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여름 오기전 고상하게 빛나는 신록… 7㎞ ‘선비의 길’ 따라 만춘을 걷다

醉月 2023. 4. 27. 11:17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신록 가득한 전북 순창 두 갈래 길

‘인공산’ 강천산이 만든 초록길
명물 ‘고추장’ 대신할 자원으로
40여년전 조성된 첫 군립공원

맨발산책로·족욕장·구름다리…
‘잘 꾸며진 공원’ 같은 공간으로
탐방로엔 단풍나무 새잎 가득
120m폭포옆 선녀계곡길 으뜸

추령천 물길 낀 ‘역사의 길’
천변 목재 덱의 호젓한 산책길
조선시대 서당 ‘훈몽재’서 출발

자연당 등 한옥건물 경관 수려
‘사향노루 지나간 정자’ 사과정
이팝꽃 핀 마을엔 김병로 생가
종점 낙덕암 풍경 최고로 꼽혀


순창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과속도 이런 과속이 없습니다. 이른 봄꽃이 두서없이 피더니, 올해는 초록도 이릅니다. 남도의 산자락은 눈부신 연두색 신록의 감격도 없이, 곧바로 짙푸른 녹음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싱그러운 신록을 미처 느끼지 못했던 건, 때마침 황사와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려 발이 묶였던 탓도 있을 겁니다. 더 미룰 수 없어서 이 무르익은 봄날에 초록을 보러 가는 여정을 제안합니다. 목적지는 전북 순창입니다. 하필 순창인 것은 그곳에 근사한 ‘초록의 길’ 두 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강천산의 깊은 짙은 숲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섬진강 최상류인 추령천 물길을 끼고 수변의 초록을 감상하며 걷는 길입니다. 강천산 숲길은 단풍이 물드는 가을 외에는 발길이 뜸한 곳이고, 추령천 수변 길은 아예 알려지지 않은 곳이어서 적막하기까지 합니다. 두 곳 모두 다 봄날의 목적지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어서 고즈넉하게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 만들어서 완성한 산, 강천산

강천산은 ‘만들어진 산’이다. 까마득한 벼랑바위 위에다 수도꼭지를 설치해 뜬금없는 폭포를 곳곳에 만들었고, 허공에다 ‘꼭 필요하지 않은’ 구름다리를 매달았다. 맨발로 걷기 좋은 산길도 몇 해에 걸쳐 흙을 부어서 만든 것이다. 공원처럼 여기저기에 꽃과 나무를 심고 벤치를 가져다 놓았다. 산길 곳곳에 조성해놓은 공원에는 다람쥐며 거북이 같은 철 지난 유행의 조악한 조형물이 곳곳에 있다. 만들어낸 풍경 위에다 짐짓 그럴듯하게 꾸며낸 전설까지 덧대 놓았다.

강천산에는 왜 이런 인공시설물들이 많은 것일까. 1981년 강천산이 전국 최초의 ‘군립공원’으로 지정됐다는 것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될 듯하다. 나라(國)에서 정한 자연공원이 ‘국립공원’이고, 도(道)에서 정한 자연공원은 ‘도립공원’이다. 그렇다면 군립공원은 군(郡)에서 지정한 자연공원을 말한다. 그러니까, 순창군은 40여 년 전에 군 단위로는 최초로 강천산을 군립공원으로 지정했던 것이다.

왜 하필 순창이고, 강천산이었을까. 이유는 분명하다. 이웃 지자체와 비교하면 순창의 관광자원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지도만 쓱 훑어봐도 순창의 처지는 짐작되고도 남는다. 순창과 이웃한 담양과 정읍, 남원을 보자. 담양에는 대나무가 있고, 정읍에는 내장산이 있으며, 남원에는 광한루가 있다. 고추장이 이름났지만 순창이 아쉬웠던 건 관광객을 불러들일 ‘장소’였다. 전력을 다해 강천산을 다듬어 ‘최초의 군립공원’을 만든 이유다.

자연에 대해 ‘가급적 손대지 않는 태도’를 중시하는 지금의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40여 년 전쯤에는 인공시설물 설치가 선진적인 관광개발로 받아들여졌다. 강천산에 인공시설물이 많다는 것을 그때 식으로 해석하면 ‘그만큼 많은 공력과 비용을 들여서 강천산을 정성껏 가꿨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강천산에는 단풍나무가 하늘을 가린 구간이 많다. 지금이 새잎 색감이 가장 아름다울 때다.



# ‘만든’ 폭포에다 새긴 ‘만든’ 이야기

강천산에서 가장 인상 깊은 풍경이자 대표적인 인공시설물은 폭포다. 강천산에는 탐방로를 따라 병풍폭포며, 천우폭포, 구장군폭포 등이 있는데, 하나같이 인공으로 만들어 설치한 폭포다. 그때만 해도 인공폭포는 참신한 아이디어이자 ‘혁신’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겠지만, 이즈음 지자체마다 놓고 있는 출렁다리나 케이블카도 따지고 보면 40년 전의 인공폭포와 별다를 게 없다. 그만큼 더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 시대 사람들이 관광지마다 매달아 놓은 출렁다리나 케이블카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를 일이다.

강천산에는 폭포만 만든 게 아니다. 폭포에다 그럴듯한 전설도 덧댔다. 두말할 것 없이 ‘만들어낸’ 스토리다. 인위적으로 만든 폭포이니 전설이 있을 턱이 없다. 이를테면 ‘병풍폭포 아래를 지나면 죄지은 사람도 깨끗해진다’거나 ‘용머리 폭포는 수컷용과 함께 승천하지 못한 암컷용의 머리 부분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라는 식이다.

무언가를 더 만들다가 ‘무리’한 곳도 있다. 구장군폭포 앞에 조성해놓은 ‘성문화’ 공원이 대표적이다. 성문화를 핑계 삼아 공원 여기저기다 낯 뜨거운 성적인 조형물을 가져다 놓았다. 중년의 관광객을 겨냥해서 관광지마다 해학적인 성묘사 공간을 만드는 게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다.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어정쩡하게 내버려 두고 있는 성문화공원은 그 무렵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금까지의 얘기는 ‘만들어진 관광지’인 강천산의 한계에 대한 것이다. 단풍이 곱게 물드는 가을철에는 몰려든 행락객들로 붐비긴 하지만, 그래도 선입견 때문에 어쩐지 흔쾌하지 않은 기분이 드는 산. 한마디로 ‘이발소 그림’ 같은 산. 고백하자면 그게 강천산을 바라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었다.

# 봄날 숲 산책을 즐기는 최고의 장소

이번에는 생각을 바꿔보자. ‘만들어진 산’의 단점은 많지만, 강점도 없는 건 아니다. 역설 같지만, 가장 큰 강점이라면 ‘이미 손을 댄 곳이니 더 손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탐방로에 맨발 산책로를 놓고, 입구에다 제법 큰 규모의 족욕장을 설치했다. 탐방로를 따라 이어지는 긴 숲길 구간의 무릎 높이에다 조명시설을 설치하기도 했다. 심지어 깊은 산중에다 난데없이 벤치를 놓고 꽃밭 정원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이제는 세월에 낡아 특별해 보이지 않지만, 강천산에서 느껴지는 건 자연보다는 이용자의 ‘편의’ 추구다.

큰 산에서 긴 종주 산행을 즐기는 경우도 있고, 기암의 산에 올라 경관을 감상하는 짧은 산행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극기 훈련을 방불케 하는 고된 산행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가벼운 산책과 같은 트레킹을 즐기는 이들도 있다. 손대지 않은 날것 같은 자연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지만, 잘 꾸며진 공원 같은 공간을 더 좋아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강천산은 산책 삼아 가벼운 산행을 즐기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산이다. 게다가 지금은 단풍나무 새잎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 가을 단풍으로 이름난 강천산은 탐방로를 따라 단풍나무들로 그득하다. 대부분 심어 기른 것들이지만 군립공원 조성 당시 심은 것들도 수령 40년은 족히 넘었으니 제법 굵고 풍성하다. 지금 강천산에는 터널처럼 하늘을 덮은 단풍나무 여린 새잎을 투과한 연초록빛이 탐방로마다 뿌려져 있다. 강천산은 명산이라고 할 수는 없다. 크기나 웅장함, 혹은 비경을 놓고 겨룬다면 강천산은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산은 아니다. 하지만 봄날 녹음이 막 시작하는 시기에 딱 맞춰서 초록으로 샤워하며 산책 혹은 산행을 즐기는 장소로는 더할 나위 없다. 딱 맞춰 가야 하는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

# 협곡 따라 초록으로 빨려드는 길

강천산의 명물은 구름다리다. 1980년에 설치한 높이 50m, 길이 78m의 현수교인 강천산 구름다리는 요즘 말로 하면 ‘킬러콘텐츠’였다. 출렁다리가 흔해진 지금까지도 그렇다. 그런데 아쉽게도 지난 3월부터 오는 5월 20일까지 안전점검 중이어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구름다리뿐만 아니라 요즘 강천산 군립공원 곳곳이 공사 중이다.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다. 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건, 지금이 ‘비수기’란 뜻. 구름다리에 올라갈 수 없어 아쉽지만, 비수기라 방문객이 적어 봄날의 초록을 호젓하게 즐길 수 있다. 북새통을 이루는 이름난 행락지로 가는 봄나들이보다, 비수기의 강천산이 몇 배나 나은 선택이다.

 강천산 구장군폭포를 지나 선녀 계곡과 광덕산으로 이어지는 임도. 사진 왼쪽 임도를 따라 걷는 이의 크기와 비교해보면 저마다 채도가 다른 초록의 이 숲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다.



강천산의 산행코스는 다양하다. 맨발로도 걸을 수 있는 평탄한 흙길을 따라 구장군폭포까지 타박타박 걷고 되돌아나오는 2시간짜리는 기본. 협곡 옆을 치고 올라가 강천산 왕자봉이나 광덕산 선녀봉을 가는 4∼5시간짜리 코스도 있다. 강천산과 광덕산을 종주하는 18.6㎞의 8시간짜리 탐방코스도 있다. 강천산에서는 본격 등반보다는 구장군 폭포를 목적지로 삼되 걷고 싶은 만큼 걷다가 돌아 나오는 것을 추천한다.

구장군폭포는 높이 120m의 거대한 폭포. 폭포는 두 개의 단을 이루는데, 상부에서는 수직으로, 하부에서는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쏟아진다. 폭포의 자태가 자연폭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감쪽같다. 경치만으로 따지면 강천산 최고의 명소니 이곳을 빼놓을 수 없다. 매표소에서부터 구장군폭포까지는 길이 좋은 데다 경사가 거의 없는 평지나 다름없으니 휠체어를 타거나 유모차를 끌고도 얼마든지 다녀올 수 있다.

구장군폭포를 지나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오른쪽 길은 산중호수인 강천산 제2호수를 지나 형제봉이나 산성산으로 오르는 길이고, 왼쪽 길은 시루봉이나 광덕산으로 가는 길이다. 왼쪽 길로 접어들면 또다시 길이 시루봉과 광덕산 가는 길로 나뉘는데, 이 중에서 추천하고 싶은 건 광덕산으로 가는 임도 길이다. 굳이 광덕산까지 다녀올 건 없고, 협곡을 따라 이어지는 선녀 계곡 숲길을 걷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길이야말로 초록의 협곡 속으로 빨려드는 길이다.

# 하서 김인후의 자취에서 시작하는 길

순창에서 봄날의 숲길이 강천산이라면, 순창의 신록의 수변 길은 추령천 변에 있다. 추령천은 섬진강 댐 상류의 물길로, 내장산 동쪽의 추령봉을 끼고 흐른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추령천이 성주봉과 백방산 사이를 통과하는 구간쯤에 있는 ‘훈몽재’에서 길은 출발한다. 길 이름이 ‘훈몽재, 선비의 길’이다.

먼저 훈몽재에 대한 설명부터. 훈몽재는 조선 명종 때, 그러니까 470여 년 전쯤에 하서 김인후가 처가 동네로 이사해서 지은 서당이다. 정조 임금이 ‘동방의 주자’라고 불렀다는 하서 김인후의 호남에서의 학문적 지위는 압도적이다. 하서는 죽고 나서 236년 만에 문묘에 배향됐다. 문묘 배향이야말로 조선 선비의 최고 영예. 하서는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종사된 18 선정(先正) 중의 한 명이다. 지금까지도 그를 두고 ‘호남의 큰선비’라고 칭하는 이유다. 김인후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당시 사관들이 명조실록에다 남긴 하서의 인물됨에 대한 기록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의 용모만 바라보고도 이미 속세의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김인후가 처가 마을 서당 훈몽재에서 후학을 가르친 건 부친상을 당해 장성으로 떠나기까지 2년에 불과하지만, 훈몽재의 맥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하서가 떠난 뒤에 금세 퇴락한 서당을 130년이 지나서 5대손이 중건했다. 중건한 서당이 다시 퇴락하자 140년 세월이 흐른 뒤에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 이후 서원철폐령으로 다시 쓰러졌다가 일제강점기에 다시 지어졌고, 이번에는 6·25전쟁으로 불타고 말았다. 그러던 것을 순창군이 나서 지난 2009년 말끔하게 다시 지었다. 짓고 스러지기를 자그마치 아홉 번이나 했다는 것만으로도 훈몽재는 특별한 곳이다.

훈몽재에서는 한문학과 대학생에게 유학 경전을 가르치기도 하고 방학 때면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예절, 인성교육 등을 한다. 관광지라기보다는 교육시설에 가까운 곳이지만, 추령천 물길을 끼고 지어진 훈몽재와 자연당, 삼연정 등의 한옥 건물이 빚어내는 경관이 근사해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전북 순창의 ‘훈몽재 선비의 길’의 목재 덱 구간. 추령천 물길을 끼고 화사한 신록에서 녹음으로 옮아가고 있는 천변의 초록을 따라간다. 이 길이 끝나면 만개한 이팝나무가 늘어선 길이 나온다. 이 길 끝의 정자에 ‘사과정(麝過亭)’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 사향노루 지나간 길에 남은 향기

훈몽재 선비의 길의 거리는 편도 7㎞ 남짓. 출발지점이 훈몽재 아래 추령천 변에 놓은 목재 덱이다. 추령천의 물길을 끼고 덱 로드가 길게 이어지는데, 덱에 올라서서 걸으면 천변의 신록과 봄꽃이 가깝고, 물 건너편으로는 시골 마을의 소박한 전경이 펼쳐진다. 봄의 정취에 온몸을 맡기고 걷는데 버드나무 신록이 눈부신 풍경 사이로 이따금 백로며 왜가리가 날아올랐다. 걷기만 좋은 게 아니다. 나무 덱에는 도시락을 꺼내놓고 먹으면 딱 좋을 만한 휴식공간까지 있다. 이 좋은 길에 인적이 아예 없다. 좋은 길이 더 좋아지게 만드는 건 적막에 가까운 호젓함이다.

훈몽재 선비의 길은 다채롭다. 1.2㎞ 남짓한 덱 로드 구간이 끝나면 황토 포장길로 이어진다. 덱이 끝나는 지점에 새로 지은 작은 정자 사과정(麝過亭)이 있다. 흔하지 않은 한자인 ‘사향노루 사(麝)’ 자에 ‘지날 과(過)’ 자를 쓴다. ‘사향노루가 지나간 정자’란 뜻이다. 김인후가 지은 백련초해(百聯抄解)에 나오는 시 구절 ‘사과춘산초자향(麝過春山草自香·사향노루가 봄 산을 지나니 풀이 절로 향기롭다)’에서 따온 것이다. 지금과 같은 만춘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사향노루가 지나지 않았어도, 이곳의 봄 풍경은 더없이 향기로우니까.

황토 포장길이 끝나면 이팝나무 길이 1㎞ 정도 이어진다. 길가에 탐스럽게 만개한 이팝꽃이 치렁치렁하다. 이팝나무 길을 지나면 길은 하리와 중리 마을로 이어지는데, 가인 김병로 생가터를 거쳐 간다. 초가로 복원한 집이 하서 김인후의 15대손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 선생의 생가 자리다. 그는 변호사시절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에 앞장선 독립운동가를 무료 변론했고, 신간회 중앙집회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생가는 6·25 때 불타서 사라졌으나 지난 2014년 순창군이 후손의 고증으로 안채와 문간채를 복원했다.

훈몽재 선비의 길의 종점은 김인후를 기리기 위해 후손이 1900년에 바위 낙덕암 위에 지은 정자다. 한옥 양식의 팔각 정자인데 형태와 구조가 독특하다. 을사사화로 순창으로 내려온 김인후는 추령천의 물과 소나무 숲이 어우러지는 낙덕암 일대의 경관을 좋아했는데, 그의 후손인 김병로는 어린 시절 이 정자에서 공부했다고 전한다. 이 길에서 만나는 풍경에도, 사람 자취에도 봄의 향기가 있다. 풍경에서 출발한 길이 이렇게 사람에게서 끝이 난다.



한 상 가득 1만원 백반… 어딜 가도 맛집

■ 하숙집의 고장, 푸짐한 밥상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전북 순창은 음식 맛있기로 이름난 지역이다. 남도에서 음식이라면 해남이나 강진 등을 첫손으로 꼽는데, 순창도 못지않다. 이름난 몇 집만 그런 게 아니다. 음식점의 전반적인 수준이 고르게 높다. 아무 음식점이나 문을 열고 들어가도 실패할 확률이 낮다는 뜻이다.

왜 그럴까. 순창 사람들은 ‘하숙집’에서 이유를 찾는다. 한때 순창에는 하숙집이 많았다. 학교도 많고 관공서도 많아 하숙생이 많았는데, 이들을 상대로 밥을 해주던 하숙집이 식당을 겸하는 경우가 적잖았단다. 하숙생이 줄어들면서 하숙집 운영이 어려워지자 안주인이 식당을 차리기도 했다. 하숙생을 대상으로 푸짐하게 차려 내는 밥상이 그대로 식당 음식이 된 것이다. 순창에 한정식집과 백반집이 유독 많은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순창의 한정식은 가격대비 만족도가 뛰어나다. 추천하는 곳은 산경(063-653-6458). 1인분 2만 원짜리 한정식이 한 상 가득 황송할 정도로 차려진다. 가짓수를 채우려 허투루 내는 반찬은 없다. 식재료도 신선하고 간도 좋다. 재료가 떨어지면 손님을 더 받지 않으니 사전 예약은 필수. 1만 원짜리 백반도 나무랄 데 없다. 연잎 밥 정식을 내는 미소식당(010-5713-3755)도 훌륭하다. 정갈한 반찬도 좋고, 수삼과 대추, 호두, 잣까지 넣어 지은 연잎 밥에서는 맛과 함께 정성까지 느껴진다. 연잎 밥만 포장해가는 손님들도 있다. 모밀국수와 콩국수 등을 내는 조약돌(063-652-8926)은 사전 정보 없이 들어간 식당인데, 만족도가 높다. 중소도시에서는 분식 메뉴를 제대로 차려 내는 곳이 드문데, 이곳은 예외다. ‘새집’(063-653-2271)과 ‘옥천골’(063-653-1008)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지만, 오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정식의 강자다.

■ 잔도와 출렁다리

순창에는 근래 관광지로 개발해 인기를 누리는 곳이 몇 곳 있다. 대표적인 곳이 용궐산과 채계산이다. 섬진강을 끼고 있는 용궐산은 산 중턱 암반에다 아찔한 잔도를 매달아서 일약 전국구 여행 명소로 떠오른 곳이고, 채계산은 아찔한 고도감이 느껴지는 출렁다리로 이름난 곳이다. 그런데 용궐산 잔도는 오는 6월 말까지 공사 중이어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상황. 채계산 출렁다리는 다리를 건너는 게 전부인 ‘놀이 기구’ 같은 곳이라 보통 인근의 용궐산과 엮어서 코스를 짜는데, 용궐산 잔도가 출입 불가라 더불어 매력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