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발원지 검룡소에서 솟아 넘친 ‘첫 물’이 작은 계단처럼 이어진 폭포를 따라 흘러내리고 있다. 1300리 물길의 한강의 시작은 이 물줄기다. 새로 솟는 물은, 아무리 추워도 얼지 않는다. 얼지 않는 검룡소의 물처럼, 새해에는 희망이 다시 샘솟을 수 있기를….
■ 박경일기자의 여행 - 무겁게 맞는 새해… 다시 시작하는 ‘태백 여행’
한강 발원지 ‘검룡소’
1981년 도상 계측해 ‘금대봉 북서쪽 계곡’ 지목
일제때 메운 물구덩이 발견… 2010년 ‘명승’ 지정
태백산 정상, 하늘에 제사 지냈던 ‘천제단’도
낙동강 발원지 ‘황지’
태백 시내 한복판… 동국여지승람 등서 시원으로 표기
노승에 쇠똥 줬다가 집터 잠긴 황씨 노인 전설 전해
물이 시작하는 자리, 삼가야 할 것들 말해주는 듯
태백=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시(詩) 한 편과 함께 ‘시작’을 생각하다
신년의 여정을 시(詩) 한 편으로 시작한다.
“다시 받는다 / 서설처럼 차고 빛 부신 / 희망의 백지 한 장 / 누구나 공평하게 새로 받는다 / 이 순백의 반듯한 여백 위에 / 무엇이든 시작하면 잘될 것 같아 / 가슴 설레는 시험지 한 장 / 절대로 여벌은 없다 / 나는 또 무엇부터 적을까?/…(후략)…” < 임영조 시인의 ‘새해를 향하여’ 중에서 >
백지 한 장을 다시 받아들었다. 지나온 세밑의 시간은 어수선했다. 시간이 분절되지 않는 건, 그래서 새해를 맞는 감회가 덤덤하다 못해 걱정스러워지는 건, 해를 넘겨서도 갈등과 혼돈은 현재진행형이라서다. 시인은 ‘무엇이든 시작하면 잘될 것 같다’고 했지만, 과연 올해도 그럴까. 새로 맞은 해에 ‘눈부신 희망’이나 ‘가슴 설레는 기대’를 말할 수 있을까. 눈부신 백지 한 장의 소박한 희망과 설렘마저 빼앗긴 채 새해를 맞았다. 소박한 신년의 꿈은 흐려지고, 설레어야 할 백지 한 장도 어지러운 염려로 색이 바랬다.
태백산 능선의 낙엽송 숲에 하얗게 피어난 상고대.
올해 떠난 첫 여정에서는 ‘시작’을 얘기하기로 한다. 사실 모든 시작에 기대와 희망만 있는 건 아니다. 난감함과 두려움도 있는 법.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까. 혹 길을 잃는 건 아닐까. 이런 불안 속에서도 낙관과 믿음을 생각한다. 굽이치며 흘러도 기어코 바다를 만나고야 마는 물을 생각한다.
상선여수(上善如水). 으뜸의 선(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루며 다투지 않는다. 물은 상대방을 거역하지 않으며 힘을 과시하거나 함부로 상대방과 겨루려 하지 않는다. 노자는 ‘물의 덕(德)’을 말했다. 그 덕이 이렇다. 낮은 곳으로 흐른다. 싸우지 않는다. 장애물을 돌아가고 높은 곳이 있으면 넘치며, 땅속으로 스며 목적지까지 간다. 부드러워서 강함을 이긴다. 만물을 생성하고 이롭게 한다. 그릇에 따라 모양을 바꾼다.
강원 태백의 첩첩한 산중. ‘물의 시작’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한강의 시원(始原), 그러니까 514㎞를 굽이치며 흘러가는 한강의 ‘처음’이 그곳에 있다. 한강보다 더 긴 낙동강의 시작도 태백이다. 우리 민족의 영험이 깃든 신령한 산 태백산도 있다. 모든 시작과 처음이 있는 곳. 신년의 첫 여행지를 영험한 기운이 서린 땅, 강원 태백으로 고른 이유다.
태백산 당골에서 소문수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초입의 기도처.
# 출발선에서 ‘물의 의미’를 생각하다
강원 태백에는 겨우내 ‘지긋지긋하게’ 눈이 내리는데, 올해는 아직 눈 소식이 뜸하다. 예년 같았으면 한강 발원지 ‘검룡소(儉龍沼)’까지 가는 길은 발목이 푹푹 빠지는 눈길이었을 터. 지금은 먼지만 풀풀 날리는 꽁꽁 언 땅이다. 눈은 골짜기의 안쪽이나 숲길의 음지쪽에만 더러 쌓여있을 따름이다.
물푸레나무와 굴참나무, 다릅나무, 산돌배나무, 호랑버들…. 겨울나무 사이로 검룡소 가는 길이 꽁꽁 얼어붙었다. 혹한의 겨울 한복판. 차갑고 맑은 산중의 겨울 대기가 멱살을 붙잡듯 정신을 번쩍 깨운다. 시린 공기 속에는 진한 박하 향이 스며있는 듯하다.
마치 ‘진공의 공간’처럼 느껴질 만큼 적막한 이 길 위에서는, 저절로 제 숨소리를 듣게 된다. 들숨으로 폐부 깊숙하게 들어온 박하 향이 날숨의 흰 입김으로 흩어진다. 이렇게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걷는 길 위에서 새삼스럽게 느꼈던 사실. ‘아, 이렇게 우리는 쉬지 않고, 숨을 쉬며 살고 있구나.’
검룡소는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 아래 있다. 들머리에서 가깝다. 태백산국립공원 검룡소 분소에서 걸어서 20분 남짓이다. 길을 안내하는 건 혹한에도 얼지 않는 물소리다. 검룡소 아래 창죽천 물소리를 따라 잠깐만 걸어 들어가면, 땀 한 방울의 수고도 없이 검룡소에 닿는다.
검룡소는 물이 솟아나는 ‘용천(湧泉)’이다. 지하수맥과 연결된 석회암 동굴의 입구가 계곡의 바닥에 노출돼 여기서 물이 솟는다. 솟아나는 물이 만들어낸 지름 6m 정도의 소(沼)가 바로 검룡소다. 여기서 솟은 물이 30m 길이의 완만한 기울기의 폭포로 쏟아져 내린다. 검룡소에서 하루 솟는 물은 적게는 2000t부터 많게는 5000t까지라는데, 고요한 수면만 봐서는 물이 솟는 걸 전혀 느낄 수 없다. 소 아래로 넘친 물이 와폭(臥瀑)을 타고 포말을 일으키며 굽이치는 모습을 봐야만 거기서 얼마나 많은 물이 쉬지 않고 샘솟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은 자랑하지도,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저 제 안에서 차오른 물을 끊임없이 흘려보낼 따름이다. 이렇게 차고 넘친 물이, 더 낮은 곳을 남김없이 채워가며 1300리를 쉼 없이 흘러서 바다로 간다. 검룡소를 다녀오는 길 위에서 문득 든 생각. 그때 솟은 물은 지금 어디쯤 흘러가고 있을까. 뗏군들이 정선 아리랑을 불렀던 아우라지쯤을 지나고 있을까, 아니면 단종이 유배됐던 영월 청령포를 굽이치고 있을까.
낙동강 발원지 황지(黃池)의 전설 조형물.
# 지리의 시작, 그리고 인문의 시작
과연 물의 ‘시작’과 ‘끝’을 가려낼 수 있을까. 검룡소를 한강 발원지라고 하지만, 검룡소 위쪽으로 물이 솟는 샘이 여럿 있다. 고목나무샘은 검룡소(951m)보다 훨씬 높은 금대봉의 해발 1306m 산중에서 솟는다. 해발고도와 유로(流路)를 감안하면 검룡소에서 2㎞쯤 상류다. 검룡소보다 상류에 있음에도 고목나무샘이 한강 발원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물이 솟는 게 불규칙하기도 하고 갈수기에는 물이 사라져서다.
인근의 해발 1285m쯤에는 제당굼샘도 있고, 그 아래로 물구멍 석간수(石間水)도, 예터굼의 굴물(窟水)도 있다. 가본 건 여기까지. 가보지 않았지만 산제당골에는 세 곳에서 물이 나는 ‘삼각수(三角水)’가 있으며, 동그란 바위 구멍에서 물이 나오는 ‘옥문수(玉門水)’도 있다고 했다. 이곳들도 다 검룡소보다 상류에 있지만, 고목나무샘과 마찬가지 이유로 발원지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곳들은 발원지 대신 ‘발원 샘’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불린다.
태백의 검룡소가 ‘한강 발원지’로 지목된 건 40년이 채 안 된다. 사실 검룡소가 한강의 시원이란 주장은 그 이전에는 전혀 없었다. 고서(古書)를 뒤져봐도 검룡소 얘기는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택리지, 대동여지도는 한결같이 한강 발원지로 한참 하류에 있는 오대산 서대의 샘물인 ‘우통수’를 지목하고 있다. ‘물맛과 물색이 좋고, 다른 물과 섞이지 않고 흘러간다’는 이유였다. 옛사람들은 반드시 ‘최장거리’ 지점을 발원지로 보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 시절, 물의 발원지는 지도 위가 아닌, 사유(思維)와 문장 사이에 있었다.
현대적인 의미의 발원지는 하구로부터 가장 먼 곳, 그러니까 ‘최장 발원지’를 뜻한다. 그렇다면 검룡소는 진짜 한강 발원지일까.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학계에서 보는 한강 발원지는 구체적이지 않다. 지리학적인 공식 답변은 ‘금대봉 북서쪽 계곡’이다. 1981년 한 지리학자가 한강 물길을 도상 계측해 밝혀낸 사실이다. 검룡소는 지리학자의 지목대로 금대봉의 북서쪽 계곡에 있긴 하다. 하지만 금대봉 북서쪽엔 검룡소만 있는 게 아니다. 고목나무샘과 제당굼샘을 한강 발원지 후보에서 지운 이유를 ‘갈수기에 물이 사라져서’라고 했는데, 검룡소 아래 창죽천도 땅으로 스며 물길이 끊기는 구간이 있다. 그렇다면 검룡소는 어떻게 한강 발원지로 간주되고 있는 것일까.
# 꿈으로 지은 전설과 만들어낸 지명
금대봉 북서쪽 계곡에 한강 발원지가 있다는 계측 결과가 나오자 태백의 한 향토사학자가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 찾아낸 게 일제강점기 임도를 닦기 위해 돌과 나무로 메운 물구덩이였다. 그가 물구덩이에 처음 붙인 이름은 ‘금룡소(金龍沼)’였다. 금대봉(金臺峰) 자락에 있는 데다 자신의 성도 마침 김 씨라 ‘금(金)’ 자를 생각했고, 솟은 물이 용처럼 뒤틀면서 흘러내리기에 ‘용(龍)’을 생각해 지은 이름이었다. 그러고는 마을 주민들에게 꾸었다는 꿈 얘기를 들려줬다.
나중에 ‘검룡소의 전설’로 윤색된 그의 꿈 얘기가 이랬다. 서해의 이무기가 물길을 거슬러 올라와서 검룡소에 머물며 용이 되려 했다. 이무기는 물을 마시러 오는 소를 잡아먹었는데, 화가 난 마을 주민들이 연못을 메워버리는 바람에 결국 승천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만한 명소에는 진짜 있을 법한 전설 같지만, 전설은 40년 전 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창작’이었던 셈이다.
금룡소가 ‘검룡소’로 이름을 바꾼 건 순전히 발음 때문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금룡소란 발음이 쉽지 않아 검룡소라고 부르자, 향토학자는 단군왕검의 ‘검(儉)’ 자를 빌려다가 검룡소로 이름을 바꿨다. ‘검’이라는 말이 고어에서 신(神)을 뜻하는 말이라는 점도 고려됐다. 이름도 새로 지어 붙인 마당에 글자 하나 바꾸는 게 무어 어려운 일이었을까. 이렇게 누군가 지목해 특정한 장소 위에 꿈으로 지어진 전설을 입혀 한강 발원지는 완성됐다. 이걸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 ‘첫 마음’을 생각하는 한 해가 되길…
몇 가지 감안해야 할 사항이 있다. 우선 이 향토사학자가 검룡소 발견 시점부터 명명의 과정, 전설을 만들어낸 뒷얘기까지 숨기지 않아 왔다는 것. 그는 책이나 기고 등을 통해 이런 과정을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또 하나는 1981년에야 시(市)로 승격되면서 비로소 이름을 가진 태백시로서는, 일천한 역사 속에서 석탄 이전의 인문자원을 어떻게든 발굴했어야 했다는 점이다. 행정도 이해가 된다. 검룡소가 ‘금대봉 북서쪽’에 있다는 건 사실이니, 구태여 거기를 ‘한강 발원지가 아니’라고 말할 이유도 없었겠다.
그게 적절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지만, 분명한 건 지금은 검룡소가 한강 발원지로 인정받는 명소가 됐다는 사실이다. 검룡소는 복원한 지 24년 만인 지난 2010년, 국가유산인 ‘명승’으로 지정됐다.
사실 물은 순환이다. 물에 시작과 끝이 어디 있을까. 한강의 물길 위에 검룡소가 있고, 그 위에서 솟아나는 샘물도 그 너머의 어딘가로부터 온 것. 솟은 물은 흘러가고, 쉼 없이 흘러간 물은 어딘가에서 모여서 다시 솟는다.
시간을 분절할 수 없듯이, 물도 자를 수 없다. 어디가 진짜 처음인지 따져 봐야 달라질 건 없다. 강의 발원지를 찾아가자는 건, 어디가 시작인지 찾아내려던 게 아니라, 스스로 첫 마음을 생각하고 간직하자는 뜻일 따름이니까. 신년의 해는 밝았고, 검룡소에서는 새 물이 솟았다.
상지, 중지, 하지로 이뤄진 황지.
# 황지에서 삼가야 할 것을 생각하다
태백에는 낙동강 발원지 ‘황지(黃池)’도 있다. 시내 한복판의 황지는 낙동강의 ‘역사적·문화적 발원지’다. 우통수를 한강 발원지로 간주했던 것과 비슷한 경우다. 동국여지승람은 물론이고 택리지, 척주지 등도 황지를 낙동강 발원지로 지목했다. 이처럼 외딴곳에 있는데도 옛 지도를 보면 황지를 그려 넣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다. 황지는 신령스러운 곳이었다. 홍수가 나거나 가물 때면 황지에서 제사를 지냈다.
인문적인 낙동강 발원지가 황지라면 지리적인 발원지는 어디일까. 낙동강 발원지는 점점 더 상류로 올라가고 있다. 1978년 황지(681m) 위쪽의 너덜샘(1190m)이 발원지로 지목된 데 이어, 금샘(1257m)과 은대샘(1270m)이 발견됐다.
새로 발견된 샘에서 물이 솟는 것도, 낙동강 하류에서 가장 먼 것도 맞지만 문제는 다들 고만고만한 약수터처럼 보인다는 점. 싸리재 고개를 넘는 38번 국도변의 너덜샘은 근린 체육시설에 딸린 수돗가처럼 보일 정도다. 거기 얽힌 전설로 보나 영험한 기운으로 보나 황지의 아우라에는 감히 대적할 수 없다는 얘기다. ‘낙동강 발원지’란 타이틀을 여태 황지가 갖고 있는 이유다.
황지는 연못 둘레가 100m 정도인 상지(上池)와 둘레 50m 남짓인 중지(中池), 그리고 둘레 30m 정도의 하지(下池)로 나뉜다. 상지를 마당늪, 중지를 방깐늪, 하지를 통시늪이라고도 부른다. 시주받으러 온 노승에게 쇠똥을 담아줬다가 벌을 받아 집터가 땅으로 꺼지면서 물에 잠겼다는 황씨 노인의 전설을 빗대 붙인 이름이다. 황씨 노인의 이야기는 심술과 횡포, 그리고 그 뒤의 재난에 대한 이야기다. 첫 물이 발원하는 자리에서 시작의 희망 대신 경계와 권선징악을 말한다. 스타트라인에서 기대와 소망보다 삼가야 할 것을 생각하자는 뜻일까.
# 영험한 산, 태백이 주는 위안
태백산은 예로부터 영험한 산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천하의 명산은 삼한(三韓)에 많고, 삼한의 명승은 동남(東南)이 가장 뛰어나다. 동남의 거산(巨山)은 태백이 우두머리가 된다.’ 태백은 일찌감치 명산(名山)의 반열에 올랐다. 산세가 웅장하거나 아름다워서라기보다, 거기 서린 신령스럽고 영험한 기운 때문이었다.
태백산 정상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천제단이 있다. 태백산에 천제단을 설치하고 단군과 산신을 모신 건 신라 때부터. 불교국가였던 고려 땐 여기서 산신령에게 제의를 올렸다.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은 산신을 지우고 조상을 모셨다. 단군을 천왕(天王)으로 모신 것이다. 그러다 조선 후기 국운이 쇠퇴하자 천왕을 ‘천신(天神)’으로 격상했다. 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워보겠다는 의지였다. 조선 후기 태백산 천제단에는 지방 관리나 백성들이 치성을 올리려 모여들었다. 구한말에는 의병장 신돌석이 천제단에 백마(白馬)를 잡아 올리고 제사를 드리기도 했다. 이 무렵 동학 등 신흥종교들이 앞다퉈 태백산을 ‘민족의 종산(宗山)’으로 삼고 떠받들었다. 1000년 넘게 이어졌던 제례와 기원이 한데 비벼지면서, 태백산은 단군신화와 민간신앙이 혼재하는 성지(聖地)가 된 것이다.
# 소원을 꺼내놓을 수 있는 자리
예년 같으면 보수작업을 막 마친 태백산 천제단에 올라 새해의 힘찬 기운을 받으라 권하겠지만, 올해는 좀 다르다. ‘나만 받는 복’을 기원하기조차 마음이 불편해서다. 대신 무력하고 심란한 마음을, 그저 고요하게 두 손 모은 기도로 달랠 수 있는 곳을 추천하기로 한다.
태백산에는 당골광장이 있다. 여기서 출발하면 길은 소문수봉과 문수봉을 지나서 천제단과 장군봉으로 이어진다.
‘당골’이란 지명에서 짐작되듯 이 계곡에는 한때 굿을 하거나 치성을 드리는 ‘당집’이 가득했다. 1970년대 이후 태백산 주변을 정비하면서 수많은 당집과 기도처를 없앴지만, 아직까지 서낭당, 성황당, 국사당, 제당, 산당, 신당 등의 이름을 달고 남아있는 당집이 여럿이다.
당골에서 소문수봉 가는 길에 사람들의 기도가 오래 쌓인 곳이 있다. 붉은 천을 주렁주렁 매달거나 부적 같은 그림을 걸어놓은 당집은 아니고, 돌을 쌓아 만든 자그마한 제단이다. 누구든 여기서 마음을 내려놓고 소원을 말할 수 있다.
‘태백산에서 기도발이 가장 잘 받는’ 곳이라지만 기도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있을까. 신년의 소원 하나 꺼내놓기조차 미안한 날, 거기서 두 손을 모은다. 갈등과 혼돈, 고통과 상심 속에서 새해를 맞은 모든 이들에게 부디 위안을….
■ 구문소의 글씨 이야기
태백에는 구문소(求門沼)가 있다. 물길이 바위를 뚫어 만든 동굴과 그 아래 여울을 부르는 이름이다. 구문소 석벽에 글씨가 있다. 오복동천자개문(五福洞天子開門). 오복동천(五福洞天)은 정감록에 나오는 이상향. 자개문(子開門)은 ‘자시(子時·오후 11시부터 이튿날 새벽 1시)’에만 열린다는 문이다. 글은 ‘흉년이 없고 병화도, 삼재도 들지 않는 이상향으로 이어진 문’이란 뜻이다. 누가 썼을지 궁금한가. 결론은 허탈하다. 글을 새긴 건 검룡소 전설을 지어낸 그 향토사학자. 새긴 시기도 1988년 1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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