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늦단풍, 본색을 드러내다

醉月 2023. 11. 2. 10:46

대전 장태산 휴양림의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늦가을 단풍으로 붉게 물든 모습.



■ 늦가을 단풍 명소 4곳

고깔모양 수직 메타세쿼이아
장태산 휴양림 붉은물결 채워

90여만 그루 자작나무 군락
인제 응봉산은 ‘순백의 매력’

익산엔 고즈넉한 아가페 정원
해남 대흥사 가는 길도 일품

가을 단풍이 빠르게 남하하며 전국을 붉고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아직 단풍 구경을 다녀오지 못해 마음이 바쁘시다면 서두시길….

절정의 단풍을 놓친다 해도 기회는 더 남아 있다. 가을이 오래 머무는 남녘의 땅끝도 있고, 활엽수 단풍이 다 진 뒤에 비로소 물드는 낙엽 침엽수의 단풍 시즌도 한참 남아 있다. 가을이 더 깊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늦은 가을의 단풍 명소 네 곳을 소개한다.

# 봄만큼 긴 가을…해남 두륜산 장춘동

전남 해남 두륜산 아래 장춘동 계곡.



전남 해남의 두륜산 아래 대흥사로 이어지는 길이 ‘장춘동(長春洞)’이다. 한자의 뜻을 새기면 ‘긴 봄의 길’인데, 이 길에서는 봄만큼 가을도 길다. 봄은 일러서 길다면, 가을은 늦어서 길다. 지금 그 길은 이제 단풍으로 물들고 있다. 장춘동의 계곡은 가을 끝에도 우수수 떨어져 떠내려온 단풍잎으로 붉게 물든다.

가을이 늦게 당도하는 이 숲길 너머 해남의 두륜산 아래 그윽한 절집 대흥사가 있다. 1500여 년 내력의 대흥사야 익히 알려진 거찰.

대흥사가 두륜산에 거느리고 있는 산내 암자의 빛나는 아름다움은 아는 이들만 안다. 백화암, 청신암, 관음암, 진불암, 상관암, 일지암, 북미륵암, 남암…. 남녘의 땅끝, 두륜산의 암자를 찾아가는 길에서 만나는 가을 풍경은 다른 곳과는 사뭇 다르다. 동백나무와 난대림의 반질반질한 이파리가 가을볕에 반짝이는 사이 단풍이 물들고 또 떨어진다. 낙엽 다 떨궈 시린 나무들만 서 있는 산길에도 푸른빛이 성성한 신우대가 무리 지어 우거져 있다. 가을이 다 지나간 뒤에도, 겨울이 당도한 이후에도 이쪽의 숲은 여전히 초록빛이다. 같은 초록이되 이즈음의 초록빛은 차갑고 맑아서 다른 계절의 것과는 다르다.

# 붉은 침엽수 군집…익산 아가페 정원

전북 익산 아가페 정원의 메타세쿼이아 숲.



늦은 가을 붉게 물드는 낙엽 침엽수도 활엽수 단풍 못잖다. 활엽수 단풍이 다 지고 난 뒤 전북 익산의 아가페 정원에서는 낙엽 침엽수 메타세쿼이아가 화려하게 물든 모습을 볼 수 있다. 아가페 정원은 양로시설인 아가페 정양원에 딸린 잘 가꿔진 넓은 정원. 아가페 정양원은 1985년 세상을 뜬 고 서정수 신부가 1970년대 노숙인을 거둬 공동생활을 하던 곳. 평생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해 오다 은퇴한 신부는 양로원 지을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정원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길렀다.

아가페 정원은 수목의 배치나 조성의 형태가 다른 정원과 전혀 다르다. 나무가 조화롭게 섞여 있지 않고, 수종끼리 군집을 이뤄서 자란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구획에 따라 묘목으로 심은 것이어서 그렇다. 전체적인 조화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심은 것이지만, 그렇게 50년을 빽빽하게 자라 울창한 숲을 이루니 그 느낌이 독특하다.

# 허공에 놓은 길…대전 장태산 휴양림

메타세쿼이아 숲의 규모는 장태산 자연휴양림이 압도적이다. 잘 다듬은 고깔 모양으로 하늘을 찌르듯 치솟은 메타세쿼이아가 늘어선 장태산 자연휴양림 숲은, 늦가을의 문턱을 넘을 무렵이면 붉은 기운이 감도는 진한 갈색으로 혹은 황금색으로 세상을 물들인다.

장태산 휴양림의 메타세쿼이아 단풍을 보러 간다면 오전 나절을 겨눠 가는 게 좋겠다. 단풍은 역광으로 마주 섰을 때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데, 오전에 휴양림에 가면 단풍을 역광으로 감상할 수 있어서다.

전망대 바로 아래에는 돌출 바위가 있다. 한창 단풍이 물들 무렵이면 위태롭게 바위 위에 올라서서 이른바 ‘인생 사진’을 남기려는 이들이 길게 줄을 선다. 사진 촬영을 온 사진가들까지 뒤섞여서 전망대 일대는 북새통이다. 하지만 단풍이 절정을 살짝 넘기고 나면 전망대는 다시 한적함을 되찾는다.

장태산 휴양림의 압권은 ‘스카이웨이’다. 철골 구조물로 다리를 놓듯 15m 높이의 허공에 내놓은 길이다. 숲 사이로 난 스카이웨이의 길이는 200m가 채 안 되지만, 그 길이 짧다고 느껴지지 않는 건 단풍 물든 메타세쿼이아 숲 사이의 허공을 걷는 경험이 강렬해서다.

# 순백 수피의 자작나무… 인제 응봉산

강원 인제 응봉산의 자작나무 숲.



단풍이 다 지고 겨울의 초입으로 들어설 무렵에 가장 황홀한 풍경을 빚어내는 나무가 있다. 바로 자작나무다. 다른 나무들은 잎을 다 떨군 뒤에 거칠고 투박한 둥치와 앙상한 가지를 초라하게 드러내지만, 자작나무는 잎을 다 떨군 뒤에 순백의

수피를 화려하게 드러낸다.

인제에는 자작나무 숲이 두 곳 있다. 그중 잘 알려진 곳이 공원처럼 잘 조성해 놓은 인제읍 원대리의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이다. 가을 자작나무 숲의 자연스러운 정취라면, 여기보다는 소양호를 끼고 있는 강원 인제군 남면 수산리의 응봉산

(매봉) 아래 자작나무 숲을 권한다. 서울 여의도의 2배만 한 넓이에 자그마치 90여만 그루의 자작나무가 자라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대 자작나무 군락지다. 응봉산의 자작나무 숲은 1987년 동해펄프가 종이 생산을 위해 조림해 가꾼 곳. 나무들을 다 베어내고 600㏊에 자작나무만 심었다. 가파른 산자락에 어찌나 촘촘하게 심어놓았던지 순백의 자작나무 숲이

끝 간데없이 펼쳐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