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부처님 오신날 앞두고 미리 가본 작은 절집들

醉月 2021. 5. 15. 07:14
전남 광양의 백운산 턱밑 해발 1000m 높이에 들어선 암자 상백운암. 풍수지리와 비기에 능했던 도선국사가 ‘봉황 둥지 형상의 천하 길지’를 골라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본래 가파른 산길을 걸어야만 당도할 수 있는 속세에서 까마득한 거리의 암자였지만, 광양시와 사찰이 합작해 산을 깎고 산림을 훼손해 암자 앞까지 시멘트 포장도로를 놓았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대중과 교유하는 내로라하는 이름난 절집 말고, 숨 가쁘고 거친 길 끝의 암자와 작은 절집을 골라 다녀왔습니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고승들이 용맹정진했던 긴장감이 넘치는 자리에 들어선 암자들입니다. 사실 종교가 꿈꾸는 게 위안과 평안이라면, 이렇듯 배반적인 장소가 또 있을까요. 짐작하건대 이처럼 위태로운 벼랑 끝에다 암자를 뒀던 건, 자신을 가두는 ‘구도의 방식’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는 절벽 앞에서의 수도. 화두를 붙잡은 고승들은 수도에 목숨을 걸고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붙였겠지요. 그게 바로 아슬아슬한 곳에서 빗장을 걸고, 동굴로 은거하고 벼랑 끝에서 가부좌를 틀었던 이유였을 겁니다. 잠깐의 여행으로 무슨 깨달음을 얻을 리 있겠습니까만, 길이 가파르고 거칠어서 혹은 멀어서 거기 가는 것만으로도 수행으로 삼을 수 있겠다 싶어 제안하는 길입니다.


# 구름 넘나드는 암자…광양 상백운암

▲ 아찔한 수직의 벼랑에다 아슬아슬 매달듯 지은 전남 담양 추월산의 암자 보리암. 스스로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는 수도자의 비장한 정신이 느껴지는 곳이다.


상백운암은 전남 광양 백운산에 있다. 호남정맥의 최고봉인 백운산(1222m)은 높기도 하거니와 품도 크다. 광양시가 국립공원 지정을 추진하고 있을 정도로 지역에서는 독보적인 명산으로 대접을 받는다. 백운산 깊은 산중의 해발 1000m 바위벽 아래 상백운암이 있다. 백운(白雲)이란 구름을 두르고 있다는 뜻. 과연 이름처럼 상백운암에 오른 날엔 백운산 산정에도, 암자에도 수시로 흰 구름이 넘나들었다.

백운산이 명산으로 인정받는 데는 산에 깃든 도선국사의 자취도 한몫한다. 남도 땅을 여행하다 보면 도선국사의 이름과 자주 마주친다. 도선은 비기(秘記)와 음양풍수설로 이름을 날렸다. 풍수지리가 가진 예언과 주술의 성격 때문인지 그는, 전설 속에서 신화적 존재로 자주 출몰한다. 영암 구림마을에 전해지는 탄생 설화도 그렇고, 나뭇가지를 잡고 일어서다 부러진 가지에서 흘러나온 고로쇠 수액으로 좌선하느라 얻은 무릎 병을 치료했다는, 광양의 고로쇠 물 전설도 그렇다.

상백운암은 도선국사가 창건한 암자다. 상백운암이 있으니, 그 아래 중백운암과 하백운암도 있었다. 지금은 승격해 ‘백운사’로 현판을 바꿔 단 하백운암에 머물면서 3년 기도를 하던 도선국사는 바위가 감싸고 있는 상백운암 터를 발견하고는, 기쁨에 겨워 장삼을 차려입고 7일 동안 춤을 췄다고 전한다. 도선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을 만큼 상백운암 자리가 명당이었다는 얘기다. 지금도 상백운암 터는 풍수가들 사이에서 ‘봉황 둥지 형상의 천하 길지’로 통한다. 도선국사는 상백운암에서 종이학을 날려 그 학이 내려앉은 자리에 옥룡사를 지어 머물며 35년 동안 산문 밖을 나가지 않고 후학을 가르치다 입적했다고 전한다.

상백운암은 백운사에서 40분 이상 가파른 산길을 가야 당도할 수 있었는데, 지난해 가을쯤 번듯한 시멘트 찻길이 났다. 광양시가 임도를 개설한다며 온 산을 다 파헤치다시피 해 상백운암 턱밑까지 시멘트 포장도로를 놓은 것. 어마어마한 규모의 산림 훼손을, 광양시가 시 예산으로 했다. 길을 낸다고 해도 말렸어야 할 지방자치단체가 앞장서 산을 파헤쳐 암자까지 가는 길을 내준 셈이다. 광양시에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 공적인 목적의 ‘임도’라는 것. 그런데 백운사는 ‘제 땅’이라며 바리케이드를 용접해 길을 잠가놓고 열쇠를 관리한다.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이다.

찻길을 낸 것만큼 더 아쉬웠던 건 오래된 상백운암 법당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건물을 새로 지은 것이었다. 여순사건 당시 숨어든 반란군들이 불을 질러 폐사된 뒤에 지었다는 옛 법당 건물은, 낡긴 했으되 형형한 수도의 정신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그걸 단번에 허물어버린 게 아쉽고도 아쉬웠다. 깊은 산중의 수도처가 속세와 가까워지는 걸 어찌 막을 수 있을까. 멀고 깊은 산중에 있어서 훨씬 더 돋보였던 상백운암은 아쉽게도 이제 없지만, 상백운암 자리가 주는 감동은 아직 남아 있다.

상백운암에 가려거든 차로 오르는 대신, 걸어 오를 것을 권한다. 차를 타고 가고 싶다고 해도 사찰 측에서 열쇠를 내줄 리 만무하지만 말이다. 백운사를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다가 길을 버리고 상백운암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숲속으로 들어가서 40분 정도만 걸으면 상백운암이다. 힘들여 오른 암자 입구에 스님들이 단번에 타고 올라온 승용차 몇 대가 서 있겠지만, 포장도로는 절에서나 쓰라고 두자.


전북 완주의 청량산 정상 바로 아래 벼랑에 들어선 절집 원등사의 약사전. 바위 동굴에다 들보와 기와를 얹어 기막힌 법당을 만들었다.



# 여기 서면 바다가 보인다…완주 원등사

‘청량산’이란 이름은 여러 곳에 있다. 봉화의 청량산이 이름났지만, 인천에도, 마산에도, 완주에도 청량산이 있다. ‘청량’이란 이름의 절집은 더 많아서 ‘청량사(淸凉寺)’는 전국 곳곳에 있다. 청량이란 이름은 중국에서 왔다. 중국 산시(山西)성 동북부 우타이(五臺)현에 청량산(3058m)이 있다. 불교 삼대 영장(靈場)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산이다. 중국 청량산에는 다타사(大塔寺), 칭량사(淸凉寺), 진가오사(金閣寺) 등의 이름난 절이 있다. 불교가 배경이 된 이름이니 우리 청량산에도 불교의 자취가 새겨 있는 건 자명한 일이다.

전북 완주의 청량산 눈썹 아래쯤에 천년고찰 원등사가 있다. 신라 때 체징이 창건한 천년고찰로, 신라말에 도선국사가 중창하고 조선 선조 때 일옥이 절을 크게 늘렸다고 전한다. 원등사는 본래 사찰이 아닌 ‘목부암(木鳧庵)’이란 암자였다. ‘나무 목(木)’에 ‘오리 부(鳧)’ 자를 쓴 건 체징이 날려 보낸 나무로 만든 오리가 앉은 자리에 세운 암자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원등사는 6·25전쟁 당시 공비토벌을 위해 국군이 지른 불로 사찰 전체가 다 불탔다. 1985년 이수련 보살이 사라져버린 절집의 자취를 더듬어 벼랑에 법당을 들여 법맥을 잇고 있지만, 워낙 높고 깊은 산중에 있어서 외지인들은 물론이고,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도 원등사를 아는 이가 거의 없다.

원등사까지는 차로 오를 수 있다. 가파르고 좁은 시멘트 도로를 따라 오르는 길이다. 운전에 익숙하지 않다면 내내 간담이 서늘해질 만한 길이다. 교행이 거의 불가능한 좁은 산길이라 차량이 마주치면 자칫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어 산 아래 길 입구에 차단기를 설치해뒀다. 바리케이드 앞에 적어둔 전화 번호로 문의하면 문을 열어준다. 불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찾아오는 이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준다.

원등사에서 대번에 눈길을 끄는 건 바위 동굴에 들보와 지붕을 달아서 지은 약사전. 동굴 내부는 뭐 별다를 게 없지만, 법당의 건축과 동굴의 자연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없다. 절집 자리가 청량산 정상 바로 아래라 전망도 탁월하다. 가파른 벼랑에 강관 지지대를 받쳐서 테라스처럼 법당 앞마당을 만들어놓았는데, 여기에 서면 절반은 완주 시내의 도시 풍경이, 그리고 절반은 첩첩한 산중의 경관이 동시에 펼쳐진다. 대기가 청명한 날이면 이곳에서 좀처럼 믿기 어려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전북 부안의 격포 앞바다가 바라다보이는 것. 전주에서도 한참 동쪽인 완주 땅에서 서해가 보이다니…. 그러고 보니 원등사라는 절 이름도, 전북 부안 월명암에서 수도하던 이가 이곳을 바라봤을 때 멀리 등불이 보였다고 ‘멀 원(遠)’에 ‘등잔 등(燈)’ 자를 써서 지은 것이란다.


# 벼랑 끝 비장함을 보라…담양 보리암

‘어떻게 저런 자리에다 암자를 앉힐 생각을 했을까.’ 전남 담양 추월산 중턱의 상봉 아래 수직 벼랑에 매달린 작은 암자 보리암을 보면 드는 생각이다.

추월산의 보리암은 아슬아슬 긴장감 넘치는 자리에 있다. 위태로운 벼랑에서 좌선했을 수도자의 비장함을 생각한다면, 암자까지 가는 점점 가팔라지는 길에서 다리가 뻐근해지고, 숨이 가빠지는 것쯤이야 당연히 감수할 일. 그래 봐야 길이 잘 정비돼 있어 보리암까지는 1시간이면 넉넉하다.

▲ 전남 영암 월출산 중턱 노적봉 아래서 세상에 등을 돌린 채 숨어 있는 암자 상견성암. 이 암자에서 근대한국불교의 선지식으로 꼽히는 청화스님이 홀로 3년 동안 묵언 수행을 했다.


보리암 터는 고려말 보조국사 지눌이 처음 발견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눌이 날려 보낸 ‘나무로 만든 매’가 찾았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고려불교 개혁에 앞장섰던 지눌은 지리산의 상무주암에 머물다 나무로 매 세 마리를 만들어 공중으로 날려 보냈는데 한 마리는 전남 장성의 백양사, 한 마리는 전남 순천 송광사 터에 앉았고, 나머지 한 마리가 여기 보리암 터로 날아왔단다. 지눌은 매가 앉은 자리마다 절을 세웠다고 했다. 백양사와 송광사는 내로라하는 거찰이지만, 보리암은 규모나 위세를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작고 허름한 암자다. 하지만 보리암이 자리 잡은 터는 서릿발 같은 수행의 정신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보리암에는 고승 대덕이 지나간 자취가 굵게 새겨져 있지만, 암자 발끝의 까마득한 벼랑에서는 비극적인 죽음도 있었다. 임진왜란 와중에 역모의 굴레를 쓰고 억울하게 죽은 의병장 김덕령. 그의 부인 흥양 이씨는 정유재란 때 왜군에 쫓기다가 이 암자에서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스스로 몸을 던졌다. 김덕령과 함께했던 의병의 부인 2명과 그리고 김덕령의 매부, 사돈도 여기서 목숨을 잃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난 갈기처럼 바위로 일어선 능선과 깎아지른 암벽의 지형, 기이한 접근 불가의 지세 앞에서 누구는 비탄의 죽음을 면하지 못했고, 다른 누구는 벼랑 끝에 서서 목숨을 걸고 수행했다. 누구든 죽음을 무릅쓰지 않을 수 없었던 자리. 그곳이 바로 추월산 보리암이다.


# 속세에서 가장 먼 암자…영암 상견성암

기기묘묘한 암봉이 창검처럼 솟아 있어 산 하나가 통째로 거대한 수석을 연상하게 하는 월출산, 월출산 깊은 곳에 마치 비밀처럼 숨어 있는 도갑사의 암자 상견성암이 있다. 등산객이나 행락객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길. 도갑사에서 대웅보전 뒷길로 들어 대숲을 지나고 홍계골을 따라 조릿대와 굴참나무 울창한 숲길을 40분쯤 걸어 오르면 노적봉 험준한 바위 아래 작고 소박한 암자 상견성암이 있다. 조용하다 못해 적막까지 느껴지는 깊은 산중에서 암자 처마 끝의 풍경소리만 청아하다.

월출산에는 도갑사가 거느린 3개의 암자 상·중·하견성암이 있었으나 1948년 빨치산의 근거지가 된다고 해서 죄다 불태워져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 기(氣)가 세다는 상견성암 하나만 돌집으로 새로 지어졌다. 새로 지어졌다고는 하지만 암자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관음보살을 모신 법당과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 그리고 손바닥만 한 텃밭이 암자의 전부다.

상견성암 주위는 숨이 턱 막힐 만큼 절경이다. 노적봉과 전함바위, 합장바위에다 수미산을 업고 있는 코끼리바위까지 기이한 바위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경관을 두르고 있는 암자 자리에서는 맑고 정갈한 기운이 배어 나온다. 이런 기운 속에서 수많은 수행자가 암자를 거쳐 갔다. 근대한국불교의 선지식으로 불리는 청화스님도 1978년부터 3년간 이곳에 머물며 묵언 수행을 했다.

암자 바로 앞 벼랑의 바위에는 구한말, 영암 하씨 문중에서 새겼다는 글귀가 남아 있다. ‘천봉용수(千峰龍秀) 만령쟁호(萬嶺爭虎)’. 풀어보자면 ‘천 개의 봉우리는 빼어남을 자랑하는 용과 같고, 만 개의 계곡은 호랑이가 서로 다투는 듯하다’는 뜻이겠다. 앞서 상견성암을 다녀간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이하곤도 암자의 경관을 한 편의 시로 남겼다. 암자의 툇마루에 앉아 기기묘묘한 월출산의 경관을 바라보며 지었을 그의 시를 꺼내 읽는다.

“가파른 절벽 위에 풍경처럼 매달린 절 / 흔들흔들 구름 끝에 걸려 있네 / 고승은 고고하고 뛰어남을 좋아하여 / 나뭇가지 끝을 걷듯 처신하네 / 초연히 속세를 벗어나 / 새집 같은 거처에 산다네 / 청초하게 외길을 가니 /유랑하는 이 몸에게는 까마득한 길일세….” 이하곤이 “속세를 벗어나 새집 같은 거처에 산다”고 썼던 고승은 그때 나이 여든의 ‘혜정’이란 법명의 스님이다.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상견성암에는 나뭇가지 끝을 걷듯 처신하며 청초하게 외길을 가는 스님이 있다.

전남 순천의 선암사가 거느리고 있는 작은 암자 대각암의 누각 대선루. 누각 마루의 나무의자에 앉으면 창 안으로 숲의 초록이 밀려든다.

# 초록을 보는 누각의 빈자리…순천 대각암

전남 순천의 선암사. 지금 선암사는 봄꽃에서 신록을 거쳐 녹음으로 가득하다. 절집으로 가는 짙은 오솔길에 놓인 아치형의 다리 승선교도, 누각 강선루도 초록의 바탕색 위에서 하루하루 더 우아해진다. 선암사는 지금도 당당한 절집이지만, 과거에도 수많은 암자를 거느렸던 대찰이었다. 한때 37개의 암자를 거느렸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기록으로 확인되는 선암사의 암자는 23개다. 조계산 너머에 송광사가 있고, 거기 딸린 암자가 또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니, 조계산은 온 산이 다 불국토였으리라. 그 많던 선암사의 암자가 일제강점기에 6개까지 줄었다가, 여순사건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폐허가 됐다.

훗날 다시 지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선암사의 암자는 4개. 그중에서 압권은 대각암이다. 대각암은 대각국사 의천이 짓고 머물렀던 암자라고 알려져 있다. 대각국사는 11세에 출가한 고려 문종의 넷째 왕자로 송나라에서 유학해 수많은 장경을 수집하고 천태종을 개창한 고려 불교의 선각자다. 대각국사는 이곳 대각암에 머물면서 선암사를 고려 제일의 거찰로 중창했다고 전해진다.

암자에 깃든 역사적 의미와는 사뭇 다르게 대각암은 소박하기 짝이 없다. 근래 중건한 본당에 누각 형식의 대선루, 그리고 요사채 하나가 암자의 전부다. 그런데도 이곳을 꼭 가보라 권하는 건 누각 ‘대선루’ 때문이다. 활짝 열어젖힌 이층누각의 투박한 나무 창문 안으로 누각 앞 초록의 경치가 밀려드는데, 그 광경을 내다볼 수 있도록 마루에 긴 의자를 놓았다. 나무로 짠 그 의자에 앉아 누각의 창밖으로 사각 연못과 초록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지금 암자를 찾아가 그 자리에 앉으면 볼 수 있겠다. 절집과 암자가 지어지고 허물어지고 또다시 지어진 자리에서 그 시간의 겹과 겹 사이로 만춘의 날들이 지나는 장면을….


■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

아득한 길 끝 외딴곳에서 그윽한 향기를 품고 있는 암자를 순례하듯 둘러보고 싶다면, 지리산국립공원에 속한 삼정산(1261m)의 어깨를 오르내리며 걷는 ‘칠암자 순례길’을 추천한다. 까마득한 벼랑에 들어선 암자 다섯 곳과 그윽한 절집 두 곳을 한걸음에 다 둘러보는 길이다. 길은 도솔암,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사, 약수암을 거쳐 남원 실상사로 이어진다. 암자 대부분이 수도의 공간이라 여럿이 어울려서 가는 것보다 홀로 조용히 다녀오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