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
귀신은 존재하는가. 구천을 떠도는 영혼과 어떻게 소통하는가. 끊이지 않는 질문에 그는 빙긋 웃기만 할 뿐이다. 설위설경 인간문화재, 장세일 법사. 그는 오늘도 흰 너울을 서리서리 걸어놓고 놋양푼으로 장단 맞추며 이승을 떠도는 귀신의 한을 위로한다. |
그와 서른 마디쯤 했을까. 이렇게 말이 없는 인터뷰이는 보다보다 처음이다. 시가지에서 한참 벗어난 사무실에서 충남 태안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나갈 일을 난감해했더니 장세일(張世壹·73) 법사는 말없이 오토바이에 올라탄다. 뒤에 타란 말 같은 건 없다. 그저 묵묵히 오토바이를 앞에 대놓고 기다린다. 눈치 채고 뒷자리에 탔더니 다시 말없이 달린다. 그리고 정류장 앞에 멈춘다. 역시 말은 없다. 그저 빙긋 웃기만 한다. 이렇게 말을 않고도 살 수 있는가. 말이 없다고 냉랭한 건 천만 아니다. 아무 말 없어도 정다운 훈김이 전달된다. 은근하고 미쁘고 뿌듯한 침묵이다. 뭐든 말로 분명하고 명확하게 전달하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고, 성에 차지 않는 우리의 소통방식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침묵이다. 태안 시외버스 정류장 앞엔 ‘햇살 가득한 약국’과 ‘뜰에 봄 약국’이란 이름의 약국 둘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태안반도 앉은굿의 맥을 잇는, 저토록 말없이 웃기만 하는 장세일 법사가 보여주는 평화와 고요가 그대로 녹아 있는 이름이라 나도 혼자 웃는다.
‘앉은굿’과 ‘선굿’ ‘앉은굿’은 말 그대로 앉아 하는 굿이다. 무당이 맡아 하는 ‘선굿’과 대비되는 말이다. 한강을 기준으로 이남은 대개 앉은굿을, 이북은 선굿을 행해왔다는 게 일반적 분류다. 앉은굿은 앉아서 경문이나 불경을 외며 혼자 북과 양판이란 악기를 두드리며 귀신을 쫓는다. 전에는 전국적으로 행해지던 굿이었으나 지금은 충청도를 중심으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태안·서산·보령·서천 같은 충남 서북부 해안지방에 그 형태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앉은굿은 악귀를 몰아내고 수복을 기원하기 위해 낭송하는 설경(說經)과 종이를 접고 오려 여러 신의 그림이나 글씨를 새겨 굿판 주변에 걸어두는 설위(設位)가 함께한다. 그래서 굿이란 이름대신 ‘설위설경’이라 부르며, 굿을 주도하는 이의 칭호도 무당이 아니라 법사라고 한다. ‘송경법사(誦經法師)’를 줄인 말이다. 충청도 사투리로는 ‘정 읽는다’고도 했다. 병원이 멀던 시절, 집에 우환이 생기면 굿보다 한결 점잖은 방법으로 집에 법사를 불러 경을 읽었다. 귀신을 겁주고 얼러 쫓아내는 내용의 경문을 밤새 읽으면 병을 불러온 악귀들이 맥없이 물러난다. 경만 읽는 걸로는 부족하니 사방에 울타리를 둘러치고 귀신을 위협하는 물건을 만들어 걸었다. 종이를 접고 오려 만든 장치들이었다. 나는 장세일 법사가 굿을 할 때 사방에 걸어둔다는, 조선종이를 칼로 오려낸 설위작품들을 찬탄하며 들여다봤다. 1㎜도 안 될 정교한 선을 잇댄 각종 문양들, 이 다양하고 정밀한 문양들은 몇 번의 칼질만으로 한지 위에 주르륵 나타난다. 펼친 모양은 오직 머릿속에 들어 있고 눈에는 보이지 않다가 칼질이 끝난 후 접은 종이를 펼칠 때라야 비로소 드러난다. 이를 종이 ‘까순다’고 하는데 물감으로 그린 회화와도, 덩어리에 형태를 새겨 넣는 조각과도 다르다. 그러나 분명 종이 ‘까수기’는 그 자체로 독립된 장르의 예술이 될 만큼 아름답고 신비하고 독특하다. 게다가 오랫동안 이 땅의 민간에서 행해져온 전승예술이다. 그래서 충청남도는 몇 해 전 설위설경을 충청남도의 무형문화재 24호로 지정했다. 서해와 연한 태안반도는 산이 낮은 구릉지이지만 숲이 울창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예로부터 ‘검은산 안’이라 불렸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어촌이 많으니 무속신앙이 성행했고, 아직도 태안을 중심으로 80여 명의 무속인이 활동하는데 종이 ‘까수는’ 솜씨로도, 경 읽는 솜씨로도, 몸에 밴 역사로도 으뜸가는 이가 바로 장세일 법사였다. 그는 이 일을 스물셋에 배우기 시작했는데, 지금껏 50년 동안 오려낸 종이만도 트럭으로 열 트럭 분량은 될 거라 하니 솜씨도 솜씨지만 앉은굿이 태안에서 얼마나 자주 행해졌는지 짐작할 만하다. 종이 오려 설치하는 설위는 경을 읽는 설경이 끝나면 대개 불살라 없애버린다.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다워도 살아남지 못하는 운명이다. 설위가 그 자체로 훌륭한 그림이라는 걸 사람들이 깨달은 뒤부터 장 법사는 굿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를 음미하고 후세에 남기기 위해 종이를 접고 오린다. 그걸 배우는 전수생들을 위해 그가 오려내는 그림의 종류는 기본형이 서른 가지쯤 된다. 그렇지만 온갖 변형이 가능하니 거의 숫자를 셀 수 없는 만큼 다양하다. 창을 든 사람도 사천왕상도, 鬼 壽 福 皇帝 같은 각종 한자도, 나비와 꽃과 새들도 그는 칼질 서너 번에 자유자재로 오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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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각을 하면 남자가 힘써” “전에는 음각을 주로 했거든. 요즘은 내가 양각을 해. 음각을 했더니 음이 너무 성해서 못쓰겠어. 어딜 가든 여자들이 더 세게 나대잖아? 그래서 힘이 더 들어도 양각을 하기로 했어. 이제 양각을 한동안 하고 나면 다시 남자들이 힘을 쓸 날이 올 거야.” 여자들이 사회활동을 많이 하고 목소리가 높아지는 현상을 설위에다 두는 해석이 재미있어 나는 그에게 자꾸 말을 시킨다. “양각을 하면 남자들이 힘이 더 세질까요?” “그으럼.” “아직은 음각을 좀더 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래야 조화가 맞을 것 같은데.” “음각도 아주 안 하는 건 아니여. 조화에 맞게 한다 이 말이지. 전에는 아주 음각만 했거든.” 전에는 이 지방에서 경 읽으러 다니는 사람과 목수일 하는 사람의 품삯을 같이 쳐줬다. 설위설경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해졌기에 낮도 하루품, 밤도 하루품이었다. 그러니 한때는 품값도 수월찮이 벌었지만 그게 모이지는 않았다. 태안에서 8대째 터잡고 살아온 이 동네 토박이인 그는 경 읽으러 다닌다 해서 천한 취급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외려 경을 읽어 축귀(逐鬼)를 한다 해서 선비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았다. “귀신이 실제로 있느냐?”고 물었다. 장세일 법사는 또 예의 그 따스한 웃음을 웃더니 딱 한마디로만 대답했다. “있으니 하제 없으면 하것어?”
“신장이 움직이니까 알제” 한참 있다 다시 “귀신이 없는데 어뜨케 평생 이일을 하남?” 했다. “그럼 귀신을 봤느냐?”고 다시 물었다. “귀신이 어데 눈에 보이간?” “그럼 귀신이 있는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덮어놓고 또 물어봤다. “신장(신이 내린 막대기)이 움직이니까 알제.” 신장은 누가 잡느냐, 혹시 일부러 움직이는 건 아니냐, 최면상태가 돼서 흔드는 것 아니냐, 신장이 움직인다 해서 그게 무슨 귀신이라는 증명이 되냐, 귀신이 쫓겨 나가면 병이 금방 낫느냐, 그럼 무슨 병이든 병원 가지 말고 귀신만 쫓으면 되느냐… 별별 질문을 다 해봐도 그는 끄떡없이 웃고 앉아 있었다. “허허 그거야 모르제…. 어디 말로 할 수 있간?” 그러나 먹지도 못하고 곧 죽어가던 사람을 독경으로 벌떡 일으켜놓은 경험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밤새 독경하고 나면 낯빛부터 달라지는 걸 여러 번 봐왔다. 그는 귀신을 쫓아서 낫는 병도 있고 그런 종류가 아닌 병도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종이로 오려 만든 신장에 신장 내림경을 읽으면 신이 강림한다. 그가 하는 방식은 그 신장에다 물어서 일의 사태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귀신이 들어 이 병이 생겼느냐, 물으면 신장이 대답한다. 아니면 흔들고 맞으면 끄덕이는 식으로! “내야 뭘 아나, 신장이 그렇다니 그런 줄 알제.” 과장도 흥분도 없다. 우직하고 순정한 눈이 끔벅끔벅 뿐이다. “우리 경전은 불경과 무경(巫經)이 짬뽕이 된 거여. 내가 천수경(千手經)을 아는데 천수경과도 비슷한 데가 많어. 무경은 불경보다 역사가 깊을 겨, 나중에 불경을 따라간 건지는 몰라도. 우리는 이게 언제 어디서 왔느냐고 집이처럼 물어보질 않았어. 그런 거 물으면 안 되는 줄 알았네. 그저 외고 까수고만 했제. 역사니 그런 거는 궁금혀도 안 했어.” 그는 1932년생이다. 논이 없는 농부의 둘째아들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 한 2년 다녔다. 한문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이웃에 경문을 공부하는 사람이 있었다. 담 너머 글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한 밤이면 더 잘 들렸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귀에 쟁쟁했다. 낮에 밭일하고 밤에 마실가는 거 말고는 별 오락이 없는 시절이었으니 그 집에 가서 경문을 구경했다. 한자로 된 경문의 뜻이 환하게 보였다. 의미도 마음에 쏙쏙 닿았다. 읽는 소리도 뜻도 자꾸만 좋아졌다. 그러느라 절로 공부가 된 것이다. “나는 선생이 따로 없어. 그냥 혼자 헌 거여. 아무리 긴 경문도 서너 시간만 들여다보믄 다 외워져버려. 내가 기억력 하나는 참 좋았어. 그걸로 법 공부를 했으면 육법전서를 줄줄이 외는 거는 일도 아니었을겨. 지금도 후회를 한다니깬. 내가 그때 경문 대신 법조문을 외웠으면 지금쯤 요로고 있지 않고 법관이 되얏을 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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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가지 경문 채록
그러나 진정 후회하는 기색은 전혀 아니다. 나중에는 이웃집 경문 공부하는 사람보다 훨씬 앞서가게 됐다. 숱한 경을 혼자서 다 외웠다. 그게 소문나 진짜 경꾼들이 손이 달리면 장세일 청년을 앞세워 경읽기를 다니곤 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외운 경을 다시 종이에 기록하는 일을 진행 중이다. 채록해놓은 십수권의 책을 내게 보여준다. 반듯하고 유려한 서체로 깨알같이 박아 쓴 글씨다. 자주 쓰지 않는 어려운 한자들도 빼곡하다. 이렇게 훌륭한 구비문학 채록작업이라니. 나는 그걸 산발적으로 베껴왔다. 운에 맞춰 읽으면 심신이 절로 안정될 듯했다. 내용도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이 그대로 담겨있어 옛 이야기를 읽듯 재미가 있었다. “사귀야 듣거라, 일락서산하고 월출만공연한데 천신만귀(千神万鬼) 다 부르는 게 아니라 금차가중(今次家中) 모(某)생 신상사지육신(身上四肢六身) 중에 소침(所侵)하여 흥아 작란하고 탈인정기 인간작해 하는 사묘지물이 있다기에 부르는 게니 지체 말고 썩 나서거라!… 속담에 이르기를 악한 귀신은 악하게 대접하고 유한 귀신은 유하게 대접하라 했으니… 이저러리 다니다가 배가 고파 기진하고 목이 말라 갈증 나서 요기하러 들어왔다고 할 것 같으면 아무리 빈한한 가정일지언정 일년 여름바지 농사지어 상생미 중생미 하생미 다 골라 삼칠(三七)은 이십일(二十一) 스물 한번 쓸고 쓸어 흰밥 짓고 미역국을 가마솥에 한솥 끓여….” 물론 이런 한글 경문이 아닌 순한문 경문도 여럿 있다. 장세일 선생이 외고 있는 경문 수는 100가지가 넘는 듯했다. 대강 짚어봐도 천수경, 축원경, 성조(成造)경, 조왕경, 지신경, 명당경, 부정(不淨)경, 팔문경, 기문(奇問)경, 팔양(八陽)경, 조상경, 백살(百殺)경, 삼재경, 육모적살경, 육계주경, 친축경, 옥갑경 등이 있고 각 경문 안에 다시 작은 장으로 나뉜 경이 있는데, 그걸 책 하나씩으로 묶어 기록해나가는 중이다. 경문마다 길이가 다르긴 하지만 경 하나를 두세 시간에 외는 게 보통이고 공들인 앉은굿 자리에서는 이레 밤낮을 꼬박 경을 외기도 했다. 그리고 경마다 종이를 오리는 방식과 종류도 다 다르다. 종이를 오려 만든 여덟 문 여덟 진을 친 장엄한 경청. 그 안에서 펼쳐지는 낭랑한 독경, 북과 징으로 맞추는 장단. 종이고깔을 머리에 쓴 법사가 펼치는, 음악과 미술과 문학이 어우러진 이 앉은굿은 그대로 완결된 복합 행위예술이다. 그 안에서 신인(神人)이 서로 만나 그간 쌓인 설움과 원한을 한바탕 사설로 풀어낸다. 귀신은 제 갈 곳으로 편하게 물러가고 인간은 스트레스에서 놓여나 안정을 회복한다. 이게 굿이다. 미신이 아니라 무의식을 건드리는 섬세하고 정교한 심리치료가 아닐 수 없다. 설위설경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장세일 법사도 알지 못한다.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무경을 읽어가며 공부하긴 했다. 워낙 오자와 탈자가 많은 책이었다. 나이든 지금 그걸 자신이 직접 기록해놓지 않으면 사라질지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매일 조끔씩 써놓으려고 해도 그게 안 돼. 죽기 전에 다 써놔야 할 텐데….”
“칼질 많이 해봤는가가 솜씨여” 종이 오리기도 직접 가르쳐준 선생은 없었다. 눈썰미가 있으니 따라다니다 그저 어깨너머로 배웠다. 경 읽는 경꾼들은 당시만 해도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딸렸다. 일이 많으니까 경을 채 다 외기도 전에 설위설경판으로 따라다녔다. 미리 가서 며칠 전부터 종이를 오려 팔진팔문을 만들었다. 그때 주로 따라다닌 사람이 태안반도 앉은굿의 대가이던 한응회 선생이다. “어딜 감히 물어봐. 어려워서 감히 물어볼 수가 있남? 혼자 자꾸 해보니까 그냥 되데. 칼질을 하도 많이 해봤으니께 밑그림 없이 밑글 없이 그냥 막 파도 글자가 나오는 거제, 첨부터 그리 되간? 눈으로 봐서 저건 저렇게 접고 요건 요렇게 접고 저기를 까수어내면 요런 모양이 나온다는 걸 머릿속에 짐작해두고 요리조리 칼질을 해본 겨. 얼마나 칼질을 많이 해봤는가가 솜씨여. 딴 거 어. 그래도 나는 뭐이든 한번 보믄 따라 했어. 같은 값이믄 보기 좋게 하려고 요리조리 혼자 연구를 했제. 밤에 자려고 누우면 종이 까수는 모양이 머릿속에 영화가 돌아가듯이 환하게 떠올라. 그라믄 얼른 일어나서 연필로 그걸 그려놓제. 안 그러면 이튿날 다 잊어불거든. 저런 것들도 다 그렇게 맹근 거야.” 그는 6·25 참전용사다. 서당공부를 몇 년 한 후 집에서 농사를 거들다 전쟁이 나자 징집됐다. “그전에는 국민방위군 훈련을 받으러 다녔어. 2개 면이 1소대였을 걸. 나는 스무 살도 안됐는데 제주도 가서 훈련 받고 강원도 7사단에 배치됐어.” 사방에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걸어가려면 시체를 발로 치우고 갈 수밖에 없었다. 총알은 연신 귀 뒤로 머리 위로 날아가거나 떨어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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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웠겠네요” 했더니 그는 “무섭고 안 무섭고 그런 생각이 나나?” 한다. 혼인 말이 오가는 중에 갑자기 군에 가게 됐기에 입대 몇 달 뒤에 잠깐 휴가 나와서 결혼식을 간단히 올린다. 혹시 전사하더라도 총각귀신이 되게 할 수는 없으니 혼인은 해놓고 가야 한다는 어른들의 성화 때문이었다. 그러다 진짜 전사해버리면 신부 인생은 뭐가 되냐니까 그저 웃기만 한다. “금방 헤어졌으니 색시가 몹시 보고 싶었겠네요?” 해도 그의 대답은 역시나 싱겁기 짝이 없이 “그런 거 몰랐어”다. 세상에 갓 결혼한 색시가 안 보고 싶었단 말이냐고 펄쩍 뛰어봤더니 “죽나 사나 그 생각뿐인데 색시 보고 싶고 말고가 어디 있간?” 한다. “맘에 안 들었던 건 아니냐?”며 대답이 뭐가 나오는지 궁금해 일부러 자꾸 물어본다. “아, 들먼 어떻고 안 들먼 어떠남? 그저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라니까 하는 거지.” 그가 참전한 게 그 유명한 금화전투였다. 작전을 벌이던 중 어깨에 포탄 파편을 맞는다. “총알 맞는 것보다 파편 맞는 게 더 아파. 전쟁에서 마취란 게 어디 있나. 그냥 생살을 파헤쳐서 파편을 몇 개 끄집어냈지. 대전 병원에 와서 누웠는데 그 이튿날로 휴전이 됐다 하드만. 상처가 아물면서 제대를 했제.” 장세일 법사에 따르면, 귀신이 있긴 분명히 있되 사람이 죽는다고 저마다 귀신이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시집장가를 못 가고 어려서 죽었거나 갑자기 비명횡사를 했거나 누명을 쓰고 죽었거나 가슴이 한이 많이 쌓였거나 그렇게 이생에 미련이 많이 남은 영혼들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몸 없이 떠도는데 그런 무리를 일컬어 귀신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이건 도올 김용옥 선생의 말과 같다. 혼(魂)과 백(魄)이 합한 것이 사람이니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내려간다. 혼과 백이 분리되는 게 죽음인데 이 분리가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이뤄지면 혼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인간세상을 떠돌게 된다는 말을 전에 도올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고 귀신이 아무한테나 붙는 것은 아니야. 신수가 안 좋거나 심신이 허하거나 하는 이에게 들러붙어 앓게 하거나 해롭게 하지. 누군가를 성가시게 해야 뭘 좀 얻어먹잖아. 귀신들이 원 좀 풀겠다고 그러는 걸 잘 달래 제 갈 곳으로 보내줘야잖어. 말 안 듣고 유달리 어렵게 하는 귀신이 있으면 몇날 며칠 밤을 새우고 경을 읽어야 혀. 그래야 귀신과 대적이 되제.” 한 많고 불쌍한 귀신을 달래 좋은 곳으로 편하게 보내주는 방식이 설위고 설경이고 굿이고 천도재(薦度齋)인 모양이다. “경문에도 있어. ‘의약치병해도(의약으로 치료해도)’ ‘종무소차라(아무 차도가 없다)’ 이거여. ‘원자천문 근자복문’ 헌즉, 점쳐서 하늘에 묻는다는 소리여. ‘필시귀책’이라, 반드시 귀신이 침투했다 그 소리여. 그래서 아프믄 독경을 하러 가제. 뭣 땜에 아픈가 보려고 하믄 언제든지 시작은 저녁에 하니께 그날 저녁에 차려가지고 독경하고 성주를 내려가지고 물어봐. 옛날에는 한 7일 정도 종이 철망을 맹글어서 방뿐 아니라 뒷간이고 문간이고 다 빙 둘러싸지. 그래놓고 신령들 위패를 써붙여. 그러고 난 다음 독경을 해. 예쁜 꽃과 새를 까수는 건 귀신들도 그거 보고 마음이 기쁘라고. 달래주는 거제.”
설위, 설경, 굿, 천도제 장세일 법사가 ‘태안문화’라는 잡지에 써놓은 글이 있다. 경문 읽기가 증세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설명해놓았다. 그는 아무래도 말보다는 글이 편한 것 같다. “별안간 눈에 가시가 들어간 것 같고 눈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통증을 견디지 못할 때는 집에 물건이 잘못 들어와 생긴 병이다. 이런 때는 칠쌈이라 하여 문제되는 물건을 다른 장소에 옮기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 또 객귀침탈이라 하여 배가 몹시 아플 때는 된장국밥을 해서 칼로 절면서 진언호통해 물리치면 곧 축귀가 되어 낫는다. 느닷없이 토하고 설사하는 토사곽란에는 아궁이 흙을 파서 토수(土水)물을 해먹이면 즉시 효험이 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병원에서 불치병이라 진단받고 돌아온 환자가 독경 7일 기도 후 완치되어 건강하게 생활하는 산 증인도 여럿 보았다. 현대에는 드물지만 안택경이라 하여 예전에는 매년 정월이면 집집마다 1년 동안 편안케 해달라는 안태기도를 올렸다. 환자에 대한 경은 탈에 따라 다른데 축사(逐邪)에는 단을 모아 청수발원하고 경청을 꾸미는데 한지에도 격에 맞는 무늬를 만들고 부적을 그려서 장식한다. 그 앞에 종이로 만든 대철망을 치고 귀신을 잡아 가둔 다음, 병철망 삼기팔문진, 백살금진을 다시 덧씌운다. 그 앞에서 축사축귀 경문을 통경한다. 독경일수는 3일, 5일, 7일을 하며 이 일수는 주야를 말한다. 7일 기도 이상이라야 검무(劍舞) 화전(火戰)을 펼칠 수 있다. 검은 대개 참나무를 칼 모양으로 만들고 그 끝에다 종이 수술을 길게 달고 독경법사가 검무 장군을 청하면 ‘예-이’ 대답하고 법사의 명에 따라 검무를 한다. 먼저 환자에게 침책한 축귀를 하고 다음은 화전을 치는데 화전 재료는 소나무 껍질을 잘 말린 다음 절구에 빻아서 고운 체로 친 다음 볶아서 만든다. 그 가루를 횃불에 흩뿌리면 온통 불바다처럼 된다. 이것을 먼저 환자에게 한 다음 집주변을 돌면서 뿌려 숨어 있는 귀신을 축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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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변두리에 마련된 ‘무형문화재 장세일 법사 설위설경 전시장’에는 앉은굿에 필요한 재료들을 쭉 전시해뒀다. 거기엔 소금, 붉은 팥, 고추같이 주변에서 흔히 보는 귀신 쫓는 것들도 있었지만 몇 가지 낯선 물건들이 보였는데 그게 바로 화전가루다. 그게 뭔지 물어도 장 법사는 별 신통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 귀신 쫓는 데 쓰는 거여” 하더니, 글에는 그게 분명히 적혀 있다. 소나무 껍질을 빻아서 볶은 것이라고! “귀신은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취가 나는 것도 아닌 무형무적이거등. 그런다고 없남? 그건 아니거든. 나도 신장 행동을 보고 아는 건데 경을 정성 들여 읽다보면 언제부턴가 그게 보이기 시작하제. 남들 보면 나 혼자 씨부렁거리는 거 같겄지만 그게 다 귀신에게 호통치고 달래는 것이여. 다 쫓고 나면 진이 다 빠져부러. 그래도 속은 얼매나 시원타고!” 머릿속에 들어 있는 수백 종류의 경문과 종이로 ‘까수는’ 숱한 형상들말고도 그에겐 솔가루를 빻아 만든 화전용(火戰甬) 무기도 있었다니 흥미진진하다.
서른셋에 모신 법당 설위설경의 구체적 방법에 대한 기록도 있으니 읽어보자. 나는 직접 굿하는 현장을 보진 못했다. 요즘은 굿을 청하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한 달에 한 번쯤 부르는 사람이 있어도 간단히 경문만 읽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 화전까지 치르는 굿판은 매우 드물다. 왼손으론 북을 치고 오른손으로는 놋양푼을 엎어놓고 징 대신 치면서 경문을 읽는 장세일 법사를 본 건 여러 번이다. 진짜 앉은굿이 아니라 축제행사장에서 옛굿을 재현하는 형식으로였다. 그는 그런 재현을 시덥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몇 시간씩 경을 해야 시원할 것을 겨우 20~30분 천수경이나 축원경 일부를 외다 말고 신명이 채 잡히기 전에 일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동토적살에는 복숭아 나무 채와 절구대를 들고 법사가 태세경을 읽으면서 나무태세를 선창하면 이웃 사람들이 복창하면서 집안 밖 사면을 돌면서 동토(動土)난 자리를 절구대로 찧고 복숭아 나무채로 후려치면서 축귀한다. 또 한 맺힌 원혼을 천도하는 해원경을 할 때는 굿청의 설경을 다르게 꾸미는데 종이를 여러 모양으로 무늬도 팔보살, 사천왕 원앙오행진을 치고 십대왕 거목과 문 양쪽에다 줄을 띠우고 연등과 조화등으로 장식하고 남망자(男亡子), 여망자(女亡子)의 옷과 길포 등으로 치장하고 구슬픈 해원경이 독통되고 나면 해원신이 내려와서 길포를 갈라 나아간다. 용궁수배탈(龍宮隨陪)에는 배를 만들어 오색기를 화려하게 꾸며 수배신을 불러 용궁으로 행차시킨다. 나쁜 살이 끼면 화살을 만들어 쏘며 오곡을 볶아 흩뿌리면서 제살(除煞)을 한다.… 기타 성황제 칠성제 산제 용왕제 당제 뚝제 노신(路神)제 참봉제 횡수막이 고사(告祀) 등 무형무적이라 영신의 이름을 불러가며 두 손 모아 애걸복걸 도움을 간청하며 매달릴 제 지성이면 감천이라 유형유적하게 소원을 이룰 수 있다.’ 굿할 때 그는 제사장이지만 평소에는 그저 말없이 인자한 농부다. 한창 농사철에도 부르는 데가 있으면 매던 논을 버려두고 달려가야 했으니 실한 농사꾼이라고는 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 농사일을 대신해준 건 6·25전쟁 때 잠깐 휴가 나와 혼인했던 부인 권씨이다. 집 한쪽에 차려놓은 법당을 관리하는 일도 부인 몫이다. 부인은 남편과 달리 걱실걱실하게 이야기를 잘 한다. “이 영감은 젊어서부터 1년이믄 반년도 함께 못 산 사람이여. 애들 어려서 혼자 다 키우고 (슬하에 3남1녀를 뒀다) 맨날 소 하나 먹여가며 길쌈해가며 만고강산 다 겪고 살았는디. 이 영감은 평생에 나가 댕기니 돈이야 벌지 모르제. 그래도 나한테는 평생에 목돈 한번 안 갖다주네. 한푼, 두푼 타서 쓰제. 저 영감하고 50년 넘게 살면서 아실아실한 정이 있지는 않아도 글타고 정 없이 살지도 않았네. 조강지처니께 살고 애들 부모니께 살고 그라지 뭐.” 설경을 배운 건 스물셋이었지만 서른셋쯤 되자 신명이 와서 할 수 없이 집에 법당을 모셨다. 동네 여인들이 곡식 몇 되를 이고 장 법사를 만나러 와 하소연도 하고 부적도 써달라고 했다. 말하자면 한 시절 그의 집은 신앙의 장소였다. 그는 그곳의 충실한 사제였다. 지금 사람들은 법사가 귀신을 불러 대화하고 영접하고 쫓아보내는 과정에만 관심을 기울여 무형문화재로 지정한다, 채록을 한다 호들갑을 떨지만 그건 다 형식일 뿐이다. 장세일 법사에게 중요한 건 한맺힌 귀신들 자체다. 귀신들의 원을 풀어 곱게 돌려보내주는 것이 그의 선결과제인 것이다. 밤새워 종이를 오리는 것, 종이 진지를 구축하는 것, 새로운 형상을 구성하는 것, 이제는 몸에 완전히 밴 경문을 읽은 것도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 그걸 도구로 귀신을 쫓을 때만 유효한 과정이다.
“안 믿는 사람은 소용 없어” 집에 법당을 설치할 때의 권씨 할머니 얘기가 재밌다. “신명이 내렸으니 워치케 혀. 거 각성(各姓)받이 해서, 각성받이라는 기 처음에 법당에 부처님 앉힐 때 동네 다니면서 성이 다른 사람한테 쌀을 걷어야 혀. 그러고서 법당 모시고 경꾼들 데려와 몇날 며칠 두드리는 거지. 우리 집이 사람들로 백설 치듯이 허옇게 다 찼어. 그 사람, 그렇지 않을 사람이 이런 일을 한다는 게 너무 신기해가지고 동네 사람들도 구경한다고 다 모였어. 술을 닷 말을 하고. 저 영감 신명을 그렇게 해가지고 풀었으니 바깥에 돌아댕기고 해도 아무 지장이 없을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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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두어 달 전 내가 처음 태안에 내려갔을 때 그는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있었다. 잠깐 문병하고 서울로 올라오며 귀신과 통한다는 사람이 교통사고 나는 일에 대해 동행들과 설왕설래한 적이 있다. 이번에 그걸 물어봤다. “교통사고 같은 건 귀신이 그렇게 만든 걸까요? 단순한 사고일까요? 선생님은 보통사람과 다르니 사고 날 걸 미리 예감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런 질문에 그는 당당했다. 일부러 하는 당당함이 아니라 일점 의혹이 없어 보였다. “일진이 나빴던 거지.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우리 같은 사람도 하루도 안 빼고 일진을 짚어볼 수야 없제. 그래도 일진을 짚었으면 알기야 미리 알았겠제.” 두려움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게 귀신의 장난이면 귀신을 다루고 쫓아내는 방법에는 통달했다고 믿고 있다. “안 믿는 사람들한테는 소용없어. 암만 조심하라고 해도 어디 내 말을 믿어주나.” 그가 말을 않고 입을 다무는 것은 그런 이유일지 모른다. 종이 고깔을 쓰고 낭랑하게 경을 외는 법사의 무표정은 그게 귀신을 불러들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게 축제의 한 과정, 전승문화 이벤트 중의 하나로 전락했다는 난처함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지금 그걸 남기는 일에 주력한다. 시간 나면 사무실에 나와 칼로 종이를 오린다. 이제는 귀신을 위협해 태울 목적이 아니다. 가르치기 위해, 보존하기 위해 종이를 ‘까순다’. 실은 배우겠다는 사람도 흔치 않다. 전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은 전수자 둘뿐이다. 종이 오리기는 동아시아 3국에 두루 있는 전통이다. 중국엔 지엔즈(剪紙), 일본엔 기리가미(切紙)라 하여 제각기 전통 무늬의 본을 삼고 국가적인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어르고 달래고 부비며 우리는 그 가치를 아직 잘 모르는 듯하다. 국학자 심우성 선생이 노력해 그가 충청남도 무형문화재로 겨우 지정됐지만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 것 같지는 않다. 일흔을 넘긴 장 법사가 오늘 아침 오렸다는 희디 흰 설위는 정교하고 치밀하고 눈부시고 황홀하다. 이게 신을 부르고 쫓기 위한 것이니 이렇듯 공을 들였지 예술로 여겨 오렸다면 배가 고파서라도 그 긴 세월 변함없이 칼질을 하기는 어려웠으리라. 따로 본을 뜨는 법도 없이 눈썰미만으로 모양을 척척 오려내는 신기를 탄복하며 바라본다. 묵은 달력을 들치자 이미 오려놓은 그림들이 연이어 나온다. 마치 마법과도 같이. 흰 너울을 서리서리 걸어놓고 놋양푼으로 장단을 맞추며 무욕하고 어진 법사 하나가 침착하게 앉아 경을 왼다. 귀신은 거기 와 차려진 음식을 흠향(歆饗)하며 맺힌 한을 굽이굽이 풀어놓는다. 경문 속에는 귀신을 위협하는 내용말고도 삼라만상과 천지조화를 갈망하는 시적 언어가 가득하다. 그는 애절하고 청아하게 독송하며 접신한다. 천지가 거기 조용히 감응한다. 착한 백성은 괜히 한숨을 쉬며 눈물을 찍어낸다. 이게 우리네 삶의 모습이었다.
그는 인간의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법사와 인터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맘속에 따스한 물이 천천히 고여들 듯 나 또한 태안에서 넉넉한 평화를 얻고 돌아왔다. 장 법사가 50여 년 머릿속에 새겨진 말들을 다 기록하길 빈다. 손끝에 맺힌 종이 오리는 기술을 다 누군가에게 잘 넘겨줄 수 있길 빈다. 그래야 앞으로도 한 맺힌 귀신들이 와서 하소연할 때 그들의 쌓인 한을 풀어줄 수 있지 않겠나. 달래고 어르고 같이 흐느끼고 어깨를 부비면서. 그 방법을 일러주기 위해 그는 오늘도 종이를 오리고 경문을 기록한다. 아주 가끔 진짜로 귀신을 불러달라는 청이 오면 북과 놋양푼을 오토바이에 싣고 바람같이 달려간다. 신이 나서 종이를 까수고 천지를 어루만지는 목소리로 기운차게 경을 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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