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져버린 ‘인민의 고무래’ 박헌영
약관의 21세 조선 최초 공산주의자 되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코올 병에 담가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같이 부풀어 오른 두 뺨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상록수’의 작가로 유명한 심훈(沈薰, 1901~1936)이 1927년 12월 2일에 쓴 시다. ‘박군의 얼굴’이라는 제목인데, 심훈의 슬픔과 노여움은 격렬하게 이어진다.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 사람의 박은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으로 말리고 있고
C사에 마주앉아 붓을 잡을 때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은 모진 매에 창자가 꿰어서 까마귀 밥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 사람의 박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군은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구나.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코올 병에 담가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같이 부풀어 오른 두 뺨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상록수’의 작가로 유명한 심훈(沈薰, 1901~1936)이 1927년 12월 2일에 쓴 시다. ‘박군의 얼굴’이라는 제목인데, 심훈의 슬픔과 노여움은 격렬하게 이어진다.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 사람의 박은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으로 말리고 있고
C사에 마주앉아 붓을 잡을 때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은 모진 매에 창자가 꿰어서 까마귀 밥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 사람의 박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군은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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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노동당을 하나로 만든 북한 노동당대회에 참석한 박헌영(왼쪽). |
시에는 세 사람의 ‘박’이 나온다. ‘C사’는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이 몸담고 있던 ‘시대일보’로 보인다.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으로 말리고 있’는 첫 번째 박군은 일본 황태자를 암살하려 했다는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째 복역 중인 박열(朴烈, 1902~1974)이고 두 번째 박은 제2차 공산당사건으로 잡혀 끔찍한 족대기질(고문)을 당하던 끝에 죽은 박순병(朴純秉, 1901~1926)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선 박’은 박헌영(朴憲永, 1900~1956)이다. 문학비판가 최원식(인하대 교수)의 연구에 따른 것인데, 시는 치떨리는 노여움을 넘어 굳은 마음다짐으로 이어진다.
박아 박군아 XX(헌영)아!
사랑하는 네 안해가 너의 잔해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
이빨을 악물고 하늘을 저주하듯
모로 흘긴 저 눈동자
오!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군아
눈을 빼어서 갈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주마!
너와 같이 모든 X을 잊을 때까지 우리들이 심장의 고동이 끊칠 때까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1년 후배인 심훈이 노엽고 슬픈 목소리로 부르짖은 박헌영은 2년 만에 병보석으로 감옥을 나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심신상실’이라는 병명이었으니, 자기 배설물을 먹는 따위의 미친 증세를 심하게 보였던 까닭이다. 다음은 동아일보 1927년 10월 21일치 기사다.
“서대문형무소 독감방에서 신음 중인 조선공산당사건 피고의 한 사람인 박헌영은 그동안 병세가 더욱 높아서 정신이 전혀 상실되어 식음을 전폐한 데다가, 더구나 독을 마시려고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므로, 형무소에서는 만일을 염려하여 두 손에 고랑을 채워서 경계 중이라는데, 이인, 허헌, 김병로, 후루야 네 변호사는 15일 오전에 재판소 당국에 보석원을 제출하였다는데, 병세가 그와 같이 위중한 터이므로 보석이 허가될 듯하다더라.”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이 받은 족대기질은 참으로 끔찍한 것이었다. 박헌영의 증언이다.
“우리들 중 누군가가 체포되기만 하면 그는 곧바로 예비심문이 이루어지는 경찰서의 비밀 장소로 끌려가게 된다. 일제 경찰은 연행된 사람으로부터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냉수나 혹은 고춧가루를 탄 뜨거운 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거나, 손가락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가죽 채찍으로 때리거나, 긴 의자에 무릎을 꿇려 앉힌 다음 막대기로 관절을 때리거나 한다. 7, 8명의 경찰이 큰 방에서 벌이는 축구공놀이라는 고문도 있다. 이들 중 한 명이 먼저 ‘희생양’을 주먹으로 후려치면, 다른 경찰이 이를 받아 다시 또 그를 주먹으로 갈겨댄다. 이 고문은 가련한 ‘희생양’이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다.”
북한·소련 경제문화 협정조인에 박헌영(맨 오른쪽)이 당시 북한 부수상 겸 외상이 김일성(왼쪽 두번째)과 함께 북한 대표로 참석한 모습. |
박헌영은 충남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하다가 대흥보통학교를 나와 16살 때인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 졸업하던 해에 일어난 3·1만세운동에 들었는데, 심훈이 이즈음 박헌영의 모습을 그린 것이 있다.
“사나이다운 검붉은 육색(肉色)에 양 미간에는 가까이 못할 위엄이 떠돌았고 침묵에 잠긴 입은 한 번 벌리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더니라.”
고보를 나온 다음 해 잡지 ‘녀자시론’에 편집원으로 들어갔는데, 이것이 뒤에 그를 ‘미제의 첩자’로 몰아붙이게 되는 빌미가 된다.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 사건 공판문헌’이라는 것을 보자.
“피소자 박헌영은 1919년경 서울에서 잡지 ‘녀자시론’의 편집원으로 있을 때부터 동 잡지를 주간하는 친미분자 차마리사와 기독교 선교사로서 연희전문 교원(후에 교장)으로 있던 미국인 언더우드와의 친교를 이용하여 숭미사상을 품게 되었고 1925년 11월 초순 일제 경찰에 체포되자 변절하여 각지의 지하 비밀조직을 고백하고 지도적 간부들을 고발함으로써 일제의 주구로서 조선혁명운동 탄압에 복무하였으며 그 대가로 ‘정신착란’이라는 구실 밑에 ‘보석’의 명목으로 석방되었고 1939년 9월에는 대전형무소에서 일제 앞에 혁명운동을 완전히 포기하고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 ‘사상전향’을 표명하고 출옥하였다.”
여기서부터 박헌영의 이른바 ‘정권전복음모’와 ‘간첩사건’들이 장황하게 이어지는데, 한마디로 줄이면 일제 때는 일제의 사주를 받는 일제 간첩이었고, 미제 때는 미제의 사주를 받는 악질반동 미제 간첩이었다는 것이다. ‘녀자시론’은 제4호까지 발간되었던 월간 잡지였는데, 확인되지 않는 제2호를 빼고는 어디에도 박헌영의 자취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결론이다.
박헌영은 1920년 9월 고학을 해볼 작정으로 일본 동경으로 가서 두 달 동안 물색하다가 실패하고 나가사키를 거쳐 중국 상해로 간다. 친구인 김단야(金丹冶, 1900~1938)의 주선으로 이동휘(李東輝, 1873~1935)와 김만겸(金萬謙, 1886~?)이 지도하는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에 들어가 공산주의운동을 시작한다. 1921년 4월 상해상과대학에 들어갔으나 학자금을 댈 수 없어 서너 달 만에 그만두고, 고려공산청년단을 거쳐 고려공산당에 들어간다. 고려공산당은 이동휘, 김만겸, 안병찬(安炳瓚, ?~1922), 여운형(呂運亨, 1886~1947), 조동호(趙東祜, 1892~1954) 등이 주도하던 이르쿠츠파를 말한다.
박헌영은 당에서 내는 비합법 기관지 ‘올타’ 편집을 하면서 당에서 운영하던 사회주의연구소에서 사상연구에 힘쓴다. 같은 해에 주세죽(朱世竹, 1898~1953)과 내외가 되었다. 1930년 심훈이 첫 장편소설 ‘동방의 애인’을 쓰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김동렬은 박헌영을, 김동렬의 연인 강세정은 주세죽을 모델로 한 것이다. 심훈은 그때 항주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벗 박헌영을 만나 혁명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던 피끓는 청춘이었다. ‘동방의 애인’을 보면 박헌영의 삶이 몹시 궁핍한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심훈은 뒷날 쓴 ‘박군의 얼굴’이라는 시에서 박헌영과 관계를 이렇게 읊었다.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사이었다.)”
1920년 11월부터 1922년 3월 말까지, 21살부터 23살까지 16개월 동안 박헌영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것은 고려공산청년단 결성에 참가하여 그 비서 자리를 맡은 것과 고려공산당에 들어감으로써 조선 최초의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었지만, 그것에 못지않게 큰 일은 혼인을 한 것이었다.
“사나이다운 검붉은 육색(肉色)에 양 미간에는 가까이 못할 위엄이 떠돌았고 침묵에 잠긴 입은 한 번 벌리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더니라.”
고보를 나온 다음 해 잡지 ‘녀자시론’에 편집원으로 들어갔는데, 이것이 뒤에 그를 ‘미제의 첩자’로 몰아붙이게 되는 빌미가 된다.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 사건 공판문헌’이라는 것을 보자.
“피소자 박헌영은 1919년경 서울에서 잡지 ‘녀자시론’의 편집원으로 있을 때부터 동 잡지를 주간하는 친미분자 차마리사와 기독교 선교사로서 연희전문 교원(후에 교장)으로 있던 미국인 언더우드와의 친교를 이용하여 숭미사상을 품게 되었고 1925년 11월 초순 일제 경찰에 체포되자 변절하여 각지의 지하 비밀조직을 고백하고 지도적 간부들을 고발함으로써 일제의 주구로서 조선혁명운동 탄압에 복무하였으며 그 대가로 ‘정신착란’이라는 구실 밑에 ‘보석’의 명목으로 석방되었고 1939년 9월에는 대전형무소에서 일제 앞에 혁명운동을 완전히 포기하고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 ‘사상전향’을 표명하고 출옥하였다.”
여기서부터 박헌영의 이른바 ‘정권전복음모’와 ‘간첩사건’들이 장황하게 이어지는데, 한마디로 줄이면 일제 때는 일제의 사주를 받는 일제 간첩이었고, 미제 때는 미제의 사주를 받는 악질반동 미제 간첩이었다는 것이다. ‘녀자시론’은 제4호까지 발간되었던 월간 잡지였는데, 확인되지 않는 제2호를 빼고는 어디에도 박헌영의 자취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결론이다.
박헌영은 1920년 9월 고학을 해볼 작정으로 일본 동경으로 가서 두 달 동안 물색하다가 실패하고 나가사키를 거쳐 중국 상해로 간다. 친구인 김단야(金丹冶, 1900~1938)의 주선으로 이동휘(李東輝, 1873~1935)와 김만겸(金萬謙, 1886~?)이 지도하는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에 들어가 공산주의운동을 시작한다. 1921년 4월 상해상과대학에 들어갔으나 학자금을 댈 수 없어 서너 달 만에 그만두고, 고려공산청년단을 거쳐 고려공산당에 들어간다. 고려공산당은 이동휘, 김만겸, 안병찬(安炳瓚, ?~1922), 여운형(呂運亨, 1886~1947), 조동호(趙東祜, 1892~1954) 등이 주도하던 이르쿠츠파를 말한다.
박헌영은 당에서 내는 비합법 기관지 ‘올타’ 편집을 하면서 당에서 운영하던 사회주의연구소에서 사상연구에 힘쓴다. 같은 해에 주세죽(朱世竹, 1898~1953)과 내외가 되었다. 1930년 심훈이 첫 장편소설 ‘동방의 애인’을 쓰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김동렬은 박헌영을, 김동렬의 연인 강세정은 주세죽을 모델로 한 것이다. 심훈은 그때 항주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벗 박헌영을 만나 혁명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던 피끓는 청춘이었다. ‘동방의 애인’을 보면 박헌영의 삶이 몹시 궁핍한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심훈은 뒷날 쓴 ‘박군의 얼굴’이라는 시에서 박헌영과 관계를 이렇게 읊었다.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사이었다.)”
1920년 11월부터 1922년 3월 말까지, 21살부터 23살까지 16개월 동안 박헌영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것은 고려공산청년단 결성에 참가하여 그 비서 자리를 맡은 것과 고려공산당에 들어감으로써 조선 최초의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었지만, 그것에 못지않게 큰 일은 혼인을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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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_박헌영-주세죽 부부. 오른쪽_김일성이 북한 방소단을 이끌고 모스크바 역에 도착해 연설하는 모습. |
주세죽. 함남 함흥 출신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여학교를 나와 상해에서 음악학교를 다니고 있던 주의자였다. 박헌영은 모두 세 차례 공식, 비공식 혼인을 하게 되는데, 호적에 적힌 것으로는 두 살 더 많은 주세죽이 첫사랑이다. 박헌영 22세, 주세죽 24세. 이제 기준으로 보면 아직 어린 나이지만 그때에 뜻있는 이들은 10대 중·후반이면 벌써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고 20대로 접어들면 이미 당당한 혁명맹장이 되는 가열찬 혁명의 시대였다.
개인사 쪽으로만 보자면 박헌영은 불행한 남자였다. 세 차례 혼인을 했지만 식구들과 정답게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배다른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지만 2명만 살아 남았다. 주세죽과 사이에서 난 딸 비비안나(1928~ )는 모이세예프 무용단 무용수를 하다가 모스크바에 살고 있고, 1939년 출옥한 다음 지하생활을 하던 충북 청주 비밀 아지트에서 ‘해방일보’ 주필로 유명한 정태식(鄭泰植, 1910~ )의 5촌 조카로 ‘하우스키퍼’를 하던 두 번째 부인 정순년(鄭順年, 1920~?)에게 낳은 아들 박병삼(朴秉三, 1941~ )은 조계종 이름으로 중노릇을 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상으로 있던 1949년 평양에서 혼인한 세 번째 부인 윤레나한테서 낳은 딸 나타샤와 아들 세르게이는 그 자취를 모른다. 내무성 지하감옥에 3년 동안 갇혀 있던 박헌영이 1956년 7월 19일 평양 근교 숲 속에서 처형되기 직전 “집사람과 어린 두 자식은 외국으로 보내주겠다는 언약을 지키라”는 말을 김일성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윤레나는 조선공산당 3대 이론가의 하나로 ‘노력인민’ 주필이었던 조두원(趙斗元, 1905~?)의 처제였다.
1922년 4월 2일, 국내에 혁명 거점을 마련하려고 압록강변 안동으로 갔다가 왜경에게 붙잡혔다. 상해 트로이카인 김단야, 임원근(林元根, 1900~1963)과 함께였다.
서울로 올라간 것은 평양 감옥에서 1년 10개월 징역을 마친 다음날이었다. 1월 20일, 이즈음 주세죽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갔고, 어머니가 성대한 혼례식을 새로 올려주었다. 이때가 무지갯빛 강철 같은 세계적 혁명가 박헌영에게는 짧지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당시 여론조사서 대통령감 1위로
1925년 4월 17일 열린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 ‘화요회 야체이카’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것은 ‘동아일보’ 지방부 기자로 있을 때다. 초대 책임비서는 김재봉(金在鳳, 1890~1944)이다. 다음 날 열린 고려공산청년회 제1차 창립대표회를 김단야·조봉암(曺奉岩, 1899~1959)과 함께 치렀고 사흘 뒤에 열린 고려공청중앙간부회에서 책임비서로 선임됐다. 8월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들어갔다가 두 달 만에 해직됐는데, 사회주의 기자를 해직하지 않으면 발행 정지 처분을 해제하지 않겠다는 총독부의 희망에 따른 것이다.
10월 25일 한양청년연맹 주최로 ‘반기독교 대강연회’가 열렸다. 이때 강사와 강연 제목은 김단야 ‘기독교의 기원’, 박헌영 ‘과학과 종교’, 홍순준(洪淳俊) ‘기독교는 미신이다’, 김평주(金平主) ‘대중아 속지 말아라’, 박래원(朴來源) ‘양면양심의 기독교’다. 박헌영은 또 ‘개벽’에 ‘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줄거리를 보면 대략 이렇다.
“종교는 과학과 생산기술이 낙후한 조건에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기독교는 봉건 사회에서는 제후의 이익을,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야만 미개의 나라에 파견되어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선교사는 몸에 촌철의 무기도 갖지 않은 정예 병사로서 제국주의 영토 확장의 첨병 구실을 한다.”
11월 29일, 박헌영은 아내 주세죽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체포됐다.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악랄한 고문과 취조를 받던 중 주세죽은 약 3주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고, 박헌영은 열차편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박헌영이 쓴 ‘죽음의 집, 조선의 감옥에서’의 한 대목이다.
“내가 있었던 모든 감옥의 각 방에는 침대는 물론 의자도 없었고 맨바닥에 가마니만 깔려 있었다. 방 안의 온도는 보통 영하 5~6℃였다.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 어망을 짜는 노역에 시달렸다. 수인들은 방한 효과가 전혀 없는 아주 얇은 겉옷 한 장을 입고 지냈다. 산책 시간은 전혀 없었고 목욕도 일 주일에 한 번밖에 할 수 없었다. 독서가 허용되는 책은 불교나 기독교 등의 종교서적과 일본인들이 발행하는 팸플릿 정도였다. 편지와 면회는 두 달에 한 번 허락해주었다. 음식으로는 대두(大豆)로 만든 맛없는 수프에 종종 소금에 절인 배추가 나왔다.
감옥의 규율을 위반하는 사람에게는 책을 압수하고 독방에 집어넣고 급식을 줄였다. 이외에도 손발을 묶고 짐승처럼 매질을 했다. 경찰서를 거쳐 오는 정치범들 가운데서 건강한 상태로 감옥에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감옥에서 형편없는 음식과 힘겨운 노역으로 건강을 결정적으로 해하게 된다. 이로 인해 박순병·박광흠·박길양과 권오산 같은 프롤레타리아 용사들이 감옥에서 사망했다.”
양광(佯狂)이라는 것이 있다. 거짓으로 미친 척함으로써 잘못된 세상과 그런 세상에서 단물이나 빨아먹는 속악한 자들을 한껏 조롱하는 것이다. 기개 높던 옛 선비들이 쓰던 방편이었다. 세조 쿠데타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매월당(梅月堂)이 그러하였다. 매월당의 그것은 그러나, 반정(反正)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따르지 않는 유가 먹물의 슬픈 몽니에 지나지 않았다. 박헌영의 그것은 달랐다. 양광을 담보로 삶을 얻어냈던 것이다. 그 길밖에 길이 없었다. ‘심신상실’ 판정을 받아 병보석 판정을 얻어낸 ‘세계사적 개인’이 함흥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간 것은 1928년 8월, 29살 난 세계적 혁명가의 위대한 탈출이었다.
‘통일 후 북한 동포와 함께 부르고 싶은 노래’ 가운데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게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고 한다. 김용호라는 이가 노랫말을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이 노랫말을 지은 이가 노래를 부른 가수 김정구의 친형 김용환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박헌영과 정순년 사이에서 태어난 원경 스님이다. 박헌영의 탈출 소식을 두만강 근처에서 들은 음악 천재 김용환은 두만강으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푸른 강물 위에서 빈 배를 젓는 뱃사공을 보았고 배를 타고 탈출했다는 박헌영의 모습이 겹치면서 음악적 영감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민족 해방을 위하여 온몸을 던져 싸우다가 강을 건너간 인민의 벗 박헌영이 돌아오기를 애태게 기다리는 마음이 절절히 녹아 있는 노랫말이다. 박헌영이 바로 ‘그리운 님’이었다는 것이다. 진위를 알 수 없지만 가슴을 후벼파는 이야기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메인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님 가신 강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밤 깊은 두만강에 밤새가 우니
떠나던 그 님이 보고 싶구려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모스크바로 간 박헌영은 레닌대학에 들어가고 주세죽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들어간다. 박헌영은 주세죽에게 ‘코레예바’라는 러시아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는 ‘조선 여자’라는 뜻이다. 박헌영은 레닌대학을 마친 다음 상해로 갔다. 조선공산당 재건을 준비하라는 코뮌테른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1933년 7월 5일, 박헌영은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됐다. 6년 징역을 살고 나온 것은 1939년 9월이다.
박헌영이 대전형무소에서 징역을 살던 1937년 11월 5일, 김단야가 소련비밀경찰에게 체포된다. 일제 경찰의 밀정이라는 이유였다. 곧바로 처형된 김단야는 스탈린 공포정치의 희생양이었다. 조선공산당원이었던 김춘성이라는 자가 투서를 했는데, 김단야는 한때 혁명운동에 참가한 적이 있으나 그것은 ‘부유한 집안의 젊은이’가 젊은 혈기로 혁명을 가지고 놀았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1922년 이후 체포된 동지들이 동일한 사건으로 중형을 선고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김단야가 가벼운 형을 받거나 무사히 도주할 수 있던 것이 밀정이었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박헌영 또한 그로부터 19년 뒤 비슷한 이유로 처형되니, 똑같은 논리요 똑같은 수법이다. ‘아리랑’으로 유명한 김산, 곧 장지락(張志樂, 1905~1938)이 그러하였고 조명희(趙明熙, 1894~1942)가 그러했다. 스탈린문학상을 받았다고 서울 친구들이 축하모임을 연 것이 해방 다음 해였는데, ‘낙동강’의 작가 조명희가 일제 첩자로 몰려 처형된 것은 그 4년 전이다.
박헌영이 상해에서 붙잡혀 조선으로 끌려간 다음 모스크바로 가서 김단야와 재혼한 주세죽도 체포됐다. ‘사회적 위험분자’로 지목되어 5년간 카자흐스탄에서 유배생활을 한 주세죽은 형기가 끝난 다음에도 보호감호법에 묶여 1946년까지 유배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박헌영 선생은 빨리 나타나서 우리들의 지도에 당(當)하라!
지하에 숨어 있는 박헌영 동무여! 어서 나타나서 있는 곳을 알려라! 그리하여 우리의 나갈 길을 지도하라!”
8·15 이후 서울 종로 네거리에 나붙은 삐라였다. 전남 광주 시내 한 벽돌공장에 4년간 노동자로 위장 취업해 있던 박헌영이 전주형무소에서 나오는 김삼룡(金三龍, 1910~1950)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것은 8월 18일이다.
경성콤그룹 동지 중심으로 감옥에서 나오고 지하에서 솟아나온 순정한 공산주의자들이었는데, 박헌영·이주상·이관술·김삼룡·이현상·홍증식·김형선·권오직·최원택 등 20명 안쪽이었다. 인류 역사에 그 유례가 없는 일제의 야수적 폭압 아래서도 꿋꿋하게 절개를 지켜낸 주의자들 거의 전부였다. 이들 공산주의 핵심 역량들은 곧바로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를 만들고 기관지 ‘해방일보’를 펴낼 것을 결의한다. 사회주의 선도국 소비에트와 연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소련 부영사 샤브신과 접촉했는데, 다음은 샤브신 부인인 역사학자 샤부시나가 본 박헌영의 첫 인상이다.
“지식인다운 외모와 다소 멋쩍어하는 듯한 미소,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주위를 살피는 태도(지하활동의 오랜 습관으로 인한 듯)와 침착하고 과묵함, 이와 더불어 왠지 각별히 무게가 있어 보이는 모습. 이러한 특징들이 두드러졌다.”
박헌영은 미국 군용기를 타고 귀국한 이승만과 민족통일 문제를 놓고 회담했다. 이승만은 친일파의 즉각 숙청에 반대하며 독립국가 수립을 뒤로 미루자고 했고, 박헌영은 친일파 숙청 문제는 잠시도 미룰 수 없는 민족사의 엄숙한 명령이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좌우의 역사 인식이 뚜렷하게 갈라지니, 민족 분단 비극은 이미 예정된 명운이었다.
이우적(李友狄)·정태식(鄭泰植)과 함께 조선 공산당 3대 이론가였던 조두원(趙斗元)이 쓴 글이 있다. 박헌영을 가리켜 ‘조선 인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지도자요, 친일파들에게는 가장 미움받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났는데, 수제국 침략을 격퇴한 을지문덕과 당제국 침략을 물리친 연개소문과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을 보기로 들었다. 그런 다음 일제 강점 36년간의 민족사 절명 위기에 나타나 나라를 구한 사람이 박헌영이라고 했다.
박헌영이 즐겨 쓴 이름은 이정(而丁)이다. ‘고무래가 되겠다’는 말이다. 평등하고 자유로워서 행복한 불을 지펴야 되는 인민의 아궁이를 꽉 막고 있는 극우세력 잿더미를 긁어내는 고무래가 되겠다는 다짐에서 썼던 이름이다.
박헌영은 여론 조사에서 대통령감 1위로 뽑힌 사람이다. 여운형이 2위고 3위는 이관술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그 한참 밑이다. 그런 이정이 북으로 올라간 것이 1946년 9월 29일.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필요없는 하나 객담이지만 그의 월북 자체가 이미 패배를 안고 들어간 것이다. 그는 조직이 있는 남반부에서 버텼어야 했다. 남로당 무장력이던 이현상 항미빨치산 부대가 무너져버린 것은 1953년 9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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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전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시절의 박헌영. |
1925년 4월 17일 열린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 ‘화요회 야체이카’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것은 ‘동아일보’ 지방부 기자로 있을 때다. 초대 책임비서는 김재봉(金在鳳, 1890~1944)이다. 다음 날 열린 고려공산청년회 제1차 창립대표회를 김단야·조봉암(曺奉岩, 1899~1959)과 함께 치렀고 사흘 뒤에 열린 고려공청중앙간부회에서 책임비서로 선임됐다. 8월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들어갔다가 두 달 만에 해직됐는데, 사회주의 기자를 해직하지 않으면 발행 정지 처분을 해제하지 않겠다는 총독부의 희망에 따른 것이다.
10월 25일 한양청년연맹 주최로 ‘반기독교 대강연회’가 열렸다. 이때 강사와 강연 제목은 김단야 ‘기독교의 기원’, 박헌영 ‘과학과 종교’, 홍순준(洪淳俊) ‘기독교는 미신이다’, 김평주(金平主) ‘대중아 속지 말아라’, 박래원(朴來源) ‘양면양심의 기독교’다. 박헌영은 또 ‘개벽’에 ‘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줄거리를 보면 대략 이렇다.
“종교는 과학과 생산기술이 낙후한 조건에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기독교는 봉건 사회에서는 제후의 이익을,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야만 미개의 나라에 파견되어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선교사는 몸에 촌철의 무기도 갖지 않은 정예 병사로서 제국주의 영토 확장의 첨병 구실을 한다.”
11월 29일, 박헌영은 아내 주세죽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체포됐다.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악랄한 고문과 취조를 받던 중 주세죽은 약 3주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고, 박헌영은 열차편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박헌영이 쓴 ‘죽음의 집, 조선의 감옥에서’의 한 대목이다.
“내가 있었던 모든 감옥의 각 방에는 침대는 물론 의자도 없었고 맨바닥에 가마니만 깔려 있었다. 방 안의 온도는 보통 영하 5~6℃였다.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 어망을 짜는 노역에 시달렸다. 수인들은 방한 효과가 전혀 없는 아주 얇은 겉옷 한 장을 입고 지냈다. 산책 시간은 전혀 없었고 목욕도 일 주일에 한 번밖에 할 수 없었다. 독서가 허용되는 책은 불교나 기독교 등의 종교서적과 일본인들이 발행하는 팸플릿 정도였다. 편지와 면회는 두 달에 한 번 허락해주었다. 음식으로는 대두(大豆)로 만든 맛없는 수프에 종종 소금에 절인 배추가 나왔다.
박헌영(왼쪽)이 여운형과 대화하는 모습. |
양광(佯狂)이라는 것이 있다. 거짓으로 미친 척함으로써 잘못된 세상과 그런 세상에서 단물이나 빨아먹는 속악한 자들을 한껏 조롱하는 것이다. 기개 높던 옛 선비들이 쓰던 방편이었다. 세조 쿠데타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매월당(梅月堂)이 그러하였다. 매월당의 그것은 그러나, 반정(反正)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따르지 않는 유가 먹물의 슬픈 몽니에 지나지 않았다. 박헌영의 그것은 달랐다. 양광을 담보로 삶을 얻어냈던 것이다. 그 길밖에 길이 없었다. ‘심신상실’ 판정을 받아 병보석 판정을 얻어낸 ‘세계사적 개인’이 함흥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간 것은 1928년 8월, 29살 난 세계적 혁명가의 위대한 탈출이었다.
‘통일 후 북한 동포와 함께 부르고 싶은 노래’ 가운데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게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고 한다. 김용호라는 이가 노랫말을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이 노랫말을 지은 이가 노래를 부른 가수 김정구의 친형 김용환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박헌영과 정순년 사이에서 태어난 원경 스님이다. 박헌영의 탈출 소식을 두만강 근처에서 들은 음악 천재 김용환은 두만강으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푸른 강물 위에서 빈 배를 젓는 뱃사공을 보았고 배를 타고 탈출했다는 박헌영의 모습이 겹치면서 음악적 영감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민족 해방을 위하여 온몸을 던져 싸우다가 강을 건너간 인민의 벗 박헌영이 돌아오기를 애태게 기다리는 마음이 절절히 녹아 있는 노랫말이다. 박헌영이 바로 ‘그리운 님’이었다는 것이다. 진위를 알 수 없지만 가슴을 후벼파는 이야기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메인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님 가신 강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밤 깊은 두만강에 밤새가 우니
떠나던 그 님이 보고 싶구려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1948년 박헌영, 김일성 등이 묘향산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 |
모스크바로 간 박헌영은 레닌대학에 들어가고 주세죽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들어간다. 박헌영은 주세죽에게 ‘코레예바’라는 러시아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는 ‘조선 여자’라는 뜻이다. 박헌영은 레닌대학을 마친 다음 상해로 갔다. 조선공산당 재건을 준비하라는 코뮌테른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1933년 7월 5일, 박헌영은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됐다. 6년 징역을 살고 나온 것은 1939년 9월이다.
박헌영이 대전형무소에서 징역을 살던 1937년 11월 5일, 김단야가 소련비밀경찰에게 체포된다. 일제 경찰의 밀정이라는 이유였다. 곧바로 처형된 김단야는 스탈린 공포정치의 희생양이었다. 조선공산당원이었던 김춘성이라는 자가 투서를 했는데, 김단야는 한때 혁명운동에 참가한 적이 있으나 그것은 ‘부유한 집안의 젊은이’가 젊은 혈기로 혁명을 가지고 놀았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1922년 이후 체포된 동지들이 동일한 사건으로 중형을 선고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김단야가 가벼운 형을 받거나 무사히 도주할 수 있던 것이 밀정이었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박헌영 또한 그로부터 19년 뒤 비슷한 이유로 처형되니, 똑같은 논리요 똑같은 수법이다. ‘아리랑’으로 유명한 김산, 곧 장지락(張志樂, 1905~1938)이 그러하였고 조명희(趙明熙, 1894~1942)가 그러했다. 스탈린문학상을 받았다고 서울 친구들이 축하모임을 연 것이 해방 다음 해였는데, ‘낙동강’의 작가 조명희가 일제 첩자로 몰려 처형된 것은 그 4년 전이다.
박헌영이 상해에서 붙잡혀 조선으로 끌려간 다음 모스크바로 가서 김단야와 재혼한 주세죽도 체포됐다. ‘사회적 위험분자’로 지목되어 5년간 카자흐스탄에서 유배생활을 한 주세죽은 형기가 끝난 다음에도 보호감호법에 묶여 1946년까지 유배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박헌영 선생은 빨리 나타나서 우리들의 지도에 당(當)하라!
지하에 숨어 있는 박헌영 동무여! 어서 나타나서 있는 곳을 알려라! 그리하여 우리의 나갈 길을 지도하라!”
8·15 이후 서울 종로 네거리에 나붙은 삐라였다. 전남 광주 시내 한 벽돌공장에 4년간 노동자로 위장 취업해 있던 박헌영이 전주형무소에서 나오는 김삼룡(金三龍, 1910~1950)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것은 8월 18일이다.
박헌영(맨 오른쪽)이 김일성(오른쪽 두 번째) 등과 함께 국제여성총회에 참석해 손뼉을 치는 모습. |
“지식인다운 외모와 다소 멋쩍어하는 듯한 미소,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주위를 살피는 태도(지하활동의 오랜 습관으로 인한 듯)와 침착하고 과묵함, 이와 더불어 왠지 각별히 무게가 있어 보이는 모습. 이러한 특징들이 두드러졌다.”
박헌영은 미국 군용기를 타고 귀국한 이승만과 민족통일 문제를 놓고 회담했다. 이승만은 친일파의 즉각 숙청에 반대하며 독립국가 수립을 뒤로 미루자고 했고, 박헌영은 친일파 숙청 문제는 잠시도 미룰 수 없는 민족사의 엄숙한 명령이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좌우의 역사 인식이 뚜렷하게 갈라지니, 민족 분단 비극은 이미 예정된 명운이었다.
이우적(李友狄)·정태식(鄭泰植)과 함께 조선 공산당 3대 이론가였던 조두원(趙斗元)이 쓴 글이 있다. 박헌영을 가리켜 ‘조선 인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지도자요, 친일파들에게는 가장 미움받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났는데, 수제국 침략을 격퇴한 을지문덕과 당제국 침략을 물리친 연개소문과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을 보기로 들었다. 그런 다음 일제 강점 36년간의 민족사 절명 위기에 나타나 나라를 구한 사람이 박헌영이라고 했다.
박헌영이 즐겨 쓴 이름은 이정(而丁)이다. ‘고무래가 되겠다’는 말이다. 평등하고 자유로워서 행복한 불을 지펴야 되는 인민의 아궁이를 꽉 막고 있는 극우세력 잿더미를 긁어내는 고무래가 되겠다는 다짐에서 썼던 이름이다.
박헌영은 여론 조사에서 대통령감 1위로 뽑힌 사람이다. 여운형이 2위고 3위는 이관술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그 한참 밑이다. 그런 이정이 북으로 올라간 것이 1946년 9월 29일.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필요없는 하나 객담이지만 그의 월북 자체가 이미 패배를 안고 들어간 것이다. 그는 조직이 있는 남반부에서 버텼어야 했다. 남로당 무장력이던 이현상 항미빨치산 부대가 무너져버린 것은 1953년 9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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