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나에게서 구하라 단기 4320년(서기1987) 5월 18일
옛부터 지금까지 精神을 수련하느니,
무슨 秘傳法을 배우느니 하는 인사들이 항상 그 비법이 傳授해 주는 師道에게 있으려니 생각한다.
물론 無에서 有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라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승이라는 것은 어디서 어디까지 가면 이런 곳에서 시작해서 이러저러한 곳을 경과하고
이런 산을 넘으며 저런물을 건너야만 目的地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예시해주는 것에 책임이 있을 뿐이다.
즉 路程記를 상세히 지도해 주는 것이 師道요,
잘 가고 못 가는 것은 師의 책임이 아니며,
항상 내가 잘 가야 하는 것이니,
비록 스승의 도움은 바랄지언정,
目的地까지 잘 가고 못 가는 것은 자신에게 구해야 한다.
驚天動地의 비법도 모두 나 자신의 誠心여하가 成不成을 좌우하는 것이다.
그러나 師道에 있어서 그 가르침이 옳지 않다면 이는 그 스승된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신의 공부의 成不成은 自己의 誠力여하에 있으며,
나 自身 밖에 있지 않다.
이것이 萬古不易의 秘法이요, 證據이다.
一般學問은 師友의 도움만 가지고도 아주 下愚만 아니면
常識線까지는 도달할 수 있으되,
정신수련에는 비록 大仙生佛이 지도하더라도 本人인 내가 성의가 없으면
나 以外에서는 아무것도 求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안에서 나를 구하라.
내 안에서 나를 구하면 仙도 될 수 있고,
佛도 될 수 있는 법이다.
東學敎祖인 崔水雲선생의 말씀에 人乃天이라는 내용이 있어서
人이 곧 天이라,
사람의 마음이 天心이요,
사람의 움직임이 天意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곧 天地人이 一體이니,
天을 알고자 할진대,
가장 가까운 곳,
自我에서부터 연구해 나가면 天도 알 수 있고 地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原理이며,
사람의 사람됨과 天地의 天地됨이 동일한 원리에서 萬物의 生養收藏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形以上이 天이요, 形以下가 地요, 形以上과 形以下를 구비한 것이 사람이다.
여기서 '具備했다'함은 天地의 중간자적 존재인 사람으로서
자신의 知慧를 확장·확대하면 天도, 地도 얼마든지 알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 갖추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上天下地,
즉 위로는 하늘에 통하고 밑으로는 땅에 익어지려면,
내 안에서 진정한 나를 구해야 하며,
내 밖에서 나를 구한다면,
그것은 나 아닌 다른 것을 구한 것이다.
現代高度物質社會에서 科學萬能을 자랑하지만,
有眼者가 본다면,
벼룩이 장판 위에서 뛰어오르며 자기의 용맹스러움을 자랑하나
사람이 주위에서 이를 지켜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우리의 정신수련도 역시 그 한계가 없다.
누구나 자기의 간 것 만큼 갔고,
그 이상은 억천겁을 갈 수록 더 닦아야 하는 것이다.
古人들이 石火光陰이니,
滄海粟身이니 하는 말은,
우주에서 보면 우리 人生이라는 것이 시간적으로는 돌을 맞부딪칠 때
반짝 일어나는 불꽃처럼 짧고,
공간으로 보면 가이없는 바닷물 위에 떠 있는 좁쌀알만큼 미미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무얼 하겠는가,
그렇다고 비바람 부는 대로 세월을 허송할 수 없으니,
電光石火中에서라도 만년불변의 태세를 지니고 나를 내 안에서 구하면,
이것이 바로 勿勿然然 久久不休하는 學人의 消息이요,
路程記가 될 것이다.
천 가지,
만 가지 말과 글이 모두 다 먼저 행함보다 못한 것이다.
나에게서 나를 구하라.
나 밖에 내가 없다.
나를 내 안에서 구해 얻음이 있어야 비로소 나 아닌 다른 남도 미루어 알 수 있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하고 나 아닌 남을 안다는 것은 내가 나에게 罪人이 되고
나 아닌 남에게도 죄인이 되는 것이다.
世人들은 나는 모르되 나 아닌 남을 잘 말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天이 아닌 까닭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그대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내가 내 마음의 일부만도 거느리지 못하면서 감히 他人을 거느리려고 생각한다는 것,
그것을 罪라 하지 않고 무엇을 죄라 하리요.
사람으로 태어나서 德이나 功을 세우지 못할 지라도,
罪人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서 구하라.
2. 나를 안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자기가 자기를 아는 일이다.
자기가 자기를 알지 못하고 남이나 남의 일을 안다면 이보다 곤란한 일은 없을 것이다.
자기의 과거 현재의 경력이나 실력이나 또는 업적으로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가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기의 학력도 알 수 있고,
자기의 업적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자기의 성품이나 일을 꾀하는 힘이 얼마만큼 되느냐 하는 것도 자기 이외에 누가 알 것인가?
그러니 냉정히 자기를 살펴서 자기의 힘에 맞는 일을 하면 실패가 없을 것이다.
3.백두산족은 누구인가?
백두산(白頭山)은 일찍이 온 겨레의 첫 조상이 되시는 단군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시어 교화(敎化)의 터를 잡으신 성스러운 산으로서,
지나온 역사 동안 우리 민족의 삶의 주된 무대였으나
언제부터인가 겨레의 마음속에서 잊혀져가고 말았다.
백두산에 대한 망각은 바로 우리 민족 주체의 유무(有無)에 따라 부침(浮沈)해 왔다.
우리 민족이 대륙 한복판에서 당당히 삶을 누려가고 있을 때
백두산은 강성한 겨레의 성산(聖山)으로서 받들어졌으며 통일된 국민의식의 상징으로서 자리했으나,
국력이 쇠하여 반도이남에서 주된 삶을 이끌어가던 시대에는
이름마저 남이 부르는 장백산(長白山)으로 둔갑하는 지경으로,
지도상에 백두산이 어디에 표시되든 무관한 우리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삼천리 반도 내에서 그것도 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려버린 지 반세기가 되어가는
지금 우리들에게 백두산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러한 물음이 내포한 분단된 삶의 허탈함이 있기에 백두산은 더욱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 찢기워진 삶의 봉합을 위해,
분단된 민족의 통일을 위해 백두산은 오늘도 남과 북의,
만주의, 시베리아의, 중앙아시아의, 미국의, 일본의,
세계의 모든 단군의 자손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백두산의 회복은 잃어버린 우리 민족주체의 회복이요,
민족사(民族史)와 문화의 회복이며 통일된 민족국가로의 회복이기도 하다.
백두산족(白頭山族)이라고 이름하였을 때 이것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이룩되어진 고대 문화권의 창시자이자 담당자였던 우리 겨레,
즉 단군의 자손으로서 일관된 역사와 문화를 계승해가며 살아가는 우리 한민족(韓民族)을 나타낸다 하겠다.
우리 백두산 겨레가 나아가는 길은 단순히 고대의 찬란했던 문화를 되새기자는
복고적 감상에서 발단하는 것이 아니며,
21세기를 앞두고 있는 첨단 과학기술문명시대의 온갖 문제와 모순들을 안으로 풀어나가며,
아울러 민족의 대립과 분열을 화합과 통일로서 해결해 나가는 겨레의 활로(活路)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백두산은 우리 모두가 나아갈 정신적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 영산(靈山)으로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4.황백전환기(黃白轉換期)와 정신문명의 도래(到來)
황백전환기라 함은 바로 백산대운(白山大運)이 열릴 시기를 말한다.
백인들이 주축이 되어온 서구문명의 선구적 역할은 이제 한 세대 안에 끝나고,
황인종-특히 한국, 인도, 중국인-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계적 문명권이 열리고 있다.
이것은 얼핏 지극히 인종주의적인 발상에 사로잡힌 편견같이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20세기 과학물질문명의 핵심은 사실 백인을 다수인종으로 하는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 주도한 것이었고,
앞으로 21세기 과학기술문명의 핵(核)은 거의 피부가 누런 사람들 속에서
창출되어질 것임을 암시한 것에 불과하다.
확실한 것은 전환의 시대는 오고 있으며 그 조짐은 이미 몇 십년 전부터 천문에,
역학에, 추수(推數)에, 원상(原象)에 드러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이 황백전환기가 바로 정신문명이 도래하는
백산대운으로 이어지는 것이라 하겠다.
백산대운이라 함은 곧 백두산족의 큰 운명(運命)을 이르는 말로서
삼천년만에 찾아온 역사적 순환인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새 문명의 전환은 세계적인 대성현(大聖賢)이 출현하시되
그 성인의 도력(道力)으로가 아니라,
인간적인 기술개발이라든지 살상 파괴적 병기를 억제할 수 있는
평화적 무기의 발명 등 새로운 물질문명의 건설로서 나아가 진정한 평화세계를 이룩함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와같이 위대한 정신문명의 발족(發足)에 관한 옛 성인들의 표현을 들자면,
우리의 성조(聖祖) 단군(檀君)께서 4286년에 보통사람으로 오신다는 것과,
대순(大舜, 고대 중국을 다스린 성인)이 4234년에 다시 화(華)에 오겠다는 것과,
석가모니불이 삼천년 후에 용화세계(龍華世界)가 된다는 것과,
문왕(文王)의 선후천 변괘론(先後天變卦論)이 있고,
예수의 이천년 후 부활론(復活論)이 있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이 시기에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대립이 없어지고 조화되어
지상천국이니,
극락세계이니,
장춘세계(長春世界)이니,
태평건곤(泰平乾坤)이니의 창설(創設)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평화세계 건설은 우리 백두산족이 먼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자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기반으로 삼는 대동책(大同策)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을
하나하나 성취해나갈 때 가능하다.
이러한 이상(理想)은 결코 허황한 몽상가의 허튼소리가 아니라,
지나간 인류역사의 어두운 질곡에 대한 물극필반(物極必反)의 원리로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5.단학수련(丹學修鍊)의 시대적 요청
단학(丹學)의 기원(起源)은 백두산족의 성조(聖祖)이신 단군의 가르침에서 비롯한 바,
인간생명의 근원인 숨을 조절하여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고
더 나아가 본래 지니고 있던 정신의 밝음을 다시금 밝게 되찾음을 제일 목표로 삼아
그 명명(明明)함을 바탕으로 자기 주위의 세상을 이롭게 함에 힘쓰는 것을 최상의 목표로 하고 있다.
단학은 큰 길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걸을 수 있어서,
적은 것을 원하는 이에겐 적은 만큼,
큰 것을 얻기 위해 힘쓰는 이에게는 그만큼 큰 것을 제공한다.
실로 고대로부터 우리 겨레의 면면한 숨결이 고동치고 있는 고유한 정신수양체계로서,
삼국시대의 화랑도(花郞道) 사상이나 국선(國仙), 조의선인(早衣仙人)제도 등은 모두 같은 맥락이다.
또한 이 체계안에는 지(智), 덕(德), 체(體)의 세가지 면을 아울러 닦을 수 있는
조상 전래의 지력(智力)개발법,
체력양성법,
덕성(德性)함양법 등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어서
누구나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능력에 맞게 선택하여 정성껏 행하기만 한다면,
고유한 민족문화의 탁월한 하나의 계승자로서 사회발전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단학의 본질이 결코 현실도피적이거나 은둔지향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내온 역사를 보면 주체적인 민족고유사상이 외래문화 도입에 따른
사대주의의 만연으로 탄압을 받은 적이 매우 많아서,
그때마다 역사의 주류(主流)로 나서지 못하고 그 밑으로 숨어 지내며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함에 바빴던 것으로 안다.
이제 역사적인 민족의 통일대업(統一大業)이 금세기 안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우리 백두산족의 민족자주정신의 완벽한 회복을 위해서,
또한 홍익인간 이념의 현세적 실현을 이룩할 정신문명의 도래를 위해서,
민족 구성원 모두에게 민족정신의 단결을 튼튼히 해 줄 단학수련의 문호를 활짝 열면서
우리 모두 통일이라는 대동(大同)의 배를 저어 나갈 것을 천지신명에게 고하는 바이다.
6.신·경·성
어떠한 일이든지 우리가 시작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이요,
믿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다. 그러니,
첫번째 조건이 믿음(信)이라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무슨 일이고 착수하여 될 리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 일이다.
믿음이라면 그 일을 충분히 알고 의심이 없어야 믿을 수 있을 것이요,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믿거든 공경(敬)하라는 것이다.
경(敬)이라는 것은 무슨 일이나 그 일을 하자면 당연히 실행해야 할 일을
실행함으로서 공경이 생기는 것이다.
소홀함이 없어야 하는 것이요,
공경함에서 인내도 생기고 지구력도 생기고 추진력도 생기는 것이요,
목적에 도달하기까지는 이 경(敬)만으로도 좀 부족해서 정성(誠)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정성이라 함은 그 극치점(極致點)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찻물을 이는데 냉수로는 찻물이 안 되니
끓는 물이라야 된다는 것을 알고 찻물을 끓일 절차를 시작하는 것이 신(信)이요,
차를 끓일 물을 다리는데 실수없이 다른 일을 안 보고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것이 경(敬)이요,
말하자면 냉수를 깨끗이 길어 와서 깨끗한 차주전자에다 담아서 화로에다 올려놓고
부채질을 주의해 가며 하고 있는 것이 경(敬)에 속하고,
이 냉수가 비등점에 가고 찻잎을 넣게 될 때,
성심성의(誠心誠意)로 하지 않으면 목적에 가까우면서도 성공하기 곤란한 것이다.
이 정성이 아니고는 성공에 도달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믿음으로 시작하여 공손히 일을 해나가서 정성을 다해야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더구나 정신공부 같은 것은 알지 못하면 믿을 수 없는데
믿음(信)의 극치점이 경(敬)이 되고,
경의 극치점이 성(誠)이 되며,
성의 극치는 성공이 되는 것이다.
공부하는데 스승을 구하되 그 스승의 자격을 알고 믿으며,
믿게 되므로 그 스승을 공경하고,
그 공경이 극도에 가서 정성을 다하면 스승의 가르침도 이루어지고 자기 공부도 성공할 것이다.
세상에서
신(信),
경(敬),
성(誠)의 하나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확신하는 점도 발견 못하고
의심을 가진 채 이루고 못 이루고의 여부도 가리지 못한 채 착수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신·경·성(信敬誠)이 없이 일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고도 성공한다면 그것은 물론 예외적인 일이다.
믿음·공경·정성을 말하며 일을 이루고 못이룸이
사전에 확정된 것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 붓을 든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신·경·성(信敬誠)이 없이는 절대로 성공이 없다는 것을 확언해 두는 것이다.
이 세가지 조건이 확보되면 성공 못하는 법이 없고,
운이 아무리 없는 사람이라도 이 세 조건이 확보되면 틀림없는 행운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대인(大人)은 조명(造明)이라고 운명론을 반대하는 이유이다.
누구든 무슨 일을 하든지 확신을 가지고 경의(敬意)를 다하여 성심껏 하면
성공한다는 확정론을 말해 둔다.
그렇다고 자기의 역량이나 주위사정을 따지지 않고
아무 일이나 착수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기 역량에 합당한 것을 택해서 목적을 삼고 나아가되
이상의 세 조건을 확보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역량과 성품의 단점을 돌아보지 않고 추진한다면
절대로 성공이 없다는 것도 덧붙여 말해 둔다.
7.우리나라 고유의 체술
우리나라에 옛부터 전해오는 무술의 비밀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문자화 되어서 전하는 것은 보지 못하고,
단편적으로 흩어진 가운데 야담으로 전해지고 설화로서 그 지방에 전해질 뿐이다.
이것은 당시의 정치가 그것을 전하도록 허용을 안 한 것이 주된 원인이요,
또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치던 방식이 공개되지 않고,
한 사람의 높은 수제자가 무예의 전부를 습득 못하고 한 기술이나 하나의 재능을 기르는데 불과하여,
무술의 가장 비밀스런 핵심부분을 실제로 시범을 보일 만큼 닦지 못하고,
입으로만 전해 주고 마음 속으로 전해 받는 식이다.
그러나 다른 공부라면 모르되 무술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체득하지 못하면
사용이 불가능 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무술의 전모를 엿볼 수 없는 주원인이 된다.
그리고 후세 사람으로도 이 전모를 연구하려고 하기보다는
한 가지의 기술이나 재능이라도 습득함을 스스로 만족해 하게 한 원인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을 염려해서 각 사람의 각 기술을 종합해서 근본적 체술을 연구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8.역사에 가리워진 우리의 고대문화
세상에는 겉으로 드러난 일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일도 많다.
또 겉으로 드러난 표현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일도 많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자. 상고사는 잘 알 수 없으니 접어두고,
중고역사(中古歷史)에서 을지문덕이 수나라 병사 백만을 청천강에서 대파하였다.
당시 수(隋)라면 중국에서 천하를 호령하던 강국이요,
또 우문술이라면 상당한 장수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요,
병력이 태부족이었는데 수나라 군대를 청천강까지 유인하여 전멸시켰다.
야사에 전하기를,
수나라 병사들이 청천강 북쪽 기슭에 와서 도하작전을 시작하려고 할 때,
그 강물의 깊이를 알지 못해서 주저하였다.
그때 강변에서 승려 세 사람이 강을 건너는데,
물이 무릎까지밖에 차지 않았다.
승려들이 강을 다 건너가는 것을 본 수나라 장수가 곧 대군에게 도강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대군이 강의 가운데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 수심이 깊고
또 고구려군이 반격하는 바람에 수나라 군사가 거의 전멸되었다.
그 승려들은 사람이 아니고 청천강 남쪽 기슭의 어느 사찰에 봉안한 미륵불 세 분이었다고 한다.
비록 알 수 없는 일이나 수나라 군대가 청천강을 건너다가 패망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가 여기서 연구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을지문덕이 무슨 병력과 병법으로 수나라의 그 엄청난 대군을 전멸시켰는가 하는 것이다.
또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와 개인적으로 대결을 하여 승리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병대병(兵對兵)의 전술이었을 것이다.
그 전술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일시적으로 수나라 병사가 실수하여 패했다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추측해 보더라도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어 재반격을 하였을 것인데,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아주 치명적인 타격을 주어 수나라 군사로 하여금
뒤돌아 볼 엄두를 못 내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그 병법이 어떤 것이었는지 전쟁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깊이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전래되던 우리의 병법은 무엇인가?
무기는 무엇이 있었는가?
을지문덕은 무슨 공부를 하던 사람인가?
이러한 것들을 각 방면으로 조사해야 한다.
역사를 볼 적에 주마간산식으로 보아서는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이다.
연개소문이 당나라 병사를 대파할 때에도 보면,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중국을 평정하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나라를 범하였다.
당시 중국의 천하영재를 모두 모아 가지고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무슨 고유의 전통적인 무예나 병법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연개소문의 지략과 용맹은 당나라에서 감히 상대를 못할 정도로 뛰어났다.
중국에서는 열 여덟 종류의 무기를 사용하였는데,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무기를 사용하였는가?
또 중국에서는 병력 배치 방법으로 팔문법(八門法)이 유행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병력 배치법을 썼는가?
이 모든 의문을 풀어 줄 자료가 한 건도 역사에 전하는 것이 없다.
그저 연개소문이 용맹하였다는 것 뿐이다.
이래서는 역사적 가치가 없다. 역사가들이여!
고고학을 좀 더 연구하고 나서 역사를 쓰라는 것이다.
당시 민간풍속은 무엇이었으며,
국가 정치는 어떠했는가 하는 것도 현재 우리가 보는 역사책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신라시대에는 화랑도(花浪道)가 있었는데,
그것이 있었다는 기록만 엿보일 뿐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상세한 것은 도저히 가늠할 길이 없다.
화랑도에 나오는 국선(國仙)이라는 것도,
어떤 수련을 해야 국선이 되는지 알 길이 없다.
그렇다면 삼국사는 완전히 피상적인 것만 남았을 뿐이다.
당시 우리의 예술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우수하였던 것은 사실인데,
역시 그 예술의 흔적은 있으나 그 예술이 전래되지는 못하였다.
그 신라 말기의 견훤이나 궁예 역시 지략과 용맹을 겸비한 장수였는데,
그들이 무슨 병법을 지니고 있었는지 상세히 알 길이 없다.
그 다음 고려사에 보면,
초기에 서희(徐熙)같은 명장이 있었고,
중기에 강감찬 같은 명장이 있어서 종종 그 전하는 이야기들은 있으나,
역사로 보아서는 조금도 알 수가 없다.
또 도자기 예술도 당시에는 보통으로 알았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그 뛰어난 공예술을 다시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소중화(小中華)라고 자처한 유학자들이 자기 나라에 전래하는 인심이나 풍속을 기록한 일이 없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는 일이다.
조선개국 초기에는 문무(文武)를 모두 겸비하였던 듯하다.
태조대왕의 용맹스러운 모습이나,
이지란(李之蘭)의 용맹한 자태가 서로 우열을 다투고,
또 세종대왕의 문화정치는 역사적으로 뛰어났다.
당시 김종서(金宗瑞)같은 재상은 문무를 겸하였고 세조대왕도 역시 문무의 재인이었다.
그렇다면,
개국초기에는 선비들이 문과 무를 모두 공부한 것이 사실이다.
그 다음에도 선조대왕 당시에 지혜로운 인물이 속출하였는데,
이들의 맥을 살펴보면 순수한 주자학파가 있는 반면에,
이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전래하는 성리학(철학)을 전공한 이도 있다.
이 방면의 학자들을 주자학파에서는 소강절학파라고 지칭하였으나,
사실은 우리나라 유교는 주자학파뿐이요,
소강절파는 전래된 일이 없다.
그들은 우리나라에 고래부터 전해오는 학문을 연구한 분들이었던 것이다.
또 주자학파는 교리에 치중한 교파(敎派)가 대부분인 것 같고,
본체를 공부하는 심파(心派)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우리 고유의 철학을 연구한 이들은 주자학파의 탄압이 무서워서 발표를 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화담 서경덕,
북창 정렴,
남명 조식,
구봉 송익필,
율곡 이이,
고청 서기,
미수 허목 등과 같은 인물이나
박엽, 허생, 진묵, 서산, 사명당 같은 이들은 모두 그런 이들이며,
그 이름이 별로 나지 못했다 해도 숨어 있던 선비 중에도 무수한 위인이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율곡선생 한 분만이 국가적으로 대접을 받았을 뿐
다른 이들은 입에도 오르지 못했다.
이 모두가 주자학파의 횡포 때문이었다.
이렇게 회고해 보면 조선문화가 선조대왕 시대까지는 그래도 전래되었으나,
그 후에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인조대왕 이후 인물이 나오지 못했으며,
효종대왕때에 약간의 숨은 선비들이 있었으나 감히 세상에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 후 2백년간은 역사에 기록할 만한 자료가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무엇을 참고하여 붓을 드는가,
그것이 나는 궁금하다.
우리나라의 인물전기부터 왜곡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 그런가 하면,
전기라는 것은 마땅히 주인공이 어떤 인물이고 어떤 삶을 살았고 무엇을 공부했는가를
첫 출발부터 잘잘못을 상세히 기록하는 것이 당연하다.
말하자면 임진왜란에 충무공이 세기적인 위인으로 성공한 이유가
자초지종 상세히 기록되어야 다음에 제2의 충무공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가치라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전기에는 이러한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이를테면 거두절미의 문학일 뿐이다.
충무공이 수련시기에 무슨 수양을 해서 어느 정도의 단계에 갔는가?
관직의 길로 나가서 수양한 실력을 어떻게 활용했으며,
그리하여 어떤 전략으로 명량, 노량 대해전과 같은 신화적인 전과를 올렸는가가
상세히 기록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거북선을 만들게 된 원인과 그 방식이 기록되어야 할 것인데,
의외로 거북선에 대한 평면 외관도는 있으나 입체설명도와 해설이 없고,
충무공 자신의 거북선 제작 동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나라 인물전기의 부족한 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율곡과 충무공의 관계에 얽힌 야담이 많은데,
이 야담을 구체화해서 후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게끔 명료하게 기록하지 않고,
다만 상투적으로 그 인물에 대한 칭찬이나 늘어 놓아서 외양만 번지르르하게 써 놓은 것 뿐이다.
충무공 뿐만이 아니다.
조선 오백년의 인물전기에 실린 사람들 모두 단점이라고는 하나도 기록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인물전만 가지고는 후대가 그 진실을 알 길이 없다.
내가 지금 이렇게 중언부언하는 것은 현재의 역사책에는 우리나라의 전래되어온 고대문화가
한 건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한심해서다.
우리의 대황조께서는 태초에 한 기운이 세 갈래로 맑은 형태로 형상화되고,
그 세 갈래의 형태가 다시 한 기운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셨다.
또 장차 삼교가 통합되어 한 집안이 될 것이며,
간방의 도가 다시 빛나서 시작과 끝을 이루리라고 하셨다.
여기서의 간방은 바로 우리 나라를 가리킨다.
이를 공자도 묵시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석가모니 부처는 미륵불의 도래를 말하였는데,
미륵불의 용화세계라는 것도 우리나라를 의미한다.
여러 방면으로 각양 각색의 설들을 종합해 볼진대,
어느 모로 보든지 성인이 시작과 끝을 완성할 도를 다할 곳은 바로 우리 간방이다.
여기서는 내가 이런 정도로 말하지만,
실제로 중국이나 인도나 구미의 성현들이 모두 우리나라에서 장차 구세주가 나온다고 말한 일이 있다.
이런 점은 종교가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현재 구미 각국에서는 동양철학을 연구하는 일에 열심이다.
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자들과 예술가들도 동양의 정신을 찾고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젊은이와 지식인들은 동양의 고대철학이라면 덮어놓고 미신이라고 돌려버린다.
이 무슨 역설인가?
서양의 선진국에서는 동양철학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있는데
동양에서는 고대철학을 미신이라고 반대하니,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숭배하는 구미의 철학자들이 미신 숭배자란 말인가?
우리는 먼저 역사의 이면에 가리워진 우리의 고대 전통철학을 공부해야 한다.
우리의 전통철학이 미신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과학이라는 미신에 젖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고대 철학을 연구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가 있을 것이다.
흩어진 고서들에서 찾아 읽는 방법이 있고,
또 입에서 입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학문을 배우는 방법이 있으며,
실질적으로 그러한 철학을 체득한 이들에게서 배우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역사가들이 피상적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실질적으로 우리의 사상과 철학을 다시 부활시키는 일이다.
9.정신연구에 가장 중요한 비결은 무엇인가?
정신연구에서 제일 중요한 비결이라고 하며 무슨무슨 법으로 전해지는 것이 많다.
그러나 그 비결을 쓴 사람들의 의견이 각기 다르게 보인다.
예를 들면,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거나 하는 데 대한 비결은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하고,
목이 마른 사람은 마셔야 된다는 것이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올바른 요결의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도 않다고 본다.
배가 고픈 사람이 음식을 먹으면 그 배가 부르다는 것을 몰라서 안 먹는 것이 아니고,
목이 마른 사람 또한 마실 것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된다는 것을 몰라서 안 마시는 것이 아니다.
비록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지만 먹을 수가 없고 마실 수가 없는 까닭이 있어서
할 수 없이 배가 고프니 목이 마르니 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경우도 거의 다 이런 것이다.
병이 있는 사람은 약을 먹어야 하고,
몸이 피로한 사람은 휴식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고,
그 요결 또한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모두,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모두 각기 나름대로는 올바른 풀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 행함에 있어서 백 가지 천 가지의 요결이 마음대로 실행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면 그 요결이 정해(正解)가 아닌가 하면,
요결은 정해(正解)지만 그 실행은 어렵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단도직입적으로 요결이 비록 정해(正解)였지만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자세한 지침이 없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내가 본격적으로 정신연구에 가장 중요한 비결이 무엇인가?
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게 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까닭에서이다.
정신연구의 중요한 비결을 쓴 앞서간 현자들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백 수천에 달하고,
그 저술 또한 수천 수만 권에 이르니,
각기 경험대로 최선을 다해 기록한 것이다.
그 어느 것이나 올바른 풀이가 아닌 것이 없지만,
정신을 연구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성공한 사람은
깊은 바닷물 속에서 진주를 캐는 것보다 더 찾기 힘들다.
이런 현상이 단지 그 요결의 부족함 때문인가,
처음 배웠던 사람들이 성의가 없었던 까닭인가 하는 것은
오늘날 수련에 정진하고 있는 후학들의 의문사항이 되고 있다.
동양철학에서는 우선 유교의 중용사상이나 주역사상이 있어서
이 요결에 성공하는 사람이 성현군자가 되고,
이 요결을 솔성이라 한다.
또 불교의 대장경이 있어서 그 요결에 성공하신 이가 부처·보살·조사·나한이 되어,
그 요결을 견성이라 한다.
그리고 도교의 도장경, 참동결이 있어서 그 요결에 성공하신 이가 신선·진인·천사가 되고,
그 요결을 명성이라 한다.
서양에서도 이와 유사한 법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나 자신 역시 정신수련에 고락을 같이 했던 사람이었고
또 후학들을 위해서 내가 경험한 바를 간단히 적고자 한다.
가.스승의 도움(師助) :
정신수련계의 중진을 택해서 정신학에 대한 강의를 많이 들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은연중에 신념이 생겨서 스승의 지시대로 정신수련을 해볼 수 있게 된다.
나. 자습(自習) :
천 가지 만 가지 쓰디 쓴 고초를 무릅쓰고 그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기백으로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
공부중에 포기하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 된다.
다.벗의 도움(友助) :
스스로 수련하다 보면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스승에게 문의하기가 곤란 할 때에,
같이 수련을 하면서 어려움을 함께 하는 선배의 경험담을 들으면
막막하고 포기하고 싶던 마음속에 다시 새로운 희망이 생겨서
오히려 신념이 강해지고 경의가 나타나게 된다.
이 마음은 성심·성의가 되어 비로소 성공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10.만세(萬世)대장부의 출현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이 세계 현상으로 보아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인류가 거의 동일한 문제에 의문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의식주에 관한 문제는 전인류의 공통된 문제이니 이는 제외하고,
그밖에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의
자웅을 겨루는 결정이 언제 나는지에 관한 것이고,
또한 이 양자간의 충돌이 전세계에 어떤 변화를 가지고 올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양자간의 충돌이 없이,
무슨 좋은 제안으로 전쟁없는 평화세계가 창조되었으면 하는 것이
모든 약소국가와 민족들의 공통된 염원이다.
전세계가 좌, 우, 중간의 3파로 갈려있고 그밖에도 좌나 우, 중간도 아닌 순회색파가 있다.
국가들의 원수나 지배급 인물들이 이 3파로 나뉘어 있을지라도
인류전체는 그들의 지도자들의 의사와는 거의 백팔십도 반대로
전쟁없는 평화를 제일 공통된 희망으로 여긴다.
하지만 전인류의 의사를 무시한 소수 지도인물들의 장난으로 세계는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다.
어느 나라든 극소수 수뇌들에게 희생이 되어 순진한 양 노릇하는 백성이 불쌍하다.
그 극소수의 인물들은 전국민을 제물로 놓고 자신을 마음대로 요리하고
최저보수로 의식주를 해결토록 착취하며 자신들은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 앞으로 세계 인류의 공통된 목자로서 모든 사람이 희망하고 있는
이상을 실현시킬 만한 역량이 있는 인물이 나온다면
전인류가 쌍수로 환영할 것이요,
이 사람이야말로 우주사(宇宙史) 에 최대 영광을 차지할 인물이 될 것이어늘
이 좋은 시대에 어느 곳에서 그 위대한 사업이 세워질 것인지 궁금하다.
역학(易學)으로 보면 간도광명(艮道光明)이라 하여
우주사가 전개된 이후 인류의 운명이 이 간방(艮方,동북방)에서 시작하였고
다시 광명이 간방에서 온다고 하였다.
이것이 중명(重明, 거듭 빛남)이라는 것이다.
백두산족에게서 세계인류의 평화를 건설할 인물이 나오리라는 옛성인들의 예시인데
누가 이 운(運)에 맞는 인물인가,
하루라도 속히 출현하라,
전세계 인류는 고대한지 오래다.
"때로다,
때에 이르렀도다,
다시 오지 않을 때로다.
만세(萬世)의 대장부로서 오만 년이나 갈 때로다" 한
최수운(崔水雲)의 세대보다는 현재가 누가 보든지 바로 그 때임에 틀림없다.
이 때를 버리고서 과연 어느 때를 기다릴 것인가.
주저말고 속히 오라.
이 때를 잃지 않을 장부로다.
양쪽 불이 싹을 움직여서
누런 학 울음소리 가운데 싹은 트고,
현무(玄武)가 물속에서 잘 길러져서
푸른 호랑이 한 번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들 크게 놀라거든
금닭이 한 번 우는 소리에
붉은 바람(丹風)이 불어오고
지난 정묘년부터 시기가 도래하여
문밖에 복숭아와 오얏이 만발하는구나.
이것이 오만 년 무극대도(無極大道)의
서른 여섯 성스러운 무리임이 분명하다.
북쪽으로 만 리 얼음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 금사람(金人)이 곤륜산을
대함은 한국과 중국이 한집안으로서
천하를 호령하며 황백(黃白)을 바꿈이라
이와 같이 다시 이와 같이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을 펼치는 것이
바로 요임금이 세상에 나오시는 것이요,
큰 성인 순임금이 다시 츨현하심이라.
11.나의 한계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나는 어떻다느니,
나는 무슨일을 하겠다느니,
나의 장래일을 위하여 내 과거일은 이랬어야 하느니,
나와 남을 비교하느니 하는데 대체 '나'라는 것의 한계를 잘 알 수 없다.
'나'의 한계는 무엇인가?
세상에 나온 후부터 나라고 이름붙여 다시 온 곳으로 돌아가기까지
일생을 통해 더불어 사는 이 육체를 바로 '나'라고 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어디까지가 '나'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만약 세상에 나온 이 육체를 나라고 한다면,
이 육체가 나오기 전에는 나라는 것이 없었을 것이요,
또 이 몸이 죽어지면 나라는 것이 자연 소멸될 것인가?
세상의 해석은 이 방면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야 알 수 없고 또한 한 번 죽어지면
그 이후의 세계도 알 수 없는 것이니 '나'라는 것은 한계가 아마 이정도인가?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렇다.
이 육체가 생기기 전에는 나라는 것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 육신이 온 후에 내가 생겼다고 한다면,
또 그래서 이 육신을 '나'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육신이 죽었더라도
그 육신이 나인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호흡이 정지되고 이 몸에 열이 식어서 시체가 되면 그때까지
나를 대표하던 이름으로 그시체를 부르지 않고
다만 누구의 시체라고 하는 일개의 송장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나에게 가장 가깝던 사람도 모두 나를 피한다.
따라서 이 육체가 나를 대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불변하는 '나'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육체가 내가 아니라면 무엇이 나란 말인가?
어떤 이는 정신(精神)이 곧 나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이 육체는 무엇인가?
또는 정신과 육체를 합한 것이 곧 나라고 하나,
그렇게 되면 정신이 육체를 떠나는 찰라에 나라는 것도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 속에서 볼 때 이 정신,
이 육체를 다 떠나서도 나라는 존재가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즉, 내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 후에도 여전히 나를 대표하는 이름이,
아무개라는 명칭이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름이 곧 나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또는 내가 출생하기 전의 몸(前身)도 나요,
현재의 몸(現身)도 나요,
미래의 몸(後身)도 불변하는 나라고 하니 무엇이 진정한 나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각자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자기 주장이 옳다고 하나
어느 '나'가 진정한 나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면 이러한 주제는 애초부터 아주 한계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먼저 '나'라는 것을 잘 찾아야 이 한계를 알 수 있다.
저마다의 주장이 다르니 지금 말을 하고 있는 나도
이 한계가 의심이 나서 매듭을 짓지 못하는 것인지,
나 자신의 결론이 있으나 말을 안하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그대에게 맡긴다.
그저 나의 한계를 알 수 없다는 의문을 남겨 두고
뒷날의 누군가에게 답을 구하는 것이다.
나의 한계는 무엇인가?
내가 있다 없다 함도 모두 나요
과거도 미래도 현재의 '나'라
없고 또 없고, 비고 또 비어도 나 아님이 아니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 또한 나로 말미암으니
세상 사람들이여, 삶과 죽음의 길을 찾고자 한다면
빈 산 밝은 달에 '참 나'를 깨달으라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죽음에 대하여 공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생(生)을 모르는데 어찌 사(死)를 알리요?"라고 반문하였다.
공자가 삶을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질문을 한 자로가 삶을 모르면서 죽음에 대해서 알려고 하니 이를 지적한 것이다.
말하자면 비교할 근거가 되는 생을 알지도 못하면서 죽음을 알아서 무엇하러 묻는가 하신 것이다.
나의 생부터 깨달으면 자연히 죽음은 알 일이라는 뜻이다.
자로가 생을 모르면서 사를 묻다가 반문을 당하기는 했지만,
자로 역시 '나의 한계'에 의문을 가졌던 듯하다.
12.대자연의 삶
인간으로 탄생한 것을 우리가 얼핏 생각하면 가장 무의미한 우연의 산물인 듯 여겨지고,
탄생 후의 주위 환경과 교육 여하에 따라 그 삶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졌기 때문에
흔히들 인생을 부생(浮生), 뜬구름처럼 떠도는 삶이라고 말한다.
또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부귀영화를 누리다 가는 사람은 극소수인데 반해
가난과 병으로 일생을 보내는 사람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이 인간살이를 고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인간으로 탄생한 것이 맹목적인 우연에 있는 것도 아니며,
삶 자체가 부생이나 고해인 것은 더우기 아니다.
단지 이 우주 대자연의 크나 큰 수레바퀴 속에서
자신의 과거 행적에 따라 돌고 도는 가운데,
각자가 무의미한 우연에 의해서 이 지상에 나오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뿐이다.
세상에 나와서 남과,
또 사물과 맺어지는 인연이라는 것은 모두가
각자의 판단과 결정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아무 관계도 없는 우연으로 그 인연이 맺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삶은 반드시 그 뜻이 있는 것이지 뜬구름 같은 부생이 아니다.
또한 무수한 세월을 두고 전전하던 잘못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어 나온 것이니
선(善)을 생할 수도 있고 악(惡)을 행할 수도 있는 이 자리가
어찌 고해라고만 단정할 것이겠는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천지의 대자연은 변함이 없으나,
인간의 행위는 여러모로 그 대자연을 위반하고 대자연에 역행하는 방향으로만 달려간다.
하늘은 어느 때고 그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인간에게 부여하지만,
인간들이 스스로 끊임없는 윤회의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가 시작한 이래,
이것을 자각하신 성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 윤회의 고통을 스스로 택하지 말고,
그 사슬에서 벗어나(해탈하여) 극락을 얻으라고 수없이 일깨워 왔다.
그러나 인간들은 여전히 술취한 듯,
꿈꾸는 듯 그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옛사람들이 이 현상을 보다 못하여 현실적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이 삶을 부생(浮生)이라 하고,
극락을 만들 수 있는 낙토를 고해(苦海)라고 오해하였다.
또 마음 속과 지상에 천국을 건설할 수 있는 이곳을 지옥이라고 생각하여
죽어서 갈 천당을 희구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이것은 비단 현 인류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태초 이래 인류가 시작된 뒤부터 계속되어 온 문제다.
그리하여 이처럼 끊임없이 인연을 맺고 잘못을 되풀이하여
윤회하는 삶이 마치 정상적인 대자연의 삶인 양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을 깨달으라.
피와 살과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진 이 몸 안에 불멸의 대생명력이 무한히 내포되어 있다.
이것을 자각하라.
이 몸이 가장 뜻깊은 몸이요,
이 삶이 가장 즐거운 삶이요,
지금의 이 세계가 바로 극락세계이다.
이 세계 외에 또다른 극락세계가 있지 않다.
이 삶보다 더 의미있는 삶이 있지 않다.
인생은 고통이라고 부르짖는 인류로 태어나서 이 현실세계를 극락으로 생각하고,
지상극락 건설을 크게 외치면서 자기 자신과 남을 자각시키는 마음,
이것이야말로 윤회라는 피동적 삶의 형태를 극복하는 사람의 자세다.
또다른 삶과,
또다른 세상을 꿈꾸지 말라.
그대가 선 바로 그 자리에서 천국을 느끼고,
진리를 찾으라.
이것이 바로 옛 현자들의 깨우침이며,
대자연계에서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소식이다.
내가 나를 안즉 능히 남을 알고
원래 밝은 것을 다시 밝히니 도道가 이루어진다.
남을 알고 나를 알면 모든 일을 알고
주변을 돌보면 덕德이 세워진다.
이것이 바로 생의 최고의 목표라,
뜻을 세움이 낮으면 그 배움이 보통의 수준을 넘지 못하니
반드시 이러한 최고의 것으로 뜻을 세워서
그리하면 비록 타고난 재주와 성질이 크게 뛰어나지 않더라도
자신도 모를는 사이에
능히 지혜로운 자의 대열에 서게 될 것이니
모든 배우는 이들은 마땅히 힘쓰고 힘쓸지어다.
13.사물은 극에 달하면 반드시 되돌아온다.
우리가 유년시대부터 노년시대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거울삼아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상을 예측해 보면 어떤 일정한 동일궤도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문제일 뿐 아니라 주변의 여러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들의 과거, 현재, 미래상을 추측해 보아도 역시 동일궤도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으며
한 사람도 그 공식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이 없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 출발하여 면으로, 군으로, 도로 확대해 가면서
약 60여년이라는 세월을 두고 사람들이 살아나가는 각양각색의 모습들을
통계학적으로 조사하여 동일궤도상의 공식에 적용시켜 본 결과,
이상하리만치 그 공식이 불변의 철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 전체를 대상으로 시도해 보아도 모든 통계가 그 공식에 일치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만 이 공식이 적용되고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내 한 몸의 일생에서 시작하여,
이것을 미루어서 사방으로 폭을 넓혀 보고 점차적으로
우리나라 전체에까지 확대하여 조사해 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서 과거의 역사를 회상해 보면,
역사적 흥망성쇠라는 것도 한 개인이 흥망성쇠하는 공식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앞으로 올 일을 예지하는 것인데,
나는 정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
즉 미래를 예측하기보다 현재와 과거를 확실히 아는 것이 더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행적만 잘 안다면 미래에 올 일이야 불을 보듯 환한 일이다.
조물주가 이 공식을 내놓지 않았다면 개인이나 한 국가나 흥망성쇠라는 것이 있을 리 없다.
이 불변의 철칙을 알지 못하고 범하는 자는 반드시 망하고 쇠함을 면치 못할 것이요,
그 공식을 알고 즐겨 지키는 자는 흥하고 성함이 자연히 오는 것이다.
이것이 대자연의 법칙이요,
공식이다.
하늘이 무엇이며 조물주가 어디 있느냐며
이 대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하는 자도 간혹 있지만,
공식과 법칙을 위반하는 이런 자들의 행위가
결국 멸망을 자초했다는 사실을 역사는 밝혀 주고 있다.
여기서 이 공식을 지키는 자의 행위를 선(善)이라 하고,
그 공식을 위반하는 자의 행위를 악(惡)이라 해보자.
그리하여 누구나 그 생각과 행위에 선한 요소가 많으면 그 결과 복이 찾아올 것이요,
악한 요소가 많으면 재앙이 오는 것이 대자연의 법칙이다.
세상 사람들은 악한 자가 잘 되고 선한 자는 고생만 한다고 말하나,
이것은 근시안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시간에 느리고 빠른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공식이 예외로 작용한 경우는 역사상 없었다.
현세계의 물질문명이 비록 첨단을 걷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모든 흐름이 점차 악화일로로 치달아 자멸의 시기가 멀지 않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도 남북통일이 언제야 이루어질 것인가,
혹시 파국이 오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것도 아주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쉽사리 낙관하지 못하고 있으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북한이 아무리 남침준비를 하고 있다 하여도
남한에 사는 국민이 그 고난을 두 번 당할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
나의 첫 번째 생각이다.
또한 한국도 6·25 당시와 같은 무방비 상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아무리 전쟁을 잘 한다고 해도 승산없는 전쟁을 일으킬 리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이 민생의 안정이다.
즉 사회의 특권층에 집중되어 있는 부(富)를 분산시켜
극심한 빈부의 차를 과감하게 시정해야 한다.
이렇게만 되면 나라의 힘이 커져서 전쟁의 가능성은 없어지며,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가장 최상책의 전략이 성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어떠한가?
그것과 정반대로 국내 특권층이란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국민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자기네 사욕을 채울까 하고 있으며,
또한 그 특권층들에게 아부하며 나라와 민족은 어찌되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부패한 인간들이 이 세상을 활보하고 다니는 형편이다.
그리하여 국민들도 '사람이 살아가는 정당한 도리' 따위는 염두에도 둘 새 없이
서로 이익을 좇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스스로 멸망을 부르는 길을 서슴없이 택하고 있다.
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가?
이것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지나 장차 날이 밝아오려는 때에
온갖 귀신들이 난무하는 현상이요,
장차 온갖 어두운 것들이 모두 사라지려는
물극필반(物極必返, 사물은 극에 달하면 반드시 되돌아온다)의 현상이라 할 것이다.
그러니 이 현상이 비록 눈앞에서는 비참하나
머지않아 밝은 태양이 떠오를 전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미리 어둠 속의 한 가닥 밝은 빛을 길러
꿈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일깨우는 것이 선각자들의 책임이다.
날이 모두 밝은 뒤에는 누구나 광명(光明)을 아는 것이니,
이 물극필반이라는 경지에서 자아를 잃지 말고,
탁류에 헤매이지 말며,
미래의 일꾼이 될 씨앗들을 썩지 않게 싹틔울 역할을 각자 스스로 맡아야 한다.
이것이 나의 한 가닥 희망이다.
물질문명의 극이 머지않아 정신문명과 교체할 단계에 왔다는 것을 나는 다시금 강조한다.
이 새로운 정신문명의 건설자,
곧 미래 5천년 조화세계의 주역은 바로 우리 백두산 민족임을 모두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옛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힘이 같으면 지혜를 헤아리고
지혜가 같으면 덕을 헤아린다.
일하는 이가 많고 쓰는 이가 적으면
그 쓰임이 넉넉할 것이요,
쓰는 이가 많고 일하는 이가 적으면
그 쓰임이 궁핍해질 것이니
만인과 더불어 같이 기꺼워하는 사람이 흥하리라.
이것이 가장 쉽고도 또 가장 어려운 일이다.
행하면 성공하고 못하면 실패한다.
다만 부지런히 성실하게 일하면서 한편으로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할 도리를 핵심으로 하고
나아가야 동녘에 떠오르는 맑게 개인 아침 해가
모든 사악함을 몰아내고 온누리를 비추는 상쾌함이 있을 것이다.
14.나의 잘못을 용서하지 말라
인생을 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죄와 실수를 범하는 일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남의 잘못은 잘 지적하고 용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잘못은 스스로 용서하는 예가 얼마든지 있다.
언제나 자신의 행위를 제3자가 되어 비판하라.
옳은가,
그른가 깊이 생각해 보고 일을 시작하라는 것이다.
그른 줄 알면서도 남이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행동에 옮기는 것은 자신의 죄를 더 크게 하는 일이다.
옛 사람의 말씀에 "자신을 나무라면 밝아지고, 자신을 용서하면 어두워진다."라고 하였다.
남을 나무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나무라고,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면 점점 사람의 행실이 올바르게 된다는 것이다.
남의 잘못을 금방 알 수 있듯이 누구나 자신의 잘못을 안다.
다만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이 강해서 늘 그릇된 행위를 범하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으나 실천하지 못할 뿐이다.
이를 잊지 말라. 어떤 경우에서나 나의 잘못을 용서하지 말라.
옛어른은 하루에 세 번 반성하라 하였으나,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크게 반성할 때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용서하려는 생각이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 구하라"는 의미이다.
물론 스승이나 벗의 도움을 받지 말고 혼자 공부하라는 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체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범하는 잘못은 보통으로 생각하고,
남의 잘못은 특별하게 생각하면서 지적하고 나무란다.
이런한 사람은 진리를 구할 때에도 '나'에게서 구하지 않고 '남'에게서 구한다.
나의 잘못을 용서하지 말라.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싶을 때는 먼저 자신의 잘못을 비추어 보라.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스스로 용서하는 부류 속에 나 또한 포함되어 있는지라,
나 스스로를 책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15.누구나 한정된 인생을 살면서
인생은 한정된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누구나 한정된 인생을 산다.
그 인생의 한계를 모르고 무궤도하게 살아나가면 그 산다는 것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된다.
다같은 인생으로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그 한정된 인생을 가장 뜻있게 소비한 사람이 최상의 지혜로운 인물이요,
가장 무의미하게 소비한 사람이 최하의 어리석은 자인 것이다.
최상과 최하의 중간에도 천차만별이 있다.
한 번의 인생을 살았다는 다 같은 자격으로 최종점에 가서 보면
그 인생의 질이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 세상에 왔다가 간다는 점만 같을 뿐,
그 인생의 답안과 공식이 천차만별이다.
그대는 어떤 답안과 공식을 가지고 이 한정된 인생을 살아가는가?
그 답안과 공식을 크게 나누면 두 가지요,
좀더 자세히 나누면 세가지다.
두 가지란 선과 악으로 나누는 것이며,
선해질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는 중간도 있어서 세 가지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한정된 인생으로 흔적도 없이 냄새도 없이 왔다가 간다는 점에서는 누구나 같다.
이것이 바로 무에서 유가 나고,
유에서 1이 나고 1에서 2와 3이 나와서 천지만물이 모두 동일궤도를 걷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며,
이 점에서는 만물이 모두 같은 상황이다.
이왕 왔다가 갈 바에야 선이니 악이니 할 것 없이 흘러가는 대로 되어가는 대로
살다 가면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이들도 그 숫자가 대단히 많다.
현 세계의 사조인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또는 그 중간노선을 걷는 나라나 모두 동일한 물질문명의 혜택을 입고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현실주의자,
실용주의자가 가장 많은 것 같다.
이 현실주의,
실용주의가 극에 달한 나머지,
사람들은 살아서 어떤 일을 하든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고
아무 주저없이 마음내키는 대로 살아가고 있다.
현재 전인류가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
이것은 그 원인이 물질문명에 있다.
물질문명의 단점이 현재의 우리의 삶에서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고대문명이라고 하면 동양의 정신문명을 일컫는다.
정신문명에서는 물질보다 정신에 치중해서 비록 한정된 인생일지라도
우주 대자연의 순리와 흐름에 충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비록 육체는 한정이 있으나,
정신만은 우주와 한 흐름이 되어서 개벽 이전부터 다음에 오는 개벽 뒤까지라도
영원히 우주와 함께 한다는 자세를 갖는 것이 바로 정신문명의 핵심이다.
비록 끝없이 변화하는 육체 속에 있을지라도 정신이 영원성을 망각하지 않으며,
육체를 위해 정신을 희생하는 불명예를 범할 수 없다는 것이 정신문명의 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물질문명은 현실주의와 실용주의에 치우쳐서
우주 원리를 무시하고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생애를 살아간다.
이 굴레를 벗어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것이 인간의 고귀한 삶을 파괴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정신문명이 우리 모두의 삶 속에 뿌리내린다면,
원리로 보아서 그 가치가 얼마 되지 않는 국한된 육체를 위해서
인생을 희생시키는 일을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다.
현 세계는 유물론(唯物論)이 극치에 달해서 유심론(唯心論)이 아주 땅에 떨어졌으며,
정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무슨 고대소설이나 듣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우주에는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되돌아온다"는
물극필반(物極必返)의 이치가 있어서 오래지 않아
다시 정신문명으로 되돌아가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세계에만 홀린 나머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한정된 육체의 소중함만 알아서 무한한 정신의 소중함을 인정하지 않는
현재의 흐름에서 서둘러 깨어나야 한다.
'方外之士'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몸살림운동가 김철의 ‘스스로 건강법’ (0) | 2008.07.14 |
---|---|
道家수련과 전통무예의 고수 박 현 (0) | 2008.07.09 |
중국 화산파(華山派) 여자 장문인 곽종인 (0) | 2008.06.02 |
아차산 산신령_김민수 (0) | 2008.06.02 |
‘북한판 황우석’김봉한 의 영광과 몰락 (0) | 2008.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