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엔 노을빛이, 밤엔 달빛이 가슴속에 들어오니…
바야흐로 백수의 시대가 오고 있다.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라는 말의 유행은 ‘백수시대’의 진입을 알리는 북소리다. 이 북소리는 월급쟁이들의 종말을 알리는 공포의 소리인가, 삶의 낡은 모델이 퇴조하고 새 모델이 등장함을 알리는 출발의 소리인가.
전남 장성의 고택에서 유유자적하는 처사(處士) 강기욱(姜基旭·43)씨는 이를 새 출발의 북소리라 한다. 그는 대학졸업 후 단 한 번도 직장을 가져본 적 없는 ‘프로백수’다. 그렇다면 먹고사는 데 걱정이 없을 정도로 재산을 모아놓았을까. 그건 아니다. 그는 가진 것도 거의 없다. 그런가 하면 독신도 아니어서 부인도 있고 자식도 둘이나 된다. 그렇다면 농사짓고 사는가. 아니다. 하루종일 논다. 자본주의의 원칙을 배신하면서 사는 것이다. 돈도 없고, 직장도 없고, 처자식마저 딸린 그는 사지육신이 멀쩡하게 생존해 있다. 아니 생존차원을 넘어서 마치 ‘백수의 제왕’처럼 삶을 음미하면서 산다. 마치 백수시대의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도대체 그는 어떤 인생관을 가졌을까.
3500평 전망 좋은 고택에 기거
백수의 제왕이 기거하는 곳은 품격 있는 대저택이다. 호남선 장성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10km 정도 가면 ‘너브실(廣谷)’이라는 곳이 나온다. 동네 앞에 나주평야가 넓게 펼쳐 있다고 해서 ‘너브실’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이 동네는 행주 기씨(幸州奇氏)의 집성촌으로 40~50가구의 기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 이들은 퇴계와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인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1527~72)의 후손들이다.
강기욱씨가 머무는 곳은 너브실에서 가장 큰 고택 애일당(愛日堂)으로 고봉의 13대 후손인 기세훈 변호사가 소유주다. 고봉의 6대 후손인 기언복(奇彦復)이 숙종 때 터를 잡은 이래 300년의 역사를 이어온 집이다. 대지만 3500평의 저택으로 닭장 같은 아파트에 살던 사람이 대문 앞에 서면 대궐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랑채 뒤쪽으로는 700평 넓이의 대숲이 조성되어 있는데, 예로부터 대나무숲 그늘은 번뇌의 열기를 식혀주는 효력이 있다고 했다. 마당에는 주먹만한 목련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노란 창포꽃이 소복이 피었다. 조그만 연못에는 붉은 색 금붕어 5~6마리가 꼬리치며 노닌다. 봄볕은 따사롭고 꽃향기는 코를 간질인다.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정답 아닌가! 이처럼 유서 깊고 전망 좋은 고택에서 강기욱씨 일가는 삶을 누리고 있다. 전생에 무슨 복을 지어 이런 저택에서 산단 말인가! 그것도 백수신분에.
-어떻게 이런 호화저택에서 살게 되었나.
“원래 이 집은 비어 있었다. 후손들이 모두 서울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들어와 살겠다고 하니 집주인이 흔쾌히 허락했다. 한옥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금방 망가진다. 사람이 살아야 오래간다. 물론 집세는 없다. 공짜로 살면서 집을 관리해주는 셈이다. 오히려 집주인으로부터 관리비를 받는다.”
한 달 네 식구 생활비 50만원
-도대체 뭘 먹고사는가.
“서울에 사는 집주인이 빈집을 청소하고 관리해준다고 해서 매달 50만원씩 보내준다. 그게 공식적인 수입의 전부다. 간혹 광주지역 문화답사단체에서 단체로 답사를 떠날 때 안내를 맡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약간의 사례비를 받는다. 우리 네 식구 한 달 생활비는 50만원으로 1년에 600만원이면 충분하다. 아이들은 딸만 둘이다. 큰애는 초등학교 3학년이고 작은애는 1학년이다. 시골이라서 과외비가 들어갈 일이 전혀 없다. 김치를 비롯한 채소와 우리 식구 한 달 먹는 쌀 두 말은 3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부모님 집에서 가져다 먹는다. 돈 들어가는 부분은 10년 된 중고차를 움직이는 기름 값과 가끔 광주에 나가서 가족들과 함께 영화 보는 것밖에 없다.”
-외롭지 않은가. 하루종일 뭐하고 지내는가.
“사람들이 내게 묻는 질문이 거의 늘 똑같다. 뭘 먹고사느냐는 것과 외롭지 않으냐는 것이다. 이 집에 들어온 후 처음 3년은 외로웠다. 때로는 불안하기도 했다. 나는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에 외부사람과의 교제도 거의 없다. 어떻게 보면 무위도식의 삶이다. 가장 큰 어려움은 열등감이었다. ‘내가 사회로부터 완전히 낙오되었는가. 나는 낙오된 인생을 사는 것인가’ 하는 열등감 말이다. 이것을 극복하는 데 3년이 걸렸다. 누구보다도 집사람이 큰 위안이 돼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자연과 호흡할 수 있게 됐다. 새벽의 여명이 아름답게 느껴졌고 지저귀는 새 소리가 반가웠으며 저녁이 되면 노을빛이, 밤이 되면 달빛이 가슴에 들어오게 됐다. 대자연과 내가 함께 호흡하고 있다고 느낀 뒤로는 외롭지 않았고 잔잔한 평화가 밀려왔다. 그때부터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아! 나는 복 많은 사람이구나’ 하고. 처음 3년이 문제다. 이 시기만 넘기면 시골에 뿌리내릴 수 있지만, 견디지 못하면 다시 도시로 돌아가게 된다.
낮에는 주로 3500평이나 되는 집을 청소하고 풀 뽑는 일을 하는데 보통 서너 시간이 걸린다. 그 외엔 설거지를 도와주거나 아이들과 함께 책을 본다. 또 강아지와 함께 뒷동산에 1시간 정도 산책을 다녀온다. 이만하면 완벽한 건달의 일과 아닌가(웃음).”
이 집의 흙담 뒤로는 2km 가량 이어진 오솔길이 나 있다. 뒤에는 백우산(白牛山) 자락이 완만한 경사의 숲길을 이루고 있어 몇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기에 최적이다. 집 뒤쪽으로 텃밭을 지나서, 고봉이 책을 읽었다는 귀전암(歸全庵) 터에 오르면 눈 아래로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소나무와 진달래가 어우러진 숲길을 내려오면 옛 선비들이 공부에 전념했던 월봉서원(月峰書院)이, 동네 윗길을 돌아 올라가면 동네 아이들이 공부하던 서당인 귀후재(歸厚齋)가 보인다. 오솔길뿐 아니라 동네 앞으로 흐르는 황룡강 길을 따라 산책하는 것도 일품이다. 오솔길 산책이 자기와의 만남이라면 석양 무렵 강변길 산책은 마음을 풀어놓고 사물의 지혜를 깨닫는 시간이다. 강 처사는 산책을 너브실 생활의 가장 큰 즐거움으로 꼽았다.
담양 소쇄원에서 인생 공부
필자가 강 처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1년 봄이다. 호남의 명문인 고봉 기대승 집안을 추적하던 중 너브실의 애일당을 알게 됐다. 그때 넓디넓은 고택을 지키던 사람이 바로 강 처사다. 젊은 사람이 시골에서 남의 집을 관리해주며 살고 있다는 것이 필자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후 마음이 허전할 때마다 애일당에 가서 강 처사와 함께 달을 보곤 했다. 소나무 향기를 맡으며 달을 바라보면 허전한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었다.
함께 달을 보며 간간이 들었던 그의 과거사를 정리하면 이렇다. 강 처사의 고향은 광주로, 20세 때 피비린내 나는 광주항쟁을 겪었다. 친지와 선배들이 처참하게 죽는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했던 것. 한 세상을 온전하게 사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80년대 중반 대학을 다니면서 다산 정약용의 사상에 접하게 됐다. 특히 다산의 탕론(湯論)과 여전제(閭田制)에 공감했다. 탕론은 일종의 혁명론으로 백성의 뜻에 따르지 않는 왕은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고, 여전제는 공동으로 전답을 경작하고 공동으로 분배한다는 토지개혁사상이다. 그는 다산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겠다는 생각으로 1988년 광주 대인동에 있던 ‘다산학연구원(茶山學硏究院)’을 찾아갔다. 당시 다산학연구원장은 다산학 연구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고 이을호(李乙浩) 선생이었다. 대개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자리를 알아보지만 강 처사는 무보수로 다산학연구원에 다니면서 7년간 이을호 선생을 시봉했다. 아울러 광주에서 ‘다신계(茶信契) 문화교실’을 운영하며 팀을 짜서 다산의 유적지를 답사했다. 다산정신의 사회화 운동이자 전남지역 문화운동인 셈이었다.
이 시기 강 처사는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으로 거처를 옮겼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기도 한 소쇄원에서 무보수로 근무하면서 숙식을 해결했다. 숙소는 계곡 바로 옆에 자리잡은 광풍각(光風閣) 건물로 글자 그대로 빛과 바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특히 장마철 정취는 압권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 광풍각에 앉아 있으면 철철철 흐르는 물소리가 사람을 빨아들이는 것 같고 튀어오르는 물보라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이때 강 처사는 자연과 일체가 되는 체험을 했다고 한다. ‘물아일체(物我一體)’와 ‘내가 없어질수록 마음은 편하다’는 이치를 어렴풋이 깨닫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청소년 시기에 읽었던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나 ‘노자’의 무위(無爲)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맴돌던 명사(名詞)가 가슴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동사(動詞)로 전환되던 시기였다.
소쇄원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별밭’이 펼쳐진다. 이 장관을 보면 ‘성산별곡(星山別曲)’이 왜 소쇄원 일대에서 나왔는지 이해가 된다. 강 처사는 소쇄원 생활 3년 동안에 16년 동안 학교에서 공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공부를 했다고 한다.
소쇄원이 광주 일대의 명소다 보니 밤에는 문화인들이 종종 마실을 왔다. 술은 먹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기에 광풍각의 모임은 학구적이었다. 새벽이 올 때까지 의견을 주고받으며 토론을 진행했다. 이때 단골로 드나들던 9명의 멤버가 ‘장작계’를 조직하기도 했다. 아궁이에 땔 장작을 마련하기 위한 계모임이었다. 돈을 걷어서 한 트럭분의 장작을 사놓고 구들장을 달구었다. 당시 소쇄원 내의 광풍각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장작을 때야 했다. 멤버들은 밤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새벽의 여명을 같이 즐겼다. 이때 벅차 오르는 감동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소쇄원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대학 시절엔 무등산의 원효계곡에 텐트를 치고 선후배들과 함께 야영생활을 즐겼다. 이때 ‘전환시대의 논리’ ‘해방신학’ ‘종속이론’ 같은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였다.
다른 한편 무등산 원효계곡 주변의 식영정(息影亭), 면앙정(?仰亭), 환벽당(還碧堂), 취가정(醉歌亭), 독수정(獨修亭), 명옥헌(鳴玉軒), 물염정(勿染亭)을 순방하면서 조선의 풍류를 몸으로 배웠다. 그 풍류는 대자연과 같이 호흡할 수 있다면 굳이 직장에 예속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어떻게 보면 이 과정이 애일당 생활의 워밍업이었던 셈이다.
1993년 소쇄원 처사 시절에 부인 김진미(37)씨를 만나 결혼했다. 광주 토박이인 김씨 역시 자연을 좋아해 전원에서 신혼살림을 하기로 합의한다. 두 사람은 적당한 시골집을 물색하기 위해 광주 일대를 답사하던 중 너브실의 기세훈 고택과 인연이 닿았다. 애일당에 이사온 것이 1995년 1월이었으니 올해로 10년째다.
-도시 사람들이 시골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문명의 리듬과 자연의 리듬이 다른데, 이 양자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 때문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문명의 리듬은 아침 9시까지 학교나 직장에 가야 한다. 비 오는 날도, 몸이 아픈 날도, 삼복의 여름에도, 눈 내리는 겨울에도 9시다. 왜 이래야 하는가. 산업사회의 일꾼을 키우기 위해서인가. 말이 산업사회의 일꾼이지 사실은 똥개 훈련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이는 자연의 리듬을 전적으로 배반하는 것이다. 자연의 리듬은 해 뜨면 일어나고 해 떨어지면 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문명의 리듬을 훈련받아왔다. 그러다 갑자기 자연에 들어오면 문명의 금단현상이 일어난다. 회사생활 하던 사람이 시골에 살면 이유 없이 불안해한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마당에 연못을 파기 시작했고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영광(靈光)의 부모님 집에 가서 일도 했다. 일부러 4년간이나 집을 고치기도 했다. 무엇인가를 하고 있어야만 불안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불안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자유로부터의 도피’였다. 혼자 있으면 한가하고 즐거워야 하는데 오히려 불안하다. 이게 현대인의 불행이다. 현대인은 똥개 훈련을 너무 많이 받아서 혼자 있을 수 없다.”
-주변에서는 직업도 없이 시골에서 처사로 사는 삶을 찬성했는가.
“찬성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집사람만 찬성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반대는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지만, 가족 친지들의 반대는 견디기 힘들었다. ‘빌어먹을 것이다’ ‘저러다가 굶어 죽을 것이다’ ‘쟤가 어떻게 인간 구실을 할 것인가’ 하는 집안 사람들의 인식이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로 굶어 죽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한 달에 쌀 두 말만 있으면 굶어 죽지 않는다’ ‘나는 쌀 두 말만 있으면 부러울 게 없다’고 다짐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남과 경쟁하는 것이 싫었다. 남을 이겨도 행복하지 않았다. 자연도 모듬살이를 하고 문명도 모듬살이를 한다. 자연의 모듬살이는 상생(相生) 작용을 하지만, 문명의 모듬살이는 서로 경쟁하고 경쟁이 극에 달하면 죽이기까지 한다. 문명이 주는 경쟁과 죽임을 싫어했던 것 같다. 사회가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
심심한 시간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
-시골생활에서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땀을 흘리는 일이 중요하다.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릴 때 우리 몸에 있는 수억 개의 세포가 열린다. 세포가 열려야만 자연과, 그리고 세계와 교감할 수 있다. 머리로만 알면 모든 것이 명사이지만, 몸과 가슴으로 알면 동사로 다가온다. 나는 요즘에야 문법시간에 배웠던 명사와 동사의 차이를 깨우치고 있다. 다산의 학문도 마찬가지다. 다산은 사서삼경을 모두 씹었다가 다시 입으로 토해놓았다. 강진에 유배 가서 변두리 인생들에게 강학(講學)하고 서로 인생을 주고받는 과정을 겪고 난 후에 토해낸 학문이 그의 저술세계다. 그래서 다산의 저술에는 힘이 있다. 유배생활을 겪으면서 다산도 명사에서 동사로 전화되는 체험을 했을 것이다.
이 집은 집터만 무려 3500평이나 된다. 그러니 마당의 풀을 깎는 데만 1주일이 걸린다. 그냥 2주일만 놔두면 풀이 15cm 길이로 자란다. 한 달이 지나면 무릎이 차고 두 달이 지나면 허리까지 찬다. 그러니 매일매일 땀을 흘리며 깎아야 한다. 이렇게 땀을 흘릴 때 공간과 사람이 일체가 된다. 조선시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땀을 흘리면서 일하고 마당을 쓸던 하인들은 그 집과 일체가 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집주인은 양반이 아니라 오히려 하인이었을 수 있다.”
마당에 있는 작은 연못에는 붉은 색 금붕어들이 살고 있다.(좌)
초등학생인 두 딸 역시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을 즐긴다.(우)
-아무리 땀을 흘린다 해도 무료하지 않나.
“나는 편안함과 무료함의 사이를 도(道)라고 생각한다. 사실 심심한 시간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기도 하다. 처음 시골에 왔을 때는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아깝게 생각됐다. 책을 읽던가, 하여간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심한 시간이야말로 자기(自己)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그렇지만 무료하면 사람이 늘어지게 마련 아닌가. 자기의지로 자기를 컨트롤하지 못하면 자기가 무너진다. 자기가 무너지면 혼자서 살 수 없다. 불교 승려들이 조석예불에 참석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일정한 리듬 속에 스스로를 집어넣음으로써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천산대학(千山大學)’ 졸업이 꿈
-생활의 좌표가 있다면 소개해달라.
“첫째 어떤 경우에도 이성적으로 행동한다. 둘째 물질을 떠나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셋째 혼자 있을 때 외롭지 않아야 한다. 이는 유교의 신독(愼獨)과도 같다. 넷째 자기훈련이 잘된 사람이 된다. 다섯째 나날이 새로운 사람이 된다. 이 다섯 가지가 내 생활의 좌표다.”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나.
“5남3녀 중 넷째아들이다. 형제들은 모두 번듯한 대학을 나와 열심히 돈을 벌고 있다. 내가 제일 한가하니까 시골 부모님 집을 자주 간다. 원래 출세한 자식은 부모 만날 시간이 없는 법이다. 출세 못한 내가 제일 자주 찾아뵈니 자연히 부모님도 나를 좋아하신다. 효는 다름아닌 부모님과 같이 밥 먹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같이 식사하려고 노력한다.”
-앞으로 직업을 가질 생각은 없는가.
“없다.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자기를 파는 일이다. 나는 세상에 나를 팔고 싶지 않다. 자기를 팔지 않고도 세상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류역사 1만년 중에서 사람들이 직업을 가졌던 역사는 얼마 되지 않는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천산대학(千山大學)’을 졸업하는 일이다. 천산대학이란 죽기 전에 1000개의 산을 오르는 일이다. 현재까지 200여개의 산에 올랐다. 우리집 안방 천장에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붙여놓았는데 누우면 대동여지도가 눈에 들어온다. 그걸 보면 저 지도에 나오는 산들을 모두 올라가 봐야겠다는 의지가 작동한다. 화랑의 풍류도를 체감하는 데는 등산이 최고인 것 같다. 풍류도는 자연산천을 유람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산천을 유람하다 보면 육체는 건강해지고 정신은 유연해진다. 등산을 하면 호연지기, 자연과의 교감, 자신에 대한 사색을 할 수 있다. 등산은 운동보다는 풍류도에 가깝다.
그런데 아쉬운 부분이 있다. 등산을 할 때는 대개 산악회 멤버들과 같이 가게 되는데 대다수가 중년층이다. 이들은 등산할 때 무조건 올라가는 특징이 있다. 산에 올랐다 오후 5시까지 버스에 돌아오면 되는데, 3시쯤이면 이미 하산해서 버스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2시간이나 기록을 단축했다’고 자랑한다. 그게 어떻게 자랑이 된다는 건지. 그건 곧 산을 오르내리면서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증거다. 무조건 땀을 많이 빼고 시간을 단축해서 올라가기만 하면 대수인가. 중간중간 절에 들러 불상도 쳐다보고 주변 산세도 감상하고 주련(柱聯)에 걸린 글귀도 음미해보면 좋으련만, 정신 없이 앞만 보고 달려간다. 한국인들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다.”
삼라만상이 다 저절로 살아가는데…
문득 이런 남자와 같이 사는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강 처사의 부인 김진미씨에게 시골생활이 어떠한지 물어보았다.
“아파트는 편리하지만 답답하다. 이 집은 전망이 탁 트여서 시원하다. 그뿐인가. 아파트에 살면 기왓장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 낙숫물 소리를 들어야 영혼이 맑아지는데. 비 오는 날 밤 기왓장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는 대단히 값비싼 소리다.
또 집 경관이 활짝 열려 있어 주변 나무들의 색깔이 계절 따라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봄이 오면 연둣빛 색감이 서서히 밀려오기 시작한다. 여름이 되면 민들레 3000~4000송이가 한꺼번에 핀다. 아침에는 누런 색으로 피었다가 오후 4시가 지나면 하얗게 변한다. 하루 동안 변하는 그 색감은 사람을 황홀하게 만든다. 밤이 되면 자연의 색감이 또 변한다. 별빛과 달빛이 도시와 달리 맑고 청명하다. 보고 있으면 원초적 편안함이 밀려오는데,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이다.
또 이 동네의 색감은 품격이 담겨져 있다. 오랜 동네라 고목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이러한 색감을 돈으로 환산하면 몇천만 원은 될 것이다.
보통 결혼해서 아파트 한 채 장만하려면 적어도 10년은 맞벌이를 해야 한다. 그렇게 10년을 지내다 보면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가버린다. 우리 부부는 결혼하자마자 바로 3500평 한옥으로 이사왔다. 10년의 시간을 번 셈이다. 삶의 질을 어떻게 비교하겠는가. 아파트와 한옥은 품격이 한참 다르다.”
-어머니로서 아이들 교육이 걱정되지 않는가.
“제도교육을 잘 받아 출세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자녀에 대한 최고의 교육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현대교육의 맹점은 자연을 학원으로 대치하려는 데 있다. 삼라만상이 다 저절로 살아가는데, 왜 인간만 인위적으로 교육을 시켜야 하는가. 때로는 교육 그 자체가 너무도 큰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유아교육 이론에 의하면 10세 이전에 자연 속에서 성장하면 성인이 된 후 인생의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딸 해인이가 일곱 살 때 ‘봄이란다’는 제목의 시집을 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시에 대해 가르쳐준 적이 없다. 자연에서 놀다 보니 저절로 시심(詩心)이 길러진 것이다. 요즘 대안학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딸들도 대안학교로 진학하고 싶어한다. 대학도 일반대학이 아닌 특성화대학에 보냈으면 한다. 예를 들어 승가대학(僧伽大學) 같은 곳이다. 내가 학교 다닐 때 가장 큰 상은 개근상이었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성실성을 기른다고 하지만 어찌 보면 자본주의 문명이라는 인위(人爲)에 길들이는 과정이 아닌가. 남편과 같이 지낸 10년간 나는 무척 행복한 여자였다.”
부창부수라더니 강 처사 부부는 꼭 닮았다.
4월엔 화전, 5월엔 야생차
애일당 정원에는 붓꽃, 동백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매화, 벚꽃이 심어져 있다. 이른봄에는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린다. 매화의 암향(暗香)이 마당을 가로지른다. 그후 살구꽃이 피고 이어서 하얀 목련과 붉은 동백이 같이 핀다. 목련이 질 무렵이면 민들레가 누렇게 피어오른다. 제비꽃이 피고 영산홍, 영산백이 뒤를 따르며 철쭉이 합세한다. 철쭉이 지면 노란 꽃창포가 연못가에서 피어난다. 그 노란 꽃잎은 100일이나 간다. 가을이 오면 단풍이 들고, 단풍이 지고 나면 감나무에 감이 열린다. 그리고 은행이 물든다. 은행잎이 떨어지면 눈이 내린다.
먹을거리는 또 어떤가. 봄에는 쑥과 머위나물을 뜯는다. 4월 초에는 화전놀이를 한다. 찹쌀가루 반죽에 진달래꽃을 얹어 전을 부치는 것이다. 봄의 풍미다. 5월에는 주변이 온통 고사리밭이다. 앵두, 보리똥, 매실을 따서 차를 담근다. 대나무숲 밑에는 야생 차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이 찻잎을 따서 삼겹살을 싸먹는 맛이 일품이다. 찻잎이 돼지고기의 느끼함을 제거하기 때문. 찻잎 다음은 대나무 순이 나오는 시기다. 죽순을 식초에 버무린 죽순무침은 무척 맛이 있다. 우렁에 죽순을 섞어 먹는 것 또한 별미. 냉장고에 보관하면 사시사철 죽순 요리를 즐길 수 있다. 이렇게 자연과 어울려 살다 보면 1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가버린다며 강 처사 부부는 환히 웃었다.
|
애일당을 찾은 손님은 두 번 놀란다. 우선 고택을 둘러싼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놀라고, 이어 집을 지키는 강 처사가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 놀란다. 강 처사는 “손님들에게 사랑채가 비어 있으니 하룻밤 자고 가라고 권하지만 다들 바삐 돌아간다”며 아쉬워했다. 또 사람들이 매번 “언제 다시 와서 자고 가겠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다시 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한다. 바쁜 현대인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강 처사는 말했다.
인터뷰 내내 강 처사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미소는 진정한 행복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닐까. 애일당을 떠나면서 ‘한 세상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가?’ 하는 의문이 필자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方外之士'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팔로군 출신 기공 연구가 윤금선 (0) | 2008.07.29 |
---|---|
‘설위설경(設位說經)’ 인간문화재, 장세일 법사 (0) | 2008.07.29 |
차 맛 감별하는 품명가(品茗家) 손성구 (0) | 2008.07.23 |
지력(智力) 기공 캠프 연 ‘장풍도사’ 양운하 (0) | 2008.07.14 |
몸살림운동가 김철의 ‘스스로 건강법’ (0) | 2008.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