 적진에 공포심을 유발하였고, 적군이 하늘을 쳐다보면서 ‘어-어-’하
는 사이에 발화통에서 비산(飛散)된 쇳가루 파편으로 피해를 입히고, 마지막으로 끝에 달린 화살촉으로 적군에 치명상
을 입혔던 것이다. 신기전은 사거리가 길었기에 간혹 신호용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신기전이 한꺼번에 수십 발씩 집중적으로 발사되었기에 대치하고 있던 적군이 느꼈을 공포심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기전을 어떻게 날려 보내었을까? 길이가 5미터를 넘는 신기전을 발사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발사대가
필요하였다. 요즘에 북한의 미사일 문제가 터지면 십중팔구함께 거론되는 것이 발사대임을 기억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가 있다. 왜냐하면 신기전이야말로 최초의 한국형 장거리 소형미사일이었기 때문이다.
신기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것이 바로 조선의 화차(火車)였다. 화차는 조선 초인 1409년에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이 처음으로 제작에 성공한 이후 세종 대의 보완기를 거쳐서 마침내 문종 1년(1451년)에 이르러 매우 발전된 형태로 개량되었다. 흔히 신기전을 장착한 발사대란 의미로 신기전기(神機箭機) 화차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문종 대의 화차는 주로
신기전을 발사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임진왜란 시기에 이르면 화차에 총통을 장착하여 발사하기도 하였다. 이 신기전기에는 가로로 15개, 세로로 7개의 구멍이 있는데, 필요시 여기에 최대 100발의 중신기전을 장착하고 일거에 15발씩 적진을 향해 발사하였다.
일전에 방영된 바 있는 ‘대왕 세종’이라는 사극에서도 그려지고 있듯이 왕세자 시절부터 화약무기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문종은 즉위 초부터 화차 개량이라는 업적을 남기었다. 이는 최해산이 처음으로 육상용 경량 화차를 개발한 이래로 거의 반세기에 달하는 발전과정을 거쳐서 나온 무기 과학적 산물이었다. 화차가 문종의 지시에 의해서 어떠한 형태로 만들어 졌는지가 잘 기록되어 있다.
문종 대에 개량된 화차로는 신기전기 화차와 총통기 화차 두 종류가 있었다. 전자는 최대 중신기전 100발을 연속하여 발사할 수 있는 다연장 로켓 발사기였고, 후자는 사전총통 50정을 장착하여 최대 세전 200발을 발사할 수 있던 발사대였다. 화차 자체로는 정교한 나무틀에 불과하였지만, 이것이 화약무기와 결합하면서 엄청난 위력을 지닌 첨단무기로 격
상된 것이다.
이후 조선시대에 여러 종류의 화차가 개발되었지만, 문종 대에 제작된 화차가 가장 독창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화차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국조오례의서례>의 ‘병기도설’을 보면 수긍이 간다. 이에 나와 있는 화차의 제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름 0.87미터짜리 2개의 수레바퀴, 그 위에 올려진 길이 2.3미터에 너비 0.74미터의 차체, 그리고 이러한 수레 위에 중신기전 100개를 장착한 신기전기.
즉, 이는 신기전기의 발사각을 최대 40도까지 올려줄 수가 있었기에 보다 긴 사정거리를 얻을 수가 있었다. 또한 화차는 그 활용 폭이 넓어서 훈련이 뜸한 휴식기에는 관청에서 취급하는 물건을 운반하는 수레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1451년 한 해에만 약 7백 대의 화차가 제작되어 주로 북방 국경지대에 배치될 정도로 조선 왕실은 신무기 개발에 진력하였다. 하지만 대부분 목재로 제작된 까닭에 애석하게도 현재 진품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병기도설에 실려 있는 설계도를 보고서 복원한 화차가 육군박물관 및 전쟁기념관 등 몇 군데에 전시되어 있다. 물론 화차에 소신기전 100발을 장착하여 시험 발사한 경우도 있었다. 이에 대한 촬영 영상을 보면, 심지어 오늘날 21세기에도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지금부터 5, 6백 년 전에야 오죽했으랴. 아마도 북방 여진족들에게 화차에서 연속적으로 발사되는 신기전은 말 그대로 ‘귀신 잡는 기계’에서 날아오는 화살이었을 것이다.
문종 대에 대폭적인 개량이 이루어진 화차는 이후에도 약점을 보완하면서 발전을 거듭하였다. 문종 초기 화차는 수레 바퀴틀 위에 발사틀을 올려놓은 것이 전부였기에 포수에 대한 방어수단이 전혀 없었고, 전부 목재로 제작되었기에 특히 화재에 취약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들을 보완하려는 노력이 시도된 바, 전자는 화차의 좌우에 방패막을 설치하여 그리고 후자는 목재 발사틀을 쇠판으로 두르고 장식하였다.
화차가 실전에서 승패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임진왜란 시 벌어진 행주산성 전투에서였다. 전력 면에서 절대적 열세에 놓여 있던 권율 장군은 전투 직전에 지원 받은 화차 40량을 활용하여 왜군에 대승을 거둘 수가 있었다. 이때 권율 군에 지원되었던 화차는 일명 ‘변이중 화차’로 기존 화차를 변이중이란 인물이 발전적으로 개량한 것이었다. 예컨대, 발사틀의 네 면에 모두 방호벽을 설치하였고, 무엇보다도 각 방호벽마다 1개의 관측구멍을 뚫어서 방호벽 뒤에 있는 포수가 전방을 관측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발사틀에는 정면 및 좌우측면을 향해서 신기전이 아니라 전체 40정의 총통을 장착하였다. 이후에도 화차는 지속적으로 개량되었는데, 순조 대인 19세기 초에 발간된 <융원필비>에는 당시 훈련대장 박종경의 주도로 만들어진 화차의 그림과 설계도가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넓게 보아 신기전과 화차의 결합은 오늘날 소형 로켓무기와 다연장 발사기의 결합에 해당하였다. 현대에 벌어진 대소 규모의 전투에서 막강한 화력을 과시한 다연장 로켓포는 그 원조가 우리나라의 신기전과 화차에 있음을 알 수가 있다. 1980년대에 우리의 국방과학기술로 개발된 K-136 다연장 로켓포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선조들의 국방과학기술에 대한 노하우가 기록이나 유물,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DNA를 통해 면면히 전해졌기에 가능하였다고 생각한다. 비록 현대의 과학기술적 기준으로 보면 하찮은 것처럼 보일지언정, 우리 주변에서 접하게 되는 전통무기를 포함한 군사문화재야말로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수북이 쌓여있는 보물덩어리임을 명심해야겠다.
글_이내주 육군대령 육사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